2020년 6월 27일 토요일

노벨상,

노벨상,
스웨덴의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의 유언에 따라 인류의 복지에 공헌한 사람이나 단체에게 수여되는 상으로, 6개 부문(문학, 화학, 물리학, 생리학 또는 의학, 평화, 경제학)에 대한 수상이 이뤄진다.

외국어 표기/ Nobel Prizes(영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베르나르드 노벨(1833~96, Alfred Bernhard Nobel)이 기부한 유산 3100만 크로나를 기금으로 하여 노벨재단(the Nobel Foundation)이 설립된 후 1901년부터 매년 인류의 복지에 공헌한 사람이나 단체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노벨은 스톡홀름에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러),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기초공학, 화학을 수학했으며, 이후 스웨덴에 돌아와 폭발성이 강한 위험 물질인 니트로 글리세린에 관한 수차례 실험 끝에 1867년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였다. 다이너마이트는 영국(1867), 미국(1868) 등지에서 특허를 받았고 노벨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굴착공사, 수로 발파, 철도 및 도로 건설에도 곧바로 사용되었다. 이후에도 노벨은 계속해서 다른 폭탄들을 개발해 전 세계에 판매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으게 되었다.
노벨은 사망 1년 전 재산을 헌납한 후 5개 부문(문학, 화학, 물리학, 생리학 또는 의학, 평화)에 걸쳐 전년도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매년 상을 수여하라는 유언장을 남겼다. 유언장에는 900만 불 상당의 유산을 기금으로 하고 전 년도에 인류에게 가장 큰 혜택을 제공한 사람들에게 상금으로 매년 분배하도록 적혀 있었으며, 수상자 선정은 평화상을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나머지 부문은 스웨덴의 3개 기관이 맡도록 지목하였다. 이처럼 노벨상이 스웨덴과 노르웨이 두 나라에서 시상되게 된 이유는 노벨이 1895년 유서를 작성하고 노벨재단이 1900년 설립되었을 때 두 나라가 한 나라로 합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연합국가는 1905년 분리되었으나, 노벨기구들의 내부적인 관계는 변경되지 않았다.
노벨상의 수상 부문은 물리학ㆍ화학ㆍ생리학 및 의학ㆍ문학ㆍ평화의 다섯 부문에 걸쳐 수여됐으며, 1969년부터 경제학상이 새로 추가되었다. 물리ㆍ화학ㆍ경제는 스웨덴 학술원, 의학은 스웨덴 카롤린의학연구소, 문학은 스웨덴 예술원에서 선정하나, 평화상은 노르웨이 국회가 선출한 5인 위원회가 맡는다.

수상 대상은 생존해 있는 사람이며 수상자로 선정된 후 사망한 경우에도 수상 자격이 유지된다.수상자는 수상 후 6개월 이내에 수상 업적에 대해 강연해야 하며 강연 내용의 저작권은 노벨재단에 귀속된다. 노벨상은 생존자 개인에게 주는 것이 원칙이나 평화상은 단체나 조직에 줄 수 있다.
노벨상 메달,
제1ㆍ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1918년, 1939~43년 등 여섯 차례 노벨상 시상식을 치르지 못하였다. 노벨상 수상자 발표는 매년 10월에 이뤄지고, 시상식은 노벨이 사망한 날인 12월 10일에 열린다. 수상자에게는 900만 크로나(약 13억 원)의 상금과 금메달, 상장이 주어진다.
노벨상 개관
주최/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개최 원년/ 1901년
개최 시기/ 매년 12월 10일(노벨 사망일)
개최 장소/ 스웨덴 스톡홀름(평화상은 노르웨이 오슬로)
시상 분야/ 평화, 문학,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경제학(경제학상은 1969년 추가)
수상자 심사/ 물리학상, 화학상, 경제학상은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한림원), 생리·의학상은 스톡홀름에 있는 카롤린 의학연구소, 문학상은 스웨덴·프랑스·에스파냐의 세 아카데미, 평화상은 노르웨이 국회가 선출한 5인 위원회가 분담
수상식 특징/ 소개사는 수상자의 모국어, 추천사는 스웨덴어. 스웨덴 국왕이 시상. 수상자는 그 후 6개월 이내에 수상 업적에 관한 강연을 할 의무가 있으며, 강연 내용의 저작권은 노벨재단에 귀속된다. 한 부문의 수상자가 2명 이상일 경우 상금은 공평 배분한다. 상금은 800만 크로나(1000만 크로나에서 2012년 6월 800만 크로나로 인하됨)로 금메달과 상장이 주어진다.

노벨상 참고 자료
분야별 노벨상,
연도별 노벨상 수상,,
누가 '인류에게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매년 성대한 축제를 벌인다. 앨프리드 노벨(Alfred Nobel, 1833~1896)이 백년도 더 전에 그 답을 요구하며 막대한 돈을 제공한 덕택이다. 평생을 바쳐 강력한 폭약 제조로 벌어들인 돈을 말이다. 1896년 12월 10일 노벨이 이탈리아의 리비에라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다이너마이트의 제왕'이 남긴 유언장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것은 그가 죽기 1년 전에 변호사도 없이 직접 작성한 것이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자식도 없는 노벨은 유언장에서 재산의 대부분으로 기금을 마련하고 그 이자로 '지난해에 인류에게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상을 수여하겠다고 밝혔다. 상은 다섯 개 부문으로 나뉘어 제정되었다. 물리학, 화학, 생리학/의학, 문학의 네 개 학문분야와 '민족 간의 화합을 위한' 평화의 분야였다. 노벨 경제학상은 원래 노벨상이 처음 만들어진 1895년 당시에는 없었으나, 노벨이 사망한 뒤 1968년 스웨덴 중앙은행이 '알프레드 노벨을 기념하는 스웨덴 중앙은행 경제학상'을 만든 것이 정식 명칭이다.
1895년의 노벨 유언장 발췌문
"이 돈(3천만 스웨덴 크로네)으로 (…) 기금을 마련하여 그 이자로 매년 지난해 인류에게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상을 수여하도록 한다. 이자에서 나오는 상금은 다섯 개 부문으로 나누어 지급한다. 일부는 물리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명이나 발견을 한 사람에게 돌아가고, 일부는 가장 중요한 화학적 발견이나 진보를 이룬 사람에게 돌아가고, 일부는 생리학 또는 의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에게 돌아가고, 일부는 문학에서 이상적인 방향으로 가장 탁월한 작품을 발표한 사람에게 돌아가고, 일부는 민족 간의 화합, 기존 군대의 폐지 또는 축소, 평화회담의 성사와 촉진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에게 돌아간다."
다섯 가지 부문의 시상 순서는 노벨의 유언장 내용을 그대로 따른다. 노벨이 자연과학을 문학과 정치보다 우선시하였음을 엿보게 해주는 부분이다. 여기서는 그중 자연과학 부문만을 다루기로 하겠다. 그것만으로도 노벨의 유언장에 담긴 느슨한 조건들이 스톡홀름의 엄격한 규정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어려움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00년, 혼란의 와중에 수립된 노벨재단은 그 후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노벨의 뜻을 충족시키는 인물들을 엄선하여 우리에게 소개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인류에게 가장 큰 공헌을 한 첫 번째 인물, 즉 1901년의 첫 수상자를 보면 재단이 시작부터 노벨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첫 수상자인 뢴트겐은 이미 1895년에 자신의 유명한 X선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서 노벨이 분명하게 밝힌 것처럼 '지난해에' 이루어진 공헌이 아니었다.
노벨상의 상금,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베르나르드 노벨(1833~96, Alfred Bernhard Nobel)이 기부한 유산 3100만 크로나를 기금으로 하여 노벨재단(the Nobel Foundation)이 설립됐으며, 이 노벨재단이 1년 동안 운영한 이자 등의 수입으로 상금을 지급한다.
노벨상 상금은 노벨이 남긴 유산을 기금으로 노벨재단이 1년 동안 운영한 이자 등의 수입에서 나온다. 한 해 이자 수입의 67.5%를 다음 해의 물리학, 화학, 생리학 및 의학, 문학, 평화상 등 5개 부문의 상금으로 5등분하여 시상한다. 다만 경제학상은 스웨덴 중앙은행에서 별도로 마련한 '중앙은행 창립 300주년 기금'에서 염출된다.
공동수상인 경우의 상금 배분은 다음과 같다.
1) 2인이 동일 주제로 공동 수상하는 경우와, 각각 다른 주제로 2인이 수상하는 경우 모두 2등분한다.
2) 3인의 공동 수상자가 동일 주제로 수상한 경우에는 3등분한다. 다만 아주 드물게 첫 번째 수상자에게 절반을, 나머지 두 사람에게는 4분의 1씩 나누는 경우도 있다.
3) 3인의 수상자가 두개의 주제로 수상한 경우에는 제1주제 수상자에게 상금의 절반을, 그리고 나머지 절반을 가지고 다음 주제의 2인의 수상자에게 다시 절반씩 나눈다.
4) 두 개의 주제로 3인이 수상한 경우, 제1주제에 두 사람의 수상자가 있는 경우는 상금의 1/2을 양분하고 나머지 절반을 한 사람의 제2주제 수상자에게 준다.
1901년의 수상자들
물리학: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1845~1923), 독일
화학: 야코부스 반트 호프(1852~1911), 네덜란드
생리학/의학: 에밀 폰 베링(1854~1917), 독일
문학: 쉴리 프뤼돔(1839~1907), 프랑스
평화: 장 앙리 뒤낭(1828~1910), 스위스 & 프레데리크 파시(1822~1912), 프랑스
노벨의 유산을 기금으로 1901년부터 상을 수여하였다. 해마다 물리학·화학·생리학 및 의학·문학·평화의 다섯 부문의 수상자에게 금메달·상장·상금을 수여하는데, 1969년부터는 경제학상을 신설하였다. 노벨상 시상식은 노벨이 죽은 날인 12월 10일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노벨 평화상이 주어지고, 나머지 상은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주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이 처음이다.
노벨의 간략한 지시를 포괄적인 절차에 맞게 변경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지는 그의 유언장이 이탈리아에서 사망한 스웨덴 사람이 파리에서 작성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다국어 사용자였던 노벨이 자신의 마지막 뜻을 모국어로 작성했다는 사실 때문에 시상식의 장소는 스톡홀름으로 정해졌다. 1896년 12월 말에 재단설립자인 그도 이곳에 안장되었다.
"공식 노벨상 이외의 이른바 "~의 노벨상"
공식 노벨상 이외에 노벨상이 수상되지 않는 분야에서 노벨상만큼 권위가 있다고 하여 '~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상들이 있다. 기초 학문이면서도 노벨상에 빠져 있는 수학분야에 필즈상과 아벨상이 '수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며, 학문으로의 중요성이 당시에는 인식되지 않았던 전산학 분야에는 튜링상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그 외에도 언론 퓰리처상, 건축 프리츠커상, 항공우주 폰 브라운상, 정신분석학 시고니상, 음악 그라베마이어상, 아동문학 뉴베리상, 예술분야 세계문화상, 환경 골드만 환경상, 간호학 크리스치안 라이만상, 종교 템플턴상 등이 각 분야의 노벨상으로 불린다. '아시아지역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중남미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로물로 가예고스상도 있다.
노벨상 수상자 심사,
노벨상 수여 기관들이 매년 10월 노벨상 발표를 전후해 후보자 추천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노벨상 수상자 심사가 시작된다. 이후 접수된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선정 작업에 들어가며, 이후 상 수여 기관에서 행해지는 심사 및 표결 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다. 한편, 노벨상 최종 수상자는 11월 15일까지 결정되어야 한다.
노벨상 수여 기관들은 매년 10월 노벨상 발표를 전후해 한 부문당 약 1,000명씩 총 6,000여 명에게 후보자 추천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낸다. 추천권 서한을 받는 대상은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과 상 수여 기관을 비롯해 물리학, 화학, 생리학·의학 분야에서 활동중인 학자들과 대학교 및 학술단체 직원들이다.
서한을 받은 사람들은 해당 후보를 추천하는 이유를 서면으로 제출해야 하며, 자기 자신을 추천하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후보자 명단은 그 다음 해 2월 1일까지 노벨위원회에 도착해야 한다. 후보자는 부문별로 보통 100∼250명가량 된다. 2월 1일부터 6개 노벨 위원회는 접수된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각기 선정 작업에 들어간다. 이 기간 동안 각 위원회는 수천 명의 인원을 동원해 후보자들의 연구 성과를 검토하며, 필요한 경우에는 검토 작업에 외부 인사를 초빙하기도 한다.
각 노벨 위원회는 9∼10월 초 사이에 스웨덴왕립과학아카데미와 기타 상 수여 기관에 추천장을 제출하게 된다. 대개는 위원회의 추천대로 수상자가 결정되지만, 상 수여 기관들이 반드시 여기에 따르는 것은 아니다. 상 수여 기관에서 행해지는 심사 및 표결 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며 11월 15일까지는 최종 수상자를 결정해야 한다. 상은 단체에도 수여할 수 있는 평화상을 제외하고는 개인에게만 주도록 되어 있다.
한편, 사망한 사람은 수상 후보자로 지명하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다그 함마르시욀드(평화상, 1961)와 에리크 A. 카를펠트(문학상, 1931)의 예처럼 생전에 수상자로 지명된 경우에는 사후에도 상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일단 수상자가 결정되고 나면 번복할 수 없다. 상을 수여하는 사람들은 시상 과정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외교적 혹은 정치적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
노벨상 심사 및 수여기관,
물리학상
· 스웨덴왕립과학아카데미(The Royal Swedish Academy of Sciences)
· 노벨 물리학상 심사위원회
화학상
· 스웨덴왕립과학아카데미(The Royal Swedish Academy of Sciences)
· 노벨 화학상 심사위원회
생리의학상
· 카롤린스카 연구소(the Karolinska Institute)
· 노벨 생리학상 및 의학상 심사위원회
문학상
· 스웨덴 아카데미(The Swedish Academy)
· 노벨 문학상 심사위원회
평화상
· 노르웨이 국회 노벨 위원회
경제학상
· 스웨덴왕립과학아카데미(The Royal Swedish Academy of Sciences)
· 노벨 경제학상 심사위원회
알프레드 노벨 가문의 기록물,[ The Alfred Nobel Family Archives ]
국가소장 및 관리기관 등재 연도
스웨덴(Sweden)
지방기록관리보관소(Landsarkivet)(룬드에 소재함), 스톡홀름 국가기록보관소(Riksarkivet)
2007년

룬드(Lund)의 지방 기록관리보관소에 있는 「노벨 가문의 기록물(Nobel Family Archives)」은 1840년~1900년까지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 1833~1896)의 아버지인 임마누엘 노벨(Immanuel Nobel, 1801~1872), 형제인 로베르트 노벨(Robert Nobel, 1829~1896)과 루드비그 노벨(Ludvig Nobel Sr, 1831~1888), 조카인 루드비그 노벨 주니어(Ludvig Nobel Jr)의 사업 활동에 대한 자료들이다.

기록물의 주요 부분은 제정 러시아에서 이루어진 노벨 가문의 산업 및 상업 활동, 특히 러시아 군대를 위해 육지와 해저에서 행한 광산 개발과 바쿠(Baku)에서 가족들이 유전을 개발한 내용이다. 이 기록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노벨 가문의 사업 전통과 발명의 재능을 보여 주며, 알프레드 노벨이 발명가·국제사업가로서, 그리고 기부자로서 살아가는 데 큰 배경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스톡홀름에 있는 국립 기록보관소의 「알프레드 노벨 가문의 기록물(The Alfred Nobel Family Archives)」에는 작은 내용까지도 빠짐없이 충실히 담겨 있다. 노벨의 노트와 그가 주고받은 서신을 통해, 쉬지 않고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협상하고 법적 소송을 진행하는 등 재능 있는 발명가와 사업가로서 활동한 그의 일상을 추적할 수 있다. 그의 기록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사업으로 이어진 고갈될 줄 모르는 창의성과 에너지의 증거이다.

전문가로서의 그의 역할은 그가 남긴 기록에 모두 들어 있다. 사생활 부분도 많지는 않지만 남아 있는데, 베르타 폰 주트너(Bertha von Suttner, 1843~1914)와 전쟁과 평화에 관하여 주고받은 서신, 그의 친구 조피 헤스(Sofie Hess)와 주고받은 서신에 나타나 있다. 그는 유명한 유언과 함께 난해한 극작 『네메시스(Nemesis)』도 남겼다. 노벨은 사후 100여 년이 지나도록 위대한 기부자로 기억되고 있다.
세계적 중요성·고유성·대체 불가능성
이 기록물은 노벨 가문이 창립한 산업 복합체와, 알프레드 노벨이 발명가·사업가·기부자로서의 업적을 쌓는 데 배경이 된 노벨 가문의 기업 전통과 창의성을 보여 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출처 ^ 참고문헌,
[노벨상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위키백과
[노벨상 [Nobel Prize] (슈뢰딩거의 고양이, 2009..,)
[노벨상 (학습용어 개념사전, 2010..,)
[노벨상의 상금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노벨상 수상자 심사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http://www.unesco.org/]
[저자 세계기록유산(영/불어 원문)
[유네스코한국위원회(번역 감수) http://heritage.unesco.or.kr/]
[알프레드 노벨 가문의 기록물 [The Alfred Nobel Family Archives]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세계기록유산(영/불어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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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노벨, [ Alfred Bernhard Nobel ]

알프레드 노벨, [ Alfred Bernhard Nobel ]

스웨덴에서 발명가의 아들로 태어난 노벨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 했다. 하지만 몸이 약해 학교에 못 가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노벨은 집에서 책을 읽거나 기계를 만들면서 놀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경영하는 화약 공장에서 화약을 가지고 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스웨덴의 발명가, 화학자, 노벨상의 창설자. 고형 폭약을 완성하여 다이너마이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알프레드 노벨
출생-사망/ 국적/ 활동분야/ 출생지/
1833.10.21 ~ 1896.12.10
스웨덴
과학
스웨덴 스톡홀롬
183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출생한 후 4세 때 핀란드로 이주하였다. 8세 때는 다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고 이곳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1850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4년 동안 기계공학을 배웠다. 크림전쟁 후 스웨덴에서 폭약의 제조와 그 응용에 종사하고 있던 아버지의 사업을 도와 폭약의 개량에 몰두하였다.

1863년 소브레로가 발명한 니트로글리세린과 중국에서 발명한 흑색화약을 혼합한 폭약을 발명하고, 그 이듬해 뇌홍(雷汞)을 기폭제로 사용하는 방법을 고안하여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이의 공업화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1864년 9월 공장이 폭파되어 동생과 조수 4명이 희생되었다.

여기서 그는 니트로글리세린이 바로 액체라는 점에 위험의 원인이 있다고 인정하고, 1866년 이것을 규조토(硅藻土)에 스며들게 하여 안전하게 만든 고형(固型) 폭약을 완성하여 이것에 '다이너마이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 1887년 니트로글리세린·콜로디온면(綿)·장뇌(樟腦)의 혼합물을 주체로 하는 혼합 무연화약(無煙火藥)을 완성하였다. 노벨의 공장은 스웨덴·독일·영국 등에서 연이어 건설되어, 1886년 세계 최초의 국제적인 회사 ‘노벨다이너마이트트러스트사’가 창설되기도 하였다.

그동안 그의 형인 로베르트와 루트비히는 카스피해(海)의 서안에 있는 바쿠의 유전개발에 성공하여 대규모의 정유소를 건설하고 세계 최초의 유조선 조로아스타호(1877년 취항)를 사용하여 세계 최초의 파이프라인(1876)을 채용함으로써 노벨가(家)는 유럽 최대의 부호가 되었다.

노벨은 평생 결혼하지 않았으며 자식도 없었다. 1895년 11월 자신의 재산을 은행 기금으로 예치토록 하는 유서를 작성하였으며 1896년 12월 10일 6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과학의 진보와 세계의 평화를 염원한 그의 유언에 따라 스웨덴 과학아카데미에 기부한 유산을 기금으로 1901년 이래로 세계의 평화, 문학, 물리, 화학, 생리·의학, 경제 분야에 노벨상 제도가 실시되고 있다.

알프레드 노벨

알프레드 노벨 연보출생 1833.10.21~ 사망 1896.12.10
1833
10월 21일 스웨덴 스톡홀롬에서 출생.
1842
가족과 함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
1851
미국으로 유학. 기계공학과 화학을 공부.
1863
소브레로가 발명한 니트로글리세린과 중국에서 온 흑색화약을 혼합해 폭약을 발명.
1867
니트로글리세린을 연구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 특허를 얻음.
1875
무연화약 발리스타이트 발명.
1886
세계 최초의 국제적인 회사 '노벨다이너마이트트러스트'가 창설.
1896
12월 10일 스웨덴 과학 아카데미에 유산을 기부하고 사망.
1901
노벨의 유산으로 노벨상 제도가 만들어짐.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노벨 가족은 러시아로 이주했다. 그 곳에서 아버지는 다시 사업에 성공하였고 노벨은 가정 교사 밑에서 열심히 공부해 열여섯 살에 화학자가 되었다.

크림 전쟁 후 아버지의 사업이 다시 힘들어지자 노벨은 스웨덴으로 돌아와 폭탄 제조 실험을 시작하였다.

1862년, 노벨은 액체 화약 니크로글리세린과 흑색 화약을 혼합하여 폭약을 만들고, 이듬해에 특허를 얻었다.

노벨은 스톡홀름에 공장을 세웠다. 폭탄은 만들자마자 불티나게 팔려 나갔고, 노벨은 많은 돈을 벌었다.

엄청난 폭발력만큼 사고도 많았다. 노벨의 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나 공장은 산산조각이 났고 동생과 직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자 스웨덴 정부도 스톡홀름에서 폭탄 만드는 것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노벨은 연구를 멈추지 않고 스웨덴과 독일, 영국에 공장을 세우고 폭탄을 만들어 세계로 수출했다.

액체인 니크로글리세린을 고체로 만들면 운반이 쉬워 폭발 사고를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1866년에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다.

“나 알프레드 베르나르드 노벨은 심사숙고한 결과 이 문서로써 내가 죽을 때 남기게 될 재산과 관련하여 내 유언이 아래와 같음을 천명하는 바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유언장에는 우선 일가친척과 사업을 함께 하는 동료 및 직원에게 분배할 재산 내역이 열거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재산의 처리법은 이렇게 지시되어 있었다.

“유언 집행인에 의해 안전한 유가증권에 투자된 재산으로 기금을 만들고, 거기에서 매년 나오는 이자를 지난해에 인류에게 가장 큰 유익을 가져다 준 사람들에게 상금으로 수여한다.” 이자는 모두 5등분해서 물리학, 화학, 생리학/의학, 문학, 평화 분야의 수상자에게 각각 나눠줄 예정이었다. 그 유명한 노벨상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군수업자 노벨 가문의 기원,
알프레드 베르나드 노벨은 1833년 10월 21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8남매 가운데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임마누엘 노벨 2세는 건축업자 겸 발명가였지만 연이은 사업 실패 때문에 1837년에 단신으로 고국을 등지고 말았다. 핀란드를 거쳐 러시아에 정착한 임마누엘은 니콜라이 1세 황제의 신임을 얻어 지뢰와 수뢰를 비롯한 각종 군수품을 제조하는 공장을 차렸다. 생활이 안정되자 스웨덴에 있던 나머지 가족도 1842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했다.

알프레드의 정규 교육은 여덟 살 때 스톡홀름의 어느 학교에 1년간 다닌 것이 전부였다. 러시아에 와서야 그는 가정교사를 두고 공부를 재개해서 러시아어,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를 익혔고 특히 과학에 재능을 보였다. 부친의 사업이 확장되면서 세 아들도 각각 판매와 생산과 실험 업무를 나눠 맡게 되었다. “내 생각으로는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이는 루드비그이고, 가장 근면한 아이는 알프레드이고, 투기 정신이 가장 뛰어난 아이는 로베르트라네.” 부친은 이렇게 평가했다.

1864년 6월, 뇌관 및 나이트로글리세린 점화법에 관한 특허를 얻기 위해 노벨이 작성한 신청서<출처:wikipedia>

17세 때인 1850년부터 수년간 알프레드는 부친의 지시에 따라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는 계기로 삼았다. 1854년에 크림 전쟁이 발발하자 임마누엘 노벨의 회사는 러시아군에 지뢰와 수뢰를 납품하며 승승장구했지만, 전쟁 중인 1855년에 니콜라이 1세가 사망하자 후계자인 알렉산드르 2세가 군수품 공급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함으로써 또다시 파산하고 말았다. 임마누엘은 19년 간 살았던 러시아를 떠나 고국 스웨덴으로 돌아왔고, 이때부터 나이트로글리세린이라는 특이한 물질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돌입한다.

1847년에 개발된 무색투명의 액체 나이트로글리세린은 진동이나 충격에 쉽게 폭발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기존의 흑색화약보다 현저하게 강력한 폭발력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고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지만, 아직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관건은 나이트로글리세린의 폭발력을 가급적 그대로 유지하는 한편으로 안전성을 높인 실용적인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알프레드는 30세 때인 1863년부터 아버지와 함께 연구를 시작했고, 곧이어 독자적인 아이디어로 신형 뇌관과 액체 폭약을 개발해 연이어 특허를 얻었다.

1864년에 노벨 가 소유의 공장에서는 폭발 사고가 일어나 알프레드의 막내 동생을 비롯한 5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곧이어 부친마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알프레드는 공장의 운영을 도맡게 되었으며, 1864년 10월 22일에 투자자를 모아 나이트로글리세린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그 지배인이 되었다. 회사는 곧바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듬해인 1865년에 함부르크에 지사를 세운 것으로 시작해 점차 규모를 늘려 나갔다.

다이너마이트의 발명
1876년부터 알프레드 노벨은 나이트로글리세린을 규조토에 흡수시켜 만든 고체 폭약을 ‘노벨의 안전 화약’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했다. 그 상표명인 다이너마이트(‘힘’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비롯된 신조어)는 훗날 이 물건을 지칭하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이른바 다이너마이트라는 새로운 폭약은 나이트로글리세린과 구멍이 아주 많은 규산염의 화합물에 다름 아니다. 내가 이 폭약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 것은 그 진짜 성분을 숨기기 위함이 아니라, 이전의 것과는 아주 많은 차이가 나는 이 새로운 형태의 폭발물을 일반에게 널리 알리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이름은 전적으로 정당하다.” 노벨의 말이다.

사고로 유출된 나이트로글리세린이 포장재인 규조토에 흡수된 사건에서 다이너마이트가 발명되었다는 일화도 전해지지만, 당사자인 노벨은 이를 단호히 부정했다.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나는 처음부터 액체 폭약의 단점을 알고 있었고, 그때부터 그 단점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섰다.” 기존의 폭약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안전한 다이너마이트는 1867년에 영국, 스웨덴, 미국에서 특허를 얻었고 채굴이나 건설 산업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한편으로는 인명 살상을 비롯해서 부정적인 용도로 사용되는 일도 비일비재해지며 노벨의 악명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1895년 11월 25일자로 작성된 알프레드 노벨의 마지막 유언장. 여기 나와 있는 내용에 따라 노벨상이 제정되었다. <출처:wikipedia>

사업이 확장되면서 노벨은 특허 및 해외지사 관리를 위해 끝없이 출장을 다녔고, 1873년에는 아예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유럽 전역에서의 사업을 관장했다. 1875년에는 젤라틴 형태의 폭약을 개발해서 다시 한 번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1879년에는 여전히 러시아에서 사업을 벌이던 두 형과 함께 러시아의 바쿠 유전에 투자해서 이곳을 전 세계적인 석유 생산지로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 노벨 형제는 세계 최초의 유조선과 파이프라인을 가동하는 등의 혁신적인 조치를 통해 러시아 석유 산업의 기틀을 닦은 것으로 평가된다.

58세 때인 1891년에 노벨은 18년 동안 살았던 프랑스를 떠난다. 셀룰로이드를 이용한 신형 폭약 발리스타이트의 개발 및 특허 취득 과정에서 프랑스 정부와 알력이 생겼고, 급기야 스웨덴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노벨을 겨냥한 국수주의적 비난과 공격이 난무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프랑스인 동업자가 파나마 운하 건설 관련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회사에 재정적 손실과 명예 실추를 가져온 사건도 있었다. 이래저래 환멸을 느낀 노벨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은퇴를 선언하고 이탈리아의 산레모로 향한다.

죽음의 상인이란 오명과 말년
은퇴 중에도 노벨은 평소 일과인 연구와 실험을 결코 중단하지 않았다. 산레모에서도 그는 저택에 아예 실험실을 마련했으며, 종종 화약 관련 야외 실험을 하다가 이웃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1년에 1천 개의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고, 그 가운데 오직 하나만이 쓸모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나는 만족할 수 있다.” 그는 평생 355개의 특허를 취득했으며 화약 말고도 만년필, 축음기, 전화기, 축전지, 백열등, 로켓, 인조 보석, 비행기, 수혈 등을 연구했다. “나는 중간 중간 휴식을 취하며 작업했다. 한동안 일을 놓아두었다가 다시 매달리곤 했다. 나는 자주 이런 방식으로 작업한다. 하지만 결국 해내고 말 것이란 느낌이 드는 일로 돌아가곤 했다.”

막대한 부에도 불구하고 노벨은 평생 독신이었다. 43세 때에 빈에서 알게 된 20세의 소피 헤스와 18년 간 내연 관계였지만, 그녀의 사치와 방종에 실망한 나머지 결국 인연을 끊고 말았다(노벨 사후에 소피는 그의 유산을 노리고 둘 사이의 연애편지를 공개하겠다며 소동을 벌였다). 술과 담배는 물론이고 사교 모임도 멀리한 노벨은 “그 시대의 가장 소박한 갑부”로 통했다. “나는 두 가지 관점에서 경쟁자들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습니다. 돈 긁어 모으기와 아첨은 나의 흥미를 전혀 끌지 못하지요.” 그는 사람을 만나거나 행사에 참석하는 것도 마다했으며, 심지어 자기 사진이나 초상화가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는 것도 싫어했다.

노벨상 수상자에게 수여되는 메달. 스웨덴에서 시상하는 네 가지 분야의 메달은 앞면(위 왼쪽)만 똑같고, 뒷면은 물리 및 화학(위 가운데), 생리·의학(위 오른쪽), 문학(아래 왼쪽) 분야마다 특유의 도안이 새겨져 있다.

노벨상 수상자에게 수여되는 메달. 스웨덴에서 시상하는 네 가지 분야의 메달은 앞면(위 왼쪽)만 똑같고, 뒷면은 물리 및 화학(위 가운데), 생리·의학(위 오른쪽), 문학(아래 왼쪽) 분야마다 특유의 도안이 새겨져 있다. 노르웨이에서 시상하는 평화상 메달은 앞면(아래 오른쪽)과 뒷면(아래 가운데) 모두가 나머지 분야의 메달과 다르게 생겼다.

일각에서는 노벨이 다이너마이트가 무기로 사용되는 것에 죄책감을 느껴 재산을 기부하게 되었다고도 설명한다. 1888년에 루드비그 노벨이 사망하자, 그를 더 유명한 형제와 혼동한 프랑스의 한 신문이 “죽음의 상인, 사망하다”라는 표제 하에 “사람을 더 많이 더 빨리 죽이는 방법을 개발해 부자가 된 인물”이라고 폄하하는 부고 기사를 내보냈다. 이를 보고 깜짝 놀란 알프레드 노벨이 속죄를 위해 재산을 기부하기로 했다는 것인데, 그럴듯한 주장이긴 하지만 아쉽게도 확증까지는 없다. 애초부터 노벨 가문은 오랫동안 수뢰나 폭탄 등의 군수품을 제조하여 부를 축적한 이력이 있었으니, 알프레드 역시 다이너마이트가 무기로 사용되는 것에 대해 어쩌면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오해되거나 오용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 역시 도구에 불과하다고, 따라서 거기다가 선악의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가 애초에 나이트로글리세린을 연구하게 된 것도 보다 안전한 취급을 위해서였음을 고려하면, 그 결과물인 다이너마이트로 인한 악명은 적잖은 아이러니다.

1896년에 노벨은 협심증 진단을 받았는데, 묘하게도 그 치료제는 혈관 확장 효과를 지닌 나이트로글리세린 성분 약품이었다. 그해 12월 10일 새벽 2시, 그는 63세로 산레모의 자택에서 사망했고, 29일에 스톡홀름으로 옮겨져 가족 묘지에 매장되었다. 며칠 뒤인 1897년 1월 2일에 그의 유언장이 공개되었고, 이를 토대로 노벨 재단이 수립되어 1901년 12월 10일에 노벨상의 첫 시상식이 거행되었다.

노벨상의 기원,
알프레드 노벨은 1893년에 평화운동가 베르타 폰 주트너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기꺼이 내 유산의 일부를 한 재단에 기부하여 5년마다 수여되는 상을 제정하고 싶습니다. (...) 남자이건 여자이건 유럽에서 평화의 실현에 가장 공로가 큰 인물에게 수여할 상을 말입니다.” 노벨이 자신의 이름을 딴 상의 제정에 관해 언급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해 3월 14일, 그는 최초의 유언장을 작성했다. 유산 가운데 20퍼센트는 일가친척에게 나누어주고, 또 17퍼센트는 병원과 의학연구소 등 여러 단체에 나누어 기부하고 기금을 조성해 “생리학과 의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하고 선구적인 발견이나 발명”에 상을 수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위의 37퍼센트를 제외한 나머지 금액은 이렇게 처분하도록 지시했다. “모두 기금을 만들도록 스톡홀름 학술원에 기증할 생각이다. 학술원이 매년 이 기금에서 나오는 이자를 생리학과 의학을 제외한 학문과 진보의 전 분야에 걸쳐 가장 중요하고 선구적인 발견이나 정신적인 작업에 대한 포상으로 나누어주게 할 계획이다. (...) 이 유언장에 예고된 모든 상들이 스웨덴인이건 외국인이건, 또 남자이건 여자이건 조금도 차별하지 않고 가장 공로가 많은 사람에게 수여되는 것이 나의 확고한 소원이다.” 1895년 11월 27일에 노벨은 유언장을 약간 수정했고, 이것이 그의 사후에 공개되어 오늘날 노벨상의 기본 취지를 표현한 문서로 공인되었다.

오늘날은 세계 최고의 영예 가운데 하나인 노벨상이지만, 노벨의 유언장이 공개된 직후에만 해도 스웨덴 내부에서는 이 상의 제정을 놓고 격렬한 비난이 일어났다. 노벨의 일가친척은 물론이고 한때 애인이었던 소피까지도 자신들의 정당한 유산을 엉뚱한 상에 빼앗기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법적 대응을 고려했다. 수상자 선정에서 국적이나 성별에 구애되지 말라는 유언의 당부 때문에 스웨덴 국민 사이에서는 국부를 해외로 유출시키는 몰지각한 처사라는 비난도 나왔다. 평화상 수상자를 스웨덴이 아니라 노르웨이 국회에서 선정하게 한 것을 놓고도 논란이 일었다(그 당시에만 해도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연합국가였기 때문에 스웨덴 국왕이 노르웨이 국왕을 겸했으며, 1905년에 이르러 별개의 국가로 분리되었다).

논란의 와중에 설립된 노벨 재단은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을 실현하는 데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총 3천 3백만 크로나(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2억 달러 이상으로 평가된다)로 집계된 노벨의 유산 가운데 세금을 제외하자 3천 1백만 크로나가 남았다. 이 가운데 2천 8백만 크로나가 노벨상 기금이 되었고, 나머지는 운영 기금이 되었다. 재단은 노벨의 유언 중에서도 비현실적인 부분(가령 과학상 후보를 “지난해의 발견•발명”만으로 제한한 것)은 보다 유연하게 적용하기로 했고, 전반적으로 “인류에게 가장 큰 유익을 가져다 준 사람들”이라는 취지에 근거해 수상자를 결정하기로 결했다. 1900년 7월 29일, 노벨 재단은 스웨덴 정부의 공인을 받았다.

노벨은 과학자였으니 과학 분야 상들의 제정은 당연해 보이지만, 문학상과 평화상은 어딘가 의외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분야 역시 그의 개인적 관심이 반영된 결과였다. 노벨은 평생 문학을 가까이 하며 시와 소설을 습작했고, 당대의 여러 평화운동가들과도 친분을 유지했다. “나는 전쟁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무시무시하고 대규모의 파괴력을 가진 물질이나 기계를 만들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노벨의 이러한 제안은 어쩌면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자다운 발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자칫 무제한적인 군비 경쟁으로 비화될 수 있음을 최근의 역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

1969년에 스웨덴 제국은행이 노벨 재단과는 별도의 기금을 마련해 ‘알프레드 노벨 기념 스웨덴 은행 경제과학상’을 제정함으로써, 오늘날 ‘노벨 경제학상’으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분야가 생겨났다. 한편 미국의 공학자인 헨리 페트로스키는 명색이 화학공학자였던 노벨이 제정한 상에서 줄곧 공학자들이 배제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며, 이는 노벨의 유언을 그 집행자들이 편협하게 해석한 결과라고 일리 있는 지적을 내놓기도 했다. 즉 ‘과학’에는 순수과학과 응용과학이 모두 포함되는데도, 노벨 재단 측에서 순수과학 분야만을 대상으로 시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노벨상의 과학 분야에서 공학자가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단 두 차례뿐이었으며, 가장 최근의 사례는 무려 100년 전인 1914년에 있었다.

그런가 하면 노벨 수학상이 없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한 가지 묘한 소문이 오래 전부터 떠돌고 있다. 즉 노벨의 부인이 어느 수학자와 불륜 관계였기 때문에, 이에 앙심을 품은 노벨이 수학 부문의 상을 만들지 말도록 유언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벨이 평생 독신이었음을 고려해 보면, 이는 근거 없는 헛소문에 불과하다. 또한 노벨의 연적이라면 훗날 소피의 남편이 된 어느 군인뿐인데, 이는 차라리 평화상의 제정 근거라면 모를까 수학상과는 무관해 보인다. 따라서 그보다는 노벨이 구체적으로 지정한 분야가 어디까지나 그의 개인적 관심사를 반영했음을 근거로 삼아, 수학은 아쉽게도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고 보는 편이 더욱 타당하지 않을까?.

세계적인 부자가 된 노벨은 자신이 발명한 다이너마이트가 사람들의 생활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고와 전쟁 등으로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간다는 것에 늘 가슴아팠다.

그래서 다이너마이트로 번 돈을 인류를 위해 쓰기로 결심했다.

“나의 모든 재산으로 기금을 만들어 해마다 인류를 위해 일한 사람에게 상을 주도록 하시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노벨상이다.

노벨상은 물리학, 화학, 생리 · 의학, 문학, 평화 그리고 경제학 이렇게 여섯 개 부문으로 나뉘어 해마다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이나 단체에 수여한다.

시상은 매년 12월 10일, 노벨이 사망한 날 스톡홀름에서 거행되며 평화상은 같은 날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시상된다.

과학의 진보와 세계의 평화를 염원한 그의 유언에 따라 스웨덴 과학아카데미에 기부한 유산을 기금으로 1901년부터 노벨상 제도가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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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항목

역참조항목

카테고리
출처 ^ 참고문헌
[알프레드 노벨 [Alfred Bernhard Nobel] (두산백과)
[노벨, 본문에 인용된 노벨의 말은 다음 책에서 가져왔다. (프리츠 푀트클레 지음, 한길사, 2000)
[알프레드 노벨 [Alfred Bernhard Nobel] - 스웨덴의 발명가 겸 기업가· 노벨상 창설자 (인물세계사,)
[wikipedia 1864년 6월, 뇌관 및 나이트로글리세린 점화법에 관한특허를 얻기 위해 노벨이 작성한 신청서
[wikipedia 1895년 11월 25일자로 작성된 알프레드 노벨의 마지막 유언장. 여기 나와 있는 내용에 따라 노벨상이 제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벨 [Alfred Bernhard Nobel] (한 권으로 끝내는 교과서 위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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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치' 야마모토 다로, (일본)

'새 정치' 야마모토 다로, (일본)

일본에도,,,???세계에서 주목 할만한 인물이 있내유!!!

야마모토 타로 (やまもとたろう | 山本太郎 | Yamamoto Taro) 영화배우, 정치인출생1974년 11월 24일, 일본신체175cm, 60kg소속일본 생활당(대표)수상2003년 제46회 블루 리본상 남우 조연상경력2014~ 일본 생활당 대표
2013 일본 참의원 의원사이트공식홈페이지블로그트위터페이스북

반(反) 아베 선봉, 야마모토 다로의 도전은 성공할까?

야마모토 다로. 레이와신센구미 홈페이지 캡처

‘일본의 노무현’ ‘정계의 풍운아’로 불리는 야마모토 다로(山本太郞) 레이와신센구미(令和新選組) 대표가 도쿄도(東京都) 지사에 출마하면서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다음달 5일 치러지는 도쿄도 지사 선거는 현직 고이케 유리코, 입헌민주당 등 야당 3당이 지원하고 있는 우츠노미야 겐지(전 일본변호사연맹 회장), 레이와신센구미의 야마모토 다로 3파전으로 압축된 상황인데요.

"18일까지 거취 밝히겠다"
야당 표만 갉아먹을 것이란 우려도 
야마모토 다로. 레이와 신센구미 홈페이지,
" 이쁜짓을 하니 그런가  너무 잘 생겼내유 ~^0^~ㅎㅎㅎ

야마모토 대표는 제1공약으로 내년 7월로 연기된 도쿄올림픽·패럴림픽의 취소를 내걸었습니다. 아울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책으로 1,400만명에 달하는 모든 도쿄도 도민에게 1인당 10만엔(약 110만원)을 지급하겠다고 했는데요. 국내에는 앞서 “독도를 한국에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도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야마모토 유튜브 조회수 3만회 vs 고이케는 300회,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한 고이케 유리코(왼쪽부터) 현 지사, 야마모토 다로 레이와신센구미 대표, 야당 3당이 지원하는 우츠노미야 겐지 후보. 

일본 언론들은 현 고이케 지사가 이변이 없는 한 당선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합니다.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전화조사 한 결과 고이케 지사가 다른 후보들을 크게 따돌렸다고 보도했는데요.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고이케 지사보다 더 눈길을 끄는 후보는 바로 야마모토 후보입니다.

실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만 놓고 보면 야마모토 후보의 인기가 고이케 지사를 능가합니다. 일본 매체 닛칸 겐다이는 최근 ‘야마모토 타로의 열쇠는 인터넷 전략, 동영상 재생에서 코이케 지사와 큰 차이’라는 기사를 보도했는데요. 레이와신센구미의 트위터 팔로어수는 8만7,000명으로 코이케 지사(86만명)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동영상 재생 수를 보면 얘기가 달라지는데요. 연설이 끝나고 1시간 뒤 야마모토의 동영상 재생횟수는 3만회에 달하지만 코이케 지사는 316회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닛칸 겐다이는 그러면서 온라인 전략이야말로 야마모토 후보의 특기라고 전했습니다. 야마모토는 유세장에서도 “기본적으로 초상권이 없다. 마음대로 찍고 SNS에 올려달라”며 온라인 입소문을 호소했다고 하는데요. 프리랜서 정치 저널리스트 스즈키 데쓰오(鈴木哲夫)는 “레이와신센구미는 참의원 선거에서 거리 연설과 온라인 전략을 잘 조합해 약 230만표를 얻었다’며 “온라인 전략만 놓고 보면 고이케 진영보다 야마모토 진영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것은 확실하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물론 온라인을 중심으로 야마모토가 야당 표를 뺏는다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스즈키는 “야마모토는 우츠노미야 표를 뺏으려는 게 아니라 무당파 층을 끌어내는 게 목적”이라며 “잠자고 있는 표를 끌어낼 수 있다면 다가올 총선에서 야당 공동 협력의 이점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서른일곱 배우가 반 아베 선봉에 나선 이유,
2013년 10월 참의원 시절 야마모토 다로(왼쪽). 지난해 7월 21일 실시된 참의원 선거에서 국회 진출에 성공한 루게릭병 투병 환자인 후나고 야스히코와 야마모토가 함께 기뻐하고 있는 모습. 
야마모토 후보의 이력은 화려합니다. 일본 영화 ‘배틀로얄’과 재일 한국인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영화 ‘고(Go)’, 한국 영화 ‘역도산’과 ‘마이웨이’ 에도 출연한 배우 출신 정치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요. 그가 2011년 서른일곱 나이에 뒤늦게 정치인으로 변신한 것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사고 직후 트위터에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는데 정치권으로부터 미운털이 박히면서 연예 활동에 제약을 받자 아예 탈원전 운동을 시작하면서 정치권에 뛰어들었습니다.  2013년 참의원 선거 당시 도쿄 선거구에서 당선해 파란을 일으켰다고 하고요.

그 이후 돈키호테 저리 가라 할 만큼 파격 행보를 이어왔습니다. 참의원이 된 직후 2013년 10월 헤이세이 일왕(아키히토) 부부가 고쿄(皇居·황거)에서 주최한 가든파티에 참석해 원전 피해의 실상을 알리는 편지를 직접 전달했다가 우익으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기도 했고요. 2015년 9월에는 아베 정부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허용하는 안보 법안을 강행 처리하려고 하자 국회에서 상복을 입고 투표함을 향해 무려 6분 동안 느릿느릿하게 걷는 ‘우보(牛步ㆍ소걸음)’ 전술을 펼쳤습니다.

지난해 참의원 선거 때는 레이와신센구미를 창당해 무당파 유권자를 대거 흡수하며 돌풍을 일으켰는데요. 당시 중증장애인을 비례대표 1, 2번으로 배치해 국회에 입성시켰지만 정작 자신은 비례대표 3번을 택해 99만여표를 얻고도 낙선했습니다. 이는 역대 참의원 비례대표 선거사상 최다득표 낙선 기록이었죠. 때문에 본인은 낙선했지만 선거에서 가장 주목 받은 인물이 야마모토 다로라는 평가가 나왔을 정도입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야마모토 타로가 고이케 지사를 이긴다면 도쿄뿐만이 아니라 일본 전체가 큰 영향을 받을 것이 확실시된다”며 “야마모토 타로가 극우가 주도하는 일본 정치를 바꿀 수 있는 희망이 될지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올해 초 니혼게이자이신문은 탄탄한 조직도 없는 다로가 대중의 이목을 사로잡은 데 대해 “세상에 대한 불만이나 불안의 ‘대변자’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볼 수도 있는 이번 선거에서 야마모토 후보가 어떤 성적표를 받아들게 될지 주목되고 있습니다. 

일본판 '새 정치'를 표방하는 야마모토 다로(45)의 도쿄도지사 출마 여부에 관심이 모아진다. 

12일 일본 언론들에 따르면 야마모토 다로 레이와 신센구미 대표는 오는 18일까지 도쿄도지사 출마에 대해 입장을 밝히겠다고 했다. 그는 전날 기자들에게 "마음은 피프티(50%)"라며 거취를 놓고, 고심을 거듭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그는 고이케 지사의 현 도정 운영 방식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나타내며, 자신이 출마를 한다면 "변화를 호소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올초까지만 해도 그는 일본 정계에서 적지않은 이목을 끌었다. 일본 야당이 자민당 및 현 고이케 체제에 대항해 그를 이번 도지사 선거에서 공동 후보로 추대할 수 있다는 설도 제기됐다.

그러나 최근 일본의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이 일본 변호사 연합회 회장을 지낸 우츠노미야 켄지로 후보 추천을 마무리하면서, 거품 인기였다는 평가가 나온다. 되레 이제는 그의 출마가 야당 표만 갉아먹을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야마모토 다로는 한국 영화 '역도산'과, 재일 한국인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영화'고(Go)'에도 출연한 바 있는 배우 출신 정치인이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반핵운동가로 활동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2013년 참의원에 당선됐다. 정치에 입문 한 뒤 전쟁 반대와 안보법 반대를 외치며, 아베 신조 총리의 독단적 행보에 반발해 '의식있는 젊은 정치인'이란 평가가 잇따랐다. 2015년엔 연립여당이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가능케 하는 안보법안을 통과시키자 "자민당은 죽었다"며 검은 정장의 상복 차림에 염주를 손에 들고 분향하는 자세를 취한 바 있다.

특히, 지난해 7월 일본 참의원 선거에선 비례 1, 2번을 중증장애인으로 배치해 이들은 당선됐으나, 자신은 3번을 배정해 낙선했다. '전략적 낙선'은 대의를 위한 희생의 이미지를 만들며 되레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일본의 노무현', '바보 다로'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올초 니혼게이자이신문은 탄탄한 조직도 없는 다로가 대중의 이목을 사로잡은 데 대해 "세상에 대한 불만이나 불안의 '대변자'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올림픽 취소하자"는 야마모토 다로, 도쿄지사 도전,
일본의 '새 정치'를 표방해온 야마모토 다로(山本太郞) 레이와신센구미(令和新選組) 대표(45)가 내달 5일 치러지는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아사히신문 등에 따르면 야마모토 대표는 15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도쿄도지사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하고 내년 도쿄올림픽·패럴림픽 취소 등 '도쿄도 8대 긴급대책'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의 여파로 힘겨워하고 있는 도쿄도민들을 돕기 위해 올림픽 취소와 지방채 발행 등을 통해 총액 15조엔(약 170조원) 상당의 자금을 마련, 지원 사업에 써야 한다는 것이다.

야마모토 대표는 "내가 정치를 시작한 이유는 '어려운 사람들을 어떻게든 돕겠다'는 것이다.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면서 이를 실천하기 위해 이번 도쿄도지사 선거 출마를 결심했다고 설명했다.

야마모토 대표는 배우 출신 정치인으로서 과거 '역도산'·'마이웨이' 등 한국 영화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 당시 발생한 후쿠시마(福島) 제1원자력발전소 폭발사고를 계기로 '탈(脫)원전' 운동가로 변신한 야마모토는 2013년 7월 참의원(상원) 선거를 통해 원내 진출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정치행보를 시작했다.

특히 그는 의정활동을 하면서 보수적인 일본 정치권과 대비되는 파격적인 모습을 여러 차례 선보여 국내외 언론의 관심을 모았다.

일례로 그는 지난 2013년 10월엔 아키히토(明仁) 당시 일왕(현 상황) 초청 만찬에서 후쿠시마 원전 피해의 실상을 담은 건의서를 일왕에게 직접 전달해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2015년 9월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안보 관계법 강행 처리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투표함까지 최대한 천천히 걷는 이른바 '우보'(牛步·소걸음)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에 나서기도 했다.

또 작년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치단체 '레이와신센구미'를 결성한 야마모토는 당시 선거에서 비례대표 2명을 원내에 입성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정작 본인은 비례대표 후보 3번을 배정받아 99만여표를 얻고도 낙선했다. 이는 역대 참의원 비례대표 선거 사상 낙선자 최다 득표 기록이기도 하다.

이런 가운데 그간 일본 정치권에선 야마모토의 높은 대중적 인지도를 이유로 '올해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야권 단일후보로 출마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제기돼왔던 상황.

그러나 입헌민주당과 공산당·사회민주당 등 주요 야당들은 이번 도쿄도지사 선거운동 기간 야마모토 소속 정당명(레이와)을 사용하는 문제와 차기 중의원(하원) 선거 공약(소비세 5%) 등에 한 이견을 좁히지 못해 일본변호사연합회장 출신의 우쓰노미야 겐지(宇都宮健兒·73)을 단일후보로 추천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 때문에 이번 도쿄도지사 선거에선 우쓰노미야와 야마모토 등 2명에게 야권표가 갈릴 경우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현 지사(67)가 재선에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집권 자민당은 이번 도쿄도지사 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는 방식으로 사실상 고이케 지사를 지원하기로 했다.

NHK에 따르면 이번 도쿄도지사 선거엔 고이케 지사와 우쓰노미야, 야마모토와 함께 일본유신회가 지원하는 오노다 이스케(小野泰輔) 전 구마모토(熊本)현 부지사(46), NHK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당 대표 다치바나 다카시(立花孝志·52) 등 모두 13명이 출마를 예정하고 있다. 야마모토 타로씨응원합니다, ~꼭 되시길~~~화이팅-^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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