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孟子, Mencius.
맹모삼천지교.
맹자 는 산둥성 추현 지방 출생으로 이름은 가(軻), 자는 자여(子與) 또는 자거(子車)다. 세 살 때에 아버지를 잃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했는데, 조숙했던 공자와는 달리 말썽꾸러기였다.
모방하려는 기질이 강하여 주변 지역의 풍습을 곧잘 흉내 냈기 때문에, 그 어머니가 세 번 이사를 다니며 가르쳤다고 하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가 유명하다.
이와 관련하여 《열녀전》에 나온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맹자가 어렸을 때, 그 집은 공동묘지 근처에 있었다.
그가 노는 모양을 보니, 무덤을 만들고 발로 달공 하는 흉내를 냈으므로 맹자 어머니는 “이곳은 아이를 기를 만한 데가 못 된다.”
하고는 이제 시장 근처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물건을 파는 장사꾼의 흉내를 자꾸 내서, 이에 맹모는 “이곳도 아이를 교육할 만한 곳이 못 된다.” 하며 다시 학교 근처로 이사했다.
여기에서는 놀이를 하되, 제기를 차려놓고 어른에게 인사하고 겸손하며 양보하는 예를 다하는지라, 이때에야 비로소 맹모는 마음을 놓고 “이곳이야말로 참으로 자식을 가르칠 만한 곳이구나.” 하며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맹자의 어머니가 모성 교육의 사표(師表)로서 후세에 길이 빛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 시대나 맹자가 생존했던 전국 시대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적으로는 큰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때 제자백가(諸子百家)라 부를 만큼 많은 사상가들이 나왔는데, 가령 유가 외에도 도가 · 묵가 · 법가 · 병가 등이 있었으며, 황당무계하고 대담한 학설도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처럼 잡다한 학설에 대항하여 유가의 이름을 크게 떨친 인물이 바로 맹자였다.
앞서 언급한 것 외에도 맹자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더 있다.
맹자가 어렸을 때, 밖에서 놀다가 이웃집의 돼지를 잡는 것을 보고 집으로 뛰어 들어가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돼지는 왜 잡습니까?”
그러자 어머니는 무심코 대답했다.
“너를 먹이려고 그런단다.”
하지만 곧 맹모는 자신의 말에 크게 후회했다.
“내 듣건대 예전에는 태교(胎敎)도 있었다는데, 이 아이가 무엇을 알려고 묻거늘 내가 만일 거짓말을 한다면, 이것은 불신을 가르치는 결과가 된다.”
이런 생각에 맹모는 결국 그 돼지고기를 사다 먹였다는 것이다.
그 후 맹자는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
몇 년 후에 선생님이 그를 불러서 말했다.
“너는 내게서 배울 것을 다 배웠으니, 이제부터 여기에 나올 필요가 없다.”
해서 맹자는 노나라의 수도인 취푸(曲阜)로 가게 되었고, 공자의 손자인 자사 의 문하에서 배우기 시작했다.
맹자는 공자가 태어난 곳에서 겨우 6리 정도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그를 흠모했고 그와 같은 성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얼마 후 맹자는 말 타기를 배우다가 넘어져 팔을 다쳤는데, 마침 어머니와 헤어진 지도 오래되고 하여 고향으로 갔다.
그때 길쌈을 하던 맹모가 물었다.
“너의 공부가 얼마나 성취되었느냐?”
이에 맹자가 대답했다.
“별로 나아진 바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맹모는 칼을 들어 길쌈하던 것을 끊으며 말했다.
“네가 공부를 하다가 중단하는 것은 마치 내가 이 칼로 여태까지 애써서 짜던 이 길쌈을 끊는 것과 같다.”
맹자는 크게 깨닫고, 발길을 돌렸다.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공부하여 쉴 줄을 몰랐다.
이것을 맹모의 단기지교(斷機之敎)라고 마흔 살을 전후로 추(鄒)나라의 벼슬길에 올랐으나, 혼란한 세태에 실망한 채 물러나고 말았다.
그는 공자의 손자이기도 하고 또 증자 의 제자이기도 한 자사의 문하에서 정통적인 유학을 배웠고, 수많은 제자들과 더불어 여러 나라를 주유(周遊)하며 유가의 이상을 달성하고자 했다.
그가 수백 명의 제자와 함께 수십 대의 수레를 이끌고 이동할 때는 일대장관을 이뤘으며, 용기가 넘치고 기질이 강했던 그는 여러 왕들에게 이상정치를 실시하도록 강력히 권고하기도 했다.
여든네 살까지 제자들과 함께 공부했고, 자신의 이상을 전하기 위해 《맹자》를 일곱 편까지 썼다.
사람은 본래 착하다
사람의 천성은 선할까, 악할까? 이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맹자가 주장한 성선설이고, 다른 하나는 순자가 주장한 성악설이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천성은 물이 항상 아래로 흐르듯이, 오직 선한 것만을 따른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을 이끌어내기만 하면 되며, 현자의 모범적인 삶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
그저 자기 마음속에서 속삭이는 착한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모든 잘못이나 죄는 밖에서 사람을 옭아매는 사회제도가 불완전한 데서, 그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의 잘못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맹자는 다음의 예를 든다.
“인간은 누구나 남의 고통을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한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갑자기 보았다고 하자.
누구나 깜짝 놀라서 건지려고 할 것이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부모와 잘 사귀어보려고 하기 때문도 아니고, 동네 사람들과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도 아니며, 그 아이의 지르는 소리가 듣기 거북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 측은한 마음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니···.”
이러한 맥락에서, 맹자는 인간에게 다음 네 가지의 ‘착함의 처음’이 있다고 말한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어짊의 시작이요,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로움의 시작이요, 사양하는 마음은 예절의 시작이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지혜의 시작이라.”
이를 다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면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어질다고 하는 증거다.
둘째, 누구나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의롭다고 하는 증거다.
셋째,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예의바르다고 하는 증거다.
넷째, 누구나 어떤 일이 옳은지 그른지는 판단할 수 있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지혜롭다고 하는 증거다.
모두 이처럼 타고난 본성대로 행동하면 누구나 착해질 수 있다.
본래 착한 인간의 마음일지라도 불의 불씨나 물의 샘 줄기와 같아서 그것을 바르게 잘 이끌면 요원(燎原)의 불길이나 큰 강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꺼지거나 말라버리기 쉽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든지 선하게 될 수도 있고 악하게 될 수도 있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인간의 선한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수양해야 한다는 과제가 놓여 있는 것이다.
부동심 & 호연지기
수양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맹자는 우리가 착한 본성의 씨앗을 잘 보존하고 널리 키워나가는 방법으로,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수양법을 제시한다.
찾아오는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 부동심(不動心)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를 위해, 맹자는 먼저 참된 용기(大勇)를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참된 용기란?,
만용과 비겁의 중용이다.
이는 스스로 반성해봐서, 자신을 의롭지 않다고 여기면 아무리 헐렁헐렁한 옷을 입은 사람일지라도 그에게 겁을 내게 되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면 설사 천만 명의 사람일지라도 그들에게 겁을 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러한 용기에 의해 부동심은 길러진다.
둘째, 우리가 부동심을 얻기 위해서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야 한다.
호연지기란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한 것이다.
손상시키지 않고 곧게 키우면 천지 사이에 꽉 차게 될 것이다.
그것은 겉으로만 의리에 맞는 행동을 취했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면적으로 의리를 쌓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러한 노력을 잠시라도 중단해서는 안 된다. 항상 마음속에 지니고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한편 그것은 억지로 조장해서도 안 된다.
송나라의 어떤 사람은 자기 논에 심은 모가 잘 자라지 않는 것을 걱정하여, 한 뿌리 한 뿌리씩 손으로 잡아 뽑아서 올려주었다.
그리고 피곤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와서는, “오늘 나는 논의 모가 빨리 자랄 수 있도록 돕느라 매우 혼이 났다.”라고 했다.
이에 놀란 그의 아들이 달려가 보니, 논의 모들은 벌써 다 말라죽어 있었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기(氣)를 키우겠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이처럼 모를 억지로 뽑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고, 맹자는 지적했다.
수양이 잘된 사람은 절대로 물질에 대한 욕심에 유혹되어 도덕적 신념이 흔들리지도 않거니와 어떤 위협이나 곤란 아래서도 인의의 행위 원칙을 저버리지 않는다.
말하자면, “아무리 부귀하여도 음탕한 데 빠지지 않으며, 아무리 빈천하여도 주체 없이 이리저리 움직이지 않으며, 아무리 무력으로 위협하더라도 굴복하지 않는다.”(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돈이 많아지면 성적인 음란에 빠지고 술이나 도박에 취하기 십상인데, 도덕적으로 수양이 잘된 사람은 결코 그런 일에 빠져들지 않는다.
사람이 물질적으로 너무 가난해지면 자기도 모르게 비굴해져 줏대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게 마련이지만, 도덕적으로 수양이 잘된 사람은 그러하지 않는다.
아울러 웬만한 사람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험한 상황에서 무릎을 꿇기 십상이지만, 역시 도덕적으로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은 자기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원칙을 지켜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가령 복권에 당첨되어 일확천금을 했다고 해서 흥청망청 쓰지도 않고, 비빌 언덕조차 없이 가난해졌다고 해도 끝까지 인간의 도리를 지켜나가며, 어떠한 위협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왕도정치 와 정전제도
개인마다 스스로 수양을 잘해야 하겠지만, 한 나라가 백성을 잘 다스리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맹자는 성선설을 바탕으로 개인의 도덕적 가치를 국가사회에 실현하기 위한 실천 방안을 제시한다.
‘사람의 본성은 어질기 때문에, 위정자는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이른바 왕도정치(王道政治)가 그 정치론의 핵심이다.
왕도정치는 먼저, 공리주의(功利主義)를 배격한다.
맹자는 양 혜왕(梁 惠王)에게 공리주의의 폐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만약 임금께서 어떻게 하여 내 나라를 이롭게 할까 주장하신다면, 대부(大夫)들도 어떻게 하여 내 집안을 이롭게 할까 하고 말할 것이며, 선비나 백성들도 어떻게 하여 나 자신을 이롭게 할까 하고 말할 것입니다.
이렇게 위아래가 서로 자기의 이익만을 얻기 위해 다투면 나라가 위태롭게 되고 말 것입니다.”
신하 된 자가 자기 이익을 생각해서 임금을 섬기고, 자식 된 자가 자기 이익을 생각해서 어버이를 섬기고, 동생 된 자가 이익을 생각해서 형을 섬긴다면, 그것은 인의가 아니라 이익 때문에 서로 만나는 것이 된다.
그러하면서도 멸망하지 않은 자는 지금까지 없었다고 맹자는 통렬히 비판한다.
둘째, 왕도정치는 백성들의 먹고사는 문제, 즉 민생 문제를 해결해줘야 한다.
백성들은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기 때문이다.
현명한 왕들은 우선 백성들의 생산 능력을 안정시켜 위로는 부모를 봉양할 수 있게 해주고, 아래로는 아내와 자녀들을 부양할 수 있게 해주며, 풍년에는 배불리 먹고, 흉년에는 굶어 죽지 않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맹자는 백성들의 생업을 보장해주기 위해 정전제도의 실시를 주장했다.
이 제도는 여덟 집이 한 정(井)이 되어 집집마다 100무(畝) 의 토지를 받아 농사를 짓되, 한가운데 있는 공전(公田)은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물을 나라에 세금으로 바치도록 하는 것이다.
맹자에 의하면, 5무 되는 집터 안에 뽕을 심고 누에를 치면 쉰의 늙은이도 모두 비단옷을 입을 수 있으며, 닭과 돼지를 길러 새끼 치는 것을 돌봐주면 일흔의 노인도 모두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백성들에게는 생업을 보장해준 뒤에 비로소 도덕적인 생활로 이끌어야 하는 반면, 지도층에게는 생업에 좌우되지 않고 도덕적인 생활을 솔선수범하도록 해야 한다.
나라에서는 이들에게 먹고살 만큼의 녹봉을 주되, 그렇다고 정치지도자들이 재산을 쌓아놓아서도 안 되고 부와 사치와 음란을 누려서도 안 된다.
정치지도자는 백성들에게 어질고 너그러운 정치를 베풀어야 한다.
형벌을 줄여주고 세금을 가능한 한 적게 거두며, 모두 편안한 마음으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정치의 궁극적 목표는 먹고사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도록 하는 데 있다.
백성들이 효성과 공경, 우애와 진실, 신의와 도덕을 닦게 하여 살고 죽는 일에 유감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면에서, 맹자는 인의를 숭상하고 덕을 본위로 하는 왕도정치가 이(利)를 숭상하고 힘을 본위로 하는 패도정치보다 우월하다고 말한다.
왕도정치의 최고 책임자라 할 수 있는 천자(天子)는 백성들의 신망을 받는 덕스러운 사람이어야 한다.
임금은 백성들의 신뢰를 받는 현자 가운데서, 선거에 의한 것이 아닌 선양에 의해 추대되어야 한다.
사실 왕이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다시 세우는 세습제도나, 오늘날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는 방식에는 모두 문제가 있다.
왜 그것들은 백성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왜곡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덕스러운 사람을 추대해 왕으로 모시도록 하는 방식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맹자는 본 것이다.
추대된 통치자는 자기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국민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온 힘을 쏟아야 한다.
만일 막강한 힘을 가진 군주가 중대한 잘못을 저지를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에는 당연히 백성들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으며,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에는 다른 군주를 모셔올 수도 있다.
군주로서의 의무를 게을리 하여 백성들의 마음에서 멀어진 자는 왕위를 물러나게 해야 하고,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심지어 살해해도 좋다.
폭압정치를 펴며 타락한 모습을 보이는 임금은 이미 임금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설령 그를 퇴위시키거나 죽인다 한들 신하 된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초상화가?
맹자는 성선설을 통해 동물과 인간을 구별함으로써, 인간의 지위를 드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아가 그는 성선설에 기초하여 인의의 도덕정치, 이른바 왕도정치를 주장함으로써 정치사상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공자가 주로 교육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은 제자들이었다.
이에 반해 맹자는 군왕이나 권력자, 그리고 귀족들을 교육의 대상으로 삼았다.
맹자가 그들에게 가르친 방법은 아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예지와 용기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많은 군주들 앞에서도 당당했고, 막강한 힘을 가진 그들은 도리어 맹자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가 민심에 바탕을 둔 인의정치를 주장하면서도, 군주제를 선호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민주제 아래에서는 국민 개개인을 교육시켜야만 하는 데 비해, 군주제 아래에서는 왕후 한 사람만을 올바르게 이끌면 족하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정치를 담당한 소수, 나아가 한 사람만 현명하면 나라는 저절로 잘 다스려진다고 믿었던 까닭이 아닌가 싶다.
맹자는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권력자는 언제라도 물러나게 해야 한다” 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의 초상화와 글이 문묘(文廟)에서 제거된 일도 있었다.
역대의 왕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흔들 수도 있는 맹자의 정치사상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면이 많다.
어머니의 사려 깊은 교육환경
그는 노나라 희(姬)씨 성의 귀족공자(贵族公子) 경부(庆父)의 후예로 부친의 이름은 격(激)이고, 모친은 장씨(仉氏)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사려 깊은 교육환경 속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맹자의 교육환경을 위하여 세 번씩이나 집을 옮겼었다.
저 유명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가 바로 그것이다.
맹자가 공부하는 기간을 채우지 않고 집으로 왔다고 해서 당신이 짜던 베를 끊어 경계했다는 ‘단기지훈’ 이란 유명한 고사를 통해 어질고 현명한 어머니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공자 문하의 적통을 잇다
학설에 의하면 직접 자사에게서 배웠다고 하기도 하나 연대가 맞지 않는다.
그가 죽은 뒤 역대 왕조들이 잇따라 작위를 추증하여 그 위상을 높였는데, 송나라 때인 1083년에 추국공(鄒國公)에 봉해진 이래 1330년 원나라 때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 1530년 명나라 때 ‘아성(亞聖)’, 1935년(민국 24)에 ‘아성봉사관(亞聖奉祀官)’ 등으로 봉해졌다.
『한서』 「예문지」에 『맹자』 11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7편만 남아 있는데, 제자들과 맹자의 언행록이 수록되어 있다.
맹자의 시대적 배경
맹자가 살았던 시대는 전국시대로서 주 왕실의 힘이 극도로 미약하여 사람들이 그 존재조차도 망각할 정도에 이르렀고, 각기 제후들은 승부를 다투는 싸움을 벌여 약육강식의 난맥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공자와 맹자의 시대적 차이는 몹시 컸다. 공자가 처했던 춘추시대는 비록 주나라 왕실의 세력이 쇠퇴했고 또 춘추오패가 나타났으나, 그래도 존왕양이의 풍조가 남아 있었고 어느 정도 도덕적으로 재건할 수 있는 희망이 적게나마 있었다.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폭력과 허망한 사설(邪說)이 횡행하여 천하는 극도로 혼란에 빠지고 백성들은 도탄의 구렁텅이에서 신음하며 갈 바를 몰랐다.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희미해져서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는 자가 있고 자식으로서 아비를 죽이는 자가 생기자 공자께서 두려워하여 『춘추』를 지었다는 그 춘추시대를 훨씬 뛰어넘는 모습이었으니, 중국사 전체를 통해서도 일찍이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었던 혼란시대였다.
이런 때에 맹자는 의연히 일어나 불타협의 굳은 신념으로 무력에 의한 패도를 버리고 하 · 은(상) · 주 3대의 전통인 인의왕도(仁義王道)의 덕치로 천하가 하나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고, 실제로 여러 나라의 군주를 찾아 그들을 설득하는 데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정치적 이상주의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왕도정치에 의한 이상적인 세계의 건설을 주장하는 복고적 이상주의에 집착한 사상가였다.
맹자의 주장은 대부분이 당시의 실권자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부국강병에 광분하고 있던 여러 군주에게 이(利)를 버리고 인의(仁義)를 찾으라고 했다.
불쌍한 것을 보고 못 견디는 마음을 확대하는 것이라고 하여 왕도덕치의 근원이 임금의 덕심(德心)에 달려 있음을 강조했다.
이렇게 천하의 온갖 책임을 위정자 한 사람의 덕에 돌리면서도 맹자는 임금의 존재를 형편없이 격하시켰다.
맹자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다음이고, 임금은 가볍다”라고 했다.
“임금은 백성과 같이 즐겨야 한다”고 주장하여 민권(民權)을 더없이 높였고 민본사상(民本思想)을 최대한으로 고취했다.
맹자는 패도정치(覇道政治)는 악덕할 뿐만 아니라 오래 가지도 못하고, 또 천하를 통일하고 참다운 왕자(王者)가 될 수 있는 길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보다는 백성을 사랑하고 민생을 안정시켜 민심을 얻으면 온 천하가 저절로 귀순심복(歸順心腹)할 것이며, 그 때에야 스스로 천하를 덕으로 다스리는 참다운 왕좌에 오를 것이요, 그것이 바르고 영원한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무력을 배제하고 덕치를 주장한 맹자는 당연히 보민양생(保民養生), 즉 민생을 중하게 강조했다. 맹자의 민생주의는 바로 맹자의 경제사상의 일환이기도 했다. 맹자는 농업생산을 진작하여 백성이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안락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안정, 민생안정이 정치의 바탕이라는 생각은 오늘에 와서는 당연하지만 당시의 제후들에게는 일대 공격이 아닐 수 없었다.
맹자의 민생안정은 제후들의 포악을 막고 반대로 백성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장하라는 뜻이기도 했다.
맹자는 민생안정을 국민복리 면에서도 강조했다.
“양잠을 장려하여 비단을 증산하고 가축을 증산하여 노인들에게 따뜻한 비단옷을 입히고 든든하게 고기를 먹이라”고 강조했다.
백성을 안락하게 살게 해주고 나아가서 백성을 교육하여 높은 경지에 이끌어 올려야 한다고 했다. 맹자의 정치사상은 필연적으로 교육사상과 연결된다. 그는 말했다.
“정성껏 학교 교육을 시행하고 더 나아가 효제인의를 넓히면 노인들이 길가에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지 않을 것이다.
일흔 살의 노인들이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고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는 그런 상태로 다스린다면 바로 왕도의 임금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훗날 유가가 독존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그는 공자 다음가는 성인이란 뜻으로 ‘아성(亞聖)’으로 추앙되었지만, 당시 정치판으로부터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맹자의 이러한 티없는 선의에서 우러난 사상과 그것을 토대로 하여 설정된 여러 가지 방책은 정치제도, 사회정세, 경제정책, 문교시책, 생활태도, 학술문화 등 실로 다방면에 걸쳐 선명하게 반영되었고 폭넓게 논의되었다.
백성을 귀하게 여기는 민본사상은 아주 귀중한 주장으로 정치사상의 질을 높였다.
그는 공자와 더불어 ‘공맹(孔孟)’으로 불리기도 하고, 성선설에 입각하여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기도 했는데, 순자의 ‘성악설(性惡說)’과 함께 중국 철학사의 중요한 쟁점을 제공했다.
맹자의 주요사상
천인합일(天人合一)
맹자에게 있어 하늘은 천리(天理)이자 동시에 만물의 근원이며 또한 우주의 주재자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뜻, 즉 천의(天意)의 발동자였다.
사람은 본성 속에 하늘을 지각하고 따르는 속성이 있다고 인정했다. 즉 맹자는 말했다.
“영명한 본심을 극진하게 계발하면 본성을 알 수 있고 나아가서는 하늘도 알게 된다.
영명한 본심을 잘 간직하고 본성을 잘 배양하면 천도를 따라 섬길 수가 있다.”
결국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하늘과 일치 즉, 천인합일하게 마련이며, 동시에 하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자이므로 천명을 따르게 되어 있으니, 사람이 할 일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을 가다듬고 자기에게 주어진 명수를 잘 받아, 자기의 책임을 다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성선설(性善說)
공자의 도는 맹자에 이르러서 더욱 선양되고 빛났다.
맹자는 도의 근원을 요 · 순으로부터 시작하여 우 · 탕 · 문무(문왕(文王)과 무왕(武王)) · 주공(周公) 그리고 공자를 거쳐서 자신에 이르기까지 도의 정통을 세움으로써 유교의 체계를 확립시켰다.
사람의 본성이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으로 그 본성 속에는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고통을 차마 보아 넘길 수 없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인 인(仁)을 비롯해서, 옳지 않은 것을 미워하고 부끄러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인 의(義), 어른을 공경하고 다른 사람에게 겸손하는 사양지심(辭讓之心)인 예(禮), 선악을 식별하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인 지(智) 등 사단(四端)이 존재하며, 인간의 이 본성은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성은 본선(本善)이라는 성선설을 주장하였고, 천진난만한 어린이가 잘못하여 우물로 빠져 들어가려는 광경을 발견했을 때 경악과 측은한 감정이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것을 금치 못하는 것은 사람의 공통적인 것이라는 것을 들어 성선설을 증명하고 있다.
한편 선한 본성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맹자는 선한 본성의 발단과 적극적인 확충, 선의 본성을 잃는 일을 막자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논하고, 인간만사를 선한 본성에 따라서 처리할 것을 권했다.
사람은 누구나 선한 본성을 다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확충해 나가게 되면 성인에 못지않은 경지에까지도 도달할 수 있지만, 만약에 그것을 잃어버리면 본래부터 선한 본성이라고는 없었던 것처럼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인간으로 타락해 버린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라 하겠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인간이 선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발전을 지향하도록 줄기차게 고무해 주는 힘이 있다.
인륜(人倫)과 대장부(大丈夫)
맹자의 인생관이나 윤리관은 한 마디로 이상주의적 도덕주의에 서 있다.
맹자는 말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부모님을 모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 천지에 죄 될 일이나 부끄러운 일을 안 한 것, 천하의 수재들을 모아 교육하는 것이다.
그 중에 임금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끼지 못한다.”
맹자는 가장 높은 작위를 천작(天爵)이라 했고, 인간 정치사회에서의 작록(爵祿)을 인작(人爵)이라 하여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렇게 정치보다도 도를 더 존중했기 때문에 맹자는 인생의 가치를 “인을 이루고 의를 따르는” 데 두었으며, “의를 살리고 목숨을 버리라”고 했다.
나의 생명보다도 인의(仁義)를 중요시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인의가 우주의 대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맹자는 대도의 윤리와 덕목을 지키는 사람을 여러 가지로 불렀는데 그 중에서 ‘대장부’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인(仁), 즉 천하의 넓은 집에 몸을 두고, 의(義) 즉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서 천하의 대도(大道)를 간다.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인의의 대도를 구현하고, 뜻을 못 얻으면 자기 하나만이라도 대도를 간다.
부귀에도 타락하지 않고, 빈천에도 절개를 바꾸지 않으며, 어떤 권세 앞에도 굴복하지 않으니 그런 사람이 바로 대장부이니라.”
이러한 대장부는 지대지강(至大至剛, 더없이 크고 굳셈)하고 천지에 대통하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지니고 있다.
그 호연지기를 키우는 바탕은 바로 존심양성이다.
한편, 맹자는 자기향상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 격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자기향상의 목표를 요 · 순 같은 성인에 둘 것을 말했다.
대장부로 큰 뜻을 실현시키고자 한다면 시련을 극복하고 유혹을 물리치는 굳센 신념이 있어야 함을 말했다.
맹자의 공부법
맹자의 공부법은 공자의 공부법 못지않게 체계적이고 계통적이다.
먼저 독서와 관련하여 맹자는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독서 과정에서의 주관적이고 능동적인 작용을 중시하여 “책에 나온 내용을 다 믿는다는 것은 책이 없는 것만 못하다”(「진심(盡心)」하)라고 말할 정도였다.
공부는 자연스럽게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해나가야지 서두르거나 요령을 피워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동시에 굳센 의지와 항상심을 가지고 꾸준히 한 마음으로 해야지 용두사미식의 공부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맹자의 공부법을 몇 개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스스로 구하면 얻을 것이다
맹자는 독서나 공부는 자신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말한다.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구하면 얻고, 버리면 잃는다.
구하면 얻는데 유리하고, 구하면 내게 존재하게 된다”(「진심」상). 이 공부법을 간단하게 줄여 ‘자구자득(自求自得)’이라 할 수 있다.
맹자는 이와 관련하여 또 이렇게 말한다.
“무릇 도란 큰 길과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려우리오! 사람이 구하지 않는 것이 병이니 그대가 돌아가 구하면 배울 것이 남아 있을 것이다.”(「고자(告子)」하).
맹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군자가 깊이 나아가는 길을 택하는 것은 스스로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얻으면 삶이 편안하고, 삶이 편안하면 자질이 깊어지고, 자질이 깊으면 좌우에서 취하여 그 근원을 만나기 때문에 군자는 스스로 얻고자 하는 것이다.”(「이루(離婁)」하).
이 대목을 공부나 교육과 연관 지어 보면 이렇다.
스승이 학생들을 보다 깊이 있는 공부로 이끄는 방법은 학생의 내적 동기를 계발하고 유도함으로써 스스로 구하여 얻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지적 욕구에 기대어 자신의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얻게 하는 것이다.
꾸준히 한 마음으로
“학문의 길이라는 것이 다른 게 아니다.
그 놓인 마음을 구하는 것일 뿐이다”(「고자」상). 이런 저런 잡념과 딴 마음으로 독서하는 태도를 맹자는 단호히 배격했다.
맹자는 천하에 바둑을 잘 두기로 이름난 혁추(奕秋)가 오로지 한 마음으로 집중하는 사람과 사냥 따위에 마음이 팔려 있는 사람에게 바둑을 가르쳤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이냐며 “마음을 오로지 하고 뜻을 극진히 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고자」상)고 강조한다.
공부에 만족할 만한 효과를 얻지 못하는 것은 총명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한 마음으로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머리가 아니라 자세의 문제라는 것이다.
맹자는 공부하는 자세와 태도를 우물을 파는 일에 비유하며 “뭔가를 한다는 것은 비유컨대 우물을 파는 것과 같다.
우물을 아홉 길이나 파고도 물이 안 나온다고 우물을 버리는 것이다”(「진심」상)라고 하여 공부나 독서를 견지하지 못하면 끝내는 헛공부가 된다고 지적했다.
독서나 공부는 축적이 핵심이다.
축적되지 않는 공부는 헛공부다.
쌓이는 과정 그 자체가 한 인간의 성숙도를 결정한다.
이런 점에서 맹자가 한 마음으로 꾸준히 공부하라고 한 것은 공부와 독서의 핵심과 그 효과를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차거든 나아가라
인간이 성장단계를 건너 뛸 수 없듯이 공부에도 단계가 있다. 지력과 관심의 정도에 따라 공부의 질과 양은 달라지지만 그 지력과 관심에는 단계가 있다.
쉽게 말해 성장과정과 각자의 특성에 맞는 공부와 독서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흐르는 물이 웅덩이에 차지 않으면 흐르지 못한다. 군자가 도에 뜻을 두어도 글을 이루지 못하면 통달할 수 없다”(「진심」하).
물은 밤낮없이 흘러 웅덩이를 채워야만 계속 흘러 바다에까지 이를 수 있다.
맹자는 물을 공부에 비유하여 점점 축적되는 지식, 순서에 따라 꾸준히 나아가는 공부법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이 공부법은 앞에서 꾸준히 한 마음으로 공부하라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꾸준히 한 마음’이 큰 테두리에서 공부의 태도와 자세를 말한 것이라면, 이 방법은 좀 더 구체적이다.
그 같은 자세를 견지하면서 순서를 밟아 단계적으로 공부하면 지식은 축적되고 지혜는 깊어져 보다 성숙한 사람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듭 생각하고 의심을 품어라
맹자는 오로지 마음이란 기관에 의지한 사유야말로 사물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듣고 보고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듣지 않고 보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라 했다.
우선 맹자의 말을 들어보자.
“귀와 눈은 생각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사물에 가려진다.
그래서 눈과 귀는 사물과 접촉하면 거기에 끌려 갈 뿐이다.
마음은 생각할 줄 알기 때문에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게 된다”(「고자」상).
이 말은 실제 인식을 감성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하라는 요구다.
반드시 사유를 거쳐 사물의 진실된 내면, 즉 본질을 파악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맹자는 또 독서하면 의문이 생긴다고 주장하면서 앞서 말한 대로 “책을 다 믿느니 책이 없는 것이 낫다”(「진심」상)라고까지 말한다.
어떤 공부가 되었건 의문을 품을 줄 모르는 공부는 제대로 된 공부가 아니다.
독서나 공부의 출발은 호기심과 관심이며, 그 호기심과 관심의 이면에는 강한 의문이 함께 웅크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의역지(以意逆志)
맹자의 공부법에서는 작품, 특히 시를 해석하는 방법에 관한 언급이 눈에 띤다.
“시를 말하는 사람이 글로 말을 해치지 않고, 말로 뜻을 해치지 않아서 ‘자신의 뜻으로 작자의 뜻을 찾아 아는’ 것을 시를 안다고 할 것이다”(「만장(萬章)」상).
이 중에서도 ‘자신의 뜻으로 작자의 뜻을 찾아 아는’ 이의역지란 대목에 대해서는 역대로 논란이 적지 않았는데, 대체로 두 가지 해석이 유력하다.
하나는 청나라 때 학자들의 해석으로 ‘옛사람의 뜻으로 옛사람의 뜻을 찾는 것’으로, 말하자면 ‘시로 시를 논하는 것’이다. 작품 자체를 분석하여 작가의 사상을 유추한다는 의미다.
또 하나는 한나라 이래 다수의 해석이다.
이 해석들에 따르면 ‘이의역지’에서 ‘의(意)’자를 독자의 사상 · 지식 · 경험 등으로 해석한다.
작품을 읽는 사람의 뜻으로 작가의 뜻을 이해하거나 유추한다는 것이다.
맹자의 ‘이의역지’ 공부법은 문학 작품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우선 작가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다른 작품들을 참조하여 그것들을 근거로 작품을 이해하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하나의 방법을 끌어낼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온 지식이나 주관에 근거하여 작품의 경향과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방법도 가능하다.
어느 쪽이나 작품과 작가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 상당히 유용한 방법이다.
물론 이 두 가지를 적절히 절충하면 더 효과적일 것이다.
지인논세(知人論世)
‘사람을 알고 세상을 논하다’는 ‘지인논세’는 그 방법과 의미가 확대되면 독서나 공부의 최고 경지가 된다.
맹자는 이를 우선 책의 작가와 그 작품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한다.
맹자는 작품과 작가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인논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옛 사람들의 시를 외우고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알지 못하는 것이 옳은가? 그러므로 (그 다음으로는) 그 세상을 논하는 것이니 이것이 옛날로 올라가서 옛 사람을 벗하는 것이다”(「만장」하)
진정으로 그 작품을 이해하려면 작가의 경력과 사상 심지어는 감정과 인격까지 파악해야 한다.
그 사람의 객관적 조건, 이를 테면 그가 처했던 시대적 환경 따위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좁게는 한 작가와 작품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방법이지만, 이 공부법이 확대되고 깊어지면 말 그대로 세상 모든 부류의 사람과 세상을 알고 논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치밀하게 공부하되 요약할 수 있어야
모든 공부는 지나온 과정을 종합하고 그것을 자기만의 생각과 견해로 요약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진짜 독서고 제대로 된 공부다. 명인들이 하나같이 제기하는 공부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맹자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넓게 배우고 상세히 해설하는 것은 되돌아가 요약하려는 것이다”(「이루」하)
맹자가 말하는 ‘상세히 해설’은 읽고 공부한 것에 대한 정교하고 세밀한 연구를 통해 그 의미를 자세히 해석하는 것을 가리킨다.
‘요약’은 공부한 내용에 대한 간명한 개괄을 말한다.
공부는 먼저 넓고 치밀해야 하며, 그런 다음 이를 기초로 귀납하고 개괄하여 명확하게 공부한 핵심을 파악해야 한다.
이상 살펴본 맹자 공부법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공부법이 대단히 체계적이라는 점이다.
공부하는 자세와 태도로부터 작품과 작가를 이해하는 방법, 나아가 그 모든 것을 종합하여 자신의 주관으로 요약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구체적인 방법론들을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맹자의 공부법은 체계적일 뿐만 아니라 단계적이기도 하다.
공부방법 이 추구하는 기본 정신
맹자의 공부법이 추구하는 기본 정신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맹자는 ‘마음을 다한다’는 뜻의 「진심」(상)이란 장에서 “부모형제가 모두 아무 일 없이 살아 있는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하늘을 우러러 보아도 땅을 굽어보아도 한 점 부끄러움 없는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며, 천하의 재능 있는 인재를 얻어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며 세 가지 즐거움을 이야기했다.
소위 ‘군자삼락(君子三樂)’이란 것이다. 인재를 교육시키는 것을 낙으로 알았던 맹자이기에 공부에서도 대단히 적극성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맹자 자신이 “구하는 데는 방법이 있고, 얻는 데는 명이 있다”(「진심」상)고 했듯이 공부에도 나름대로의 규칙과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규칙에 근거하여 정확한 공부법을 잡아야 한다는 정신이다.
하나는 자신이 공부하는 과정 자체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 방법을 알 수 있다.’
공부의 규칙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수시로 자신의 학습 행위를 그 규칙에 맞게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안 되면 평생을 공부해도 제대로 된 방법과 길을 모른 채 헤매다 평범한 독서인으로 남게 된다.
공부법 의 맹모(孟母)
공부에 관한 맹자의 기본 정신은 대단히 엄격하다.
이는 맹자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으며 특히, 그 어머니의 교육법과도 관계가 있어 보인다.
맹자의 어머니는 너무나 잘 알다시피 자식의 교육을 위해 이사를 세 번씩이나 한 어머니이지 않은가.
맹모의 극성은 삼천지교에만 머물지 않았다.
‘결단(決斷)’이란 단어가 있다.
무엇인가 확고한 결정을 내리거나 굳은 결심을 할 때 ‘결단을 내린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 단어의 근원지를 추적해보면 공교롭게도 맹모와 만나게 된다.
학업에 힘쓰던 맹자가 한번은 공부하다말고 밖에 나가 논 적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맹모는 아들을 불러다 놓고 맹자가 보는 앞에서 한동안 열심히 짜놓은 베를 칼로 서슴없이 잘라버렸다.
맹자는 깜짝 놀라며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맹모는 다음과 같은 말로 아들 맹자를 가르쳤다.
“베는 실 한 올 한 올이 연결되어야 한다.
학문도 마찬가지로 한 방울 한 방울 쌓여야만 한다.
네가 공부하다말고 나가 놀았다는 것은 잘려나간 이 베와 마찬가지로 쓸모없어진다는 것과 같으니라!”
이 일화에서 이른바 ‘베틀을 끊어 가르친다’는 ‘단기지교(斷機之敎)’ 또는 ‘단직교자(斷織敎子)’의 고사성어가 탄생했고, 여기서 ‘결단’이란 단어가 파생되었다.
관련 유적
맹자 관련 유적은 고향 추현에 그의 무덤과 사당을 비롯하여, 그 어머니의 무덤인 맹모림(孟母林)과 ‘맹모삼천지교’와 관련된 유지 등이 남아 있다.
맹묘(孟廟)
‘아성묘(亞聖廟)’라고도 부르는 맹자의 사당 맹묘는 쩌우청시 남관에 위치한다. 역대로 맹자에게 제사를 드리는 장소였다.
맹묘의 역사는 북송 인종 경우(景祐) 4년인 1037년에 공자의 45대손인 공도보가 연주지주(延州知州)로 있으면서 사기산(四基山)에서 맹자의 무덤을 방문하고 무덤 옆에다 사당을 세움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성에서 좀 떨어져 있기 때문에 참배 및 제사가 불편해서 휘종선화(宣和) 3년인 1121년에 지금 장소에 사당을 옮겨지었다. 북송 신종 원풍(元豊) 연간에는 맹자를 추국공(鄒國公)으로 봉했으며, 원나라 때 다시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에 봉해졌다. 그 후로도 계속 맹묘를 확장하고 수리했고, 명나라 때 지금과 같은 규모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아성전(亞聖殿)이 남북 중축선상에 자리잡은 사당 내의 주체건물인데, 7칸에 높이 17미터, 길이 27.7미터 깊이 20.48미터이다. 중층에 녹색 유리기와를 얹었다. 처마 밑으로 팔각기둥이 26개가 있는데 기둥 전체에 용과 봉황 그리고 꽃을 조각했다.사당은 전체적으로 장방형이며, 모두 다섯 구역에 64칸의 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1만 2,000여 평에 이른다. 기록에 따르면 역대로 중수한 횟수만 38차가 넘는다. 현존 건축물들은 청 강희(康熙) 연간에 지진으로 기울어진 다음 다시 중건한 것이다.
중축선 양 옆으로 침전(寢殿) · 계성전(啓聖殿) · 맹모전(孟母殿) · 치엄당(致嚴堂) · 도주사 · 동서무(東西廡) · 제기고(祭器庫) · 성생소 · 강희 및 건륭(乾隆) 어비정(御碑亭) 등이 늘어서 있다. 사당 내 비갈이나 석각만 350기가 넘는다. 그 중 이름난 것으로는 원나라 때 다시 만든 진(秦)나라 이사가 소전체로 쓴 ‘역산각석(嶧山刻石)’을 비롯하여 서진시대 유보(한 순제)의 묘표, 당나라 구양순의 ‘소옥화묘지명(蘇玉華墓志銘)’ 등이며, 이밖에 청나라 때 세운 ‘맹모단기처(孟母斷機處)’ 비석이 있다.
사당 안은 고목이 우거져 하늘을 가릴 정도인데 회나무가 많고 간간히 홰나무 · 은행나무 · 등나무 등이 눈에 띈다. 명나라 때의 유명한 화가 동기창은 <제맹묘고회(題孟廟古檜)>라는 시에서 맹묘의 나무를 언급하고 있다.
“지언문 밖에는 홰나무 안에서 나무가 자라나 홰나무를 감싼 기이한 측백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측백나무가 홰나무를 끌어안았다’고 말한다. 수백 년 풍상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짙은 잎사귀가 자라고 있는 참으로 기이한 나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맹묘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맹부(孟府)
쩌우청시 남관에 위치한 맹자 후손들의 고택인 맹부는 처음 세워진 연대가 정확하지 않다.
동쪽으로 맹묘와 이웃하고 있으며, 맹묘를 북송 선화 3년인 1121년에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보아 맹부도 그 무렵 사당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옮겨 다시 지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원나라 문종 지순(至順) 2년인 1331년 맹자를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에 봉하면서 맹부도 아성부(亞聖府)로 불리기 시작했고, 명나라 때 오면서 상당한 규모를 갖추었다.
맹부의 앞쪽은 관아이고 뒤쪽은 주택이다. 현재 건축은 모두 네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남북 길이 226미터, 동서 폭 99미터에 전당과 문 그리고 회랑이 모두 116칸이다. 대문은 검은 옻칠을 했고 양 옆에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사자가 웅크리고 있다. 문 안쪽 동서 회랑은 맹부를 지키는 수위와 심부름꾼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두 번째 문을 들어서면 정중앙에 대당(大堂)이 있는데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문무관원을 접대하며 친족과 가족의 법규 따위를 논의하는 곳이다. 당 안에는 조정에서 하사한 각종 패와 깃발이 진열되어 있다. 당 앞 동남쪽에는 해시계가, 서남쪽에는 됫박이 설치되어 있다. 동서 회랑은 맹부를 관리하는 여러 관리들의 사무실이다. 대당 뒤에는 맹자의 후손들이 거처하는 내택(內宅)과 사서루(賜書樓)가 있다.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맹림(孟林)
맹림은 쩌우청시 동북 사기산 서쪽 기슭에 자리 잡은 맹자의 무덤이다. ‘신건맹자묘기(新建孟子墓記)’라 쓴 비석의 기록에 의하면, 북송 경우 4년인 1037년에 처음으로 이곳에서 맹자 무덤이 발견되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 뒤 선화 연간에 현성(縣城) 남관으로 사당이 옮겨졌다. 원풍 7년인 1084년 조정에서 30만 전을 내려 무덤과 사당을 정비하게 하고 제사를 위한 땅을 사는 한편 측백과 홰나무를 고루 심었다. 청 강희제 때 이르면 제사와 무덤을 관리하기 위한 땅이 약 2만 평으로 늘었다.
맹림 내에는 측백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울창하며 작은 시내가 남북을 관통하고 흐른다. 신도에서 무덤에 이르는 길은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돌로 바닥을 깔아 향전(享殿) 대문 앞까지 통하게 되어 있다.
제사를 지내는 향전은 5칸이고 전 뒤에 맹자의 무덤이 있다. 무덤 서쪽 300미터 지점에 옛 무덤 3기가 있는데, 맹손(孟孫) · 계손(季孫) · 숙손(叔孫)의 무덤으로 본다.
맹자 읊은 역대 시 모음
孟子之母, 敎化別分. 맹자의 모친은 교화에 분별이 있었네.
處子擇業, 使從大倫. 자식이 업(業)을 택함에 있어 대륜(大倫)을 따르게 했다네.
子學不近, 斷機示焉. 자식의 학업이 비근(卑近, 알기 쉬움)할 때에 베를 잘라 가르쳤네.
子遂成德, 爲當世冠. 자식이 마침내 덕을 완성하자, 당세에 세상에서 으뜸으로 삼았네.
處子擇業, 使從大倫. 자식이 업(業)을 택함에 있어 대륜(大倫)을 따르게 했다네.
子學不近, 斷機示焉. 자식의 학업이 비근(卑近, 알기 쉬움)할 때에 베를 잘라 가르쳤네.
子遂成德, 爲當世冠. 자식이 마침내 덕을 완성하자, 당세에 세상에서 으뜸으로 삼았네.
沉魄浮魂不可招, 가라앉은 백(魄)과 떠있는 혼(魂)은 불러들일 수 없고,
遺編一讀想風標. 유편(遺編, 맹자) 한번 읽고 그 풍도와 본보기가 그리웠네.
何妨擧事嫌迂闊, 거사(擧事)에 있어 오활(迂闊, 멍청함)함을 싫어함이 무슨 상관이오?
故有斯人慰寂廖. 이 사람 덕분에 무료함을 위안할 수 있네.
遺編一讀想風標. 유편(遺編, 맹자) 한번 읽고 그 풍도와 본보기가 그리웠네.
何妨擧事嫌迂闊, 거사(擧事)에 있어 오활(迂闊, 멍청함)함을 싫어함이 무슨 상관이오?
故有斯人慰寂廖. 이 사람 덕분에 무료함을 위안할 수 있네.
戰國縱橫際, 전국(戰國)이 종횡(縱橫)할 때에
姬周喪亂余. 희씨의 주나라가 난리로 어수선해졌네.
聖經渾掃地, 성인의 경전으로 혼연히 땅을 쓸었고,
爲著七編書. 7편의 책을 저술했다네.
姬周喪亂余. 희씨의 주나라가 난리로 어수선해졌네.
聖經渾掃地, 성인의 경전으로 혼연히 땅을 쓸었고,
爲著七編書. 7편의 책을 저술했다네.
삼천교자(三遷敎子) - 명 유준(劉浚)
孟氏三遷宅已荒, 맹씨 삼천(三遷)의 집은 이미 황폐되고,
至今猶說斷機堂. 지금은 오직 단기당(斷機堂)의 말만 전해지네.
絲成交匹勤方得. 실이 필(匹)이 되는 것은 부지런히 해야 비로소 가능하고,
身入芝蘭久自香. 몸은 지초과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간 것 같이 오래도록 향기가 나네.
俎豆容儀非賈衒, 사고 팖에 있어 제수를 올리고 용모를 갖추었으니
經綸事業豈尋常. 경륜과 사업이 어찌 보통이겠는가.
母賢子聖誰能似, 어머니는 어질고 자식은 성스러우니 누가 그에 견주리오
故里千秋尙有光. 고향에는 아직까지 천추의 빛이 남아있네.
至今猶說斷機堂. 지금은 오직 단기당(斷機堂)의 말만 전해지네.
絲成交匹勤方得. 실이 필(匹)이 되는 것은 부지런히 해야 비로소 가능하고,
身入芝蘭久自香. 몸은 지초과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간 것 같이 오래도록 향기가 나네.
俎豆容儀非賈衒, 사고 팖에 있어 제수를 올리고 용모를 갖추었으니
經綸事業豈尋常. 경륜과 사업이 어찌 보통이겠는가.
母賢子聖誰能似, 어머니는 어질고 자식은 성스러우니 누가 그에 견주리오
故里千秋尙有光. 고향에는 아직까지 천추의 빛이 남아있네.
古殿移邾邑, 고전(古殿)은 주읍(邾邑)으로 옮겨지고
高山近孔林. 높은 산은 공림(孔林)에 가깝다네.
遊從齊梁老, 제와 양나라에서 늙을 때까지 유세하면서
功續禹周深. 공적은 우왕과 주공보다 깊었다네.
孝弟先王業, 효제(孝弟)로서 선왕의 유업을 잇고,
耕桑海內心. 농사로써 나라 안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렸다네.
期應過七百, 나라의 주기가 7백년을 넘고 보니
運豈厄當今. 천운은 지금 액운이 되었다네.
辯說千秋奉, 변설(辯說, 아름다운 말)은 오랜 세월 신봉되고
精靈故國歆. 정령은 옛 나라에서 흠향(歆饗)을 받네.
四基岡上柏, 사기산(四基山) 언덕 위에 측백나무
凝望轉森森. 눈여겨보니 삼삼하게 펄럭이네.
高山近孔林. 높은 산은 공림(孔林)에 가깝다네.
遊從齊梁老, 제와 양나라에서 늙을 때까지 유세하면서
功續禹周深. 공적은 우왕과 주공보다 깊었다네.
孝弟先王業, 효제(孝弟)로서 선왕의 유업을 잇고,
耕桑海內心. 농사로써 나라 안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렸다네.
期應過七百, 나라의 주기가 7백년을 넘고 보니
運豈厄當今. 천운은 지금 액운이 되었다네.
辯說千秋奉, 변설(辯說, 아름다운 말)은 오랜 세월 신봉되고
精靈故國歆. 정령은 옛 나라에서 흠향(歆饗)을 받네.
四基岡上柏, 사기산(四基山) 언덕 위에 측백나무
凝望轉森森. 눈여겨보니 삼삼하게 펄럭이네.
戰國春秋, 又異其世. 전국춘추 또 그 세상은 기이하네.
陷溺人心, 豈惟功利. 인심을 함닉(陷溺)시키고, 어찌 공리만 찾았나.
時君爭雄, 處士橫議. 그때에 임금들은 자웅을 다투고, 처사(處士)는 멋대로 지껄였다네.
爲我兼愛, 簧鼓樹帜. 위아(爲我)와 겸애(兼愛)로 생황 불고 북치는(망령된) 기치를 심었네.
魯連高風, 陳仲廉士. 노중련은 고풍을 불렀고, 진중자는 청렴한 선비처럼 행동했다네.
所謂英賢, 不過若是. 이른바 영재와 현인이 이와 같을 따름이었네.
于此有人, 入孝出弟. 이곳에 한 사람이 있어 집에선 효도하고 나가선 어른을 공경했다네.
陷溺人心, 豈惟功利. 인심을 함닉(陷溺)시키고, 어찌 공리만 찾았나.
時君爭雄, 處士橫議. 그때에 임금들은 자웅을 다투고, 처사(處士)는 멋대로 지껄였다네.
爲我兼愛, 簧鼓樹帜. 위아(爲我)와 겸애(兼愛)로 생황 불고 북치는(망령된) 기치를 심었네.
魯連高風, 陳仲廉士. 노중련은 고풍을 불렀고, 진중자는 청렴한 선비처럼 행동했다네.
所謂英賢, 不過若是. 이른바 영재와 현인이 이와 같을 따름이었네.
于此有人, 入孝出弟. 이곳에 한 사람이 있어 집에선 효도하고 나가선 어른을 공경했다네.
夢寐懷鄒邑, 자나 깨나 추읍(鄒邑)을 그리다가
今來亞聖堂. 오늘에야 아성당(亞聖堂)에 왔다네.
斯文天不喪, 하늘도 사문(斯文)을 버리지 않아서
吾道日重光. 우리의 도가 날로 거듭 빛을 발하네.
古木森松檜, 고목 삼나무과 노송나무 사이에
豊碑峙漢唐. 한(漢)과 당나라 비석이 우뚝 서있네.
薪傳應有俟, 섶나무가 불을 전하듯 기다리고 있듯이,
誰復數筍揚? 누가 다시 영명을 드날리나?
今來亞聖堂. 오늘에야 아성당(亞聖堂)에 왔다네.
斯文天不喪, 하늘도 사문(斯文)을 버리지 않아서
吾道日重光. 우리의 도가 날로 거듭 빛을 발하네.
古木森松檜, 고목 삼나무과 노송나무 사이에
豊碑峙漢唐. 한(漢)과 당나라 비석이 우뚝 서있네.
薪傳應有俟, 섶나무가 불을 전하듯 기다리고 있듯이,
誰復數筍揚? 누가 다시 영명을 드날리나?
一發千鈞, 道脈永系. 한 올의 실에 천근의 무게를 매달고, 도맥(道脈)을 오래 이었다네.
能不動心, 知言養氣. 부동심(不動心)에 능하고, 지언과 양기를 설파했네.
治世之略, 堯舜仁義. 치세의 책략과 요순의 인의로
愛君澤民, 惓惓余意. 임금을 사랑하고 백성에게 은택을 주고, 내 뜻을 간곡히 하였네.
欲入孔門, 非孟何自? 공문에 들어가려면 맹자가 아니면 어디서부터 시작하리.
孟丁其難, 顔丁其易. 맹씨(孟氏)처럼 하기 어렵고, 안씨(顔氏)처럼 하기 쉽네.
語墨故殊, 道無二致. 묵자(墨子)와는 다르다고 하나 두 길이 아니네.
卓哉亞聖, 功在天地. 우뚝하도다! 아성(亞聖), 공은 천지에 있다네.
能不動心, 知言養氣. 부동심(不動心)에 능하고, 지언과 양기를 설파했네.
治世之略, 堯舜仁義. 치세의 책략과 요순의 인의로
愛君澤民, 惓惓余意. 임금을 사랑하고 백성에게 은택을 주고, 내 뜻을 간곡히 하였네.
欲入孔門, 非孟何自? 공문에 들어가려면 맹자가 아니면 어디서부터 시작하리.
孟丁其難, 顔丁其易. 맹씨(孟氏)처럼 하기 어렵고, 안씨(顔氏)처럼 하기 쉽네.
語墨故殊, 道無二致. 묵자(墨子)와는 다르다고 하나 두 길이 아니네.
卓哉亞聖, 功在天地. 우뚝하도다! 아성(亞聖), 공은 천지에 있다네.
당시적구(唐詩摘句)
孟母遷鄰罷, 맹자의 어머니는 이웃을 가려 옮겼고,
將軍辭第切. 장군은 처음부터 저택을 사양했네.
將軍辭第切. 장군은 처음부터 저택을 사양했네.
韋生堪繼相, 위생(韋生)은 후손을 이어가길 감내했고,
孟子願依隣. 맹자는 이웃과 의지해 살기 원했네.
孟子願依隣. 맹자는 이웃과 의지해 살기 원했네.
문헌
- 『사기(史記)』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
- 『맹자(孟子)』
- 『현자들의 평생 공부법』, 김영수, 역사의 아침, 2011.
- 『백양 중국사』, 백양, 김영수역, 역사의 아침, 2014.
- 단기지훈(斷機之訓) : 학문을 중도에 그만 두는 것은 짜던 베의 날을 끊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백가쟁명이 최전성기에 이르렀던 전국 시대의 유교사상가. 성선설과 왕도정치론과 정전제도의 실시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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