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암 , 菩提庵.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尙州面) 상주리 금산 남쪽 봉우리에 있는 절.
종파
대한불교조계종
창건시기
683년(신문왕 3)
창건자
원효
소재지
경남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683년(신문왕 3) 원효가 이곳에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 산 이름을 보광산, 초암의 이름을 보광사라 지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건물로 보광전, 간성각, 산신각, 범종각, 요사채 등이 있고, 문화재로는 보리암전 삼층석탑(경남유형문화재 74)이 있다.
이외에 큰 대나무 조각을 배경으로 좌정하고 있는 향나무 관세음보살상이 있으며 그 왼쪽에는 남순동자, 오른쪽에는 해상용왕이 있다.
일설에 따르면 이 관세음보살상은 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이 인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조선왕조를 연 것에 감사하는 뜻에서 1660년(현종 1) 왕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산 이름을 금산, 절 이름을 보리암이라고 바꾸었다.
1901년과 1954년에 중수하였고, 1969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전국의 3대 기도처의 하나이며 양양 낙산사 홍련암(강원문화재자료 36), 강화군 보문사와 함께 한국 3대 관세음보살 성지로 꼽힌다.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금산에 있는 사찰로 683년(신문왕 3)에 원효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조선왕조를 연 것에 감사하여 1660년(현종 1)에 왕실의 원당으로 삼았다.
전국의 3대 기도처의 하나이며 양양 낙산사 홍련암, 강화군 석모도 보문사와 함께 한국 3대 관세음보살 성지로 꼽힌다.
보리암에서 내려다보는 남해의 절경때문에 관광자원으로도 매우 훌륭한 사찰이다.
남해 보리암 해수관음상
남해 보리암 종각
남해 보리암 존광전
남해 보리암 만불전
남해 보리암 3층석탑
남해 보리암
남해 보리암 해수관음상 남해 보리암의 해수관음상이다.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尙州面) 상주리 금산 남쪽 봉우리에 있는 절
전국의 3대 기도처의 하나이며 양양 낙산사 홍련암(강원문화재자료 36), 강화군 보문사와 함께 한국 3대 관세음보살 성지로 꼽힌다.
하동 동쪽에 자리한 남해(南海)는 본래 바다 가운데 있던 섬이었다.
신라 신문왕 때 처음으로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남해현은 바다 복판에 있는 섬으로서 진도(珍島), 거제(巨濟)와 함께 솔밭처럼 우뚝하다.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번성하여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적지 아니하다. ······
이 고을은 하늘 남쪽에 있는 훌륭한 지역으로서, 해산(海産)의 풍족함과 토산(土産)의 풍부함이 나라 쓰임에 필수가 된다.
진도와 거제를 부흥하는 것도 또한 기대할 수 있다.
정이오의 기문에 위와 같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남해는 뭍에서나 바다에서나 모든 물산이 풍부해서 왜구의 침략만 없다면 사람들이 살기에 모자람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해로 건너가는 노량 바다에서 임진왜란의 마지막 싸움이 벌어진 것은 1598년이었다.
11월 19일 충무공 이순신은 노량해전 에 나아가 손수 북채를 쥐고 북을 두드려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그날 그가 이끌었던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함대 150여 척은 왜선 500여 척을 불사르거나 바다 밑으로 가라앉혔다.
이순신은 왜구의 유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는데, 그때 나이 54세였다.
전투가 끝난 뒤 이순신의 시신은 노량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관음포에 며칠 동안 모셔졌다가 고향인 충청도 아산으로 옮겨질 때까지 3개월가량 노량나루(지금의 충렬사)에 가매장되었다.
그때부터 관음포는 ‘이(李) 충무공의 목숨이 이곳에서 떨어졌다’ 하여 이락포(李落浦)라 불렸고, 그 뒷산도 이락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의 시신이 묻혔던 자리에 빈 봉분을 만들고 충렬사를 지었으며, 1973년 사적 제233호로 지정하였다.
남해는 고려 때부터 유배지로 알려진 곳이다.
조선 초기에 안평대군, 한석봉, 양사언과 함께 4대 서예가로 알려진 자암(自菴) 김구는 기묘사화로 인해 유배를 와서 경기체가인 「화전별곡(花田別曲)」을 남겼고(화전은 남해의 옛 이름), 조선 영조 때 사람인 유의양은 1년 남짓한 유배 기간에 한글로 남해의 풍물을 묘사한 『남해견문록(南海見聞錄)』을 남겼다.
무학산과 마산
남해에서 1킬로미터쯤 배를 타고 건너면 닿는 자그마한 섬 노도로 유배를 왔던 사람이 서포 김만중이었다.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증손자이자 김집의 손자인 그는 아버지 김익겸이 병자호란 당시 김상용을 따라 강화도에서 순절하여 유복자로 태어났다.
1665년(현종 6)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김만중은 이듬해 정언(正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고, 헌납(獻納), 사서(司書) 등을 거쳤다.
1679년(숙종 5)에 다시 등용되어 대제학,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1687년(숙종 13) 경연에서 장숙의(張淑儀) 일가를 둘러싼 언사(言事)로 인해 선천에 유배되었고, 이때 『서포만필』을 지었다.
김만중은 “사람의 마음은 입에서 나오면 말이 되고, 말이 절주(節奏, 리듬)를 가지면 문학 작품이 된다”라고 하면서 조선 사대부들의 중국 문화 추종과 한문학 모방을 질타하였다.
우리나라 시문은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배우므로 설사 십분 비슷하다고 해도 그것은 앵무새가 사람 말을 하는 짓이다.
일반 백성이 사는 거리에서 나무하는 아이나 물 긷는 아낙네가 “아아” 하면서 서로 화답하는 노래는 비록 천박하다고 하지만, 만일 진실과 거짓을 따진다면 참으로 학사, 대부의 이른바 시(詩)니, 부(賦)니 하는 것들과 함께 논할 바가 아니다.
그는 이듬해에 왕자(후에 경종)의 탄생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몰락하게 되자 왕을 모욕했다는 죄로 남해의 절도에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그가 이렇게 유배 길에 자주 오른 것은 그의 집안이 서인에 속하였기 때문에 치열한 당쟁을 피할 수 없어서였다.
현종 초에 시작된 예송논쟁에 뒤이어 경신환국, 기사환국 등 정치권에 변동이 있을 때마다 그 영향을 심하게 받았다.
김만중은 많은 시문과 잡록 그리고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의 소설을 지었다.
『서포만필』에서는 한시보다 우리말로 쓰인 작품의 가치를 높이 인정하여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들면서 우리나라의 참된 글은 오직 이것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노도와 가까운 양아리의 두모와 두모리 사이에 있는 바위를 서불제라고 부른다.
앞면에 화상문자(畵象文字, 한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문자)로 글을 새겨놓았는데, 전설에 진시황에게서 삼신산 불로초를 구하라는 명령을 받은 서복(서불)이 동남동녀(童男童女) 5백 명을 거느리고 가던 중 이곳 명지를 지나다가 자신의 자취를 후세에 알리고자 기록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초대 천황인 진무(神武)가 되었다고 한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화상문자라고 하며, 고고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73년에 남해군 설천면 모량리와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노량해협을 잇는 남해대교가 완공되면서 남해군은 섬 아닌 섬이 되었다.
남해군에 자리한 금산에 보리암이 있다.
푸른 바다와 수많은 돌들이 섞이고 섞여 조화를 이루는 금산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사천시에 속한 삼천포에 이른다.
3번 국도가 시작되는 삼천포는 사람들에게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지다’라는 속담으로 더 알려졌지만, 한번 가본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에 빠져 다시 가고 또 가는 곳이다.
통영대전고속도로가 개통된 뒤 싱싱한 회를 맛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줄을 잇는 삼천포는 남해를 잇는 다리의 개통으로 더욱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형승」조에 “남쪽 끝의 요충이다. 굽어보면 기름진 들녘이 펼쳐지며 여러 산봉우리가 아름답다.
이구산(尼邱山)이 우뚝 솟아 있으며 사수(泗水)가 가로질러 흐른다.
와룡산이 웅장하게 서려 있고 드넓은 바다가 아득히 펼쳐진다”라고 쓰여 있는 사천은 와룡산, 봉암산, 향노봉 등의 산들이 연달아 있고 향노봉 자락에 운흥사라는 옛 절을 안고 있다.
사천군 곤명면 조장리에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 가던 주민 101명이 미군의 오폭과 총격으로 숨지거나 다친 역사적 상처가 남아 있다.
이곳 사천시 곤양면 용산리 와룡산 자락에 다솔사(多率寺)라는 큰 절이 있다.
소나무가 많은 곳이라고 여기기 쉬운 다솔사는 한자 이름대로라면 ‘많은 군사를 거느린다’는 뜻이다.
소나무 숲과 측백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진 다솔사로 가는 길은 한적하지만,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는 길처럼 운치가 있다.
이 절은 신라 지증왕 4년(503)에 인도에서 온 연기조사가 창건한 뒤 영악사라고 하였는데, 성덕왕 5년에 다솔사라 고쳤고, 문무왕 16년(676)에 의상스님이 영봉사라고 고쳤다가,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가 다시 다솔사라고 고쳤다.
1326년에 나옹스님이 중수하였고, 조선 초기에 영일, 효익 스님이 중수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숙종 때 복원하였다.
다솔사
사천시 곤양면 용산리 와룡산 자락에 다솔사(多率寺)라는 큰 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