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6일 화요일

양귀비.1

양귀비.

죽음에 관한 설화"

자결 아닌 자결로 38세의 생을 마감, 
(화무십일홍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권불십년(  꽃은 열흘 붉은 것이 없고 권세는 10년을 가지 못 한다)’ 이란 말이 있듯이 양귀비의 권세도 오래가지 못했다. 양귀비의 몰락은 현종 외에 양귀비가 총애하던 두 남자 사이의 알력에서 시작되었다. 

양귀비는 중국 변방 돌궐족 출신인 안록산을 가까이 하였다. 안록산은 일개 군졸에서 시작하여 용맹으로 공을 세워 일약 중앙정계로 진출한 인물이었다.
20대의 양귀비는 40대의 안록산을 수양아들로 삼고 그를 매우 가까이 하였다. 일설에는 양귀비가 안록산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현종은 안록산과 양귀비의 관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양귀비가 안록산을 총애하는 것만큼 더욱 안록산을 높은 지위로 등용하였다. 그것이 양귀비의 6촌 오빠인 양국충과 안록산 사이에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양국충은 안록산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이를 눈치 챈 안록산은 변방에서 난을 일으키고 곧이어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까지 쳐들어 왔다. 이것이 바로 안사의 난이다.
현종은 양귀비를 데리고 서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장안에서 100여리쯤 가 섬서성 마외파에 도착했을 때였다. 성난 군중들과 현종을 호위하던 병사들은 나라꼴을 이렇게 만든 양귀비와 그 일족들을 처벌하기를 원했다.
현종은 사랑과 목숨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는 양귀비와 함께 장렬히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종은 양귀비를 보호하지 않고 그녀에 대한 백성의 분노를 수수방관함으로써 그녀에게 죽음을 종용하였다. 정치를 내팽개치고 나라를 몰락하게 만든 모든 책임을 양귀비에게 덮어씌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종은 사랑보다는 자신의 목숨을 선택했다. 결국 현종의 뜻을 알아차린 환관 고력사가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양귀비가 자결 아닌 자결로 생을 마감하고 나자 현종은 그녀의 시체를 수습해 인근 조그마한 산에서 장사 지냈다.
양귀비가 죽고 간신히 피난길을 떠났던 현종은 황위를 아들 숙종에게 물려주고 태상황이 되었다. 이후 그는 숙종에게 안사의 난을 진압하도록 모든 것을 맡긴 채 자신은 양귀비만 그리워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현종은 양귀비의 초상화를 앞에 두고 끝내 그녀를 지키지 못한 회한과 그리움 속에서 6년 세월을 보내다가 762년 7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현종은 안녹산의 난이 평정되어 궁으로 돌아온 후 사람들을 파견하여 그녀의 시신을 찾으려 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일설에는 그녀가 마외역에서 죽지 않고 해외로 도피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즉, 양귀비의 미모가 너무 아까웠던 금군 장수 진현례가 환관 고역사와 짜고 그녀 대신 시녀를 죽이고는 남쪽으로 도피시켜 일본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정사()도 그녀를 "자질풍염()"이라 적었으며, 절세()의 풍만한 미인인데다가 가무()에도 뛰어났고, 군주()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총명을 겸비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백()은 그를 활짝 핀 모란에 비유했고, 백거이()는 귀비와 현종과의 비극을 영원한 애정의 곡()으로 하여 《장한가()》로 노래한 바와 같이, 그녀는 중국 역사상 가장 낭만적인 주인공이 되었다. 진홍()의 《장한가전()》과 악사()의 《양태진외전()》 이후 윤색()은 더욱 보태져서, 후세의 희곡에도 좋은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당나라에는 일본의 사신들이 종종 왕래했는데 그들과 일본으로 갔다는 이야기다. 일본에 도착한 양귀비는 여황제 효겸천황()을 접견하고 나라() 지방에 거주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68세까지 살다가 죽었는데, 지금도 야마구치()현에 양귀비묘가 있다고 한다.
양귀비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른 재미있는 전설이 하나 있다. 양귀비의 아름다움이 너무나 대단해 고력사나 따라간 군졸들이 차마 죽이지 못하여 그녀를 일본으로 탈출시켰다는 이야기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양귀비는 30여 년을 일본에서 더 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유물과 사당, 무덤이 일본 야마구치현에 남아 있는데, 실제로 양귀비의 후손이라고 족보까지 들고 나선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현대 일본의 여가수 야마구치 모모에()가 자신의 조상이 양귀비라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전설이 전하지만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의 역사서에는 모두 양귀비가 마외역에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755년 그녀의 친척 오빠인 양국충과의 반목()이 원인이 되어 안녹산(祿)이 반란을 일으키자(안사의 난), 황제·귀비 등과 더불어 쓰촨으로 도주하던 중 장안()의 서쪽 지방인 마외역()에 이르렀을 때, 양씨 일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호위 군사가 양국충을 죽이고 현종에게 양귀비의 목숨을 요구하였다. 현종도 이를 막을 방법이 없자, 양귀비는 군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화청궁 양귀비 전용욕실 해당탕
중국 산시성 시안(西安). 양귀비가 현종과 함께 목욕한 곳. 부용탕이라고도 한다. 24개의 검은 돌로 만들어졌다.
그녀의 이야기는 많은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문예 창작에 미친 영향을 보면, 시가()로는 이백의 <청평조(調)>, 정전의 <마외파()>, 백거이의 <장한가> 등.., 소설로는 『양태진외전()』, 『장한가전()』 등이 있다. 
희극으로는 『당명황추야오동우()』, 『마진감()』, 『경홍기()』, 『채대기()』, 『장생전(殿)』, 『귀비취주()』, 『태진외전()』, 『마외파()』, 『당명황여양귀비()』 등이 있다.
관련 유적.
양귀비고거(楊貴妃故居)
산시(西)성 윈청()시 융지()시 서우양향() 두터우촌()에서 동쪽으로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양귀비가 태어나고 성장했던 생가가 있다.
양귀비묘(楊貴妃墓)
그녀의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양귀비묘는 실제로 의관총 이라고 할 수 있다. 산시(西)성 셴양()시 싱핑()시 마짜이진() 서쪽 500미터 밖에 있다. 시안(西)에서 6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무덤의 모양은 반구형이고 높이는 3미터이다. 무덤 뒤에 대리석으로 만든 약 6미터 높이의 양귀비상이 있다. 주위의 흙은 귀비분()으로 일컬어지는데, 유람객들이 흙을 가져가기도 한다. 무덤 앞에 비()가 있는데 그 위에 ‘당현종귀비양씨묘()’라고 쓰여 있다.
"일설에 어릴 때 이름은 옥환(),옥노()이고,세칭 양옥환(), 시가()에서는 양태진()이라 불린다. 당() 현종()이 총애하던 귀비()로 부친인 양현염()은 촉주사호()를 지냈다. 그녀는 자태가 요염했고 가무()와 음률()에 능통했다. 
처음에 당 현종의 아들인 수왕() 이모()의 왕비()였으나, 시아버지 현종()의 명령에 의해서 여도사()가 되었다가 다시 현종의 귀비()로 책봉되었다. 천보() 15년(756)에 안록산(祿)의 난이 일어나자 현종과 촉() 지방으로 피난가던 도중에 마외역()에서 군사들에게 피살되었다. 서시(西),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 4대 미인으로 일컬어진다."

야설"에...
제목 앞에 ‘력사소설()’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총 16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기보다는 현종과 양귀비의 이야기를 대중의 흥미에 맞춰 간결한 문체로 풀어 쓴 작품이다.

내용

개원 13년 가을, 현종은 왕황후를 멀리하고 측천무후의 조카딸 무혜비를 곁에 둔다. 조여비, 황보덕, 유재인 등은 왕황후의 편에 서지만, 무혜비는 왕황후가 미신을 이용하여 왕에게 저주를 내리고 있다며 그녀를 모함한다. 현종은 왕황후를 냉궁에 가두고 그녀의 오라비를 죽인다. 
대신들은 모두 무혜비를 황후에 올리는 것에 반대하고 나선다. 무혜비는 궁에 도둑이 들었다며 태자들을 무장시켜 궁 안으로 들여보내고, 이를 모반으로 오해한 현종은 태자들을 모두 죽인다. 무혜비는 충격을 받아 실성하고 죽음을 맞는다. 
현종이 외로운 나날을 보내자 환관 고력사는 왕을 위해 미인들을 찾는다. 어느 날 온청궁에서 수왕비 양씨를 본 현종은 한눈에 그녀에게 반하고 고력사에게 그녀를 불러오라 명한다.

현종의 아들 수왕의 비인 양씨는 황후가 되고픈 야망을 품고 고력사를 따라간다. 현종은 양씨에게 귀비의 호칭을 내리고 향락에 빠진 생활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무장 안록산을 만난 양귀비는 그에게 호감을 갖는다. 
양귀비의 세를 등에 업고 재상이 된 양국충은 안록산을 경계하며 현종에게 그의 참소를 청한다. 이에 안록산은 간신 양국충을 친다는 명목하에 반란을 일으킨다. 반란군은 양국충을 죽이고 달아나는 현종과 양귀비를 쫓는다. 
현종은 양귀비를 내어 달라는 안록산에게 불복하여 양귀비에게 자진을 명한다. 양귀비는 부귀영화의 지난 생활을 한탄하며 목을 매 죽는다.

 妃" 수화 양귀비.
당나라의 미녀 양귀비가 화원에 가서 꽃을 감상하며 우울함을 달래는데, 무의식 중에 함수화(미모사)를 건드리게 되었다. 
함수화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부끄러워하며 바로 잎을 말아 올렸고, 당 현종이 그녀의 '꽃을 부끄럽게 만드는 아름다움(수화 : )'에 찬탄하고 그녀를 절대가인()이라 칭했다.
현종은 양귀비에게 정신을 빼앗겨 나라를 돌보지 않게 되었고, 간신이 제멋대로 날뛰어 당나라의 정치는 부패하게 되었다. 이에 양귀비는 나라를 어지럽힌 죄로 안사( : 안록산-사사명)의 난 때 피난길에서 처형당했다.

양귀비술.楊酒.
당나라 현종의 비(妃)인 양귀비가 아름다움과 건강을 위해 밤낮으로 애용했다는 약술. 외래주다. 
양귀비술의 재료인 당귀, 작약, 목단피, 홍화, 향부자, 치자 등의 약초는 혈액순환을 촉진하며, 몸을 따뜻하게 하며, 생리통을 완화하고 부인병을 없애고, 피를 늘려 빈혈을 없애준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여성의 미용에 매우 좋은 약술이다.

양귀비술의 재료는 당귀 30g, 작약 15g, 목단피 15g, 적복령 15g, 용안육 30g, 향부자 15g, 홍화 20g, 치자 10g, 박하 10g, 시호 10g, 국화 10g, 대추 20g, 설탕 300g 또는 벌꿀 160g, 소주 1.8ℓ이다. 
홍화와 국화는 그대로 사용하고 다른 약재는 잘게 썰어서 용기에 넣고 소주를 붓고 밀봉하여 시원한 곳에 보관한다.
생리불순, 혈액불량, 빈혈, 보양강장, 미용에 효능이 있으며, 1일 2~3회 20㎖정도씩 식전 또는 식간에 마시면 좋다.

처음 3~5일은 하루에 1회씩 가볍게 흔들어 주고 이후로도 자주 흔들어 주면 숙성이 빨라진다. 약재의 유효성분은 3개월 정도이므로 3개월 후 개봉하여 약재를 가재 천으로 걸러 분리한다. 
술은 다시 용기에 붓고 설탕 또는 벌꿀을 넣어 잘 저어주고 완전히 녹으면 여기에 약재 건더기의 1/5을 다시 넣고 밀봉하여 시원한 곳에 보관한다. 
6개월 후 개봉하여 윗부분만 따라내고 나머지는 여과지로 걸러낸 후 처음 걸러낸 술과 합하면 독특한 향기와 맛을 지닌 약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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