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4일 화요일

張飛.도원결의...

飛.

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무장. 유비·관우와 함께 의형제를 맺었고 후한 말의 많은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다. 유비의 익주 공략 때 큰 공을 세워 파서태수가 되고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거기장군·사례교위에 임명되었다. 유주() 탁군(涿) 사람으로 자는 익덕()이다. 삼국시대 촉한() 시기의 명장()으로 벼슬은 거기장군(), 사례교위()를 지냈고, 서향후(西)에 봉해졌다. 뒤에 범강(), 장달()에게 죽임을 당한 후에 후주()가 환후()로 추봉하였다.
자는 ‘익덕()’으로 《삼국지연의》에는 ‘익덕()’으로 표기되어 있다. 삼국 시대 촉나라 탁군(涿) 사람. 자는 익덕()인데, 보통 익덕()이라 쓴다. 시호는 환후()다. 후한 말기에 관우()와 함께 유비()를 섬겼다. 헌제() 건안() 중에 조조()와 형주()를 다투다가 유비가 장판()에서 패하자 20명의 기병()으로 추격병을 막으니 조조의 군사가 감히 접근을 못했다. 유비가 익주()를 공격할 때 제갈량()과 함께 강을 거슬러 올라가 군현()을 점령하고 파서태수(西)가 되었다. 위나라의 장합()이 파서를 함락시키자 가서 격파했다. 거기장군()으로 옮겨 서향후(西)에 봉해졌다. 용맹스럽고 무예가 뛰어나 관우와 함께 ‘만인적()’으로 불렸다. 형 관우의 원수를 갚으려고 오()나라를 칠 준비를 하다가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무장. 유비·관우와 함께 의형제를 맺었고 후한 말의 많은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다. 유비의 익주 공략 때 큰 공을 세워 파서태수가 되고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거기장군·사례교위에 임명되었다.
성격이 호쾌하여 생각한 바를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기질의 인물이었다. <삼국지연의>에는 유비()와 관우()를 만나 의형제를 맺었다는 도원결의()의 고사가 전해지지만 이는 창작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후한() 말 동란기에는 유비관우와 함께 공손찬, 공융, 도겸 휘하에서 장수로 참전하여 많은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다.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자 3명은 흩어지게 되는데 이때 장비는 망탕산에서 탈출하여 고성현에 세력을 구축하고 눌러앉게 된다. 이후 다시 유비와 관우를 만나 합류하여 유비와 함께 제갈량을 찾아간다. 조조()가 형주()를 공격해 오자 당양 장판교() 위에서 기병 20기를 데리고 "내가 장익덕이다"라고 일갈하여 추격해 오는 조조군을 물리친 일화가 유명하다. 이후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치는 승리를 거두었다. 유비의 익주() 공략 때는 주력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워 파서태수(西)가 되었다. 위()나라의 명장 장합이 장로()를 무찌르고 파서로 밀고 들어오자 역전 끝에 이를 격퇴하였다.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거기장군()·사례교위()에 임명되었다. 장비는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였고 지나치게 부하들에게 엄격하여 원성을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유비에게 훈계를 자주 듣기도 하였다. 유비가 형주에서 죽음을 당한 관우의 복수를 위하여 오()나라 동정()을 명했는데 종군할 준비를 하던 중 술에 취해 잠이 들었을 때, 자신의 부하였던 장달과 범강에게 암살되었다. 관우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용장으로 일컬어진다.  후한() 말 동란기에는 유비관우와 함께 공손찬, 공융, 도겸 휘하에서 장수로 참전하여 많은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다.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자 3명은 흩어지게 되는데 이때 장비는 망탕산에서 탈출하여 고성현에 세력을 구축하고 눌러앉게 된다. 이후 다시 유비와 관우를 만나 합류하여 유비와 함께 제갈량을 찾아간다. 조조()가 형주()를 공격해 오자 당양 장판교() 위에서 기병 20기를 데리고 "내가 장익덕이다"라고 일갈하여 추격해 오는 조조군을 물리친 일화가 유명하다. 이후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치는 승리를 거두었다. 유비의 익주() 공략 때는 주력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워 파서태수(西)가 되었다. 위()나라의 명장 장합이 장로()를 무찌르고 파서로 밀고 들어오자 역전 끝에 이를 격퇴하였다.

장비는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였고 지나치게 부하들에게 엄격하여 원성을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유비에게 훈계를 자주 듣기도 하였다. 유비가 형주에서 죽음을 당한 관우의 복수를 위하여 오()나라 동정()을 명했는데 종군할 준비를 하던 중 술에 취해 잠이 들었을 때, 자신의 부하였던 장달과 범강에게 암살되었다. 관우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용장으로 일컬어진다.

1) 방랑하는 무사, 장비
장비는 유주() 탁군(涿) 탁현 사람으로 자는 익덕()이다. 정사()에 의하면 장비는 원래 어느 성주()의 부장()으로서 자신들이 머물고 있던 성이 황건적에게 함락되고 난 이후 방랑생활을 시작하게 된 무사이다.
장비는 용맹했지만, 성격이 매우 급하고 술을 좋아하였다. 또한 과격하며 싸움을 즐겼다.
2) 유비, 관우, 장비의 만남
동한 영제 중평() 원년(184), 황건 봉기가 발발했다. 유비는 탁현(涿)에서 군대를 조직하여 봉기를 진압하려 하였다. 당시 소년이던 장비는 관우와 함께 군에 들어가 함께 각지를 전전하며 싸웠다. 세 사람은 마치 형제 같았는데 한 침상을 사용할 정도였다. 봉기를 진압한 후 벌인 연회에서 유비의 곁에는 항상 관우와 장비가 함께 있었다.
헌제 초평() 원년(191), 유비는 공손찬에 의탁하여 전해()와 함께 원소에 대항하여 공을 세웠다. 유비는 평원상()에 봉해졌고, 관우와 장비는 유비의 수하에서 별부사마()를 맡아 부곡()을 관할했다.
헌제 흥평() 원년(194), 황건의 남은 무리가 북해태수(공융을 포위해와, 태사자를 보내 구조를 요청하였다. 장비는 유비를 따라가 그들을 도와주었다. 후에 조조가 서주(, 지금의 장쑤()성 쉬저우시)를 공격해 왔는데, 장비는 또 유비를 따라 서주에 가 도겸()을 구해주었다. 도겸은 유비에게 예주 책사를 주었고, 장비는 유비를 따라 소패(, 지금의 장쑤성 페이()현)에서 군대를 주둔하였다. 도겸이 죽은 후, 유비는 서주를 근거지로 삼았다.
3) 조조를 막고 삼고초려 제갈량을 만나다
건안() 원년(196), 원술이 서주를 공격해왔다. 유비는 장비를 보내 하비 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우이(, 지금의 장쑤성 화이안() 쉬이현)와 회음 을 지켜 원술에 대항하였다. 양측이 대치한 지 여러 달이 지났다. 도겸의 옛날 부하였던 조표가 장비 수하에 있었는데 이미 여포와 내응하고 있었으며 원술은 여포에게 하비를 습격하라고 명했다.
결국 유비와 장비는 싸움에서 패하였고, 여포는 유비와 그의 처자식, 가족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장비는 조표를 죽이지만 유비의 가솔들을 구하지 못했고, 자결하려 했던 장비를 유비가 말렸다.
후에 유비와 관우는 조조를 찾아가 연합하였고, 조조와 함께 장비는 중랑장()에 임명된다. 건안 5년(200),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조조를 배신하고 달아나 다시 하비를 점거하였고, 조조가 유대와 왕충을 보내 공격하였으나 장비가 그들을 격퇴한다. 조조는 직접 출병해 유비를 격퇴하고 관우를 잡아들으며 유비와 장비는 원소에게 도망갔다.
건안 6년(201년) 장비와 유비는 유벽, 공도() 등과 조조를 교란시키고, 조조가 채양()을 보내 공격했지만 유비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후에 유비는 조인에게 패배하였고, 장비는 유비를 따라 형주(,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에 있는 유표에게 가서 의탁하여 신야 에 주둔하였다. 이때 유비는 삼고초려한 끝에 제갈량을 만나게 된다. 이 길에 동행한 장비는 제갈량이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을 보고 화가 나 집에 불을 지르려고까지 했다.
4) 번뜩이는 기개로 위기를 넘기다
건안 13년(208), 유표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유종()이 조조에게 투항하자 유비는 남쪽으로 떠났다. 조조는 군대를 거느리고 남하하였고, 수십만 명의 백성이 그를 뒤따랐다. 조조가 조순()을 보내 유비군을 격파하자, 유비는 제갈량, 장비, 조운 등과 수십 명의 기병만을 데리고 도망쳤다.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운 때에 장비는 기병 20여 명을 소집하여 당양교() 위에 섰다. 장비는 강 근처에 있는 숲에 말 20마리를 묶어놓고, 말의 꼬리에 빗자루를 매달았다. 말이 꼬리를 흔들면서 먼지가 많이 일어나게 하여 복병이 많아 보이게 위장한 것이다. 그리고 조조의 대군이 도착하자 장비는 다리를 끊어버렸다. 그러고는 조조의 군대에게 “내가 장익덕이다. 마지막 승부를 겨루자!”라고 소리쳤다. 비록 장비 쪽 사람이 훨씬 적었지만 조조의 군대는 장비의 용맹스러움에 겁을 내고 감히 나설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5) 유비를 지원하다
유비의 군대는 안정을 되찾았고, 후에 조운이 유비의 아내와 가솔들을 구출해 유비와 합류하였다. 이때 관우는 수로를 통해 지원하여 유비, 장비와 함께 강하(, 지금의 후베이성 우한() 장샤구)로 나아갔다. 이윽고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유비는 강남을 평정했다.
건안 15년(210) 주유가 죽자 유비는 손권과 협의하여 남군() 일대를 넘겨받았다. 이때 장비는 의도태수()와 정로장군()에 임명되었고 이후 남군태수()로 전임되었다.
건안 17년(212) 유비는 익주목() 유장()의 요청으로 서천(西)으로 가 유장을 도와 장로()에 대항하여 싸웠다. 이때 장비, 관우, 조운, 제갈량 등은 함께 형주를 지키고 있었다. 손권의 여동생인 손부인이 이 기회를 틈타 유비의 아들 유선을 데리고 오나라로 돌아가려했는데 장비가 이를 저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비와 유장의 사이가 벌어졌고 장비는 제갈량, 조운 등과 함께 서천으로 가 유비를 지원하였다.
건안 18년(213), 대군이 강주(, 지금의 충칭()시)에 도착하자 강주 수장 엄안이 수비하였지만 장비에게 패하였다. 장비는 강주를 점령한 후 엄안을 생포하여 이렇게 말했다. “대군이 오는데 너는 어찌하여 투항하지 않고 우리와 큰 전쟁을 벌이느냐!” 엄안은 “너희는 무리하게 우리의 영토를 침탈해왔다. 우리는 여기에서 죽더라도 투항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장비가 대노하여 엄안의 목을 베려 하자 엄안이 “목을 베려면 베지, 화는 왜 내느냐!” 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고 이 기세에 감동한 장비는 그를 풀어주었다. 그를 용서하고 후하게 대접했다.
6) 왕좌에 오른 유비와 관우의 죽음
건안 19년(214) 장비는 지금의 쓰촨성 일대인 파군()과 파서(西)를, 조운은 강양  을 평정하였다. 유비는 익주7)를 평정한 후 장비에게 황금 500근, 은 천근, 비단 천 필을 하사하였고 파서태수(西)로 임명하였다.
218년, 조조는 장합에게 파서를 공격하라고 명했고, 장합은 파서 탕거()현을 침략하여 백성을 괴롭혔다. 유비는 강주에 주둔하며 장비로 하여금 낭중(, 지금의 쓰촨성 난충() 랑중구)에 주둔하며 장합을 공격하라고 명하였다. 장비는 장합과 50여 일을 대치하다가 장합을 산길이 비좁은 와구관()으로 유도하여 장합의 군대가 더 이상 지원을 오지 못하게 하여 장합을 대파하였다. 파서는 안정을 되찾았다.
건안 24년(219), 장비가 장수 오란(), 뇌동()과 함께 저수(, 산시(西)성 쥐수)에 가서 무도(, 지금의 간쑤성 우두시), 음평(, 지금의 간쑤성 룽난시 원()현) 두 곳을 점령하려 하였으나 조홍조진서황 등에 패하였다. 조조는 직접 유비가 지키고 있는 한중(, 지금의 산시(西)성 한중시)을 치러 갔으나 소득 없이 철수하고 한중은 유비의 소유가 되었다. 유비가 한중을 평정하고 한중왕()에 올랐고, 장비는 우장군()에 임명된다. 그 해 12월 관우가 손권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7) 불같은 성정으로 죽음에 이르다
건안 26년(221)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장비는 거기장군(), 사례교위(), 낭중목()을 겸임하였고 서향후(西)에 봉해진다. 그러나 관우가 죽고 나자 장비는 매일 큰 소리로 울며, 술을 마시고는 난폭해져 부하들을 학대하였다. 이를 본 유비는 장비에게 “군사들을 채찍질하기만 하고 또다시 너를 섬기라고 하니, 나중에 큰 화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관우가 죽자 유비는 거의 전군을 동원하여 오나라 정벌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장비는 관우의 복수를 위해 군사들을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군사들에게 입힐 흰 갑옷, 흰 군복 그리고 흰 깃발을 사흘 내에 마련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는 관우를 애도하기 위함이었다.
다음 날, 이것들을 조달하는 임무를 맡은 범강()과 장달()이 찾아와 사흘 안에 수만 명의 군사가 입을 갑옷, 군복을 마련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토로한다. 이에 장비는 분개하여 두 장수를 나무에 매달아 50대나 채찍질하고, 두 명의 얼굴을 직접 때려 얼굴에 피가 가득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고는 다음 날까지 이 모든 것을 마련하지 못하면 목을 베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목숨에 위협을 느낀 범강과 장달은 결국 장비를 죽이기로 모의했다.
장달은 장비가 술에 취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장비의 막사를 지키던 군사를 속이고 장비에게 접근했다. 장비의 눈이 떠있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범강과 장달은 동시에 장비를 찔렀다. 장비는 비명을 지르고는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장비의 나이 55세였다. 범강과 장달은 장비의 목을 베어 수하 군사들과 함께 오나라로 달아났다. 유비가 크게 상심했고, 오나라 정벌은 처절한 패배로 끝났다. 후퇴하던 유비도 백제성에서 숨을 거두었고, 후주 유선이 뒤를 이었다. 후주 유선은 경요(耀) 3년(260)에 장비에게 환후()라는 시호를 내렸다.

8) 유적
장비묘()가 쓰촨성의 운양(, 충칭시 윈양현)과 낭중(, 난충() 랑중구) 두 곳에 있다. 장비묘는 장비를 기리는 사당으로 장환후묘 또는 장환사()라고도 부른다.
낭중에 있는 장비묘는 장비를 기리기 위한 대전(殿), 장비의 아들과 수하 문무관들을 모신 적만루(), 묘소,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운양에 있는 묘는 과거 장비의 머리가 양자강에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수습하여 비봉산에 묻어주고 사당을 지어준 것이 시초가 되었다 전한다. 운양의 장환후묘는 2007년에 완공된 삼협() 댐에 의해 본래 자리에서 32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옮겨졌는데 그 과정에서 상당 부분 훼손되었다. 이곳의 장환후묘에는 묘당, 결의루(), 묘 주변에 2년간 머물렀던 시인 두보의 작은 동상, 주원장의 친필 글씨 등이 있다.
주요 업적으로 장판파()에서 20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다리를 끊어 조조() 군사들의 추격을 막고, 서천(西)을 취하는 큰 공을 세웠다. 또 한중() 쟁탈전에서 장합()에게 대승()을 거둔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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