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1일 목요일

자금성. Forbidden City.

Forbidden City. 자금성.

자금성은 5세기 이상 중국 최고 권력의 중심지에 있던 황궁으로, 이곳에는 가구와 예술품이 있는 약 10,000개의 방과 잘 조성된 정원이 있다. 이 황궁과 이곳의 유물은 명과 청 시대 중국 문명의 가장 귀중한 증거로 남아있다.


거대한 나라 중국의 중심지였다. 중국 사람들은 이곳을 세상의 중심이자 신성한 장소로 여겼다.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넓은 공간에 수많은 건축물이 들어서 있는데, 건축물 하나하나가 중국 고대 사상과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자금성은 과거 중국 왕조가 얼마나 눈부신 문화를 이루고,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는지 잘 보여 주는 문화유산입니다.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궁궐.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천안문[톈안먼] 성벽은 길고 높아 보입니다. 거대한 문을 지나 조금 이동하면 500년 넘게 절대 권력의 중심지였던 거대한 궁궐이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중국 황제들이 살았던 궁궐, 자금성 이다.
자금성에 살았던 중국 황제들은 하늘의 아들이란 의미로 ‘천자()’라고 불렸다고 전합니다.

명나라 제3대 황제 영락제는 황제가 된 지 4년째인 1406년, 수도를 남쪽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면서 거대한 궁궐을 짓도록 했습니다. 약 100만 명의 사람들이 14년에 걸쳐 건설한 끝에 모습을 드러낸 자금성은 이전까지의 어떤 궁궐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웅장하다.
전체 면적 72만m2, 건축 면적만도 15만m2에 이르는 거대한 건축물이었지요. 길이 960m, 폭 750m인 직사각형의 공간에 수많은 건물이 들어서 있고, 방의 개수도 약 9000개나 될 정도였다.

자금성은 도시 속에 지어진 하나의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면적만 보면 마을 정도의 규모이지만 동서남북으로 설치된 폭 50m의 해자(성 주위에 둘러 판 못)와 10m 높이의 성벽을 보면, 완벽한 하나의 도시로 보인다.

자금성 건설에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어요. 자금성의 건축 재료는 여러 곳에서 가져왔는데, 돌은 가까운 팡산 채석장에서, 벽돌은 산둥 지방에서 가져왔어요. 이 두 지역에서 자금성까지는 수십, 수백 킬로미터에 불과하지만 대리석과 나무는 쑤저우와 윈난 성 등 2000km가 넘게 떨어진 곳에서 가져와 건물을 지었다고 함.
자금성의 방에 대해서도 여러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처음 건설될 당시의 소문을 믿고 있다고 해요. 예를 들면 자금성 방의 개수가 9999개라고 믿고 있는 거예요. 실제로 자금성에 있는 방은 모두 8886개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더 믿고 있다.

황제  업무 공간, 태화전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자금성은 질서 정연한 대칭 구조로 되어 있고, 기능에 따라 크게 외조[와이차오]와 내정[네이팅]으로 나뉘어 있어요. 외조는 황제가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고, 내정은 황제와 황후, 빈과 상궁들이 사용했던 사적인 공간이다.
자금성의 중심 출입문인 남쪽 오문[우먼]에서 보면 앞쪽에 외조가, 뒤쪽에 해당하는 북쪽에 내정이 자리 잡고 있어요. 낮에 일하고 밤에 휴식을 취한다는 전형적인 중국 궁궐 건축 양식의 맥을 이은 것이다.

외조는 황제의 공식 집무실인 태화전[타이허뎬]과 방문객을 만나거나 신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중화전[중허뎬], 황제의 책을 보관하는 도서관이자 연회장이었던 보화전[바오허뎬]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외조의 중심은 자금성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태화전이에요. 태화전은 황제가 중요한 나랏일을 결정하고 공식적인 행사를 치르던 장소이다.
황제의 즉위식, 탄생 축하 행사, 결혼식, 국가의 칙령 발표, 외국 사신 접대 및 조공 등 나라의 중요한 행사가 주로 이곳에서 열렸어요. 그리고 군대가 전쟁터에 나갈 때 행사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사상이 담긴 종합 박물관.
자금성은 거대한 건축 박물관이자 중국을 대표하는 역사 박물관이며, 종합 문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나라 영락제 때 처음 지어진 건물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낡아졌지만 청나라 때 고치고 새로 지으면서 명나라 때의 모습을 그대로 만들어 놓았답니다. 기본 구조는 물론이고 자재와 장식 등 모든 것을 명나라 때의 건축을 바탕으로 지었다고 한다.

자금성에는 건축물 외에도 흥미로운 것들이 가득해요. 천자인 황제가 머물렀던 자금성의 공간들에는 하나같이 깊은 뜻이 숨어 있어요. 자금성이란 이름은 중국의 천문학(우주관)에서 우주의 중심으로 여겼던 북극성과 관련이 있어다.
우주의 중심인 북극성을 진한 자주색으로 알고 있던 중국의 권력자와 천문학자들이 하늘의 아들인 천자가 머무는 궁궐의 색을 자주색으로 지정한 것이다.

또한 자금성에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고 화려한 물품들이 가득해, 황제들의 생활 모습과 옛 중국의 화려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황제가 나랏일을 볼 때 사용했던 책상과 의자, 수많은 보석, 서예, 미술품, 공예품은 물론이고 궁궐의 벽과 바닥을 장식한 돌조각 하나까지도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명,청조, 궁전 으로 1407년부터 있었다.
명조와 청조의 황제 궁전인 자금성의 건축은 1407년에 시작되었으며, 20만 명이라는 엄청난 사람들이 고생한 끝에 14년이 걸려 완공되었다. 황제의 권력과 위엄을 상징하기 위해 설계된 자금성은, 천제()의 거처와 동등한 지상의 등가물이라 여겨졌다. 자금성이라는 이름은 황제의 허가 없이는 그 누구도 안으로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다.

1644년 명나라 뒤를 이어 들어선 청나라의 열 명의 황제들은 자금성을 정부 소재지로 삼았다. 1912년, 신해혁명에 뒤이어 중국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가 퇴위했고, 자금성은 결국 박물관이 되었으며 많은 보배와 진기한 물품들을 전시하게 되었다(유물들의 일부는 국공내전() 동안 대만으로 옮겨졌다). 중국 공산당의 정책이 완화되면서 자금성은 중국인과 외국인 관광객 모두가 찾는 주요 명소가 되었다.
직사각형 모양의 건물 단지는–각 변에 주 성문이 나 있다–깊이 6m의 해자와 높이 10m의 벽에 둘러싸여 있다. 총 넓이가 약 72헥타르에 이르는 자금성 안에는 약 800채의 건물과 8,880개의 방이 있는데, 방의 개수가 좀 더 그럴싸한 숫자인 9999개라고 나와 있는 자료들도 있다. 
건물들 중에 다섯 채의 커다란 전당과 열일곱 채의 궁전이 있었다. 자금성은 두 지역으로 구분되었다. 남쪽 구역, 즉 '전조'()는 황제가 매일의 정무를 보는 곳이었고, 황제와 그 가족이 거주하는 곳은 북쪽 구역, 즉 '내정'()이었다. 건물의 소재로는 목재가 지배적으로 쓰였다. 자금성 안에는 오래된 목조 건물들이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모여 있으며, 지붕은 전통적인 왕의 색깔인 노란색으로 칠해졌다.

한자로 ‘자금성[, 쯔진청]’이란 자주색의 금지된 성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중국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이었던 궁궐, 자금성은 오랫동안 백성들이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궁궐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황제, 황후, 고위 관리와 궁녀, 내시, 시종, 외국 사절단 정도가 전부였다.

지금은 자금성을 ‘고궁박물원’이라고 부릅니다. 자그마치 5세기 넘게 백성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황제의 공간은 박물관으로 옷을 갈아입어,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태화전은 그 자체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어요. 길이 64m, 폭 37m, 높이 27m에 달하는 중국에서 가장 큰 목조 건축물로, 온통 흰 돌로 이루어진 넓은 마당에 세워져 있어요. 또한 황제만 다녔던 길을 따라 폭 3m, 길이 16m에 이르는 조각이 새겨져 있고, 건물 안과 밖도 용과 봉황, 사자, 기린, 말, 물고기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천하제일이란 표현을 사용해도 손색이 없는 모습이랍니다. 그중 가장 멋진 곳은 황제가 나랏일을 볼 때 앉았던 옥좌(의자)입니다. 금박으로 장식된 7폭짜리 병풍과 의자, 향을 피우던 도자기와 기둥 등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준다.
태화전은 여느 건축물과 다르게 3단의 기단 위에 지어졌는데, 3단의 기단은 오직 하늘의 아들인 황제가 머무는 곳에만 사용되었지요. 기단에 장식된 동물 조각과 문양도 하나같이 아름다워요. 목조 건물의 약점인 화재에 대비하여 궁궐 안에 ‘금수하[진쉐이허]’라는 인공 하천(호수)을 만들어 물을 저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황제, 황후의 공간, 

황제와 황후, 빈과 상궁 들이 사용하던 내정은 건청궁[치안칭궁]과 교태전[자오타이뎬], 곤녕궁[쿤닝궁]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내정은 이 3개의 건물들 주변에 대칭으로 많은 건물이 세워져 있어, 공적인 공간인 외조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답니다.

내정의 중심 건물은 건청궁이에요. 명나라에 이어 청나라 초기까지 황제의 침실이자 휴식 공간으로 사용하던 곳이지요. 건청궁은 청나라 옹정 황제가 양심전[양신뎬]이란 곳에 새로운 침실을 마련하고 태화전에 이어 보조 직무실로 사용하기 전까지는 오직 황제와 황후만의 공간으로 사용되었어요.

옹정 황제 이후부터 건청궁은 황제의 서재이자 고위 관리들이 만나는 장소이기도 했고, 때론 외국 왕실의 손님을 맞는 곳이자 연회장으로 이용하기도 했어요. 전체적인 분위기와 내부의 모습이 태화전과 비슷한데, 역시 금박 병풍과 옥좌를 비롯하여 천장과 기둥, 여러 가지 물건들이 모두 화려하답니다.
건청궁 옥좌 뒤에는 ‘정대광명()’이란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어요. 이 액자는 초기 청나라 황제였던 순치 황제가 직접 쓴 거라고 해요. 또 건물 입구에 걸려 있는 ‘건청궁()’이란 현판도 순치 황제가 직접 쓴 것으로 한자와 만주어가 함께 쓰여 있어요. 황실의 주인이 만주족이라는 것을 알리는 표시였지요.

건청궁 뒤쪽에 있는 교태전은 명나라 초기에 황후가 살던 곳이자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는 장소였어요. 건륭 황제 때는 황제의 직무실로 사용했고, 이후에는 나라의 옥새를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했지요.
교태전 역시 무척 화려하게 꾸며져 있어요. 옥좌 뒤에는 커다란 병풍과 건륭 황제가 강희 황제를 공경하여 직접 썼다는 ‘무위()’라는 액자가 걸려 있어요. 그리고 교태전 뒤쪽에는 황후가 사용했던 곤녕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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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해외여행 > 관광지
지역아시아 > 중국 > 베이징
유형공원·정원
테마세계문화유산
휴관일연중무휴
주소
가는방법버스 6, 34, 35, 36, 39, 41, 43, 60, 116, 610, 707, 723, 743, 957, 958번 탑승 후 톈탄둥먼()에서 하차. 또는 버스 53, 120, 122, 525, 610, 803, 958번 탑승 후 톈탄난먼()에서 하차. 또는 버스 2, 7, 15, 17, 20, 69, 105, 707, 729, 826번 탑승 후 톈탄시먼(西)에서 하차. 또는 버스 6, 34, 35, 110, 106, 687, 707, 742번 탑승 후 톈탄베이먼()에서 하차. 지하철을 이용할 경우 5호선 탑승 후 톈탄둥먼()역에서 하차.
오픈 시간공원 06:00~21:00, 원구·황궁우·기년전 11월~2월 08:00~17:00, 3월~6월 08:00~17:30, 7월~10월 08:00~18:00

2017년 12월 20일 수요일

진시황"

진시황"
중요한 인물임에도, 진시황에 관한 역사 기록은 많지 않으며 확실히 믿기도 어려운 점이 있다. 진왕조 자체의 역사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상태에서 진시황 관련 자료는 사마천의 <사기>와 유향의 <전국책> 정도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책들은 모두 진시황의 시대보다 백 년 이상 지난 뒤에 씌어진데다 사실과 전설의 구분이 모호하고, 일부는 의도적인 왜곡을 했다는 의심마저 들기 때문이다. 이따금 출토되는 진나라의 죽간이 어느 정도의 실마리를 보태 주지만, 진시황이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고 어떤 일을 했는지 지금 정확히 알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진시황의 상.
그의 명성은 사실과 전설을 넘어 우뚝 서 있다
아무튼 남아 있는 자료에 따르면, 진시황의 탄생은 매우 위태로웠는데다 모종의 음모까지 깃들어 있었다. 그는 기원전 259년에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던 진나라의 왕족 자초()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자초는 조국 진나라에서 그리 세력이 크지도 않았고 관례상 죽을 때까지 조나라에서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도 컸다.
운명의 장난이 아니었다면 자초나 그의 아들 영정()이나 역사에 단 한 줄도 채우지 못한 채 쓸쓸히 사라져야 했을 것이다. 진나라의 상인인 여불위 가 조나라에 갔는데, 우연히 자초를 만나보고는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특이한 상품()이다. 사 놓으면 큰 이익을 보겠구나!”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초에게 거금을 주어 조나라에서 인기를 끌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자초를 당시 진나라의 유력자였던 안국군의 양자로 들어가도록 공작했다.
여불위의 투자는 멋지게 성공, 안국군이 즉위하여(효문왕) 불과 사흘 만에 죽자 조나라에서 돌아온 자초가 왕위를 계승한다(장양왕). 이로써 최고권력의 으뜸가는 후원자가 된 여불위는 이후 3년 간, 그리고 다시 장양왕이 죽고 영정이 왕위에 오른 한동안 진나라의 최고실권자로서 세력을 떨친다.
<사기>에는 여불위가 이처럼 대담한 도박을 했을 뿐 아니라 세상을 몽땅 속이는 음모까지 꾸몄다고 적혀 있다. 자초에게 자신이 총애하던 무희를 보냈는데, 그 무희는 이미 여불위의 자식을 잉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낳은 아들이 바로 영정, 미래의 진시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너무 교묘한 이야기로, 여불위와 자초의 긴밀한 관계, 그리고 한때 나는 새도 떨어트렸던 여불위의 세도에서 비롯된 뜬소문이 아닌가 하고 요즘에는 의심받고 있다. 사마천이 이를 <사기>에 기록한 것은 진시황을 폄하하기 위한 의도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또한 애초에 진나라 왕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고 하는 자초가 대권을 잡는 과정도 기이하다. 여불위의 억지스러운 음모가 그렇게 척척 통할 만큼 당시의 진나라 왕실이 허술했다면 과연 천하통일을 이룰 수 있었을까. 실제 역사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
아무튼 13세에 왕이 된 영정은 10년 뒤에 태후(기록대로라면 본래 여불위의 애첩이었다고 하는)와 손잡고 역모를 꾀하던 노애를 처단하고 태후는 옹이라는 고을에 유폐시켜 버렸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여불위까지 숙청했다. 1년 뒤 여불위는 자살한다. 이제 진나라는 명실공히 영정의 천하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천하’가 진짜 ‘온 천하’로 확대되기까지는 불과 15년이 더 걸렸다.

합종도 암살도 아랑곳없는 제국의 탄생

기원전 230년에 진나라 군대가 한()나라를 멸망시키고부터 221년에 제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 약 10년 동안 한, 조, 위, 초, 연, 제 6개국이 잇달아 진나라에게 무너졌다. 평균 2년도 안 되는 기간에 한 나라씩. 이들 나라가 수백 년 동안 할거해 왔음을 생각하면 믿기 힘든 일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역시 기록에는 전하지 않는 사정이 있었으리라 여겨지지만, 기록으로만 볼 때 우선 진나라가 중국의 서쪽 외곽에 떨어져서 험준한 지형에 의존해 외침을 잘 받지 않으며 오랫동안 실력을 키웠던 점, 진효공 시절 상앙의 변법()을 비롯한 과감하고 실용주의적인 개혁이 미친 부국강병의 효과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진시황이라는 지도자가 보여준 리더십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사람됨이 몹시 잔인하고 냉혹했다고 한다. 그를 폄하하기 위한 역사왜곡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도, 모든 기록이 한결같이 지적하고 있는 점이라 실제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한편으로 헛된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인재를 소중히 여겼으며, 실수를 했다고 깨달으면 체면에 아랑곳없이 곧바로 시정했다. 운하 건설을 책임지고 있던 정국이라는 사람이 한나라의 첩자임이 밝혀지자 국내에 머물던 모든 외국인을 추방하도록 했지만, 후일 승상이 되어 천하통일의 일등공신 역할을 할 이사()가 “진나라는 대대로 외국인들을 우대하여 발전해왔다”고 반론을 올리자 곧바로 취소하며 전보다 더 외국의 인재를 중시했다. 한비자의 경우 그 한 사람을 얻으려는 마음으로 한나라와 전쟁을 벌였다고도 한다. 또 장군 왕전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좌천시켰다가, 왕전의 말이 맞았음을 알고는 곧바로 몸소 왕전의 거처로 달려가 용서를 빌고는 재기용했다고 한다.
진시황(진왕 정)은 이처럼 여러 국보급 인재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시켰고, 병사들에게도 전공을 세울 경우 최대한의 혜택을 보장함으로써 용맹하게 싸우게끔 부추겼다. 그리고 여러 나라의 정치에 은밀히 공작을 해서 안으로 내분에 휩싸이게 하고, 밖으로 여러 나라가 단합해서 진나라에 대항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한 번에 한 나라씩, 전력을 기울여 단번에 적의 수도를 함락시키는 방법으로 무너뜨려갔다. 또 자료를 잘 살펴보면 진시황이 잔인무도하다는 점에서 폭군이라는 비방은 숱하게 있지만, 사치향락을 일삼았다는 쪽의 비방은 별로 없다(적어도 통일 이전까지는 그랬고, 이후에도 죽기 직전까지는). 주지육림이나 삼천궁녀 같은 이야기는 전설로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반면 도무지 의심이 많아서 신하들이 일을 잘하나 계속 감시하므로 괴롭다는 푸념이 많이 보이고, 스스로는 죽간으로 지어진 공문서를 매일 120근씩 처리하지 않고는 먹지도 쉬지도 않았다고 하니, ‘일 중독자’로서 부하들을 매섭게 다그치는 ‘호랑이 같은 관리자’였으되 자기 개인의 쾌락을 위해 국가와 국민을 희생시키는 폭군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고, 때로 비정한 결단도 숱하게 내려야 하는 정복-통일 군주에게는 적합한 성격이었다. 다른 나라들이 이런 진시황과 진나라를 막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서로 힘을 합쳐 공동 대응하는 합종()은 과거에 진나라의 야심을 저지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진시황 시대인 기원전 241년에 마지막으로 연나라를 제외한 5개국이 진나라를 공격했다가 패배한 후로 다시 합종이 성사되지 못했다. 남은 방법은 단숨에 진나라의 중추를 파괴하는 방법, 즉 암살이었다. 227년에 연나라의 형가()가 암살에 거의 성공할 뻔 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나며 연나라의 멸망만 가져온다. 기원전 221년, 진왕 정은 천하통일을 선포하면서 스스로 전설의 성군들인 삼황오제()에서 따온 ‘황제’라고 칭했다.
분서갱유는 ?
황제가 된 진시황은 무력 통일을 뒷받침하고 안정시키기 위해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통일 또한 강력하게 추진한다. 여러 나라의 화폐를 모두 폐지하고 정부에서 주조한 통일 화폐를 쓰도록 하며, 나라마다 제 각각이었던 도량형과 문자도 통일했다. 그리고 북방민족을 막기 위한 북부의 장벽(이것이 증축 보완 과정을 거쳐 만리장성이 된다)만 남기고는 국내의 성벽들을 헐어 버리고, 로마의 아피아 도로에 비할 만큼 넓고 잘 포장된 도로를 건설하여 중국이 두루 하나로 이어지도록 했다. 무엇보다 오랜 전통의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한 것은 혁명적인 조치였다. 
국가는 중앙의 군주 직할지 외에는 여러 제후의 분봉지로 나뉘어져분봉지마다 독립된 왕국에 가까운 자치를누렸다. 지방행정의 단위로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는 군현이 있었으되 그 역시 지방관의 세습이 허용되었다. 그런데 진시황은 전국을 일체 군현으로 나누고는 모두 지방관을 파견해 관리하고, 세습을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기록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있다면 세계사에서 전례가없을 정도로 강력한 중앙집권이었다.
혁명적 조치였던 만큼 반발도 많았으리라 여겨지는데, 기록상 두드러진 반발은 봉건제를 이상적인 정치형태로 보는 유학자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이는 ‘문화적 통일’, 즉 자유 언론과 사상 탄압을 촉발하는데, 진시황 최대의 악행으로 거론되는 ‘분서갱유()’가 그 일환이었다. 그런데 분서갱유가 말 그대로 “기술서적 외에 모든 경전과 역사서를 불태우고, 모든 유학자를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버리는” 식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의문이 많다. 일단 지금까지 살아남은 경전 사서도 많으며, 유학 역시 죽지 않고 머잖아 중국의 지배 이념이 된다. 
<사기>에 따르면 분서갱유를 제안한 사람은 승상 이사인데, 그의 표현에는 “국가에서 인정한 박사들 말고 사사로이 경전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빼앗아 불태우고….”라고 되어 있다. 떳떳이 경전을 갖고 연구해도 되는 박사(유학자)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또 한문제 때의 인물인 가의()는 진나라의 멸망 원인을 돌이켜 보며 이를 거울삼아 올바른 정치를 하기를 권하는 <과진론>을 올렸는데, 여기서 진시황의 여러 악행을 지적하면서도 분서갱유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 갱()이라는 한자를 문자 그대로 ‘파묻어 죽인다’로 읽을 수도 있지만 다만 ‘처형한다’ 또는 ‘직업을 그만두게 한다’로 읽을 수도 있다는 점 등이 지적된다. 이를 볼 때 분명 언론과 사상을 탄압하는 조치가 취해졌지만, 보통 ‘분서갱유’에서 연상되는 정도의 잔혹함이나 철저함은 없지 않았을까 한다.


스러진 꿈, 그림자는 길다.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이 애써 천하를 통일해 놓고도 겨우 50세의 나이로 객사했으며, 곧바로 제국이 무너지고 천하가 다시 전란에 휩싸이게 된 것은 그가 당치 않은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세운 나라가 영원불멸하리라 주장했고, 자신은 1대 황제(시황제)이며 다음은 2대, 3대…로 무궁토록 이어지리라 했다. 
수백 년 이어진 주왕조도, 춘추전국의 나라들도 허무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본, 아니 그렇게 무너뜨린 장본인이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나라가 있으리라고 여겼다면 그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는 한 술 더 떠서 그런 주장과 스스로 모순되는 꿈을 꾸었다. 바로 불로불사를 염원했다는 것이다. 2대, 3대 따위는 없이 자신이 영원히 황제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연나라 출신의 노생에게 불로장생한다는 영약을 구해 오게 하고(노생은 “진나라는 호() 때문에 멸망한다”는 예언만 전해주었다), 서복(, 서불(巿) 또는 서시()라고도 한다)에게 어린 남녀 수천 명을 주고는 멀리 동쪽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했다(서복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가 일본에 정착해서 일본 왕실의 시조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말년에 접어든 그는 점점 죽음이 두려웠던지, 암살을 피하기 위해(218년에 박랑사에서 암살을 모면한 적이 있다. 이 암살 음모를 꾸민 사람은 나중에 한고조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는 장량이었다고 한다) 수도 함양 인근에 궁전 270개를 짓고 지하도를 통해 드나들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비밀로 했다. 이 밖에 거대하고 화려한 본궁을 지었는데, 그 일부인 아방궁만 완성을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거대함과 화려함을 갖고 있어, 이후 ‘사치스러운 건물’의 대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또한 여산 기슭에 자신의 능묘를 조성하고, 거대한 지하 궁전을 만들어 죽어서도 생전에 못지않은 영화를 누리고자 했다.

과장이 섞였을 수 있지만, 정말 이처럼 거대한 토목공사를 벌이며 세월을 보냈다면 이미 과거의 ‘일 중독자’다운 근면함은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통일 제국이라고 해도 민생에 커다란 부담을 주었을 것이다. 진시황은 지식인들과 백성들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가혹한 법률에만 의존했는데, 이는 당장은 폭정을 유지시켜도 끝내 종기가 터지듯 반정부적 힘이 터져 나오게끔 하는 방법이다. 앞에 말한 가의는 <과진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릇 천하를 정복할 때는 사술과 무력을 중시하며, 천하가 통일된 후에는 백성에게 권력이 잘 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천하를 취할 때와 지킬 때의 방법은 다른 것이다. 그러나 7국이 할거하던 전국 시대를 마감하고 천하의 임금 노릇을 하면서도 예전의 방법을 답습하고 혹독한 정치를 거두지 않았으니, 그만큼 빠르게 멸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원전 210년 9월 10일, 진시황은 다섯 번째로 천하를 순행하는 길에 나섰다가 사구()에서 병을 얻어 죽고 만다. <사기>에 따르면 이 때 진시황은 북방에 가 있던 태자 부소에게 황위를 물려준다고 유언했으나,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가 음모를 꾸며 다른 황자인 호해()를 내세우고는 부소와 그를 지지하던 공신들을 살해하고 2세 황제를 탄생시켰다고 한다. 
진시황의 시신이 함양으로 돌아오는 길이 지체되어 심하게썩어 냄새가 나므로, 절인 생선을 실은 마차를 써서 은폐했다고 한다. 전무후무한 통일제국을 세운 황제의 어이없는 마지막이었다. 제국 자체도 그 뒤 겨우 4년 만에 어이없이 멸망해 버린다.

진시황 관련 자료는 크게 부족하고, 의심스러운 부분도 많다. 어찌 보면 그의 일생은 유학자들이 군주가 결코 행해서는 안 되는 일들로 점철되어 있다.
유교적인 모범 군주는 효성이 지극해야 하며(진시황은 “친아버지를 핍박해 죽게 하고” “친어머니를 유폐했다”),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늘 수양과 학문에 힘써야 하며(진시황은 “분서갱유를 했다”), 거대한 토목공사를 비롯한 불필요한 사업으로 백성을 괴롭히지 말고(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을 짓고, 거대한 능묘를 만들었다”), 스스로 국사를 챙기기보다 훌륭한 신하를 기용해 그에게 매사를 위임해야 한다(진시황은 “신하들을 믿지 않아 일일이 참견했고, 모든 업무를 도맡아 하려고 했다”). 여기에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환관이 날뛰게 한” 점까지 본다면 진시황이야말로 후대의 제왕이 결코 본받아서는 안 될 모델인 셈이다.
이런 ‘교훈’을 주게끔 그의 일생이 어느 정도 왜곡되고 변형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도 드는 것이다(불로초 이야기도 뜬소문을 적당히 가공한 것이며, 서복 등은 동방 영토를 개척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이러니저러니 결국 진시황은 이후 수천 년간 중국의, 아니 동양 군주들의 모델이었다. 결국 한왕조를 비롯한 역대 왕조는 진시황의 군현제를 유지하고, 황제라는 이름과 지배원리를 답습했으며, 사상을 통일하려고 했다(이 경우에는 유교가 핍박 받는 쪽보다는 핍박하는 쪽에 서는 경우가 많았지만). 진시황이 수립한 강력한 동양적 군주제는 천하가 평화와 안정을 누리고 국가적 사업이 의욕적으로 추진되는 장점을 낳은 반면, 폭정이 행해질 가능성과 사상의 자유가 심하게 억압될 가능성도 낳았다. 그리하여 군주 제도를 인정하고 옹호하면서도 한편으로 견제하고 구속하려는 정치사상의 모순된 입장이 생기지 않았을까. 진시황에 대한 사실의 왜곡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을지 모른다.

참고"
사기는 중국 고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저작이다. 사마천은 진나라의 통일과 멸망 과정을 많은 분량으로 서술하고 있어, 진시황에 대해 알고 싶다면 <사기>를 읽지 않을 수가 없다. 천징의 <위대한 폭군 진시황 평전> 은 그런 <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하면서 여러 가지 의심스러운 점을 지적하며 대안을 제시한다. 쓰루마 가즈유키의 <중국 고대사 최대의 미스터리 진시황제> 도 대략 그런 입장인데, 천징의 책에 비해 학술서적의 냄새가 짙으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보기에는 다소 버거운 책이다.

진시황릉.

진시황릉.

중국 산시성의 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진시황릉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무덤이다. 수도인 셴양의 도시 계획을 반영하여 설계하도록 한 것으로, 무덤 안은 유명한 병마용에 둘러싸여 묻혀 있다. 말이나 마차를 타거나 무기를 지닌 병마용들은 형상이 사실적이어서, 당시의 의복과 무기 등의 형태와 구성, 시황제의 사상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나라 시황제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엄청난 토목 건설을 펼쳤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만리장성과 화재로 사라진 아방궁에 이어 불로장생을 꿈꾸며 거대한 무덤을 건설하였지요. 진시황제의 무덤은 지금까지 발굴된 규모와 유물만 놓고 보아도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모습이다.
진시황제의 거대한 무덤에 관한 이야기는 옛날부터 입에서 입을 통해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그러다가 고대 중국 역사가인 사마천의 《사기》라는 책에 처음 수록되었습니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유적지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하나둘씩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진시황제의 무덤 유적지는 산시 성의 고도 시안 동북쪽에 있습니다. 현재 발견된 유적지는 진시황제 무덤과 3곳의 병마용갱입니다. 병마용 지하 유적지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유적지는 아직 발굴이 끝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가장 중요한 유적인 진시황제가 잠들어 있는 거대한 무덤은 발굴을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진시황제의 무덤 발굴이 시작되면 전 세계 사람들은 다시 시안을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원대한 야망을?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를 세운 사람은 열세 살에 왕위에 오른 영정이었어요. 어린 나이에 왕위를 이었지만 그의 야망은 웅대했어요. 왕위에 오른 지 16년이 되자 본격적으로 주변 국가를 하나씩 공격하기 시작했지요.

기원전 230년, 국력이 가장 약한 한나라를 공격하고 곧이어 조, 위, 초, 연나라를 정복했어요.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는 막강한 국력을 갖춘 제나라를 점령하면서 불과 9년 만에 주변의 여섯 나라를 정복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완성하였습니다.

영정이 주변 나라를 침략하는 데 동원한 군사는 백만 명이 넘었어요. 또 장군과 지휘자들이 사용했던 말도 만 필이나 되었지요. 지금도 세계적으로 백만 명의 군인이 있는 나라는 미국과 중국, 러시아 정도가 전부입니다.
그런데 2200여 년 전에 군사 백만 명을 이끌고 정복 전쟁을 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지요? 영정의 군대는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단 한 차례 전투에서 적군을 4만 명이나 몰살시킨 경우도 있었다고 해요.

천하를 통일한 영정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새 칭호가 필요했어요. 작은 진나라 왕에서 통일 국가의 왕이 된 영정은 자신을 ‘황제’로 칭하고, 새로운 대국의 왕을 의미하는 진시황제로 부르도록 했어요. 오늘날 중국의 영어 명칭인 차이나(China)도, 바로 진(Chin)에서 비롯되었답니다.
진시황제
진시황제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를 세운 사람은 열세 살에 왕위에 올랐다.

개혁을 추진한 황제

통일 국가를 완성한 진시황제는 서둘러 새로운 정책을 세웠어요. 진시황제는 봉건주의를 무너뜨리고 전국을 쉽게 다스리기 위해 강력한 중앙 집권체제를 세우는 데 집중했지요. 전국을 군현으로 개편하고 자신의 지시가 빠른 시간에 전국에서 시행될 수 있도록 행정 조직도 개편했어요.
관료는 물론이고 백성들에게도 이전에 사용하던 여러 문자체를 쓰지 못하게 하고 비교적 단순한 예서체만 사용하도록 했어요. 문자를 통일하여 많은 백성들이 보다 쉽게 학문을 접할 수 있게 만든 동시에 중앙 정부의 뜻을 곧장 전달하려는 의도에서 한 일이었지요.
복잡했던 도량형을 표준화시키고, 마차 바퀴의 모양도 통일시켰어요. 문자와 도량형의 표준화는 진나라는 물론이고 이후 중국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진시황제는 정책 개편에 이어 대규모 공사를 시작했어요. 만리장성 건설을 시작으로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 위하여 관개 시설을 고치고, 변방과 수도 시안(당시 장안)을 연결하는 도로와 운하를 건설했지요. 또한 황제가 살 아방궁과 죽은 뒤 묻힐 묘지까지 공사를 했습니다.
진시황제 묘지 주변서 발굴된 엄청난 유물"진시황제는 시안에서 동북쪽으로 약 37km 지점에 자신이 죽은 뒤 묻힐 안식처를 짓기 시작했어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7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10년 넘게 공사를 했다고 해요.
진시황릉은 인공으로 만든 묘지라기보다 산처럼 보여요. 한 면이 400m가 넘고 높이가 76m에 이르러, 현존하는 단일 무덤 가운데 가장 크답니다. 한 세기 뒤에 기록된 책에 따르면, 무덤 안에 ‘아름다운 가재도구와 보석, 진귀한 물건뿐 아니라 궁궐과 탑, 관청 건물까지 세워져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2000년 넘게 전해지던 소설 같은 이야기는 1932년 묘지 주변에서 일하던 농부들에 의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어요. 농부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인형을 발견한 거예요.
주변에서 같은 모양의 인형 4개가 잇따라 발견되었다. 이후 40여 년 동안은 특별히 발견된 것이 없다가 다시 관심이 집중된 것은 1974년이었어요. 진시황릉 근처의 들판에서 우물을 파던 농부들이 흙을 빚어서 만든 170~190cm 정도 크기의 인형을 발견한 거.
과거에 황제를 호위하던 병사로 진시황제가 죽기 전에 미리 지하에 묻어 둔 것 이후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많은 유물이 동시에 발굴되면서 전 세계의 관심이 진시황릉 근처의 들판에 쏠리게 되었다.

지하 군대

제1호 병마용갱으로 불리는 이 발굴 현장은 진시황릉에서 약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며. 진시황릉 제1호 병마용갱은 길이 230m, 폭 62m에 달하는 직사각형 모양으로, 이전에는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유물이 이곳에서 발견되었어요. 유물의 숫자 도 엄청나다. 
약 2200년 동안 지하에 잠들어 있다가 햇빛을 보게 된 유물은 6000여 점이나 되었다. 제1호 병마용갱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 중 나무로 만든 40대의 전차를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흙으로 빚어 가마에 넣어 구워 낸 실물 크기의 도용(무덤 안에 묻기 위해 흙으로 만든 인물상이나 인형)이었다.
제1호 갱 북쪽에는 제2호와 제3호 병마용갱이 발굴되었다. 제2호 병마용갱은 제1호 갱에 비해 면적이 좁은데, 현재 발굴작업이 진행 중이에요. 제2호 병마용갱에서는 장군과 병사, 마차를 끌고 있는 기병, 말의 도용과 함께 말의 뼈가 여러 개 발굴되었어요. 살아 있는 말을 묻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이지요.

제1호 병마용갱 앞쪽에는 총 204점의 보병 군사들이 3줄로 세워져 있어며. 갑옷과 투구를 입지 않고 길게 늘어선 보병 뒤로는 11개의 통로에 세로 38열로 수많은 도용들이 놓여 있는데, 이 도용들은 갑옷을 입고 있다. 중간마다 기마 부대를 상징하는 말과 마차가 있으며, 끝쪽에는 말과 장군 모습의 도용이 있다.

제1호 병마용갱의 최대 자랑거리는 6000여 점에 달하는 도용이 저마다 다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고, 병사를 지휘하는 장군은 물론이고 수많은 보병들과 말과 마차까지도 표정과 모습이 다르다.
얼굴 표정은 물론, 직위에 따른 갑옷과 머리 모양, 자세 등 어느 한 곳도 똑같은 것이 없습니다. 병마용갱의 도용들이 단순한 복제품이 아니라 하나하나 실제 살아있는 장군과 병사, 말, 마차를 모델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1호 갱 북서쪽에는 제3호 갱이 있어요. 제3호 갱은 1, 2호 갱과 입구의 모습, 도용의 배치, 사용된 자재가 조금 달라요. 제3호 병마용갱 입구에는 1, 2호 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경사진 넓은 도로가 만들어져 있어요. 지휘관이 탔던 커다란 마차가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든 도로. 

보병과 병사들을 지휘했던 간부, 기마병과 말이 세워져 있습니다. 한눈에도 각기 다른 역할을 담당하는 병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용들은 너무 많아 처음 본 순간에는 모두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얼굴 크기와 표정은 물론, 머리 모양과 손동작 하나까지도 제각각입니다. 좌우 끝에는 옆을 바라보고 있는 도용들이 세워져 있으며, 기마병들의 말도 규모에 따라 3~4마리씩 배치되어 있습니다.

제1호 병마용갱 뒤쪽 끝에는 대규모 병사들을 지휘했던 장군과 말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튼튼해 보이는 갑옷을 입은 장군은 얼굴은 물론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훨씬 섬세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장군의 말도 기마병의 말에 비해 큽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곳이 너무 넓고 가까이 다가가는 데 한계가 있어, 자세한 부분까지 보기는 어렵다는 점입니다. 이런 아쉬움은 유리관 안에 따로 병사와 말을 전시해 놓은 제2호 병마용갱 전시장에서 달랠 수 있답니다.

제2호 갱에는 병마용갱을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던 청동으로 만든 도구와 칼, 창이 전시되어 있어요. 청동 제품들은 전투용 칼, 창뿐만 아니라 일반 생활용품으로도 사용되었다고, 제2호 병마용갱에서 발굴된 도용들도 하나같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요. 그중 눈에 띄는 것은 무릎을 꿇고 앉아 활을 쏘는 도용입니다. 활 쏘는 병사들의 모습은 마치 전쟁터를 옮겨 놓은 듯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 준다.

실제로 제3호 병마용갱에서는 4마리의 말이 마차를 끌고 있는 청동 마차가 발굴되었어요. 도용의 배치도 1, 2호 병마용갱처럼 장군과 병사, 마차, 말이 적군을 향하여 공격하는 형태가 아니라 최고 지휘부를 보호하는 형태로 되어 있어요. 또한 청동 유물도 많이 발굴되어, 제3호 갱이 1, 2호 갱에 비해 더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화를 알 수 있는 박물관"

병마용갱 서쪽에는 진시황제 때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박물관이 있어요. 병마용갱 주변에서 발굴된 주요 유물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지요. 당시 사용했던 거울과 건축하는 데 사용했던 도구 등의 생활용품, 아름다운 회화와 조각, 서예, 마차까지 무척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유물들은 하나같이 소중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1980년 진시황제 무덤 서쪽 20m 지점에서 발굴된 두 대의 마차입니다. 1호와 2호 마차로 불리는데, 각각 4마리의 말이 끌고 있다.
진시황제가 전국을 순회할 때 탔던 마차를 모델로 만든 것으로 보고 있지요. 실물 크기의 2분의 1로 축소해서 만든 것이라고 해요. 청동 위에 금과 은으로 도금하고 그 사이사이에 색을 칠해 놓은 채색 마차로, 최고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말은 높이 90cm, 길이 110cm에 무게가 170~190kg에 달하며, 말 4마리가 끌고 있는 청동 마차는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무겁고, 또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어요. 작은 1호 마차의 경우 자그마치 3064개의 부품을 연결하여 만들었고 2호 마차는 이보다 더 많은 3462개의 부품을 사용했다고 함.
마차 하나를 만드는 데 이토록 많은 부품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 이 마차들의 무게는 자그마치 1000kg이 넘는다.

진시황제가 살았던 진나라의 수도 시안에는 병마용갱 외에도 흥미로운 유적지가 많다.
아직 발굴을 시작하지도 못한 진시황제의 능을 비롯하여 거대한 성곽 유적지와 당나라 때 건설한 양귀비의 흔적으로 가득한 화칭츠,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존해 놓은 쯔언사 다옌탑 등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어요. 중국 최고의 문화 도시 시안은 중국 고대 문명을 알 수 있는 문화의 보고다.
명십삼릉"
중국 베이징 북쪽 천수산 주변에는 명나라 황제 13명이 잠들어 있는 무덤 유적지, 명십삼릉이 있습니다. 명십삼릉은 시안 외곽에 자리한 진시황릉과 더불어 중국 최대 규모의 무덤 유적이다.
겉모습만 보면 자연의 일부로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인공 산 형태의 묘지로, 능과 그 부속 건물들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명나라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긴 영락제가 묻힌 장릉을 중심으로 헌릉과 경릉, 사릉까지 명십삼릉에는 총 13개의 무덤이 모여 있습니다. 명나라의 황제는 모두 16명이었으나 초대 황제 주원장과 2명의 황제는 난징과 금산에 묘가 있기 때문에 이곳에는 13개의 묘만 있는 것이다.

실제 묘지는 지하 8m에 만들어 놓았는데, 궁궐과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현재 발굴된 유적지는 제14대 황제인 신종 주익균의 묘인 정릉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발굴되지 않은 상태라서 정릉만 관람객에게 개방되고 있다.
벽면이 옥으로 장식된 묘지에서는 황제들이 사용하던 각종 생활용품과 황금으로 만든 호화로운 부장품이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이 부장품들은 앞뜰의 전시실에서 전시되고 있어 명나라 황제들의 화려한 삶을 엿볼 수 있다.

산시 성 역사 박물관

시안 도심에는 산시 성에서 발굴된 주요 유물을 전시해 놓은 산시 성 역사 박물관이 있습니다. 자그마치 36만 점에 달하는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거대한 박물관이다.
중국 최초의 글자인 갑골 문자부터, 고대의 화폐, 병마용갱에서 발굴된 도용과 생활용품, 수나라와 당나라 황제가 사용했던 물건에 이르기까지 고대 중국을 상징하는 소중한 자료로 가득 차 있는 곳입니다.
산시 성 역사 박물관은 크게 3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1관에는 구석기와 신석기 유물과 진나라 때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반드시 보아야 할 것은 다양한 도용입니다.
진시황릉 병마용갱에서 발굴된 도용도 있지만 여러 시대에 만들어진 다른 도용들도 있어 서로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제2관에는 한나라, 남북조 시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바위를 깎아 만든 조각과 아름다운 불상이 눈에 띕니다.

제3관에는 수, 당, 송, 명, 청나라 시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수나라 인형, 당나라 불상과 고분에 그려졌던 벽화, 송나라 도자기와 자주색 석영으로 만든 술잔, 명나라 생활용품 등 탄성을 자아내게 만드는 유물이 가득합니다.
단연 돋보이는 것은 당나라 때의 커다란 불상으로 중국 불상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꼽힙니다. 산시 성 역사 박물관은 전시품 하나하나가 곧 중국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제1호 병마용갱

진시황릉 병마용갱에서는 제1호 병마용갱이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제1호 병마용갱은 중앙 관람대에서 관람하는 것이 가장 좋다.

중앙 관람대 바로 앞에는 3줄로 보병의 도용이 세워져 있습니다. 무기는 물론 없고, 투구도 쓰지 않은 도용이지만 같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각기 조금씩 다른 얼굴 표정과 머리 모양 등을 보면 신기하다는 생각이?

坑" 진시황릉 병마용갱.
중국 산시성[陝西省] 린퉁현[臨潼縣]에 있는 진시황릉원 동쪽 담에서 1km 떨어진 병마도용을 수장한 지하 갱도.
1974년 중국 서안 외곽의 시골마을에서 우물을 파기 위해 땅을 파던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양취위안이라는 농부는 땅속에서 발견된 도기인형의 조각과 쇳조각을 보고 이 사실을 신화사통신 기자(린안인)에게 알렸다. 
인민일보을 통해 보도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산시성 고고학발굴팀은 1974년 7월 15일부터 본격적인 발굴작업에 착수하였으며, 7월 21일 진시황릉에 딸린 병마용갱임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발굴이 시작되어 현재까지 총면적 25,380m2에 달하는 4개의 갱이 발굴되었으나 그 중 4호갱은 완성되기 전에 폐기된 빈 갱도였다. 
완전히 발굴되지 않은 1호갱은 길이 210m, 너비 60m, 깊이 4.5~6.5m의 총면적 12,000m2로서, 본래 이 갱 위에는 길이 210m, 넓이 9칸의 회랑식 건축이 있었으나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매장된 전체 도용은 약 6,000개로 추정되지만, 진나라로 쳐들어온 항우에 의해 많은 도용들이 파괴되어 정확한 개수의 파악은 어렵다. 
도용의 크기는 1.75~1.96m, 도마용은 높이 1.5m, 길이 2m로 실물보다는 조금 크게 만들어졌다. 병사들은 겉옷만 입은 것과 겉옷 위에 갑옷을 입은 병사로 구분되어 있다. 무장한 무사의 엄격한 표정은 모두 다르게 생겼다. 도용들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모두 컬러로 채색된 도용이었으나 발굴과정에서 햇빛에 노출되자 불과 몇시간만에 모두 색이 바래버렸다.

1976년 4월 1호갱의 동북쪽 20m떨어진 곳에서 또하나의 병마용갱이 발견되었다. 이 병마용갱을 2호갱이라고 부르며 약 6,000m2의 넓이이며 길이는 96m, 폭은 84m이다. 갱도는 정방형인 1호갱에 비해 L자 형으로 생겼다. 2호갱 역시 완전히 발굴이 완료되지 않았으며 부분적으로 발굴되었다. 89대의 목제 전차와 이를 끄는 마용 356건, 기병용 116건, 안마 116건, 보병용 2000건이 발견되었다. 병사가 도열해 있는 1호갱과 달리 2호갱은 궁노병, 기마병, 전차병이 포진하고 있다.
1976년 5월 11일에는 1호갱 서북쪽 25m 떨어진 지점에서 520m넓이의 3호갱이 발견되었다. 3호갱은 군사 지휘부로 추정되는데, 장군의 것으로 보이는 채색된 전차 1량과 갑옷 입은 보병용 64건, 마용 4건이 출토되었다. 이 밖에도 진시황릉 서북측에서 동마용과 동용이 딸린 대형 동전차가 1대 발견되었다.

세계의 8대 경이 중의 하나로 꼽히기도 하는 이 병마용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훌륭한 예술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이 병마용들은 진시황 친위군단의 강력한 위용을 과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나라의 군사편제 ·갑옷 ·무기 등의 연구에도 구체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와 아울러 일부 도용에서 확인되는 북방 민족의 두발형식은 친위군단의 민족적 구성을 짐작하게 한다.
중국 산시성의 리산(驪山) 남쪽 기슭에 있는 진시황릉(秦始皇陵)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BC 259~BC 210)의 무덤이다. 1974년에 발견된 이 고고학적 유적지에는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수많은 병마 형상들이 남아 있다. 
진시황릉은 수도인 셴양(咸陽)의 도시 계획을 그대로 반영하여 설계하도록 한 것으로, 무덤 안은 유명한 병마용(兵馬俑)에 둘러싸여 묻혀 있다. 말이나 마차를 타거나 무기를 지닌 병마용들은 형상이 제각각이며 매우 사실적이어서, 당시의 의복과 무기, 마구 등의 형태와 구성, 그리고 시황제의 사상 등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하고 흥미로운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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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릉은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보존 지역으로, 독특한 건축학의 총체라 할 수 있다. 두 겹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황제의 궁전이 있는 진시황릉의 배치는 수도 셴양의 도시 계획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진시황릉은 기원전 221년에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이룩한 강력한 절대군주의 능으로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중국의 첫 번째 황제 진시황(본명은 영정())은 왕좌에 오르기 오래전부터 자신이 묻힐 곳을 준비했다. 기원전 247년 진나라의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점술가를 시켜 리산의 산자락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고르도록 했다. 이 사업은 경쟁국이었던 한(), 초(), 위(), 조(), 연(), 제()를 넘어서 정치적·군사적으로 큰 성공으로 거둠으로써 더욱 활기차게 진행되었다.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한 이후, 그의 묘와 관련된 사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전국에서 모인 70만 명의 노동자들은 황제가 죽을 때까지 거대한 고분 안에 지하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쉬지 않고 일했다. 그곳은 궁전과 제국, 세계의 진정한 비례 모형이었다. 무덤 도굴꾼들을 막기 위해 고안된 자동발사 무기가 무덤의 보물들을 지켰다. 진시황이 죽은 후, 지하 무덤과 관련된 주요 건축가들은 비밀 유출을 우려한 다음 왕의 명령에 따라 감금당했다. 진시황릉은 시안(西)에서 35㎞ 떨어진 곳에 있으며, 43m 높이의 거대한 봉분은 지금도 주요 역사적 건조물이다. 능은 동서남북 기본 방위에 대응하는 네 개 각각에 문이 달린 최초의 정방형 담장 안에 지어졌다. 그리고 이 정방형 담장은 다시 남북으로 뻗은 더 큰 장방형 담장으로 에워싸여 있다.

영묘의 거대한 구조물은 사라져 버렸으며, 오직 꼭대기가 떨어져 나간 피라미드와 닮은 나무 둔덕만이 350㎡의 토대 위에 남아 있다. 영묘 안쪽에 있는 방의 외부 동쪽 벽으로부터 1.5㎞ 떨어진 곳에서 우물을 파던 농부 3명이 진흙으로 만들어진 실물 크기의 병사 도용()이 있는 갱을 우연히 발견했고, 곧바로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1호 갱에서는 측면을 보호하는 궁수들과 함께 전투 대열로 서 있는 보병대와 기병대의 병사 1,087명이 나왔다. 길이 230m에 이르는 이 하나의 갱에만 하더라도 6,000개의 병마용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주변은 박물관으로 보호되고 있다.

두 개의 다른 갱은 1호 갱의 바로 북쪽에서 발견되었고 비슷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2호 갱에서는 병사 1,500명과 수레 및 말이, 3호 갱에서는 지휘관과 고관 68명과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가 나왔다. 이 갱들은 임시로 다시 메워졌고 갱에서 꺼낸 물건들은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그 밖에 봉분의 서쪽 비탈면에서는 청동 주물로 만든 반()실물 크기의 4두 2륜 전차 두 대가 발견되었다. 진시황릉의 병마용은 황실 근위대의 정확한 숫자를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13년간 발견된 유물들로 영묘의 규모가 드러났으며, 그 부지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경이로운 고고학적 유적지이다. 진흙으로 된 병마용과 청동으로 만들어진 장례용 수레는 기술적·예술적 우수성이 매우 뛰어나, 한()나라 이전의 중국 조각품 역사상 대단히 귀중한 작품이다. 도용들로 이루어진 군대 역시 춘추전국시대(BC 475~221)와 짧았던 진나라 시대(BC221~210)의 중국 군사 조직을 짐작케 한다. 창, 검, 도끼, 미늘창, 활과 화살 등의 물건들은 그 확실한 증거물이다.

등재기준

진흙으로 된 병마용과 청동으로 만들어진 장례용 수레는 기술적·예술적 우수성이 매우 뛰어나, 한나라 이전의 중국 조각품 역사상 대단히 귀중한 작품이다.

도용 군대는 춘추전국 시대와 짧았던 진나라 시대의 중국 군사 조직을 짐작게 한다. 창, 검, 도끼, 미늘창, 활과 화살 등의 물건들은 그 확실한 증거물이다. 병사들의 옷과 무기에서부터 말의 고삐 같은 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초현실주의적인 병마용의 기록적 가치는 막대하다. 더욱이 도공의 공예, 기술과 관련된 도용에 담긴 정보는 헤아릴 수 없다.

진시황릉은 중국에서 가장 큰 보존 지역으로, 독특한 건축학의 총체라 할 수 있다. 두 겹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황제의 궁전이 있는 진시황릉의 배치는 수도 셴양의 도시 계획을 반영하고 있다. 
진의 수도는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통합(진시황은 전 중국에 통일된 문자, 화폐, 도량형을 도입하고자 했다)과 사방 어디서든 침략할 수 있는 적들로부터 보호(군대는 무덤에서 바깥을 향하고 있는 죽은 황제의 얼굴을 지키고 있다)하기를 바랐던 중국의 축소판이다.

진시황릉은 기원전 221년에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이룩한 강력한 절대군주의 능으로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진시황릉"
진시황릉

중국 산시성 시안. 세계적으로 개인을 위한 묘로서는 최대의 크기로 진시황제가 즉위한 때부터 39년에 걸쳐 만들어 졌다.
중국 산시성[陝西省] 린퉁현[臨潼縣] 여산(驪山) 남쪽 기슭에 위치한 시황제의 구릉형 묘.

춘추전국시대의 혼란했던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의 무덤으로 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약 76m의 거대한 능이다. 사마천이 저술한《사기》 <진시황본기()>에 의하면 시황제 즉위 초부터 착공되어 중국 천하를 통일한 이후에는 70여 만명이 동원되어 완성되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드는 등 천상과 지상을 모방한 지하 궁전을 만들고 도굴자가 접근하면 화살이 자동발사하는 비밀스러운 장치도 갖추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아직 발굴로 밝혀진 바는 없다.
능은 장방형의 두 겹의 담장으로 싸인 능원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쪽 담과 바깥 담의 사변 길이는 각각 2,525.4m, 6,294m이며, 현재는 지상에서는 능의 흔적을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담벽 아래에서는 도수도(), 능원 내외에서 3곳의 건축유지와 수많은 배장묘와 순장묘가 발굴되어 전체적인 규모와 구조가 확인되었다. 능원 동문 밖의 거대한 병마용갱은 세계적인 관심거리가 되었고, 능원 밖에서 발견된 100여 개의 형도묘는 건설 당시의 가혹한 강제노역의 실상을 짐작하게 한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BC 210.9 불사()의 꿈이 허망하게 무너지다"

“중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역사인물은 누구인가?” 중국에서 이런 설문을 해보면 거의 언제나 진시황과 마오쩌둥 두 사람이 1, 2위를 다툰다. 마오쩌둥은 오늘날의 사회주의 중국을 만들었고, 진시황은 그 중국 자체를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시황 이전에도 중국 역사는 오래 이어져 왔다.

중국을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통일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마치 유럽처럼 여러 나라로 나뉜 채로 발전해 왔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중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런 뜻에서 마이클 하트가 펴낸 <세계사를 바꾼 사람들: 랭킹 100>에서는 진시황이 카이사르와 나폴레옹을 제치고 18번째로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