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4일 수요일

관음사 ,觀音寺.

관음사 ,觀寺.

요약 황해북도 개성시 박연리 천마산 기슭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찰.
지정번호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25호
소재지개성시 박연리 천마산
시대조선시대
종류/분류사찰유적
북한의 보물급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25호로 변경되었다. 박연리 대흥산성 북문에서 약 1km 정도 거리의 천마산 기슭에 있다. 
970년(고려 광종 21) 법인국사() 탄문()이 처음 세우고, 1393년(조선 태조 1)에 크게 확장하였다. 

1477년(성종 8)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1646년(인조 23)에 다시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1797년(정조 21)에 중수한 것이다.

경내에는 현재 대웅전·승방·칠층석탑·관음굴이 남아 있다. 

승방 중앙에 난 문으로 들어가면, 마당 안쪽에 대웅전이 있고 그 서쪽에 7층석탑, 북쪽으로 관음굴이 있다.

대웅전은 장대석을 쌓아올린 높은 기단 위에 있으며, 정면 3칸(8.4m), 측면 3칸(6.61m)의 겹처마를 댄 다포계 우진각지붕집이다. 
배흘림기둥을 사용하였고, 모서리기둥에 귀솟음과 안쏠림 기법을 사용하여 안정감을 주었다. 

공포 장식은 외부는 쇠서형으로 비교적 길게 뽑고 내부는 교두형()과 운공형()으로 처리하여 운공 위에 연꽃 봉오리를 장식했다. 
모서리에는 용머리를 장식했다. 

창호는 꽃살문으로 달았는데, 특히 화병에 담긴 연꽃을 동판에 새긴 후면창호는 그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내부에는 중층 닫집을 설치하고 그 아래 불단을 놓았다. 
천장에 학, 봉황 조각으로 장식하고 안팎을 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승방은 정면 4칸(10.7m), 서쪽 측면 4칸, 동쪽 측면 2칸의 'ㄴ'자형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에 대문채가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7층석탑은 높이는 약 4.7m로, 고려 때 조성되었다. 
단층기단 위에 7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쪽대기에 상륜을 장식한 석탑이다.

대웅전 뒤쪽에 있는 관음굴은 관음사가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현재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54호로 지정된 대리석관음보살상이 2구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평양시의 중앙역사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공포와 내부 장식 등 조선 중기 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물이다. 

1400년(조선 태종 즉위년)에는 태종이 이 절에서 수륙재를 열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운나라는 소년이 손재주가 너무 좋아 관음사 대웅전 꽃살문을 만드는 데 동원되었다가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하자 자신을 왼손을 잘라 버리고는 손 잘린 자신의 모습을 살문에 조각해 놓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도 손 잘린 운나의 모습이 대웅전 꽃살문에 남아 있다.

북한의 보물급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25호로 변경되었다. 박연리 대흥산성 북문에서 약 1km 정도 거리의 천마산 기슭에 있다. 

970년(고려 광종 21) 법인국사() 탄문()이 처음 세우고, 1393년(조선 태조 1)에 크게 확장하였다. 
1477년(성종 8)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1646년(인조 23)에 다시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1797년(정조 21)에 중수한 것이다. 

경내에는 현재 대웅전·승방·칠층석탑·관음굴이 남아 있다. 
승방 중앙에 난 문으로 들어가면, 마당 안쪽에 대웅전이 있고 그 서쪽에 7층석탑, 북쪽으로 관음굴이 있다. 

대웅전은 장대석을 쌓아올린 높은 기단 위에 있으며, 정면 3칸(8.4m), 측면 3칸(6.61m)의 겹처마를 댄 다포계 우진각지붕집이다. 
배흘림기둥을 사용하였고, 모서리기둥에 귀솟음과 안쏠림 기법을 사용하여 안정감을 주었다. 

공포 장식은 외부는 쇠서형으로 비교적 길게 뽑고 내부는 교두형()과 운공형()으로 처리하여 운공 위에 연꽃 봉오리를 장식했다. 

모서리에는 용머리를 장식했다. 창호는 꽃살문으로 달았는데, 특히 화병에 담긴 연꽃을 동판에 새긴 후면창호는 그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내부에는 중층 닫집을 설치하고 그 아래 불단을 놓았다. 
천장에 학, 봉황 조각으로 장식하고 안팎을 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승방은 정면 4칸(10.7m), 서쪽 측면 4칸, 동쪽 측면 2칸의 'ㄴ'자형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에 대문채가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7층석탑은 높이는 약 4.7m로, 고려 때 조성되었다. 
단층기단 위에 7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쪽대기에 상륜을 장식한 석탑이다. 

대웅전 뒤쪽에 있는 관음굴은 관음사가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현재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54호로 지정된 대리석관음보살상이 2구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평양시의 중앙역사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공포와 내부 장식 등 조선 중기 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물이다. 
1400년(조선 태종 즉위년)에는 태종이 이 절에서 수륙재를 열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운나라는 소년이 손재주가 너무 좋아 관음사 대웅전 꽃살문을 만드는 데 동원되었다가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하자 자신을 왼손을 잘라 버리고는 손 잘린 자신의 모습을 살문에 조각해 놓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도 손 잘린 운나의 모습이 대웅전 꽃살문에 남아 있다.  


위치개성특급시 박연리 천마산 기슭
연혁970년(고려 광종 2) 법인국사() 탄문()이 창건
1393년(태조 2) 중건
임진왜란 때 소실
1646년(인조 24) 중건
1797년(정조 21) 중수
대웅전 아미타삼존불상(금동)(大雄殿 阿彌陀三尊佛像)

대웅전 아미타삼존불상(금동)(大雄殿 阿彌陀三尊佛像)
출처: 북한의 전통사찰

970년 고려 태조 왕건으로부터 '별대덕()', '별화상()'으로 칭송받던 법인국사() 탄문()이 굴 안에 관음보살상 한 쌍을 놓고 '관음굴'이라고 불렀고, 그 후에 관음사가 지어졌다. 
1393년에 크게 확장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1646년에 다시 지었다. 

1797년 고쳐 지을 때 5채의 당우가 있었던 것으로 전하지만 지금은 대웅전과 승방만 남아 있다. 
대웅전 앞에는 고려 시기 석조물인 7층석탑이 있고, 옆에는 관음사가 창건되기 전부터 있었다는 관음굴이 있다.

대웅전은 1.7m의 기단 위에 정면 3칸(8.4m), 측면 3칸(6.61m)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절 건물에서는 보기 드물게 겹처마를 댄 우진각지붕을 이었다. 
건물의 앞면은 기둥 사이를 같게 하고, 옆면은 가운데 칸을 좌우 칸보다 넓게 했다. 
공포는 바깥 7포, 안 9포로 되어 있으며, 모두 32개이다. 
북한의 국보유적 제125호로 알려져 있으나 표식비에는 국보유적 제142호로 표기되어 있다.

관음사(국보급 제125호) 전경
관음사(국보급 제125호) 전경
출처: 조선향토대백과

요사채는 앞면 4칸(10.7m), 서쪽 측면 4칸, 동쪽 측면 2칸인 'ㄴ' 모양의 평면을 가진 배집이다.

대웅전 옆 관음굴 안에는 흰 대리석의 관음보살좌상 2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높이 약 1.2m로 크지 않으나 화려한 보관과 가슴에 드리운 영락과 천의 등이 마치 무른 나무로 조각한 듯 화려하고 섬세하여 고려 석조불상 가운데 대표작이다. 

하나는 두 손을 무릎 위에 드리웠으며, 하나는 왼손 팔꿈치를 무릎 위에 세우고 오른손을 무릎 위에 놓아 차이가 난다. 

현재 전자는 조선중앙력사박물관으로 이동해 보존하고 있고, 후자는 관음굴에 그대로 있다. 
국보유적 제154호로 지정되어 있다.



관음사돌부처(국보급 제154호)
관음사돌부처(국보급 제154호)
북한의 보물급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25호로 변경되었다. 

박연리 대흥산성 북문에서 약 1km 정도 거리의 천마산 기슭에 있다. 

970년(고려 광종 21) 법인국사() 탄문()이 처음 세우고, 1393년(조선 태조 1)에 크게 확장하였다. 

1477년(성종 8)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1646년(인조 23)에 다시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1797년(정조 21)에 중수한 것이다. 

경내에는 현재 대웅전·승방·칠층석탑·관음굴이 남아 있다. 

승방 중앙에 난 문으로 들어가면, 마당 안쪽에 대웅전이 있고 그 서쪽에 7층석탑, 북쪽으로 관음굴이 있다. 

대웅전은 장대석을 쌓아올린 높은 기단 위에 있으며, 정면 3칸(8.4m), 측면 3칸(6.61m)의 겹처마를 댄 다포계 우진각지붕집이다. 

배흘림기둥을 사용하였고, 모서리기둥에 귀솟음과 안쏠림 기법을 사용하여 안정감을 주었다. 

공포 장식은 외부는 쇠서형으로 비교적 길게 뽑고 내부는 교두형()과 운공형()으로 처리하여 운공 위에 연꽃 봉오리를 장식했다. 

모서리에는 용머리를 장식했다. 
창호는 꽃살문으로 달았는데, 특히 화병에 담긴 연꽃을 동판에 새긴 후면창호는 그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내부에는 중층 닫집을 설치하고 그 아래 불단을 놓았다. 
천장에 학, 봉황 조각으로 장식하고 안팎을 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승방은 정면 4칸(10.7m), 서쪽 측면 4칸, 동쪽 측면 2칸의 'ㄴ'자형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에 대문채가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7층석탑은 높이는 약 4.7m로, 고려 때 조성되었다. 
단층기단 위에 7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쪽대기에 상륜을 장식한 석탑이다. 

대웅전 뒤쪽에 있는 관음굴은 관음사가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현재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54호로 지정된 대리석관음보살상이 2구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평양시의 중앙역사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공포와 내부 장식 등 조선 중기 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물이다. 
1400년(조선 태종 즉위년)에는 태종이 이 절에서 수륙재를 열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운나라는 소년이 손재주가 너무 좋아 관음사 대웅전 꽃살문을 만드는 데 동원되었다가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하자 자신을 왼손을 잘라 버리고는 손 잘린 자신의 모습을 살문에 조각해 놓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도 손 잘린 운나의 모습이 대웅전 꽃살문에 남아 있다.  

















































































































관음사 7층탑( )관음사 7층탑은 대웅전 앞에 있는 석탑으로 높이는 4.77m이다. 기단은 밑돌과 갑돌이 복련과 양련조각으로 된 연꽃대좌형 기단이다. 
보존유적 제540호.

관음사7층탑(보존급 제540호)
관음사7층탑(보존급 제540호)

관음사(국보급 제125호) 거북이바위관음사(국보급 제125호) 거북이바위



관음사(국보급 제125호) 보살동굴관음사(국보급 제125호) 보살동굴

970년에 지은 관음사는 1393년에는 크게 확장 되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듭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646년에 고쳐지은 것이다. 
원래 다섯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관음사에는 지금 대웅전과 승방, 7층탑과 관음굴이 남아있다. 
절의 중심건물인 대웅전은 정면 3칸(8.4m), 측면 3칸(6.61m)의 크지 않은 건물이다.

대웅전의 평면배치에서 흥미있는 것은 장여와 장여 사이의 간격을 배수로 하여 두공을 배렬하고 평면을 이룬 것이다. 
이 절에 세운 홀림기둥은 굵기는 43cm, 높이는 2.83m로서 높이가 밀굵기의 6.58배나 된다. 
모서리기둥은 밑굵기 45cm로서 가운데기둥보다 굵으며 높이는 더 높게 하고 대각선방향으로 조금씩 기울여 세웠다.

평방 위에는 바깥 7포, 안 9포로 된 화려한 포식두공을 놓았다. 
두공은 매개 기둥 위마다 1개씩 놓는 한편 정면과 측면 가운데칸에서는 기둥사이마다 2개씩, 측면 두 가녘 기둥 사이에는 1개씩 놓아 모두 32개이다. 
소혀형제공으로 하면서 비교적 길게 뽑은 것이 특이하며 네 모서리와 정면 가운데기둥들의 두공 위에는 용머리조각을 하였다. 
건물 안에는 소람반자를 높이 대고 거기에 잇대어 좁은 빗반자를 중도리까지 올려붙였다. 
집 안 깊숙이 불단을 놓고 그 위에는 이층 짜리 닫집을 달아놓았다.

17포나 되게 섬세하게 짜올리고 붉은 빛이 돌게 한 닫집은 그 자체가 하나의 공예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화려하다. 
관음사에는 겹처마를 댄 우진각지붕을 하였다. 
지붕의 용마루는 짧게 하면서도 마루들과 지붕면, 처마에 이르기까지 완만한 휘임을 주어 몸체에 잘 어울리며 아름다워 보인다. 
건물전체에 입힌 금단청은 퍽 은근한 감을 준다.

이 절의 뒤벽에는 뚫음새김으로 장식한 문짝이 달려있는데 한짝은 완성된 것이고 하나는 채 완성되지 못한 것이다. 
대웅전 앞 서쪽에 서 있는 높이 4.77m의 7층탑은 고려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우수한 탑이다. 
승방은 정면 4칸(10.7m), 서쪽측면 4칸, 동쪽 측면 2칸되는 ‘ㄴ’모양의 평면을 가진 뱃집이다. 
관음사뒤의 관음굴은 관음사가 서기 전부터 있던 것이다. 
그 안에 있던 2개의 관음보살상은 옛날의 조각상으로서는 매우 보기 드문 대리석상이다. 
유백색대리석으로 조각한 높이 1.2m 정도의 앉은 모양의 관음상은 머리에 화려한 관을 쓰고 여러 가지 몸치레를 하였으며 부드럽게 드리운 옷주름은 섬세하고 아름답다.

관음사 대웅전 뒤쪽의 미완성 문짝 하나를 두고 다음과 같은 기막힌 사연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이곳에 나이는 어리지만 손재간이 비상한 운나라는 소년이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관가에서 나졸들이 마을에 달려들어 관음사 절건설에 나어린 운나까지 강제로 끌고 갔다. 
절건설에 동원된 운나는 대웅전 문짝의 장식을 조각하였는데 누구도 그의 재간을 따를 수 없었다.

그가 문짝들을 다 조각하고 이 마지막 문짝을 조각하고 있던 어느 날 어머니의 병이 위급하다는 소식에 접하게 되었다. 
홀로 병석에서 신음하고 있을 어머니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던 소년은 집에 잠깐 다녀오게 해달라고 간청하였으나 매정하고 포악한 통치자들은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아들을 애타게 찾다가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는 비통한 소식을 전해듣게 된 운나는 크나큰 슬픔과 간악한 통치자들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자기의 손재간을 원망하며 다시는 그들을 위해 자기의 재간을 바치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칼로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버리고는 절을 뛰쳐나와 농민군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대웅전 문짝중의 하나만은 지금까지 미완성품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고 한다.


관음사(국보급 제125호) 목욕탕

관음사(국보급 제125호) 목욕탕

유의 

  • **본 내용는 1999~2005년 남북공동 편찬사업에 의해 발간된 자료로서,
    북한에서 사용되는 표현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북한 자료의 특수성으로 내용의 최신성이나 이미지의 선명도가 다소 떨어지는 점 양해 부탁 드리겠습니다.


참조

[네이버 지식백과] 관음사 [觀音寺] (조선향토대백과, 2008., (사)평화문제연구소)
관음사 [觀音寺] (북한의 전통사찰, 2011. 6. 10., 도서출판 양사재)

관음사 [觀音寺] (두산백과)

관음사 관음보살상 "觀音寺觀音菩薩像.

관음사 관음보살상

"觀像.


유형유물
시대고려/고려전기
성격불상
소장처관음사
제작시기·일시미상
수량2구
재질대리석

관음사 관음보살상. 
이 불상은 원래 관음사 뒤의 관음굴에 모셔졌던 대리석 보살좌상으로 2구가 있었다고 한다. 
머리에는 앞 부분에 화불(化佛)이 있는 사각형의 각이 진 화려한 관을 썼다. 
얼굴은 이마가 편평하고 넓고 밑으로 내려오면서 타원형으로 둥근데, 눈·코·입이 가운데로 모아져 있다. 
고려시대의 불상 가운데 중국 송대의 영향이 가장 짙게 반영된 상이다.


개성시 산성리 관음사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관음보살상.


관음사 관음보살상은 관음사 뒤편의 관음굴에 있었던 불상이다. 
이 관음보살상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원통형 보관을 착용하였다. 

몸에는 화려한 영락장식과 장신구로 치장되어 있다. 
자세는 왼발을 올려 반가부좌를 틀고 오른발은 아래로 내린 반가좌 형식이다.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실시한 ‘북녘의 문화유산’ 전시회에 출품되기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輿)』 ‘불우()’조를 보면 개성의 박연폭포 상류에 두 석상이 안치된 관음굴이 있는데, 광종대 창건되어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 관음보살상의 조성 시기도 광종대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관음사 관음보살상이 광종 때에 만들어 졌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또하나의 근거는 보살상 이마에 표현된 ‘팔()’자 형의 머리카락 모습이다. 
보살상의 이마 위에 팔자형의 머리카락이 표현된 사례는 952년(광종 3) 중국의 후주에서 조성되었으며 현재 미국의 넬슨·애킨스 미술관에 소장된 ‘쌍보살도’에서도 확인된다. 

이 불화의 보살 머리카락과 관음사 관음보살상의 이마에 표현된 ‘팔’자 형 머리카락은 동일한 모습이다. 
이러한 머리카락의 표현 양식은 중국에서 유행한 양식을 고려에서 광종대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관음사 관음보살상의 구체적인 조성 시기는 광종대 후반인 970년(광종 21) 이후로 추정된다. 
이 불상과 유사한 형태의 불상이 970년에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대만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요()의 시기에 제작된 금동보살상의 대좌 뒷면에는 ‘보녕이년()’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이 시기는 970년에 해당한다. 

관음사 관음보살상과 이 금동보살상은 형태적으로 거의 유사한데, 원통형 보관, 반가부좌한 자세, 다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화려한 영락장식 등 직접 모방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흡사하다. 
970년경에 제작된 대만 역사박물관소장 금동보살상과 비슷한 보살상이 고려에 전래되어 이를 모방하여 관음사 관음보살상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보살상의 머리카락 모양, 대만 역사박물관 소장 금동보살상의 존재 등을 고려하면 관음사 관음보살상은 970년 이후 광종 집권 후반기에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명승지인 박연폭포 인근의 관음굴에 대리석으로 제작한 화려한 불상이 있다는 점에서, 관음사 관음보살상은 고려시대 당시에도 크게 유명세를 탔을 것으로 보인다. 

광종이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장소에 자비의 상징인 관음보살상을 만든 배경은 『고려사()』의 ‘광종 19년’조의 기록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다. 
광종은 즉위 19년까지도 가차 없는 숙청을 단행해 수 많은 사람을 처형하였다. 
특히 집권 후반기 광종의 모습은 무자비한 폭군의 이미지로 알려졌으며 광종의 통치에 반발하는 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불교의 인과응보설을 믿었던 광종은 자신의 과업을 소멸하기 위해 많은 불사를 시행하였고 참회도량을 자주 개최하였다. 
관음사 관음보살상의 조성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불사를 통해 수복멸죄()하고 정치적 반발을 유화책으로 무마하고자 했던 광종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고려 광종을 보는 또 다른 시각: 미술사와 고고학을 통하여」(정성권, 『한국인물사연구』19, 2013)
  • 「개성 관음굴 석조보살상과 송대 외래요소의 수용」(정은우, 『시각문화의 전통과 해석』, 2007)
  • 『한국의 사찰문화재』(문화재청, 2003)
  • 문화재청(www.cha.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관음사 목조관음보살상 (觀音寺木造觀音菩薩像)

관음사 觀音寺
목조관음보살상 , 木造觀音菩薩像.


시도유형문화재 제216호
이 보살상은 1650년(효종 1)에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조각승 무염(無染), 성수(性修), 경성(敬性)에 의해 조성된 불상으로 17세기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체에 비해 다소 얼굴이 크지만 안정감 있는 자세, 오똑한 코, 단정한 결가부좌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 

조성연대가 확실하고 주로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한 조선후기 조각승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유형유적
시대조선/조선후기
성격불교조각
건립시기·연도17세기
규모(면적)불상 1구, 복장유물일괄
소재지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양지길 92-38(소천리 1224)
소유자관음사
관리자무주군
문화재 지정번호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16호
문화재 지정일2009년 10월 09일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 소재 관음사 법보전 내부에 보관된 조선 중기의 목조불상.

1650년(효종 1)에 전라도 일대에서 대표적으로 활동하던 조각승 무염() 등에 의해 조성된 불상으로 조성연대가 확실하고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체높이 61㎝, 어깨폭 24㎝, 무릎 38㎝ 내외 크기의 목조불상이다.
2009년 10월 9일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16호로 지정되었고, 관음사에서 보존, 관리해오고 있다.

관음사 목조관음보살상은 무주 관음사 법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보살좌상으로, 중형의 보살상이다. 

전체적으로 신체에 비하여 두부()가 다소 큰 편으로, 머리를 약간 숙이고 결가부좌()하였다. 

머리에는 화문()과 운문() 등으로 장식된 화려한 보관을 썼으며 정상부에는 높고 길쭉한 보계()를 표현하였다. 

이마 부분에는 빗으로 빗은 듯 머리카락이 가지런히 표현되었는데, 보발은 귀의 중간 부분을 감싸고 흘러내리다가 어깨 위에서 세 가닥으로 갈라져서 팔뚝 위로 흘러내렸다.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지만 턱 부분에 살이 올라 부드러워 보인다. 

미간에는 백호()가 선명하며, 활형[]의 가는 눈썹과 가늘면서 약간 위로 치켜뜬 반개()한 눈, 오똑한 콧날, 꾹 다문 얇은 입술 등은 조선 중후기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신체는 안정감이 있고 균형이 잘 잡혀있는 편으로, 어깨 폭이 넓지 않아 아담하면서도 단정해 보이며 결가부좌한 무릎 폭도 적당하다. 

양 어깨에는 조선 후기 보살상에게 흔히 볼 수 있듯이 천의가 아닌 통견의 법의를 걸치고 있다. 

법의는 목 뒷부분이 약간 접혀있으며 왼쪽의 법의는 왼쪽 어깨를 완전히 가리고 어깨에서부터 무릎 부분까지 내려오면서 무릎 위에 놓인 왼손을 손목 부분까지 완전히 덮고 있다. 

오른쪽에는 안쪽에 통견으로 법의를 걸친 뒤 다시 법의 한자락이 어깨를 덮고 있는데, 안쪽의 법의 자락은 오른쪽 팔꿈치 아래로 하여 배 부근으로 내려가 왼쪽에서 내려온 법의 안쪽으로 여며진 모습이다. 

이와 같은 착의법은 넓게 트인 가슴, 수평의 군의()와 함께 조선 후기 불상의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올려 첫째와 셋째 손가락을 마주 잡고 있는데, 손바닥 쪽으로 길쭉한 모습의 정병이 끈으로 매달려 있다. 

왼손은 왼쪽 무릎 위에 대어 첫째와 셋째 손가락을 마주 잡고 있는데, 두 손은 모두 별도로 제작하여 끼워놓았다. 

자세는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데, 오른쪽 발끝 부분을 왼쪽 법의 자락으로 살짝 덮었다.

보살상의 밑부분에는 복장공()이 마련되어 불상 조성 발원문과 경전류 등이 들어 있었다. 

불상 발원기는 앞부분에 시주질을 적고 뒷부분에 화원 등 연화질()과 조성 연대를 기록하였으며, 제일 마지막 부분에 중수연대를 적었다. 

발원기에 의하면 이 보살상은 1650년(효종 1)에 화주 덕인()이 조성하였고, 1676년(숙종 2)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화원은 무염(), 성수(), 경성()이라고 적혀있다. 
화원’이라는 명칭 아래 크게 적혀있는 성수, 경성과는 달리 무염은 작고 가는 글씨로 성수 이름 윗부분에 적어놓았다. 

이로써 본다면, 무염은 불상을 제작할 때에 처음부터 관여하지 않았다가 1676년(숙종 2) 중수할 때에 참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원기에는 존상의 명칭과 봉안사찰 등이 적혀있다.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없지만, 보살상의 규모가 크지 않은 점을 미루어 볼 때, 독존상으로 조성되었다기보다는 삼존불상의 협시보살 중 하나라고 추측된다. 

이 상의 존명에 대해서는 왼손에 정병을 들고 있어 관음보살상으로 보기도 하지만 오른손은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고 정병은 따로 끈으로 매달아 놓았기 때문에 정병이 조성 당시의 것이었는가는 알 수 없다.  

‘관음보살상’이라고 한다면 보통 표현되어야 하는 보관의 아미타화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존상의 명칭도 확언할 수 없다. 

이 보살상이 무염과 경성이 함께 제작한 전라북도 완주 정수사 삼존불상 중 관세음보살과 착의법, 신체표현, 목걸이 장식 등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관음보살일 가능성이 크다.

이 보살상은 1650년(효종 1)에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조각승 무염, 성수, 경성에 의해 조성된 불상으로 신체에 비해 다소 얼굴이 크지만 안정감 있는 자세, 오똑한 코, 단정한 결가부좌의 자세를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조성연대가 확실한 이 보살상은 17세기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을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한 조각승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 「고려 광종을 보는 또 다른 시각: 미술사와 고고학을 통하여」(정성권, 『한국인물사연구』19, 2013)
  • 「개성 관음굴 석조보살상과 송대 외래요소의 수용」(정은우, 『시각문화의 전통과 해석』, 2007)
  • 『한국의 사찰문화재』(문화재청, 2003)
  • 문화재청(www.cha.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