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애사. 端宗哀史.
1928년 11월 30일부터 1929년 12월 1일까지 『동아일보』에 총 217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1972년 삼중당(三中堂)에서, 1979년 우신사(又新社)에서 발간한 『이광수전집』에 각각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은 작가가 민족정신을 일깨우기 위하여 집필한 일련의 역사소설들과 같은 의미에서 창작되었다.
지금부터 사백구십년 전, 조선을 가장 사랑하시고 한글과 음악과 시표를 지으시기로 유명하신 세종대왕 이십삼년 칠월 이십 삼일. 이날에 경복궁 안 자선당에서는 큰 슬픔의 주인 될 이가 탄생하시니, 그는 세종대왕의 맏손자님이시고 장차 단종 대왕이 되실 아기씨였다.
아기의 탄생을 접한 세종대왕은 대신들에게 장차 나라를 짊어질 왕이 될 아이를 대신들에게 부탁했다.
단종은 문종의 아들이거니와 문종은 세종대왕의 큰아들이다.
세종대왕은 슬하에 문종 외에 수양대군,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 팔 형제를 두었다.
그중 문종은 장차 왕이 되실 이로써 팔 형제 중 가장 학식이 높고 효가 깊었다.
그의 병약한 몸은 항상 궁중의 걱정거리였다.
세종대왕 승하하신 후 삼년상을 지내고는 문종마저 선왕(先王)의 뒤를 따라가니, 나이 십 삼 세의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수양은 이러한 형세에 자신이 권세를 잡으리라 생각하였다.
사람을 불러들여 계획을 세웠다. 계획의 중심에는 권람과 한명회가 있었다.
이들은 수양대군에게 불평객과 무사를 모아 세를 확장시킬 것을 간하고 장안의 무뢰배들을 모아들였다.
계유년 시월 십일, 인왕산 밑 수양대군 궁에는 아침부터 문객들이 모여들었다.
계유년 시월 십일, 인왕산 밑 수양대군 궁에는 아침부터 문객들이 모여들었다.
이렇게 사람이 모이는 것은 근래에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날은 그 동안의 계획을 결판 내는 날이었다.
고관대작 집정들을 애버리고 수양대군이 정난(靖難)이라는 이름으로 국정을 한 손에 총람하기로 정한 날인 것이다.
이날은 또한 왕의 누님 되는 경혜공주의 생신이다. 이 날 왕은 누님이 계시는 영양위 궁으로 납시었다.
수양대군은 사대문을 단속하여 모두 닫아걸고 아무도 제 명이 아니고서는 문을 열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우의정 김종서를 찾아가서 죽였다.
호랑이라 불리며 육진을 개척한 김종서는 선대로부터 신임을 받는, 수양대군 입장에서는 가장 걸림돌이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 일은 사대문이 닫혀 있어서 왕에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수양대군은 군사를 몰아 왕이 계시는 영양위 궁으로 갔다.
"안평대군 인, 종서 놈들이 모반을 하옵기로 일이 급하와 미처 여짭지 못하옵고 적괴 종서를 베이옵고 그 연유를 상감께 아뢰오" "인과 종서가 모반을 하여?" 수양대군은 왕이 어리신 것을 타서 늙은 대신들이 안평대군을 세우려 했다고 아뢰었다.
"안평대군 인, 종서 놈들이 모반을 하옵기로 일이 급하와 미처 여짭지 못하옵고 적괴 종서를 베이옵고 그 연유를 상감께 아뢰오" "인과 종서가 모반을 하여?" 수양대군은 왕이 어리신 것을 타서 늙은 대신들이 안평대군을 세우려 했다고 아뢰었다.
말을 들은 어린 왕의 생각에 또 그럴 듯하였다.
아무리 선왕의 고명을 받은 충신들이라 하더라도 혈족만 못하리라는 생각도 하였던 것이다.
왕을 어릴 때부터 지켜보던 내시들이 수양대군의 말이 사실과 다름을 고하였으나 그 자리에서 수양대군의 칼에 베어졌다.
왕을 어릴 때부터 지켜보던 내시들이 수양대군의 말이 사실과 다름을 고하였으나 그 자리에서 수양대군의 칼에 베어졌다.
수양은 놀란 왕을 조용한 다른 방으로 옮겨 모시어 주무시게 하기를 부탁하고는 일체 출입을 못하게 막았다.
권세를 장악하기 위해 죽여야 할 인물들을 모두 불러 처단하였다.
다음날 수양대군은 영의정 이조판서 병조판서 겸 내외병마도통사라는 전무후무한 겸직으로 일국의 중요한 권세를 혼자 맡게 되었다.
다음날 수양대군은 영의정 이조판서 병조판서 겸 내외병마도통사라는 전무후무한 겸직으로 일국의 중요한 권세를 혼자 맡게 되었다.
섭정을 하게 된 수양대군은 왕위에 대한 욕심이 있었으나 차마 직접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아는 무리들은 수양대군의 마음을 얻고자 왕께 보위를 수양대군에게 사양할 것을 권하였다.
이 말이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음은 물론이고 또한 제 곁에 편이 하나도 없음을 왕은 애통해 하시었다.
이 일을 들은 금성대군은 수양대군에게 진위를 물었으나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하였다. 이 일은 수양이 금성을 죽일 생각을 갖게 한 계기가 되었다.
이 일을 들은 금성대군은 수양대군에게 진위를 물었으나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하였다. 이 일은 수양이 금성을 죽일 생각을 갖게 한 계기가 되었다.
금성대군을 축으로 한 아직 의리가 남아 있는 무리들은 수양대군에 반감을 품고 무기를 들고 찾아가나 반생반사가 되어 붙들리고 결국 모두 죽음을 맞이하였다.
단종대왕 삼년 을해 윤 유월 십일일. 주위에 자기편이라고는 한 명도 없고 돌아가는 형편이 어려운 줄 아는 왕은, 이왕 선위를 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면 위협을 당하여 창피한 꼴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정정당당하게 내편에서 내어 던지리라 생각하였다.
우의정으로 하여 선위 하신다는 전교를 내리신 뒤에는 부랴사랴 간략한 노부로 종묘에 하직까지 하시었다.
정원, 정부, 육조 할 것 없이 대신으로부터 아래 서리에 이르기까지 난리를 당한 모양으로 전 아래 꿇었다. 왕이 일어나신다.
"영의정! 오늘 대임을 숙부께 맡기오" 수양대군은 이마를 조아려 세 번 사양하다가 일어나 옥좌 앞에 꿇어앉아 왕의 손에서 옥새를 받아 들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시 부복하였다. 마침내 바라던 바를 이루게 된 것이다.
보위를 넘긴 단종은 중전과 궁녀 몇을 데리고 그날 밤으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었다.
"영의정! 오늘 대임을 숙부께 맡기오" 수양대군은 이마를 조아려 세 번 사양하다가 일어나 옥좌 앞에 꿇어앉아 왕의 손에서 옥새를 받아 들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시 부복하였다. 마침내 바라던 바를 이루게 된 것이다.
보위를 넘긴 단종은 중전과 궁녀 몇을 데리고 그날 밤으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었다.
다시 수양으로 하여금 금성대군의 집으로 옮겨져 외부와의 접촉을 못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는 뜻 있는 이들은 기회를 보았다.
이 와중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는 뜻 있는 이들은 기회를 보았다.
상왕이 선위하고 수양대군이 즉위하신 문제에 대한 명나라 조정의 의논이 정해져 수양대군 아무로 조선 왕 됨을 승인한다는 조칙을 가진 명나라 사신이 서울에 오게 된 것이 기회였다.
이 때를 틈타 왕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무리 중에 배신자가 있어서 계획은 틀어지고 여기에 가담하였던 이들은 모두 죽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영월로 유배되었다. 이후 금성대군 역시 노산군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나아가서는 드디어 노산군을 죽이기로 조의가 확정되었다.
이렇게 단종의 한많은 인생을 막을 내렸다.
이렇게 단종의 한많은 인생을 막을 내렸다.
그 시체는 강에 버려졌는데 밤에 영월 호장 엄흥도가 몰래 시체를 건지어 제 어머니를 위해 짜두었던 관에 넣어 부중에서 북으로 오 리쯤 되는 곳에 평토장을 하고 돌을 얹어 표하여 두었다.
단종이 태어나서 영월에서 사망할 때까지의 연대기소설(年代記小說)이다.
1441년(세종 23) 7월 23일 진시(辰時)에 경복궁 안에 있는 동궁이 거처하는 자선당(資善堂)에서 단종이 태어난다.
단종이 태어나자 세종은 신숙주, 성삼문에게 자신의 사후에도 세자에게 충성할 것을 부탁한다.
세자 문종이 왕위에 오른 후 집현전 학자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어린 세자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자 세자의 삼촌인 수양대군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문종이 승하하고 어린 세자가 단종이 되자,
수양대군은 분통을 터뜨린다.
권람이 수양대군이 권력을 장악하게 할 심산으로 한명회와 정인지를 추천한다.
수양대군은 한명회를 신임하여 참모로 기용한 뒤 서서히 자신의 세력을 만들고, 김종서를 위시한 반대파를 숙청한다.
순식간에 권력을 잡은 수양대군은 영의정에 올라 권세를 휘두른다.
병자옥사가 있은 뒤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곧 서인으로 폐출되었다가 영월로 귀양을 가게 된다.
도사 왕방연(王邦衍)이 한양을 떠나 청령포(淸泠浦)에 단종을 가두고 떠나기 전날 “천만리 머나먼길에 고운님 여의옵고/이마음 둘데없어 냇가에 앉았으니/저물도 내안 같아야 울어밤길 예놋다.”라고 읊은 시조는 간장을 끊고도 남는다.
정축 10월 24일 왕방연이 사약을 가지고 왔으나 단종이 없어서 울고만 있는데, 유시(酉時)에 공생(貢生)이 활줄로 단종의 목을 매어 한 많은 숨을 거두게 된다.
공생은 문을 나가다 피를 토하여 죽고, 노산군의 시체는 금강에 띄운다.
밤에 영월의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몰래 시체를 건져 싸두었다가 관에 넣어 평토장(平土葬)을 하고 돌을 얹어 표를 하여둔다.
성삼문, 박팽년, 유성원 등 여섯 명의 충신들이 모여 훗날을 기약한다.
수양대군은 동생 안평대군을 죽임으로써 반대 세력을 모두 없앤다.
그는 단종이 성장하여 권세를 잡기 전에 자신이 왕위에 오를 계획을 세운다.
한명회와 정인지 등은 단종에게 왕위에서 물러날 것을 종용하고, 결국 단종은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넘긴다.
성삼문, 박팽년, 유성원 등은 수양대군의 척결을 계획하나 실패하여 죽임을 당한다.
단종은 영월로 유배를 떠난 후 그곳에서 수양대군 무리에 의해 죽음을 맞고, 영월 호장 엄흥도가 그의 시신을 몰래 거둔다.
병약한 문종이 죽자 단종이 등극하지만 한명회의 계책대로 수양대군의 등극을 위한 정리 작업이 시작되어 김종서와 그 아들이 죽고, 단종을 옹위하는 수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하여 세조가 등극하고 단종은 상왕으로 남게 된다.
엄흥도. 嚴興道.
시호 충의(忠毅). 영월(寧越)의 호장(戶長)으로 있을 때, 귀양살이하던 단종(端宗)이 세조에 의하여 죽자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시신을 거두려 하지 않는데도, 관까지 준비하여 장례를 치르고는 몸을 숨겼다.
뒤에 공조참판이 추증되고, 영월의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다.
옛날 우리 단종(端宗)께서 보위(寶位)를 내놓으시고 영월(寧越) 땅으로 귀양살이를 오시게 되니, 정축년(丁丑年, 1457년 세조 3년)의 일을 말하면 목이 메일 뿐이다.
엄흥도(嚴興道)가 있어서 피를 토(吐)하며 통곡(痛哭)해 마지않으면서 염습을 도와 양지(陽地)바른 산언덕에 수장(壽藏)하려 할 때 뭇사람들이 말하기를, ‘뜻하지 않은 앙화(殃禍)가 내릴 것이라’고 하면서 만류하는 데도 엄흥도가 말하기를, “(의(義)로운 일을 하고 화(禍)를 당하는 것은) 내가 마음에 달게 여기는 바요,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 하였다.
누대(累代)의 명신(名臣)들과 귀족(貴族)들은 모두 안일(安逸)에 젖어 슬퍼할 줄 몰랐는데, 하급직(下級職)의 미미한 자리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의로움은 당세(當世)에 가장 뛰어났다.
그 후 2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저마다 혀를 차며 경악하여 마지않았다.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후(后)에게 고하니 칭송하는 소리가 빨리 퍼져나갔고 강원 감사(江原監司) 홍만종(洪萬鍾)이 사당(祠堂)을 세우고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제향(祭享)을 드리게 되니 경건히 머리 숙여 생각하는 바, 숙종(肅宗)이 폐허(廢墟)된 궐사(闕祀)를 닦게 하고 장릉(莊陵)의 위(位)를 회복케 되므로, 사람들은 물론 신(神)까지도 기꺼워하였다.
숙종이 “엄흥도(嚴興道)의 사적(事蹟)은 실로 탁출하여 해와 별같이 소명(昭明)하고 태산(泰山)같이 높다.” 하고 원외랑(員外郞)과 승훈랑(承訓郞)의 관질(官秩)로써 포증(褒贈)하여 화곤(華袞)을 뛰어넘어 포상(褒賞)함에 우리의 후(后)가 밝았으니, 대저 군(君)은 영월(寧越) 사람으로 (시조(始祖)) 임의(林義)의 자손이니, 오랜 세월 그 계서(系序)는 족보(族譜)에서 빠졌지만 그 후손들은 오히려 가히 견디어 왔다.
엄호현(嚴好賢)이 엄화(嚴和)를 낳아 근근이 이어오는 것 같더니 엄희령(嚴希齡)과 엄한려(嚴漢呂)가 증현손으로 점점 벌어져 나갔으며 5대손 엄응원(嚴應垣)과 엄응평(嚴應平) 그리고 엄응일(嚴應一)에 미치니 엄응원과 엄응일이 비록 죽어 지금 후손(後孫)이 없으나, 승진(承軫)이 성(姓)은 같으나 파(派)가 달랐는데 엄화(嚴和)에게 딸이 있어 아내로 주었고 외손(外孫)인 제(悌)와 한(漢)이 이미 없으나 그 후에도 계속 대신 향화(香火)를 받들어 오히려 결례(缺禮)하는 일이 없었다. 팔계(八溪)에 있는 군(君)의 묘소(墓所)는 유좌혈(酉坐穴)인데, 처음에는 보잘것없었으나 지금은 잘 손질되어 완연(宛然)히 면목을 일신(一新)하게 되었다.
슬프다! 군(君)이여. 그대의 행적(行蹟)이 알 길 없어 유감없이 기술치 못함이 한(恨)이 되는구나. 그 충의(忠義)를 생각건대 여타(餘他)의 일들로 가히 헤아리고 남음이 있도다.
태화(太華)가 무너지고 금수(錦水)의 물이 마를지라도 원외랑의 이름은 길이길이 후세(後世)에 남아 천추(千秋)에 빛날 것이며 멸(滅)하지 아니할 것이다.
이제 내가 그대의 의기(意氣)와 절의(節義)를 모아서 묘비(墓碑)에 적어 높이 들어 세상에 보이나니, 마음과 뜻이 있는 자는 이를 짓밟고 없애지 말지어다.
장릉 엄흥도 정여각의 비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승하한 후 강물에 던져진 단종의 옥체를 거두어 암장한 엄흥도의 충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영조 2년(1726)에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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