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7일 수요일

실크로드 .

실크로드"

동서양을 이어 준 기원전 고속도로
비단길(Silk Road)이라고 일컫는 실크로드는 고대 중국과 서역 각국 간에 비단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무역을 하면서 정치ㆍ경제ㆍ문화를 이어 준 교통로의 총칭이다. 
총길이 6,400㎞에 달하는 실크로드라는 이름은 독일인 지리학자 리히트호펜(Richthofen, 1833~ 1905)이 처음 사용했다. 
중국 중원() 지방에서 시작하여 허시후이랑(西)을 가로질러 타클라마칸 사막(Taklamakan Desert)의 남북 가장자리를 따라 파미르(Pamir) 고원, 중앙아시아 초원, 이란 고원을 지나 지중해 동안과 북안에 이르는 길이다.

실크로드란 인류문명의 교류가 진행된 통로를 말한다. 실크로드란 말은 130여년 전인 근세에 와서 출현했는데, 이 명칭을 처음 쓴 사람은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Richthofen, 1833~1905)이다. 
그는 1868~1872년에 중국 각지를 답사하고, 1877년부터 1912년까지 『중국』(China)이란 책 5권을 찬술하였다.

이 책 제1권의 후반부에 동서교류사를 개괄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시르다리야(Syr Darya, 시르강)와 아무다리야(Amu Darya, 아무강) 두 강 사이에 있는 트란스옥시아나(Transoxiana) 지역과 서북인도로 수출되는 주요 물품이 비단(silk)이라는 사실을 감안하여 이 교역로를 독일어로 ‘자이덴슈트라센’(Seiden strassenSeiden=비단, strassen=길, 영어로 Silk Road)이라고 명명하였다.

그후 스웨덴의 허턴(S. Hutton, 1863~1952)과 영국의 스타인(A. Stein, 1862~1943) 등에 의해 중앙아시아 각지뿐 아니라 지중해 동안에 위치한 시리아에서도 중국의 견직 유물이 다량 발굴되었다. 
이를 근거로 독일의 동양학자 알베르트 헤르만(Albert Herrmann)은 1910년에 이 실크로드를 시리아까지로 연장하였다. 
이 실크로드는 주로 중앙아시아 일원에 점재()한 여러 오아시스(oasis)를 연결하여 이루어진 길이므로 일명 ‘오아시스로’라고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양학자들은 오아시스로를 통한 동서교류 연구를 심화하여, 중국에서부터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지나 터키의 이스탄불과 로마까지 연결하여 장장 1만 2천km(직선거리 9,000km)에 달하는 이 길을 동서간의 문화통로와 교역로로 규정하였다. 
실크로드의 범위를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초원지대를 지나는 초원로(SteppeRoad, 스텝로)와, 지중해로부터 홍해() · 아라비아 해 · 인도양을 지나 중국 남해에 이르는 남해로(Southern Sea Road)까지 포함시켰다.

이 실크로드의 3대 통로(간선) 중 남해로의 명명 유래는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는 점이 있는바 수정되어야 한다. 
원래 ‘남해로’란 이름은 이 루트가 남방에 위치해 있고, 또 그 길이 중국의 남해에까지 이르는 바닷길이라는 이유에서 그렇게 명명되었다.

15세기 이후 이른바 ‘남해로’라 불리는 이 해로가 중국의 남해를 넘어서 태평양 건너 미주()에까지 연장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종래의 ‘남해로’란 명칭은 적절치 못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환지구적으로 연결된 이 바닷길은 범칭적()인 의미에서 ‘해로()’로 개칭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실크로드 3개 간선의 정확한 명칭은 ‘초원로’와 ‘오아시스로’ ‘해로’가 된다.

실크로드란 원래 중국 비단의 유럽 수출로에서 연유된 조어()였으나, 그 개념이 확대된 결과 원래의 뜻과는 다르게 하나의 상징적인 아칭()으로 변하였다. 
사실상 초원로나 해로는 물론이거니와, 오아시스로도 그 길을 따라 비단이 교류품의 주종으로 오고간 것은 역사상 짧은 기간이었을 뿐, 여러가지 교역품이나 문물이 오랫동안 교류되었다.

역사가 말해주듯이 실크로드는 비단의 일방적인 대서방 수출로 인해 이름이 지어졌고, 비단이 로마제국(특히 말엽)에서 큰 인기를 모은 진귀품으로서, 그 진가를 기리기 위해서 그 명칭이 고수되어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명칭은 분명히 유럽 중심주의 문명사관에서 비롯된 것이며 진정한 문명교류 차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크로드란 이름이 시종 존속되어온 것은 바로 그 상징성 때문이다.

실크로드는 문명교류의 통로인 것만큼이나 노선과 교류 여하에 따르는 유한()된 하나의 역사적 개념으로서, 분명히 그 시말()이 있다. 
그 시말은 광의적() 시말과 협의적() 시말로 갈라볼 수 있다. 
광의적 시말은 실크로드가 선사시대에 개통되어 지금도 계속 기능하고 있다는 좀더 넓은 의미에서의 시말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 전에 홍적세()가 시작되면서 일어난 인류의 대이동에 의해 유라시아 대륙에 몇 갈래의 길이 생겼는데, 이것이 실크로드의 시작이다.

지금도 비록 교통수단이나 노선은 달라졌어도 여전히 이 길은 문명의 교통로로서 기능하고 있다. 
기원전 7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발생한 농경과 목축업 및 토기와 방적기술 등 원시문명이 이 길을 따라 각지에 전파되었으며, 서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각각 기원전 6000년경과 4000년경에 발생한 채도()도 이 길을 따라 동서로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선사시대에 동서교류를 시사하는 최초의 유물로는 지금으로부터 만여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너스상이 있다. 
지금까지 서로는 유럽의 피레네 산맥 북방으로부터 동으로는 바이칼호부근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의 20여 곳에서 수백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시기의 문명이동은 일방적이고 단향적()인 이동으로 상호교류 같은 것은 극히 미미한 상태였으며, 그나마도 그러한 교류상을 확증할 만한 근거는 매우 불충분하다.

이러한 상태는 역사시대의 전반기에도 지속되었다. 
광의적 시말에 비해 협의적 시말은 실크로드가 역사시대의 후반기에 개통되어 18세기경까지 기능하였다는 좀더 좁은 의미에서의 시말이다. 
기원전 8~7세기에 이르러서는 오아시스로나 초원로, 해로를 통한 교류의 흔적이 유물뿐만 아니라 문헌기록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으므로 이 시기를 실크로드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부터 가동한 실크로드는 18세기에 이르게 되면 그중 초원로와 오아시스로는 거의 폐로()가 되어버렸다. 
근대적인 교통수단이 발명 · 이용되고 근대적인 민족국가들의 출현으로 인해 자유이동이 제약됨으로써 이 두 통로의 이용이 사실상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2,500여년간 맥을 이어온 실크로드의 변화과정을 추적해보면, 크게 개척기 · 번영기 · 쇠퇴기의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개척기는 기원전 8~7세기에 스키타이가 초원로를 개척한 때부터 시작해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있었던 장건()의 서역착공(西)과 로마인들의 동방초행()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번영기는 기원후 중국 비단이 다량 서양으로 전파된 때부터 중국 당()대와 아랍-이슬람제국의 활발한 동서교류와 몽골제국의 서정(西)을 거쳐 17세기 신 · 구대륙간의 교역이 진행되기까지의 시기에 해당된다. 
번영기의 실크로드 전개상을 통관하면 시대상황에 따라 3개 간선 모두 활발하게 가동되는 전면 번영기와 그중 어느 한 길만이 번영하는 부분 번영기가 엇갈려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쇠퇴기는 18세기에 이르러 초원로와 오아시스로의 이용이 점차 퇴조 · 마비된 시기다.

개념 확대

실크로드 자체는 인류의 문명사와 더불어 장기간 기능해온 객관적 실재였지만, 인간의 지적 한계성 때문에 당초부터 그 실재가 온전히 인식되어온 것은 아니다. 
그 실재에 대한 인지()는 지금으로부터 불과 130여년 전부터의 일이다. 
그간 학계의 탐구에 의해 실크로드의 공간적인 포괄 범위와 그 기능에 대한 인식이 점진적으로 그 폭을 확대해왔다.

실크로드를 통해 전개된 교류의 실상이 점차적으로 밝혀짐에 따라 실크로드의 개념에 그만큼의 확대가 초래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으로 이러한 개념 확대는 교류에 대한 시야를 또한 그만큼 넓혀주었다. 
실크로드의 개념 확대는 실크로드란 통로의 단선적인 연장뿐만 아니라, 복선적()내지는 망상적()인 확대까지를 말한다.

실크로드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몇단계를 거쳐 확대되어왔다. 
첫째는 중국~인도로의 단계다. 이 단계는 1877년에 리히트호펜이 최초로 중국에서부터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트란스옥시아나와 서북 인도로 이어지는 길을 실크로드라고 명명함으로써 실크로드란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한 단계다.

둘째 단계는 중국~시리아로의 단계다. 
1910년 헤르만이 첫 단계 기간에 탐험가들과 고고학자들이 중앙아시아와 서북 인도뿐 아니라 지중해 동안 시리아의 팔미라(Palmyra)에서 중국 비단(한금()) 유물을 다량 발견한 사실을 감안해 이 비단 교역의 길을 시리아까지 연장하여 ‘실크로드’라고 재천명하였다. 
이 두 단계에서 실크로드는 주로 사막에 점재한 오아시스를 연결하여 이루어진 길이므로 일명 ‘오아시스로’(Oasis Road)라고도 한다. 
실크로드의 개념 확대 차원에서 보면 둘째 단계는 첫단계에 비해 오아시스로의 단선적인 연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크로드 개념 확대의 셋째 단계는 3대 간선로() 단계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학계에서는 전() 단계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하여 오아시스로의 동 · 서단( · 西)을 각각 중국 이동()의 한국 및 일본, 그리고 로마까지 연장했을 뿐만 아니라 실크로드의 포괄범위를 크게 확대하였다.

그 범위를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초원지대를 지나는 초원로()와 지중해에서 중국 남해에 이르는 남해로까지 포함하여 동서를 관통하는 이른바 ‘3대간선()’으로 개념을 확대하였다. 
아직 연구가 미흡하지만, 여기에 유라시아의 남북을 관통하는 마역로() · 라마로 · 불타로 · 메소포타미아로 · 호박로()의 5개 지선()까지 합치면, 실크로드는 문자 그대로 망상적()인 교통로가 된다.

실크로드의 개념 확대 차원에서 보면 앞 두 단계의 단선적인 연장 개념에서 벗어나 복선적()이며 망상적인 개념으로 크게 확대된 것이다. 
이렇게 실크로드의 개념이 크게 확대되어왔지만 아직은 아시아와 유럽 및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이른바 구대륙()에 한정된 실크로드가 지금까지의 통념이다.

마지막 넷째 단계는 환지구로() 단계다. 
앞의 세단계를 거쳐 실크로드의 개념은 부단히 확대되어왔지만, 그것은 아직 구대륙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환언하면 문명교류의 통로인 실크로드가 지구의 한 부분인 이른바 신대륙()—적절치 못한 표현이나 관용에 따라 그대로 사용—에까지는 연결되지 못함으로써 신대륙은 인류문명의 교류권에서 소외되어왔다. 
15세기부터는 해로에 의한 문명교류의 통로가 구대륙에서 신대륙에까지 이어져 실크로드는 명실상부한 환지구적 통로로 자리매김이 되었다.

이렇게 문명교류의 통로가 신대륙에까지 이어졌다고 보는 근거는 우선 신대륙으로의 해로 개척이다. 
1492년 콜럼버스(C. Columbus, 1451~1506)가 카리브해에 도착한 데 이어, 마젤란(F. Magellan, 1480~1521) 일행이 1519~1522년 에스파냐 → 남미의 남단 → 필리핀 → 인도양 → 아프리카의 남단 → 에스파냐로 이어지는 세계일주 항해를 단행함으로써 해로를 통해 신대륙에 이르는 바닷길이 트이게 되었다.

다음 근거는 신 · 구대륙간의 교역이다. 16세기부터 스페인인과 포르투갈인들이 필리핀의 마닐라를 중간 기착지로 하여 중국의 비단을 중남미에 수출하고 중남미의 백은()을 아시아와 유럽에 반입하는 등 신 · 구대륙간에는 교역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교역을 통해 고구마 · 감자 · 옥수수 · 낙화생 · 담배 · 해바라기 등 신대륙 특유의 농작물이 아시아와 유럽의 각지에 유입 · 전파되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감안할 때 비록 해로의 단선적인 연장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문명교류의 통로는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실크로드의 개념은 종래의 구대륙 한계를 벗어나 전지구를 망라하는 환지구적인 통로로 확대되었다. 
이상은 기존 실재로서의 실크로드에 대한 인간의 인식변화 과정이다.

실크로드의 역할

실크로드는 3대 간선과 5대 지선을 비롯한 교통망의 총체로서, 이 교통망을 통해 인류문명은 동서남북으로 종횡무진 교류되어왔다. 
문명교류를 포함한 인류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실크로드가 담당 수행한 역할은 실로 막중하였다. 

첫째로 
그 역할은 명실상부한 문명교류의 가교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문명이란 교류를 통한 상보상조() 가운데 발달할 수 있으며, 또 그 생명력을 발휘하게 된다.

예로부터 많은 문명들이 동서남북간에 서로 교류가 되어, 그것이 한 문명의 발생요인이 되거나 발달 촉진제가 되기도 하였다는 것은 많은 역사적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청동기의 동방 전파는 아시아 민족의 문명 전환을 촉진하였으며, 제지법의 서방 전파는 유럽의 개화를 이끌었다. 
이러한 당위적인 문명교류가 현실화되려면 반드시 가교로서의 일정한 공간적 매체와 물리적 수단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매체와 수단이 바로 실크로드다.

둘째로 
그 역할은 세계사 전개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실크로드는 환지구적인 대동맥으로서, 이 길을 따라 중요한 세계사적 사변들이 전개되고, 수많은 민족들과 국가들의 흥망성쇠가 거듭되면서 인류역사는 전진해왔다.

고대 오리엔트 문명의 창조자들에서 그리스 · 로마제국, 페르시아제국에서 이슬람제국, 선진()시대의 중국부터 몽골제국, 석가시대의 인도에서 티무르제국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북방 유목민족들의 흥망에서부터 중앙아시아제국들의 출몰()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모든 역사적 사변은 모두 실크로드를 따라 전개되고, 이 길에 의해 서로 연계되고 관련됨으로써 비로소 모든 변화와 발달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다리우스 · 알렉산드로스 · 한무제 · 당태종 · 이슬람 칼리파들 · 칭기즈칸 · 티무르 등 수많은 세계적 영웅호걸들이 이 길을 통해 다니며 역사의 지휘봉을 휘둘렀던 것이다. 
이 길이 없었던들 세계사의 전개는 인류가 일찍이 경험한 그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셋째로 
그 역할은 세계 주요 문명의 산파역을 감당한 것이다. 
원래 문명의 탄생은 교통의 발달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교통의 불편은 문명의 후진을 초래하며, 교통의 발달 없이 문명의 창달이나 전파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명론의 원리가 바로 실크로드에서 그대로 실증되었다.

고대 오리엔트 문명을 비롯한 황허 문명 · 인더스 문명 · 그리스로마 문명 · 스키타이 문명 · 불교문명 · 페르시아 문명 · 이슬람 문명 등 동서고금의 중요한 문명은 모두가 이 실크로드를 둘러싼 지역에서 발아한 다음, 이 길을 타고 개화 · 결실하였다. 
그 가장 뚜렷한 일례가 바로 불교와 이슬람교가 이 길을 따라 동서남북으로 전파되어 세계적인 종교가 된 사실이다.

실크로드"  3개 간선 & 5대 지선

지금까지 실크로드로 통칭해온 초원로와 오아시스로, 해로는 동서로 전개된 동서 문명교류의 주요 통로로서 실크로드의 3대 간선()이다. 
이 3대 간선은 문명교류 통로의 전체는 아니고 그 간선일 따름이다. 
사실 문명교류상을 총체적으로 추적해보면 지리적으로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및 아메리카를 동서로 이어주는 길은 이 3대 간선을 제외하고도 수많은 샛길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유라시아의 남북을 관통하는 교류통로도 여러 개가 병존하여왔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실크로드라는 범칭하에 문명교류의 통로라고 하면 주로 동서로 횡단하는 3대 간선로만을 염두에 두었을 뿐, 남북을 잇는 여러 길은 도외시하였다. 
최근에 와서 이 남북교통이 문명교류에 미친 영향이 밝혀짐에 따라 남북로에 대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문명교류의 동서통로를 간선이라고 하면, 이 남북통로는 지선()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인류 문명교류의 통로를 동서횡단의 3대 간선에만 국한한 종래의 시각에서 탈피해 남북간의 여러 지선을 포함해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한 하나의 거대한 교통망으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남북연결로는 간선인 3대로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선이라 불리고 있지만, 문명교류나 교역에서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그 노선이 또한 복잡다기하다.

고대에서 중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의 남북교통로는 대체로 5대 지선이 있었다. 
동서 3대 간선은 주로 동위위도() 상에 나타나는 지형적인 특징을 반영하여 초원로(스텝로), 오아시스로, 해로라고 명명하였다. 
남북 지선에 한해서는 지형적인 공통성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주로 교류나 교역의 내역상 특징을 살려 각 지선의 이름을 짓기로 한다. 
실크로드의 남북 5대 지선은 다음과 같다.

마역로(): 
남북로의 동단로()로서 초원로의 동쪽 끝인 막북()의 오르콘(Orkhon)강 유역에서 카라코룸을 지나 장안(, 현 시안(西))이나 유주(, 현 베이징)와 연결되며, 여기에서 계속 화남() 일대로 뻗어 항저우()나 광저우()에 닿아 해로와 접한다.

고대에 이 길은 북방 유목민족과 한()민족 간의 동아시아 쟁탈전을 위한 전쟁로()였으며, 이 길을 따라 양대 민족간에 군사적 및 사회경제적으로 큰 역할을 한 말(마())이 교역되고, 북방 기마유목문화와 남방 농경문화가 교류되었다. 
이 길을 따라 북방 기마유목민족문화가 동북아시아 일원에 유입되었다.
라마로: 
이 길의 북단()은 중가리아 분지로서 고창() 서북의 투루판(토로번())과 타림 분지 동편에 있는 찰클릭(Charklik, 뤄창())를 지나 티베트의 라싸를 거쳐 히말라야 산록을 따라 북인도의 시킴(석금())에 이른 후 계속 남하해 인도 갠지스강 어구까지 이어진다. 
이 길은 기원후 5세기부터 주로 토욕혼()에 의해 이용되다가, 7~8세기에 와서는 토번(, 티베트)이 중국 경내의 라마로 주변을 장악하게 되자 토번의 서역 원정로 역할을 하였다.

당과 토번 간에 화친관계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당의 사신이나 구법승()들이 첩경인 이 길을 따라 인도에 왕래하였다. 
후세에 와서 중가리아 일원에서 통일국가로 출현한 타타르가 가끔 이 길을 따라 티베트와 중국 서북방에 대한 공략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특기할 것은 티베트에서 발생한 라마교가 바로 이 길을 따라 북상해 몽골에 널리 전파된 사실이다.

불타로(): 
이 길은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Kazakhstan)에서 출발해 타슈켄트(Tashkent)와 사마르칸트(Samarkand)를 거쳐 동서남북의 십자로상에 위치한 아프가니스탄북부의 발흐(Balkh, 현 Mazāresheif)와 페샤와르(Peshawar, 간다라(Gandhara))를 지난 후 인더스강 유역을 따라 중인도 서해안의 바루가자(Barugaza, 현 수라트(Surat))까지 줄곧 남하하는 길이다.

예로부터 이 길은 동서남북 교통로의 중심 교차점에 자리하여 동서문명의 교류와 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기원전 2000년경 아리아인들을 비롯해 후세의 알렉산드로스나 티무르(Timūr) 등 외래인들의 인도 침입은 모두 이 길을 통해 자행되었다. 
불교는 이 길을 따라 북상한 다음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북아시아에 전파되었으며, 법현()과 현장() 같은 구법승들이 이 길로 천축(, 인도)에 가서 수도 · 성불하였다.

메소포타미아로: 
흑해와 카스피해 중간지대에 있는 코카서스(Caucasus, 일명 캅카스(Kavkaz))의 북부를 기점으로 하여 트빌리시(Tbilisi)와 타브리즈(Tabriz)를 경유해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따라 바그다드와 그 이남에 펼쳐진 메소포타미아를 관통한 후 페르시아만의 바스라(al-Basrah)까지 이르는 길이다. 
일찍이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개화한 지대를 지나는 이 길은 수메르 문화 · 바빌론 문화 · 페르시아 문화 · 이슬람 문화 등 고대문화를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호박로(): 
이 길은 북유럽의 발트해에서 시작해 러시아의 모스크바와 키예프를 거쳐 유럽과 아시아 대륙의 접지()인 터키의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과 에페수스(Ephesus)를 지나 지중해 연안을 따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까지 남하하는 길이다. 
이 길에는 유럽의 라인강에서부터 헝가리아의 부다페스트를 지나 콘스탄티노플로 이어지는 지선과 발트해에서 부다페스트와 로마를 지나 알렉산드리아까지 연결되는 지선이 포함된다. 
이 길은 일찍이 페니키아 시대부터 유럽산 호박(amber)의 교역로였다.

이상과 같이 동서남북으로 거미줄처럼 뻗어간 교통망을 통해 동서문명은 종횡무진으로 교류되어왔다. 
이 여러 갈래의 간선과 지선으로 이루어진 교통망을 통틀어 실크로드라는 하나의 상징적인 아칭()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옛날 로마인들은 동쪽 어딘가에 황금 섬(중국)이 있다고 믿었고, 중국 또한 서역에 대해 항상 궁금해 했다. 
정작 동양과 서양은 BC 100년까지도 서로 간에 교류가 없었다. 
이러한 교류를 가로막고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타클라마칸 사막과 파미르 고원과 같은 자연 장애물과 이슬람인들의 방해 때문이다.

실크로드가 처음 열린 것은 전한(BC 206~AD 25) 때이다. 
한 무제()는 대월지(), 오손()과 같은 나라와 연합하여 중국 북방 변경 지대를 위협하고 있던 흉노를 제압하고 서아시아로 통하는 교통로를 확보하길 원했다. 
BC 139년 장건()은 100여 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장안을 떠났지만 얼마 가지 못해 흉노에게 붙잡히고 만다. 
그는 그곳에서 약 10년 동안 허송세월을 보낸다.

어느 날 통역인 깐후()와 탈출하여 파미르 고원 너머에 있는 페르가나(Fergana)국을 거쳐 당초 목적지인 대월지국()에 도착하였다. 
많은 세월이 흘러 대월지국은 동맹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대월지국에 머무는 1년 동안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한 후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장건이 서역으로 갈 때는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 길을 이용했지만 돌아 올 때는 그 남쪽 길을 택했다. 
도중에 티베트족에게 붙잡혀 1년 동안 고생하기도 했지만 BC 126년에 돌아왔다. 
대월지국과 동맹을 맺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의 경험과 자료가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한 무제는 치하 했다고 한다.

실크로드"
중국과 서역 간의 교통로인 실크로드는 육로뿐만 아니라 바다의 실크로드도 있었다. 
나중에는 여러 갈래의 실크로드가 개발되어 동서양 간의 물류 교역뿐만 아니라 문화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한 무제는 장건의 귀국 보고를 아주 흥미롭게 생각하였다. 
서역에는 명마가 있고, 금은전을 사용하는 나라가 있고, 중국(한)의 특산품인 칠기와 비단을 사고 싶어 하는 나라도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월지, 강거, 오손 등 군사력이 강한 유목 민족들을 흡수해서 한나라를 세계의 강국으로 끌어 올리고 싶어 했다. 
당시 중국과 서역 사이에 낀 간쑤성()은 흉노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장건은 그들을 피해 쓰촨성(), 윈난성()을 거쳐 인도로 가는 길을 개척하고자 했다. 
부하들을 여러 차례 보냈지만 모두가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장건은 흉노족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오손을 이주시키려고 직접 부하 300명을 이끌고 오손(wuson)으로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나라로 돌아 온 장건은 이듬해인 BC 114년에 죽고 말았다.

한 무제는 BC 104년부터 101년까지 페르가나국에 군사를 보내어 왕의 목을 치고, 남북실크로드의 중요한 길목에 자리한 누란()도 정복하였다. 
마침내 BC 60년에는 흉노마저 굴복시킴으로서 서역을 완전히 손에 넣게 되었다. 
이때부터 중국의 비단은 본격적으로 로마까지 팔려 나갔다.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기린, 사자와 같은 진귀한 동물과 호마(: 말), 호두, 후추, 호마(: 깨) 등이 전해졌고, 유리 만드는 기술도 전해졌다.

중국에서는 비단, 칠기, 도자기같은 물품과 양잠, 화약 기술, 제지 기술 등이 서역으로 건너갔는데, 특히 종이 만드는 기술이 서역으로 건너가서 중세 유럽의 암흑기를 밝혀 인쇄술 발달과 지식 보급에 원동력이 되었다. 
이후 둔황()을 비롯한 4군데에 요새를 세워 장사 길을 보호했는데, 이때부터 서역으로 통하는 실크로드가 훤히 뚫렸으며 1년에 5~10번씩 장사꾼들이 오갔다.

장건이 서역을 처음 개척한 이래 중국의 역대 왕조는 중앙아시아 및 서아시아 여러 나라와 빈번히 교류하였다. 
실크로드는 상업적인 면뿐만 아니라 동서 문화의 교류라는 면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많은 스님들이 경전을 구하러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로 들어갔고, 인도의 승려들도 경전을 가지고 중국에 많이 들어왔다. 
중국 불교가 발전하게 된 데에는 인도와 중국을 연결시켜준 실크로드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실크로드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당대(: 618~907)였는데, 현재는 파키스탄과 중국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를 잇는 포장도로에 일부 남아 있다고 한다.

비단길

한나라 때 처음 개척된 동서 무역로. 아시아와 중국, 지중해를 연결하는 무역 육로로 중국의 비단이 서방으로 운반되었기 때문에 비단길(실크로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비단길을 통해서 불교와 간다라 미술이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역사상 가장 먼저 사용된 길로 기원전 9세기부터 2세기까지 흑해의 동북부에서 몽골에 이르는 북위 50도를 가로지르는 무역로이다. 
이 길을 통하여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은 스키타이 금속문화가 몽골을 거쳐 북중국에 전파되었다. 
몽골지방에 금속문화를 전달함으로써 몽골의 기마전술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길은 동시에 민족이동의 길이기도 하였다. 
이 길은 비단길이 열림과 동시에 그 중요성이 감소되었다.



비단길(사막길)

기원전 139~126년간 한무제가 파견한 장건이 개척된 길이다. 
북위 40도를 따라 천산로에서 중앙사이아의 오아시스 지대를 지나 바그다드를 거쳐 지중해에 이르는 대상들의 활동로이기도 하다. 
헬레니즘 및 이란계 문물도 이 길을 통해 전래되었으며 중국은 알라비아의 말, 각종 보석, 호도, 포도, 모피 등을 수입하였다. 
서양음악과 불교와 간다라미술도 이 길을 통하여 중국에 전래되었다. 
중국의 비단, 차, 도자기, 제지술 등이 이 길을 통하여 서양에 전달되었다. 
많은 도래승과 구법승이 이 길을 이용하였다. 
원대에는 군사 도로로도 사용되었으며 중국의 혼란기에는 이 지역을 통한 동서간의 왕래가 침체되기도 하였으나 항상 부분적으로 이용되었다. 
이 길 중간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는 중계무역으로 번영하였다. 
이란계 소그드 인을 중심으로 하는 대상인이 무역의 주역이었다.

비단길은 사막길이라고도 해요. 
사막을 따라 이어져 나가기 때문이지요. 
중국 한나라의 수도 장안에서 출발하여 비단길을 따라가면 지중해까지 이를 수 있었어요. 
이 길을 통해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지면 거두는 이익이 엄청났지요. 
비단길을 차지하고 있던 나라들은 비단길을 보호하며 상업을 장려했어요.
신라의 황남대총이나 가야의 왕릉급 고분에서 로마의 아름다운 유리 제품들이 발굴된 적이 있어요. 
이 물건들도 비단길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거예요. 
비단길은 8세기 이후 이슬람 제국의 아바스 왕조의 보호를 받아 대상 무역으로 번성했지요.
 대상이란 사막이나 초원을 낙타나 말을 타고 가로지르며 각 지역의 특산물을 사고파는 상인들이랍니다.


초원길

중국의 만리 장성 이북, 몽골 고원에서 알타이 산맥과 중가리아 초원을 거쳐 카스피 해에 이르는 초원길은 기원전 6, 7세기경 기마 민족인 스키타이가 이 길을 따라 활약한 뒤 본격적인 동서 교통로가 되었다. 
뒤  진 · 한 시대의 흉노남북조 시대의 선비 · 유연, 수 · 당 시대의 돌궐 · 위구르, 송대의 거란 · 몽골 족 등 북아시아 유목 민족들은 모두 이 길을 따라 정복과 교역에 종사하면서 동서 문물의 교류에 크게 기여하였다.
중국 베이징에서부터 몽골 고원을 거쳐 흑해 북쪽까지 연결된 길. 스텝로라고도 불린다. 
고대의 스키타이족이 청동기 문화와 기마술을 전하고, 흉노족 · 돌궐족 등이 유럽 쪽으로 이동한 길이기도 하다. 
몽고의 바투(칭기즈 칸의 손자)도 초원길을 통해 유럽 원정을 하였다.

신라의 황남대총이나 가야의 왕릉급 고분에서 로마의 아름다운 유리 제품들이 발굴된 적이 있어요. 

이 물건들도 비단길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거예요. 

비단길은 8세기 이후 이슬람 제국의 아바스 왕조의 보호를 받아 대상 무역으로 번성했지요. 

대상이란 사막이나 초원을 낙타나 말을 타고 가로지르며 각 지역의 특산물을 사고파는 상인들이랍니다.


바닷길

해상로 사용은 중국인들보다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 의한 경우가 많았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양자강 유역의 월인이 남방의 진주, 상아, 물소뿔 등을 중국에 들여왔다. 
중국은 진한시대에 비로소 본격적으로 남방에 세력을 미치지만 해상엔 저조한 편이었다. 
그 후에 조금 활성화되었지만 명대의 해금령 (바다무역을 금지한 법령)으로 다시 침잠하였다. 
이 해상로는 당·송·원대에 사라센인의 활동으로 페르시아만에서 중국의 동남해안에 이르는 본격적인 해상무역시대가 열리면서 그 이용이 활발해졌다. 
사라센인은 그들의 이슬람교, 과학기술, 향료 등을 중국에 전하고 중국의 비단, 차, 자기, 인쇄술 등을 가져갔다. 
많은 사라센 상인은 광주와 천주 등에 번방이란 특별거주지를 형성할 정도였다. 
18세기 말 부터는 문화교류보다는 제국주의 침략의 길로 사용되어, 중국도 결국 이 길을 통하여 들어온 영국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확장 개념

2세기 경 중국에서 발명된 제지술은 8세기 탈라스 전투를 계기로 이슬람 세계에 전해졌다. 
탈라스 전투 때 포로가 된 중국인 중에 제지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제지술이 유럽에 전파된 것은 12세기 경 이슬람의 지배를 받고 있던 에스파냐 지역이 처음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양피지로 책을 만들었으나, 매우 비싸고 무겁다는 불편함이 있었다. 
제지술의 유럽전파는 이 지역의 문화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바닷길은 중국 남부에서 시작되어 멀리 지중해와 아프리카 동부 연안까지 연결되었어요. 
이 길을 통해 동남아시아의 향신료가 유럽에 전해져 비싸게 팔렸지요. 
8세기 이후 바닷길에서는 아라비아 상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졌어요. 
이들은 중국은 물론 신라의 울산항이나 고려의 벽란도까지 들어왔지요. 
울산항이나 벽란도는 신라나 고려에서 가장 큰 무역항이었지요.

아라비아 상인들이 고려에서 가져가는 것은 인삼이었어요. 
인삼이 인기가 높아 고려도 ‘코리아(Corea)’라는 이름으로 서양에 알려지게 되었지요. 
바닷길을 통해 상좌부 불교(규범을 지키는 일과 개인의 해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불교의 한 갈래)가 아시아에 널리 퍼지고, 아라비아의 지리학, 천문학, 수학, 의학이 중국에 전해지기도 했답니다.

관련 지식

스키타이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초원 지대에서 활약했던 최초의 기마 유목 민족이다. 
스키타이족은 오리엔트·그리스의 금속 문화의 영향을 받아 무기·마구() 따위를 발달시켜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였으나, 후에 사르마트 인에게 쫓겨 쇠퇴하였다.

장건

중국 전한() 때의 외교가(?~B. C.114)이며 자는 자문()이다.
장건은 인도 통로를 개척하고, 서역의 정보를 가져와 동서의 교통과 문화 교류의 길을 개척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번방

당()·송()시대 설치한 외국인 거류지이다. 
번방은 성 안에 두지 않고, 주로 통상()에 편리한 성 밖에 설치하였다. 
번방에는 번장()이나·도번장() 등이 사무를 관장하여 번상()을 해외로부터 불러들였다. 
번장은 외국인 거류민 중에서 덕망이 높은 사람을 뽑아 정부가 임명하였으며, 가벼운 범죄에 대한 재판권이 위임되었기 때문에 일종의 치외법권적인 존재와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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