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3
중국의 베트남 정복,
베트남, 중국에게 천 년의 지배를 받다
중국 한나라의 세력이 안정되면서 남월을 군현으로 통합시키려는 중국과 남월 사이의 긴장관계가 계속되었다.
어우락 왕국이 멸망하고 남월(남비엣)이 세워지다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제일 큰 나라이며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이다. 일찍이 우리나라의 고조선 같은 반랑국이 있었다.
단군과 같은 시조가 흥 브엉(雄王)이다.
건국 신화에 의하면, 흥 브엉의 아버지 락 롱꿘은 용의 종족이고 어머니 어우 꺼는 산의 종족이다.
어우 꺼가 낳은 커다란 알 속에서 아들이 100명이 나왔다.
락 롱꿘 어우 꺼가 각기 50명 씩 데리고 바다와 산으로 떠났는데 어우 꺼를 따라 산으로 간 아들 중 가장 강한 자가 흥 브엉이었다.
광동에서 북부 베트남에 이르는 지역에 어우락 왕국이 일어나, 기원전 275년 베트남 최초의 국가였던 반랑국을 멸망시켰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양자강 이남지역에 3개의 군을 세웠는데 그중 이 지역에 세운 것이 남해군이었다.
남해군의 용천현령이었던 중국 관리 출신 조타(趙佗, 찌에우 다)가 진말 한초의 혼란기에 월족의 지지를 바탕으로 기원전 203년 남월을 세우고 어우락 왕국을 멸망시켰다.
한무제의 침략, 천 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다
남비엣, 즉 남월(南越)에서 베트남의 이름이 유래한다.
남월의 건국자인 조타는 중국 관리에서 시작하였지만, 비엣족의 토착문화에 익숙하고 자신을 현지인들과 동일시하면서 중국의 한나라와 대립하였기 때문에 베트남인들은 조타를 중국의 침략에 대항한 위대한 황제로 여긴다.
한나라의 세력이 안정되어가면서 중국의 군현으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는 속에서 조타가 죽었다.
남월 내부에서는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입하기 위해 조공을 하려던 왕이 제거되는 등 내란이 일어나고 중국과의 긴장관계가 계속되었다.
남월은 농경과 해상 무역을 통해 성장하여 한과 대결하였다.
한무제는 남쪽 변방을 안정시키고 물소 뿔, 상아 같은 남방의 산물을 얻기 위해 남월을 침략했다.
5대 국왕 조건덕은 한무제의 침략에 맞서 싸웠으나 이듬해인 기원전 111년에 중국에 정복당하고 말았다.
5대 93년만이었다.
이 무렵 고조선도 멸망했다.
이후 베트남은 10세기까지 약 천 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당나라 때 안남도호부에 속해 있었기에 '안남'이라고 불렸다.
당나라 멸망 후 5대 10국의 분열기를 맞아 다시 독립을 도모하여 939년 토착세력인 응오꾸엔(吳權)이 응오(吳)왕조 수립에 성공했다.
베트남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베트남인에 의한 국가가 수립된 것이다.
이후 딩, 레(黎) 왕조로 이어졌다.
송군을 몰아낸 베트남, 중국과 조공관계를 맺다
975년 송나라는 내분으로 왕이 살해된 것을 빌미로 레(黎) 왕조의 베트남을 침공했다. 베트남은 수륙 양면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송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중국의 침입을 저지시켰다.
대립관계를 지속시키기는 어려웠던 베트남은 이듬해 사절단을 파견하고 중국과의 조공관계에 들어가게 된다.
이듬해 베트남은 사절단을 파견하고 중국과의 조공관계에 들어가게 된다.
송나라 왕안석이 다시 베트남 침공 계획을 수립하던 중, 낌새를 알아챈 베트남이 역습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베트남은 레 왕조를 이어 리꽁우언이 1009년에 세운 리(李) 왕조 시기였다.
1054년 국호를 대월(大越)로 정한 베트남은 송의 남쪽 국경지역을 공격하여 상당한 지역을 빼앗고 10만여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아갔다.
일격을 당한 송은 그에 대한 앙갚음으로 반격을 가했으나 베트남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송군을 격퇴한 후 다시 베트남은 조공관계를 회복했다.
원의 침략을 극복하고 조공관계를 회복하다
원의 세조 쿠빌라이는 남쪽의 참파국을 치겠다며 길을 터줄 것을 요구했다.
쩐 왕조가 이를 거절하자 원은 세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했다.
원은 모두 수도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왕을 사로잡지도 못하고 끝까지 저항하는 월남인들을 제압하지도 못한 채 철수해야 했다.
이때의 베트남의 민족 영웅이 쩐흥다오다.
그는 하노이까지 함락되었던 2차 침입 때 격장사라는 유명한 글로 사기를 북돋아 전세를 반전시켰으며, 3차 침입 때에는 유명한 바치당강(백등강) 전투에서 만조를 이용해 몽골군을 끌어들였다가 간조 때 적군을 궤멸시켜 대승을 이루었다.
몽골의 침입을 물리친 이후 쩐 왕조는 곧바로 원과의 조공관계를 회복했다.
이렇게 베트남은 중국의 침략에 단호하게 대응하여 그들을 격퇴한 다음, 불리하지 않은 조건에서 조공관계를 열어 그들의 독립성을 확보하면서 평화를 유지했다.
영락제 사후, 레 왕조가 수립되다
명의 영락제 시기에 베트남에서는 정변이 일어나 진씨 왕조가 무너지고 호씨 왕조가 들어섰다.
명은 이를 징벌한다는 명분으로 1407년 베트남을 침공하여 약 20년간 지배하였다.
이후에도 저항이 계속되다가 영락제 사후, 레 러이(黎利)를 중심으로 10년에 걸친 저항 끝에 1428년 드디어 레 왕조(後 黎朝)를 수립했다.
레 왕조는 1788년까지 베트남 역사에서 가장 수명이 긴 왕조로, 베트남의 민족 문화가 융성하였다.
레 러이베트남의 명나라의 식민지가 되자 저항운동을 이끌어 레 왕조를 수립한 초대 황제.
4대 타인똥(聖宗)은 역사상 보기 드문 안정과 번영을 이끌었다.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당율을 근간으로 베트남 고유의 관습법을 반영한 베트남 최고의 성문법 〈국조형률〉을 만들어,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실현하고, 오랜 경쟁자였던 남쪽의 참파를 무너뜨렸다.
청나라의 공격을 격파, 마지막 왕조를 세우다
16세기 후반 막씨의 권력 찬탈 이후 찐(鄭)씨, 응우옌(阮)씨가 남북으로 2세기 이상 대립했다.
오랜 대립과 전란으로 농촌이 황폐해졌고 1771년 대규모 농민봉기인 떠이썬(西山) 봉기로 찐가와 응우옌가가 모두 무너지고 명목뿐인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레 왕조가 청을 끌어들여 청나라가 베트남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베트남인들은 단결하여 20만의 청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청군을 물리친 응우옌 후에가 1788년 떠이썬 왕조를 잠시 세웠으나 응우옌푹아인이 프랑스 세력을 업고 떠이썬 군을 물리친 후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완씨 왕조, 1802~1945년)를 열었다.
이때 오늘날과 비슷한 베트남의 영토를 확보하였으며 국호를 비엣남(越南)이라 하였다. 우리나라는 이를 베트남이라고 발음한다.
고난을 극복하고 통일 국가를 이루다
19세기에 접어들어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로 개척하려는 서양 세력의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1884년 베트남은 결국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이후 20세기 중반까지의 베트남의 역사는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벗어나려는 저항으로 점철되었다.
이후로도 2차 대전 막바지에 있었던 일본의 침공, 전후 프랑스의 지배야욕, 미국의 개입과 내전이라는 고난의 시기를 극복하고 1975년 마침내 통일 국가를 이루었다.
베트남의 역사는 오랜 세월 동안 외세의 침략에 던져졌으나, 끈질기게 이를 극복해 낸 베트남 국민들에게 찬탄을 금할 수 없게 하는 그 어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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