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8일 목요일

경주 . 첨성대./ 개성첨성대. 開城瞻星臺


경주 . 첨성대./ 개성첨성대. 開城瞻星臺.

신라 선덕여왕 때인 7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전해지는 첨성대()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 또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 지난 100여 년 동안 일관되게 주류 학계에서 인정받아온 관점이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이런 관점에 대한 반론이 하나둘 제기되기 시작해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쳐 격렬한 논쟁이 있었으며, 최근까지 수많은 이설()들이 등장했다.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신라시대 천문을 관측하던 건물. 높이 약 9.5m. 국보 제31호. 역법을 만들기 위한 일월행성의 운행관측과 천문현상의 관찰로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점성의 목적에 사용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첨성대가 천문대가 ?
첨성대를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고 있지 그런데 실제로 경주에 가서 그 모습을 보고 평지에 있는 첨성대의 작은 모습에 실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떻게 저런 곳에서 별 관측을? 
천문대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단지 요즘 천문대에 비추어 생겨난 말들일 뿐이야. 첨성대를 자세히 살펴보면, 놀라운 비밀을 찾을 수 있다.

첨성대 관련 숫자의 비밀
첨성대를 만든 돌의 숫자는 365개 안팎이야. 또 첨성대 몸통은 27단인데 이는 첨성대를 쌓은 선덕 여왕이 27대 왕이라는 것과 관계가 있다. 여기에 꼭대기의 ‘정(, 우물)’자 모양 돌을 합치면 28단인데 이것은 28수라는 별자리와 관련이 있다.
2층의 기단부까지 합치면 29단과 30단이 되는데, 이것은 음력 한 달의 날 수와 같아. 가운데 창문을 기준으로 위쪽 12단과 아래쪽 12단으로 나누어지는데, 이는 각각 1년의 열두 달, 합치면 24절기와 같아. 놀랍다! 
숫자의 조합을 단지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있는 걸까? 첨성대로 들어온 빛이 바닥에 비추는 것으로 춘분·하지·추분을 측정할 수 있다.

첨성대 중간에 삐죽 튀어나온 돌?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 있다.”라고 했다. 그럼 이 돌은 사다리를 놓을 때 편하라고 튀어나오게 한 건 아닐까? 바깥 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다시 안쪽에서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농사 지을 시기를 정하려'
신라인은 첨성대를 만든 것 뿐만 아니라, 천문 박사와 사천 박사 같은 천문 담당 부서와 관리를 두고 하늘을 연구하도록 했어. 신라에서는 일식을 29번이나 관찰하여 기록할 정도의 높은 실력을 갖고 있었다. 이 정도의 일식 관측은 중국을 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수준이다.
신라인들이 천문에 관심이 많았던 이유는 뭘까? 그건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농사는 당시 국가 경제의 기초였고, 농민을 안정시켜야 나라가 안정되는 당시로서는 천문이 정말 중요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신라 문화의 국제성 - 해외'

당의 침략을 물리친 후 사회가 안정되면서 신라는 주변 여러 나라와 왕래하면서 문물 교류가 빈번해지고 해상 무역도 번성했어. 특히 신라는 당과의 교류를 통해 당의 선진 문화는 물론 서역 문화까지 받아들였어.
9세기 타고난 장사꾼으로 전세계의 바다 무역을 주름잡던 이슬람 상인들의 본거지인 바그다드에서는 이런 소문이 돌고 있었어. “중국 맨 끝 깐쑤(강주:오늘날의 경상남도 진주시 일대로 추정) 맞은 편에는 산이 많이 있는데, 그 곳이 바로 신라이다. 
이 나라에는 금이 많으며, 무슬림(이슬람 교도)은 일단 이 나라에 들어가면 그곳의 훌륭함 때문에 정착하게 된다.”라는 이야기는 신라가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넘어 서역과도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거야.


천마총 금관천마도가 발견되어 유명해진 천마총은 시베리아의 고분과 비슷하고, 출토된 금관도 시베리아 고분에서 발견된 금관과 비슷하다고 한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신라 시대의 승려 혜초가 고대 인도의 다섯 나라를 다녀온 후 일기처럼 쓴 책이야. 혜초는 10여 년 동안 황량한 사막과 뜨거운 열대 지방을 두루 거치고, 10만 리 길을 걸어 여행하면서 인도와 동남아시아·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의 사회 생활, 자연 환경, 풍습, 문화, 역사 등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혜초는 스무 살 때 당나라로 가서 인도 승려 금강지의 제자가 되어 인도로 가는 배를 탔다. 천축이란 당시 인도 또는 인도 방면을 일컫던 이름이야. 이 책을 보면 당시 인도 사람들이 신라를 구구탁국(꼬꼬댁, 계림)의 나라라고 불렀다고 한다. 
신라가 인도와도 교류했다는 신라의 국제적인 모습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1908년 프랑스 학자가 중국 둔황 석굴에서 발견해서, 지금은 파리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개성첨성대. 開臺.

정의

고려시대에 천문을 관측하던 곳.

내용

개성 만월대(滿) 서쪽 첨성대라고 구전되어온 석조물()을 말한다.
구조는 길이 약 3m의 장대석()으로 약 3m 사방의 4각형 석대()를 만들고 이것을 역시 약 3m 길이의 석재 5개로 받치고 있는데, 그 중 4개는 석대의 네 귀퉁이를, 1개는 중앙을 받치고 있다. 그리고 석대의 윗면 네 귀퉁이에 하변이 약 15㎝의 구멍이 뚫어져 있어 본래 이곳에 돌난간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개성첨성대에 대하여는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도 일체 언급한 바가 없다. 그러나 『고려사』 천문지·역지()·백관지() 서운관조() 등을 보아 고려시대에 첨성대가 있었음은 의심할 바가 없고, 또 이 석조물에 대한 구전이나 구조로 보아 이것이 실제로 고려시대의 첨성대였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하겠다.
이 첨성대에 지주()의 하나가 그 중앙을 받치고 있다는 사실은 간단한 기계를 그 중앙에 설치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져보게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다.
첨성대의 축조시기는 몽고의 침입으로 정부가 40년 동안 강도()로 피하였다가 돌아와서 파괴된 개성을 복구할 때 새로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첨성대에서의 관측에 관측기계를 사용하였는지의 여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그것은 『고려사』에 별의 정확한 위치 관측(적경, 적위 등)의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천문관측을 위해 축조한 첨성대로, 고려의 왕궁 터인 개성 만월대 서쪽에 있다. 919년(고려 태조 1) 연경궁을 세울 때 축조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천문 관측기구를 올려 놓았던 축대만 남아 있다.
황해북도 개성시 만월동에 있는 옛 건물. 고려시대의 유적이다. 첨성대는 고려왕궁터인 만월대 서쪽에 있다. 지금 여기에는 천문관측기구를 올려놓았던 축대만이 남아 있다. 
축대의 높이는 2.8m이다. 축대는 주춧돌 위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네모나게 다듬은 댓돌로 틀을 짠 다음 틀 사이에 판돌을 깔아 만들었다. 
축대의 네 면은 첨성대의 중요한 방위기준이 되도록 동, 서, 남, 북 방향과 일치하게 하였다. 축대는 부재들의 다듬새가 치밀하고 그 구조가 견고하다.
개성첨성대()는 개성() 만월대(滿) 서쪽에 있는 석제구조물로서, 세간에 고려시대 첨성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문헌상으로는 이 구조물에 관한 언급을 찾을 수 없다.
댓돌과 판돌은 서로 빈틈없이 맞물려졌는데 남북모서리에는 홈을 파고 알맞는 철편을 끼워 튼튼히 연결시켰다. 이러한 구조는 나비사개이음방법을 석구조에 도입한 것으로서 당시 석조기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축대 위에는 모서리마다 큰 구멍이 있고 그밖에도 여러 곳에 작은 구멍들이 뚫어져 있다. 
이 구멍들은 관측시설을 고정시켰던 자리인 듯하다. 개성첨성대는 경주첨성대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천문현상에 대한 관측사업을 오래 전부터 끊임없이 진행해 왔다는 것과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준에 있었던 고려 천문학의 발전모습을 실물로 밝혀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길이 3m 가량의 장대석()으로 약 3m 사방의 4각형 석대()를 만들고, 이를 역시 약 3m 길이의 석재 5개로 받쳤다. 이중 4개는 석대의 네 귀퉁이를, 1개는 중앙부를 받치고 있다. 석대의 윗면 네 귀퉁이에 하변이 약 15㎝의 구멍이 뚫어져 있어서 이곳에 돌난간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땅바닥에서 돌마루까지는 디딤돌이나 사다리로 오르내렸을 것으로 짐작되나,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첨성대의 돌마루와 기둥에는 관측기구들을 설치하는 데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름 12cm, 깊이 9cm의 구멍 1개와 지름 4cm, 깊이 3.5cm의 구멍 2개가 있다.
구조물이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려() 충렬왕() 때인 1308년에 태사국()과 사천대()를 통합하여 서운관()을 창설하고 직제를 개편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때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천문관측을 위한 기구를 사용하였는지는 불확실하다. 별의 정확한 위치 관측과 관련한 기록이 『고려사()』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 구조물의 5개 지주() 가운데 1개가 그 중앙을 받치고 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간단한 관측 장비를 그 중앙부에 설치하였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는 있다.

첨성대는 네모난 5개의 주춧돌 위에 화강석 기둥을 세우고 2.2×2.2m 크기의 돌마루를 깐 형태로, 7세기경에 축조되었던 경주 첨성대와는 구조가 다르다. 각 기둥은 크기 0.4×0.2×2.8m, 지면에서 돌마루까지의 높이는 2.3m이다.

 
경주 첨성대에 이어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천문 관측을 진행해 온 사실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고려 천문학의 발전 모습을 실물로 밝혀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