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31일 수요일

도선비기. 道詵秘記. 1


도선비기. 道詵秘記.

도선비기의 주인공 도선국사 설화가 아닌 실존 인물.

도선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도선비기'이다 비기 하면 풍수지리설이 떠오르니
도선하고는 뗄레야 뗄수없는 관계라 할수 있겠다.

태조 왕건의 탄생을 예언한 스님이 도선국사 라고 하니
도선국사의 영향을 받은 왕건은 불교를 국가적으로 숭상하니...

고려의  불교가 무진장 발전할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난 설화속에 인물이줄 알았는데 이곳 광양에 와서야 실존 인물이란 사실이 놀랍기도 하다.
영암출신이라고 한다.

실제 영암에선  도선국사가 창건한 옥룡사는 풍수지리상 임금 왕의 명당터라고 한다.
그리고 땅의 기운을 보완하기 위해 도선국사가 심었다는 동백나무가 절 주위를
감싸 안고 있다.

비록 절은 사라지고 없어졌지만 동백나무만이 천년을 넘게 이터를 지키고 있다.
복원을 할려고 해도 관련 자료가 없어 복원은 힘들다고 한다.
대신 도선국사 사상관을 건립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곳에 도선국사 부도탑과 그의 제자 통진대사 부도탑이 있다.
또한 석관에 안치된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도선국사라고 한다.

화장의 불교 장례에서 보기드문 일이라고 한다.





도선, 道詵.


속성 김(). 호 옥룡자(). 전남 영암() 출생. 15세에 지리산 서봉인 월류봉(화엄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불경을 공부하고, 4년 만인 846년(문성왕 8) 대의()를 통달, 신승()으로 추앙받았다. 
이때부터 수도행각에 나서 동리산()의 혜철()을 찾아가 무설설무법법()을 배웠으며, 23세에 천도사(穿)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혜철(惠徹)에게서 무설설무법법(無說說無法法)을 배웠다. 
그의 음양지리설, 풍수상지법(風水相地法)은 조선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저서에 《도선비기(道詵秘記)》등이 있다.
운봉산()의 굴속에서 참선삼매()한 후, 태백산() 움막에서 고행하였으며, 전라도 희양현() 백계산() 옥룡사()에 머물다가 죽었다. 
헌강왕의 초빙으로 궁중에 들어가 왕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음양지리설()·풍수상지법()은 고려·조선 시대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친 학설이다. 
죽은 후 효공왕이 요공국사()라는 시호를, 고려 현종은 대선사(), 숙종은 왕사()를 추증했고, 인종은 선각국사()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의종은 비를 세웠다. 도선에 관한 설화가 옥룡사 비문 등에 실려 있다.
저서에 《도선비기()》 《도선답산가()》 외에도, 《송악명당기()》 등이 전한다.
스님의 법명은 도선, 자는 옥룡, 호는 연기이며 성은 김 씨다. 낭주(현 전남 영암) 구림촌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 김 씨가 처녀 시절 어느 해 겨울, 우물 속의 오이를 먹고 잉태하여 낳으므로 아버지가 없어 어머니의 성씨를 따랐다. 
그의 어머니는 도선을 낳은 후 아버지 없이 태어난 아이라 주위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워 숲속에 버렸는데 수많은 비둘기들이 날아들어 젖을 먹여주므로 신기하게 여겨 다시 데려다. 길렀다. 
아기 이름을 ‘비둘기 숲’이란 뜻의 구림이라 불렀다. 
13세에 당나라 배를 빌어 타고 당에 들어갔다.
당나라 일행 선사가 언젠가 제자들에게 ‘고을의 물이 거꾸로 흐르면 나의 도를 전할 사람이 올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었다. 
하루는 문도들 가운데 그 말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달려와 아뢰기를 “오늘 고을 물이 역류합니다.”라고 했다.

일행이 그 말을 듣고 곧 가서 장삼을 두르고 몸가짐을 단정히 한 다음 문 밖으로 나가자 그때 마침 도선이 찾아뵈려 막 당도하는 것이었다. 
일행이 “기다린 지 오래이거늘 왜 그리 늦었는가?” 하며 더불어 크게 기뻐하며 즉시 도선을 맞이하여 머물도록 했다.

도선이 그의 법도을 모두 터득하고 나서 떠날 뜻을 비치자 일행은 작별에 임해 “나의 도가 동쪽으로 가게 되었구나! 부디 잘 가게” 하며 아쉬워했다.

일행은 이어 세심하게 봉해진 붉은 책 한 권을 주면서 “조심해서 다루고 절대로 일찍 열어보지 말라, 
그대에게 왕 씨 일가를 부탁하노니 앞으로 7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열어보기 바란다.” 며 간곡히 당부했다.

도선이 송도에 이르러 왕륭의 집에서 유숙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하늘을 우러러 보고 땅의 이치를 살펴본 다음 감탄하며 “내년에 반드시 훌륭한 아들을 낳아 도탄에 빠져 고통 받는 백성들을 건지리라”고 예언했다.

왕륭은 그 말을 듣고 신을 거꾸로 신고 달려 나가 그를 맞아들였다. 
이듬해 과연 왕륭은 뒷날 고려를 건국하여 태조가 되는 왕건을 낳았다. 
은산비에는 도선이 일행으로부터 전수받았다는 비보설에 대해 대략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부처님은 정신과 육체의 모든 병을 다 고쳐주는 최고의 의원이다. 
그의 가르침으로 몸을 다스리면 각종 재난과 질병이 사라지고 마음을 다스리면 번뇌가 없어지며 산천토지를 다스리면 흉함과 해로움이 변하여 길함과 이로움으로 바뀐다.

비보설은 마치 약쑥과 같다. 
약쑥은 인간에게 매우 좋은 약이지만 질병이 없는 사람에게는 더러운 흙과 마찬가지여서 비록 집 안에 있다하더라도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병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훌륭한 의사를 만나서 그 쑥으로 쑥뜸을 뜨면 아무리 깊은 병도 즉시 낫는 게 메아리나 그림자보다도 신속하다. 비록 만금이 있다. 
해도 쑥의 가치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은 그 효험이 신비하기 때문이다.

저 동쪽에 위치한 너희 나라 삼한의 지세를 보면 여러 산들이 험악한 형세로 이루어진 곳이다. 물살 또한 급하기 짝이 없다. 
혹 용 같기도 하고 호랑이 같기도 하여 서로 다투는 형세가 있는가 하면 혹 새가 나르고 짐승이 달리는 듯한 형상도 있다. 
저쪽으로부터 공격해오는 형세도 있고 혹은 미약한 것이 끊어져 격을 이루지 못하는 형국도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병이 많은 사람과 같은 것이다. 
나라가 쪼개져 혹 구한이 되기도 하고 혹 삼한이 되기도 한다. 
서로 침략ㆍ정벌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고 도둑의 무리가 함부로 날뛰며 기후가 고르지 않아 홍수나 가뭄의 피해가 발생하는 것이 모두 이 때문이다.

그대는 지금 부처님의 교법으로 약쑥을 삼아 땅과 물의 병을 치료하도록 하라. 부족한 것은 더하고 지나친 것은 억제하며 내닫는 것은 그치게 하고 등진 것은 불러들이며 해치러 오는 것은 막고 서로 다투는 것은 금지시키며 좋은 것은 심어 번성케 하고 길한 것은 북돋는다. 
병든 땅의 형국을 보아 부도를 세우거나 혹은 탑을 설치하고 절을 건립하여 그 숫자가 3천 8백여 개소에 이르면 너희 나라 산천의 병통과 흠은 모습을 감추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비보설은 바로 병통을 치료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이 비보설에 따라 지세를 잘 다스린 후에야 비로소 너희 삼한은 뭉쳐 하나의 통일 국가를 이룰 수 있고 도둑들을 교화시켜 새로운 백성이 되게 하며 비ㆍ바람이 순조로워 농사의 때에 맞춰 주어 모든 백성들이 화목하고 순박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이다.

그후대의 임금과 신하들이 나라를 고루 잘 살도록 다스릴 수 있는 이와 같은 정치법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난감하게 된다. 
비보설에 대해 ‘함부로 아무 도움도 없는 일로써 나라를 번거롭게 하느니 차라리 물러나 길할지 혹은 흉할지를 관찰하는 게 낫다’고 할지도 모른다. 
병든 사람이 치효해 줄 의사를 기피하여 “함부로 효과도 없을 약을 복용함으로써 생명을 쇠잔하게 하느니 차라리 물러나서 치유 여부를 관찰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위독해진 뒤에 돌아본들 회복될 수 있겠는가.

도선은 일행 선사에게 비보설을 모두 전수받은 다음 당나라 회종 임금 건부 2년, 신라 헌강왕 1년 을미(875)에 귀국하니 그 때의 나이는 49세였다.

조정에 아뢰어 먼저 5백여 선종사찰을 건립하였다. 
당나라 소종 임금 광화 1년, 신라 효공왕 2년(898) 3월 10일 문득 열반에 드니 세수 72세였다.

도갑사의 비문은 이경석이 지은 것이다. 
전남 구례의 연곡사에 부도 2개가 있는데 하나는 도선의 부도이고 하나는 그 어머니의 부도이다.

전남 광주군 백계산의 옥룡사에 있는 비석 글은 고려 때의 문신인 최유청이 지은 것이다. 
스님이 지은 비문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다.

도선의 속성은 김 씨이고, 어머니는 김 씨이다. 
꿈에 어떤 사람이 맑은 구슬 1개를 주며 삼키라 하여 그것을 삼키고 임신하였다.
신라말의 승려이며 풍수설의 대사. 영암출신. 왕가의 후예라는 설도 있다.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에서 스님이 되었다.
그의 부모는 그가 반드시 진리를 깨달은 큰 인물이 될 것으로 확신하고 처음부터 그가 출가하여 스님이 되는 것을 마음속에 허락하고 있었다.

나이 15세에 이미 똑똑하고 조숙한데다. 
여러 재주도 터득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스님이 되었다. 
월유산 화엄사에서 대경을 공부했는데 1년도 지나지 않아 벌써 깊은 뜻을 파악하니 그곳에서 공부하던 많은 학인들이 모두 놀라 귀신같은 총명이라고 탄복했다.

신라 문성왕 8년(846)에 이르니 도선의 나이 20세였다. 
이 무렵 혜철 대사가 당나라의 서당지장 선사로부터 밀인을 전수받고 와서 전남 곡성 동리산에서 개당, 연설하여 배우는 이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교학을 공부하고 있던 도선은 이때 혜철 대사의 선문으로 들어가 제자 되길 청하여 나이 23세 때 구족계를 받았다.
도선은 827년(흥덕왕 2)에 태어나 898년(효공왕 2)까지 살다 간 선승이다. 
신라 하대에 새로 도입되어 당시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던 선종계통 승려로서,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동리산파의 개조 혜철(, 785~861)의 인가를 받아 전라남도 광양 옥룡사에서 독자적인 선문을 개설하고 있었다. 
풍수지리와 관련하여 한국풍수의 종조로 일컬어지며, 고려 태조 왕건(877~943)의 탄생을 예견하고 「훈요십조」에서 언급되는 등 고려의 개국과 관련이 있는 역사적 인물이다.

도선에 대한 기록은 후대에 가작된 신이한 전설이 대부분이며, 비문 역시 그 사후 252년이 지난 후에야 처음 등장하므로 명확한 사실 규명에 한계가 있다. 
도선에 관한 그 최초의 자료이자 가장 신빙성 있다고 알려진 것은 1150년 건립된 최유청()의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이다.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에 따르면 도선은, 선각국사()는 인종 때 추증 받은 도선의 시호이다. 
가계와 관련된 내용은 전하지 않으나 일설에 태종대왕 서얼의 자손이라고도 한다. 
15살에 화엄사로 출가하여 『화엄경』을 수학하고 다시 혜철대사를 찾아가 선()을 배웠다.

훗날 전라남도 광양 옥룡사에 오랫동안 머물렀는데 그를 추앙하는 학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선승()활동과 풍수지리 관련'

도선은 풍수지리와 관련한 술승()으로만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는 풍수가이기 전에 견실한 선승()이었다. 
도선의 생애와 활동과 관련하여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략 5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 1기는 15세까지의 유년기, 
제 2기는 15-20세의 화엄 수학기, 
제 3기는 20-23세의 선종 수업기, 
제 4기는 23-37세의 방랑수련기, 
제 5기는 37-72세의 옥룡사 주지기이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도선은 처음에 화엄종으로 출가하였지만 신라하대에 유입된 선종을 접하고 동리산 혜철을 찾아가 선을 배우고 전국을 유력하며 수행하였으며 스승인 혜철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었다.
비문에서 보이는 도선의 생애는 줄곧 선승으로서 일관된 삶이다.

선승이었던 도선이 누구로부터 풍수지리설을 익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비문의 내용상 일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중국에 유학하여 풍수지리를 배웠던 것 같지는 않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풍수지리설의 유포가 주로 선승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선종과 풍수지리설의 유입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위 비문에서는 도선의 일대기 서술이 끝난 뒷부분에 붙여, 도선이 옥룡사에 주석하기 전 지리산에 머물 때 한 이인()을 만나 남해의 바닷가 사도촌()이라는 곳에서 산천의 형세에 대해 배웠다고 하였다. 
깨달은 바가 있어 이후 음양오행의 술을 더욱 연구하여 유수한 비결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보아 도선은 20세부터 4년간 동리산에 머물다가 23세 때 구족계를 받은 후 전국 각처를 유력하게 되는데 이 기간 동안 선을 수행하는 한편 풍수지리 이론을 실제와 대조하면서 익혔던 것으로 추측된다.

도선은 방랑수련하면서 전국 산천의 형세를 유기적으로 파악하는 안목을 얻었다. 
신라하대사회의 해체를 눈앞에서 목격하고 신라왕실의 무력화와 지방에서 건실하고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고 있던 사회상에 대해 잘 인식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풍수지리설과 시대인식이 결부되어 지기쇠왕설()이나 비보사탑설()이 나오게 되었고, 그 결과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에 나타나는 것과 같이 전 국토를 재계획하는 성격의 풍수설이 제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고려의 풍수는 도선과 함께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고려사절요()』 제 1권 「태조신성대왕」조에 왕건의 아버지가 송악의 남쪽에 집을 지었는데 도선이 문 밖에 와서 이 집에서 성인이 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 태조 왕건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도선이 그의 탄생을 예견했다는 기록을 통해, 도선과 왕건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왕건이 17세 때 군사를 쓰고 진을 설치하는 데 필요한 지리 천시의 법과 산천에 제사 지내는데 관한 감통과 보우의 이치를 도선이 알려주었다는 기록은 훗날 왕건이 풍수지리설을 정치와 군사에 적용하고 도선의 가르침에 따라 국토를 비보하여 절을 세운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생몰연대상 실제로 왕건과 도선이 만난 일은 없었지만, 왕건이 도선 풍수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은 잘 알려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대 왕들에게 남기는 유훈인 「훈요십조」에서 “여러 사원은 모두 도선이 산수()의 순역()을 점쳐서 개창한 것이다. 
도선이 말하기를, ‘내가 점쳐서 정한 곳 외에 함부로 창건하는 일이 있게 되면 지덕()을 손상시켜 왕업이 오래지 못하리라.’ 하였다···.”라고 나와 있다.

이 내용에서 밝힌 도선의 설은 도선이 찬술했다는 『도선비기()』에 수록되었을 것으로 보는데, 『도선비기』는 원본이 전하지 않는다. 
도선이 찬했다고 전하는 저술들은 대체로 원본이 전하지 않으며, 현존하는 관련 저술들은 대체로 후대에 찬술되고 도선의 이름을 가탁했다고 보기도 하는데,대표적으로 『도선답산가()』가 있다.

풍수서 『도선답산가()』

『도선답산가』는 이상적 길지의 풍수를 노래한 한시집()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유일본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필사자나 필사연대는 불분명하며, 원본의 간행 여부도 알 수 없다. 
책은 「사험결()」 「도선답산가」를 비롯하여 「주마육임정국()」 「육갑천규도()」 「주자답산부()」 「설심부()」 「마상시()」 「금낭가()」 「지리종지()」 「도선산론기()」 「도선수파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금낭가」만 국한문혼용의 가사이고 나머지는 한시이다.

도선이 지었다고 전하는 「도선답산가」는 1구 7자, 1수 14자, 총 38수로 이루어진 칠언절구의 한시이다. 
대체로 4 · 3의 음율로 산수 형세의 변화에 따른 길흉에 대해 읊고 있다. 
주로 혈()을 중심으로 주위의 사()들에 의한 혈의 운세변화를 노래했다. 
풍수에서 사란 혈의 앞뒤와 왼쪽, 오른쪽에 있는 산을 말한다.

이 사방의 산들은 앞의 것을 주작(), 뒤의 것을 현무(), 왼쪽을 청룡(), 오른쪽을 백호()로 보아 혈을 수호하는 사신사()라고 한다. 
풍수에서 말하는 혈()이란, 땅의 기운이 모여 있는 곳으로 양택풍수의 경우 이 곳에 건물이 들어선다. 
「도선답산가」에는 이 사신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구절로 표현하고 있다.
   ······
  
위 구절은, “꼭대기 완만한 주작이 북소리처럼 일어나고, 현무의 드리운 머리가 두 물줄기 사이에 있구나······청룡이 편안하게 퍼지며 머리를 높이 일으키고, 백호는 천천히 가니 해치려 하지 않네.” 정도의 의미이다. 
완만한 안산인 주작과, 주산인 현무 앞으로 갈라져 들어오는 명당수(), 좌우에서 거역의 자세를 취하지 않고 혈을 감싸 안은 듯한 청룡과 백호의 모습을 읊은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전통적인 풍수지리 명당의 지세를 노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도선에서 시작하여 고려시대를 풍미한 풍수지리사상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풍수와 관련된 수많은 저술들이 탄생했다. 
『도선답산가』 역시 그 중 하나인데, 여기에 실린 전() 도선 찬술의 「도선답산가」는 현재 알려진 유일한 한시체 「도선답산가」로 보인다. 
이 작품은 이후 파생되는 수많은 풍수가사의 시작이 되었으리라 여겨진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풍수가사란 풍수와 관련된 내용을 담아 가사체 형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한문뿐 아니라 국한문혼용의 풍수가사도 다수 전한다. 
이들 풍수가사 중에는 ‘~답산가’ 형식의 제목이 많은데 그 내용이 대체로 유사하여, 「도선답산가」와 함께 그저 「답산가」로 통칭되기도 한다. 
「주자답산가」 「옥룡자답산가()」 「최해운답산가()」 등이 대표적이다.


신라 헌강왕이 도선의 높은 인품을 존경하여 사신을 보내 궁중으로 맞아들였는데 처음의 만남임에도 서로 오랜 벗처럼 친근감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도선은 차원 높은 담론과 묘한 도리로써 임금의 마음을 깨우쳐 주고는 얼마 되지 않아 본래의 절로 돌아왔다.

어느 날 제자를 불러 말하기를 “내가 이제 가야겠다.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떠나는 것은 만고불변의 이치이니 무엇 하러 더 여기 있을 것인가?” 하고 홀연 열반에 들었다. 
중국 광화 1년, 신라 효공왕 2년(898) 3월 10 일이었는데 나이 72세였다.

절 뒤편 언덕으로 스님의 사리를 옮기고 탑을 세우니 그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효공왕이 스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하며 시호를 추증하여 요공선사, 탑호를 증성혜등으로 하도록 했다.

문인 홍적 등이, 스님의 빛나는 행적이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까 걱정하여 임금께 글을 올려 기록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임금께서 박인범에게 명해 비문을 짓도록 했으나 끝내 돌에 새기지 못하고 말았다. 
고려 현종 임금이 대선사로 추증하고 숙종 임금이 다시 높여 왕사로 추증했으며 공효왕이 선각국사로 봉했다.

스님이 전한 음양설 여러 편이 세상에 알려졌는데 후세의 지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최고본으로 삼았다. 
비문 끝부분에 이러한 내용이 있다.

천덕 2년 경오 7월 을해 9일 계미에 세우다.

평하노니 이경석과 최유청의 두 비문은 서로 엇갈리는 설이 있어 믿을 수 없다. 
부모의 성씨 및 일행에게 배웠다는 기록이 없는 것이다.

도선의 명망이 높아지자 헌강왕(, 재위 875~886)이 깊이 존경하여 궁으로 불러 머물게 하기도 하였는데, 그는 곧 옥룡사로 다시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도선은 옥룡사에서 많은 제자를 기르다가 세수 72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입적 후 효공왕이 서서학사() 박인범()에게 비문을 짓기를 명하였으나 비석이 세워지지 못하다가, 고려조에 가서야 1150년(의종 4) 비석이 건립되게 된다.
고려 현종(, 재위 1009-1031)이 대선사()의 법계를 추증하였으며, 이후 다시 숙종(, 재위 1095-1105)이 왕사()로, 인종(, 재위 1122-1146)이 국사()로 추대하였다.

"광양 옥룡사지전남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 사적 제407호. 백계산안에 있으며 도선국사가 35년간 머무르면서 수백명의 제자를 길러내고 열반에 든 곳으로 불교역사에 있어서 매우 소중한 곳이다. 이름 또한 도선의 호인 "옥룡자"에서 따온 것이다.





도선비기. 道詵秘記.

도선비기. 道記.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 도선(道詵:827~898)이 지었다고 전하는 풍수서.
한국의 풍수 창시자인 도선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풍수서로서 한국에 중국의 체계화된 풍수사상을 최초로 전한 책으로 의의를 갖는다.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인 도선은 중국에서 발달한 참위설을 위주로 지리쇠왕설()·산천순역설() 및 비보설() 등을 주장하였다. 

고려의 성립과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고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 중에서 도선선사가 지정하지 않는 곳에 함부로 절을 짓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다. 원본은 전하지 않지만 《고려사()》 등에 기록이 보인다.

고려의 성립과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고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 중에서 도선선사가 지정하지 않는 곳에 함부로 절을 짓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다. 원본은 전하지 않지만 《고려사()》 등에 기록이 보인다.

최범서의 도선비기는 1100년 전 신라의 선승 도선대사의 일대기로, 도선에 대해 왜곡된 점을 바로 잡고자 작가가 전국을 세 바퀴나 도는 고생을 마다않고 여러 사찰을 누비며 수집한 자료와 고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생생한 도선의 생애가 담겨 있는 책이다.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도선은 선승이면서 고려 태조 왕건의 집터를 잡아준 풍수가라는 정도이다. 
작가는 도선을 음택이 아닌 양기, 양택풍수를 발전시킨 대사상가요 대선승 이라고 주장한다.

도선은 조상의 뼈를 싸들고 이리저리 다니며 명당을 찾는 음택 풍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선은 밀교의 택지법과 당나라 일행 선사의 종토 재구성 풍수를 연구하여 우리 전래의 풍수를 가미한 도선 특유의 호국 호선의 비보풍수로, 오로지 난세의 신라 말 백성들과 나라 땅을 위해 한평생을 비보사찰을 세우고 탑, 부도, 당간 등을 조성하기 위해 애썼다는 것이다.

여기말하는 소승 풍수란 개인 발복을 위해 묘자리를 잡는 음택을 말하고, 
대승 풍수는 나라를 위하고 백성들을 위해 산천의 순역과 지기를 살펴 비보사찰을 짓거나 중건하고 마을터· 읍터·도읍을 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비보란 지덕을 도와 보완하는 것으로 넓은 의미에서 지나친 것을 누르는 압승· 염승도 이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

작가는 이처럼 15년간 두타행을 하며 전 국토의 비보처 3800곳을 찾아 비보사찰을 세우고 탑 등을 조성해 땅을 치료한 행적을 중심으로 왕건에게 백일기도를 시키면서 왕으로 만들어 간 도선의 발자취와 그 시대를 생생하게 복원해가며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전 3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상권은 교종과 선종, 중은 대승풍수와 소승풍수, 하권은 비기는 있다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도선이 태어난 시기는 신라 조정이 썩을 대로 썩어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호족들이 중앙정부의 세력권에서 벗어나서 국가가 극도의 혼란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어머님의 손에 이끌려 승문에 들어선 도선은 불법을 공부하는 다른 불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불교 경전의 공부에 정진하고자 노력했다.

도선은 <화엄경>에 깊이 빠질수록 학무학의 경지로는 참다운 깨우침을 얻을 수 없다는 회의가 들었다. 
부처님의 교리는 방향 제시일 뿐 깨달음은 자신의 문제였다. 
도선은 공안()이란 것을 안 뒤부터 교리에 더욱 집착했으나 얻어지는 것은 자정()일 뿐 깨우침은 아니었다. ‘
문자는 문자일 뿐 마음이 아니다. 
법장스님이 말한 일심은 분명히 마음의 작용이다. 
문자는 마음의 작용을 깨닫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선은 문자에 몰입할수록 법에 얽매어 마음을 잃어 가는 느낌이었다.

몸과 마음이 깨우침으로 충만하여 비단이 되어야 하거늘 겉치레에 지나지 않은 경 공부에 회의가 들었다. 
그만큼 절박한 심경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 무렵 보리달마란 스님을 접한 도선은 전율을 느꼈다.

‘무릇 진리에 이르는 방법은 많다 하겠으나 요약하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원리적 방법이요, 
다른 하나는 실천적 방법이다.’


도선은 간단명료한 논지에 흠뻑 빠져 들었다.

‘실천적 방법이란 이른바 네 가지의 실천이다. 
그 밖의 많은 실천은 모두 이 네 가지 실천 중의 어느 하나에 포함된다. 
첫째 전세의 원한에 보답하는 실천이며 
둘째 연분에 맡기는 실천이며 
셋째 사물을 탐내지 않는 것이며 
넷째는 법대로 살아가는 실천이다. 
여기서 법이란 자연· 현상· 도리를 말한다.’

도선의 눈에 감격의 눈물이 고였다. 회의가 말끔히 가시고 갈 길이 훤히 보였다.

‘가리로다. 고행을 감로수로 알고 교리에서 탈피하리라....’

도선은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선을 찾아 길을 떠나야 했다.

겨우내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생명들이 봄을 맞아 태동하는 것을 보면 세상 이치는 순리대로 돌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해와 달은 사사로이 빛을 발하지 않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은 사사로이 행하여지지 않는다는 말도 실감되었다.

모든 것은 천지자연의 덕으로 천하의 만물이 생성하고 쇠퇴해 갔다. 
도선은 삼동을 밀교에 매달려 정을 들여다보았으나 쉽게 문리가 트이지 않았다. 
도선의 마음속에 둥지를 틀고 앉은 것은 밀교와 관련된 풍수였다.

도선은 풍수와 밀교의 관계를 규명하려고 법문으로 서책과 씨름하는 사이에 한 가지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밀교와 비보사당이 접목되어 있다는 사실 이였다. 
밀교가 화엄과 선, 도교, 더 나아가서는 민속까지도 수용하는 종합 신앙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밀교에는 호선과 호국의 법용이 들어 있었다.

도선은 조금씩 밀교와 풍속과의 관계를 비보사당과 호국사당에서 찾아가고 있었다.

예컨대 사람은 "기" 덩어리인데 "기" 는 바로 혼백이 아닌가? 혼백은 기가 쇠할 때 까지 사람의 몸속에 들어 있다가 기가 쇠하면 음양의 양인 혼은 하늘로 돌아가고 음인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 
사람이 처음 태어나 변화하는 것을 "백" 이라 하고, 이미 백이 생겨서 양하는 것을 "혼" 이라 한다.

그러므로 하늘은 바람, 땅은 물로 대비하여 혼백과 천지와 풍속의 관계를 연관시켜 연구해 볼 수도 있었다. 
땅과 백은 우주의 모태로서 생명을 잉태시키고 죽으면 지상과 교류할 수 있는 백을 간직하고 있으니 땅이야말로 영원불변의 생명철학이 아닌가 한다.

땅을 보면 물이 눈에 밟혔다. 
그 물이 손에 잡히면 땅속도 손에 집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땅은 만물의 근원이요, 
그 근원을 이루는 물은 땅의 피요, 
기 또한 물이었다. 
모든 생명이 태어나는 뿌리요, 터전이다. 
아름다움, 추함, 현명함, 어리석음, 선하지 않은 것이 모두여기서 생겨나는 것이다.

도선은 이와 같이 사람은 땅을 본받고 하늘은 땅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뜻과 같이 근본무지에 생활행위가 있고, 그 행위로 인하여 정신작용, 마음과 물질 감각기능이 있고 대상과의 접촉이 있고 감수가 있고 욕망이 있어 집착이 있고 태어남으로 인하여 늙음, 죽음, 근심, 슬픔, 괴로움, 고민이 생긴다 하였다.

도선은 떠날 차비를 서둘렀다. 남자들이 머물 곳이란 천지가 내 집이요, 우주가 다 숨쉬는 곳이 아니던가? 그러나 도선이 갈 곳은 선천경계를 구획 짓고, 이어지고 끊어지고, 건너뛰고 하는 그런 산이었다. 그 곳에 도선이 추구하는 길이 있고, 그 곳에서 앞으로 해야 할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도선은 고통 받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방법으로 땅이 썩고 병들어 기가 쇠해지면 그 위에 사는 백성들도 고통 받게 된다는 이론을 수용한다. 백성들을 구제하려면 지기가 왕성한 땅으로 옮기거나 쇠한 지기를 보완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한국 풍수의 시조라고 여겨지는 도선(道詵)대사의 전기를 기록하고 있는 고려국사도선전에는 땅의 기(氣)가 약한 곳을 보완하는 비보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사람이 만약 병이 들면 곧 혈맥을 찾아 침을 놓거나 뜸을 뜨면 병이 낫는다. 

산천의 병도 역시 그러하다. 

이제 내가 지적한 곳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세우고 부도를 세우는 일은 사람이 침을 놓고 뜸뜨는 일과 같다. 

이를 비보(裨補)라고 한다.”


도선은 전 국토를 하나의 만다라로 보고 의원이 병자에게 쑥뜸을 뜨듯 쇠한 땅에 비보를 했다. 그리하여 도선은 15년간 두타행을 하면서 전 국토의 비보처 3800곳을 찾아내 비보사찰을 세우고 탑 부도 당간 등을 조성해 땅을 치료했다.

국토의 단전에 해당하는 운주사에 천불탑을 세우고 똥구멍에 해당하는 옥룡사를 세웠다.
흠이 있는 땅을 보살피고 치료하며 보완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그 흠결이 있는 곳에 사찰을 세워 비보하는 방법이다. 
이를 비보사찰이라 하고 이 방법을 의지법(醫地法)이라고도 한다. 
도선은 국토 전체를 살펴 그 병세를 고치는 방법을 불도에 의존하였으나 그 근본은 풍수였다.

뭇 산들이 서로 경쟁하듯이 험하고, 여러 하천들이 다투는 듯 콸콸거리며 흐르며, 마치 용과 호랑이가 서로 싸우는 것과 같은 형세도 있고, 혹은 날짐승이 날아가고 길짐승이 달아나는 형세도 있으며, 혹은 산의 맥이 멀리 지나가버려 제어하기 어려운 것도 있는 반면에 짤막짤막 끊어져서 이르지 못하는 것들도 있으나 이와 같은 형상을 구체적으로 말하기가 어려운 지경이라, 
동쪽의 고을에 이로울 것 같으면 서쪽에 있는 마을에는 해가 되고, 남쪽에 있는 고을에 길할 것 같으면, 북쪽에 있는 마을에는 흉하다. 
우뚝 솟은 산을 바꾸기란 불가능한 일이고, 아무렇게나 흐르는 물은 막기가 어려우니 이를 비유컨대 질병이 많은 사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백운산 내원사 사적》에 비보를 해야 하는 동기를 전해주는 내용이다.
도선에 관한 기록으로서 가장 신빙성이 높은 것은 고려 의종 4년(1150)에 최유청이 왕명에 따라 찬술한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이다.
책에 의하면 도선은 신라 흥덕왕 2년(827)에 영암에서 출생하여 효공왕 2년(898)에 72세로 입적하였는데 그는 15세 때에 화엄사에 가서 중이 되어 화엄학을 공부하다가 20세되던 해에 선종으로 개종하여 곡성 동리산파의 개조인 혜철의 문하에서 선을 수업한 후 23세 때부터 운봉산 · 태백산 등 각처를 유람하며 수행하다가 37세 때에 옥룡사에 주석하여 입적할 때까지 제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한다.
인간의 길흉화복이나 국가의 미래에 관하여 도참사상 및 음양오행설에 의해 행하는 예언적 기록으로 공공연하게 발표될 수 없는 비밀스런 기록이라는 뜻에서 ‘비기’라고 하였다. 
대체로 천문•역산(曆算)•음양•점후(占候) 등에 관한 내용이 중심으로 되어 있다. 
유형별로는 조상이 자손의 장래를 염려하여 남겨놓은 것과 국가의 장래에 관한 것, 
글고개인의 운명과 관계되는 것 등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도선비기》(道詵秘記)를 비롯하여 음양도참사상의 유입과 동시에 수많은 비기가 만들어졌는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옥룡자기》(玉龍子記)•《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무학비기》(無學秘記)•《징비록》(徵秘錄)•《운기귀책》(運奇龜策)•《동세기》(東世記)•《오백론사비기》(五百論史秘記)•《정북창비기》(鄭北窓秘記)•《정감록》(鄭鑑錄) 등이다.
비슷한 말로 비결(秘訣)이 있는데 전해오는 얘기로 도선 대사는 그의 어머니가 개천에서 떠내려 오는 오이를 건져 먹고 태어났다고 한다.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는 칠언이구(七言二句)씩 모두 삼십팔련(三十八聯)으로 구성되어 있다는데 전해지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작사(朱雀砂·혈처의 앞산)는 북소리 은은히 일어나듯 그 산등성이 원만하고 현무사(玄武砂·혈처의 뒷산으로 주산을 말함)는 두 물길이 모이는 사이에 우뚝 솟았네(頭圓朱雀如鼓起 玄武垂頭兩水間). 그 안에 명당은 가히 만마(萬馬)를 싸안을 만하고 좋은 산곡(山谷)은 평탄함과 첨예함이 조화를 이루어 바르고 온순하구나(明堂可得容萬馬 吉谷正欲平且尖). 청룡사(靑龍砂)는 뱀이 꿈틀거리며 고개를 치켜든 듯하고 백호사(白虎砂)는 조급하지 않아 사나운 줄 모르겠구나(靑龍蛇蛇頭高起 白虎徐行不欲殘). -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중 일부》
백성과 나라를 위해 15년간의 두타행을 행한 도선은 두 눈을 뜬 채로 입적하였다. 통일을 보기 전에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않겠다던 말 그대로였다. 
가부좌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35년 동안 옥룡사에서 연좌망언이란 말을 완성시킨 순간이었다. 
도선은 가부좌를 튼 채 말을 잃고 입적한 것이다.

고려가 건국된 후 현종은 대선사를, 숙종은 왕사를, 인종은 선각국사를 추종하여 도선을 원효나 의상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 소설은 도선이라는 지식인 즉 신라 말기의 역사를 왕조 중심이 아닌 한 지식인의 시각에서 이 나라 산천을 두루 돌며 깨우침을 얻은 도선 대사의 삶을 신라말기의 역사적 정황과 더불어 이해하기 쉽게 잘 그려내고 있다.

도선 대사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입적하기 전에 써놓은 글속에서 우리는 대선승 이었던 그를 일개 풍수가로 전락시키면서 오로지 사익()만을 채우려는 후손들에게 내리는 매서운 그의 일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어리석도다. 
인간들이여! 명당을 찾아 헤매느니 그 시각 그대들의 주위에 온정을 베풀어 불행한 이웃이 없는지 살펴 보시하라. 그것이 명당을 찾는 일보다 더 자손 발복을 기원하는 길이다.

자신들의 마음이 선하고 남에게 베푸는 일을 즐겨하고 더불어 사는 일을 실천하면 생기 있는 땅은 선한 일을 더 하라고 자연히 얻어지게 된다.

한국의 풍수 창시자인 도선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풍수서로서 한국에 중국의 체계화된 풍수사상을 최초로 전한 책으로 의의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