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2일 일요일

劉備

備"
삼국시대 촉한()의 초대 황제(재위 221~223)로 탁군 출신. 자 현덕(Xuándé). 시호 소열제(Zhāolièdì). 관우 ·장비와 결의형제하였으며,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맞아들였다. 220년 조비가 한나라 헌제의 양위를 받아 위의 황제가 되자, 221년 그도 제위에 올라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한(漢:蜀漢)이라 하였다.

삼국 시대 촉한()의 초대 황제(재위, 221-223). 자는 현덕()이고, 묘호는 소열제()며, 전한 경제()의 황자() 중산정왕()의 후손이다. 선주()로도 불린다. 유주() 탁군(涿) 탁현(涿) 사람으로 자는 현덕()이다. 누상촌() 사람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짚신을 파는 등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15살 때 노식()에게 사사하여, 공손찬()과 교의를 맺었다. 그러나 학문을 즐겨하지 않고 호협들과 교유하는 한편, 관우(), 장비()와 결의형제했다. 삼국() 시기 촉한()의 개국황제()이자 정치가이다. 서한(西) 중산정왕() 유승()의 후예로 젊었을 때에 공손찬()과 노식()의 제자가 되어 학문을 익혔다. 뒤에 황건적의 진압에 참여하여 관우(), 장비()와 더불어 북해() 공융()과 서주() 도겸() 등을 구제했다. 도겸이 병사한 후에 서주를 유비에게 맡기고 그 후에 여러 제후들에 의탁하여 전전하다가 손권()과 연합하여 적벽()에서 조조()를 물리치고 형주()와 익주()를 탈취하여 221년에 촉한()을 건립했다. 223년 백제성()에서 병환으로 서거했다. 시호는 소열황제(), 열조제()이다. 

자 현덕(). 묘호 소열제(). 전한(경제의 황자() 중산정왕()의 후손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신발·돗자리를 팔아 생계를 잇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15세 때 노식()에게 사사하여, 동문 공손찬()과 교의를 맺었다. 그러나 학문을 즐겨 하지 않고 호협()들과 교유했으며, 이때 관우(), 장비()와 인연을 맺어 《삼국지연의》에서는 도원결의라는 고사로 이들의 인연을 소개하고 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무리를 모아 토벌군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이때의 공적으로 안희현위라는 벼슬길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지위는 오래동안 유지되지 못했고 적군에게 패해 달아났다가 그뒤 공손찬에게 의탁하였다. 이후 원소()와의 대전에서 승리하여 공을 세웠다. 조조()와 서주목() 도겸()과의 대전에서 도겸을 도왔으므로, 도겸이 죽자 서주목이 되었다. 하지만 여포()의 공격으로 서주()를 빼앗기고 그와 대립하게 되며 조조의 도움으로 여포를 물리친다.


전한() 경제()의 후예로, 184년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황건적 토벌에 참가하였으며 이후 여러 호족 사이를 전전하다가 208년 제갈량()을 얻고, 손권()과 동맹을 맺어 적벽() 싸움에서 남하하는 조조()의 세력을 격퇴시켰다.

이후 형주()와 익주를 얻고 219년 한중왕이 되었으며, 2년 후 촉()을 세워 첫 황제가 되었으나 형주와 관우를 잃자, 그 원수를 갚으려고 대군을 일으켜 오()와 싸우다 이릉 전투가 패배로 끝나고, 백제성()에서 제갈량에게 아들 유선()을 부탁한 후 병사하였다.

196년 원술()로부터 공격을 받자 조조의 구원으로 원술을 물리치고, 진동장군의성정후()에 임명되어 조조에게 의탁하였다. 그러나 조조 모살계획에 참가하였다가,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자 하비로 탈주하였다. 원소와 조조가 관도대전()에서 전쟁을 시작하자 원소와 동맹하였으나 이 전투에서 조조에게 패하게 되자 형주목() 유표()에게로 가서 객장()이되었다. 이 무렵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맞아들여 그의 계략으로 형주에서 기반을 구축하던 중, 조조 휘하의 하후돈과 우금이 유표를 공격해오자 이를 물리친다. 208년 유표가 죽고 그의 아들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는 대군을 거느리고 형주를 공격해왔다. 유비는 오나라 손권()과 동맹하여 적벽전투에서 조조를 대파하고 형주를 확보하였다. 
조조가 한중() 침입을 기도하자, 두려움을 느낀 익주목() 유장()의 요청에 따라 명장 관우를 형주에 잔류시키고, 제갈량, 장비, 조운 방통 등과 함께 익주()로 갔다. 하지만 유장이 군수물자를 내어주지 않고 배신하자 그를 항복시키고 촉()을 수중에 넣었다. 이때 유비의 백말을 바꿔탄 방통이 낙봉파에서 적의 화살을 맞고 유비 대신 사망하였다. 215년 형주 땅의 영유문제를 놓고 손권과 대립하였으며 결국 형주 동부의 강하, 장사, 계양을 오나라에게 넘기게 된다. 219년 유비는 한중을 공격하여 한중왕이 되었으며, 관우는 전장군에 임명되었으나 손권의 공격을 받아 죽게된다. 220년 조비()가 한나라 헌제의 양위()를 받아 위()의 황제가 되자, 221년 그도 제위에 올라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한(:)이라 하였다. 다음해 장비가 그의 부하인 범강과 장달에게 살해되어 그의 목을 가지고 오나라로 달아나자 유비는 형주의 탈환과 관우와 장비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 손권을 공격하였다. 이릉()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백제성()에서 후사를 제갈량에게 위탁하고 223년 4월 63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시호는 소열황제이고, 그해 8월에 혜릉으로 이장하였다.
후한 말기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무리를 모아 토벌에 참가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 뒤 공손찬()과 도겸(), 조조(), 원소(), 유표() 등에게 의탁했다. 원소()와의 대전에서 공을 세웠다. 적벽대전() 중에 손권()과 연합하여 조조를 대파하고, 형주()에 거점을 마련했다.

1.유비 왕이되다.

건안() 24년(219) 자립하여 한중왕()이 되었다. 조비()가 한나라를 대신한 다음 해 칭제()하고, 국호를 한(), 성도()를 도읍으로 삼았다. 장무() 초에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를 정벌하다 이릉() 전투에서 대패하고, 백제성()에서 후사를 제갈량에게 맡긴 뒤 병사했다. 3년 동안 재위했다.

서한(西, 전한) 중산정왕() 유승()의 후예로,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가난 때문에 어머니를 따라 돗자리를 팔며 생계를 꾸렸다. 이를 계기로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한 이들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또한 노식의 제자가 되어 공손찬과 함께 학문을 익혔다.
동한(영제() 말년인 184년 무렵 황건적이 봉기를 일으키자, 유비도 사람들을 모아 관부 편에서 황건적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안희위()라는 관직을 받았다. 그러나 군의 독우 와 마찰을 일으켜 관직을 버리고 망명했다. 이후 중랑장 공손찬에게 몸을 맡기고 별부사마()가 되어 여러 차례 공을 세움으로써 평원국상()이 되었다.
2. 조조, 원소, 유표 등 여러 군벌과의 만남
관우장비와 더불어 북해()의 공융과 서주(, 지금의 장쑤성 쉬저우시)의 도겸 등을 구했다. 조조의 공격을 받은 도겸은 유비 군대의 도움을 받았으나 곧 죽었고, 유비는 도겸의 유언에 따라 그를 대신하여 유주목()이 되었다.
유비는 수춘 에 둥지를 틀고 있던 원술과 서로 대적했고, 또 다른 군벌 여포와 싸워 패한 뒤 조조에게 몸을 맡기게 되는데, 조조는 유비를 예주목()으로 추천했고, 곧 좌장군()으로 승진시켰다.
조조는 유비를 매우 주목했는데, 유비는 헌제의 장인 동승과 짜고 조조를 죽이려 한 일이 새어나가는 바람에 서주로 도망쳤다. 여기서 유비는 서주자사 거주()를 죽이고 백성 수만 명을 통솔하게 된다.
헌제 건안() 5년인 200년 조조의 공격을 받은 그는 처자를 버리고 원소에게 몸을 맡기고 큰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관도대전() 후에 남쪽의 유표에게로 도주했다. 유표는 처음에는 그를 상빈(,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손님)의 예로 대하여 신야 에 머물게 했다. 그러나 유비의 명성이 날로 높아지고 형주(,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시)의 호걸들이 그에게 귀의하자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조조가 북으로 오환(, 북부 지역의 유목민족) 정벌에 나서자 유비는 조조의 근거지인 허도(, 지금의 허난성 쉬창()시 동쪽)를 습격하자고 건의했으나 유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3. 적벽대전에서 승리하고 촉한을 세우다.
건안 13년인 208년 조조가 남방 정벌에 나섰다. 유표는 죽고 그의 아들 유종()은 별다른 저항 없이 조조에게 항복했다. 유비는 하구(, 지금의 후베이성 우한()시 지역)로 도주했다가 제갈량의 건의를 받아들여 손권과 연합하여 조조를 크게 물리쳤다. 이것이 바로 적벽대전이다.
유비는 이어서 남으로 무릉, 장사(, 지금의 후난성 창사시), 계양, 영릉(, 지금의 허난성 상추()시 닝링현) 4개 군을 취하여 형주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건안 16년인 211년 그는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익주목(유장의 요청에 부응하여 서쪽 촉()으로 갔다. 원래 유장과 함께 장노를 막아 조조에 저항하기로 했으나 얼마 못 가 우호 관계가 깨졌다. 이에 유비는 성도(, 지금의 쓰촨()성 청두시)를 공격하여 유장 정권을 뒤엎고 익주 를 빼앗았다.
건안 24년인 219년 그가 조조의 대장군 하후연의 목을 베자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몸소 정벌에 나섰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돌아갔다. 유비는 마침내 한중(, 지금의 산시(西)성 한중시)을 점령하여 한중왕()으로 자처했다. 같은 해에 관우가 피살되고 형주가 손권의 손에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촉한의 규모가 기본적으로 확정되었다.
유비는 사람을 잘 알아보고 적절하게 기용했다. 명장 관우와 장비를 좌우에 두었고, 제갈량을 얻어 철저하게 신임하면서 그의 의견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랬기 때문에 땅도 좁고 백성도 적은 촉 땅에서 위() · 오()와 정립하는 국면을 개척할 수 있었다.
221년 유비는 황제를 칭하고 나라 이름을 한(, 촉한)이라고 했다. 도읍은 성도로 정했다.
4. 이릉전투에서 패한 후 병사하다
나라를 세운 221년, 유비는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를 정벌하러 나섰다. 손권이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빼앗은 일에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손권은 사신을 보내 강화를 요청했으나 유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듬해인 222년, 두 나라 군대가 이릉 에서 결전을 벌였다. 그러나 유비의 군대가 작전 착오로 7, 8개월간 대치하는 바람에 군사들이 지치고 사기가 떨어졌다. 이 상황에서 오나라 장수 육손의 공격을 받아 심각한 타격을 입고 퇴각하고 말았다. 백제성으로 도망친 유비는 이듬해에 중병을 얻어 승상 제갈량에게 아들 유선을 맡긴다는 유언을 남긴 채 영안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소열황제(), 열조제()이다.
5. <참고자료 1> 삼고초려()
유비는 군사가 부족해서 조조와의 싸움에서 고전했다. 어느 날 유비가 사마휘에게 군사 참모를 천거해달라고 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복룡()이나 봉추() 중 한 사람만 얻으시오.” 유비는 “대체 복룡은 누구고, 봉추는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사마휘는 말을 흐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 제갈량의 별명이 복룡이란 것을 안 유비는 즉시 수레에 예물을 싣고 양양(, 지금의 후베이()성 샹양()시)에 있는 제갈량의 초가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제갈량은 집에 없었다.
며칠 후 또 찾아갔으나 역시 출타하고 없었다. 마침내 동행했던 관우와 장비의 불평이 터지고 말았다. “지난번에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이거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듣자니 그자는 아직 나이도 젊다던데······.” “그까짓 제갈공명이 뭔데. 형님, 이젠 다시 찾아오지 마십시오.” 그러자 유비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엔 너희들은 따라오지 말아라.” 관우와 장비가 극구 만류하는데도 유비는 단념하지 않고 세 번째 방문길에 나섰다. 그 열의에 감동한 제갈량은 마침내 유비의 군사()가 되어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렇게 유비가 제갈량의 초가집을 세 번이나 찾아간 데서 ‘삼고초려’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6. <참고자료 2> 유비의 후손
촉한은 263년에 멸망했다. 이에 따라 유선과 그의 일곱 후손이 위나라로 옮겨갔다. 유선의 여섯째 아들인 유순()이 안락공()이란 작위를 이었으나 영가의 난()에 휘말려 피살되어 유비의 적손이 끊어졌다. 그러나 유선의 동생인 유영의 손자 유현()은 살아남아 성한(, 5호16국 중 하나)으로 도망쳐 황제 이수에게서 안락공 칭호를 받았다. 그 후 동진()의 장수 환온이 성한을 공략하여 멸망시켰는데, 환온을 따라온 역사가 손성이 유현을 만났다고 한다. 이후 유현의 소식은 불분명하지만 그의 후손이 중국 각지에 퍼져 촉한 소열황제 유비의 혈통을 잇고 있다고 전해진다.
7. 관련 유적

1) 혜릉(惠陵)

쓰촨성 청두시 한소열묘()에 유비의 무덤인 혜릉이 있다. 제갈량과 같이 사당인 무후사 내에 있다.
2) 백제성(白帝城)
충칭시() 펑제현()에서 약 5킬로미터 남쪽 장강()의 협곡인 구당협()의 북안에 위치한 삼협()의 유명 관광지다. 백제성의 역사는 1,700여 년 전 동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현존하는 백제묘()의 주요 건물은 명 · 청 시대에 세워졌다.
이곳은 지세가 험준한 요충지로 역대의 군사가들이 쟁탈하던 곳이다. 유비가 이릉전투에서 패하고 회군하다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나며 제갈량에게 아들을 부탁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문화 명인이 이곳을 다녀갔기 때문에 유명한 시편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이곳을 ‘시의 고장’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 죽엽비(), 봉황비()를 비롯한 많은 역대 비문이 있다.
춘추 시대 말기 사람. 『예기』 「잡기()」에 공자()에게 사상례()를 배웠다는 기록이 있어 청나라 주이존()은 공자()의 제자로 보았다. 그러나 공자는 그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는 기록이 『논어』 「양화()」편에 보인다.


2017년 11월 10일 금요일

三國志演義

《삼국지연의》는 진수(陳壽, 233~297)의 《삼국지(三國志)》에 서술된 위(魏), 촉(蜀), 오(吳) 3국의 역사를 바탕으로 전승되어 온 이야기들을 중국 원(元)과 명(明)의 교체기 때의 사람인 나관중(羅貫中, 1330?~1400)이 장회소설(章回小說) 형식으로 재구성한 장편 소설이다. 원래 이름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이며,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와 함께 중국 4대기서(四大奇書)의 하나로 꼽힌다.

진수(陳壽)의 《삼국지》에 서술된 위(魏)·촉(蜀)·오(吳) 3국의 역사는 천하의 패권(覇權)을 둘러싸고 3국이 벌이는 힘과 지혜의 다툼이 워낙 치열하게 펼쳐졌기에 일찍부터 중국인들에게 흥미 있는 이야기로 전해져 왔다. 당(唐, 618~907) 시대에 이미 3국의 이야기가 야담(野談)으로 전해진 기록이 있으며, 송(宋, 960∼1279) 시대에는 전문적인 이야기꾼인 설화인(說話人)들의 이야기 대본인 화본(話本)으로 정리되고, 연극으로 공연되기도 하였다. 당시 곽사구(禱四究)의 ‘설삼분(說三分)’은 매우 유명했으며, 인종(仁宗, 1010~1063) 때에는 3국의 이야기를 공연하는 ‘피영희(皮影戱)’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원(元, 1271∼1368)의 영종(英宗, 재위 1320~1323) 때, 전래되던 화본(話本)들을 바탕으로 푸젠성(福建省) 젠양(建陽)의 출판업자 우(虞)씨가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를 간행하였다. 이 책은 3권으로 되어 있으며 위에 그림, 아래에 글을 넣은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元) 시대에는 이를 바탕으로 많은 희곡이 만들어져 공연되었는데, 종사성(鍾嗣成)의 《녹귀부(錄鬼簿)》에 따르면 그 수가 30~40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는 명(明, 1368∼1644) 시대에도 출판되었지만, 야담(野談)과 화본(話本)에 기초해 있었기에 허황된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고 역사적 사실과도 차이가 많았다. 그래서 나관중(羅貫中, 1330?~1400)은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의 줄거리를 근간으로 하되,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와 429년 배송지(裵松之, 372-451)가 이를 보완한 《삼국지주(三國志註)》,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의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을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에 어긋난 부분을 바로잡아 장회소설(章回小說) 형식으로 재구성하여 《삼국지연의》를 편찬하였다.

《삼국지연의》는 후한(後漢) 말부터 위(魏)· 촉(蜀)·오(吳) 삼국의 정립시대(鼎立時代)를 거쳐서 진(晉)이 천하를 통일하기까지의 역사를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 등 세 인물의 무용(武勇)과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지모(智謀)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원본(原本)은 전해지지 않으며 명(明)의 가정제(嘉靖帝, 1507~1566) 때인 1522년에 간행된 ‘가정본(嘉靖本)’이 가장 오래된 판본(版本)으로 전해진다.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란 제목으로 간행된 이 판본은 홍치제(弘治帝, 1470~1505) 때인 1494년의 서문(序文)이 실려 있어 ‘홍치본(弘治本)’, 혹은 나관중(羅貫中)의 성을 따서 ‘나본(羅本)’으로도 불린다. 모두 24권(卷) 240절[節, 혹은 칙(則)]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장 나관중의 원본(原本)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지연의》는 그 뒤 가정본(嘉靖本)을 근간으로 하면서 문체나 내용이 보완되어 왔으며, 수많은 속본(俗本)들을 낳았다. 명(明) 말기에 이지(李贄, 1527~1602)는 《삼국지연의》에 평을 붙이면서 2개의 절(節)을 하나로 합하여 240절(節)을 120절(節)로 줄였는데, 이를 ‘이탁오평본(李卓吾評本)’이라고 한다. 그리고 청(淸)의 강희제(康熙帝, 1654~1722) 때인 1679년(강희18년)에 모성산(毛聲山)과 모종강(毛宗岡) 부자(父子)는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에 기초해 작품 전체의 통일성을 높이고 문체(文體)를 간결하게 다듬어 19권(卷) 120절(節)로 구성된 새로운 판본을 간행하였다. 이를 ‘모본(毛本)’이라고 하는데, 모종강(毛宗崗)의 개정본은 다른 판본을 압도하고 정본(定本)이 되었다. 오늘날 번역되는 《삼국지연의》의 내용도 대부분 이 ‘모본(毛本)’에 기초하고 있다.

《삼국지연의》는 중국인에게 오랫동안 애독되었고, 그 내용은 연극(演劇)이나 강담(講談) 등으로 글자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전달되었다. 관우(關羽)는 민간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어 관제묘(關帝廟)가 곳곳에 세워지기도 하였으며, 《삼국지연의》에서 비롯된 ‘삼고초려(三顧草廬)’나 ‘계륵(鷄肋)’, ‘읍참마속(泣斬馬謖)’ 등의 표현이 고사(故事)와 함께 널리 쓰였다.

《삼국지연의》는 한국에서도 조선(朝鮮) 시대부터 매우 폭넓게 읽혔다. 《삼국지연의》는 이미 16세기 초에 조선(朝鮮)에 전해져 1569년에는 국내에서 원문(原文)으로 간행되었다. 인조(仁祖, 1595~1649) 때인 1627년(인조 5년)과 숙종(肅宗, 1661~1720) 때에도 출간(出刊)되었다. 《삼국지연의》를 번역(飜譯)하거나 번안(飜案)한 작품들도 상당수 전해지는데, 이는 사대부(士大夫)만이 아니라 부녀자(婦女子)나 민간(民間)에서도 폭넓게 읽혔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시조(時調)나 소설(小說), 속담(俗談) 등에서도 《삼국지연의》의 영향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렇듯 《삼국지연의》가 널리 읽히고 확산된 것은 이 작품이 충효(忠孝)와 의(義)를 강조하는 조선(朝鮮)의 유교적(儒敎的) 지배이념과 일치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근대 이후에도 《삼국지연의》는 수많은 번역본을 낳으며 폭넓게 읽혔는데, 1904년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최초로 근대적 활자본이 간행되었고, 1929년에는 양백화(梁白華, 1889~1938)가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每日新報)에 연재하였다. 그리고 1945년에 박태원(朴泰遠, 1909~1987)이 ‘모본(毛本)’을 기초로 현대적 번역본을 출간(出刊)한 뒤, 박종화(朴鐘和, 1901~1981), 김구용(金丘庸, 1922~2001) 등 수많은 작가들이 각기 다양한 번역본을 출간하였다.

한편 현대에 와서 《삼국지연의》는 영화나 컴퓨터게임, 애니메이션 등으로도 활발히 만들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고우영(高羽榮, 1938~2005)이 만화로 신문에 연재한 작품이 1979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일본에서는 요코야마 미츠테루(橫山光輝, 1935∼2004)가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코에이(KOEI)는 1985년 ‘삼국지(三國志, samgugji)’라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개발하였다. 그 밖에도 《삼국지연의》의 내용에 바탕을 두고 경영학이나 처세학 등을 논하는 책들도 폭넓게 출간되고 이.

주요인물들"
유비 - 현덕, 관우 - 운장, 조조 - 맹덕, 손권 - 중모, 여포 - 봉선, 원소 - 본초, 원술 - 공로, 공손찬 -백규, 손견 - 문대, 손책 - 백부 순욱 - 문약, 조운 - 자룡, 정욱 - 중덕, 곽가 - 봉효, 제갈량 - 공명, 육손 - 백언, 주유 - 공근, 노숙 - 자경, 여몽 - 자명, 하후돈 - 원양, 하후연 - 묘재, 조인 - 자효, 조홍 - 자렴, 조휴 - 문열, 조진 - 자단, 강유 - 백약, 황충 - 한승, 위연 - 문장, 마초 - 맹기, 이엄 - 정방, 장료 - 문원, 장합 - 준예, 악진 - 문겸, 이전 - 만성, 서황 - 공명, 제갈근 - 자유, 제갈각 - 원손, 허저 - 중강, 방덕 - 영명, 태사자 - 자의, 유표 - 경승, 동탁 - 중영, 방통 - 사원, 법정 - 효직, 유장 - 계옥, 사마의 - 중달, 마등 - 수성,


1.조조: 기존에는 망탁조의라고 해서 중국사의 대표적인 역적중 하나로 손꼽아지던

인물이지만 마오쩌뚱에 의해서 재평가를 됨과 동시에 삼국지시대의 실질적으로

중심이 되는 위나라의 위왕에 오른 인물로 삼국중 가장 세력이 강한 위의 군주입니다.

망해가는 후한의 황제를 내세워서 세력을 모으고 하북의 원소를 상대로 승리하여 중원을 평정하였지만

 적벽대전에서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에 패해서 삼국이 정립되게 됩니다.

서주대학살, 원소군 항병 학살, 발구중랑장(도굴을 전담하는 관직) 등 악행 역시 적지 않은

인물이지만 둔전제, 호조법, 원호법 등 난세로 피폐해진 중원을 복구하는데 큰역활을 한 인물이다.

2.손권: 동오 땅에서 형 손책이 점령한 호족세력들을 중심으로 오나라를 세우고

유비와 동맹을 통해서 조조를 적벽에서 물리쳐 삼국을 정립하지만

형주문제로 유비의 장수인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점령한바람에 이릉대전이 일어나서

촉의 국력이 떨어져서 제갈량이나 후대의 촉나라인물들이 고생하게 된다.

유비 사후 손권의 오나라와 유선의 촉한은 다시 동맹관계를 회복한다.

조조사후에도 수시로 위나라를 괴롭혔기 때문에 위나라입장에서는  

촉나라보다 오나라 쪽이 더 위험한 상대였다.

손권 개인의 무력이나 정치적역량은 높았지만 뛰어난 지휘관이라고 하기에는

장료,만총,문빙 등의 위나라쪽 인재들이 너무 뛰어났기에 매번 위나라정벌을 성공하지는 못했다.

3.유비: 전한의 황족출신으로 자수성가를 한 인물로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상대로

승리하여 형주일부를 기반으로 촉땅을 점령하고 한중을 조조에게서 빼앗아서

촉나라를 건국한다. 하지만 오나라와 형주를 두고 벌인 분쟁에 형주방면 책임자였던

관우가 전사하고 형주를 빼앗기자 대신들의 반대에도 오나라를 징벌하려고 군사를

잃으켰다가 이릉대전에서 대패해서 수많은 군사와 인재들을 상실하였고 그 후유증으로

인해 촉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백제성에서 죽는다.

이런 대패로 인해 유선시대에 제갈량,장완,비의 등의 신하들에게 권력이 넘어가는 계기가

됬지만 그 재상들이 대부분 인격자에 능력자였기에 황위 찬탈이나 신권의 강화로 인해

일어난 문제가 적었고 오히려 촉한이 부흥되는 계기가 된다.

4.관우: 유비 휘하에서 큰공로를 세웠던 맹장으로 많은 활약을 펼치고
유비가 조조에게서 한중을 빼앗자 그다음해 형주를 기반으로 조조를 치는 북벌을 하지만 위나라의 조인,서황의 활약과 오나라와의 외교실패로 인해 오나라군대에게 본진인 형주를 잃고 결국 전사하고 만다. 하지만 다른 삼국지 인물과 달리 죽은후에 무신으로써 숭상받다가 그성향이 재물을 늘려주는 재신으로 바뀐이후 현대의 중국에서도 신으로 숭배를 받게 된다.
5.제갈량: 소설과 달리 군사적역량이 신기에 달할 정도는 아니지만 정치 행정가 즉 재상으로 중국사에서 손꼽힐만한 인물로 유비가 이릉대전으로 크게 약해진 촉나라를 부흥시키고 북벌을 통해 위나라를 상대하려고 했지만 장합,학소,곽회,사마의 등 위나라의 뛰어난 인재들과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 북벌을 모두 실패한다. 하지만 이 명재상의 이미지는 민중들에 의해 계속 숭상을 받았기에 현대에 이르러서도 숭상받고 있다.
6.사마의: 조조의 정권을 성립하는데 큰 도움을 준 중원에서도 이름난 명문가 출신으로 조조시절에 출사하여 조비시절부터 중용되어서 수많은 군공을 세웠고, 고평릉사변을 일으켜서 조씨 친족들을 몰락하게하였고 그 아들들과 손자로 인해 촉,위,오 모두 망하게 하고 중국을 다시 통일한 진나라가 들어서게 만든다.대표적인 역적들을 묶어부르는 망탁조의에서 의가 이 사마의다.
역사에서 4,5차북벌에서 제갈량에게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전쟁에서 목적을 달성해서 막아냈지만 소설인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에게 계속 패배하지만 위나라에서 제갈량을 상대할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묘사된다. 
7.동탁: 황건적의 난이 갓평정된 후한의 조정에서 내시들인 십상시와 하진의 권력투쟁으로 인해 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황제가 도주하는 십상시의 난당시에 하진과 원소의 계략으로 십상시를 제거하기위해 모집됬던 지방군벌 중 하나로 도망치던 황제를 얻음으로써 십상시에게 암살당한 하진의 세력을 얻어서 낙양을 장악하고 황제를 폐위하고 왕이었던 유협을 황제로 세움으로써 한나라를 장악한다. 하지만 이사건으로 인해서 한나라의 권위가 떨어지고 반동탁세력들과의 전쟁이 벌어지는데 원술과 손견으로 인해 호진과 여포가 대패하는 바람에 낙양에서 장안으로 천도를 하지만 이후 왕윤과 손을 잡은 여포에게 죽임을 당한다.  난세를 실질적으로 열어버린 인물로 대표적인 역적들을 묶어부르는 망탁조의에서 탁이 동탁이다.
8.원소: 삼공을 여러번 배출한 원씨가문의 서자였지만 삼년상을 2번 치러서 청류파들의 대표주자인 인물로 대두된다. 십상시의 파벌에 속하던 하진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하진과 연합하여서 십상시를 처내려고 하지만 그로 인해 동탁이 정권을 잡으며 난세가 시작하게 되었고 하북으로 도망쳐서 반동탁연합의 맹주가 되었지만큰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동탁다음가는 군벌인 공손찬을 상대하여 하북을 얻게 되서 천하에서 가장강한 세력을 얻게 되지만 조조를 상대로 관도대전에서 거의다 이겨놓고 내부세력간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군량저장한 오소를 상실하고, 그 책임의 희생양으로 억울하게 몰린 장합의 배신으로 본진마저 잃게 됨으로써 다이긴 전쟁을 패배한다. 실제 하북을 상실하지 않아서 세력은 건재했지만 원소본인이 관도에서 패배의 후유증으로 몇년뒤 죽게 되고, 사후 뒤를 이을 후계자를 확실히 정하지 않은 것때문에 그의 두아들이 하북을 놓고 다투는 걸 이용해서 조조가 하북을 장악하면서 세력이 사라진다.
9. 원술: 원소처럼 원씨 가문의 인물이지만 이쪽은 원소와 달리 적자였기에 대부분의 원씨가문의 인물들이 원소가 아닌 원술에게 힘을 실어줬다. 원소와 달리 동탁도 원술을 좋아해서 후장군에 임명하는등 우호적인 자세를 취했지만 원술은 남양 땅으로 도망쳐서 세력을 모았고 손견과 동맹을 맺고 반동탁세력의 맹주로써(소설과 달리 원소와 함께 한적이 없다)
동탁의 군대를 패퇴시켜 낙양에서 장안으로 천도하게 만들지만 이과정에서 무리한 징세 와 착취로 민심을 잃은 바람에 훗날 조조군에게 패배를 하고, 이후 제기를 하지만 스스로 천자에 오르고 나라를 세운 바람에 주변 제후들의 공격으로 망하게 된다. 
10. 공손찬: 동탁 다음가는 세력을 지닌 군벌로 이민족 억압정책과 군비 확장을 위해서
하북에서 가혹한 정치를 일삼았고, 이에 반대하던 그의 상관이며,
이민족조차 존경하던 유우를 죽임으로써 원소가 공손찬을 노리는 계기가 되고, 하북의 민심이 그에게서 등을 돌려서 결국 패망하게
된다. 소설인 삼국지연의와 다르게 정의롭거나 선한 인물이 결코 아니다.
휘하에 유비를 거느린적도 있었지만 유비는 유우를 죽인이후 공손찬세력에서
이탈해서 도겸세력에 합류한다.
원소조차도 한복의 세력을 얻고, 국의라는 걸출한 장수가 공손찬을 상대로 승리하고
원소를 구하지 않았다면 이 공손찬에게 패망했을 가능성이 높을 정도로 소설과 달리
엄청나게 강력한 군벌이었다.

삼국지 주요 인물들.1

삼국지의 주요인물 중, 유비, 관우, 장비에 조자룡을 더하여 도원결의를 한번 더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조자룡은 유비가 사제(四弟)라고 불렀고, 이들 세 의형제의 막내동생처럼 나타난다. 그렇다면 조자룡의 나이는 유비, 관우, 장비보다 적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삼국연의>에서 쓴 내용에 따르면 조자룡의 출생연도는 156년으로 160년 태어난 유비보다 4살이 많다.

관우가 동오의 손에 피살된 것이 건안 2년, 즉 서기 219년이다. 책에서 관우는 58세로 죽었다고 되어 있으니, 여기서 추정해보면 관우도 161년에 태어났다. 장비는 부하를 채찍으로 치다가 보복을 받아 암살당하는데, 시간은 장무원년 즉 221년이다. 즉을 때 55세였다. 이로써 추정해보면 장비의 출생년도는 166년으로 유비보다 6살이 어리고, 관우보다 5살이 적다. 그런데 유비, 관우 장비의 나이는 모두 <삼국연의>에 나타난대로라면 조자룡보다 어리다
적벽대전이 서기 208년에 발발하는데, 조자룡은 조조군의 진영을 신출귀몰하게 유비의 아들인 아두를 구해내는 전설적인 영웅의 행적을 보인다. 이 사건으로 조자룡 본인은 젊고, 잘생겼으며, 용감한 장수로 이름을 떨친다. 그러나 156년에 그가 태어났다면 적벽대전 때 그의 나이가 이미 52세가 된다.

관우가 58세에 죽었을 때 조장으로 불리워는데, 52세인 조자룡에게 이러한 임무를 맡기는 것은 나관중이 너무 조자룡에게 가혹했던 것은 아닐까?

삼국지 주요 인물들.

유비(劉備, 161년 ~ 223년)
자는 현덕(玄德). 중국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개국 황제.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아들인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손이다.
황족의 후예임에도 삶이 어려워 어려서부터 짚신, 돗자리 등을 만들어 팔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러 군웅들과 달리 아무런 기반도 없이 결의 형제들과 함께 거병하였다.
원소, 원술과의 동맹에도 참여하고 황건적을 토벌하는 등 여러 차례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뚜렷한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고 도겸, 유표, 조조에게 의탁하는 등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떠돌았다. 하지만 제갈량, 조자룡 등 인재를 등용하면서 서서히 자기 세력을 확보하였고 손권과 손잡고 적벽에서 조조를 대패시켜 천하 삼분지계를 완성한다. 그 후 스스로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촉한의 황제가 됐으나 결의 형제인 관우와 장비가 잇따라 사망하자 그 복수를 위해 무리하게 대군을 일으켰고 결국 이릉에서 대패하여 제갈량에게 나라를 맡기고 세상을 뜬다.
조조(曹操 155년 ~ 220)자는 맹덕(孟德). 지금의 안휘성 출신으로 황건적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후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동탁 암살 실패로 세상을 떠돌던 중 원소, 원술과 동맹을 맺기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후에 동탁이 죽자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를 옹립하였으나 그 자신은 동탁보다 더한 전횡을 휘두른다. 또 최대 군웅 세력인 원소를 관도대전에서 격파하고 화북 지방을 거의 다 손아귀에 넣으면서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르게 된다. 그 후 천하 통일을 위해 남하하였으나 손권, 유비 연합군에게 적벽에서 대패하고 그 후로는 양자강 이남으로 그 세력을 뻗지 못했다. 승상, 위왕(魏王)의 관직을 받았으나 스스로 황제에 오르지는 않았고 220년에 낙양에서 사망했다. 아들 조비(曹丕)가 뒤를 잇고 헌제에게 양위를 받아 위나라 황제가 된 뒤 태조 무황제로 추존되었다. 그동안 '난세(亂世)의 간웅(奸雄)'이라 하여 간신(奸臣)의 전형처럼 그를 평가했으나 근대에 이르러 여러 제후와 군벌 중 진정한 패자(覇者)이자 영웅으로 재평가하는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관우(關羽, 160~ 219년)자는 운장(雲長). 현재의 산시성 출신으로 탁현(褶縣)에서 유비를 만나, 장비와 함께 의형제를 맺으면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의병에 가담하고 여러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단칼에 화웅의 목을 벤 일로 여러 군벌들과 조조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긴다. 후에 조조는 여러 차례 관우를 회유하려 하였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208년 적벽대전에서 수군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웠으나 과거의 은혜를 갚기 위해 패퇴하는 조조를 살려 준 일화로도 유명하다. 후에 홀로 형주를 지키던 관우는 손권의 협공으로 대패하여 사망한다. 후에 유비는 관우의 복수를 위해 무리한 전쟁을 일으켜 패망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 현재 관우는 충신의 전형으로서 민중 사이에서 무신(武神)으로 숭배되고 있다.

장비(張飛, ?~221)자는 익덕(益德). 연나라 출신인 장비는 성격이 호탕하고 시원시원한 인물. 유비와 관우를 만나 의형제를 맺고 함께 한나라의 부흥을 위해 의병에 가담한다. 유비, 관우와 함께 공손찬, 공융, 도겸 휘하에서 장수로 참전하여 많은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다. 조조가 형주(荊州)를 공격해 오자 장판교(長坂橋) 위에서 기병 20기만을 데리고 고함소리로 조조군을 물리친 일화가 유명하다. 이후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치는 데 큰 수훈을 세우고 유비가 익주(益州)를 공략할 때도 선봉에 서서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급한 성격과 더불어 술에 대한 집착으로 여러 차례 문제를 일으켰고 관우와 유비에게 지적을 당했으며 군사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위해 대군을 일으켰을 때 부장에게 살해되고 만다.

제갈량(諸葛亮, 181~234)자는 공명(孔明).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출신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세상을 피해 은거했음에도 그 명성과 학식이 높아 와룡선생이라 불렸다. 207년에 삼고초려를 통해 유비에게 발탁된 후 천하 삼분지계를 준비한다. 다음 해에 오나라의 손권(孫權)을 설득하여 유비와 연합하게 하였고, 적벽대전에서 계략을 써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친다. 유비는 점점 더 제갈량을 신임했고 황제에 오른 후에는 그를 승상으로 삼았으며 세상을 떠날 때에는 나라와 자식을 모두 부탁했다. 유비는 자신의 아들 유선(劉禪)이 황제의 재목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황제에 올라도 좋다고 유언하였으나 제갈량은 끝까지 유선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두 번에 걸쳐 출사표를 쓰고 직접 군을 지휘하여 출병하였으나 전쟁 도중 사망하고 만다. 그의 출사표는 지금까지도 역사상 가장 뛰어난 명문장으로 꼽힌다.

조운 (趙雲, ?~229년)자는 자룡(子龍). 상산군(常山郡) 출신. 8척에 이르는 큰 키에 준수한 외모를 지닌 조운은 무예가 매우 출중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창을 잘 썼다고 한다. 공손찬의 부하였던 조운은 공손찬에게 몸을 의탁한 유비를 보고 그의 부하가 된다. 유비가 장판에서 조조의 공격으로 탈출할 때 홀로 적진을 뚫고 가서 어린 유선을 구출해 온 일화가 매우 유명하다. 후에 유비가 황제가 된 후 관우, 장비, 황충, 마초 등과 함께 오호 대장군이 된다. 관우가 손권과 위나라의 협공으로 사망하자 유비는 오나라 정벌에 나서는데, 이때 조운이 나서 위나라를 먼저 치지 않으면 위태로울 것이라고 간언하였다 전해진다. 하지만 유비는 결국 조운의 말을 듣지 않았고 정벌을 강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장비마저 목숨을 잃고 만다. 유선이 황제가 된 후에 정남장군이 되었으며 고령의 나이에도 제갈량과 함께 북벌에 나섰고 229년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동탁(董卓, ? ~ 192년)자는 중영(仲潁). 지금의 감숙성 출신. 처음에는 중국의 소수 민족이었던 강족(羌族)을 토벌해 세력을 키웠다. 당시 전횡을 일삼던 환관 십상시를 제거하기 위해 외척이었던 하진의 부름을 받아 낙양으로 입성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낙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십상시와 하진이 모두 사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동탁은 힘 들이지 않고 조정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헌제를 옹립하고 스스로를 상국에 임명한 후 조정을 주물렀다. 동탁의 폭정이 계속되자 전국 제후들이 들고 일어나 원소를 필두로 하는 동맹군이 결성되었다. 이에 겁을 먹은 동탁은 낙양성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하였다. 천도 후에도 그의 만행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자 당시 조정의 사도였던 왕윤은 연환계를 쓰고 그 결과 자신의 양자였던 여포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여포(呂布, ?~198)자는 봉선(奉先). 현재의 네이멍구 출신. 원래 병주자사 정원의 수하로 있었으나 후에 동탁과 정원이 대립하자 동탁의 편에 서서 정원을 죽인다. 이때 동탁이 여포의 마음을 사기 위해 적토마를 선물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당시 적토마는 천하에서 가장 빠른 말로서 ‘사람 가운데는 여포, 말 중에는 적토마’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후에 동탁의 양자가 되어 권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단순하고 귀가 얇은 성격이었던 여포는 왕윤의 연환계에 빠져 동탁을 살해한다. 헌제에게 관직을 받았으나 장안을 공격해 온 곽사, 이각에게 패해 도망친다. 후에 거처 없이 떠돌며 무용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의탁하였다가 유비의 하비성을 빼앗아 세력을 굳히는 듯했으나 조조의 군대에게 포위되었고 결국 부하들의 반란으로 조조에게 사로잡혀 처형되고 만다.

손권(孫權, 182~252)
자는 중모(仲謀). 오나라 초대 황제. 손견(孫堅)의 차남으로 형인 손책이 죽자 그 뒤를 계승했다. 조조의 세력이 강남을 향하자 대신들은 화의를 청하였으나 주유와 노숙이 전쟁을 주장하자 그 뜻을 따랐다. 손권은 유비와 손잡고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대패시킨 후 확고한 위상을 세웠고 스스로 오나라의 황제가 되었다. 형주의 귀속 문제로 유비와 마찰이 계속 되던 중, 조조와 결탁하여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빼앗았다. 하지만 태자가 급작스럽게 죽는 바람에 후계 쟁탈전이 벌어지고 그 과정에서 국력이 많이 쇠약해졌다. 결국 10살의 막내 아들을 태자로 세운 후 7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주유(周瑜, 175년~210년)자는 공근(公瑾). 노강군 서현 출신. 명문가 출신의 주유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동으로 이름이 높았다. 손견의 장자인 손책과 형제처럼 지냈다. 손견이 죽은 후 손책의 수하가 되어 여러 전공을 세운다. 손책의 뒤를 이어 동생 손권(孫權)이 정권을 잡자 그에게도 충성을 다했다. 조조가 강남으로 압박해 왔을 때 노숙과 함께 항전을 결사하였고 손권을 설득한다. 때마침 손권을 찾아온 제갈량과 손잡고 적벽대전을 대승으로 이끌고 오나라의 기반을 닦는다. 이때 자신보다 뛰어난 제갈량을 질투하며 하늘을 원망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후에 삼국 통일을 이루겠다는 꿈을 품고 익주 정벌을 나섰다가 돌아오는 중 36세로 요절하고 만다. 당대의 미녀로 꼽히는 소교를 아내로 두었다.

사마의(司馬懿, 179~251)자는 중달(仲達). 지금의 하남성 온현 출신.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난 사마의는 학식이 깊어 명성이 자자했다. 이를 들은 조조는 그를 초빙해 태자의 스승으로 삼았으며, 뛰어난 안목과 책략으로 조정에서 큰 활약을 했다. 조조가 죽은 후 조조의 아들 조비를 섬겼으며 조비가 죽은 후에는 조예를 보좌하였다. 이때에 대장군이 되어 제갈량이 이끄는 촉한의 공격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후에 조조, 조비, 조예, 조방을 모두 섬긴 4대 충신으로 추앙 받아 무양후에 봉해졌다.

소교(小喬).언니 대교와 더불어 당대의 최고 미인 자매로 꼽힌다. 주유는 손책과 함께 형주의 많은 지역을 점령하였는데 그때 교공(橋公)의 두 딸을 생포하였다. 이를 계기로 언니 대교는 손책의 아내가 되었고 동생 소교는 주유의 아내가 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적벽대전(赤壁大戰)이 발발하기 전, 손권의 참전을 유도하기 위한 제갈량의 꾀에 소교가 등장한다. 제갈량(諸葛亮)은 조조가 지은 동작대부에, 조조가 대교와 소교를 탐한다는 내용을 집어넣어 불렀고 이를 들은 주유가 대노하여 전쟁에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초선(貂蟬)한나라의 사도 벼슬을 하고 있던 왕윤의 양녀. 원래 충신의 후예였던 초선은 왕윤의 눈에 들어 양녀가 된다. 우연한 계기로 여포가 초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왕윤은 여포에게 초선을 시집 보내기로 약속한 후 동탁을 집으로 불러들여 초선을 만나게 한다. 초선의 미모에 빠진 동탁은 초선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고 여포는 초선을 되찾기 위해 양아버지 동탁을 죽인다. 이로서 한나라를 부흥시키겠다는 왕윤의 계략은 성공하지만 초선의 말년은 비참했다고 한다. 사실 초선은 정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로 헌제의 시녀와 추문이 있었던 동탁의 이야기를 삼국지연의에서 각색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초선은 담비의 꼬리와 매미의 날개라는 뜻인데 이는 궁중 관리의 의복에 다는 장식이다. 아마도 관리의 관복을 담당하는 궁녀였을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손상향(孫尙香)손견의 딸이자 손권의 누이. 상향이라는 이름은 경극에 등장하는 것이며 손부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문무를 겸비한 여걸로 유명한 손상향은 평소에도 칼을 차고 다녔으며 오라비인 손권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손권의 권유로 유비에게 시집을 갔다. 훗날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후 손권의 계략으로 오나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때 유비의 아들 유선을 데려가려고 하다가 조운 때문에 실패하고 그 일로 인해 유비와는 다시 만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주요인물

1) 촉나라
●유비 현덕(劉備 玄德 161~223) 촉한 황제
●관우 운장(關羽 雲長 ?~219) 촉한 전장군
●장비 익덕(張飛 益德 ?~221) 촉한 거기장군
●제갈량 공명(諸葛亮 孔明 181~234) 촉한 승상
●조운 자룡(趙雲 子龍 ?~229) 촉한 진군장군
●황충 한승(黃忠 漢升 ?~220) 촉한 후장군
●방통 사원(龐統 士元 179~214) 촉한 군사중랑장
●서서 원직(徐庶 元直 ?~?) 위 어사중승
●간옹 헌화(簡雍 憲和 ?~?) 촉한 소덕장군
●손건 공우(孫乾 公祐 ?~?) 촉한 병충장군
●진진 효기(陳震 孝起 ?~235) 촉한 성양정후
●이적 기백(伊籍 機伯 ?~?) 촉한 소문장군
●법정 효직(法正 孝直 176~220) 촉한 상서령
●허정 문휴(許靖 文休 ?~222) 촉한 사도
●장완 공염(蔣琬 公琰 ?~246) 촉한 대사마●미축 자중(?~220) 촉한 중신
●미방 자방(?~?) 촉한 강릉 태수
●초주 윤남(초周 允南 201~270) 촉한 광록대부
●등지 백묘(鄧芝 伯苗 ?~251) 촉한 거기장군
●동윤 휴소(董允 休昭 ?~246) 촉한 보국장군
●비위 문위(費褘 問偉 ?~253) 촉한 대장군
●강유 백약(姜維 伯約 202~264) 촉한 대장군
●관평(關平 ?~219) 관우의 아들
●관흥 안국(關興 安國 ?~?) 관우의 아들, 촉한 시중
●장포(張苞 ?~?) 장비의 아들
●요화 원검(寮化 元儉 ?~264) 촉한 우거기장군
●이엄 정방(李嚴 正方 ?~234) 촉한 표기장군
●오의 자원(吳懿 子遠 ?~237) 촉한 거기장군
●위연 문장(魏延 文長 ?~234) 촉한 정서대장군
●왕평 자균(王平 子均 ?~248) 촉한 진북장군
●장익 백공(張翼 伯恭 ?~264) 촉한 좌거기장군
●장억 백기(張억 伯岐 ?~?) 촉한 탕구장군
●마충 덕신(馬忠 德信 ?~249) 촉한 진남장군
●오반 원웅(吳班 元雄 ?~?) 촉한 표기장군
●마량 백상(馬良 187∼222) 촉한 시중, 모사(謀士)
●마속 유상(馬謖 190∼228) 촉한 대장
●마초 맹기(馬超 176∼222) 촉한 표기장군
●마충 덕신(馬忠) 촉한 장군

2) 위나라
●조조 맹덕(曹操 孟德 155~220) 위왕
●조인 자효(曹仁 子孝 168~223) 위 대사마
●하후돈 원양(夏候惇 元讓 ?~220) 위 대장군
●순욱 문약(筍彧 文若 163~212) 조조의 문신, 광록대부
●곽가 봉효(郭嘉 奉孝 170~207) 조조의 모사
●가후 문화(賈珝 文和 147~223) 위 태위
●허저 중강(許楮 仲康 ?~?) 위 모향후
●장합 준예(張합 儁乂 ?~231) 위 정서, 거기장군
●악진 문겸(樂進 文謙 ?~218) 위 우장군
●우금 문칙(于禁 文則 ?~221) 위 안원장군
●장료 문원(張遼 文遠 165~221) 위 진양후
●서황 공명(徐晃 公明 ?~227) 위 양평후
●조비 자환(曹丕 子桓 187~226) 위 문제
●조앙 자수(曹昻 子脩 ?~197) 조조의 장남
●조창 자문(曹彰 子文 ?~223) 위 임성왕
●조식 자건(曹植 子建 192~232) 위 진사왕
●조홍 자렴(曹洪 子廉 ?~232) 위 표기장군
●조진 자단(曹眞 子丹 ?~231) 위 대사마
●조휴 문열(曹休 文烈 ?~228) 위 대사마
●순유 공달(筍攸 公達 157~214) 위 상서령
●정욱 중덕(程昱 仲德 ?~?) 위 위위
●모개 효선(毛介 孝先 ?~?) 위 상서복야
●진군 장문(陳군 長文 ?~235) 위 사공
●종요 원상(種繇 元常 151~230) 위 태부
●만총 백녕(滿寵 伯寧 ?~242) 위 태위
●유엽 자양(劉曄 子楊 ?~?) 위 태중대부
●동소 공인(董昭 公仁 156~236) 위 사도
●양수 덕조(楊修 德祖 175~219) 위 창조속주부
●화흠 자어(華欽 子魚 157~231) 위 태위
●진교 계필(陳矯 季弼 ?~237) 위 사도
●손례 덕달(孫禮 德達 ?~?) 위 사공
○문흠 중약(文欽 中若 ?~?) 위(魏) 장군
●하후연 묘재(夏候淵 妙才 ?~219) 위 정서장군
●이전 만성(李典 曼成 ?~?) 위 파로장군
●가규 양도(賈逵 梁道 174~228) 위 건위장군
●방덕 영명(龐德 令明 ?~219) 위 관문정후
●곽회 백제(郭淮 伯濟 ?~255) 위 양곡후
●학소 백도(학昭 伯道 ?~?) 위 잡호장군
●등애 사재(鄧艾 士載 ?~264) 위 태위
●하후패 중권(夏候覇 仲權 ?~?) 촉 거기장군
●종회 사계(種會 士季 225~264) 위 사도
○만총 백녕(萬寵 伯寧) 조조(曹操) 막하 모사.
○맹건 공위(孟建 公威) 남양(南陽) 숨은 인재. 위 문신
○맹달 자경(孟達 子慶 ?∼228) 유비-조비 장군

3) 오나라
●손견 문대(孫堅 文臺 156~192) 장사태수 - 파로장군
●손책 백부(孫策 伯符 175~200) 토역장군
●손권 중모(孫權 仲謨 182~252) 오 황제
●주유 공근(周瑜 公瑾 175~210) 건위중랑장 - 편장군
●노숙 자경(魯肅 子敬 172~217) 횡강장군
●정보 덕모(程普 德謨 ?~?) 탕구장군
●육손 백언(陸遜 伯言 183~245) 대도독 - 승상
●장소 자포(張昭 子布 156~236) 보오장군
●제갈근 자유(諸葛瑾 子瑜 174~241) 장사 - 대장군
●장굉 자강(張紘 子網 ?~?) 장사
●고옹 원탄(顧雍 元嘆 168~243) 승상
●육적 공기(陸績 公紀 187~219) 진조연 - 편장군
●설종 경문(薛綜 敬文 ?~243) 태자소부
●우번 중상(虞번 仲翔 164~233) 기도위
●여범 자형(呂範 子衡 ?~228) 건위장군 - 대사마
●보즐 자산(步櫛 子山 ?~247) 승상
●감택 덕윤(감澤 德潤 ?~243) 태자대부
●정병 덕추(程秉 德樞 ?~?) 태상
●제갈각 원손(諸葛恪 元遜 203~253) 대장군
●한당 의공(韓當 義公 ?~223?) 도독
●황개 공복(黃蓋 公覆 ?~?) 편장군
●주치 군리(朱治 君理 156~224) 안국장군
●여몽 자명(呂蒙 子明 178~219) 남군태수
●진무 자열(陳武 子烈 ?~215) 편장군
●장흠 공변(張欽 公변 ?~219) 우호군
●주태 유평(周泰 幼平 ?~?) 분위장군
●반장 문규(潘璋 文珪 ?~234) 우장군
●감녕 흥패(甘寧 興覇 ?~?) 절충장군
●태사자 자의(太史慈 子義 166~206) 건창도위
●능통 공적(凌統 公績 ?~?) 편장군
●서성 문향(徐盛 文嚮 ?~?) 안동장군
●주환 휴목(朱桓 休穆 178~239) 전장군
●정봉 승연(丁奉 承淵 ?~271) 대장군
●육항 유절(陸抗 幼節 226~274) 건무교위 - 대사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