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2일 일요일

幸州大捷

幸州大捷"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군을 대파한 싸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권율은 임진왜란 초에 광주목사(使)로 있으면서 군사를 일으켜 전공을 세워 전라도 순찰사(使)가 되었는데, 그 뒤 중국 명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수원성()에 머물다가, 1593년(선조 26) 2월 1만여 병력을 행주산성에 집결시켰다. 권율은 조방장() 조경()을 시켜 행주산성을 수축하게 하고 목책을 만들게 하였으며, 병사(使) 선거이()는 금주(:), 창의사(使) 김천일()은 강화(), 충청감사 허욱()은 통진(:)에서 각각 그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한편 일본군은 이 무렵 총퇴각을 감행하여 서울 부근으로 집결할 때였으므로 그 병력이 대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1월 말의 벽제관()에서 승리한 직후여서 그들의 사기 또한 충천해 있었다. 2월 12일 새벽 일본군은 3만여 병력으로 내습, 여러 겹으로 성()을 포위하고 3진으로 나누어 9차례에 걸쳐 종일토록 맹공격해왔다. 이에 권율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왜군과 맞서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였으며, 당시 행주산성의 싸움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마침내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는데, 권율은 이를 추격하여 130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깃카와 히로이에[] 등에게도 부상을 입혔다. 행주산성의 전투는 임진왜란의 3대첩() 중의 하나로, 권율은 이 공로로 도원수()가 되었다. 당시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석전()으로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때문에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상세내용
임진왜란 때인 1593년 2월에 전라도관찰사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
권율은 왜란 초 전라도 광주목사로 있으면서 1592년 7월 배티전투에서 대승한 공으로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는데, 관군과 명군이 평양을 수복한 후 남진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다가 수원 독산성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근거지를 경기도 고양의 행주산성에 주둔하면서 은밀히 군사를 이곳으로 옮긴 뒤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을 견제하였다. 이때 죽산에서 패한 소모사 변이중이 정병 1,000명을 거느리고 양천에 주둔하며 권율을 도왔으며, 승장 처영도 승병 1,000명을 이끌고 권율을 따라 강을 건너니 이 산성에 포진한 총병력은 1만명 정도였다.
이에 왜군은 배티와 독산성에서 치욕적인 대패를 설욕하고 후방의 위험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행주산성을 공격하기로 결의하였다. 왜군은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의 지휘하에 3만여 명의 병력을 7개 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으로 진군하였다. 한편, 성 안의 관군은 변이중이 만든 화차와 권율의 지시로 만든 수차석포라는 특수한 무기로 무장하였고, 병사에게는 재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허리에 차게 하였다.

마침내 1593년 2월 12일 아침 일본군의 선봉 100여기가 나타나더니 뒤이어 대군이 밀려왔다. 그러자 성 안의 아군은 일시에 화차에서 포를 발사하고, 수차석포에서 돌을 뿜어내며, 진천뢰·총통 등을 쏘아대니 몰려들었던 적은 궤멸상태에 빠져 물러갔다.

그러자 전투상황을 지켜보던 총대장 우키타는 직접 선두에 나와 지휘하니 그들은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계속 전진하여 접근하자 관군은 한때 동요하였으나 권율의 독전으로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으며, 화차의 총통이 적장에게 집중 사격되어 우키타는 부상을 입고 퇴진하였다.

그러나 남은 군사들이 뒤를 이어 화통으로 성책의 일부를 집중 발사하여 불이 붙게 하였으나 관군은 미리 마련한 물로 꺼버리고 화살과 돌로 공격을 하는 한편, 차고 있던 재를 적의 진영에 뿌리자 눈을 뜰 수 없게 된 적군은 후퇴하고 말았다. 이에 왜군은 마지막 남은 부대가 산성 서북쪽을 지키던 승군의 일각을 뚫고 성 안에까지 돌입하려 하자 급박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때 권율은 대검을 빼어들고 승군의 총공격을 명하자 일본군과 치열한 백병전에 돌입하였다. 이때 옆 진영의 관군도 화살이 다하여 투석전을 폈는데, 특히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 적을 공격케 함으로써 큰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적도 다시 기세를 올려 공격을 멈추지 않아 곤란한 상태에 빠졌으나 마침 경기수사 이빈이 수만 개의 화살을 실은 배 두 척을 몰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적의 후방을 칠 기세를 보이니, 적은 당황하여 내성에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성 안의 관군은 이를 알아차리고 일제히 추격하여 적을 완전히 물리쳤다. 이것이 유명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이 전투는 권율의 효과적인 방어 준비 태세에 의한 승리로서 왜군의 서울 방어 작전을 교란시켜 조선군의 사기가 고양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내용
권율은 왜란 초 광주목사(使)로 있으면서 1592년(선조 25) 7월 배티〔〕싸움에서 대승한 공으로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권율은 관군과 함께 평양을 수복한 뒤, 남쪽으로 내려온 명나라의 원군과 호응해 서울을 되찾기 위해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북상하던 중 수원 독산성(禿)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어 그는 군대를 서울 근교 서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조방장() 조경()에게 적당한 지역을 물색하도록 하였다.
조경은 양천()에서 한강을 건너 병력을 주둔시킬 만한 곳을 찾아내어 권율에게 보고하였다. 권율은 서울 주변인 안현()에 진을 치려고 했으나 막하 장수들이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조경이 물색한 곳으로 결정했는데, 이 곳이 행주산성이다. 권율은 행주산성에 조경으로 하여금 목책()을 완성하게 하고, 은밀히 군사를 이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휘하 병력 중 4,000명을 뽑아 전라도병사 선거이() 지휘 하에 금천( : 지금의 시흥)에 주둔시켜 서울의 적을 견제하였다. 이 때 죽산에서 패한 소모사(使) 변이중()도 정예병 1,000명을 거느리고 양천에 주둔해, 행주산성과 금천 중간 위치에서 일본군을 견제하였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행주산성에 배수진을 친 권율을 돕기로 하였다.
권율은 남은 병사를 이끌고 조경 등과 함께 행주산성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승장() 처영()도 승의병() 1,000명을 이끌고 권율을 따라 강을 건너니 행주산성에 포진한 총병력은 1만 명이 못 되었다. 이후 권율이 정예병을 뽑아 서울에 보내어 전투 태세를 갖췄다.
적장들은 배티와 독산성에서 치욕적인 대패를 경험한지라 단번에 침공해 권율의 군대를 무찔러 위험을 없애자고 결의하였다. 한 번도 진두에 나서본 일이 없던 총대장 우키타()를 비롯해 이시다()·마시다()·오타니()의 세 봉행( : 통치자 장군을 보좌하던 최고 무관직) 등 본진의 장수들까지 7개 부대로 나눠 행주산성으로 진군하였다. 이 때 전 병력은 3만여 명이었다.
성 안의 관군이 소지한 무기는 궁시()·도창() 외에, 변이중이 만든 화차(), 권율의 지시로 만든 수차석포()라는 특수한 무기가 있었다. 또, 산성에서는 일본군이 몰려올 것에 대비해 성책을 내외 이중으로 만들었다.
토제()를 쌓아 조총 탄환을 피할 수 있게 했고, 병사에게 재를 담은 주머니를 허리에 차게 하였다. 일본군이 공격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권율은 이번 한판싸움에 병사들의 생사는 물론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것을 병사들에게 주지시키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1593년 2월 12일 오전 6시 경 일본군의 선봉 100여 기()가 나타나더니 뒤이어 대군이 밀려 왔다. 제1대장 고니시(西)가 선봉으로 나섰다. 그는 평양싸움에서 대패한 이후 벽제관()싸움에도 참전하지 않다가 마침내 설욕할 좋은 기회라 여기고 성() 공격에 앞장섰다.
성 안의 아군은 일시에 화차에서 포를 발사하고, 수차석포에서 돌을 뿜어내며, 진천뢰()·총통() 등을 쏘아대고 강궁()의 시위를 당겼다. 몰려들었던 적의 병마가 이에 맞아 혼비백산하니 고니시의 제1대는 궤멸해 물러갔다. 이시다가 이끈 제2대도 공격에 실패하였다.
이어 제3대의 일본군들이 달려들었다. 대장 구로다()는 전년 9월 연안성()싸움에서 의병에게 대패한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긴 방죽 위에 누대를 만들고 그 위에 총수() 수십 명을 배치해 성 안으로 조총을 쏘게만 하고 병졸에게는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조경은 대포를 쏘아 이를 깨뜨렸다. 또 포전() 끝에 칼날 두 개씩을 달아 쏘니 맞는 자는 즉사하였다.
제1대부터 3대까지 연패하는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총대장 우키타는 크게 노해 선두에 나서니 이에 소속된 제4대 장병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랐다. 제4대는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계속 진격해 제1성책을 넘어서 제2성책까지 접근하였다.
관군은 한때 동요했으나 권율의 독려로 힘을 얻어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화차의 총통이 적장에게 집중 사격되어 우키타는 부상을 입고 부하의 부축을 받으며 퇴진하였다. 그리고 이 때까지 남아 선두에서 지휘하던 제2대장 이시다도 부상으로 후퇴하였다.
제5대장 깃카와()는 제4대의 뒤를 이어 화통()을 성책 일부에 집중 발사해 불이 붙게 했으나 관군은 미리 마련한 물로 꺼 버렸다. 관군이 시석()을 퍼부어 깃카와가 큰 부상을 입고 퇴각했고 부하 병졸의 사망자만도 160명이나 발생하였다.
두 대장의 부상에 분노한 제6대장 모리()와 고바야카와()는 제2성책을 공격하였다. 이에 처영은 승의군을 이끌고 용감히 맞섰다. 그리고 승의병이 각기 허리에 찬 재를 뿌리자 눈을 뜰 수 없게 된 적군은 달아나고 말았다.
일본군은 마지막 남은 제7대로 공격을 시작하였다. 제7대장 고바야카와()는 노장으로 선두에 서서 서북쪽 자성()을 지키던 승의군 한 귀퉁이를 뚫고 성 안에까지 돌입하려 하였다. 이에 승의병이 동요해, 위급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 때 권율은 대검을 빼들고 승의군의 총공격을 호령하고 일본군과 치열한 백병전에 돌입하였다. 옆 진영의 관군도 화살이 다해 투석전을 폈는데, 이때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이 일치단결해 싸웠다. 특히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다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성 안에 무기와 군인이 부족한 상황을 눈치챈 적군이 기세를 올리려 하였다. 그러나 마침 경기수사(使) 이빈()이 화살 수만 개를 실은 배 두 척을 몰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적의 후방을 칠 기세를 보였다. 이에 당황한 적은 성 안에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성 안의 관군도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적을 추격해 130급()을 베었다. 그리고 파괴된 내성도 급히 보수하였다.
적군은 퇴각하면서 사방에 흩어진 시체를 불태웠다. 아군은 그들이 버리고 간 갑주()·도창 등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였다. 노획물 중 중요한 것만도 272건이었다. 적군이 버리고 간 적의 시체가 200구가 넘었고, 타다 남은 시체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것이 유명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명() 제독 이여송()은 평양으로 회군하던 중 행주대첩의 소식을 듣고 벽제관에서 패하고 급히 회군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대첩이 있은 다음 권율은 병력을 이끌고 파주산성()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 등과 본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하였다. 그 뒤 권율이 김명원의 뒤를 이어 도원수가 된 것은 행주대첩의 전공이 많이 작용된 것이라 하겠다.

전라순찰사 권율은 명군과 힘을 합해 서울 수복을 위해 수원에 머물다가, 명군이 벽제관 전투에서 패하고 개성으로 퇴각하자 1593년 2월 1만여 병력을 경기도 고양군의 행주산성에 집결시켰다. 권율은 행주산성을 새로 수축하는 한편 선거이()·허욱() 등이 거느리는 관군 및 김천일이 거느리는 의병으로 하여금 시흥·김포·강화 일대에서 지원하게 했다. 왜군은 3만여 병력을 3진으로 나누고 9차례에 걸쳐 성을 맹공격했으나 결국 패퇴했으며, 조선군은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이 싸움에서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짧게 잘라입고 돌을 날라 왜군에게 던짐으로써 승리에 기여한 데서 지금의 행주치마가 유래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권율은 이 싸움의 공로로 도원수가 되었다. 격전지인 행주산성은 백제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성으로 사적 56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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