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사 ,觀音寺.
북한의 보물급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25호로 변경되었다. 박연리 대흥산성 북문에서 약 1km 정도 거리의 천마산 기슭에 있다.
1477년(성종 8)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1646년(인조 23)에 다시 세웠다.
승방 중앙에 난 문으로 들어가면, 마당 안쪽에 대웅전이 있고 그 서쪽에 7층석탑, 북쪽으로 관음굴이 있다.
대웅전은 장대석을 쌓아올린 높은 기단 위에 있으며, 정면 3칸(8.4m), 측면 3칸(6.61m)의 겹처마를 댄 다포계 우진각지붕집이다.
대웅전은 장대석을 쌓아올린 높은 기단 위에 있으며, 정면 3칸(8.4m), 측면 3칸(6.61m)의 겹처마를 댄 다포계 우진각지붕집이다.
배흘림기둥을 사용하였고, 모서리기둥에 귀솟음과 안쏠림 기법을 사용하여 안정감을 주었다.
공포 장식은 외부는 쇠서형으로 비교적 길게 뽑고 내부는 교두형(翹頭型)과 운공형(雲工型)으로 처리하여 운공 위에 연꽃 봉오리를 장식했다.
모서리에는 용머리를 장식했다.
창호는 꽃살문으로 달았는데, 특히 화병에 담긴 연꽃을 동판에 새긴 후면창호는 그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내부에는 중층 닫집을 설치하고 그 아래 불단을 놓았다.
승방은 정면 4칸(10.7m), 서쪽 측면 4칸, 동쪽 측면 2칸의 'ㄴ'자형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에 대문채가 있다.
가운데에 대문채가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7층석탑은 높이는 약 4.7m로, 고려 때 조성되었다.
단층기단 위에 7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쪽대기에 상륜을 장식한 석탑이다.
대웅전 뒤쪽에 있는 관음굴은 관음사가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현재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54호로 지정된 대리석관음보살상이 2구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평양시의 중앙역사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공포와 내부 장식 등 조선 중기 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물이다.
공포와 내부 장식 등 조선 중기 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물이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운나라는 소년이 손재주가 너무 좋아 관음사 대웅전 꽃살문을 만드는 데 동원되었다가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하자 자신을 왼손을 잘라 버리고는 손 잘린 자신의 모습을 살문에 조각해 놓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도 손 잘린 운나의 모습이 대웅전 꽃살문에 남아 있다.
북한의 보물급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25호로 변경되었다. 박연리 대흥산성 북문에서 약 1km 정도 거리의 천마산 기슭에 있다.
970년(고려 광종 21)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이 처음 세우고, 1393년(조선 태조 1)에 크게 확장하였다.
1477년(성종 8)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1646년(인조 23)에 다시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1797년(정조 21)에 중수한 것이다.
경내에는 현재 대웅전·승방·칠층석탑·관음굴이 남아 있다.
승방 중앙에 난 문으로 들어가면, 마당 안쪽에 대웅전이 있고 그 서쪽에 7층석탑, 북쪽으로 관음굴이 있다.
대웅전은 장대석을 쌓아올린 높은 기단 위에 있으며, 정면 3칸(8.4m), 측면 3칸(6.61m)의 겹처마를 댄 다포계 우진각지붕집이다.
배흘림기둥을 사용하였고, 모서리기둥에 귀솟음과 안쏠림 기법을 사용하여 안정감을 주었다.
공포 장식은 외부는 쇠서형으로 비교적 길게 뽑고 내부는 교두형(翹頭型)과 운공형(雲工型)으로 처리하여 운공 위에 연꽃 봉오리를 장식했다.
모서리에는 용머리를 장식했다. 창호는 꽃살문으로 달았는데, 특히 화병에 담긴 연꽃을 동판에 새긴 후면창호는 그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내부에는 중층 닫집을 설치하고 그 아래 불단을 놓았다.
천장에 학, 봉황 조각으로 장식하고 안팎을 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승방은 정면 4칸(10.7m), 서쪽 측면 4칸, 동쪽 측면 2칸의 'ㄴ'자형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에 대문채가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7층석탑은 높이는 약 4.7m로, 고려 때 조성되었다.
단층기단 위에 7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쪽대기에 상륜을 장식한 석탑이다.
대웅전 뒤쪽에 있는 관음굴은 관음사가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현재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54호로 지정된 대리석관음보살상이 2구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평양시의 중앙역사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공포와 내부 장식 등 조선 중기 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물이다.
1400년(조선 태종 즉위년)에는 태종이 이 절에서 수륙재를 열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운나라는 소년이 손재주가 너무 좋아 관음사 대웅전 꽃살문을 만드는 데 동원되었다가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하자 자신을 왼손을 잘라 버리고는 손 잘린 자신의 모습을 살문에 조각해 놓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도 손 잘린 운나의 모습이 대웅전 꽃살문에 남아 있다.
북한의 보물급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25호로 변경되었다. 박연리 대흥산성 북문에서 약 1km 정도 거리의 천마산 기슭에 있다.
970년(고려 광종 21)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이 처음 세우고, 1393년(조선 태조 1)에 크게 확장하였다.
1477년(성종 8)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1646년(인조 23)에 다시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1797년(정조 21)에 중수한 것이다.
경내에는 현재 대웅전·승방·칠층석탑·관음굴이 남아 있다.
승방 중앙에 난 문으로 들어가면, 마당 안쪽에 대웅전이 있고 그 서쪽에 7층석탑, 북쪽으로 관음굴이 있다.
대웅전은 장대석을 쌓아올린 높은 기단 위에 있으며, 정면 3칸(8.4m), 측면 3칸(6.61m)의 겹처마를 댄 다포계 우진각지붕집이다.
배흘림기둥을 사용하였고, 모서리기둥에 귀솟음과 안쏠림 기법을 사용하여 안정감을 주었다.
공포 장식은 외부는 쇠서형으로 비교적 길게 뽑고 내부는 교두형(翹頭型)과 운공형(雲工型)으로 처리하여 운공 위에 연꽃 봉오리를 장식했다.
모서리에는 용머리를 장식했다. 창호는 꽃살문으로 달았는데, 특히 화병에 담긴 연꽃을 동판에 새긴 후면창호는 그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내부에는 중층 닫집을 설치하고 그 아래 불단을 놓았다.
천장에 학, 봉황 조각으로 장식하고 안팎을 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승방은 정면 4칸(10.7m), 서쪽 측면 4칸, 동쪽 측면 2칸의 'ㄴ'자형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에 대문채가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7층석탑은 높이는 약 4.7m로, 고려 때 조성되었다.
단층기단 위에 7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쪽대기에 상륜을 장식한 석탑이다.
대웅전 뒤쪽에 있는 관음굴은 관음사가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현재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54호로 지정된 대리석관음보살상이 2구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평양시의 중앙역사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공포와 내부 장식 등 조선 중기 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물이다.
1400년(조선 태종 즉위년)에는 태종이 이 절에서 수륙재를 열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운나라는 소년이 손재주가 너무 좋아 관음사 대웅전 꽃살문을 만드는 데 동원되었다가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하자 자신을 왼손을 잘라 버리고는 손 잘린 자신의 모습을 살문에 조각해 놓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도 손 잘린 운나의 모습이 대웅전 꽃살문에 남아 있다.
970년 고려 태조 왕건으로부터 '별대덕(別大德)', '별화상(別和尙)'으로 칭송받던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이 굴 안에 관음보살상 한 쌍을 놓고 '관음굴'이라고 불렀고, 그 후에 관음사가 지어졌다.
1393년에 크게 확장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1646년에 다시 지었다.
1797년 고쳐 지을 때 5채의 당우가 있었던 것으로 전하지만 지금은 대웅전과 승방만 남아 있다.
대웅전 앞에는 고려 시기 석조물인 7층석탑이 있고, 옆에는 관음사가 창건되기 전부터 있었다는 관음굴이 있다.
대웅전은 1.7m의 기단 위에 정면 3칸(8.4m), 측면 3칸(6.61m)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절 건물에서는 보기 드물게 겹처마를 댄 우진각지붕을 이었다.
건물의 앞면은 기둥 사이를 같게 하고, 옆면은 가운데 칸을 좌우 칸보다 넓게 했다.
공포는 바깥 7포, 안 9포로 되어 있으며, 모두 32개이다.
북한의 국보유적 제125호로 알려져 있으나 표식비에는 국보유적 제142호로 표기되어 있다.
요사채는 앞면 4칸(10.7m), 서쪽 측면 4칸, 동쪽 측면 2칸인 'ㄴ' 모양의 평면을 가진 배집이다.
대웅전 옆 관음굴 안에는 흰 대리석의 관음보살좌상 2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높이 약 1.2m로 크지 않으나 화려한 보관과 가슴에 드리운 영락과 천의 등이 마치 무른 나무로 조각한 듯 화려하고 섬세하여 고려 석조불상 가운데 대표작이다.
하나는 두 손을 무릎 위에 드리웠으며, 하나는 왼손 팔꿈치를 무릎 위에 세우고 오른손을 무릎 위에 놓아 차이가 난다.
현재 전자는 조선중앙력사박물관으로 이동해 보존하고 있고, 후자는 관음굴에 그대로 있다.
국보유적 제154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