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제11·12대 대통령, 1
3공화국 시절,
그 후 전두환은 육군 중령으로 승진, 1963년 1월 7일 중앙정보부 총무국 인사과장을 거쳐, 1963년 9월 15일 육본 인사참모부로 전속되었다. 1964년 7월 육군대학(陸軍大學)에 입교, 1965년 6월 27일 육군대학을 수료하였다. 1966년 8월 11일에는 육군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에 임명되고, 1967년 8월 11일에는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67년 서독 시찰 중 아버지 전상우의 부음을 접한다. 1968년 1월 귀국 후 다시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으로 복귀했다. 그는 육사 동기들 중 육군 중령으로는 늦게 진급했지만 1969년 육사 11기 동기들 중 최초로 육군 대령으로 진급했고, 육군 본부 육군참모총장실 수석부관대리를 지냈다. 1969년 4월 14일, 전두환 중령은 육사11기 이후의 동창회인 북극성회(北極星會)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2월 1일 육군참모총장실 수석부관이 되었다.
월남전 참전,
1970년에는 육군 대령으로 진급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이 되어 1년간 근무했다. 1970년 11월 22일 백마부대 29연대 연대장이 되어 베트남 전쟁의 지휘관에 파병·참전했다. 1971년 1월 30일 박쥐 25호 공수낙하 작전을 개시하였다가 병사 1명이 실종되었다. 수색을 하였으나 병사는 찾지 못했는데, 기적적으로 이 병사는 홀로 살아서 돌아왔다. 2월 2일부터 2월 20일까지는 쑤이까이 및 망망 계곡에 숨어있는 베트콩을 섬멸하였다. 3월 7일 29연대 3대대의 12중대 중대원 176명 가운데 한꺼번에 9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나 부상당하여 후퇴하였다. 우기(雨期) 중인 6월 22일 박쥐26호 작전을 개시하여 베트콩 23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때 소화기 115정, 공용화기 13문, 수류탄 42개, 실탄 2191개, 포탄 31개등을 암시장에서 구입하여 노획이라 보고해 전두환 대령은 특별히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1971년 화랑, 충무, 을지무공훈장 등 3개의 무공훈장을 받았다.
파병기간 중 패전도 없었는데 예하 군 장병들로부터 인망은 크게 잃었다.(특히 식수가 부족한데도 혼자 진중에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거나 암시장에서 무기를 사와 전리품으로 상부에 보고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귀국과 함께 훈장을 주려 했으나, 월남전에서의 그의 직속상관들은 그의 훈장수여를 반대하였다.) 1971년 11월 귀국하였다. 이때 그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일본에서 3대오물로 유명한)츠지 마사노부라는 일본군 대위가 있었다. 그는 동남아 일대를 돌며 나쁜 것은 하나도 배우지 않았어, 돌아다닌 나라의 지형과 풍속을 그는 소상이 머리에 넣고 왔지, 전쟁이 일어나자 그 대위의 정보만으로 일본은 초기의 태평양전쟁을 수유히 수행했다.'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왔다.
숙청위기와 중앙 복귀, 윤필용 사건과 숙청 위기,
윤필용 필화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귀국 후 11월 30일 장군 보직인 제1공수특전여단 여단장에 파격적으로 임명되고, 1973년 1월 1일 (임)준장(임기제 준장)으로 진급했다. 1974년 김복동 손영길 최성택 등과 육사 11기 최초로 정식 준장에 진급됐다. 1976년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겸 보안차장보가 되었다가 1978년 1월 23일 육군 제 1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또한 그해 6월 10일 1사단장 재직 당시 한 GP 근무자로부터 폭발음이 들렸다는 보고를 받고 주변지역의 땅을 파 7월 4일 제3땅굴을 발견하기도 했다.
전두환은 윤필용의 비호속에 손영길 등과 함께 하나회를 이끌어 갔지만, 육사 동기이자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 손영길 준장과 하나회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기도 했다. 하나회의 리더 중의 하나였던 그는 1973년 4월 윤필용이[24] 윤필용 사건으로 당시 보안사령관 강창성에 의해 군부 내 사조직으로 적발돼 위기에 몰렸다.
윤필용(尹必鏞) 사건이 터졌을 때 그를 따르던 장교들이 모반 혐의로 수십 명 연행되었다. 백마부대 연대장으로 베트남전에 다녀온 뒤 이 무렵 제1공수특전여단 여단장이 되어 있던 전두환 또한 화를 피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전두환도 윤필용이 후원해주던 ‘하나회’의 핵심 멤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가 대통령에게 강력히 건의해 풀려날 수 있었다. 윤필용 사건이 일어남으로해서 그는 오히려 손영길(孫永吉) 준장 등 경쟁자를 물리치고 하나회의 1인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1976년 청와대 경호실 차장보에 임명되었다.
차지철과의 관계,
1976년 6월 14일 전두환은 차지철의 발탁으로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겸 보안차장보에 임명되어 중앙으로 복귀했다. 이때 전두환은 자신의 후임 1공수특전여단 여단장으로 박희도를 추천했다. 차지철은 배은망덕한 사람은 싫어하였고, 입이 무거운 전두환을 높이 사 특별발탁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두환이 더 박정희의 총애를 받으면서 차지철은 그를 견제하게 된다. 그는 차지철 밑의 차장을 보좌하는 차장보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상관인 차지철을 존경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기보다 세 살이나 어리고, 육사가 아닌 광주포병학교 출신의 그를 깔보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 | 차지철이 원래 내 밑에 있었어. 그 사람이 육사12기 시험에 떨어지고 그 다음에 포병학교를 가서 포관이 된 사람이지. 자존심이 강해. 나와 함께 미국에 갔는데 그 사람이 미국 사람과 싸움을 해서 퇴교를 당하게 돼 있었어... ... . 차 대위가 외국인의 불만을 대표해서 때린 것이라고 내가 변호를 해서 결국 용서를 받았어. 그 사람이 육사12기 시험에 응시했다가 떨어진 것을 스스로 비밀에 부쳤는데 육사 출신을 매우 싫어했어. | ” |
— 전두환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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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차지철과 박종규의 배려로 노태우도 청와대 경호실 행정차장보로 발탁되었다. 전두환은 작전, 보안차장보로 노태우는 행정차장보로 발탁되면서 기적적으로 중앙으로 복귀했고, 전두환은 브리핑을 잘 하여 박정희의 신뢰를 얻으면서 예편위기를 넘겼다.
점차 전두환은 차지철과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총애를 받는 실세가 된다. 때문에 전두환과 차지철은 서로의 입지에 방해가 되는 상대방을 좋아할 리 없었으며 그래서 둘 사이는 겉으로는 좋아보였지만 실제로는 원수지간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차지철쪽은 직설적이고 괄괄한 데에 비해 전두환쪽은 냉정하고 침착하다는 점이 차이가 있었다. 훗날 박정희와 차지철이 김재규에 의해 살해당한 이후 전두환이 나서서 사건을 수사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러한 뒷배경이 존재했기 때문이며 전두환은 이러한 뒷배경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1978년 1월 23일 육군 제1보병사단장으로 전출되었다. 육군 1사단장으로 전출되면서 전두환은 자신의 후임 작전차장보에 노태우를 강력 추천하여 임명하고 부임하였다. 이때 다시 한번 예편위기에 몰렸지만 제3땅굴을 발견하여 신뢰를 얻었다.
1979년 3월 5일 국군 보안사령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임명되자 부하에게 차지철을 견제하기 위해 보안사가 계엄하에서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방안에 어떤 것이 있는지 연구해보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그해 여름까지 강구된 것이 합동수사본부 설치에 관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보안사가 중심이 되어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게 되면 다른 정보·수사기관까지 지휘할 수 있다는 보고를 들은 전두환은 “취할 수 있는 긴급조치가 꽤 많군” 하면서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군생활 이력,
- 소위
- 1955년 - 육군 소위 임관(육사 11기)
- 1955년 - 육군 보병학교 초등군사교육반 수료
- 1955년 - 육군 제25사단 소대장
- 1956년 - 육군 제21사단 소대장
- 1957년 - 육군 보병학교 교육연대 교육장교
- 중위
- 1958년 - 육군 보병학교 교육연대 구대장
- 1959년 - 육군 고급부관학교 군사영어반 제46기 수료
- 1959년 - 육군 제1공수특전단 본부 선임장교
- 대위
- 1959년 - 미국 포트브랙 심리전학교 및 특수전학교 수료
- 1960년 - 미국 포트베닝 레인저스쿨 수료
- 1960년 - 미국 육군보병학교 유격훈련 교관화 교육 과정 수료
- 1960년 - 육군 제1공수특전단 제1특전대대 작전참모
- 1961년 -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장 직무대리
- 1961년 - ROTC 창설준비요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담당 ROTC 교관
- 1961년 - 5.16 군사 정변 지지 시위 주도
- 1961년 - 군사혁명위원회 민원담당비서관
- 1961년 - 중앙정보부 수사과 과장
- 1961년 - 중앙정보부 제2국 정보과 과장
- 1961년 - 중앙정보부 제1국 인사과 과장
- 1962년 -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비서관
- 소령
- 1962년 - 중앙정보부 인사과 과장
- 중령
- 1963년 - 중앙정보부 총무국 인사과 과장
- 1963년 -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 1965년 - 육군대학 졸업
- 1966년 - 육군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 1967년 -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
- 1967년 - 서독 시찰
- 1969년 - 육군 참모총장실 수석부관
- 대령
- 1970년 - 육군 참모총장실 수석부관
- 1970년 ~ 1971년 - 베트남 전쟁에 지휘관 요원으로 참전
- 1970년 - 육군 제9보병사단(파월 백마부대) 29연대장
- 1971년 - 육군 제1공수특전여단 여단장 직무대리
- (임)준장
- 1973년 - 육군 제1공수특전여단 여단장
- 준장
- 1974년 - 윤필용 사건 영향으로 예편 위기
- 1976년 -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 소장
- 1978년 - 육군 제 1사단장
- 1978년 - 제3땅굴을 발견
- 1979년 ~ 1980년 - 국군 보안사령관
- 1979년 -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본부장
- 1979년 - 중앙정보부 차장보
- 중장
- 1980년 - 제10대 중앙정보부 부장서리
- 1980년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 대장
- 1980년 8월 6일 - 육군 대장으로 진급 후 8월 26일 부로 전역
10.26 사태 전후,
이 부분의 본문은 10·26 사태입니다.
1979년 10월 26일에 대통령 박정희가 궁정동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저격당하는 10·26 사건이 발생했다.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직으로 일시 권력을 승계했다. 이 날 전두환은 부하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가진 합동수사본부의 설치 기안을 명령했다. 10월 27일 새벽 비상국무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 유고안이 내려졌고, 계엄사령부가 설치되자 전두환 소장은 곧 계엄사령부 예하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에 임명돼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의 수사 지시 명령을 받았다.
10월 27일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 윤일균, 국내담당차장 전재덕, 검찰청 총장 오탁근, 치안본부장 손달용 등을 보안사 2층 사령관 접견실로 불렀다. 전두환은 이들을 입구에서 삼엄한 몸수색을 했으며, 상석에 앉아 박정희의 서거를 알린 뒤 범인은 중앙정보부라고 지목하고 박준광 육군 소령을 통해서 각 기관의 업무지침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곧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에는 '앞으로 일체의 예산을 집행해서는 안 된다. 다만 합수본부의 허가를 받으면 집행할 수 있다'라며 행동에 제한을 두었다. 그 뒤 "앞으로 모든 정보 보고는 오후 5시, 오전 8시에 합수부에 제출하라"라고 지시했다. "정보부는 전재덕 차장이 당분간 장악하라" 라고 지시했다가 선임자가 해외담당차장임을 알고는 수정했다.
1979년 10월 27일 비상 사태에 의한 혼란 중에 전두환은 당시 육참총장 정승화의 지시를 받아 계엄사령부 예하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즉시 군내 인맥을 동원, 중정 요원들과 격투끝에 이들을 제압시키고 김재규, 박선호, 박흥주 체포전에 돌입한다. 10월 27일 오후, 그는 합동수사본부장 자격으로 김재규, 박흥주(현역 대령, 중정부장 비서관), 박선호(前 해병대 대령, 중정 의전과장) 등을 박정희 대통령 저격범으로 체포했고, 언론에 발표했다. 이어 그는 언론에 수시로 브리핑을 하며 수사 결과, 취조 과정을 공개하였다.
김재규 체포와 수사결과 발표,
전두환은 체포된 김재규를 면담하고 그대는 역적이고 배신자이니 어쩔수 없이 죽어야 된다고 했다. 전두환은 김재규의 동생 김항규에게도 사정을 양해했다고 한다. 김항규에 의하면 "전두환 장군은 "나는 군 선배로서의 김재규 장군은 존경하지만 국가원수에 대한 일이니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이해해 달라."고 하였다. 전두환은 김항규에게 미국의 "카터나 소련의 브레즈네프가 찾아와도 형님은 살릴 수 없다."고 했다.
11월 6일 계엄사 합수부장으로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 피살사건의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계엄군법회의에서 공개재판할 것을 언론사에 발표했다. 이날 그는 10.26 사건은 김재규 단독계획범행이고 정승화는 무혐의라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또한 내외부의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고 수사 기간 중 협조해준 국민과 관계기관에 감사를 표한다고 발표했다. 11월초 전두환은 노태우를 불러 모종의 계획을 세웠다.
1979년 11월 중순부터, 전두환은 하나회 동기와 후배들을 규합하여 군사 반란을 일으킬 모의를 했다. 같은해 12월 6일 최규하는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후 혼란한 정국을 틈타 노태우, 정호용, 유학성, 황영시 등이 주도하는 비밀 군내 친목단체 하나회의 육사 11기 출신 장교들을 주축으로 하여 신군부를 형성했고, 일부 선후배 기수들을 끌어들였다. 이를 배경으로 전두환은 신군부가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쿠데타에 의한 집권과정 12·12 군사 반란,
이 부분의 본문은 12·12 군사 반란입니다.
12월 6일 전두환은 육군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이 제안한 수사계획서에 따라 반란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부장으로서 현장에 있던 김계원 및 계엄사령부 사령관 육군 대장 정승화 등을 내란방조죄로 체포하고, 이 과정에서 김오랑 육군 소령과 병사 2명이 신군부 병사들이 쏜 총격에 사망하는 등 물리적 교전이 발생했다. 정승화 참모총장 연행을 반대하던 수경사령관 장태완, 특전사령관 정병주 등도 곧 체포됐다. 정승화 참모총장은 보충역 이등병으로 강등당한 뒤 강제 예편당했고, 이 과정에서 반발하던 육군 장군과 장교들은 인사 불이익을 받고 강제 퇴역, 예편당했다.
한때 하나회 회장이었던 윤필용 수경사 사령관이나 그 고문이었던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은 하나회의 리더 격인 전두환에게 풍부한 활동자금을 지원해주었다. 전두환은 이 자금을 혼자 착복하지 않고 다시 회원들에게 통크게 배분했다.(지동욱, <한국대통령열전> 주코 신서(일본), 2002) 이런 태도가 그의 타고난 친화력과 함께 사람들을 그의 주변에 모여들게 했다.
12월 12일 오후 6시경 전두환 등 신군부는 최규하 권한대행에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김재규와 내통했으니 체포할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구했다. 최규하는 정식 결재 라인을 거쳐서 올라오라며 승인을 거부했다. 전두환은 정승화 연행을 재가받으려 하였다. 그러나 최규하는 이들의 예상 밖으로 완강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국방부 장관의 의견을 들어봐야 겠다'며 버텼다.
전두환은 노태우, 최세창 등 동지들의 부대에 병력출동 준비를 명령했다. 또 총리공관 경비의 무장을 해제시켜 최규하를 완전히 포위했다. 당시 청와대가 내부 수리 중이어서 최규하는 총리공관에 살았다. 이번에는 전두환 뿐만 아니라 유학성 등 여럿이 함께 쳐들어갔다. 드러내놓고 위협했지만, 1시간 30분을 넘기도록 최규하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12월 13일 전두환은 지시를 내려 정승화, 특전사 사령관 정병주를 체포, 연행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육군참모총장 전속부관 등이 부상을 당하고, 특전사 사령관 정병주의 부관 김오랑 소령(당시 소령, 사후 중령 추서)이 현장에서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정승화와 정병주는 즉시 체포되어 감금당했다.
12.12 군사 반란 성공과 군부 장악,
전두환은 즉시 명령을 내려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여, 국방장관 노재헌을 잡아오라' 하였다. 치밀하게 계획했고 군의 주요 병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보안사령부의 도청으로 모든 움직임을 샅샅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휴전선을 지키는 최전방의 병력마저 서슴없이 동원하는 대범함도 보였다. 12월 13일 새벽 1시 30분께 행주대교를 건넌 1공수특전여단은 새벽 3시 50분께 지하 벙커에 있던 노재헌 국방장관을 연행한다. 12월 13일 새벽 5시 10분 최규하는 드디어 재가한다. 이로서 전두환은 군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다.
한편 전두환은 영어 실력도 있었으므로 직접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을 설득하려 들었다. 전두환은 글라이스틴을 만난 자리에서 “부패를 일소한 후 병영에 복귀하겠다”고 했다. 이 같은 멘트 또한 허화평 등이 연구해서 올린 <5>에 들어 있었던 대사다. 전두환이 돌아간 뒤 글라이스틴은 서류철을 뒤져 1961년 쿠데타 당시 박정희가 보낸 김종필의 대사 기록을 찾아냈는데 전두환의 말과 김종필의 말이 놀랍게 일치했다고 미국의 한 한국학 교수가 지적했다.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과 CIA 한국지부장 로버트 브루스터는 미국 본국에 이를 보고하였다. 한편 미국에서는 신원조회 결과 전두환이 공산주의자는 아닌 것이 확인되자 5.16 때와는 달리 방관하는 입장을 취한다.5>
"당시 주한유엔군사령관이던 카터 B 매그루더 장군을 찾아온 김종필은 '부패를 일소한 뒤 병영에 복귀하겠다'고 말했다. 이 기록은 매그루더가 하와이에 있는 태평양지역 총사령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적혀 있었다."(마크 피터슨, <신동아> 1989년 5월호)
이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신군부가 5·16의 선례를 깊이 연구했다는 방증이었다. 그런 만큼 전두환은 이 거사의 결론이 어떻게 귀결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정변에 성공한 뒤 전두환은 12월 13일 보안사령부 사령관으로 중정 차장보를 겸임하였다.
1980년 2월 보안사는 정보처 아래 언론반을 설치했다. 그는 보안사 언론반과 중앙정보부의 부하들을 통해 국내외 정보를 실시간으로 수집했다. 보안사 언론반은 전두환의 지시 아래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기 하려는 목적에서 언론을 장악하기 위한 공작인 K-공작계획을 실행했다.
1980년 3월부터 그는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국무총리에게 자신을 중앙정보부장 서리 직에 임명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최규하, 신현확은 겸직규정이 없다는 점과 전두환이 현역군인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했다. 그러나 10.26 이후 이희성이 이미 현역군인 신분으로 중앙정보부장 서리 자리에 임명되었던 전례가 있었고, 12.12 이후에는 이희성이 정승화의 뒤를 이어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면서 빈 자리가 된 중앙정보부장 서리 자리는 자연스럽게 그의 차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군인사법 위반 논란 속에서 전두환은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4월 14일에는 제10대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취임해 국내 모든 정보 기관을 장악했다. 동시에 그는 전직 중앙정보부 직원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임명했던 실국장, 단장급 간부들에게 일괄 사직서를 받아 간부들을 대폭 물갈이했다. 보안사령관으로 중앙정보부 차장보를 겸직하던 그는 보안사령관으로 다시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게 되었다.
비상계엄 확대 계획,
1980년 5월 초순경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에서는 국내 정세 불안을 해소한다며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인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했다. 보안사령부 대공처장 이학봉은 전두환의 지시를 받아, 이학봉은 김대중, 김종필 등 정치인을 연행할 계획을 세웠다. 전두환은 노태우, 황영시, 정호용, 유학성 등 신군부 핵심 세력과 논의를 하여 '시국수습방안' 실행 동의를 받았다.
중앙정보부는 5월 10일 대북 특이동향을 경고하는 보고서, '북괴남침설'을 작성했고, 5월 12일 심야에 임시 국무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5월 11일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는 북한의 남침 준비 완료라는 첩보의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5월 13일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과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북괴남침설'은 근거가 없으며, 전두환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흘린 정보라고 평가했다. 훗날 남침설을 제보했다고 알려진 당시 일본의 내각 조사실의 한반도 담당반장과 한국 담당관은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말한 적도, 그런 정보도 없었다"고 밝혀, 신군부가 '시국수습방안'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명분이였던 '북괴남침설'이 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같은 해 5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 서울역 광장에서 전국 대학생 10~20만 명이 운집해 데모를 했다. 5월 12일에는 계엄 해제안이 국회에 상정이 됐고, 여야 총무는 5월 20일 10시 개헌안과 비상계엄 해제에 대해 논의를 하기 위해 임시국회를 개회하기로 합의했다. 전두환은 이들 학생들을 즉시 체포하려 했지만 5월 16일 10~20만 명의 대학생들은 당시 군, 경찰 고위층의 자제였던 어느 학생운동권 학생에 의해 입수한 군과 경찰의 투입정보를 접하고 즉시 감쪽같이 서울역 광장을 빠져나갔다. 전두환의 학생운동권 일망타진 계획은 실패하고 만다.
5·17 비상계엄 확대와 5·18 민주화 운동,
이 부분의 본문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입니다.
5월 17일 전두환은 노태우, 정호용 등에게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시국수습방안'에 대한 찬성 의견을 주도하도록 했고, 전군주요지휘관회의의 의견을 내세워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계엄확대, 비상기구 설치 등을 실시하도록 강요했다. 같은날 중앙청과 국회가 군으로 포위되고 외부와의 통신이 차단된 상태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실시됐다.
5월 18일 광주에서 전남대 학생들은 신군부의 쿠데타적 조치, 김대중 체포에 항거하는 시위를 했다. 시위가 거세지자 이에 신군부는 계엄군과 공수특전여단을 투입하여 진압했고 이로 인해 사태가 확산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발생했다.
5월 19일 시위대가 5,000여명으로 불어나자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착검한 총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5월 20일 20만명의 시민이 군경 저지선을 뚫고 시청건물을 장악하였으며, 계엄군에 의해 모든 시외 전화가 두절되어 광주는 고립되었고, 밤 11시경 계엄군은 시민에게 발포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국회에 배치된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국회의원의 등원을 강제로 저지해, 오전 10시에 개회하기로 예정된 임시국회가 무산됐다.
5월 21일 계엄군의 발포로 수십여명이 사망했으며, 이에 시민들은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칭하며, 경찰서에서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을 시작했다.
5월 22일 시민들은 계엄군을 몰아내고 도청을 차지 '5.18사태 수습 대책 위원회'를 결성하고 사태 수습에 들어갔으나, 계엄군의 협상 거부로 협상이 결렬됐다. 5월 27일 신군부는 무력으로 상무충정작전을 실행해 유혈 진압했다.
일반적으로 그는 노태우, 정호용 등과 함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무력진압 지휘체계의 실질적인 주요 핵심 책임자 및 조력자로 여겨지고 있다. 1995년 검찰 수사 결과, 전두환이 정식지휘계통에 불법개입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강경진압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의 완강한 부인으로 인해 5월 21일 13시 전남도청 발포 명령자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서울의 봄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학생과 시민들은 실권자였던 전두환을 겨낭해 '전두환 퇴진', '전두환 아가리를 찢어죽이자' 등의 격한 구호를 외쳤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대량 사상자를 내고 유혈진압되면서 학생운동권의 반(反) 전두환 기운은 고조됐다.
국보위 설치와 정권장악 기도,
12.12 사태로 이미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 등으로서는 선거에 의해 반유신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 거의 대부분은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특권을 누려온 존재들로서, 군대의 요직을 역임하고, 요직과는 별도로 박정희의 총애를 등에 업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따라서 민주화는 곧 자신들의 특권이 상실되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신군부는 권력 접수 시나리오대로 국가비상기구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설치안을 5월 26일 최규하에게 재가해줄 것을 요구했다. 최규하는 이들의 비상기구 설립 요구를 회피하며 하루 동안 시간을 질질 끌었다. 그것이 27일 국무회의를 통과하자 5월 31일 전두환을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 하는 국보위가 발족됐다. 국보위는 일종의 군사혁명위원회 였다. 국보위는 허화평이 보고한 <5>에 따라 1961년의 국가 재건최고회의를 흉내 낸 기구였다. 5월 27일 전두환은 내각을 통제하기 위한 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하고, 6월 초 국보위 위원에 피선됐으며, 국보위 상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선출됐다. 이어 7월 17일 중앙정보부장직을 사퇴하고 국보위만을 관할하다가 8월 5일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고, 8월 22일 예비역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다.5>
광주민주항쟁 이후 전두환 등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 전권을 장악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위협하여 하야토록 했다. 최규하는 이를 두고 오래도록 고민하였다. 7월에는 충청북도 일대에 수해가 발생하자, 7월 23일 국보위 내무분과위원회 위원장 이광로(李光魯)를 대동하고 충청북도 청주시와 보은군, 경상북도 문경군의 점촌읍, 마성면 등 수해지역을 시찰, 김종호(金宗鎬) 충북도지사와 김무연(金武然) 경상북도지사 등으로부터 수해상황을 보고받고 돌아왔다. 한편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국가원수로 추대된 전두환은, 박정희의 전례에 따라 육군소장에서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여 전역한 다음 유신체제의 유산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최규하는 한달 사이에 전두환의 어깨에 두 별을 달아주었다.
경제 수업,
5월 28일부터 그는 대한민국 국내의 경제학자들을 특별 과외 강사로 초빙하여 경제에 대한 것을 배웠다. 전두환은 자신의 무식함을 인정하고 경제학자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된 뒤에도 이들에게 수시로 도움을 청했다. 1980년 5월 말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되자 그는 스탠퍼드대학 경제학 박사 출신의 김재익(金在益)을 서울 연희동 자택으로 불러 매일 아침 2시간씩 경제공부를 시작했다. 김재익이 경제의 기본 원리부터 당면문제까지 명쾌하게 설명하는 데 감복한 전두환은 11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그를 청와대 경제수석에 임명했다.
이때 김재익이 "제가 드리는 조언대로 정책을 추진하시면 엄청난 저항에 부딪힐 텐데 그래도 끝까지 제 말을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고 수락 조건을 말하자 전두환은 "여러 말 할 것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하고 내맡겼다는 이야기는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유명하였다. 그 후에도 김기환(金基桓)·사공일(司空壹)·차수명(車秀明) 등으로부터 경제 과외수업을 계속해나갔다.
“ | 80년에 대통령이 되고 나서 경제기획원 차관보, 국세청과장까지 토요일, 일요일에 불러서 배웠다. 김재익 경제수석한테 장관 보고만 아니고 실무자의 전망과 정책 방향도 보고토록 했다. 그 사람들한테서 하루 3∼4시간씩 보고를 받았다. 80년 말까지 경제교수를 아침 7시에도 부르고 일과가 끝나자마자 뒷방으로도 부르고...(이하 생략)... | ” |
— 전두환 육성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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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열심히 공부했다. 지난날 영어 성적을 만회하기 위해 새벽 3시에 일어나 기상시각인 5시30분까지 혼자 공부하던 때처럼. 그는 빨리 습득하고 적응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몇 달간 경제공부에 전력을 집중하고 나니 "나 나름대로 우리 경제의 문제점과 끌고 나갈 방향과 시책이 정립되더라"라고 그는 회고했다.
대통령 재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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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 대통령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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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일 포기각서 제출,
1980년 초 전두환은 악화된 대미관계를 풀기 위해 "사거리 180km, 탄두 무게 453kg 이상의 미사일은 절대 개발하지 않겠다"라는 내용의 각서를 썼고, 이에 레이건 대통령은 전두환 신군부를 승인했다.
1980년 8월 6일 육군 대장(大將)으로 진급한 전두환은 곧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보안사에 의해 검열과 조종을 받았던 한국 언론은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전두환 장군을 지지한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는 미국 인사들의 발언의 진의를 훼손한 오보였다.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했고 8월 22일 전두환이 군대에서 전역했다. 8월 23일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에서 사임하고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던 노태우가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8월 25일 필리핀의 이멜다 마르코스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전두환을 지지해야 한다고 했다. 8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9월 1일 잠실체육관에서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 초 그는 미국으로부터 박정희 집권 당시 개발 중이던 핵미사일을 폐기할 것을 요구받았다.
취임 초기,
그 해 9월 국가보안법의 연좌제를 공식 폐지했고,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했다. 10월 17일 비리정치인 정치활동 금지법 발표와 함께 정당해산령을 내려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의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 민주당계 야당인 신민당, 혁신 정당인 통일사회당, 민주통일당 등을 강제 해산시켰다.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이 공포됐다.
김수환 추기경은 1980년 설 새해 인사차 방문한 전두환 당시 육군 소장에게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 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라고 말했다. 전두환은 특유의 미소로 화답하였다. 1987년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서도 김수환은 "이 정권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고 묻고 싶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 총칼의 힘밖에 없는 것 같다."라고 비판했다. 역시 전두환은 말없이 미소로 답하였다.
전두환은 5공의 신헌법 확정과 함께 국보위를 해체하고 대신 국보위입법회의라는 것을 설치했다. 여기에서 1980년 11월 3일 정치풍토쇄신법을 제정하였다. 한편 박정희 정부에서 추진하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폐지 주장이 나왔으나, 그는 이를 일축하고,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용했다. 동시에 경제 관료들의 채용을 추진했다. 1980년 유신 체제 이후 시행됐던 통행금지령과 심야 영업 금지령을 해제했으나, 심야범죄가 증가하면서 통행금지령 폐지를 취소했다.
경제 정책 자문,
전두환은 1980년 9월에 김재익을 등용했다. 김재익은 "제가 생각하는 경제 정책은 인기도 없고 기존의 세력들이 환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 일을 해내야 합니다. 그래도 저를 쓰시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전두환은 김재익의 다짐을 받아들이고 김재익을 신뢰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전두환은 '경제에 관해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라면서, 김재익에게 경제정책 전반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했다.
김재익은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입각한 뒤, 전두환의 경제 가정교사 역할까지 했다. 전두환은 자신이 경제학, 경영학 관련 지식이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김재익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제학자들과 경영학자들을 청와대로 불러들여 새벽까지 강의를 들었다. 김재익은 하얀 종이에 경제 자율화와 안정화의 그림까지 그리면서 전두환을 가르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전두환은 김재익의 경제, 경영학 강의를 통해서 나름대로의 경제관을 갖게 됐고, 사람들을 만나면 자신의 경제에 대한 소견을 밝히고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김재익에 대한 신뢰가 커지면서 전두환의 집권을 도운 군부 세력은 김재익을 견제했다.
김재익에 대한 전두환의 신임이 두터웠다는 것은 제5공화국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 청와대 정무수석 허화평과 사정수석 허삼수로부터 김재익이 괴로움을 당하자, 전두환은 격노하면서 허화평·허삼수 두 허씨를 청와대에서 내보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김재익 등의 경제 관료들은 군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경제정책을 펴나갈 수 있었다.
1981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이듬해인 1981년 1월에 창당된 민주정의당에 입당했고, 민주정의당의 초대 총재에 추대됐다. 이어 전두환은 12대 대통령에도 출마할 의사를 밝히고 대통령 후보에 출마했다. 국민당의 김종철(金鍾哲)은 기호 1번, 기호 2번은 김의택(金義澤), 3번은 민한당의 유치송(柳致松)이었고 전두환은 기호 4번을 차지했다.
전두환은 헌법 개정 과정에서 영구집권이 가능한 유신헌법의 6년 연임제 대신 7년 단임제로 바꾸었고, 입법부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등 형식적으로는 민주화를 따르는 듯 했다. 그러나 '1인 장기집권' 대신 사실상 '1당 장기집권'을 고수하였고, 이를 강화하기 위해서 직선제 개헌을 하지 않았다. 이들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좀 변형시킨 뒤 '선거인단'을 만들었다.
전두환 정부는 사실상 1당 독재 체제를 고수했다. 이 때문에 야당은 언제나 민정당의 통제를 받았고,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할때조차 통제를 받았다. 이런 식으로 야권 후보들의 까다로운 입후보 절차는 물론이요, 야권을 지지하는 선거인들은 조금밖에 출마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민정당에게 표가 유리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전두환은 90%에 육박하는 득표율로 당선된다.
12대 대통령, 12대 대통령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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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제4공화국의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주요 정책들은 제5공화국 시절에 펼쳤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그는 제5공화국 대통령으로 분류된다. 제5공화국 시절 그는 당시 헌법의 주요 정책 강령으로 정의사회구현, 복지사회건설을 구호로 내걸었 으며, 재임기간 물가안정, 범죄 소탕, 경제 성장, 88 서울 올림픽 개최 준비 성공, 무역흑자 달성 등을 이룩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반대파 억압 및 인권 유린 등으로 국민과 민주화 운동가들에 의해 군부독재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전두환 정부는 12대 대통령 선거를 1개월 앞두고 일부 정치인에게 정치규제조치를 해지했다. 구 정치인 중 일부는 각자 정당을 만들어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1981년 2월 25일에는 개정된 새 헌법에 따라 장충체육관에서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인단이 90.6%의 참석했고, 전두환은 2500표의 압도적인 표차로 2위 민한당의 유치송 후보를 누르고 제12대 대통령(7년 임기에 단임)에 당선됐다. 전두환은 노태우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임명해서 민정당의 당권을 대리하게 했다. 4월 13일 전임 대통령 최규하 등 전직 삼부요인과 각계 원로 25명을 국정자문위원으로 위촉, 국정자문회의를 발족시켰다. 국정자문회의 치사에서 "정의로운 민주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국민참여의 깃발이 높이 게양됐다. 국정자문회의는 이러한 국민 총 참여와 화합을 촉진하는 표상"이라 했다. 같은 해 6월에는 아내 이순자를 대동하고 동남아시아 5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등을 순방하고 귀국하였다.
12대 대통령 취임 후에 그는 박정희 정권과 거리를 두었다. 박정희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그는 헌법에서 소위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했다. 박정희 정권에서 시행한 통행금지령을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함과 동시에 7년 단임제를 주장하기도 했다. 하나회 계열에 부정적인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실세들을 권력형 부조리 혐의로 엮어서 제거하면서 박정희의 시대를 부정과 부패, 부조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정의사회 구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대통령 연임제를 철폐하고 임기 7년의 대통령 단임제를 시행했다.
핵개발 포기,
전두환은 취임 초 핵실험 및 개발을 포기했다. 1980년 12월 19일 전두환은 박정희가 핵개발을 주도했던 원자력 연구소를 한국핵연료개발공단과 강제로 통폐합시킨 뒤 명칭에서 '원자력'이라는 말을 빼버리고 '에너지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변경했다. 전두환은 핵을 포기하였고 1983년 11월 당시 재처리 작업을 통해 추출했던 플루토늄은 국제 원자력 기구(IAEA)에 제출됐다.
1982년~1983년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 개발 계획을 극비리에 추진했고, 이는 일본과 미국 측 언론에 입수되어 보도됐다. 일본 아사히 신문의 보도로는 레이건 정부는 그런 정보를 입수해 계획 중지를 요구했으며, 1983년 11월에 전두환은 한국을 공식 방문한 레이건 대통령에게 핵개발 계획 중지를 약속했다. 2004년 9월 8일 미국의 AP통신도 미국 고위관리의 증언을 인용하여 비슷한 보도를 했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로 집권했기에 정당성이 미비하고 집권 기틀이 부족하였던 전두환은 미국의 지원과 정권의 정당성을 승인받기 위해 핵개발 포기를 선택했다. 또한 전두환은 박정희 정권 말기에 악화되었던 미국과의 관계 회복을 꾀했고 카터 대통령의 미 행정부의 박정희 집권 시절의 핵개발 계획에 매우 부정적이었다는 점도 영향을 끼쳤다.
취임 초기,
1981년 1월 12일 전두환은 남북한 당국 최고책임자 상호방문을 제의하였다. 그리고 1982년 1월 22일 전두환은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제의하였다. 1981년 4월 10일 전두환은 국무총리에게 "근간 신체장애자 구걸행각이 늘어나고 있다는 바, 실태파악을 하여 관계부처 협조하에 일절 단속 보호조치하고 대책과 결과를 보고해주기 바랍니다"라고 지시하였다. 이후 부랑인 보호시설이 급증했다.
1981년 보호·감호법을 제정했다. 상습범은 형기 종료 후에도 즉각적인 사회 복귀를 막아야 한다는 논리로 보호감호제도를 시행, 시행하고 같은 해 강원도 춘천시 춘천교도소에 보호감호시설을 설치했다. 춘천교도소 보호감호소는 뒤에 1983년 2월 12일 경상북도 청송군으로 이전했다. 1982년 10월 26일 강원도의 이승복기념관 준공식에 참석했다. 이날 전두환은 "총칼 앞에서 어린 학생이 자기 심정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얼마나 용기 있는 일이냐"고 이승복의 용기를 칭송하며, "이승복 기념관의 준공을 계기로 어린이들 뿐만이 아니라 전 국민에게까지 이승복 군의 반공정신이 파급되어 우리 2세들에게 국민정신교육과 반공교육의 일대 전기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삼청교육대를 통해 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계 인사, 반체제 인사, 5.18 민주화운동 참가자, 범죄자, 깡패, 건달, 무직자, 노숙자 등을 잡아들여 특수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삼청교육대에 연행된 절대다수가 전과가 없거나 초범인데도 불구하고, 삼청교육대 특수훈련 과정에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해 인권탄압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다. 녹화사업을 추진하면서 운동권 성향의 대학생들의 사상개조를 위한 목적으로 활용했다.
1982년 12월 13일, 김대중으로부터 도미 치료차 미국 여행을 청원하는 탄원서를 받았다. 전두환은 곧 김대중의 미국 여행을 허락했다. 이듬해 1983년 3월 22일, 민정당 전국 시도 전당대회에 참석했다. 민정당의 행사에는 꾸준히 참여했지만 당권은 사실상 노태우에게 위임해 운영했다.
1983년 5월 18일 5·18 이후 가택연금 상태에 놓인 김영삼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를 맞이하여 전두환 정권의 야당인사 탄압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23일간 단식투쟁을 시도했다. 1981년 3월 26일에는 민주정의당 소속 지역구 국회의원 당선자들에게 직접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경제 정책,
1980년대 전반기에는 1960·1970년대 경제개발의 후유증으로 외채문제가 주요 현안으로 떠올랐고, 장영자사건, 명성그룹사건, 국제그룹해체 등 많은 문제가 표면화되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이후로 정부의 긴축정책과 국제 원유가(原油價)의 하락, 달러가치의 하락, 금리의 하락 등 3저현상이 지속되어 물가가 한 자리수로 잡히고, 수출이 호조를 보였으며, 부가가치가 높은 자동차, 전자, 기타 반도체 첨단산업이 활기를 띠고 성장했다.
1986년 현대자동차 포니, 엑셀이 미국으로 수출된 것은 우리나라가 자동차산업에서 선진국과 어깨를 겨루게 되는 첫 신호탄이었다. 한편, 선진국의 시장개방 압력이 높아지면서 공산품뿐만 아니라 농축산물도 수입자유화의 폭이 확대되어 1986년 현재 수입자유화율은 91.5%에 도달했으며, 외국자본의 투자비율도 점차 확대하여 100%까지 허용하였다. 정부의 시장개방정책은 대기업에는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였으나, 값싼 외래 농축산물의 수입으로 농촌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양곡자급률은 1970년의 86%에서 1985년에는 48.4%로 낮아졌다. 그리하여 한국인의 밥상에는 외래 농축산물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시대가 되었다.
10대 대기업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79년의 33%에서 1989년에는 54%로 증가하고, 30대 대기업의 계열기업은 1970년 126개, 1979년 429개, 1989년 513개로 늘어났다. 이와 대조적으로 농촌인구는 급속히 감소하고, 이 농민의 절대다수는 도시빈민층을 형성하여 막노동에 종사하거나 산업노동자 혹은 서비스업으로 전환하였다. 수출호조에 힘입어 국민총생산이 급속히 성장하여 매년 평균 성장률이 10% 내외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1인당 GNP가 1987년 현재 3천 달러를 넘어서서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게 되었다. 1980년부터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것도 경제성장의 한 징표였다.
외교 정책,
대한민국의 대외 관계 #제5공화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반공의 기치 아래 한·미·일 삼각동맹을 추진했다. 제5공화국은 전 정권에 이어 친미(親美) 일변도의 정책을 추진하여, 한국에 있어서 미국은 혈맹관계라고 지칭될 만큼 전통적인 우방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학생들의 반미주의 운동을 조장한 측면도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미국의 개입 또는 방조 의혹은 이 시기 학생운동의 한 테마였다. 일본과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 재일한국인 지문날인제도, 일본의 대북 접근 등 주로 일본이 야기시킨 각종의 현안 때문에 갈등을 빚었다. 한국은 북한에 대해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과 남북 정상회담을 제의하였으나, 북한은 아웅산묘역 폭탄테러사건,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을 일으켰다. 서유럽과는 정치적 이슈가 크지 않았고, 경제·통상 부문에 집중하였다.
대북 관계,
남북 관계 #제5공화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전두환은 집권 초기 정권 안정을 위해 1982년 북한과 '잠정협정'을 맺고 비정치적, 비군사적 교류부터 점진적으로 하자는 ''을 제의했다. 역대 정권으로선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기도 했다.
1983년 10월 9일 오전 10시 23분, 버마의 수도 랑군 중심지의 아웅산 묘소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함병춘 청와대 비서실장 등 장관급 5명이 목숨을 잃고 여기에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심상우 민정당 총재비서실장, 이중현 <동아일보> 기자 등 민·관의 희생자가 21명, 부상자가 46명에 달하는 대참사가 빚어졌다. 이후 군 내부에서 북한에 무력으로 보복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무력 보복 계획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10월 13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희생자 장례식을 치르고, 20일에는 대통령 특별담화에서 "이것이 우리의 평화 의지와 동족애가 인내할 수 있는 최후의 인내이며, 다시 도발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응징할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사실상 무력 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대내외에 밝힌 것이다.
1984년 9월초 남쪽에 발생한 홍수로 전국에서 190여명이 생명을 잃고 재산피해도 1천300억원이 넘는 수재가 발생하자 북한은 9월8일 조선적십자회 이름으로 통지문을 보내 쌀 5만석(7천200t), 천 50만m, 시멘트 10만t, 의약품 지원을 제안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1년 전 미얀마에서 북한이 저지른 아웅산묘소 폭파 암살 시도에도 불구하고 북쪽의 제안을 전격 수용했다. 북측의 식량지원 이후 남북 양측은 적십자회담 본회담을 가진 데 이어 1985년에는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을 실현시켰고 남북간 최초의 경제회담도 시작했다. 인도주의로 포장된 북측의 전략적 제안이었던 식량지원을 남측이 수용함으로써 남북관계의 물꼬를 튼 것이다.
1985년 전두환 대통령은 북한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고, 북한 역시 같은해 9월 허담 비밀특사를 서울에 특파해 전두환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논의를 타진했다. 전두환은 허담 밀사와 만난 자리에서 김일성의 말을 전해듣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김일성 주석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경청해보니 내용 하나 하나가 내 생각과 거의 동일합니다. 김 주석께서는 공개적으로 말씀이 계셨지만 40년 전에는 민족해방 투쟁으로, 그리고 평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애써오신 충정이 넘치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남북한 최고책임자들의 회담이 이와 같은 분위기라고 할 것 같으면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하는 것도 나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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