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31일 수요일

도선비기. 道詵秘記.

도선비기. 道記.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 도선(道詵:827~898)이 지었다고 전하는 풍수서.
한국의 풍수 창시자인 도선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풍수서로서 한국에 중국의 체계화된 풍수사상을 최초로 전한 책으로 의의를 갖는다.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인 도선은 중국에서 발달한 참위설을 위주로 지리쇠왕설()·산천순역설() 및 비보설() 등을 주장하였다. 

고려의 성립과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고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 중에서 도선선사가 지정하지 않는 곳에 함부로 절을 짓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다. 원본은 전하지 않지만 《고려사()》 등에 기록이 보인다.

고려의 성립과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고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 중에서 도선선사가 지정하지 않는 곳에 함부로 절을 짓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다. 원본은 전하지 않지만 《고려사()》 등에 기록이 보인다.

최범서의 도선비기는 1100년 전 신라의 선승 도선대사의 일대기로, 도선에 대해 왜곡된 점을 바로 잡고자 작가가 전국을 세 바퀴나 도는 고생을 마다않고 여러 사찰을 누비며 수집한 자료와 고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생생한 도선의 생애가 담겨 있는 책이다.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도선은 선승이면서 고려 태조 왕건의 집터를 잡아준 풍수가라는 정도이다. 
작가는 도선을 음택이 아닌 양기, 양택풍수를 발전시킨 대사상가요 대선승 이라고 주장한다.

도선은 조상의 뼈를 싸들고 이리저리 다니며 명당을 찾는 음택 풍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선은 밀교의 택지법과 당나라 일행 선사의 종토 재구성 풍수를 연구하여 우리 전래의 풍수를 가미한 도선 특유의 호국 호선의 비보풍수로, 오로지 난세의 신라 말 백성들과 나라 땅을 위해 한평생을 비보사찰을 세우고 탑, 부도, 당간 등을 조성하기 위해 애썼다는 것이다.

여기말하는 소승 풍수란 개인 발복을 위해 묘자리를 잡는 음택을 말하고, 
대승 풍수는 나라를 위하고 백성들을 위해 산천의 순역과 지기를 살펴 비보사찰을 짓거나 중건하고 마을터· 읍터·도읍을 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비보란 지덕을 도와 보완하는 것으로 넓은 의미에서 지나친 것을 누르는 압승· 염승도 이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

작가는 이처럼 15년간 두타행을 하며 전 국토의 비보처 3800곳을 찾아 비보사찰을 세우고 탑 등을 조성해 땅을 치료한 행적을 중심으로 왕건에게 백일기도를 시키면서 왕으로 만들어 간 도선의 발자취와 그 시대를 생생하게 복원해가며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전 3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상권은 교종과 선종, 중은 대승풍수와 소승풍수, 하권은 비기는 있다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도선이 태어난 시기는 신라 조정이 썩을 대로 썩어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호족들이 중앙정부의 세력권에서 벗어나서 국가가 극도의 혼란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어머님의 손에 이끌려 승문에 들어선 도선은 불법을 공부하는 다른 불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불교 경전의 공부에 정진하고자 노력했다.

도선은 <화엄경>에 깊이 빠질수록 학무학의 경지로는 참다운 깨우침을 얻을 수 없다는 회의가 들었다. 
부처님의 교리는 방향 제시일 뿐 깨달음은 자신의 문제였다. 
도선은 공안()이란 것을 안 뒤부터 교리에 더욱 집착했으나 얻어지는 것은 자정()일 뿐 깨우침은 아니었다. ‘
문자는 문자일 뿐 마음이 아니다. 
법장스님이 말한 일심은 분명히 마음의 작용이다. 
문자는 마음의 작용을 깨닫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선은 문자에 몰입할수록 법에 얽매어 마음을 잃어 가는 느낌이었다.

몸과 마음이 깨우침으로 충만하여 비단이 되어야 하거늘 겉치레에 지나지 않은 경 공부에 회의가 들었다. 
그만큼 절박한 심경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 무렵 보리달마란 스님을 접한 도선은 전율을 느꼈다.

‘무릇 진리에 이르는 방법은 많다 하겠으나 요약하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원리적 방법이요, 
다른 하나는 실천적 방법이다.’


도선은 간단명료한 논지에 흠뻑 빠져 들었다.

‘실천적 방법이란 이른바 네 가지의 실천이다. 
그 밖의 많은 실천은 모두 이 네 가지 실천 중의 어느 하나에 포함된다. 
첫째 전세의 원한에 보답하는 실천이며 
둘째 연분에 맡기는 실천이며 
셋째 사물을 탐내지 않는 것이며 
넷째는 법대로 살아가는 실천이다. 
여기서 법이란 자연· 현상· 도리를 말한다.’

도선의 눈에 감격의 눈물이 고였다. 회의가 말끔히 가시고 갈 길이 훤히 보였다.

‘가리로다. 고행을 감로수로 알고 교리에서 탈피하리라....’

도선은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선을 찾아 길을 떠나야 했다.

겨우내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생명들이 봄을 맞아 태동하는 것을 보면 세상 이치는 순리대로 돌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해와 달은 사사로이 빛을 발하지 않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은 사사로이 행하여지지 않는다는 말도 실감되었다.

모든 것은 천지자연의 덕으로 천하의 만물이 생성하고 쇠퇴해 갔다. 
도선은 삼동을 밀교에 매달려 정을 들여다보았으나 쉽게 문리가 트이지 않았다. 
도선의 마음속에 둥지를 틀고 앉은 것은 밀교와 관련된 풍수였다.

도선은 풍수와 밀교의 관계를 규명하려고 법문으로 서책과 씨름하는 사이에 한 가지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밀교와 비보사당이 접목되어 있다는 사실 이였다. 
밀교가 화엄과 선, 도교, 더 나아가서는 민속까지도 수용하는 종합 신앙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밀교에는 호선과 호국의 법용이 들어 있었다.

도선은 조금씩 밀교와 풍속과의 관계를 비보사당과 호국사당에서 찾아가고 있었다.

예컨대 사람은 "기" 덩어리인데 "기" 는 바로 혼백이 아닌가? 혼백은 기가 쇠할 때 까지 사람의 몸속에 들어 있다가 기가 쇠하면 음양의 양인 혼은 하늘로 돌아가고 음인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 
사람이 처음 태어나 변화하는 것을 "백" 이라 하고, 이미 백이 생겨서 양하는 것을 "혼" 이라 한다.

그러므로 하늘은 바람, 땅은 물로 대비하여 혼백과 천지와 풍속의 관계를 연관시켜 연구해 볼 수도 있었다. 
땅과 백은 우주의 모태로서 생명을 잉태시키고 죽으면 지상과 교류할 수 있는 백을 간직하고 있으니 땅이야말로 영원불변의 생명철학이 아닌가 한다.

땅을 보면 물이 눈에 밟혔다. 
그 물이 손에 잡히면 땅속도 손에 집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땅은 만물의 근원이요, 
그 근원을 이루는 물은 땅의 피요, 
기 또한 물이었다. 
모든 생명이 태어나는 뿌리요, 터전이다. 
아름다움, 추함, 현명함, 어리석음, 선하지 않은 것이 모두여기서 생겨나는 것이다.

도선은 이와 같이 사람은 땅을 본받고 하늘은 땅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뜻과 같이 근본무지에 생활행위가 있고, 그 행위로 인하여 정신작용, 마음과 물질 감각기능이 있고 대상과의 접촉이 있고 감수가 있고 욕망이 있어 집착이 있고 태어남으로 인하여 늙음, 죽음, 근심, 슬픔, 괴로움, 고민이 생긴다 하였다.

도선은 떠날 차비를 서둘렀다. 남자들이 머물 곳이란 천지가 내 집이요, 우주가 다 숨쉬는 곳이 아니던가? 그러나 도선이 갈 곳은 선천경계를 구획 짓고, 이어지고 끊어지고, 건너뛰고 하는 그런 산이었다. 그 곳에 도선이 추구하는 길이 있고, 그 곳에서 앞으로 해야 할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도선은 고통 받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방법으로 땅이 썩고 병들어 기가 쇠해지면 그 위에 사는 백성들도 고통 받게 된다는 이론을 수용한다. 백성들을 구제하려면 지기가 왕성한 땅으로 옮기거나 쇠한 지기를 보완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한국 풍수의 시조라고 여겨지는 도선(道詵)대사의 전기를 기록하고 있는 고려국사도선전에는 땅의 기(氣)가 약한 곳을 보완하는 비보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사람이 만약 병이 들면 곧 혈맥을 찾아 침을 놓거나 뜸을 뜨면 병이 낫는다. 

산천의 병도 역시 그러하다. 

이제 내가 지적한 곳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세우고 부도를 세우는 일은 사람이 침을 놓고 뜸뜨는 일과 같다. 

이를 비보(裨補)라고 한다.”


도선은 전 국토를 하나의 만다라로 보고 의원이 병자에게 쑥뜸을 뜨듯 쇠한 땅에 비보를 했다. 그리하여 도선은 15년간 두타행을 하면서 전 국토의 비보처 3800곳을 찾아내 비보사찰을 세우고 탑 부도 당간 등을 조성해 땅을 치료했다.

국토의 단전에 해당하는 운주사에 천불탑을 세우고 똥구멍에 해당하는 옥룡사를 세웠다.
흠이 있는 땅을 보살피고 치료하며 보완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그 흠결이 있는 곳에 사찰을 세워 비보하는 방법이다. 
이를 비보사찰이라 하고 이 방법을 의지법(醫地法)이라고도 한다. 
도선은 국토 전체를 살펴 그 병세를 고치는 방법을 불도에 의존하였으나 그 근본은 풍수였다.

뭇 산들이 서로 경쟁하듯이 험하고, 여러 하천들이 다투는 듯 콸콸거리며 흐르며, 마치 용과 호랑이가 서로 싸우는 것과 같은 형세도 있고, 혹은 날짐승이 날아가고 길짐승이 달아나는 형세도 있으며, 혹은 산의 맥이 멀리 지나가버려 제어하기 어려운 것도 있는 반면에 짤막짤막 끊어져서 이르지 못하는 것들도 있으나 이와 같은 형상을 구체적으로 말하기가 어려운 지경이라, 
동쪽의 고을에 이로울 것 같으면 서쪽에 있는 마을에는 해가 되고, 남쪽에 있는 고을에 길할 것 같으면, 북쪽에 있는 마을에는 흉하다. 
우뚝 솟은 산을 바꾸기란 불가능한 일이고, 아무렇게나 흐르는 물은 막기가 어려우니 이를 비유컨대 질병이 많은 사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백운산 내원사 사적》에 비보를 해야 하는 동기를 전해주는 내용이다.
도선에 관한 기록으로서 가장 신빙성이 높은 것은 고려 의종 4년(1150)에 최유청이 왕명에 따라 찬술한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이다.
책에 의하면 도선은 신라 흥덕왕 2년(827)에 영암에서 출생하여 효공왕 2년(898)에 72세로 입적하였는데 그는 15세 때에 화엄사에 가서 중이 되어 화엄학을 공부하다가 20세되던 해에 선종으로 개종하여 곡성 동리산파의 개조인 혜철의 문하에서 선을 수업한 후 23세 때부터 운봉산 · 태백산 등 각처를 유람하며 수행하다가 37세 때에 옥룡사에 주석하여 입적할 때까지 제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한다.
인간의 길흉화복이나 국가의 미래에 관하여 도참사상 및 음양오행설에 의해 행하는 예언적 기록으로 공공연하게 발표될 수 없는 비밀스런 기록이라는 뜻에서 ‘비기’라고 하였다. 
대체로 천문•역산(曆算)•음양•점후(占候) 등에 관한 내용이 중심으로 되어 있다. 
유형별로는 조상이 자손의 장래를 염려하여 남겨놓은 것과 국가의 장래에 관한 것, 
글고개인의 운명과 관계되는 것 등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도선비기》(道詵秘記)를 비롯하여 음양도참사상의 유입과 동시에 수많은 비기가 만들어졌는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옥룡자기》(玉龍子記)•《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무학비기》(無學秘記)•《징비록》(徵秘錄)•《운기귀책》(運奇龜策)•《동세기》(東世記)•《오백론사비기》(五百論史秘記)•《정북창비기》(鄭北窓秘記)•《정감록》(鄭鑑錄) 등이다.
비슷한 말로 비결(秘訣)이 있는데 전해오는 얘기로 도선 대사는 그의 어머니가 개천에서 떠내려 오는 오이를 건져 먹고 태어났다고 한다.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는 칠언이구(七言二句)씩 모두 삼십팔련(三十八聯)으로 구성되어 있다는데 전해지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작사(朱雀砂·혈처의 앞산)는 북소리 은은히 일어나듯 그 산등성이 원만하고 현무사(玄武砂·혈처의 뒷산으로 주산을 말함)는 두 물길이 모이는 사이에 우뚝 솟았네(頭圓朱雀如鼓起 玄武垂頭兩水間). 그 안에 명당은 가히 만마(萬馬)를 싸안을 만하고 좋은 산곡(山谷)은 평탄함과 첨예함이 조화를 이루어 바르고 온순하구나(明堂可得容萬馬 吉谷正欲平且尖). 청룡사(靑龍砂)는 뱀이 꿈틀거리며 고개를 치켜든 듯하고 백호사(白虎砂)는 조급하지 않아 사나운 줄 모르겠구나(靑龍蛇蛇頭高起 白虎徐行不欲殘). -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중 일부》
백성과 나라를 위해 15년간의 두타행을 행한 도선은 두 눈을 뜬 채로 입적하였다. 통일을 보기 전에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않겠다던 말 그대로였다. 
가부좌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35년 동안 옥룡사에서 연좌망언이란 말을 완성시킨 순간이었다. 
도선은 가부좌를 튼 채 말을 잃고 입적한 것이다.

고려가 건국된 후 현종은 대선사를, 숙종은 왕사를, 인종은 선각국사를 추종하여 도선을 원효나 의상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 소설은 도선이라는 지식인 즉 신라 말기의 역사를 왕조 중심이 아닌 한 지식인의 시각에서 이 나라 산천을 두루 돌며 깨우침을 얻은 도선 대사의 삶을 신라말기의 역사적 정황과 더불어 이해하기 쉽게 잘 그려내고 있다.

도선 대사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입적하기 전에 써놓은 글속에서 우리는 대선승 이었던 그를 일개 풍수가로 전락시키면서 오로지 사익()만을 채우려는 후손들에게 내리는 매서운 그의 일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어리석도다. 
인간들이여! 명당을 찾아 헤매느니 그 시각 그대들의 주위에 온정을 베풀어 불행한 이웃이 없는지 살펴 보시하라. 그것이 명당을 찾는 일보다 더 자손 발복을 기원하는 길이다.

자신들의 마음이 선하고 남에게 베푸는 일을 즐겨하고 더불어 사는 일을 실천하면 생기 있는 땅은 선한 일을 더 하라고 자연히 얻어지게 된다.

한국의 풍수 창시자인 도선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풍수서로서 한국에 중국의 체계화된 풍수사상을 최초로 전한 책으로 의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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