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9일 금요일

응고롱고로 보호지역 [Ngorongoro Conservation Area]

응고롱고로, Ngorongoro Distric.
탄자니아 북부 아르샤주에 있는 자연보호구역. 1979년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고 2010년 세계 복합유산으로 변경되었다. 아프리카 심장 속의 심장, 인류의 시원 응고롱고로 분화구 속으로 달린다. 황토 흙먼지 날리며 4륜구동 지프는 질주한다. 끝을 꿈꾸지만 도무지 끝이 없는 것처럼 달려간다.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오지로 불리는 이곳, 응고롱고로 정상에 섰다. 태초의 인류가 탄생한 땅과 같은 곳, 물안개 자욱이 초원을 감싸고 대지의 생명들 습기를 머금고 태고의 땅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곳, 응고롱고로의 첫인상이다. 이 땅은 정녕 아프리카의 배꼽이다. 가슴 깊숙한 곳까지 대자연의 진동이 강하게 밀려드는 이곳, 아프리카의 심장이다. 인류의 시원답게 그 자태 또한 고매하고 청정하다. 태초의 모습 그대로인 이곳, 마주치는 다양한 동물들은 야성의 냄새와 본능을 있는 그대로 뿜어 내고 있다. 본격적인 숲길로 접어들더니 갑자기 깊은 계곡으로 변하고, 또다시 숲이 시작된다. 활엽 수림의 정글처럼 계곡 밑바닥부터 정상까지 짙은 숲이 이어져 있다. 황토의 촉촉한 기운이 대지에 생명력을 더하고 공기 또한 투명하고 상쾌하다. 롯지에 도착한 일행들은 평온하고 원시적인 마을 같은 산장에 매료된 듯, 미소와 안도의 표정들이다. 인간에게 가장 평온한 휴식처는 나의 본성과 닮은 곳이며,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위로해주는 곳이다. 안개 자욱한 응고롱고로의 첫날밤을 마주하고 있다. 부슬부슬 빗방울, 초원의 생명력처럼 투 두둑 떨어지고 있다. 마음마저 차분히 가라앉는 밤. 빗소리에 나의 의식이 깨어 난다.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되는 곳이다. 높은 고도 덕분에 시야도 탁 트여있다. 그로 인해 동물들도 거대한 분지 같은 이곳, 우리 아닌 우리 속에서 평온한 일상을 맞이하고 있다. 6인승 사파리 차량에 탑승하고 한참을 비탈진 골짜기 속으로 내려간다. 서울 여의도 면적의 30배에 달한다는 응고롱고로의 저지대 지역까지 동물들의 발자취를 찾아 나서는 길이다. 세계 8대 불가사의이며 세계 최대크기의 분화구인 응고롱고로는 다양한 종의 동물들이 서식하며 아프리카에서도 손꼽히는 야생동물의 보고다. 특히 아프리카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화이트 코뿔소(실제 흰색 코뿔소가 아니라 입 모양이 넓은 특징을 갖고 있으며 wide가 잘못 전달 되어 white가 되었다고 한다)가 서식하는 것으로 더욱 유명한 곳이기에 일행들은 기대가 더 크다. 탄자니아의 마사이어로 '큰 구멍'이라는 뜻의 응고롱고로는 남북으로 16㎞, 동서로는 19㎞, 특히 아래로의 깊이가 600m로 제주도의 8배에 달하는 면적이다. 동물 백화점이라 불리는 응고롱고로에 살고 있지 않는 동물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기린이다. 분화구를 둘러싼 외각 지역의 경사가 아주 심하기 때문이란다. 이 경사지고 좁은 길은 사람도 쉽게 통과하지 못한다. 내려가는 길과 오르는 길이 모두 일방통행이며 사륜구동 차량이 외에는 출입할 수 없다. 응고롱고로 분화구의 정 중앙에는 마카 투라 불리는 호수가 있다. 이 호수는 아무리 혹독한 건기라도 항상 물이 고여 있기 때문에 '아프리카의 에덴동산'이라고도 불린다. 연중 건기와 우기에 따라 찾아오는 동물 수가 틀리지만 펠리컨과 홍학 떼도 볼 수 있다. 홍학 무리들의 분홍빛이 띠를 이루는 호수 주변은 마치 봄의 벚꽃놀이처럼 분홍빛 장관을 이룬다. 응고롱고로는 그 유명한 탄자니아의 전사, 마사이 부족의 땅이며 유럽인에게 처음 발견된 것은 1892년 독일인 바우만 박사에 의해서였으며 그 이후 유럽 탐험가들의 발걸음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북서쪽으로 50km 떨어진 올두바이 계곡 Olduvai Gorge은 200만 년 전의 초기 인류 진잔트로푸스 보이세이가 발견된 곳으로 이곳에는 인류학 박물관도 자리하고 있다. 원시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땅, 응고롱고로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태초 모습 그대로다. 비록 가난한 나라이긴 해도 자연보호 의지는 한국보다 훨씬 앞서 있다. 탄자니아의 경우 국토의 38%가 국립공원 아니면 자연보호지구다. 그 면적을 다 합치면 한반도 1.5배가 넘는다. 이 넓은 땅에 사람의 거주가 금지 또는 제한돼 있고 사냥조차 할 수 없게 돼 있는 것이다. 이런 규제가 철저히 지켜지기까지는 동물학자와 지식인이 흘린 피땀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동부 아프리카에서 야생동물 보호운동이 본격화한 것은 1950년대 말부터였다. 구미의 지식층과 케냐 탄자니아 정부가 합심해 공원을 지정하고 사파리 차량이 다닐 수 있는 길을 정비하는 한편 밀렵꾼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당시 탄자니아에서 야생동물 연구와 자연보호 운동에 앞장선 인물이 독일인 베른하르트 그르지멕(Bernhard Grzimek) 교수였다. 그는 평생 모은 기금으로 동부 아프리카 국가를 지원하며 이 지역 동물보호운동에 불을 붙였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동물의 대이동을 바라보면 그만 숨이 멎는다. 누구나 동물이 우리의 친구이자 이웃임을 실감하게 된다. 그르지멕 교수는 야생동물 보고서와 같은 책과 영화를 제작했고 언론 매체를 통해 야생동물과 자연, 이 무한대의 값진 인류 유산을 보존해야 한다고 유럽인과 아프리카 지도자들에게 온몸으로 역설해 온 것이다. 그가 목숨을 포함해 모든 것을 바쳐 왔기에 우리가 지금 야성의 동물들과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태초의 원시 자연, 신이 창조하신 에덴동산 응고롱고로. 동물의 낙원 그대로, 수 천년 세월이 지나 오늘에 이르도록 태초의 창조물들은 창조와 진화를 거듭하고 오늘의 응고롱고로를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다. 생명의 땅, 신비의 대지 응고롱고로는 21세기 인간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포근한 휴식처이며, 동물과 인간이 태초에 하나였음을 보여주는 원시 대자연이자 아프리카의 마지막 낙원인 것이다. 화산 분화로 형성된 거대한 응고롱고로 크레이터를 중심으로 한 자연보호구역이다. 본래는 영국의 보호령이었던 1951년 설립한 세렝게티 국립공원에 속했으나 1959년 새로운 공원인 응고롱고로 보호구역으로 설립되었다. 1979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면적 8,094㎢를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하였고 2010년 인류의 진화에 관한 많은 발견이 이루어진 점을 인정하여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이 합쳐진 세계 복합유산으로 변경하였다. 부근에 물이 깊이 고인 엠파 카 아이(Empakaai)Empakaai 크레이터와 활화산인 올도니오 렝가산(Oldonyo Lenga)이 있다. 기후가 온난하고 짧은 시간에 비가 많이 내려서 동·식물이 다양하게 분포한다. 식물로는 자귀나무의 일종으로 높이 약 30m 이상 자라는 알비지아 구미 파리하아 관목류가 자란다. 동물은 약 2만 5000마리가 서식하여 야생동물의 보고()라고 불린다. 대표적인 종은 아프리카물소·검은꼬리누·사바나 얼룩말·그랜트 가젤· 얼룩 하이에나 등이며 코끼리·아누비스 개코원숭이·검은 등재 칼·큰 귀 여우 등도 흔하다. 조류는 400여 종이 분포하는데, 후투티·타조·모래 달리기 등이 대표적인 종이다. 올두바이 계곡(Olduvai Gorge)에서 300만∼360만 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의 뼈와 150만~200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던 초기 인류인 호모 하빌리스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라이 톨리(Laitoli)에서는Laitoli 360만 년 전의 인류 조상의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었다. 크레이터 주위의 평원에서 마사이족이 가축을 방목하면서 살고 있다. 탄자니아의 아루샤 주(州)를州 이루는 다섯 개 지역 가운데 하나로 북쪽으로 케냐(Kenya)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전체 인구는 약 13만여 명이며, 지역 주민의 대부분은 마사이(Maasai)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칼데라로 알려져 있는 응고롱고로 분화구와 활화산인 올도이니 오 렝가 이(OlOl Doinyo Lengai)가 있다. 이 지역 남쪽의 대부분은 응고롱고로 보존 구역(Ngorongoro Conservation Area)에 포함되어 있다. 응고롱고로 보존 구역은 사람이 거주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지만 농작물 재배와 가축 방목을 포함한 토지 이용에는 제한을 두고 있다. 특히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응고롱고로 분화구에서의 거주와 방목은 금지되어 있다. 화산 분화로 형성된 거대한 응고롱고로 크레이터를 중심으로 한 자연보호구역이다. 본래는 영국의 보호령이었던 1951년 설립한 세렝게티 국립공원에 속했으나 1959년 새로운 공원인 응고롱고로 보호구역으로 설립되었다. 1979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면적 8,094㎢를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하였고 2010년 인류의 진화에 관한 많은 발견이 이루어진 점을 인정하여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이 합쳐진 세계 복합유산으로 변경하였다. 부근에 물이 깊이 고인 엠파 카 아이(Empakaai)Empakaai 크레이터와 활화산인 올도니오 렝가산(Oldonyo Lenga)이 있다. 기후가 온난하고 짧은 시간에 비가 많이 내려서 동·식물이 다양하게 분포한다. 식물로는 자귀나무의 일종으로 높이 약 30m 이상 자라는 알비지아 구미 파리하아 관목류가 자란다. 동물은 약 2만 5000마리가 서식하여 야생동물의 보고()라고 불린다. 대표적인 종은 아프리카물소·검은꼬리누·사바나 얼룩말·그랜트 가젤· 얼룩 하이에나 등이며 코끼리·아누비스 개코원숭이·검은 등재 칼·큰 귀 여우 등도 흔하다. 조류는 400여 종이 분포하는데, 후투티·타조·모래 달리기 등이 대표적인 종이다. 올두바이 계곡(Olduvai Gorge)에서 300만∼360만 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의 뼈와 150만~200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던 초기 인류인 호모 하빌리스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라이 톨리(Laitoli)에서는Laitoli 360만 년 전의 인류 조상의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었다. 크레이터 주위의 평원에서 마사이족이 가축을 방목하면서 살고 있다. 응고롱고로 분화구[ Ngorongoro Crater 마사이어로 '큰 구멍'을 의미하는 응고롱고로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야생생물이 풍부한 거대한 분화구이다. 면적이 160제곱킬로미터인 이곳은 누 영양 수천 마리, 얼룩말, 코끼리와 사자를 비롯한 대형 포유류 50종과 타조에서 오리까지 조류 200종이 서식한다. 자연의 천국인 응고롱고로는 250만 년 전에 화산이 분화한 후 정상이 붕괴해 만들어졌다. 북서쪽의 라운드테이블 힐이 고대 화산의 유일한 흔적이다. 칼데라(분화구)의 가장자리가 붕괴되지 않고 잘 보존된 곳 중에서 세계 최대의 크기를 자랑한다. 전 세계 과학자들이 포식자와 먹이의 관계, 유전적 고립과 동계 교배를 연구하는 이곳은 살아 있는 연구소이다. 분화구 밖에서 사는 동물과 달리 이곳의 동물은 이동을 하지 않는다. 우기에는 드넓은 평원에서 살고 우기에는 뭉게 습지의 습지대에서 지내는데, 일 년 내내 물과 먹이가 풍부해서 이곳을 떠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응고롱고로 분화구는 동아프리카 야생 생태계를 그대로 축소해 놓은 곳이 되었다.

문헌"
응고롱고로 보호지역 [Ngorongoro Conservation Area] (두산백과)
탄자니아 응고롱고로 - 인류의 시원, 야생 동물의 지상낙원 (세계의 명소,)
응고롱고로 분화구 [Ngorongoro Crater]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자연 절경 1001, 2008.)

2019년 3월 27일 수요일

열하일기, 熱河日記.

열하일기, 熱河日記.
열하일기, 熱河日記.
조선 정조 때에 박지원(朴趾源)이 청나라를 다녀온 연행 일기(燕行日記). 26권 10 책. 필사본.
1780년(정조 4) 연암 박지원은 종형인 금성 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건륭제(고종)의 칠순연(七旬宴)에 참석하는 사신의 일원으로 동행하게 되었다. 중국 연경(燕京)을 지나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장지인 열하(熱河)까지 기행한 기록을 담았는데 중국의 문인들과 사귀고, 연경(燕京)의 명사들과 교유하며 중국의 문물제도를 목격하고 견문한 내용을 각 분야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1780년 6월 24일 압록강 국경을 건너는데 부터 시작하여 요동(遼東) ·성경(盛京) ·산하이관[山海關]을 거쳐 베이징[北京]에 도착하고, 다시 열하로 가서, 8월 20일 다시 베이징에 돌아오기까지 약 2개월 동안 겪은 일을 날짜 순서에 따라 항목별로 적었다. 조선의 사신 일행이 열하까지 가게 된 이유는 연경에 도착해보니 청나라 황제는 열하에 가고 연경에 없었기 때문에 그의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까지 가게 된 것이다.

연암이 남긴 《열하일기》는 당시 보수파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나, 중국의 신문물(新文物)을 망라한 서술, 그곳 실학사상의 소개로 수많은 조선시대 연경 기행문학의 정수(精髓)로 꼽힌다. 이 책은 당초부터 명확한 정본(正本)이나 판본(版本)도 없었고, 여러 전사본(轉寫本)이 유행되어 이본(異本)에 따라 그 편제(編制)의 이동이 심하다.

이 책에는 중국의 역사 ·지리 ·풍속 ·습상(習尙) ·고거(攷據) ·토목 ·건축 ·선박 ·의학 ·인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문학 ·예술 ·고동(古董) ·지리 ·천문 ·병사 등에 걸쳐 수록되지 않은 분야가 없을 만큼 광범위하고 상세히 기술되었는데, 경치나 풍물 등을 단순히 묘사한 데 그치지 않고 이용후생(利用厚生) 면에 중점을 두어 수많은 《연행록(燕行錄)》 중에서도 백미(白眉)로 꼽힌다. 충남대학교 도서관 소장 연암 수택본(手澤本) 26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권 1 <열하일기서(熱河日記序)> <도강록(渡江錄)>:서문은 필자 미상이나, 풍습 및 관습이 치란(治亂)에 관계되고, 성곽 ·건물 ·경목(耕牧) ·도야(陶冶) 등 이용후생에 관계되는 일체의 방법을 거짓 없이 기술하였다고 설명하였다. 또 <도강록>은 압록강에서 랴오양[遼陽]까지 15일간(1780.6.24∼7.9)의 기행문으로 중국인이 이용후생적인 건설에 심취하고 있음을 서술하였다.

권 2 <성경잡지(盛京雜識)>:십리 하(十里河)에서 소 흑산(小黑山)까지 5일간의 기록으로, 특히 <속재 필담(粟齋筆譚)> <상루필담(商樓筆譚)> <고동록(古董錄)>은 흥미 있는 내용이다.

권 3 <일신 수필(馹汛隨筆)>:신 광녕(新廣寧)에서 산하이관까지 9일간의 기록으로, 그 서문 중의 이용후생학에 대한 논술이 독특하다.

권 4 <관내 정사(關內程史)>:산하이관에서 연경까지 11일간의 기록으로, 여기 수록된 한문 고대소설 <호질(虎叱)>은 연암의 소설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작품의 하나이다.

권 5 <막 북행 정록(漠北行程錄)>:연경에서 열하까지 5일간의 기록으로, 열하에 대하여 소상히 기록하였고, 그곳을 떠날 때의 아쉬운 심경을 그렸다.

권 6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열하에 있는 태학(太學)에서 6일간 지낸 기록으로 당시 중국의 명망 있는 학자들과 더불어 나눈 한 ·중 두 나라 문물제도에 관한 논평 및 지동설(地動說) ·달세계 등에 관한 토론이다.

권 7 <구외 이문(口外異聞)>:구베이커우[古北口] 밖의 기문이 담(奇聞異談)을 적은 것으로, 반양(盤羊)에서 천불사(千佛寺)에 이르는 60여 종의 이야기이다.

권 8 <환 연도 중록(還燕道中錄)>:열하에서 다시 연경으로 돌아오는 도중 6일간의 기록으로, 대개 교량 ·도로 ·방호(防湖) ·방하(防河) ·탁타(橐駝:庭園師) ·선제(船制) 등에 관한 논평이다.

권 9 <금료소초(金蓼小鈔)>:주로 의술(醫術)에 관한 기록으로 《연암집(燕巖集)》에서는 이를 <보유(補遺)>라 한다.

권10 <옥갑 야화(玉匣夜話)>:이본(異本)에 따라서는 <진덕 재야화(進德齋夜話)>로 된 것도 있다. 여기 수록된 <허생전(許生傳)>은 연암 소설뿐만 아니라 한국 소설 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권 11 <황도 기략(黃圖紀略)>:황성(皇城)의 구문(九門)에서 화조포(花鳥鋪)까지 38종의 문관(門館) ·전각(殿閣) ·도지(島池) ·점포(店鋪) ·기물(器物) 등에 관한 기록이다.

권 12 <알성 퇴술(謁聖退述)>:순천부학(順天府學)으로부터 조선관(朝鮮館)에 이르기까지 역람 한 기록이다.

권 13 <앙엽기(盎葉記)>:홍인사(弘仁寺)에서 이마 두총(利瑪竇塚)에 이르는 20개의 명소(名所)를 두루 구경한 기록이다.

권 14 <경개 록(傾蓋錄)>:열하의 태학(太學)에서 6일간 머물며, 그곳 학자들과 응수한 기록이다.

권 15 <황교 문답(黃敎問答)>:황교와 서학자(西學者)의 지옥(地獄)에 관한 논평이다. 끝에는 세계의 이민종(異民種)을 열거하는 가운데 특히 몽골과 아라사 종족의 강맹(强猛)함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권 16 <행재잡록(行在雜錄)>:청나라 황제의 행재소(行在所)에서의 자세한 견문록이다. 여기서 특히 청나라의 친선 정책(親鮮政策)의 연유를 밝혔다.

권 17 <반선 시말(班禪始末)>:청 황제의 반선(班禪)에 대한 정책을 논하고, 또 황교(黃敎)와 불교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권 18 <희본 명목(戱本名目)>.

권 19 <찰습륜포(札什倫布)>:찰습륜포란 티베트어(語)로 ‘대승(大僧)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열하에 있을 때의 반선에 대한 기록이다.

권 20 <망양록(忘羊錄)>:음악에 관하여 중국 학자들과 서로의 견해를 피력한 기록이다.

권 21 <심세편(審勢編)>:당시 조선 사람의 오망(五妄)과 중국 사람의 삼난(三難)을 역설한 기록이다. 북학(北學)에 대한 예리한 이론을 펼쳤다.

권 22 <곡정 필담(鵠汀筆譚)>:중국 학자 윤가 전(尹嘉銓)과 더불어 전날 태학(太學)에서 미진하였던 토론을 계속한 기록이다. <태학유관록> 중에서 미흡하였던 이야기인 월세계 ·지전(地轉) ·역법(曆法) ·천주(天主) 등에 대한 논술이다.

권 23 <동란섭필(銅蘭涉筆)>:동란재(銅蘭齋)에 머물 때 쓴 수필이다. 주로 가사 ·향시(鄕試) ·서적 ·언해(諺解) ·양금(洋琴) 등에 대하여 쓴 것이다.

권 24 <산장 잡기(山莊雜記)>:열하 산장에서의 여러 가지 견문기이다.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상기(象記)> 등은 가장 비장하고 기괴하게 묘사되었다.

권 25 <환희기(幻戱記)>:광 피사 표 패루(光被四表牌樓) 아래서 중국 요술쟁이의 여러 가지 연기를 구경한 소감을 적은 이야기이다.

권 26 <피서 록(避暑錄)>:열하의 피서 산장에서 지낸 기록이다. 주로 조선과 중국 두 나라의 시문(詩文)에 대한 논평이다. 연암의

후손에 의하여 최근 <양매시화(楊梅詩話)>가 새로 발견되었는데, 이는 양 매서가(楊梅書街)에서 중국의 학자들과 주고받은 한시화(漢詩話)로서, 당시 옮겨 쓰려다가 우연히 누락된 것으로 짐작된다. 1911년 광문회(光文會)에서 국판 286면 활자본으로, 1932년 박영철(朴榮喆)이 6 책 활자본으로, 1948년 김성칠(金聖七) 국역본이 정음사(正音社)에서 각각 나왔으며, 1956년 타이완[臺灣] 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사본(寫本)을 영인(影印) 출판하였다. 또 최근 민족문화 추진회의 《고전국역 총서(古典國譯叢書)》 18∼19 책으로 간행된 26권 2 책의 이가원(李家源) 국역본이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박지원(朴趾源)이 청나라를 다녀온 연행일기(燕行日記)로서 26권 10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1780년에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이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칠순 잔치를 축하하는 진 하사로 베이징[북경(北京)]에 가게 되자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수행하면서 곳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사회 제도와 양반 사회의 모순을 신랄히 비판하는 내용을 독창적이고 사실적인 문체로 담았기 때문에 위정자들에게 배척당했다. 책의 구성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7권은 여행 경로를 기록했고 8~26권은 보고 들은 것들을 한 가지씩 자세히 기록했다. 박지원은 이 책을 통해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비롯한 북학파의 사상을 역설하고, 동시에 구태의연한 명분론에 사로잡혀 있는 사고방식을 효과적으로 풍자하기 위해 여행과 관련된 일화를 사실적으로 서술하기도 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창작하기도 했다.

간본(刊本)으로는 1901년 김택영(金澤榮)이 ≪연암집 燕巖集≫ 원집에 이어 간행한 동 속집 권1·2(고활자본)에 들어 있고, 1911년 광문회(光文會)에서 A5판 286면의 활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조선조 1780년(정조 4)에 박지원(朴趾源)은 청나라 건륭(乾隆)황제의 70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한 외교사절단에 참가하여 중국을 다녀올 수 있었다. 그 해 음력 5월 말 한양을 출발해서 압록강을 건넌 뒤 요동(遼東) 벌판을 거쳐, 8월 초 드디어 북경에 도착했다. 그런데 예기치 않았던 건륭황제의 특명이 내려, 만리장성 너머 열하(熱河)까지 갔다가,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약 한 달 동안 머문 뒤 그해 10월 말에 귀국했다. 당시 박지원이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발전한 청나라의 실상을 직접 목격하고 이를 생생하게 기록한 여행기가 바로 『열하일기(熱河日記)』다.

1932년 박영철(朴榮喆)이 간행한 신활자본 ≪연암집≫ 별집 권 11∼15에도 전편이 수록되어 있다. 보유편도 있고 1956년 자유중국의 대만대학(臺灣大學)에서 동 대학 소장본을 영인한 것도 있다.

1780년(정조 4) 저자가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연(七旬宴)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행하는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을 수행하여 청나라 고종의 피서지인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청조 치하의 북중국과 남만주 일대를 견문하고 그곳 문인·명사들과의 교유 및 문물제도를 접한 결과를 소상하게 기록한 연행 일기이다.

각 권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강록>은 압록강으로부터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으로 성제(城制)와 벽돌 사용 등의 이용후생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잡지>는 십리 하(十里河)에서 소 흑산(小黑山)에 이르는 5일간에 겪은 일을 필담(筆談) 중심으로 엮고 있다.

<일신 수필>은 신 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하이관(山海關)에 이르는 병 참지(兵站地)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관내 정사>는 산하이관에서 연경(燕京)에 이르는 기록이다. 특히 백이(伯夷)·숙제(叔齊)에 대한 이야기와 <호질 虎叱>이 실려 있는 것이 특색이다.

<막 북행 정록>은 연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5일간의 기록이다. <태학유관록>은 열하의 태학(太學)에서 머무르며 중국 학자들과 지전설(地轉說)에 관하여 토론한 내용이 들어 있다. <구외 이문>은 고북구(古北口) 밖에서 들은 60여 종의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환 연도 중록>은 열하에서 연경으로 다시 돌아오는 6일간의 기록으로 교통제도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금료소초>는 의술(醫術)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옥갑 야화>는 역관들의 신용문제를 이야기하면서 허생(許生)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뒷날에 이 이야기를 <허생전>이라 하여 독립적인 작품으로 거론하였다.

<황도 기략>은 황성(皇城)의 문물·제도 약 38종을 기록한 것이다. <알성 퇴술>은 순천부학(順天府學)에서 조선관(朝鮮館)에 이르는 동안의 견문을 기록하고 있다. <앙엽기>는 홍인사(弘仁寺)에서 이마 두총(利瑪竇塚)에 이르는 주요 명소 20군데를 기술한 것이다.
<경개 록>은 열하의 태학에서 6일간 있으면서 중국 학자와 대화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황교 문답>은 당시 세계정세를 논하면서 각 종족과 종교에 대하여 소견을 밝혀놓은 기록이다. <행재잡록>은 당시 청나라 고종의 행재소(行在所)에서 견문한 바를 적은 것이다. 그중 청나라가 조선에 대하여 취한 정책을 부분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반선 시말>은 청나라 고종이 반선(班禪)에게 취한 정책을 논한 글이다. <희본 명목>은 다른 본에서는 <산장 잡기> 끝부분에 있는 것으로 청나라 고종의 만수절(萬壽節)에 행하는 연극놀이의 대본과 종류를 기록한 것이다. <찰십륜포>는 열하에서 본 반선에 대한 기록이다.

<망양록>과 <심세편>은 각각 중국 학자와의 음악에 대한 토론 내용과 조선의 오망(五妄), 중국의 삼난(三難)에 대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곡정 필담>은 주로 천문에 대한 기록이다. <동란섭필>은 가악(歌樂)에 대한 잡록이며, <산장 잡기>는 열하 산장에서의 견문을 적은 것이다.

<환희기>와 <피서 록>은 각각 중국 요술과 열하 산장에서 주로 시문 비평을 가한 것이 주요 내용이다. ≪열하일기≫는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 北學議≫와 함께 “한 솜씨에서 나온 것 같다(如出一手).”라고 한 평을 들었다.
주로 북학을 주장하는 내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고, 당시에 정조로부터 이 책의 문체가 순정(醇正) 하지 못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으나 많은 지식층에게 회자된 듯하다.
종래의 연행록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열하일기≫는 박지원의 기묘한 문장력으로 여러 방면에 걸쳐 당시의 사회문제를 신랄하게 풍자한 조선 후기 문학과 사상을 대표하는 걸작이라 하겠다.

열하는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약 230km 떨어진 허베이 성(河北省) 동북부, 난하(濼河)의 지류인 무열하(武烈河) 서쪽에 있다. 열하라는 지명은 무열하 주변에 온천들이 많아 겨울에도 강물이 얼지 않는 데에서 유래했다. 건륭황제는 이곳에다 '피서산장(避暑山莊)'이라는 거대한 별궁을 짓고 거의 매년 행차하여 장기간 체류함으로써, 열하를 북경에 버금가는 정치적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청나라의 국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그의 치세 중에 열하는 황제를 알현하러 모여든 몽골·티베트·위구르 등의 외교사절들로 붐볐다. 박지원을
포함한 일행은 열하를 방문한 최초의 조선 외교사절이었다. 그래서 그는 열하에서 보고 들은 진귀한 견문을 자신의 여행기에 집중적으로 서술했을 뿐 아니라, 그 제목까지도 특별히 '열하일기'라 지었던 것이다. 

청나라를 다녀온 여행기인 연행록(燕行錄)에는 대체로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일기 형식을 취해 여행 체험을 날짜순으로 기록하는 유형으로서, 김창업(金昌業)의 『연행 일기(燕行日記)』를 비롯한 대부분의 연행록들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비교적 드물지만, 인물·사건·명승고적 등 견문의 내용을 주제별로 나누어 기록하는 유형으로서, 홍대용(洪大容)의 『연기(燕記)』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첫째 유형은 여행의 전 과정을 충실히 기록할 수 있는 반면, 중요한 사항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서술하기는 어려우며, 중복되는 내용이 많아 산만하고 지루한 느낌을 주기 쉽다. 둘째 유형은 주제에 따른 집중적인 논의를 할 수 있지만, 그 대신 여행의 전 과정을 제대로 전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열하일기』는 이와 같은 두 유형의 연행록들이 지닌 장점을 종합하면서, 아울러 그 나름의 창안을 가미하여 독특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우선, 주요 여정은 첫째 유형의 연행록처럼 날짜별로 충실히 기록해 나가되, 해당 일자의 기사에 포함시키기 힘든 중요한 사항은 독립된 한 편의 글로 서술해 두었다. 이는 둘째 유형의 연행록이 지닌 장점을 부분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열하일기』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특색은, 열하나 북경에 장기간 머물 때 얻은 잡다한 견문들을 시화(詩話)·잡록(雜錄)·필담(筆談)·초록(抄錄) 등 다양한 형식으로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는 점이다. 『열하일기』는 「도강록(渡江錄)」부터 「금료소초(金蓼小抄)」까지 모두 25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시화와 잡록에 해당하는 것은 「행재잡록(行在雜錄)」, 「피서 록(避暑錄)」, 「구외 이문(口外異聞)」, 「황도 기략(黃圖紀略)」, 「알성 퇴술(謁聖退述)」, 「앙엽기(盎葉記)」, 「동란섭필(銅蘭涉筆)」 등이다. 이러한 시화나 잡록을 통해 박지원은 당시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청나라 학계와 문단의 최신 동향을 주로 소개하고 있다.

「속재 필담(粟齋筆談)」, 「상루필담(商樓筆談)」, 「황교 문답(黃敎問答)」, 「망양록(忘羊錄)」, 「혹정 필담(鵠汀筆談)」 등 중국인들과 나눈 필담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필담들을 『열하일기』에 원고 그대로 싣지 않고, 독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도록 현장감을 살린 대화록으로 교묘하게 재구성해 놓았다. 그밖에도
중국 여행 중에 입수한 청나라의 공문서, 도서목록, 비문(碑文), 신간 서적 등 각종의 희귀한 자료를 초록하여 소개해 놓았다. 예컨대 『열하일기』의 마지막 편인 「금료소초」는 청나라 문인 왕사정(王士禎)이 지은 『향 조필기(香祖筆記)』란 책에서 의약(醫藥)에 관한 내용을 초록한 것이다.

1830년대 초에 중국을 다녀온 바 있는 김경선(金景善)은 역대 연행록 중 가장 뛰어난 저술로 김창업의 『연행 일기』, 홍대용의 『연기』,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꼽으면서, 『열하일기』는 '입전체(立傳體)'적 특징을 지닌 독특한 유형의 연행록이라고 보았다. 그가 말한 입전체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이후 중국 정사(正史)의 체제로 계승되어 온 기전체(紀傳體), 그중 특히 열전(列傳) 형식을 가리킨다. 김경선은 『열하일기』가 단순한 여행 기록이 아니라 여행 도상에서 마주친 수많은 인간들을 생생하게 형상화한 일종의 '열전'이기도 하다는 점을 통찰한 것이라 하겠다.

내용상으로 볼 때 『열하일기』는 청나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의 현실에 대한 풍부한 견문과, 이에 기초한 박지원의 실학사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열하일기』의 곳곳에서 박지원은 청나라가 눈부신 번영과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고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청나라가 한족(漢族)뿐만 아니라 몽골·티베트 등 주변의 강성한 민족들의 저항을 억누르려고 무척 고심하고 있음도 놓치지 않고 꿰뚫어 본다. 

박지원은 상업을 중심으로 청나라의 발전상을 다각도로 증언하면서,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할 구체적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열하일기』에서 그는 도시마다 시장이 번창하고 있으며, 도로와 교량이 잘 정비되어 있어 수레와 선박을 이용한 교통이 원활한 점, 궁전을 비롯한 각종 건축들이 크고 화려하며 벽돌을 사용하여 견고한 점 등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우리도 청나라처럼 벽돌을 널리 활용하고 수레를 전국적으로 통용하게 하자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청나라와 통상(通商)한다면, 국내의 산업을 촉진할 뿐 아니라 문명의 수준을 향상하고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박지원의 실학사상은 청나라의 선진문물 수용을 통한 부곡 책(富國策)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양반들은 경제보다 도덕을 중시하는 유교사상으로 인해 상공업이나 농업의 실무에 무지하고 무관심했다. 또한 청나라는 오랑캐요, 조선은 소중화(小中華)라는 의식이 골수에 박혀 청나라의 선진문물조차 싸잡아 배격했다. 그러므로 실학사상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양반들의 고루한 사고방식부터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이 사물을 새롭게 인식할 것을 역설하고 있음은 바로 그 때문이다.「산장 잡기(山莊雜記)」편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서 그는 마음을 차분히 다스림으로써 격류를 무사히 건널 수 있었던 자신의 체험담을 소개하며, 사물을 인식할 때 선입견이나 감각에 현혹되지 말고 주체적으로 사고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서 난생처음 코끼리를 본 충격을 표현한 「상기(象記)」에서는, 이 세계가 우리의 좁은 식견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주면서, 이처럼 광활하고 경이로운 현실 세계에 대해 편견을 버리고 개방적인 자세로 탐구할 것을 요청한다.

박지원은 주체적이고 개방적인 인식을 강조할 뿐 아니라, 개인의 제한된 관점을 고집하지 말고 더욱 높은 차원에서 사물을 보도록 촉구하기도 한다. 「일신 수필(馹汛隨筆)」편 7월 15일 자 일기에서 그는 중국 여행 중에 본 장관(壯觀)을 논하면서, 남들처럼 명승고적이나 산천 풍물, 웅장한 건축과 번창하는 시장 따위를 꼽지 않았다. 그 대신 관점을 완전히 달리하여, 하찮은 '기왓조각'이나 '거름 똥'이야말로 중국의 첫째가는 장관이라는 역설적인 주장을 편다. 중국인들은 깨어진 기왓조각으로 집의 담과 뜰을 아름답게 꾸미고, 버려진 똥을 남김없이 수거하여 알뜰히 비축하니, 청나라의 문물이 발달하게 된 비결은 이처럼 하찮은 물건이라도 철저히 활용하는 그 실용정신에 있다고 본 것이다.

『열하일기』에는 유명한 「호질(虎叱)」과 「허생전(許生傳)」이 실려 있다. 이 두 작품은 오늘날 박지원의 대표적 한문소설로 간주되고 있지만, 실은 우언(寓言)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호질」에서는 '범'과 '북곽(北郭) 선생', 「허생전」에서는 '허생'과 대장(大將) '이완(李浣)'이라는 다분히 허구적인 존재들이 주고받는 문답이 작품의 핵심을 이루고 있을뿐더러, '범'이나 '허생'이 작자를 대신하여 펼치는 도도한 웅변에 작품의 흥미가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이러한 우언의 형식을 빌어, 가급적 물의를 피하면서도 당시 양반들의 위선과 무능을 통렬히 풍자하는 한편 자신의 실학사상을 더욱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소설로 알려진 「호질」과 「허생전」에 소설적인 속성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려운 특징이 다분한 반면, 『열하일기』에는 얼핏 소설과 거리가 먼 형식을 취한 듯한 부분들에서 도리어 소설적인 특징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도강록」 이하 「환 연도 중록(還燕道中錄)」에 이르는 전반부 7편은 압록강을 건넌 뒤 북경을 거쳐 열하에 갔다가 북경으로 되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식 표현 기법을 종횡무진 구사하여 소설보다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열하일기』에 나타난 소설적 특징으로서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여행 중에 겪은 아무리 사소한 사건일지라도 이를 장면 중심으로 교묘하게 구성하여 매우 풍부하고도 흥미 있는 체험담으로 재현해낸 점이다. 또한 이와 같이 장면 묘사를 추구한 대목들에서는 육성을 방불케 하는 생기 있는 대화를 구사하고 있다. 중국인과의 대화는 반드시 구어체인 백화(白話)로 표현하여 실감을 더하고 있으며, 우리말 대화 장면에서는 조선식 한자어와 우리 고유의 속담을 구사하여 토속어의 맛을 살리면서 해학적 효과도 거두고 있다.

『열하일기』는 소설처럼 곳곳에 일종의 복선을 설정하여 가급적 사건의 서술을 짜임새 있고 흥미로운 것으로 만든다. 그 한 예로 「막 북행 정록(漠北行程錄)」편 8월 5일 자 일기에서 북경에 막 도착한 일행에게 열하로 급히 오라는 황제의 명이 떨어져 소동이 벌어진 대목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박지원은 자초지종을 곧바로 밝히지 않고, 먼저 정사(正使) 박명원(朴明源)이 간밤에 열하로 가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이야기하는 장면부터 그린다. 

그러고 나서, 숙소에 난데없는 소란이 일어나 그 원인을 알지 못한 일행이 법석을 피우고 청나라 통역관들이 허둥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묘사하여 독자들의 궁금증을 잔뜩 돋운 뒤에야 비로소 열하 여행이 갑작스레 결정된 경위를 밝힘으로써, 사건을 한층 더 흥미 있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아울러, 『열하일기』는 소설처럼 정밀한 세부묘사를 통해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는 경향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열하일기』의 도처에서 박지원은 여행 도중에 보고 겪은 자연 풍경과 기상(氣象) 변화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이역만리의 낯선 땅을 직접 여행하는 듯한 실감을 자아내게 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또한 그는 수레와 기계류, 벽돌을 이용한 건축물, 선박과 교량 등 청나라의 갖가지 문물에 대해서도 과학적인 엄밀성을 갖추어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열하에서 구경한 중국의 신비로운 마술들이나 청나라 황제에게 진상한 세계 각국의 기이한 새와 짐승 따위를 여실하게 묘사함으로써, 이 세계가 경이로운 현상들로 가득 차 있음을 충격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소설식의 사실적인 표현은 여행 도중에 마주친 청나라 각계각층의 인물들과 조선 사행의 구성원들을 묘사한 대목들에도 뚜렷이 드러나 있다. 그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각종 상인, 직업적인 연희인(演戱人), 시골 훈장, 점쟁이, 도사, 승려, 창기, 하녀, 거지 그리고 조선 사행 중의 병졸이나 말몰이꾼, 박지원 자신의 하인 등등, 다른 연행록에서는 거의 무시되기 일쑤인 하층 민중들을 자못 애정 어린 시선으로 묘사한 점이다. 

그러한 인물들 가운데 가장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박지원 자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비대한 몸집이나, 농담 좋아하고 겁 많은 성격조차 솔직하게 그려 보인다. 그리하여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은 청나라의 문물을 탐구하고 개혁 방안을 모색하는 진지하고 사려 깊은 선비일 뿐만 아니라, 소탈하고 인정이 많으며 인간적 약점도 지닌 인물로 매우 개성 있게 부각되어 있다.

『열하일기』는 소설처럼 써졌을뿐더러 해학과 풍자가 넘치기에 더욱 재미가 있다. 박지원은 여행 도중에 목격한 우스운 사건들을 놓치지 않고 기록할 뿐 아니라, 수시로 일행들을 웃기는 자신의 익살스러운 언동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그려낸다. 그러나 『열하일기』에서 해학은 그러한 가볍고 유희적인 웃음으로만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피력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해학과 풍자를 즐겨 구사한다. 진지한 사상적 논의를 펼 때마다 돌연 우스운 이야기를 덧붙임으로써,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그러한 대목에 여유와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도강록」 편 6월 28일 자 일기에서 박지원이 동행인 정진사(鄭進士)를 상대로, 성을 쌓는 데에는 벽돌이 돌보다 낫다고 조목조목 논하는 장광설을 펴자, 그 사이 졸고 있던 정진사가 깨어나, "내 이미 다 들었네. 벽돌은 돌만 못하고, 돌은 잠만 못하다면서"라고 대꾸하여 웃음을 자아내는 대목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의 해학과 풍자는 당시 사람들의 고루한 사상을 깨뜨리는 데도 뛰어난 효과를 발휘한다. 「망양록」 편에서 왕민호(王民皞)는 박지원이 양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보고, "선생은 제(齊)·노(魯) 같은 대국(大國)을 즐기지 않습니까?"하고 농담을 했는데, 이는 고사(故事)를 이용하여, 박지원이 소국에서 왔기 때문에 대국의 음식 맛을 모른다고 놀린 말이었다. 그러자 그는 즉시 "대국은 노린내가 나서요" 하고 응수함으로써 왕민호를 무안케 하고 만다. "양고기는 노린내가 나서 싫다"는 뜻의 이 해학적인 답변은 "청나라가 비록 대국이지만 노린내 나는 오랑캐의 나라가 아니냐"는 풍자의 의미도 함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1990년대 이후 『열하일기』는 박지원의 실학사상을 담은 사상서로서만이 아니라 그의 문학을 대표하는 탁월한 문예작품으로도 재인식되면서, 그에 관한 연구가 학계에서 갈수록 활발해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언론사에서도 『열하일기』에 주목하고, 압록강을 건너 열하까지 갔던 박지원의 여행길을 추적하는 기획을 다투어 추진했다. 그 결과물로 여행기들이 잇달아 신문에 연재되거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TV 다큐멘터리도 이미 여러 차례 제작·방영되어 대중의 관심을 모은 바 있다. 그로 인해 『열하일기』 번역본을 찾는 독자들이 날로 늘고 있으며, 열하 여행도 이제 관광코스의 하나로 정착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박지원과 달리, 해외여행을 자유로이 할 수 있고, 게다가 전 세계가 급속히 하나로 통합되어 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대에 살면서도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식의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가. 

세계화의 도도한 물결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에 표류하지 않고 주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우리 시대의 화두(話頭)라고 한다면, 『열하일기』는 그에 대해 훌륭하게 응답하는 고전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열린 마음으로 드넓은 세계를 보도록 깨우치는 『열하일기』야말로 세계화 시대에 다시 주목되어야 할 값진 문학적 유산이 아닐까 한다.

박지원은 「황교 문답」의 서문이나 '심세(審勢) 편'에서 청나라를 여행할 때 중국인에게 취해서는 안 되는 행동과 청나라의 실정을 관찰할 때 유의해야 할 점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낯선 외국을 여행하면서 그 나라의 실정을 관찰할 때에도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는지 알아보자. 박지원이

열하를 방문했을 당시 마침 티베트 불교계의 지도자인 판첸 라마도 건륭황제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그곳을 방문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묵고 있었다. 『열하일기』에서 티베트 불교와 판첸 라마에 관해 소개한 부분을 찾아보고, 청나라가 이처럼 판첸 라마를 융숭하게 대접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도 함께 생각해 보자. 박지원의

중국 여행을 상상하기 위해 중국 지도를 펴 놓고 그의 여행길을 짚어 보자. 압록강을 건넌 뒤 요동 벌판을 지나고 산하이관(山海關)을 거쳐 북경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북경과 열하에 장기간 머물면서 그가 보았던 중국의 명승고적들을 조사해 보자.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처음 접한 소감을 토로한 「도강록」 6월 27일 자 일기나, 중국의 신비로운 마술을 소개한 「환희기(幻戱記)」에 덧붙인 글 등에서 박지원은 앞을 못 보는 장님이야말로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역설적 주장을 펴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등에서 박지원은 새로운 천문 학설로서 지구가 둥글 뿐만 아니라 스스로 돌고 있다는 지구 자전설(地球自轉說)을 주장하면서, 아울러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무수한 별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중국의 지식인들을 상대로 이와 같은 주장을 한 이유와 근거는 무엇일까?

문헌
『열하일기 해제(熱河日記解題)』(민족문화 추진회, 1983)
「열하일기의 서술 원리」(이종주, 한국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2)
「열하일기의 문학적 연구」(강동엽, 건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2)
열하일기 [熱河日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한국학 중앙연구원)
열하일기 [熱河日記]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어 용어사전, 2006.)
열하일기 [熱河日記] (두산백과) 

2019년 3월 23일 토요일

경국대전.經國大典.

경국대전, 經國大典.
조선시대의 기본법전. 
조선 시대에 나라를 다스리는 기준이 된 최고의 법전. 조선 시대에 나라를 다스리는 기준이 된 법전이다.
세조 때 최항, 노사신, 강희맹 등이 집필을 시작하여 성종 7년(1476년)에 완성하고, 16년(1485년)에 펴냈음. 
조선의 제7대 임금인 세조 때 최항, 노사신, 강희맹 등이 만들기 시작해 성종 때 완성했다. 
조선 전기의 법전이며, 국가를 경영하는 큰 법전이라는 뜻이다. 1461년(세조 7년)부터 편찬하기 시작해 1485년(성종 16년)에 완성되었다. 조선 초기부터 전해져 오던 여러 법령들을 모아 집대성한 것으로 조선 통치 질서의 기본을 확립한 법전이다. 이전 · 호전 · 병전 · 형전 · 예전 · 공전의 여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 건국 초의 법전인 『경제육전()』의 원전()과 속전(), 그리고 그 뒤의 법령을 종합해 만든 조선시대 두 번째 통일 법전. 
조선에서는 이보다 앞서 《경제육전》이 있었으나, 건국 초에 급히 만들어져 부족하거나 현실과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았다. 그래서 나라의 힘을 기울여 체계적이고 통일된 법전으로 만든 것이 《경국대전》이다.

조선은 개창과 더불어 법전의 편찬에 착수하여 고려 말 이래의 각종 법령 및 판례법과 관습법을 수집하여 1397년(태조 6) 《경제육전()》을 제정, 시행하였다. 그 전에 왕조 수립과 제도 정비에 크게 기여한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을 지어 바친 일이 있었지만 개인의 견해에 그친 것이었다. 
《경제육전》은 바로 수정되기 시작하여 태종 때에 《속육전()》이 만들어지고, 세종 때에도 법전의 보완작업이 계속되지만 미비하거나 현실과 모순된 것들이 많았다. 국가체제가 더욱 정비되어 감에 따라 조직적이고 통일된 법전을 만들 필요가 커졌다.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당시까지의 모든 법을 전체적으로 조화시켜 후대에 길이 전할 법전을 만들기 위해 육전상정소()를 설치하고, 최항(김국광(한계희(노사신(강희맹(임원준()·홍응()·성임()·서거정() 등에게 명하여 편찬작업을 시작하게 하였다.
1460년(세조 6) 먼저 〈호전()〉이 완성되고, 1466년에는 편찬이 일단락되었으나 보완을 계속하느라 전체적인 시행은 미루어졌다. 예종 때에 2차 작업이 끝났으나 예종의 죽음으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성종 때 들어와서 수정이 계속되어 1471년(성종 2) 시행하기로 한 3차, 1474년 시행하기로 한 4차 《경국대전》이 만들어졌다. 1481년에는 다시 감교청()을 설치하고 많은 내용을 수정하여 5차 《경국대전》을 완성하였고 다시는 개수하지 않기로 하여, 1485년부터 시행하였다.
이듬해 7월에는 「형전()」을 완성해 공포, 시행했으며, 1466년에는 나머지 「이전()」·「예전()」·「병전()」·「공전()」도 완성하였다. 또 「호전」·「형전」도 함께 다시 전면적으로 검토해 1468년 1월 1일부터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글고 세조는 신중을 기해 반행()을 보류하고 있었다. 그 뒤, 예종도 육전상정소를 설치해 원년 9월에 매듭지어 2년 1월 1일부터 반포하기로 결정했으나, 예종이 갑자기 죽어 시행하지 못하고 말았다.
성종이 즉위하자, 곧 『경국대전』을 다시 수정해 드디어 1471년 1월 1일부터 시행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신묘대전()』이다.
그중에도 누락된 조문이 있어 다시 개수해 1474년 2월 1일부터 시행했는데, 이것이 『갑오대전()』이다. 그 때 대전에 수록되지 않은 법령으로 시행할 필요가 있는 72개 조문은 따로 속록()을 만들어 함께 시행하였다.
1481년 9월에 다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있어, 감교청()을 설치하고 대전과 속록을 적지 않게 개수해 1485년 1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이것이 『을사대전()』인데, 이것을 시행할 때에 앞으로 다시는 개수하지 않고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으로 규정지었다.
그리하여 영세 불변의 조종성헌()으로서, 통치의 기본 법전으로서 그 시대를 규율하게 되었다. 오늘날 온전히 전해오는 『경국대전』은 『을사대전』이며, 그 전의 것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 『을사대전』은 우리 나라에 전해오는 법전 중 가장 오래된 유일한 것이다.
『경제육전』과 같이 6분 방식에 따라 「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의 순서로 되어 있다. 또 각 전마다 필요한 항목으로 분류해 규정하고, 조문도 『경제육전』과는 달리 추상화, 일반화되어 있어, 건국 후 90여 년에 걸친 연마의 결정답게 명실상부한 훌륭한 법전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전」에는 통치의 기본이 되는 중앙과 지방의 관제, 관리의 종별, 관리의 임면·사령() 등에 관한 사항이 규정되어 있다. 「호전」에는 재정 경제와 그에 관련되는 사항으로서 호적제도·조세제도·녹봉·통화·부채·상업과 잡업·창고와 환곡()·조운()·어장()·염장()에 관한 규정을 비롯, 토지·가옥·노비·우마의 매매와 오늘날의 등기제도에 해당하는 입안()에 관한 것, 그리고 채무의 변제와 이자율에 관한 규정이 수록되어 있다.
「예전」에는 문과·무과·잡과 등의 과거와 관리의 의장() 및 외교·제례·상장()·묘지·관인(), 그리고 여러 가지 공문서의 서식에 관한 규정을 비롯, 상복 제도·봉사()·입후()·혼인 등 친족법 규범이 수록되어 있다.
「병전」에는 군제와 군사에 관한 규정이, 「형전」에는 형벌·재판·공노비·사노비에 관한 규정과 재산 상속법에 관한 규정이, 「공전」에는 도로·교량·도량형·식산()에 관한 규정이 수록되어 있다.
당시의 법사상인 양법미의()에 대한 자신감과 실천 의지가 표명되어 있으며, 정치의 요체는 법치()에 있다고 서약, 선언한 창업주인 태조의 강력한 법치 의지가 계승, 발전된 조종성헌으로서, 법제사상 최대의 업적이다.
이 대전의 편찬, 시행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전제정치의 필연적 요청으로서의 법치주의에 입각한 왕조 통치의 법적 기초라 할 수 있는 통치규범 체계가 확립되었다.
둘째, 여말선초의 살아 있는 현행 법령으로서 양법미의, 즉 타당성과 실효성있는 고유법()을 성문화하고 조종성헌화해 중국법의 급작스러운 무제한적 침투에 대해서 방파제가 되었다. 또 영구불변성이 부여되어 고유법의 유지, 계승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전형적인 예가 「형전」 사천조()에 규정된 자녀 균분 상속법(), 「호전」 매매한조()에 규정된 토지·가옥·노비·우마의 매매에 관한 규정과 전택조()에 규정된 토지·가옥 등에 대한 사유권의 절대적 보호에 관한 규정, 그리고 그들 사유권이 침해된 경우의 민사적 소송 절차에 관한 「형전」의 규정들이다. 이 규정들은 특히 중국법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유법이었다.
셋째, 「형전」의 규정은 형벌법의 일반법으로서 계수된 『대명률()』에 대한 특별형사법이었다. 「형전」의 규정에는 조선적 특수 형법사상이 담겨 있어 『대명률』보다 우선적으로 적용되었다.
이 대전이 시행된 뒤 『대전속록()』·『대전후속록()』·『수교집록()』 등과 같은 법령집과, 『속대전()』·『대전통편()』·『대전회통()』 등과 같은 법전이 편찬, 시행되어 이 조문이 실제로 개정되거나 폐지된 것이 적지 않았다.
그 기본이념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으며, 이 대전의 조문은 나중의 법전에서 삭제되어서는 안 되는 신성성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제도사를 연구하는 데 기본 사료가 된다. 이 대전의 을사본은 편찬 당시 출판해 널리 반포했고, 그 뒤에도 여러 번 출판하였다.
이 밖에 1936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판본을 고교(稿)해 활자로 인쇄, 간행한 것이 널리 퍼져 있다. 이어 1962년에는 법제처에서 『경국대전』 역주본을 내었고, 1985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역주 경국대전』을 출간해 한글 번역본으로 독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 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법령이 계속 마련되어 1492년의 《대전집록()》, 1555년(명종 10)의 《경국대전주해》, 1698년(숙종 24)의 《수교집록()》 등을 거느리게 되었다. 1706년(숙종 32)의 《전록통고()》는 위의 법령집을 《경국대전》의 조문과 함께 묶은 것이다. 
반포 때에 이미 〈예전()〉의 의식절차는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호전〉의 세입과 세출은 그 대장인 공안()과 횡간()에 의거하도록 규정되었다. 또 형벌법으로서 《대명률()》과 같은 중국법이 〈형전〉에 모순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적용되었다.


시기가 많이 지남에 따라 후속 법전도 마련되었다. 1746년(영조 22)에는 각종 법령 중 영구히 시행할 필요가 있는 법령만을 골라 《속대전》을 편찬하여 시행함으로써 또 하나의 법전이 나타났고, 1785년(정조 9)에는 《경국대전》과 《속대전》 및 《속대전》 이후의 법령을 합하여 하나의 법전으로 만든 《대전통편》이 시행되었으며, 그 이후의 법령을 추가한 《대전회통()》이 조선왕조 최후의 법전으로서 1865년(고종 2)에 이루어졌다.
《경국대전》은 조선왕조 개창 때부터의 정부체제인 육전체제()를 따라 6전으로 구성되었으며, 각기 14~61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졌다. 〈이전()〉은 궁중을 비롯하여 중앙과 지방의 직제 및 관리의 임면과 사령, 〈호전〉은 재정을 비롯하여 호적·조세·녹봉·통화와 상거래 등, 〈예전〉은 여러 종류의 과거와 관리의 의장, 외교, 의례, 공문서, 가족 등, 〈병전()〉은 군제와 군사, 〈형전〉은 형벌·재판·노비·상속 등, 〈공전()〉은 도로·교량·도량형·산업 등에 대한 규정을 실었다.


짧게는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한 지 30년 만에, 길게는 고려 말부터 약 100년 간의 법률제정사업을 바탕으로 완성된 이 법전의 반포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밑받침하는 통치규범의 확립을 의미하였다. 
새로운 법의 일방적인 창조라기보다 당시 현존한 고유법을 성문화하여 중국법의 무제한적인 침투를 막고 조선 사회 나름의 질서를 후대로 이어주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형전〉의 자녀균분상속법, 〈호전〉의 매매 및 사유권의 절대적 보호에 대한 규정, 〈형전〉의 민사적 소송절차에 대한 규정 등은 중국법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유법이다.


당시 사회의 한계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국왕에 대한 규정이 없는 것이 한 예이다. 실제 정치운영에서는 점점 세밀한 규정들이 수립되어 국왕의 권한에 많은 제약을 가하였지만, 조선 사회의 기본 정치이념에서 국왕은 법률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관리의 자격에 대해 천민이 아닐 것 이상의 신분적 제약을 정해놓지 않아 중세 신분제의 극복과정에서 한층 발전된 수준을 보여주지만, 노비에 대한 규정을 〈형전〉에 자세하게 담은 것은 당시의 지배층이 노비제의 기반 위에 서 있었고 그들을 죄인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경국대전》은 조선시대가 계속되는 동안 최고법전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법률의 개폐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그것을 반영한 법전이 출현하였지만, 이 법전의 기본체제와 이념은 큰 변화없이 이어졌다. 《대전회통》에는 비록 폐지된 것이라 하더라도 《경국대전》의 조항이 그 사실과 함께 모두 수록되었다.


사회운영의 질서는 실질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고 따라서 법전의 시행 내용 또한 매우 큰 폭으로 달라져 갔다. 그것은 단순한 법질서의 혼란이 아니라 사회의 변동과 발전에 대한 체제의 적응 노력이었다. 
예를 들어 최고위 관서로 의정부가 있고 그곳의 3정승이 관료의 정상을 이룬다는 기본구조는 19세기 말까지 변화가 없었지만, 조선 전기 3정승과 의정부가 비교적 강력하게 백관을 통솔하고 국정을 총괄한 반면, 조선 중기 이후로는 비변사()가 국정을 총괄하는 관서가 되었고 3정승이 그곳의 대표자로서 권한을 행사하였다. 
이때의 비변사는 고위관리의 회의를 통해 운영되는 합좌기구로서 당시 지배층의 확산에 조응하여 좀더 많은 사람의 의견을 끌어모으고, 더욱 복잡해진 국가행정을 전문적으로 이끌어간다는 의미를 지녔다. 물론 후기 법전인 《속대전》부터는 비변사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다.
매우 여러 차례 간행되었으며 현대에 들어와서는 법제처가 1962년에 번역본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1985년에 번역본과 주석서를 함께 간행하였다. 2007년 7월 13일 보물 제1521호로 지정되었다.
법이란 국가가 강제로 시행하는 사회 규범이야. 법은 역사의 발전에 따라 변화하고 발전했어. 삼국 시대에는 율령이 있었고, 고려 시대에는 중국 당나라의 법률을 참고하여 만든 71조의 법률과 보조 법률이 있었지. 그러나 일상생활과 관계되는 것은 관습법을 중심으로 지방관이 자신의 생각에 따라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실정에 맞지 않는 경우도 많았고, 관습법에 의존하다 보니 법이 상황마다 다르게 적용되는 경우가 많았어. 여기에서 고려()의 정책()이나 법령()은 사흘 만에 바뀐다는 의미의 ‘고려 공사()는 3일’이라는 속담이 생기기도 했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들어선 새 나라 조선에서는 정치와 사회의 안정을 위해 모두가 믿을 수 있는 법을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조선은 개국하자마자 법치주의를 내세웠고, 특히 나라와 지방, 고을의 살림 모두를 중앙 정부에서 임명한 관리가 법에 따라 처리하도록 했지. 이를 위해 나라에서는 통일 법전을 편찬하고자 노력했는데, 이런 노력이 《경국대전》의 완성으로 마무리되었다.
세조 때 만들기 시작하여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은 조선 건국 초기의 법전들을 모두 모아 만든 법전으로, 조선을 유교적 법치 국가로 만든 기본 법전이다.
육조에서 맡은 업무를 기준으로 분류한 법전이라고 할 수 있어. 그런데 육전이 도대체 뭐냐고? 이젠 육전이 각각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한번 살펴볼까?

이전()은 중앙 및 지방 관리들의 조직에 관한 법률이야. 요즘으로 치면 ‘행정안전부’에서 하는 일을 담고 있지. 호전()은 나라를 운영하는 돈과 관련된 법률이야. 호적, 토지 제도, 부세, 조운, 환곡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으며, 요즘의 ‘기획재정부’에서 하는 일을 담고 있어.
예전()은 과거, 의례, 외교, 친족, 제사 등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어. 요즘으로 치면 ‘교육과학기술부’와 ‘외교통상부’에서 하는 일을 담고 있지. 병전()은 무과, 군사 제도에 대한 규정으로 ‘국방부’, 형전()은 형벌, 재판, 노비에 대한 규정으로 ‘법무부’, 공전()은 도로, 교통, 도량형, 공장() 등에 대한 규정으로 ‘국토해양부’에 해당된다.
조선에는 중국의 법률을 따라 태형·장형·도형·유형·사형의 형벌이 있었어. 죄인의 볼기를 치는 형벌인 태형과 장형은 가벼운 죄를 범한 경우에 사용되었는데, 태형은 10~50대, 장형은 60~ 100대까지 집행했어.
도형은 비교적 무거운 죄를 지은 자를 관아에 붙잡아 두고 힘든 일을 시키는 것으로, 오늘날의 징역형과 비슷해. 유형은 매우 무거운 죄를 지은 자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 죽을 때까지 살게 하는 거야.

최고 형벌인 사형에는 교형과 참형이 있었어. 교형은 목을 매서 죽게 하는 방법으로 신체는 온전할 수 있었지만, 참형은 목을 베는 무거운 형벌이었어. 또한 반역자의 신체와 목을 모두 베어버리고 매장을 허용하지 않는 ‘능지처참’이라는 아주 가혹한 형벌도 있었다.
《경국대전》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기본 규범을 담은 종합적인 법이다. 내용은 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 등 6개 분야로 나누어진다.
육전내용
이전
중앙 및 지방 관리들의 조직에 관한 법률
호전
나라를 운영하는 돈과 관련된 법률
예전
과거, 의례, 외교, 친족, 제사 등에 관한 법률
병전
무과, 군사 제도에 관한 법률
형전
형벌, 재판, 노비에 관한 법률
공전
도로, 교통, 도량형, 공장 등에 관한 법률
《경국대전》이 완성된 이후에 조선의 국가 정책은 ‘육전 체제’에 따라 시행되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조직인 의정부와 6조는 물론 지방의 각 고을에서도 모든 일을 처리할 때 이 법전을 따랐다. 물론 백성들도 집이나 땅을 사고팔 때, 재산을 상속할 때, 혼인할 때 등 일상생활에서 《경국대전》의 법을 따라야 했다.
《경국대전》은 조선 시대에 오랫동안 최고 법전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경국대전》이 완성되고 260여 년이 지난 영조 때에 이르러서야 많은 항목을 개정하거나 보충한 《속대전》이 만들어져, 《경국대전》과 함께 사용되었다. 《경국대전》은 조선 왕조가 ‘법에 따라 나라를 다스린다.’는 법치주의를 따랐음을 보여 준다.
《경국대전》은 육전, 즉 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으로 나뉘어 있는데, 국가 정책은 육전 체제를 따랐어. 조선 시대에 나라의 일은 보통 의정부에서 결정하고, 6조에서 판서를 중심으로 시행되는데, 그 모든 일의 기본을 《경국대전》에 따랐다. 그리고 지방을 8도로 나누고 관찰사 밑에 수령을 두어 고을을 다스리도록 했는데, 고을의 행정을 볼 때도 《경국대전》을 따랐다.
가정의 재산 상속을 비롯하여 토지나 집을 사고팔 때, 혼인을 할 때와 같은 일상생활과 관련된 법도 《경국대전》을 따랐어. 이처럼 《경국대전》은 국가 전체의 통치 원칙에서부터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기본 규범을 담은 종합적인 법전으로,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법전의 역할을 했다.

보고 읽는 법전.
조선 왕조는 통치 규범을 보다 확실히 하는 성문화 작업을 추진했습니다. 이미 조선 건국 직후에 정도전이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등을 편찬했고, 조준이 여러 조례를 모아 《경제육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저서들의 결정판으로 드디어 《경국대전》이 편찬되었습니다. 
세종(1418~1450), 세조(1455~1468) 대를 거쳐 성종 대에 이르러 완성된 것이지요. 《경국대전》은 필요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조선 왕조 내내 기본 법전의 자리를 유지했습니다. 이 법전은 조선 왕조의 법제적 통치 질서를 존중하는 유교 문화를 상징합니다.



"참고문헌
『세조실록』, 『예종실록』, 『성종실록』, 『한국근대법사상사』(전봉덕, 박영사, 1981), 『한국가족법상의 제문제』(이희봉, 일신사, 1976),『한국법제사고』(박병호, 법문사, 1974), 「경국대전의 편찬과 대명률」(이성무, 『역사학보』 125, 1990), 「경국대전의 법사상적 성격」(박병호, 『진단학보』 48, 1979), 『李朝法典考』(麻生武龜, 1936), 경국대전주해대전통편대전회통서거정속대전수교집록경국대전 [經國大典] -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다 (한국사 개념사전), 경국대전 - 조선 시대에 나라를 다스리는 기준이 된 법전 (한국사 사전 1 - 유물과 유적·법과 제도, 경국대전 [經國大典] (Basic 중학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보이는 법전, 읽는 법전 : 《경국대전》의 완성 (고교생이 알아야 할 한국사 스페셜,), 경국대전 [經國大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