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20일 월요일

삼국사기 VS 삼국유사, 비교,

삼국사기 VS 삼국유사, 비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고려 시대에 쓰인 삼국 시대의 역사책이에요.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왕의 명령으로 펴낸 책이에요. 

묘청의 반란을 진압한 김부식을 기억하나요?

유학자였던 김부식은 ‘믿을 수 없는 일은 기록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으로 주로 왕과 정치 이야기를 썼어요.

이 책에는 중국을 최고로 생각하는 당시 유학자들의 생각이 드러나 있어요.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는 <삼국사기>보다 130여 년 늦게 펴낸 책이에요.

이 책에서는 몽골의 오랜 침략에 맞서 민족의 자부심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어요.

그래서 삼국의 역사뿐만 아니라 고조선, 부여, 삼한, 가야 등 여러 나라의 역사를 다루었지요.

또 처음으로 단군 신화를 실어 고조선이 중국과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다는 역사를 밝혀냈어요.


삼국-사기 

발음 삼국싸기 ] 

  • 표준국어대사전
  • 고려대한국어대사전
  •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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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뜻풀이 부

명사

책명 고려 인종 23(1145) 김부식이 왕명에 따라 펴낸 역사책신라고구려백제  나라의 역사를 기전체로 적었다

본기()ㆍ연표()ㆍ지류( 열전()으로 되어 있으며, ≪삼국유사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다50 10.


삼국사기, 三國史記,

대한민국 국보 제322-1호[A]
대한민국 국보 제322-2호[B]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A]/ 서울특별시 중구[B]

분류 : 기록유산 / 전적류 / 목판본  

수량/면적 : 50권 9책[A]/ 50권 9책[B]

지정연도 : 2018년 2월 22일

제작시기 : 1573년(선조 6)[A]/ 1512년(중종 7) 추정

삼국사기 전권의 모습,

한국사에서 내용 전체가 현대까지 전하는 역사서 중 가장 오래된 사서. 《화랑세기》 필사본을 위작으로 판단할 경우 현존하는 국내 사료 중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며, 현존하는 삼국 시대 관련 사료 중에서 가장 분량이 많기도 하다.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와 더불어 삼국시대 연구를 위해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필수 사료다.

고려 인종의 명에 의하여 고려왕조 국가적 지원 하에 1145년에 편찬 책임자 김부식과 그 외 보조 역할을 담당한 참고(參考) 8명과 행정사무를 전담한 관구(管句) 2명 등 총 11명이 편찬한 관찬 역사서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후삼국시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동아시아의 고전적 역사 서술 방식인 기전체 형식을 따르고 있다.

본기 28권(신라 12, 고구려 10, 백제 6), 연표 3권, 지 9권, 열전 10권. 총 50권 9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현대에 남아있는 삼국사기 원서 중 김부식이 편찬한 원본은 없다.

삼국사기 서적 중 가장 오래된 원서는 보물 722호 성암본으로 13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성암본은 성암고서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름은 '삼국'사기이지만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이후부터 고려 초까지, 즉 '3국'이 있지 않았던 약 260여 년의 역사도 같이 다루었는데, 삼국사기는 신라가 아닌 고려에서 작성한 것으로 아무래도 당시 고려인들의 시각으로 봤을 때에는 다시 나눠진 후삼국시대를 고려가 재통일한 것을 통일의 종결로 여겼던 것에서 기인한 것 같다. 

삼국사기는 고대도 고대지만 당시 고려왕조의 현실도 그나마 엿볼 수 있는 역사책이기도 하다.

또한 고려의 칭제건원과 서경 천도 운동을 하였던 묘청 일파를 반대하고 몸소 묘청 일파를 숙청한 김부식이 사직하고 집필한 사서로 자주성이 약한 시각에서의 사관이라는 점에서 식민사관론과 관련되어 민족주의 사관에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는 역사서이기도 하다.

중국 사서의 내용을 그대로 적은 부분이 다수라는 점에서 이런 비판이 나오는데, 이미 삼국시대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시기였으니 김부식 시대에 이미 국내 사료가 많이 부족해진 상태라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며 오히려 김부식은 당대 사회상을 감안하면 상당히 한반도 중심적, 민족주의적으로 기록했다,,,


<삼국유사>

불교 이야기, 신화나 전설 같은 신기한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 있어요.

우리가 재미있게 보고 들은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 ‘에밀레종’, ‘김대성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지은 이야기’ 등 모두가 <삼국유사> 속 이야기예요.

『삼국사기』에 기록된 화랑(花郞)의 화장,21세기는 남성 화장 시대, ‘누드 화장’, ‘물광 메이크업’, ‘민낯 얼짱’, ‘꿀 피부’ 등 화장 필수 시대, 화장품 산업 세계 11..

문화유산 답사기 2021. 9. 5.

전통 화장(化粧)사상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흰색에 대한 호상(好尙), 미를 존숭(尊崇)하는 생활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희고 윤택한 피부는 고귀한 신분을 상징하였고, 그래서 남녀 구분 없이 백색 피부를 만들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러한 미의식은 우리 조상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목욕을 즐겼다거나 천연재료 등을 이용한 화장품에서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지(智)·덕(德)·체(體)의 합일을 추구, 내면의 미와 외면의 미를 동일시하는 상황 아래에서 피부의 청결을 중시하였고, 피부를 정결하게 하는 목욕을 자주 하였다.

누구든지 깨끗한 옷에 정결한 신체를 간직하기 위하여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세수와 빗질을 하였으며, 외출하였다가 돌아온 뒤에는 반드시 손발을 씻는 등 청결하면서도 단정한 몸가짐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처럼 아름다움과 청결을 중시했던 미의식은 삼국시대부터 화장과 화장술이 발달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들이할 때 반드시 화장을 포함한 정장을 하였다.

이 관습은 고구려시대부터 비롯되었다고 믿어지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공사(公事)에 반드시 비단옷을 입고 금은주옥(金銀珠玉)으로 치레하였다고 한다.

조선 24대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가 남긴 복식에 관한 지침서 『사절복색자장요람』에 보면 조선시대 여성들은 계절에 따라서 화장법과 의상과 장신구도 달리해 멋을 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여성미의 극치는 어디까지나 한국인답게 개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전체의 조화에서 찾을 수 있다.

영육일치사상으로 발현된 삼국의 화장

우리나라 사람들의 화장 경향은 줄곧 엷은 색조의 은은한 화장, 타고난 아름다움을 가꾸는 미용에 주안을 두었다.

고분벽화 속 인물화를 보면 갸름한 얼굴곡선에 백옥(白玉) 같은 피부, 가늘고 얇은 일자형의 끝이 살짝 둥글려진 눈썹, 가늘고 긴 눈매와 넓은 이마, 홍조 띤 붉은 볼에 연지를 찍었다.

작고 오뚝한 코와 붉은 입술은 우리나라 미인의 조건을 두루 갖춘 모습이다.

고구려에서는 연지를 이용한 화장법이 일반화 되어 있었는데 직업을 구별 짓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사기』에 무녀와 악공이 이마에 동그랗게 연지를 그렸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수산리 벽화무덤, 쌍기둥무덤 속 인물화는 고구려의 화장형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둥근 얼굴형에 양 뺨에는 연지화장을 하였는데, 당대의 연지화장이 뺨 전체에 진하게 펴 발랐다면 벽화에서 보여지는 연지화장은 둥근 형태의 점을 찍은 듯한 형태이다.

이는 한국인의 무의식 속 깊이 자리한 동그라미에 대한 미의식의 표현이며 자연주의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눈은 가늘고 눈동자는 표현이 안 되었으나 눈두덩이의 붉은 화장은 현대의 아이섀도(eye shadow)와 유사한 형태로, 중국의 화장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화장법이다.

신라 때에 와서는 남성들도 화장을 하였는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화랑(花郞)의 화장이 그것이다.

미소년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분을 바르고 구슬로 장식한 모자를 썼다고 하는데, 이는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는 ‘영육일치사상’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신라 진흥왕은 아름다운 남자들을 뽑아서 화랑으로 삼았는데, 중국 당나라 학자가 쓴 신라의 역사책 『신라국기』에 보면 “귀인의 자제로 아름다운 사람을 뽑아서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해 화랑이라 이름하고, 나라 사람들이 모두 존경해 섬겼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에서는 여자뿐 아니라 남자에 이르기까지 화장을 하였고 아름다움을 귀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우아함이 깃든 고려인의 아름다움

고려시대가 시작되면서 기생이 짙은 화장을 함으로써 직업 여성은 야한 화장, 여염 부녀자는 엷은 색조의 화장이라는 이원화된 고정관념이 생겨났다.

조선 전기 문신 문효공과 정경부인 영정에서는 당시 화장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색조 면에서 특히 고식(古式)을 보이고 있는데, 안면에 옅은 복숭아꽃 색을 그대로 본떠서 칠하고 입술연지만을 발랐다.

평소에 거할 때나 소례 시에는 피부를 청결하게 가꾸고 담장을 하였으며, 환갑이나 혼례 등의 성장(盛粧)을 필요로 하는 의례 시에는 농장(濃粧) 혹은 응장(凝粧)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 다른 초상인 영의정하연부부영정 중 하연 부인의 모습을 살펴보면 화장의 형태는 짧지만 굵은 눈썹은 곡선 형태이고, 동그란 눈은 눈썹과 동일한 크기로 표현되었으며, 입술은 붉고 크기는 보통이다.

볼과 이마, 턱에 연지와 곤지가 동그랗게 그려졌으며 색상은 붉다.

하연 부인상은 얼굴에 분을 바른 뒤 볼 전체에 엷게 홍을 펴 발랐고 입술연지를 붉게 하였다.

양 볼과 이마와 턱에 연지를 찍었고, 눈썹을 굵게 그렸으며, 입술에 연지를 발라 홍장을 하고 있다.

이런 화장 형태는 백제 궁녀사(宮女祀)의 영정에서도 볼 수 있다.

평상시에는 볼과 입술에만 연지화장을 하고 혼례 때는 이마 연지(곤지)도 같이 찍었다고 한다.

계급에 따라 다른 조선시대 화장법

궁중여인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사대부 여인들은 담박한 기초화장을 했지만, 기녀들은 고려의 교방화장법을 계승해 화려한 색조화장을 했다.

조선시대 여인들의 화장은 진하진 않았지만 그 어느 시대보다 부드럽고 세련됨을 알 수 있다.

얼굴은 복스럽게 둥글고 야위지 않으며 살빛은 흰 편이고 흉터나 잡티가 없었다.

얼굴에 눈썹을 그리고 연지를 칠하고 분을 바르되 본래의 생김새를 바꾸지 않는 범위 안에서 아름답게 가꾸도록 하였으며, 화장한 모습이 화장하기 전보다 확연하게 달라 보이면 야용(冶容)이라 하여 크게 경멸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장악원(掌樂院)의 예기(藝妓) 선발과 관련해 ‘분칠’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연산군은 여인을 간택할 때 “어찌 분칠한 것을 참 자색이라 할 수 있겠느냐? 옛 사람의 시에 ‘분연지로 낯빛을 더럽힐까봐 화장을 지우고서 임금을 뵙네’라 하였으니 앞으로 간택할 때는 분칠을 못하게 명하여 그 진위를 가리게 하라”고 하였다.

이는 단순히 분 화장만 금한 것이 아니라 진색을 알기 위하여 야용을 금지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연지화장도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고종 3년(1866년)에 행해진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에서 관찰되는데, 혼례에 앞서 명하여 초간택 시에 참여하는 처자들이 궁에 들어올 때는 분만 바르고 성적(成赤)은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성적은 이마를 4각이 되게 족집게로 솜털을 뽑고 얼굴에 연지 곤지를 찍는 색채화장을 의미한다.

초간택에서 성적을 금하고 재간택과 삼간택에서는 성적을 금한다는 명이 없는 것은 재간택과 삼간택에서는 색채화장을 허용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려의 태조는 교방을 설치해 기녀들에게 화장을 가르쳤다.

백분으로 얼굴을 하얗게 한 후 먹으로 눈썹을 그리고, 뺨은 복숭아 빛, 입술은 앵두 빛 연지를 칠했다고 한다.

전형적인 조선시대 미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면 전체 골격은 풍만하고 건강한 편이고, 머리카락은 검고 숯이 많으며, 표정은 부드럽고 인중이 긴 편이다.

또한 앵두처럼 붉고 작은 입술과 초승달같이 흐리고 가느다란 눈썹에 쌍꺼풀 없이 가느다란 눈, 마늘쪽처럼 생긴 자그마한 콧방울과 반듯하고 넓은 이마는 사실주의적 미의식이 가장 잘 나타난 작품이다.

얼굴은 복스럽게 둥글고 야위지 않으며, 살빛은 흰 편이나 흉터나 잡티가 없었다.

얼굴에 눈썹을 그리고 연지를 칠하고 분을 바르되, 본래의 생김새를 바꾸지 않는 범위 안에서 아름답게 가꾸도록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운낭자상>에 나타난 얼굴화장은 진수아미(.首蛾眉) 미용법을 따랐다.

이 화장법은 족집게를 이용한 ‘뽑는 미용법’인데, 고대 여인들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유행한 미용법이다.

진수아미는 넓고 네모 반듯한 이마에 초승달 같은 눈썹인 여자 얼굴을 형용한 말로, 오랫동안 이 미용법이 아름다운 여인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고구려 벽화의 여인상, 가락국기 김수로왕의 황후 허황옥 등과 조선전기 하연부인상 등 조선여인들의 얼굴도 진수아미 미용을 한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에는 미의식과 화장 문화가 이원화를 보이나 후기로 오면서 신분제도의 변화와 유교 윤리의 약화로 일반 여성도 기녀의 화장양식을 모방하였다.

과거 여인들의 모습이 담긴 그림을 통해 시대에 따라 화장법이나 미의 기준이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변치 않는 진리 가운데 하나는 본래 타고난 아름다움을 헤치지 않는 화장, 내면의 아름다움이 발현된 화장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곧 선조들의 삶의 자세,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진리, 몸을 가꿈으로써 마음도 가꾸려 노력했던 노력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계승 발전시켜야 할 가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글 방기정(대전대학교 뷰티건강관리학과 교수)   출처:월간 문화재사랑

위의 글은 1920~30년대 한국의 여성 작가였던 백신애(1908~1939)가 중국의 청도를 여행하면서 쓴 「청도 기행」의 한 대목이다.

백신애는 일제 강점기 사범학교를 졸업한 교사 출신으로, 조선여성동우회(1925), 경성여성청년동맹(1925) 등에서 활동하고, 여성계몽 운동과 저항문학으로 현실참여에 앞장섰던 여성이었다.

그녀는 번화가인 산동로(山東路)를 거닐다가 서양 여성들과 중국 여성들의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열등감을 느꼈음을 토로하였다.

그런데 그때의 열등감이 “화장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는 말로 표현된 것이 눈에 띈다.

결혼 후에도 여성이 남편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화장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시대와 사회를 고민하고 일제에 목숨을 걸고 저항하던 여성조차도 ‘화장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회.

이미 1920~30년대에도 한국은 ‘화장 권하는 사회’였던 것이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근 백 년 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화장은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외모 가꾸기의 한 요소가 되었다.

요즘에는 여성들이 직장을 다니거나 이성을 만날 때 화장을 하지 않으면 ‘예의가 없다’는 말을 듣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고생들도 외출할 때 비비(Blemish Balm)크림 정도는 바르는 걸 예사로 여긴다.

남성들을 위한 화장품 산업의 규모도 나날이 확대되어 가고 있다.

2012년 현재 한국 화장품 시장 규모는 63억 400만 달러(한화 약 7조 540억 원)로 세계 11위에 해당한다고 하니 한국의 인구 수에 비교해 볼 때 엄청난 규모임을 알 수 있다.

화장품 산업은 한국에서 불황을 모르는 업종이라고 한다.

갸루상은 사람이 아니므니다!

하지만 화장은 여성들에게 일종의 딜레마와도 같은 문제이다.

짙은 화장을 한 여성은 ‘천박하다’는 이야기를 듣기 쉽기 때문이다.

2012~2013년, “사람이 아니므니다!”라는 화제의 유행어를 낳은 한 개그맨의 극중 이름은 ‘갸루상’이었다.

‘갸루(ギャル)’는 ‘girl’의 일본식 발음에서 비롯된 말인데, 일본에서 ‘갸루’, 혹은 ‘고갸루’라고 불리는 젊은 여성들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그들만의 독특한 화장법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의 외모에서 모티브를 얻은 갸루상 캐릭터는 하얀 분칠과 짙은 눈 화장, 붉은 립스틱, 금발 머리, 세일러복 차림으로 무대 위에 등장하곤 했다.

갸루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엉뚱한 발언을 함으로써 그녀(?)의 독특한 화장법과 맞물려 ‘(일반적인) 사람이 아닌’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처럼 ‘지나친’ 화장은 천박하다고 간주되거나 비웃음이나 풍자의 소재가 되곤 하는 것이다.

화장을 안 해도, 반대로 지나치게 해도 문제가 되는 세상, 어떻게 보면 여성들에겐 실로 살기 힘든 세상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화장은 전략이다!

하지만 여성들에게 주어진 ‘화장을 해야 하는 운명’이 정말 ‘부담’, ‘굴레’이기만 할까.

오늘날의 외모 지상주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이고, 미모는 ‘인생역전’의 중요한 자산이다.

직업뿐 아니라 남녀가 따로 없고, 노소도 따로 없다.

그러다 보니 너 나 할 것 없이 외모를 가꾸기 위해 노력하고 피부, 체형관리, 다이어트, 성형수술, 화장, 패션 등 미용관련 산업은 나날이 확대되어 간다.

좋은 대학의 졸업장을 따고, 토익 점수를 올리고, 이런 저런 자격증을 따듯 외모 가꾸기도 하나의 ‘스펙’처럼 관리되고 있다.

특히 여성들의 ‘예쁜 여자 되기’에 대한 강박은 남성들에 비해 더욱 심하다.

그러나 이것을 무조건 사회나 남성들의 강요에 의한 ‘수동적’인 행위로만 볼 수는 없다.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아름다워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학력이나 경력을 높여 지식인, 전문직 여성으로서 성공하는 것 못지않게 주효한 성공 전략이다.

따라서 여성이 스스로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다는 것은 이 시대에 있어서 몸의 교환가치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다이어트나 성형수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장을 통해 자신의 얼굴과 피부를 가꾸는 여성들은 아름다워야만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화려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많은 경우 여성들의 화장은 스스로의 선택인 것이다.

‘누드’+‘메이크업’?

언젠가부터 ‘누드화장’, ‘물광 메이크업’, ‘민낯 얼짱’, ‘꿀 피부’ 등의 말이 유행하고 있다.

여성들 사이에서 화장을 안 한 듯 자연스러운 피부표현이 중요한 미의 기준이 된 것이다.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매끈 촉촉하고, 이목구비는 뚜렷한, 그러면서도 립스틱이나 파운데이션, 아이라이너 등으로 일명 ‘떡칠’을 하지 않은 얼굴이어야 아름답다고 인정받는다.

아마도 ‘누드’와 ‘메이크업’이라는 형용모순의 합성 조어가 바로 ‘예의’ 있으면서도 ‘천박하지’ 않은 화장의 이상적 절충안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민낯 얼짱’ 담론을 양산하고 이를 이용하는 것 역시 미용 산업이라는 사실이다.

신문, 잡지, TV, 화장품, 피부과 병원 등이 ‘민낯’처럼 보일 수 있다며 여성들에게 새로운 꾸미기의 방법을 권하는 것일 뿐이다.

점차 ‘자연스러운’, ‘화장 안 한’ 얼굴에 가까운 메이크업이 유행하는 것은 화장이 귀찮은 여성들로선 반가운 일이기도 하지만, ‘민낯’은 진짜 화장품 하나 바르지 않은 얼굴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민낯’처럼 보이면서도 피부와 이목구비가 아름답게 보이는 화장품을 (어쩌면 오히려 더 많이) ‘바른’ 얼굴을 말하는 것이다.

화장품 시장은 고객들을 그렇게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여성들에게 있어 화장을 하거나 안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될 필요는 없다.

자신이 아름다워 보이고 싶다면, 화장을 한 자신의 모습에서 좀 더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면, 세상이 화장을 한 자신에게 좀 더 관대하다고 생각된다면 얼마든지 화장하라.

성형이나 다이어트에 비하면 화장은 훨씬 손쉽게 아름다워질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의 외모 가꾸는 과정에 혹시 자본이나 권력의 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스스로가 주체가 되지 못 한 채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 외모를 가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조금은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는 정도는 필요하겠다.

그것이 우리가 좀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아름다워지는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글 이영아(명지대학교 인문교양학부 교수)              출처:월간 문화재

9월 7일은 푸른 하늘의 날,

가을장마가 지나간 영향일까요? 참 맑고 푸르른 하늘을 보니 기분까지 상쾌해지는 오늘입니다.

이렇게 푸른 하늘을 계속 보면 좋을 텐데, 대기오염이 날로 심각해져서 멀지 않은 미래에는 ‘푸른 하늘’이 기록으로만 존재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이 같은 생각이 국경을 초월해 공감을 얻어 만들어진 날이 ‘푸른하늘의 날’입니다.

지난 2019년 9월 23일에 열린 ‘기후행동 정상회의 기조연설’에서 우리 정부가 기념일 지정을 제안했고, 같은 해 12월인 제74차 UN총회에서 채택되어 국제 기념일이 되었답니다.

제2회 차를 맞는 푸른하늘의 날 올해의 주제는 ‘건강한 공기, 건강한 지구’입니다.

푸른 하늘을 위한 행동을 비롯해 모든 환경문제는 일회성 행사가 아닌 일상이 되어야만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느 특정한 개인, 공동체, 국가에 한한 문제가 아닌 전 세계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정부와 기업, 공동체, 개인이 똘똘 뭉쳐 정책을 만들고 실행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야겠습니다.

인권운동가 존 루이스의 유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점점 나아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근거 없는 낙관론과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는 과학맹신론에서 벗어나 오늘 당장 국제환경단체 ‘대자연’이 제안한 미니멀 더스트 체크리스트 항목을 살펴보고 핸드폰 대신 공원을 거닐며 푸른 하늘을 감상하고, 자동차 대신 걷기 등을 실천해보시면 어떨까요?

[문화재방송(www.tntv.kr) 캠페인]

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

"우리문화재를 사랑합시다,


전통 화장(化粧)사상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흰색에 대한 호상(好尙), 미를 존숭(尊崇)하는 생활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희고 윤택한 피부는 고귀한 신분을 상징하였고, 그래서 남녀 구분 없이 백색 피부를 만들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러한 미의식은 우리 조상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목욕을 즐겼다거나 천연재료 등을 이용한 화장품에서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지(智)·덕(德)·체(體)의 합일을 추구, 내면의 미와 외면의 미를 동일시하는 상황 아래에서 피부의 청결을 중시하였고, 피부를 정결하게 하는 목욕을 자주 하였다.

누구든지 깨끗한 옷에 정결한 신체를 간직하기 위하여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세수와 빗질을 하였으며, 외출하였다가 돌아온 뒤에는 반드시 손발을 씻는 등 청결하면서도 단정한 몸가짐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처럼 아름다움과 청결을 중시했던 미의식은 삼국시대부터 화장과 화장술이 발달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들이할 때 반드시 화장을 포함한 정장을 하였다.

이 관습은 고구려시대부터 비롯되었다고 믿어지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공사(公事)에 반드시 비단옷을 입고 금은주옥(金銀珠玉)으로 치레하였다고 한다.

조선 24대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가 남긴 복식에 관한 지침서 『사절복색자장요람』에 보면 조선시대 여성들은 계절에 따라서 화장법과 의상과 장신구도 달리해 멋을 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여성미의 극치는 어디까지나 한국인답게 개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전체의 조화에서 찾을 수 있다,


번역본,

조선왕조실록》과 마찬가지로 《삼국사기》도 인터넷에서 무료로 검색, 열람이 가능하다.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되는 온라인 열람 서비스.
  • KRPia: KRPia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열람 서비스. 원문에 가까운 것을 제공하며, 검색 기능도 좋고 이병도의 주석도 달려있어 우월하다. 다만 유료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 네이버-원문으로 보는 삼국사기네이버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열람 서비스. 한국인문고전연구소에서 번역한 삼국사기를 제공하며, 접근성이나 편의성에서 일반인들이 사용하기 가장 좋다. 각주도 KRPia만큼은 아니나, 일반인들에게는 꽤 유용한 정보들이 담겨있다.


삼국유사》와 더불어 한국고대사 연구의 필수 자료답게 여러 학자들의 손을 거쳐 번역된 바 있으며, 번역본의 출판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위의 링크에도 있듯이 이미 네이트 한국학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등 여러 사이트에서 무료로 열람이 가능하므로 이를 참고해도 좋다. 누구든지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 최강의 장점.

서적으로 출판된 것 중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1997년에 간행한 5권의 《역주 삼국사기》가 가장 좋은 평을 받고 있는데, 노중국 등을 비롯한 한국 고대사학계의 권위자들이 참여하여 상당한 퀄리티를 자랑한다.

2012년에는 개정판을 내놓았는데 이 역시 좋은 평을 받았다. 단점은 5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다가 한 권의 가격이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4~5만 원에 육박하는지라 전부 소장하려면 돈이 꽤 많이 깨진다는 것이다.

참고로 '상고사학회 ' 라는 단체에서 펴낸 삼국사기는 대륙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봉의고등학교의 영어교사 이병곤이 삼국사기 전체를 영어로 번역했다. 이미 해외에서 본기를 개별적으로 번역한 바가 있지만 전체를 번역한 것은 처음이다.

영문 제목은 'The History of Three Kingdoms'. 관련 기사


가치,

비록 불분명한 부분도 있고 비판받을 부분도 존재하지만, 삼국사기는 한국의 역사를 다룰 때 그 중요도가 엄청나다.

삼국사기는 제대로 인정받은 가장 오래된 한반도의 정사(正史)인 것이다.

삼국사기와는 대조적으로 삼국유사의 경우, 책 이름의 '유사'가 '남겨진 사실', '버려진 사실'이란 의미인 데서 알 수 있듯 이전의 사서에서 빠진 내용들을 기록했다는 뜻으로, 삼국사기에서 상당수 누락시킨 설화, 불교적 이야기를 중점으로 다루고 있다.

그나마도 삼국유사는 삼국사기 편찬 이후에 기술되어 삼국사기를 적극적으로 반영했기 때문에, 삼국시대를 정통적인 사관에서 다루는 유일한 사서는 삼국사기 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고구려신라백제가 충돌했던 기록이나, 율령 반포, 불교 수용 같은 중요 기록들은 빠지지 않고 언급되고 있으며 삼국시대의 국왕의 시호, 이름, 가계 등도 온전히 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신라 금석문에서 보여지는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 무즉지태왕(另卽智太王),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의 경우 우리는 법흥왕이라는 걸 알 수 있지만 만약 삼국사기가 없었다면 왕의 시호가 정확이 어떤 것인지 몰랐을 것이며, 신라의 율령반포가 법흥왕 대에 일어났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구삼국사나 다른 사서들도 남아있었다면 더 좋았겠으나 전부 실전된 상황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삼국사기의 존재로 인해 한국사는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고대사 기록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은 삼국사기의 존재 덕분에 전세계사로 넓히면 고대의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나라다.

삼국사기의 존재로 기원전부터의 기록이 제법 남아있는 한국의 고대 역사를 다른 나라들의 고대 역사와 비교해 보면, 영국은 그나마 기록이 많은 잉글랜드조차 기원후 5세기 무렵에 형성된 고대 7왕국 시절까지의 기록은 개인의 연대기에 의존해야 하며, 스웨덴은 기원후 800년대까지는 신화의 영역이며, 독일과 덴마크 등의 조상 격인 게르만족의 역사 또한 그들이 직접 남긴 기록이 없어서 고대 로마인들의 기록을 적극적으로 참고해야 한다. 동유럽도 마찬가지라서 불가리아나 세르비아크로아티아체코는 초기 역사를 연구할 때 동로마나 서방교회, 독일 쪽 기록이 필수다. 

폴란드는 아예 서기 960년 폴란드 영지 성립 이전 역사가 존재하지 않으며 발트 3국은 서기 기준 네자릿수 연도가 된 11세기까지 가야 자국의 역사가 수립되기 시작한다.

아시아로 가더라도 인도는 기원후 200년대인 굽타 왕조대나 들어서야 본격적인 기록들이 등장한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기원후 4세기 이후에나 역사시대에 들어서며일본 또한 일본서기고사기 등 초기 기록은 말 그대로 "신화적"인 요소가 강하고 4세기의 기록은 중국과의 교류가 없어 공백 수준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들인 마야 문명아즈텍 제국잉카 제국은 기원 후 1000년경부터 역사가 확인 되고 있다. 

아프리카의 사하라 이남 지역은 자체 문자나 이렇다할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무려 13세기까지 있었던 국가인 가나 제국조차 불분명한 부분이 많다. 

아프리카에서는 그나마 에티오피아가 역사 기록이 꽤 많이 있는 편이다.


이름에 대한 이야기,

《삼국사기》의 '사기(史記)'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사마천의 《사기》를 따른 것으로 여겨지며, 《삼국사》라는 이름도 자주 쓰였다.

이를 들어 원래의 이름은 《삼국사》였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삼국사기》라는 이름이 굳어졌다라는 주장이 있다.참조기사

기사들,,,

① 고려사나 조선 초기 김종직의 《동문수》에 실린 『진삼국사표』,

② 옥산서원본을 발간한 김거두가 쓴 발문에 있는 삼국사라는 표현,

③ 남아있는 《삼국사기》의 표지에 쓰인 삼국사라는 제목,

④ 《조선왕조실록》에서 삼국사라는 명칭이 더 빈번하게 쓰였기 때문에 원래 제목이 삼국사가 아니였겠냐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학계에서 전혀 공인받지 못한다.

《삼국사》라는 약칭이 널리 쓰인 것도 맞기는 하지만 학계에서는 가독성과 구분 편의 등을 이유로 《삼국사기》를 쓰는 것이고, 일제가 《삼국사기》라는 명칭을 밀었다는 주장에는 뚜렷한 근거가 없다.


상세히 보면,,,

《삼국사(三國史)》라는 표현은 《삼국사기》라는 표현에 비해 '삼국의 역사'라는 일반명사로 오인될 가능성이 있고,

삼국사'라는 명칭은 이전 시기 편찬된 《구삼국사》 혹은 《해동삼국사》와 혼동을 빚을 가능성이 있으며,

사료상 《삼국사기》와 《삼국사》라는 표현이 혼용되고 《동문수》(1488)와 달리 《동문선》(1478)에서는 『진삼국사표』가 아닌 『진삼국사기표』라는 명칭이 있기 때문에 《삼국사》는 그 약칭일 것이다.

외국에서도 이 책의 서명을 《삼국사기》로 아는 사례가 이미 《삼국사기》 편찬 34년 후를 기록한 남송 대 사료에 등장한다. 

옥산서원과 잔존 삼국사기의 표지 등에 《삼국사》라고 쓰여 있다고 하지만, 정작 조선시대 작성되었을 발문과 표지와는 달리 고려시대의 원문을 옮겼을 《삼국사기》 본문에는 스스로 《삼국사기》라고 쓰고 있다

옥산서원본 정덕본 그러니까 고의적인 사실 왜곡을 하려 한 것이거나, 본문을 다 잊어버리고 표지와 발문만 기억한 것이 아니라면 이 기사를 쓴 사람은 《삼국사기》 표지와 발문만 보고 본문은 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맞든 아니든 학계를 비판하기에는 수준 이하이다.

《삼국사》라는 명칭보다 《삼국사기》라는 명칭이 정식 명칭일 가능성이 오히려 더 확정적이며, 거기에 더해,,,

구분상의 문제로 《삼국사기》를 쓰는 것이 가독성 면에서 더 편리했기 때문에 《삼국사기》가 선택된 것이다.

공식적인 명칭과 편의상 쓰이는 약칭이 의미 전달에 큰 차이가 없다면 오히려 약칭이 널리 쓰이는 것도 빈번한 일이다. 예를 들어 공식명칭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대신 광개토왕 내지 광개토대왕이 더 널리 쓰이거나, 《선화봉사고려도경》 대신 고려도경이라는 이름이 더 널리 쓰인 것처럼. 게다가 일제강점기에 《삼국사기》라는 이름을 밀었다는 주장의 경우 기사에 제대로된 근거가 없다.

오히려 나쁜 건 모두 일제가 했다고 주장하면 되는 유사역사학계의 사고방식을 매우 몹시 잘 보여주는 기사인 셈.


인용 문헌,

삼국사기에는 어떤 기록을 인용했는지 중간중간 언급된다.

동일한 책도 서로 다른 이름으로 기록된 경우가 있는데 특히 중국 사서를 기록할때 동국통감-통감, 신라국기-신라기, 신라고기-라고기 등 축약되어 기록한 것이 확인 된다.

이는 사관들이 기록을 취합하면서 서로 다르게 기입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삼국사기에서 전거가 확인되는 인용 문헌은 다음과 같다.


국내 문헌,

삼국을 다룬 사서이니 만큼 김부식은 1차 자료로 당시에 남아 있던 국내 사서를 다수 참고했다.

백제 멸망, 고구려 멸망, 그리고 고려-거란 전쟁 등으로 인해 수많은 사서가 사라진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끌어 모았으며 중국 측 사서와 교차 검증에서 서로 내용이 다르면 되도록 한반도 국가의 사서를 우선시했다.

인용한 사서들은 구삼국사를 비롯한 삼국 통합 역사서와 신집최치원이나 김대문 등 신라의 당대 역사학자들의 역사서들, 김유신등 유명인의 행장, 그리고 각종 금석문을 참조한 것으로 파악된다.

《고기》(古記)
말 그대로 옛 기록을 통칭하는 것인지, 특정 서적의 이름이 고기인 것인지는 알수가 없다. 

유례 이사금 본기, 진평왕 본기, 효소왕 본기, 경덕왕 본기, 헌덕왕 본기, 헌강왕 본기, 근초고왕 본기, 잡지1 제사, 잡지1 악, 잡지6 지리4 고구려, 잡지6 지리5 백제, 잡지9 고구려·백제에서 언급된다.

《삼한고기》(三韓古記)
동성왕 본기에 언급된다.

《신라고기》(新羅古記)
잡지1 악, 강수 열전에서 언급된다.

《본국고기》(本國古記)
잡지9 고구려·백제에서 언급된다.

《해동고기》(海東古記)
태조대왕 본기, 삼국사기 잡지1 제사에 언급된다.

《신라고사》(新羅古史)
의자왕 본기에 언급된다.

《사전》(祀典)
고려의 국가 행사의 규칙이나 규격을 기록한 책으로, 삼국사기 잡지1 제사에 언급된다.

《예전》(禮典)

구삼국사》(舊三國史)
삼국사기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으나 이규보가 남긴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에 온전히 남은 기록과 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를 비교해보면 거의 차이가 없음을 알수가 있다.

다만 삼국사기는 기이한 내용을 최대한 배재한 반면, 구삼국사는 야사에 가까운 내용들도 가감없이 실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고승전(高僧傳)》
김대문 열전에 나오는 책으로 김대문이 저술했다는 기록만 나온다.

《난랑비》(鸞郞碑)
최치원이 쓴 비문으로 진흥왕 본기에서 화랑을 다루며 언급된다.

《고운문집》(孤雲文集)
최치원의 문집으로 진성여왕 본기에 언급된다.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최치원이 통일신라대에 쓴 책이며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에 존재하는 책은 위서다. 

지증 마립간 본기에 언급된다.

화랑세기(花郞世記)》
김대문이 쓴 책으로 화랑세기는 진흥왕 본기에 등장한다.

또한 사다함관창 열전등 화랑을 다룬 기록들도 화랑세기에서 인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다만 현대에 발견되어 남당 박창화의 위작설이 유력한 '화랑세기 필사본'은 마지막에 '記'가 아닌 '紀'자를 쓴다.

어차피 별 차이는 없지만.

《계림잡전》(鷄林雜傳)
김대문이 쓴 책으로 법흥왕 본기 중 이차돈 설화를 다루며 언급했다.

그외 남해 차차웅 본기, 유리 이사금 본기, 눌지 마립간 본기, 김흠운 열전에도 김대문의 글이 인용된다.

편찬자들이 서명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학계에서는 도미 설화 등을 같은 저자의 《한산기(漢山記)》 내용을, 백결선생 열전은 《악본》(樂本)에서 일부 인용한 것으로 본다.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
한나마(韓奈麻) 김용행(金用行)이 쓴 책이라고 하며 법흥왕 본기에 이차돈 설화를 다루며 "계림잡전 내용과는 다르다."라는 식으로 짤막하게 언급된다.

《장의사의 재문》(莊義寺齋文)
고려의 태조가 직접 쓴 글로 헌덕왕 본기에 인용된다.

《김유신비》(金庾信碑)
의자왕 본기에 언급된다.

김유신행록(金庾信行錄)
김유신 본기는 김유신의 후손 김장청이 쓴 10권의 김유신행장을 축약해서 옮겨 놓은 것이다.

《삼랑사비문》(三郞寺碑文)
의자왕 본기에 언급된다.

신집》(新集)
영양왕대에 편찬된 고구려의 역사서로 총 5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실제로 인용된 저서로 신집의 이름이 나오진 않으나 정황상 신집이 인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신집 항목 참조.


중국 문헌,

아무래도 고대 한반도 국가들의 기록이 상당수 소실됐던 탓에 중국 문헌도 상당수 참고했다.

흥미로운 것은 인용문들 대부분이 중국 측 기록보다는 한국 측 기록을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몇가지 사례를 들면 고구려 태조대왕 본기에는 "해동고기에는 146년에 돌아가신 걸로 나오는데 후한서에는 121년에 돌아가셨다고 기록 되어 있다.

우리의 기록과 중국이 서로 엇갈리니 후한서의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라며 후한서를 깠고, 신라 태종 무열왕의 경우에는 "우리쪽 기록에는 김용수의 아들로 나오는데 당서에는 진덕여왕의 아들로 기록되었으니 당서가 틀렸다."라고 나온다. 

신라의 기이한 민족인 장인(長人)에 대해서도 "신당서에는 장인의 존재가 사실인거 처럼 기록했는데 우리쪽 기록을 보면 소문에 불과하다."라며 지적하고 있다.

물론 왕의 생몰년이나 계보를 따지면서 당사국의 기록을 더 중시하는 게 당연한 측면도 있지만.

심지어 주필산 전투를 기록한 대목에서는 유공권(柳公權)의 소설을 언급하며 "당시 이세적을 포위한 고구려의 군세를 본 당태종이 지렸다고 나오는 데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에는 왜 그 내용이 빠져있냐?

쪽팔리니 빼버린 것이 틀림없다."라고 대놓고 깠다.

하지만 김부식이 중국의 문헌을 인용하면서 기록을 면밀하게 살펴본 것은 아닌지, 산상왕의 이름인 이이모(伊夷模)와 동천왕의 이름인 위궁(位宮)을 각각 고국천왕과 산상왕의 이름으로 기록하는 오류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름만 잘못 기록했으면 다행이겠지만, 덕분에 사건의 연도까지 잘못 비정되어 버렸다.

삼국지에서 나오는 고발기와 관련된 기록을 고국천왕 본기 원년조에 실었고, 동천왕이 태어났을 때 태조왕처럼 사람을 볼 수 있었다는 일화를 산상왕 본기 원년조에 실어놓았다.

덕분에 후대 사람들이 고발기가 두 명이라 착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고국천왕을 왕계에서 누락해놓은 후한서와 삼국지의 고구려 왕계 기록이 문제의 시발점이긴 하지만.


판본,

현대에는 김부식이 직접 집필한 삼국사기 원본은 남아있지 않으며, 후대에 새로 인쇄하거나 필사한 판본들이 남아 있다.


옥산서원본,

문화재청 홈페이지: 삼국사기 (三國史記)

총 50권 9책 완질본. 일명 옥산서원본(玉山書院本)이라 불린다. 

이언적을 배향하여 영남의 양대 서원으로 위상이 높은 옥산서원에서 조선 선조 6년인 1573년에 찍어낸 것이다.

각주의 글자가 너무 작게 되어있는 등 인쇄 상태가 깨끗하지 못하지만 현재 우리가 보는 삼국사기의 내용은 이 옥산서원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국보 제322-1호,

문화재청 홈페이지 : 삼국사기 (三國史記)  

『삼국사기』는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1145년(고려 인종 23년)에 삼국시대의 역사를 기전체(紀傳體)로 편찬한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와 함께 삼국시대 연구의 기본사료로 인식되고 있다.

국보 제322-1호 『삼국사기』는 1573년(선조 6) 경주부(慶州府)에서 인출(印出)하여 옥산서원에 보내준 것으로, 고려시대에 처음 새긴 원판(原板)과 조선 태조 때에 개각(改刻)한 것, 중종 때 다시 개각한 것 등 3종의 판(板)이 종류별로 섞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총 9책으로 구성된 완질본(完帙本)이자 인출상태와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또한 1573년 당시 유통경로와 더불어 사용한 종이와 장정(裝幀) 양식 등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어 조선시대 학술 동향은 물론 목판인쇄 사정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정덕본,

문화재청 홈페이지: 삼국사기 (三國史記)


총 50권 9책 완질본. 조선 중종(中宗) 재위기간인 1512년(조선 중종 7년)에 경주부(慶州府)에서 간행되어 정덕본이라 통칭하며, 경주부간본이라고도 한다.

당시 경주부사 이계복이 삼국사기를 점점 구하기 힘들어지는 것을 보고 이러다 삼국사기가 사라질 수도 있겠다고 판단하고 새로이 인쇄하기로 결정해 제작한 판본이다.

원판이 닳아서 복구할 수 없는 곳, 잘못된 글자, 빠져 있는 글자 등의 결점이 있지만 국보 제322-1호인 옥산서원본(玉山書院本)과 함께 현재까지 내려오는 둘뿐인 완질본이다.


국보 제322-2호,

문화재청 홈페이지 : 삼국사기 (三國史記),

국보 제322-2호『삼국사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사서(官撰史書)라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 속에 반영된 역사의식의 객관성과 민족자아의식에도 높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1512년까지 증보된 보각판에 기초하여 찍은 인출본으로, 인출 당시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총 9책의 낙장이 없는 완질본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판각본이 혼재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고려 및 1394년 잔존 목판본의 조성형식과 보존상태 등도 확인할 수 있다.


보물 제722호: 성암본,

문화재청 홈페이지: 삼국사기 권44∼50 (三國史記 卷四十四∼五十)


권 44~50권 분량으로 총 7권 1책. 성암본이라 불린다.

1981년 서울 성암고서박물관에서 발견된 판본인데 고려 후기인 13세기 후기에 찍어낸 것으로 현존하고 있는 삼국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지만 단 1책만 존재하고 있다.

권말의 끝부분 장(張)이 떨어져 간기나 발문이 없다. 또한, 복각할 때 사용한 초간본의 상태가 좋지 않다.

초간의 원각에서 탈락된 것을 그대로 판각한 듯한데, 초간본의 후쇄본을 가지고 복각한 것으로 보인다.

몇몇 부분은 기존의 옥산서원본이나 정덕본과는 다른 데 대표적으로 온달이 참전한 장소인 배산(拜山)이, 성덕본에서는 이산(肄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 궁내청본,

1981년 2월 아키히토 당시 황태자의 지시로 일본 궁내청 서원부(황실도서관)의 장서를 정리하다가 삼국사기 정덕본을 수정, 가필한 삼국사기가 발견되었다. 50권 9책 완질본이다.

아키히토가 왜 장서 정리를 저 시점에 요구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1960년 생인 나루히토가 막 성년이 된 시점이었기에 황거 정리 차원에서 했을 가능성이 높다.

1981년 서원부 정리 과정에서 삼국사기 외에도 한국, 중국, 일본, 심지어 유럽 국가들의 역사서들이 추가로 발견되었던 성과도 있었다.

대부분은 일본 제국 시기에 수집한 것으로 보인다.

해당 삼국사기 버전이 언제 일본으로 넘어갔는지는 불분명하나 1981년 이전에 서원부를 정리했던 것은 일제강점기 이전 메이지 유신 때인 1870년이다.

일본에서는 이 삼국사기 발견 이후 보존을 위해 영인을 하고 나서 보존처리 후에 다시 황실 도서관인 서원부에 보존하고 있다.

영인본은 2020년 현재 공개 여부에 대해 알려져 있지 않다.


"논란,

신라 우선주의 서술이다.

일제강점기에 신채호가 《삼국사기》와 그 저자인 김부식을 전격적으로 비난한 이후 이 주장에 동의하여 그를 디스하는 학자들이 상당히 많아졌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부분은 《삼국사기》는 누가 보아도 질과 양을 볼 때 철저히 신라 위주로 기술되었다는 것.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보다 수백 년은 더 후대에 멸망했으므로 더 쓸 이야기나 그 분량도 많겠지만, 그것을 감안하고서라도 꽤 심각하게 편향되어 있다는 것이다. 

북한 또한 삼국사기가 신라 우선주의로 쓰였다고 본다.

또한 《삼국사기》의 주요한 편찬자인 김부식은 이자겸이 금에 사대했을 때 찬동했던 인물인 동시에,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진 서경파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과정에서 제거한 신라 계승주의를 주도한 동경파의 대표자라는 점이 지적받으면서, 이전에는 고려의 입장과 동시에 김부식이 포함된 당시 문벌귀족들의 입장이 강하게 표현되어 고구려 계승 의식이 쇠퇴한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했을 가능성이 있는 《구삼국사》가 유실된 점을 아쉬워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


삼국사기의 편찬 목적,

조금 더 자세히 풀어본다면 일단 《삼국사기》를 어떤 시점으로 봐도, 고려라는 나라를 구성하는 요소 중에 신라의 지분이 가장 크며 삼국사기는 당장 《삼국사기》를 쓰는 사람들의 현 소속국가였던 고려의 시점에서 역사를 재정비하는 것이 우선적이라, 고려의 영토 대부분이 위치한 한반도 중부와 남부를 다스리던 국가인 삼한을 한때 아우른 신라가 고려 태조에게 귀부하고 고려는 흉악무도한 후백제를 물리치며 그것을 이어받은 정통성 있는 국가라는 인식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경순왕이 우리 태조께 귀의함과 같은 것은 비록 부득이하여 한 일이지만 역시 가상한 것이며, 오히려 만약 힘써 죽기로 싸워 태조의 군사에 저항하다가 힘이 다하고 형세가 곤궁하기에 이르렀다면, 필시 그 종족이 뒤집혀 멸망되고 그 해독이 무고한 백성에까지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명령을 여쭈어 기다리지 않고 미리 나라의 창고를 봉하고 군․현을 기록해 바쳐 왔으니, 그의 우리 조정에 대한 공로와 백성들에 대한 은덕이 매우 크다 하겠다.

옛날 전씨가 오월의 땅을 들어 송나라에 바치매 소자첨이 그를 충신이라고 했거니와, 지금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 훨씬 더한 것이다.


《삼국사기》권12 신라본기. 종결부의 사론,

신라의 운수가 다하고 도의가 상실되니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은 돌아갈 바를 몰랐다.

이에 뭇 도적들이 틈을 타고 일어나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았거니와, 그 가운데 심한 자는 궁예와 견훤 두 사람뿐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이면서도 반란하여 주종의 나라를 원수로 삼아 멸망시킬 것을 도모해 선조의 화상을 베기에 이르렀으니, 그 어질지 못함이 심하였다.

견훤은 신라의 백성으로서 일어나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도 모반의 마음을 품고 나라의 위난을 요행으로 여겨 도읍을 침노하고 임금과 신하 베기를 마치 짐승 죽이듯 풀 베듯 했으니, 실로 천하의 극악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궁예는 그 신하에게 버림당했고 견훤은 화가 그 아들에게서 일어났으니, 이는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것들인지라 다른 누구를 허물할 것인가. 비록 항우나 이밀과 같은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서도 한나라와 당나라의 흥기를 대적하지 못했거늘, 하물며 궁예나 견훤과 같은 흉악한 이들이야 어찌 우리 태조를 상대해 항거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단지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준 이들이었을 뿐이다.


《삼국사기》권50 견훤전. 말미의 사론

김부식은 김부를 오월의 전씨에 비교하여 공덕이 월등히 크다고 하였는데 무엇을 보고 그러한 것인가?

오월은 송나라에 대하여 번병으로서 술직 하니 그 군신의 직분이 정하여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고려에 대하여 이와 같지 않은즉, 태봉은 신라의 반적이요 고려 태조는 태봉의 신하였던 것이다.

비록 태봉이 이미 무너지고 고려의 국운이 날로 창성했다 하나 신라가 고려에 대해 일찍이 무릎꿇고 칭번한 적이 없었거늘 하루아침에 종묘사직을 버리고 토지를 바치며 북면하여 조회하는 것이 옳겠는가. …

뒷날 비록 부귀하고 외손이 번성하였으나 어찌 나라가 망하고 자신을 잃는 큰 수치를 씻을 수 있겠는가!

경순왕과 같은 자는 이미 큰 절의를 잃었으므로 그 나머지는 취할 바가 없는데, 김부식이 전씨에 견주어 경순왕의 우월함을 비교하니 도대체 무엇을 보고 그러한 것인가?


동국통감》 권12 고려 태조 18년 사론,

이것만 봐도 《삼국사기》가 어떠한 생각과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또한 후대의 사람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 또 봐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삼국유사》이다.

《삼국유사》에도 《삼국사기》와 어느 정도는 비슷한 시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후백제견훤조는 기이편의 마지막 항목인 가락국기조 바로 앞에 자리한다.


《삼국유사》

기이편이란 단군조선에서 출발하여 고려왕조 성립 이전까지를 대상으로 하여,

흥법편 이하 불교 신앙의 홍포와 신이한 이적에서 오는 감동의 공유를 위한 시공간적 배경 설정과도 같은 것이다.

고려 태조에게 귀부한 경순왕의 행적을 마지막으로 하여 시간 순서에 따른 기록은 완결되는 것이고, 아울러 사실상 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역사 계승은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런데 김부대왕조 이후에 남부여전백제조, 무왕조, 후백제견훤조가 배치되었다.

이러한 배치는 일단 시간 순서에 따른 기이편의 서술 체계와는 상반된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후백제 및 견훤 관련 자료의 분석에는 김부대왕조 이후 네 항목에 대한 편찬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때 가락국기는 자료명 자체가 제목을 이루고 있다는 데서 일연 이후의 추가로 보는 시각이 있음을 환기하게 된다.

이러한 지적은 그에 대한 동의 여하와는 상관없이 본 문제에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즉 후백제견훤조는 기실 ‘삼국사본전’ 곧 《삼국사기》 견훤전에 주요한 바탕을 두고 있되, 고기》(古記) 등의 정보를 제시하는 데 본의가 있었던 것이므로, 가락국기조의 맥락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

또한, 무왕조 자체가 고기에 근거했음은 물론이며, 남부여 전백제조 역시 고기 계통 정보를 담고 있었다.

다시 말해 후백제 견훤조를 위시한 네 조목의 편록은 유사를 자처한 《삼국유사》 저자 일연이 삼국의 ‘본사(本史)’로 간주한 삼국사기에서 배제된 고기류의 정보를 제시하는 데 주안 했던 것이다.

덧붙여 《삼국사기》에 가장 자료량이 풍부한 김유신전 역시 고기로 불린 그의 행록을 크게 절삭한 것인데, 그 절삭된 부분이 바로 《삼국유사》의 김유신조나 가락국기조 등에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견해가 있다.

즉 《삼국유사》의 김유신 설화는 그 서술 목적이 《삼국사기》의 열전과는 다르며 지배이념의 구현보다는 그 인물의 신이한 행각이라든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일화를 표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고기에서 무왕은 용의 아들이며 견훤은 지렁이의 아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대비된다.

비록 이들의 출생담은 건국 신화적 요건을 갖춘 야래자신화(夜來者神話)로 파악되고, 이 ‘야래자신화’는 온조 등 백제 건국 주체 집단의 동명 신화가 하늘에서 온 아버지-지상의 어머니였던 것과는 달리 물에서 온 아버지-지상의 어머니로서 마한의 신화였을 가능성에 주목하기도 하나, 둘 다 뭔가 비정상적인 일이라고 하는 것은 몰라도 적어도 신성한 이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남부여전백제조 말미에 고기의 전승으로 파악되는 이른바 용바위 전승은 사비하(백마강/백강)가에 한 바위가 있는데 소정방이 일찍이 이 위에 앉아 물고기와 용을 낚아 냈기 때문에 바위 위에 용이 꿇어앉은 흔적이 있는지라 그로 인해 용바위라고 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소정방의 이 행위가 백제의 멸망을 예비하는 조건으로 이해된 것처럼, 역시 부정적 예조(預兆)일 뿐이다.

요컨대 김부대왕조를 끝으로 마무리되어야 할 기이편의 구성에서 경순왕조 뒤에 있는 전-후백제사의 세 조목은 고기의 편린에 자저자의 강조점이 있되, 그것은 백제와 후백제에 대해 우호적이지 못하였다.

또한, 고구려사의 전말도 전혀 배려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로 보아야 할 사안이며 여기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집필되던 시기의 좀 배웠던 사람들의 주류시각과 고려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 생각건대 저 구려는 오늘날 발해로 되었는데, 비로소 근래 와서 계속 과거에서 분에 넘치는 성과를 거두었으니, 이는 곧 외방이 착함을 사모하는 정성을 기록하시고 대국의 공평한 덕화를 드러내심이나 …


최치원. 당나라 예부 배상서에게 보내는 편지(與禮部裵尙書瓚狀)

… 구려가 이윽고 미친 회오리바람이 잦아지자 간신히 불탄 나머지를 거두어 따로 고을들을 취합할 것을 도모하더니 문득 나라 이름을 도적질하였으니 곧 예전의 구려임을 알 것이요 이가 오늘의 발해인 것입니다.

… 최치원이 요행히도 천박한 재주를 가지고 … 실로 지극한 공정함을 만나 이전의 치욕을 씻었으니 변화됨은 한 번 돌보아주심에 깊이 힘입었고 그 광영은 멀리 삼한에 퍼졌습니다.


최치원. 당나라 고대부에게 편지(新羅王與唐江西高大夫湘狀)

… 신이 삼가 발해의 원류를 살피건대, 구려가 아직 멸망되기 전에는 본래 사마귀만한 부락이었던 것이 말갈의 부류가 번창해지자 그 가운데 속말이라는 작은 번속이 있어 일찍이 구려를 따라 내지로 옮겨왔는데 그 수령 걸사비우 대조영 등이…


최치원.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못한 것을 보면 고려가 떨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 지방에 거하면서 고구려라 했고, 부여씨가 서남지방에 거하면서 백제라 했으며, 박씨․석씨․김씨가 동남지방에 거하면서 신라라 한 바 이것이 삼국이다.

이 삼국에는 마땅히 삼국에 대한 사서가 있어야 할 텐데, 고려가 이것을 편찬했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한 다음 김씨가 남방을 차지하고 대씨가 북방을 차지하고는 발해라 했으니, 이것을 남북국이라 하는 바,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거늘,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유득공. 《발해고

이 사료들까지 본다면 신라가 나라가 망하고 있던 시기에도 통일 전쟁 시기부터 표방해온 삼한일통에 대해 얼마나 집작하고 있는지, 또한, 건국 초에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뚜렷하게 표방하였으나, 북벌정책이 거란과의 전쟁을 거치며 종료되고 신라말의 삼한일통 의식이 고려의 주류 역사관으로 자리 잡은 것을 알 수가 있다.


신라 우선주의가 아니다,

분량으로 봐도 통일 시점까지를 따지면, 고구려가 10권, 신라가 7권으로 고구려가 더 많다. 특히 건국 시점부터 4세기~5세기초까지 기록은 고구려본기가 신라본기의 2배 넘는다. 

구삼국사》가 좀 더 고구려 계승 의식에 근거해 고구려 우선적 서술이 있었을 확률이 있지만, 그렇다고 고구려 관련 기술을 김부식이 의도적으로 뺀 건 아니라는 것이 현재 정설이다.

실제로 구삼국사의 기록이 일부 온전히 남아있는 이규보가 남긴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을 읽어보면 《삼국사기》 동명성왕본기에 수록된 내용과 별반 다르지가 않다,

세세한 업적등은 구삼국사 부분에 없고 《삼국사기》에만 기록되어 있음이 확인 되어 오히려 《삼국사기》의 기록이 더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삼국의 역사를 제후의 용어인 세가(世家)가 아닌 황제의 역사에 해당하는 본기(本紀)로 구성하여 황제의 역사와 동등하게 취급했다.

이는 엄청난 정치적 모험인데, 김부식이 있던 당시 중국에 송나라라는 명실상부한 황제국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황제국 "본기"는 오로지 황제한테만 올리는 부분으로, 중국이 이걸 알았으면 군대를 일으켜 즉시 고려를 침공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엄청난 도박이었다.

그 당시는 다원적 천하관이 자리잡은 시기였다.

고려는 해동천하를 내세우며 황제국을 표방하고 있었고 송에서는 고려로 쳐들어올 능력도 없었다.

훗날 조선에서는 고려사를 편찬할 때 고려 역대 국왕에 대해 세가를 사용한 것과 비교하면 오히려 '이 사람 사대주의자 맞아?'라고 생각이 들 수도 있을 정도이다.

따라서 책을 평가할 때에 김부식이 합리적 유교 사관에 입각하여 이상과 현실을 적절히 타협하여 서술했음을 전제로 논해야 한다.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을 모두 똑같은 본기를 사용했다는 점을 통해서 삼국을 동등한 위치의 국가로 봤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신라에 우선순위를 두었다면 신라만이 본기고 고구려 계승 의식만을 내비쳤다면 고구려만 본기일테고 어떤 경우든 어중간한 백제의 왕과 역사는 세가에 따로 넣었을 것이다.

이는 비슷하게 병존한 3개 국가를 동시에 편찬했던 중국의 사서 삼국지에서도 촉과 오의 군주들은 열전 처리하고 위진 계통만을 본기로 서술해 조위정통론을 분명히 했던 것과 비교된다.

제일 늦게 중앙집권국가로 시작하고 전성기도 제일 늦게 맞이한 신라가 3국 중에서 제일 먼저 건국했다는 것도 주요 논쟁거리였지만 최근에는 신라 건국 시기를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먼저 건국했다고 항상 먼저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위략』, 『삼국지』의 진국(辰國)과 진한(辰韓)에 관한 기록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요동지역의 세력이 점점 남하하여 경상도에 최종 정착했다는 주장이다.

진한은 당시에 세력은 후퇴했으나 정치적으로 진국의 충분한 경험이 있었고, 신라는 진한의 6소국이 모여 성립된 나라이므로 삼국 중 먼저 건국되어도 모순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신라가 가장 늦게 발전한 것은 진국 통치의 경험, 지리적 위치로 인한 현상으로 바라본다. 

사로국 항목도 참조.

삼국사기에 수록된, 김부식 등 사관 본인들의 직접 평가라고 할 수 있는 사론(史論)들을 살펴봐도, 신라본기의 사론 10개는 전부 신라의 제도를 비판하는 사론이다. 

신라삼보는 사람이 만든 사치한 물건일 뿐이니 나라를 통치함에 있어 필요가 없었다든가, 여자를 왕으로 올렸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든가. 반면 고구려본기에서도 비판적인 사론도 있지만 을파소나 안시성주 등을 사론으로 오히려 칭찬하고 있다.

김부식 등 삼국사기 편찬자의 성향이 신라에 더욱 우호적이라면 이런 식으로 서술할 이유가 없다.


오해를 받는 이유: 사료의 부족,

앞서 기술된 "감안해도 심한 정도"라는 말은 학술적인 증거가 포함되지 않은 주관적인 생각이며 "어디까지"에 대한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일제강점기 이전 한국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역사서를 편찬하기 위해 원전을 편집하여 역사서를 낸다고 하자. 그러면 양은 어디가 많을까? 당연히 조선이 압도적일 수밖에 없다. 

조선왕조실록만으로도 500년 조선 역사기록이 1400여년의 삼국 + 고려 관련 역사 기록보다 훨씬 많다. 

승정원일기까지 합하면 넘사벽이고. 그런데 과연 이런 양적 문제를 근거로 조선 위주로 서술했다고 비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한국사 역사서에서 다루는 기간이 조선이 아니라 현재까지라면 조선 대신 대한민국 분량이 밀도적으로 가장 많다.

당연히 역사서를 쓸 때 참고할 원사료는 책을 쓰는 시점과 가까운 시대일수록 더 많기 때문이다.

김부식도 간접적으로 밝혔는데, '고구려와 백제의 직관(職官)이 오래되고 기록이 없어서 고기(古記)와 중국 사서에 나타난 것만 기록한다.'고 서술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제사 제례는 명확하지 않으므로 다만 고기(古記)와 중국 역사에 쓰여 있는 내용을 상고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삼국사기》 제32권 잡지 제1- 제사

신라는 연대가 오래 되었으며 문헌과 사서들이 사라져서 그 제도를 자세히 말할 수 없다.

(중략)
고구려와 백제의 의복제도는 고찰할 수 없으므로 여기에 중국의 역대 사서(史書)에 보이는 것만을 기록하기로 한다.


《삼국사기》 제33권 잡지 제2 - 의복

고구려와 백제의 관직은 연대가 오래 되었으며 기록이 모호하여 자세히 알 수 없다.


《삼국사기》 제40권 잡지 제9 - 관직

게다가 아래 구성에서 보듯, 삼국통일까지의 시점을 따지면 고구려 10권, 신라 6권, 백제 6권으로 고구려본기의 권수가 가장 많다.'

따라서 양적인 문제를 근거 없이 비판하는 것은 잘못됐다.

이런 논란이 벌어지는 이유는 《삼국사기》 편찬 당시 사료가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7세기 이전 파트는 당시에도 자료가 너무 없어서 중간 저자인 김부식조차도 "마한은 온조왕때 망했다며?

100년이 지났는데 왜 갑자기 또 나오는거냐?"라고 의아해 하는 주석을 달기도 했으며 사반왕처럼 아예 통으로 날려 먹은 파트도 존재한다.

70년(서기 122), 임금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입하였다.

부여왕이 병사를 보내 요동을 구하고, 우리를 격파하였다.

마한은 백제온조왕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한 것은 아마도 멸망한 후 다시 일어난 것인가?】

《삼국사기》 제15권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

백제고구려쪽은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수도가 함락되는 과정에 대부분 기록이 불에 타거나 약탈로 없어졌다. 

신라의 기록 역시 여요전쟁으로 인해 상당수 소실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에 그나마 남아있었던 자료들조차도 그 양이 매우 부족해서 신라 편향적이라고 욕을 먹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박혁거세부터 진평왕까지의 일을 기록한 책은 단 4권이다.

이해하기 힘들다면 고려의 승리에서 비롯되는 후백제 관련 자료의 한계는 7세기 이후 멸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가 승리한 신라인의 관점에 충실한 형태로 재편되었던 사정과 다르지 않고, 또한 멸망한 나라의 사서는 업데이트나 보존을 위한 노력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알기 쉽다.

사실 통일신라 시기의 신라본기도 기록의 양이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

기록의 밀도가 높아서 실감이 안 날 뿐이지, 효소왕~혜공왕 시기 기록과 효공왕~신덕왕 시기 기록은 각 연도별 사건들이 미천왕 이후 고구려본기급으로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아쉬운 점은 고려시대에는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전대 왕조에 대한 정사를 편찬하는 시기가 너무 늦었다는 것에 있다.

전통적으로 동양 왕조들은 건국 후 바로 전 왕조의 정사(正史)를 편찬하는 전례가 있어 왔단 건데 고려는 그러지 않았다.

그 이유는 추측하자면 초기의 왕위쟁탈전과 곧이어 일어난 고려-거란 전쟁, 그리고 천추태후 등의 실정과 그로 인해 벌어진 권력 투쟁인 계속된 전쟁으로 고려 초는 혼란기가 적지 않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사료 자체가 또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여요전쟁만 해도 2차 침입 때 개경이 함락되면서 적지 않은 역사 자료가 파괴되었다.

또 전조의 정사 편찬은 본래 중국의 관습인데, 고려 초는 근친혼이 성행하는 등 아직 중국식 문화가 후대에 비하면 덜 유입된 시대이기 때문에 필요성 또한 적게 느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17대 왕인 인종대에 와서야 《삼국사기》를 집필하는데 이를 근거했을 당시의 자료가 시기상 고구려나 백제가 멸망한 지 500여 년이나 지난 시점이었고 이들의 기록을 상당수 가졌을 발해와 통일신라도 멸망한 지 무려 200년은 된 시점이라 당시 동아시아 내에서 직접 구할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구할 수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당연히 고구려나 백제가 신라보다 먼저 망했고 신라가 수백 년은 더 오래 갔기 때문에 신라인들의 관점에서 재정리되어 있는 것이 많았고, 혹은 그것을 토대로 고려에서 재정리한 것이었다.

또한, 북방의 대륙에 위치한 국가였던 고조선과 고구려발해의 기록이 중국왕조에 의해 훼손되고 백제와 삼한의 기록이 신라에 의해 훼손되면서 기록이 부실해 짜깁기식으로 기록을 편집한 채로 편찬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김부식도 비슷한 내용의 옛 기록들을 찾아보았으나 인용할만한 기록이 거의 없어 기술을 포기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집필하던 1100년대 중기에는 이미 신라, 백제, 고구려 등의 여러 국가가 약 천여 년 동안 기록하여 남긴 역사 사료들을 모두 긁어모아 재정립해도 단 아홉 권에 그칠 정도로 이미 이전대의 역사 사료들이 상당수 사멸한 상태였고 이러다 보니 어느 정도의 비중 문제는 어쩔 수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부식도 나름대로 고구려와 백제 관련 자료를 박박 긁어모아서 찾아보려 한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혹자는 김유신 열전을 언급하며 신라 우선주의라고 매몰차게 비판하기도 한다.

10권으로 이루어진 '열전'에 수록된 인물 69명 중에 고구려, 백제인은 합쳐서 11명에 불과하고 또 10권 중에 김유신 열전이 3권을 차지하고 있는 점을 들어, 아무리 당시에 기록이 적어졌다 하더라도 두 국가를 합쳐서 11명밖에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편향적이며 신라의 시각과 신라 편향적인 자세에서 글을 쓴 것은 도저히 피하기 힘들 정도로 비판받을 만한 거리라는 것. 하지만 삼국사기를 좀 더 들여다본다면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김유신의 기록마저 부족했기 때문에 김유신의 후손이 쓴 김유신 행장록을 그대로 베꼈기 때문이다.

유신의 현손(玄孫)으로서 신라의 집사랑(執事郞)인 장청(長淸)이 행록(行錄) 10권을 지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만들어서 넣은 말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일부 삭제해 버리고 기록할 만한 것들을 취하여 전(傳)을 만들었다.

《삼국사기》 제43권 열전 제3 김유신 하,

그래서 김유신 열전 초반부에는 군자불어 괴력난신(君子不語怪力亂神)과 술이부작(述而不作)에 따라서 작성된 삼국사기의 내용과는 전혀 동떨어진 전설들이 등장하며, 당시 허구헌날 백제에게 개털렸다는 신라본기의 기록과는 정반대로, 김유신 열전에는 김유신이 가는 곳마다 승리를 이끌어 낸다고 나와 와있는 등 앞뒤 기록이 안 맞는 경우가 발생했다.

한마디로 김유신과 같이 통일신라 시대의 주역의 자료도 빈약한 상황이었다는 걸 알 수가 있다.

연개소문도 관련된 자료의 부재로 《삼국사기》 '연개소문 열전'은 《당서》의 연개소문 관련 대목을 거의 그대로 복붙해버렸다.

그 때문에 당고조의 이름인 이연(李)을 피휘하느라 천개소문(蓋蘇文)이라고 적은 것을 그대로 가져와 버린 웃지 못할 실수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한때 교과서 등에 연개소문이 천개소문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본 열전이 기본적으로 적대국이 남긴 기록인 까닭에 연개소문의 부정적인 모습들을 실상보다 훨씬 과장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은 더 큰 문제가 된다.

그 외에 본기나 다른 문헌에서 전재하지 않은 독자적인 전기를 가진 사람은 온달과 도미 단 두 명뿐이다.

위에 나왔듯이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은 후손들이 쓴 행장을 복붙했고, 고구려의 명장 중 한 명인 안시성주는 김부식이 그렇게 위대한 영웅의 이름을 알지 못해서 한탄스럽다는 평(而史失其姓名 與楊子所云 齊魯大臣 史失其名 無異 甚可惜也)을 삼국사기에 남겼다.

이런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 기록도 사라진 판에 다른 이들의 기록이 남아있을 확률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열전 중에서는 이름만 언급되어 있고 행적이 없다고만 적힌 인물들도 있다.

박인범(朴仁範), 원걸(元傑), 거인(巨仁), 김운경(金雲卿), 김수훈(金垂訓) 등은 글이 전하는 것은 조금 있으나 역사기록에 그들의 행적이 없으므로 전기를 만들 수 없다.

朴仁範元傑巨仁金雲卿金垂訓輩 雖僅有文字傳者 而史失行事 不得立傳


삼국사기 제46권 열전 제6 - 박인범, 원걸, 거인, 김운경, 김수훈 등

굳이 쓰지 않아도 됐을 이야기를 삼국사기에 남긴 행적만 봐도 김부식이 열전을 편향적으로 쓴 게 아니라, 박박 긁어모아서 쓴 게 현재의 삼국사기였다는 것이다.

개별열전은 구체적인 일생이 담겨있어야 저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예로 거인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진성여왕을 비판하는 글을 쓴 것으로 몰려 옥고를 치뤘다가 전부로 왕(王)이라는 성씨도 삼국유사에만 등장하는 내용이며 그 외의 내용은 삼국사기와 동일하다.

즉 위의 기록에도 나와 있지만 거인에 대한 "글이 전하는 것은 조금 있으나 역사기록에 그들의 행적이 없으므로" 열전을 만들 분량이 나오지 않아 열전을 만들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수정하면 식민사관?

 자세한 내용은 삼국사기 초기기록 수정론 식민사관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여타 문제점,

태조대왕을 비롯한 삼국 초기 왕들의 재위 기간이 지나치게 길게 나타나는 문제등이 있어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설'이 비중있게 제기되기도 했다.

고구려, 신라, 백제 할 것 없이 《삼국사기》를 펼쳐보고 왕들의 재위 기간, 출생 연도를 하나하나 따져보면 왕들의 나이가 실로 예술이다. 

고이왕처럼 아버지가 죽는 해에 태어났다고 쳐도 120살이 넘게 살기도 하고, 심지어는 석탈해와 같이 아예 태어나기 전부터 활동한 사람도 있고, 대무신왕처럼 어머니가 죽은 뒤 수년 뒤에 태어난 사람도 있다.

편찬자들의 실수도 있겠지만 그전에 김부식이 인용한 원사료들부터 문제가 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예를 들어 백제는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개국 이래 문자로 사실을 기록한 적이 없다가, 근초고왕 때에 이르러 고흥이 처음으로 『서기(書記)』를 썼다고 되어있다.

즉 그 이전은 글로 쓰지 않고 기억에 의존해 입에서 입으로 전했을테니 근초고왕 이전 시대 백제의 기록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 원사료도 또다른 고대 사서인 《일본서기》처럼 백제사를 미화하기 위해 의도적인 윤색까지 가해졌던 책일 가능성도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불신론에 의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70~80개의 소국이 병립된 것으로 묘사되는 2~3세기에 백제와 신라가 각각 한반도 서남부 지역과 동남부 지역을 석권한 집권 국가임을 드러내는 초기 기록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사학계 내부에 팽배했다.

이러한 기류는 풍납토성 발굴을 계기로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이후 신라의 나정/신궁 유적 발굴로 인해 어느 정도 학설이 수정되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해체 국면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최근의 발굴 조사 결과는 영산강 유역에 5세기까지 독자적인 정치 세력이 존립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 시조인 온조왕대 이미 마한을 아울렀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배치되는 모습을 보인다.

사실 삼국의 초기 역사에 대한 기술은 건국자에 대한 미화 등을 목적으로 후대의 윤색이 들어갈 여지가 크기 때문에 신뢰성이 낮을 수밖에 없다.

훨씬 후대의 국가인 조선왕조의 경우에도 용비어천가나 태조실록은 미화와 과장이 많은 것처럼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지인데 특히 고대는 문자기록시대 이전의 이야기를 입에서 입으로 전한 것이므로 더욱 그렇다.

정치적인 이유에서 직필하지 않고 어물쩍 넘긴 부분이 있는데 궁예는 901년 고려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혹은 사실상의 국가 상태에서 왕국을 선포하였)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나 궁예 열전에서는 901년 왕을 칭한 사실만 기록하였다.

김부식 본인이 소속된 국가였던 왕씨 고려의 정통성이 훼손되니까 이 부분에서 객관성을 찾기는 힘든 면이 있다. 

왕건의 정통성과 당시 고려인들의 역사관을 생각하면 그렇게 서술한 것이 당연하긴 하지만 삼국사기를 액면 그대로 믿는 것은 곤란하다는 증거이다.

편찬 목적이 아예 다른 《삼국유사》에는 연표에 궁예가 고려라는 국호로 901년 건국한 것이 명확히 기재되어 있다.

고려사에선 식화지가 있을 정도로 신라의 문란한 토지제도까지 비판했지만 삼국사기에선 토지제도에 큰 이야기가 없었다.

이후 이제현은 고려 경종 평가에서 역분전이 신라의 문란한 토지제를 옛날 관료전처럼 역분전으로 정한 걸 미봉책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전시과를 그나마 높이 평가했는데 전시과마저도 후세에 고칠게 많다고 비판했다.

삼국 시대의 토지 제도에 대해 당시에는 남은 기록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사 식화지의 내용이나 이제현의 사평을 통해서 반대편 측에선 신라의 관료전이 신문왕 시절에 시행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꽤나 뜻이 깊은 논평이라고 보여진다.

나름대로 이제현의 사평과 고려사 식화지 서문은 이를 뒷받침하고 고대의 토지제도에 관련된 교차검증이 한발 더 앞서갔다는 것이다. 

이제현 또한 신라가 문란하다고 깠을 뿐이지 신라의 토지제도가 무엇인지는 전혀 말하지 못하고 있다.

직관지나 열전만 보아도 복원하지 못한 과거의 사실이 너무나 많다.

열전에 별의별 듣보잡 인물이 다 들어가 있다는 비판도 있다.

백제와 싸우다가 죽은 여러 듣보잡 인물들의 열전들이 다 있다.

열전은 한정된 지면에서 중요한 인물들의 사적을 간단히 돌아보는 곳이지 이런 사람들의 공을 찬양하는 곳이 아니다.

실제로 고려사 열전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듣보잡들은 그룹으로 묶어 간단히 논하고 만다.

그러나 기전체의 열전은 원래 주관이 상당히 들어가는 부분이므로 듣보잡 인물이 들어갔다고 비판할 수 없자는 견해 또한 있다. 

기전체의 정석인 사기에 실린 열전에는 백이손자오자서등 우리가 역사책에서 익히 이름을 들은 유명한 이들도 있는 반면 오왕비나 장창처럼 생소한 이들의 단독 열전도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을 두고 듣보잡을 단독으로 열전에 실었다고 비아냥대는 경우는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듣보잡의 기준이 지극히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오왕 유비는 종친이며 나중에 오초칠국의 난 을 일으킨 자이니 당연히 기록될 만하며, 장창은 승상도 지냈고 음양가 철학의 대가로서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열전의 수록 기준은 편찬자의 의도에 따라 나뉘는 것이지 "이런 사람만 들어가야 올바른 사서다!"라는 것은 없다.

충, 효등 유교적 사상에 입각해 저술된 삼국사기의 경우에는 당연히 열전에도 그런 의도가 담겨서 편찬될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현대의 일부 사람들이 듣보잡으로 취급하는 위인들도 열전에 수록된 것이다.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는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고구려의 영웅 안시성주의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아 삼국사기 사관이 이름을 알지 못해 한탄할 정도였고, 김유신의 경우에도 기록 부족으로 가문의 행록을 줄이고 줄여서 열전에 올릴 판이었다.

한마디로 열전에 이름을 남긴 이들은 교훈과 더불어 기록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김부식이 의도적으로 유명한 재상들을 빼서 수록했다는 주장은 그 근거가 무척이나 부족하다. 

연개소문은 아예 중국측 사서를 그대로 옮겨와 성이 강제개명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고 을지문덕과 장보고의 경우에는 중국의 기록을 참고할수 밖에 없었다는 아쉬움을 드러내는 대목이 삼국사기에 남아있다.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지략과 장보고(張保臯)의 용맹이 있었어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다면 모두 사라져 후세에 알려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삼국사기』 제43권 열전 제3 김유신 하

이런 상황에서 다른 재상들의 세세한 기록이 남아있을 리는 거의 없다.

또한 고구려의 기록을 인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집이 동명성왕부터 고국원왕 대까지의 일을 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을파소나 명림답부처럼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그 시기에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기록 부족으로 재상들의 이름이 빠졌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하물며 역사서 편찬 기록이 거의 없는 백제는 더욱 그 기록이 부족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史記(사기)'의 총권수는 50권으로, 1권의 분량이라야 몇 장이 되지 못하고 옛날 舊版(구판)의 粧冊(장책)으로는 통히 9책 내지 10책을 넘지 못하고, 근래 新活字版(신활자판)의 책자로는 1책 내지 2책에 지나지 않는 적은 분량의 책이다. 

三國(삼국)의 歷年(역년)이 오래고 그간에 발생한 역사적 사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史記(사기)'의 內容(내용)·卷帙(권질)이 이와 같이 빈약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면 도대체 史料(사료)가 부족했던 까닭이다. 

돌아보건대, 三國(삼국)은 일찍이 각자의 역사를 기록 또는 편찬한 일이 종종 있었던 것이다.

즉 고구려는 國初(국초)로부터 한문을 사용하여 일찍이 『留記(유기)』 백권의 史書(사서)가 있었던바, 嬰陽王(영양왕) 11년(서기 600년)에 太學博士(태학박사) 李文眞(이문진)으로 하여금 『留記(유기)』를 刪修(산수)하여 新集(신집) 5권을 만들게 하였고, 백제는 近肖古王(근초고왕) 30년(서기 375년)에 博士(박사) 高興(고흥)을 얻어 國史(국사)를 닦게 하여 백제의 書記(서기)가 있게 되었다.

『日本書紀(일본서기)』 중에 인용된 「百濟本記(백제본기)」·「百濟紀(백제기)」·「百濟新撰(백제신찬)」 등도 모두 百濟人(백제인)의 손에 된 史書(사서)일 것이다.

신라는 眞興王(진흥왕) 6년(서기 545년)에 大阿湌(대아찬) 居柒夫(거칠부) 등을 명하여 國史(국사)를 編修(편수)케 한 일이 있거니와, 이후에도 누차의 修史(수사)가 있었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三國(삼국)의 史籍(사적)은 兵亂(병란)에 이미 湮滅(인멸)된 지 오래되어 金富軾(김부식) 당시에는 제2차 내지 제3차적 史料(사료)인 古記類(고기류)가 存傳(존전)하여, 그것과 또 中國史書(중국사서) 중에 실린 記事(기사)를 採取(채취)하여 편찬한 데 불과하였던 것이다.

이병도 삼국사기 해제. 서문.

앞서 예시로 언급된 고려사의 경우 조선이 건국한 직후 편찬을 준비했고 그 결과 상세한 기록들이 고스란히 역사책에 담길수 있었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삼국통일전쟁이 끝나고 500여 년, 통일신라가 멸망하고도 200여 년이 지난 후에나 작성된 역사책이다.


삼국사기의 구성,

총 50권 9책으로, '권'은 내용 구성상의 단락을 나눈 단위이고 '책'은 물리적으로 책 한 권을 묶은 단위를 뜻한다.

즉 현대인의 관점에서 재구성해 말하자면 목차가 50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총 아홉 권의 책인 셈.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

자세한 내용은 진삼국사기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삼국사기》를 올리는(進) 표문(表)으로, 김부식이 썼다. 자세한 내용은 진삼국사기표 참조. 참고로 현존하는 《삼국사기》 판본에는 이 부분이 전하지 않으며,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시문선집인 《동문선》에 실려있다.


본기,

본래 본기는 기전체 역사서에서 중화 세계를 지배한 통일 국가와 천자에 대한 기록을 쓰는 것인데, 김부식은 한국사가 중국사에 못지 않다는 점과 셋 중 어느 한 나라만이 아닌 대등하게 계승하였음을 강조하기 위해 3개국 모두를 본기에 편입해 썼다.

상술된 대로 고려사에서는 본기가 아예 없고 모든 고려왕을 세가에 넣었다는 점에서 대조된다.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


연표,

도표 형식으로 사건을 기록한 것.


잡지,

당시의 생활상이나 제도, 풍속 등을 기록한 사회사 기록.

  • 잡지
    • 권32 제사, 음악
    • 권33 색복(옷), 거기(車騎: 수레와 마구), 기용(器用: 그릇), 옥사(屋舍: 가옥)
    • 권34·35·36 지리 1,2,3 신라
    • 권37 지리 고구려, 백제
    • 권38·39·40 직관 상,중,하: 관직에 대한 기록이다.


열전,

역사에 이름을 남겨 모범, 반면교사가 되는 여러 인물에 대한 기록. 마지막 10권은 역적을 다룬 반역열전에 준하게 구성하고, 나머지 앞의 인물들은 인물의 중요성을 칭찬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수록되어 있다.

또한 본기와 다르게 열전은 당대 전해져오는 내용을 가공없이 기록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한 예로 가야의 경우에도 본기에는 금관국반파국안라국등 다양한 국가들을 가라혹은 가야로 일괄적으로 통칭하고 있으나 열전에는 해당 국가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 있다. 

포상팔국의 난의 경우에도 본기에는 “가라국 왕자가 도움을 요청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열전인 물계자전에는 “아라국이서 도움을 요청했다.”라고 명시해놓았다. 

김유신열전은 아예 후손이 쓴 열전을 허무맹랑한 것을 제외하고 축약해서 옮겨 놓았기 때문에 당대의 기록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편찬자,

  • 참고(叅考)
    • 김영온(金永溫)
    • 최우보(崔祐甫)
    • 이황중(李黃中)
    • 박동계(朴東桂)
    • 서안정(徐安貞)
    • 허홍재(許洪材)
    • 이온문(李溫文)
    • 최산보(崔山甫)
  • 그 외
    • 김충효(金忠孝)
    • 정습명(鄭襲明)
    • 김거두(金居斗)
    • 최득경(崔得冏)
    • 민개(閔開)


발문,

사기와는 다르게 삼국은 제후를 봉하지 않았으므로 제후들의 역사를 다루는 세가가 없다.

고대 삼국은 자국만의 작위를 쓰고 왕작, 공작, 후작 등 오등작을 봉하는 등 각국 국왕이 자국 내에서 천자로서 군림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진짜 주나라 마냥 땅을 떼준 게 아니라 '제후 칭호'를 봉한 것이다.

삼국은 부족 연합체, 소국 연합체에서 조금씩 진화해 군현제 국가로 성장했지 봉건제 국가로 성장하지 않았다.


북한이 보는 삼국사기,

북한의 교과서인 조선력사에서는 지금의 한국 사학계와 달리 신라 사관을 토대로 신라에게 우호적으로 쓰인 책으로 비판되고 있지만 역사적 가치는 인정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왕조사로 서술된 책으로서 신라중심으로 세나라력사를 서술하고 외국자료를 무비판적으로 인용리용한것,

신라의 사대외교를 긍정한것, 삼국이전 즉 고대사자료들을 전혀 서술하지 않은것 등 근본적인 결함을 가지고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옛 력사책가운데서 제일 오래된것으로서 삼국시기 력사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로 된다.

조선력사 -


그 외

2013년도 도쿄대학 본고사 국어(일본어)의 고문(古文) 파트에서 삼국사기가 지문으로 등장하였다.

중국고전의 출제가 대부분인 해당 파트에서 중국 외의 고전이 나온 건 이례적.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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