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려. 范蠡.
중국 춘추시대 말기의 정치가. 월나라 왕 구천을 섬겼으며 오나라를 멸망시킨 공신이었다. 이후 오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가 재상에 올랐다.
춘추 시대 초(楚)나라 완(宛) 사람. 월(越)나라의 대부(大夫)로, 이름은 여(蠡)고, 자는 소백(少伯)이다. 완령(宛令) 문종(文種)의 친구로, 그를 따라 월나라로 와 월왕 윤상(允常)을 섬겼다. 구천(句踐)이 이어 등극하자 그의 모신(謀臣)이 되었다. 월나라가 오나라에 패배하자 문종은 나라를 지키고 그는 오나라에 화해를 요청하여 구천을 따라 3년 동안 오나라에서 신복(臣僕)으로 있었다.
귀국해서는 문종과 함께 부국강병에 최선을 다했다. 구천 15년 오나라의 도성(都城)을 격파했다. 22년 오나라를 포위한 뒤 3년 뒤에 멸망시켰다. 상장군(上將軍)에 올랐다. 높은 명성을 얻은 뒤에는 구천과 오래 함께 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벼슬을 내어놓고 미인 서시(西施)와 더불어 오호(五湖)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고 한다.
자 소백(少伯). 초(楚)나라 완(宛-현재 하남성 남양현)에서 태어났다. BC 494년 월(越)나라 왕 구천(句踐)이 오(吳)나라 왕 부차(夫差)에게 패하였을 때 구천을 따라 오나라에 노부로 종사하였다가 그의 지략으로 목숨을 건져 구천과 함께 월나라로 귀국하였다.
오나라 부차에게 미인을 보내 부차를 주색에 빠지게 했던 절세미인 서시와 범려의 사랑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이후 범려는 구천을 상담(嘗膽)하게 하고 월나라를 부흥시켜 20여 년 뒤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범려는 월왕 구천을 모시면서 고생하며 온 힘을 다했다. 구천과 20년 넘게 깊게 고민하여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회계에서의 치욕을 갚았다. 회수 이북으로 군대를 출병시켜 제나라, 진나라를 압도함으로써 중국을 호령하고 주 왕실을 높였다. 구천은 이로써 패주가 되고 범려는 상장군으로 불렸다.
귀국한 뒤 범려는 큰 명성 아래서는 오래 머무를 수 없고, 구천이란 사람이 근심은 함께 할 수 있어도 편안함을 함께 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구천에게 다음과 같은 사직서를 썼다.
“신이 듣기에 왕께 근심이 있으면 신하는 수고를 다하고, 주군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과거 군왕께서 회계에서 치욕을 당하셨음에도 죽지 않은 것은 이 일을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설욕을 했으니 신은 회계의 치욕에 대한 죽음을 청하옵니다.”
범려는 어려울 때가 아닌 맹주로서 구천을 더이상 섬길 수 없는 군주라고 생각하여, 가족을 데리고 떠나게 되는데 범려는 월나라를 떠나면서 그의 친구에게 토사구팽(兎死拘烹)이라는 글귀를 남겼다고 전한다. 월나라를 떠난 범려와 그의 가족에 대한 행적에는 여러가지 설이 많지만 모두 불확실하다. 제(齊)나라로 갔다는 설은 범려가 이름을 치이자피(鴟夷子皮)라 고치고, 두아들과 함께 해변(海邊)을 일구어 농사를 짓고 살았으며 거부가 되었다고 전한다.
제나라에서는 그의 현명함을 듣고, 재상(宰相)으로 삼았다. 하지만 얼마 뒤 재물을 모두 친지 ·향당(鄕黨)에게 나누어 주고 재상자리를 버리고 떠났다고 한다. 당시 교통 ·상업의 중심지였던 도(陶:山東省 定陶縣)로 가서 도주공(陶朱公)이라 칭하고 상업에 종사하였다.
나중에 스스로 치이자피(鴟夷子皮)라 일컫고 재물을 모았다가 그 재물을 모두 흩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다시 도(陶) 땅에 가서 호를 도주공(陶朱公)이라 일컫고, 수만 금(金)을 모아 대부호가 되었다. 왕이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금으로 그의 형상을 새기게 하여 조정에서 예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치이자피나 도주공이 그와 동일한 인물이었는지는 의심스러우며, 사마천(司馬遷)이 이전(異傳)을 모아서 그의 전기를 지어 낸 것이 아닌가 한다. 저서에 『범려』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구천은 “내가 나라를 나누어 그대에게 주겠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대에게 벌을 주겠소.”라고 했다. 범려는 “군주는 명령을 집행하고 신하는 뜻을 실행합니다.”라 하고는 가벼운 패물 등을 챙겨 식구, 노복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구천은 회계산을 범려의 봉읍으로 삼아 기념했다.
범려는 바닷길로 제나라에 도착해서는 성과 이름을 바꾸어 스스로를 ‘치이자피(鴟夷子皮)’라 했다.
범려는 장사로 다시 거만(巨萬)의 재산을 모았다고 전해진다. 치이자피나 도주공이 그와 동일인물이었는지는 의심스러우며, 사마 천(司馬遷)이 이전(異傳)을 모아서 그의 전기를 지어 낸 것이라고 추측되기도 한다.
월나라의 충신이자 천재 전략가이며 이재가(理財家). 천문·역법·지리·군사·전략·재정 등 모든 방면에 두루 통달했던 박학지사(博學之士)이자 희대의 경세가(經世家). 월왕 구천을 보필하는 데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해 마침내 오랜 숙원이었던 오나라 멸망을 실현한 뒤 토사구팽(兔死狗烹)의 세태에 따라 구천이 오나라 멸국 공신들을 탄압할 것을 미리 감지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처자와 함께 제나라로 떠났음.
이후 치이자피(鴟夷子皮)라고 개명하고 제나라 도산(陶山)에서 목축업을 하여 천금(千金)을 벌어들이는 탁월한 이재(理財), 경영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춘추 전국 시대의 손꼽히는 거부(巨富) 대실업가가 되었음. 당대인들이 이로 인해 그를 도주공(陶朱公)이라고 존칭했으며 후대에도 그 특유의 이재술(理財術)은 전통 경제학의 묘책으로서 널리 회자되었음. 사마천(司馬遷)이 저술한 『사기(史記)』 중의 1편인 「화식열전(貨殖列傳)」에도 도주공의 이재에 관해 별도의 지면을 할애하여 소개하고 있다.
해변에서 힘들게 온 힘을 다해 농사를 지었는데 아들과 함께 생산에 종사하여 얼마 되지 않아 수십 만의 재산을 모았다. 제나라 사람들이 범려의 유능함을 알고는 재상감으로 여겼다. 범려는 “집에서는 천금의 재산을 이루고, 벼슬로는 경상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보통 사람으로는 갈 데까지 간 것이다. 존귀한 명성을 오래 갖고 있으면 상서롭지 못하다.”라고 탄식하고는 곧 재상의 도장을 돌려보내고 재물을 다 나누어 친구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귀한 보물만 가지고 몰래 떠났다.
도(陶)나라라는 곳에 와 보니 천하의 중심이자 교역의 통로로 장사를 하면 치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자칭 ‘도주공(陶朱公)’으로 칭하고 다시 아들과 함께 농사와 목축을 하며 물건을 사두었다가 때를 기다려 다시 팔되 1할의 이윤을 남겼다. 오래 지나지 않아 억만의 재산을 모으니 천하가 도주공을 칭송했다.
도주공이 도나라에 살면서 막내아들을 낳았다. 막내아들이 장성할 무렵 도주공의 둘째아들이 사람을 죽여 초나라의 감옥에 갇혔다. 도주공이 “사람을 죽였으니 죽는 것이 도리에 맞다. 그러나 내가 듣자 하니 천금을 가진 집의 자식은 저자거리에서 죽지 않는다고 한다.”라 하고는 막내아들에게 가서 (형을) 보게 했다. 그리고 황금 천 일(鎰)을 마대자루에 넣어 소가 끄는 마차에 실어 가져가게 했다. 막내아들을 막 보내려는데 도주공의 큰아들이 한사코 자신이 가겠다고 나섰다. 도주공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남은 “집안의 장남을 집안일을 돌본다 해서 ‘가독(家督)’이라 합니다. 지금 동생이 죄를 지었는데 아버님께서 저를 보내지 않고 막내를 보내는 것은 제가 불초해서입니다.”라며 자살하려고 했다. 그 어머니도 “지금 막내를 보낸다고 해서 둘째를 꼭 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닌 데다, 그보다 앞서 큰아들을 잃게 생겼으니 어찌 합니까?”라고 했다. 도주공이 하는 수 없이 큰아들을 보내면서 편지 한 통을 써서 오랜 친구인 장생(莊生)에게 주라 하고는 “도착하면 바로 장생에게 천금을 드리고 그가 하는 말을 잘 듣되 이 일을 놓고 다투는 일이 없도록 조심 하거라!”라고 했다. 큰아들은 떠나면서 자기도 개인적으로 수백 금을 챙겼다.
초나라에 도착했다. 장생의 집은 성 근처였는데 잡초가 집 주위로 잔뜩 자라고 있었고 집안이 몹시 가난했다. 그러나 큰아들은 편지와 천금을 건넸다. 장생은 “여기 머무르지 말고 빨리 가라하고, 또 동생이 (감옥에서) 나오거든 그 자초지종을 묻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 큰아들은 장생의 집에서 떠나왔지만 다시 장생 집에 가지 않고 몰래 머무르면서 자기가 가져간 황금을 초나라 권력자에게 바쳤다.
장생이 누추한 곳에 살고 있었지만 청렴하고 강직한 것이 나라에 알려져 초나라 왕 이하 모두가 그를 스승처럼 존중했다. 도주공이 금을 보내오자 그것을 받으려는 뜻이 아니라 일이 이루어진 뒤 다시 돌려주어 신의를 보이려 했다. 그래서 금을 받자 부인에게 “이건 도주공의 금이요. 갑자기 병이 나서 미리 알리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나중에 다시 돌려 줄 것이니 건드리지 마시오.”라고 했다. 도주공의 큰아들은 장생의 생각을 모르고 그에게 별다른 방법이 없는 것으로 여겼다.
장생은 틈을 봐서 (궁으로) 들어가 초왕을 만나 “어떤 별이 어떤 곳으로 이동했는데 이는 초나라에 해가 됩니다.”라고 했다. 왕이 평소 장생을 믿기에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소?”라고 했다. 장생이 “오직 덕을 베푸셔야만 이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라 했다. 초왕이 “선생께서는 돌아가 편히 계십시오. 과인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왕이 곧 사신을 시켜 금, 은, 동 삼전(三錢)의 창고를 봉쇄했다. (큰아들에게 뇌물을 받은) 초나라 권력자는 깜짝 놀라 도주공의 큰아들에게 “왕이 사면령을 내릴 것입니다.”라고 하니 “어찌 그렇게 되었습니까?”라고 물었다. “왕께서 사면령을 내리실 때면 늘 삼전의 창고를 봉쇄하시는데 어제 저녁 사람을 시켜 봉쇄했습니다.”라고 했다.
도주공의 큰아들은 사면이 내려지면 동생도 당연히 나올 텐데 천금을 장생에게 주어봤자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장생을 찾아갔다. 장생이 놀라며 “아직 안 갔는가?”라고 했다. 큰아들이 “아직 안 갔습니다. 당초 동생 일로 왔는데 지금 사면이 논의되고 있다 해서 선생께 인사를 드리고 가려 합니다.”라고 했다. 장생은 그가 황금을 다시 가져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자네, 방에 들어가 황금을 가져가게나.”라고 했다. 큰아들은 곧장 방으로 들어가 황금을 가지고 떠나면서 혼자 좋아 어쩔 줄 몰랐다.
장생이 도주공의 아들에게 모욕당한 것이 부끄러워 곧 들어가 초왕을 만나 “신이 일전에 별 이야기를 말씀드렸더니 왕께서는 덕을 베풀어 (하늘에) 보답하려 하셨습니다. 지금 신이 밖에 나가 길에서 하는 말을 들으니 부자 도주공의 아들이 사람을 죽여 초에 갇혀 있는데 그 집에서 금전을 많이 갖고 와서 왕의 측근에게 뇌물을 쓴다고 합니다. 그래서 왕께서 초나라를 아껴서가 아니라 도주공 아들 때문에 사면을 내리려 한다고 말입니다.”라고 했다.
왕은 크게 노하며 “과인이 부덕하기로서니 어찌 도주공의 아들 때문에 은혜를 베푼단 말이오!”라 하고는 명을 내려 도주공의 아들을 죽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사면령을 내렸다. 도주공의 큰아들은 결국 동생의 시신을 가지고 돌아갔다.
도착하니 그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는데 도주공 혼자만 웃으면서 “내가 동생을 죽게 할 줄 알았다! 저 녀석이 동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뭔가를 차마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나와 함께 고생하고 생활의 곤란을 겪어서 재물을 쓸 줄 모른다.
막내 놈은 태어나면서 내가 잘 사는 것을 보고 좋은 마차에 토끼 사냥이나 하고 다녔으니 그 재물이 어디서 오는 줄 모르기 때문에 가볍게 버리고 아까워하지 않는다. 일전에 내가 막내를 보내려 했던 것도 그 놈은 재물을 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큰 놈은 그렇게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그 동생을 죽게 한 것이다. 사물의 이치가 참으로 이러하니 슬퍼할 것 없다. 내가 낮밤으로 둘째의 시신이 오길 기다렸노라.”라고 했다.
범려는 세 번을 옮기고도 천하에 명성을 떨쳤다. 떠난 것만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반드시 명성을 날렸다. 늙어 도나라에서 죽으니 세상에는 ‘도주공’이라 전해온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우(禹)의 공이 크구나! 아홉 개의 하천을 소통시키고 아홉 개의 주를 안정시키니, 지금까지 중원이 편안하도다. 후예 구천(句踐)에 이르러 노심초사하며 끝내 강한 오나라를 멸망시키니 군대가 북으로는 중국에까지 이르러 주 왕실을 받들고 패왕으로 칭했다. 구천을 유능하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대개 우가 남긴 덕이 아니겠는가? 범려가 세 번을 옮기고도 모두 영예로운 이름을 얻어 후세에게까지 남겼다. 신하와 군주가 이러했으니 드러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탄을 했다고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