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4일 수요일

관음사 ,觀音寺.

관음사 ,觀寺.

요약 황해북도 개성시 박연리 천마산 기슭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찰.
지정번호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25호
소재지개성시 박연리 천마산
시대조선시대
종류/분류사찰유적
북한의 보물급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25호로 변경되었다. 박연리 대흥산성 북문에서 약 1km 정도 거리의 천마산 기슭에 있다. 
970년(고려 광종 21) 법인국사() 탄문()이 처음 세우고, 1393년(조선 태조 1)에 크게 확장하였다. 

1477년(성종 8)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1646년(인조 23)에 다시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1797년(정조 21)에 중수한 것이다.

경내에는 현재 대웅전·승방·칠층석탑·관음굴이 남아 있다. 

승방 중앙에 난 문으로 들어가면, 마당 안쪽에 대웅전이 있고 그 서쪽에 7층석탑, 북쪽으로 관음굴이 있다.

대웅전은 장대석을 쌓아올린 높은 기단 위에 있으며, 정면 3칸(8.4m), 측면 3칸(6.61m)의 겹처마를 댄 다포계 우진각지붕집이다. 
배흘림기둥을 사용하였고, 모서리기둥에 귀솟음과 안쏠림 기법을 사용하여 안정감을 주었다. 

공포 장식은 외부는 쇠서형으로 비교적 길게 뽑고 내부는 교두형()과 운공형()으로 처리하여 운공 위에 연꽃 봉오리를 장식했다. 
모서리에는 용머리를 장식했다. 

창호는 꽃살문으로 달았는데, 특히 화병에 담긴 연꽃을 동판에 새긴 후면창호는 그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내부에는 중층 닫집을 설치하고 그 아래 불단을 놓았다. 
천장에 학, 봉황 조각으로 장식하고 안팎을 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승방은 정면 4칸(10.7m), 서쪽 측면 4칸, 동쪽 측면 2칸의 'ㄴ'자형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에 대문채가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7층석탑은 높이는 약 4.7m로, 고려 때 조성되었다. 
단층기단 위에 7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쪽대기에 상륜을 장식한 석탑이다.

대웅전 뒤쪽에 있는 관음굴은 관음사가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현재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54호로 지정된 대리석관음보살상이 2구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평양시의 중앙역사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공포와 내부 장식 등 조선 중기 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물이다. 

1400년(조선 태종 즉위년)에는 태종이 이 절에서 수륙재를 열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운나라는 소년이 손재주가 너무 좋아 관음사 대웅전 꽃살문을 만드는 데 동원되었다가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하자 자신을 왼손을 잘라 버리고는 손 잘린 자신의 모습을 살문에 조각해 놓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도 손 잘린 운나의 모습이 대웅전 꽃살문에 남아 있다.

북한의 보물급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25호로 변경되었다. 박연리 대흥산성 북문에서 약 1km 정도 거리의 천마산 기슭에 있다. 

970년(고려 광종 21) 법인국사() 탄문()이 처음 세우고, 1393년(조선 태조 1)에 크게 확장하였다. 
1477년(성종 8)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1646년(인조 23)에 다시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1797년(정조 21)에 중수한 것이다. 

경내에는 현재 대웅전·승방·칠층석탑·관음굴이 남아 있다. 
승방 중앙에 난 문으로 들어가면, 마당 안쪽에 대웅전이 있고 그 서쪽에 7층석탑, 북쪽으로 관음굴이 있다. 

대웅전은 장대석을 쌓아올린 높은 기단 위에 있으며, 정면 3칸(8.4m), 측면 3칸(6.61m)의 겹처마를 댄 다포계 우진각지붕집이다. 
배흘림기둥을 사용하였고, 모서리기둥에 귀솟음과 안쏠림 기법을 사용하여 안정감을 주었다. 

공포 장식은 외부는 쇠서형으로 비교적 길게 뽑고 내부는 교두형()과 운공형()으로 처리하여 운공 위에 연꽃 봉오리를 장식했다. 

모서리에는 용머리를 장식했다. 창호는 꽃살문으로 달았는데, 특히 화병에 담긴 연꽃을 동판에 새긴 후면창호는 그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내부에는 중층 닫집을 설치하고 그 아래 불단을 놓았다. 
천장에 학, 봉황 조각으로 장식하고 안팎을 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승방은 정면 4칸(10.7m), 서쪽 측면 4칸, 동쪽 측면 2칸의 'ㄴ'자형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에 대문채가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7층석탑은 높이는 약 4.7m로, 고려 때 조성되었다. 
단층기단 위에 7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쪽대기에 상륜을 장식한 석탑이다. 

대웅전 뒤쪽에 있는 관음굴은 관음사가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현재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54호로 지정된 대리석관음보살상이 2구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평양시의 중앙역사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공포와 내부 장식 등 조선 중기 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물이다. 
1400년(조선 태종 즉위년)에는 태종이 이 절에서 수륙재를 열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운나라는 소년이 손재주가 너무 좋아 관음사 대웅전 꽃살문을 만드는 데 동원되었다가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하자 자신을 왼손을 잘라 버리고는 손 잘린 자신의 모습을 살문에 조각해 놓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도 손 잘린 운나의 모습이 대웅전 꽃살문에 남아 있다.  


위치개성특급시 박연리 천마산 기슭
연혁970년(고려 광종 2) 법인국사() 탄문()이 창건
1393년(태조 2) 중건
임진왜란 때 소실
1646년(인조 24) 중건
1797년(정조 21) 중수
대웅전 아미타삼존불상(금동)(大雄殿 阿彌陀三尊佛像)

대웅전 아미타삼존불상(금동)(大雄殿 阿彌陀三尊佛像)
출처: 북한의 전통사찰

970년 고려 태조 왕건으로부터 '별대덕()', '별화상()'으로 칭송받던 법인국사() 탄문()이 굴 안에 관음보살상 한 쌍을 놓고 '관음굴'이라고 불렀고, 그 후에 관음사가 지어졌다. 
1393년에 크게 확장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1646년에 다시 지었다. 

1797년 고쳐 지을 때 5채의 당우가 있었던 것으로 전하지만 지금은 대웅전과 승방만 남아 있다. 
대웅전 앞에는 고려 시기 석조물인 7층석탑이 있고, 옆에는 관음사가 창건되기 전부터 있었다는 관음굴이 있다.

대웅전은 1.7m의 기단 위에 정면 3칸(8.4m), 측면 3칸(6.61m)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절 건물에서는 보기 드물게 겹처마를 댄 우진각지붕을 이었다. 
건물의 앞면은 기둥 사이를 같게 하고, 옆면은 가운데 칸을 좌우 칸보다 넓게 했다. 
공포는 바깥 7포, 안 9포로 되어 있으며, 모두 32개이다. 
북한의 국보유적 제125호로 알려져 있으나 표식비에는 국보유적 제142호로 표기되어 있다.

관음사(국보급 제125호) 전경
관음사(국보급 제125호) 전경
출처: 조선향토대백과

요사채는 앞면 4칸(10.7m), 서쪽 측면 4칸, 동쪽 측면 2칸인 'ㄴ' 모양의 평면을 가진 배집이다.

대웅전 옆 관음굴 안에는 흰 대리석의 관음보살좌상 2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높이 약 1.2m로 크지 않으나 화려한 보관과 가슴에 드리운 영락과 천의 등이 마치 무른 나무로 조각한 듯 화려하고 섬세하여 고려 석조불상 가운데 대표작이다. 

하나는 두 손을 무릎 위에 드리웠으며, 하나는 왼손 팔꿈치를 무릎 위에 세우고 오른손을 무릎 위에 놓아 차이가 난다. 

현재 전자는 조선중앙력사박물관으로 이동해 보존하고 있고, 후자는 관음굴에 그대로 있다. 
국보유적 제154호로 지정되어 있다.



관음사돌부처(국보급 제154호)
관음사돌부처(국보급 제154호)
북한의 보물급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25호로 변경되었다. 

박연리 대흥산성 북문에서 약 1km 정도 거리의 천마산 기슭에 있다. 

970년(고려 광종 21) 법인국사() 탄문()이 처음 세우고, 1393년(조선 태조 1)에 크게 확장하였다. 

1477년(성종 8)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1646년(인조 23)에 다시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1797년(정조 21)에 중수한 것이다. 

경내에는 현재 대웅전·승방·칠층석탑·관음굴이 남아 있다. 

승방 중앙에 난 문으로 들어가면, 마당 안쪽에 대웅전이 있고 그 서쪽에 7층석탑, 북쪽으로 관음굴이 있다. 

대웅전은 장대석을 쌓아올린 높은 기단 위에 있으며, 정면 3칸(8.4m), 측면 3칸(6.61m)의 겹처마를 댄 다포계 우진각지붕집이다. 

배흘림기둥을 사용하였고, 모서리기둥에 귀솟음과 안쏠림 기법을 사용하여 안정감을 주었다. 

공포 장식은 외부는 쇠서형으로 비교적 길게 뽑고 내부는 교두형()과 운공형()으로 처리하여 운공 위에 연꽃 봉오리를 장식했다. 

모서리에는 용머리를 장식했다. 
창호는 꽃살문으로 달았는데, 특히 화병에 담긴 연꽃을 동판에 새긴 후면창호는 그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내부에는 중층 닫집을 설치하고 그 아래 불단을 놓았다. 
천장에 학, 봉황 조각으로 장식하고 안팎을 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승방은 정면 4칸(10.7m), 서쪽 측면 4칸, 동쪽 측면 2칸의 'ㄴ'자형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에 대문채가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7층석탑은 높이는 약 4.7m로, 고려 때 조성되었다. 
단층기단 위에 7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쪽대기에 상륜을 장식한 석탑이다. 

대웅전 뒤쪽에 있는 관음굴은 관음사가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현재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54호로 지정된 대리석관음보살상이 2구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평양시의 중앙역사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공포와 내부 장식 등 조선 중기 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물이다. 
1400년(조선 태종 즉위년)에는 태종이 이 절에서 수륙재를 열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운나라는 소년이 손재주가 너무 좋아 관음사 대웅전 꽃살문을 만드는 데 동원되었다가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하자 자신을 왼손을 잘라 버리고는 손 잘린 자신의 모습을 살문에 조각해 놓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도 손 잘린 운나의 모습이 대웅전 꽃살문에 남아 있다.  

















































































































관음사 7층탑( )관음사 7층탑은 대웅전 앞에 있는 석탑으로 높이는 4.77m이다. 기단은 밑돌과 갑돌이 복련과 양련조각으로 된 연꽃대좌형 기단이다. 
보존유적 제540호.

관음사7층탑(보존급 제540호)
관음사7층탑(보존급 제540호)

관음사(국보급 제125호) 거북이바위관음사(국보급 제125호) 거북이바위



관음사(국보급 제125호) 보살동굴관음사(국보급 제125호) 보살동굴

970년에 지은 관음사는 1393년에는 크게 확장 되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듭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646년에 고쳐지은 것이다. 
원래 다섯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관음사에는 지금 대웅전과 승방, 7층탑과 관음굴이 남아있다. 
절의 중심건물인 대웅전은 정면 3칸(8.4m), 측면 3칸(6.61m)의 크지 않은 건물이다.

대웅전의 평면배치에서 흥미있는 것은 장여와 장여 사이의 간격을 배수로 하여 두공을 배렬하고 평면을 이룬 것이다. 
이 절에 세운 홀림기둥은 굵기는 43cm, 높이는 2.83m로서 높이가 밀굵기의 6.58배나 된다. 
모서리기둥은 밑굵기 45cm로서 가운데기둥보다 굵으며 높이는 더 높게 하고 대각선방향으로 조금씩 기울여 세웠다.

평방 위에는 바깥 7포, 안 9포로 된 화려한 포식두공을 놓았다. 
두공은 매개 기둥 위마다 1개씩 놓는 한편 정면과 측면 가운데칸에서는 기둥사이마다 2개씩, 측면 두 가녘 기둥 사이에는 1개씩 놓아 모두 32개이다. 
소혀형제공으로 하면서 비교적 길게 뽑은 것이 특이하며 네 모서리와 정면 가운데기둥들의 두공 위에는 용머리조각을 하였다. 
건물 안에는 소람반자를 높이 대고 거기에 잇대어 좁은 빗반자를 중도리까지 올려붙였다. 
집 안 깊숙이 불단을 놓고 그 위에는 이층 짜리 닫집을 달아놓았다.

17포나 되게 섬세하게 짜올리고 붉은 빛이 돌게 한 닫집은 그 자체가 하나의 공예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화려하다. 
관음사에는 겹처마를 댄 우진각지붕을 하였다. 
지붕의 용마루는 짧게 하면서도 마루들과 지붕면, 처마에 이르기까지 완만한 휘임을 주어 몸체에 잘 어울리며 아름다워 보인다. 
건물전체에 입힌 금단청은 퍽 은근한 감을 준다.

이 절의 뒤벽에는 뚫음새김으로 장식한 문짝이 달려있는데 한짝은 완성된 것이고 하나는 채 완성되지 못한 것이다. 
대웅전 앞 서쪽에 서 있는 높이 4.77m의 7층탑은 고려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우수한 탑이다. 
승방은 정면 4칸(10.7m), 서쪽측면 4칸, 동쪽 측면 2칸되는 ‘ㄴ’모양의 평면을 가진 뱃집이다. 
관음사뒤의 관음굴은 관음사가 서기 전부터 있던 것이다. 
그 안에 있던 2개의 관음보살상은 옛날의 조각상으로서는 매우 보기 드문 대리석상이다. 
유백색대리석으로 조각한 높이 1.2m 정도의 앉은 모양의 관음상은 머리에 화려한 관을 쓰고 여러 가지 몸치레를 하였으며 부드럽게 드리운 옷주름은 섬세하고 아름답다.

관음사 대웅전 뒤쪽의 미완성 문짝 하나를 두고 다음과 같은 기막힌 사연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이곳에 나이는 어리지만 손재간이 비상한 운나라는 소년이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관가에서 나졸들이 마을에 달려들어 관음사 절건설에 나어린 운나까지 강제로 끌고 갔다. 
절건설에 동원된 운나는 대웅전 문짝의 장식을 조각하였는데 누구도 그의 재간을 따를 수 없었다.

그가 문짝들을 다 조각하고 이 마지막 문짝을 조각하고 있던 어느 날 어머니의 병이 위급하다는 소식에 접하게 되었다. 
홀로 병석에서 신음하고 있을 어머니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던 소년은 집에 잠깐 다녀오게 해달라고 간청하였으나 매정하고 포악한 통치자들은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아들을 애타게 찾다가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는 비통한 소식을 전해듣게 된 운나는 크나큰 슬픔과 간악한 통치자들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자기의 손재간을 원망하며 다시는 그들을 위해 자기의 재간을 바치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칼로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버리고는 절을 뛰쳐나와 농민군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대웅전 문짝중의 하나만은 지금까지 미완성품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고 한다.


관음사(국보급 제125호) 목욕탕

관음사(국보급 제125호) 목욕탕

유의 

  • **본 내용는 1999~2005년 남북공동 편찬사업에 의해 발간된 자료로서,
    북한에서 사용되는 표현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북한 자료의 특수성으로 내용의 최신성이나 이미지의 선명도가 다소 떨어지는 점 양해 부탁 드리겠습니다.


참조

[네이버 지식백과] 관음사 [觀音寺] (조선향토대백과, 2008., (사)평화문제연구소)
관음사 [觀音寺] (북한의 전통사찰, 2011. 6. 10., 도서출판 양사재)

관음사 [觀音寺] (두산백과)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