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6일 금요일

이슬람 국가,

이슬람 국가,

이슬람 공동체와 국가,
메디나에 공동체(움마)를 건설한 무함마드는 아라비아반도 각지의 부족집단과 맹약을 맺어서 이들을 개별적으로 움마에 연결시키고, 그 결과 성립한 완만한 정치구성체(쟈마아 ; jamā 'a)를 움마의 지배하에 통합했다. 여기에서 이슬람 국가의 원초형태를 인정할 수 있다. 쟈마아는 무함마드의 권위를 승인하는 부족민의 집합체이었는데, 결국 칼리프의 지휘하에 대정복이 행하여지자, 움마와 쟈마아를 구성하는 아랍전체가 정복자 집단으로서 제국 내의 이민족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비아랍 이교도 중에서도 개종해서 움마의 구성원이 되고, 아랍 무슬림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의 수가 점차로 증대했다. 이들 신개종자를 마와리라고 하는데, 아랍 우위체제하에서 그들에 대한 세금의 지불의무에서도, 또한 사회적 신분상에서도 확실히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이슬람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무슬림은 인종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움마의 성원으로서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아랍제국인 옴미아드 왕조(661~750)는 결국 이와 같은 이슬람의 이념에 합치하는 정치체제를 창출하지 못했다.
아바스 왕조(750~1258)의 성립에 의해서 아랍의 특권은 상실되고, 제국 내에서의 무슬림의 평등 원리가 확립되었다. 이 왕조가 일반적으로 이슬람제국이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9세기경까지는 이슬람법(샤리아)의 체계화도 행하여져, 움마의 지도자로서 샤리아의 집행에 임하는 칼리프의 권한은 현저하게 강화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움마의 통일은 이미 상실되고, 동서로 분열한 이스라엘 세계는 칼리프 또는 왕(마리크, 아밀)을 주권자로 받드는 왕조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이 실정이었다. 다우라는 원래 <시간의 추이>나 <계절의 전환>을 의미하는 아라비아어인데, 이것이 <왕조>의 의미로 이용된 것은 아바스 왕조 시대 이후이다. 물론 다우라는 지배권을 담당하는 칼리프족이나 왕가를 중심으로 하는 개념으로, <국가> 그 자체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왕권의 지배영역에 착안하면 맘라카(mamlaka, 왕국)라는 말도 잘 이용되며, 또한 정부나 통치기관을 의미하는 윌라야(wilāya, 오스만 왕조에서는 후쿠마 ; hūkuma)도 사용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이슬람 국가의 하나의 측면을 나타내는 용어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이 국가 그 자체를 나타내는 고유한 용어가 이슬람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무슬림에 있어서 이슬람 국가의 본질이 칼리프의 권위를 서약에 의해서 인정하는 각 무슬림의 집합체, 즉 움마나 쟈마아로서 의식되었기 때문이다. 그 공간적 확산이 <이슬람 세계(다르 알이슬람)>이었다. 따라서 독자적인 권력국가론을 전개한 이븐 할든(Ibn Khaldūn)을 제외하면 무슬림 지식인(울라마)에 의한 이슬람 국가론은 오로지 움마의 대표로서의 칼리프(이맘)를 중심논제로서 전개되며, 실질적으로 국가로서의 기능을 담당하는 왕조(다우라)는 그 시야 밖에 놓여져 있었다.
칼리프권과 왕권,
<신의 사도의 대리>로서 초대 칼리프에 취임한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종교ㆍ정치의 두 권한 중 정치적 권한만을 계승했다. 그나마 그 권한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겨우 무슬림의 정리역, 즉 움마의 지도자로서의 성격을 가지는데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대정복에 의해서 국가영역이 확대되고, 막대한 부가 칼리프에 집중하게 되자 칼리프의 권력은 현저히 강대하게 되었다. 제2대 칼리프, 우마르 1세는 <신도의 수장>을 의미하는 아미르 알무미닌의 칭호를 이용하였는데, 이는 성전(지하드)의 지휘관인 칼리프에 어울리는 칭호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수니파의 울라마가 이용하는 이맘은 무슬림의 종교적인 지도자로서 칼리프에 무게를 두는 칭호였다. 또한 아바스 왕조 시대에 칼리프는 <신의 사도의 대리>에서 <신의 대리>로 보게 되고, 법학자도 칼리프권은 신으로부터 직접 위임받았다는 칼리프권 신수설(神授設)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단, 이와 같은 칼리프의 신권화에도 불구하고 그 권위가 공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초기 시대와 마찬가지로 칼리프에 대한 무슬림의 바이아와 타아(복종)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마을이나 거리의 주민이 이 계약을 파기해서 모스크에서의 설교에서 주권자의 이름을 깎는 것은 그 지역의 무슬림이 공적으로 반란의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바스 왕조는 군대와 관료에 의한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수립하였는데, 칼리프권이 강대하였던 시대는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9세기 중반을 지날 무렵부터 맘무크(노예군인)의 대두와 함께 칼리프권은 점차로 약체화되고, 936년에는 군인총독을 대아미르(아미르 알울라마)에 임명해서, 군사ㆍ재정의 양 권한을 포함한 제국의 행정권을 위양했다. 이때 전국의 모스크에서는 칼리프와 대아미르의 이름하에 프토바를 행할 것이 명령되었는데, 이는 칼리프가 프토바의 권한을 독점하였던 시대의 종지부를 의미했다. 시아파를 받드는 브와이프 왕조(932~1062)의 대아미르도 칼리프가 가진 특권을 차례차례로 빼앗고, 칼리프에는 이맘(신앙상의 지도자)으로서의 명목적인 권한만이 남았다.
그러나 브와이프 왕조나 셀주크 왕조(1038~1194)의 군주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칼리프에 의한 정당화가 필요하였는데, 여기에 칼리프는 대아미르나 술탄의 보호를 받는 대신에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보증한다는, 칼리프권과 왕권(물크)과의 상호의존시대가 끝났다. 이와 같은 현실 변화에 대응해서 울라마도 국가의 사실상의 지배자인 군주의 존재를 용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알 마와르디는 지배자가 샤리아에 따라서 정치를 행한다면 칼리프는 왕권에 합법성을 주어야 한다고 하고, 또한 가자리는 공동체의 질서유지에 임하는 술탄을 칼리프는 무조건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에는 타협과 추인의 칼리프론을 비판하는 이븐 타이미야와 같은 사상가도 나타났는데, 대방의 울라마는 현실적으로 차례차례로 양보를 거듭해서 결국에는 이븐 쟈마아(Ibn Jamā 'a)와 같은 폭군의 용인에까지 이르렀다.
국가의 구조,
칼리프나 술탄에 의한 통합(윌라야)의 실태에 대해서 살펴보면, 아랍제국의 시대에는 아미르가 정복지의 농민으로부터 조세를 징수하고, 그중에서 아랍 전사에게 봉급을 지급하는 시스템이 취해졌다. 이를 아타체제라고 한다. 군영도시를 통괄하는 아미르는 칼리프에 의해서 임명되며, 그 체제하에서 조세징수의 실무를 담당한 것은 사산 왕조나 비잔틴제국시대 이래의 촌장이었다.
아바스 왕조 시대가 되어서 관료기구가 정비되자, 중앙에서 파견된 징세관(아미르)이 촌장 대신에 징세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는데, 군대나 관료에게 봉급을 지불하는 아타체제는 거의 그대로의 형태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10세기 초 무렵까지는 군벌간의 항쟁이나 궁정의 난비, 또는 징세기구의 파탄 등에 의해서 국가재정은 점차로 궁핍의 도를 더해갔다. 국고수입의 저하는 아타체제의 유지를 어렵게 하였다. 10세기 중반에 군인에 대해서 직접 토지의 지배와 관리를 위임하는 이크타제도가 성립한 것은 이와 같은 구 체제의 완전한 붕괴를 의미하였다. 도시에 사는 이크타 보유자(무크타)는 대관을 파견해서 농민으로부터 조세를 징수하고, 그 수입을 이용해서 지배하는 병사를 양성하는 것이 의무시되었다. 이와 같이 이크타 제도는 군인을 매개로서 국가와 사회를 연결시키는 체제였기 때문에 그후의 이슬람 여러 왕조에서도 국가의 기본제도로서 널리 채용되었다. 사파비 왕조의 투유르나 소유르갈, 오스만 제국의 티말 등도 본질적으로 이 이크타를 계승하는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칼리프나 술탄의 권력은 군대나 관료에 의해서 지지되었다. 관청은 옴미아드 왕조 시대부터 현실의 필요에 따라서 차례차례로 증설되고, 아바스 왕조 시대에 되자 이란인을 중심으로 한 재상(와질)이나 서기(카티브)가 정치 세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군대의 주력은 아바스 왕조 혁명을 계기로 아랍군에서 홀라산군으로 바뀌고, 9세기 이후에는 맘루크군인이 관료를 억압해서 국가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크타보유에 의해서 농촌을 지배한 맘루크는 그 부를 기초로 도시의 경제를 좌우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으나, 군인의 지배권에는 무슬림에 대한 재판권은 포함되어 있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샤리아에 의한 재판은 각 도시에 파견된 카디(재판관)에 의해서 행하여졌다. 또한 이들 카디는 재판의 업무를 넘어서 지방행정에 참여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카디를 포함한 울라마는 불법적인 지배자에 대한 이슬람 정의의 수호신인 동시에 이민족의 군사정권을 지지해서 국가와 민중을 연결하는 고리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경향은 이라크나 이집트에 수니파 정권이 부활하는 셀주크 왕조나 아이유브 왕조(1169~1250) 또는 맘루크 왕조(1250~1517) 시대에 특히 현저하다.
맘루크 왕조를 쓰러뜨리고 메카메디나의 종주권을 장악해서 이슬람 국가로서의 본질을 밝힌 오스만 제국은 아랍 이외에 발칸의 그리스도 교도 등을 옹호하는 다민족 국가의 양상을 띠는데, 국가의 성격이나 구조에 대해서 보면 그 이전의 이슬람의 여러 왕조와 거의 변함없었다. 최성기인 술탄은 동시에 칼리프를 칭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강대하였는데, 그 정치는 샤리아에 따라서 행하여지며,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전대의 샤사(행정법)에 상당하는 카눈이 발포되었다. 또한 술탄권력을 지지해온 것은 군대나 관료이며, 군대는 그리스도교의 자제를 노예로서 징발한 이에체리군단과 티말이 수여된 시파히(기사)군단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관료는 중앙관처 이외에 주, 현, 군, 향, 촌 등 정비된 행정기구 중에 조직되었는데, 샤리아의 유효한 시행을 위해서 울라마로서의 재판관도 이들 지방행정조직과 결합해서 계층적으로 임명된 것이 오스만제국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이슬람 국가론,
19세기를 통해서 점차로 결정적인 것으로 나타난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 변동하에서 <이슬람 세계>라는 관념도 <이슬람 국가>의 이데올로기도 모두 해체ㆍ붕괴되었다. 근대 이슬람의 위기감의 주요 내용은 이슬람 국가의 상실감(제도ㆍ사상 양면에서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샤 와리 울라의 아들 압두 알아지즈가, 영국인 지배하의 인도는 오로지 이슬람 세계의 범위 밖에 있는 달 알할브(전쟁의 집)라고 선언한 파토와(1803)에서 시작되어서, 터키혁명하의 칼리프제 폐지(1924)에 이르는 과정 중에서 점차로 전혀 치유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전통적 지배 이데올로기의 구조는 이슬람법(샤리아)과 이슬람 신비주의의 복합으로 나타나며, 울라마와 교단(카리카)이 정치적ㆍ사회적 통합의 채널로서 기능하였는데, 이와 같은 전통적 시스템은 급속하게 약체화되어 분해되었다. 유럽의 법 체계가 실질적인 힘을 가지기 시작해서 법의 이중 과정이 발생한 것은 신수(神授)의 법으로서의 이슬람법의 절대성ㆍ자기완결성의 이데올로기가 심하게 파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유럽 상품의 압력에 의한 길드적 동업동직조합의 해체와 지주제 경영확대에 의한 <촌락>사회의 변질은 교단조직을 붕괴시키고 이슬람 신비주의의 형해화를 초래했다.
울라마에 대신해서 기사, 군인, 법률가, 관리 등 새로운 형태의 지식층이 엘리트로서 등장했다. 세계 자본주의적 편성의 심화와 함께 여러 지역에서 여러 가지 에스닉 그룹(민족집단)이 대중적 레벨에서 이동해서 혼합과정이 심하게 전개되었다. 평화와 안전의 체계였던 오스만 제국의 미레트제는 동방문제 중에서 오히려 분쟁의 요인으로 전화되었다. 시오니즘을 이용한 팔레스타인 문제의 설정은 이슬람 국가 상실감의 증폭에 의한 초조와 지하드론적 대응을 날카롭게 자극했다.
이렇게 해서 이슬람 국가론은 현대 이슬람의 중심적 쟁점이 되었다. 거기에서 먼저 현저하게 인정되는 첫 번째의 입장은 현상 유지파적ㆍ국제 정치론적 이슬람 국가론이다. 그것은 20세기에 발생한 여러 국가 시스템을 전제로서, 다수의 이슬람 교도를 옹호하는 제국을 이슬람 제국으로 보는 입장으로, 이슬람 제국회의(1971년 발족, 가맹국 42개국)는 그에 의거하고있다. 이에 대립적인 두 번째의 입장은 현상타파적ㆍ종교사회운동론적 이슬람 국가론이다. 그것은 1930년대 이후, 우슬림 동맹단으로 대표되는 대중적 사회운동 중에서 공정과 정의에 의한 이슬람 국가의 재건ㆍ획득의 요구로서 전개되었는데, 그후 대중의 정치적 급진화하에서, 70년대 말의 이란혁명론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입장의 혁명적 성격이 현저하게 강해졌다. 파키스탄 국가가 어떤 의미에서 이슬람 국가인가라는 논의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입장 사이를 흔드는 것이었다. 또한 70년대에는 두 번째 입장의 발전과 함께 그에 대해서 대항적으로, 첫 번째 입장 중에서도 <이슬람 경제>론이 발생하고, 자원주권이나 은행개혁 또는 파트너십에 의거한 경제개발이나 자카트의 제도화를 널리 논의하게 되었다.
이들 현대 이슬람국가론의 여러 조류로 인해서 실제로는 항상 세속화ㆍ세속주의적 행동의 경향을 나타내는 제국정부도 헌법에서의 이슬람의 국교규정을 둘러싼 문제나 샤리아의 실행(가령 하드와 같이 코란에 규정된 형벌)을 둘러싼 문제에 관해서 동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팔레스타인의 운동사이에서는 명확한 탈종교의 비종파주의 입장이 이슬람국가론을 적극적으로 극복해서 지양하는 것으로서 밝혀지게 되었다.
이슬람 사회,
유목민, 상인, 농민,
자힐리야라고 불리는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메카나 메디나 등 일부 정주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베드윈에 의한 유목생활이 지배적이었다. 그들은 작은 가족집단마다 일정한 수장(水場)을 이동해서 낙타, 산양, 양 등의 가축을 사육하고, 전쟁이나 기근이 일어나면 보다 큰 혈연집단을 조직해서 비상사태에 대처했다. 오래전부터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던 메카는 6세기 중반 이후, 예멘과 시리아를 연결하는 남아라비아 무역을 독점해서 번영하였는데, 상업활동에 종사하는 자는 아직 쿠라이슈족의 일부 상인에 한정되었다. 통상적인 범위와 규모는 이슬람 이념에 의한 아랍의 대정복에 의해서 일거에 확대된다. 각지에 건설된 미슬(군영도시)은 여기에 아랍전사와 그 가족이 정주하고, 또한 가까운 곳에서 상공업자가 모여듬으로써 마침내 생산과 소비의 중심적인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들 미슬을 연결하는 광대한 국내 경제권의 형성은 화폐수요의 증대를 초래하고, 이에 호응해서 7세기 말에는 아랍화폐의 주조가 개시되었다. 또한 미슬로의 아랍 이주는 마침내 원주민의 아랍화를 촉진하고, 아라비아어를 공통어로 하는 일대 문화권을 성립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바스 왕조 시대(750~1258)에는 바그다드를 비롯한 도시의 상공업 활동은 더욱 활발하게 되었다. 모스크에 인접한 시는 교역의 장인 동시에 생산의 장이기도 하여서, 거기에서 생산된 각종 직물이나 유리제품, 종이, 비누 등의 특산물은 각지의 도시를 향해서 많이 수출되었다. 도시상인에는 외국무역에 종사하는 대상인부터 시장의 소상인까지 있었는데, 아바스 왕조 시대에 특히 유력한 계층을 형성한 것은 전자의 대상인이었다. 그들은 중국의 비단이나 도자기, 인도의 후추, 목재, 철, 러시아의 모피와 노예, 비잔틴의 공예품, 그 외에 아프리카의 금이나 도예 등을 구입해서 칼리프나 고급관료 또는 군인 등의 유력자에게 판매했다. 그리고 9세기 이후에는 그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정치 세계로 진출해서, 그중에는 국가의 재상에까지 올라간 상인도 나타났다. 또한 그 재력을 학문 분야에 활용해서 스스로 각지를 돌아다녀 예언자의 전승을 수집하기 위해서 돌아다니는 상인도 다수 존재했다. 정부에 의한 재산몰수가 빈번하게 행하여졌기 때문에 몇 세대에 걸쳐서 호상이 존속하는 예는 드물었지만, 군사정권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경제, 정치, 문화의 면에서 상인의 이와 같은 활약을 볼 수 있는 것은 이슬람 사회의 현저한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목민이었던 아랍 정복군은 지배하의 농촌사회나 농업에는 흥미를 나타내지 않고 거기에서 조세를 징수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였다. 종래대로의 토지보유가 인정된 경작농민에게는 인두세 외에 토지세가 부과되는데, 이 토지세만으로 수확의 약 반에 이르렀다고 추정되고 있다. 면세특권을 가진 아랍 무슬림과 원주민과의 세제상의 불평등이 해소된 것은 이슬람의 조세제도가 정비되고 토지의 경작자는 모두 지대로서의 지세를 지불한다는 원칙이 확립되는 8세기 중반 이후의 일이다. 또한 촌장도 종래와 마찬가지로 사유지의 소유가 인정되고, 조세를 일괄해서 정부에게 납부하는 마을의 책임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8세기경부터 아랍이 지주가 되어서 마을에 살고, 관료적인 징세기구가 정비되게 되면 이들 촌장은 지방명사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대신에 샤이프라고 하는 아랍의 촌장이 촌락사회를 책임지고 관리하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이미 아바스 왕조 시대 초반부터 주민의 다수가 무슬림이 되었는데, 이와 같은 변화에 대응해서 촌락에서도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농민의 수가 점차로 증대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정복지의 토지와 농민은 아랍전사에게는 분배되지 않는 것이 최초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옴미아드 왕조(661~750) 초반부터 칼리프는 일족이나 총신에 대해서 사유지인 카티아를 수여하게 되고, 또한 황무지 개간이나 토지에 울타리를 둘러서 보다 대규모 사령지도 계속 성립되었다. 이렇게 해서 8세기부터 9세기에 걸쳐서 카티아나 다이아를 기초로 군인이나 관료, 상인에 의한 대토지 소유가 현저하게 발달했다. 그들은 대리인을 이용해서 수로의 개삭이나 염해를 입은 토지의 개량에 노력, 특히 티그리스ㆍ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다이아에서는 소맥이나 대맥외에 상품작물인 벼나 사탕수수의 지배가 성행하였다. 상공업 활동의 진전과 함께 여기에 이슬람 사회 번영의 경제적 기반이 거의 확립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이슬람 사회의 생활의 기초는 상공업과 농업과 목축에 있었는데, 이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는 거의 변함없다. 그것도 이들 요소는 상품유통과 인간의 이동을 통해서 상호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노예군인과 울라마,
샤리아(이슬람법)에 의한 정치 원리가 확립되고, 무슬림 상인의 광범위한 활약과 농민의 개종이 서서히 진행됨에 따라서, 9세기 초 무렵에 이슬람 사회는 그 이름에 어울리는 내실을 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슬람 사회가 이와 같이 충실한 한편, 특권적인 대토지 소유의 발달이나 아바스 왕조의 상비군인 홀라산군의 해체는 새로운 역사적 전개를 촉진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변혁은 터키인을 중심으로 하는 맘루크(노예군인)의 대두에서 시작된다. 중앙아시아의 터키인은 이미 8세기 초부터 어떤 자는 전쟁포로로서, 어떤 자는 구입노예로서 이슬람 사회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란의 다이람인이 오로지 보병으로서 이용된 것에 반해서, 이들 터키인은 기마전사로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칼리프 무타심(재위 833~842)은 약 7000기의 터키인 맘루크를 구입해서 친위대를 조직하였는데, 이 이후 맘루크는 홀라산군에 대신해서 국가의 실권을 장악하고, 마침내 칼리프의 폐위도 좌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0세기 중반 이후에도 유리한 이크타 보유에 의해서 농촌을 지배하고, 12세기 말에는 흑인노예병의 세력을 구축해서 아미르나 지방 총독의 자리를 독점했다. 물론 자유신분의 비맘루크기사도 다수 존재하였는데, 맘루크 왕조(1250~1517)는 물론, 그후의 오스만제국(1290~1922)이나 사파비 왕조(1501~1736)에서도 노예군단 우위의 체제에 변함은 없었다.
이민족으로 노예출신인 맘루크에 의한 지배가 이와 같이 오래 계속된 것은 맘루크와 울라마(종교지도자, 학자)와의 긴밀한 제휴에 의하는 점이 적지 않다. 시아파의 여러 세력에 대해서 수니파 이데올로기를 보급하기 위한 마드라사(학원)의 건설은 이미 셀주크 왕조 시대(1038~1194)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정책을 답습한 아이유브 왕조에서 맘루크 왕조에 걸쳐서 울라마의 사회적 역할은 더욱더 증대하였다. 맘루크는 모스크나 마드리사를 많이 건설해서 이슬람문화를 보호해서, 무슬림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울라마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다. 물론 이와 같은 맘루크 체제에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랍 유목민은 이민족 노예에 의한 지배에 이론을 제기하고 가끔 반란을 일으켰으며, 도시의 젊은이 집단인 아이야르('ayyār)도 군인의 폭력에서 하라(마을)를 지키는 것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견하였다. 유목민이나 아이야르는 정부에 협력해서 군대의 보조군을 구성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10~12세기의 시리아나 쟈지라에서는 일시적이기는 하였지만 상인이나 아프다스(아이야르)의 지지를 얻어서 도시에 울라마의 연합정권이 수립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맘루크가 대두하고, 이크타제가 성립한 후에도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상업활동이 활발히 행하여졌다. 아바스 왕조 시대와 같이 정치가로서 활약하는 상인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지만, 술탄의 보호하에 향료무역이나 노예무역에 종사하는 상인 중에는 정부에 자금을 빌려주거나 외교사절로서 멀리 중앙아시아나 러시아까지 가는 자도 있었다.
이슬람교 예배,
맘루크의 대두에 따른 정정(政情)의 혼란은 이란이나 이라크의 농촌사회에 큰 타격을 주었다. 군벌상호의 전투에 의해서 수리기구는 파괴되고, 부와이 왕조(932~1062)의 성립 후에도 군인에 의한 자의적인 수탈이 계속되었다. 셀주크 왕조는 군인의 이크타보유를 엄격하게 감독함으로써 농촌사회에 어느 정도의 안정을 가져왔으나, 그래도 과거의 농업생산력을 완전히 회복하기에는 이르지 못했다. 한편 서방의 이집트ㆍ시리아에서는 비교적 안정된 농업생산이 유지되어, 아이유브 왕조에서 맘루크 왕조에 걸쳐서 도시와 농촌의 인구는 확실히 증가하였다고 추정되고 있다. 촌락사회를 구성하는 주요한 계층은 자소작의 농민이었는데, 이크타제가 성립하자 그들은 점차로 군인에 대한 예속도를 더해서 마침내 이크타 보유자의 농노적인 상태로 전락해갔다. 또한 이크타제의 성립과 함께 이슬람 신비주의 교단의 결성도 농촌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온 요인이었다. 12세기 이후, 각 도시에 성립한 타리카는 그 조직의 틀을 농촌에도 확산시킴으로써 도시와 농촌을 연결하는 강력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수공업자나 농민은 이들 타리카에 참가함으로써 비로소 이슬람의 신앙을 친근한 것으로서 체득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도시와 촌락,
전통적인 이슬람 사회가 형성되는 과정은 이상과 같은데,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의 결합원리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대부분 시대의 이슬람 사회에도 공통되는 것이 있었다. 도시는 직물을 비롯한 수공업제품이나 도서무역에 의한 향료, 노예 등이 거래되는 장인 동시에, 정부관리나 군인에 의한 농촌지배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한편, 주변 촌락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도시는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교통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촌락은 자급자족적인 공통체가 아니라, 이미 이슬람 시대 초기부터 직물의 원료나 각종 과일 등의 특산물이 근처 도시를 향해서 출하되었다.
촌락의 쿳타브(절의 소옥)에서 코란의 암송을 끝낸 소년은 도시로 나와서 마드라사에서 공부하고, 바그다드나 카이로 등에서 면학을 계속하는 것이 유력한 울라마가 되기 위한 필수 코스였다. 촌락에는 농민이외에 농경지의 관리인이나 순찰인, 목수, 설교사 등도 존재하였는데, 그들 중 특히 순찰역은 유목민에 의해서 청부되는 일이 가끔 있었다. 일반적으로 기동력과 무력을 가진 유목민은 전투집단으로서의 성격도 갖추었기 때문에, 그들은 계약에 의해서 촌락을 순찰할 뿐만 아니라, 정부에 보조군을 제공하거나 일정 지역에 보호권을 행사해서 여행객이나 순례에 대한 안전보장을 하는 대신에 보호료를 징수했다. 그러나 이들 유목민은 농촌사회와 공존하며 국가체제에 협력하는 반면, 중앙권력이 약해지면 즉시 농촌이나 메카순례의 약탈자로 변할 위험성도 항상 지니고 있었다.
사회계층은 칼리프나 술탄의 일족, 군인, 대상인, 고급관리 등으로 이루어진 지배층과 중소 상인이나 직인, 또는 농민으로 이루어진 민중으로 나뉘어졌다. 그 중간에 무슬림 지식인이 존재하였는데, 도시에 마드라사가 건설되기 시작하는 11세기 이후에는 서서히 이 중간층이 두터워지는 경향이 있었다. 원래 핫사와 안마 및 각 직업은 결코 고정적인 신분인 것이 아니라, 농민의 자제가 관리가 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상인이나 직인의 자녀가 부모의 직업을 잇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단, 아바스 왕조 중기 이후의 군사는 터키인이나 몽고인 등 이민족에 의해서 독점되며, 도시민이나 농민 출신의 군인이 거의 전무하였다는 것은 이슬람 사회에 고유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 자유인과 노예의 구분도 존재하였는데, 군인노예이건 가내노예이건 해방 후의 경력에 노예였던 것이 큰 장해가 되지는 않았다. 만술이나 하른알라시드를 비롯해서 아바스 왕조의 역대 칼리프에 노예의 자녀가 많았던 사실이 이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이슬람 사회는 이와 같은 신분ㆍ직업의 유동성과 함께 인간의 이동이 매우 활발히 행하여진 사회이다.
아랍제국의 성립 이후, 터키인이나 몽고인은 정복에 의해서 사방에 대한 이주를 실현해서, 페르시아인 마와리나 맘루크는 유력자의 예속민으로서 이슬람 사회에 들어갔다. 또한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를 연결하는 상호이주는 정정의 불안이나 기근을 계기로 단속적으로 행하여졌으며, 농민이나 유목민의 도시로의 유입도 일상적인 현상이었다. 또한 학문의 습득방법을 보아도 마드라사의 학생은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서 법학이나 전승학을 공부하고, 마침내 충분한 지식을 얻으면 선생으로부터 면허를 받아서, 다른 마을의 마드라사에게 새로운 선생을 구해서 여행을 떠났다. 또한 동서를 연결하는 활발한 상업활동이나 1년에 한 번의 메카순례도 이와 같은 인간의 이동을 더욱 촉진하는 요인인 것에 틀림없다. 와크프(기부 재산)에 의한 캐라반 사라이의 건설에 더해서 유력자가 일정기간 여행자의 생활과 안전을 보장하는 지와르(jiwār)의 관행도 살아 있기 때문에, 여행인이 이향에서의 생활에 큰 불편을 느끼는 경우는 없었다. 민족이나 지역의 전통이 복잡하게 혼합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사회가 대략적으로 균질적인 문화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이동에 의해서 새로운 기술이나 학문의 정보가 원격지에 신속하게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생활과 문화.
무슬림의 생활은 복수의 달력을 기본으로 영위되었다. 이드라고 하는 이슬람의 이대 제사(단식이 끝난 후의 제사와 희생제), 예언자의 성탄제(마우리드) 등은 헤지라력에 의해서 개최되었는데, 농사나 조세의 징수는 각지에 고유한 태양력에 의해서 행하여졌다. 가령 이집트에서는 나일이 증수하는 8월말을 연초로 하는 콥트력이 사용되며, 시리아에서는 가을을 연초로 하는 시리아력이, 이라크나 이란에서는 춘분을 연초로 하는 페르시아력이 이용되었다. 근년 이후에는 이에 그레고리오력이 더해져서 많은 지역에서 3력 병용의 상태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민족이나 종교도 결코 단일하지 않았던 것이 특징이다.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한 아랍, 페르시아인(이란인), 터키인, 몽고인, 버버 이외에 쿨드, 아르메니아인, 누비아, 슬라브인, 그루지아인, 다이람 등의 소위 <소수민족>도 수없이 많이 존재하였다.
종교별로 보면 이슬람 교도 외에 인두세의 지불을 조건으로 <계전의 민족>으로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그리스도 교도나 유대 교도, 또는 조로아스터 교도 등이 있으며, 이슬람 교도 수니파시아파, 아라위파, 도르즈파 등의 여러 분파로 나뉘어졌다. 이들 민족이나 종파는 페르시아인은 서기ㆍ문인으로서, 터키인은 군인으로서, 유대 교도는 상인ㆍ금융업자로서 특히 눈에 띤 작용을 한 것처럼 각각 고유한 기술이나 재능을 살려서 이슬람 사회에 독자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민족이나 종교가 이와 같이 다양한 것에 대응해서 언어 또한 복잡했다. 물론 코란의 언어인 아라비아어는 오랫동안 이슬람 세계의 공용어로서 이용되고 학문이나 문학활동도 아라비아어에 의해서 행하여졌다. 그러나 10세기 이후가 되면 이란에서는 근세 페르시아어가 부활하고, 또한 터키민족의 서진과 함께 터키어의 사용 지역도 점차로 확대되었다. 또한 쿨드나 아르메니아인, 또는 그루지아인 등의 사이에서는 각각의 민족언어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주된 생업이 도시의 상공업이건, 시골의 농업이나 목축이건, 생활의 기초가 되는 단위는 역시 가족이었다. 부계의 혈연그룹의 집합체인 가족은 그 집합의 정도에 따라서 대소 여러 가지였으나, 현실의 생활은 비교적 소규모의 가족에 의해서 영위되었다. 가족의 성원은 부친의 권위에 따르고, 필요하면 먼 혈연에게까지 원조의 손길을 뻗치는 것이 요구되었다. 개인주의적인 행동의 원리가 강하게 살아 있는 사회로, 가족이나 일족의 긴밀한 유대는 도시나 촌락의 공동체와 함께 개인의 자유로운 행동에 대한 규제력으로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슬람 사회에는 현실의 소가족과는 별도로 공통의 선조에 의해서 결합된 <집>의 의식도 존재하였다.
예를 들면 이라크의 바르마크가나 이집트의 맘마티가는 관료의 명가로서 오랜 전통을 자랑하며, 맘루크 왕조나 오스만 왕조의 아미르는 맘루크와 의제적인 혈연관계를 맺음으로써 하나의 집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이와 같은 가족이나 집의 관념은 크게 동요되기 시작했다.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른 도시화의 진행과 촌락공동체의 붕괴, 또는 서구시민사회의 이데올로기의 유입은 혈연에 의한 기반을 점차로 약화시켰다. 또한 사회변동의 물결은 사람들의 행동 규범이 된 이슬람 그 자체에도 미쳤다. 혼합 재판소의 설치에 의해서 샤리아가 적용되는 범위는 대폭으로 제한되며, 그 담당자인 울라마의 역할도 점차로 저하되었다. 이슬람 사회의 전개 이후, 거의 유일한 사회조직으로서 기능하였던 타리카도 19세기 이후에는 급속하게 해체화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근대화를 촉진하기 위해서 구세력인 맘루크는 일소되며, 농촌에서도 이크타제의 시행 이후 비로소 본격적인 토지개혁이 실시되었다. 10세기 이후의 이슬람 사회는 맘루크에 의한 지배와 그것을 지지하는 울라마의 사회적 역할, 이크타제의 성립과 발전, 타리카에 의한 사회통합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서아시아, 북아프리카의 근대 여러 국가는 비이슬람화의 방향을 거치건, 이슬람 재생의 길을 걷든 이들 모두를 개혁의 대상으로 들어서 새로운 사회와 그에 어울리는 가치의식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고 있는 무함마드,
제사,
이슬람의 제사는 외형상 ①신성ㆍ엄숙ㆍ근행형 ②순교기념ㆍ비통형 ③환희활달ㆍ해방형의 세가지 타입으로 나뉘어진다. 종파의 구별없이 이슬람법에 정해진 이대제사(이드)는 단식후의 제사와 희생제이다. 이외에 ①헤지라력의 원단 ②무함마드의 성탄제 ③밤의 여행과 승천기념의 밤 ④샤반 달의 15일의 전야 ⑤라일라 알카드르(layla al-qadr) 등이 있다. 시아파에서는 이외에 무함마드가 알리의 칼리프권을 암으로 표명했다고 주장하는 사건을 기념하는 카딜품제나 알리, 하사인의 순교기념일을 중시한다. 특히 푸사인의 순교기념일 아슈라는 시아파 최대의 행사이다. 이외에 시아파에서는 역대 이맘(6대, 8대, 12대 등)의 성탄제나 명일이 중시된다. 또한 종파 구별없이 이슬람 신비주의의 성자의 성탄제가 지방적인 제사로서 널리 행하여지고 있다.
동남아시아권 이슬람,
동남아시아의 총 인구 중 무슬림(이슬람 교도)은 그 40%를 차지하며 2위의 불교도, 3위인 그리스도 교도를 웃도는 지역내 최대의 종교그룹이다. 무슬림 인구의 대부분은 동남아시아 동서부인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군도, 필리핀 군도 남부에 집중하고 있으며, 그 분포범위는 그리스도 교도가 차지하는 필리핀 북부ㆍ중부를 제외하면 소위 말레이계의 언어ㆍ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분포범위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이슬람은 교도개인의 신앙ㆍ종교생활만이 아니라, 지역내 각국의 문화, 사회, 정치, 국제관계의 동적인 구성요소로 되어 있다. 동남아시아의 무슬림은 전 세계의 무슬림 총 인구의 20%에 이르고 있으며, 1970년대 초기 이래의 세계적 이슬람 부흥의 동향도 현저하게 받아들여지며, 이슬람 세계의 유력한 구성부분으로서 발언력을 강화시키고 있다.
역사,
고대, 동남아시아는 중국과 인도대륙ㆍ서아시아ㆍ지중해의 여러 문명을 연결하는 해상교역의 루트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랍상인은 이 교역루트에서 일찍이 활약하였다. 무함마드에 의해서 제창된 이슬람의 가르침도 이 교역루트를 통해서 전해졌다. 동남아시아에서 이슬람으로의 개종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말경부터이다. 개종은 아라비아, 인도, 중국 등으로부터의 무슬림상인의 정착과 현재사회에 대한 동화, 울라마(이슬람 학자)나 스피즘(이슬람 신비주의)도사에 의한 포교, 토착권력자의 정치적 배려ㆍ경제적 타산 등 여러 가지 양태와 동기로서 진행되었다. 어떤 경우든 외부로부터의 대량의 무슬림 이민이나 무력침공은 보이지 않으며, 개종은 전체로서의 평화적ㆍ자발적ㆍ점진적 과정을 거쳤다.
먼저 13세기 말 수마트라섬의 북부 연안에 몇 개의 무슬림 왕국이 일어났다. 15세기 초기에는 말레이반도 남부의 동서교역의 거점지인 믈라카 왕국의 왕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이슬람화는 이 믈라카 해협지역을 기점으로서 한편에서는 말레이반도를 돌아서 중국을 향하는 동북방향의 교역루트를 따라서 인도차이나 남부, 보르네오(카리만탄)섬 북안, 필리핀 군도에 미치며, 한편에서는 모르카제도(향료제도)를 동단으로 하는 동남방향의 교역루트를 따라서 수마트라섬 남부, 자바섬 북안, 보르네오섬 남부, 스라웨시(셀레베스)섬 남부 등으로 퍼졌다.
1511년 믈라카가 포르투갈의 손에 함락된 후에도 수마트라 북부의 아체의 술탄 이스칸달 무다(재위 1607~1636), 자바 내륙부의 마타람 왕국의 술탄 아군, 수라웨시 남부 말카살의 하사누딘왕(동년 1631~1670) 등 강력한 무슬림 권력이 각지에서 일어나, 17세기를 통해서 유럽세력의 진출을 용이하게 허용하지 않았다. 19세기 초기부터 네덜란드에 의한 식민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서수마트라의 이맘 본로 대표되는 파드파의 저항(파드리 전쟁), 자바삼 죠크쟈카르타의 술탄가의 왕자 디오포네고로의 반란(자바 전쟁), 테운크 디 티로를 정신적 지도자로 하는 아편 전쟁 등, 이슬람 성전(지하드)의 기인(旗印)을 드는 격렬한 무력저항이 20세기 초기까지 이어졌다. 이는 20세기의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운동의 선구가 되고, 이슬람동맹(1911년 결성) 등으로 이어졌다. 1945년의 독립선언, 49년의 주권위양에 의해서 인도네시아는 이슬람을 주요 구성요소의 하나로서 탄생했다.
필리핀 남부의 무슬림은 모로족이고 불리며, 16세기 중반부터 4세기반에 걸쳐서 스페인, 아메리카의 식민지화ㆍ그리스도 교화에 계속해서 저항해서, 현재에는 분리ㆍ자치를 요구하기에 이르고 있다. 말레이반도와 보르네오 북안의 무슬림의 모든 권력은 19세기 후반부터 전체적으로 영국식민지 권익의 진출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하고, 화교ㆍ인도이민의 노동력 수입을 인정하고, 오늘날까지 이르는 다민족의 복합사회가 각지에서 형성되었다.
생활ㆍ문화,
동남아시아의 무슬림 주민의 생활은 많은 면에서 이슬람을 기조로 하고 있다. 남자의 할례(5~15세), 결혼계약(아카드 니카), 토장에 의한 매장 등 주요한 통과의례는 이슬람에 따른다. 역은 태음력에 의하며, 1일은 일몰부터 시작해서 일몰에서 끝나며, 1주는 금요일을 성일로 하는 7요일, 1개월은 29일부터 30일, 1년은 12개월로 354일로, 태양력보다 약 11일 짧다. 따라서 이슬람의 연중행사는 자연의 계절과 관계없이 돌아가고 있다. 이외에 태양력, 자바의 주 5요일 등 복수의 역법이 병용되고 있다.
이슬람의 도래와 함께 아라비아어ㆍ아라비아 문자의 사용이 동남아시아에서 보급되었다. 말레이계의 무슬림 사회전역에서 말레이시아어를 아라비아 문자로 표기한 쟈위(Jawi)가 정치, 외교, 종교, 교육 등의 분야에서 기본용어가 되었다. 자바에서는 산스크리트계의 자바문자와 자바 외에 자바어를 아라비아 문자로 표현하는 페곤(Pegon)이 이슬람법, 스피즘, 이슬람 교육 등의 분야에서 이용하게 되었다. 이 영향은 라틴 문자를 널리 사용하게 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슬람화의 초기부터 다수의 동남아시아ㆍ무슬림이 메카를 순례했다. 특히 1869년의 수에즈 운하 개통 후, 동남아시아로부터의 순례자수는 급격히 증대했다. 또한 순례 후에도 메카에 머물러서 이슬람 교의의 연찬에 노력하는 자도 많아지고, 동남아시아ㆍ무슬림의 코로니가 자바(Jawah)의 총칭하에 발전했다. 자바ㆍ코로니에서는 자바, 아체, 미난카바우 등의 출신의 울라마를 중심으로서 필리핀, 태국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전역으로부터의 무슬림이 말레이시아어를 공통어로서 공동생활을 영위하고, 동남아시아ㆍ무슬림동포로서의 연대성이 형성되었다.
이슬람은 동남아시아의 문학ㆍ예능에 샤일(페르시아 신비주의 계통의 시 형식), 히카야트 스쟈라(전기ㆍ역사 이야기 등) 등 새로운 장르를 가져오고, 와얀의 레퍼토리에 이슬람 설화, 무슬림 영웅전을 더했다. 또한 스피의 행(行) 등에서 여러 가지 무용ㆍ음악이 발달했다. 건축, 조형미술의 분야에서는 힌두ㆍ불교기에 특징적이었던 석조사원건축, 불상조각이 모습을 감추었으며 이슬람 예배당은 동남아시아의 독특한 목조건축양식으로서 세워졌다. 조각, 장식에서는 꽃ㆍ동물의 양식화, 기하학 모양이 주류를 이루었다.
교의, 특징,
동남아시아의 이슬람은 코란과 함께 무함마드의 언행(수나)과 무슬림 공동체의 합의(이주마)를 중시하는 수니파에 속한다. 수니파의 교의는 신앙ㆍ의례적 규범(히바다트)인 육신오행(六信五行)은 전세계 어디에서나 우수한 공통성ㆍ보편성을 나타내는데, 사회윤리적 규범(무아말라트)에서는 코란과 수나를 원칙으로 하며, 시대나 환경, 관습(아닷트) 등을 고려해서 유연성 있는 다양한 적응을 행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수니파 이슬람법학(피크프) 4학파 중에서 동남아시아에서는 샤피이파가 주류이다. 수피교단(탈레캇트)의 활동은 동남아시아의 이슬람화 초기부터 활발하였는데, 그중에서도 나크슈반디야, 카디리야, 샤타리야 등이 현재에도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이슬람ㆍ시아파의 영향은 단편적으로 말레이시아어, 인도네시아어 중에 페르시아어 기원의 단어가 보이는 점, 수마트라 서ㆍ북부 등에서 하산 후사인의 수난제의 흔적이 보이는 점, 이븐 아르알라비계통의 <존재의 단일성론>이 신비주의 사상의 일단을 이루고 있는 점 등에 머물렀다. 그러나 1979년의 이란혁명 이후에는 시아 정치사상이나 이슬람 원리주의의 영향이 강해지고 있다.
교육,
할례 전기의 아동에 대한 양친이나 코란교사에 의한 코란 낭독의 교육은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상당히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더욱 발전한 이슬람 교육을 위해서 폰도크(아라비아 어원 푼도크, 숙사라는 뜻. 자바에서는 푸산트렌이라고도 한다)이라고 하는 기숙사가 각지에 산재하고, 울라마(자바에서는 키야이)의 지도하에 아라비아어 문법, 코란해석, 하디스(무함마드의 언행록), 이슬람법, 이슬람 신비주의 등 전통적인 커리큘럼에 따른 교육이 행하여졌다.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동남아시아의 무슬림주민의 교육은 기본적으로 이슬람 교육이었다. 오늘날에는 전통적인 폰도크 프산트렌 교육은 근대적 학교교육의 영향을 받아서 여러 가지 내부개혁이 일어나고, 종교학교나 일반학교를 병설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서 동남아시아에서의 이슬람의 유지ㆍ발전에 의연히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슬람의 위치와 역할,
동남아시아 각국에서의 이슬람의 위치와 역할은 역사, 인구 구성 등에 따라서 다양하다.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브루네이에서는 이슬람이 국가생활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싱가포르, 필리핀, 태국에서 무슬림은 국가적 통합에 관련된 중요한 마이널리티의 위치에 있으며, 인도차이나에서는 소멸의 위기에 처한 극소수파이다.
인도네시아는 총인구 중 88%가 무슬림이며, 동남아시아만이 아니라 세계에서 최대의 무슬림 인구를 가지는 국가이다. 그러나 이슬람은 헌법상 국교로서의 위치에 있지는 않다. 헌법은 그 전문에서 건국 5원칙의 제1원칙으로서 유일 최고신으로의 귀의를 들고 있으며, 무슬림의 대다수는 이를 이슬람의 근본원리인 타우히드(신의 유일성)의 승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지만 일부에서는 이슬람을 국가원리로서 명기할 것을 요구하는 움직임도 의연히 존재한다. 현행 헌법체제하에서 무슬림의 결혼, 이혼, 상속, 기부 등에 관한 행정과 사법, 이슬람 교육 등은 종교성(宗敎省)의 관할하에서 놓여있어 이슬람법의 적용이 보증되어 있다.
말레이시아는 식민지화 이전부터 연속되고 있는 토착의 무슬림 여러 권력을 주체로서 연방국가로서 형성되어 있다. 연방헌법은 이슬람을 국교로 정하고 있는데, 총인구의 44%에 이르는 말레이계 무슬림은 대부분이 농민으로, 공업, 상업을 지배한 화교에 대해서 경제적으로 약세의 위치에 있다. 현 정부는 말레이계 주민을 부미프트라(<토지의 자손>)로서 여러 가지 특권을 줌으로써 경제적ㆍ사회적 향상에 노력하고 있다. 브루네이(총인구 중 말레이계 55%)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술탄 통치국인데, 최근 영국연방에서 독립해서 풍부한 천연자원(천연가스)을 활용해서 독특한 국가형성을 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화교가 주체인 복합민족국가로 총인구 중 말레이계 무슬림 15%와 인도계의 무슬림 상당수가 있는데, 결혼, 이혼, 상속 등의 영역에서의 이슬람법의 적용과 종교활동의 자유가 보증되고 있다. 필리핀과 태국의 무슬림 인구는 모두 총인구의 4%, 그것도 독자적인 역사와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 점에서 공통되고 있다. 또한 국가의 남부에 있어서 근린국의 무슬림 주민과 긴밀한 사회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분리ㆍ독립의 요구가 반복되었는데, 양국 정부 모두 현재의 국경선을 유지하는 것을 원칙으로서 양보하지 않고, 교육, 사회복지 등의 면에서 내부자치를 높임으로써 무슬림 주민의 합의를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미얀마에도 총인구의 4%의 무슬림이 존재하는데, 그 실태는 불분명하다.
인도차이나에서는 오랜 역사를 가진 챰족의 무슬림이 지금도 캄보디아에 거의 10만 명, 베트남에 5만 명 정도, 라오스에 수천 명이 현존하고 있다고 추정되는데, 장기의 전란에 의해서 마이널리티로서의 입장도 위협당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일부는 이미 난민으로서 미국이나 유럽으로 이주했다.
오늘날 메카 순례에 임하는 무슬림 중에서는 동남아시아로부터의 순례자가 가장 많다고 한다. 1970년대부터 80년대 전반에 걸친 ASEAN제국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 번영이 같은 지역에서의 이슬람 재활성화의 경향에 박차를 가한 것이다. 국가적 통합, 개발노선과 전략, 기본적 이권과 사회복지, 마이널리티의 생존권 등 여러 문제에서 이슬람 부흥의 움직임, 특히 이슬람 원리주의의 새로운 대두는 동남아시아 각국의 앞으로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아프리카 권 이슬람,
현황,
아프리카 전역에서는 현재도 매년 이슬람 교도가 증가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이슬람화가 진행되고 있는 대륙이다. 1981년의 추계에 의하면 이슬람 교도가 약 1억5000만 명, 그리스도 교도(전종파)가 약 1억3000만 명이며, 이슬람 교도는 아프리카 전 인구의 3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아프리카제국 독립 전의 1950년대의 2000만 정도에 비해서 7~8배의 증가를 나타내고 있다. 서아프리카의 사하라 이남의 사바나지대, 수단 중앙부, 동아프리카 연안부의 주민의 대부분은 이슬람 교도이며, 지금도 서아프리카의 기니아만 연안부나 동아프리카 내륙부에서는 도시를 중심으로 이슬람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근년 아랍 산유국의 경제원조나 이슬람 자조운동의 전개에 의해서 각지에서 신모스크의 건설, 신자조직의 활성화가 진행되고, 또한 아프리카 각지에서 공로에 의한 메카 순례자의 수도 격증하고 있다.
이를 현재의 국가 레벨에서 보면 이집트,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모리타니아, 수단, 지브티, 소말리아의 9개국을 특별히 아랍ㆍ이슬람 문화의 강국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9개국은 이슬람 교도가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아라비아어를 주요 언어로 하는(소말리아를 제외) 아랍민족으로서의 의식이 높으며 아랍연맹에 가맹하고 있다.
이슬람화의 루트,
아프리카 대륙의 이슬람화의 전개는 역사적으로 보아서 크게 세 가지의 루트가 고려된다. 즉, ①이집트에서 나일강을 따라서 남하해서 수단, 에티오피아로, 나가서 사바나를 따라서 챠드호 지방으로 ②이집트에서 서쪽으로, 마그리브(튀니지, 알제리, 모로코를 포함한 북서 아프리카)를 거쳐서 사하라의 교역 루트를 따라서 남하해서 서아프리카로 ③홍해, 인도양을 거쳐서 동아프리카 연안부로, 여기에서 동아프리카 내륙부로, 동서 양 아프리카의 이슬람화를 크게 유형화하면 동쪽으로는 선형(線型), 서쪽은 면형(面型)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프리카에서는 이슬람화의 거점이, 연안부에 선상으로 나열된 교역도시의 연결이라는 지역 전개를 한 것에 대해서, 서아프리카에서는 왕국의 영토라는 넓은 면에 교역 루트, 국가통치조직의 망이 정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서아프리카,
서아프리카의 이슬람화의 과정에 대해서 영국의 인류학자 H. J. 피셔는 격리, 혼합, 개혁의 세 가지 기본적 단계를 상정하고 있다. 격리는 무슬림(이슬람 교도)인 아랍상인, 전도자, 망명자 등의 집단과, 비무슬림인 아프리카인 집단이 분리해서 거주지를 구분하고 있는 초기 단계이다. 이어서 아프리카주민의 이슬람화가 일어났는데 아프리카인 사회의 개종은 아프리카 국가의 중추부, 즉 왕이나 수도의 상인 등에서 일어났다. 예를 들어 아랍의 여행객 엘 바클리에 의하면 11세기에 발흥한 마리제국에서 왕이 한발시의 기우에 실패해서 곤경에 처했을 때, 모로코에서 일어난 모라비트파의 수도사가 왕의 개종과 인환해서 은혜의 비를 내리게 해서 이로써 왕국이 이슬람화했다고 한다. 모라비트파의 수도사들은 서아프리카의 각지에서 지하드(성전)를 전개하고, 이슬람화의 길을 열었다.
14세기에는 마리의 왕 만사 무사가 마린케(만딘고)족의 많은 추종자들과 재보를 갖추어서 메카로 순례하고(1324~25), 카이로나 마그리브에서 많은 이슬람 신학자를 톤브크투로 데리고 돌아가서 서아프리카에서의 정통 이슬람 증흥의 기초를 형성했다. 또한 스피즘(신비주의)의 경향이 있는 카딜리아파, 티쟈니아파, 또는 마흐디즘(종말론) 등 여러 이슬람 신들의 사상도 이 루트를 통해서 소개되고, 각지에 퍼졌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만사ㆍ무사가 메카에서 돌아왔을 때에 여행의 안전을 감사해서 마린케족의 조령을 제사지내는 전통적 의례를 행하였다는 고사에도 나타난 바와 같이 통치자는 국가의 통치상 사람들의 전통적인 비무슬림적 가치지향도 무시할 수 없다는 안비바렌트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이슬람교와 전통적 종교의 여러 요소와의 신크레티즘(습합)은 피할 수 없었다.
19세기 개혁기에는 이와 같은 습학적 이슬람을 주된 공격대상으로서 북나이지리아의 플루베족인 우스만 단 포디오에 의한 프라니 왕국, 마찬가지로 플루베족에 의한 마시나제국, 현 세네갈의 투크롤족의 하지우말에 의한 투크롤 제국 등의 신성 지하드 국가의 건설이 계속되고 이슬람화를 보다 넓은 지역에서 일으킴과 동시에 유럽의 식민지 세력의 침략에 대해서 최종적으로는 패배했지만, 장기간 강하게 저항했다. 또한 마흐디즘 사상은 수단의 무함마드 아흐마드의 마프디(구세자)선언과 반란(1881), 교단국가의 성립이라는 형태로 결실을 맺었다(마흐디파).
동아프리카,
한편, 동아프리카에서는 환인도양 교역의 일단으로서 발달한 연안부의 여러 도시에서 토착의 반투문화와 아랍ㆍ페르시아 문화와 접촉하였고, 7세기에는 이슬람이 더해지고 아플로ㆍ아시아적 스와힐리 도시문화가 형성되었다. 15~17세기, 포르투갈에게 제해권을 빼앗겨 이슬람 중핵지대와의 항상적인 문화접촉의 길이 끊어진 연안도시는 필연적으로 부득이하게 반투 사회와의 밀접한 사회관계를 맺었다. 이렇게 해서 아플로ㆍ아시아적인 이슬람문화인 스와히리 문화는 한층 아프리카적 색채를 강하게 띠었다. 18~19세기, 몬바사의 마즐루이가, 마스카트 오만의 부 사이드가 등과의 전쟁에 의해서 포르투갈 세력은 점차로 남쪽으로 이동하고, 1840년에는 부 사이드가의 사이이드 사이드에 의한 잔지발을 수도로 하는 연안부 일대의 술탄국가가 성립했다. 19세기 중기에는 아랍 스와힐리 상인에 의한 내륙교역이 시작되고, 그 교역루트를 중심으로 주민의 이슬람화가 일어났다. 이들은 연안부의 스와힐리 이슬람인을 모델로서 스스로를 <스와힐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19세기 말, 유럽인에 의한 식민지화가 일어나자 식민지 통치자에게 징세 청부인이나 안내인으로서 고용된 스와힐리 사람들이나 서아프리카의 이슬람인은 내륙 각지에 이슬람교를 전했다. 또한 화폐경제의 침투와 함께 시장네트의 확립, 플랜테이션이나 철도건설 등에 대한 주민의 타향벌이가 이슬람화를 진행시키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동아프리카ㆍ서아프리카에서 무슬림이 된다는 것은 이슬람문화와 아프리카문화가 융합한 아플로 이슬람을 수용하는 것이며, 동시에 종교 그 자체와 함께 아플로 이슬람적인 생활양식 전체를 수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례를 들면 이슬람 교도에게는 신앙고백, 예배, 희사, 단식, 순례가 <오주(五柱)>로서 의무지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을 소중히 하는데, 또 한편에서는 부족의 전통적인 종교의례나 제사도 수용되어 있는 경우가 그것이다.
종파,
아프리카계 이슬람인은 거의 전부가 수니파(정통파)가 차지하고 있다. 그외에는 동아프리카의 인도ㆍ파키스탄계 주민에게는 시아파계의 이스나 아샬리파, 이스마일파, 보홀라파 등 이란, 인도에 발달한 종파에 속하는 사람이 많다. 또한 잔지발에 왕조를 형성한 부 사이드가는 이바디파에 속한다. 수단에서는 마흐디즘을 신봉하는 마흐디파의 사람들이 지금도 정권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출처 & 참고문헌,
[이슬람 [Islam, al-Islām]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재미있는 지구촌 종교 이야기]
[(CC BY-SA)Tab59@Wikipedia]
#종교 #이슬람교 #예수 #아랍 #중동 #아랍파트 #이슬람교도 #일신교 #무함마드(Muhammad) #라마단 #라마단'의 달(9월) #메카 #아담 #노아 #지하드(jihad) #부하리(Bukhari) #하디스 #유대교도의 제도 #미나레트, #사다카, #시리아, #수나, #시아파 #수니파, #순나파 #수피즘, #술탄, #아잔, #알라, #예루살렘, #와하브파, #움마, #이드알아드하, #이드알피트르, #이맘, #메카신전 카바신전 #사움(sawm #헤즈볼라 #골콘다 #왕조, #교단, #나세르주의, #나스르 왕조, #알라위파, #다룰이슬람, #단식 #세계사 #무함마드 #중세 이슬람역사 #이슬람교의 천계 #유럽과 이슬람의 관계 #자카트 #순례자, #수행자 #수피즘 #정통칼리프시대 #우마이야왕조 #아바스왕조 #중동역사 #코란 #알라이쿰 앗살람(wa-alaykum al-salam #앗살람 알라이쿰(al-salam alaykum #작법(作法) #아라비아어 #하즈 hajj #순례 #성전(聖戰) #주권 #라흐마산 #아라하트 #자카트(zakat #희사 #살라트(salat #예배 #부하리 #샤하다(shahada #작법(作法) #전승 #부할 #서울중앙성원 #부산 알파타성원 #광주성원 #안양 성원 #전주 성원 #이주(히즈라hijra) #이교도 #왼손에 코란 #이슬람교중앙연합회 #오른손에 칼 #순례월(12월) 8일부터 10일 사이 #일신교 #유대교 #기독교 #이스마엘 #알라 #라세르 #천국 #예언자 #쨔그르 #노예 #경전 #계시의 책 #알라의 사도 #지브릴(가브리엘) #알카에다 #하마스 #하주 #is #율법 #계시의 책 #레바논 #텔레반 ##세례 #헬레니즘 사상 #엄마가 들려주는 세계사 이야기

이슬람, [Islam],2

이슬람, [Islam],2
가끔 유튜브에서 아랍어나 터키어를 가르쳐주겠다고 비무슬림들이나 타종교인에게 샤하다를 따라하게 시키고 나서 "축하합니다. 당신은 샤하다를 했으니 이제 무슬림입니다(!)"하고 말하여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드는 장난 비디오를 볼 수 있는데, 말 그대로 장난일 뿐, 타종교인이나 비(非)무슬림이 저 말을 아무생각없이(또는 학술적 목적으로) 따라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무슬림이 되는건 아니다.

인터넷 접미사 ~슬람,
이슬람에서 따 온 인터넷 은어 접미사무슬림에서 따 와 ~슬림이라고도 하나 이는 잘 쓰이지 않는다.

불특정 집단이 특정한 대상에 대해서 종교적으로 까지 보이는 불합리하고 맹목적인 추종, 옹호, 열광 등의 행동을 보일 때 사용한다. '고리타분하고 꽉 막혔다'는 뉘앙스를 주므로 여기서 말하는 '~슬람(~슬림)'은 이슬람 근본주의 등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면에서 나온 것이다. 예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개슬람:  + 이슬람. 사실 다른 대상을 욕하는 게 아니라 개독교에서 나온 말로, 이슬람 자체를 욕하는 말이다.(개독과 달리 이슬람 전체를 욕하는 뉘앙스가 강하다.) 놀라운 점은 이슬람에서는 개를 더러운 동물로 보고 매우 혐오한다는 것(...). 말레이시아에서는 개를 만지는 것조차 하람(부정한 행위)으로 정의했다. 이슬람권에서 사건이 터지면 한 술 더 떠 미개슬람이라고도...
  • 나치슬람: 나치 + 이슬람. 서구권에서 이슬람을 비하할 때 쓰는 말이다. 개슬람의 서구 버전. 실제로 前 메이저리그의 선발투수였던 커트 실링은 무슬림이 나치보다 못하다는 비판 발언을 했다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 도슬람리그 오브 레전드의 악성 유저인 롤독(교)(롤+개독/기독교)에 대치되는 개념으로 만들어진 단어. 원래는 악성 도타유저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언제부턴가 일반적인 도타 유저들도 자신을 도슬람이라 칭하더니 어느샌가 도타 유저 및 팬덤 전반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 리슬람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리븐을 사용하는 유저들이 리븐은 너프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별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고 실드를 치는 양심없는 유저들을 비난하는 단어. 실제로 리븐은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챔피언으로, 다른 암살자 챔피언들과 비교해서 너프를 해야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라이엇 측에서 계속 내버려 두기 때문에 논란이 계속되는 것. 리븐 유저들은 '리븐은 엄청 어려우니까 그 점 감안해서 내버려 두는 거임'이라는 이유를 대기도 하는데, 그런 것이라면 당연히 리메이크된 갱플랭크도 너프를 하면 안 됐었지만 갱플랭크의 화약통 데미지가 말이 안 된다는 등의 소리가 나오면서 결국 난도질 당하였다.
  • 문슬람문빠 문서 참고.
  • 쉐슬람: 그런데 쉐슬람은 자신이 쉐보레 차량을 타고 다니면 자기 자신을 쉐슬람이라 칭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만년필 제조사 쉐퍼의 펜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쉐슬람이라 하기도 한다.
  • 유슬람: 한국에서 변질된 성리학 사상을 비꼬는 말. 비슷한 단어로 유교탈레반이 있다.
  • 특슬람: 레이 커즈와일의 저서 '특이점이 온다'에서 유래한 드립을 치는 유저들을 비꼬아 특슬람이라고 부른다.
  • 즈이슬람: 함대 콜렉션의 정규항모인 즈이카쿠의 빠돌이를 즈이슬람이라 부른다.
관련 문서,
가나다순 정렬
무슬림들의 견해에 따르면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에 이은 최후의 예언자. 무슬림들은 이슬람은 아담의 창조 때부터 있어왔던 종교인데 유대교와 기독교가 이슬람을 왜곡했다고 주장하고, 7세기에 이슬람을 바로잡고자 보낸 최후의 예언자가 무함마드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무함마드가 이슬람의 창시자라고 하는 걸 싫어하지만, 역사적, 종교학적으로 볼 때 사실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유대교와 기독교의 교리를 섞어서 원래 없었던 새로운 아브라함 계통의 유일신교를 창시한 것이 맞다. 그러므로 무함마드를 이슬람교를 만들어낸 창시자로 보는 것은 객관적으로 봐도 잘못된 관점이 아니다. 

세계 인구의 24.1%, 출처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 서울 성원의 인터넷 주소는 이곳이다. 즉, 인터넷이나 책 등지에서 본 걸 그냥 장난삼아 따라한다고 해서 무슬림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 좀 더 설명하자면, 이 SLM 어근에서 나온 말 가운데 하나가 비무슬림에게도 유명한 'salaam'이다. 아랍어처럼 "샬롬 알레켐"도 있으나, 그냥 "샬롬"을 많이 쓴다. 사실 이 어근은 '평화'가 주된 뜻인데, 부가적인 뜻으로 복종, 항복, 건강이 있다. (신에게) 복종함으로써 평화가 있고, 서로에게 항복함으로써 평화가 있으며, 몸이 건강하니 몸에 평화가 있다는 것. 고려가요 쌍화점에 "회회(回回)아비"가 등장하는데 회족 출신이거나, 이슬람(회교) 신자로 고려에 온 장사꾼(그러니까 회족이 아닌 민족일 수도 있음)이라는 등 견해가 갈린다. 쌍화점 문서에서는 위구르인으로 소개되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면서 한족을 제외한 56개 소수민족을 거느리게 되었는데, 회족(후이족으로도 표기)과 위구르족은 별개의 민족으로 분류한다. 성(省)과 동등한 행정단위인 민족자치구로 닝샤 후이족 자치구와 신장 위구르족 자치구도 별개로 존재한다. 본래 한 종교의 경전은 처음 쓰여진 이외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터부시된다. 불경 중 중요한 구절은 중국어의 음차를 이용해 표기하거나,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읽는 전통주의 가톨릭 신자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기독교도 초기에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성경만 인정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중앙아시아를 들 수 있다. 이 점에서 '가려져 있던 하느님의 빅픽쳐가 뒤로 갈수록 점차 완전히 드러나는' 계시의 점진성을 주장하는 기독교와 대비된다. 설명하자면,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알라의 첫 예언자이며, 아브라함, 모세, 솔로몬 등 구약의 굵직한 인물도 알라의 예언자였으며 심지어 예수는 무하마드의 맞선임이었다는 의미다. 

유대인과 기독교인. 누구를 지칭하는지 해석이 갈리는데 에즈라, 아자리야/아벧느고 등이 거론된다. 교리에 따르면 이 25명 말고도 전 세계에 수많은 예언자들이 나왔다고 한다. 이 중 쿠란에서 공인된 게 25명. 나머지 둘은 모세와 무함마드 정확히는 신이 마지막으로 보낸 최후의 예언자이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앞선 예언자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책으로 비교하자면 앞서 모세(구약)나 예수(신약)를 집필해 부족한 점이 생기자 무함마드로 최신 개정판(쿠란)을 낸 것이므로, 이쪽이 더 옳은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대로는 아니고 지극히 이슬람스러운 전통에 따른다. 가장 흔한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도 사실 페이크고 재림하긴 하는데 십자가들을 부수고 기독교도를 이슬람으로 이끌며 40년 통치 후 죽어서 메디나의 무함마드 무덤 옆에 묻힐 것이라고 한다. 보다시피 예수의 신성만이 아닌 신약의 핵심을 싸그리 저격하는 듯한 내용 때문에 기독교 입장에선 되려 뒷목잡을 수도... 

사실 예수의 죽음에 관한 이슬람의 전승과 해석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여러 얘기가 난무했다. 세르기우스라는 사람이 대신 죽었다는 얘기도 있고, 신이 직접 예수를 승천케 했다는 얘기도 있으며, 무덤이 메디나에 있다는 전승이나, 신이 그를 잠깐 동안 죽게 했다가 3시간, 또는 사흘 만에 되살렸다는 전승도 있었다. 이란과 이라크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시아파가 다수인 몇 안 되는 국가들이다. 이슬람권에서 가장 세속적인 지역으로 꼽히는 중앙아시아에서도 예외적으로 페르가나 계곡 지역은 와하브파가 득세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 동부, 키르기스스탄 남부 일부가 해당한다. 하지만 이쪽이 지역사회 차원에서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성향이 있지만 우즈벡과 키르기스라는 나라 전체적으로 보면 세속적 성향이므로 실제로는 사우디아라비아처럼 꽉 막힌 사회까지는 아니다. 

시조격인 메블라나 루미(1207~1273)가 지은 시를 봐도 이렇다. "오라 그대가 무엇을 믿든 믿지 않든불을 섬기든뱀을 섬기든신을 많이 믿든십자가를 섬기든 누구든지 오라….여기는 절망의 문이 아니다. 모두가 신에게 가는 길이자 모두가 용서받고 모두가 화목하게 지내며 모두가 자신의 신앙을 존중받아야 하는 곳이다." 이게 법제화 된게 그 유명한 샤리아 터키의 아타튀르크가 한때에 국부와 위인으로 칭송받은 것도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정교분리를 확립하여 국가발전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한때 이슬람 사회를 평정했던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안정적인 교화적 민주 체제를 이륙하면 다른 국가들도 뒤따를 것... 같았지만 교리 자체가 워낙에 배타적이고 정교분리와는 정반대인지라 도리어 터키가 다시 신정국가로 회귀하는 추세다. 

종교학적으로 보자면 창시 당시의 이슬람은 한 유목민 아저씨가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세력을 넓힌 유대교 내지는 기독교의 또다른 신흥 분파(=이단)이기에 생존을 위해서라도 강경•배타적으로 전도(?) 해야하는 특수성 또한 배제하기 어렵다. 독특한 아잔 문화도 숭배와 전파를 위한 것이다. 무슬림들은 기도를 하고 주변에 개종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계시"를 듣는다는 것 이게 바로 그 지하드 되시겠다 공개 처형 내지는 학살 “신의 위용을 보여준다”는 게 결국엔 엄청난 잠혹성으로 공포에 의한 굴복을 받아내자는 뜻이다.

현대 지하디즘/테러리즘도 이런 교리에 입각한 결과다. 과거에서부터 머리통 날리는 건 기본이있다. 요즘시절엔 어지간해선 잘 하지 않는 짓을 지금도 하니까 더 문제가 되는 것. 그것도 그냥 전쟁도 아니고 너죽고 나죽고 식의 결사항전 구약에선 대표적으로 예리고 함략 등의 빼도박도 못하는 전쟁범죄와 비윤리적인 전쟁들이 묘사되지만 그걸 알기 때문에(...) 니케아 공의회 등을 포함한 숱한 개혁을 거쳤으며, 현대로선 예수의 새로운 개명 (서로 사랑하거라)과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하사받은 십계명이 최우선이란 원칙하에 (살인X)반전을 기본 교리로 삼고 있다.

극단적인 반전교리를 펴는 분파를 제외하곤 군종 사목을 매우 중요시 여긴다. 전쟁터에서 부득이하게 사람을 죽이는 병사들에게 병자성사와 고해성사를 집전해야 하기 때문. 그 조건이란게 좀 두리뭉실한데, 단체간의 스케일로 지하드 발동 조건을 충족시키면 자동으로 성전 돌입이다. 무슬림들을 개종시키거나, 전도를 거부하고 지즈야 납세도 하지 않을 경우 타겟이 될수 있다. 그러니까 무슬림들의 이익에 반하는 집단에는 그냥 전쟁 건다는 뜻이다. 다신교, 혹은 무신론자들의 사회는 그냥 공격해도 교리상 무방하다. 그냥 이슬람을 거역하면 지하드 대상이 될수 있다고 해석이 가능하다. 

이슬람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국가에서는 인형(人形)의 반입도 금지되며, 허락이 된다 해도 목을 떼어내야 한다는 듯하다. 예를 들자면 빅잠은 가능하지만 건담은 불가. 이것도 나라마다 기준이 다른 건지 이집트에서는 넨도로이드도 반입이 가능한 모양이다. 사실 이집트 국내에서도 야시장이나 백화점 등지에서 고대 이집트를 소재로 한 피규어들을 팔기도 하는 걸 보면 이집트는 확실히 기준이 느슨한 듯. 물론 이 이시기에도 기독교도에 대한 멸시, 성당 건축 제한 등의 차별과 기독교도 가정을 대상으로 한 예니체리 강제징집 및 강제개종 등 탄압이 없었던 건 절대 아니다. 그래서 오스만 제국 시절 정교회나 유대교 밀레트에서 해결하기 힘든 재판의 경우, 무슬림이 아닌 경우에도 많은 이들이 하나피파 법관에게 가서 재판을 받곤 했었다. 

일부 세속적 이슬람 국가들을 제외하면. 그러나 이런 세속적 정서가 많은 이슬람권 국가들에서도 가정에 따라 계속 쿠란과 샤리아 교리에 입각해 개종자에 대한 명예살인 사태가 끊임없이 일어난다. 유럽 이민자 무슬림들이 타종교로 개종한 뒤 겪는 박해와 위협에 대한 증언들이나 뉴스들만 봐도 이슬람권의 개종자 박해가 타종교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은 당연히 궤변이다. 이슬람이 최종적이고 완벽한 진리라는 식의 주장은 말 그대로 무슬림들이나 하는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고, 그런 일방적 주장을 가지고 이슬람 신앙을 버리거나 비이슬람 종교를 믿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의 인권을 침해할 권리는 없다.

같은 아브라함 종교계열인 기독교와 달리, 쿠란에서는 신과 인간은 만날 수 없다고 말한다. 반대로 개신교는 개인과 신이 직접 교감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신부나 성모 마리아 같은 중재인을 두지 않는다. 특히 성차별적이거나 전근대적 또는 비합리, 비윤리적인 구절 등. 물론 초창기를 비교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옆동네 기독교도 몸집이 불어나고 국가에 의해 제도권 종교가 된 뒤부터는 북방 십자군이나 스페인 콩키스타도르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무력을 동원한 선교활동을 하였다. 

正命. 모든 일은 신의 뜻에 따라 이뤄진다는 뜻. 살라트가 유효하려면 청결을 유지해야 하는데, 최소한의 청결을 확보하고자 종교적으로 씻는 행위를 '우두'라고 부른다. 종교적 행위로서 우두를 하려는 의도를 명확히 인식하고 얼굴과 손발, 목, 입 안 등 지정된 부위를 지정된 순서와 방법에 따라 꼼꼼히 씻는다. 물론 우두보다 더 좋은 것은 아예 전신을 목욕하는 것. 다만 예전에 청결한 상태를 유지한 뒤 이를 더럽히지 않았다면 다시 씻을 필요는 없다. 청결함을 깨는 경우는 방귀를 뀌거나, 대소변을 보았거나, 피를 흘렸거나, 잠이 들었을 경우 등이 있다. 

현대 이슬람은 시작시간을 태양이 지평선 아래 X도가 되는 시각을 천문학적으로 계산하여 정한다. 지평선 아래 몇 도인지는 주요 이슬람 공동체마다 다르지만, 세계 무슬림 연맹에서는 18도를 기준으로 한다. 몇몇 무슬림들은 항해박명, 즉 12도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어질 때부터'가 어느 정도인지 역시 주요 이슬람 공동체마다 기준이 다르다. 남중 시간으로부터 1분만 지나면 된다는 곳도 있고, 5분쯤은 지나야 한다는 곳도 있다. 

세계 무슬림 연맹에서는 일몰 후 태양이 지평선 아래 17도로 내려갔을 때를 시작시간으로 본다. 한때는 지하드, 즉 성전이 들어간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제사나 명절 전에 하는 '목욕재계'와 근본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목적이다. 그 외에도 예배 중에 개가 앞을 지나가면 그 예배도 무효가 된다. 근데 우습게도 고양이는 괜찮단다. 무슬림들의 관념에 따르면 개는 인간을 신으로 인식하여 인간을 절대적으로 따르고 신뢰하기 때문에 불경하지만, 인간을 적당히 쌩까는 고양이는 인간을 신으로 보는 게 아니라 신의 대리인이란 것을 알고 있는 동물이기 때문. 사실은 무함마드가 개는 싫어하고 고양이만 좋아하는 개인취향에 따라 예배규정을 이런 식으로 한 것이다. 아주 사소한 피 흘림이 아니면 무조건 해야 된다고 한다. 샤워기 없이 손으로 물을 떠서 전통적으로 하는 방법도 있다. 어께를 기준으로 눈대중으로 맞추는 곳도 있고 발과 발을 옆으로 슬쩍 대어 맞추기도 한다. 

수니파 5번, 시아파 3번(시아파도 기본적으로 5번이다. 3번이라고 오해를 받는 것은 수니파는 예배를 정확하게 다섯 번으로 나누어 하는 반면에, 시아파의 경우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연달아 하고 네 번째와 다섯 번째를 연달아 하기 때문이다. 즉,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3번만 예배를 하는 것 같지만, 여기서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한 번의 예배가 아니라 약간의 숨을 돌리고 하는 두 예배가 합쳐진 것이다.) سجادة, sajjāda الوضوء, al-wuḍūʼ‎ 경건한 것도 좋지만, 건조한 지방에서 물을 헤프게 쓰다간 진짜로 신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صلاة‎, Salat 

예를 들면, 대한민국 서울 한남동 모스크에도 한국인 수니파 이맘(이주화 이맘)이 있다. 그리고 현대 시아파 역사에 상상을 초월하는 영향을 끼친 루홀라 호메이니 정도가 이맘으로 불리고, 나머지 시아파 율법학자들은 아무리 명성이 날리거나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이라도 이맘 칭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여담으로, 이슬람 근본주의 신정국가인 이란 헌법에는 이 구세주 마흐디가 재림할 경우, 그에게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통치권을 즉시 넘긴다(!)는 구절이 있다. 이는 '모방의 원천'이라는 뜻이 있는데, 말그대로 시아파 신도들이 대 아야톨라의 행적이나 율법해석을 그대로 모방해 실천해도 무방할 정도인 높은 수준의 종교적 권위자들이라는 뜻이 있다. 

최근의 ISIL에 대항하는 시아파 신자들의 지하드를 촉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렘과 어원이 같다. 므흣한 그 하렘의 의미는 '금(禁)'남구역에 해당한다. 명지대 이슬람 전문가인 최영길 교수의 할랄식품 해석 문헌에서도 이를 언급한다. 사실 이것은 종교적인 것과 실질적인 중동 지역의 현지 환경의 어려움이 합쳐진 것이다. 대부분 사막에 척박한 고산지대들뿐이라 안 그래도 먹을 게 풍족하지 않은 상황에서, 인간과 동일한 먹이를 먹는 경쟁관계의 동물을 키우기는 어려웠다는 점이 작용한다. 

이슬람교를 믿는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지역에서도 사육하는 낙타염소 등 다른 우제류 가축들처럼 풀만 먹고 고기는 물론 젖, 털, 가죽 등 다른 부산물들까지 같이 제공하면 모를까, 돼지는 고기만 얻는 짐승인 데다 굳이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먹여야 하기에 키우려면 엄청난 부담을 강요한다. (물론 돼지도 고기뿐만 아니라 가죽이나 털같은 다른 부산물들이 나오긴 하지만, 고기는 물론 젖이나 가죽, 털등 나오는 부산물들이 다양한 낙타, 소, 염소, 양 등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등 이슬람권 지역에서 사육하는 다른 가축들에 비하면 극히 제한적이다.) 게다가 돼지는 때때로 진흙탕에서 굴러 몸을 씻어야 하기 때문에 물도 엄청나게 필요해서 이슬람교의 본산이자 물이 부족한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사육하기에 완전히 부적합한 동물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유목민족들인 이들에게,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매우 짧은 돼지는 아무래도 안 어울리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한국이나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 국가들에 거주하거나 관광, 사업차 방문한 무슬림 외국인들 상당수는 스시징기스칸가라아게스키야키규동불고기안동찜닭 등 생선이나 양고기, 닭고기, 소고기가 들어간 현지 요리들만을 찾아 먹기도 한다.

한국 이슬람 중앙성원 홈페이지에 올라온 질문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질문자가 중동 출신인지 동남아 출신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외국인 무슬림인데, 한국에 와서 사귄 친구에게 선물로 초코파이를 받았다. 새로 사귄 친구에게 받은 첫 선물이라 일단 받고서는 이게 이슬람 율법에 허용되는지 확인해보려고 질문한 것. 그런데 초코파이 마쉬멜로우에 돼지기름에서 추출한 성분이 섞여 있었고 결국 먹어선 안 될 하람이란 답변을 받고 먹지 못하고 버렸다고 한다(...). 사실 알콜이라는 단어 자체가 아랍어 알쿨(الكحل, al-kuḥl, "화장먹, 아이라이너 같은 가루")에서 나온 단어다. 보통 '밖에서 공식적으로' 먹는 것이 기피되는 편이다.

율법의 원칙과 현실의 욕구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한 것. 당연히 원칙적으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집에서 술이나 돼지고기을 먹을 때 "이 정도는 하나님께서 봐주실 거야. 그분은 자비로우시니까." 하면서 먹는 신도들도 많다. 물론 이건 이 음식들을 쉽게 구하는 한국에서의 얘기다. 아랍국가에서도 이 음식들을 구할 수 있다면 이렇게 될지 모를 일이지만. 이집트나 시리아, 레바논 같은 경우 기독교인이 공존해서인지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돼지고기임을 알고도 거리낌없이 먹는 무슬림들을 본 한국인 거주자들과 일부 외국인 관광객들의 증언도 있다. 가을이 아니다! 이슬람력은 계절의 변화와는 무관한 순수 태음력이라 반드시 태양력(그레고리력)의 9월 및 계절의 변화와 일치하지 않는다.

이슬람력과 태양력은 대개 1년에 10일씩 오차가 발생하므로 해마다 오차가 누적되면서 라마단은 일정한 주기에 따라 어느 계절이든 거치게 된다. 이슬람력 문서 참고. 애초에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단식을 하는 것은 아니니 상관없다. 단식을 함으로써 정신 상태를 맑고 순수하게 만들면 천사의 속성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보았고, 또 굶주린 사람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줄 수 있는 동기를 유발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하게 된 것이다. 굶으면 살찌기 더 쉽다. 몸이 양분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양분이 들어올 때 축적해두려고 하기 때문. 굳이 식사량으로 살을 빼려면 단식하지 말고 소식+운동을 하는 게 효과가 있다.(운동이 없으면 근육량까지 같이 줄고 소식이 없으면 건강한 근육돼지가 된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힌두교 문화권도 대표적인 일부일처제 문화권이다. 마하트마 간디 같은 인물도 평생 일부일처제를 지켰다. 치마 속을 몰래 훔쳐본다든지. 이슬람에서는 신의 형벌이 불을 통해 가해진다고 믿으므로, 죽은 사람을 화장하는 것조차 극도로 꺼린다. 실제로 쿠란엔 직접적인 동성애 금지 조항은 없다. 참고 그러나 쿠란에 준하는 제2경전인 하디스에 동성애 금지가 나와있기에 사실상 동성애는 이슬람 교리상 죄다. 이 구절은 남편의 아내에 대한 구타가 무죄가 되는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주장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무함마드가 아내를 때린 남편을 규탄하였다는 기록을 근거로 때리는 것이 아닌 이혼을 제안하라는 말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때리다가 맞는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영문 위키 문서 및 위키이슬람 문서 참조. 아랍어로 "아드라부 안후나"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현대 아랍어 문법으로는 해석이 애매하다. 아드라부란 문구로 시작할 경우는 보통 멀리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뒤에 안후나라는 부분이 구분하는 한정성 때문에 사전대로라면 이 문구는 때리다, 후드려패다(!)라는 문구로 해석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한국어 쿠란에서는 저 아내를 때리라는 단락에 '가볍게'라는 원문에도 없는 첨언을 달아 번역했다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우스운 사실은, 이 쿠란의 규정을 어긴 당대의 유일한 무슬림이 무함마드 본인이었다(!).

그는 정치적인 필요(예를들어 정략결혼인 아이샤 빈트 아부 바크르 등)나 개인의 음욕을 충족하려는 목적으로(대표적으로 양자의 며느리와 간통하여 결혼한 자이납 빈트 자흐시, 적 부족장의 아내로서 강간에 가까운 강제결혼을 했던 샤피야 빈트 후야이 등) 죽을 때까지 "본인에게만 허용된 신의 특별 계시"라는 미명하에 무려 13명이나 되는 아내를 두었다. 또 이 아내들을 공평하게 대하라고 본인이 말해놓고 정작 자신은 아내들을 공평하게 대하지 않았으며, 일부 아내만 편애(대표적으로 마리아 빈트 샤문)하는 바람에 아내들끼리 거짓 고발과 다툼이 있게 방조하기도 했다(...).

무함마드 문서 참고. 여종 혹은 포로로 잡히거나 사온 이교도 여자 성노예. 만일 주위에 물이 있다면 소위 '깨끗한 상태'가 되기 위해선 우두(팔, 다리와 얼굴을 씻기), 혹은 구쓸(샤워)를 해야 한다. 여성과의 사심없는 가벼운 접촉 정도는 괜찮다지만(무함마드도 예배 전에 부인과 가벼운 키스를 했다는 기록 때문에 괜찮다고 주장) 조금이라도 사심이 있었다면 바로 세정의식을 다시 해야된다. 한마디로 이슬람에서 여성을 대하고 만졌을 때는 화장실에서 똥을 쌀 때와 마찬가지로 더러운 상태로 취급된다는 것(!).

영어가 안 되는 위키러들을 위해 요약해서 설명하자면, 아내를 때릴 때는 얼굴을 포함한 머리 부분을 때려서는 안 되고, 때리며 아내한테 욕해서도 안 되고, 열 대 이상 때려서도 안 되고, 아내를 다치게 해서도 안 되고, 손을 가슴 높이 위로 처들어서도 안 되고, 몸에 자국을 남길 정도로 세게 때려서도 안 되고, 연속으로 때려서도 안 된다. 막대기로 때릴 때는 작은 막대기로 때릴 수 있고, 때리는 것은 가장 마지막에 택하는 방법이어야 하고, 이전에는 말로 타이르거나, 동침을 거부함으로써 경고하라고 한다.

헤로도토스가 살던 시절에도 나온 걸 보면 이슬람이 생기기 아득한 옛날부터 있었던 걸 알 수 있다. 가령 중왕국 아시리아의 경우, 여성 외출 시 기혼은 베일 착용, 미혼과 창녀는 미착용이 의무였다. 창녀가 위반 시 곤장 50대와 끓는 물 세례를 받았다. 부인은 전쟁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면 2년을 기다려야 했고, 그 뒤 재혼해 새로 애까지 낳았어도 옛 남편이 갑툭튀하면 홀로 그에게 돌아가야 했다. 인도 토속 종교가 카스트와 지참금 같은 힌두교의 신분제도, 여성 인권침해 등의 요소들을 죄다 받아들여 여성차별 종교가 되어버린 사례에 비추어 볼 때, 이슬람이 없었더라도 아랍 전통적 여성 차별 인식으로부터 또다른 여성 탄압 종교가 탄생했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 하지만 이슬람은 첩에 대해서는 제한을 두지 않아 사실상의 성노예제도 및 하렘 운영은 가능했다는 게 함정. 때문에 실질적으로 4명 제한은 안 지켜졌다. 

잠자리 횟수까지 모든 것을 공평하게 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그러나 당시 여자는 0.5명 분의 증인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남자가 아무도 증인으로 나서주지 않을 경우 총 8명의 증인이 필요했고, 그중 단 한 명만 부족해도 해당 사건은 증거불충분 처리가 됐다. 즉 개선이 되었건 안되었건 이 교리 자체가 여성차별 규정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차별규정은 현대까지도 "훌륭한 선지자 무함마드의 가르침"이라는 식으로 변화가 불가능하게 유지되고 있다.

무슬림들과 이슬람을 지나치게 옹호하는 사람들이 명백한 이슬람권의 여성차별을 변명할 때 쓰는 주된 논리가 "전근대 불교나 기독교도 이슬람과 별다를것 없었다. 그러니 이슬람을 비판하지 말라"는 식의 양비론인데, 사실 이슬람 창설기에도 비잔티움 제국 문화권이나 중화 문화권, 게르만 문화권 등 불교 및 기독교 문명은 이슬람에 비해 딱히 두드러지게 성차별적이지도 않았으며, 또한 근현대 이후 사상적으로 변화해가는 지역의 문화권에 유연하게 적응하여, 현재 불교나 기독교의 실천교리 상으로는 여성을 사회적/생활적으로 차별하는 교리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된다. 반면 이슬람은 21세기에도 쿠란/하디스 및 샤리아에 있는 복장규정, 일부다처제 및 각종 여성차별을 문자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집행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이슬람이라는 종교 자체를 거의 잠식해가는 수준이다. 

율법이나 실천에서 이슬람과 상당히 비슷한 유대교의 경우도 토라에 간통자에 대한 투석형, 일부다처제를 했던 왕들과 지도자들, 각종 전근대적 처벌 규정 등 샤리아를 연상시키는 율법들이 많고, 지금도 실정법이지만(사실 이는 무함마드와 우스만 등 초기 무슬림들이 이슬람법을 만들 때 토라의 율법을 어수룩하게 변형하여 섞었기 때문이다) 유대교는 이미 11세기에 일부다처제를 폐지했으며, 근대에도 현대에도 개혁파나 정통파는 말할것도 없고, 하시딤파나 하레디같은 극정통파마저도 간통자에 대한 투석형이나 개종자에 대한 살해 등 반인권적 율법은 사실상 사문화시켜두고 실천하지 않는다. 물론 유대교 등도 근본주의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나, 현대에까지 샤리아 처벌 강요를 전세계적으로 바득바득 우겨대는 무슬림(근본주의자)들과는 아예 문제의 심각성부터가 다르다. 

쿠란의 해석은 후대의 해석을 따르도록 쿠란이 지시하고 있어서 여성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해석해도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남성의 기득권 유지가 목적이라는 분석이 있다. 그 이유도 가관인 게, 서구 남성이랑 연애를 하거나, 비무슬림과 결혼했다는 이유 그리고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조금이라도 진보적으로 나가 밉보였다는 이유(!) 등이다. 사실상 답이 없는 수준. 인도네시아는 여성 대통령도 집권했었고, 아이돌 여가수 그룹도 대놓고 히잡을 안 쓰고 공연, 활동하는 등 이슬람교의 본산인 중동이나 아랍 국가들보다는 여성 인권이 꽉 막혀있지는 않다. 그 중동의 대부분 국가들에 이슬람이 퍼져 있으니 혼동할 법도 하긴 하다. http://www.landinfo.no/asset/960/1/960_1.pdf, http://www.justice.gc.ca/eng/rp-pr/cj-jp/fv-vf/hk-ch/p3.html, http://en.wikipedia.org/wiki/Honor_killing#Iran, http://www.centerforinquiry.net/isis/islamic_viewpoints/the_lethal_combination_of_tribalism_islam_cultural_relativism, http://www.islam-watch.org/SyedKamranMirza/honor_killing.htm, 이상 팔라비 왕조에서 재발췌. 

이는 헤즈볼라의 특성이 이슬람주의 단체의 탈을 쓰고는 있지만 실상은 시아파 아랍 민족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탈레반이나 알 카에다 같은 세력보다는 온건한 편이다. 자살특공도 웬만하면 하지 말 것을 권장하는데 하더라도 신중히 여러 번 고려해서 자발적으로 하겠다고 나선 사람만이 한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공격은 금지하고 전사자에 대한 예우를 극진히 하는 데다 이스라엘과 미국을 까는 방송을 래퍼들이 송출하는 녀석들이다. 예시를 들자면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 덕분에 경제적으로 삶이 윤택해졌지만 이와는 모순되게 종교적으로는 와하비즘으로 대표되는 이슬람 근본주의와 극단주의가 존재한다.

Kurban과 발음이 비슷한 폴란드어 Kurwa는 씨발이란 뜻이다. 오히려 삶에서의 의식적, 의례적인 율법행위에서는 기독교계 종파들이 훨씬 더 자유롭다. 이슬람이 유대교의 타나크 율법의 상당수를 그대로, 또는 일부 변형하여 차용해 가져온 반면 기독교의 신약성경과 교회 전통, 신학에서는 타나크 의식,전례법,위생법 대다수의 강제성을 폐지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흡연과 음주의 경우. 유대교에서는 이 둘 다 허용된다.  

의외로 규율이 널널한 터키에서도 그래서 공중화장실에 갈때 소변기에 사람이 없는데도 굳이 안에 들어가서 작은일을 보는 사람들이 많다. 최영길 저,《최초 원료에 대한 파트와 : 할랄 인증 조건과 절차》, 2017 사도(무함마드)는 이자는 70개의 죄(와 동급)이며, 그중 가장 사소한 것(동급의 죄)가 남자가 그의 어머니를 간음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이븐 마자 본 하디스, 2360절) 한국 무슬림의 대표적 인물들 중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 와하브파에 영향받은 아랍 유학파 출신들이 많은데, 이들 중 일부는 와하비즘의 극단적 교리를 한국에서도 따라 자신의 자녀에게 나쉬드를 제외한 모든 음악을 금지하는 걸 자랑스럽게 주장하여 이러한 행위를 혐오하는 한국의 네티즌들과 격렬한 논쟁이 있었던 적도 있다. 위의 그림은 페르시아 세밀화이다.

본래 페르시아의 세밀화 전통은 몽골을 통해 중국에서 넘어온 것이고 무함마드를 비롯한 사도들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금지되어있지만 계시를 받기 전의 무함마드는 신의 사도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이므로 그려도 무방하다고 본다. 당장 아래의 그림에서는 무함마드의 얼굴에 베일을 그려 가려놓은것을 볼 수 있다. 당시 무함마드가 정복한 메카는 빈부격차가 극심했던 지역이라 하층민들의 불만이 아주 높았다고 한다. 평등사상을 강조한 이슬람 설교가 통했던 것도 이 덕분이다. 다만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세력의 침략을 받기도 했다. 

서유럽의 일부만이 참가한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의 유럽에 대한 군사적 열세를 증명한 사건이다. 12세기를 기점으로 유럽은 인구에 있어서나 농업 생산성에 있어서나 상공업의 활성화에 있어서나 이슬람권보다 종합적으로 더 강대한 국력을 보유하게 된다. 연금술을 뜻하는 'alchemy'와 대수학을 뜻하는 'algebra'는 모두 아랍어에서 온 말로써, 각 단어의 앞에 붙은 'al-'은 아랍어에서 정관사 the의 의미로서 자주 사용되는 말이다. 요새 그나마 이슬람권 국가 중 세속화가 잘 되었다는 터키(구 소련소속 중앙아시아가 세속화 1위. 레바논,알제리,터키 가 2티어 )에서도 무신론자라는 단어는 욕설로 사용되는 것을 감안하면 이때의 상황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일 칸국의 재상으로서 마라게에 천문대를 지었고 프톨레마이오스를 능가한 천체 관측기를 만들었다. 그 기구로 투시는 지구 공전설을 주장하게 된다. 이후 그 기구를 티코 브라헤도 사용한다! 그리고 이 수정하는 것도 이슬람권 사람들이 잘못 접근한 것과 옳은 목적을 가지고 의견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디 철학이나 모든 성경이나 코란 같은 책들은 선조들이나 성인들이 이성적인 생각과 공동체를 위한 생존 및 개개인의 권리 보장, 차별이 없는 평등 등의 지금의 현대 법전과 같이 여러 생각과 의견을 쌓고 모아 만들어지고 고쳐 만들어진 것인데 이들은 이러한 전제를 무시하고 멋대로 자신들의 이익을 목적으로 수정을 가해버린 것이 제일 큰 문제점이다.

한 예로 성노예는 여성에 대한 인권에 대한 침해 및 그 여성에 대한 생명이 위험해 질 수 있기에 금지해야 한다고 철학자들과 성인들이 누누히 강조해왔었다. 거기다 코란 어디에서도 맞서 싸우라는 것은 적의 군사들과 싸우라고 했지 민간인들이 살고 있는 곳이나 정부 기관을 향해 테러를 하거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가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즉, 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오히려 조상들의 명예에 먹칠과 퇴보를 하고 있다는 것.

독일 무슬림 출신인 하미드 압델 사미드 등의 이슬람 비평가는 이러한 무슬림들의 행태를 두고 현대사회의 마피아들이 주민들에게 시행하는 '보호세' 갈취 제도와 비슷하다고 평했다. 일례로 동로마 제국에서 불가리아를 정복한 이후 처음에는 불가리아인 농민들에게 세금을 곡물로 납부하도록 했으나, 나중에 이를 바꾸어 불가리아 농민들에게 세금을 화폐로 납부하도록 바꾸자 바로 폭동과 반란이 일어났었다. 자급자족하는 농민 입장에서는 세금으로 지불할 화폐를 ‘구입’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다. 2등 국민으로 차별받는 기독교도와 유대교도 샤리아에 의한 비무슬림 탄압과 차별 및 세금폭탄 부과와 비무슬림 양육권 빼앗기 등. 로버트 스펜서 저, 《정치적으로 왜곡된 이슬람 엿보기》 163p. 결과적으로 무슬림들에게 유리해질 수밖에 없다.

전근대 사회에서 아내의 종교는 남편을 따라가게 마련인데, 대놓고 무슬림 남성이 비무슬림 여성을 상대적으로 취하기 쉽게 만드는데 경우에 따라선 일부다처제까지 허용하니... 더욱이 이 결혼 차별 문제는 근본주의적인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말레이시아 같은 비교적 온건하다고 자부하는 나라에서까지 심각한 인권문제가 될 정도로 21세기 현재까지 철저히 현재진행형이다. 

동시대 비잔티움 제국은 신분이나 종교에 의한 차별을 법적으로 금지시켰다. 다만 중세의 역사 기록이 공적을 자랑한다던가 피해를 과장하는 식의 부풀리기가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진짜로 수백만명이 납치되고 학살당한 경우, 그러니까 16세기 크림 칸국에서 노예 납치를 목적으로 우크라이나에서 1년에 평균 2만명씩 수백만명을 납치하거나 학살하자 우크라이나 중부가 무인지대가 된 적이 있다. 중세 초 무렵에 유럽에서 노예로 납치된 수효가 진짜 수백만명이라는 기록이 맞다면, 남부 유럽의 많은 곳이 주민들이 전부 달아나서 황무지가 되었다는 기록이 나와야 한다. 실제로 십자군 왕국들은 이교도를 죽이거나 여자를 첩으로 삼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했다. 덕분에 레콩키스타가 완료된 후 유태인들은 무슬림과 함께 학살당하거나 추방당하는 신세가 된다. 

노르만인들은 무슬림 상당수에게 한동안은 관용을 베풀었다. 심지어 나디르 샤가 무굴 제국의 수도 델리를 함락할 때는 같은 무슬림들이 통치하는 도시인데도 불구하고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다, 물론 무신론/무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20세기 중후반의 공산주의 탄압 때문이라고 변명은 할 수 있으나, 그것이 2010년대 후반인 지금까지도 교정되지 않는 것은 이슬람 세력의 반발과 압력 때문임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단, 일부 지역에서는 다소간 예외도 있다.

공산주의 치하에 있었던 중앙아시아나 알바니아, 발칸반도 지역의 보스니아인 거주 지역에서는 무신론을 내세워도 딱히 죄가 되지 않는다. 즉, 선교가 금지인 나라. 사실 선교가 금지인 나라는 이슬람권 국가를 제외하고 꽤 있는 편이고 이 정도면 진정한 종교의 자유라고는 볼 수 없지만 형식상으로는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 주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있으나, 실질적으로 대다수 강성 이슬람 국가에서 비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은 주요 무슬림 커뮤니티에서 극심한 핍박이나 린치를 받고 지구상 어느 종교권보다도 가혹한 사회매장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볼 때 현대 기준으로 위 이슬람 국가들이 꽤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준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등의 중앙아시아 쪽 국가들은 보통 세속주의적이라고 하지만 이 동네는 이슬람을 포함한 모든 종교가 엄격하게 통제받고 있는 쪽에 가까우며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라 보긴 힘들다. 타종교인이 무슬림으로 개종했다가 다시 타종교로 개종하는 것도 포함. 이 신성모독이란 것도 무슬림들 기준에서 판단되는, 대단히 자의적인 기준이다. 일례로 나이지리아에서는 기도하는 무슬림들 앞으로 기독교인 여자가 단순히 그냥 지나갔다는 이유로 신성모독이라며 기독교도에 대한 유혈폭동이 일어난 적도 있다. 실제로 이집트에서는 해마다 지즈야를 낼 돈이 없는 많은 극빈층 콥트 정교회 기독교인들이 무슬림으로 반강제로 개종당하는 걸로 유명하다. 근데 사실 이슬람 내 세속주의가 힘을 잃지 않았던 20세기 중후반만 해도 중동에서조차 수니파-시아파 무슬림 사이의 결혼은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다.

당사자들도 "같은 무슬림인데 뭐 어때..." 같은 식으로 생각하고 말았다고. 그러나 갈수록 이슬람 근본주의가 부상하고 수니-시아파간 종파갈등이 극심해지면서 지금은... 2014년 ICM 영국, 독일, 프랑스 무슬림 ISIL 지지여부 여론조사 자료 통계. 단적으로 말해 영국에서는 길가다 마주치는 무슬림 중장년 10명 중 1명이, 프랑스에서는 이슬람 청년들 4명 중 1명이 IS 추종/지지자라는 것이다. 괜히 파리 테러나 런던 지하철 폭탄 테러가 아무 이유없이 일어난 게 아니다. 하지만 ISIL 정도로 극단적으로 가면 무슬림들의 반응 역시 대부분은 부정적이거나, 파키스탄처럼 극단적인 지역에서도 '모른다' 정도가 주된 반응이었다. 물론 ISIL의 극단성을 감안하면 위에 언급된 10-20%도 우려할 만한 수준이지만. 하지만 이슬람 율법을 국법으로 도입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응답한 무슬림들 중에서도 배교자 처형 등의 극단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의견이 크게 갈렸다.

카자흐스탄 같은 경우에는 샤리아 지지자(10%) 중 배교자 처형을 지지한다는 비율은 4%에 불과했고, 인도네시아(샤리아 지지자 중 18%)처럼 샤리아 지지자가 70%가 넘어가는 나라들 중에서도 이런 극단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지지율이 낮은 경우도 있었다. 물론 샤리아 지지자가 99%에 그 중 79%가 배교자 처형을 지지한 아프가니스탄 같은 사례도 있지만. 조사 대상국 전체로 보면 샤리아 지지자에만 한정해도 배교자 처형까지 지지한다는 비율이 과반을 넘긴 나라는 19개국 중 6개국에 그쳤다. 다른 종교권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를 보면, 이스라엘 유대인 중 유대교 율법을 국법으로 지정하는 데 찬성하는 비율은 29%였다. 같은 맥락에서 고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다른 종교의 신을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는 미신과 다를 바 없다”라고 비판했었으며, 고대 로마의 다신교 신자들은 유일신 종교를 믿는 기독교인과 유대교인들을 “불경한 무신론자들”이라며 비난했다 한다.

쿠란에서는 유대인을 하나님이 보내준 예언자를 함부로 처형한 죄, 그리스도교인들을 예언자일 뿐인 예수를 신으로 숭배하는 오류를 저질러 방황하고 있다고 규정하고, 무슬림만이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슬람 학교 마드라사의 시스템은 중앙아시아 불교 교육 시스템을 직접 이어받았다. 그 근거로 부하라, 사마르칸드 등 중앙아시아의 불교권 도시들이 이슬람화된 이후에 한동안 이슬람 신학의 중심지가 된 것 등을 들 수 있다. 

중국의 오호십육국 시대 당시 비한족들이 유교 대신 불교를 선호했던 이유와 같다. 시크교 같은 인도 소수 토착종교도 이때 광신적 이슬람 세력에게 정말 잔혹한 탄압을 당했다. 시크교 여성과 유아살해는 예삿일이었고 도저히 위키에 쓸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핍박을 해댔다. 무굴 제국의 종교공존을 말 그대로 박살냈다.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의 타종교와의 대외적인 갈등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어서 의외로 가볍게 생각하는 부분인데, 현대에 들어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내부 종파간 갈등은 대부분 봉합되거나 종파간에 가시적, 물질적 박해나 폭력사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메이저 타종교들(기독교, 유대교, 불교, 힌두교)과 달리 현대 이슬람은 내부 종파간 유혈탄압과 갈등문제에서도 정말로 답이 없다는 수준이다. 전 중동에 현재진행형으로 피를 뿌려대고있는 수니파-시아파간 유혈전쟁과 갈등은 더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으며, 알라위파아마디야파같은 소수종파 무슬림들은 주류 수니파들에게 정말 가혹한 차별과 유혈박해를 일상처럼 당해왔고, 지금도 근본주의 수니파들에 의해 당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21세기에 아예 국가 주도로 시아파를 이단 사이비 종파로 대놓고 탄압하고 있다. 파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시아파와 소수종파 모스크들이 테러당하거나 불타는 것이 뉴스에 올라오는 상황이다. 수니파 내부에서도 살라피즘이나 와하브파같은 종파주의에 찌든 무슬림들의 세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으며, 이들의 종파주의, 이슬람 근본주의는 많은 무슬림들의 형식적인 "이슬람은 온건하니 나몰라라"식 태도와 무책임한 방관 속에 끝을 모르고 확산되고 있다.

초기에는 러시아 정교도 탄압받았지만 독소전쟁때 국민결집의 필요성때문에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사실 프랑스 뿐만 아니라 다른 식민 열강들도 해외 식민지에 이런 방식의 식민통치를 취했다. 그러나 과거 프랑스 식민 통치를 겪었던 나라들 중 비무슬림 국가들(마다가스카르캄보디아라오스 등등)조차 상당수가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것을 보면 프랑스의 우민화 정책이 유달리 악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무슬림들은 무역상, 천문학자, 의사 등으로 활동하였고 유학자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유교와 이슬람은 사실 같은 종교"라고 주장하는 무슬림도 있었다. 

20세기 초 미국의 금주법에서도 그렇지만, 당시 아랍인들에게 술이란 '포도주'가 전부였다. 나머지 알콜음료는 술이라는 인식이 없었으며 실제로 무함마드도 생전에 차갑게 만든 대추야자술을 즐겨마셨다는 하디스의 전승이 있다. 마찬가지로 이슬람과 무관한 몽골이 말젖을 발효시킨 술인 아이락(보통 쓰이는 마유주라는 일본 한자어는 옳지 않는데 아이락은 말젖 말고도 양젖이나 염소젖으로도 만들기 때문이다. 근데 그럼 밀이나 쌀로 만든 맥주는?)을 애들이고 어른이고 남자고 여자고 물처럼 마신 것도 비슷한 경우다. 즉 유목민들에게 술을 금지할 수 없다는 것은 어디건 같은 셈이다.

2005년 10월 파키스탄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7만여명이 목숨을 잃을 당시 부상을 입고 매몰된 건물이나 산사태로 묻혀진 사람들은 하필 라마단 기간이라고 음식을 거부하다가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당시 인명 구조를 위해 해외 각지에서 파견된 구조대는 어쩔 줄 몰라했는데, 사정을 잘 아는 터키 구조대가 "라마단에 스스로 죽으려고 단식하는 건 이슬람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자살이다."고 설득하자 사람들이 물과 음식을 받아먹었다. 당시 한국 구조대가 쓴 책인 <슈끄람! 파키스탄>에서 발췌.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명목상은 세속국가다. 하지만 사실상(de facto) 국교가 이슬람이니.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시절 네덜란드인들이 세운 하이네켄 맥주 공장이 시초라고 한다. 원래는 말레이시아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 싱가포르에서 생산하던 싱가포르 맥주였는데 생산 공장을 말레이시아 본토로 이전하면서 말레이시아 맥주가 되었다. 

맥주 정도는 어느 식당이나 마트 등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수도 자카르타나 쿠알라룸푸르를 비롯해 요그야카르타, 메단, 이포, 푸트라자야, 우중판당, 팔렘방 등 일부 대도시 지역에도 술을 파는 바와 클럽, 호텔, 식당, 관광지등이 넘쳐나는데 이는 다른 기독교 세속국가의 유흥가, 호텔, 식당, 관광지 등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터키와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이집트, 보스니아, 알바니아, 요르단 같은 경우 전통적으로 터키는 튀르크족이 음주가무를 즐기던 민족이기도 했고 수피즘과 알레비즘 같은 이슬람 신비주의가 정착해 토속화된 결과 술에 대한 금기가 많이 흐려졌다.

특히 오스만 제국시대 기독교 동방정교를 믿는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불가리아인, 세르비아인 등 술문화가 있는 기독교도 타 민족들과 함께 살게 되면서 음주에 대한 인식이 관대로워졌는데다 오스만 제국 멸망 후 들어선 터키 공화국 정부가 강력한 서구화, 세속주의 정책을 추진하여 터키의 종교적, 사회적 분위기가 더욱 더 세속화되면서 음주에 대한 이슬람의 종교적 금기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이집트는 이슬람이 전래되기 전인 고대 이집트 시기에 맥주를 먼저 만들어서 먹었을 정도로 술 문화가 있었고 알제리와 모로코, 튀니지, 요르단, 보스니아, 알바니아 역시 전통적으로 포도주 문화가 있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의 직간접적인 영향권에 속해 있었다. 

방글라데시 사채업자들은 살인적인 이자로 인해 돈을 못 갚는 집안의 아이를 데려와 아동노동을 시켜 임금을 이자 대신 가로채는 경우가 허다하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그라민 은행의 무함마드 유누스가 채무에 대한 이자를 금지한다는 교리를 무시한다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웃기는 것은 그런 사채업자들과 그들의 뇌물을 받아먹은 성직자들이 그라민 은행이 이자(정해진 이자)를 받는다고 비난하는 것. 공산정권 치하에서 강력하게 세속화가 되었다지만 알바니아는 무슬림들이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는 나라다.

이쪽은 아예 신정 국가다. 하지만 출산율 감소속도가 기존의 영미권과는 비교도 할수없이 빨라서 1980년대 후반에 5명대였던 출산율이 불과 2000년대 들자 1명대로 떨어졌고 현재도 1명대 후반정도의 출산율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경제난과 생활고로 삶이 어렵다보니 청년층은 출산을 기피하여 출산율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어 실질적으로 인구감소가 일어나고 있다. 일부 이슬람국가에서 되려 출산율이 상승하기도 했다.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의 경우는 소련 붕괴 이후의 경제난으로 출산율이 감소했다가 경제사정이 어느정도 풀리자 다시 증가한것에 가깝고 (러시아도 비슷한 추세) 알제리도 출산율이 2000년대 초반 2.4명까지 떨어졌던 출산율이 2000년대 후반들어 2.8명, 2015년에는 3.1명으로 올라갔는데 이쪽도 내전이 끝나고 경제가 2000년대 들어 크게 회복된 지역. 예외로 이집트는 2008년 3.0명이었던 출산율이 2014년 3.5명을 기록하였다. 이는 어찌 보면 나우루와 비슷하다. 이쪽도 넘쳐나는 자원으로 국민들이 외노자에게 일을 시키고 자기네들은 놀고 먹기만 했다. 그나마 차이점이라면 나우루는 진짜 국민들이 잘 먹고 잘 살았을 뿐더러 부의 편중도 크지 않았지만 이쪽은 부가 편중된 것. 

한국은 정부의 무지한 산아 제한 정책으로 출산율이 심하게 빠르게 가라앉은 편이다. 2014년 기준 말레이인 2.653명, 화교 1.414명, 인도인 1.384명. 그런 지역은 기독교인들도 상당하다. 때문에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종교분쟁이 끊이질 않는다. 흔히 중동이라 인식하는 지역 이외의 이슬람 지역은 아프리카 동해안과 서해안 나이지리아 일대, 중앙아시아, 그리고 인도네시아 지역이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이슬람 지역의 경우 동해안을 따라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아랍 유일의 해상 식민제국이었던 오만 제국 때문이다. 오만은 유럽과 아랍에 팔 노예와 상아 등을 얻기 위해 탄자니아까지 남하하여 잔지바르에 수도를 정했었다. 때문에 해안 지역에 아랍계 이슬람인들이 분포하며, 내륙의 흑인들과 갈등을 빚고 있다. 이와 달리 아프리카 서부와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는 무역으로 인해 이슬람이 전파되었다. 중앙아시아에도 동남아와 마찬가지로 실크로드 무역으로 전해졌다. 

프랑스령 마요트를 포함. 의외로 90%대가 아닌데 그 이유는 원주민인 카타르인들은 거의 무슬림이나 인구의 절반가량은 동남아출신 불교도나 인도에서 온 힌두교도들이다.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들로 카타르의 경제를 이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들을 값쎄게 고용하다보니까 노동착취같은 문제점이 심하다. 이스라엘이나 사우디,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같은 나라들도 겪는 문제지만. 자세한 건 카타르 문서 참고. 서유럽 국가 중 무슬림 비율(%)이 가장 높다.

약 200만명이 넘는 무슬림이 살고 있다. 이태원동 등에 살고 있으며 대부분이 이슬람 국가 출신 외국인이다. 한국 거주 무슬림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인 신자는 3만 명 정도 된다고 한다. 이슬람권 출신 외국인은 인도 문화권(주로 파키스탄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중앙아시아터키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하며 이란, 아랍, 아프리카 출신 무슬림 이민자도 간혹 있다. 

냉전때 서독의 고도 경제 성장기 과정에서 외국인 노동자 신분으로 터키에서 독일로 이주, 정착해 온 터키계와 90년대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전란을 피해 보스니아와 코소보 등 구 유고 지역에서 독일로 이주해 온 알바니아계, 보스니아계 한정 위구르인과 회족, 보안족 등의 소수민족. 2%정도 된다. 더불어 소수라고 해도 중국의 인구가 워낙에 많은 탓에 1000만 명이 넘는다. 파타니 나라니왓 송크흘라 등의 말레이인 거주 지역은 이슬람 지역이다. 이 지역은 원래 소규모 에미르국가가 존재했는데 타이가 삼켰다. 현재 태국 정부군과 말레이계 이슬람 분리주의 반군 세력 등이 전투를 치르면서 혼란을 겪고 있다. 승병도 있다. 

미얀마에서는 로힝야족이라는 아랍 상인의 후손인 무슬림이 있다. 미얀마는 지금 무슬림과 불교도 간의 갈등이 있다. 참족이 무슬림이다. 참족은 베트남 캄보디아에 거주하며, 참파를 세웠던 민족이다. 남쪽 민다나오 섬의 모로인들이 무슬림이다. 역사적으로 민다나오는 술루 왕국의 술탄이 통치하는 등 일찍이 스페인에 복속된 북부의 섬들과 다른 길을 걸어왔으며 이로 인해 오늘날도 북부 지역과 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재일 터키인 및 아랍인들 등. 근데 이 묘사는 그리스인들이 에티오피아인들을 묘사한 문장과 너무 흡사하다. 에티오피아인들은 죄수들을 금으로 만든 족쇄로 채우며 100년 이상 장수한다는 지상락원이라는 등등. 그래서 신라와는 실제 교류가 있었다기 보다는 신라의 존재가 해당 지역에 알려져 있고 정보가 없어 신비화되는 과정에서 그렇게 묘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튀르크계, 아랍계 출처: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회회교도(回回敎徒)는 의관(衣冠)이 보통과 달라서, 사람들이 모두 보고 우리 백성이 아니라 하여 더불어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합니다. 이미 우리나라 사람인 바에는 마땅히 우리 나라 의관을 좇아 별다르게 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혼인하게 될 것입니다. 또 대조회(大朝會) 때 회회도(回回徒)의 기도(祈禱)하는 의식(儀式)도 폐지함이 마땅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9년 4월 4일 기사 참조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904004_004 그러나 수요 측에서 대안이 널려있는 해외 건설과는 달리, 에너지 수입은 중동 입장에서도 한국은 매우 큰 손이다. 한국의 경제 규모는 환율, 성장률에 따라 대략 10~15위를 왔다갔다 하는데 에너지 수입은 원유 5위, 천연가스 11위, 그 외의 원자재도 일본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수준이다.

참고 이는 한국의 산업구조가 제조업 및 에너지 다소비 위주이고, 천연자원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나라이기 때문. 중동의 주요 산유국들의 수출국가 순위를 살펴봐도 한국이 3위 아래로 내려가는 경우는 없다. 즉 중동 국가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한국에 천연자원 수출을 끊어버리면 일단 원자재 시장에서 거대한 혼란이 벌어질 텐데, 수요의 한 축을 담당하는 거대한 시장이 사라졌으니 자연히 가격이 폭락할 테고, 재정수입 또한 급감할 것이다. 한국이 대책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라서, 100일 넘게 버틸 수 있는 비축석유로 급한 불을 끄면서 바로 근처에 있는 러시아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석유를 수입하면 된다. 사실 이런 대책(?)을 논하기 이전에 주요 산유국들이 담합하여 가격을 올리는 경우라면 모를까 정치적인 이유로 특정 국가에게 수출을 중지하는 일은 생각하기 어렵다. 한국을 비롯한 주요 원유 수입국들은 대부분 산업 강국이자(원유를 대량 수입한다는 게 무슨 의미겠는가?) 군사 강국이기 때문에, 중동의 기름왕국들이 안보에 직결되는 어그로를 끌었다가는(...).,

영국, 프랑스, 독일 무슬림의 이주와 정착 및 갈등에 관한 연구: 한국 이주 무슬림과의 비교를 위하여, 韓國中東學會 論叢,第31-1號 韓國中東學會, 2010, 105-149. 하지만 당시의 알리고등학교는 이슬람 미션스쿨이기는 했지만, 알부 기독교 계열 미션스쿨처럼 학생들에게 이슬람을 강요하지는 않았고, 일주일에 한번 있는 교양수업에 강제성이 없는 이슬람 교리, 쿠란 낭독 정도나 신청자에 한해 이슬람 체험 활동 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걸 신청하는 이들도 거의 없었다고 하며 그 외에도 제2외국어 영역으로 아랍어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한국의 개신교 신자들은 이슬람권 나라에 개신교 선교를 나서면서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이다. 인구 비율로 보면 미국을 압도한다. 사람이 많이 오는 것도 아니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운영자금을 지원하겠다고 했음에도. 정확히는 유치원, 초등학교도 과정이 포함된 외국인 학교이며, 국내 곳곳에 있는 외국인 학교와 마찬가지로 영어 위주 학교이다. 참고로 이 학교는 터키인들하고 관련이 있는데, 후술할 귀네슈가 개교 행사에 참가한 것도 이러한 인연 때문. 2015년 중반부터 기독교 언론인 국민일보나 크리스천투데이 등에서 이에 대한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한 걸로 보아 루머의 출처는 기독교계로 추정된다.

기독교계는 국가식품클러스터 사업이 시작할 때부터 맹렬히 비난했으며 할랄 푸드가 '대한민국을 공격하기 위한 이슬람의 공세'라고 주장했고 KBS의 할랄사업 다큐멘터리 방영 때에도 비난기사를 내보냈다. 20대 총선에 출마한 기독자유당의 경우 주요 공약 중 하나로 할랄 단지 반대를 내걸기도 했다. 이 글은 신빙성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신미선씨 본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신미선씨인 것 처럼 글을 썼다는 것. 실제 기독교 사이트를 중심으로하여 일반 사이트까지 많이 확산되어 있으나, 원글은 게시일자, 사이트주소 등 게시글의 출처를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전무하고 오로지 내용 캡처본 밖에 없으며, 언론사를 통해 기사화 된 바도 없다. 해당 카페에서 원문내용을 확인하려면 일단 카페에 가입해서 정회원 승인을 받아야 한다.

'알리야&앰버 맘'이란 닉네임으로 사연글을 올렸으며 일찍이 개설한 본인의 블로그(첫 글을 제외하곤 활동은 없지만)도 들어가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책은 피해 당사자인 엄마가 쓴 책이므로 엄마의 시선으로만 작성되어 있음을 유념할 필요도 있다.

무함마드 아심이 한국에도 세우려 했던 이 종교학교는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식 '마드라사'이다. 이 마드라사는 그 지역의 테러범 양성소라 불릴 정도로 이슬람 근본주의의 온상으로 악명이 높다. 당장 세우려던 무함마드 아심부터가 파키스탄 탈레반 중범죄 테러범이었고. 우리나라 무슬림은 대부분 수니파이다. 시아파는 소수파에다가 원리원칙에 집착하는 성향이 강해서 해외 다른 국가들에게 동화되기 힘든고로 국외 진출이 어렵다(기껏해야 고향에서 시아파 믿던 사람이 다른 나라로 갔을 경우 정도). 실제로 국외와 교류가 많거나 국내외적으로 잘 알려진 이슬람 국가들(사우디, 이집트, 요르단, 터키, 모로코, 튀니지, 알제리, 인도네시아 등)은 수니파가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특히 독일의 경찰이 이 극단주의자 무슬림들의 범죄 때문에 유독 무슬림에게만 엄격해진다. 이는 독일뿐만 아니라 무슬림이 사는 다른 유럽도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이슬람 국가에서 기독교 선교는 그 자체가 죽음을 각오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다. 가자 지구는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인 하마스가 지배하고 있지만 가자 지구내에서도 하마스를 100%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서평]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김동문, 선율) 기독교 목사가 들려 주는 이슬람 혐오 반대 이야기 맥마흔 선언과 밸푸어 선언. 단, 이것은 아랍어가 히브리어에 가장 가까운 언어라서 그런 것도 있다. 다만 해당 주장은 오히려 여성의 정조에 대한 구시대적 집착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디나 시하비는 부모가 팔레스타인인이기 때문에 아라비아 반도 혈통이 아니다. 대부분 서양에서 만들어진 게임이나 영화 한정 주로 비이슬람권의 보수언론들이다.

트레이 파커와 멧 스톤은 이에 대해 무슬림 전체를 비하할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실제로 이슬람을 비판한 유럽의 언론인들이 경찰한테 신변 보호를 받았다. 혹은 사우스 파크처럼 여기에 역자극을 받아 더 악랄하게 하는 경우도(...). 그러나 중동 출신이라고 해서 전부 다 무슬림은 아니라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실 스트리트 파이터는 원래 되도록 무국적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실제로 터키인은 겉으로 볼 때 아랍인보다는 동부 유럽인들과 비슷하게 생겼다.

터키인 문서 참고. 때로는 불교적인 요소를 여기에 융화시키기도 한다. 한국이나 중국에서도 무속신앙, 도교 같은 전통 신앙이 불교와 어느 정도 융화된 것과 비슷하다. 돼지고기를 거리낌없이 먹긴 하나 이슬람 국가 중에서도 돼지고기를 먹는 지역이 있으므로 나이롱 신자라고 하긴 힘들다. 그러나 소스케는 돼지고기와는 달리 술의 경우엔 매우 완강하게 거부한다. 가만 종교상의 이유뿐만 아니라 건강상으로도 입맛으로도 너무 안맞아서 안마시는 것이다. 게다가 텟사가 필름이 끊겼을 때를 주제로 한 외전에서 술을 마신 텟사에게 '술을 마시면 마오처럼 됩니다. 이 일을 오래하려면 마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을 한 것 봐선 주변에 심각한 주정뱅이 때문에 술에 대해서 더 안 좋게 생각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얘는 아프간 출신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래서 소스케가 종교적으로 매우 유연함을 보이는 것일 수도 있는데, KGB의 소년 암살자 출신인 사가라 소스케를 키우고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 중 하나인 '마지드'는 묘사로 보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전쟁의 아프간의 전설적 게릴라이자 영웅 아흐마드 샤 마수드에서 따 온것이 거의 확실하다.

실존인물 마수드는 이슬람 원리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는 하지도 않았고 여성교육, 인권을 생각하고 타민족과의 포용(종교적 문제까지 포함해서)을 이야기하는 굉장히 깨인 인물 중 하나였다. 마수드가 살아있었으면 아프가니스탄이 지금과는 분명 달랐을 것이라는(긍정적으로) 평가가 주를 이룰 정도의 영걸. 즉 마지드 밑에서 성장한 소스케가 사상적으로 매우 유연한게 당연하다. 또한 소스케는 종교 이전에 '전투와 용병일'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방식을 보인다고 봐야한다. 군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임무완수와 생존이다(소스케의 이런 성향이 치도리 카나메와 사람들과의 교류로 완화되고 고쳐지는 것은 풀 메탈 패닉 작중에서도 중후반 이후다). 어느 환경에서 뭘 먹고 생존하게 될 지 예상하기 어려운데 돼지고기니 뭐니 하며 가리면 활동이 매우 어려워진다. 즉 종교 이전에 군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을 두었다면 별로 이상하진 않은 부분. 워해머 판타지에서 그렇다. 엘더스크롤 시리즈도 이슬람과 무슬림 모티브인 레드가드가 서구를 모티브로 한 제국에 종속되며 살았었다. 사실 이슬람도 근세까지는 유럽과 대등할만큼 강했다.

대항해시대가 대표적인 예시인데 이슬람 진영에 있었던 오스만 제국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동쪽 땅이 아니라 바다로 나간 것만 해도 그 당시 이슬람의 힘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근대가 되면서 경제력과 기술력에 넘사벽의 차이가 나다보니 군사력이 역전되어 유럽한테 이기기는커녕 실컷 쳐맞고 살며 영토 유지도 겨우 하는 형편이 되었다. 지금도 서구권의 군사력과 이슬람권의 군사력은 그야말로 넘사벽이다. 게임에 엄격한 중국만 해도 반이슬람 게임은 신경안쓴다. 당장에 중국군에서 제작하여 발매한 게임 광영사명에서도 등장한 적에서 무슬림이 나온다. 반대로 서구권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와 범죄 때문에 반이슬람 감정이 강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사실 이슬람권에서 만든 게임들은 하나같이 질이랑 성능이 매우 떨어진다.

서구의 게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 사우디에서 그렇게 오일머니로 벌어들인 돈으로 투자한 언어스드도 최악의 게임으로 평가받는다. 이슬람권에서 서구가 싫어도 괜히 서구의 게임을 하는 게 아니다. 이는 이슬람권의 과도한 게임 규제 때문에 그렇다. 뭔가를 할려면 '종교에 어긋난다', '그런 것은 불경하다'며 검열하고 제재하니 게임 산업 자체가 발전할 수가 없다. 해외에서 개발한 게임들조차 정치,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금지하려드니 유저들은 국가의 규제를 피해서 몰래 해야하는 수준이다. 이러다보니 게임 제작사들도 이슬람권만은 사업하기를 굉장히 꺼린다. 사실 이런 근본주의를 탈피한 이념이 가능한 이유가 원래는 하퀴슬람이 이슬람 국가들에게 이단으로 심하게 억압당했지만 세계관에서 자원의 고갈이 가져온 에너지 대공황과 이슬람 국가들간의 전쟁으로 이슬람 국가들 전체가 몰락했고 그들이 신념으로 삼던 종교인 이슬람교마저 몰락하여 혼란에 빠진 상황이라서 이를 대체할 새로운 이념이 필요했기에 가능했다.

내부적 설정은 이렇고, 외부적으로는 인피니티가 나온 스페인 문화계 자체가 근현대까지 사회를 강하게 억눌러온 가톨릭 신정주의에 대한 반발도 있고, 무엇보다 중세에 찬란한 영화를 누리다가 사라졌지만 지금도 스페인 문화에 엄청난 영감을 주는 알 안달루스의 역사적 경험에 기반한, 돈키호테의 화자 중 하나인 시데 아메떼 베네헬리 처럼 현명한 아랍인 같은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권보다는 중동권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보는 게 더 적절하다. 애초에 판타지 작품이기도 하고, 작중 종교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주인공인 사가라 소스케가 무슬림이라는 설정이 있다. 정확히 이슬람을 차용한 것은 아니지만 이슬람을 모티브로 한 종교가 작중의 주요 종교다. 특히 문화나 고유명사(자카트나 샤하다 등)들은 이슬람의 것을 따온 곳이 많다. 근본주의에서의 탈피를 제창한 이슬람 분파에서 출발했다는 설정으로, 그 이름도 '새로운 이슬람' 혹은 '참된 이슬람'이라는 뜻이다. 중세시대의 이슬람 문화권처럼 개방적이면서도 과학 기술적으로 발달한 이미지이다. 아랍 에미리트에서 발간된 최초의 일본식 만화. 영어를 더 선호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아랍어로 된 만화를 그렸다고 한다.

참조항목
라마단, 무함마드, 메카, 미나레트, 사다카, 샤리아, 수나, 수니파, 수피즘, 술탄, 시아파, 아잔, 알라, 예루살렘, 와하브파, 움마, 이드알아드하, 이드알피트르, 이맘, 지하드, 핫즈, 헤즈볼라

역참조항목
골콘다 왕조, 교단, 나세르주의, 나스르 왕조, 알라위파, 다룰이슬람, 단식

카테고리
  • 종교 > 이슬람교
출처 & 참고문헌,
[이슬람교 [Islam] (두산백과)
[이슬람교 [Islam, ─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종교연감』(한국종교사회연구소 편저, 고려한림원, 1997)
[이슬람사상사』(김정위, 민음사, 1987)
[이슬람교」(김정위, 『한국인의 종교』, 정음사, 1987)
[이슬람철학사』(앙리 코르방, 김정위역, 대광문화사, 1986)
[이슬람문화사』(김정위, 문학예술사, 1981)
[네이버 지식백과] 이슬람교 [Islam, ─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이슬람교 [Islam] (천사, 2000. 3. 31., 마노 다카야, 신은진)
[엄마가 들려주는 세계사 이야기] = yutube/ 동영상볼수있는곳,

#종교 #이슬람교 #예수 #아랍 #중동 #아랍파트 #이슬람교도 #일신교 #무함마드(Muhammad) #라마단 #라마단'의 달(9월) #메카 #아담 #노아 #지하드(jihad) #부하리(Bukhari) #하디스 #유대교도의 제도 #미나레트, #사다카, #시리아, #수나, #시아파 #수니파, #순나파 #수피즘, #술탄, #아잔, #알라, #예루살렘, #와하브파, #움마, #이드알아드하, #이드알피트르, #이맘, #메카신전 카바신전 #사움(sawm #헤즈볼라 #골콘다 #왕조, #교단, #나세르주의, #나스르 왕조, #알라위파, #다룰이슬람, #단식 #세계사 #무함마드 #중세 이슬람역사 #이슬람교의 천계 #유럽과 이슬람의 관계 #자카트 #순례자, #수행자 #수피즘 #정통칼리프시대 #우마이야왕조 #아바스왕조 #중동역사 #코란 #쿠란 #알라이쿰 앗살람(wa-alaykum al-salam #앗살람 알라이쿰(al-salam alaykum #작법(作法) #아라비아어 #하즈 hajj #순례 #성전(聖戰) #주권 #라흐마산 #아라하트 #자카트(zakat #희사 #살라트(salat #예배 #부하리 #샤하다(shahada #작법(作法) #전승 #부할 #서울중앙성원 #부산 알파타성원 #광주성원 #안양 성원 #전주 성원 #이주(히즈라hijra) #이교도 #왼손에 코란 #이슬람교중앙연합회 #오른손에 칼 #순례월(12월) 8일부터 10일 사이 #일신교 #유대교 #기독교 #이스마엘 #알라 #라세르 #천국 #예언자 #쨔그르 #노예 #경전 #계시의 책 #알라의 사도 #지브릴(가브리엘) #알카에다 #하마스 #하주 #is #율법 #계시의 책 #레바논 #텔레반 #대공항 #아흐마드 샤 마수드 #이슬람 원리주의자 #이슬람 근본주의 #대항해시대 #가자 지구 #히브리어 팔레스타인 #마드라사 #오스만 제국 #광영사명 #알 안달루스 #맥마흔 선언 #밸푸어 선언 #지상낙원 #트레이 파커 #민다나오 #폴메탈페닉 #치도리 카나메 #자카트 샤하다 #로마제국 #오스만 #제국시대 #동방정교 #무속신앙, #도교 #시크교 #16세기크린칸국 #비잔티움 제국 #조선왕조실록 세종 #알라위파, #아마디야 #나우루 #알리야 #회회교도 #의관 #대조회(大朝會) #회회도(回回徒) #기도(祈禱) #의식(儀式) #아랍어 #모티브 #앰버 맘 #와하비즘 #양비론 #레콩키스타 #하퀴슬람 #콥트 정교회 # 메블라나 루미 #엄마가 들려주는 세계사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