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6일 화요일

양귀비 . 楊貴妃. Yáng Guìfēi. 楊貴美酒.

양귀비 . 楊貴妃. Yáng Guìfēi.

중국 당나라 6대왕 현종의 총비. 
시대 ; 당나라
출생 - 사망719년 ~ 756년이칭 ; 양옥환(), 양옥노(), 양태진()
당나라 현종(玄宗)의 비(妃). 절세미인에 총명하여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황후 이상의 권세를 누렸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 도주하던 중 살해되었다.

눈동자를 돌리며 한번 웃으면 백 가지 애교가 철철 넘쳐서,()
육궁의 단장한 미녀들, 모두 낯빛을 잃어버렸네.().

수나라 황실의 후예로 태어난 그녀의 본적은 포주() 영락이다. 일설에 따르면 촉주(, 지금의 쓰촨()성 청두()시) 혹은 용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어릴 때 이름은 양옥환 또는 양옥노였다고 한다. 시인들은 양태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촉주에서 사호()라는 벼슬을 지낸 양현염()의 딸이며,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 양현교() 슬하에서 자랐다.
16세가 되던 735년에 당 현종의 아들 수왕 이모()와 혼인했다.
이모의 어머니인 무혜비는 현종이 매우 총애하여 궁중의 예우가 황후에 버금갔는데, 개원() 25년인 737년에 무혜비가 세상을 떠나자 현종이 오랫동안 슬퍼하고 아쉬워했다.
후궁들 중에서는 현종의 마음을 달래줄 사람이 없었는데, 이때 한 신하가 현종에게 수왕비의 자질이 뛰어나고 천하절색의 미인이니 마땅히 후궁으로 들여야 한다고 주청했다.
이에 현종은 그녀를 후궁으로 불러들이게 되었는데, 그녀는 시아버지의 후궁이 된다는 세간의 이목을 두려워하며 현종의 어머니인 두태후()의 명복을 비는 여도사()가 되겠다고 했다. 그녀의 도호()는 태진()이었다.

당 현종, 살기 위해 사랑하던 양귀비를 버리다.


당나라를 대표하는 시인 백거이가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서사시 <장한가>에서 묘사한 양귀비의 죽음이다. 시 속에서 양귀비를 총애하던 황제는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을 외면하며 오로지 피눈물만 흘리는 소극적이고 비겁한 남자일 뿐이다. ‘안사의 난’을 피해 쓰촨으로 도망가던 당나라 6대 황제 현종의 가마가 마외파에 이르렀을 때였다. 호위하던 병사들이 소동을 일으켰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하다고 했던 양귀비가 환관 고력사의 손에 이끌려 죽으러 가는 것을 그저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양귀비는 마외파 인근 불당 앞 배나무에 비단천으로 목을 매어 죽었다. 
자결했다고도 하고 고력사가 죽였다고도 한다. 당시 양귀비의 나이 38세였다.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는 여인, 경국지색() 양귀비의 10여 년 권세는 이렇게 끝이 났다.
나라를 망친 양귀비와 그 일족을 죽이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주저앉은 것이다. 뒤에선 안록산의 군대가 쫓아오고 피난 가마는 조금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다급해진 현종은 병사들의 요구를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양귀비의 일족은 병사들에게 내어주어 주살하게 했고 사랑해 마지않던 총비 양귀비는 내팽개쳤다. 

'안사의 난'을 피해 도주하다' 

자결 아닌 자결로 비극적 종말을 맞다.


서쪽으로 도성 문 백여 리를 나오더니. / 어찌 하리오! 호위하던 여섯 군대 모두 멈추어서네 / 아름다운 미녀 굴러 떨어져 말 앞에서 죽으니 / 꽃비녀 땅에 떨어져도 줍는 이 아무도 없고, / 비취깃털, 공작비녀, 옥비녀마저도. / 황제는 차마 보지 못해 얼굴을 가리고 / 돌아보니 피눈물이 흘러내리네.

천보 14년인 755년에 범양(), 평로(), 하동() 삼진절도사(使)였던 안녹산이 황제를 바로 보좌하고 양국충 일당을 소멸시킨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병사들이 장안(, 지금의 산시(西)성 시안(西)시)으로 들어가자 현종은 양귀비와 양국충을 데리고 촉중(, 지금의 쓰촨()성 청두()시)으로 피난을 떠났다. 일행이 마외역에 이르렀는데 평소 양국충을 증오하던 금군 대장 진현례를 위시한 군사들이 양국충과 양귀비를 죽여야만 움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종은 결국 양국충을 주살하고 양귀비에게는 사약을 내렸다. 이때 양귀비의 나이는 38세였다.
당시의 정경을 백거이는 <장한가>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군사들이 하나같이 움직이지 않으니 어찌 한단 말인가?()
가여운 눈썹 미인, 마외역 앞에서 죽고 말았네.()"

양귀비(양옥환)고아 출신으로 양씨 가문에 양녀가 되었다. 양아버지의 임지()인 쓰촨성[]에서 자랐으며, 17세 때 현종의 제18왕자 수왕() 이모()의 비()가 되었다. 
현종의 무혜비()가 죽자, 황제의 뜻에 맞는 여인이 없어 물색하던 중 수왕비 옥환()이 절세의 미녀라는 소문을 듣고 황제가 온천궁()에 행행()한 기회에 그녀를 보고 총애를 받게 되었다고 전한다. 
현종은 수왕에게 새로운 여자를 아내로 주었고 옥환을 태진()이란 이름의 여도사()로 삼고 현종 가까이에 두었다. 궁중에 들어오자 6년만인 27세 때 정식으로 귀비()로 책봉되었다.
다년간의 치세로 정치에 싫증이 난 황제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궁중에서는 황후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고, 세 자매까지 한국()·괵국()·진국부인()에 봉해졌다.  
6촌 오빠인 양소()는 품행이 나쁜 인물이었으나 현종에게서 국충()이라는 이름까지 하사받았다. 이외 양씨의 많은 친인척이 고관으로 발탁되었고, 여러 친척이 황족과 통혼()하였다. 그녀가 남방() 특산의 여지()라는 과일을 좋아하자, 그 뜻에 영합()하려는 지방관이 급마()로 신선한 과일을 진상()한 일화는 유명하다.

양귀비는 애초 현종의 며느리.
양귀비는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미인 중 한 사람이다.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고 중독시키는 아편 꽃에 양귀비란 이름을 붙인 걸 보면 그녀의 미모는 어지간히도 치명적이었던 것 같다. 
본명은 양옥환이며 잠시 도가에 입문했을 때 법명은 태진()이다. 산시성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쓰촨성 관리이던 숙부 양립의 집에서 자랐다. 양옥환은 노래와 춤에 능하고 미모가 출중해 17세에 당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왕 이모의 비가 되었다. 수왕 이모는 당 현종과 무혜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로 황제계승권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진 수많은 왕자 중 한 명에 불과했다.
당나라 6대 왕 현종. 그의 치세 전반기는 태평성세였지만 양귀비를 만난 후 나라와 백성을 위태롭게 했다.
천보() 4년인 745년에 현종은 수왕 이모를 위씨()에게 다시 장가보내고 그녀를 환속시켜 귀비()로 책봉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26세였고, 현종은 55세였다.
그녀는 노래와 춤에 뛰어났으며 음률에도 밝았다. 또한 재치가 있고 총명하여 현종의 기분을 잘 맞춰주었다. 현종은 매우 기뻐했고, 그녀는 총관후궁의 지위에서 홀로 현종을 모셨다. 모두가 그녀를 황후처럼 대우했는데, 당시 정황을 백거이는 <장한가>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양옥환과 수왕의 사이가 어땠는지는 알순 없지만 별 풍파 없이 양옥환이 수왕과 6년간 결혼생활을 이어간 것을 보면 그다지 나쁜 사이는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 현종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양옥환은 수왕 이모와 천수를 다하며 해로하였을지도 모르고, 당나라도 혼란에 휩싸여 자멸의 길로 걸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타고난 자의 운명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6년간 수왕(현종 아들) 이모의 아내로 살던 스물세 살의 양옥환은 현종 처소의 환관인 고력사의 은밀한 방문을 받는다. 고력사는 총애했던 무혜비가 죽고 나서 외로워하는 현종을 위로하기 위해 중국전역의 미녀들을 백방으로 수소문하였다. 그 중에 수왕 이모의 아내 양옥환이 특히 아름답다고 들은 고력사는 그녀를 현종의 술자리로 불러낸다. 
양옥환은 이 자리에서 음악 애호가였던 현종이 연주하는 가락에 맞춰 자신의 장기인 아름다운 춤을 선보였다. 춤이 끝나기 전에 남녀 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당시 예순을 바라보던 현종의 마음에 사랑의 불길이 당겨진 것이다. 
현종은 양옥환이 아들의 아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아름다운 그녀를 품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망설이는 양옥환을 고력사가 특별히 파견한 궁녀들이 설득하기 시작했고 물량공세와 구애가 이어졌다. 마침내 양옥환은 수왕을 버리고 그 아버지 현종의 여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사랑에 눈이 먼 현종, 정치는 관심 밖....


 황제라 하더라도 주위의 눈은 신경 쓰이는 법. 아들의 아내를 바로 빼앗을 수 없었던 현종은 일단 양옥환을 화산으로 보내 도교의 도사로 입문시킨다. 도가에서는 일단 입문을 하면 그 이전에 있었던 속세의 일들은 다 지워지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현종은 이런 도가사상을 자기의 몰염치한 사랑에 이용했다. 이때 양옥환은 태진이라는 도호를 얻었다. 

현종이 미안해서인지 아들 수왕에게는 위씨 성을 가진 여인과 재혼하도록 주선하였다. 마침내 모든 일이 매끄럽게 처리되고 현종은 꿈에도 그리던 여인을 맞을 수 있게 되었다. 일단 도사를 모셔와 가르침을 받는다는 핑계로 태진궁을 짓고 그곳에 양옥환을 살게 하였다. 이때부터 태진궁은 그들만의 사랑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다. 

양옥환은 27세가 되던 해 귀비 책봉을 받아 양귀비가 되었다. 양귀비는 비록 비의 신분이었지만 현종이 황후의 자리를 비워둔 채 지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황후와 다름없는 귄력을 휘둘렀다. 현종이 양귀비를 맞으면서 당나라는 큰 변화를 맞이한다. 현종은 젊었을 때 꽤나 정치에 소질이 있는 황제였다. 

치세 전반기는 현종의 연호를 따 <개원()의 치()> 라는 칭송을 받으며 중국 역사상 몇 안 되는 태평성세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기나긴 태평성세에 마음이 해이해진 현종은 양귀비를 맞으면서 사랑에 눈이 멀어 정치는 관심 밖의 일이 되고 말았다. 양귀비를 낀 환관과 탐관오리가 득세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백성들의 삶은 급속히 몰락해 민심은 흉흉해졌다.

현종은 양귀비 친인척 대거 등용,


현종에게는 오로지 양귀비뿐이었다. 현종은 양귀비를 위해 누대로 유명한 온천, 화청지에 궁을 짓고 오로지 양귀비와 사랑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양귀비를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꽃. 즉 해어화()라 부르며 양귀비의 아름다움 앞에는 꽃조차도 부끄러워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양귀비가 즐겨 먹는다는 이유로 2천리 밖에서 열리는 과실 여주를 매일 공수해오도록 하였고 양귀비가 원하는 모든 사치를 다 누리도록 해주었다. 더불어 그녀의 친인척을 궁과 관직에 대거 등용하였다. 

양귀비의 세 자매까지 한국()·괵국()·진국부인()에 봉해졌다. 이때 등용된 양귀비의 6촌 오빠 양소는 건달출신의 부도덕한 간신배였지만 현종에게서 국충()이라는 이름까지 하사 받았다. 양국충은 당 현종 말기의 대표적 부패권력이었으며 종내는 안사의 난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다.
양귀비는 현종의 사랑을 영원히 붙잡아 두려고 매번 새로운 화장법을 개발하였고 또 목욕을 즐겨 늘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양귀비는 날씬하고 가녀린 미녀와는 거리가 멀었다. 역사서에는 그녀의 용모를 ‘자질풍염()’이라 하였는데 이는 풍만하고 농염하다는 의미이다. 
양귀비가 총애를 받자 그녀의 가족들도 출세하기 시작했다. 이미 세상을 떠난 그녀의 부친이 태위와 제국공()으로 추증되었고, 숙부는 광록경(祿)으로 봉해졌다. 그녀의 큰언니는 한국부인(), 셋째 자매는 괵국부인(), 여덟째 자매는 진국부인()으로 봉해졌다. 
육촌 오빠인 양섬()은 홍려경()이 되었고, 양기()는 시어사로 봉해진 후 현종의 딸인 태화공주()에게 장가들었다. 또한 육촌 오빠 양국충은 도박을 좋아하는 포악한 인물인데도 고관이 되어 조정에서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현종은 더욱 주색()에 빠졌고, 조정의 정치는 양씨 일당에 의해 부패했다.

통통한 몸매에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졌던 양귀비는 매일 온천물에 몸을 닦고 새로운 화장법으로 미모를 가꾸어 밤이나 낮이나 당 현종을 자신의 침실로 이끌었다. 백거이는 <장한가>에서 양귀비와 현종의 사랑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연꽃 휘장 속에서 보낸 뜨거운 봄밤, 봄밤에 너무 짧아 해가 높이 솟았구나. 황제는 이날 이후 조회에도 안 나오네, 후궁에 미인들은 3천명이나 되었지만 3천명의사랑을 한 몸에 받았네. 금으로 치장한 궁궐에서 화장을 끝내고 기다리는 밤 백옥누각에 잔치 끝나면 피어나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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