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일 금요일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1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

기록유산으로는 세계 6위, 아시아 1위의 우리나라
조선은 최고의 나라다. 
한글과 같은 세계 최고의 문자를 만들어낸 왕조가 형편 없을수가없다. 
조선의 문화 는 후손들이 최고로 손꼽을 수밖에 없는것이다.
우리는 조선을 보는 눈을 달리 해야 합니다. 
조선은 물()이 아니라 문()으로 접근해야 하는 나라입니다. 
사치를 하거나 기념비적인 건물을 세우는 등의 화려한 문화를 뽐낸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은 문자나 역사기록 같은 ‘문’에 치중한 국가입니다. 
문이란 대단히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문자나 활자, 역사기록, 철학 등 인문적인 것 모두를 말합니다. 
조선은 세계 최고입니다. 

조선왕조실록『조선왕조실록』, 국보 제151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1997년 지정). 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약 470여 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한 책이다. 
현재 남한에는 정족산본 1707권 1187책과 오대산본 74책, 태백산본 1707권 848책 등이 남아 있다. 
『고종태황제실록(高宗太皇帝實錄)』과 『순종황제실록(純宗皇帝實錄)』은 일제 치하에서 편찬되었기 때문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제 보게 될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인조대 무인년간의 사초 ().




실록은 아시다시피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9개의 항목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직지와 고려대장경, "실록, 승정원일기훈민정음 해례본조선왕조의궤동의보감일성록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이 그것인데, 이 가운데 6개가 조선의 것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조선이 얼마나 문에 뛰어난 국가였는지 알 수 있다. 
기록유산의 숫자로 볼 때 우리나라는 세계 6위를 점하고 있고 아시아에서는 1위입니다. 
이웃나라 일본은 세계기록유산이 아예 하나도 없다. 
더욱놀라운 것은 우리가 중국도 능가했다는 사실 (중국이 보유한 세계기록유산은 5개). 이것은 모두 조선이 문에 치중한 문화를 만들어낸 덕일 겁니다. 
조선은 세계 최고의 문화국가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 중에 우리가 볼 실록은 단연 빼어납니다. 
최고로"
실록은 한 마디로 인류 역사상 단일왕조 역사서로서 가장 규모가 큰 책입니다.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했으니 말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300년 가는 것 자체가 힘든데 조선은 500년 이상 갔을 뿐만 아니라 그 기간의 역사까지 꼼꼼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세계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중국에도 명(明)실록이니 청(淸)실록이니 하는 게 있지만 유네스코에는 하나도 선정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알면 우리의 실록이 얼마나 뛰어난 기록유산인지 알 수 있다.



권력의 견제 역할.


조선의 왕은 원칙적으로 실록을 적는 사관()이나 승정원일기를 적는 주서()와 같은 기록자가 없이는 어느 누구도 만날 수 없었다. 

하나의 정치술로 왕의 모든 언행을 적게 함으로써 왕권을 견제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던 옆에서 다 적고 있고 그것이 후대에 영원히 남는다면 어느 누가 함부로 말을 할수가, 매사에 신중할 수밖에? 생각해보면 여러분들이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웬 사람이 계속해서 여러분들의 언행을 기록하고 있다면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겠습니까? 

생각해보면 조선에서 왕 노릇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태종이 사냥을 가는데 사관이 또 따라붙은 모양입니다. 
태종이 “놀러 가는 것이니 올 필요 없다”고 하자 그 사관은 변복을 하고 쫓아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서운 것은 사관.


사관이 소신껏 기록한 것을 왕은 볼 수 없었습니다. 
왕이 이것을 볼 수 있었다면 사관이 유교적인 기준에 따라 엄격하게 왕의 언행을 판단내릴 수가???. 이게 춘추필법이라는 것인데 사관은 이 기준에 따라 왕이 유교의 윤리에 맞게 정치를 하는지를 판단해 적게 됩니다. 

한번은 세종대왕이 자기 아버지인 태종에 대해 쓴 기록을 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신하들이 그 부당함을 고하자 어진 세종은 단념하고 맙니다. 
그 뒤로 어떤 임금도 대놓고 실록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연산군조차 이 실록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고 합니다. 

연산은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사관뿐이다”라고 했답니다. 
연산군 역시 자신이 패륜적인 짓을 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 후대에 전해져 자신의 악명이 길이 남을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조선은 바로 이런 자세로 정치를 했기 때문에 500년 이상을 간 것입니다. 
공정한 역사 기록을 통해 정치를 잘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기록에는 사관의 이름을 남겨놓지 않았습니다. 

익명성을 보장받은 것이다. 
만약 사관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야 한다면 후환이 두려워서 누가 사실( 혹은 )을 있는 그대로 적으려 했겠는가? 
안타깝게도 이 정책은 100% 지켜지지는 않았습니다. 

압력 때문에 사관의 이름을 적는 경우가 더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실록.


우리의 실록은 이와 같이 역사기록으로서 객관성이나 공정성, 익명성이라는 부문에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세계기록유산이 된 것입니다. 


정종실록의 표지 사진.

동북아 삼국 중 일본은 이런 역사 기록이 아주 일천한 반면, 중국은 이런 기록 시스템을 처음으로 만들어놓고도 제대로 가동시키지 않았다고 전해져 옵니다.

어떤 황제는 사관 제도를 제멋대로 없애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조선의 왕들은 그 기록들을 보지 못한 반면 중국의 황제들 가운데 일부는 보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지우라고 명하기도 했다. 
중국의 실록은 그냥 손으로 썼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실록은 단 4부를 만들면서도 아름다운 활자를 만들어 찍었습니다. 
어떤 나라가 문화국가인지???
우리 실록과 관련해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임진왜란 때 소실될 뻔한 것을 선비 두 분이 구해냈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전 이 실록은 도성을 비롯해 4 군데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임난 때 전주에 있는 것 빼고 모두 소실되고 맙니다. 
전주에 있는 것 역시 소실될 운명이었는데 ‘안의’와 ‘손홍록’이라는 선비 두 분이 내장산 속으로 피신시켜 간신히 살아남습니다. 
이 두 분이 세계유산을 살려낸것입니다. 
이 두 분이 안 계셨다면 실록은 ‘세계최대 단일왕조 역사서’라는 이름을 가질 수 없었을 겁니다. 
우리의 교과서에는 이 두 분을 기리기는커녕 언급조차 없습니다. 
꼭기록에 교과서에도 남아야 겠읍니다.
고려대장경을 구해내신 김영환 대령님과 더불어 이런 분들을 하루빨리 우리의 문화영웅으로 모셔야 하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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