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6일 화요일

양귀비.1

양귀비.

죽음에 관한 설화"

자결 아닌 자결로 38세의 생을 마감, 
(화무십일홍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권불십년(  꽃은 열흘 붉은 것이 없고 권세는 10년을 가지 못 한다)’ 이란 말이 있듯이 양귀비의 권세도 오래가지 못했다. 양귀비의 몰락은 현종 외에 양귀비가 총애하던 두 남자 사이의 알력에서 시작되었다. 

양귀비는 중국 변방 돌궐족 출신인 안록산을 가까이 하였다. 안록산은 일개 군졸에서 시작하여 용맹으로 공을 세워 일약 중앙정계로 진출한 인물이었다.
20대의 양귀비는 40대의 안록산을 수양아들로 삼고 그를 매우 가까이 하였다. 일설에는 양귀비가 안록산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현종은 안록산과 양귀비의 관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양귀비가 안록산을 총애하는 것만큼 더욱 안록산을 높은 지위로 등용하였다. 그것이 양귀비의 6촌 오빠인 양국충과 안록산 사이에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양국충은 안록산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이를 눈치 챈 안록산은 변방에서 난을 일으키고 곧이어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까지 쳐들어 왔다. 이것이 바로 안사의 난이다.
현종은 양귀비를 데리고 서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장안에서 100여리쯤 가 섬서성 마외파에 도착했을 때였다. 성난 군중들과 현종을 호위하던 병사들은 나라꼴을 이렇게 만든 양귀비와 그 일족들을 처벌하기를 원했다.
현종은 사랑과 목숨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는 양귀비와 함께 장렬히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종은 양귀비를 보호하지 않고 그녀에 대한 백성의 분노를 수수방관함으로써 그녀에게 죽음을 종용하였다. 정치를 내팽개치고 나라를 몰락하게 만든 모든 책임을 양귀비에게 덮어씌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종은 사랑보다는 자신의 목숨을 선택했다. 결국 현종의 뜻을 알아차린 환관 고력사가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양귀비가 자결 아닌 자결로 생을 마감하고 나자 현종은 그녀의 시체를 수습해 인근 조그마한 산에서 장사 지냈다.
양귀비가 죽고 간신히 피난길을 떠났던 현종은 황위를 아들 숙종에게 물려주고 태상황이 되었다. 이후 그는 숙종에게 안사의 난을 진압하도록 모든 것을 맡긴 채 자신은 양귀비만 그리워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현종은 양귀비의 초상화를 앞에 두고 끝내 그녀를 지키지 못한 회한과 그리움 속에서 6년 세월을 보내다가 762년 7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현종은 안녹산의 난이 평정되어 궁으로 돌아온 후 사람들을 파견하여 그녀의 시신을 찾으려 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일설에는 그녀가 마외역에서 죽지 않고 해외로 도피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즉, 양귀비의 미모가 너무 아까웠던 금군 장수 진현례가 환관 고역사와 짜고 그녀 대신 시녀를 죽이고는 남쪽으로 도피시켜 일본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정사()도 그녀를 "자질풍염()"이라 적었으며, 절세()의 풍만한 미인인데다가 가무()에도 뛰어났고, 군주()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총명을 겸비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백()은 그를 활짝 핀 모란에 비유했고, 백거이()는 귀비와 현종과의 비극을 영원한 애정의 곡()으로 하여 《장한가()》로 노래한 바와 같이, 그녀는 중국 역사상 가장 낭만적인 주인공이 되었다. 진홍()의 《장한가전()》과 악사()의 《양태진외전()》 이후 윤색()은 더욱 보태져서, 후세의 희곡에도 좋은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당나라에는 일본의 사신들이 종종 왕래했는데 그들과 일본으로 갔다는 이야기다. 일본에 도착한 양귀비는 여황제 효겸천황()을 접견하고 나라() 지방에 거주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68세까지 살다가 죽었는데, 지금도 야마구치()현에 양귀비묘가 있다고 한다.
양귀비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른 재미있는 전설이 하나 있다. 양귀비의 아름다움이 너무나 대단해 고력사나 따라간 군졸들이 차마 죽이지 못하여 그녀를 일본으로 탈출시켰다는 이야기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양귀비는 30여 년을 일본에서 더 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유물과 사당, 무덤이 일본 야마구치현에 남아 있는데, 실제로 양귀비의 후손이라고 족보까지 들고 나선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현대 일본의 여가수 야마구치 모모에()가 자신의 조상이 양귀비라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전설이 전하지만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의 역사서에는 모두 양귀비가 마외역에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755년 그녀의 친척 오빠인 양국충과의 반목()이 원인이 되어 안녹산(祿)이 반란을 일으키자(안사의 난), 황제·귀비 등과 더불어 쓰촨으로 도주하던 중 장안()의 서쪽 지방인 마외역()에 이르렀을 때, 양씨 일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호위 군사가 양국충을 죽이고 현종에게 양귀비의 목숨을 요구하였다. 현종도 이를 막을 방법이 없자, 양귀비는 군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화청궁 양귀비 전용욕실 해당탕
중국 산시성 시안(西安). 양귀비가 현종과 함께 목욕한 곳. 부용탕이라고도 한다. 24개의 검은 돌로 만들어졌다.
그녀의 이야기는 많은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문예 창작에 미친 영향을 보면, 시가()로는 이백의 <청평조(調)>, 정전의 <마외파()>, 백거이의 <장한가> 등.., 소설로는 『양태진외전()』, 『장한가전()』 등이 있다. 
희극으로는 『당명황추야오동우()』, 『마진감()』, 『경홍기()』, 『채대기()』, 『장생전(殿)』, 『귀비취주()』, 『태진외전()』, 『마외파()』, 『당명황여양귀비()』 등이 있다.
관련 유적.
양귀비고거(楊貴妃故居)
산시(西)성 윈청()시 융지()시 서우양향() 두터우촌()에서 동쪽으로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양귀비가 태어나고 성장했던 생가가 있다.
양귀비묘(楊貴妃墓)
그녀의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양귀비묘는 실제로 의관총 이라고 할 수 있다. 산시(西)성 셴양()시 싱핑()시 마짜이진() 서쪽 500미터 밖에 있다. 시안(西)에서 6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무덤의 모양은 반구형이고 높이는 3미터이다. 무덤 뒤에 대리석으로 만든 약 6미터 높이의 양귀비상이 있다. 주위의 흙은 귀비분()으로 일컬어지는데, 유람객들이 흙을 가져가기도 한다. 무덤 앞에 비()가 있는데 그 위에 ‘당현종귀비양씨묘()’라고 쓰여 있다.
"일설에 어릴 때 이름은 옥환(),옥노()이고,세칭 양옥환(), 시가()에서는 양태진()이라 불린다. 당() 현종()이 총애하던 귀비()로 부친인 양현염()은 촉주사호()를 지냈다. 그녀는 자태가 요염했고 가무()와 음률()에 능통했다. 
처음에 당 현종의 아들인 수왕() 이모()의 왕비()였으나, 시아버지 현종()의 명령에 의해서 여도사()가 되었다가 다시 현종의 귀비()로 책봉되었다. 천보() 15년(756)에 안록산(祿)의 난이 일어나자 현종과 촉() 지방으로 피난가던 도중에 마외역()에서 군사들에게 피살되었다. 서시(西),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 4대 미인으로 일컬어진다."

야설"에...
제목 앞에 ‘력사소설()’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총 16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기보다는 현종과 양귀비의 이야기를 대중의 흥미에 맞춰 간결한 문체로 풀어 쓴 작품이다.

내용

개원 13년 가을, 현종은 왕황후를 멀리하고 측천무후의 조카딸 무혜비를 곁에 둔다. 조여비, 황보덕, 유재인 등은 왕황후의 편에 서지만, 무혜비는 왕황후가 미신을 이용하여 왕에게 저주를 내리고 있다며 그녀를 모함한다. 현종은 왕황후를 냉궁에 가두고 그녀의 오라비를 죽인다. 
대신들은 모두 무혜비를 황후에 올리는 것에 반대하고 나선다. 무혜비는 궁에 도둑이 들었다며 태자들을 무장시켜 궁 안으로 들여보내고, 이를 모반으로 오해한 현종은 태자들을 모두 죽인다. 무혜비는 충격을 받아 실성하고 죽음을 맞는다. 
현종이 외로운 나날을 보내자 환관 고력사는 왕을 위해 미인들을 찾는다. 어느 날 온청궁에서 수왕비 양씨를 본 현종은 한눈에 그녀에게 반하고 고력사에게 그녀를 불러오라 명한다.

현종의 아들 수왕의 비인 양씨는 황후가 되고픈 야망을 품고 고력사를 따라간다. 현종은 양씨에게 귀비의 호칭을 내리고 향락에 빠진 생활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무장 안록산을 만난 양귀비는 그에게 호감을 갖는다. 
양귀비의 세를 등에 업고 재상이 된 양국충은 안록산을 경계하며 현종에게 그의 참소를 청한다. 이에 안록산은 간신 양국충을 친다는 명목하에 반란을 일으킨다. 반란군은 양국충을 죽이고 달아나는 현종과 양귀비를 쫓는다. 
현종은 양귀비를 내어 달라는 안록산에게 불복하여 양귀비에게 자진을 명한다. 양귀비는 부귀영화의 지난 생활을 한탄하며 목을 매 죽는다.

 妃" 수화 양귀비.
당나라의 미녀 양귀비가 화원에 가서 꽃을 감상하며 우울함을 달래는데, 무의식 중에 함수화(미모사)를 건드리게 되었다. 
함수화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부끄러워하며 바로 잎을 말아 올렸고, 당 현종이 그녀의 '꽃을 부끄럽게 만드는 아름다움(수화 : )'에 찬탄하고 그녀를 절대가인()이라 칭했다.
현종은 양귀비에게 정신을 빼앗겨 나라를 돌보지 않게 되었고, 간신이 제멋대로 날뛰어 당나라의 정치는 부패하게 되었다. 이에 양귀비는 나라를 어지럽힌 죄로 안사( : 안록산-사사명)의 난 때 피난길에서 처형당했다.

양귀비술.楊酒.
당나라 현종의 비(妃)인 양귀비가 아름다움과 건강을 위해 밤낮으로 애용했다는 약술. 외래주다. 
양귀비술의 재료인 당귀, 작약, 목단피, 홍화, 향부자, 치자 등의 약초는 혈액순환을 촉진하며, 몸을 따뜻하게 하며, 생리통을 완화하고 부인병을 없애고, 피를 늘려 빈혈을 없애준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여성의 미용에 매우 좋은 약술이다.

양귀비술의 재료는 당귀 30g, 작약 15g, 목단피 15g, 적복령 15g, 용안육 30g, 향부자 15g, 홍화 20g, 치자 10g, 박하 10g, 시호 10g, 국화 10g, 대추 20g, 설탕 300g 또는 벌꿀 160g, 소주 1.8ℓ이다. 
홍화와 국화는 그대로 사용하고 다른 약재는 잘게 썰어서 용기에 넣고 소주를 붓고 밀봉하여 시원한 곳에 보관한다.
생리불순, 혈액불량, 빈혈, 보양강장, 미용에 효능이 있으며, 1일 2~3회 20㎖정도씩 식전 또는 식간에 마시면 좋다.

처음 3~5일은 하루에 1회씩 가볍게 흔들어 주고 이후로도 자주 흔들어 주면 숙성이 빨라진다. 약재의 유효성분은 3개월 정도이므로 3개월 후 개봉하여 약재를 가재 천으로 걸러 분리한다. 
술은 다시 용기에 붓고 설탕 또는 벌꿀을 넣어 잘 저어주고 완전히 녹으면 여기에 약재 건더기의 1/5을 다시 넣고 밀봉하여 시원한 곳에 보관한다. 
6개월 후 개봉하여 윗부분만 따라내고 나머지는 여과지로 걸러낸 후 처음 걸러낸 술과 합하면 독특한 향기와 맛을 지닌 약술이 된다.


양귀비 . 楊貴妃. Yáng Guìfēi. 楊貴美酒.

양귀비 . 楊貴妃. Yáng Guìfēi.

중국 당나라 6대왕 현종의 총비. 
시대 ; 당나라
출생 - 사망719년 ~ 756년이칭 ; 양옥환(), 양옥노(), 양태진()
당나라 현종(玄宗)의 비(妃). 절세미인에 총명하여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황후 이상의 권세를 누렸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 도주하던 중 살해되었다.

눈동자를 돌리며 한번 웃으면 백 가지 애교가 철철 넘쳐서,()
육궁의 단장한 미녀들, 모두 낯빛을 잃어버렸네.().

수나라 황실의 후예로 태어난 그녀의 본적은 포주() 영락이다. 일설에 따르면 촉주(, 지금의 쓰촨()성 청두()시) 혹은 용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어릴 때 이름은 양옥환 또는 양옥노였다고 한다. 시인들은 양태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촉주에서 사호()라는 벼슬을 지낸 양현염()의 딸이며,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 양현교() 슬하에서 자랐다.
16세가 되던 735년에 당 현종의 아들 수왕 이모()와 혼인했다.
이모의 어머니인 무혜비는 현종이 매우 총애하여 궁중의 예우가 황후에 버금갔는데, 개원() 25년인 737년에 무혜비가 세상을 떠나자 현종이 오랫동안 슬퍼하고 아쉬워했다.
후궁들 중에서는 현종의 마음을 달래줄 사람이 없었는데, 이때 한 신하가 현종에게 수왕비의 자질이 뛰어나고 천하절색의 미인이니 마땅히 후궁으로 들여야 한다고 주청했다.
이에 현종은 그녀를 후궁으로 불러들이게 되었는데, 그녀는 시아버지의 후궁이 된다는 세간의 이목을 두려워하며 현종의 어머니인 두태후()의 명복을 비는 여도사()가 되겠다고 했다. 그녀의 도호()는 태진()이었다.

당 현종, 살기 위해 사랑하던 양귀비를 버리다.


당나라를 대표하는 시인 백거이가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서사시 <장한가>에서 묘사한 양귀비의 죽음이다. 시 속에서 양귀비를 총애하던 황제는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을 외면하며 오로지 피눈물만 흘리는 소극적이고 비겁한 남자일 뿐이다. ‘안사의 난’을 피해 쓰촨으로 도망가던 당나라 6대 황제 현종의 가마가 마외파에 이르렀을 때였다. 호위하던 병사들이 소동을 일으켰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하다고 했던 양귀비가 환관 고력사의 손에 이끌려 죽으러 가는 것을 그저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양귀비는 마외파 인근 불당 앞 배나무에 비단천으로 목을 매어 죽었다. 
자결했다고도 하고 고력사가 죽였다고도 한다. 당시 양귀비의 나이 38세였다.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는 여인, 경국지색() 양귀비의 10여 년 권세는 이렇게 끝이 났다.
나라를 망친 양귀비와 그 일족을 죽이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주저앉은 것이다. 뒤에선 안록산의 군대가 쫓아오고 피난 가마는 조금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다급해진 현종은 병사들의 요구를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양귀비의 일족은 병사들에게 내어주어 주살하게 했고 사랑해 마지않던 총비 양귀비는 내팽개쳤다. 

'안사의 난'을 피해 도주하다' 

자결 아닌 자결로 비극적 종말을 맞다.


서쪽으로 도성 문 백여 리를 나오더니. / 어찌 하리오! 호위하던 여섯 군대 모두 멈추어서네 / 아름다운 미녀 굴러 떨어져 말 앞에서 죽으니 / 꽃비녀 땅에 떨어져도 줍는 이 아무도 없고, / 비취깃털, 공작비녀, 옥비녀마저도. / 황제는 차마 보지 못해 얼굴을 가리고 / 돌아보니 피눈물이 흘러내리네.

천보 14년인 755년에 범양(), 평로(), 하동() 삼진절도사(使)였던 안녹산이 황제를 바로 보좌하고 양국충 일당을 소멸시킨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병사들이 장안(, 지금의 산시(西)성 시안(西)시)으로 들어가자 현종은 양귀비와 양국충을 데리고 촉중(, 지금의 쓰촨()성 청두()시)으로 피난을 떠났다. 일행이 마외역에 이르렀는데 평소 양국충을 증오하던 금군 대장 진현례를 위시한 군사들이 양국충과 양귀비를 죽여야만 움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종은 결국 양국충을 주살하고 양귀비에게는 사약을 내렸다. 이때 양귀비의 나이는 38세였다.
당시의 정경을 백거이는 <장한가>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군사들이 하나같이 움직이지 않으니 어찌 한단 말인가?()
가여운 눈썹 미인, 마외역 앞에서 죽고 말았네.()"

양귀비(양옥환)고아 출신으로 양씨 가문에 양녀가 되었다. 양아버지의 임지()인 쓰촨성[]에서 자랐으며, 17세 때 현종의 제18왕자 수왕() 이모()의 비()가 되었다. 
현종의 무혜비()가 죽자, 황제의 뜻에 맞는 여인이 없어 물색하던 중 수왕비 옥환()이 절세의 미녀라는 소문을 듣고 황제가 온천궁()에 행행()한 기회에 그녀를 보고 총애를 받게 되었다고 전한다. 
현종은 수왕에게 새로운 여자를 아내로 주었고 옥환을 태진()이란 이름의 여도사()로 삼고 현종 가까이에 두었다. 궁중에 들어오자 6년만인 27세 때 정식으로 귀비()로 책봉되었다.
다년간의 치세로 정치에 싫증이 난 황제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궁중에서는 황후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고, 세 자매까지 한국()·괵국()·진국부인()에 봉해졌다.  
6촌 오빠인 양소()는 품행이 나쁜 인물이었으나 현종에게서 국충()이라는 이름까지 하사받았다. 이외 양씨의 많은 친인척이 고관으로 발탁되었고, 여러 친척이 황족과 통혼()하였다. 그녀가 남방() 특산의 여지()라는 과일을 좋아하자, 그 뜻에 영합()하려는 지방관이 급마()로 신선한 과일을 진상()한 일화는 유명하다.

양귀비는 애초 현종의 며느리.
양귀비는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미인 중 한 사람이다.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고 중독시키는 아편 꽃에 양귀비란 이름을 붙인 걸 보면 그녀의 미모는 어지간히도 치명적이었던 것 같다. 
본명은 양옥환이며 잠시 도가에 입문했을 때 법명은 태진()이다. 산시성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쓰촨성 관리이던 숙부 양립의 집에서 자랐다. 양옥환은 노래와 춤에 능하고 미모가 출중해 17세에 당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왕 이모의 비가 되었다. 수왕 이모는 당 현종과 무혜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로 황제계승권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진 수많은 왕자 중 한 명에 불과했다.
당나라 6대 왕 현종. 그의 치세 전반기는 태평성세였지만 양귀비를 만난 후 나라와 백성을 위태롭게 했다.
천보() 4년인 745년에 현종은 수왕 이모를 위씨()에게 다시 장가보내고 그녀를 환속시켜 귀비()로 책봉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26세였고, 현종은 55세였다.
그녀는 노래와 춤에 뛰어났으며 음률에도 밝았다. 또한 재치가 있고 총명하여 현종의 기분을 잘 맞춰주었다. 현종은 매우 기뻐했고, 그녀는 총관후궁의 지위에서 홀로 현종을 모셨다. 모두가 그녀를 황후처럼 대우했는데, 당시 정황을 백거이는 <장한가>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양옥환과 수왕의 사이가 어땠는지는 알순 없지만 별 풍파 없이 양옥환이 수왕과 6년간 결혼생활을 이어간 것을 보면 그다지 나쁜 사이는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 현종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양옥환은 수왕 이모와 천수를 다하며 해로하였을지도 모르고, 당나라도 혼란에 휩싸여 자멸의 길로 걸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타고난 자의 운명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6년간 수왕(현종 아들) 이모의 아내로 살던 스물세 살의 양옥환은 현종 처소의 환관인 고력사의 은밀한 방문을 받는다. 고력사는 총애했던 무혜비가 죽고 나서 외로워하는 현종을 위로하기 위해 중국전역의 미녀들을 백방으로 수소문하였다. 그 중에 수왕 이모의 아내 양옥환이 특히 아름답다고 들은 고력사는 그녀를 현종의 술자리로 불러낸다. 
양옥환은 이 자리에서 음악 애호가였던 현종이 연주하는 가락에 맞춰 자신의 장기인 아름다운 춤을 선보였다. 춤이 끝나기 전에 남녀 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당시 예순을 바라보던 현종의 마음에 사랑의 불길이 당겨진 것이다. 
현종은 양옥환이 아들의 아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아름다운 그녀를 품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망설이는 양옥환을 고력사가 특별히 파견한 궁녀들이 설득하기 시작했고 물량공세와 구애가 이어졌다. 마침내 양옥환은 수왕을 버리고 그 아버지 현종의 여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사랑에 눈이 먼 현종, 정치는 관심 밖....


 황제라 하더라도 주위의 눈은 신경 쓰이는 법. 아들의 아내를 바로 빼앗을 수 없었던 현종은 일단 양옥환을 화산으로 보내 도교의 도사로 입문시킨다. 도가에서는 일단 입문을 하면 그 이전에 있었던 속세의 일들은 다 지워지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현종은 이런 도가사상을 자기의 몰염치한 사랑에 이용했다. 이때 양옥환은 태진이라는 도호를 얻었다. 

현종이 미안해서인지 아들 수왕에게는 위씨 성을 가진 여인과 재혼하도록 주선하였다. 마침내 모든 일이 매끄럽게 처리되고 현종은 꿈에도 그리던 여인을 맞을 수 있게 되었다. 일단 도사를 모셔와 가르침을 받는다는 핑계로 태진궁을 짓고 그곳에 양옥환을 살게 하였다. 이때부터 태진궁은 그들만의 사랑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다. 

양옥환은 27세가 되던 해 귀비 책봉을 받아 양귀비가 되었다. 양귀비는 비록 비의 신분이었지만 현종이 황후의 자리를 비워둔 채 지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황후와 다름없는 귄력을 휘둘렀다. 현종이 양귀비를 맞으면서 당나라는 큰 변화를 맞이한다. 현종은 젊었을 때 꽤나 정치에 소질이 있는 황제였다. 

치세 전반기는 현종의 연호를 따 <개원()의 치()> 라는 칭송을 받으며 중국 역사상 몇 안 되는 태평성세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기나긴 태평성세에 마음이 해이해진 현종은 양귀비를 맞으면서 사랑에 눈이 멀어 정치는 관심 밖의 일이 되고 말았다. 양귀비를 낀 환관과 탐관오리가 득세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백성들의 삶은 급속히 몰락해 민심은 흉흉해졌다.

현종은 양귀비 친인척 대거 등용,


현종에게는 오로지 양귀비뿐이었다. 현종은 양귀비를 위해 누대로 유명한 온천, 화청지에 궁을 짓고 오로지 양귀비와 사랑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양귀비를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꽃. 즉 해어화()라 부르며 양귀비의 아름다움 앞에는 꽃조차도 부끄러워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양귀비가 즐겨 먹는다는 이유로 2천리 밖에서 열리는 과실 여주를 매일 공수해오도록 하였고 양귀비가 원하는 모든 사치를 다 누리도록 해주었다. 더불어 그녀의 친인척을 궁과 관직에 대거 등용하였다. 

양귀비의 세 자매까지 한국()·괵국()·진국부인()에 봉해졌다. 이때 등용된 양귀비의 6촌 오빠 양소는 건달출신의 부도덕한 간신배였지만 현종에게서 국충()이라는 이름까지 하사 받았다. 양국충은 당 현종 말기의 대표적 부패권력이었으며 종내는 안사의 난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다.
양귀비는 현종의 사랑을 영원히 붙잡아 두려고 매번 새로운 화장법을 개발하였고 또 목욕을 즐겨 늘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양귀비는 날씬하고 가녀린 미녀와는 거리가 멀었다. 역사서에는 그녀의 용모를 ‘자질풍염()’이라 하였는데 이는 풍만하고 농염하다는 의미이다. 
양귀비가 총애를 받자 그녀의 가족들도 출세하기 시작했다. 이미 세상을 떠난 그녀의 부친이 태위와 제국공()으로 추증되었고, 숙부는 광록경(祿)으로 봉해졌다. 그녀의 큰언니는 한국부인(), 셋째 자매는 괵국부인(), 여덟째 자매는 진국부인()으로 봉해졌다. 
육촌 오빠인 양섬()은 홍려경()이 되었고, 양기()는 시어사로 봉해진 후 현종의 딸인 태화공주()에게 장가들었다. 또한 육촌 오빠 양국충은 도박을 좋아하는 포악한 인물인데도 고관이 되어 조정에서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현종은 더욱 주색()에 빠졌고, 조정의 정치는 양씨 일당에 의해 부패했다.

통통한 몸매에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졌던 양귀비는 매일 온천물에 몸을 닦고 새로운 화장법으로 미모를 가꾸어 밤이나 낮이나 당 현종을 자신의 침실로 이끌었다. 백거이는 <장한가>에서 양귀비와 현종의 사랑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연꽃 휘장 속에서 보낸 뜨거운 봄밤, 봄밤에 너무 짧아 해가 높이 솟았구나. 황제는 이날 이후 조회에도 안 나오네, 후궁에 미인들은 3천명이나 되었지만 3천명의사랑을 한 몸에 받았네. 금으로 치장한 궁궐에서 화장을 끝내고 기다리는 밤 백옥누각에 잔치 끝나면 피어나는 봄.

전자올겐 / 내 나이가 어때서 KORG PA50 SD. 아름다운세상(자연)

전자올겐 영시에 이별 korg Microarranger(아름다운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