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football, Soccer],
고대의 축구
기원전 7~6세기경 그리스에서는 '하르파스톤(Harpaston)'이라는 경기가 성행했다. 이 경기는 각기 자기진영의 골라인을 지키는 두 팀 사이에 진행된 경기였다. 양팀 선수들이 공을 차거나 던지면서 전진하다가, 마지막에는 상대가 지키고 있는 골라인을 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고 알려진다.
축구의 역사는 유럽, 그 중 특히 옛날의 중세 스페인에서 펼쳐졌던 전통적인 축구 경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의 축구는 1863년에 잉글랜드에서 설립된 축구 협회 (FA)의 등장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런던의 몇몇 클럽이 경기를 하는 데에 있어 서로간에 논쟁의 여지가 없는 보편적인 규칙을 만들기 위해 모였다. 그 당시에, 축구팀들은 각자 자신들만의 규칙과 방법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팀과 경기를 할 때에는 경기 시작 전에 규칙을 정해야만 했다. FA 규칙 제정의 즉각적인 영향은 없었다. 그 이유는 축구가 여전히 아마추어 스포츠로서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노동자 계급의 스포츠에 참여와 더불어, 기업가들은 관중들이 스타 선수를 보기 위해 모이는 것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활용하기 위해 최초의 프로 클럽이 탄생하게 되었다. 일단 프로페셔널리즘이 확립되면서부터, 경기의 인기는 무척 높아졌고, 곧 영국인의 해외 이주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오늘날의 전세계적인 스포츠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이 경기가 로마에 전파돼 군대 스포츠로 발전하였고, 이는 '하르파스툼(Harpastum)' 또는 '파가니카(Paganica)'라는 새로운 경기로 변형됐다. 이후 로마가 영국을 침략했을 때 하르파스툼이 영국에 소개됐으며, 이후 영국의 축구는 1500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은 형태로 지속됐다.
'association football ' 혹은 'soccer'라고 불리는 축구는 각각 11명으로 구성된 두 팀이 발 또는 머리로 공을 쳐서 상대 팀 골에 넣는 경기로, 오늘날의 현대축구는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분류/ 올림픽/ 채택여부/
구기 |
Y (2020년 도쿄올림픽 기준) |
양편이 대항하는 구기 종목의 하나로, 발을 사용하여 볼을 다루고 골을 다투는 대표적인 팀 스포츠이다. 축구는 손과 팔을 제외한 신체의 모든 부위로 볼을 다룰 수가 있으므로 경기 기술이 다양하고, 많은 양의 달리기가 필요한 경기이다. 또한 경기 상황이 매 순간 새로우므로 선수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서 게임을 펼쳐 나가야 한다.
드리블, 슈팅, 패스, 트래핑 등의 기술을 연마하면서 민첩성, 협응력 등을 양성할 수 있고 격렬한 게임을 통해 강한 지구력과 투지를 배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팀 스포츠로서 자신만의 독자적 노력으로 뜻을 이룰 수 없다는 특성에 의해 협동심, 책임감, 단결심, 희생정신 등의 사회성 육성에 도움이 된다.
역사,
축구가 언제 어디서 발상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다. 대표적으로 기원전 6~7세기경 고대 그리스 시대에 행해진 하파스톤(Harpaston)이라고 하는 경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과, 중국이 그리스보다 먼저 축구를 시작했다는 것이 있는데 이는 직접적으로 현대 축구와 연결되었다고 보기에 부족한 점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근대 축구와 연결되는 가장 믿을 만한 설은 영국에서 축구가 발상되었다는 것인데, 덴마크의 폭정하에 학대를 받아왔던 영국인들이 덴마크 군을 철퇴시킨 후 전쟁터에서 패잔병들의 두개골을 차며 승전을 축하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설이다.
근대 축구와 연결되는 가장 믿을 만한 설은 영국에서 축구가 발상되었다는 것인데, 덴마크의 폭정하에 학대를 받아왔던 영국인들이 덴마크 군을 철퇴시킨 후 전쟁터에서 패잔병들의 두개골을 차며 승전을 축하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설이다.
그 후 축구는 14세기 이후 점차 성황을 이루었으나 오늘날과 같이 골대를 세우지 않고 찬 볼이 골라인을 넘으면 득점으로 인정하였으며, 오늘날의 축구 형식으로 발전된 것은 19세기 중엽 축구와 럭비를 구별하기 위해 1863년 영국 축구협회를 발족시켜 경기 규칙을 제정함과 동시에 그 명칭을 Association Foot Ball이라 명명했던 때이다.
축구 협회,
이 부분의 본문은 잉글랜드 축구 협회 or 역사입니다.
1860년대 초반, 잉글랜드의 사립학교들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축구 경기를 일치시키고 통합시키려는 시도가 생겨났다. 케임브리지 규칙을 만들고 추진했던 J.C. 트링(John Charles Thring)은 1862년 당시에 어핑엄 스쿨의 교사였는데, 그는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고 "가장 간단한 경기"(이는 어핑엄 규칙으로 잘 알려짐) 라고 명명했다. 1863년 10월 초에 새로이 수정된 캠브리지 규칙이 해로우, 슈류즈버리, 이튼, 럭비, 말보로, 웨스트민스터의 졸업생 대표로 구성된 7명의 위원회에서 만들었다.
헐의 법무관이었던 에베니저 콥 몰리(Ebenezer Cobb Morley)는 축구를 위한 관리기관 설립을 제안하였다. 몰리는 축구 협회의 초대 사무관(1863~1866)을 지냈으며, 2대 회장(1867~1874)을 지냈다. 그러나 특히 그에 대해 기억되는 것은 최초로 게임의 규칙이라는 저서를 통해 현재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축구 규칙의 밑바탕을 그려놓은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그는 축구 협회의 아버지 뿐만 아니라 축구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1863년 10월 26일 저녁, 몇몇 축구팀 대표자들이 런던의 코벤트 가든 구역의 롱 에이커 거리에 위치한 프리메이슨 테이번에서 모였다. 이는 축구 협회(The FA) 최초의 회의였다. 축구 협회는 세계 최초의 축구 관리기관이었으므로, 영국인들은 축구 협회 앞에 '잉글랜드'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는다. 런던의 채터하우스는 초대에 응해 참석한 유일한 학교였다. 첫 회의에선 각 사립학교 대표자들에게 협회에 가입하길 요청하자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트링이 재직하던 어핑엄 스쿨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학교가 거절하였다. 1863년 10월부터 11월까지 총 6번의 축구 협회 회의가 열렸다. 위원회의 위원이었던 J. F. 앨콕 (J. F. Alcock)은 "케임브리지 규칙은 협회가 채택하고픈 가장 탐나는 것이었다."라고 말했었다.
세 번째 회의가 끝나고 규칙의 초안을 축구 협회가 출간하였다. 그러나 네 번째 회의가 시작될 때, 세간의 주목을 끈 것은 최근에 발간된 1863년의 케임브리지 규칙이었다. 케임브리지 규칙은 축구 협회 규칙의 초안과 중요한 두 가지 차이가 있었다. 즉, 공을 가지고 뛰는 것 과 해클링 (상대방 선수의 정강이를 차는 것)에서 차이가 있었다. 논쟁이 발생한 두 가지 규칙은 다음과 같다:
IX. 만약 선수가 정당하게 공을 잡았거나, 첫 번째 바운드에 공을 잡았으면 선수는 상대방의 골문을 향해 공을 가지고 뛸 수 있다; 그러나 정당하게 공을 잡았을 경우에 만약 그 선수에게 수비가 있을 경우에는 달릴 수 없다.X. 어느 선수든지 공을 가지고 상대방의 골문으로 있다면, 반대편의 어떤 선수라도 저지하고, 붙잡고, 발을 걸거나 정강이를 차거나 공을 비틀어 빼앗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붙잡고 정강이를 차는 것을 동시에 하면 안 된다.
다섯 번째 회의에서 위의 두가지 규칙을 축구 협회 규칙에서 제외하자는 제안이 제기되었다. 대부분의 대표들은 이 제안을 지지하였지만, 블랙히스 럭비 클럽의 대표자이자 축구협회의 첫 번째 재무담당이었던 F. W. 캠벨(F. W. Campbell)만이 강력하게 거부하였다. 그는 "해클링이 진정한 축구이다" 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제안은 마지막 회의에서 실행되었고, 캠벨은 그의 팀을 FA에서 탈퇴시켰다. 12월 8일의 마지막 회의가 끝나고 축구 협회는 "축구의 규칙"을 발간하였다. 이는 최초의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축구 규칙이었다. 축구는 또한 "Association football"을 줄인 "soccer"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는 그 당시의 공을 들고 뛰는 잉글리쉬 풋볼인 럭비 풋볼(Rugby football)과 구별하기 위함이었고, "사커"는 일반적으로 오늘날 여러 국가에서 축구를 부르는 명칭이기도 하다. ]])에서는 아직도 그 규칙을 분간할 수 있다.
축구협회 회원들에게 승인된 축구의 규칙은 경기장 그라운드의 최대 너비와 폭, 킥오프의 순서, 골, 드로인, 오프사이드와 같은 용어의 정의 등을 명시하였다. 지나가는 공을 잡는 것은 여전히 허용되었으며, "정당하게 또는 첫 번째 바운드 때" 잡는 공만 사용되었다. 이러한 자세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신발류의 착용, 선수의 수, 벌칙, 파울 행동이나 공의 모양 등에 관한 자세한 규칙이 없었기 때문에, 경기에 참가하는 팀의 주장과 감독은 경기전에 이러한 것에 대한 합의를 먼저 이루어야 했다.
대회 창설,
축구 협회가 만든 규칙은 즉각적인 효과를 가져와, 셰필드와 노팅엄(지금은 노츠 카운티)이 FA 규칙에 의한 1년 일정의 경기에 참가하기로 하였다. 다음 2년 동안 체스터필드와 스토크가 참가하였고, 이는 성문화된 형태의 스포츠가 더이상 사립학교들만의 배타적인 스포츠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때까지 한 팀은 각각 11명의 선수가 뛰게 되었고, 경기는 둥근 공으로 진행되었다.
이전에는 전방으로 공을 패스하는 경우를 없애고, 공 앞에 위치한 모든 선수가 오프사이드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럭비와 유사했다. 이 규칙은 완화되었다. 1866년에 규칙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관찰하기 위해 축구 협회에서 허용한 셰필드와 런던의 경기가 열렸다. 그 결과, 공을 손으로 잡는 규칙은 한 팀에 단 한 명, 골키퍼를 제외하고 폐지되었다. 또 붉은 끈이 양쪽의 골대 사이에 붙여졌는데, 이는 골대의 높이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국적인 대회의 개최가 제안되었다.
첫 째 FA컵,
1871년 7월 20일에 선덜랜드 출신이자 해로우 스쿨의 졸업생이었던 찰스 윌리엄 앨콕(Charles William Alcock)이 "축구 협회와 연관되어 만들어진 챌린지 컵"[1]의 개최를 제안하였는데, 이것이 FA컵의 탄생을 가능케 하였다. 1872년에 열린 최초의 FA컵에서 원더러스와 로열 엔지니어스가 2,000여명의 관중 앞에서 결승전을 펼쳤다. 로열 엔지니어스는 강력한 우승후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선수 한 명이 쇄골이 부러진 상태로 경기를 계속했지만, 그 당시에는 교체제도가 아직 도입되지 않았을 때였기 때문에, 로얄 엔지니어스는 한 명이 적은 상황으로 남은 경기를 치렀고, 결국 1-0으로 패하였다.
FA컵은 성공적이었고, 몇 년 만에 잉글랜드에서 참가를 원하는 모든 팀이 참가하게 되었다. 참가하기 위해서는 FA규칙을 준수해야만 했고, 이는 보편적 규칙의 빠른 확산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 규칙들이 현재의 축구의 줄기를 이루는 주요한 기본이 되었다.
후에 대회는 '신사'이자 남부인이 주를 이룬 올드 이트니언스, 원더러스, 로얄 엔지니어스, 옥스퍼드 유니버시티가 주도하였는데, 이들이 가져간 우승컵은 총 19번이었다. 퀸즈파크는 1873년의 FA컵 (이 해의 대회는 지난 대회 우승 팀인 원더러스에 도전하는 방식의 구성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FA 챌린지 컵이라고 불렸다.) 준결승에서 기권하였다. 왜냐하면 잉글랜드로 오는 여행 경비의 지속적인 부담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바로 스코틀랜드 축구 협회의 설립을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퀸즈파크는 스코틀랜드 축구 협회가 스코틀랜드 클럽의 참가를 금지한 1887년까지 결승에 두 번 오르기도 하였다.
1872년에 앨콕은 20파운드에 FA컵 트로피를 구입하였다. 그해, 첫대회에 15개 팀이 대회에 참가하였고, 퀸즈파크는 상대팀의 기권으로 인해 준결승에 경기 한번 없이 진출하였다. 그러나 다음에 펼쳐진 원더러스와의 경기에서 골없이 비기자, 퀸즈파크는 기권해야만 했다. 그 당시는 연장전과 승부차기가 등장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퀸즈파크로서는 런던으로 다시 와 재경기를 할 형편이 안 되었다. 준결승에서 승리한 원더러스는 최초의 FA컵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최초의 리그,
이 부분의 본문은 풋볼 리그 § 역사입니다.
1888년에, 애스턴 빌라의 관리자였던 윌리엄 맥그리거는 런던과 맨체스터에서 열린 12개 축구 팀이 관련된 회의에서 힘껏 리그 대회를 계획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12 클럽은 후에 풋볼 리그의 원년 멤버가 된다. 회의는 1888년 3월 22일에 런던에서 개최되었고, 주요 의제는 녹아웃 형태의 FA컵에서 일찍 탈락하는 팀은 거의 1년 동안 아무 경기가 없기 때문에, 재정적인 손실뿐만 아니라, 팬들 역시 경기 없이 오랜 기간 동안 지내기 때문에 다른 팀이 경기할 때,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의제는 4월 17일에 맨체스터에서 결정하기로 하였다.
맥그리거는 풋볼 리그의 명칭에 대하여 투표를 붙였지만, 대다수의 찬성으로 풋볼 리그라는 명칭이 선택되었다. 대회는 일정에 따라 진행되고, 리그 참가팀간에 경기가 펼쳐지게 된다. 팀들은 균등하게 북쪽, 미들랜드, 남쪽으로 나뉘었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여전히 아마추어였다.
라이벌 리그였던 풋볼 얼라이언스(Football Alliance)는 1889년부터 1892년까지 진행되었다. 1892년에 두 리그는 공식적으로 통합하기로 결정하고, 대부분의 풋볼 얼라이언스 팀을 포함하여 풋볼 리그 2부 디비전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현재의 리그 팀들에 얼라이언스 팀 가운데 상위권 세 팀을 합하여 풋볼 리그 1부 디비전을 형성하였다.
최초의 국제경기,
28세에 축구 협회의 사무관이 된 찰스 윌리엄 앨콕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에 매년 펼치는 정기적인 국제대회를 창시하는 문제를 궁리하고 있었다. 그가 글래스고에서 내놓은 지면광고는 두 국가간의 국제경기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광고 이후에 스코틀랜드 선수로 구성된 팀을 구성하고 퀸즈파크 FC의 설립을 도운 세 형제 중의 하나인 바비 스미스를 주장으로 삼았다. 그의 팀은 전부 잉글랜드에 거주하는 스코틀랜드인으로 구성되었다.
1872년 11월 30일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서 열렸던 이 최초의 국제경기는 득점 없이 0-0으로 비겼으나, 축구의 역사를 통해 가장 치열하게 진행되는 라이벌전 중 하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두 팀 간의 두 번째 경기는 1983년 3월 8일에 열렸고 잉글랜드의 4-2 승리로 돌아갔고, 다음 경기에서는 스코틀랜드가 2-1로 승리하였다. 네 번째 경기는 2-2로 비겼고, 이후 세 경기 연속으로 스코틀랜드의 승리로 돌아갔다. (두 팀간의 모든 경기 결과는 FIFA 웹사이트에서 찾을 수 있다.) 2008년 현재 양팀의 경기 결과는 다음과 같다.
- 잉글랜드 : 45승 24무 41패
- 스코틀랜드 : 41승 24무 45패
아마추어 ~ 프로로,
영국 축구 협회, 아마추어 축구 연합 문서,,,
축구가 1870년대와 1880년대 인기를 얻어갈 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프로페셔널리즘은 금지된 상태였다. 그러나 1880년대에 잉글랜드 북부에서 원더러스가 해체되자, 각 팀들은 '프로선수'들을 고용하기 시작하였다. 축구에 최초로 프로페셔널리즘이 도입된 시기이다. 노동자 계급이 있는 지역의 클럽, 특히 북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지역에서는 노동 외에도 축구를 할 여유가 있는 프로축구를 원했다. 몇몇 클럽에서는 프로선수를 고용하는 것을 비난하였다. 1885년에 축구 협회는 프로축구가 정당하고 인정하였다. 그렇지만 임금 제한이 존재했다. 하층 계급을 선수로 고용한 북부 클럽들은 탄력이 붙어 아마추어인 '남부의 신사'들을 넘어섰다. 1882년에 FA컵 결승에 오른 북부 클럽 팀인 블랙번 로버스는 올드 이트니언스에게 졌는데, 올드 이트니언스는 FA컵에서 승리한 마지막 아마추어 팀이 되었다.
프레스턴의 딕 케르스 레이디와 같은 초기의 잉글랜드 여성팀들은 자선 기금을 모으는 경기를 통해 인기를 얻었다. 최초로 기록된 여자 축구 경기는 1895년 3월 23일에 펼쳐졌는데 잉글랜드 북부팀과 남부팀간의 경기였다. 모금을 위한 자선경기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다. 1921년에는 여자들이 FA 리그 경기에서 플레이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축구 협회의 역사에서는 이 금지령이 향후 40년 동안 잉글랜드에서 "사실상의 경기를 망쳤다"고 언급하고 있다.
전 세계로 퍼지는 축구,
유럽 대륙,
축구는 1879년에 잉글랜드 거주자들이 덴마크 클럽인 쾨벤하운 BK (KB) 와 스위스 클럽인 FC 장크트갈렌에 도입하였다. 이로 인해 KB와 장크트갈렌은 유럽 대륙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축구 클럽이 되었다. 덴마크 축구 협회는 1899년에 설립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축구는 설립되었던 1898년부터, 이탈리아 축구 협회가 세리에 A를 전국적인 리그로 조직하던 1929년까지 지역별 그룹 리그로 진행되었다. 스페인의 내셔널리그인 라 리가는 1928년에 첫 시즌을 시작하였는데, 1902년부터 시작된 코파 델 레이 우승 팀도 다음 시즌에 참가하였다. 독일의 축구 리그인 분데스리가는 유럽 국가 가운데 설립이 늦어 1963년에 설립되었다. 독일 축구 협회는 1900년에 설립되었는데 1903년에 독일 축구 우승 팀이 최초로 결정되었다. 분데스리가가 조직되기 전까지 독일 축구는 많은 수의 지역 리그에서 아마추어 단계의 축구가 진행되었다.
남 아메리카,
아르헨티나에서 기록된 첫 번째 축구 경기는 1867년에 잉글랜드 철도 노동자들이 겨룬 경기였다. 남아메리카의 첫 번째 클럽팀은 1887년에 창단된 힘나시아 라 플라타이다. 아르헨티나의 프로리그는 1931년에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가 만들었다.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는 1893년에 스코틀랜드 학교선생님이었던 알렉산더 왓슨 허튼이 설립하였다. 아르헨티나 최초의 축구 대회는 1891년에 개최되었고, 영국 이외의 지역에서 열리는 가장 오래된 리그가 되었다.
1870년대에 상파울로의 철도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이주민 존 밀러라는 영국인이 1890년대에 영국에서 3000여명의 이주민을 데려왔다. 존 밀러는 그의 아들 찰스 윌리엄 밀러를 교육을 위해 잉글랜드로 보내기로 하고, 1884년에 찰스가 10살이 되자 사우샘프턴에 있는 배니스터 학교에 보냈다. 찰스는 타고난 축구 선수로 두각을 나타냈다. 축구 협회는 그 당시 즈음에 설립되었다. 잉글랜드의 많은 대학들은 각자의 축구 규칙을 만들었고 찰스는 윙어와 스트라이커로서 학교의 명성을 드높이며, 사우샘프턴 클럽 팀에 들어가게 되었고 햄프셔 주 대표팀에도 선발되었다.
찰스는 브라질로 돌아올 때, 축구 장비와 규정집을 가지고 왔다. 그는 상파울로 지역사회에서 통용될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다. 그가 돌아오기 6년 전인 1888년, 첫 번째 스포츠 클럽인 상파울로 AC가 상파울로에서 창단되었다. 밀러의 기술은 그 당시에 이미 동료들과 큰 차이가 있었다. 그는 뒤꿈치를 이용한 볼트래핑으로 그의 이름을 명예의 전당에 올렸다.
찰스 밀러는 그의 삶을 통틀어 잉글랜드 축구와 깊은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사우샘프턴 클럽과 코린티안스 FC가 브라질로 와서 상파울로 AC와 상파울로의 다른 팀들과 경기를 가졌다. 1910년에 코린티안스팀이 브라질로 여행을 다녀간 후에 새로운 지역 팀이 탄생했는데 찰스는 팀의 이름을 코린티안스로 할 것을 제안하여 현재의 코린치안스가 탄생하였다.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축구의 발전,
FIFA의 설립,
20세기 초에 국제 경기에 대한 인기가 증가하면서 전 세계의 축구 경기를 감독할 단일 단체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잉글랜드 축구 협회가 주가 되어 국제 단체의 설립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오갔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다는 것에 합의하고 유럽의 7개국이 함께 모여 새로운 협회를 만드는 것에 이르렀다. 이렇게 FIFA (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는 1904년 5월 21일에 프랑스의 파리 시에서 설립되었다. FIFA라는 명칭은 프랑스어로 된 명칭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오늘날까지도 계속 사용되고 있고 비프랑스어권에서도 이렇게 쓰인다. 첫 번째 회장은 로베르 게렝이다.
FIFA가 주관하는 첫 번째 국제 대회는 1906년에 있었는데,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것은 경제적인 요인과 복합적으로 연계되어 있었고, 이로 인해 회장의 빠른 교체가 있었다. 두 번째 회장은 잉글랜드 출신의 대니얼 벌리 울폴이었다. 다음 대회인 1908 런던 올림픽에서의 축구 대회는 FIFA의 축구 원칙과 어긋나는 프로 축구 선수의 출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FIFA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많은 축구 선수들이 전쟁에 참전하였고, 국제 경기를 하기 위한 여행이 심각하게 제한되면서 허덕이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후, 회장인 울폴의 사망에 따라 연맹은 알렉산더 바르톨로뮤가 맡게 되었지만, 1919년에 그가 사망하면서 네덜란드 사람인 칼 허치먼이 맡게 되었다. 이렇게 협회는 존속되었지만, 세계 대전의 적대국과 함께 국제 대회에 참가하는 것을 꺼린 영국 내의 4개국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이 탈퇴하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1946년에 영국 내의 4개국이 다시 가입하였다. 1947년 5월 10일, "세기의 경기"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햄던 파크에서 135,000명의 관중이 모인 가운데 영국과 '그외 유럽국가 XI'와의 경기가 열려 6-1로 영국이 승리하였다. 이 경기를 통한 수익은 35,000파운드에 달했는데, 이는 FIFA에게 주어졌고, 이를 가지고 2차대전 이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전후 첫 번째 월드컵이 1950년에 브라질에서 열리게 되었다. 그동안 FIFA는 가입국의 확대를 그때까지 계속하여 50주년 기념일에 84개국을 회원으로 맞아들였다.
FIFA 남자 월드컵,
이 부분의 본문은 FIFA 월드컵입니다.
첫 번째 축구 월드컵이 1930년에 우루과이에서 열렸다. 첫 대회의 결승전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였는데, 양 국 모두 자신의 공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 당시에는 각국의 공의 규격이 통일되지 않았음) 결국 전반전엔 아르헨티나의 공을 사용하고, 후반전에는 우루과이의 공을 사용하였다. 첫 월드컵에는 많은 나라가 참가하지 못했고, 주로 아메리카 국가가 많이 참가하였다.
1950년까지 유럽 팀들이 관심을 보이며 대회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축구 대회로 발전하였다. 이로부터 많은 대회들이 등장하였다. — 유럽축구선수권대회, 남아메리카의 코파 아메리카, 오세아니아의 OFC 네이션스컵, 아시안컵,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북아메리카의 CONCACAF 골드컵이 각 대륙의 주요 대회가 되었다. 브라질은 월드컵 최다 우승국으로 5회 우승을 하였다. 독일 2014년 FIFA 월드컵을 우승하였다.
FIFA 여자 월드컵,
이 부분의 본문은 FIFA 여자 월드컵입니다.
FIFA 여자 월드컵의 첫 대회는 1991년 FIFA 여자 월드컵으로 중국에서 12개의 팀이 참가하였다. 1999년 FIFA 여자 월드컵에는 650,000명의 관중이 경기장을 찾았고 거의 10억에 가까운 시청자가 70개 국가에서 시청하였다. 2003년 대회부터 16개팀이 본선에 참가하게 되었다. 2007년 FIFA 여자 월드컵까지 포함하여 총 다섯 번의 대회가 열렸는데, 미국과 독일이 두번, 노르웨이가 한 번 우승을 하였다. 여자 축구의 대륙별 연맹 명칭은 남자 축구의 대륙별 명칭과 동일하다.
축구의 명칭은 나중에 'Soccer'로 바뀌게 되었다. 이와 같은 축구의 체계화에 대한 움직임과 함께 1863년 10월 26일 영국의 축구협회(The Football Association)가 만들어진 것이 실질적인 현대 스포츠로서의 축구로 발전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국은 축구의 종주국으로서 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보급된 스포츠의 하나가 되었으며 국가 간 대항전은 '대리전쟁'이라 불릴 만큼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대표적인 축구 세계대회는 'FIFA 월드컵' 대회로 단일 종목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스포츠 행사이다. FIFA 월드컵 대회는 20세기 초 올림픽 운동, 특히 1920년 올림픽 대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930년 제1회 FIFA 월드컵의 개최권은 우루과이에 주어졌다. 올림픽 중간 연도를 택해 4년에 한 번씩 개최되고 있다.
스포츠가 되다,
축구가 현재와 같은 스포츠로서의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은 1800년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축구는 통일된 규칙 없이 무질서하게 행해졌고, 이에 통일된 경기 규칙이 필요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1863년 영국 런던에서 '축구협회(FA: Football Association)'가 창립되었는데, 이것이 축구 공식기구 1호라 할 수 있다. 당시 영국 축구협회는 14개 조로 구성된 규칙을 발표했고, 이때부터 현재 축구경기의 기초들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영국 내에서 조직화되고 발전한 축구는 19세기 영국이 식민지 개척을 위해 전 세계로 진출하면서 함께 전파되었다. 이후 1882년 영국과 아일랜드 간 최초의 공식적인 국제경기가 열렸고, 1899년에는 영국이 독일로 가서 경기를 치렀다. 그리고 1904년 축구의 국제관리기구로서 국제축구연맹(FIFA·Fede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이 탄생했으며, 1930년에는 우루과이에서 제1회 월드컵 대회가 열리게 된다.
영국 내에서 조직화되고 발전한 축구는 19세기 영국이 식민지 개척을 위해 전 세계로 진출하면서 함께 전파되었다. 이후 1882년 영국과 아일랜드 간 최초의 공식적인 국제경기가 열렸고, 1899년에는 영국이 독일로 가서 경기를 치렀다. 그리고 1904년 축구의 국제관리기구로서 국제축구연맹(FIFA·Fede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이 탄생했으며, 1930년에는 우루과이에서 제1회 월드컵 대회가 열리게 된다.
한국의 축구 역사,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축구와 유사한 경기를 즐겨온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 공차기 놀이가 있었는데 그 명칭이 '축국(蹴鞠)'이었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이 놀이를 했는데 '농주(弄珠, 둥근 놀이기구)'를 가지고 놀다가 옷고름이 찢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영국에서 시작된 근대 축구가 한국에 전파된 것은 1882년(고종 19년) 제물포에 상륙한 영국 군함 '플라잉 피쉬(Flying Fish)'호의 승무원들을 통해서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식 축구의 보급은 1904년 서울의 관립(官立) 외국어학교에서 체육 과목의 하나로서 채택하면서부터이다.
한국 최초의 축구 경기는 1906년 3월에 서울 삼선평(오늘의 삼선교 부근)에서 열린 대한체육구락부와 황성기독청년회 간의 시합이라고 할 수 있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규칙하에 경기에 필요한 각종 장비를 갖추고 경기가 열리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이다. 1921년 제1회 전(全)조선 축구대회가 개최되고, 이어 1928년 5월 22일 우리나라 최초의 축구 조직인 '조선심판협회'(회장 신기준)가 창립되었다. 이어 5년 뒤인1933년 9월 19일 '조선축구협회'(회장 박승빈)가 창립됨으로써 한국에 정식으로 축구가 조직화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축구는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가슴에 쌓인 민족의 울분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청량제였고 독립의 희망을 키울 수 있는 싹이었다. 일제 말기 강제로 해산되었던 조선축구협회는 해방과 함께 1948년 9월 4일 대한축구협회로 개칭하면서 새롭게 출범했다. 같은 해 FIFA(국제축구연맹)에 가입했고, 1954년에는 AFC(아시아 축구연맹)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 1948년 런던 올림픽 본선에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처음으로 세계무대에 발을 내딛은 한국 축구는 1954년 스위스에서 열린 월드컵 본선에 최초로 진출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한국 축구는 1956년 제1회, 1960년 제 2회 아시안컵에서 연속으로 우승함으로써 아시아 축구 챔피언으로서의 기세를 드높였다. 이어 1960년대 이후 메르데카컵, 킹스컵, 아시안게임,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 등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각종 축구대회에서 수많은 우승컵을 차지함으로써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아시아 축구 최강으로 불리게 되었다. 세계 무대에서의 도약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 우리나라 축구는 2002년 일본과 함께 '코리아-재팬 월드컵 대회'를 개최한 바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축구가 세계적 수준으로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경기에서 우리나라는 세계 최강의 국가 대표팀들을 누르고 4위 성적을 올리는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한국 최초의 축구 경기는 1906년 3월에 서울 삼선평(오늘의 삼선교 부근)에서 열린 대한체육구락부와 황성기독청년회 간의 시합이라고 할 수 있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규칙하에 경기에 필요한 각종 장비를 갖추고 경기가 열리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이다. 1921년 제1회 전(全)조선 축구대회가 개최되고, 이어 1928년 5월 22일 우리나라 최초의 축구 조직인 '조선심판협회'(회장 신기준)가 창립되었다. 이어 5년 뒤인1933년 9월 19일 '조선축구협회'(회장 박승빈)가 창립됨으로써 한국에 정식으로 축구가 조직화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축구는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가슴에 쌓인 민족의 울분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청량제였고 독립의 희망을 키울 수 있는 싹이었다. 일제 말기 강제로 해산되었던 조선축구협회는 해방과 함께 1948년 9월 4일 대한축구협회로 개칭하면서 새롭게 출범했다. 같은 해 FIFA(국제축구연맹)에 가입했고, 1954년에는 AFC(아시아 축구연맹)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 1948년 런던 올림픽 본선에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처음으로 세계무대에 발을 내딛은 한국 축구는 1954년 스위스에서 열린 월드컵 본선에 최초로 진출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한국 축구는 1956년 제1회, 1960년 제 2회 아시안컵에서 연속으로 우승함으로써 아시아 축구 챔피언으로서의 기세를 드높였다. 이어 1960년대 이후 메르데카컵, 킹스컵, 아시안게임,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 등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각종 축구대회에서 수많은 우승컵을 차지함으로써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아시아 축구 최강으로 불리게 되었다. 세계 무대에서의 도약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 우리나라 축구는 2002년 일본과 함께 '코리아-재팬 월드컵 대회'를 개최한 바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축구가 세계적 수준으로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경기에서 우리나라는 세계 최강의 국가 대표팀들을 누르고 4위 성적을 올리는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시설,
경기장은 반드시 직사각형이어야 하고, 장방형 경기장의 긴 변(터치라인)을 형성하는 2개의 측선의 길이는 장방형의 경기장을 구획하는 짧은 쪽의 2개의 라인(골라인)의 길이보다 길어야 한다. 길이는 최소 90m, 최대 120m, 너비는 최소 45m, 최대 90m이다. 국제 경기용 경기장의 규격은 길이가 최소 100m에서 최대 110m, 너비는 최소64m에서 최대 75m이다. 경기장의 표시는 명확한 선으로 긋는다. 모든 선의 폭은 12cm를 넘지 않아야 한다. 경기장은 중앙선에 의하여 둘로 나누어지고 센터 서클은 반지름이 9.15m인 원을 그려 표시한다.
골은 반드시 각 골 라인의 중앙에 위치한다. 양 코너 플랙 포스트에서 같은 거리에 두 개의 포스트를 똑바로 세우고, 두 개의 포스트 윗부분을 수평의 크로스바로 연결한다. 양 포스트의 거리는 7.32m이고, 높이는 2.44m이다. 골 포스트는 골 문을 형성하고 있는 2개의 기둥을 말하며, 양 코너로부터 같은 거리의 지점에서 크로스바를 지지한다. 골 포스트와 크로스바의 폭과 두께는 같아야 하며, 12cm(5인치)를 초과해서는 안 된다. 골라인의 폭은 골 포스트와 크로스바의 폭과 같아야 한다. 골네트를 골 뒤쪽 지면에 설치할 수 있으나 골키퍼를 방해하지 않도록 완전하게 받쳐주어야 한다. 골 포스트와 크로스바는 흰색이어야 한다.
각 골 포스트의 안쪽에서 코너 쪽으로 5.5m되는 곳에 골라인과 직각이 되도록 경기장 안쪽으로 5.5m의 길이가 되게 두 개의 선을 긋고, 그 끝을 골라인과 평행이 되게 직선으로 연결시킨다. 이 선들과 골라인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골 에어리어라 한다. 각 골 포스트의 안쪽에서 코너 쪽으로 16.5m(18야드) 되는 곳에 골라인과 직각이 되도록 경기장 안쪽으로 16.5m의 길이가 되게 두개의 선을 긋고, 그 끝을 골라인과 평행이 되도록 직선으로 연결한다. 이 선들과 골라인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페널티 에어리어라 한다. 각 페널티 에어리어 안의 두 골 포스트 중앙에서 11m되는 지점에 페널티 아크를 표시한다. 페널티 아크는 각 페널티 마크에서 반지름이 9.15m인 원호를 페널티 에어리어 밖에 그린다.
각 골 포스트의 안쪽에서 코너 쪽으로 5.5m되는 곳에 골라인과 직각이 되도록 경기장 안쪽으로 5.5m의 길이가 되게 두 개의 선을 긋고, 그 끝을 골라인과 평행이 되게 직선으로 연결시킨다. 이 선들과 골라인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골 에어리어라 한다. 각 골 포스트의 안쪽에서 코너 쪽으로 16.5m(18야드) 되는 곳에 골라인과 직각이 되도록 경기장 안쪽으로 16.5m의 길이가 되게 두개의 선을 긋고, 그 끝을 골라인과 평행이 되도록 직선으로 연결한다. 이 선들과 골라인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페널티 에어리어라 한다. 각 페널티 에어리어 안의 두 골 포스트 중앙에서 11m되는 지점에 페널티 아크를 표시한다. 페널티 아크는 각 페널티 마크에서 반지름이 9.15m인 원호를 페널티 에어리어 밖에 그린다.
선수는 다른 선수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것을 몸에 지녀서는 안 된다. 따라서 선수는 상의, 하의, 양말, 정강이 보호대, 신발, 골키퍼용 장갑을 착용할 수 있을 뿐, 쇠장식이 붙은 벨트나 시계, 반지 등은 몸에 지닐 수 없다. 축구화에도 일정한 기준이 있으므로 기준에 맞는 것을 사용해야 한다.
축구공은 완전한 구형으로 외피에는 가죽을 사용한다. 구조상 선수에게 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물질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바깥둘레는 27인치(68cm)~28인치(70cm)이고 무게는 14온스(410g)에서 16온스(450g)이다. 공기 압력은 해면에서 0.6 기압 이상, 1.1기압 이하여야 한다. FIFA 공식경기, 대륙 연맹, 국가 협회주관 경기에서 대회 혹은 주최 측의 상징, 볼 제조자의 상표를 제외하고 볼에 어떠한 종류의 상업적 광고도 허용되지 않는다. 대회 규정에 마크의 크기와 숫자를 제한할 수 있다.
경기 방법.
축구는 출전 선수 11명씩 한 팀을 이루어 두 팀이 경기하며 일반적으로 전반전, 후반전으로 각각 45분, 총 90분으로 치른다. 경기 도중 반칙 등의 상황이 있어도 축구 경기의 시간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간다.
다만 이 손실 시간을 어림잡아 주심이 추가 시간을 주는 것이 보통이다. 전반전, 후반전 모두 45분이 지난 뒤에는 추가 시간이 있는데, 보통 1~3분으로 시간은 심판이 정한다. 심판은 경기에 따라서 추가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 주심은 경기 진행에 있어 시간 관리를 주관하며, 선수 교체나 부상 선수 등에 따르는 경기 중단과 재개의 권한이 있다.
추가 시간은 인저리 타임(injury time), 로스 타임(loss time), 스토피지 타임(stoppage time) 등으로 불리며, 전적으로 주심의 판단에 따른다. 주심만이 경기 종료를 선언할 수 있으며, 전·후반 종반에 이르면 보조심이 주심의 추가 시간 사인을 받아 번호판을 올려 선수와 관객에게 알린다. 이렇게 미리 공개된 추가 시간은 상황과 주심의 의도에 따라 더 길어질 수 있다.
친선 경기나 평가전 등의 경우에는 90분을 끝으로 경기가 끝나지만, 월드컵 경기와 같이 반드시 승부를 내야 하는 토너먼트 경기일 경우에는 연장전을 치른다. 연장전은 전·후반 각각 15분, 총 30분의 경기시간이 주어진다. 연장전을 해도 승부가 나지 않으면 승부차기로 돌입하는데(연장전을 치루지 않고 승부차기로 돌입하는 경우도 있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재경기에 돌입했으나, 이 제도가 채택되면서 거의 모든 축구 대회에서 이 방법을 택한다.
축구에서 반칙을 한 선수에게는 옐로카드 또는 레드카드가 주어진다. 경고로 충분한 경우는 옐로카드를, 선수가 경기장 밖으로 나가야 된다고 생각될 때는 심판이 레드카드를 꺼내든다. 반칙에 대한 벌칙으로 반칙을 당한 상대팀에게 직접프리킥이나 간접프리킥 기회를 주는데, 모든 프리킥은 차는 순간 인플레이가 성립되며 오프사이드도 적용된다. 킥을 하기 전에 공은 반드시 정지 상태여야 한다. 상대편 선수는 공으로부터 최소한 9.15m(10yards)를 떨어져야 한다.
직접프리킥은 키커가 차서 공이 골로 들어가면 골로 선언된다.
간접 프리킥은 키커가 찬 공이 심판을 제외한 누군가를 반드시 거쳐서 골로 들어가야 골로 선언된다. 직접 프리킥은 키커가 차서 공이 골로 들어가면 골로 선언된다. 페널티킥은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직접프리킥에 해당하는 반칙을 한 경우 선언된다. 골키퍼는 키커가 공을 차기 전에 앞으로 움직일 수 없고 다만 좌우의 평행이동만 가능하다. 키커와 골키퍼를 제외한 선수들은 페널티킥 스폿으로부터 9.15미터를 떨어져야 한다. 간접 프리킥에 해당하는 반칙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고 상대편은 벽을 세울 수 있다. 9.15 미터를 벌릴 수 없는 경우에는 골라인에서 벽을 세울 수 있다.
페널티킥은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직접프리킥에 해당하는 반칙을 한 경우 선언된다.
축구에서 가장 복잡한 규칙은 오프사이드 반칙이다. 공격팀 선수가 상대편 진영에서 공보다 앞쪽에 있을 때, 자기와 골라인과의 중간에 상대팀 선수가 2명 이상 없으면 오프사이드의 위치에 있으며, 이때 후방의 자기편으로부터 패스를 받으면 반칙이 된다. 만약 오프사이드 위치에 있는 선수에게 패스를 의도하지 않더라도 공이 선수 몸에 맞는 굴절 등의 이유로 그 선수에게 향했다면 오프사이드가 선언된다.
킥(Kick)
축구 경기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중요한 기술이 킥이다. 킥은 일반적으로 공이 발에 닿는 부위에 따라 구분한다. 인사이드킥은 엄지발가락이나 복사뼈 부근에 볼을 대고 차는 방법으로 근거리 패스나 골 가까이의 슈팅에 많이 사용된다. 아웃사이드 킥은 발등의 바깥쪽으로 볼을 치는 방법으로 근거리에 날카로운 패스를 할 때나, 볼에 회전을 주어 코스를 휘어지게 할 때에 사용한다. 후자의 경우 아웃 프런트 킥이라고도 한다.
축구 경기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중요한 기술이 킥이다. 킥은 일반적으로 공이 발에 닿는 부위에 따라 구분한다. 인사이드킥은 엄지발가락이나 복사뼈 부근에 볼을 대고 차는 방법으로 근거리 패스나 골 가까이의 슈팅에 많이 사용된다. 아웃사이드 킥은 발등의 바깥쪽으로 볼을 치는 방법으로 근거리에 날카로운 패스를 할 때나, 볼에 회전을 주어 코스를 휘어지게 할 때에 사용한다. 후자의 경우 아웃 프런트 킥이라고도 한다.
인스텝 킥은 발등 전체를 볼에 대고 차는 방법이다. 슈팅이나 장거리의 빠른 패스에 많이 사용된다. 인프런트 킥은 인사이드 킥과 아웃사이드 킥의 중간적인 방법으로, 엄지발가락에서 발 안쪽의 복숭아 뼈 쪽으로 공을 감아 찬다는 기분으로 하는 킥이다. 흔히 바나나킥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인프런트 킥은 센터링이나 대각선 패스, 로빙 패스 등을 할 때 주로 이용되며, 특히 골 에어리어 부근에서 발생한 직접 프리킥을 할 때 매우 위협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다. 아웃프런트 킥은 중앙에서 약간 바깥 부분으로 공을 차는 기술이다.
아웃프런트 킥은 중거리 패스, 슈팅, 프리킥 등에 많이 사용된다. 토킥은 발끝으로 공의 중심보다 약간 밑 부분을 차는 기술로, 혼란스러운 상대편 골문 앞에서 슛을 하거나 상대 선수보다 타이밍을 한 템포 빠르게 공을 처리하고자 할 때 사용한다. 힐 킥은 발뒤꿈치로 공을 살짝 찬다는 기분으로 킥을 하는 기술인데, 흔히 백힐링이라고도 부른다. 힐 킥은 정면으로 돌아서기가 여의치 않고 시간적인 여유가 없을 때, 특히 상대 선수를 속이고자 할 때 주로 사용하는 킥이다.
아웃프런트 킥은 중거리 패스, 슈팅, 프리킥 등에 많이 사용된다. 토킥은 발끝으로 공의 중심보다 약간 밑 부분을 차는 기술로, 혼란스러운 상대편 골문 앞에서 슛을 하거나 상대 선수보다 타이밍을 한 템포 빠르게 공을 처리하고자 할 때 사용한다. 힐 킥은 발뒤꿈치로 공을 살짝 찬다는 기분으로 킥을 하는 기술인데, 흔히 백힐링이라고도 부른다. 힐 킥은 정면으로 돌아서기가 여의치 않고 시간적인 여유가 없을 때, 특히 상대 선수를 속이고자 할 때 주로 사용하는 킥이다.
트래핑
손을 제외한 신체의 모든 부위 즉, 발등, 발바닥, 발의 인사이드와 아웃사이드, 대퇴, 복부, 가슴, 머리 등을 이용하여 날아오는 공을 멈추게 하는 기술이다. 공이 낙하하는 지점을 정확히 포착하여 타이밍을 잘 맞추고 공을 부드럽게 끌고 나가는 것이 트래핑 기술의 핵심이다. 한 가지 트래핑 기술에만 집착하지 말고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트래핑 기술을 구사할 수 있도록 연습해야 한다.
손을 제외한 신체의 모든 부위 즉, 발등, 발바닥, 발의 인사이드와 아웃사이드, 대퇴, 복부, 가슴, 머리 등을 이용하여 날아오는 공을 멈추게 하는 기술이다. 공이 낙하하는 지점을 정확히 포착하여 타이밍을 잘 맞추고 공을 부드럽게 끌고 나가는 것이 트래핑 기술의 핵심이다. 한 가지 트래핑 기술에만 집착하지 말고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트래핑 기술을 구사할 수 있도록 연습해야 한다.
드리블
공을 자유자재로 몰고 다니면서 상대에게 공을 빼앗기지 않고, 또 필요할 때 슛을 하거나 자기편 선수에게 유리한 위치로 패스를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중요한 기술이다. 드리블은 그 어느 기술보다도 배우기 어렵고 힘이 들기 때문에 완전히 숙달하려면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드리블 연습에서 중요한 것은 땅만 쳐다보지 말고 가급적이면 전방 3m 이상 앞을 보면서 드리블하는 습관을 갖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을 보면서 드리블을 할 수 있어야 게임 상황에서 우리편 선수와 상대 선수의 위치를 파악하고 정확한 위치로 이동하거나 패스하여 득점 찬스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을 자유자재로 몰고 다니면서 상대에게 공을 빼앗기지 않고, 또 필요할 때 슛을 하거나 자기편 선수에게 유리한 위치로 패스를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중요한 기술이다. 드리블은 그 어느 기술보다도 배우기 어렵고 힘이 들기 때문에 완전히 숙달하려면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드리블 연습에서 중요한 것은 땅만 쳐다보지 말고 가급적이면 전방 3m 이상 앞을 보면서 드리블하는 습관을 갖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을 보면서 드리블을 할 수 있어야 게임 상황에서 우리편 선수와 상대 선수의 위치를 파악하고 정확한 위치로 이동하거나 패스하여 득점 찬스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헤딩
공중에 뜬 공을 패스하거나 슛할 때 쓰는 기술로서, 스탠딩 헤딩(서서하는 헤딩)과 점프 헤딩 즉, 뛰어오르면서 공중에서 하는 헤딩으로 구분된다. 사람들은 흔히 축구 경기에서 헤딩이라는 기술이 없다면 그 재미가 훨씬 줄어들 것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헤딩은 예측하기가 어려우며 그만큼 멋진 슛이 나올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축구 경기에서 꽤 많은 득점을 헤딩슛으로 얻는 것이 좋은 예이다.
태클
상대의 공을 빼앗거나 공격을 저지하는 기술이다. 태클에는 정면 태클, 아웃사이드 태클, 러닝 태클이 있다. 태클을 할 때에는 상대의 움직임, 속도, 방향 등을 고려하여 적합한 태클을 적절한 시기에 시도하도록 한다. 특히 태클하는 발이 공의 중심보다 아래를 향하게 하여 발이 높게 올라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쓰도록 한다. 발을 높게 올리면 상대 선수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으며, 이 경우 반칙이 주어지고 심하면 퇴장까지 당하게 된다.
스로 인
양 발을 지면에 대고 양손으로 공을 잡아서 상체와 허리의 반동을 이용하여 힘차게 던지는 기술이다. 특히 지면에서 한 발이라도 떨어지거나 머리 뒤쪽에서부터 공을 던지지 않으면 반칙이 주어진다.
슈팅
득점을 위한 마지막 공격 수단으로서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자책골을 포함한 축구의 생명인 모든 골인은 슈팅으로 이루어진다. 그만큼 슈팅은 득점으로 직접 연결시키는 중요한 공격 기술인 것이다. 슈팅을 할 때에는 공의 방향과 함께 수비수와 골키퍼의 위치를 파악하여 신속하고 정확한 슛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며, 평소에 여러 각도에다 공을 놓고 연습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집단 전술
쇼트 패스 공격은 드리블, 패스, 킥 등 공격수들의 개인 기술이 우수할 경우 빠르고 짧은 패스로 상대편의 중앙부를 돌파하는 전술이다. 쇼트 패스 공격은 주로 2:1 패스나 3:1 패스를 연결하여 상대 진영을 뚫고 들어가서 득점과 연결시키는 공격 전술이다. 그러므로 패스할 때에는 상대의 수비 위치와 자세를 살피고, 패스를 받을 사람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킥 앤드 러시란 자기편 선수가 킥을 하면 다른 공격자들이 빈 공간을 향해 뛰어 들어가면서 공을 받아 공격하는 전술이다. 킥 앤드 러시는 미드필드가 빈 공간으로 롱 패스를 하여 발이 빠른 공격수에게 공격 기회를 갖도록 하는 전술이다. 스로인, 코너킥, 직·간접 프리킥을 할 때 상대의 수비대형이나 골키퍼의 위치를 고려하여 자기편끼리 사전에 약속된 전술을 펼치는 것을 세트 플레이라고 한다.
공중에 뜬 공을 패스하거나 슛할 때 쓰는 기술로서, 스탠딩 헤딩(서서하는 헤딩)과 점프 헤딩 즉, 뛰어오르면서 공중에서 하는 헤딩으로 구분된다. 사람들은 흔히 축구 경기에서 헤딩이라는 기술이 없다면 그 재미가 훨씬 줄어들 것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헤딩은 예측하기가 어려우며 그만큼 멋진 슛이 나올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축구 경기에서 꽤 많은 득점을 헤딩슛으로 얻는 것이 좋은 예이다.
태클
상대의 공을 빼앗거나 공격을 저지하는 기술이다. 태클에는 정면 태클, 아웃사이드 태클, 러닝 태클이 있다. 태클을 할 때에는 상대의 움직임, 속도, 방향 등을 고려하여 적합한 태클을 적절한 시기에 시도하도록 한다. 특히 태클하는 발이 공의 중심보다 아래를 향하게 하여 발이 높게 올라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쓰도록 한다. 발을 높게 올리면 상대 선수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으며, 이 경우 반칙이 주어지고 심하면 퇴장까지 당하게 된다.
스로 인
양 발을 지면에 대고 양손으로 공을 잡아서 상체와 허리의 반동을 이용하여 힘차게 던지는 기술이다. 특히 지면에서 한 발이라도 떨어지거나 머리 뒤쪽에서부터 공을 던지지 않으면 반칙이 주어진다.
슈팅
득점을 위한 마지막 공격 수단으로서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자책골을 포함한 축구의 생명인 모든 골인은 슈팅으로 이루어진다. 그만큼 슈팅은 득점으로 직접 연결시키는 중요한 공격 기술인 것이다. 슈팅을 할 때에는 공의 방향과 함께 수비수와 골키퍼의 위치를 파악하여 신속하고 정확한 슛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며, 평소에 여러 각도에다 공을 놓고 연습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집단 전술
쇼트 패스 공격은 드리블, 패스, 킥 등 공격수들의 개인 기술이 우수할 경우 빠르고 짧은 패스로 상대편의 중앙부를 돌파하는 전술이다. 쇼트 패스 공격은 주로 2:1 패스나 3:1 패스를 연결하여 상대 진영을 뚫고 들어가서 득점과 연결시키는 공격 전술이다. 그러므로 패스할 때에는 상대의 수비 위치와 자세를 살피고, 패스를 받을 사람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킥 앤드 러시란 자기편 선수가 킥을 하면 다른 공격자들이 빈 공간을 향해 뛰어 들어가면서 공을 받아 공격하는 전술이다. 킥 앤드 러시는 미드필드가 빈 공간으로 롱 패스를 하여 발이 빠른 공격수에게 공격 기회를 갖도록 하는 전술이다. 스로인, 코너킥, 직·간접 프리킥을 할 때 상대의 수비대형이나 골키퍼의 위치를 고려하여 자기편끼리 사전에 약속된 전술을 펼치는 것을 세트 플레이라고 한다.
세트 플레이는 대부분 득점과 직접 연결시킬 수 있는 위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상적인 여러 상황과 여러 각도에서 연습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격과 수비를 구현하는 데 있어 팀은 기본 대형을 짜고 플레이를 한다. 4-4-2 시스템은 미드필드의 체력이 뛰어나서 공격과 수비에 모두 가담할 수 있는 경우에 주로 사용하는 대형으로, 공격 2명, 수비 4명, 미드필드 4명으로 이루어지는 시스템이다.
4-3-3 시스템은 공격력을 보강하기 위해 공격수 3명, 미드필드 3명, 수비수 4명을 두고 미드필드 3명이 공격과 수비에 가담하는 대형이다. 3-5-2 시스템은 공격수 2명, 수비수 3명, 미드필더 5명으로 이루어지는 시스템으로 두 명의 윙백이 경기장의 측면에서 수비와 공격에 가담한다.
참고사항,
- 2016년 제31회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축구 메달 수 : 2개
- 2016년 제31회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축구 종목· 남자 : 16팀 토너먼트· 여자 : 12팀 토너먼트
참조어,
구기, 구기경기, 단체경기, 프로축구, 인저리타임, 코너킥, 프리킥, 페널티킥, 센터링, 저글링, 트래핑, 키킹, 드리블링, 헤딩, 태클링, 차징, 스로인, 골키핑, 골게임, 월드컵축구대회,
현대 축구의 발전사,
· 1863년: 영국 런던에서 '축구협회(FA : Football Association)' 창립· 1870년: FA가 팀의 구성에 관한 규정 제정 · 1871년: FA컵 대회 시작됨. · 1877년: 영국 내의 축구협회들이 통합 경기규칙 제정 · 1880년: 영국에서 '네틀 허니볼'이라는 최초의 여자 축구팀 창단 · 1883년: 축구규칙에 관한 모든 것을 논의·결정하는 기구로'국제축구협회평의회(IFAB)' 설립 · 1888년: 영국에서 6개의 클럽이 세계 최초의 공식리그 시작, 영국에서 리그가 형성되면서 프로선수 공인 · 1892년: 영국에서 2부리그가 출범 · 1904년: 국제축구연맹(FIFA) 창립· 1913년: FIFA, 국제축구협회평의회(IFAB) 가입· 1930년: 제1회 월드컵 축구대회,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개최
· 1863년: 영국 런던에서 '축구협회(FA : Football Association)' 창립· 1870년: FA가 팀의 구성에 관한 규정 제정 · 1871년: FA컵 대회 시작됨. · 1877년: 영국 내의 축구협회들이 통합 경기규칙 제정 · 1880년: 영국에서 '네틀 허니볼'이라는 최초의 여자 축구팀 창단 · 1883년: 축구규칙에 관한 모든 것을 논의·결정하는 기구로'국제축구협회평의회(IFAB)' 설립 · 1888년: 영국에서 6개의 클럽이 세계 최초의 공식리그 시작, 영국에서 리그가 형성되면서 프로선수 공인 · 1892년: 영국에서 2부리그가 출범 · 1904년: 국제축구연맹(FIFA) 창립· 1913년: FIFA, 국제축구협회평의회(IFAB) 가입· 1930년: 제1회 월드컵 축구대회,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개최
출처 & 참고문헌,
[스포츠 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축구 [football, Soccer] (스포츠 백과, 2008., 대한체육회)
[시사상식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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