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 , 西施. Xī Shī.
중국 춘추시대 월국(越國)의 미녀. 중국의 4대 미녀 중 한명으로 손꼽히며 부차에게 접근하여 오나라가 멸망하게 하였다.
고사성어 ; | 효빈(效顰), 빈축(嚬蹙), 동시빈축(東施嚬蹙), 동시효빈(東施效顰), 침어(沈魚) |
---|
나무꾼의 딸로 저라산(苧羅山) 자락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며 자세한 성장배경은 알려진 것이 없다. 평범한 집안에서 출생하였지만 뛰어난 미모를 타고났기에 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연정을 품었다고 전한다.
그녀가 살았던 마을에서 절세의 미녀로 소문이 나 같은 마을에 사는 여자들은 무엇이든 서시의 흉내를 내면 아름답게 보일 것이라 생각했고 지병으로 앓던 심장병의 통증으로 찡그리는 서시의 얼굴까지 흉내를 냈다고 한다. 눈살을 찌푸린다는 의미의 서시효빈(西施效嚬), 서시빈목(西施嚬目) 서시가 가슴앓이를 한다는 의미의 서시봉심(西施奉心)이라는 말도 이러한 정황에서 유래되었다. 모두 본질을 망각하고 맹목적으로 남을 따라한다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오(吳)나라에 패망한 월왕(越王) 구천(勾踐)의 충신인 범려(范蠡)가 서시를 데려다가, 호색가인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바치고, 서시의 미색에 빠져 정치를 태만하게 한 부차를 마침내 멸망시켰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오나라가 멸망하고 부차에 대한 죄책감으로 강에 빠져 자살했다고도 하며 자신을 요부로 훈련시킨 범려와 함께 제나라로 가 그곳에서 장사를 통해 큰 재물을 모았다고도 전해진다.
미인 대명사
춘추시대 말기 월나라 저라산 출신이다. 원래 이름은 시이광(施夷光)이며, 이광(夷光), 서자(西子), 완사녀(浣沙女)라고도 일컬었다. 미인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 4대 미녀(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인물이다.
오(吳)나라에 패망한 월왕(越王) 구천(勾踐)의 충신인 범려(范蠡)가 서시를 데려다가, 호색가인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바치고, 서시의 미색에 빠져 정치를 태만하게 한 부차를 마침내 멸망시켰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오나라가 멸망하고 부차에 대한 죄책감으로 강에 빠져 자살했다고도 하며 자신을 요부로 훈련시킨 범려와 함께 제나라로 가 그곳에서 장사를 통해 큰 재물을 모았다고도 전해진다.
의문 되는 실존 여부
서시에 대한 기록 중 공통된 사항은,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원한을 갚기 위해 미인계를 썼을 때 선발된 미녀이며, 오나라로 보내져 부차의 총애를 얻고 그가 사치와 향락에 빠지게 만들어 결국 오나라 멸망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의행적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적지 않아 혹자는 그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실제로 『사기(史記)』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에는 그녀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일화
그녀는 어릴 때부터 미인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마을 처녀들이 서시의 행동을 따라 하곤 했는데, 심지어 서시가 배가 아파 찡그리는 것까지 따라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효빈(效顰)’이란 단어가 생겼다. 찡그리는 것을 본받는다는 뜻이다.
‘빈축(嚬蹙)’이란 단어도 파생되었는데, 역시 찡그린다는 뜻이다. 이로써 훗날 다른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언행을 비유할 때 ‘빈축을 산다’고 표현하게 되었다. 동쪽 마을에 살았던 동시는 서시가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따라 했는데, 여서 ‘동시빈축(東施嚬蹙)’ 또는 ‘동시효빈(東施效顰)’이란 사자성어가 파생되었다.
그녀가 시내에 빨래하러 오면 시냇물에서 헤엄치던 물고기들이 그녀에 미모에 넋을 읽고 바닥으로 가라앉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여서 물고기도 가라앉히는 서시의 미모를 가리키는 ‘침어(沈魚)’라는 별명이 나왔다.
죽음에 관해서
그녀의 죽음에 관해서는, 오나라가 망한 뒤 연인이었던 범려와 함께 도망쳐서 장쑤성 우시시에 있는 태호 안에 있는 호수 여호(蠡湖)에서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는 설과 오나라 사람들이 나라를 망친 요물이라 하여 강에 빠뜨려 죽였다는 설, 부차를 사랑하게 되어 그가 죽자 따라 죽었다는 설 등이 전하는데, 첫 번째 설을 전하는 기록이 가장 많다.
빨래하던 여인 오나라 멸망킴
여러 기록에 나타나는 공통점을 추려 그녀의 일생을 간략하게 복원하면 다음과 같다.
살았던 마을이 동서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녀는 서쪽에 살았기 때문에 이름을 서시라 했다. 동쪽 마을에 사는 동시(東施)도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나무꾼이었고 어머니는 빨래를 직업으로 삼았는데, 빨래하는 직업을 완사(浣紗)라 했다. 서시도 늘 시내에 나가 빨래를 했는데, 이 때문에 서시의 고향 마을의 시내를 완사계(浣沙溪)라 부른다.
오왕(吳王) 부차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고 3년 동안 부차의 시중을 들다가 귀국한 월왕(越王) 구천은 와신상담하며 복수의 칼을 갈았다. 이때 범려와 대부(大夫) 문종 등이 미인계를 권하여 전국적으로 미인을 선발하게 되었다. 미인을 찾던 문종은 서시를 발견해 궁으로 데려왔고, 춤과 노래 등을 가르친 후 오왕 부차에게 보냈다.
부차는 서시의 미색에 사로잡힌 나머지 나랏일을 게을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충신 오자서의 충고를 무시하고 결국 그를 자결하게 하는 등 오만한 정치를 일삼다가 결국 월왕 구천에게 망하고 말았다.
유적
고향으로 알려진 저장성 사오싱시 주지시에 서시 마을을 비롯하여 서시의 사당, 완사계 등 꽤 많은 유적이 남아 있으며, 매년 기념 축제도 열리고 있다.
서시는 기원전 5세기 경 춘추말기의 저장 회계(会稽 : 현재의 紹兴 诸曁市 부근) 출신으로 본명은 시이광(施夷光)이며 서자(西子)라고도 불렸다. 영라산(苧萝山) 아래쪽에는 2개의 촌락이 동서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대부분이 시(施) 씨로 시이광이 서촌(西村)에서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를 서시(西施)라고 칭하였다.
오(吴)에 패한 월왕(越王) 구천(勾踐)은 회계의 치욕을 씻으려고 대부(大夫) 종(種)의 책략을 이용하여, 두 명의 미녀인 서시와 정단(郑旦)을 데려와 악사(乐師)로 하여금 서시에게 가무와 몸가짐 등을 가르치게 하였으며 3년 후 재상 범려(范蠡)를 사신으로 보내 오왕 부차(夫差)에게 바쳐 부차를 미혹시키려 하였다.
많은 백성들이 서시의 미모를 한번 보고자 몰려들었고 역관(驿馆)으로 몰려가 그녀를 맞이하였으며 거리에 인파가 가득하였다고 전한다.
당시의 이야기에 따르면 서시를 데려간 월(越)의 대부(大夫) 범려는 미인을 보려하는 사람은 돈을 내야한다고 하며 역관(驿馆) 내에 돈궤를 마련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가득 차고 넘쳤으며 3일간 거두어들인 돈을 월로 가져가 국가재정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이야기에 따르면 서시를 데려간 월(越)의 대부(大夫) 범려는 미인을 보려하는 사람은 돈을 내야한다고 하며 역관(驿馆) 내에 돈궤를 마련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가득 차고 넘쳤으며 3일간 거두어들인 돈을 월로 가져가 국가재정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범려는 오왕을 만나 꿇어앉으며 말하기를 동해의 '적신 구천이 대왕의 은덕에 감복하여 나라 안을 뒤져서 가무에 능한 여자를 구해서 왕께 바치오니 하녀로라도 쓰시기 바랍니다‘라 하자 오자서(伍子胥)가 오왕(吴王)에게 진언하기를 ‘신이 듣기에 하(夏)는 말희(妺喜)로 인해 망하였고, 은(殷)도 달기(妲己)로 인해 망하였으며 주(周)가 망한 것도 포사(褒姒)로 인한 것이니 무릇 미인이라는 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요인이니 청컨대 받으시면 아니 될 것입니다.’라고 간청하였으나 오왕은 이를 듣지 않고 바로 서시를 받아들였다.
오왕은 고소대(姑苏臺)에 춘소궁(春宵宮)을 짓고 영암산(灵岩山) 위에 관왜궁(馆娃宮)을 지었으며 큰 연못을 파서 서시로 하여금 놀게 하는 등 부차는 서시를 매우 총애하며 국사를 등한시 하여 구천이 오(吴)를 칠 수 있는 충분한 준비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오왕은 고소대(姑苏臺)에 춘소궁(春宵宮)을 짓고 영암산(灵岩山) 위에 관왜궁(馆娃宮)을 지었으며 큰 연못을 파서 서시로 하여금 놀게 하는 등 부차는 서시를 매우 총애하며 국사를 등한시 하여 구천이 오(吴)를 칠 수 있는 충분한 준비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서시의 종말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설이 있는 데 하나는 오(吴)가 멸망한 후에 구천의 부인이 서시의 미모를 보고 구천이 그녀를 좋아하게 될까 두려워하여 오(吴) 나라 사람들에게 서시가 나라를 멸망케 한 요부라고 믿게 하면서 그녀를 자루에 넣어 강물에 빠트려 죽게 하였으며 후에 강에서 조개가 발견 되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서시의 혀라고 하였으며 이로 인해 조개가 서시의 혀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다른 하나는 서시와 범려가 사랑에 빠져 오국(吴国)이 말망한 후 범려가 월왕(越王)의 봉작을 포기하고 밤중에 서시를 데리고 사라졌으며 타이호(太湖, 태호)에서 세상을 피해 여생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현재 저장 사오싱 제기시에는 서시전(西施殿), 월국고도성문(越国古都城门) 등의 유적이 남아 있고 시후는 서시의 이름을 따서 서자호(西子湖)라고도 불리며 북송 시인 소동파(苏东坡)가 칠언절구(七言絕句)로 시호(西湖)와 서시에 대한 유명한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현재 저장 사오싱 제기시에는 서시전(西施殿), 월국고도성문(越国古都城门) 등의 유적이 남아 있고 시후는 서시의 이름을 따서 서자호(西子湖)라고도 불리며 북송 시인 소동파(苏东坡)가 칠언절구(七言絕句)로 시호(西湖)와 서시에 대한 유명한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문헌
- 「월어(越語)」 『묵자(墨子)』 「화식열전(貨殖列傳)」 『사기(史記)』
- 「조세가(趙世家)」,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월절서(越絶書)』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