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22일 금요일

강감찬 장군" (고구려무신).

조선 초기의 문신인 성현(成俔:1439~1504)이 쓴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강감찬이 몸집이 작고 귀도 조그마했다고 전한다. (정확하지 는않음 고구려때 사람과 글쓴이는 조선때 인물이니까) 관상이 실제 맞는지 어떤지는 모를 일이지만,고려시대의 명장. 거란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서북면 행영도통사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무찔렀으며 달아나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였다.거란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 이를 물리친 사람이 바로 강감찬이에요

1018년 거란은 소배압 장군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습니다. 이때 고려를 이끌었던 장군은 70세의 강감찬이었어요. 뛰어난 작전을 바탕으로 귀주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답니다. 전쟁 후 도읍 주위에 나성을 쌓고 국경에 천리 장성을 쌓았어요.거란의 왕은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어요. 하지만 고려군 총 사령관이었던 강조가 작전을 잘못 짜는 바람에 크게 패했지요. 이 바람에 고려는 도읍인 개경까지 무너졌어요. 이것이 거란의 2차 침입입니다.고려는 거란의 1차 침입 때 서희의 활약으로 강동 6주를 얻었어요.

거란은 강동 6주를 되돌려 받기 위한 핑계거리를 찾았어요. 이때 마침 고려에 정변이 일어났어요. 정변이란 합법적이지 않은 수단으로 생긴 정치상의 큰 변동을 말해요.당시 고려에서는 강조라는 장군이 제7대 목종을 강제로 물러나게 하고 제8대 현종을 왕의 자리에 앉힌 사건이 일어났어요.

거란은 ‘이웃 나라로서 예의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는 것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는 구실을 내새워 고려를 침략하기로 했어요.북이십일 아울북) 본관 금주(衿州:서울 관악구 봉천동), 초명 은천(殷川). 983년(성종 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조신(朝臣)들은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를 반대하고 하공진(河拱辰)으로 하여금 적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그 뒤 한림학사·승지·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서경유수·내사시랑평장사를 역임하였다. 

1018년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이듬해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군사 20만 8000명을 이끌고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 위에 쫓겨가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고 개선할 때 영파역(迎波驛)에서 왕의 영접을 받았으며, 검교태위(檢校太尉)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 식읍 3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 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그 이듬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가 

1030년 왕에게 청하여 성을 쌓고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이듬해 특진검교 태사시중 천수군개국후(天水郡開國侯)에 봉해졌다. 현종 묘정(廟庭)에 배향, 수태사 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 《구선집(求善集)》 등이 있다.강감찬의 관상만은 귀인상이었다. 어느 날 키 크고 잘생긴 선비를 관리 복장을 하게 하고 자신은 허름한 옷을 입고 그 뒤에 섰는데, 송나라 사신이 한눈에 강감찬을 알아봤다고 한다. 

송나라의 사신이 가난한 선비를 보고, “용모는 비록 크고 위엄이 있으나 귀에 성곽(城郭)이 없으니, 필연코 가난한 선비다.” 하고, 강감찬을 보고는 두 팔을 벌리고 엎드려 절하며, “염정성(廉貞星)이 오랫동안 중국에 나타나지 않더니, 이제 동방(東方)에 있습니다.” 라고 했다.

위인전을 읽었다면 유치원생도 들어봤을 이름이 귀주대첩의 신화를 만든 강감찬(姜邯贊, 948~1031)이다. 강감찬은 고려 정종과 현종 년간에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 중의 영웅으로 고구려의 을지문덕, 조선의 이순신과 더불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3대 영웅으로 회자되는 인물이다. 

강감찬이 막아낸 외적은 거란이다. 우여곡절 끝에 목종을 이어 현종이 즉위하자, 거란의 성종은 목종을 끌어내린 강조의 정변을 구실 삼아 여러 차례 고려를 침공하였고,1018년의 세 번째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인물이 강감찬이다. 이후 현종의 친조를 들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재차 침입한 거란의 소배압을 귀주에서 뛰어난 계략으로 물리침으로써 명장과 명신으로 추앙받는 삶을 살았다.

구국의 영웅 강감찬은 서기 948년 금주(衿州)에서 태어났다. 금주지역은 조선시대에 금천이라 불린 곳으로 현재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과 금천구 일대 등 관악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해당된다. 

강감찬의 5대조인 강여청(姜餘淸)이 신라시대부터 이 지역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고 전해지며, 부친인 강궁진(姜弓珍)이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우고 벽상공신이 되면서 명망가 집안으로 부상했다. 

강감찬의 탄생일화는 꽤 유명하다. [고려사] 열전에는 세상에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라고 전제하며 다음과 같은 소개 하고 있다.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어떤 사신(使臣)이 한밤중에 시흥군으로 들어 오다가 큰 별이 어떤 집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어 찾아보게 하니, 마침 그 집 부인이 사내를 낳았었다. 이 말을 듣고 사신이 마음속으로 신기하게 여기고 그 아이를 데려다가 길렀는데 그가 바로 강감찬으로 재상이었다고 전하며, 그가 재상이 된 후 송나라 사신이 그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가서 절하며 말하기를 “문곡성(文曲星)이 오래 보이지 않더니 여기 와서 있도다!”라고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강감찬이 다른 역사 인물과 다른 점은 역사기록은 물론이고 문헌 혹은 구비설화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는 점이다.강감찬이 지금의 평양인 서경 시장으로 갔을 때, 거란의 장군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왔다. 강감찬은 일흔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이끌고 거란군에 맞섰다. 

정면으로 맞서면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강감찬은 전투가 예상되는 곳의 지형을 관찰하고 거란군이 올 만한 길목을 살폈다. 적은 흥화진을 건너올 것이야. 그러니 강의 상류를 막아 적이 강을 건널 때 공격하자.” 강감찬은 장수들을 불러 쇠가죽을 엮도록 했다. 그리고 엮은 쇠가죽으로 강물을 막았다. 그리고 곳곳에 군사를 숨겨 두었다. 

쇠가죽으로 강을 막았기 때문에 강물은 평소보다 훨씬 적은 양이 흘렀다. 거란군이 흥화진에 이르렀을 때는 강의 수심이 얕아 보였다거란군이 안심을 하고 강을 건너는 순간, 강감찬은 둑을 무너뜨렸다. 그러자 거란군은 순식간에 물길에 휩쓸려 떠내려갔고, 많은 거란군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소배압은 살아남은 군사들을 정비해 개경 가까이까지 밀고 내려왔다. 강감찬도 포기하지 않고 전략을 세워 끈질기게 맞섰다. 

강감찬은 적군이 달아나는 길목에 숨어 있다가 총공격을 벌였다. 남은 적군들은 앞다투어 달아나기 시작해 귀주에 이르렀다. “한 놈도 남김없이 쳐라! 적군은 지칠 대로 지쳐 있다!” 
강감찬의 명령에 귀주 벌판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결국 소배압은 10만 대군 가운데 2,000여 명만 데리고 달아났다. 이것이 바로 귀주 대첩으로, 고구려 장군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과 조선 장군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더불어 우리 나라의 ‘3대 대첩’으로 불린다. 강감찬은 사후에 역사와 문학작품 외에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오랫동안 회자되었을 뿐만 아니라, 설화 속 주인공으로 신격화되고 민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역사 속 인물이 설화 속 주인공으로 환생한 것은 아마도 그의 공적이 인간의 힘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감찬의 탄생일화는 막 태어난 아이를 사신이 데리고 가서 키웠다는 앞뒤 안 맞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꾸며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지만, 이 전설의 흔적을 오늘날 낙성대에서 찾을 수 있다. 

강감찬을 가리켜 문곡성의 화신이라 했고, [용재총화]는 염정성의 화신이었다 전한다. 아마도 구전되는 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 내용상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일화에 등장하는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4번째 별로 문운(文運)을 주관한다. 반면에 북두칠성의 5번째 별인 염정성은 형살(刑殺)을 주관한다. 북두칠성은 일곱 별마다 도교적 색채의 이름이 있다. 국자의 맨 앞별에서부터 차례로 탐랑성∙거문성∙녹존성∙문곡성∙염정성∙무곡성∙파군성이라 한다. 

강감찬이 과거에 장원급제한 문신이면서도 거란을 물리친 무장의 재능을 갖추었기 때문에 두 별이 등장한 듯싶다. 중국에서는 문곡성의 화신을 판관 포청천으로 봤다. 그 문곡성이 중국에서 고려로 건너온 셈이니 그가 바로 강감찬 장군이다. 1010년(현종 1년) 강조가 목종을 죽이고 현종을 추대하는 정변이 일어나자, 이를 구실로 거란의 2차 침입이 시작되었다.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이 나주까지 피신하였지만, 현종의 친조를 조건으로 이듬해 1월에 거란군이 철수하였다. 이후 현종은 병을 핑계로 친조를 거절하였고, 결국 고려와 송, 거란 3국의 관계는 거란의 침략이 시작되었던 10여 년 전과 같이 다시 미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1014년(현종 5년) 9월 소적렬이 이끄는 거란군이 통주와 흥화진을 공격하는 것을 신호로 거란의 3차 침입이 시작되었다. 거란의 공격이 계속될 기미를 보이자 고려는 송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송나라는 국력이 쇠퇴한데다 그 무렵 거란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송나라의 도움을 받지 못한 가운데 고려는 1016년(현종 7년) 또다시 거란의 침입을 받았다. 이렇듯 쉴 새 없이 소모전을 벌이던 거란의 공격은 소합탁이 패배한 뒤로 약 1년 동안 잠잠하였다. 잠시 소강기를 갖게 되자 고려는 거란에 화해의 손짓을 보내는 척하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빈틈없는 준비에 온 힘을 기울였다.고려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사이 마침내 거란의 성종은 1018년 12월 소배압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게 했다. 

소배압은 앞서 1차 침입 때에 왔던 소손녕의 형으로 2차 침입 때에는 거란 성종을 따라 개경까지 왔던 인물이다. 거란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고려 역시 거란의 대규모 침략을 예상하고 20만 군대를 조성해 놓고 있었다. 

이 20만 군대를 지휘한 상원수가 바로 평장사 강감찬이었다.결국 이듬해 정월, 그는 개경에서 백여 리 떨어진 황해도 신은현(신계)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개경을 코앞에 둔 소배압은 기습부대들의 공격을 받고 전의를 상실, 철군하기 시작했다. 거란군이 회군을 시작하자 강감찬은 곳곳에 군사를 매복시켜 두었다가 이들을 급습했다. 퇴각하는 소배압이 외나무다리에서 강감찬과 만난 곳이 바로 ‘귀주’였다. 강감찬이 처음 병력을 이끌고 진을 친 곳은 영주(안주)였다. 그러나 곧 흥화진으로 나아가 기병 1만 2천을 복병으로 배치해 놓고 흥화진 앞을 흐르던 내를 소가죽으로 꿰어 막았다. 그런 다음 거란군이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일시에 물을 터트려 흘려보내고 복병으로 하여금 거란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흥화진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한 소배압은 퇴각하지 않고 개경으로 진군하였다. 이후에도 부원수 강민첨과 시랑 조원의 공격으로 꽤 많은 부하가 죽었음에도 소배압은 개경 입성을 고집했다. 처음 양 진영은 서로 팽팽하게 맞선 채 좀처럼 승부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가 개경에 내려갔던 김종현의 부대가 가세하고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거란군이 있는 북쪽으로 불기 시작하였다.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거란군은 북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고, 고려군은 도망치는 적을 맹렬히 추격하여 거의 몰살시켜 버렸다. 당시 살아서 본국으로 도망친 거란군은 단지 수천 명밖에 안 되었으며, 게다가 적장 소배압은 갑옷에 무기까지 버리고 죽기 살기로 압록강을 헤엄쳐 달아났다. 

소배압에게는 그야말로 한 맺힌 압록강이었다. 소배압이 패전하고 돌아오자 거란 성종은 진노하여 “네 낯가죽을 벗겨 죽여 버리겠다.”며 노발대발하였다. 소배압의 낯가죽이 실제로 벗겨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파직되어 귀양갔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다행히 목숨만은 건진 듯하다.거란군은 눈 깜짝할 사이에 압록강 건너 평안북도의 흥화진을 포위했어요. 그러자 강감찬은 흥화진 강물을 막았다가 터트려 거란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어요. 게다가 돌아가는 거란군을 공격하여 귀주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흥화진 전투와 귀주 대첩이에요.강감찬의 지휘로 거란군의 침략야욕을 분쇄해 버린 이 날의 전투는 우리 역사상 귀주대첩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거란역사에서는 가장 비참한 패전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거란패장 소배압이 자신의 낯가죽을 걱정하는 사이, 승장 강감찬은 3군과 포로를 이끌고 당당히 개선했다. 강감찬이 개경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현종은 친히 영파역으로 나가서 그를 맞이하고 금화 8가지를 강감찬에게 꽂아 주었다. 이날을 기념하여 영파역은 흥의역으로 개칭되고 이곳의 역리는 지방관리와 같은 관대(冠帶)를 받았다.위기에서 구한 영웅으로 강감찬은 수많은 설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가 일궈낸 귀주대첩이야말로 신화라 불릴 만 한 대사건이기 때문이다. 

강감찬과 관련한 설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호환(虎患)을 없앤 이야기다.국가를 위해 헌신한 강감찬은 이후 연로함을 이유로 여러 차례에 걸쳐 은퇴를 청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종이 지팡이까지 하사하며 만류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1030년에는 벼슬이 문하시중에까지 올랐으며, 1032년(덕종 원년)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84세였다. 

강감찬이 죽자 덕종은 3일간 조회를 멈추고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르게 했다.고려의 강감찬이 현종 때 판관이 되었는데, 한양에 범이 많아 백성의 걱정이 많았다. 

강감찬이 편지 한 장을 적어서 아전에게 주며 말하기를, “북문 밖 북동에 가면 늙은 중이 바위 위에 앉아 있을 것이니, 네가 불러서 데리고 오너라.”고 하였다. 아전이 그의 말대로 하니 과연 중이 있었다. 아전을 따라온 중을 보고 강감찬이 꾸짖으며 “너는 빨리 무리를 데리고 멀리 가거라.” 하니, 주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이어 강감찬이 본색을 드러내라고 명령하니, 중이 크게 울부짖고는 한 마리의 큰 호랑이로 변하고 사라졌는데, 이후로 한양에 호환이 사라졌다고 한다. 

귀주대첩으로 거란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다 준 강감찬은 전란 이후에는 개성 외곽에 성곽을 쌓을 것을 주장하는 등 국방에 힘썼다. 

낙향한 뒤에는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과 [구선집(求善集)] 등 저술에도 힘써 몇 권의 저서도 남겼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강감찬의 활약 이후, 거란과 고려는 외교적 평화 관계가 만들어졌어요. 고려가 거란을 물리친 덕분이었고, 강감찬 장군은 거란과의 전쟁에 승리한 공으로 최고 벼슬인 문하시중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겉보기에 강감찬은 매우 보잘것 없었다, 전해지고있으며. 의복도 검소했고 겉치장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전해지며 나라일을 할 때는 앞서서 열심히 다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을 모으던 여느 관리들과 달리 자신의 토지마저 부하 가족에게 나누어 줄 정도였다. 

워낙 청렴 결백하여 많은 백성들이 따랐던 강감찬은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자연과 벗삼아 책을 읽으면서 조용히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

대관령 (4령) 3대목장,

대관령 (4령)  3대목장,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하늘목장." 강원도 의4령 (진부령.미시령.한계령.대관령). 하늘과 맞닿은 초원이 매력적인 풍경이 아름답다. 평창에는 우리나라 3대목장으로 손꼽히는 하늘목장, 삼양목장, 양떼목장 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하늘목장은 제일 늦게 일반에 오픈되었다. 

1974년부터 조성되어 지난 2014년 9월에 개방되어 방목을 통한 목장으로 운영되고 있다.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해발 800미터가 넘는 고원지대에 초원을 지닌 목장은 드물다. 하늘과 가장 가깝고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하늘목장의 입구. 강원도 가볼만한곳 하늘목장은 성인기준 6,000원의 입장료가 있다. 

트랙터 마차 이용권도 성인기준 1인 6,000원이다. 중앙역에서 전망대까지 트랙터 마차의 왕복 소요시간은 약 50분이고 산책로를 이용할시에는 2시간 30분정도이다. 이외에도 승마체험과 양떼체험료가 있다, 

하늘목장은 목장체험존 11곳과 하늘승마장 관련 4곳, 가축의 방목지가 10여곳, 축사단지 2곳, 숲속쉼터 4곳, 하늘속 초원관련 6곳으로 구성되어 월드컵경기장 500개 넓이를 자랑한다. 트랙터 마차 타는곳은 중앙역이다. 휴일이라 그런지 가족동반이 많았고 가끔친구나 연인들이 보인다. 

방목지와 축사단지를 지나 올라가다가 영화 웰컴투 동막골의 촬영지로 사용된 장소에 멧돼지 동상과 미군기의 추락장소로 꾸민  웰컴투 동막골 공원을 지난다. 대관령 하늘목장에는 이십기가 넘는 풍력발전기가 있고 여기에서 생산된 전기는 강릉으로 보내진다. 마음과 벅찬 감동의 시간이 머문다. 대자연의 품에 안긴 느낌이 편안하다.

대관령의 바람과 맑은 공기를 맡으며 푸른 초원의 풀을 마음껏 먹어대는 녀석이 멋지다. 방목을 통해 자연속에서 자라나고 우유를 생산하는 이녀석들을 한참 동안이나 본다.동반한 가족들도 함께초원과 목장을 즐기는 모습이 좋다. 

방목지마다 가축들이 있는것은 아니다. 우리에 가둔 것이 아니라서 가축들이 있는것 이 보기가정말좋다. 수시로 방목지를 옮겨 가는지라 멀리서 보는 경우도 있고 바로 옆에서 보기도 한다. 
홀스타인 젖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으며 이동도해가며 풀을뜯는다. 유자적하며 풀을 뜯는다. 목동이라도 되고 싶다는 생각이 찰나지간에 스친다. 

초원이 펼쳐진 하늘목장 을 가로지르는 고압선 철탑이 아쉽긴 하지만 대관령의 맑은 바람과 푸른 초원을 마음껏 호흡한다. 방목지에서는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들이 아랑곳하지 않고 먹이만을 먹는다. 
강원도 가볼만한곳 대관령 하늘목장 주말나들이, 가족 나들이에도 좋고  데이트코스로도강추 하고 싶은 가을 여행지이다. 

강원도에서 만난 하늘과 초원이 만나는곳 하늘목장에서 확인해보자!  대관령 숲속에동물농장은 실내*실외 동물체험장이라 비올때는 실내에서 동물체험,체험장마다 도와주시는 분이 계시니 궁금한건 물어보고 하시면 도며 숲속에동물농장 입장하면 보이는 기린이랑 마차! 여기랑 그네의자 기타 야외에 이쁜 포토존이 많이 마련되어 있으니 가족사진도 찍을수있다. 

승마체험장 옆 토끼체험장(B동)에 가는 길에 만난 다람쥐들~^^ 동물체험 싫어하는 아이들은 없는거 같아요! 워낙 반응이 좋으니 동물체험만 몇번을 가는지. .대관령 숲속에동물농장은 알펜시아랑 용평리조트에서도 가깝고 강릉쪽 다녀오다가 들리기도 좋고~ 전 아침 일찍 출발해서 봉평 찍고, 숲속에 동물농장으로~야외에는 돼지, 염소, 양 등이 놀고 있어요, 

동물체험장에는 토끼, 염소, 스컹크, 사슴, 말, 개, 타조, 펜더마우스, 당나귀 등 왠만한 동물은 다 있다, 먼저토끼 우리에 들어가서 장갑낀 손으로 먹이 주기 시작,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먹이주기에 어미 돼지랑 양, 토끼, 새, 염소 등이 있어서 한참 먹이주기 합니다. 엄마토끼랑 아기토끼 함께 있는 우리에서 아기토끼라 어찌나 귀엽던지~ 아이들도 아기토끼 귀엽다고 잘 놀고들 한다.

알록달록 새랑 꿀꿀 돼지들도 먹이 엄청 잘먹는다. 바가지도 먹을 기세. 양들은 순하니까 장갑낀 손으로 주면 냠냠 잘먹는다   옆동으로 이동해서 거북이와 아기거북이 보고, 새장에 손 넣어서 먹이주기도 하구~ 귀여운 기니피그랑 고슴도치도 있다, 고슴도치는 반드시 장갑끼고 만져보기! 쪼삣쪼삣 많은가시들...나무숲 근처에 그네가 있어서 그네 타고 놀고~ 좀 쌀쌀하긴 하지만 청정지역 이라서그런지 말은공기 가넘무들조아들한다,

강원도 고성군 간성면() 흘리()에 있는 해발 1,052m의 스키장. 1984년 10월에 확장 및 포장공사가 완료되었다. 마산봉()에서 서쪽으로 기울어진 길이 2,580m의 2개 슬로프가 1971년 대한 스키 협회와 현지 주민들의 협력으로 개발된 표고차 450m의 국제 코스의 후보지로 시즌은 3월 말까지이다. 

슬로프가 서쪽으로 기울어져 바람을 막아주고, 적설량이 많아 국내 스키장 중 가장 자연 조건이 좋은 곳으로 1971년 3월 제23회 전국 스키 선수권 대회를 개최한 것이 최초의 정규 경기회이다. 인공 시설 및 근대적 장비는 미비한 편이다. 

높이는 520m이다. 
남쪽의 미시령()ㆍ한계령()ㆍ대관령() 등과 함께 태백산맥 동서간의 교통에 큰 도움이 된다. 이 지역은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흘리 일대의 태백산맥 설악권과 금강권에 속하며, 금강산 1만 2천봉의 남한 제2봉인 해발 1,052m의 마산봉을 주봉으로 하는 진부령 고원분지에 리조트가 위치하고 있다. 

주변지역은 춥고 눈이 많이 내리는 기후조건을 이용하여 명태를 건조시키는 황태덕장이 다수 위치하고 있다. 이 고개에 있었던 진부리라는 마을은 마을터만 남아 있으며, 여기에 향로봉지구전적비가 세워져 있고, 북쪽에는 설화희생순국충혼비()가 세워져 있다. 

2006년 미시령을 관통하는 4차선 터널이 건설되면서 진부령의 교통상황은 비교적 한가해졌으나 아직도 고성군 간성읍을 거쳐 최북단인 대진 방향으로 가는 교통량이 많은 편이다. 

진부령은 남한 쪽 백두대간 등산로의 최북단으로 마산령을 거쳐 대간령을 지나 신선봉을 거쳐 미시령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어 최근 등산객들의 발걸음이 잦은 지역이다. 백두대간의 일부인 미시령부터 신선봉까지는 설악산국립공원으로 편입되었다. 

가을단풍으로도 유명하며, 이곳을 찬미하여 부르는 「진부령 아가씨」라는 노래도 있다.  부근의 흘리()에는 전국 제일의 자연조건을 갖춘 진부령 알프스 스키장이 있다. 이곳은 다른 관광지들과 함께 설악권의 핵심관광지를 이룬다. 인제군에서 고성군으로 넘어가려면 미시령(767m)을 넘거나 진부령 (529m)을 넘어야 한다. 

인제군 용대삼거리에서 46번 국도를 타고 용대자연휴양림 입구를 지나 북으로 올라가면 알프스리조트 입구와 진부령고개가 나온다. 

진부령 마을관리휴양지는 46호선 국도변에 위치한다. 향로봉 산맥인 칠절봉과 둥글봉에서 발원한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으로 관광객을 사로잡고 있다. 

여행객들은 이곳 마을에서 생산되는 산채, 옥수수, 감자, 약초, 토종꿀 등을 산지에서 직접 구입할 수 있으며, 토종닭을 비롯한 토속음식이 관광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새이령(샛령, 대간령)은 이름처럼 곱고 순한 옛길입니다. 강원 북부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는 고개로, 과거에는 진부령과 미시령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고개였습니다. 이 고개를 넘어 다녔던 한 주민은 “진부령은 좀 지루하고, 미시령은 짧지만 까탈스럽고, 한계령은 경관이야 수려하지만 험악스럽고, 구룡령은 장쾌하지만 뭔가 무거운 느낌이 드는 반면, 새이령은 너무도 부드러운 길”이라고 했습니다. 

강원 북부의 동서를 연결하는 고개는 한계령, 미시령, 진부령이 대표적이다. 모두 험준한 백두대간 고개다. 동서 고개의 통로가 차량으로 넘을 정도로 관광도로화 되고 수월해진 것은 1971년 12월 한계령 길이 포장되면서부터다. 

새이령의 출발점은 미시령 구도로에 자리한 박달나무쉼터다. 이곳을 들머리로 마장터를 거쳐 새이령 고갯마루에서 백두대간에 올라붙고, 병풍바위봉에 올라 설악의 조망을 즐기고, 도원리로 내려간다. 

박달나무쉼터는 미시령과 진부령이 갈리는 용대삼거리에서 미시령 방향으로 1.5㎞쯤 떨어진 지점에 있다. 자그마한 박달나무쉼터는 약초 전문집이다. 

주인장은 설악산에서 캔 약초를 팔며 새이령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미시령은 조선시대 성종 때 도로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워낙 지형이 험해 폐쇄와 개통을 반복해 왔던 곳이고, 진부령 역시 이때까지 비포장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한계령이 각광받게 된 것은 당연하다. 그로부터 진부령이 포장된 것은 13년 뒤인 1980년대 중반이고 이 중반이 넘도록 미시령은 또한 비포장의 세월을 보냈다. 적어도 이 한계령 길이 개통되기 전에는 동서간 이어주는 가장 쉽고 빠른 길은 새이령밖에 없었다. 

졸졸 흐르는 자그마한 계곡 옆으로 호젓한 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이젠 좀 길이 험하려니 해도 길은 요지부동 순둥이다. 계곡을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번갈아가며 7~8번 건넜을까 작은 고개 같은 곳을 넘는다. 고개라 하지만 길이 얼마나 순한지 주변을 잘 관찰하지 않으면 고개인 줄 알 수 없다. 이곳이 작은새이령(소간령)이다. 작은새이령을 넘으면 울창한 쭉쭉 뻗은 낙엽송 길을 지나는데, 활엽수에서 침엽수로 바뀌며 이국적 정취를 물씬 풍긴다. 나무 사이로 보랏빛 산부추와 투구꽃이 다정하게 피었다. 

박달나무쉼터 오른쪽으로 가면 넓은 공터를 만난다. 예전 군부대 유격훈련장이다. 훈련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개울을 건너는 것이 키포인트. 자세히 계곡 건너편을 보면 길이 나 있는 걸 알 수 있다.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계곡에 내려앉은 가을빛을 보는 맛이 삼삼하다. 개울을 건너면 본격적으로 새이령 옛길이 시작되며 군부대 훈련장과 백두대간 신선봉~미시령 통제구역을 알리는 안내판이 차례로 나온다. 훈련장은 철수했고, 새이령은 통제구역이 아니므로 안내판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낙엽송 지대를 지나면 거의 평지가 이어진다. 마치 거대한 고원 위에 올라선 기분이다. 갈림길에서 새이령이 아닌 그대로 직진하면 유명한 마장터가 나온다. 마장터는 마방과 주막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장터에는 심마니이분들이 살고 있다. 곡을 따르다 징검다리를 건너면 드디어 오르막이 시작된다. 

경사가 그다지 세지 않다. 옛길 특유의 굽이굽이 길을 타고 오르면 어느새 새이령 고갯마루다. 자그마한 공터와 돌탑이 서 있는 정상이 왠지 정감 넘친다. 옛사람들의 자취가 서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대편으로 내"옛날에는 이곳에 없는 게 없었다하고. 

함지박공장에 말발굽 파는 곳까지 있었다고전해집니다. 바닷가에서 소금이나 생선을 지고 다니는 상인들이 수시로 넘어다니니까 이 골짝 사람들은 장 보러 나갈 일이 없었어요. 원님도 이 길로 넘어다녀 고갯마루가 원터였었고. 오죽하면 저 위 웃마장터에 주막집까지?.” 한동안 걸어가면 고성 도원리 마을이 나오고, 오른쪽은 통제구역인 신선봉, 왼쪽은 마산봉 방향이다. 

노인에 따르면 그가 사는 이곳은 아랫마장터, 새이령 고개 아래는 웃마장터라 불렀다. 
정노인은 짐을 꾸리더니 마을로 내려간다. 느타리버섯을 팔러 창암마을로 간다고 한다. 정노인과 인사를 나누고 다시 갈림길로 돌아와 좀 넓어진 계곡을 따른다. 물이 굽이굽이 돈다고 해서 물굽이계곡이다. 

도원리로 내려오기 전에 설악산 감상을 빼놓을 수 없다. 급경사 오르막을 15분쯤 오르면 너덜바위의 독특한 풍경을 연출하는 너덜바위봉에 이른다. 여기서 바라보는 신선봉과 설악산 서북주릉은 한마디로 명품이다. 

신선봉은 금강산 1만2천 봉 중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한 봉우리다. 실컷 조망을 즐기고 다시 새이령 고갯마루에 이르고, 여기서 임도를 타고 도원리로 내려오면 된다. .한계령 전망대는 도시 사람들이 오 면 탄성을 금치 못하는 확 트인 풍경을 선사합니다. 할리 라이딩 부대들이 주차장을 정복하고 등산 시작을 거의 낮 12시쯤 시작했기 때문에 당일치기로 대청봉을 찍고 하산을 하려면 서둘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