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6일 화요일

장량 . 張良.

장량 . 張良. zhāng liáng.

한나라 건국에 공헌한 책사"

한나라 고조 유방의 공신. 진승 · 오광의 난이 일어났을 때 유방의 진영에 속하였으며, 후일 항우와 유방이 만난 '홍문의 회'에서는 유방의 위기를 구하였다. 선견지명이 있는 책사로서 한나라의 서울을 진나라의 고지인 관중으로 정하고자 한 유경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자 자방(). 시호 문성공(). 한나라 명문 출신으로, BC 218년 박랑사(:)에서 시황제()를 습격했으나 실패, 하비(: )에 은신하고 있을 때 황석공()으로부터 《태공병법서()》를 물려받았다고 한다.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났을 때 유방의 진영에 속하였으며, 후일 항우()와 유방이 만난 '홍문의 회()'에서는 유방의 위기를 구하였다. 

장량은 영천() 성부(, 지금의 허난()성 양시현 서쪽) 사람으로 자는 자방()이다. 장량의 집안은 대대로 한()나라의 귀족 가문이었다. 장량의 할아버지인 장개지()와 아버지 장평()이 모두 한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아버지가 죽고 BC.230년에 한나라가 진()에 멸망하게 되면서 장량의 집안도 몰락하게 되었는데, 그때까지 장량은 관직에 오르지 못한 상태였다.
선견지명이 있는 책사()로서 한나라의 서울을 진()나라의 고지()인 관중()으로 정하고자 한 유경()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소하()와 함께 책략에 뛰어나 한나라 창업에 힘썼다. 그 공으로 유후()에 책봉되었다.

장량은 복수를 결심하고, 전 재산을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 복수를 위한 굳은 의지 때문에 동생이 죽었을 때에도 장례 비용을 대주지 않았다고 전한다. 복수를 함께할 동지를 찾으려 동쪽으로 떠난 그는 창해군()이라는 인물을 찾아가 함께 진()의 시황제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진시황 29년경(BC.218) 진시황이 동쪽을 순시하는 경로를 알게 된 장량은 힘이 센 자를 고용해서 박랑사(, 지금의 허난성 위안양()현)를 지나던 시황제의 행차에 무게가 120근(약 30kg)이나 되는 철퇴를 던졌다. 당시 지나가던 4개의 수레 중 가장 호화로운 중간의 수레를 선택한 것인데 철퇴는 시황제의 수레가 아닌 다른 빈 수레에 맞아 암살은 실패로 돌아갔다. 복수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장량 일행은 도망쳤고, 진시황이 전국적으로 수배령을 내렸다. 장량은 신분을 감추고 하비에 숨었으며 이름까지 바꾸었다.


장량이 하비에 은거하고 있을 때, 장량은 황석공이라는 사람에게 병법을 배웠다고 알려진다. 황석공 이야기는 물론 전설이지만, 장량이 누군가 스승을 두고 병법을 배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때 황석공이 장량에게 주었다는, 소위 ‘태공병법서’라는 것이 강태공(강자아)이 지은 『육도()』라는 설이 있다. 이때 만난 사람 중에 항백도 있었는데, 항백은 항우의 숙부로 살인죄를 저지르고 도망치고 있었다. 둘은 돈독한 사이가 된다.
진이세() 원년(BC.209) 장량은 100여 명 정도의 사람들을 소집하여 그들을 데리고 유방의 진영에 합세했다. 당시에 진나라는 시황제부터 이어져온 폭정으로 나라가 위태로웠고 이세황제(호해)는 사치와 방탕한 생활에 빠져있었다. 이런 와중에 진승 · 오광의 난이 일어나 천하가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다. 유방은 장량의 책략을 받아들이는 한편 가장 중요한 고문으로 우대했다. 장량은 원래 경구()에게 몸을 맡길 생각이었으나 이를 포기하고 유방을 따랐다. 유방은 계책과 간언을 잘 받아들이는 총명한 군주였기에 장량의 잠재력이 잘 발휘될 수 있었다.
진이세 2년(BC.208) 항량은 초나라를 부활시켜 회왕을 군주로 옹립했다. 각 지방의 수령들은 이 대사를 논의하기 위해 설성으로 모였다. 이 모습을 본 장량이 항량에게 말했다. “장군께서는 이미 초나라 왕실의 후손을 찾아서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한나라 왕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왕실의 후손들 중 횡양군() 성()이 어진 이름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를 한왕으로 세우고 한나라의 잔존 세력들을 규합해야 합니다.” 한나라 왕실의 후손인 한성()을 한왕으로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장량은 “한나라의 잔존세력을 규합할 수 있다”며 승낙을 얻어냈다.


지혜로운 계략을'

BC.208년 말, 초 회왕은 유방과 항우에게 군대를 나누어 진을 공격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누구든지 함양(, 지금의 산시(西)성 셴양시)에 먼저 진입하는 자를 왕으로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유방은 무관(, 산시성 상뤄() 단펑현 동남)을 기점으로 영천(, 허난성 중부 지역)과 남양(, 지금의 허난성 난양)을 경유하여 관중 지방으로 진입할 계획을 세웠다.
207년, 유방의 군대는 영천을 공격했다. 한왕과 장량은 유방에 합류했다. 유방은 한왕에게는 남아서 양책을 지키라고 명했고, 장랑에게는 군대를 끌고 남하하도록 명했다. 군대가 남양에 도달했을 때, 남양군수가 완성(, 지금의 허난성 난양() 완청구)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유방은 완성을 공격하기 어렵게 되자 우회하여 계속 서쪽으로 진출하였다.
장량은 이것이 옳지 못하다고 여기고, 유방에게 “서쪽 진출이 긴급한 것은 알지만 이 경로에 진나라 군대가 너무 많으며 험준한 곳을 이미 점거하고 있습니다. 지금 완성을 점령하지 못하면, 완성의 진군들이 뒤에서 공격해 올 것이니 그렇게 되면 앞뒤로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라고 충고했다.
유방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계획을 바꾸어 군대를 이끌고 은밀하게 되돌아갔다. 동이 틀 무렵, 유방의 군대는 이미 완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다. 유방은 적의 전의를 상실시켜 남양태수를 투항하게 했다. 그리고 도시 전체의 백성들을 놓아주었다. 그의 군대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완성을 함락했다. 이후 유방의 군대의 위세가 온 도시에 자자했고, 다른 도시들도 하나씩 항복해왔다.

장량의 간언을'

 유방은 군대를 이끌고 요관()에 도착했다. 요관은 고대 남양과 관중의 교통 요충지로 방어하기는 쉽지만 공격하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진나라는 많은 군대를 보내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유방은 군대 2만 여 명을 친히 인솔하여 공격을 강행하고자 했는데 장량은 “현재 진나라 군대가 너무 강대하니,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라며 만류했다. 대신 장량은 유방에게 하나의 묘책을 제시했다.
“요관을 지키는 수장이 도축업자의 아들인데, 이런 사람들은 재물만 있으면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선봉부대를 보내 5만 명의 군량과 급료를 준비하게 하고, 또한 주위 산에 수많은 깃발을 세워 마치 많은 병사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다음 다시 돌아와 역이기를 보내 금은보화를 주고 타이르면 일은 성공할 것입니다.”
유방은 그 계획을 따랐고 요관의 장수는 항복하여 자신들도 동참하겠다고 했다. 유방은 기뻐하였지만 장량은 그들이 다시 불복하고 반란을 일으킨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냉정히 판단한 후 요관을 다시 기습 공격할 것을 진언했다. 유방이 이를 듣고 요성을 공격해 쫓아 남전에서 진군을 대패시켰다.
유방의 진군은 수월하게 이뤄져 진이세 3년(BC.207) 10월 패상(, 지금의 산시성 시안 동쪽)에 도착했다. 이때 진이세는 조고에 의해 피살된 후였으며 진왕 자영은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함양에 입성한 유방은 호화스러운 궁전과 아름다운 궁녀, 수많은 보물들을 보았다. 이것들은 본 많은 사람들은 흥분하고 자만하였고 유방도 감정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궁중에 머물면서 부귀를 편히 누리고 싶었다.
장수 번쾌가 목숨을 걸고 유방에게 간언하였으나 유방은 상대하지 않았다. 이에 장량은 유방에게 단호하게 간언하였다. “진왕이 불의를 많이 저질러 그들을 물리치고 함양으로 들어왔는데, 이렇게 된 이상 재난을 뿌리 뽑고 평민처럼 소식하며 검소해야 합니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속담이 있으니 지금 이 충언이 귀에 거슬려도 행해야 합니다.” 유방은 장량의 충고를 받아들여 함양에서 나와 주변에 주둔하였다.

홍문의 연회에서'

한 고조() 원년(BC.206) 항우가 진나라의 군대를 몰살하고 기세좋게 함양으로 진격했다. 이 사실을 들은 유방은 함곡관을 막았다. 이때 항우의 군대는 40만 명이었고 유방에게는 단지 10만 명의 군사들뿐이어서 싸우면 대적하기 힘들었다. 그해 12월, 항우는 신풍과 홍문(鸿)으로 군대를 진주시키고 유방과 승부를 겨루고자 했다. 유방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다.
이때 장량과 일찍이 친분이 있던 항우의 삼촌 항백이 항우가 쳐들어오는 사실을 장량에게 몰래 말해주었다. 장량은 혼자 도망가는 것은 의리에 어긋난다며 유방에게 모든 사실을 알렸다. 유방은 깜짝 놀라며 장량에게 의견을 물었다.
장량은 항우의 군대에 맞서 싸울 수 없으니 싸울 의사가 없음을 항우에게 알려야 한다면서 항백을 데려와 유방과 만나게 했다. 유방은 서로의 자식들을 혼인시키겠다는 약속을 한 뒤 항백을 돌려보냈다. 항백은 항우에게 가서 말했다. “패공은 너에게 맞서 싸우려던 것이 아니라, 도적을 막기 위해 함곡관을 막았던 것이었다. 그들은 싸울 의지가 없어 보인다.” 이에 항우는 유방을 죽일 생각을 거두게 되었다.
다음 날 유방은 백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항우에게 찾아가 사죄하였다. 이때 장량도 동행했다. 하지만 범증은 유방을 죽이고자 하였다. 연회 중에 범증은 항우에게 여러 번 눈짓을 보내 유방을 없애라고 했지만 항우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이에 범증은 항장에게 은밀하게 “검무를 추는 척 하며 유방을 없애라.”고 명령했다. 항장은 칼춤을 추면서 유방을 위협하였다.
이를 본 항백이 유방을 보호하기 위해 그에 맞서 검무를 추기 시작했으나 상황이 매우 급박했다. 이를 눈치 챈 장량은 번쾌를 불러 지혜롭고 재빠르게 이 사태를 수습하고 유방을 피신시켰다. 이 술자리가 유명한 홍문연이다. 『사기』가 이와 관련하여 “이날 번쾌가 병영에 달려 들어가 (항우를) 나무라지 않았더라면 (유방의) 과업은 거기서 끝났을 것이다”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유방에게 돌아가다'
장량은 조국 한나라의 부활이 목표였다. 그래서 파촉 지방으로 떠나는 유방과 함께 갈 수 없었다. 장량은 포중(, 지금의 산시(西)성 바오청()현)까지 유방을 배웅하러 나왔는데, 이때 항우의 의심을 없애기 위해 절벽 등 여러 군데에 설치된 잔도(, 절벽 사이에 임시로 놓은 다리)를 모두 불태워 버리라고 권하였다. 이는 또한 기습공격을 막기 위함이었다.
항우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분노하여 유방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장량은 이 점을 일찍이 예측하고 제왕(전영이 모반을 꾀한다는 소식을 항우에게 흘림으로써 항우의 주의를 동쪽으로 돌렸다. 유방은 이를 틈타 회복기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후 항우는 한왕 성을 죽이고, 한을 부흥시키려는 장량의 꿈을 짓밟아버렸다. 장량은 항우로부터 탈출하여 유방에게 돌아갔고, 유방은 그를 성신후()에 봉했다.


무찌를 방안을'

한 고조 2년(BC.205) 소하의 추천으로 한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그의 계책에 따라 한중을 나온 유방은 인접 지역의 항복을 받아 56만 대군을 집결시켜 항우를 정벌하고자 했다. 초나라의 본거지인 팽성까지 점령했던 유방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항우의 공격으로 크게 패하고 밀려나게 된다.
유방은 근심걱정이 가득한 모습으로 “난 관동지방은 필요 없다. 누구든 촉을 무찌르는 공을 세우는 자에게 관동지방을 나누어 줄 터인데, 누가 좋겠는가?” 하고 물었다. 장량은 “구강왕() 경포(영포)는 초나라의 맹장인데, 지금은 초왕과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상태고, 팽월은 제왕 전영을 도와 양나라 땅에서 항우에게 대항했으니, 이 두 사람을 부르면 될 것입니다. 또한 대왕의 장수 중에서는 오직 한신만이 대사를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 사람에게 땅을 나누어야 초나라를 무찌를 수 있습니다.”라고 진언했다.
유방은 이 말을 듣고 경포를 즉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팽월에게도 계속하여 연락을 취했다. 또한 위표가 자신을 배반하자, 한신을 보내 그를 격파하고 북벌에 나설 채비를 하였다.
한 고조 3년(BC.204), 초나라 군대가 형양(, 지금의 후난성 헝양)에서 유방을 둘러싸고 보급로를 끊어버렸다. 유방은 굉장히 초조해 하며 신하들에게 좋은 계책이 있는지를 물었다. 이때 역이기가 계책을 내놓았다. 역이기는 6국의 후예들을 제후로 삼아 과거의 봉건제를 부활시키자는 계책을 내세웠다. 장량이 뒤늦게 이를 듣고 매우 놀라며 다음과 같은 근거들을 들며 이 의견에 반대했다.
첫째, 유방은 현재 항우를 금방 제압할 수 없고, 둘째, 당장 항우를 잡기 어려우며, 셋째, 지금 당장 유방은 능히 성인의 분묘를 새로 쌓고 현인이 살았던 마을 어귀에서 그의 덕을 칭송하며, 재능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문 앞을 지나며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없다. 넷째, 유방은 지금 능히 관곡에 있는 식량과 금품을 꺼내 백성들에게 모두 나누어줄 수 없으며, 다섯째, 현재 유방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학문과 법령으로 세상을 다스리며 무기의 사용을 금할 수 없다.
여섯째, 전쟁에서 사용한 말들을 풀어주어 그것들을 다시는 전쟁에 쓰지 않을 수 없고, 일곱째, 소들을 방목하여 군수품과 군량미를 운반하는 일을 멈출 수 없다. 여덟째, 6국을 복국시켜 그들의 후손을 다시 제후왕으로 세우면 선비들은 각각의 주인을 섬긴다며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게다가 강대한 초나라를 따를 것이다.
장량은 이 여덟 가지 이유를 들며 봉건제를 반대했다. 이 말을 들은 유방은 역이기에게 “형편없는 유생 하나 때문에 하마터면 대사를 그르칠 뻔했다!”라며 격노하였다. 그러고는 각 제후들에게 줄 인장들을 다시 없애라고 명했다.

파촉 지방을 다스리게 된 유방'

항우는 스스로 초나라의 왕이 되어 팽성(, 지금의 장쑤성 시저우(西)시)에 성도를 정했다. 그는 18명을 제후왕에 봉하고 영토를 할양해주었다. 회왕은 “먼저 관중에 진입하는 자에게 관중왕의 자리를 내리겠다.”라는 약속을 어기고 유방에게 외지고 황량한 파촉(, 지금의 쓰촨 지방) 지방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왕()이라고 불렀다. 또한 항우는 관중 지방을 세 구역으로 나누어 자신에게 항복한 진나라의 장수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유방의 북상을 막게 했다.
유방은 매우 분노하여 항우를 공격하고 싶었으나 소하와 장량이 말렸다. 유방은 장량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각종 재물을 장량에게 주었는데, 장량은 이것들을 항백에게 주며 촉 지방 뿐 아니라 한중(, 지금의 산시(西)성 한중시) 지역까지 유방에게 주도록 설득했다. 그리하여 한중 역시 유방의 손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은거에 들어간 장량

한 고조 5년(BC.202), 유방은 정식으로 황제로 즉위하여 한 고조가 되었다. 그리고 연회를 열어 그동안 수고한 신하들의 공로를 치하했다. 장량은 직접 칼을 들고 전쟁터에서 세운 공이 없었지만, 유방은 친히 장량의 공을 언급하며 칭찬하며 제나라 땅 중 3만 호를 직접 골라서 봉읍으로 갖게 해주었다. 그러나 장량은 이를 거절하였다. 공을 유방에게 돌리고 자신은 단지 유방과 장량이 처음 만난 유() 땅을 봉지로 갖고 유후()가 되었다.
원래 유방은 낙양(, 지금의 허난()성 뤄양시)에 수도를 세우려고 하였는데 장량은 이에 반대했다. 장량은 낙양이 지리적인 이점은 가지고 있지만 토지가 척박하고 적의 침입에 취약함을 이유로 들어 낙양 천도를 반대했다. 유방은 이 말을 듣고 관중을 수도로 삼았다. 장량에게는 이전부터 병세가 있었는데, 유방이 관중에 들어가고부터 병을 구실로 삼아 은거하며 나오지 않았다.

항우의 자살

유방의 별동대 대장 한신은 위(), 대, 조(), 연나라에 이어 제나라까지 평정하려 하고 있었는데, 자신을 제나라의 임시 왕으로 봉해달라고 유방에게 청하였다. 유방은 이에 대노하여 한신을 공격하려 했으나, 옆에서 장량이 한신이 외부에서 병사를 이끌고 있으니 일단은 자극하지 말라고 말렸다. 이 말을 듣고 유방은 입장을 바꾸어 임시가 아니라 정식으로 왕을 하라며 한신을 제왕에 봉했다. 그러고는 한신에게 초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한신은 제나라 땅에서 계속해서 초의 군대를 습격했는데 초한대전의 승패를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팽월 또한 몇 번이고 초군의 군량미를 차단하여 초군의 상황이 어려워졌고, 항우는 결국 유방의 부친, 아내, 딸을 구금하고 유방과 강화를 맺고자 하였다. 양측은 결국 홍구()를 경계로 천하를 반으로 나누기로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래서 동쪽은 초나라의 땅, 서쪽은 한나라의 땅이 되었다. 이때가 한 고조 4년(BC.203)이다.
장량과 진평은 천하통일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며 항우의 뒤를 치자고 제안했고, 팽월과 한신에게도 연락하여 협공을 명하였는데 팽월과 한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끝내 유방은 초나라의 반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하고 말았다.
장량은 이 두 명의 상황을 분석하기를 “한신과 팽월이 오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들은 초왕이 없어지면 그들의 지위가 흔들릴까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냥이 끝나면 개를 삶아먹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라며 계속 그 둘을 회유할 것을 건의했다. 장량의 설명을 들은 유방은 계속해서 그 두 명을 회유하였고, 그들은 마침내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함께 항우를 공격하고자 해하로 모였다. 한신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 군대와 격돌하였고,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어 초군을 대파하자 항우는 달아나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황제의 스승되다'
한 고조 10년(BC.197) 유방은 태자 책봉 문제로 여후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유방은 척() 부인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 하였다. 즉 원래의 태자 유영(후에 혜제가 됨)을 폐하고 새로 태자를 임명하겠다는 뜻이었다. 대부분의 신하들은 이에 비판적이었지만 유방이 너무 단호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여후는 초조해하다가 자신의 오빠인 여택을 장량에게 보내 자문을 구했다.
장량은 처음에 황실의 일이라며 거절하였는데, 여후가 너무나도 간곡하게 부탁을 해오는 바람에 계책을 알려주었다. 바로 유방이 초빙하고자 그렇게 노력했던 상산사호라는 은자들을 초빙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을 데리고 와 태자 옆에 두면 황제를 놀라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여후는 그 즉시 많은 재물을 써서 상산사호를 초빙하였다. 유방은 이를 보고 결국에는 태자를 바꾸는 일을 포기하였다.
장량은 이후에도 황제를 도와 계책을 내거나, 인재를 천거하는 등 유방을 여러 방면에서 도왔다. 『사기』 「유후세가()」에 유방이 “무릇 군 막사에서 군사를 운용하고, 천리 바깥의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것은 내가 자방(장량)만 못하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장량은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한나라의 재상이었다. 한나라가 멸망하고 원수를 갚고자 하였고 천하를 진동시켰다. 지금은 이 세 치 혀로 황제의 스승이 되었고, 만호의 봉읍을 받고 지위는 열후에 올랐으니 나는 이미 매우 만족한다. 이제는 세상사 모두 잊고 적송자의 뒤를 따라서 노닐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한 고후() 2년(BC.186) 장량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문성후()라 했다. 한신, 소하와 더불어 한나라 건국의 3걸인 ‘한초삼걸()’ 또는 ‘서한삼걸’로 불리며, 후인들의 그의 책략이 출중한 것을 기리어 그를 ‘모성()’으로 받들었다.

유적

장량의 묘가 중국 곳곳에 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허난()성 란카오()현, 장쑤()성 쉬저우()시, 후난()성 장자제시()의 청암산(), 산둥()성 웨이산()현 등에 장량의 묘로 전하는 무덤들이 있다. 이 중 산둥성 웨이산현에 있는 묘는 문화대혁명의 와중에 파괴되었다가 복구되었다.

자료

  • 『사기(史記)』 「유휴세가」 『한서(漢書)』 「장량열전」 「한기삼」
  • 『사기(史記)』 「고조본기」 『자치통감(資治通監)』  『사기(史記)』 「항우본기」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