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노벨, [ Alfred Bernhard Nobel ]
스웨덴에서 발명가의 아들로 태어난 노벨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 했다. 하지만 몸이 약해 학교에 못 가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노벨은 집에서 책을 읽거나 기계를 만들면서 놀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경영하는 화약 공장에서 화약을 가지고 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스웨덴의 발명가, 화학자, 노벨상의 창설자. 고형 폭약을 완성하여 다이너마이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알프레드 노벨
출생-사망/ 국적/ 활동분야/ 출생지/
1833.10.21 ~ 1896.12.10 |
스웨덴 |
과학 |
스웨덴 스톡홀롬 |
183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출생한 후 4세 때 핀란드로 이주하였다. 8세 때는 다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고 이곳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1850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4년 동안 기계공학을 배웠다. 크림전쟁 후 스웨덴에서 폭약의 제조와 그 응용에 종사하고 있던 아버지의 사업을 도와 폭약의 개량에 몰두하였다.
1863년 소브레로가 발명한 니트로글리세린과 중국에서 발명한 흑색화약을 혼합한 폭약을 발명하고, 그 이듬해 뇌홍(雷汞)을 기폭제로 사용하는 방법을 고안하여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이의 공업화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1864년 9월 공장이 폭파되어 동생과 조수 4명이 희생되었다.
여기서 그는 니트로글리세린이 바로 액체라는 점에 위험의 원인이 있다고 인정하고, 1866년 이것을 규조토(硅藻土)에 스며들게 하여 안전하게 만든 고형(固型) 폭약을 완성하여 이것에 '다이너마이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 1887년 니트로글리세린·콜로디온면(綿)·장뇌(樟腦)의 혼합물을 주체로 하는 혼합 무연화약(無煙火藥)을 완성하였다. 노벨의 공장은 스웨덴·독일·영국 등에서 연이어 건설되어, 1886년 세계 최초의 국제적인 회사 ‘노벨다이너마이트트러스트사’가 창설되기도 하였다.
그동안 그의 형인 로베르트와 루트비히는 카스피해(海)의 서안에 있는 바쿠의 유전개발에 성공하여 대규모의 정유소를 건설하고 세계 최초의 유조선 조로아스타호(1877년 취항)를 사용하여 세계 최초의 파이프라인(1876)을 채용함으로써 노벨가(家)는 유럽 최대의 부호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니트로글리세린이 바로 액체라는 점에 위험의 원인이 있다고 인정하고, 1866년 이것을 규조토(硅藻土)에 스며들게 하여 안전하게 만든 고형(固型) 폭약을 완성하여 이것에 '다이너마이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 1887년 니트로글리세린·콜로디온면(綿)·장뇌(樟腦)의 혼합물을 주체로 하는 혼합 무연화약(無煙火藥)을 완성하였다. 노벨의 공장은 스웨덴·독일·영국 등에서 연이어 건설되어, 1886년 세계 최초의 국제적인 회사 ‘노벨다이너마이트트러스트사’가 창설되기도 하였다.
그동안 그의 형인 로베르트와 루트비히는 카스피해(海)의 서안에 있는 바쿠의 유전개발에 성공하여 대규모의 정유소를 건설하고 세계 최초의 유조선 조로아스타호(1877년 취항)를 사용하여 세계 최초의 파이프라인(1876)을 채용함으로써 노벨가(家)는 유럽 최대의 부호가 되었다.
노벨은 평생 결혼하지 않았으며 자식도 없었다. 1895년 11월 자신의 재산을 은행 기금으로 예치토록 하는 유서를 작성하였으며 1896년 12월 10일 6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과학의 진보와 세계의 평화를 염원한 그의 유언에 따라 스웨덴 과학아카데미에 기부한 유산을 기금으로 1901년 이래로 세계의 평화, 문학, 물리, 화학, 생리·의학, 경제 분야에 노벨상 제도가 실시되고 있다.
알프레드 노벨 연보출생 1833.10.21~ 사망 1896.12.10
1833 | 10월 21일 스웨덴 스톡홀롬에서 출생. |
1842 | 가족과 함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 |
1851 | 미국으로 유학. 기계공학과 화학을 공부. |
1863 | |
1867 | |
1875 | 무연화약 발리스타이트 발명. |
1886 | 세계 최초의 국제적인 회사 '노벨다이너마이트트러스트'가 창설. |
1896 | 12월 10일 스웨덴 과학 아카데미에 유산을 기부하고 사망. |
1901 | 노벨의 유산으로 노벨상 제도가 만들어짐. |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노벨 가족은 러시아로 이주했다. 그 곳에서 아버지는 다시 사업에 성공하였고 노벨은 가정 교사 밑에서 열심히 공부해 열여섯 살에 화학자가 되었다.
크림 전쟁 후 아버지의 사업이 다시 힘들어지자 노벨은 스웨덴으로 돌아와 폭탄 제조 실험을 시작하였다.
1862년, 노벨은 액체 화약 니크로글리세린과 흑색 화약을 혼합하여 폭약을 만들고, 이듬해에 특허를 얻었다.
노벨은 스톡홀름에 공장을 세웠다. 폭탄은 만들자마자 불티나게 팔려 나갔고, 노벨은 많은 돈을 벌었다.
엄청난 폭발력만큼 사고도 많았다. 노벨의 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나 공장은 산산조각이 났고 동생과 직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자 스웨덴 정부도 스톡홀름에서 폭탄 만드는 것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노벨은 연구를 멈추지 않고 스웨덴과 독일, 영국에 공장을 세우고 폭탄을 만들어 세계로 수출했다.
액체인 니크로글리세린을 고체로 만들면 운반이 쉬워 폭발 사고를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1866년에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다.
“나 알프레드 베르나르드 노벨은 심사숙고한 결과 이 문서로써 내가 죽을 때 남기게 될 재산과 관련하여 내 유언이 아래와 같음을 천명하는 바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유언장에는 우선 일가친척과 사업을 함께 하는 동료 및 직원에게 분배할 재산 내역이 열거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재산의 처리법은 이렇게 지시되어 있었다.
“유언 집행인에 의해 안전한 유가증권에 투자된 재산으로 기금을 만들고, 거기에서 매년 나오는 이자를 지난해에 인류에게 가장 큰 유익을 가져다 준 사람들에게 상금으로 수여한다.” 이자는 모두 5등분해서 물리학, 화학, 생리학/의학, 문학, 평화 분야의 수상자에게 각각 나눠줄 예정이었다. 그 유명한 노벨상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군수업자 노벨 가문의 기원,
알프레드 베르나드 노벨은 1833년 10월 21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8남매 가운데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임마누엘 노벨 2세는 건축업자 겸 발명가였지만 연이은 사업 실패 때문에 1837년에 단신으로 고국을 등지고 말았다. 핀란드를 거쳐 러시아에 정착한 임마누엘은 니콜라이 1세 황제의 신임을 얻어 지뢰와 수뢰를 비롯한 각종 군수품을 제조하는 공장을 차렸다. 생활이 안정되자 스웨덴에 있던 나머지 가족도 1842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했다.
알프레드의 정규 교육은 여덟 살 때 스톡홀름의 어느 학교에 1년간 다닌 것이 전부였다. 러시아에 와서야 그는 가정교사를 두고 공부를 재개해서 러시아어,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를 익혔고 특히 과학에 재능을 보였다. 부친의 사업이 확장되면서 세 아들도 각각 판매와 생산과 실험 업무를 나눠 맡게 되었다. “내 생각으로는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이는 루드비그이고, 가장 근면한 아이는 알프레드이고, 투기 정신이 가장 뛰어난 아이는 로베르트라네.” 부친은 이렇게 평가했다.
17세 때인 1850년부터 수년간 알프레드는 부친의 지시에 따라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는 계기로 삼았다. 1854년에 크림 전쟁이 발발하자 임마누엘 노벨의 회사는 러시아군에 지뢰와 수뢰를 납품하며 승승장구했지만, 전쟁 중인 1855년에 니콜라이 1세가 사망하자 후계자인 알렉산드르 2세가 군수품 공급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함으로써 또다시 파산하고 말았다. 임마누엘은 19년 간 살았던 러시아를 떠나 고국 스웨덴으로 돌아왔고, 이때부터 나이트로글리세린이라는 특이한 물질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돌입한다.
1847년에 개발된 무색투명의 액체 나이트로글리세린은 진동이나 충격에 쉽게 폭발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기존의 흑색화약보다 현저하게 강력한 폭발력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고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지만, 아직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관건은 나이트로글리세린의 폭발력을 가급적 그대로 유지하는 한편으로 안전성을 높인 실용적인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알프레드는 30세 때인 1863년부터 아버지와 함께 연구를 시작했고, 곧이어 독자적인 아이디어로 신형 뇌관과 액체 폭약을 개발해 연이어 특허를 얻었다.
1864년에 노벨 가 소유의 공장에서는 폭발 사고가 일어나 알프레드의 막내 동생을 비롯한 5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곧이어 부친마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알프레드는 공장의 운영을 도맡게 되었으며, 1864년 10월 22일에 투자자를 모아 나이트로글리세린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그 지배인이 되었다. 회사는 곧바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듬해인 1865년에 함부르크에 지사를 세운 것으로 시작해 점차 규모를 늘려 나갔다.
다이너마이트의 발명
1876년부터 알프레드 노벨은 나이트로글리세린을 규조토에 흡수시켜 만든 고체 폭약을 ‘노벨의 안전 화약’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했다. 그 상표명인 다이너마이트(‘힘’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비롯된 신조어)는 훗날 이 물건을 지칭하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이른바 다이너마이트라는 새로운 폭약은 나이트로글리세린과 구멍이 아주 많은 규산염의 화합물에 다름 아니다. 내가 이 폭약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 것은 그 진짜 성분을 숨기기 위함이 아니라, 이전의 것과는 아주 많은 차이가 나는 이 새로운 형태의 폭발물을 일반에게 널리 알리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이름은 전적으로 정당하다.” 노벨의 말이다.
사고로 유출된 나이트로글리세린이 포장재인 규조토에 흡수된 사건에서 다이너마이트가 발명되었다는 일화도 전해지지만, 당사자인 노벨은 이를 단호히 부정했다.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나는 처음부터 액체 폭약의 단점을 알고 있었고, 그때부터 그 단점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섰다.” 기존의 폭약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안전한 다이너마이트는 1867년에 영국, 스웨덴, 미국에서 특허를 얻었고 채굴이나 건설 산업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한편으로는 인명 살상을 비롯해서 부정적인 용도로 사용되는 일도 비일비재해지며 노벨의 악명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사업이 확장되면서 노벨은 특허 및 해외지사 관리를 위해 끝없이 출장을 다녔고, 1873년에는 아예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유럽 전역에서의 사업을 관장했다. 1875년에는 젤라틴 형태의 폭약을 개발해서 다시 한 번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1879년에는 여전히 러시아에서 사업을 벌이던 두 형과 함께 러시아의 바쿠 유전에 투자해서 이곳을 전 세계적인 석유 생산지로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 노벨 형제는 세계 최초의 유조선과 파이프라인을 가동하는 등의 혁신적인 조치를 통해 러시아 석유 산업의 기틀을 닦은 것으로 평가된다.
58세 때인 1891년에 노벨은 18년 동안 살았던 프랑스를 떠난다. 셀룰로이드를 이용한 신형 폭약 발리스타이트의 개발 및 특허 취득 과정에서 프랑스 정부와 알력이 생겼고, 급기야 스웨덴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노벨을 겨냥한 국수주의적 비난과 공격이 난무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프랑스인 동업자가 파나마 운하 건설 관련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회사에 재정적 손실과 명예 실추를 가져온 사건도 있었다. 이래저래 환멸을 느낀 노벨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은퇴를 선언하고 이탈리아의 산레모로 향한다.
죽음의 상인이란 오명과 말년
은퇴 중에도 노벨은 평소 일과인 연구와 실험을 결코 중단하지 않았다. 산레모에서도 그는 저택에 아예 실험실을 마련했으며, 종종 화약 관련 야외 실험을 하다가 이웃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1년에 1천 개의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고, 그 가운데 오직 하나만이 쓸모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나는 만족할 수 있다.” 그는 평생 355개의 특허를 취득했으며 화약 말고도 만년필, 축음기, 전화기, 축전지, 백열등, 로켓, 인조 보석, 비행기, 수혈 등을 연구했다. “나는 중간 중간 휴식을 취하며 작업했다. 한동안 일을 놓아두었다가 다시 매달리곤 했다. 나는 자주 이런 방식으로 작업한다. 하지만 결국 해내고 말 것이란 느낌이 드는 일로 돌아가곤 했다.”
막대한 부에도 불구하고 노벨은 평생 독신이었다. 43세 때에 빈에서 알게 된 20세의 소피 헤스와 18년 간 내연 관계였지만, 그녀의 사치와 방종에 실망한 나머지 결국 인연을 끊고 말았다(노벨 사후에 소피는 그의 유산을 노리고 둘 사이의 연애편지를 공개하겠다며 소동을 벌였다). 술과 담배는 물론이고 사교 모임도 멀리한 노벨은 “그 시대의 가장 소박한 갑부”로 통했다. “나는 두 가지 관점에서 경쟁자들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습니다. 돈 긁어 모으기와 아첨은 나의 흥미를 전혀 끌지 못하지요.” 그는 사람을 만나거나 행사에 참석하는 것도 마다했으며, 심지어 자기 사진이나 초상화가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는 것도 싫어했다.
노벨상 수상자에게 수여되는 메달. 스웨덴에서 시상하는 네 가지 분야의 메달은 앞면(위 왼쪽)만 똑같고, 뒷면은 물리 및 화학(위 가운데), 생리·의학(위 오른쪽), 문학(아래 왼쪽) 분야마다 특유의 도안이 새겨져 있다. 노르웨이에서 시상하는 평화상 메달은 앞면(아래 오른쪽)과 뒷면(아래 가운데) 모두가 나머지 분야의 메달과 다르게 생겼다.
일각에서는 노벨이 다이너마이트가 무기로 사용되는 것에 죄책감을 느껴 재산을 기부하게 되었다고도 설명한다. 1888년에 루드비그 노벨이 사망하자, 그를 더 유명한 형제와 혼동한 프랑스의 한 신문이 “죽음의 상인, 사망하다”라는 표제 하에 “사람을 더 많이 더 빨리 죽이는 방법을 개발해 부자가 된 인물”이라고 폄하하는 부고 기사를 내보냈다. 이를 보고 깜짝 놀란 알프레드 노벨이 속죄를 위해 재산을 기부하기로 했다는 것인데, 그럴듯한 주장이긴 하지만 아쉽게도 확증까지는 없다. 애초부터 노벨 가문은 오랫동안 수뢰나 폭탄 등의 군수품을 제조하여 부를 축적한 이력이 있었으니, 알프레드 역시 다이너마이트가 무기로 사용되는 것에 대해 어쩌면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오해되거나 오용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 역시 도구에 불과하다고, 따라서 거기다가 선악의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가 애초에 나이트로글리세린을 연구하게 된 것도 보다 안전한 취급을 위해서였음을 고려하면, 그 결과물인 다이너마이트로 인한 악명은 적잖은 아이러니다.
1896년에 노벨은 협심증 진단을 받았는데, 묘하게도 그 치료제는 혈관 확장 효과를 지닌 나이트로글리세린 성분 약품이었다. 그해 12월 10일 새벽 2시, 그는 63세로 산레모의 자택에서 사망했고, 29일에 스톡홀름으로 옮겨져 가족 묘지에 매장되었다. 며칠 뒤인 1897년 1월 2일에 그의 유언장이 공개되었고, 이를 토대로 노벨 재단이 수립되어 1901년 12월 10일에 노벨상의 첫 시상식이 거행되었다.
노벨상의 기원,
알프레드 노벨은 1893년에 평화운동가 베르타 폰 주트너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기꺼이 내 유산의 일부를 한 재단에 기부하여 5년마다 수여되는 상을 제정하고 싶습니다. (...) 남자이건 여자이건 유럽에서 평화의 실현에 가장 공로가 큰 인물에게 수여할 상을 말입니다.” 노벨이 자신의 이름을 딴 상의 제정에 관해 언급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해 3월 14일, 그는 최초의 유언장을 작성했다. 유산 가운데 20퍼센트는 일가친척에게 나누어주고, 또 17퍼센트는 병원과 의학연구소 등 여러 단체에 나누어 기부하고 기금을 조성해 “생리학과 의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하고 선구적인 발견이나 발명”에 상을 수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위의 37퍼센트를 제외한 나머지 금액은 이렇게 처분하도록 지시했다. “모두 기금을 만들도록 스톡홀름 학술원에 기증할 생각이다. 학술원이 매년 이 기금에서 나오는 이자를 생리학과 의학을 제외한 학문과 진보의 전 분야에 걸쳐 가장 중요하고 선구적인 발견이나 정신적인 작업에 대한 포상으로 나누어주게 할 계획이다. (...) 이 유언장에 예고된 모든 상들이 스웨덴인이건 외국인이건, 또 남자이건 여자이건 조금도 차별하지 않고 가장 공로가 많은 사람에게 수여되는 것이 나의 확고한 소원이다.” 1895년 11월 27일에 노벨은 유언장을 약간 수정했고, 이것이 그의 사후에 공개되어 오늘날 노벨상의 기본 취지를 표현한 문서로 공인되었다.
오늘날은 세계 최고의 영예 가운데 하나인 노벨상이지만, 노벨의 유언장이 공개된 직후에만 해도 스웨덴 내부에서는 이 상의 제정을 놓고 격렬한 비난이 일어났다. 노벨의 일가친척은 물론이고 한때 애인이었던 소피까지도 자신들의 정당한 유산을 엉뚱한 상에 빼앗기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법적 대응을 고려했다. 수상자 선정에서 국적이나 성별에 구애되지 말라는 유언의 당부 때문에 스웨덴 국민 사이에서는 국부를 해외로 유출시키는 몰지각한 처사라는 비난도 나왔다. 평화상 수상자를 스웨덴이 아니라 노르웨이 국회에서 선정하게 한 것을 놓고도 논란이 일었다(그 당시에만 해도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연합국가였기 때문에 스웨덴 국왕이 노르웨이 국왕을 겸했으며, 1905년에 이르러 별개의 국가로 분리되었다).
논란의 와중에 설립된 노벨 재단은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을 실현하는 데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총 3천 3백만 크로나(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2억 달러 이상으로 평가된다)로 집계된 노벨의 유산 가운데 세금을 제외하자 3천 1백만 크로나가 남았다. 이 가운데 2천 8백만 크로나가 노벨상 기금이 되었고, 나머지는 운영 기금이 되었다. 재단은 노벨의 유언 중에서도 비현실적인 부분(가령 과학상 후보를 “지난해의 발견•발명”만으로 제한한 것)은 보다 유연하게 적용하기로 했고, 전반적으로 “인류에게 가장 큰 유익을 가져다 준 사람들”이라는 취지에 근거해 수상자를 결정하기로 결했다. 1900년 7월 29일, 노벨 재단은 스웨덴 정부의 공인을 받았다.
노벨은 과학자였으니 과학 분야 상들의 제정은 당연해 보이지만, 문학상과 평화상은 어딘가 의외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분야 역시 그의 개인적 관심이 반영된 결과였다. 노벨은 평생 문학을 가까이 하며 시와 소설을 습작했고, 당대의 여러 평화운동가들과도 친분을 유지했다. “나는 전쟁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무시무시하고 대규모의 파괴력을 가진 물질이나 기계를 만들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노벨의 이러한 제안은 어쩌면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자다운 발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자칫 무제한적인 군비 경쟁으로 비화될 수 있음을 최근의 역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
1969년에 스웨덴 제국은행이 노벨 재단과는 별도의 기금을 마련해 ‘알프레드 노벨 기념 스웨덴 은행 경제과학상’을 제정함으로써, 오늘날 ‘노벨 경제학상’으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분야가 생겨났다. 한편 미국의 공학자인 헨리 페트로스키는 명색이 화학공학자였던 노벨이 제정한 상에서 줄곧 공학자들이 배제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며, 이는 노벨의 유언을 그 집행자들이 편협하게 해석한 결과라고 일리 있는 지적을 내놓기도 했다. 즉 ‘과학’에는 순수과학과 응용과학이 모두 포함되는데도, 노벨 재단 측에서 순수과학 분야만을 대상으로 시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노벨상의 과학 분야에서 공학자가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단 두 차례뿐이었으며, 가장 최근의 사례는 무려 100년 전인 1914년에 있었다.
그런가 하면 노벨 수학상이 없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한 가지 묘한 소문이 오래 전부터 떠돌고 있다. 즉 노벨의 부인이 어느 수학자와 불륜 관계였기 때문에, 이에 앙심을 품은 노벨이 수학 부문의 상을 만들지 말도록 유언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벨이 평생 독신이었음을 고려해 보면, 이는 근거 없는 헛소문에 불과하다. 또한 노벨의 연적이라면 훗날 소피의 남편이 된 어느 군인뿐인데, 이는 차라리 평화상의 제정 근거라면 모를까 수학상과는 무관해 보인다. 따라서 그보다는 노벨이 구체적으로 지정한 분야가 어디까지나 그의 개인적 관심사를 반영했음을 근거로 삼아, 수학은 아쉽게도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고 보는 편이 더욱 타당하지 않을까?.
세계적인 부자가 된 노벨은 자신이 발명한 다이너마이트가 사람들의 생활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고와 전쟁 등으로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간다는 것에 늘 가슴아팠다.
그래서 다이너마이트로 번 돈을 인류를 위해 쓰기로 결심했다.
“나의 모든 재산으로 기금을 만들어 해마다 인류를 위해 일한 사람에게 상을 주도록 하시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노벨상이다.
노벨상은 물리학, 화학, 생리 · 의학, 문학, 평화 그리고 경제학 이렇게 여섯 개 부문으로 나뉘어 해마다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이나 단체에 수여한다.
시상은 매년 12월 10일, 노벨이 사망한 날 스톡홀름에서 거행되며 평화상은 같은 날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시상된다.
과학의 진보와 세계의 평화를 염원한 그의 유언에 따라 스웨덴 과학아카데미에 기부한 유산을 기금으로 1901년부터 노벨상 제도가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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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yyC0WZCHn9c -정통 사교춤 경음악 총결산 풀타임,
~감사합니다.~
참조항목
역참조항목
카테고리
출처 ^ 참고문헌
[알프레드 노벨 [Alfred Bernhard Nobel] (두산백과)
[노벨, 본문에 인용된 노벨의 말은 다음 책에서 가져왔다. (프리츠 푀트클레 지음, 한길사, 2000)
[알프레드 노벨 [Alfred Bernhard Nobel] - 스웨덴의 발명가 겸 기업가· 노벨상 창설자 (인물세계사,)
[wikipedia 1864년 6월, 뇌관 및 나이트로글리세린 점화법에 관한특허를 얻기 위해 노벨이 작성한 신청서
[wikipedia 1895년 11월 25일자로 작성된 알프레드 노벨의 마지막 유언장. 여기 나와 있는 내용에 따라 노벨상이 제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벨 [Alfred Bernhard Nobel] (한 권으로 끝내는 교과서 위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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