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0일 토요일

성 베드로 대성당 , Basilica of St. Peter.

성 베드로 대성당 , Basilica of St. Peter.
산 바티칸) 대성당
San Pietro in Vaticano.

제작시기1593년
건축가미켈란젤로, 델라 포르타, 베르니니, 브라만테, 마데르노
위치바티칸 시티
양식바로크 고전주의
재료석재, 대리석
로마(바티칸)에 있는 로마 ∙
가톨릭의 총본부.
320년경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성 베드로의 묘 위에 오랑식()의 바실리카를 건립한 후 15세기 말까지 존재했다.

이를 성 베드로 구() 성당이라 부름.
1502년 브라만테의 안()에 따라 집중식의 신성당이 기공되었으나 설계상의 미비로 인하여 중단하고, 줄리아노 ∙ 다 ∙ 상갈로가 교회의 요망에 응해 장당식()으로 변경했다.

프라 조콘도와 라파엘, 페르치, 안토니오 다 상갈로도 각기 안을 제시했으나 모두 채택되지 못하고 1546년 주임건축가가 된 미켈란젤로가 다시 집중식의 안을 설계하여 공사에 착수, 비뇨라가 소() 돔을 부가함.

미켈란젤로 설계의 대() 돔은 1587년~89년에 델라포르타와 도메니코 폰타나가 건조했다.

17세기 초두, 교황 파울루스 5세(Paulus V, 재위 1605~21)가 다시 장당화()를 명해 1607년 설계공모에 의해 마데르나의 정면안()이 당선,

1614년까지 거의 완성함.
1624년에 신랑부()도 완성되고 헌당식을 거행 그후 1656~67년에는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성당 앞면의 광장을 에워싼 장대한 콜로네이드를 건조, 일세기 반에 걸친 공사를 완성했다.

면적 약 1만 6600㎡, 정면의 폭 71m, 오더의 높이 34m, 입구에서 아프시스까지 183m, 대 돔의 내경 42m, 바닥에서 내각 정상부까지 104m, 지반면에서 돔 정점의 십자가까지 138m로서 세계 최대 최호화 성당건축이라 알려진 이탈리아 ∙ 바로크 건축의 대표적 작품의 하나임.
내부에는 미켈란젤로의 서명이 있는 유일한 조각작품 『피에타』(1498~1499/1500)와 베르니니의 발다키노(대천개)가 있음. 광장 중앙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 왕국 제12왕조의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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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당(내부)성 베드로(바티칸) 대성당 [San Pietro in Vaticano] (미술대사전(용어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권력을 내뿜는 건축물이 있다. 
가톨릭의 총본산인 성 베드로 대성당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로마의 주교좌 교회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톨릭 교회 그 자체도 아니다. 
가톨릭의 진원이자 그 자체가 하나의 도시 국가이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돔은 우아하고 강렬한 인상을 준다. 
미켈란젤로는 156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건물에 매달렸으며, 그 뒤 1593년, 자코모 델라 포르타와 도메니코 폰타나에 의해 마침내 완공되었다. 
관광객들은 일단 132.5미터 높이에 매달려 있는 등을 둘러싼 외부 갤러리로 오르게 된다. 
성 베드로 대성당과 로마가 내려다보이는 전경은 그야말로 굉장하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바실리카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네이브는 그 길이가 211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길다. 
베르니니의 바로크풍 실내는 수많은 신성한 걸작들로 가득하며 제단 위에 드리운 발다친 혹은 휘장(1633년)은 정말로 멋지다.

성 베드로 대성당






성 베드로의 의자(1666년)는 베르니니가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제작한 작품이자 하이 바로크 예술의 축도이다. 
카를로 마데르노의 작품인 동쪽 면은 다소 딱딱하고 엄숙하지만 중앙 발코니에서 교황이 강론과 축복을 내리는 배경으로는 잘 어울린다. 
베르니니가 설계한 산 피에트로 광장은, 로마는 완전히 배제하는 동시에 광장을 에워싼 열주(1656년에서 1667년 사이에 세워졌다)로 신앙심 깊은 순례객들을 끌어안는 '열쇠구멍' 설계를 확장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천재의 작품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 깊이가 1.2미터인 열주는 몇 겹으로 늘어선 기둥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위로는 바로크풍 인물상들이 서 있다. 
광장의 중심에는 기원전 1년에 이집트에서 한 덩이리의 화강암을 깎아 만든 기둥이 서 있는데, 1585년 이곳에 세워졌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어머어마한 규모, 엄숙한 구성, 그리고 강력한 권위는 세계 곳곳의 대형 교회와 정부 건물 설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성 베드로 대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 [Basilica of St. Peter]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 2009. 1. 20., 마로니에북스)


산피에트로 대성당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시국에 있는 가톨릭의 총본산 교회. 르네상스를 바탕으로 베르니니가 건축 주임을 맡았다.







베드로대성당 또는 성베드로대성전·베드로대성전·바티칸대성당·바티칸대성전이라고도 한다. 



가톨릭의 총본산으로서 유럽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교황청의 산피에트로대성당 관리 성성()의 관리하에 있다. 

그 역사는 깊어서 기원으로 말하면 성()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4세기의 바실리카식 성당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16세기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당시의 대표적 건축가들에 의해 전성기를 맞은 르네상스의 건축이념에 바탕을 두고 재건되었다.

15세기에 한 차례 시도되었다가 중단되었던 구당()의 개수계획을 재개하기 위하여 1506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저명한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에게 명하여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하게 하였다. 

브라만테는 그리스 십자식 플랜의 중심에 대원개()를 얹고, 네 구석에 한 개씩의 작은 원개를 얹는 구상을 세운 듯, 대원개를 떠받칠 4개의 큰 지주와 그것들을 잇는 4쌍의 아치를 완성하였다. 

브라만테가 죽은 뒤 라파엘로가 여기에 긴 회당부()를 추가한 라틴 십자식 플랜을 계획하였으나 그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뜨고 공사는 발다사레 페루치(Baldassare Peruzzi)의 손을 거쳐 안토니오 다 상갈로(Antonio daSangallo)에게로 넘어갔다. 

상갈로 역시 궁륭(窿)의 일부를 착수하였다가 1546년에 세상을 떴으나, 그동안 역대의 건축담당자들이 이 조영()사업에 기울인 정열은 건물의 계획을 놀랍도록 변경시켰다.

산피에트로대성당 본문 이미지 1

1546년 교황 바오로 3세는 마침내 71세의 미켈란젤로에게 공사의 전권을 맡겼다. 
그는 그리스 십자식 플랜을 채용함으로써 브라만테의 안()으로 돌아가는 듯하였으나, 브라만테의 그것과는 달리 네 구석의 작은 원개를 없애고 건물 전체의 긴밀한 조형성과 다이내믹한 공간을 대원개를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통일한다는 탁월한 구상을 생각해내었다. 
일체의 보수를 사양하고 오직 신에 대한 사랑과 사도 베드로에 대한 존경에서 이 조영사업에 몸바친 그는 1564년 그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대원개의 기부()에 해당하는 탕부르의 공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직경 42.4m, 바닥에서 탑 십자가까지의 높이가 약 133m에 달하는 이 원개 공사는 그가 남긴 목제()의 모형과 함께 1588년 자코모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에게 인계되었고, 다시 도메니코 폰타나(Domenico Fontana)의 손으로 넘어가 1590년 마침내 완성되었다. 
건물 전체의 역동감을 그 아름답고 힘찬 곡선에 모았다가 허공에 해방시키는 듯한 이 훌륭한 원개는 그러나, 17세기 초기 신랑()의 전면() 연장과 정면 가득히 펼친 칸막이와 같은 파치아타(서쪽 정면)의 증축으로 인해 그 효과가 크게 손상되었다.
헌당식()은 1622년에 거행되었고, 마침내 명장 잔 로렌초 베르니니(Gian LorenzoBernini)가 나타나, 1655년에서 1667년에 걸쳐 원주회랑으로 에워싸인 훌륭한 정면 광장을 완성시켰다. 
투시효과를 교묘히 이용한 이 훌륭한 광장은 가톨릭의 총본산에 어울리는 규모와 성격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카를로 마데르나(Carlo Maderna)에 의해 정면구성으로 손상된 대성당의 모습을 살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산피에트로대성당 [San Pietro Basilica, ─大聖堂] (두산백과)

2018년 10월 24일 수요일

관음사 ,觀音寺.

관음사 ,觀寺.

요약 황해북도 개성시 박연리 천마산 기슭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찰.
지정번호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25호
소재지개성시 박연리 천마산
시대조선시대
종류/분류사찰유적
북한의 보물급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25호로 변경되었다. 박연리 대흥산성 북문에서 약 1km 정도 거리의 천마산 기슭에 있다. 
970년(고려 광종 21) 법인국사() 탄문()이 처음 세우고, 1393년(조선 태조 1)에 크게 확장하였다. 

1477년(성종 8)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1646년(인조 23)에 다시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1797년(정조 21)에 중수한 것이다.

경내에는 현재 대웅전·승방·칠층석탑·관음굴이 남아 있다. 

승방 중앙에 난 문으로 들어가면, 마당 안쪽에 대웅전이 있고 그 서쪽에 7층석탑, 북쪽으로 관음굴이 있다.

대웅전은 장대석을 쌓아올린 높은 기단 위에 있으며, 정면 3칸(8.4m), 측면 3칸(6.61m)의 겹처마를 댄 다포계 우진각지붕집이다. 
배흘림기둥을 사용하였고, 모서리기둥에 귀솟음과 안쏠림 기법을 사용하여 안정감을 주었다. 

공포 장식은 외부는 쇠서형으로 비교적 길게 뽑고 내부는 교두형()과 운공형()으로 처리하여 운공 위에 연꽃 봉오리를 장식했다. 
모서리에는 용머리를 장식했다. 

창호는 꽃살문으로 달았는데, 특히 화병에 담긴 연꽃을 동판에 새긴 후면창호는 그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내부에는 중층 닫집을 설치하고 그 아래 불단을 놓았다. 
천장에 학, 봉황 조각으로 장식하고 안팎을 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승방은 정면 4칸(10.7m), 서쪽 측면 4칸, 동쪽 측면 2칸의 'ㄴ'자형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에 대문채가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7층석탑은 높이는 약 4.7m로, 고려 때 조성되었다. 
단층기단 위에 7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쪽대기에 상륜을 장식한 석탑이다.

대웅전 뒤쪽에 있는 관음굴은 관음사가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현재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54호로 지정된 대리석관음보살상이 2구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평양시의 중앙역사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공포와 내부 장식 등 조선 중기 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물이다. 

1400년(조선 태종 즉위년)에는 태종이 이 절에서 수륙재를 열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운나라는 소년이 손재주가 너무 좋아 관음사 대웅전 꽃살문을 만드는 데 동원되었다가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하자 자신을 왼손을 잘라 버리고는 손 잘린 자신의 모습을 살문에 조각해 놓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도 손 잘린 운나의 모습이 대웅전 꽃살문에 남아 있다.

북한의 보물급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25호로 변경되었다. 박연리 대흥산성 북문에서 약 1km 정도 거리의 천마산 기슭에 있다. 

970년(고려 광종 21) 법인국사() 탄문()이 처음 세우고, 1393년(조선 태조 1)에 크게 확장하였다. 
1477년(성종 8)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1646년(인조 23)에 다시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1797년(정조 21)에 중수한 것이다. 

경내에는 현재 대웅전·승방·칠층석탑·관음굴이 남아 있다. 
승방 중앙에 난 문으로 들어가면, 마당 안쪽에 대웅전이 있고 그 서쪽에 7층석탑, 북쪽으로 관음굴이 있다. 

대웅전은 장대석을 쌓아올린 높은 기단 위에 있으며, 정면 3칸(8.4m), 측면 3칸(6.61m)의 겹처마를 댄 다포계 우진각지붕집이다. 
배흘림기둥을 사용하였고, 모서리기둥에 귀솟음과 안쏠림 기법을 사용하여 안정감을 주었다. 

공포 장식은 외부는 쇠서형으로 비교적 길게 뽑고 내부는 교두형()과 운공형()으로 처리하여 운공 위에 연꽃 봉오리를 장식했다. 

모서리에는 용머리를 장식했다. 창호는 꽃살문으로 달았는데, 특히 화병에 담긴 연꽃을 동판에 새긴 후면창호는 그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내부에는 중층 닫집을 설치하고 그 아래 불단을 놓았다. 
천장에 학, 봉황 조각으로 장식하고 안팎을 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승방은 정면 4칸(10.7m), 서쪽 측면 4칸, 동쪽 측면 2칸의 'ㄴ'자형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에 대문채가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7층석탑은 높이는 약 4.7m로, 고려 때 조성되었다. 
단층기단 위에 7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쪽대기에 상륜을 장식한 석탑이다. 

대웅전 뒤쪽에 있는 관음굴은 관음사가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현재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54호로 지정된 대리석관음보살상이 2구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평양시의 중앙역사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공포와 내부 장식 등 조선 중기 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물이다. 
1400년(조선 태종 즉위년)에는 태종이 이 절에서 수륙재를 열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운나라는 소년이 손재주가 너무 좋아 관음사 대웅전 꽃살문을 만드는 데 동원되었다가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하자 자신을 왼손을 잘라 버리고는 손 잘린 자신의 모습을 살문에 조각해 놓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도 손 잘린 운나의 모습이 대웅전 꽃살문에 남아 있다.  


위치개성특급시 박연리 천마산 기슭
연혁970년(고려 광종 2) 법인국사() 탄문()이 창건
1393년(태조 2) 중건
임진왜란 때 소실
1646년(인조 24) 중건
1797년(정조 21) 중수
대웅전 아미타삼존불상(금동)(大雄殿 阿彌陀三尊佛像)

대웅전 아미타삼존불상(금동)(大雄殿 阿彌陀三尊佛像)
출처: 북한의 전통사찰

970년 고려 태조 왕건으로부터 '별대덕()', '별화상()'으로 칭송받던 법인국사() 탄문()이 굴 안에 관음보살상 한 쌍을 놓고 '관음굴'이라고 불렀고, 그 후에 관음사가 지어졌다. 
1393년에 크게 확장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1646년에 다시 지었다. 

1797년 고쳐 지을 때 5채의 당우가 있었던 것으로 전하지만 지금은 대웅전과 승방만 남아 있다. 
대웅전 앞에는 고려 시기 석조물인 7층석탑이 있고, 옆에는 관음사가 창건되기 전부터 있었다는 관음굴이 있다.

대웅전은 1.7m의 기단 위에 정면 3칸(8.4m), 측면 3칸(6.61m)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절 건물에서는 보기 드물게 겹처마를 댄 우진각지붕을 이었다. 
건물의 앞면은 기둥 사이를 같게 하고, 옆면은 가운데 칸을 좌우 칸보다 넓게 했다. 
공포는 바깥 7포, 안 9포로 되어 있으며, 모두 32개이다. 
북한의 국보유적 제125호로 알려져 있으나 표식비에는 국보유적 제142호로 표기되어 있다.

관음사(국보급 제125호) 전경
관음사(국보급 제125호) 전경
출처: 조선향토대백과

요사채는 앞면 4칸(10.7m), 서쪽 측면 4칸, 동쪽 측면 2칸인 'ㄴ' 모양의 평면을 가진 배집이다.

대웅전 옆 관음굴 안에는 흰 대리석의 관음보살좌상 2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높이 약 1.2m로 크지 않으나 화려한 보관과 가슴에 드리운 영락과 천의 등이 마치 무른 나무로 조각한 듯 화려하고 섬세하여 고려 석조불상 가운데 대표작이다. 

하나는 두 손을 무릎 위에 드리웠으며, 하나는 왼손 팔꿈치를 무릎 위에 세우고 오른손을 무릎 위에 놓아 차이가 난다. 

현재 전자는 조선중앙력사박물관으로 이동해 보존하고 있고, 후자는 관음굴에 그대로 있다. 
국보유적 제154호로 지정되어 있다.



관음사돌부처(국보급 제154호)
관음사돌부처(국보급 제154호)
북한의 보물급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25호로 변경되었다. 

박연리 대흥산성 북문에서 약 1km 정도 거리의 천마산 기슭에 있다. 

970년(고려 광종 21) 법인국사() 탄문()이 처음 세우고, 1393년(조선 태조 1)에 크게 확장하였다. 

1477년(성종 8)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1646년(인조 23)에 다시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1797년(정조 21)에 중수한 것이다. 

경내에는 현재 대웅전·승방·칠층석탑·관음굴이 남아 있다. 

승방 중앙에 난 문으로 들어가면, 마당 안쪽에 대웅전이 있고 그 서쪽에 7층석탑, 북쪽으로 관음굴이 있다. 

대웅전은 장대석을 쌓아올린 높은 기단 위에 있으며, 정면 3칸(8.4m), 측면 3칸(6.61m)의 겹처마를 댄 다포계 우진각지붕집이다. 

배흘림기둥을 사용하였고, 모서리기둥에 귀솟음과 안쏠림 기법을 사용하여 안정감을 주었다. 

공포 장식은 외부는 쇠서형으로 비교적 길게 뽑고 내부는 교두형()과 운공형()으로 처리하여 운공 위에 연꽃 봉오리를 장식했다. 

모서리에는 용머리를 장식했다. 
창호는 꽃살문으로 달았는데, 특히 화병에 담긴 연꽃을 동판에 새긴 후면창호는 그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내부에는 중층 닫집을 설치하고 그 아래 불단을 놓았다. 
천장에 학, 봉황 조각으로 장식하고 안팎을 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승방은 정면 4칸(10.7m), 서쪽 측면 4칸, 동쪽 측면 2칸의 'ㄴ'자형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에 대문채가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7층석탑은 높이는 약 4.7m로, 고려 때 조성되었다. 
단층기단 위에 7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쪽대기에 상륜을 장식한 석탑이다. 

대웅전 뒤쪽에 있는 관음굴은 관음사가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현재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54호로 지정된 대리석관음보살상이 2구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평양시의 중앙역사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공포와 내부 장식 등 조선 중기 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물이다. 
1400년(조선 태종 즉위년)에는 태종이 이 절에서 수륙재를 열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운나라는 소년이 손재주가 너무 좋아 관음사 대웅전 꽃살문을 만드는 데 동원되었다가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하자 자신을 왼손을 잘라 버리고는 손 잘린 자신의 모습을 살문에 조각해 놓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도 손 잘린 운나의 모습이 대웅전 꽃살문에 남아 있다.  

















































































































관음사 7층탑( )관음사 7층탑은 대웅전 앞에 있는 석탑으로 높이는 4.77m이다. 기단은 밑돌과 갑돌이 복련과 양련조각으로 된 연꽃대좌형 기단이다. 
보존유적 제540호.

관음사7층탑(보존급 제540호)
관음사7층탑(보존급 제540호)

관음사(국보급 제125호) 거북이바위관음사(국보급 제125호) 거북이바위



관음사(국보급 제125호) 보살동굴관음사(국보급 제125호) 보살동굴

970년에 지은 관음사는 1393년에는 크게 확장 되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듭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646년에 고쳐지은 것이다. 
원래 다섯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관음사에는 지금 대웅전과 승방, 7층탑과 관음굴이 남아있다. 
절의 중심건물인 대웅전은 정면 3칸(8.4m), 측면 3칸(6.61m)의 크지 않은 건물이다.

대웅전의 평면배치에서 흥미있는 것은 장여와 장여 사이의 간격을 배수로 하여 두공을 배렬하고 평면을 이룬 것이다. 
이 절에 세운 홀림기둥은 굵기는 43cm, 높이는 2.83m로서 높이가 밀굵기의 6.58배나 된다. 
모서리기둥은 밑굵기 45cm로서 가운데기둥보다 굵으며 높이는 더 높게 하고 대각선방향으로 조금씩 기울여 세웠다.

평방 위에는 바깥 7포, 안 9포로 된 화려한 포식두공을 놓았다. 
두공은 매개 기둥 위마다 1개씩 놓는 한편 정면과 측면 가운데칸에서는 기둥사이마다 2개씩, 측면 두 가녘 기둥 사이에는 1개씩 놓아 모두 32개이다. 
소혀형제공으로 하면서 비교적 길게 뽑은 것이 특이하며 네 모서리와 정면 가운데기둥들의 두공 위에는 용머리조각을 하였다. 
건물 안에는 소람반자를 높이 대고 거기에 잇대어 좁은 빗반자를 중도리까지 올려붙였다. 
집 안 깊숙이 불단을 놓고 그 위에는 이층 짜리 닫집을 달아놓았다.

17포나 되게 섬세하게 짜올리고 붉은 빛이 돌게 한 닫집은 그 자체가 하나의 공예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화려하다. 
관음사에는 겹처마를 댄 우진각지붕을 하였다. 
지붕의 용마루는 짧게 하면서도 마루들과 지붕면, 처마에 이르기까지 완만한 휘임을 주어 몸체에 잘 어울리며 아름다워 보인다. 
건물전체에 입힌 금단청은 퍽 은근한 감을 준다.

이 절의 뒤벽에는 뚫음새김으로 장식한 문짝이 달려있는데 한짝은 완성된 것이고 하나는 채 완성되지 못한 것이다. 
대웅전 앞 서쪽에 서 있는 높이 4.77m의 7층탑은 고려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우수한 탑이다. 
승방은 정면 4칸(10.7m), 서쪽측면 4칸, 동쪽 측면 2칸되는 ‘ㄴ’모양의 평면을 가진 뱃집이다. 
관음사뒤의 관음굴은 관음사가 서기 전부터 있던 것이다. 
그 안에 있던 2개의 관음보살상은 옛날의 조각상으로서는 매우 보기 드문 대리석상이다. 
유백색대리석으로 조각한 높이 1.2m 정도의 앉은 모양의 관음상은 머리에 화려한 관을 쓰고 여러 가지 몸치레를 하였으며 부드럽게 드리운 옷주름은 섬세하고 아름답다.

관음사 대웅전 뒤쪽의 미완성 문짝 하나를 두고 다음과 같은 기막힌 사연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이곳에 나이는 어리지만 손재간이 비상한 운나라는 소년이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관가에서 나졸들이 마을에 달려들어 관음사 절건설에 나어린 운나까지 강제로 끌고 갔다. 
절건설에 동원된 운나는 대웅전 문짝의 장식을 조각하였는데 누구도 그의 재간을 따를 수 없었다.

그가 문짝들을 다 조각하고 이 마지막 문짝을 조각하고 있던 어느 날 어머니의 병이 위급하다는 소식에 접하게 되었다. 
홀로 병석에서 신음하고 있을 어머니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던 소년은 집에 잠깐 다녀오게 해달라고 간청하였으나 매정하고 포악한 통치자들은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아들을 애타게 찾다가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는 비통한 소식을 전해듣게 된 운나는 크나큰 슬픔과 간악한 통치자들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자기의 손재간을 원망하며 다시는 그들을 위해 자기의 재간을 바치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칼로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버리고는 절을 뛰쳐나와 농민군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대웅전 문짝중의 하나만은 지금까지 미완성품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고 한다.


관음사(국보급 제125호) 목욕탕

관음사(국보급 제125호) 목욕탕

유의 

  • **본 내용는 1999~2005년 남북공동 편찬사업에 의해 발간된 자료로서,
    북한에서 사용되는 표현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북한 자료의 특수성으로 내용의 최신성이나 이미지의 선명도가 다소 떨어지는 점 양해 부탁 드리겠습니다.


참조

[네이버 지식백과] 관음사 [觀音寺] (조선향토대백과, 2008., (사)평화문제연구소)
관음사 [觀音寺] (북한의 전통사찰, 2011. 6. 10., 도서출판 양사재)

관음사 [觀音寺]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