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31일 수요일

도선비기. 道詵秘記. 1


도선비기. 道詵秘記.

도선비기의 주인공 도선국사 설화가 아닌 실존 인물.

도선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도선비기'이다 비기 하면 풍수지리설이 떠오르니
도선하고는 뗄레야 뗄수없는 관계라 할수 있겠다.

태조 왕건의 탄생을 예언한 스님이 도선국사 라고 하니
도선국사의 영향을 받은 왕건은 불교를 국가적으로 숭상하니...

고려의  불교가 무진장 발전할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난 설화속에 인물이줄 알았는데 이곳 광양에 와서야 실존 인물이란 사실이 놀랍기도 하다.
영암출신이라고 한다.

실제 영암에선  도선국사가 창건한 옥룡사는 풍수지리상 임금 왕의 명당터라고 한다.
그리고 땅의 기운을 보완하기 위해 도선국사가 심었다는 동백나무가 절 주위를
감싸 안고 있다.

비록 절은 사라지고 없어졌지만 동백나무만이 천년을 넘게 이터를 지키고 있다.
복원을 할려고 해도 관련 자료가 없어 복원은 힘들다고 한다.
대신 도선국사 사상관을 건립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곳에 도선국사 부도탑과 그의 제자 통진대사 부도탑이 있다.
또한 석관에 안치된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도선국사라고 한다.

화장의 불교 장례에서 보기드문 일이라고 한다.





도선, 道詵.


속성 김(). 호 옥룡자(). 전남 영암() 출생. 15세에 지리산 서봉인 월류봉(화엄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불경을 공부하고, 4년 만인 846년(문성왕 8) 대의()를 통달, 신승()으로 추앙받았다. 
이때부터 수도행각에 나서 동리산()의 혜철()을 찾아가 무설설무법법()을 배웠으며, 23세에 천도사(穿)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혜철(惠徹)에게서 무설설무법법(無說說無法法)을 배웠다. 
그의 음양지리설, 풍수상지법(風水相地法)은 조선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저서에 《도선비기(道詵秘記)》등이 있다.
운봉산()의 굴속에서 참선삼매()한 후, 태백산() 움막에서 고행하였으며, 전라도 희양현() 백계산() 옥룡사()에 머물다가 죽었다. 
헌강왕의 초빙으로 궁중에 들어가 왕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음양지리설()·풍수상지법()은 고려·조선 시대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친 학설이다. 
죽은 후 효공왕이 요공국사()라는 시호를, 고려 현종은 대선사(), 숙종은 왕사()를 추증했고, 인종은 선각국사()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의종은 비를 세웠다. 도선에 관한 설화가 옥룡사 비문 등에 실려 있다.
저서에 《도선비기()》 《도선답산가()》 외에도, 《송악명당기()》 등이 전한다.
스님의 법명은 도선, 자는 옥룡, 호는 연기이며 성은 김 씨다. 낭주(현 전남 영암) 구림촌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 김 씨가 처녀 시절 어느 해 겨울, 우물 속의 오이를 먹고 잉태하여 낳으므로 아버지가 없어 어머니의 성씨를 따랐다. 
그의 어머니는 도선을 낳은 후 아버지 없이 태어난 아이라 주위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워 숲속에 버렸는데 수많은 비둘기들이 날아들어 젖을 먹여주므로 신기하게 여겨 다시 데려다. 길렀다. 
아기 이름을 ‘비둘기 숲’이란 뜻의 구림이라 불렀다. 
13세에 당나라 배를 빌어 타고 당에 들어갔다.
당나라 일행 선사가 언젠가 제자들에게 ‘고을의 물이 거꾸로 흐르면 나의 도를 전할 사람이 올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었다. 
하루는 문도들 가운데 그 말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달려와 아뢰기를 “오늘 고을 물이 역류합니다.”라고 했다.

일행이 그 말을 듣고 곧 가서 장삼을 두르고 몸가짐을 단정히 한 다음 문 밖으로 나가자 그때 마침 도선이 찾아뵈려 막 당도하는 것이었다. 
일행이 “기다린 지 오래이거늘 왜 그리 늦었는가?” 하며 더불어 크게 기뻐하며 즉시 도선을 맞이하여 머물도록 했다.

도선이 그의 법도을 모두 터득하고 나서 떠날 뜻을 비치자 일행은 작별에 임해 “나의 도가 동쪽으로 가게 되었구나! 부디 잘 가게” 하며 아쉬워했다.

일행은 이어 세심하게 봉해진 붉은 책 한 권을 주면서 “조심해서 다루고 절대로 일찍 열어보지 말라, 
그대에게 왕 씨 일가를 부탁하노니 앞으로 7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열어보기 바란다.” 며 간곡히 당부했다.

도선이 송도에 이르러 왕륭의 집에서 유숙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하늘을 우러러 보고 땅의 이치를 살펴본 다음 감탄하며 “내년에 반드시 훌륭한 아들을 낳아 도탄에 빠져 고통 받는 백성들을 건지리라”고 예언했다.

왕륭은 그 말을 듣고 신을 거꾸로 신고 달려 나가 그를 맞아들였다. 
이듬해 과연 왕륭은 뒷날 고려를 건국하여 태조가 되는 왕건을 낳았다. 
은산비에는 도선이 일행으로부터 전수받았다는 비보설에 대해 대략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부처님은 정신과 육체의 모든 병을 다 고쳐주는 최고의 의원이다. 
그의 가르침으로 몸을 다스리면 각종 재난과 질병이 사라지고 마음을 다스리면 번뇌가 없어지며 산천토지를 다스리면 흉함과 해로움이 변하여 길함과 이로움으로 바뀐다.

비보설은 마치 약쑥과 같다. 
약쑥은 인간에게 매우 좋은 약이지만 질병이 없는 사람에게는 더러운 흙과 마찬가지여서 비록 집 안에 있다하더라도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병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훌륭한 의사를 만나서 그 쑥으로 쑥뜸을 뜨면 아무리 깊은 병도 즉시 낫는 게 메아리나 그림자보다도 신속하다. 비록 만금이 있다. 
해도 쑥의 가치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은 그 효험이 신비하기 때문이다.

저 동쪽에 위치한 너희 나라 삼한의 지세를 보면 여러 산들이 험악한 형세로 이루어진 곳이다. 물살 또한 급하기 짝이 없다. 
혹 용 같기도 하고 호랑이 같기도 하여 서로 다투는 형세가 있는가 하면 혹 새가 나르고 짐승이 달리는 듯한 형상도 있다. 
저쪽으로부터 공격해오는 형세도 있고 혹은 미약한 것이 끊어져 격을 이루지 못하는 형국도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병이 많은 사람과 같은 것이다. 
나라가 쪼개져 혹 구한이 되기도 하고 혹 삼한이 되기도 한다. 
서로 침략ㆍ정벌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고 도둑의 무리가 함부로 날뛰며 기후가 고르지 않아 홍수나 가뭄의 피해가 발생하는 것이 모두 이 때문이다.

그대는 지금 부처님의 교법으로 약쑥을 삼아 땅과 물의 병을 치료하도록 하라. 부족한 것은 더하고 지나친 것은 억제하며 내닫는 것은 그치게 하고 등진 것은 불러들이며 해치러 오는 것은 막고 서로 다투는 것은 금지시키며 좋은 것은 심어 번성케 하고 길한 것은 북돋는다. 
병든 땅의 형국을 보아 부도를 세우거나 혹은 탑을 설치하고 절을 건립하여 그 숫자가 3천 8백여 개소에 이르면 너희 나라 산천의 병통과 흠은 모습을 감추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비보설은 바로 병통을 치료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이 비보설에 따라 지세를 잘 다스린 후에야 비로소 너희 삼한은 뭉쳐 하나의 통일 국가를 이룰 수 있고 도둑들을 교화시켜 새로운 백성이 되게 하며 비ㆍ바람이 순조로워 농사의 때에 맞춰 주어 모든 백성들이 화목하고 순박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이다.

그후대의 임금과 신하들이 나라를 고루 잘 살도록 다스릴 수 있는 이와 같은 정치법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난감하게 된다. 
비보설에 대해 ‘함부로 아무 도움도 없는 일로써 나라를 번거롭게 하느니 차라리 물러나 길할지 혹은 흉할지를 관찰하는 게 낫다’고 할지도 모른다. 
병든 사람이 치효해 줄 의사를 기피하여 “함부로 효과도 없을 약을 복용함으로써 생명을 쇠잔하게 하느니 차라리 물러나서 치유 여부를 관찰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위독해진 뒤에 돌아본들 회복될 수 있겠는가.

도선은 일행 선사에게 비보설을 모두 전수받은 다음 당나라 회종 임금 건부 2년, 신라 헌강왕 1년 을미(875)에 귀국하니 그 때의 나이는 49세였다.

조정에 아뢰어 먼저 5백여 선종사찰을 건립하였다. 
당나라 소종 임금 광화 1년, 신라 효공왕 2년(898) 3월 10일 문득 열반에 드니 세수 72세였다.

도갑사의 비문은 이경석이 지은 것이다. 
전남 구례의 연곡사에 부도 2개가 있는데 하나는 도선의 부도이고 하나는 그 어머니의 부도이다.

전남 광주군 백계산의 옥룡사에 있는 비석 글은 고려 때의 문신인 최유청이 지은 것이다. 
스님이 지은 비문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다.

도선의 속성은 김 씨이고, 어머니는 김 씨이다. 
꿈에 어떤 사람이 맑은 구슬 1개를 주며 삼키라 하여 그것을 삼키고 임신하였다.
신라말의 승려이며 풍수설의 대사. 영암출신. 왕가의 후예라는 설도 있다.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에서 스님이 되었다.
그의 부모는 그가 반드시 진리를 깨달은 큰 인물이 될 것으로 확신하고 처음부터 그가 출가하여 스님이 되는 것을 마음속에 허락하고 있었다.

나이 15세에 이미 똑똑하고 조숙한데다. 
여러 재주도 터득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스님이 되었다. 
월유산 화엄사에서 대경을 공부했는데 1년도 지나지 않아 벌써 깊은 뜻을 파악하니 그곳에서 공부하던 많은 학인들이 모두 놀라 귀신같은 총명이라고 탄복했다.

신라 문성왕 8년(846)에 이르니 도선의 나이 20세였다. 
이 무렵 혜철 대사가 당나라의 서당지장 선사로부터 밀인을 전수받고 와서 전남 곡성 동리산에서 개당, 연설하여 배우는 이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교학을 공부하고 있던 도선은 이때 혜철 대사의 선문으로 들어가 제자 되길 청하여 나이 23세 때 구족계를 받았다.
도선은 827년(흥덕왕 2)에 태어나 898년(효공왕 2)까지 살다 간 선승이다. 
신라 하대에 새로 도입되어 당시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던 선종계통 승려로서,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동리산파의 개조 혜철(, 785~861)의 인가를 받아 전라남도 광양 옥룡사에서 독자적인 선문을 개설하고 있었다. 
풍수지리와 관련하여 한국풍수의 종조로 일컬어지며, 고려 태조 왕건(877~943)의 탄생을 예견하고 「훈요십조」에서 언급되는 등 고려의 개국과 관련이 있는 역사적 인물이다.

도선에 대한 기록은 후대에 가작된 신이한 전설이 대부분이며, 비문 역시 그 사후 252년이 지난 후에야 처음 등장하므로 명확한 사실 규명에 한계가 있다. 
도선에 관한 그 최초의 자료이자 가장 신빙성 있다고 알려진 것은 1150년 건립된 최유청()의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이다.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에 따르면 도선은, 선각국사()는 인종 때 추증 받은 도선의 시호이다. 
가계와 관련된 내용은 전하지 않으나 일설에 태종대왕 서얼의 자손이라고도 한다. 
15살에 화엄사로 출가하여 『화엄경』을 수학하고 다시 혜철대사를 찾아가 선()을 배웠다.

훗날 전라남도 광양 옥룡사에 오랫동안 머물렀는데 그를 추앙하는 학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선승()활동과 풍수지리 관련'

도선은 풍수지리와 관련한 술승()으로만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는 풍수가이기 전에 견실한 선승()이었다. 
도선의 생애와 활동과 관련하여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략 5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 1기는 15세까지의 유년기, 
제 2기는 15-20세의 화엄 수학기, 
제 3기는 20-23세의 선종 수업기, 
제 4기는 23-37세의 방랑수련기, 
제 5기는 37-72세의 옥룡사 주지기이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도선은 처음에 화엄종으로 출가하였지만 신라하대에 유입된 선종을 접하고 동리산 혜철을 찾아가 선을 배우고 전국을 유력하며 수행하였으며 스승인 혜철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었다.
비문에서 보이는 도선의 생애는 줄곧 선승으로서 일관된 삶이다.

선승이었던 도선이 누구로부터 풍수지리설을 익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비문의 내용상 일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중국에 유학하여 풍수지리를 배웠던 것 같지는 않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풍수지리설의 유포가 주로 선승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선종과 풍수지리설의 유입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위 비문에서는 도선의 일대기 서술이 끝난 뒷부분에 붙여, 도선이 옥룡사에 주석하기 전 지리산에 머물 때 한 이인()을 만나 남해의 바닷가 사도촌()이라는 곳에서 산천의 형세에 대해 배웠다고 하였다. 
깨달은 바가 있어 이후 음양오행의 술을 더욱 연구하여 유수한 비결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보아 도선은 20세부터 4년간 동리산에 머물다가 23세 때 구족계를 받은 후 전국 각처를 유력하게 되는데 이 기간 동안 선을 수행하는 한편 풍수지리 이론을 실제와 대조하면서 익혔던 것으로 추측된다.

도선은 방랑수련하면서 전국 산천의 형세를 유기적으로 파악하는 안목을 얻었다. 
신라하대사회의 해체를 눈앞에서 목격하고 신라왕실의 무력화와 지방에서 건실하고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고 있던 사회상에 대해 잘 인식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풍수지리설과 시대인식이 결부되어 지기쇠왕설()이나 비보사탑설()이 나오게 되었고, 그 결과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에 나타나는 것과 같이 전 국토를 재계획하는 성격의 풍수설이 제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고려의 풍수는 도선과 함께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고려사절요()』 제 1권 「태조신성대왕」조에 왕건의 아버지가 송악의 남쪽에 집을 지었는데 도선이 문 밖에 와서 이 집에서 성인이 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 태조 왕건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도선이 그의 탄생을 예견했다는 기록을 통해, 도선과 왕건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왕건이 17세 때 군사를 쓰고 진을 설치하는 데 필요한 지리 천시의 법과 산천에 제사 지내는데 관한 감통과 보우의 이치를 도선이 알려주었다는 기록은 훗날 왕건이 풍수지리설을 정치와 군사에 적용하고 도선의 가르침에 따라 국토를 비보하여 절을 세운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생몰연대상 실제로 왕건과 도선이 만난 일은 없었지만, 왕건이 도선 풍수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은 잘 알려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대 왕들에게 남기는 유훈인 「훈요십조」에서 “여러 사원은 모두 도선이 산수()의 순역()을 점쳐서 개창한 것이다. 
도선이 말하기를, ‘내가 점쳐서 정한 곳 외에 함부로 창건하는 일이 있게 되면 지덕()을 손상시켜 왕업이 오래지 못하리라.’ 하였다···.”라고 나와 있다.

이 내용에서 밝힌 도선의 설은 도선이 찬술했다는 『도선비기()』에 수록되었을 것으로 보는데, 『도선비기』는 원본이 전하지 않는다. 
도선이 찬했다고 전하는 저술들은 대체로 원본이 전하지 않으며, 현존하는 관련 저술들은 대체로 후대에 찬술되고 도선의 이름을 가탁했다고 보기도 하는데,대표적으로 『도선답산가()』가 있다.

풍수서 『도선답산가()』

『도선답산가』는 이상적 길지의 풍수를 노래한 한시집()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유일본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필사자나 필사연대는 불분명하며, 원본의 간행 여부도 알 수 없다. 
책은 「사험결()」 「도선답산가」를 비롯하여 「주마육임정국()」 「육갑천규도()」 「주자답산부()」 「설심부()」 「마상시()」 「금낭가()」 「지리종지()」 「도선산론기()」 「도선수파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금낭가」만 국한문혼용의 가사이고 나머지는 한시이다.

도선이 지었다고 전하는 「도선답산가」는 1구 7자, 1수 14자, 총 38수로 이루어진 칠언절구의 한시이다. 
대체로 4 · 3의 음율로 산수 형세의 변화에 따른 길흉에 대해 읊고 있다. 
주로 혈()을 중심으로 주위의 사()들에 의한 혈의 운세변화를 노래했다. 
풍수에서 사란 혈의 앞뒤와 왼쪽, 오른쪽에 있는 산을 말한다.

이 사방의 산들은 앞의 것을 주작(), 뒤의 것을 현무(), 왼쪽을 청룡(), 오른쪽을 백호()로 보아 혈을 수호하는 사신사()라고 한다. 
풍수에서 말하는 혈()이란, 땅의 기운이 모여 있는 곳으로 양택풍수의 경우 이 곳에 건물이 들어선다. 
「도선답산가」에는 이 사신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구절로 표현하고 있다.
   ······
  
위 구절은, “꼭대기 완만한 주작이 북소리처럼 일어나고, 현무의 드리운 머리가 두 물줄기 사이에 있구나······청룡이 편안하게 퍼지며 머리를 높이 일으키고, 백호는 천천히 가니 해치려 하지 않네.” 정도의 의미이다. 
완만한 안산인 주작과, 주산인 현무 앞으로 갈라져 들어오는 명당수(), 좌우에서 거역의 자세를 취하지 않고 혈을 감싸 안은 듯한 청룡과 백호의 모습을 읊은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전통적인 풍수지리 명당의 지세를 노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도선에서 시작하여 고려시대를 풍미한 풍수지리사상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풍수와 관련된 수많은 저술들이 탄생했다. 
『도선답산가』 역시 그 중 하나인데, 여기에 실린 전() 도선 찬술의 「도선답산가」는 현재 알려진 유일한 한시체 「도선답산가」로 보인다. 
이 작품은 이후 파생되는 수많은 풍수가사의 시작이 되었으리라 여겨진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풍수가사란 풍수와 관련된 내용을 담아 가사체 형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한문뿐 아니라 국한문혼용의 풍수가사도 다수 전한다. 
이들 풍수가사 중에는 ‘~답산가’ 형식의 제목이 많은데 그 내용이 대체로 유사하여, 「도선답산가」와 함께 그저 「답산가」로 통칭되기도 한다. 
「주자답산가」 「옥룡자답산가()」 「최해운답산가()」 등이 대표적이다.


신라 헌강왕이 도선의 높은 인품을 존경하여 사신을 보내 궁중으로 맞아들였는데 처음의 만남임에도 서로 오랜 벗처럼 친근감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도선은 차원 높은 담론과 묘한 도리로써 임금의 마음을 깨우쳐 주고는 얼마 되지 않아 본래의 절로 돌아왔다.

어느 날 제자를 불러 말하기를 “내가 이제 가야겠다.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떠나는 것은 만고불변의 이치이니 무엇 하러 더 여기 있을 것인가?” 하고 홀연 열반에 들었다. 
중국 광화 1년, 신라 효공왕 2년(898) 3월 10 일이었는데 나이 72세였다.

절 뒤편 언덕으로 스님의 사리를 옮기고 탑을 세우니 그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효공왕이 스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하며 시호를 추증하여 요공선사, 탑호를 증성혜등으로 하도록 했다.

문인 홍적 등이, 스님의 빛나는 행적이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까 걱정하여 임금께 글을 올려 기록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임금께서 박인범에게 명해 비문을 짓도록 했으나 끝내 돌에 새기지 못하고 말았다. 
고려 현종 임금이 대선사로 추증하고 숙종 임금이 다시 높여 왕사로 추증했으며 공효왕이 선각국사로 봉했다.

스님이 전한 음양설 여러 편이 세상에 알려졌는데 후세의 지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최고본으로 삼았다. 
비문 끝부분에 이러한 내용이 있다.

천덕 2년 경오 7월 을해 9일 계미에 세우다.

평하노니 이경석과 최유청의 두 비문은 서로 엇갈리는 설이 있어 믿을 수 없다. 
부모의 성씨 및 일행에게 배웠다는 기록이 없는 것이다.

도선의 명망이 높아지자 헌강왕(, 재위 875~886)이 깊이 존경하여 궁으로 불러 머물게 하기도 하였는데, 그는 곧 옥룡사로 다시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도선은 옥룡사에서 많은 제자를 기르다가 세수 72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입적 후 효공왕이 서서학사() 박인범()에게 비문을 짓기를 명하였으나 비석이 세워지지 못하다가, 고려조에 가서야 1150년(의종 4) 비석이 건립되게 된다.
고려 현종(, 재위 1009-1031)이 대선사()의 법계를 추증하였으며, 이후 다시 숙종(, 재위 1095-1105)이 왕사()로, 인종(, 재위 1122-1146)이 국사()로 추대하였다.

"광양 옥룡사지전남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 사적 제407호. 백계산안에 있으며 도선국사가 35년간 머무르면서 수백명의 제자를 길러내고 열반에 든 곳으로 불교역사에 있어서 매우 소중한 곳이다. 이름 또한 도선의 호인 "옥룡자"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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