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의 배경.이칭별칭 | 한일협상조약, 제2차한일협약, 을사5조약, 을사늑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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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사건 | ||
시대 | 근대 | ||
성격 | 조약 | ||
발생·시작 일시 | 1905년 11월 17일 | ||
관련인물·단체 을사조약(乙巳條約) / 을사늑약(乙巳勒約) 이 협정으로 일본제국은 대한제국을 독립국이 아닌 자칭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즉, 사실상 일본제국의 속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외교권 양도 조약. 이 조약에 의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상실하였다. 외교권에 없다는 것은 제3국에서 보면 대한제국은 존재하지 않는 나라라는 얘기다. 외무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서명했으며,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및 통감부 설치 등이 주요 내용이다. 이 조약은 처음에 제목이 없었다. 제목도 없다가 나중에 붙여진 셈. 이는 밑에 있는 원본 사진 참조. 정식명칭은 제2차 한일협약이다. 제1차 한일협약은 1904년 8월에 체결된 협약이고 같은해 2월에 체결된 한일의정서와는 다른 조약이다. 흔히 을사조약이라고 하며, 을사보호조약이라고도 한다. 참고로 실록에는 한일 협상 조약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한일협상조약이 북한어로 되어있다. 초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암살 목표로 지정된 것은 초대 통감이라는 상징성에 그 이유가 있다. 1965년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는 한일기본조약(한일협상)의 제2조를 통해 무효임을 상호 확인하였다.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already void and null'(이미 무효하며 효력이 없음)가 영어본이므로 기초가 되는 문서인데 문제는 일본측의 요구 already null and void를 한국에서는 null and void를 주장했다. 또한 한국 내부에서 대부분 불법이라고 하지만 해외로 나가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또한 해외의 학자들은 조약 자체의 부당성 즉 국력의 차이로 인한 강제적인 체결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이후에 해당 지배국의 법이 실효성을 띄웠느냐가 중요하다고 본다. 한일의정서나 '정미7조약'(제3차 한일협약, 정미칠적 참조)도 마찬가지. 근본적으로 비준 절차와 황제의 전권 대행이 없는 국제법 위반 협약이었기에 조약이라 부를 수도 없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고종은 이 조약의 무효화를 주장하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으나, 국제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대한제국은 1904년 러일전쟁 발발 때 국외중립을 선언했으나 일본군의 한성진주로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한일의정서, 제1차 한일협약 등을 통해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어느 정도 승기를 잡자 대한제국의 주권을 완전히 빼앗기 위해서 러일전쟁 도중에 서구 열강으로부터의 동의를 얻기 시작했다. 먼저 태평양에 있어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던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1905년 7월 27일 맺으면서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허용하는 대신 본인들의 한반도에서의 권리를 얻었으며, 자신들과 동맹을 맺었던 첫 번째 서구 열강이었던 영국과는 1905년 8월 12일 제2차 영일동맹을 통해 영국의 인도지배를 허용하는 대신 본인들의 한반도 지배 권리를 얻었다. 그리고 1905년 9월 5일 러일전쟁을 끝내면서 맺은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한반도 지배의 걸림돌이었던 러시아를 한반도에서 완전히 배제시키는데 성공을 거둔다. 결국 1894년 청일전쟁으로부터 이어진 일본의 한반도 침략 프로젝트는 1905년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의 허가를 죄다 받아내면서 마무리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1905년 11월 추밀원장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고종 위문 특파대사 자격으로 파견하여 대한제국의 보호국화를 위한 조약 체결에 나서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재차에 걸쳐 고종과 내각을 압박했으나 고종과 내각은 당연히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11월 17일 각부 대신들을 일본공사관에 불러 한일협약의 승인을 꾀하였으나 오후 3시가 되도록 결론을 얻지 못하자, 궁중에 들어가 어전회의를 열게 했다. 어전회의에서는 일본의 각종 압박에도 불구하고 역시 거부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러자 이토 히로부미는 주한일군 사령관이었던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헌병의 호위를 받고 들어와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의견을 물어보기 시작한다. 여기서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는 반대했지만, 법부대신 이하영은 소극적 반대, 학부대신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찬성을 하면서 을사조약은 승인받게 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획득하고도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3국의 간섭을 받아 이를 반환해야만 했다. 그 뒤 한반도와 만주로의 진출을 꾀한 일본은 이 지역으로의 남하(南下)를 도모한 러시아와 대립하였다. 1898년 절영도(絶影島, 지금의 부산 영도)를 러시아에 조차(租借)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이 나타났다. 독립협회(獨立協會) 등이 참여한 반대 운동으로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는 철회되었으며, 일본도 석탄고(石炭庫) 기지를 반환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과 러시아는 1898년 4월에 한국의 내정(內政)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니시-로젠 협정(Nish-Rosen Agreement, 제3차 러일협약)을 체결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의 한국 진출은 경제적 측면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은 청일전쟁으로 받은 배상금을 바탕으로 한국에서의 철도부설권을 획득했으며, 광산·삼림·어업·항시(港市)·온천 등의 갖가지 이권(利權)을 차지하면서 한국의 상업(商業)과 무역(貿易)을 장악했다. 삼국간섭으로 서구 열강과의 외교 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한 일본은 1902년 영국과 동맹을 맺어(제1차 영일동맹) 러시아를 견제하였다. 일본과 영국은 러시아에 만주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고, 러시아는 청(淸)과의 협상을 다시 시작하여 그 해 4월 청과 철병(撤兵) 협정을 체결했다. 러시아는 협정에 따라 만주에서 일부 군대를 철수시켰지만, 1903년 이후에는 강경파가 득세하여 오히려 압록강 유역으로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였다. 1903년 5월 러시아군은 압록강의 삼림벌채권(森林伐採權)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신의주의 외항(外港)인 용암포(龍岩浦)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주롄청[九連城]과 안둥[安東, 지금의 丹東], 용암포(龍岩浦)에 이르는 지역에 1개 여단(旅團)의 병력을 배치하고, 7월에는 대한제국(大韓帝國)에 용암포 조차(租借)를 강요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반도와 만주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은 더욱 커졌으며, 군사적 충돌의 상황으로 나아갔다. 1903년 7월 이후 일본과 러시아는 만주와 한반도의 지배를 둘러싸고 협상을 진행하였다. 일본은 러시아에 자신들이 한반도를 완전히 장악하는 대신 만주에서 러시아의 상업적 권리를 보장한다는 ‘만한교환(滿韓交換)’을 제안하였지만 거부되었고, 러시아는 일본에 한반도를 북위 39도선을 중심으로 분할 점령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04년 1월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은 결렬되었으며, 두 나라의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2월 6일 러시아와 국교를 단절한 일본은 2월 8일 뤼순[旅順]을 공격하여 러시아와의 전쟁을 일으켰다. 대한제국 정부는 1904년 1월 23일 전쟁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중립국임을 선포하였지만, 2월 9일 일본군이 인천을 거쳐 서울로 진입하면서 전쟁 지원을 위한 협약의 체결을 강요당했다. 2월 23일 대한제국의 영토를 일본이 군사적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의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가 체결되어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하는 한편, 본격적인 한반도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일본군은 뤼순[旅順]의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압록강 너머에서 벌어진 육전(陸戰)에서도 승리하였다. 그리고 해전(海戰)에서도 러시아의 발틱(Baltic) 함대마저 전멸시키고 승리하였다.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기울어지자 대한제국 정부는 5월 18일 조칙(詔勅)으로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되었던 모든 조약과 협정을 폐기하고, 러시아인이나 러시아 회사에 주었던 이권(利權)도 모두 취소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8월 22일에 재정(財政)과 외교(外交) 부문에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顧問)을 둔다는 내용의 ‘외국인용빙협정(外國人傭聘協定, 제1차 한일협약)’의 체결을 강압하여 대한제국의 내정(內政)에 대한 직접적인 간섭을 확대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7월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The Katsura-TaftAgreement)’을, 8월에는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英日同盟)을 맺어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9월 5일 미국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 대통령의 조정으로 미국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러시아와 강화조약(講和條約)이 체결되었는데, 포츠머스조약(Treaty of Portsmouth)은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 군사, 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또 한국에 대하여 지도, 감독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승인한다”고 명시하였다. 이는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조약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었지만, 유럽 열강이 일본의 한국 침략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은 일본이 한국의 식민지화로 본격적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조약을 주선한 대가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유럽 열강(列强)들에게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은 일본은 한국에 보호국화의 조약 체결을 강요하며 침략을 본격화하였다. 이미 일본은 1904년 5월 31일 내각회의(內閣會議)에서 한국의 국방과 재정에서의 실권을 장악하고, 외교의 감독과 조약 체결권의 제약 등을 통해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립의 기본 방침을 결정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특명전권대사로 임명했으며, 주한(駐韓) 일본공사(日本公使)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1860~1939]는 11월 2일 서울로 돌아와 주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1850~1924]와 협력하여 이완용(李完用) 등을 매수하고 일진회(一進會)로 하여금 조약에 찬성하는 선언서를 발표하게 하는 등 조약 체결을 준비하였다. 체결 과정.
1905년 11월 9일 특명전권대사로 한국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10일에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한다는 일본 정부의 신협약안(新協約案)을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을 통해 대한제국(大韓帝國) 정부에 전달하였다. 이토는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와 함께 3차례에 걸쳐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을 만나 압박하였으나, 고종의 거부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16일 정동(貞洞)의 손탁호텔로 참정대신(參政大臣) 한규설(韓圭卨, 1848~1930)을 비롯해 여덟 명의 대신(大臣)을 모아, 그들을 위협하여 협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하지만 참정대신 한규설은 분명히 반대 의사를 밝혔고, 법부대신(法部大臣) 이하영(李夏榮, 1858~1919) 등도 공식 회의에 부쳐 토의해 결정해야 한다며 의견 개진을 거부하였다. 11월 17일 경운궁(慶運宮)에서 일본군이 에워싸고 위협하는 상황에서 어전회의(御前會議)가 열렸지만, 한규설 등이 반대 의사를 강하게 주장하여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폐회되었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공사(日本公使)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등은 폐회하여 돌아가는 대신들을 강제로 다시 소집하였고, 고종의 알현(謁見)을 요구하였다.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의 알현 요구를 거절했지만, “정부 대신과 협력하여 조처하라”며 책임을 대신들에게 미루었다. 이토와 하야시 등은 일본 헌병 수십 명과 함께 회의장에 들어가 대신 각각에게 가부(可否) 결정을 강요하였다. 일본의 강압(强壓)에도 한규설은 반대 의사를 굽히지 않았으며,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민영기(閑泳綺, 1858~1927)와 법부대신(法部大臣) 이하영(李夏榮, 1858~1919)도 한규설에 동조하여 반대하였다. 하지만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1858~1926), 군부대신(軍部大臣) 이근택(李根澤, 1865~1919),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1870~1928), 외부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 1858~1916),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권중현(權重顯, 1854~1934) 등은 고종(高宗)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조약 체결에 찬성하였는데, 이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8명의 대신 가운데 5명이 찬성하였으므로 조약 안건이 가결되었다고 선언하였다.
조약 체결에 찬성한 다섯 대신만으로 회의를 다시 열어 외부대신 박제순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를 한일 양국의 대표로 하여 조약을 체결하였다.
주요 내용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 이재극(李載克, 1864~1927)을 시켜 강제 통과시킨 협약안의 칙재(勅裁)를 고종(高宗)에게 강요하였다. 그리고 11월 17일자로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를 두 나라의 대표로 하여 조약을 체결한 뒤, 18일에 이를 공포(公布)하였다.
을사조약은 모두 5개조의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한국의 식민화를 위해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統監府)와 이사청(理事廳)을 두어 내정(內政)을 장악하는 데 있었다. 조약 각 항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일본국 정부는 금후(今後) 외무성(外務省)을 경유하여 한국의 외교를 감리(監理), 지휘(指揮)하며, 일본의 외교 대표자와 영사(領事)는 외국에 있는 한국인과 그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이 타국과 맺은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며, 한국은 금후 일본의 중개 없이는 타국과 조약이나 약속을 맺어서는 안 된다. 제3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제 아래에 통감(統監)을 두고, 통감은 외교를 관리하기 위해 경성(京城, 지금의 서울)에 주재하여 한국 황제와 친히 내알할 수 있도록 한다.
일본은 한국의 개항장(開港場) 등에 이사관(理事官)을 둘 수 있다.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 아래 종래 한국에서 일본 영사가 지니고 있던 직권(職權)을 완전히 집행하고, 또한 본 협약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한 모든 사무를 담당한다.
제4조. 일본과 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나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하지 않는 한 계속 효력을 지닌다. 제5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安寧)과 존엄(尊厳)의 유지를 보증한다. 이러한 조약의 내용을 기초로 일본은 1905년 12월 20일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官制)’를 공포하고, 초대 통감(統監)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임명하였다. 주한 일본 공사관은 철폐되어 통감부로 그 기능이 넘겨졌으며, 각지의 영사관은 이사청으로 개편되었다.
개항장과 13개의 주요 도시에 이사청이, 11개의 도시에 지청(支廳)이 설치되어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1906년 1월 31일 각국의 영사관은 모두 철수하였으며, 초대 통감(統監)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외교에 관한 사항만이 아니라, 각 대신들과 협의해 시정(時政) 개선의 급무(急務)를 시행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사실상 한국의 내정(內政)을 장악하였다.
1906년 8월 1일 일본은 한국 주둔군 사령부 조례를 공포하여 통감의 명령으로 병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로써 통감부는 관헌(官憲) 감독권, 병력 동원권, 시정 감독권 등을 보유한 최고 권력 기관으로 군림하였다.
반대투쟁
을사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는 일본의 보호국이나 사실상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다. 때문에 조약 체결의 사실이 알려지자 각지에서 일본에 대한 항쟁이 일어났다.
장지연(張志淵, 1864~1920)은 1905년 11월 20일자의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게재하여 일본의 흉계를 비판하며 조약 체결의 사실과 부당함을 널리 알렸다.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이상설(李相卨), 종1품 이유승(李裕承), 법부주사(法部主事) 안병찬(安秉瓚), 원임의정대신(原任議政大臣) 조병세(趙秉世),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閉泳煥), 전참찬(參贊) 최익현(崔益鉉), 특진관(特進官) 이근명(李根命), 종묘제조(宗廟提調) 윤태흥(尹泰興), 승지(承旨) 이석종(李奭鍾), 유림(儒林) 이건석(李建奭) 등은 상소(上疏)로 조약 체결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상소가 효과를 얻지 못하자, 민영환은 유서를 남겨 국민에게 경고하면서 자결하였고, 뒤이어 조병세, 전참판 홍만식(洪萬植), 학부주사(學部主事) 이상철(李相哲), 평양대(平壤隊) 일등병(一等兵) 김봉학(金奉學), 주영공사(駐英公使) 이한응(李漢應) 등도 죽음으로 일본에 항거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일본에 항거하는 의병(義兵)도 일어나 전참판 민종식(閔宗植)이 홍주(洪州)에서 거병한 것을 비롯하여 전라도에서 최익현(崔益鉉)이, 경상도에서는 신돌석(申乭石)이, 강원도와 충청도에서는 유인석(柳麟錫) 등이 각각 의병을 일으켰다. 나철(羅喆), 오기호(吳基鎬) 등은 이완용, 박제순 등의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기 위해 거사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고종(高宗)도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 등을 통해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알리려 하였다.
1907년에는 이상설(李相卨)과 전 평리원 검사(平理院檢事) 이준(李儁) 등을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네덜란드의 헤이그로 밀사(密使)로 파견해 열강(列强)들에게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려 하였다.
한국 대표의 회의 참석은 거부되었고, 밀사(密使) 파견이 문제가 되어 고종(高宗)은 순종(純宗)에게 강제로 양위(讓位)되었다.
을사조약은 조약 체결 당시부터 국제법학계에서 무효라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1906년 프랑스 파리법과대학의 교수인 F. 레이는 을사조약이 협상 대표에 대한 고종의 위임장과 조약 체결에 대한 비준서 등 국제조약에 필요한 형식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데다가 한글과 일본글로 된 조약문의 첫머리에도 조약의 명칭조차 없이 그대로 비어 있어 국제조약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하였다.
1965년 체결된 ‘대한민국과 일본국과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한일협정)에서 한국과 일본은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 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제2조)고 규정하여 을사조약이 다른 조약과 함께 이미 무효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한일협정 제2조를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의 해석이 다르게 나타나 을사조약의 효력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을사조약이 체결 당시부터 무효였다고 보지만, 일본에서는 1965년 협정 이후 무효가 되었다고 해석한다.
한국은 국제 관습법(慣習法)에서 강제와 위협에 기초한 조약 체결은 무효로 하므로 을사조약도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본다.
당시 국가를 대표했던 고종(高宗)의 승인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고종이 친서(親書)와 밀사(密使) 등으로 국제 사회에 조약이 무효임을 꾸준히 밝혔다는 사실도 중요한 근거로 제시한다.
하지만 일본은 강제와 위협에 기초한 조약 체결을 무효로 하는 국제 관습법은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났으며, 1945년 ‘국제연합헌장’에서야 비로소 명문화되었으므로 1905년에 체결된 을사조약에 적용할 수는 없다고 해석한다.
고종(高宗)에 대해 강제와 협박이 행해졌다는 역사적 근거도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을사조약의 실효성을 둘러싼 대립은 간도협약(間島協約) 등 1905년 이후 일본이 한국을 대리해 청(淸) 등과 체결한 조약의 효력과도 연관되므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간도협약. 間島協約.
1909년(융희 3) 9월 청(淸)나라와 일본이 간도(젠다오)의 영유권 등에 관하여 맺은 조약.
청나라는 19세기 말기부터 간도가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여 군대까지 투입하고 지방관까지 두었으나, 한국도 그에 강력히 맞서 영토권을 주장하였으므로 간도영유권 문제는 한·청 간의 오랜 계쟁문제(係爭問題)였다.
일제는 1905년(광무 9)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뒤 청나라와 간도문제에 관한 교섭을 벌여 오다가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푸순[撫順]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는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 협약은 전문 7조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① 한·청 양국의 국경은 도문강(圖們江:토문강)으로서 경계를 이루되, 일본 정부는 간도를 청나라의 영토로 인정하는 동시에 청나라는 도문강 이북의 간지(墾地)를 한국민의 잡거(雜居)구역으로 인정하며,
② 잡거구역 내에 거주하는 한국민은 청나라의 법률에 복종하고, 생명·재산의 보호와 납세, 기타 일체의 행정상의 처우는 청국민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③ 청나라는 간도 내에 외국인의 거주 또는 무역지 4개처를 개방하며,
④ 장래 지린[吉林]·창춘[長春] 철도를 옌지[延吉] 남쪽까지 연장하여 한국의 회령(會寧) 철도와 연결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것으로 일본은 만주 침략을 위한 기지를 마련하는 동시에, 남만주에서의 이권을 장악하고, 조선통감부 임시간도파출소를 폐쇄하는 대신 일본총영사관을 두어 한국인의 민족적 항쟁운동을 방해하는 공작을 하게 되었다.
간도와 독도우리 땅,
대한 제국기에는 청과는 간도를 놓고, 일본과는 독도를 놓고 영토 분쟁이 일어납니다. 일찍이 청은 백두산이 청 왕조가 일어난 신령한 산이라며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1712년(숙종 38년)에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지면서 청과 백두산 일대의 영토 문제는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런데 대한 제국기에 들어서 이 지역에 대한 분쟁이 다시 불거지게 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 이후 나라가 뒤숭숭해지면서 한민족은 간도 지방으로 이주하여 황무지를 개척하고 삶의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그러자 청은 간도 개간 사업을 구실로 한민족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이로 인해 간도의 귀속 문제가 발생한 것이죠. 그것은 특히 백두산 정계비에 대한 해석을 놓고 청과 대한 제국이 각기 다른 입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두산정계비1)는 비문에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서위압록 동위토문 고어분수령 :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라고 되어 있습니다. 조선의 정부는 이 토문강이 송화강 상류이므로 간도가 우리 영토라고 주장하고, 간도에 관리를 파견하여 관리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청은 토문강이 두만강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통감부가 설치된 뒤에 일제는 간도에 통감부 파출소를 두어 이를 관할했습니다. 하지만 일제는 만주의 안봉선 철도 부설권을 받아내는 대가로 간도를 청의 영토라고 넘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일제가 청과 체결한 간도 협약입니다(1909). 이 협약은 일제가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 조약에 근거하여 제멋대로 체결한 협약입니다. 고종 황제는 을사 조약이 무효라고 선언했고 조약을 비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을사 조약을 근거로 체결한 간도 협약도 무효인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일제는 러 · 일 전쟁 중에 독도를 자기들의 영토에 편입시키는 불법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독도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우리 국토에 속하는 섬입니다. 지금도 가끔 일본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우리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근대의 개혁‧ 갑오 · 을미 개혁은 청의 종주권 부인과 사법권 독립, 재정 일원화, 신분제와 봉건적 폐습 등을 개혁한 것으로, 자율적인 성격과 타율적인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 고종은 국호를 대한 제국, 연호를 광무, 왕호를 황제로 바꾸어 자주국가임을 선포했습니다. ‧ 서재필 등의 진보적 지식인과 도시 시민층을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 협회는 만민 공동회를 열어 일반 시민들이 시국에 대한 자유로운 의견을 내놓을 수 있게 했습니다.
독립 협회는 국권 · 민권 운동을 통한 민주주의와 근대적 민족주의 사상을 보급하고, 자주적 근대 개혁 사상 정착에 기여했습니다.
백두산정계비 비문
오라총관 목극등(烏喇摠管 穆克登), 봉지사변(奉旨査邊), 지차심시(至此審視), 서위압록(西爲鴨綠), 동위토문(東爲土門), 고어분수령(故於分水嶺), 륵석위기(勒石爲記), 강희(康熙) 오십일년(五十一年) 오월십오일(五月十五日) 〔오라총관 목극등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변방의 경계를 직접 조사하고자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이고 동쪽은 토문이다. 그러므로 물이 나뉘는 고개 위에 돌을 새겨 기록하노라. 강희 51년 5월 15일〕 독립 협회.
흔들리는 주권
한 나라의 왕이 일개 외국 공사관의 보호 아래에 들어간 아관 파천으로, 주권 국가로서 조선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조선은 아관 파천으로 일본의 위협에서는 조금 벗어날 수 있었으나, 이후 제국주의 국가들이 조선의 주권을 훼손하는 데 경쟁적으로 나서면서 더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을미정권을 대신하여 이범진 등 고종의 측근 세력과 정동파라 불리는 친러, 친미 인사들이 권력을 차지하였다. 이들도 개화 정책에는 적극적이었다. 전면적인 서구화를 추진한 일본이 중체서용을 내세운 청을 꺾음으로써 더욱 큰 힘을 얻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 침략을 본격화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정권은 바뀌었으나 갑오개혁의 상당 부분이 계승되었다. 청으로부터 독립을 확고히 하는 것과 함께 신문의 발행, 학교의 설립이나 신산업 육성을 위한 조치들도 꾸준히 추진되었다. 새로운 호적 제도를 실시하면서 신분 차별을 법적으로 철폐한 것도 이때였다.
독립신문과 독립 협회
서양 열강의 간섭과 이권 침탈이 강화되고 있던 1896년 무렵에는 이래저래 '독립'이란 말이 화두였다. 1896년 4월, "무슨 일에서든 인민의 대변자가 되고, 정부가 하는 일을 백성에 알리고……" 라는 창간 정신을 밝힌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신문 발간을 추진하였던 갑오정권의 계획을 새 정권이 이어받아 서재필로 하여금 신문 발간 사업을 추진하게 한 결과였다. 이해 7월에는 독립 협회도 창립되었다. 독립 협회에는 이완용 등 정부 관료와 서재필, 윤치호 등 개화파 인사들이 두루 참가하였다. 독립 협회는 청 사절단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이 문은 단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부터, 그리고 유럽 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 《독립신문》 사설(영문판), 1896. 6. 20.
서재필(1864~1951, PhilipJaisohn)갑신정변에 참가하였다가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1896년에 귀국하여 중추원 고문을 맡은 뒤,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 협회 활동을 주도하였다. 의회 설립을 추진하다가 추방되어 1898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독립 협회는 토론회와 강연회를 자주 열어 자주 독립 의식을 높이고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자주 독립을 위해서는 산업을 육성하여 경제력을 길러야 하며, 민권을 보장하고 애국심을 높여 폭넓은 인민의 참여를 이끌어 내야 한다고 믿었다. 이들이 행사 때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수시로 '동포'란 말을 사용한 것은 이런 취지에서였다.
《독립신문》(한글판, 영문판)1896년 4월 7일에 창간되어 1899년 12월 4일자로 폐간되었다. 순 한글로 발행한 최초의 신문이며, 외국인을 위해 영문판도 함께 만들었다. 개화 정책의 필요성과 독립 의식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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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1일 일요일
을사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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