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9일 월요일

부산깡통시장"(부평)1

부평동 깡통시장은 
부산광역시 중구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에는 용두산이 있고, 동쪽에는 광복동이 인접해 있다. 
조선시대에는 부민동과 함께 동래구의 부평리였다. 
풀밭과 갈대밭이 많은 지역이었지만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면서 부산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부산이 1914년 부산부가 되었을 때 부평정이 되었다가 1947년 동제로 바뀌면서 부평동 1, 2, 3, 4가로 이름이 바뀌었다. 

1995년 부산광역시가 되면서 중구 부평동 1, 2, 3, 4가가 되었다. 부평동은 거주 인구에 비해 유동 인구가 많은 곳으로 주민들 대부분이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 
부평깡통시장은 부산지하철 1호선 자갈치역에서 내리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남포사거리에서 접근하면 부평깡통시장과 국제시장이 마주하고 있는 길로 갈 수 있고, 부평교차로 방향에서 가도 된다. 
국제시장이 서기 전에 그 자리는 일본이 소개한 공터였다. 
미군이 부산으로 상륙할 것을 예상하고 전투가 벌어질 것을 대비한 그 공터에 일본인들이 떠나며 헐값으로 판 물품과 그들이 미처 가져가지 못한 물품들이 거래되기 시작했고, 말 그대로 도떼기시장이 형성되었다. 

부평시장은 이미 일제강점기 때부터 상설시장으로 시장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도떼기시장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해방의 어수선한 시기를 보냈다. 당시 부평정시장을 운영하던 일본인들의 점포는 한국인들이 차지했다. 
서로 닮은 점이 많은 부평시장과 국제시장의 차이점은 여기에 있다. 
해방 이후 많은 일본인들은 서둘러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본국으로 가져갈 수 없는 것이나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많은 물건을 시장에 내놓았다. 그때 큰 시장으로 성장한 것이 부평시장과 마주하고 있는 국제시장이었다. 
부평시장은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상권이었다. 따라서 부평시장은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물품보다는 그들의 상권을 헐값에 물려받았다. 
하나의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이 부산을 상징하는 먹을거리인 ‘부산어묵’이다. 
어묵은 말 그대로 생선[]을 묵처럼 만든 것이다. 일본어로 어묵은 오뎅이다. 
부평시장은 일본인들을 상대로 어묵을 많이 팔았던 곳이었다. 
오늘날 부평시장에는 3대째 어묵을 팔고 있는 전문점이 있는데 그 어묵가게의 시작이 1945년이었다는 것이 이러한 사정을 알려준다.  

부평시장은 이미 일제강점기 때부터 상설시장으로 시장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도떼기시장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해방의 어수선한 시기를 보냈다. 당시 부평정시장을 운영하던 일본인들의 점포는 한국인들이 차지했다. 서로 닮은 점이 많은 부평시장과 국제시장의 차이점은 여기에 있다.

부평시장이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은 떠난 일본인보다는 새로 들어온 미군에 의해서였다. 오늘날 부평시장의 이름인 부평깡통시장이라는 말이 생긴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깡통이라는 말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통조림과 과자를 비롯해 다양한 물품들을 팔면서 붙은 이름이었다. 미군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70년대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이 미군의 전투식량인 시레이션(C-ration)을 비롯한 다양한 외국 물품들을 부평시장을 중심으로 판매하면서 깡통시장의 이름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부평깡통시장은 그 이후 수많은 외국의 물품을 다루는 대표 시장으로 성장했다. 그 시장을 지탱한 것 중 하나가 일본의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는 관부연락선이었다.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부산으로 건너올 때, 그리고 해방으로 부산을 떠나야 할 때 탔던 배도 이 관부연락선이다. 

관부연락선은 1945년 미군의 공습과 어뢰 공격으로 통행이 중단되었다가 1970년 6월에 다시 재개되었다. 베트남전쟁 특수로 급성장을 한 부평깡통시장의 상인들이 그 이후 새로운 수입처로 삼은 것이 때마침 통행이 재개된 관부연락선을 통해 연결된 일본이었다. 이때 과거 미군과 베트남 참전 용사를 대신한 것이 일명 보따리장수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물건을 실어 날랐다. 

시모노세키에는 이들을 상대로 하는 교포들이 있었다. 이들에게 싸게 물건을 떼서 부평깡통시장에 얼마간의 이익을 남기고 넘기면 깡통시장 상인들이 다시 이윤을 붙여 일반 소비자들에게 판매하는 구조였다.  

판매 구조는 공식적으로 세관을 통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합법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때때로 밀수품 단속을 통해 부평깡통시장은 된서리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보따리장수와 깡통시장 상인들은 법망 위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하면서 물건을 들여오고 팔았다. 

수입 개방이 이루어지면서 과거와 달리 소비자들이 외국 제품을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되자 부평깡통시장은 조금씩 힘을 잃어 갔다. 그렇다고 해서 시장이 쇠퇴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부평깡통시장에는 수많은 물건들이 즐비하고, 향수가 담긴 이야깃거리도 가득하기 때문이다. 물자가 풍부하지 못했던 시대에 부평깡통시장은 소비자들에게 신세계와 다름없었다. 

최첨단 전자제품부터 양주, 담배 등의 기호식품까지 흔히 말하는 ‘외제’ 가운데 구하지 못할 제품이 없었다.부평깡통시장이 다시 전국적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2013년 10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야시장 때문이었다. 흔히 깡통시장야시장으로 불리는데, 연중무휴로 저녁 7시 30분부터 자정까지 불야성을 밝힌다. 깡통시장야시장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음식을 선보이고 있다. 

과거 깡통시장에서 세계의 물품들을 구입할 수 있었다면 이제 깡통시장야시장에서는 세계 각지의 다양한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다. 여기에 액세서리, 건강식품 등 다양한 물품들이 함께 팔린다. 또한 민속놀이와 거리공연 등이 선보이며 부산의 밤 문화를 선도하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2016년 현재 부평깡통야시장은 평균적으로 평일 3,000여 명, 주말에는 7,000여 명의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부평깡통시장은 모두 6개의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다. 깡통야시장거리는 시장 4번 출구, 패션거리는 시장 2번 출구, 먹자거리는 시장 1번 출구로 들어가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야채와 청과, 육류, 수산물, 곡류, 반찬, 의류와 침구류, 잡화 등 다양한 품목의 물건들을 판매 한다.

부산깡통시장"(부평)

깡통시장"
시장은 부산의 중심에 자리한 전통시장이다. 국제시장, 자갈치시장과 함께 부산을 대표하는 시장이라 할 수 있다. 

2013년부터 국내 최초로 개장한 야시장은 세계의 다양한 전통음식과 먹을거리를 다양하게 맛볼 수 있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부산 중구의 부평동이 발전한 것은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의한 개항 이후로, 일본인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시가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부평동에는 과거부터 열리던 장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그곳에서 장을 보게 되면서 일한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사설시장이 개설되었다.일제가 정한 시장규칙에 따라 1915년 일한시장은 부산부에서 운영하는 공설시장으로 바뀌었고, 장옥도 새롭게 정비해서 부평정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부평정시장은 국내 최초의 공설시장으로 1920년대 시장의 규모를 넓혀가며 큰 시장으로 성장했다. 해방으로 일본인들이 물러간 이후에는 부평시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을 취급하면서 장세를 키웠다. 

부평시장은 베트남전쟁 특수로 크게 성장했는데, 당시 미군의 식량을 비롯한 다양한 군수품을 팔았다. 부평시장은 미군 물자인 통조림 등을 많이 팔았기 때문에 깡통시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일본을 통해 세계 각국의 물자를 들여와 판매해 큰 인기를 끌었다. 2013년에는 국내 최초로 야시장을 개설해 세계의 전통음식들과 먹을거리를 팔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부평동은 개항하기 전까지 강의 입구에 위치해 있어 갈대밭과 풀밭이 많았다. 부평이라는 말은 부산의 옛 지명인 부산()과 하구의 갈대밭과 풀밭을 의미하는 평()이 합쳐진 말이다. 부평시장은 시장이 있는 지역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한편 부평시장은 부평깡통시장이라고도 불렸는데, 미군 부대에서 나온 통조림 같은 깡통 제품을 많이 거래하고 판매했기 때문이다. 

개항 이후 부산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부산의 중심은 조선시대에 초량왜관이 있던 오늘날의 부산 중구로 옮겨갔다. 
용두산공원 주변의 부평동, 광복동, 남포동, 신창동 등 오늘날의 부산 중구에 해당되는 지역은 개항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갈대밭과 풀밭이 많은 지역으로 ‘샛디’라고 불렸다. 

부산이 개항을 하자 일본인들이 몰려왔고, 이들이 주로 거주한 곳이 부산 중구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곳은 일본 문화와 일본인들이 도입한 서양 문화가 활발하게 유입된 지역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극장이다. 

1876년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에 의해 개항하기 전까지 부산의 중심은 동래와 구포였다. 동래는 행정의 중심지였고, 구포는 낙동강 연안에 위치한 포구로서 낙동강 교역의 중심지였다.극장은 서양에서 발달한 문화로, 한국은 극장보다 마당극이 발달해 있었다. 

부산 지역에 개관한 극장은 1904년 행좌와 송정좌, 1907년 7월 부평동에 부산좌가 있다. 부산좌는 2층짜리 목조건물로 700~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였다. 주요 고객은 일본인들로, 활동사진의 시대가 개막되면서 다양한 영화들이 상영되었다. 그러나 부산좌는 1923년 3월에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부산의 중구가 오늘날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영화의 도시가 된 것도 부산좌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근처의 밭을 구입해서 장옥과 점포를 설치하고, 경찰의 허가를 얻어 1909년 일한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사설시장을 개설했다. 

‘일한’이란 일본과 한국을 의미한다. 일한시장은 1914년 일제의 시장규칙에 따라 시장의 부지와 건물을 부산부 당국이 임차해서 1915년 9월부터 장옥을 개축해 공설시장으로 바꾸었다. 이때 이름도 지역 이름에서 유래한 부평정시장으로 바꾸었다. 

부평정시장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개설된 공설시장이었다. 부평정시장이 있던 곳은 오늘날의 부평아파트 인근이었다.주요 고객은 일본인들로, 활동사진의 시대가 개막되면서 다양한 영화들이 상영되었다. 그러나 부산좌는 1923년 3월에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부산의 중구가 오늘날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영화의 도시가 된 것도 부산좌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부평동에는 원래 사거리시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개항으로 늘어난 일본인 거주자들이 이 시장에서 장을 보게 되면서, 그들을 대상으로 물건을 판매하는 상인 또한 늘어났다.부산부에서 부평정시장을 공설시장으로 개설한 것은 일본인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식재료나 잡화 등을 일본인들에게 10~25% 정도 할인해서 판매했다. 

일본인 거주자들이 늘어나면서 부평정시장은 1922년과 1924년에 주위의 도로를 수용해서 시장의 규모를 키웠다. 시장의 규모는 이후에도 계속 커져서 1927년에 4,233.9m2가 되었다. 1층 목조건물이었던 부평정시장은 건물 안팎에 점포들이 있었다. 1923년에는 건물 내에 125개, 바깥에 137개의 점포가 있었고, 1935년에는 건물 내에 92개, 바깥에 570개가 있었다. 

부평정시장은 매월 초하루를 빼고 매일 장이 서는 상설시장이었다. 1923년 초반 주요 거래 품목은 백미, 대두, 소금, 야채와 과일, 잡곡, 조수, 어류 및 해조, 직물 등으로 가장 많이 거래된 것은 백미(56만 9,000원)와 어류 및 해조(47만 2,600원)였고, 하루 거래액은 4,346원, 연 거래액은 180만 3,000원에 이르렀다. 

1935년에는 수백 명의 상인들이 곡물과 식료품, 해산물, 직물 등을 거래하며 하루 거래액이 6,500원, 연 거래액이 300만 원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커졌고, 부산을 대표하는 시장으로 성장했다. 일제강점기 때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늘어나고 도시가 커지면서 부평정시장 외에도 서구 대신동에 대신정시장이 1933년 1월 문을 열었다. 

대신정시장의 부지 면적은 2,692m2였다. 이 외에도 1930년대 중구 영주동, 동구 수정동에도 영주정시장, 수정정시장이 개설되어 성황을 이루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부평정시장은 동제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부평동시장, 부평시장이 되었다. 

해방은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것은 부평시장도 다를 것이 없었다. 해방이 되면서 강제든 자발적이든 해외로 나갔던 동포들이 귀환하기 시작했고, 부산은 인천 등과 함께 귀환의 주요 통로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해방의 기쁨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터진 한국전쟁 또한 한국 사회에 준 충격과 영향은 엄청났다. 전쟁 초반에 한국은 ‘낙동강전투’가 상징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낙동강 이남으로 밀려났다. 수많은 피란민들이 함락되지 않는 부산을 향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런 상황은 시장과도 관련이 깊은 인구의 변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해방 당시 40만을 헤아리던 부산의 인구는 한국전쟁 당시 2배 가까이 늘어나 88만까지 늘어났다. 인구의 급증은 부산이라는 도시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피란민들은 곳곳에 임시가옥인 판잣집을 지어 거주했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쳤다. 그 가운데 하나가 시장의 활성화였다. 

사회가 급격한 변화를 겪을 때 또는 위기에 빠졌을 때,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 흔히 말하는 암시장이다. 필요한 재화와 생필품을 얻기 위해 물물교환 형태로 시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부산의 시장은 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시장이 확대되고 성장하였다. 특히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중구가 그 중심지였다.  다음2부로.! 
https://youtu.be/fKNbbj5Mjic,

구포시장."

구포시장." 
조선 중기에 개설된 구포장의 명맥을 이은 유서 깊은 전통시장이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정기시장과 함께 장이 서며, 야채나 과일, 농산물, 수산물 등을 파는 골목 외에 약재와 가축을 파는 구역이 따로 있다. 

구포는 낙동강 하류에 자리 잡은 포구로 내륙과 해안에서 생산된 물산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이렇게 모인 물산이 낙동강을 따라 멀리 안동까지 오갔다. 구포는 이런 지리적인 이점을 잘 살려 크게 번영했던 곳이었으며, 감동창이라는 조창이 있어 세금으로 낼 곡물이 집산되는 곳이기도 했다. 

번영은 수로 교통에서 육로 교통으로 바뀌는 20세기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1905년 개통된 경부선이 구포역을 지나면서 여전히 교통의 중심지로 기능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구포는 해방되기 전까지 영남에서 가장 번성했던 포구 중 하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부산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구포는 주변으로 밀려났고, 구포시장도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성쇠를 함께했다. 

오늘날 구포시장은 상설시장과 정기시장이 조화를 이루며 여전히 큰 시장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특히 구포의 정기시장은 장날이면 3~5만 명이 찾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고 있고, 상설시장 역시 750여 개의 점포를 통해 고객을 맞고 있다. 

2011년에는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선정되었고 ‘정()이 있는 구포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구포는 오랫동안 동래에 속한 곳이었으나, 부산의 중심이 동래에서 부산으로 옮겨가면서 북구에 편입되었다. 

과거 구포는 낙동강 하류에 자리 잡은 나루터였으며, 조선시대 좌이면이었던 구포는 오늘날 구포동이 되었다.구포()는 인근에 있는 범방산 줄기가 거북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구포의 어원에 대해 두 물이 만나는 곳 또는 갈라지는 곳에 자리한 큰 나루에서 기원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탓에 구포에는 유난히 거북이 들어간 이름이 많다. 구포시장은 지역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구포는 오랫동안 동래에 속한 곳이었으나, 부산의 중심이 동래에서 부산으로 옮겨가면서 북구에 편입되었다. 과거 구포는 낙동강 하류에 자리 잡은 나루터였으며, 조선시대 좌이면이었던 구포는 오늘날 구포동이 되었다. 

구포()는 인근에 있는 범방산 줄기가 거북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구포의 어원에 대해 두 물이 만나는 곳 또는 갈라지는 곳에 자리한 큰 나루에서 기원했다는 주장도 있다.

순대.

순대.=(각지역)
소나 돼지의 창자 속에 여러 가지 재료를 소로 넣어 삶거나 쪄서 익힌 음식으로 돼지창자를 이용하여 만드는 것이 보편적인데, 어류를 이용한 순대도 있다. 
순대는 밀가루를 뿌려 주물러 씻어 물에 담갔다가 물기를 닦은 돼지 내장에, 데쳐 다진 숙주,배추, 으깬 두부, 선지를 된장, 간장, 새우젓, 다진 파.마늘 등으로 양념하여 채워 넣고 끝을 봉함.찜통에 찌거나 삶은 것입니다. 

순대에는 돼지 창자에 소를 채운 돼지 순대, 동태의 뱃속에 소를 채운 동태 순대와 오징어의 몸통에 소를 채운 오징어 순대가 있습니다. 

찹쌀순대 (당면순대, 시장순대, 포장마차순대 등)  지금 순대라고 하면 바로 나오는 그것이다. KBS '한국인의 밥상'에서 방영된 내용에 따르면, 한국 전쟁 이후 당면공장에서 당면 자연건조 중 떨어진 부스러기들의 처리를 고민하다, 순대 재료로 넣어먹을 생각을 하면서 탄생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전후 시기 남한에서 만들어진 순대라 북한 탈북자들은 남한에서 받은 문화충격을 이야기할때 이 당면순대를 언급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순대와 달리 너무 생소해서 귀순한지 수년이 지나도록 못 먹는 탈북자도 있을정도. 양장/돈장에 당면과 기름을 바탕으로 채소와 찹쌀 및 돼지피를 넣은 소를 채워 만든다. 

연세가 되는 어르신들 중에서는 "순대는 식용비닐로 만들어져서 몸에 안 좋다"며 아이들이 순대 먹는 것을 말리기도 하는데, 정말로 식용비닐로 만들었던 적이 있었는지에 관해선 의견이 분분하고, 돼지 창자는 항상 싸게 남는 부위라 그것보다 더 비싼 식용비닐로 순대를 만들 이유가 없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면, 순대 끄트머리를 보면 된다. 창자 특유의 끄트머리 형태와 식감은 식용비닐로는 절대로 재현이 불가능하다. 

고기순대(북한순대, 평안도 평양시) 평양의 향토음식으로, 소창(가끔가다 막창)에 돼지고기와 찹쌀, 선지 및 각종 채소를 넣어 만든다. 현재 먹는 순대의 오리지널 버전이라 보면 되겠고, 순대의 기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식 명칭도 그냥 순대아바이순대 (함경도 함흥시) 함경도 지방의 향토음식이다. 평양과는 달리 대창으로 만들고, 어슷썰기 때문에 상당히 큼지막하게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전쟁 때 남한으로 피난 온 함경도민이 주로 화천군, 속초시, 고성군 등지에 정착하여 명맥을 잇고 있다. 
북한에서 '아바이 순대'라고 하면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데, 본래 이 음식의 이름은 그냥 순대일 뿐이다. 다만 접두어로 붙은 '아바이'는 '아버지'나 '아저씨'를 뜻하는 존칭격 사투리로, 명확한 기원이 없는 것으로 보아 크기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오징어순대 (강원도 속초시) 속초로 피난 온 함경도민들이 순대 재료인 돼지를 구하기 힘들어 만들어 먹은 음식으로, 현재는 속초를 대표하는 향토음식이 되었다. 당연하지만 오징어에는 피가 없으므로 자연스레 속재료가 검붉지 않다. 먹물을 쓰면 어떨까? 또한 오징어는 돼지창자와 달리 점착력이 없어, 단순히 썰어서 먹으면 속재료가 쉽게 튀어나가는 단점이 있는데,  이를 기름에 지짐으로써 해결했다. 

원래는 단순히 찹쌀의 점착력 및 누룽지화를 통해 점착시켰으나, 현재는 편하다는 이유로 계란 옷을 입혀 부쳐내는 형태로 바뀌었다.  현지인들은 계란을 입혀 지지면 느끼함이 커져서 맛이 떨어진다고 조언한다.  

오징어의 몸통에 찹쌀과 다진 오징어, 각종 채소를 넣어서 만든다.  
속초 이남의 관동지방(삼척, 강릉 등)에서는 이걸 아바이순대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 온 함경도 실향민들이 모여 살던 아바이 마을에서  먹는 순대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명태순대 (함경도 함흥시)위 오징어순대와는 달리, 함경도 해안가의 향토음식이다. 명태를 구하기 쉬운 속초에서 구한오징어 으로사용 합니다. 

백암순대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삶은 채소와 고기, 기타 돼지고기 부속물 등의 큼직큼직한 소가 들어간 고기순대로,  터질 듯한 비주얼과 식감이 특징. 백암장에서 유래했다. 병천순대 (충청도 천안시 병천면) 고기는 거의 안 들어가거나 아예 빼버리고, 채소와 찹쌀로만 만드는 순대이다.  

충남의 경우 병천순대에서 파생된 것으로, 찰밥이나 당면이 거의 없다시피 하고 선지와 콩나물이 주를 이룬다고 한다. 비록 파생품이지만, 맛이 지나치게 달라서 전혀 다른 요리로 구분하고 있다. 꾸득꾸득하게 말리기도 한다. 

병천 5일장에서 주로 만들어 팔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피순대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구 충청도 연기군 조치원읍),충남 논산시 연산읍 연산리 전주시 익산시 등등) 꽤나 여러 곳에서 보이는 순대로, 찹쌀이나 당면이 아닌 선지가 주를 이루는 순대이다. 전주의 경우 남부시장에서 팔아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연변순대 (조선족 순대) 주로 북한에서 피밥이라 부르는 것을 재료로 한 순대이다. 몰론 피밥의 피는 돼지 피. 정말 고기나 채소 같은 것들은 한 쪽도 안 들어가고, 그저 쌀과 선지만 들어간 것이 특징이다.  일반적인 찹쌀순대와 달리 저렴해서, 돈 없으면 한 끼 식사로도 나름 괜찮지만, 문제는 순대만 먹으면 물린다는 것이다. 

선지에 버무린 맨밥을 먹는 기분과 비슷하다고(…). 그래서 연변 사람들은 보통 간장, 파, 고추 등을 넣은 양념장에 이 쌀순대를 무쳐먹는다.  보통 중국의 조선족 식당에서 순대라고 파는 것들이 이 연변식 순대. 돼지 창자에 숙주 ·우거지 ·찰밥 등과 돼지 선지를 섞어서 된장으로 간한 것을 채워서  삶은 음식. 지역에 따라 순대를 만드는 방법과 맛이 다르다. 

평안도와 함경도에서는 아바이순대를 만든다. 돼지 창자를 뒤집어 깨끗이 씻어 내고 소금으로 주물러 씻어 하룻밤 물에 담가 놓는다. 찹쌀을 충분히 불려서 삶고, 숙주도 데쳐서 다지고 물끼를 꼭 짠다. 
찹쌀밥을 식혀서 먼저 선지를 넣어 섞은 다음 준비한 채소를 섞고 갖은양념을 한다. 이때 간은 된장 ·간장 ·소금으로 한다. 돼지 창자를 건져 물기를 닦고 깔때기를 대고 준비한 소를 밀어 넣어 채우고 양쪽 끝을 실로 묶는다. 

끓는 물에 된장을 풀고 순대를 삶는다. 30분 정도 지나면 대침으로 순대 곳곳에 침을 주고 계속 삶아 1시간 정도 지나면 꺼내 식혀서 둥글게 썰어서 양념 소금과  함께 내놓는다. 

강원도에서는 돼지 창자 대신 오징어를 사용하여 오징어 순대를 만든다. 소는 쇠고기, 데친 숙주, 고추를 다지고 두부 으깬 것과 달걀을 섞고 파 ·마늘 ·깨소금 ·후춧가루 ·참기름으로 양념하여 오징어 몸 속에 넣은 다음 실로 꿰매서 끓는 물에 삶거나 찜통에서 찐다.  
다 익으면 식혀서 썰고 초장과 함께 대접한다. 그 외 충청도 병천순대, 전라도 암뽕순대 등 지역마다 특색 있는 순대가 있다.

배추김치.

배추김치.
배추를 주재료로 하여 소금에 절여 헹군 뒤 기호에 따라 여러 가지 양념을 넣고 담그는 김치,  1850년 무렵 중국 산둥성에서 속이 꽉 찬 통배추를 들여와 왕십리에서 재배한 이후부터 배추 켜켜이 속을 넣는 김치가 일반적인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배추는 뻣뻣한 줄기 부분에 간이 배도록 6~7 시간 이상 소금물에 절여서 사용한다. 배춧속을 넣을 양념으로 무채와 쪽파, 미나리, 갓 등의 야채와 새우젓, 멸치젓 등의 젓갈, 고춧가루, 마늘, 생강 등을 쓰고 소금과 감미료로 간을 맞춘다. 

감칠맛을 내기 위해 찹쌀풀, 생새우, 굴 등을 넣기도 한다. 양념과 지역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발달하였는데 통배추김치, 갈치젓배추김치, 유자배추김치, 제주도배추김치, 백김치, 평양식배추김치, 전라반지 등이 대표적이다.

김치를 담그는 방법은 각 지역에 따라 전래되어온 독특한 방법들이 있으나 최근에는 공장에서 생산되는 김치의 비중이 점차 증가되어 김치 만드는 방법이 간소화·표준화 되고 있다. 

김치 만드는 방법" 은 크게 3가지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중 배추김치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배추를 소금에 알맞게 절이면 소금에 있는 마그네슘염이나 칼슘염이 배추의 펙틴(pectin)과 결합하여 아삭아삭한 맛을 더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짜게 절이면 비타민 C와 같은 수용성 성분과 당분이 많이 빠지고 양념이 잘 스며들지 않아 맛이 좋지 않다. 일반적으로 배추는 농도 10~15% 소금물에서 5~6시간 정도 절이는 것이 적당하다.

먼저 무는 채 썰고, 마늘과 생강은 껍질을 벗겨 곱게 다지며 파, 미나리, 갓 등의 부재료는 알맞은 크기로 썰어 둔다. 준비한 재료에 건더기를 다진 새우젓과 고춧가루를 넣고 고루 버무려 소를 만든다. 

준비한 소를 절인 배추 잎사귀 사이사이에 펴 바르고 끼워 넣으면 김치가 어느 정도 완성된다. 소를 채워 넣은 김치는 배추 겉잎으로 잘 싸서 용기 안에 차곡차곡 넣은 뒤에 무거운 돌로 눌러 공기가 있을 만한 공간을 없애주고, 배추가 김치국물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해야 김치가 물러지지 않고 잘 숙성될 수 있다. 

소금에 절인 배추를 여러 번 씻어 물기를 뺀 다음 소를 넣는다. 소는 여러 가지 양념과 부재료를 섞은 것으로 김치의 종류와 지역, 계절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만들 수 있으며 김치의 맛을 결정하는 중요한 과정이다.김치의 숙성과정에서는 소금의 농도와 온도가 매우 중요한데, 김치를 숙성하는 온도가 낮고 소금의 농도가 높을수록 숙성기간이 오래 걸린다. 

일반적으로 가장 맛있는 숙성온도는 4~5℃ 정도에서 천천히 숙성시키는 것이다. 소금의 농도는 겨울 김장에는 2~3%, 봄에는 4~5%, 여름에는 7~10% 정도로 하는데, 소금의 농도가 너무 높거나 오래 절이면 배추나 무의 단맛을 잃어 맛이 떨어진다. 김치가 숙성되는 과정은 재료 속의 탄수화물이나 단백질 등의 유기물질들이 효소에 의해 분해되고, 분해된 당분이나 아미노산이 미생물에 의해 발효되는 과정이다. 

김치가 숙성됨에 따라 김치 안의 일반 병원균이나 부패균 등은 줄어들게 되고, 반면 소금에 잘 견디며 공기가 필요하지 않은 김치 내의 유익한 유산균들이 급격하게 증가하여 김치의 맛을 좋게 한다. 이때 생성된 유산균의 작용으로 생긴 젖산, 초산, 탄산가스, 알코올 등은 김치 특유의 상쾌하고 새콤한 맛과 향을 낸다. 

숙성과정 중 초기에는 여러 가지 잡균이 번식하게 되나 점차 젖산균이 많아지게 됨에 따라 젖산 발효에 의해 젖산(lacticacid)이나 초산(aceticacid), 옥살산(oxalicacid), 말론산(malonicacid), 숙신산(succinicacid), 사과산(malicacid), 구연산(citricacid) 등의 다양한 유기산을 생성하게 된다. 

김치가 숙성되면서 생기는 유기산에 의해 산도는 증가하고 pH는 점차 감소하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pH는 4.2~4.6, 산도는 0.6~0.8 정도가 적당하다. 김치 속의 유기산은 소금과 함께 김치의 방부력을 높이고, 알코올과 에스테르를 만들어 김치의 맛을 좋게 한다. 
알코올은 소금농도를 낮게 해서 숙성시킨 김치에서 더 많이 생성된다.과학적으로 여러 가지 효능이 입증된 건강식품이다. 

무·배추·열무 등의 채소와 동물성 식품인 젓갈, 고추·마늘·생강과 같은 양념이 혼합·숙성되어 만들어지기 때문에, 사용되는 재료나 재료 간의 혼합 비율, 숙성되는 정도에 따라 그 영양 가치가 달라진다.김치에는 비타민 A, B, C가 모두 함유되어 있다. 특히 젖산균이 발효하는 과정에서 비타민 B1, B2, B12, 나이아신 등의 비타민 B군 영양소들이 크게 증가하게 되는데, 이들은 인체의 여러 가지 대사에 관여하고 신경통, 피로회복, 정력 증강에 큰 도움이 된다. 

김치에 들어있는 비타민 C와 베타카로틴, 클로로필 등은 항산화 작용을 일으켜 노화 억제에 효과가 있다.김치는 대부분의 재료가 채소로 구성된 저열량 식품으로 식이섬유, 비타민, 무기질의 함량이 어떤 식품보다도 높은 편이다. 

배추나 무 등에 포함된 식이섬유는 고혈압이나 고지혈증·당뇨병 등의 성인병 예방에 도움이 되고, 변비 예방과 다이어트, 항암에도 도움이 된다.또한 김치는 칼슘, 칼륨, 철, 인 등의 무기질 공급원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특히 칼슘의 함유량이 높은 편이다.  

숙성되는 과정에서 젖산균을 만들어 내는데, 자연 발효된 김치에 포함된 젖산균은 식중독균, 병원균과 같은 유해균의 생육을 억제하고 정장 작용을 함으로써 변비와 대장암을 예방하는데 효과가 있다.

이외에도 김치에 들어있는 다양한 영양소는 항암, 면역력 증강, 소화, 스트레스 해소, 피부 노화 방지, 다이어트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고춧가루에 포함된 캡사이신은 신진대사를 활발히 함으로써 지방을 연소시켜 체중 조절에 도움을 준다. 

https://youtu.be/fKNbbj5Mjic = 다른 볼거리.

2017년 9월 22일 금요일

돼지국밥,순대국밥.

돼지국밥"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script>
(adsbygoogle = window.adsbygoogle || []).push({
google_ad_client: "ca-pub-4162949345545299",
enable_page_level_ads: true
}); <script>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경상도 지방으로 피난온 피난민들이 먹을 것이 부족하자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돼지뼈를 이용해 설렁탕을 만들어 먹은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경상도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즐기는 음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지역을 대표하는 향토 음식의 하나로 부산에는 돼지국밥 골목까지 있을 정도이다. 돼지뼈로 진하게 우려낸 육수에 돼지 수육을 넣고 밥을 말아 먹는 국밥으로 부산을 비롯한 경남 지역의 대표적 향토음식이다. 진하게 우려낸 돼지뼈 육수에 돼지고기, 고춧가루 다진 양념, 새우젓을 넣고 끓인 뒤 부추김치나 깍두기를 얹어 먹는다. 허영만 화백은 만화 『식객』에서 돼지국밥에 대해 “소 사골로 끓인 설렁탕이 잘 닦여진 길을 가는 모범생 같다면, 돼지국밥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반항아 같은 맛이다”라고 말하였다.

 돼지국밥 애호가인 부산의 최영철 시인은 “돼지국밥을 먹으면 숨어 있던 야성이 깨어난다”고 말한다. 돼지국밥은 향신료와 내장을 상대적으로 많이 넣는 ‘대구식’, 설렁탕을 연상시키는 뽀얀 색깔의 국물로 대표되는 ‘밀양식’, 곰탕식의 맑은 국물로 대표되는 ‘부산식[신창 국밥식]’ 등으로 구분되는데, 현재는 일부 특색을 유지하는 식당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식당에서 모든 방식이 혼합되어 나타나고 있다. 

북한 지역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에 의해 북한 지역의 향토 음식이던 순대국밥이 유입되었고, 1960년대 이후 순대가 귀해져 순대를 대신하여 편육을 넣어 현재의 형태로 변형되었다는 설[1952년에 개업한 부산 돼지국밥 의 시발점 이라 할수가 있다. 

돼지고기와 무를 밑간해서 중불에 볶은 뒤, 여기에 돼지 사골[다리뼈]을 고아 낸 육수를 부어 삶는다. 뚝배기에 밥과 함께 삶은 돼지고기를 한 입 크기로 썰어[편육] 넣고, 돼지 사골 육수를 토렴(退)[밥이나 국수에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하여 덥게 함]하여 고춧가루 등으로 만든 다진 양념을 넣는다. 
기호에 따라 새우젓·부추 겉절이 등을 첨가하기도 하며, 통상 반찬으로 양파·풋고추·마늘·깍두기 등을 함께 먹는다. 

소량의 소면이 사리로 들어가기도 한다.부산의 돼지국밥 음식점들은 대부분 돼지국밥[편육만 들어간], 순대국밥[편육과 순대가 들어간], 내장국밥[편육 대신 내장 부위가 들어간], 섞어국밥[편육과 내장이 들어간], 모듬국밥[편육·내장·순대 등이 모두 들어간], 수육백반[편육·국물·밥이 따로 나오는] 등의 차림을 제공하고 있다. 

돼지국밥은 밀면과 함께 부산의 대표적인 향토 음식으로 손꼽히며, 또한 피난 음식으로도 불리고 있다. 타지에서 생활하는 부산 출신 사람들이 돼지국밥이 그립다는 말을 많이 할 정도로 부산의 상징적인 향토 음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돼지국밥은 주로 ‘남성용’ 음식으로 여겨졌으나, 현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돼지 냄새[돼지고기 특유의 누린내]를 없애기 위한 음식점들의 비법 또한 다양하게 개발되었고, 영양을 고려하여 육수를 고아 낼 때 소 사골이 들어가기도 할 정도로 계속 진화하고 있다. 

부산광역시의 돼지국밥 음식점 중 서구 토성동의 신창 국밥[2009년 지정], 북구 구포동의 덕천 고가[2009년 지정], 연제구 연산동의 경주 박가 국밥[2009년 지정] 등이 부산 향토 음식점으로 지정되어 있고 동구 범일동의 조선방직 앞과 부산진구 부전동의 서면 등지에 돼지국밥 음식점이 밀집되어 있는 이른바 ‘돼지국밥 골목’이 형성되어 있다. 

돼지고기와 무를 밑간해서 중불에 볶은 뒤, 여기에 돼지 사골[다리뼈]을 고아 낸 육수를 부어 삶는다.돼지 뼈로 우려낸 육수에 돼지고기편육과 밥을 넣어 먹는 국밥류의 요리로, 부산광역시의 향토 음식이다. 

돼지국밥의 유래에는 다양한 설이 있으나, 전쟁 중에 피난길을 전전하던 이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돼지의 부속물로 끓인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본래 돼지국밥은 밀양과 부산, 대구 지역에서 각각의 방식으로 발전하여 오다가 현재는 그 세 가지 방식이 혼합된 형태에 이르렀다.지역별 특성을 살펴보면 밀양의 돼지국밥은 소뼈로 육수를 내 국물 색이 진한 것이 특징적이며, 대구의 돼지국밥은 내장과 같은 부속 부위를 다양하게 첨가한 점이 다르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script>
(adsbygoogle = window.adsbygoogle || []).push({
google_ad_client: "ca-pub-4162949345545299",
enable_page_level_ads: true
}); <script>
부산식 돼지국밥은 돼지의 뼈로 우려내기 때문에 색이 탁하다. 세 지역 중, 돼지국밥이 대중적으로 인지도를 얻게 된 곳이 부산이어서, 돼지국밥은 부산의 향토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만드는 법은 먼저 돼지의 사골과 돼지고기를 찬물에 담가 핏물을 뺀다. 냄비에 물이 끓으면 사골을 넣어 한 번 데친 뒤 건져낸다. 

다시 냄비에 물을 붓고 대파, 양파, 후춧가루, 청주 등을 넣어 끓이다, 

사골과 돼지고기를 넣고 6시간 이상 푹 끓여낸다. 이때, 돼지고기는 삼십분 정도 끓이다 건져낸다. 

돼지고기는 편으로 썰고, 부추는 4cm 간격으로 썰어 고춧가루, 새우젓, 들깨가루와 함께 무친다. 

고춧가루, 간장, 다진 마늘, 참기름, 새우젓 등을 섞어 다진 양념을 만든다. 

그릇에 밥을 담고, 썰어놓은 돼지고기를 얹는다. 

여기에 육수를 붓고 그 위에 만들어 놓은 부추무침을 얹는다. 기호에 따라 다진 양념으로 간하거나, 새우젓이나 소금으로 간한다.

돼지고기는 육질이 연하고 부드러워 소화가 쉽고 단백질이 풍부하여 근육 형성, 체력 보강에도 도움을 주는 식품이다. 

불포화지방산이 함유되어 있어 혈관의 콜레스테롤 축적을 막아주어 동맥경화와 같은 성인병 예방에 효과적이다. 

뚝배기에 밥과 함께 삶은 돼지고기를 한 입 크기로 썰어[편육] 넣고, 돼지 사골 육수를 토렴(退)[밥이나 국수에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하여 덥게 함]하여 고춧가루 등으로 만든 다진 양념을 넣는다. 

개인 취향에 따라 새우젓·부추 겉절이 등을 첨가하기도 하며, 통상 반찬으로 양파·풋고추·마늘·깍두기 등을 함께 먹는다. 

소면이 사리로 들어가기도 한다.돼지국밥은 밀면과 함께 부산의 대표적인 향토 음식으로 손꼽히며, 또한 피난 음식으로도 불리고 있다. 

타지에서 생활하는 부산 출신 사람들이 돼지국밥이 그립다는 말을 많이 할 정도로 부산의 상징적인 향토 음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돼지국밥은 주로 ‘남성용’ 음식으로 여겨졌으나, 현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돼지 냄새[돼지고기 특유의 누린내]를 없애기 위한 음식점들의 비법 또한 다양하게 개발되었고, 영양을 고려하여 육수를 고아 낼 때 소 사골이 들어가기도 할 정도로 계속 진화하고 있다.

부산의 돼지국밥 음식점들은 대부분 돼지국밥[편육만 들어간], 순대국밥[편육과 순대가 들어간], 내장국밥[편육 대신 내장 부위가 들어간], 섞어국밥[편육과 내장이 들어간], 모듬국밥[편육·내장·순대 등이 모두 들어간], 수육백반[편육·국물·밥이 따로 나오는] 등의 차림을 제공하고 있다.

2012년 현재, 부산광역시의 돼지국밥 음식점 중 서구 토성동의 신창 국밥[2009년 지정], 북구 구포동의 덕천 고가[2009년 지정], 연제구 연산동의 경주 박가 국밥[2009년 지정] 등이 부산 향토 음식점으로 지정되어 있고 동구 범일동의 조선방직 앞과 부산진구 부전동의 서면,사상 터미널 주변 등지에 돼지국밥 음식점이 밀집되어 있는 이른바 ‘돼지국밥 골목’이 형성되어 있다.

돼지고기를 푹 삶은 국물에 건져 썬 고기, 양파, 무를 넣고 끓이다가 밥, 다진 마늘, 고춧가루, 소금을 넣어 끓인 것으로 돼지편육, 내장, 순대 등을 넣기도 한다. 
순대국밥이라고도 한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script>
(adsbygoogle = window.adsbygoogle || []).push({
google_ad_client: "ca-pub-4162949345545299",
enable_page_level_ads: true
}); <scri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