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9일 토요일

말, horse 1


말, horse 1.


말과에 속하는 포유동물.
가축의 하나이며 학명은 Equus caballus L.이다.
말의 조상이라고 생각되는 동물의 화석은 유럽·아시아·아프리카 지방에서 볼 수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300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신생대 제3기층 초기의 지층에서 발견되고 있다.

한국에서의 말 사육은 선사시대부터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되나, 문헌상으로는 부여·옥저·고구려 등에서 이미 목장을 설치하여 ·돼지와 더불어 말의 목양()이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우경()의 시작과 더불어 기마전()의 보급으로 말의 수요가 늘어나 우마목장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우마를 중심으로 한 국영·민영 목장이 전국에 174개에 이르게 되어 말에게 먹일 사료가 큰 문제가 되자 중국에서 목숙(:개자리)을 수입해 이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고려에서는 초기부터 획기적인 축마제도를 갖추어 1025년(현종 16)에 목감양마법(), 1159년(의종 13)에 축마요식()을 제정하여 말을 사용 목적과 종류에 따라 전마()·잡마()·빈마()·파부마()·별립마()·어마()·반마()·상립마() 등으로 구분하고, 이를 청초기(:4~9월)·황초기(:1~3월, 10~12월) 등 계절에 따라 사료의 품종과 양에 차이를 두어 사육하는 등 축마의 과학화를 이루었는데, 이러한 축마체제는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특히 고려와 원()나라의 관계가 깊어진 1276년(충렬왕 2)에는 제주 등에 몽골식 목장을 설치한 뒤, 원나라로부터 대원마()·달단마(알씸)·나귀 등을 들여와 한국 고유의 재래종 말과 함께 목양하게 되었다. 
이렇게 말이 증산됨에 따라 원나라·명()나라로부터 징마() 요구도 잦아지게 되자 고려는 원나라에 약 20회에 걸쳐 수만 필의 말과 를 보냈고, 명나라에는 33회에 걸쳐 약 3만 필의 말을 보냈다. 

조선시대에도 '말의 생산은 나라를 부()하게 한다', '나라의 부()는 말의 수로써 결정된다'는 기치 아래 말의 증산에 힘써 전국에 53개(세종 때)의 국영 목마장을 설치하고, 말의 수에 따라 목부()를 배치하였다. 
말의 증산정책에 크게 힘을 기울여도 목축류 가운데 말의 수요가 가장 많아 말의 공급 문제는 항상 위정자들의 고민거리로 대두되었다. 
이 당시의 말의 용도는 군사상의 전마()와 통신용의 역마(), 교통·운반·교역용() 등으로 다양하였을 뿐 아니라 식용으로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궁중과 관아에서 말고기의 수요가 늘게 됨에 따라 말의 명산지인 제주에서 건마육()을 공물()로 바치게 하기도 하였다. 
말은 이 밖에도 가죽·털·힘줄[]은 가죽신·장신구 등에 사용되었고, 갈기[]·꼬리는  또는 관모(:· 등)로 쓰였으며, 마분()은 비료·약용의 원료나 연료로도 쓰이는 등 부산물의 용도도 다양하였다.


초기의 말은 체고()가 25∼50㎝로서 머리와 목이 짧고 배면()이 두드러지게 구부러졌으며, 4지()가 매우 짧고 여우 정도의 크기로서 오늘날의 말과는 달리 앞다리에 4지(), 뒷다리에 3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말의 품종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되는데, 몸집이 크고 힘이 센 냉혈종(cold blood), 경주마 또는 승용마인 온혈종(warm blood) 그리고 몸집이 매우 작은 포니(pony)로 구분된다. 
말은 무리를 이루어 생활하며 뚜렷한 서열을 가지고 있고 보통 한 마리의 암말이 무리를 이끈다. 

위험이 닥쳤을 때에는 보통 도망을 치는 습성이 있으나, 이것이 불가능하거나 자신의 새끼가 위험에 닥쳤을 때와 같은 경우에는 맞서 싸우게 된다. 
초식동물로서 말은 시각과 청각이 뛰어나며, 특히 시야는 약 350 이상이며 양쪽 눈으로 볼 수 있는 시야는 약 65이다. 
말은 서서 또는 누워서 잠을 잘 수 있으며 다양한 소리와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말의 성장은 품종과 크기, 성별 그리고 말의 주인에 따라 차이가 크나 대개 3년 이상이 되어야 번식을 시키기 시작한다.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났을 때는 미국과 유럽에 있던 말의 조상은 전멸되었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만 조금 남아 있었다.
오늘날의 가축화된 말은 중앙아시아가 원산으로 추정된다.
소련의 탐험가인 프르제발스키(Przewalski)가 몽고의 중가리아(Dzungaria)사막에서 발견한 프르제발스키말이 야생말에 가장 가까운 체형을 가지고 있다.


야생말은 초원형·고원형·삼림형으로 나눌 수 있다.
초원형:
프르제발스키말이 이 형에 속하며, 대표적인 가축은 몽고말이다.

고원형:
타르판(Tarpan)말이 이에 속한다.
한자어로는 달단마()라 하며, 우리나라의 고대 마산()과 많은 관련이 있어 문헌에 자주 등장한다.
이 말은 1766년 그멜린(Gmelin)에 의하여 발견되었는데 19세기 후반에 멸종되었다.
이 계통에 속하는 대표적인 가축으로는 아랍말이 있다.

삼림형:
빙하기가 끝나고 각 지방에 삼림이 우거진 때부터 유럽·아시아·아프리카 삼림지대에 널리 퍼진 말로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무난히 자란 대형의 말이다.
북부독일에서는 이 대형마의 두골이 홍적세(의 제일 말기인 제4기의 전반)의 유물로 출토되었다.
현재 오스트레일리아산의 핀츠가우어(Pinzgauer)와 벨기에말이 이에 속한다.

말의 형태는 품종에 따라 차이가 많으나 일반적으로 목이 길고 귀는 서고, 기갑부()가 높고, 등·허리가 짧으며 미근부()가 높다.
갈기와 꼬리는 아름답게 늘어져 있다.
털의 색은 다양하며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하기도 한다.

율모():
밤색으로 여기에는 황금색에서부터 암갈색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다모():
대체로 색이 붉은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도 농담()의 차이가 많다.

청모():
옛말의 가라마에 해당되는 것으로 털색이 전체적으로 검은빛을 띤다.

월모():
이것은 고어의 공골말에 해당하는 것으로 피모()가 여린 황백색을 띠고 있다. ⑤ 백모(): 설모()라고도 하는데 털빛이 순백색이다.
위모():
출생시에는 갈색이나 흑색이었다가 나중에 백색으로 변하는 것을 말한다.
한자어로는 총()에 해당된다.

박모():
이것은 고어의 월라에 해당하는 것으로 바탕에 흰 백반()이 있는 것을 말한다.
생장속도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3, 4세에 발육이 완성된다.
임신기간은 평균 335일 정도이며 생후 4, 5개월에 젖을 떼게 된다.
15세까지 번식이 가능하다.

말의 품종은 
형태·능력·원산지·용도 등에 따라서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용도에 따라 승용()·만용(: 수레를 끄는 용도)·태용(: 짐을 싣고 나르는 용도)으로 분류한다. 또 체중에 따라 경종·중종·중간종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승용마 중 가장 널리 분포되어 있는 말은 아랍종이다.
이 말은 아라비아반도가 원산으로 타르판계통의 말인데 예로부터 우수한 품종의 하나로 알려져왔다.
중국의 고문헌에 천마 또는 서역마로 기록된 말이 바로 이 계통의 말이다.
이 종은 체형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경쾌한 운동성에 체질이 강건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개량원종으로 이용하는 우수한 말이다.
이 밖에 승용마로는 영국 원산의 서러브레드(Thoroubred)와 프랑스에서 개량한 앵글로아랍(Anglro-Arab) 등이 있다.

만용으로서는 프랑스에서 산출되는 페르셔롱(Percheron)이 유명하고, 중간종으로는 프랑스의 앵글로노르만(Anglo-Norman)이 유명하다.
만용마는 전시에 중포·치중() 장비를 끄는 데 이용되었다.
왜마()는 셔틀랜드포니(Shetland Pony)가 유명하고 재래종으로는 몽고마와 우리나라의 제주마가 있다.
제주마는 암수 평균체고가 116㎝ 정도인 조랑말로서 소형마에 속한다.
제주도의 조랑말은 수컷보다 암컷이 약간 체격이 크고 체장이 체고보다 짧다.
이것은 제주마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이다.
제주마는 우리나라에서 오랜 세월을 지내온 관계로 기후·풍토에 잘 적응되어 있고 체격이 강건하고 번식력이 왕성하다.
조식()과 조방()한 사양관리에도 잘 견딘다.
능력이 우수하여 105㎏의 짐을 질 수 있고, 1일 32㎞씩 22일간을 행군하더라도 잘 견디어내는 체력과 인내력이 있다.
굽이 치밀하고 견고한 장점이 있다.

전파경로
말의 가축화는 동부유럽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그 시기는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서기전 3000∼2400년경으로 추정된다.
말은 그 특수한 용도로 인하여 가축화된 이래로 세계 도처에 퍼져 사육되었으며, 과학문명이 근대화되기 이전에는 전쟁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우리나라에는 몽고 계통의 호마와 향마라는 두 계통의 말이 존재하였다.
향마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들이 있다.

가모의 설: 
가모()는 우리나라 고대 기마인들이 스키타이식의 활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북부지방에서는 스키타이 기마민족으로부터 얻은 말이 일찍부터 사육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818년에 보고된 김해 패총을 비롯하여 평양 시외의 미림리유적,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의 소평동패총, 경기도 광주군 암사동(현재 서울 강동구) 및 경상북도 점촌유적 등에서 발견된 말의 치아로 우리나라에 석기시대부터 말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것이 가축화된 말인지 야생마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야시다의 설: 
하야시다()는 중국의 쓰촨성·윈난성 일대에는 몽고마와는 다른 현재의 사천마의 조상인 소형마가 있었고, 이것이 구주 서남도서(제주도 포함)에 들어왔다고 추정하여 제주도의 조랑말로 대표되는 재래마의 남래설()을 주장하였다.

노자와의 설: 
노자와[]는 제주마의 유전자 구성을 몽고마 계통의 중형마와 남방도서마 계통의 소형마 등과 비교 검토한 결과, 체격이 작음에도 불구하고 북방의 중형마에 가깝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향마로 불리는 우리의 재래마는 고문헌의 기록과 형태학적 연구를 통해 볼 때, 그 체형이 소형이어서 형태학적 견지에서는 중국 남방의 소형마들과 비슷하나, 몽고마 계통으로 체형이 여러 가지 원인에서 점점 소형화된 것뿐이라고 하겠다.
고문헌에 기재된 재래마의 기록은 매우 많다. 말의 이용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의 “원봉2년……우거청강태자헌마운운(……)”이라는 내용으로 말을 사육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이 밖에 군용으로 이용하였다는 기록과 신라에서는 거()라는 말 목장의 수도 많았고, 목숙()을 대륙에서 들여와서 말의 사료작물로 재배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백제에서는 일본에 말을 보낸 사실도 있다.
다른 문물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중형마는 북방 계통으로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전파되었다는 설이 인정되고 있다.
문헌적으로 우리나라의 『삼국사기』 등에는 기록이 없다.
『일본서기』에서는 “백제왕견 아직기양마이필즉양지어경판상구인이아직기영장사()”라 하였고, 『고사기()』에서는 “백제국조고왕이목마일필비마일필부아직길사역공상()”이라 하여 백제에서는 아직기()로 하여금 일본에 말 두 필을 보내고 또 이의 사육을 맡게 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그때 일본에 좋은 말이 없었을 뿐 아니라 사육방법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고려 때에는 이색()이 “아동방마유이종왈호마북방래자야왈향마국중소출야국마여로무족이양마()”라 하여 국내에 두 종류의 말이 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승용과 만용의 역사

말의 용도는 승용·만용·태용·수렵용·희생용·육용 등 다양하나 가장 큰 매력과 효용은 그 속력에 있다.
말의 용도는 어디까지나 승용이 주가 되고 그 밖의 용도는 부수적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고구려 동명성왕의 건국신화, 대무신왕의 승용마인 ‘거루(imagefont)’에서처럼 일찍부터 승용으로 이용되어 왔다.
고구려 벽화의 수렵도 역시 이를 뒷받침해주는 자료가 되고 있다.
안악고분의 벽화에는 말이 수레를 끄는 그림이 있어 만용으로도 일찍부터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가지 이용이 우리 나라에서의 말 생산의 가장 큰 목적으로 예로부터 조선시대까지 수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왔다.

희생용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전()에 “부지승우마우마주어송사()”라 되어 있어 삼한에서는 말과 소를 순전히 수장용으로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말은 서유럽이나 일본 같은 지역에 있어서는 농경용으로 중요한 것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에서 밭 밟기에 이용한 것 외에는 농경에 이용된 일이 없었다.

육용과 부산물의 이용

축산물과 관계되는 문화 분류에 있어서 식물문화권·미식문화권·착유문화권·비착유문화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고기의 식용에 있어서도 마육문화권과 비마육문화권으로 나눌 수 있다.
말고기의 식용은 희생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말을 희생으로 제단에 바친다는 것은 곧 사람이 그 고기를 먹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순장을 한 일은 있으나 제단에 희생으로 바친 일은 없었으므로 말고기를 식용하는 풍습은 성립되지 않았다.
다만 제주도에서 말고기의 포를 진상한 기록은 있다.
대체로 고대 유럽·중국·인도는 말고기를 먹는 문화권에 속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말총이 망건·탕건 등의 재료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설화·민속

설화

말과 관련된 설화로는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전해진다.
서기전 69년 경주의 알천에서 6촌의 장들이 모여 군주의 선출을 의논하고 있을 때 남쪽 양산 밑의 나정에 백마가 무릎을 꿇고 있다가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 자리에는 큰 알 하나가 있었고 그 알에서 태어난 아이가 박혁거세라는 것이다.
이 밖에 고구려의 명마 거루에 관한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대무신왕 때 부여와 전쟁이 벌어졌는데 골구천이라는 곳에서 거루라는 신마를 잃어버렸다.
일년이 지난 뒤 그 말이 부여마 100여 필을 이끌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민속

우리 민속에 혼인을 정할 때 궁합을 보는 일이 많다.
이때 말띠의 여자, 특히 경오년()에 태어난 여자는 백말띠라 하여 기가 세서 팔자가 사납다고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오()는 화성()이어서 성질이 급한데서 나온 속설이다.
이와 같이 말이 강한 양성()이라는 데서 액귀나 병마를 쫓는 방편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발전과정

말을 목양하여 이를 군사 및 교통·통신·산업용 또는 외교상의 교역품으로 공급하였던 행정을 말한다.
역대 통치자들은 말을 중시하여 마정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여왔다.
우리나라의 마정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실시되어 삼국·고려·조선 시대를 거치는 동안 중국 및 몽고의 제도 등을 받아들여 크게 발달된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한때는 수만 필씩 전마()로 수출되어 원나라·명나라까지 그 이름을 떨쳤다.
마정의 발전과정은 다음과 같다.

초기의 마정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말이 산출되어 이용되었고 마정이 실시되었는지는 명백히 밝힐 수 없다.
현재까지 출토된 청동기시대의 마면()·마탁() 등의 유물로 미루어 말이 이용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사기』 조선전에도 고조선에서 말을 사용한 기록이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부여에서 명마(), 고구려에서 소마, 예에서 과하마()가 산출되었다는 기록과 변한·진한에서도 말이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삼국시대 이전인 청동기시대부터 말이 생산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시대에는 목장도 설치되어 말을 생산하였을 뿐 아니라 고조선에서는 말 5,000필을 한나라에 헌마하기도 한 사실이 있어 이 당시에 마정이 행하여졌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마정

삼국시대에 들어와 말은 더욱 그 용도가 확대되었는데, 특히 기마전()의 보급으로 전마확보가 시급한 과제로 되어, 마정조직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고구려는 국초부터 목장을 설치하여 양마 생산에 힘썼는데, 22년(대무신왕 5)에는 『사기』 대완열전()에 전하는 신마()의 존재를 찾을 수 있어 당시에 외래 우량마를 목양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역제()와 기병제의 발달을 보게 하였다.
백제도 국초부터 목장을 설치 목양에 힘썼는데 260년(고이왕 27) 이후에는 병관좌평()이 병마의 일을 관장하였으며, 또한 마부()를 설치하여 마정에 힘쓰게 함으로써 말이 교통·군사·외교면에서 크게 이용되었다.
신라는 64년(탈해왕 8)에 기마전이 행하여졌던 사실로 보아 이때를 전후하여 마정이 발달하였음을 말하여주고 있다.
487년(소지왕 9)에는 역()을 설치하였으며, 516년(법흥왕 3)에 병부()를 두고, 584년(진평왕 6)에는 승부()를 두어 마정에 철저를 기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 목장()은 크게 발달하여 669년(문무왕 9)에는 전국에 공·사목장이 174개가 존재하였다.
말 사육에 있어 중요한 문제는 마료()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삼국 중 신라는 양질의 우마료인 목숙을 외국으로부터 수입, 이를 관리 재배하기 위하여 백천목숙전()·한지목숙전()·문천목숙전()·본피목숙전() 등의 관청을 설치하기까지 하였다.
삼국시대 마정은 군사·교통·산업·외교면에서 크게 이바지하였으나, 반면 그 재정적 부담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후삼국시대에 있어서도 마정은 행하여졌다.

마진()에서는 비룡성()이 설치되어 마정이 발달된 흔적을 남기고 있다.

고려시대의 마정

고려시대의 마정조직은 중앙과 지방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중앙조직은 병부 밑에 대복시()·전목사()·상승국()·공역서() 등의 관아가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병부는 마정의 최고 정책기관으로서 역마·전마 목장관리에 관한 일을 맡았다.

대복시·전목사·상승국·공역서는 실무관아로서, 그 중 대복시는 여마(輿) 및 구목()을 소관하고 문종 때는 판사(, 정3품)와 경(, 종3품) 1인, 소경(, 종4품) 1인, 승(, 종6품), 주부(簿, 종7품) 등을 배치하였다.
그 뒤 1308년(충선왕 즉위년)에 사복시()로 개칭되는 동시에, 이에 상승국·전목사·제목감() 등이 합병되고, 영사()·정()·부정()·승()·직장(, 종7품) 등이 배속되었다.
그 뒤 곧 판사·부령(, 종4품)·승·직장으로 개편되었으며, 그 뒤에도 거듭 개편되어갔다.
이 밖에 대첨장() 1인, 안욕장() 1인과 잡직장교() 2인을 배치하였다.
전목사는 전국 목장을 관장하여 말 사육을 담당하였는데, 문종 때 판사·사(使)·부사(使)·판관·녹사()·기관()·기사()·서자() 등을 배치하였다.

상승국은 내구(: 임금의 승마, 수레)를 맡은 관아로서 충선왕 원년에 사복시에 병합되었다가 이듬해 봉거서()로 고치었다.
그 뒤 다시 상승국으로 되었다가 1391년(공양왕 3)에 중방()에 병합되었다.
공역서는 전국 525개의 우역()을 관장하여, 역마·포마()의 기발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등 마정상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지방조직은 전국 각지에 설치되었던 목장을 단위로 하여 이루어졌는데, 각 목장에는 목감직()과 노자(: 뒤의 )를 배치해서 말 사육에 종사하게 하고 또 간수군()인 장교와 군인을 배치해서 감독하도록 하였다.
목감직의 지위는 병과권무직()으로, 연 녹봉 8석 10두를 받는 최하층의 관직이었다.
노자는 천인 신분으로 청초절(··)에 대마() 네 필을 사육하는 것을 직책으로 하였는데, 그 직이 고역()이었다.
이상과 같은 지방조직은 1276년(충렬왕 2)에, 몽고가 탐라도(: 제주도)에 목마장을 건설하고 몽고의 말과 몽고인 말 사육전문가인 목호()들을 계속 파견하여 목마사업을 적극화함으로써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종래 말 사육에 종사하였던 노자는 목자로 개칭되는 동시에 그 신분도 차츰 신량역천()의 계층으로 전화되어갔다.
지방조직의 단위가 되었던 목장은 『고려사』 병지 마정조()에 용양()·농서(西)·은천()·양란()·좌목()·회인()·상자원()·엽호현()·강음()·동주() 등 10개의 목장명을 전하고 있다.
이 밖에 전국 각지에 목장이 설치된 기록이 전하고 있고, 또한 신라시대에 174개의 목장이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고려시대에도 약 160개 정도의 목장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 중 탐라목장은 그 규모가 크기로 유명하였다.
고려시대 마정으로 특기할 것은 말 사육책에 획기적 조처를 취한 것이다.

1025년(현종 16)에는 노자들의 직책을 명시하여 청초절에 대마 네 필을 사육하여 새끼를 생산하도록 하되 사육방법에 있어 마료()는 계절에 따라 종류와 수량의 차를 두었다.

황초절()에는 하루 한 필의 말에 말두() 3승(), 실두() 3승을, 그리고 청초절에는 말두 3승을 먹이도록 하였다.
그 뒤 1159년(의종 13)에는 전목사가 주청하여 전국 목장의 축마료식()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목장관리책이 확립되고, 말 사육방법은 과학성을 가지게 되었다.
고려는 10여 종류가 넘는 우수한 말을 생산하여, 그 이름이 원나라·명나라에까지 떨치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의 쉴새없는 징마() 요구에 부딪치어 마정은 외교문제 해결에 큰 구실을 하게 되었다.
고려는 여진과의 외교에서 말거래를 약 130회 하였으나 그 대부분은 말을 수입하는 관계였다.
원나라와는 약 30회에 걸쳐 다량의 말과 마료를 수출하는 관계로, 또 명나라와는 35회에 약 3만 필을 수출하는 관계로 외교문제를 해결하였다.
이로 인해 말이 부족하게 되어 문무관은 물론 심지어는 민간마를 탈취하기까지 하여 이를 충당하기도 하였다.
마가()가 상승하여 말 한 필이 노비 2, 3명과 거래되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고려는 마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목장전()·마전() 및 역전()을 배정하였고, 방대한 마료(··· 등)와 노자(목자)와 수의박사( 16 22 지급) 등의 인건비를 부담하였다.
이로써 마정은 전마·역마 그리고 말을 외교상의 교역품으로 공급함으로써 고려사회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선시대의 마정

조선시대의 마정조직은 처음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실시하였으나 그 뒤 수차례에 걸친 개혁을 통해 『경국대전』의 완성으로써 조선적인 마정조직을 정비하기에 이르렀다.
중앙조직은 병조 밑에 사복시가 전국 마정을 관장하였다.
병조에는 승여사(輿)·무선사()·무비사()의 3사가 있었다.
그 중 승여사는 구목()·여연(輿)·정역() 등을 맡고, 무선사는 마정에 종사하는 관리들의 인사에 관한 일을 맡고, 무비사는 전국의 마적()에 관한 사무 등을 관장하였다.
사복시는 마정집행의 실무기관으로서 『경국대전』에 의하면 정2품 이상의 제조(調) 2인을 추대하고, 장으로 정3품의 정() 1인을 임명하였다.
그 밑에 부정(, 종3품)·첨정(, 종4품)·판관(종5품)·주부(簿, 종6품)·안기(, 종6품)·조기(調, 종7품)·이기(, 종8품)·보기(, 종9품)·마의()·서리()·제원()·차비노()·근수노()·견마배()·이마()·창직[]·대청직()·사령(使)·군사 등이 배치되었다.

궁의 마정을 위하여 내사복시를 설치하였으며, 이 밖에 의정부는 최고정책기관으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지방조직은 각도 관찰사 책임관할하에 수령이 감목관()을 겸임(일부지방은 의 감목관을 두는 수도 있다)하여, 각 목장에 말 사육에 종사하는 군두()·군부() 및 목자를 지휘 감독하도록 조직하였다.

이러한 조직은 국초부터 수없이 많은 개혁과정을 통하여 1425년(세종 7)에 일단 정비된 조직을 갖추고 그 뒤 약간의 수정을 거쳐 『경국대전』의 제정으로 확립되었다.
곧 제도 목장을 자마(: 암말) 100필과 웅마(: 수말) 15필로서 1군()으로 삼고, 매1군마다 군두 1인, 군부 2인(목자 중에서 우수한 자를 골라서 정함)과 목자 4인을 배정하고, 매년 새끼생산 책임량으로 1군당 85필 이상을 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 목장수는 약 200개가 존재하였으며 이에 종사하는 목자는 5,178명, 군두 1,295명, 군부 2,589명, 감목관 21명 등 총 9,083명이었다.
그 중 목자는 우·마 생산을 직접 담당한 자로서 신분은 신량역천에 속하는 계층이었다.
그들의 임기는 16세에서 60세까지였는데, 1425년에는 암말 25필을 사육하여 1년에 새끼 20필 이상을 생산하도록 하더니, 『경국대전』의 제정으로 1년에 21필 내지 22필을 생산해야만 되었다.

이는 목자의 사육기술이 고도에 달하고 있음을 말하여 준다.
국가는 그 대가로서 목자에게 목자위전() 2결을 지급하여주고, 복호()하거나 봉족을 배정하고, 근무성적이 우수할 때는 토관()·군무·군부·백호()·천호()의 직위를 수여하고 또한 경관()으로도 임용하였다.

이러한 처우에 비해, 그 몇 배나 되는 고역()이 그들에게 가해지는 이외에 그 직은 종신 세습으로 자손에까지 전하여 타직으로의 전직이 용서되지 않았으며, 마초()·토산물을 바쳐야 되고, 또한 목마군()으로서 복무를 하여야만 되었다.
감목관은 종6품 이상으로 목장관리 및 마적·목자의 호적 보관과 목자의 근무성적을 평가하여 그 진퇴를 결정하였다.

마정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하여 취한 정책은 
첫째는 목장전·마전·역전을 배정하여 경비에 충당하고, 
둘째는 우량마를 확보하기 위하여 중국 및 야인으로부터 종마(:달단마·등) 등을 구입, 종자개량에 힘써 약 90여 종의 말을 생산하였는데 그 중 철청준(駿)·오명마() 등 20여 종은 명나라까지 알려진 명마로서 외교적으로 거래되었다.

셋째는 『마의서』·『마경()』·『농사직설』·『고사촬요』 등의 서적을 발간하여 과학적 양육법 등을 참고로 말의 치료예방에 노력하고 마의(, 정6품에서 종9품)를 양성하여 치료·의술 및 의방(· 등)을 목자에게 전습시키고 또한 약재(········· 등)를 개발, 사용하게 하였다.
이러한 수의술로서는 가령 현종 때 창궐했던 우마질()에 속수무책이었다.

넷째는 영양가 있는 마료를 확보하여 먹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정부는 마초전()을 설치하고 도서 적전()에까지 곡초를 심어 목초확보에 노력하였으며 또 유사시에 대비하고자 행정구획에 따라 대·중·소로 구분하여 대읍()은 10만속, 중읍은 8만속, 소읍은 6만속, 그리고 중요도로 연변읍은 상기한 것 등에 다시 1만속을 추가 비축하게 하고 1494년에는 전 1결에 1속의 마료()를 징수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백성들은 그 부담으로 인해 허덕이는 생황을 하게 되었다.

다섯째는 말 생산에 종사하는 자(祿····· 등)들의 복무규정을 강화하여 우수하면 영전시키고 말을 잃어버리면 태·장형에 처함은 물론 그 수대로 변상징수하게 함으로써 말을 보호하게 하였다.
이러한 규정이 너무 가혹하여 결국 목자들의 이역현상()을 초래하였다.
조선시대 마정으로 말은 역마·승마 등의 교통용으로, 그리고 전마 등의 군사용으로, 농경용의 생산수단으로, 이 밖에 말갈기[]는 갓(· 등)으로, 말가죽은 가죽신[]과 주머니[], 말힘줄은 조궁(), 마분()은 종이원료용으로 그리고 말고기는 식육용으로 크게 이용되었는데 특히 징마 요구에 부딪치어 마정은 외교면에서 더욱 중시되어 국초부터 세종까지 무려 6만 필의 말을 수출하게 되었다.
이로써 마가는 말 한 필에 오승포()로 대마는 상등이 500필, 중등이 450필, 하등이 400필, 중마는 상등이 300필, 중등이 250필, 하등이 200필로 거래되었다.
조선의 마정은 임진왜란 이후 쇠퇴하여 인조·효종 때는 전국 목장이 119개 소로 축소되고 숙종 때는 73개의 목장이 간전()으로 되었다.

유한원()·서유구() 등의 일부 실학자들은 그 재건을 주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으로 목장전을 압수함으로써 조선의 마정은 전폐되었다.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에 위치한 신라시대 무덤인 천마총에서 출토된 장니에 그려진 말그림.


마구의 일종인 장니(말다래) 2점이 발견되었으며 다른 한 점에 비해 이 장니는 상태가 좋아 말갈기와 꼬리털을 세우고 하늘을 달리는 천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인동덩굴무늬는 고구려의 영향을 보여준다. 
신라, 53×73㎝, 국보 제207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조랑말


어깨높이 140㎝ 이하이다. 대부분이 각 지방의 재래이다. 
체질이 강건하고 근육질로서 단단하며, 머리는 큰 편이고, 귀는 작다. 
등허리가 곧고 길며, 다리는 가늘다. 
머리와 목에 갈기가 많고, 꼬리에는 이 많다.

각 지역의 풍토에 적응하여 거친 먹이에 잘 견디며, 지구력이 강하다. 
이 때문에 체질에 따라 논갈이의 농마로서, 운반용의 역마()로서, 어린이를 위한 승마로서 이용되고 있다.

영국의 재래마인 셰틀랜드포니(Shettland pony)는 어깨높이 87∼125㎝로 가장 작은 말에 속하며, 유원지나 공원 등에서 어린이를 상대로 한 애완용 승마로서 유명하다. 
중앙아시아의 초원에 생존하였던 프셰발스키말(Przewalskii horse)은 조랑말의 야생종으로, 몸길이 220∼180㎝, 어깨높이 120∼146㎝, 몸무게 200∼300㎏이며, 오늘날에는 세계 각국의 동물원에 보존되어 있다. 
몽골말(Mongolian wild horse)은 프셰발스키말에 고원마계()의 동양종이 섞인 조랑말이다.

한국에는 제주마가 있는데, 부여 및 고구려 때부터 사육되어온 말로서 기록상으로 1073년과 1258년에 탐라에서 고려에 제주마를 진상한 사실이 있으며, 1273년에 원나라가 탐라를 침공한 뒤 약 100년간 몽골말이 유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주마는 과하마() 또는 토마()라고도 하였다. 
과하마란 이름은 제주마가 몸집이 작아서 과수나무 밑을 갈 수 있는 말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제주마는 어깨높이 113㎝, 몸길이 122㎝로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으며, 몸길이가 긴 독특한 체형으로 다른 말들보다 뚜렷하게 작다. 
몸의 균형이 전체적으로 고르게 잡혀 있으며, 얼굴이 넓다. 
털빛깔은 밤색과 붉은빛을 띤 갈색, 젖빛을 띤 흰색 등이다.

성질이 지극히 온순하여 사람을 잘 따르며 명령에도 잘 순종한다. 
제주에서 사육되고 있는 제주마의 사육수는 한때 2만여 마리에 달하였으나 현재는 1,000여 마리로 감소하였다. 
1986년 2월 8일 혈통 및 종 보존을 위하여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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