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29일 수요일

한국의 마차,

한국의 마차,
달구지, 각나라 운송장비, 말이나 소가 끄는 수레.
본디 이름은 달구지이지만, 소가 끌면 ‘우차(牛車)’, 말이 끌면 ‘마차(馬車)’라고 부르며, 소가 끌어도 ‘마차’라고 하기도 한다. 우리 나라 달구지는 바퀴 수가 두 개와 네 개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앞의 것은 북한지방에서, 그리고 뒤의 것은 중부 이남의 평야지대에서 많이 썼다.
소나 말로 끄는 수레를 말한다. 달구지는 바퀴가 두 개인 것과 네 개인 것이 있다. 두 바퀴 달구지〈사진 12-21〉는 단순히 수레에 채를 연결한 모양으로 바퀴 축이 하나라서 서있을 때도 소가 쉴 수 없는 단점은 있으나 방향 회전이 쉽고 기동성이 좋아 소가 덜 지친다.
 달구지(2륜) (전남 농업박물관)
앞바퀴 축에 소에 메우는 채를 연결하여 채를 좌우로 움직이면 앞바퀴 축이 따라 움직여서 방향을 잡았다.

네 바퀴 달구지는 짐을 싣고 내리기가 쉽고 정지하였을 때는 소도 쉴 수 있는 이점은 있으나, 연장이 무거워 기동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근년에는 두 바퀴 달구지가 대부분 이었고, 바퀴도 자동차에 쓰는 고무타이어를 사용한 달구지가 많았다.
조선조 정조 때의 『화성성역의궤』에는 대차(大車)와 평차(平車)라는 이름의 수레가 등장하는데 두 바퀴 달구지와 같은 형태로서, 대차가 크고 평차는 그보다 작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차(大車)와 평차(平車) (『화성성역의궤』)
달구지를 예전에는 ‘큰술위’(『역어류해』)라 하고 한문으로는 大車 · 牛車 · 車로 적었다. 그리고 지방에 따라 ‘우차’ · ‘마차’ · ‘구루마’(일본말)라고도 부른다. 달구지로 한 번 에 500∼1,000kg의 짐을 나를 수 있다. 달구지는 근년에 경운기와 트랙터와 같은 동력기계가 보급되면서 점차 사라졌다.
두 바퀴 달구지는 반드시 소가 끌었으며, 소 등에 길마를 얹지 않고 쳇대를 길게 하여 소의 등에 걸어 둔다. 그리고 쳇대가 등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양쪽에서 목 앞으로 끈을 둘러 감았다. 이처럼 길마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험한 길에서 달구지가 넘어지거나 언덕으로 굴러떨어질 때 소나 말이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이 지역 달구지 바퀴는 다른 지역의 것에 비하여 매우 큰 편인데, 이렇게 해야만 상틀이 높아져서(지상에서부터의 높이는 5자) 바닥이 바위나 돌 등에 닿지 않기 때문이다.
네 바퀴 달구지는 마소가 함께 끌었으나, 도회지에서 짐을 나르는 경우는 말을, 농가에서 곡식 따위를 운반할 때는 소를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앞바퀴가 뒷바퀴보다 작으며 거덜이가 장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우로 움직여서 방향을 잡는다. 달구지 바퀴는 모두 목재이며, 텟쇠를 둘러서 보강한다. 한때는 나무 바퀴 대신 자동차 타이어를 쓰는 일이 많았다.
달구지로는 곡식 가마니를 비롯하여 잔 모래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짐을 운반한다. 예전에는 도회지에서도 대부분의 짐을 달구지를 이용하여 운반했으며 중소도시에서 흙·모래·시멘트 등의 건축자재를 운반하는 데 사용하였다. 지금은 차나 경운기 등으로 대체되어 찾아보기가 어렵다. 한 틀의 무게는 1,500∼2,000㎏이다.
달구지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 명칭이 있다.
달구지의 부분이름(김광언, 1991) 1. 장틀, 2. 사장, 3. 갈고리, 4. 챗대 고리, 5. 챗대, 6. 거더리관자7. 장구통, 8. 텟쇠, 9. 빗통, 10. 살, 11. 간철, 12. 메뚜기
*** 달구지의 부분이름(1991년)위그림,1. 장틀, 2. 사장, 3. 갈고리, 4. 챗대 고리, 5. 챗대, 6. 거더리관자
7. 장구통, 8. 텟쇠, 9. 빗통, 10. 살, 11. 간철, 12. 메뚜기
① 쳇대:전주에서는 ‘체장’이라고 한다. 달구지를 마소의 등에 연결하는 두 개의 긴 막대기로 한 끝은 달구지 앞쪽에 달려 있다. 길이는 6자이다.
② 쳇대고리:쳇대를 마소의 길마에 걸어 주는 작은 쇠고리. ③ 사장:달구지의 몸을 이루는 세로로 댄 긴 널쪽. ④ 쇠장:사장을 받치면서 동시에 좌우 양 틀을 고정시키는 각목재. 몸체에 가로로 놓인다.
⑤ 갈고리:짐을 잡아맨 끈을 걸어 두기 위해 장틀에 붙여 놓은 아귀진 쇠붙이. ⑥ 텟쇠:바퀴를 보호하기 위하여 둘러 놓은 쇠. 철판을 구부려서 둥글게 만들고 양쪽을 이어서 바퀴에 씌우는데, 이 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⑦ 빗등:바퀴의 테를 이루는 목재. 이것은 반드시 단단한 괴목으로 하는데, 뒷바퀴는 7개, 앞바퀴는 6개로 이루어진다. 이를 ‘어리빗등(전주)’이라고도 한다.
⑧ 살:바퀴의 테를 유지하기 위하여 빗등과 장구통 사이에 끼운 나무. 이것은 참나무로 만드는데 뒷바퀴에는 14개를, 앞바퀴에는 12개를 붙인다.
⑨ 장구통:전주에서는 ‘수박통’이라고도 한다. 중앙에 구멍이 뚫린 수박만한 나무통으로 바퀴의 살이 모두 여기에 꽂히며 구멍에는 중심축이 걸려서 상틀을 바퀴에 고정시키는 구실을 한다. 장구통은 괴목으로 만든다. ⑩ 간철:장구통을 보호하기 위하여 장구통 안팎으로 둘러 놓은 쇠. ‘탱갱이쇠’라고도 한다.
⑪ 들보:두 개의 뒷바퀴 사이에 끼어 있어서 상틀과 하장을 바퀴에 고정시키는 네모진 쇠몽둥이. 한 면의 두께가 앞바퀴의 것은 한 치이며 뒷바퀴의 것은 1치2푼 내지 1치4푼이다. ⑫ 메뚜기쇠:들보가 수박통에서 빠져 나가지 않도록 구멍에 꽂는 쇠이다.
⑬ 맷돌:‘맷돌쇠’라고도 한다. 맷돌은 앞바퀴의 상부와 하장 사이에 달려서 앞바퀴가 좌우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둥근 쇠로, 지름은 1자3치이다. 네 곳에 둥근 구멍이 뚫리고 이에 방망이쇠를 꽂아서 위아래 짝이 고정된다.
⑭ 거덜이 판자:하장과 쳇대를 연결시켜 주는 쇠붙이. ⑮ 상틀:달구지의 몸으로 이곳에 짐을 싣는다. 참나무로 만든다. 하장:앞바퀴의 들보 위에 붙은 판. 달구지 앞쪽의 무게가 여기에 실린다.
뻗침발:하장과 들보 사이에 끼어 있는 가위 다리모양으로 굽은 쇠. 이것이 스프링과 같은 구실을 하여 앞바퀴에 전달되는 충격을 조절한다.
장틀:달구지 양편에 대는 좁고 긴 널. 달구지 한 틀을 제작하는 데는 목수 한 사람 품으로 열흘쯤 걸리며, 소요되는 목재는 두 발 달구지가 60새, 네 발 달구지는 80새이다.
큰 바퀴의 지름은 3자1치5푼이며 텟쇠의 두께를 합치면 3자2치가 된다. 작은 바퀴의 지름은 2자가웃이다. 바퀴의 너비는 작은 바퀴가 2치5푼, 뒷바퀴가 4치이며, 3치나 2치5푼짜리도 있다.
달구지 나 황소 카트 (때때로 불리는 황소 마차 , 특히 사람을 운반 할 때) 두 바퀴 또는 4 바퀴입니다 차량 에 의해 끌려  . 그것은 세계 여러 곳에서 고대부터 사용 된 교통 수단입니다. 현대 자동차가 너무 비싸거나 인프라가 선호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됩니다.
특히 물품 운반에 사용되는 불락 카트는 하나 또는 여러 황소에 의해 당겨집니다. 카트는 요크에 부착 된 특수 체인으로 황소 팀에 부착 되지만 한두 마리의 동물에 로프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운전자와 다른 승객은 카트의 앞쪽에 앉고 짐은 뒤쪽에 놓습니다. 전통적으로화물은 주로 농산물과 목재 였습니다.
운송에 사용되는  의 발명은 Sumer 에서 가장 많이 발생했습니다 . 바퀴 달린 차량의 증거는 BC 4 세기 중반부터 북 코카서스 ( Maykop 문화 )와 중부 유럽 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납니다 . 가장 초기의 차량은 황소 카트 일 수 있습니다. 
인력거,[ 人力車 ],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을 태우고 사람이 끌던 수레.
유형/시대/성격/용도
물품
근대
생활용품, 운송수단, 교통수단
운송

인력거(1905년경),
자전거바퀴처럼 생긴 두 개의 차륜 위에 사람이 앉을자리를 만들고 포장을 씌운 것이다. 인력거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894년(고종 31)으로 일본인 하나야마(花山帳場)가 10대를 수입, 서울 시내 및 서울과 인천간에 운행한 것이 시초이다.
초기의 인력거는 차 위에 고정시킨 네 귀의 기둥에 장막을 쳐서 지붕을 삼은 간단한 구조였으나 뒤에 마음대로 여닫을 수 있도록 개량되었다. 여름철 등에는 벽과 지붕을 뒤로 젖히고 운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바퀴도 처음에는 철테 바퀴를 그대로 써서 몹시 흔들렸으나, 뒤에 통고무 바퀴가 등장하였고, 압축공기를 이용한 타이어가 나온 것은 191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초기의 인력거꾼은 일본인이었으나 뒤에 우리나라 사람으로 바뀌었다.
인력거는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평양·대구 등 지방도시에까지 급속도로 보급되었다. 초기에는 관리·중산층·노약자·기생 등이 가마를 대신하는 교통수단으로 많이 이용하였다. 초기의 승객은 일본인이 대부분이었으나 우리나라 사람들도 점차 늘어났다. 특히 기생들은 요긴한 교통수단으로 애용하였다.
당시 풍습은 기생이 요릿집에서 대기하는 것이 아니라 손님이 연석에 나올 기생 이름을 대면 요릿집에서 기생조합에 통보하고 이곳에서 인력거를 기생집에 보내어 술집으로 나가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염집 부인들이 탈 때에는 기생으로 오인받지 않으려고 차 앞의 장막을 내려서 승객이 누구인지 알 수 없도록 하였다.
인력거꾼은 요즈음의 택시운전사나 우체부처럼 지리에 밝았기 때문에 초행자들에게는 매우 편리한 교통수단이었다.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골목이나 언덕에서도 운행이 가능하여 중산층의 대중 교통수단으로 자리를 굳혀갔다.
1869년경에 일본인 다카야마 고스케[] 등이 서양마차를 본떠 만들었으며, 한국에는 1894년(고종 31), 하나야마[]라는 일본인이 10대의 인력거를 수입해 들여와 영업을 함으로써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따라서 최초의 인력거꾼은 모두 일본인이었다가 점차 한국 사람으로 바뀌었다. 이로부터 인력거는 부산·평양·대구 등 지방도시에 급속히 보급되어 가마를 대신하는 중산층 이상의 교통수단으로 번성을 누렸다.
1930년대에는 신문사에도 자가용 인력거를 두고 기자들이 이용할 때마다 전표를 떼어 주었다. 급한 일이 있을 때에는 인력거를 뒤에서 미는 사람을 따로 붙였는데 이를 ‘두패지른다’고 일렀다. 인력거꾼은 뜀박질을 잘해서 서울 장충단에서 벌어진 ‘대운동회’에 참가, 장거리 경주에서 일등을 하는 일이 많았다.
1911년 말 현재 전국의 인력거는 1,217대(당시 자동차는 2대, 객마차는 110대였다.)였으나 1923년에는 4,647대로 늘어났으며, 서울에서는 약 37%인 1,816대가 운행되었다. 인력거를 이용할 사람은 오늘날의 콜택시처럼 인력거조합에 전화를 걸어서 불렀으며, 부유층에서는 자가용을 따로 마련하였다.
1924년 당시 자가용 인력거는 1,509대인데 소유자를 살펴보면 한국인(936대), 일본인(482대), 프랑스인(77대), 기타 외국인순이었다. 한편 영업용 인력거는 소유자와 종업원인 인력거꾼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소유자들이 조합을 결성, 운행하였다. 1908년 인력거의 영업허가, 인력거꾼의 자질, 운임, 속도, 정원, 두 대가 마주쳤을 때 길을 비키는 법 등을 정한 「인력거영업단속규칙」이 공포되었다.
1914년부터는 인력거의 운행감독을 각 경찰서에서 맡게 되어 일정한 날짜에 차체수리상태 및 인력거꾼의 복장검사 등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인력거꾼의 복장은 업종의 성질상 개선되기 어려웠다. 특히 여름철에는 땀이 비오듯이 쏟아져 복장단정을 운위할 형편이 못 되었고, 심지어 더위와 땀 때문에 맨발로 달리는 사람도 많았다.
인력거는 1912년부터 등장한 임대승용차(택시)에 밀려 점차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승객확보를 위하여 1922년 11월 10리에 80전이던 삯을 60전으로, 하루 전세료도 5원에서 4원으로 낮추었으나 큰 효과가 없었다.
1931년 현재 자동차는 4,331대로 증가한 반면 인력거는 2,631대로 줄어들었다. 인력거꾼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낮았고 수입도 지나치게 영세하여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인력거부조합(人力車夫組合)도 결성되었으나, 근무조건은 나아지지 않았다.
인력거꾼과 승객 사이의 요금시비도 끊이지 않아 한때는 인력거 승차표를 발매한 일도 있다. 서울의 경우 인력거는 광복 무렵부터 자취를 감추었으나 일부지방 도시에서는 6·25전쟁 이후까지 운행되었다.
인력거의 갑작스런 범람은 서민의 보행교통을 크게 방해하였고, 또한 초기의 승객들은 대부분 일본인이거나 일본인 기생[藝者], 한국인의 경우는 귀현신사(貴顯紳士) 또는 유지(有志)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횡포 또한 적지 않았다. 경무청(警務廳)은 1908년(융희 2) '인력거영업단속규칙'을 공포하여 인력거 영업허가를 비롯해 인력거꾼의 자질·운임·속도·정원·피양(避讓:길을 서로 비켜 주는일) 등 최초의 교통법규를 만들기도 하였다.

인력거는 오늘날의 콜택시처럼 손님이 인력거조합에 전화를 걸어 대절하였는데, 부유층은 자가용을 두었다. 인력거 영업은 1923년 절정에 이르러 전국에 4,647대(서울 1,816대)를 기록하였으나 1932년부터 등장한 임대승용차(택시)와의 경쟁에 밀려 점차 사양길을 밟았으며, 일부 지방도시에는 6·25전쟁 후 얼마 동안 인력거조합이 남아 있었다.
호주,
호주에서는 블록 카트를 블록 드레 이라고하며 바퀴가 4 개이며 보통 큰 짐을 운반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20 마리 이상의 동물로 구성 될 수있는 불럭 팀이 드레이를 뽑았습니다. Bullock 팀의 드라이버는 'bullocky'로 알려져 있습니다.
Bullock 팀은 농촌 지역에서 주요 도시 및 항구로 농산물을 운송하는 데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습니다. 호주의 규모 때문에 이러한 여행은 종종 먼 거리를 커버했으며 며칠에서 몇 주까지 걸릴 수 있습니다.
코스타리카,
황소 카트 ( carretas 에서 스페인어가 ), 특히 1850과 1935 사이의 일상 생활과 상업의 중요한 측면했다, 여전히 개발되고 독특한 건축 및 장식 전통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코스타리카 퍼레이드 와 전통 축제는 전통적인 황소 카트 퍼레이드가 없으면 완성되지 않습니다.
1988 년, 전통적인 황소 수레는 코스타리카 정부에 의해 국가 작업 기호로 선언되었습니다.
2005 년 "코스타리카 Oxherding와 우차 전통은"에 포함 된 유네스코 의 인류 무형 문화 유산 대표 목록.
인도네시아 ,
달구지 상품과 사람을 운반 국가의 농촌 지역에서 사용되지만, 더 자주 인도네시아 있습니다 horsecars 달구지보다는 사용되는. 불로 카트 드라이버는 인도네시아 에서는 바진 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Bullock 카트는 자동차 도입 전에 말레이시아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됩니다. 여기에는 특히 관광객들에게 사용되는 승용차가 포함되었습니다. 여객 카트에는 일반적으로 태양과 비로부터 보호하기위한 차양이 장착되어 있으며 종종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참조 항목,
관련 항목,
역참조 항목,
카테고리,
출처 & 참고 문헌,
[인력거 [人力車]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농기구고]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36)
[달구지 (한국의 농기구, 2001..,)
『서울잡학사전』(정동출판사, 1989)
『서울육백년사』(서울특별시, 1981)
『개화백경』3(신태양사, 1969)
「풍류세시기」(『중앙신서』1, 중앙일보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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