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2일 일요일

幸州大捷

幸州大捷"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군을 대파한 싸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권율은 임진왜란 초에 광주목사(使)로 있으면서 군사를 일으켜 전공을 세워 전라도 순찰사(使)가 되었는데, 그 뒤 중국 명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수원성()에 머물다가, 1593년(선조 26) 2월 1만여 병력을 행주산성에 집결시켰다. 권율은 조방장() 조경()을 시켜 행주산성을 수축하게 하고 목책을 만들게 하였으며, 병사(使) 선거이()는 금주(:), 창의사(使) 김천일()은 강화(), 충청감사 허욱()은 통진(:)에서 각각 그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한편 일본군은 이 무렵 총퇴각을 감행하여 서울 부근으로 집결할 때였으므로 그 병력이 대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1월 말의 벽제관()에서 승리한 직후여서 그들의 사기 또한 충천해 있었다. 2월 12일 새벽 일본군은 3만여 병력으로 내습, 여러 겹으로 성()을 포위하고 3진으로 나누어 9차례에 걸쳐 종일토록 맹공격해왔다. 이에 권율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왜군과 맞서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였으며, 당시 행주산성의 싸움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마침내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는데, 권율은 이를 추격하여 130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깃카와 히로이에[] 등에게도 부상을 입혔다. 행주산성의 전투는 임진왜란의 3대첩() 중의 하나로, 권율은 이 공로로 도원수()가 되었다. 당시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석전()으로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때문에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상세내용
임진왜란 때인 1593년 2월에 전라도관찰사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
권율은 왜란 초 전라도 광주목사로 있으면서 1592년 7월 배티전투에서 대승한 공으로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는데, 관군과 명군이 평양을 수복한 후 남진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다가 수원 독산성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근거지를 경기도 고양의 행주산성에 주둔하면서 은밀히 군사를 이곳으로 옮긴 뒤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을 견제하였다. 이때 죽산에서 패한 소모사 변이중이 정병 1,000명을 거느리고 양천에 주둔하며 권율을 도왔으며, 승장 처영도 승병 1,000명을 이끌고 권율을 따라 강을 건너니 이 산성에 포진한 총병력은 1만명 정도였다.
이에 왜군은 배티와 독산성에서 치욕적인 대패를 설욕하고 후방의 위험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행주산성을 공격하기로 결의하였다. 왜군은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의 지휘하에 3만여 명의 병력을 7개 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으로 진군하였다. 한편, 성 안의 관군은 변이중이 만든 화차와 권율의 지시로 만든 수차석포라는 특수한 무기로 무장하였고, 병사에게는 재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허리에 차게 하였다.

마침내 1593년 2월 12일 아침 일본군의 선봉 100여기가 나타나더니 뒤이어 대군이 밀려왔다. 그러자 성 안의 아군은 일시에 화차에서 포를 발사하고, 수차석포에서 돌을 뿜어내며, 진천뢰·총통 등을 쏘아대니 몰려들었던 적은 궤멸상태에 빠져 물러갔다.

그러자 전투상황을 지켜보던 총대장 우키타는 직접 선두에 나와 지휘하니 그들은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계속 전진하여 접근하자 관군은 한때 동요하였으나 권율의 독전으로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으며, 화차의 총통이 적장에게 집중 사격되어 우키타는 부상을 입고 퇴진하였다.

그러나 남은 군사들이 뒤를 이어 화통으로 성책의 일부를 집중 발사하여 불이 붙게 하였으나 관군은 미리 마련한 물로 꺼버리고 화살과 돌로 공격을 하는 한편, 차고 있던 재를 적의 진영에 뿌리자 눈을 뜰 수 없게 된 적군은 후퇴하고 말았다. 이에 왜군은 마지막 남은 부대가 산성 서북쪽을 지키던 승군의 일각을 뚫고 성 안에까지 돌입하려 하자 급박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때 권율은 대검을 빼어들고 승군의 총공격을 명하자 일본군과 치열한 백병전에 돌입하였다. 이때 옆 진영의 관군도 화살이 다하여 투석전을 폈는데, 특히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 적을 공격케 함으로써 큰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적도 다시 기세를 올려 공격을 멈추지 않아 곤란한 상태에 빠졌으나 마침 경기수사 이빈이 수만 개의 화살을 실은 배 두 척을 몰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적의 후방을 칠 기세를 보이니, 적은 당황하여 내성에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성 안의 관군은 이를 알아차리고 일제히 추격하여 적을 완전히 물리쳤다. 이것이 유명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이 전투는 권율의 효과적인 방어 준비 태세에 의한 승리로서 왜군의 서울 방어 작전을 교란시켜 조선군의 사기가 고양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내용
권율은 왜란 초 광주목사(使)로 있으면서 1592년(선조 25) 7월 배티〔〕싸움에서 대승한 공으로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권율은 관군과 함께 평양을 수복한 뒤, 남쪽으로 내려온 명나라의 원군과 호응해 서울을 되찾기 위해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북상하던 중 수원 독산성(禿)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어 그는 군대를 서울 근교 서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조방장() 조경()에게 적당한 지역을 물색하도록 하였다.
조경은 양천()에서 한강을 건너 병력을 주둔시킬 만한 곳을 찾아내어 권율에게 보고하였다. 권율은 서울 주변인 안현()에 진을 치려고 했으나 막하 장수들이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조경이 물색한 곳으로 결정했는데, 이 곳이 행주산성이다. 권율은 행주산성에 조경으로 하여금 목책()을 완성하게 하고, 은밀히 군사를 이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휘하 병력 중 4,000명을 뽑아 전라도병사 선거이() 지휘 하에 금천( : 지금의 시흥)에 주둔시켜 서울의 적을 견제하였다. 이 때 죽산에서 패한 소모사(使) 변이중()도 정예병 1,000명을 거느리고 양천에 주둔해, 행주산성과 금천 중간 위치에서 일본군을 견제하였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행주산성에 배수진을 친 권율을 돕기로 하였다.
권율은 남은 병사를 이끌고 조경 등과 함께 행주산성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승장() 처영()도 승의병() 1,000명을 이끌고 권율을 따라 강을 건너니 행주산성에 포진한 총병력은 1만 명이 못 되었다. 이후 권율이 정예병을 뽑아 서울에 보내어 전투 태세를 갖췄다.
적장들은 배티와 독산성에서 치욕적인 대패를 경험한지라 단번에 침공해 권율의 군대를 무찔러 위험을 없애자고 결의하였다. 한 번도 진두에 나서본 일이 없던 총대장 우키타()를 비롯해 이시다()·마시다()·오타니()의 세 봉행( : 통치자 장군을 보좌하던 최고 무관직) 등 본진의 장수들까지 7개 부대로 나눠 행주산성으로 진군하였다. 이 때 전 병력은 3만여 명이었다.
성 안의 관군이 소지한 무기는 궁시()·도창() 외에, 변이중이 만든 화차(), 권율의 지시로 만든 수차석포()라는 특수한 무기가 있었다. 또, 산성에서는 일본군이 몰려올 것에 대비해 성책을 내외 이중으로 만들었다.
토제()를 쌓아 조총 탄환을 피할 수 있게 했고, 병사에게 재를 담은 주머니를 허리에 차게 하였다. 일본군이 공격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권율은 이번 한판싸움에 병사들의 생사는 물론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것을 병사들에게 주지시키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1593년 2월 12일 오전 6시 경 일본군의 선봉 100여 기()가 나타나더니 뒤이어 대군이 밀려 왔다. 제1대장 고니시(西)가 선봉으로 나섰다. 그는 평양싸움에서 대패한 이후 벽제관()싸움에도 참전하지 않다가 마침내 설욕할 좋은 기회라 여기고 성() 공격에 앞장섰다.
성 안의 아군은 일시에 화차에서 포를 발사하고, 수차석포에서 돌을 뿜어내며, 진천뢰()·총통() 등을 쏘아대고 강궁()의 시위를 당겼다. 몰려들었던 적의 병마가 이에 맞아 혼비백산하니 고니시의 제1대는 궤멸해 물러갔다. 이시다가 이끈 제2대도 공격에 실패하였다.
이어 제3대의 일본군들이 달려들었다. 대장 구로다()는 전년 9월 연안성()싸움에서 의병에게 대패한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긴 방죽 위에 누대를 만들고 그 위에 총수() 수십 명을 배치해 성 안으로 조총을 쏘게만 하고 병졸에게는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조경은 대포를 쏘아 이를 깨뜨렸다. 또 포전() 끝에 칼날 두 개씩을 달아 쏘니 맞는 자는 즉사하였다.
제1대부터 3대까지 연패하는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총대장 우키타는 크게 노해 선두에 나서니 이에 소속된 제4대 장병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랐다. 제4대는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계속 진격해 제1성책을 넘어서 제2성책까지 접근하였다.
관군은 한때 동요했으나 권율의 독려로 힘을 얻어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화차의 총통이 적장에게 집중 사격되어 우키타는 부상을 입고 부하의 부축을 받으며 퇴진하였다. 그리고 이 때까지 남아 선두에서 지휘하던 제2대장 이시다도 부상으로 후퇴하였다.
제5대장 깃카와()는 제4대의 뒤를 이어 화통()을 성책 일부에 집중 발사해 불이 붙게 했으나 관군은 미리 마련한 물로 꺼 버렸다. 관군이 시석()을 퍼부어 깃카와가 큰 부상을 입고 퇴각했고 부하 병졸의 사망자만도 160명이나 발생하였다.
두 대장의 부상에 분노한 제6대장 모리()와 고바야카와()는 제2성책을 공격하였다. 이에 처영은 승의군을 이끌고 용감히 맞섰다. 그리고 승의병이 각기 허리에 찬 재를 뿌리자 눈을 뜰 수 없게 된 적군은 달아나고 말았다.
일본군은 마지막 남은 제7대로 공격을 시작하였다. 제7대장 고바야카와()는 노장으로 선두에 서서 서북쪽 자성()을 지키던 승의군 한 귀퉁이를 뚫고 성 안에까지 돌입하려 하였다. 이에 승의병이 동요해, 위급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 때 권율은 대검을 빼들고 승의군의 총공격을 호령하고 일본군과 치열한 백병전에 돌입하였다. 옆 진영의 관군도 화살이 다해 투석전을 폈는데, 이때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이 일치단결해 싸웠다. 특히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다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성 안에 무기와 군인이 부족한 상황을 눈치챈 적군이 기세를 올리려 하였다. 그러나 마침 경기수사(使) 이빈()이 화살 수만 개를 실은 배 두 척을 몰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적의 후방을 칠 기세를 보였다. 이에 당황한 적은 성 안에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성 안의 관군도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적을 추격해 130급()을 베었다. 그리고 파괴된 내성도 급히 보수하였다.
적군은 퇴각하면서 사방에 흩어진 시체를 불태웠다. 아군은 그들이 버리고 간 갑주()·도창 등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였다. 노획물 중 중요한 것만도 272건이었다. 적군이 버리고 간 적의 시체가 200구가 넘었고, 타다 남은 시체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것이 유명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명() 제독 이여송()은 평양으로 회군하던 중 행주대첩의 소식을 듣고 벽제관에서 패하고 급히 회군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대첩이 있은 다음 권율은 병력을 이끌고 파주산성()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 등과 본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하였다. 그 뒤 권율이 김명원의 뒤를 이어 도원수가 된 것은 행주대첩의 전공이 많이 작용된 것이라 하겠다.

전라순찰사 권율은 명군과 힘을 합해 서울 수복을 위해 수원에 머물다가, 명군이 벽제관 전투에서 패하고 개성으로 퇴각하자 1593년 2월 1만여 병력을 경기도 고양군의 행주산성에 집결시켰다. 권율은 행주산성을 새로 수축하는 한편 선거이()·허욱() 등이 거느리는 관군 및 김천일이 거느리는 의병으로 하여금 시흥·김포·강화 일대에서 지원하게 했다. 왜군은 3만여 병력을 3진으로 나누고 9차례에 걸쳐 성을 맹공격했으나 결국 패퇴했으며, 조선군은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이 싸움에서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짧게 잘라입고 돌을 날라 왜군에게 던짐으로써 승리에 기여한 데서 지금의 행주치마가 유래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권율은 이 싸움의 공로로 도원수가 되었다. 격전지인 행주산성은 백제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성으로 사적 56호로 지정되어 있다.



권율장군.權慄

조선 중기의 명장. 금산군 이치(梨峙)싸움, 수원 독왕산성 전투, 행주대첩 등에서 승리했다. 임진왜란 7년 간 군대를 총지휘한 장군으로 전공을 세웠다. 1537(중종 32)∼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문신, 명장. 임진왜란 당시 행주산성 전투에서 왜군을 대패시켰다.
본관 안동. 자 언신(). 호 만취당() ·모악(). 시호 충장().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가 되고, 전적()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 이듬해 예조정랑 ·호조정랑 ·경성판관()에 이어, 1591년 의주목사(使)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수도가 함락된 후 전라도순찰사 이광()과 방어사(使) 곽영()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로서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이 되어 북진하다가 용인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뒤 남원에 주둔하여 1,000여 명의 의용군을 모집, 금산군 이치()싸움에서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정예부대를 대파하고 전라도순찰사로 승진하였다.
북진 중에 수원의 독왕산성(禿)에 주둔하면서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여 지구전()과 유격전()을 전개하다 우키타 히데이에[]가 거느리는 대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하였다. 1593년에는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거이()에게 시흥 금주산()에 진을 치게 한 후 2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하여, 3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해온 고바야카와의 일본군을 맞아 2만 4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며 격퇴하였다. 그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도망병을 즉결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마귀()와 함께 울산에서 대진했으나, 명나라 사령관 양호()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하였다.
순천예교()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임진왜란 7년 간 군대를 총지휘한 장군으로 바다의 이순신과 더불어 역사에 남을 전공을 세웠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에 영가부원군()으로 추봉되었으며, 충장사()에 배향되었다.
정의
1537(중종 32)∼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문신·명장.
개설
본관은 안동(). 자는 언신(), 호는 만취당()·모악(). 도첨의() 권보()의 9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강화부사 권적(), 아버지는 영의정 권철(), 어머니는 적순부위() 조승현()의 딸이다. 이항복()의 장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어 전적·감찰·예조좌랑·호조정랑·전라도도사·경성판관을 지냈다. 1591년에 재차 호조정랑이 되었다가 바로 의주목사로 발탁되었으나, 이듬해 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에 제수되어 바로 임지로 떠났다. 왜병에 의해 수도가 함락된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과 방어사 곽영()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로서 곽영의 휘하에서 중위장()이 되어 서울의 수복을 위해 함께 북진했다.
이광이 수원과 용인 경내에 이르러 이곳에 진을 친 소규모의 적들을 공격하려 하자 극력 반대하면서 자중책을 말하기도 했다.
즉, 서울이 멀지 않고 대적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적은 적과의 싸움에서 도내의 병력을 모두 소모할 것이 아니라, 조강()을 건너 임진강을 막아서 서로(西)를 튼튼히 하여 군량미를 운반할 수 있는 도로를 보장한 다음에 적의 틈을 살피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옳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장인 이광이 듣지 않고 무모한 공격을 취해 대패하고 선봉장 이시지()·백광언() 등 여러 장수들이 전사했다. 오직 혼자만이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광주로 퇴각해 후사를 계획했다.
한편, 남원에서 1,000여 명의 의군을 모집해 다시 북진, 금산군에서 전주로 들어오려는 고바야카와[]의 정예 부대를 맞아 동복현감() 황진()과 함께 이치()에서 싸웠다.
이 싸움에서 황진이 총을 맞아 사기가 저하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군사들을 독려해 왜병을 격퇴시켜 호남을 보존하였다. 그해 가을 이치싸움의 공으로 곧 전라감사에 승진하였다.
12월 도성 수복을 위해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진 길에 올라 직산에 이르러 잠시 머물다가, 체찰사 정철()이 군량미 마련 등에 어려움이 있으니 돌아가 관내()를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에 잠시 주저했으나 북상하라는 행재소의 전갈을 받고 북진을 계속했다.
그러나 앞서 용인에서 크게 패한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 바로 북상하는 것을 피하고, 수원독성산성(禿)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했다.
대병이 그곳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왜병의 총사령관 우키타[]는 후방의 연락이 단절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도성에 주둔한 왜병을 풀어 삼진()을 만들고 오산 등 여러 곳에 진을 친 다음 서로 오가게 하며 독성산성의 아군을 밖으로 유인하려 했다.
그러나 성책을 굳게 해 지구전()과 유격전을 펴가면서 그들에게 타격을 가하자 몇 날이 지난 다음 영책()을 불사르고 도성으로 물러났다. 적이 퇴각할 때 정예 기병 1,000명을 풀어 적의 퇴로를 기습해 많은 왜병을 베었다.
그 뒤 명나라 원군과 호응해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독성산성으로부터 서울 근교 서쪽 가까이로 옮기기로 하고 먼저 조방장 조경()을 보내 마땅한 곳을 물색하도록 해 행주산성을 택했다.
조경에게 명해 2일간에 걸쳐 목책()을 완성하게 하고 이어 독성산성으로부터 군사를 옮기는 작업을 개시했다. 대군의 행렬을 위해서 독성산성에 소수의 군사만을 남겨 많은 군사가 계속 남아 있는 것 같이 위장한 뒤 불시에 행주산성으로 옮겼다.
행군 중 휘하 병 가운데 4,000명을 뽑아 전라병사 선거이()로 하여금 금천(: 지금의 시흥)에 주둔하게 하고 도성의 적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이때 휴정의 고제() 처영()이 의승병() 1,000명을 이끌고 당도하였으나, 행주산성에 포진한 총 병력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그 뒤 정예병을 뽑아 도성에 보내어 도전하니 적장들은 이치싸움에서 대패한 경험이 있고, 또 독성산성에서의 치욕을 경험한 탓으로 일거에 침공해 멸하지 않는 이상 큰 위협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도성에 모인 전군을 총출동시켜 행주산성을 공격하겠다는 결의를 제장()의 중론으로 정하고 조선 침입에서 한번도 진두에 나서본 일이 없었던 총대장 우키타를 위시해서 본진장령()들까지 3만의 병력으로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왜병은 7대로 나누어 계속해 맹렬한 공격을 가해 성이 함락될 위기에까지 직면했으나, 일사불란한 통솔력과 관군과 의승병이 사력을 다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대패한 적은 물러가기에 앞서 사방에 흩어져 있는 시체를 모아 불을 질렀으나, 그밖에도 유기된 시체가 200구에 달했고 타다 남은 시체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권율의 군대는 그들이 버리고 간 기치()와 갑주()·도창() 등 많은 군수물을 노획했다. 이것이 1593년 2월 12일에 있었던 행주대첩이다.
그 뒤 권율은 왜병의 재침을 경계해 행주산성은 오래 견디어내기 어려운 곳으로 판단, 파주산성()으로 옮겨가서 도원수 김명원(), 부원수 이빈() 등과 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했다.
그 뒤 명나라와 일본 간에 강화 회담이 진행되어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휴전 상태로 들어가자, 군사를 이끌고 전라도로 복귀했다.
그해 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로 승진되어 영남에 주둔했는데, 1596년 도망병을 즉결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바로 한성부판윤에 기용되었으며, 호조판서·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재차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와 함께 울산에 대진했으나 도어사 양호()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했다.
이어 순천 예교()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려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장()들의 비협조로 실패했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7월에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에 영가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1841년 행주에 기공사()를 건립, 그해 사액되었으며, 그곳에 향사되었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공훈을 중심으로 기록된 사적이 『권원수실적()』이란 책명으로 1권이 전한다. 시호는 충장()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백사집(白沙集)』
  • 『상촌집(象村集)』
  • 『이계집(耳溪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임진전란사』(이경석, 신현실사,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