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12일 월요일

총살 다음날 또다른 시신 떠올랐다,

 총살 다음날 또다른 시신 떠올랐다,

긴박했던 열흘의 기록


어업지도선 무궁화 10호가 9월 27일 전남 목포 해양수산부 서해어업관리단 국가어업지도선 전용부두에 정박하고 있다. 

무궁화 10호는 서해 최북단 연평도 해상에서 실종된 후 북한군 총격으로 인해 피살된 해양수산부 서해어업관리단 소속 공무원 이모(47)씨가 탑승했던 어업지도선이다.

11:30 이○○ 주무관 점심 식사 방송 후 식사하러 나오지 않음.

11:31 최○○ 주무관이 전화하였으나 전화가 꺼져있어 이○○ 주무관 방을 확인하였으며 방에 없어 직원들에게 알림.

북한군에 의해 사살된 해양수산부 소속 공무원 이모(47)씨가 탑승했던 어업지도선 ‘무궁화 10호’의 9월 21일 당직일지 기록이다. 

해양수산부가 국민의힘 안병길 의원실에 제출한 해당 선박의 열흘치(16~25일) 당직 일지엔 이씨 실종을 전후해 긴박했던 선박 내부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1시 45분 전 직원 식당 집합”


당직일지로 본 ‘무궁화10호’의 열흘.

무궁화 10호 승선 동료들이 이씨의 실종을 알아차린 것은 21일 11시 30분 무렵이다. 점심을 알리는 방송에도 이씨가 나타나지 않고, 휴대전화도 꺼진 상태인 것이 확인되자 11시 35분 전 직원이 선박 내부 수색에 돌입했다. 

당직일지엔 통상적으로 2시간에 한 번씩 특이사항 유무가 기재됐지만, 이씨의 실종 인지 이후엔 긴박했던 당시 상황이 분 단위로 적혔다.

실종인지 15분 뒤인 11시 45분, 선장 강모씨가 전 직원을 식당으로 소집했으나 역시 이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5분 뒤 강씨는 해수부 소속인 어업지도과장에게 이씨의 실종 사실을 구두 보고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무궁화 10호는 선체 내부 수색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2시 25분, 선박 우현 선미의 계류삭(선박을 일정한 곳에 고정하는 밧줄) 속에 이씨 것으로 추정되는 신발이 발견되며 상황은 급변했다. 

이씨가 선박을 이탈했을 가능성이 커지자 무궁화10호는 5분 뒤 자체 고속단정 2대를 내려 선박 인근 수색에 나섰다.

당직일지에 따르면 실종 인지 1시간 30분 뒤인 낮 1시 무렵, 해경 502함은 해군에 실종자 수색 협조 요청을 했다. 50분 뒤엔 헬기 1대도 수색 활동에 가세했다. 

이날 무궁화10호를 비롯한 국가 어업지도선 3척, 시ㆍ군 어업지도선 2척, 해군 함정 1척, 해경 함정 2척이 탐조등을 활용한 밤샘 야간 수색을 벌였지만 이씨의 행적은 찾을 수 없었다.

군은 北 사살 알았는데, 무궁화10호는 계속 수색

북한군 피격으로 숨진 공무원 이모씨의 형 이래진 씨가 김기윤 변호사와 함께 6일 오후 국방부에 정보공개청구서를 접수하기 전 서울 용산 국방부 민원실 앞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실종 다음 날인 22일 오전 10시 15분, 수색 참관 등의 목적으로 이씨의 친형 이래진씨 등 실종자 가족 2명이 무궁화 10호에 승선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이날 오후 9시 40분쯤 북한군은 이씨를 사살했다. 국방부는 이씨 시신도 훼손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무궁화 10호는 자정 무렵 마지막 당직일지 기록에 “수색활동 중 실종자 발견사항 없음”이라고 적는 등 종일 이씨 수색에 집중했다. 선박은 이씨 실종 이후 연평도 해상에 정박해 있었으나 당직일지엔 시신 훼손 정황으로 볼 수 있는 ‘불빛 관측’ 등의 내용은 기재되지 않았다.

22일 당직일지엔 군에서 무궁화 10호에 연락을 취한 내용도 자세히 적혔다. 오후 5시 5분 해군작전사령부에서 유선으로 연락해 ‘구명동의(구명조끼)의 종류와 색, 수량 파악’을 요구했다. 군이 이씨가 등산곶 인근 해상에서 북한 측에 발견된 것으로 파악한 시각(오후 4시 40분)에서 25분 지난 시각이다.

당직일지에 ‘구명동의’란 말이 등장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다. 군이 이씨가 북한군에 발견될 당시 구명조끼를 입었다고 밝힌 만큼, 군의 특수정보 ‘SI(Special Intelligence)’가 상당한 수준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구명조끼 착용은 군이 이씨의 월북 가능성을 높게 보는 이유 중 하나다. 단순 실족은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다만 해경은 이씨가 무궁화 10호에 실린 구명조끼를 착용했을 가능성에 대해선 확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당시 무궁화 10호엔 물품 대장에 등재된 구명조끼 29개와 비상시 쓰려고 놔둔 구형 조끼 56개 등 총 85개의 구명조끼가 배에 실려 있었는데, 관리하지 않은 구명조끼 몇 개가 배에 실려 있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와 관련, 안병길 의원은 “선박 안전 지침상 선외에서 구명조끼 착용은 필수이며, 해군ㆍ해경도 갑판에서 활동할 때 반드시 구명조끼를 착용하기 때문에 조끼 착용 여부가 월북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연평도 해상서 떠오른 또 다른 시신

9월23일 무궁화10호 당직일지. 해군 실종자로 추정되는 시신을 발견했으나, 가족 확인 결과 숨진 해수부 공무원 이모씨의 시신과 일치하지 않았다. [국민의힘 안병길 의원실 제공]

군과 정부가 이미 이씨가 북한군에 의해 사살된 사실을 확인한 23일에도 무궁화 10호는 수색활동에 집중했다. 오전엔 잠시 긴박감도 흘렀다. 당직일지엔 ‘해군 실종자로 추정되는 시신발견. VHF(선박 통신 주파수) 채널 6번에서 수신함’이라고 적혔다. 인근에서 함께 수색 중이던 선박이 해상을 떠돌던 또 다른 변사체를 발견한 것이다.

이씨의 시신인지 확인하기 위해 무궁화 10호 선장과 이씨 가족이 함께 살펴봤지만, 이씨는 아니었다고 한다. 현재 해경은 해당 변사체의 지문 대조 결과 일치된 결과가 없어 한국인이 아닌 것으로 보고 중국에 신원 확인을 의뢰한 상태다.

이씨 승선 다음 날 CCTV 고장

3일 군과 해양경찰이 서해 북단 소연평도 해상에서 사라졌다가 북한에서 피격돼 사망한 해양수산부 공무원의 시신 등을 찾기 위해 연평도 서방부터 소청도 남방까지 해역을 수색하고 있다.

당직일지에 따르면 무궁화 10호는 9월 16일 전남 목포시 북항에서 출항했다. 이씨가 이 배에 오른 것은 다음날인 17일 오전 11시다. 이씨는 연평어장에서 어업지도를 하던 무궁화13호에 근무했지만, 선박 임무 교대 후 무궁화 10호에 승선해 연평도 인근 해상에 남았다. 해경에 따르면 무궁화 10호 승선은 이씨의 희망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18일 밤 10시엔 무궁화 10호의 CCTV가 고장 났다. 당직일지엔 ‘본선 CCTV 작동 불량(화면 꺼짐, DVR 부팅 불가)’라고 적혔다. 출항 당시 점검에선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이씨는 이날부터 실종 당일인 21일까지 4일간 0시부터 새벽 4시까지 당직 근무를 섰다.

실종 당일 당직일지에도 ‘04:00 선내외 순찰결과 이상무, 이○○’라고 적혀있다.

이씨가 21일 새벽 1시 35분에 조타실을 떠난 이후 실종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 행적이 묘연하다는 동료들의 증언과 배치되는 정황이다. 다만 이씨 이름으로 기재된 당직일지 기록 필체가 제각기 달라 대리 서명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18일 밤 10시엔 무궁화 10호 #CCTV가 고장 났다 #당직일지 #본선 CCTV 작동 불량(화면 꺼짐 #DVR 부팅 불가)’라고 적혔다 #출항 당시 점검에선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21일 새벽 1시 35분에 조타실을 떠난 이후 #실종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 행적이 묘연하다 #동료들의 증언과 배치되는 정황 #9월 16일 전남 목포시 북항에서 출항했다 #이씨가 이 배에 오른 것은 #다음날인 17일 오전 11시다 #이씨는 연평어장에서 어업지도를 하던 무궁화13호에 근무 #선박 임무 교대 후 무궁화 10호에 승선해 연평도 인근 해상에 남았다 #해경에 따르면 무궁화 10호 승선은 이씨의 희망에 따른 것 #군과 정부가 이미 이씨가 북한군에 의해 사살된 사실을 확인한 23일에도 무궁화 10호는 수색활동에 집중했다 #오전엔 잠시 긴박감도 흘렀다 #당직일지엔 ‘해군 실종자로 추정되는 시신발견 #VHF(선박 통신 주파수) 채널 6번에서 수신함’이라고 적혔다 #인근에서 함께 수색 중이던 선박이 해상을 떠돌던 또 다른 변사체를 발견한 것 #안병길 의원 #선박 안전 지침상 선외에서 구명조끼 착용은 필수 #해군ㆍ해경도 갑판에서 활동할 때 반드시 구명조끼를 착용하기 때문에 조끼 착용 여부가 월북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오후 5시 5분 해군작전사령부에서 유선으로 연락해 ‘구명동의(구명조끼)의 종류와 색, 수량 파악’을 요구했다 #군이 이씨가 등산곶 인근 해상에서 북한 측에 발견된 것으로 파악한 시각(오후 4시 40분)에서 25분 지난 시각이다 #당직일지 #구명동의’란 말이 등장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다 #군이 이씨가 북한군에 발견될 당시 구명조끼를 입었다고 밝힌 만큼 #군의 특수정보 ‘SI(Special Intelligence)’가 상당한 수준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구명조끼 착용은 군이 이씨의 월북 가능성을 높게 보는 이유 중 하나다 #단순 실족은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해경은 이씨가 무궁화 10호에 실린 구명조끼를 착용했을 가능성에 대해선 확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당시 무궁화 10호엔 물품 대장에 등재된 구명조끼 29개와 비상시 쓰려고 놔둔 구형 조끼 56개 등 총 85개의 구명조끼가 배에 실려 있었는데 #관리하지 않은 구명조끼 몇 개가 배에 실려 있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적진에 달려가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의 행동은 바로 독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중국과 함께 일제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으며, 전 세계에 우리의 독립의지를 알릴 수 있었어요.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고 민족을 위해 큰 결심을 했던 #윤봉길 의사의 삶과 독립운동,,,♡

윤봉길의사 홍커우공원의거 재현 장면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

충청남도 예산 출생

본명은 우의, 별명이 봉길, 아호는 매헌,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배우고 책과 잡지를 읽으며 신학문을 배웠으며. 한시에 재능이 있었어요.

일제가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로 빼앗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우리 민족을 탄압하자 윤봉길은 농민들을 깨우치기 위해 1926년 야학당을 만들고 농촌의 부흥을 위해 부흥원과 월진회를 세워 농민조합 활동을 하셨어요.

월진회 취지서,

월진회를 만든 목적과 규칙을 적은 것으로 뒤에는 윤봉길 의사를 회장으로 하는 회원 명단이 들어 있어요.

기사년일기,

1929년 음력 정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쓴 일기로 곳곳에 민족의 현실에 대해 분개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답니다.​

​일본 경찰들의 감시로 농촌운동에 한계를 느낀 윤봉길은 1930년 23살이 되던 해에 부인과 두 아이를 고향에 담겨두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한 뒤 공장에서 일하거나 채소를 팔면서 정보를 수집하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어요.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의 의거 소식을 듣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을 찾아가 직접 거사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마침 1932년 4월,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 상하이 침략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가 일본 왕의 생일 기념식을 겸하여 열린다는 소식이 있자 윤봉길 의사는 임시정부가 조직한 의열투쟁 단체 한인애국단에 입단하고 김구 선생과 함께 의거를 준비했어요.

한인애국단 선서식,

1932년 4월 26일, 윤봉길은 안공근의 집에서 김홍일이 동석한 가운데 애국단에 입단하고 선서식을 거행하고, 입단하며 쓰신 선서문을 걸고 찍은 사진이에요.

​한인애국단 단장 김구 선생과 단원 윤봉길이 1932년 4월 26일 함께 찍은 사진이에요.

한인애국단 입단 선언서,

윤봉길 의사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다짐을 쓴 입단 선언서입니다.

- 나는 적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

윤봉길의사의 자필 이력서 및 유촉시,

거사 전날,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수첩에 마지막으로 직접 써서 남긴 약력과 유서가 적혀 있어요

'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이도 만일 피가 잇고 뼈가 있다면 반다시 조선을 위하야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기발을 놉피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압헤 차저와 한잔 술을 부서 노으라.

그리고 너의들우 아비 업슴을 슬퍼하지 말어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잇스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가 잇고 미국에 발명가 에듸손이 잇고 바라건대 너의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의들은 그 사람이 되리라.'​

-윤봉길이 두 아들에게 보내는 글(1932. 4. 27)

​윤봉길의사가 의거 당시 갖고 있었던 지갑과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낸 김구 선생의 낡은 시계입니다.​

1932년 4월 29일, 김구 선생과 아침식사를 마친 윤봉길 의사는 전날 새로 산 시계를 꺼내며,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제 것하고 바꾸시지요.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 밖에는 쓸데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윤봉길 의사는 김구 선생의 시계를 차고 홍커우 공원을 향하셨답니다.

​홍커우공원 의거에 사용된 도시락형 폭탄과 수통형 폭탄(모형)으로 천안 독립기념관 제5전시실 나라 되찾기에 전시되어 있어요.

폭탄을 투척한 직후의 기념식장 (1932. 4.29.)

홍커우의거

1932년 4월 29일 오전 9시 30분경,

일제의 승전 기념식 1부가 시작되어 군사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어어 11시 30분경 기념식장 무대 위에 상하이를 침략한

일본 장군들과 일본인 대표가 올라오고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끝나갈 무렵,

윤봉길 의사는 일본 헌병들을 제치고 무대를 향해 폭탄을 던지셨어요.

의거에 미처 사용되지 못한 도시락폭탄,

중앙 무대에 정확히 떨어진 폭탄으로 시라카와 대장은 다음날 죽고, 노무라 중장과 우에다 중장 등 한반도와 중국 침략에 앞장선 일본인 다수가 중상을 입었어요.

거사 직후 일본 경찰에 붙잡혀가는 윤봉길의사,

홍커우의거는 성공했지만 자폭에 실패하고 현장에서 체포 상해의 일본 헌병대에서 취조를 받으며,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배후를 밝히지 않다가 김구 선생이 성명을 발표한 후에야 배후가 김구인 것을 시인하였어요.​

그 후 일제는 윤봉길 의사에게 서둘러 5월 25일 상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내리고 홍컹우 공원에서 공개처형될 예정이었으나 윤봉길의사의 순국이 독립운동가들의 자극이 될 수 있다는 점과 국제여론 악화를 우려하여 11월 18일에 오사카에 있는 육군 위수형 형무소로 옮겨 수감됩니다.

​일제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사기가 꺾여 욕심을 포기하고 전쟁을 멈추는 협정을 중국과 맺었고 행사장에 와 있던 외국 기자들이 의거 소식을 전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게 되었답니다.

​1932년 12월 18일 일본 가나자와로 옮겨 다음날 오전 7시 30분에 총살형이 집행되어 25세의 일기로 순국하셨답니다.

​일제는 최대한의 보복과 응징을 하려 했지만 윤봉길 의사의 죽음은 우리의 독립을 앞당기고 인류의 평화와 정의를 실현하려는 거룩한 순국이었어요.

국내. 외 동포들이 독립의지를 다지고 중국과 함께 항일운동을 펼친 끝에 1945년 8월, 마침내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으며, 1946년 3월 임시정부 유해발굴단은 일본에 암매장된 유해를 찾아 고국으로 모셔옴으로써 윤봉길 의사는 그토록 그리던 광복된 조국에 묻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윤봉길과 이봉창이 폭탄으로 일본군 수뇌부와 천황을 노렸다,

시대/ 국가/대륙/

1932년 4월 29일

한국

아시아

4월 29일,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공원에 마련된 일본군의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졌다. 윤봉길의 폭탄에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일본인 거류민단장이 그 자리에서 죽고 일본군 중장을 비롯한 고위 인사 1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에 앞서 이봉창은 1월 8일 도쿄에서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폭탄은 천황이 탄 마차에 미치지 못했다. 윤봉길과 이봉창은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 소속으로, 의거 직후 체포돼 순국했다. 중국 정부는 윤봉길의 의거를 계기로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후원한다.

훙커우공원의 현재 모습,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당시 최고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윤봉길 의사는 다양한 매체나 소설, 책 등에서 도시락 폭탄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도시락폭탄을 상하이 홍구 공원에서 일본 전승행사를 쑥대밭으로 만든 사건은 오늘날 역사교과서에서도 잘 소개가 된 대목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분은 그정도이고, 조금 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어 3가지 정도 정리해봤습니다.

윤봉길은 스프링코트를 말쑥하게 차려입고 오른손에는 일장기, 왼손에는 물통과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을 들고 삼엄한 경계망을 뚫으면서 상해 홍구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 안에서는 천장절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11시 50분 일본 국가가 울려퍼지는 순간 윤봉길은 도시락폭탄을 단상으로 힘차게 던졌다. 경축대 위에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이 다시 바닥에 놓아둔 물통폭탄을 집어들려는 순간 일본 헌병이 덮쳤다. 윤봉길은 팔목이 잡힌채11시가 되자 중국주둔 일본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 등장했고 상해에 있는 외교관과 내빈이 자리를 잡았다. 군악이 울려퍼지고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과 내빈은 돌아가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해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을 가졌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우렁차게 외쳤다. 

도시락폭탄은 일본 요인 7명을 몽땅 쓸어버렸다. 상해 거류민회 위원장 가와바다는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고 시라카와는 열두 차례에 걸친 복부수술을 받았으나 20일 만에 죽고 말았다,

함대사령관 노무라 중장은 애꾸가 되었고 9사단장 우에다는 절름발이가 되었으며 나머지 사람도 온전한 몸이 아니었다. 이는 독립운동사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거와 버금가는 일이었다. 

윤봉길의 거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20대의 처녀 이화림이다. 그녀는 김구의 비서로 윤봉길을 뒤따르며 몰래 수행했는데 비밀을 유지해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윤봉길은 이 거사로 중국 100만대군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 

사태의 진상을 잘 모르는 중국 민간인들은 만보산사건으로 조선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기도 했다. 상해의 중국사람들은 가난하고 초라한 조선사람을 만나면 '망꿔노'라 하며 깔보기 일쑤였다. 또 일제가 조선인 밀정을 곳곳에 풀어 공작에 이용했기 때문에 조선인을 보면 일제의 밀정이라고 지레 짐작하는 중국인이 많았다.

그런데 이 거사에 감동하여 조선인에게 존경의 인사를 보냈다. 흥구공원 부근에 사는 중국의 혁명문학가 노신도 이 소식을 듣고 통쾌하게 여겼다. 또 김구가 배후인물로 알려지자 국내외를 통틀어 김구의 정치적 입지와 인기가 높아졌다. 


수통 형 폭탄의 진실

우선 첫 번째 잘못 알려진 사실중에는 윤봉길 의사가 던진것으로 보이는 도시락 폭탄에 대한 부분부터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곳에서 수통 형 폭탄은 거사용으로 사용된것이고, 도시락 폭탄은 자살용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오전 11시 40분경에 축하식 중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에 윤봉길 의사는 수통 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뺀 후 폭탄을 투척한 것입니다.윤봉길 의사는 거사 당일에 김구선생과 아침을 함께 먹고 상해 병공창의 주임이었던 김홍일장군의 주선으로 마련된 수통 형 폭탄이랑 도시락 폭탄을 챙겨 홍구공원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그럼 왜 하필 홍구공원에서 거사를 한 것일까?

두번째는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다는 이야기인데요, 상해 홍구공원에 가면 한쪽에 매원이라는 이름 붙여진 곳에 별도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들어가게되면, 윤봉길 의사 의거비가 나옵니다.

조선족 현지 가이드들은 바로 의거비를 설명하면서 이곳이 폭탄을 투척했던 곳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하지만 이건 잘못된 것이고, 노신의 묘가 있는 곳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운봉길 의사 체포사진의 진실

마지막으로 폭탄 투척 이후 윤봉길 의사가 체포 당하는 당시 사진은 매우 악의적인 의도로 만들어진 오류중 하나 입니다. 사진은 옷이 멀쩡한 채로 중절모를 들고 약간 겁먹은 얼굴의 중년 남성이 윤봉길 의사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 사진은 의문이 많다고 이야기 합니다. 윤봉길 의사의 복장은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으며, 당시 군경들에게 심하게 구타를 당하였고, 결국에는 그자리에서 사망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독립기념관 #랜선역사여행 #역사여행 #언택트역사여행 #대한독립만세 #천안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전시관 #윤봉길의사 #의열투쟁으로 꽃피운 한인애국단 윤봉길 의사 #1932년 4월 26일 #윤봉길은 안공근의 집에서 김홍일이 동석한 가운데 애국단에 입단 #선서식을 거행 #입단하며 쓰신 선서문을 걸고 찍은 사진 #중국주둔 일본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 등장했고 #상해에 있는 외교관과 내빈이 자리를 잡았다 #군악이 울려퍼지고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과 내빈은 돌아가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해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을 가졌다 #11시 50분 일본 국가가 울려퍼지는 순간 윤봉길은 도시락폭탄을 단상으로 힘차게 던졌다 #경축대 위에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이 다시 바닥에 놓아둔 물통폭탄을 집어들려는 순간 일본 헌병이 덮쳤다 #윤봉길은 팔목이 잡힌채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우렁차게 외쳤다 #도시락폭탄 #일본 요인 7명을 몽땅 쓸어버렸다 #상해 거류민회 위원장 가와바다는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고 #시라카와는 열두 차례에 걸친 복부수술을 받았으나 20일 만에 죽고 말았다 #함대사령관 노무라 중장은 애꾸가 되었고 #9사단장 우에다는 절름발이가 되었으며 나머지 사람도 온전한 몸이 아니었다 #독립운동사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거와 버금가는 일이었다 #윤봉길의 거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20대의 처녀 이화림이다 #20대의 처녀 이화림 그녀는 김구의 비서로 윤봉길을 뒤따르며 몰래 수행했는데 비밀을 유지해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윤봉길은 이 거사로 중국 100만대군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

2020년 10월 10일 토요일

비겁한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겁한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류가 평화를 유지해 온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억제'의 개념이다. <script data-ad-client="ca-pub-4162949345545299"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적으로 하여금 '전쟁을 도발하면 이익보다는 손실이 훨씬 더 클 것임'을 인식시켜 감히 도발을 못 하게 하는 평화유지 방법이다.

여기에는 빌붙고 달래거나 위협을 회피해서 평화를 유지한다는 인식은 없다. 회피하고 도망하면 뒤따라와 뒷덜미를 물어뜯는 것이 '전쟁의 속성'이다.

 

전쟁을 각오하고라도 '단호히 맞서야 지켜지는 것이 평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억제에 성공한 국가들은 통상 '철저한 응징과 보복'을 원칙으로 삼는다.

하지만 우리는 6·25 이후 지금까지 1·21사태, 아웅산 폭파 등 전쟁이라도 선포해야 할 수많은 북한의 도발이 있어 왔지만 제대로 응징이나 보복을 하지 않았다.

더욱이 2007년 한국청소년연구소는 조국에 전쟁이 났을 때 참전하겠다는 청소년이 일본과 중국은 40%가 넘었는데 한국은 10.1%에 불과하다고 발표했다.

따지고 보면 우리 사회의 이런 측면이 북한이 우리를 "아무 때나 마음 내키는 대로 뺨 한대 올려붙여도 괜찮을 만만한 상대"로 깔보고 함부로 도발을 하게 만든 배경일 것이다.

그런데 이번 천안함 사태를 두고도 남북 긴장을 겁내 적당히 넘어가자는 사람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물론 북한의 도발임이 확인됐는데도 저들이 오히려 '서울 불바다' 운운하며 위협의 수위를 높이고 있으니 한반도의 긴장이 좀 더 높아질 것임은 당연하다.

도대체 군함이 폭침(爆沈)된 마당에 긴장을 우려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지만, 지금은 크게 보면 南과 北 간에 일종의 기싸움이 진행 중인 때다.

 

만약 여기에 겁내 화해를 구걸하려 들면 한국은 또다시 북한에 코가 꿰이고 말 것이다.

 

그리고 북한의 교만을 키우고 또 키워서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는커녕 머지않은 장래에 정말로 전면 전쟁이 불가피하거나 자유 대한의 미래를 잃게 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우리 사회는 물론 심지어 우리 장병들 사이에도 "비겁한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는 식의 무책임한 주장에 동조하거나 심지어 "전쟁에 투입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떠는 경우도 없지 않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큰 문제다.

물론 오늘 동북아 안보 환경을 비춰 보면 전면 전쟁은 북한이 오히려 더 겁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46명의 전우가 희생됐는데도 우리 사회나 장병들이 '비겁한 평화'나 찾고 도발에 대한 분노 대신 슬픔과 공포뿐이라면 북한이 무엇이 두려워 다양한 추가도발을 자제하려 하겠는가? 

윤봉길의사 홍커우공원의거 재현 장면 [출처] 의열투쟁으로 꽃피운 한인애국단 윤봉길 의사 in 독립기념관|작성자 독립기념관,

분명히 말하지만 '비겁한 평화'란 이 세상에 없다. 단순히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전쟁터 초대장'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자유와 함께하는 참된 평화는 그것을 지킬 의지와 용기가 있는 자만이 향유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혹 다소의 희생이 따를지 몰라도 "오늘의 작은 희생을 두려워하면 내일 더 참혹하고 큰 희생을 강요당하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그래서 역사는 언제나 지혜롭고 용기 있는 자의 것이 돼 온 것이다.

1938년 뮌헨회담에서의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국가적 비겁성이 불과 1년여 만에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다는 제2차 세계대전의 문을 열어 줬듯이

 

"용기가 필요할 때 비겁한 것은 때로 더할 수 없는 죄악이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안중근 의사 동상!

“비겁한 평화는 전쟁을 부른다!” 

 

이 영상은 국가정보원이 제작한 영상으로 임진각에서 상영하려고 했으나 민주당 의원이 반발하자 통일부가 안보견학 현장에서 상영중지시킨 동영상이다.


youtu.be/xbTDFm8PQW4


이 영상속에 나오는 정신나간 짓은 민주당, 통합진보당, 전교조, 민노총, 한대련 등등,, 


각종 좌파단체를 비롯하여 성서한국을 비롯한 종북기독교인들이 앞장서고 있다...


참으로 심각한 대한민국의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번영과 평화는 비겁한 자들을 기르고 역경은 대담한 자들을 낳는다 (세익스피어)


가진 것이 많을 때, 지켜야 할 것이 많을 때 사람들은 비겁해진다.


그러나 어려움이 있게 되면, 결국 비겁해져서는 가지고 있는 것조차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사람들은 용기를 내고 대담해질 수밖에 없다.


번영과 평화가 있을 때나 어려움이 있을 때 정의를 위해 용감한 사람이 되는 것을 훈련해야 한다.


평화는 적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나를 지키는 길이다-<오즈의 에메랄드 시>

함께 읽은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중 아들은 이제까지 2권 <환상의 나라 오즈>가 제일 재미있었는데 6권 <오즈의 에메랄드시>를 다 읽고 나서는 어떨 땐 2권이 제일 재미있다고 했다가 오떨 때는 6권이 제일 재미있다고 하며 수시로 마음이 바뀐다.


복수의 칼을 가는 놈 왕과 동맹군들, 마지막의 대 반전이 있어 그런 모양이다. 사실 나도 6권 <오즈의 에메랄드시>가 2권과 우열을 다툴수 없을 만큼 재미있었다.

도로시에게 늘 부모 같은 헨리 아저씨와 엠 아주머니 부부에게 청천벽력 같은 은행 독촉장이 날아왔다. 이번 달까지 농장을 담보로 빌린 돈을 갚지 않으면 농장은 은행 소유로 넘어간다는 것이었다. 빚 갚고 먹고 살려고 그 오랜 동안 뼈빠지게 일했건만 늘 가난에 허덕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생명 같은 농장에서도 쫓겨나 길바닥에 나앉게 된 헨리 아저씨네 부부에게는 마주 보고 한숨 짓는 일 말고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자기네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린 도로시까지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게 하다니, 이 일을 어찌 할고! 헨리 아저씨와 앰 아줌마는 어린 조카에게 끝까지 이 사실을 숨기려 했지만 착하고 상냥하고 세심한 도로시가 헨리 아저씨와 엠 아주머니 얼굴에 나타난 지독한 근심을 못볼 리 없었다.

모든 사정을 알게 된 도로시는 오즈마 공주가 이 문제도 해결해 줄 수 있을거라고 장담하며 어른들에게 또다시 환상의 나라 오즈 이야기를 꺼냈다. 그곳에서는 오즈의 마음 착한 통치자 오즈마 공주 덕분에 자기도 공주인데 오즈마에게 부탁해 헨리 아저씨와 엠 아주머니도 오즈에서 살 수 있도록 하면 만사가 해결될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다.


오즈에서는 먹고 살기 위해 뼈빠지게 일할 필요도 없고, 평생 따라다닌 가난도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평생 개미처럼 일만 해 온 선량한 노부부가 남은 생을 그렇게 보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니만큼 아무 생각도 말고 마음 편히 자기를 따라가도 된다고.,,

마술 허리띠의 마법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화려한 오즈마의 궁전에 서 있게 된 헨리 아저씨와 앰 아줌마는 자기 모습이 너무 초라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교회 갈 때 입는 제일 좋은 옷이라도 입고 올 걸.

옷이야 옷장에 넘치게 걸린 옷들을 갈아입으면 되지만 평생 스스로 몸 움직여 힘들게 일만 하며 살아온 노부부에게 고역 중의 고역은 아무 할 일 없이 빈둥빈둥 하는 것이었다. 평생 농사일에 시달린 부모님이 안타까워 남은 날들이라도 편히 지내시라고 도시로 모셔 오면 할일 없고 아는 사람 없어 심심해 하시다 그 심심함이 무료함으로, 무료함이 우울증으로 변해가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는것 처럼.

사실 아이들과 집안일로 정신이 없어서인지, 워낙 일 못하고 편한 것만 찾는 사람이어서인지 솔직히 헨리 아저씨 부부에게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누구를 부려본 적 없는 타고난 서민이라 하인들이 하나에서 열까지 몽땅 챙겨주는 것에 극도로 어색한 것에는 확실히 공감하지만.


우리 집 바로 밑에 있는 슈퍼가 3만원 넘게 사면 배달해주지만 20KG 짜리 쌀 말고는 선뜻 배달해달라는 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코앞에 살면서 나보다 나이 많은 분들께 그런 부탁 하기가 왠지 미얀하다.


돈 내는 고객의 당연한 권리를 떠나 그냥 내가 아는 어른들께는 그런 부탁 하는게 아니라는 어릴적 부터 몸에 벤 무의식 때문이다.


튼튼하고 젊은 청년이 할 수 있는 일을 남에게 부탁하지 말고 혼자 해야 한다고 배웠으니 그 반대로 하면 왠지 야단 옴팡지게 맞을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오즈마가 자신이 밀린 나랏일을 처리하고 헨리 아저씨와 엠 아주머니에게 맞는 새 일거리를 찾아보는 동안 도로시에게 어른들을 모시고 여행이나 다녀오면 어떻겠냐며 권했다.


오즈의 나라는 넓고도 넓어서 아직 도로시와 친구들이 가 보지 못한 곳들이 많았다. 정말 좋은 생각이라며 도로시, 허수아비, 그 동안 글린다에게서 열심히 마법을 배워 진짜 마법사가 된 위대한 마법사 오즈는 헨리 아저씨와 엠 아주머니를 모시고 목마가 끄는 마차를 타고 신기한 생물들이 사는 낯선 세계를 향해 출발했다. 아 참, 늘 떠돌아다니기 좋아하는 털북숭이 할아버지도 함께.

컷튼클립은 종이를 오리고 붙여 무언가를 만드는 걸 세상의 유일한 낙으로 아는 한 소녀를 위해 착한 마녀 글린다가 살아있는 종이를 주고 땅을 주면서 생기게 된 나라였다. 도로시 일행이 컷튼클립의 종이 백성들이 날아갈 세라 숨 소리도 죽여 가며 살금살금 다가갔을 때도 소녀는 가위를 들고 바쁘게 종이를 자르고 있었다. 종이로 만든 사람들이 신기한 듯 마을 구석구석을 둘러 보며 감탄하는 손님들과 점점 가까워지려는 찰나 그 동안 참고 참아 왔던 털북숭이 할아버지의 제채기가 터져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폭풍을 만난 개미떼처럼 이리저리 휘날려 흩어지고 마을은 홰오리바람이 휩쓸고 간 것 마냥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종이 사람들은 겁이 나서 집 안으로 숨어버리고 도로시 일행은 미얀해 어쩔 줄 몰라 하며 황급히 이 나라를 떠나야만 했다. 종이와 가위를 든 소녀는 나중에 또 오라며 손님들을 정중히 배웅했지만 백성들은 전혀 바라지 않는 눈치였다.

종이로 만든 것들이 살아 움직이는 컷튼클립은 그냥 구경만 하고 나왔지만 퍼즐 조각들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사는 머들 컴징에서는 점심을 얻어 먹기 위해 외부인의 출현에 놀라 허둥대다 조각조각 부서진 머들들을 하나하나 맞춰주어야 했다.


평소에 퍼즐 맞추기를 좋아하는 도로시와 눈썰미 좋은 엠 아줌마는 다리를 잘 못 밪춰 절뚝이기는 했지만 요리사 퍼즐을맞출수 있어 점심을 굶지 않게 되었다. 손님들은 시간이 없어 모든 머들들을 다 맞춰주지 못해 아쉬워 했지만 정작 머들들은 신경쓰지 않았다. 또 누군가 와서 맞춰주겠지, 그 때 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면 되죠 뭐.

화려한 오즈에 와서 사녀들 시중만 받으며 손끝 까딱 않는 생활에 적응 못해 안절부절 못 하고 제발 설거지라도 하게 해 줬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기도하던 엠 아주머니는 머들들을 맞추고 정리하면서 얼굴이 조금씩 피기 시작했다. 먹고 살 걱정도 없고 힘들지도 않지만 내 손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안도감과 자존감 때문일까?

노동이라는 것이 육체와 정신을 좀먹지만 않는다면, 일을 하고 또 해도 늘 먹고 살 걱정에 짖눌려 스트레스만 받지 않는다면 인간에게 노동이란 꼭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문제는 일은 많이 하는데 급여는 적고, 생활은 더 빠듯해지다 보니 내 노동의 가치가 이것밖에 안되나 싶어 자존감은 떨어지고 몸도 마음도 고달파서 사랑하고 즐길 시간이 없어지고 좀비처럼 숨만 쉬고 있으니 비참하고......

오즈에서는 누구나 노동을 하지만 자기 노동에서 소외되지 않는다. 모두가 능력껏 일하고 그 일이 남을 이롭게 하는 노동이라면 충분히 존중받고 보상받는다.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행복을 위해 일하기에 일은 의무요 굴레가 아니라 권리가 될 수 있다.


헨리 아저씨와 엠 아주머니가 열심히 일한 것도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스스로 일해 자기 일생을 책임질 수 있다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런 마음을 알기에 오즈마 공주는 두 어른들이 너무 힘힘들지 않으면서도 보람을 느낄수 있는 일거리를 찾아주려 고민했던 것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오즈마의 고민은 헨리 아저씨에게는 왕실 보석관리인, 엠 아주머니에게는 오즈마의 스타킹 수선사라는 맞춤한 일자리를 만들어 냈다.

아들은 아직은 이런 생각을 못하겠지만, 나도 예전에는 이 부분을 그냥 스쳐 지나쳤지만 슬슬 노후준비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게 된 40대 중반이 되고 보니 인공지능이 우리 일을 너무 많이, 너무 빨리 대신해가는 세상에서 내 아이들은 무슨 일을 하며 밥벌이하고 자존감 지키며 살아갈까 고민하는 엄마가 되다 보니 <오즈의 마법사>에 이런 내용도 있었나 싶을 만큼 새로운 발견이다. 나도 나의 노동과 노후를 이토록 세심히 신경 써 주는 나라에서 늙어가고 싶다!

​여행 이튿날 혼자 아침 일찍 일어난 도로시는 다른 일행이 깨기 전에 잠깐 산책이나 다녀오자 싶어 토토를 앞세워 길을 나섰다.


한참 숲을 헤메는 사이 되돌아 가는 길을 깜빡 잊었다 싶어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사이 왠 숟가락들이 도로시와 토토를 겹겹이 포위하고는 침입자들을 체포한다며 억지로 자기네 왕국을 향해 밀어붙였다.


숟가락, 칼, 도마, 프라이펜 같은 주방 용품들의 나라 우텐시아 법정에 서 보니 이 왕국 사람들은 너무 할 일이 없어 따분한 나머지 누군가를 잡아와 억지로 재판이라도 열어 구경거리를 만들 샘으로 애꿎은 행인을 잡아들인 것이었다.


하릴없이 자식 전화만 기다리는 시어른들 격이라고나 할까! 자식 입시 뒷바라지에 올인하던 엄마가 자식 대학가고 나면 빈 둥지 증후군에 시달려 우울증에 빠지는 격이라고나 할까. 이래서 인간은 단지 밥벌이만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남을 위해서 적당한 만큼은 일을 해야 하는 모양이다. 문화센터를 다닌다,


노래교실 사람들과 쑥 뜯으러 간다 하며 부산떨며 어딘가에 재미붙이며 사는 칠순 넘은 부모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내 부모는 나보다 바빠서 절대 자식들을 기다리고 괴롭힐 시간이 없다!

아침도 못 먹고 숲을 헤메느라 배가 너무 고픈 도로시와 토토는 모든 것이 빵들로 이루어진 번베리에서 피아노와 담벼락, 손수레를 조금 얻어 먹고는 그래도 일행들을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어 토끼들의 나라 버니베리에도 들렀다.


나라를 다스리고 갈등을 조정하는 의무는 싫고 왕으로서 누리는 맛난 음식과 공연, 화려한 왕궁 생활만 좋은 토끼 왕, 처음에는 토끼 왕에게 연민으로 따뜻하던 도로시의 마음은 점심 식사가 끝날 무렵에는 싸늘하게 식어버리고 말았다.


사다 주는 과자는 좋아하면서 깜빡 한 두부 한 모 사오라고 하면 이 핑계 저 핑계 다 대는 아들 같다고 했더니 왕도 그러는데 자기도 그럴수 밖에 없다고 능청이다. 하긴 그게 인지상정이긴 하지!얼마 전에 우리나라에도 그런 여왕이 있어서 국민들이 엄청 고생했다고 사과 깎다 말고 한마디 하는 남편! 그래, 그 땐 정말 힘들었지!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는 듯 환상의 나라 이곳 저곳을 여행하는 도로시 일행 이야기와 함께 <오즈의 에레랄드 시>에서는 3권 <오즈의 오즈마 공주>에 등장했던 놈 왕의 복수극도 펼쳐진다.

허수아비에게 달걀을 맞고 쓰러진 것도 모자라 마술 허리띠까지 빼앗기고 포로로 잡은 이브 왕실 가족들까지 돌려보내게 된 놈 왕은 오즈마 공주에게 이를 갈았다. 이제나 저제나 복수할 기회만을 노리며불같이 화내며 측근들과 백성들을 괴롭히는 바람에 언제나 충실했던 집사까지도 두 손 두 발 다 들 때쯤 놈 왕의 복수 계획을 도와줄 구푸 장군이 구세주처럼 등장한다.

구푸 장군은 늘 행복하게 살아가는 오즈나라 사람들이 꼴사나워서 그들을 영원히 노예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이유로 놈 왕의 복수심에 동조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집행하는 행동대장 역할을 떠맡는다. 언제나 지하에서 우중충한 얼굴로 우중충한 주인의 비위나 맞추며 파리 목숨처럼 살아가야 하는 놈 사람들에게 평화롭고 풍요롭고, 그래서 늘 행복할 수밖에 없는 오즈나라 사람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자신들의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움츠려들게 하는 자들이니 한시라도 빨리 없애버려야 할 악의 근원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구푸 장군은 놈 왕과 자기처럼 열등감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에게 무조건 저주를 내리고 싶어 하는 족속들을 찾아다니며 동맹을 맺기 시작했다. 몸통에 비해 너무 작은 머리 때문에 놀림 당할까봐 가짜 머리를 만들어 쓰고 다니는 휨지, 힘이 너무 세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잔인하고 무뚝뚝해서 남에게 제대로 대우받지도 못하고 따돌림까지 당해 점점 더 잔인해져 가는 글로우레이워그, 마술 허리띠도 필요 없을 만큼 마법과 힘을 다 갖추었지만 역시 너무 악하고 잔인해서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어둠 속 자신들 왕국에서만 살아가는 천하무적 팜파즘 종족들이 그들이다.

​남산 자락에 있던 탈북민 대안학교 이전을 반대한 은평뉴타운 주민들 이야기, 장애인들을 위한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지역주민들 이야기, 이래저래 차별받는 조선족과 다문화 가정 아이들 이야기가 떠오른다. 결손가정이라고, 학벌도 부모 백도 받쳐주지 못하는 청년들의 고달픈 삶도 떠오른다.


우리가 이렇게 멸시하고 배제한 이들이 놈 왕의 선동에 동조해 행복한 얼굴로 학교에, 회사에 가는 이들을 무차별 습격하는 사회의 뇌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텐데. 무한 경쟁의 정글 같은 대학 입시를 통과하느라 내 아이가 이렇게 매마르고 날카로워지지는 말아야 할 텐데. 한 사람 한 사람의 온정에만 기대지 말고 다양한 사회적 안전망과 복지 정책으로 휨지와 글로우레이워그, 천하무적 같은 사회적대세력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할 텐데. 우리 아이들은 그런 안정된 나라에서 살아갔으면 좋겠다.

증오심에다 머리까지 좋은 구푸 장군은 오즈의 나라와 놈 왕국을 가로막고 있는 죽음의 사막을 건너기 위한 방법도 이미 마련해 두었다. 죽음의 사막 밑으로 땅굴을 파서 에메랄드 시까지 가는 방법인데 죽음의 사막만 믿고 안심하는 오즈마 공주의 허를 찌르고 에메랄드 시까지 도착하는 동안 누구에게도 들킬 염려가 없는 기가 막힌 방법이었다.

오즈마 공주가 헨리 아저씨와 엠 아주머니 문제를 해결해 놓고 느긋하게 앉아 마법의 그림을 갑자기 들여다보고 싶어 지지만 않았더라도, 뜬금 없이 예전에 자기가 혼내주었던 놈 왕이 지금은 무얼하고 있을지 궁금해지지만 않았더라면 구푸의 계획은 완벽히 성공했을 것이다. 여자의 직감이라고나 할까. 하여간 땅굴에서 나오기 전에 발견하게 되어 천만다행이었다.

오즈마 공주의 슬픈 소식을 듣고 양철 나무꾼과 여행 떠난 도로시 일행이 급히 에메랄드 시로 달려와 죽어도 함께 싸우다 죽자며 오즈마를 둘러쌌지만 오즈마는 전혀 싸우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무리 악한 놈 왕이라도 자기가 그 생명을 파괴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악한 주인을 따라온 병사들은 또 무슨 죄란 말인가! 공주는 어떻게든 싸우지 않고 해결할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아마도 오즈마는 '금지된 샘물'을 이용할 방법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오즈의 어떤 왕이 나쁜 짓을 하려고 해서 착한 마녀 글린다가 한 모금만 마셔도 자신이 살아온 모든 기억을 잊고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착한 마음만 남게 하는 망각의 샘물을 만들어 왕에게 그 물을 마시게 했었다.


마시기만 하면 모든 것을 망각하는 너무나 위험한 샘물이기에 그 후로 아무도 마시지 못하게 '금지된 샘물'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놈 왕의 땅굴은 오즈마 공주의 궁전 밑을 지나 바로 이 샘물 앞까지 파여 있엇고 다음날 아침이면 에메랄드 시를 정복하기 위해 지상으로 올라올 것이다.

언제나 위기에 강한 허수아비는 이 이야기를 듣고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오즈마 공주에게 마술 허리띠로 놈 왕의 땅굴로 아주 건조한 먼지를 마구 휘날려보내도록 했는데 그러면 병사들은 너무 목이 말라서 지상으로 올라오자마자 물을 찾아 샘물로 달려들 것이다.


그 순간 병사들은 에메랄드 시로 온 목적마저도 잃고 아이들처럼 행복한 얼굴로 오즈마의 명령을 기다리게 될 터였다.

허수아비의 지혜는 정말로 놀라웠다. 모든 계획이 딱딱 들어맞았다. 샘물을 마시고 아이들처럼 장난만 치는 병사들에게 화가 나서 목이 마른 것도 잊고 길길이 날뛰는 놈 왕을 허수아비와 양철나무꾼이 한 팔씩 잡고 샘물에 풀덩 빠뜨려야 했던 것만 빼고는. 물에 들어갔다 나온 놈 왕도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마저도 잊고 어쩔줄 몰라 하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더 이상 에메랄드 시를 어지럽히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오즈마 공주는 마술허리띠를 이용해 놈 왕의 동맹군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나서 놈 왕과 구푸 장군, 놈 병사들은 자신들이 판 땅굴을 통해 고향으로 되돌아가라고 명령했다.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들처럼 일행은 순순히 왔던 길을 되돌아 갔고 에메랄드 시는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오즈마가 끝까지 평화를 꿈꾸었기에 오즈의 백성들은 한 명도 다치지 않았고 아름다운 에메랄드 시도 계속 아름다울수 있었다. 평화는 상대방에게 선심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고, 내 국가, 내 국민들을 위한 것이었다. 만일 전쟁이 일어났다면 앞에 나가 싸우는 병사들도 다쳤겠지만 힘 없는 아이와 여자들이 더 많이 죽고 다쳤을 테고 땅을 갈고 가축을 기르고 대장간을 만들어 쇠를 다루는 사람들은 그 모든 삶의 터전을 잃고 전쟁이 끝나고도 한동안은 고생고생 하며 다시 삶을 일구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통치자가, 국가가 평화를 선택하는 것은 진정으로 백성을 위해서일 것이다. 군대를 기르고 외교정책을 잘 펴는 것도 국민을 위해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여야 한다. 마음만 먹으면 전쟁을 못할 것도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진 오즈마 공주가 평화를 선택하는 것은 그러니 절대 비겁한 행동이 아니었다. 전쟁보다 더 용감한 선택이었다.

그러니 북한에 개성공단을 다시 열고, 금강산 관광길을 다시 잇고, 북미간에 평화협정을 맺도록 어떻게든 중제하는 것을 두고 우리는 비겁하다, 한낱 백일몽이다 폄하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것이 어떻게든 이 나라에서 살아가야 할 변변한 백도, 돈도 없는 나와 내 아이들의 생명과 밥줄을 지켜주는 길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내 아이들이 보내주는 효도여행으로 금강산 한번 다녀올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싶어 슬쩍 아들을 넘겨 본다. 그런 날이 오려나 빵돌?


그놈의 평화는 결국 가짜 평화였나?


이완용-히틀러-체임벌린-베트남-김정은-문재인 이들의 공통점은? feat. '북한이 미국을 속이고 있다' - CIA

세 번째 방북길에 오른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 장관.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북핵 문제는 끝났다'고 거듭 강조해온 트럼프 대통령. 정의로운 전쟁보다 비겁한 평화가 낫다고 강조해온 문재인 대통령. 이들에 대해 미국 언론과 전문가들은 강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더군다나 6.12 정상회담 이후, 오히려 북핵 시설이 증강되고 있다는 정황이 나오면서 회의적인 시각이 더 많아지고 있는 분위기다.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내가 이룬 걸 봐라. 북한 미사일 발사도, 로켓 발사도 없다. 일본은 나를 세계적인 영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참모들은 잇따라 북한의 핵 위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지나친 낙관론을 경계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우려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더욱이 북한의 핵시설이 오히려 증축되는 정황이 포착되면서, 급기야 CIA 등 정보기관 인사들이 '북한이 미국을 속이고 있다'고 방송에서 말하기도 했다.

CIA등 전문가들에 따르면 북한이 미.북 정상회담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었을 뿐만아니라, 지난 몇 달 동안 다수의 비밀 핵시설을 만들어왔다는 분석이다. 또한 주요 언론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낙관론을 경계하는 기사들을 잇따라 내놓으며 의구심을 감추지 않았다.

백악관 출입 기자가 "정보기관은 북한이 미국을 속이고 있다고 말하는데, 대통령은 무슨 근거로 잘 돼가고 있다고 말하는 건가?"라고 묻자, 세라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정보기관 보고에 대해서는 내가 찬성이나 반대의 언급을 하지 않겠다. 어쨋든, 며칠 전에도 성김 대사가 북한과 좋은 만남을 가졌고 (폼페이오)국무장관이 대화를 위해 북한을 간다"고 말하면서 즉답을 피했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도 "자신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북한과 전쟁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비교만 강조하고 있어 북한의 시간벌이에 일조했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또 헤더 나워트 미 국무부 대변인은 "(지난해 이맘 때 나는) 급히 서둘러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왜 그랬을까? 북한이 ICBM을 쐈기 때문이다. 그래서 1년 전과 비교해보면 지금은 좋은 상황에 있다."면서 같은 입장을 내놨다.

이는 결국, 북한의 극단적 행동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단 변명으로 들려 '시간벌이용 졸속 회담'이라는 비난은 피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게 있다.

1905년 조선-일본 을사조약 체결 당시 이완용은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전쟁보다는 낫다"라는 말을 남겼다. - 조선 5년 뒤 패망.

1973년 북베트남, 남베트남의 종전선언과 미국의 주도하에 '파리평화협정'이 맺어진다. - 2년 후 북베트남 남베트남 침공 남베트남 패망 '적화통일'

1938년 영국의 체임벌린 총리는 독일의 히틀러와 평화협정을 맺는다. - 11개월 후 독일, 폴란드 침공! "세계 2차 대전" 발발

2016년 10월 15일 문재인은 트위터에 "나는 가장 좋은 전쟁보다 가장 나쁜 평화에 가치를 더 부여 합니다."라고 적었다. 그후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2018년 4월 27일 김정은과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판문점 선언을 선포함으로써 평화협정을 맺는다. - 그후 남북의 평화는 얼마나 갈까? 벌써부터 김정은은 히틀러가 체임벌린을 종이 쪼가리로 유린 했듯이 판문점 선언 종이 뒤로 핵개발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정황들이 포착 됐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 윈스턴 처칠

#동북아 안보 환경 #번영과 평화 #비겁한 자들을 기르고 #역경은 대담한 자들 #비겁한 평화는 전쟁을 부른다 #국가정보원 #제작한 영상 #임진각에서 #상영하려고 했으나 민주당 의원이 반발 #통일부가 안보견학 현장에서 상영중지시킨 동영상 #오늘의#격언#속담#명언#지혜#세익스피어#좋은#생각#비겁 #2007년 한국청소년연구소 #조국에 전쟁이 났을 때 참전하겠다는 청소년이 일본과 중국은 40%가 넘었는데 #한국은 10점1%에 불과하다고 발표했다 #우리 사회 #북한이 우리를 "아무 때나 마음 내키는 대로 뺨 한대 올려붙여도 괜찮을 만만한 상대"로 깔보고 함부로 도발을 하게 만든 배경 #영상속에 나오는 정신나간 짓은 민주당 #통합진보당 #전교조 #민노총 #한대련 #각종 좌파단체 #성서 한국 #종북 기독교인들이 앞장 #참으로 심각한 대한민국의 현실 #2016년 10월 15일 문재인은 트위터에 #나는 가장 좋은 전쟁보다 가장 나쁜 평화에 가치를 더 부여 합니다"라고 적었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2018년 4월 27일 김정은과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판문점 선언을 선포함으로써 평화협정을 맺는다 #남북의 평화는 얼마나 갈까? #김정은은 히틀러가 체임벌린을 종이 쪼가리로 유린 했듯이 #판문점 선언 종이 뒤로 핵개발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정황들이 포착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윈스턴 처칠 #비겁한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평화협정서 #독일 폴란드침공 <script data-ad-client="ca-pub-4162949345545299"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2020년 10월 9일 금요일

개천절 서울 곳곳서 차량시위.

개천절 서울 곳곳서 차량시위..


애국순찰팀, 조국·추미애 자택 인근서 경적 울려

보수단체 '애국순찰팀' 관계자들이 모는 차량 9대는 이날 오전 경기도청을 출발해 정오께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수감 중인 의왕시 서울구치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방역조치 등을 규탄했다.

방송차를 비롯한 차량 9대에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더불어민주당 윤미향 의원 등을 비판하는 내용의 종이가 붙었다.

이들은 이어 오후 2시께 우면산터널을 통해 서울 서초구로 진입했다.

경찰은 터널 입구 갓길에 시위차량을 잠시 세우고 탑승 인원과 번호판 등이 미리 신고된 내역과 일치하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행렬 앞뒤로는 경찰과 언론사 차량이 동행하기도 했다.

차량시위 참가자들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방배동 자택 부근을 지나 추미애 법무부 장관 자택이 있는 광진구 구의동의 한 아파트 앞까지 차량시위를 진행했다.

법무부 장관 사퇴 촉구하며 행진하는 차량들, 개천절인 3일 서울 강동구 굽은다리역 앞에서 보수단체 회원들이 추미애 법무부 장관 사퇴를 촉구하는 차량 행진을 하고 있다. 

진입이 막힌 조 전 장관 집 인근에는 시민들과 유튜버, 취재진 등 수십명이 모였다. 시위차량들은 연속해서 경적을 울리며 지나갔다.

조국 전 장관은 이날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집회의 자유는 헌법적 기본권이고 '애국순찰팀'도 이 기본권을 향유할 수 있다는 취지"라며 "공인으로서 법원의 이 판단을 감수한다.

단 동네 이웃분들께 죄송하게 됐다"라는 글을 올렸다.

 

새한국, 강동구서 차량시위…번화가서 체증 빚기도,,

다른 보수단체인 '새로운 한국을 위한 국민행동'(새한국)도 이날 오후 2∼4시 서울 강동구 굽은다리역에서 출발해 강동 공영차고지에 이르는 경로로 9대 규모의 '드라이브 스루' 차량시위에 나섰다.

참가자들은 추미애 법무부 장관 사퇴를 촉구하는 내용의 종이와 깃발을 차에 부착한 채 오후 2시께 강동구민회관 앞에 모여 출발했다. 강동구민회관 앞 도로는 취재차량과 시위차, 경찰차 등이 몰리면서 한때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다.

이 단체는 당초 시위 시작 전 기자회견을 할 계획이었으나 법원이 이를 제한해 인쇄된 성명서를 배포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차량시위에 동참한 김문수 전 경기지사는 "궁여지책으로 차량시위를 하긴 했지만, 제약이 너무 많아 시위라기보다는 고행에 가깝다"며 "여태 살면서 계엄령도 겪고 긴급조치도 겪어봤지만 제 인생 최고 계엄령 상태 같다"고 비판했다.

시위차량들과 동행한 경찰은 시위 참가자 중 1명이 운행 도중 창문을 내리자 경적을 울려 경고했다. 다만 통행 차량이 많은 번화가 일대에서는 시위차량 행렬 사이로 일반 차가 끼어들어도 제지하지 못해 혼란을 보이기도 했다.

한남대교 북단서 불법시위 차량 단속하는 경찰, 

개천절인 3일 서울 한남대교 북단에 마련된 합동검문소에서 경찰이 차량 통제를 하고 있다. 경찰은 법원에서 손을 들어준 10대 미만 차량 시위를 제외하고 사전에 통지되지 않은 10대 미만의 차량 시위에 대해 경비교통 합동검문소를 운영한다고 밝혔다.

 

경찰, 도심 진입 저지…진입로 90곳서 검문

경찰은 이날 시위차량들이 도심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시내 진입로 90곳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이동 차량을 점검했다.

또 경비경찰 21개 중대와 교통경찰·지역경찰 등 800여명을 동원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경찰은 차량시위 참가자들이 법원이 제시한 조건을 지키지 않을 경우 엄정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법원은 앞서 집회를 허용하면서 집회 참가자의 이름·연락처, 차량번호를 적은 목록을 작성해 미리 경찰에 내고, 집회 시작 전에 이를 확인받아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달았다.

▲ 차량 내 참가자 1인 탑승 ▲ 집회 중 창문을 열지 않고 구호 제창 금지 ▲ 집회 중 교통법규 준수 및 신고된 경로로 진행 ▲ 참가자 준수사항 각서 제출 등을 요구했다.

참가자들은 제3의 차량이 행진 대열에 진입하는 경우 경찰이 이를 제지하기 전까지 행진해서는 안 되며, 경찰이나 방역 당국의 조치에 따르지 않을 경우 해산될 수 있다.

 

#개천절 서울 곳곳서 차량시위 #도심 진입로 90곳 검문 #방송차 포함 '9대씩' 운행 #조국·추미애 자택까지 진행 #개천절인 3일 #서울 시내 곳곳에서 #드라이브 스루 #차량시위가 진행 #경찰 #보수단체들이 신고 #10대 미만의 차량시위에 모두 금지통고를 내렸으나 #이들 단체가 낸 집행정지 신청 2건에 대해 서울행정법원이 일부 인용 결정을 내리면서 집회 2건은 까다로운 조건 속에 '차량 9대' 규모로 허용됐다 #법원은 앞서 집회를 허용하면서 #집회 참가자의 이름·연락처, 차량번호를 적은 목록을 작성해 미리 경찰에 내고 #집회 시작 전에 이를 확인받아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달았다 #차량 내 참가자 1인 탑승 #집회 중 창문을 열지 않고 구호 제창 금지 #집회 중 교통법규 준수 #신고된 경로로 진행 #참가자 준수사항 각서 제출 등을 요구했다 #참가자들은 제3의 차량이 행진 대열에 진입하는 경우 #경찰이 이를 제지하기 전까지 행진해서는 안 되며, 경찰이나 방역 당국의 조치에 따르지 않을 경우 해산될 수 있다 #개천절인 3일 서울 한남대교 북단에 마련된 합동검문소에서 경찰이 차량 통제를 하고 있다 #경찰은 법원에서 손을 들어준 10대 미만 차량 시위를 제외하고 사전에 통지되지 않은 #10대 미만의 차량 시위에 대해 경비교통 합동검문소를 운영한다고 밝혔다 #경찰 #도심 진입 저지 #진입로 90곳서 검문 #경찰은 이날 시위차량들이 도심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시내 진입로 90곳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이동 차량을 점검했다 #경비경찰 21개 중대 #교통경찰·지역경찰 #800여명을 동원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경찰 #차량시위 #참가자들 #법원이 제시한 조건을 지키지 않을 경우 #엄정 대응한다는 방침 #애국순찰팀, 조국·추미애 자택 인근서 경적 울려 #보수단체 #애국순찰팀 #관계자들이 모는 #차량 9대 #이날 오전 경기도청을 출발해 정오께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수감 중인 의왕시 서울구치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방역조치 등을 규탄했다 #방송차를 비롯한 차량 9대 #추미애 법무부 장관 #더불어민주당 윤미향 의원 #비판하는 내용의 종이가 붙었다 #이들은 이어 오후 2시께 우면산터널을 통해 서울 서초구로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