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4일 화요일

張飛.도원결의...

飛.

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무장. 유비·관우와 함께 의형제를 맺었고 후한 말의 많은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다. 유비의 익주 공략 때 큰 공을 세워 파서태수가 되고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거기장군·사례교위에 임명되었다. 유주() 탁군(涿) 사람으로 자는 익덕()이다. 삼국시대 촉한() 시기의 명장()으로 벼슬은 거기장군(), 사례교위()를 지냈고, 서향후(西)에 봉해졌다. 뒤에 범강(), 장달()에게 죽임을 당한 후에 후주()가 환후()로 추봉하였다.
자는 ‘익덕()’으로 《삼국지연의》에는 ‘익덕()’으로 표기되어 있다. 삼국 시대 촉나라 탁군(涿) 사람. 자는 익덕()인데, 보통 익덕()이라 쓴다. 시호는 환후()다. 후한 말기에 관우()와 함께 유비()를 섬겼다. 헌제() 건안() 중에 조조()와 형주()를 다투다가 유비가 장판()에서 패하자 20명의 기병()으로 추격병을 막으니 조조의 군사가 감히 접근을 못했다. 유비가 익주()를 공격할 때 제갈량()과 함께 강을 거슬러 올라가 군현()을 점령하고 파서태수(西)가 되었다. 위나라의 장합()이 파서를 함락시키자 가서 격파했다. 거기장군()으로 옮겨 서향후(西)에 봉해졌다. 용맹스럽고 무예가 뛰어나 관우와 함께 ‘만인적()’으로 불렸다. 형 관우의 원수를 갚으려고 오()나라를 칠 준비를 하다가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무장. 유비·관우와 함께 의형제를 맺었고 후한 말의 많은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다. 유비의 익주 공략 때 큰 공을 세워 파서태수가 되고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거기장군·사례교위에 임명되었다.
성격이 호쾌하여 생각한 바를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기질의 인물이었다. <삼국지연의>에는 유비()와 관우()를 만나 의형제를 맺었다는 도원결의()의 고사가 전해지지만 이는 창작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후한() 말 동란기에는 유비관우와 함께 공손찬, 공융, 도겸 휘하에서 장수로 참전하여 많은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다.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자 3명은 흩어지게 되는데 이때 장비는 망탕산에서 탈출하여 고성현에 세력을 구축하고 눌러앉게 된다. 이후 다시 유비와 관우를 만나 합류하여 유비와 함께 제갈량을 찾아간다. 조조()가 형주()를 공격해 오자 당양 장판교() 위에서 기병 20기를 데리고 "내가 장익덕이다"라고 일갈하여 추격해 오는 조조군을 물리친 일화가 유명하다. 이후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치는 승리를 거두었다. 유비의 익주() 공략 때는 주력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워 파서태수(西)가 되었다. 위()나라의 명장 장합이 장로()를 무찌르고 파서로 밀고 들어오자 역전 끝에 이를 격퇴하였다.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거기장군()·사례교위()에 임명되었다. 장비는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였고 지나치게 부하들에게 엄격하여 원성을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유비에게 훈계를 자주 듣기도 하였다. 유비가 형주에서 죽음을 당한 관우의 복수를 위하여 오()나라 동정()을 명했는데 종군할 준비를 하던 중 술에 취해 잠이 들었을 때, 자신의 부하였던 장달과 범강에게 암살되었다. 관우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용장으로 일컬어진다.  후한() 말 동란기에는 유비관우와 함께 공손찬, 공융, 도겸 휘하에서 장수로 참전하여 많은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다.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자 3명은 흩어지게 되는데 이때 장비는 망탕산에서 탈출하여 고성현에 세력을 구축하고 눌러앉게 된다. 이후 다시 유비와 관우를 만나 합류하여 유비와 함께 제갈량을 찾아간다. 조조()가 형주()를 공격해 오자 당양 장판교() 위에서 기병 20기를 데리고 "내가 장익덕이다"라고 일갈하여 추격해 오는 조조군을 물리친 일화가 유명하다. 이후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치는 승리를 거두었다. 유비의 익주() 공략 때는 주력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워 파서태수(西)가 되었다. 위()나라의 명장 장합이 장로()를 무찌르고 파서로 밀고 들어오자 역전 끝에 이를 격퇴하였다.

장비는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였고 지나치게 부하들에게 엄격하여 원성을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유비에게 훈계를 자주 듣기도 하였다. 유비가 형주에서 죽음을 당한 관우의 복수를 위하여 오()나라 동정()을 명했는데 종군할 준비를 하던 중 술에 취해 잠이 들었을 때, 자신의 부하였던 장달과 범강에게 암살되었다. 관우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용장으로 일컬어진다.

1) 방랑하는 무사, 장비
장비는 유주() 탁군(涿) 탁현 사람으로 자는 익덕()이다. 정사()에 의하면 장비는 원래 어느 성주()의 부장()으로서 자신들이 머물고 있던 성이 황건적에게 함락되고 난 이후 방랑생활을 시작하게 된 무사이다.
장비는 용맹했지만, 성격이 매우 급하고 술을 좋아하였다. 또한 과격하며 싸움을 즐겼다.
2) 유비, 관우, 장비의 만남
동한 영제 중평() 원년(184), 황건 봉기가 발발했다. 유비는 탁현(涿)에서 군대를 조직하여 봉기를 진압하려 하였다. 당시 소년이던 장비는 관우와 함께 군에 들어가 함께 각지를 전전하며 싸웠다. 세 사람은 마치 형제 같았는데 한 침상을 사용할 정도였다. 봉기를 진압한 후 벌인 연회에서 유비의 곁에는 항상 관우와 장비가 함께 있었다.
헌제 초평() 원년(191), 유비는 공손찬에 의탁하여 전해()와 함께 원소에 대항하여 공을 세웠다. 유비는 평원상()에 봉해졌고, 관우와 장비는 유비의 수하에서 별부사마()를 맡아 부곡()을 관할했다.
헌제 흥평() 원년(194), 황건의 남은 무리가 북해태수(공융을 포위해와, 태사자를 보내 구조를 요청하였다. 장비는 유비를 따라가 그들을 도와주었다. 후에 조조가 서주(, 지금의 장쑤()성 쉬저우시)를 공격해 왔는데, 장비는 또 유비를 따라 서주에 가 도겸()을 구해주었다. 도겸은 유비에게 예주 책사를 주었고, 장비는 유비를 따라 소패(, 지금의 장쑤성 페이()현)에서 군대를 주둔하였다. 도겸이 죽은 후, 유비는 서주를 근거지로 삼았다.
3) 조조를 막고 삼고초려 제갈량을 만나다
건안() 원년(196), 원술이 서주를 공격해왔다. 유비는 장비를 보내 하비 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우이(, 지금의 장쑤성 화이안() 쉬이현)와 회음 을 지켜 원술에 대항하였다. 양측이 대치한 지 여러 달이 지났다. 도겸의 옛날 부하였던 조표가 장비 수하에 있었는데 이미 여포와 내응하고 있었으며 원술은 여포에게 하비를 습격하라고 명했다.
결국 유비와 장비는 싸움에서 패하였고, 여포는 유비와 그의 처자식, 가족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장비는 조표를 죽이지만 유비의 가솔들을 구하지 못했고, 자결하려 했던 장비를 유비가 말렸다.
후에 유비와 관우는 조조를 찾아가 연합하였고, 조조와 함께 장비는 중랑장()에 임명된다. 건안 5년(200),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조조를 배신하고 달아나 다시 하비를 점거하였고, 조조가 유대와 왕충을 보내 공격하였으나 장비가 그들을 격퇴한다. 조조는 직접 출병해 유비를 격퇴하고 관우를 잡아들으며 유비와 장비는 원소에게 도망갔다.
건안 6년(201년) 장비와 유비는 유벽, 공도() 등과 조조를 교란시키고, 조조가 채양()을 보내 공격했지만 유비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후에 유비는 조인에게 패배하였고, 장비는 유비를 따라 형주(,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에 있는 유표에게 가서 의탁하여 신야 에 주둔하였다. 이때 유비는 삼고초려한 끝에 제갈량을 만나게 된다. 이 길에 동행한 장비는 제갈량이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을 보고 화가 나 집에 불을 지르려고까지 했다.
4) 번뜩이는 기개로 위기를 넘기다
건안 13년(208), 유표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유종()이 조조에게 투항하자 유비는 남쪽으로 떠났다. 조조는 군대를 거느리고 남하하였고, 수십만 명의 백성이 그를 뒤따랐다. 조조가 조순()을 보내 유비군을 격파하자, 유비는 제갈량, 장비, 조운 등과 수십 명의 기병만을 데리고 도망쳤다.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운 때에 장비는 기병 20여 명을 소집하여 당양교() 위에 섰다. 장비는 강 근처에 있는 숲에 말 20마리를 묶어놓고, 말의 꼬리에 빗자루를 매달았다. 말이 꼬리를 흔들면서 먼지가 많이 일어나게 하여 복병이 많아 보이게 위장한 것이다. 그리고 조조의 대군이 도착하자 장비는 다리를 끊어버렸다. 그러고는 조조의 군대에게 “내가 장익덕이다. 마지막 승부를 겨루자!”라고 소리쳤다. 비록 장비 쪽 사람이 훨씬 적었지만 조조의 군대는 장비의 용맹스러움에 겁을 내고 감히 나설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5) 유비를 지원하다
유비의 군대는 안정을 되찾았고, 후에 조운이 유비의 아내와 가솔들을 구출해 유비와 합류하였다. 이때 관우는 수로를 통해 지원하여 유비, 장비와 함께 강하(, 지금의 후베이성 우한() 장샤구)로 나아갔다. 이윽고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유비는 강남을 평정했다.
건안 15년(210) 주유가 죽자 유비는 손권과 협의하여 남군() 일대를 넘겨받았다. 이때 장비는 의도태수()와 정로장군()에 임명되었고 이후 남군태수()로 전임되었다.
건안 17년(212) 유비는 익주목() 유장()의 요청으로 서천(西)으로 가 유장을 도와 장로()에 대항하여 싸웠다. 이때 장비, 관우, 조운, 제갈량 등은 함께 형주를 지키고 있었다. 손권의 여동생인 손부인이 이 기회를 틈타 유비의 아들 유선을 데리고 오나라로 돌아가려했는데 장비가 이를 저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비와 유장의 사이가 벌어졌고 장비는 제갈량, 조운 등과 함께 서천으로 가 유비를 지원하였다.
건안 18년(213), 대군이 강주(, 지금의 충칭()시)에 도착하자 강주 수장 엄안이 수비하였지만 장비에게 패하였다. 장비는 강주를 점령한 후 엄안을 생포하여 이렇게 말했다. “대군이 오는데 너는 어찌하여 투항하지 않고 우리와 큰 전쟁을 벌이느냐!” 엄안은 “너희는 무리하게 우리의 영토를 침탈해왔다. 우리는 여기에서 죽더라도 투항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장비가 대노하여 엄안의 목을 베려 하자 엄안이 “목을 베려면 베지, 화는 왜 내느냐!” 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고 이 기세에 감동한 장비는 그를 풀어주었다. 그를 용서하고 후하게 대접했다.
6) 왕좌에 오른 유비와 관우의 죽음
건안 19년(214) 장비는 지금의 쓰촨성 일대인 파군()과 파서(西)를, 조운은 강양  을 평정하였다. 유비는 익주7)를 평정한 후 장비에게 황금 500근, 은 천근, 비단 천 필을 하사하였고 파서태수(西)로 임명하였다.
218년, 조조는 장합에게 파서를 공격하라고 명했고, 장합은 파서 탕거()현을 침략하여 백성을 괴롭혔다. 유비는 강주에 주둔하며 장비로 하여금 낭중(, 지금의 쓰촨성 난충() 랑중구)에 주둔하며 장합을 공격하라고 명하였다. 장비는 장합과 50여 일을 대치하다가 장합을 산길이 비좁은 와구관()으로 유도하여 장합의 군대가 더 이상 지원을 오지 못하게 하여 장합을 대파하였다. 파서는 안정을 되찾았다.
건안 24년(219), 장비가 장수 오란(), 뇌동()과 함께 저수(, 산시(西)성 쥐수)에 가서 무도(, 지금의 간쑤성 우두시), 음평(, 지금의 간쑤성 룽난시 원()현) 두 곳을 점령하려 하였으나 조홍조진서황 등에 패하였다. 조조는 직접 유비가 지키고 있는 한중(, 지금의 산시(西)성 한중시)을 치러 갔으나 소득 없이 철수하고 한중은 유비의 소유가 되었다. 유비가 한중을 평정하고 한중왕()에 올랐고, 장비는 우장군()에 임명된다. 그 해 12월 관우가 손권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7) 불같은 성정으로 죽음에 이르다
건안 26년(221)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장비는 거기장군(), 사례교위(), 낭중목()을 겸임하였고 서향후(西)에 봉해진다. 그러나 관우가 죽고 나자 장비는 매일 큰 소리로 울며, 술을 마시고는 난폭해져 부하들을 학대하였다. 이를 본 유비는 장비에게 “군사들을 채찍질하기만 하고 또다시 너를 섬기라고 하니, 나중에 큰 화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관우가 죽자 유비는 거의 전군을 동원하여 오나라 정벌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장비는 관우의 복수를 위해 군사들을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군사들에게 입힐 흰 갑옷, 흰 군복 그리고 흰 깃발을 사흘 내에 마련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는 관우를 애도하기 위함이었다.
다음 날, 이것들을 조달하는 임무를 맡은 범강()과 장달()이 찾아와 사흘 안에 수만 명의 군사가 입을 갑옷, 군복을 마련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토로한다. 이에 장비는 분개하여 두 장수를 나무에 매달아 50대나 채찍질하고, 두 명의 얼굴을 직접 때려 얼굴에 피가 가득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고는 다음 날까지 이 모든 것을 마련하지 못하면 목을 베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목숨에 위협을 느낀 범강과 장달은 결국 장비를 죽이기로 모의했다.
장달은 장비가 술에 취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장비의 막사를 지키던 군사를 속이고 장비에게 접근했다. 장비의 눈이 떠있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범강과 장달은 동시에 장비를 찔렀다. 장비는 비명을 지르고는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장비의 나이 55세였다. 범강과 장달은 장비의 목을 베어 수하 군사들과 함께 오나라로 달아났다. 유비가 크게 상심했고, 오나라 정벌은 처절한 패배로 끝났다. 후퇴하던 유비도 백제성에서 숨을 거두었고, 후주 유선이 뒤를 이었다. 후주 유선은 경요(耀) 3년(260)에 장비에게 환후()라는 시호를 내렸다.

8) 유적
장비묘()가 쓰촨성의 운양(, 충칭시 윈양현)과 낭중(, 난충() 랑중구) 두 곳에 있다. 장비묘는 장비를 기리는 사당으로 장환후묘 또는 장환사()라고도 부른다.
낭중에 있는 장비묘는 장비를 기리기 위한 대전(殿), 장비의 아들과 수하 문무관들을 모신 적만루(), 묘소,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운양에 있는 묘는 과거 장비의 머리가 양자강에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수습하여 비봉산에 묻어주고 사당을 지어준 것이 시초가 되었다 전한다. 운양의 장환후묘는 2007년에 완공된 삼협() 댐에 의해 본래 자리에서 32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옮겨졌는데 그 과정에서 상당 부분 훼손되었다. 이곳의 장환후묘에는 묘당, 결의루(), 묘 주변에 2년간 머물렀던 시인 두보의 작은 동상, 주원장의 친필 글씨 등이 있다.
주요 업적으로 장판파()에서 20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다리를 끊어 조조() 군사들의 추격을 막고, 서천(西)을 취하는 큰 공을 세웠다. 또 한중() 쟁탈전에서 장합()에게 대승()을 거둔 것 등이다.













2017년 11월 12일 일요일

幸州大捷

幸州大捷"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군을 대파한 싸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권율은 임진왜란 초에 광주목사(使)로 있으면서 군사를 일으켜 전공을 세워 전라도 순찰사(使)가 되었는데, 그 뒤 중국 명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수원성()에 머물다가, 1593년(선조 26) 2월 1만여 병력을 행주산성에 집결시켰다. 권율은 조방장() 조경()을 시켜 행주산성을 수축하게 하고 목책을 만들게 하였으며, 병사(使) 선거이()는 금주(:), 창의사(使) 김천일()은 강화(), 충청감사 허욱()은 통진(:)에서 각각 그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한편 일본군은 이 무렵 총퇴각을 감행하여 서울 부근으로 집결할 때였으므로 그 병력이 대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1월 말의 벽제관()에서 승리한 직후여서 그들의 사기 또한 충천해 있었다. 2월 12일 새벽 일본군은 3만여 병력으로 내습, 여러 겹으로 성()을 포위하고 3진으로 나누어 9차례에 걸쳐 종일토록 맹공격해왔다. 이에 권율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왜군과 맞서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였으며, 당시 행주산성의 싸움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마침내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는데, 권율은 이를 추격하여 130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깃카와 히로이에[] 등에게도 부상을 입혔다. 행주산성의 전투는 임진왜란의 3대첩() 중의 하나로, 권율은 이 공로로 도원수()가 되었다. 당시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석전()으로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때문에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상세내용
임진왜란 때인 1593년 2월에 전라도관찰사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
권율은 왜란 초 전라도 광주목사로 있으면서 1592년 7월 배티전투에서 대승한 공으로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는데, 관군과 명군이 평양을 수복한 후 남진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다가 수원 독산성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근거지를 경기도 고양의 행주산성에 주둔하면서 은밀히 군사를 이곳으로 옮긴 뒤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을 견제하였다. 이때 죽산에서 패한 소모사 변이중이 정병 1,000명을 거느리고 양천에 주둔하며 권율을 도왔으며, 승장 처영도 승병 1,000명을 이끌고 권율을 따라 강을 건너니 이 산성에 포진한 총병력은 1만명 정도였다.
이에 왜군은 배티와 독산성에서 치욕적인 대패를 설욕하고 후방의 위험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행주산성을 공격하기로 결의하였다. 왜군은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의 지휘하에 3만여 명의 병력을 7개 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으로 진군하였다. 한편, 성 안의 관군은 변이중이 만든 화차와 권율의 지시로 만든 수차석포라는 특수한 무기로 무장하였고, 병사에게는 재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허리에 차게 하였다.

마침내 1593년 2월 12일 아침 일본군의 선봉 100여기가 나타나더니 뒤이어 대군이 밀려왔다. 그러자 성 안의 아군은 일시에 화차에서 포를 발사하고, 수차석포에서 돌을 뿜어내며, 진천뢰·총통 등을 쏘아대니 몰려들었던 적은 궤멸상태에 빠져 물러갔다.

그러자 전투상황을 지켜보던 총대장 우키타는 직접 선두에 나와 지휘하니 그들은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계속 전진하여 접근하자 관군은 한때 동요하였으나 권율의 독전으로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으며, 화차의 총통이 적장에게 집중 사격되어 우키타는 부상을 입고 퇴진하였다.

그러나 남은 군사들이 뒤를 이어 화통으로 성책의 일부를 집중 발사하여 불이 붙게 하였으나 관군은 미리 마련한 물로 꺼버리고 화살과 돌로 공격을 하는 한편, 차고 있던 재를 적의 진영에 뿌리자 눈을 뜰 수 없게 된 적군은 후퇴하고 말았다. 이에 왜군은 마지막 남은 부대가 산성 서북쪽을 지키던 승군의 일각을 뚫고 성 안에까지 돌입하려 하자 급박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때 권율은 대검을 빼어들고 승군의 총공격을 명하자 일본군과 치열한 백병전에 돌입하였다. 이때 옆 진영의 관군도 화살이 다하여 투석전을 폈는데, 특히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 적을 공격케 함으로써 큰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적도 다시 기세를 올려 공격을 멈추지 않아 곤란한 상태에 빠졌으나 마침 경기수사 이빈이 수만 개의 화살을 실은 배 두 척을 몰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적의 후방을 칠 기세를 보이니, 적은 당황하여 내성에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성 안의 관군은 이를 알아차리고 일제히 추격하여 적을 완전히 물리쳤다. 이것이 유명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이 전투는 권율의 효과적인 방어 준비 태세에 의한 승리로서 왜군의 서울 방어 작전을 교란시켜 조선군의 사기가 고양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내용
권율은 왜란 초 광주목사(使)로 있으면서 1592년(선조 25) 7월 배티〔〕싸움에서 대승한 공으로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권율은 관군과 함께 평양을 수복한 뒤, 남쪽으로 내려온 명나라의 원군과 호응해 서울을 되찾기 위해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북상하던 중 수원 독산성(禿)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어 그는 군대를 서울 근교 서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조방장() 조경()에게 적당한 지역을 물색하도록 하였다.
조경은 양천()에서 한강을 건너 병력을 주둔시킬 만한 곳을 찾아내어 권율에게 보고하였다. 권율은 서울 주변인 안현()에 진을 치려고 했으나 막하 장수들이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조경이 물색한 곳으로 결정했는데, 이 곳이 행주산성이다. 권율은 행주산성에 조경으로 하여금 목책()을 완성하게 하고, 은밀히 군사를 이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휘하 병력 중 4,000명을 뽑아 전라도병사 선거이() 지휘 하에 금천( : 지금의 시흥)에 주둔시켜 서울의 적을 견제하였다. 이 때 죽산에서 패한 소모사(使) 변이중()도 정예병 1,000명을 거느리고 양천에 주둔해, 행주산성과 금천 중간 위치에서 일본군을 견제하였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행주산성에 배수진을 친 권율을 돕기로 하였다.
권율은 남은 병사를 이끌고 조경 등과 함께 행주산성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승장() 처영()도 승의병() 1,000명을 이끌고 권율을 따라 강을 건너니 행주산성에 포진한 총병력은 1만 명이 못 되었다. 이후 권율이 정예병을 뽑아 서울에 보내어 전투 태세를 갖췄다.
적장들은 배티와 독산성에서 치욕적인 대패를 경험한지라 단번에 침공해 권율의 군대를 무찔러 위험을 없애자고 결의하였다. 한 번도 진두에 나서본 일이 없던 총대장 우키타()를 비롯해 이시다()·마시다()·오타니()의 세 봉행( : 통치자 장군을 보좌하던 최고 무관직) 등 본진의 장수들까지 7개 부대로 나눠 행주산성으로 진군하였다. 이 때 전 병력은 3만여 명이었다.
성 안의 관군이 소지한 무기는 궁시()·도창() 외에, 변이중이 만든 화차(), 권율의 지시로 만든 수차석포()라는 특수한 무기가 있었다. 또, 산성에서는 일본군이 몰려올 것에 대비해 성책을 내외 이중으로 만들었다.
토제()를 쌓아 조총 탄환을 피할 수 있게 했고, 병사에게 재를 담은 주머니를 허리에 차게 하였다. 일본군이 공격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권율은 이번 한판싸움에 병사들의 생사는 물론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것을 병사들에게 주지시키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1593년 2월 12일 오전 6시 경 일본군의 선봉 100여 기()가 나타나더니 뒤이어 대군이 밀려 왔다. 제1대장 고니시(西)가 선봉으로 나섰다. 그는 평양싸움에서 대패한 이후 벽제관()싸움에도 참전하지 않다가 마침내 설욕할 좋은 기회라 여기고 성() 공격에 앞장섰다.
성 안의 아군은 일시에 화차에서 포를 발사하고, 수차석포에서 돌을 뿜어내며, 진천뢰()·총통() 등을 쏘아대고 강궁()의 시위를 당겼다. 몰려들었던 적의 병마가 이에 맞아 혼비백산하니 고니시의 제1대는 궤멸해 물러갔다. 이시다가 이끈 제2대도 공격에 실패하였다.
이어 제3대의 일본군들이 달려들었다. 대장 구로다()는 전년 9월 연안성()싸움에서 의병에게 대패한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긴 방죽 위에 누대를 만들고 그 위에 총수() 수십 명을 배치해 성 안으로 조총을 쏘게만 하고 병졸에게는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조경은 대포를 쏘아 이를 깨뜨렸다. 또 포전() 끝에 칼날 두 개씩을 달아 쏘니 맞는 자는 즉사하였다.
제1대부터 3대까지 연패하는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총대장 우키타는 크게 노해 선두에 나서니 이에 소속된 제4대 장병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랐다. 제4대는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계속 진격해 제1성책을 넘어서 제2성책까지 접근하였다.
관군은 한때 동요했으나 권율의 독려로 힘을 얻어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화차의 총통이 적장에게 집중 사격되어 우키타는 부상을 입고 부하의 부축을 받으며 퇴진하였다. 그리고 이 때까지 남아 선두에서 지휘하던 제2대장 이시다도 부상으로 후퇴하였다.
제5대장 깃카와()는 제4대의 뒤를 이어 화통()을 성책 일부에 집중 발사해 불이 붙게 했으나 관군은 미리 마련한 물로 꺼 버렸다. 관군이 시석()을 퍼부어 깃카와가 큰 부상을 입고 퇴각했고 부하 병졸의 사망자만도 160명이나 발생하였다.
두 대장의 부상에 분노한 제6대장 모리()와 고바야카와()는 제2성책을 공격하였다. 이에 처영은 승의군을 이끌고 용감히 맞섰다. 그리고 승의병이 각기 허리에 찬 재를 뿌리자 눈을 뜰 수 없게 된 적군은 달아나고 말았다.
일본군은 마지막 남은 제7대로 공격을 시작하였다. 제7대장 고바야카와()는 노장으로 선두에 서서 서북쪽 자성()을 지키던 승의군 한 귀퉁이를 뚫고 성 안에까지 돌입하려 하였다. 이에 승의병이 동요해, 위급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 때 권율은 대검을 빼들고 승의군의 총공격을 호령하고 일본군과 치열한 백병전에 돌입하였다. 옆 진영의 관군도 화살이 다해 투석전을 폈는데, 이때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이 일치단결해 싸웠다. 특히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다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성 안에 무기와 군인이 부족한 상황을 눈치챈 적군이 기세를 올리려 하였다. 그러나 마침 경기수사(使) 이빈()이 화살 수만 개를 실은 배 두 척을 몰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적의 후방을 칠 기세를 보였다. 이에 당황한 적은 성 안에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성 안의 관군도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적을 추격해 130급()을 베었다. 그리고 파괴된 내성도 급히 보수하였다.
적군은 퇴각하면서 사방에 흩어진 시체를 불태웠다. 아군은 그들이 버리고 간 갑주()·도창 등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였다. 노획물 중 중요한 것만도 272건이었다. 적군이 버리고 간 적의 시체가 200구가 넘었고, 타다 남은 시체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것이 유명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명() 제독 이여송()은 평양으로 회군하던 중 행주대첩의 소식을 듣고 벽제관에서 패하고 급히 회군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대첩이 있은 다음 권율은 병력을 이끌고 파주산성()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 등과 본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하였다. 그 뒤 권율이 김명원의 뒤를 이어 도원수가 된 것은 행주대첩의 전공이 많이 작용된 것이라 하겠다.

전라순찰사 권율은 명군과 힘을 합해 서울 수복을 위해 수원에 머물다가, 명군이 벽제관 전투에서 패하고 개성으로 퇴각하자 1593년 2월 1만여 병력을 경기도 고양군의 행주산성에 집결시켰다. 권율은 행주산성을 새로 수축하는 한편 선거이()·허욱() 등이 거느리는 관군 및 김천일이 거느리는 의병으로 하여금 시흥·김포·강화 일대에서 지원하게 했다. 왜군은 3만여 병력을 3진으로 나누고 9차례에 걸쳐 성을 맹공격했으나 결국 패퇴했으며, 조선군은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이 싸움에서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짧게 잘라입고 돌을 날라 왜군에게 던짐으로써 승리에 기여한 데서 지금의 행주치마가 유래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권율은 이 싸움의 공로로 도원수가 되었다. 격전지인 행주산성은 백제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성으로 사적 56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