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論介)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의기(義妓)로 알려진 기생.
진주목(晉州牧)의 관기(官妓)로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중 진주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될 때 왜장을 유인하여 순국한 의기(義妓)이다.
이곳 진주성에서는 임진왜란 때 두 번에 걸쳐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 가운데 1차 전투가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손꼽히는 진주성싸움이다.
1593년(선조 26)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 혹은 충청병사 황진(黃進)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는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위는 1779년(정조 3년) 진주 남강 변에 논개(論介, ? ~ 1593)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의기사(義妓祠)를 보수하면서 당대 뛰어난 학자였던 정약용이 쓴 추모 시이다.논개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함락시킨 왜장을 끌어안고 함께 진주 남강에 투신하여 전공을 세운 의로운 기생(the Kisaeng) 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죽음이 전쟁의 혼란 속에서 그 직후 바로 기록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출신과 삶, 그녀가 죽인 왜장의 이름 등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유몽인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미처 그 의로운 죽음이 기록되지 못하고 신분상의 문제로 나라로부터 보상을 받지 못한 논개에게 측은함을 느껴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자신의 문집에 실었다.
논개(論介)는 진주 관기(官妓)였다.
계사년(癸巳年)에 김천일(金千溢)이 의병을 일으켜 진주를 근거지로 왜병과 싸우다가, 마침내 성은 함락되고 군사는 패하고 백성은 모두 죽었다.
이때, 논개는 분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矗石樓) 아래 가파른 바위 꼭대기에 서 있었으니, 아래는 만 길 낭떠러지였다.
출처: 대한민국 구석구석
사람의 혼이라도 삼킬 듯 파도가 넘실거렸다.
왜병들은 멀리서 바라보며 침을 삼켰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왜장 하나가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며 곧장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가? 논개는 요염한 웃음을 흘리면서 왜장을 맞았다.
왜장의 손이 그녀의 몸을 잡자, 논개는 힘껏 왜장을 끌어안는가 싶더니 마침내 몸을 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던졌다.</blockquote> 둘은 모두 죽고 말았다.
임진란을 당하여 관기의 경우, 왜놈에게 욕을 당하지 않고 죽은 이가 어찌 논개 한 사람에 그치겠는가? 이름도 없이 죽어 간 여인들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는 것이 한이다.
관기라 하여 왜적에게 욕을 당하지 않고 목숨을 끊었다고 할지라도 정렬(貞烈)이라 칭할 수 없으니 어찌하랴.
그런 도랑물 같은 신세로서도 또한 성화(聖火)할 수 있는 정신이 있었으니, 나라를 등지고 왜적에게 몸을 바치는 것을 차마 하지 못하였다면 그것을 충(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유몽인은 나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논개의 공이 안타까워 이런 글을 썼지만 이로 인해 논개는 오랫동안 그녀의 삶 자체가 묻힌 채 진주의 관기라고만 알려져 있었다.
17세기 전반까지 논개는 나라로부터 그 공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진주에서는 그녀를 기리는 제사가 해마다 남강 변에서 일반 백성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그녀가 왜장을 안고 떨어졌던 남강의 바위에 의로운 바위라는 뜻으로 의암이라는 글씨를 새겨 넣었다.
이를 보면 당시 진주성 백성들은 진주성 함락 후, 완전히 절망상태에 빠졌던 상황에서 여인의 몸으로 목숨을 바쳐 왜장을 죽인 그녀의 복수에 통쾌함을 느끼고 승리의 희망 속에서 다시 한번 일어설 수 있었던 것 같다.
희망을 가지고 결국 왜적을 내몰 수 있는 기운을 준 논개에게 감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논개에 대한 국가적 보상은 18세기 초 경종대에 가서야 가까스로 이루어졌다.
진주성민의 요청을 받은 경상우병사 최진한이 비변사에 건의하여 논개를 기리고 그 자손들에게 포상을 하려 한 것이다.
이미 1세기가 넘은 상황에서 논개의 자취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경상우병영에서는 경상도 일대에 관문을 띄워 수소문했지만, 논개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결국 나라에서는 의암사적비를 세워 그녀의 순국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녀를 의로운 기생이라 하여 의기(義妓)로 부르기로 하였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739년에는 경상우병사 남덕하의 노력으로 논개를 기리는 사당인 의기사가 의암부근에 세워지고, 논개에 대한 추모제가 매년 나라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러졌다.
의기사는 그 뒤 홍화보 등이 여러 차례 보수하여 지금까지 촉석루 옆에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정약용이 논개를 기리는 시를 쓴 것은 정조 초의 일이었다. 근 2세기 간 기생으로 알려졌던 논개는 그간 그 자취를 찾으려는 노력의 결과로 19세기 들어서 출생이나 성장 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 중 논개가 2차 진주싸움에서 장렬히 전사한 최경회(崔慶會, 1532~1593)의 첩이었다는 의견이 가장 유력하다.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최경회의 삶을 기리는 [일휴당실기]에 논개로 추정되는 인물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공의 부실(副室)이 공이 죽던 날 좋은 옷을 입고 강가 바위에서 거닐다가 적장을 유인해 끌어안고 죽어 지금까지 사람들은 의암이라고 부른다.</blockquote>
부실이란 정실 부인이 아닌 첩을 뜻한다.
이 기록에 근거하여 사람들은 최경회의 첩이었던 여인을 조사하게 되었고 이는 [호남절의록], [호남상강], [동감강목] 등에서 고증과 민간에 떠도는 구전까지 포함하여 기록하면서 대략 논개라는 인물의 가계와 일생이 재구성되게 되었다.
최경회의 첩을 논개라고 상정하고 보면 그녀의 삶과 가계는 대개 이러하였다.
논개의 성은 주씨이며 전라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을에서 훈장을 하던 주달문, 어머니는 밀양박씨이다.
나름 양반가의 딸이었던 것이다.
논개가 5세 되던 해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는 딸과 자신의 생계를 시동생 주달무에게 의탁한다.
주달무는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논개를 마을부자이던 김풍헌의 집에 민며느리로 팔아먹고 달아났다. 딸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논개의 어머니는 친정으로 도망을 갔다.
돈을 낸 김풍헌은 논개 모녀를 관아에 고발하였고 이들의 재판을 맡은 것이 당시 장수 현감이던 최경회였다.
최경회는 논개 모녀의 딱한 사정을 듣고 무죄방면했으며 모녀가 살 길이 막연하자 관아에서 잔심부름하며 살게 하였다. 최경회는 해주최씨로 전라도 능주 사람이었다. 양응정, 기대승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567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장성한 논개는 최경회의 첩으로 들어갔고 이윽고 임진왜란이 터지자 전라도 지역에서 의병장이 된 최경회를 뒷바라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차 진주성싸움에서 혁혁한 공을 쌓아 경상도우병사가 된 최경회를 따라 진주로 가게 되었다. 당시 전황에서 진주성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진 성이었다.
진주성 촉석루,
##남강가에 자리잡고 있는 아름다운 진주성은 임진왜란 때 왜적의 호남 진출을 철통같이 막아낸 성이다.
진주는 왜병들이 많이 주둔해있던 경상도의 주요성일 뿐만 아니라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넘어가는 관문에 위치하고 있었다.
진주성은 일본입장에서는 꼭 차지하고 싶은 성이었고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내어주면 안 되는 성이었다.
1592년 10월 왜군의 1차 진주성 공격은 김시민(金時敏, 1554~1592)을 중심으로 관군과 민간인, 의병들까지 합세해 이를 물리쳤다.
이를 진주대첩이라고 부른다.
조선에 들어와 매 전투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던 왜군으로서는 진주에서의 패배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들은 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를 만회하고 호남으로 통하는 관문을 확보하기 위해 집요하게 진주성 공략을 준비하였다.
1593년 7월 조선에 나와 있는 거의 모든 일본군을 동원한 10만 병력과 800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함안, 반성, 의령을 차례로 점령하고 진주성 공격에 다시 나섰다.
임진왜란 때 사용했던 무기를 재현해놓았다.
이때 조선의 중앙정부는 명나라 군이 진주성을 지키는 원병을 보내주지 않기로 하자, 진주를 포기하라고 명령하였다.
1차 진주성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던 의병들과 민간인들은 다시 한번 똘똘 뭉쳐 왜군의 공격을 막았다.
전투는 7일간 계속되었고 그 와중에 많은 지휘관들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진주성은 7월 29일 왜군의 거대한 병력이 휩쓸고 들어와 함락되고 말았다. 성이 함락되던 날 논개의 남자였던 최경회는 김천일 등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성에 진입한 일본군은 보복이라도 하듯이 성안의 민간인과 살아 있는 동물을 모두 학살하고 주변을 약탈했다. 왜장들은 승리에 도취되어 남강 변 촉석루에서 술판을 벌였다. 이때 논개는 관기들 틈에 끼어들었다.
논개는 술에 취한 왜장 중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내어 남강의 바위 위에 올랐다.
그를 안고 그대로 강물에 투신하였다. 논개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왜장을 죽인 후, 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거기에다가 왜군도 7일간의 전투 동안 진주성 백성들의 끈질긴 저항에 큰 손실을보아 진주에 계속 점령할 힘이 모자랐다.
그들은 어렵게 진주성을 차지했지만 병력손실이 커,주변 지역 약탈에 그쳤을 뿐 전라도 지역으로 진격하지도 못했고, 조선군이 거점을 부산 방향으로 옮겨가자 이를 막아내느라 서둘러 진주에서 떠났다. 그렇다면 논개가 물에 함께 빠져 죽은 왜장은 누구일까?
1960년대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그 장수가 게야무라 로쿠스케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게야무라 로쿠스케는 농민 출신으로 카토 키요마사에게 발탁되어 사무라이가 된 자로서 사무라이가 된 후 이름을 기다 마고베(木田孫兵衛)로 바꾸었다.
그는 카토 키요마사의 중요한 부장 중 한 명으로 임진왜란 때 철포 부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그를 소재로 한 가부키가 있을 정도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인데 조선으로 건너왔다가 함경도에서 죽었다고도 전해지고 일본으로 돌아가 62세에 죽었다는 설도 있다.
게야무라 로쿠스케에 대한 기록이 가토 키유마사의 함경도 진출 후에도 계속 나오다가 2차 진주성싸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기록 후, 그의 이름이 기록에서 사라지는 점,
일본에 있는 그의 무덤이 가부키의 소재가 된 이후 조성되었다는 점,
그의 죽음에 대한 한 이야기로 조선에서 한 여성의 복수로 죽었다는 것이 있어 논개가 함께 죽은 왜장은 게야무라 로쿠스케 일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하여 20세기 들어와 일본의 어느 건축가가 자신의 땅에서 발견한 게야무라 로쿠스케에 관한 비석에 근거하여 논개의 영정을 모셔가 함께 전시하는 어이없는 일을 벌이기도 하였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논개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 하나 그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그녀의 신분이 번듯한 가문의 아녀자가 아니고 기생이라고 전해지면서 의도적으로 무시당하고 외면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주의 일반 백성들은 그녀를 기억하고 자발적으로 기리고 있었다.
논개가 기생이었든 아니었든, 그녀가 죽인 왜장이 왜군의 병력에 손실을 줄 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는지 아닌지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위정자의 역사기록이 그녀를 외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민간에 살아남아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논개의 죽음이 전쟁의 고통 속에서 허덕이던 일반 백성들에게 전쟁의 극복이라는 희망을 안겨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약하고 미천한 위치에 있던 한 여인의 결연한 행동으로, 임진왜란 시기 백성들은 위안과 위로 속에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중이었던 1593년 6월 김천일, 황진, 최경회, 고종후 등 관군과 의병의 결사적인 항전에도 불구하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 ,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600] 등이 이끄는 일본군에게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유몽인의 『어우야담 (於于野談)』 인륜편의 ‘효열’ 대목의 기록에 따르면,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과 백성이 모조리 죽자, 논개는 구국의 일념으로 원수를 갚기로 결심하였다.
진주성 촉석루,
논개는 곱게 단장하고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베푸는 자리에 나아가 술에 만취해 접근하는 왜장을 남강으로 유인한 뒤, 왜장을 껴안고 남강 물에 투신하여 죽었다.
이때부터 의기 논개가 강물에 떨어졌던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 방지마을에 있다는 묘가 논개의 실묘라고 구전으로 전해지지만 역사적인 근거는 없다. 진주성이 왜적에게 짓밟힐 때 진주목 관기로서 적장을 유인하여 남강 물에 빠져 순국한 사실은 성민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유포되기 시작하였다.
논개의 순국 사실이 문헌이나 금석문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620년경부터로 추정된다.
당시 관기로 사회의 멸시를 받던 기녀의 신분이지만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논개의 충절어린 죽음에 감동한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어우야담』에 논개를 진주의 관기라고 채록한 것이 남아 있는 최초의 기록이다.
진주 사민들이 논개의 애국적 행위를 기리고 전하기 위해 논개가 왜장을 안고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은 것도 이 무렵이다.
진주성민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강변에 제단을 차리고 의혼을 위로하는 한편 국가적인 추모제가 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했다.
이같은 요청을 받은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은 1721년(경종 1)에 기녀의 신분으로 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논개의 의열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했고, 이때 거론된 구체적인 포상 방법은 봉작(封爵)을 내려주고 사당(祠堂)을 건립해 주는 것이었다.
최진한의 건의를 받은 비변사는 보다 확실한 인증 자료의 제시를 요구하기에 이르러 이에 최진한은 관민 합동으로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를 건립하고 그 인본을 제출하여 자손의 급복(給復)에 대한 특전을 허락 받았다.
이는 진주 성민들의 숙원이었던 논개에 대한 봉작과 건사사액(建祠賜額)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논개의 순국 사실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계기가 됐으며 논개를 공식적으로 ‘의기(義妓)’라 지칭하는 계기가 됐다.
논개의 자손에 대한 급복의 특전이 베풀어진 20년 뒤에 의혼을 봉안하는 사당이 건립됐다.
1740년(영조 16)경에 경사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의기사(義妓祠)가 의암(義岩) 부근에 세워지고, 논개에 대한 추모제가 매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치러짐으로써 국가의 공식적인 절차가 마무리 되었다.
1868년(고종 5)에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의 노력으로 매년 6월에 300여 명의 기녀가 모여 가무를 곁들여 3일 간 치제하는 추모 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기도 했다.
의암별제는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의식 절차만이 교방가요(敎坊歌謠)에 전해지고 있었는데 지난 2000년부터 의암별제가 부활돼 진주성을 중심으로 3일 간 열리고 있다.
논개의 사실을 최초로 기록한 유몽인의 『어우야담』은 임진왜란 후 쑥대밭이 된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을 돌아본 뒤 저술된 한국 최초의 야담집이다.
논개가 순국하던 1593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광해군의 교육을 맡고 있다가 그해 가을 광해군을 모시고 수원, 전주, 진주 등 현장으로 다니며 직접 목격한 백성들의 참혹상을 기록하고 그 자료를 수집하게 된다.
유몽인은 삼도순안어사(三都巡安御使)로 왜적이 휩쓸고 간 곳곳을 살피고 사실을 기록하여 세자에게 전했다. 이처럼 유몽인의 기록은 현장에서 눈으로 보고 적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논개에 대한 유몽인의 기록 또한 이런 점에서 사실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1922년『신생활(新生活)』 4월호에 발표되었으며, 1923년 시집 『조선(朝鮮)의 마음』에 실렸다. 3연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왜장을 껴안고 남강의 푸른 물에 뛰어들어 순국한 의로운 기생 논개의 숭고한 정신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 시에서 맨 먼저 떠오르는 인상은 후렴구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 우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에서 보여주듯이, 푸른색의 대비로 나타난 ‘붉음’의 이미지이다.
이 ‘푸른’과 ‘붉음’의 대비 이외에도 분노와 정열(제1연), 아미(娥眉)와 입술(제2연), 강물과 붉은 혼(제3연) 등의 대비로 형성되어 있다.
“논개에게 얽힌 민족적 정서의 감분(感奮)과 그 수사적·기교적 배려로 그 내적인 연소와 외적 형태의 균형을 얻었다.”고 한 박두진(朴斗鎭)의 말과 같이, 논개의 숭고한 의분은 자칫 웅변적으로 흐르기 쉬운데 이 시는 적절한 비유어와 율조(律調)로 정감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물결’과 ‘마음’이 ‘푸른’이나 ‘붉음’과 이어지면서 충절의 표상인 ‘단성(丹誠 : 마음속에서 우러난 뜨거운 정성)’으로 상징되기도 한다. 규칙적인 반복의 율조와 형상화의 단조로움은 있으나, 민족적 의분을 안으로 응결시킨 점이 크게 돋보인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情熱[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娥眉[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石榴[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江[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新生活[신생활]」, 1924...
작자의 초기 시에 나타난 ‘님’이나 ‘그대’의 상징성도 바로 이 논개의 숭고한 민족정신에 집약되고 있는 것이다.
종교나 사랑보다 더 깊고 강한 분노와 정열은 결국 논개를 죽음으로 이끌어 “흐르는 강물은/길이길이 푸르리니/그대의 꽃다운 혼/어이 아니 붉으랴!”라는 결구(結句)에 이르게 된다.
흐르는 강물이 영원히 푸르듯이, 논개의 조국에 바친 민족혼도 영원하리라는 것이다
이 시는 단순한 감정의 노정이나 영탄(詠嘆)이 아니고, 그러한 감정을 안으로 수렴하고 있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시적 기교의 완벽성을 보이고 있다.
시어 선택이나 반복의 효과까지 의도하여 정감에 호소하려 함은 시적 형상화에 있어서 크게 성공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스스로 희생을 내세운 논개의 정신적 가치를 상징화하고 그 상징화의 수법으로 정신의 상승적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후처. 임진왜란 때 최경회가 전사하자 일본군이 촉석루에서 벌이는 잔치에 참석해 일본군 장수 게야무라 로구스케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였다.
성은 주씨(朱氏)이고, 본관은 신안(新安:중국)이다. 전북 장수(長水) 임내면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데 출생일에 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논개에 대한 기록은 조선 광해군 때인 1621년 유몽인(柳夢寅)이 저술한《어우야담(於于野談)》에 전하는데 "진주의 관기이며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는 간단한 기록만 남아 전한다.
그때문에 논개는 기생이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 주달문이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자 장수현감이었던 최경회(崔慶會)의 후처가 되었다고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전라도 지역에서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자 최경회가 의병장으로 나서 싸우게 되었다.
경상도에서 진주성만이 남아 왜적과 싸우고 있었는데 최경회는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지원하여 승리를 거두었다(제1차 진주성 싸움).
1593년 최경회는 경상우병사로 임명되어 싸웠으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28일만에 진주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최경회는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제2차 진주성 싸움).
1593년 7월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가락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다. 956년 '논개사당(論介祠堂)'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라고 씌어 있다. 장수군에서는 매년 9월 9일에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논개제전(論介祭典)을 열고 있다.
변영로(卞榮魯)의 시.
논개의 애국적 절개를 노래한 초기의 작품으로 시집 《조선의 마음》에 수록되어 있다.
3연으로 된 이 자유시는 비유의 대상들을 한국 고유의 꽃과 열매로부터 가져와 한국의 미와 절조(節操)를 드러내고 있다.
"석류 속 같은 입술/죽음을 입맞추었네"와 같은 비유는 한국 여인의 아름다움과 꿋꿋한 의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민족의식을 세련된 기교로 노래한 이 시인의 대표작이다.
진주성이 왜적에게 짓밟힐 때 기녀로서 적장을 유인하여 남강(南江)에 빠져 산화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유포되었다. 구전되어오던 논개의 순국 사실이 문헌이나 금석문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620년경부터라고 추정된다.
사회의 멸시를 받던 기녀의 몸으로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충성심에 감동한 유몽인(柳夢寅)이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채록하여 문자화된 것이었다. 한편 진주 사람들이 논개의 애국적 행위를 기리고 전하기 위하여, 순국한 바위에 ‘義巖(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겨넣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일부 사대부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진주성민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강변에 제단을 차려 논개의 의혼(義魂)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국가적인 추모 제전이 거행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진주성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본성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 사적 제118호. 둘레 약 4, 000m. 1592∼3년 임진왜란 당시 왜적은 이 성을 포위하여 공격을 계속하였고, 김시민 김천일 등을 비롯한 진주성의 군관민들은 장렬한 항쟁을 전개하였다.
진주성민들의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은 경종 이후의 일이었다. 진주성민들은 절의(節義)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바친 논개의 의로운 행위를 정부가 마땅히 표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진주성민들의 요청을 받은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은 1721년(경종 1)에 기녀 신분으로 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논개의 의열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였다.
이때 거론된 구체적인 포상 방법은 봉작(封爵)을 내려주고 사당(祠堂)을 건립해주는 것이었다. 최진한의 건의를 받은 비변사는 보다 확실한 인증 자료를 요구하였다. 이에 최진한은 관민합동으로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를 건립하고, 그 인본을 제출하여 자손의 급복(給復)에 대한 특전을 허락받기에 이르렀다.
이는 진주 지역민들의 숙원인 논개에 대한 봉작과 사당을 세워 사액(賜額)을 받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가 논개의 순국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의기가 논개를 지칭하는 공식 호칭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논개 자손에 대한 급복의 특전이 베풀어진 20여 년 뒤, 의혼을 봉안하는 사당이 건립되었다.
1739년(영조 16)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의기사(義妓祠)가 의암 부근에 세워지고, 논개 추모제가 매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루어지면서 국가의 공식적인 포상 절차가 마무리된 것이었다. 의기사는 그 뒤 홍화보(洪和輔)·홍백순(洪百淳)·이지연(李止淵) 등이 여러 차례 보수하여 지금까지 촉석루(矗石樓) 옆에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868년(고종 5)에는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의 노력으로 매년 6월에 300여 명의 여기가 가무를 곁들여 3일간 치제하는 대규모 추모 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의암별제는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의식 절차만이 『교방가요(敎坊歌謠)』에 전해질 뿐이다.
19세기 이후 현재까지 논개의 출생이나 성장 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설이 제시되었다. 논개는 전라도장수 출신이며, 양반 가문 출신이고, 성은 주씨(朱氏)이며, 최경회(崔慶會) 혹은 황진(黃進)의 애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문헌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논개의 출신 성분에 대한 지나친 미화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논개를 추모하는 지역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중의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는 논개의 순국 사실이 누락되었다.
이는 유교 윤리에 젖은 일부 편집자들이 관기를 정렬(貞烈)로 표창함이 불가하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보수적인 집권 사대부들의 편견 때문에 논개의 애국 충정은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것이었다.
의기 논개가 공식적인 호칭이 된 때는 경종 1년(1721)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이 논개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여 그의 순국 사실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 이후이다.
이후 영조 16년(1740)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논개의 혼을 기리는 의기사(義妓祠)가 의암 부근에 처음 세워지고, 매년 논개추모제가 성대히 치러지게 되었다.
논개의 고향으로 알려진 곳은 덕유산 육십령을 넘기 전 전북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일명 장계) 주촌(朱村)마을이다. 이곳에 논개의 생가가 복원돼 있으며, 장수읍 두산리에 의암사(義巖祠)라는 논개사당과 논개의 수명비(竪名碑)가 세워져 있다.
논개의 묘는 경남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의 당산 뒤편 골짜기에 있다. 최근 사적지로 지정되어 묘역이 대대적으로 정화되었다.
장수와 함양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논개의 일생은 대략 다음과 같다.
열네 살 나던 해인 1587년, 아버지 주달문이 죽자 천하 건달인 숙부가 토호인 김풍헌에게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고 행방을 감추었다. 이 사실을 안 논개 모녀가 외가인 안의의 봉정마을로 피신하였는데, 김풍헌이 당시 장수현감인 최경회에게 이를 알려 심문을 받게 하였다.
논개 모녀로부터 전말을 들은 최경회는 이들을 무죄로 인정하고, 관아에 머물며 병약한 최씨 부인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논개의 재색에 감탄한 현감 부인이 최경회에게 논개를 소실로 맞이할 것을 권유한 뒤 지병으로 숨을 거둔다.
이렇게 해서 논개가 18세 되던 해 1591년 봄, 최경회와 부부의 인연을 맺고 무장현감으로 부임하는 최경회를 따라 장수를 떠났다. 최경회가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하여 진주성싸움에 참가하게 되자 논개도 진주길을 떠났는데, 진주성 함락과 함께 순절하였다.
그 뒤 진주성싸움에서 살아남은 장수 의병들이 최경회와 논개의 시신을 건져 고향땅에 장사 지낼 요량으로 운구해오다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 골짜기에 묻었다.
출생지와 가문,
전라도 지역의 역사서들은 논개를 장수군 태생임을 강조하였다. 1846년 조정은 논개의 출생지를 기념하기 위해 장수현에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논개의 출생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계내면 대곡리 주촌이 유력해 보인다.
논개의 가문에 대한 것은 지역 자료에는 나타나지 않고 다만 구전되어 오던 것이 최근 공개되었다. 즉 논개의 성은 朱氏이며, 본관은 신안이다. 부는 주달문, 모는 함양박씨, 숙부는 주달무라 한다. 주달문은 한학에 밝았고, 향리에서 청년 자제들의 훈학에 종사한 선비였다고 한다.
논개는 천한 신분이 아닌 양가여자라는 점을 강조한다. 논개의 출생 연월 일시가 1574년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의 사갑술이었으므로 술은 개 戌이라서 '놓은 개(낳은 개)'라 하여 '논개'라 이름하였다 한다.
논개의 애인은?.
논개의 애인은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전사한 충청 부사 황진과 우병사 최경회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황진설은 장지연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는데, 그 이유는 황진이 장수 황씨로 남원부 주포리 산내촌에서 태어나 1593년 충청 병사가 되었다가 진주성 전투에 참전한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런데 황진은 본관이 장수라는 것과 장수와 인접한 남원 출생이라는 점 외에 장수와 인연을 맺은 적이 없다.
최경회설은 논개가 진주로 가게된 동기를 최경회의 사랑을 받아서 최경회가 진주성에 입성하자 이를 따라 들어간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최경회와 논개의 인연이 시작된 계기에 대해서도 최근에는 최경회가 장수현감 시절 논개의 송사 사건 해결과 관련을 지우고 있다.
논개의 숙부가 논개를 인근의 김씨 문중의 민며느리로 팔아버리자 함양 안의현 외가로 도망했다가 붙잡혀 송사에 연루되었으나 최경회에 의해 진실이 밝혀지고, 돌아갈 곳 없는 논개의 모녀를 최경회가 데리고 있으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 것으로 민간에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최경회의 장수 부임 시기를 1589년으로 보아야만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역사서에 의해 증명되는 최경회의 장수 부임 시기는 1577년경 이어서 시기 차이가 크다. 따라서 최경회와 논개의 관계는 최경회가 진주성에 입성한 1593년 4월부터 6월 사이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논개가 끌어안고 죽었던 왜장은?.
대체적인 견해는 가등청정의 부하로 조선에 건너와 진주성 공격의 선봉대장이었던 '毛谷村六助'라 한다. 이는 일본에서 유명했던 검객으로서 적국 미녀의 손에 죽었다는 이유로 무덤이 없었으며, 1974년 九州의 유지들이 건축사 上塚博勇을 파견하여 진주의 흙을 가져다가 九州英彦山麓에 무덤을 만들었다 한다.
논개와 의암 바위.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새겨진 '義巖'이란 글씨는 정대융의 글씨라 전해진다. 정대융은 임란시 함경도 의병장이던 정문부의 차자로 문장과 필법이 뛰어났던 선비였다. 인조 2년 1월 정문부가 무고로 피해되자, 그의 유명에 따라 형 정대영과 함께 다음 해 진주로 이거하였다. 따라서 의암이라는 글씨를 쓴 것은 인조 3년(1625) 이후이다.
효종 2년(1651)에 오두인이 의암이 쓰여진 바위를 보고 「義巖記」를 쓰는 것으로 봐 1625년에서 1651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즉 논개가 순국하고 난 30여년 후에 의암이란 글씨가 새겨져 논개의 순국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논개의 순국사실이 진주 지역민들에 의해 확고한 사실로 인식되어졌음을 증명해 준다.
논개의 무덤은. 최근에 논개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하여 논란이 많은데, 발견된 곳은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이다. 함양 지역에는 조선 후기 이후 신안 주씨들이 유력 양반 사족으로서 상당한 지역적 기반을 가진 문중이었다. 그리고 서상면 방지리는 논개의 부모가 일시 웅거했다고 전해지는 지역이다. 그리고 논개의 출생지인 주촌마을과 고개를 넘어 왕래할 수 있는 지역이어서 그 타당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논개의 순국 사실은 어떻게 증명되었을가.? 논개의 치적에 대해서 진주민들은 입으로 전하였지만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경종 원년(1721) 경상우병사로 부임한 최진한이 진주 지역의 士民들의 요구로 ≪어우야담≫과 '義巖'이라 새겨진 글자를 근거로 논개에 대한 포상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이때 당(唐)의 왕씨 여인을 숭의부인에 봉했듯이 논개도 이에 상응하는 봉작을 베풀고, 진주성 함락시 전몰한 제신들과 같이 사당을 건립하고, 왕이 사액하기를 요청하였다.
1722년 비변사로부터 논개의 순국사실이 담긴 문적을 조사 보고하라는 지시에 따라 公金과 사전을 공동으로 염출해서 「義巖事蹟碑銘」을 건립했다. 이 비명의 내용을 비변사에 보고하였다.
이에 정부는 논개의 순국사실을 인정하고 논개의 자손에게 포상하기 위해 이들을 찾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논개의 자손을 찾을 수 없어 결국 포상을 받지 못하였다.
최진한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지만 계속해서 논개 포상을 요구하였지만 성과는 없었다. 논개 포상 건의는 영조 14년(1738) 남덕하가 경상우병사로 부임하면서 계속되었다.
진주민들의 요구는 모두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영조 16년(1740) 6월에 義妓祠 건립을 허가 받았다. 의기사는 그 후 정조 3년(1779)에 우병사 홍화보가 처음으로 보수하였고 정약용이 논개를 추모하는 「矗石樓懷古詩」, 「晉州義妓祠記」를 지었다. 그후 의기사는 퇴락했고, 다시 순조 23년(1823) 목사 홍백순과 경상감사 이지연이 중건했다.
이때 그동안 지내왔던 6월 29일제를 폐지하고 춘추상제를 시행토록 하였다. 그리고 고종 5년(1868)에 목사 정현석이 춘추상제와 별도로 매년 6월 중 길일을 택하여 의암별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가무를 곁들인 의암별제는 300명의 女妓가 연 삼일간 치제하는 화려한 대제전이었다
참고자료
『진주목읍지(晉州牧邑誌)』(1831)
내 고향 전통』(진주문화원, 1983)
성계옥, 『진주의암별제지』(진주민속예술보존회, 198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9)
『진주성 문기』(진주문화원, 1995)
『진주의 문화유산』(진주문화원, 1996)
「진주성의 의기논개고」(『한국사학논총』, 1987)
『충렬실록(忠烈實錄)』(1831)
[논개 [論介]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論介(논개) (공유마당)
[논개 [論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논개 (답사여행의 길잡이 6 - 지리산 자락, 초판 1996., 16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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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3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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