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0일 수요일

최치원 [崔致遠]

최치원

[]

신라의 학자로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고운()·해운()이다. 

최치원초상 / 채용신
채용신, 〈최치원초상〉, 1924년, 비단에 채색, 123×73㎝, 무성서원. 통일신라시대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의 초상화이다. 
복식은 중국 당나라 형식으로 머리에는 복두를 쓰고 붉은색 단령을 입고 있으며 가부좌를 하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손에 불자를 들고 있는 모습이나 의자 아래 신발이 놓여 있는 모습은 불교의 승려 초상화 형식을 따른 것이다.
이칭별칭 고운, , 해운, 
유형인물
시대고대/남북국/통일신라
출생 - 사망857년 ~ 미상
성격학자
성별
본관경주()
저서(작품)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사산비명
대표관직(경력)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 부성군 태수, 아찬

 최치원 [崔致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는 고운(), 해운() 또는 해부()이다. 
고려 현종() 때인 1023년(현종 14년)에 내사령()으로 추증되었으며, 문묘()에 배향되며 ‘문창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신라 6부의 하나인 ‘사량부(, 지금의 경주)’에서 6두품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오늘날 경주() 최씨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본피부()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 47대 헌안왕(, 재위 857~861) 원년인 857년에 태어났으며, 부친은 38대 원성왕(, 재위 785~798) 때에 숭복사() 창건에 참여했다고 전해지는 견일()이다. 

48대 경문왕(, 재위 861~875) 때인 868년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 나라로 유학을 떠나, 874년 예부시랑() 배찬()이 주관한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2년 동안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뤄양[] 등지를 떠돌면서 시작()에 몰두하여 5수() 1권()으로 된 <사시금체부()>, 100수 1권으로 된 <오언칠언금체시()>, 30수 1권으로 된 <잡시부()> 등의 시문집을 지었으나,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 뒤 876년 선주() 율수현(, 지금의  ) 현위()로 관직에 올랐으며, 이 무렵 1부() 5권으로 된 <중산복궤집()>을 저술하였다.

당시 당()은 심각한 기근으로 인해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 875년부터는 왕선지(), 황소() 등이 유민을 모아 산둥성[], 허난성[], 안후이성[] 등지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877년 겨울 관직에서 물러난 최치원은 양양()에서 이위()의 문객()이 되었다가, 회남절도사(使)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이 되었다. 

고변이 황소()의 반군을 토벌하기 위한 제도행영병마도통()이 되자, 
그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4년 동안 표()ㆍ서계()ㆍ격문() 등의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이 무렵 최치원이 쓴 글은 1만여 편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특히 ‘토황소격문()’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최치원은 879년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殿)으로 도통순관()의 직위에 올랐으며, 포상으로 비은어대()를 받았다. 

882년에는 자금어대()를 받았다. 
최치원()은 당 나라에서 17년 동안 머무르며 나은(, 833~909) 등의 문인들과 친교를 맺으며 문명()을 떨쳤다. 

<당서()> ‘예문지()’에도 <사륙집()>과 <계원필경()> 등 그가 저술한 책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885년(헌강왕 11년), 최치원은 당 희종(, 재위 873~888)의 조서를 가지고 신라로 귀국했으며, 신라의 49대 헌강왕(, 재위 875~886)은 그를 당에 보내는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는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으로 등용하였다. 

귀국한 이듬해에 왕의 명령으로 ‘대숭복사비문()’ 등을 썼고, 당 나라에서 썼던 글들을 28권의 문집으로 정리하여 왕에게 바쳤다. 
이 가운데 <중산복궤집()> 등 8권은 전해지지 않으며, <계원필경()> 20권만 전해지고 있다. 

886년 헌강왕이 죽은 뒤에는 외직()으로 물러나 태산군(, 지금의 전라북도 태인), 천령군(,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 부성군(,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의 태수()를 지냈다. 
893년에는 견당사(使)로 임명되었으나,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떠나지 못했다.

당시 신라는 지방에서 호족의 세력이 커지면서 왕실과 조정의 권위가 약화되었으며, 중앙 정부는 주()와 군()에서 공부()도 제대로 거두지 못해 심각한 재정 위기를 겪고 있었다. 

게다가 889년에는 진성여왕(, 재위 887~897)이 공부()의 납부를 독촉하면서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조정의 힘은 수도인 서라벌 부근에만 한정될 정도로 정치적 위기가 심화되었다. 

최치원은 894년 진성여왕에게 10여 조의 시무책()을 제시하였고, 진성여왕은 그를 6두품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으로 임명하였다. 
최치원의 개혁은 중앙 귀족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다.



진성여왕이 물러나고 효공왕(, 재위 897~912)이 즉위한 뒤, 최치원은 관직에서 물러나 각지를 유랑하였다. 
만년에는 가야산()의 해인사()에 머물렀다.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쓸 때까지는 생존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지만,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때문에 정확한 사망 날짜는 확인되지 않으며, 방랑하다가 죽었다거나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그는 경주의 남산(), 합천 매화산의 청량사(), 하동의 쌍계사() 등을 즐겨 찾았던 것으로 전해지며, 부산의 해운대()라는 지명도 최치원의 자()인 ‘해운()’에서 비롯되었다.



남북국 시대 부산 지역의 해운대()를 명명한 신라의 학자 겸 문장가.


본관은 경주(). 자는 고운() 또는 해운(). 
아버지는 숭복사의 전신인 곡사()의 중창 사업에 참여한 최견일()이고, 형은 해인사 승려 현준()이다. 
당제()는 헌강왕() 대 견당 사절단의 녹사()였던 최서원()이다.


최치원()[856~?]은 경주 사량부()에서 태어나 12살 때인 경문왕 8년(868) 당나라에 유학하여 국자감()에서 공부하였다. 

18세 때인 874년 외국인 대상의 과거 시험인 빈공과()에 급제하여 선주() 율수현()[지금의 강소성 율수현]의 현위()가 되었다. 

황소()의 난[875~884]이 일어나자 회남 절도사 고병()의 종사관으로 나가 「격황소서()」[토황소 격문()]을 지어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29세 때인 헌강왕 11년(885)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 감사() 벼슬을 받았다. 

왕실 귀족들의 경계와 질시로 중앙 관직에서 물러나 대산군()[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천령군()[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부성군()[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시] 태수 등 외직을 전전하다가 하정사(使)로서 당나라에 한 차례 다녀왔다. 

진성 여왕 8년(894) 어지러운 정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임금에게 「시무 10조()」를 올려 채택되고, 아찬 관직을 받았으나 나라 안팎의 사정으로 개혁이 무산되었다.

최치원은 당에서 익힌 학술과 식견을 바탕으로 큰 뜻을 펼치려 했으나 번번이 좌절되자,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전국의 산천을 노닐며 책 읽고 시 짓는 일로 소일하였다. 

최치원이 전국을 방랑할 때 부산의 바닷가에 잠시 머물렀는데, 이때 동백섬 인근 바위에 자신의 자()를 따서 ‘’라는 글씨를 새겼다. 
최치원 석각
해운대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최치원 한시비 「가야산 홍류동」, 「양산 임경대」

최치원 한시비 「비오는 가을 밤에」, 「생각을 붙여」

최치원 한시비 「봄새벽」


당나라 국자감에서 공부하여 유학과 사장학()에 뛰어났고, 불교와 도교, 풍수지리설에도 이해가 깊었다. 

최치원이 지은 책은 『계원필경()』, 『중산 복궤집()』, 『금체시()』, 『오언 칠언 금체시()』, 『잡시부()』, 『사륙집()』, 『제왕 연대력()』, 『부석존자전()』, 『법장 화상전()』, 『석이정전()』, 『석순응전()』 등이 있었다고 한다. 


청룡대 각석 최치원 친필
청룡대 각석 최치원 친필경상남도 창원시 가주동에 있는 청룡대 각석에 새겨진 최치원 친필이다. 
자연 암석을 다듬은 다음, '청룡대치원서'라는 글씨를 새겼다.


일명 사산비명()으로 불리는 「성주사 낭혜 화상 백월보광탑비()」, 「쌍계사 진감 선사 대공영탑비()」, 「초월산 대숭복사비()」, 「봉암사 지증 대사 적조탑비()」 등의 글씨도 최치원이 썼다. 
이 가운데 『계원필경』과 『법장 화상전』, 사산비명의 내용만이 온전하게 전해지고 있다.

고려 현종 14년(1022)에 문창후()라는 시호를 받았고, 국자감과 향교의 문묘에 배향되었다. 부산에서는 동래 향교에서 배향하고 있다.


유·불·선 통합을 주장했던, 신라 최고의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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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1
최치원(崔致遠, 857~?)은 유교∙불교∙도교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를 지녔던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다. 

높은 신분제의 벽에 가로막혀, 자신의 뜻을 현실정치에 펼쳐보이지 못하고 깊은 좌절을 안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그가 이룩한 학문과 문장의 경지는 높았으나, 난세를 산 그의 삶은 그가 이룩한 높은 경지만큼 불행했다.


























사씨남정기 [謝氏南征記] 1

사씨남정기 [謝氏南征記]  1


중국 명나라에 유현이라는 이름난 선비가 살았다. 
느지막이 아들 유연수를 얻었으나 부인이 일찍 죽고 말았다. 
유연수는 아버지의 누이인 두 부인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는데 남달리 총명하고 글재주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인물 또한 빼어났다.

유연수는 열다섯 살에 과거에 급제하고 어질고 정숙한 사정옥과 혼인을 했다. 
혼인한 지 10년 가까이 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자, 
사씨 부인은 이를 자기 탓으로 여기고 유연수에게 첩을 들이라고 권한다. 
결국 유연수는 외모가 빼어난 교채란을 첩으로 들인다.

교채란이 아들을 낳자 유연수와 사씨뿐 아니라 하인들도 모두 축하하며 기뻐했다. 
교채란은 아들을 낳은 뒤 유연수의 사랑이 두터워지자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졌다. 
교묘한 말과 행동으로 사씨의 흠을 잡아 유연수에게 이르나 유연수는 그 말을 들은 척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사씨가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았다. 
유연수는 본부인 사씨가 낳은 아들 인아를 교씨가 낳은 아들보다 더 아끼고 사랑했다. 
교씨는 시기심에 사로잡혀 점점 더 심하게 사씨를 헐뜯지만 유연수는 그저 웃어넘기기만 했다.

어느 날 유연수의 집에 동청이라는 이가 서사로 들어온다. 
동청은 잘생긴 얼굴에 말주변과 글재주가 뛰어났으나 행실이 나쁜 이였다. 
교씨는 동청과 손잡고 사씨를 모함하여 내쫓기로 했다.
교씨와 동청은 하녀를 시켜 교씨의 큰아들 장주를 교살하고, 그 죄를 사씨에게 덮어 씌웠다. 
결국 사씨는 아들 인아를 남겨 둔 채 집에서 쫓겨나고, 교씨는 유연수의 정실 부인이 되었다.

쫓겨난 사씨는 시부모의 묘가 있는 선산 아랫동네에 거처를 정했다. 
교씨는 유연수가 행여나 일 년에 한두 번이라도 사씨와 마주칠 것이 걱정이었다. 
그래서 동청과 함께 사씨를 그곳에서 몰아낼 음모를 꾸몄다. 
사씨는 이를 눈치채고 먼저 그곳을 떠나 유연수의 고모 두 부인이 있는 장사로 향했다.

여행길에 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임 낭자의 도움을 받기도 하며 겨우겨우 장사에 도착하지만, 두 부인은 이미 장사를 떠나고 없었다. 
사씨는 절망에 빠져 악양루 강물에 몸을 던져 죽으려 하나 다행히 묘혜 스님의 도움으로 동정 호수 군산에 있는 절에 몸을 의탁하고 지내게 된다.

유연수는 동청의 계략으로 살아 돌아온 이가 없는 곳으로 유배를 가게 되고, 동청은 승상 엄숭 덕에 벼슬 자리를 얻어 유연수의 집을 떠나게 된다. 
교씨는 값진 재물들을 모두 챙기고 아이들과 하인 대여섯을 데리고 동청을 따라나섰다.
가는 길에 하녀 설매를 시켜 사씨의 아들 인아를 강물에 버리게 했다. 
설매는 아이를 차마 강물에 던지지 못하고 강가에 뉘어 놓았다.

유연수는 유배지에서 사씨가 옳았음을 알고 지난 일을 후회하며 지내다가 병이 든다. 
그때에 꿈인지 생시인지 동정 호수의 군산에 산다는 할멈이 나타나 마당 한가운데에 물병을 놓고 사라지는데, 다음 날 물병이 놓였던 자리에서 물이 솟았다. 
그 물을 마시고 유연수는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동청과 교씨는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 모아 엄 승상에게 뇌물로 바치거나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데 썼다. 
이 무렵 황제가 태자를 책봉하는 나라의 큰 경사가 있어 죄인을 풀어 주었는데 그 덕에 유연수도 유배에서 풀려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유연수는 높은 벼슬아치의 행차와 마주친다. 
바로 동청이었다.
하녀 설매를 우연히 만나 그간의 사정을 빠짐없이 알게 되었다.

교씨와 동청 역시 유연수가 유배에서 풀려났다는 사실을 알고 유연수를 잡아서 죽이려 했다. 

유연수는 사씨를 찾아 악양으로 갔다. 
그곳에서 사씨가 쓴 유서를 발견한 유연수는 슬퍼하며 제문을 쓸 때에 장정 수십 명이 유연수를 잡으러 달려 들었다.

쫓기던 유연수가 죽으려고 강물에 몸을 던지려는 순간 강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묘혜 스님과 사씨가 노래를 하며 배를 저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유연수와 사씨는 다시 만났다.

그때 동청과 교씨가 사씨를 모함할 때 도왔던 냉진이 동청의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동청이 일이 많아 집을 자주 비우자 냉진은 교씨와 정을 통하게 된다.
동청의 뒤를 보아 주던 승상 엄숭의 몰락을 알게 된 냉진은 나라에 동청의 죄를 고발했고, 이 일로 동청은 사형을 당한다. 

그 후 냉진과 교씨는 재물을 챙겨 길을 떠났다가 길에서 도적에게 재물을 몽땅 도둑맞고 만다.

황제는 엄숭의 모함으로 유배를 당했거나 쫓겨난 신하들을 다시 불러들여 벼슬을 주었다. 
유연수 역시 다시 벼슬을 하게 되었다. 
사씨와 함께 아들 인아의 행방을 찾았으나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사씨는 대가 끊기면 안 되니 정숙한 여인을 첩으로 들이자고 청하지만 유연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집안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사씨는 그동안 신세 졌던 많은 이들에게 보답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임 낭자가 어머니를 여의고 남동생과 함께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씨는 유연수에게 임 낭자를 첩으로 들이자고 청했다.

이번에는 유연수도 거절하지 않았다. 
임 낭자가 데려온 남동생이 바로 잃어버린 아들 인아였다. 
임 낭자가 버려진 인아를 거둬 동생처럼 키워 왔던 것이다.

재물을 모두 도둑맞은 교씨와 냉진의 삶은 비참했다. 
냉진은 도둑질을 하다 잡혀 죽고, 교씨는 기생이 되었다. 
교씨의 일을 알게 된 유연수는 교씨를 집으로 불러들이고 그 죄를 물어 죽이라 명했다.

세월이 흘러 임씨는 아들 셋을 낳았고, 유연수는 좌승상의 벼슬에 올랐다. 
유연수와 사씨는 여든 살이 되도록 편안한 삶을 누렸다. 
사씨가 《내훈》과 《열녀전》을 지어 세상 사람들이 바르게 살도록 가르치니 그 덕행이 오래도록 전해졌다.


샤시남정기
샤시남정기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장 인물

유연수
언뜻 보기에는 학식이 있고 사리에 밝은 인물로 보이지만 무능한 양반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간사한 교씨에게 번번이 속아 넘어가 결국은 어진 사씨를 내쫓고 나중에는 자신도 유배를 당하는 처지가 된다. 
숙종에 대비되는 인물이다.

사정옥
유연수의 부인이다. 
품행이 바르고 고운 성품을 지녔으며 유교적 윤리관에 충실한 어진 아내의 전형을 보여 준다. 
간교한 첩 교채란과 대립되는 인물로 선과 악의 관계에서 선이 승리한다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현실의 인현 왕후에 대비되는 인물이다.


교채란
유연수의 첩으로 자신의 욕망과 행복을 위해서 아들까지 죽이려 하는 비인간적인 인물이다. 
위선적이고 교활하며 표독스러운 악녀의 전형을 상징한다. 
장 희빈에 대비되는 인물이다.

동청
악인의 전형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인물로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교씨와 한패가 되어 유연수 집안의 재물을 훔쳐 내고 유연수를 유배 당하게까지 하지만 결국 처형되며 악인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한지 보여 준다.


냉진
동청의 친구로 사씨를 곤경에 빠뜨리는 인물이다. 
동청이 운이 다하였음을 알고는 동청마저 배반하고 교씨와 눈이 맞아 도망치지만 결국 도적질을 하다 잡혀 죽고 만다.

두 부인
유연수의 고모이다. 
옳고 그름을 잘 가려 사씨를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사씨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사씨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감싸 준다.










김만중 바른말을 서슴없이 하다'

《사씨남정기》는 '사씨가 남쪽으로 쫓겨나게 된 사연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이다. 
이 작품의 표면적인 내용은 처첩 간의 갈등이다. 
궁극적으로는 임금 숙종의 잘못을 풍자하고 숙종의 흐려진 마음을 돌리기 위한 목적이 있는 작품이다. 
이와 같이 넌지시 둘러서 말하며 잘못을 깨우쳐 주려는 목적을 가진 소설을 '풍간 소설'이라고 한다.

《사씨남정기》의 무대는 중국이지만 배경만 다를 뿐 궁중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줄거리로 삼고 있다. 
임금인 숙종이 인현 왕후를 내쫓고 장 희빈을 왕비로 맞아들인 사건이다. 
김만중은 이를 반대하다 유배를 당했고 유배지에서 이 소설을 썼다.
귀양살이를 하는 처지였던 김만중은 속마음이 드러나지 않게 중국의 이야기라고 슬쩍 돌려 말했던 것이다. 
김만중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난 뒤, 마침내 장 희빈은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고 인현 왕후는 다시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김만중은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을 한글로 지었다. 
김만중은 "자기 나라 말을 버려두고 남의 말로 시문을 짓는다는 것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김만중은 오로지 한문만을 떠받들던 당시 양반 사대부들과 달리 한글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사대부들은 소설을 써서도 읽어서도 안 되는 가치 없는 글이라며 멀리했다. 

김만중은 소설을 천시했던 조선 시대에 소설의 가치를 높이 사, 오늘날까지 빛나는 문학 작품을 창작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문학은 마땅히 한글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후 한글 소설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부도덕함을 비판하다

김만중이 《사씨남정기》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간교한 장 희빈에게 눈이 멀어서 어진 인현 왕후를 내쫓은 숙종의 잘못된 태도에 대한 비판이다. 
더불어 축첩 제도가 빚은 한 가정의 비극을 통해 사회 제도의 모순과 양반 사대부의 부도덕함도 고발하고 있다.

국가나 사회에서 첩을 두는 것을 허용하는 축첩 제도는 삼국 시대부터 시작돼 일제 초기까지 이어져 온 나쁜 풍습이었다. 
조선 시대에 왕은 여러 명의 후궁을 거느렸고 양반이나 돈 많은 지주들은 가난한 집안의 딸이나 집안에서 거느리고 있던 노비, 또는 기생을 첩으로 들였다.

아내는 남편이 여러 명의 첩을 거느려도 항의할 수 없었으며, 남편을 잃어도 재혼을 할 수 없었다. 
사회적으로 더욱 큰 문제가 된 것은 축첩 제도에 의해 태어난 서얼을 차별하던 제도였다. 
《사씨남정기》는 이러한 축첩 제도의 불합리함과 양반 사대부의 부도덕성에 문제를 제기하며 현실을 비판하는 역할까지도 했다.
사씨남정기 - 유배지에서 임금에게 고하는 바른 소리 (역사로 통하는 고전문학 - 임금의 잘못을 꾸짖다, 사씨 남정기, 2012.)


4책본·3책본·2책본·1책본이 있다. 
국문본으로 목판본(경판)·필사본·활자본이 있고, 김춘택()의 한역본이 있다.
‘남정기()’·‘사씨전()’은 이 작품의 다른 이름이다.
명나라 가정()연간 금릉 순천부에 사는 유현()이라는 명신은 늦게야 아들 연수()를 얻는다. 

유공의 부인 최씨는 연수를 낳고 세상을 떠난다.
연수는 15세에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고 한림학사에 제수되었으나, 아직 나이가 어리므로 10년을 더 수학하고 나서 관직에 나아가겠다고 한다. 
천자는 특별히 본직()을 띠고 6년 동안의 여가를 준다.
유한림은 덕성과 재학()을 겸비한 사씨와 혼인한다. 

사씨는 유한림과의 금슬은 좋으나 9년이 되어도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 
이에 사씨는 남편에게 새로이 여자를 얻기를 권한다. 
유한림은 거절하다가 사씨가 여러 번 권해오니 마지못해 교씨()를 맞아들인다.

교씨는 천성이 간악하고 질투와 시기심이 강한 여자로, 겉으로는 사씨를 존경하는 척하나 속으로는 증오한다. 
그러다가 잉태하여 아들을 출산하고는 자기가 정실이 되려고 마음먹고, 문객 동청()과 모의하여 남편 유한림에게 온갖 모함을 한다.

유한림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교씨가 자신이 낳은 아들을 죽이고 죄를 사씨에게 뒤집어씌우니, 사씨를 폐출시키고 교씨를 정실로 맞이한다. 
교씨의 간악은 이에 그치지 않고, 다시 문객 동청과 간통하면서 유한림의 전재산을 탈취해 도망가서 살기로 약속하고, 유한림을 천자에게 참소하여 유배시키는 데 성공한다.

유한림을 고발한 공으로 지방관이 된 동청은 교씨와 함께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는 등 갖은 악행을 저지른다.
이때, 조정에서는 유한림에 대한 혐의를 풀어 소환하고, 충신을 참소한 동청을 처형하기로 한다.
유배를 당한 유한림은 비로소 교씨와 동청의 간계에 속은 줄 알고 지난날의 죄를 뉘우친다. 
유배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유한림은 사방으로 탐문하여 사씨의 행방을 찾는다.

남편 유한림이 돌아왔다는 소문을 들은 사씨는 산사에서 나와 남편을 찾으러 나선다. 
사씨와 유한림은 도중에서 해후한다. 
유한림은 사씨에게 지난날의 죄를 사과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간악한 교씨와 동청을 잡아 처형하였다. 
사씨를 다시 정실로 맞이한다.


이 작품은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책봉한 사건에 대하여 숙종이 미혹됨을 깨닫고 모든 것을 원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목적을 담고 있다. 
권선징악의 수법을 고도로 원용하여 쓴 폭로·풍간()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유한림은 그후 숙덕()과 재학()을 겸비한 사씨()와 혼인하였으나, 9년이 지나도록 소생이 없자 교씨()를 후실로 맞아들인다. 
간악하고 시기심이 많은 교씨는 간계로써 사씨부인을 모함하여 그녀를 폐출시키고 자기가 정실이 된다. 
그후 교씨는 간부()와 밀통하며 남편인 유한림을 조정에 모함하여 유배 보내게 한 다음 재산을 가지고 간부와 도망치다가 도둑을 만나 재물을 모두 빼앗기고 궁지에 빠진다. 
유한림은 혐의가 풀려 배소에서 풀려나와 방황하는 사씨를 찾아 다시 맞아들이고 교씨와 간부를 잡아 처형한다.

작가 김만중이 이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주제는 일반적으로 쟁총()으로 보고 있으나, 오히려 덕()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리라 생각한다.
예", 성혼 과정에서 매파가 사소저의 미색을 칭찬하자 유현은 덕을 강조하여 말했고, 또 사부인이 남편 유한림에게 소실을 얻도록 주선해주는 것은 부덕()에 의한 것이다.


교씨의 간교로 인해 시가에서 쫓겨난 사부인이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시부모의 산소에서 지내는 것은 끝까지 덕을 실행해보려는 강인한 의지의 발로라고 하겠다. 
이 작품은 쟁총형의 가정소설이라기보다는, 인간에 있어서의 덕성을 강조함으로써 민비 폐출의 부당성을 풍간하기 위한 풍간소설이다.


인물구성을 보면, 사부인은 고매한 인덕의 소유자로 설정해놓은 반면, 첩은 간교한 여인으로 등장시켜 악녀를 선녀에 대립시킴으로써 여자주인공의 인격을 강조하고 있다. 
유한림의 숙모인 두부인은 선악을 판단하는 사리 판별자로서 기능하며, 또한 다가올 일을 암시하는 복선의 기교적인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소설은 구성면에 있어서, 다른 고전소설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천우신조()가 사건전개에 큰 구실을 한다. 


사부인이 시부모 묘하에 쫓겨나 있을 무렵 두부인의 위조편지를 받고, 비몽사몽간에 최부인이 꿈에 나타나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여승 묘혜가 사부인과 상봉하여 사부인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도 역시 꿈의 계시에 의해서였다. 
유연수의 중병을 고치는 일, 위기에서 구출되는 일 등 모두가 현몽 덕분이다. 
이처럼 꿈을 지나치게 과용한 것이 이 작품의 구성상의 흠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또한 실감을 크게 감퇴시키고 있다.

이 소설의 사실상의 배경은 숙종의 인현왕후 폐출사건에 있으나 소설 내용상의 배경은 중국 명나라 시대를 취하고 있다. 
그것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날카로운 저항의식을 가리기 위함일 것이다.
이 소설은 이러한 목적의식 때문에 인물의 배치나 사건의 전개에 어떤 한계를 주어 작품의 문학성이 위축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나, 김만중의 작가적 능력은 이를 훌륭히 극복하여 작품적 성과를 크게 발휘하고 있다.

문헌

  • 「사씨남정기」(『구활자본 고소설전집』4권, 인천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3)
  • 「사씨남정기의 반성적 고찰」(이원수, 『문학과 언어』3, 문학과 언어연구회, 1982)
  • 「사씨남정기연구」(김현룡, 건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76)
  • 「사씨남정기」(『판각본 고소설전집』4권, 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73)
  • 「사씨남정기연구」(우쾌제, 『숭전어문학』1, 숭전대학교, 1972)

  • 사씨남정기 [謝氏南征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