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경, [大藏經], 2
불교경전을 망라하는 일체경(一切經). 싼스끄리뜨 Tripitaka를 번역한 삼장(三藏)을 뜻하며, 이는 석존은 설법인 교설(經)과 교단을 통치하는 계율(律), 그리고 교설의 해설(論)을 망라한다. 곧 경ㆍ율ㆍ론 삼장(經律論三藏)이며, 불교의 신앙대상인 불ㆍ법ㆍ승 삼보(佛法僧三寶) 가운데 법보이다. 석존의 교설이 팔만사천법문라는 뜻에서 흔히 팔만장경(八萬藏經) 또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 부르며, 단순하게 불경(佛經)이라고도 한다m
석존의 입멸(入滅) 후 불제자들이 불교교단의 신앙체제를 확립해나간 불ㆍ법ㆍ승 삼보가운데, 법보는 석존의 교설인 경전(sutra)을 결집(結集, samgaha)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전후 네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제1차결집은 ‘왕사성결집’ 또는 ‘오백결집’으로 부르는데, 석가가 입멸한 해에, 설법이 자주 행해진 왕사성 교외에서 이루어졌다. 석존의 법통을 이은 대가섭이 좌장이 되어, 5백비구가 모인 가운데 우바리가 율(계율)을 암송하고, 아란이 법(교법)을 암송했다고 한다.
당시는 출가승단의 화합을 유지하기 위한 승가갈마(僧伽羯磨, samgha-kamma)라는 모임이 있었는데, 이에서 석존의 수기설법(隨機說法)을 구송(口誦)하기 위해 계율을 암송하는 지율자(持律者), 교법을 암송하는 지법자(持法者), 법에 대하여 해설하는 설법자(說法者), 경을 해설한 논을 암송하는 지론자(持論者), 갖추어진 경을 암송하는 지경자(持經者) 등의 전문가를 두어 결집을 행한 것이다. 이 최초의 결집에서 사제(四諦)ㆍ팔정도(八正道)ㆍ십이인연(十二因緣)을 중심한 교법과, 비구계 등의 교단운영상 필요한 계율을 확인했으며, 《아함경(阿含經)》은 이러한 초기교단의 내용을 비교적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제2결집은 ‘비사리결집’ 또는 ‘7백결집’으로 부르는데, 제1차결집 후 백년 쯤이 흘러 계율상에 이의가 생긴 것을 계기로 이루어졌다. S지족 출신의 7백비구들이 비사리성(毘舍離城)에 모여 ‘십사(十事)가 합법’임을 제창한 것으로, 십사란 소금저축ㆍ식사ㆍ출타ㆍ거주ㆍ동의(同意)ㆍ학습ㆍ보시 관행 등을 말한다. 보수적인 장로들은 이를 위법이라고 반대하여 교단적인 논란이 일어났으므로 이를 통해 교단의 근본분열(根本分裂)의 양상이 확인된다.
제3결집은 ‘천인결집’이라 부르며, 석존 멸후 2백년경에 마우리야왕조 아쇼카왕 치하의 화씨성(華氏城)에서 행해졌다. 아쇼카왕은 인도전역을 통일한 후 일체의 전쟁을 포기함으로써 호법(護法)군주ㆍ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일컬어지는데, 일체의 전쟁을 포기하고 ‘진정한 승리는 법에 의한 것’임을 선포하면서, 각처에 전법사를 파견함으로써 불교세력의 국제화를 가져왔고, 그 차원에서 경전결집을 행한 것으로 보인다.
제4결집은 기원후 약 2세기경에 카니시카왕의 치하에서 비구 5백인이 모여 행한 것으로 전한다. 외도(外道) 즉 다른 종교와의 관련 속에서 불교이념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한 결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3~4차의 결집은 남방으로 전해진 소승불교와 북방으로 전해진 대승불교가 서로 달리 전하고 있다. 경장ㆍ율장이 결집되는 교단의 발전과정에서 다른 종교와의 대론(對論)에 의한 논장이 이루어져 이른바 삼장이 마련됨으로써 이를 대장경이라 부르게 되었다. 특히 기원 후에 대승경전이 유행하면서 대장경은 엄청난 분량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불교가 각국에 전파되면서 여러 언어로 번역된 대장경을 이루게 되었는데, 인도의 싼스끄리뜨와 빠알리 경전, 스리랑카의 남전(南傳)대장경, 티베트의 서장(西藏)대장경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한역(漢譯)대장경은 여러 시대에 걸쳐 대ㆍ소승의 다양한 경전이 번역되자 방대한 이들을 일체경으로 묶어내는 작업이 이루어져 송대인 971년(태조4)에는 대장경의 판각을 명하여 983년에 5천여권으로 완성된 이른바 ‘칙판대장경’을 보게 되었다. 이후 각국에서 대장경의 판각이 이루어졌는데, 고려에서는 불력(佛力)을 빌려 외적의 침입을 막으려는 호국신앙과 함께 현종 때에 고려판대장경을 판각하는 등 전후 4차례에 걸쳐 간행작업이 이루어졌다.
현재 가야산해인사에 수장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려판 팔만대장경은 고종 때 판각된 것으로 경판(經板)의 수가 81,258판에 이른다. 이 고려판 팔만대장경은 역사성과 보존가치에서 뿐만 아니라 내용의 정교성 등에서 두드러진 예인데, 20세기 초에 이를 저본으로 하여 일본에서 활자판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을 발행하여 널리 유행하고 있다.
소태산대종사는 “경전이라 하는 것은 과거 세상의 성자 철인들이 세도인심(世道人心)을 깨우치기 위하여 그 도리를 밝혀 놓은 것이지마는, 그것이 오랜 시일을 지내 오는 동안에 부연(敷衍)과 주해(註解)가 더하여 오거시서(五車詩書)와 팔만장경(八萬藏經)을 이루게 되었나니, 그것을 다 보기로 하면 평생 정력을 다하여도 어려운 바라, 어느 겨를에 수양 연구 취사의 실력을 얻어 출중초범한 큰 인격자가 되리요”(《대종경》 수행품22)라 하여, 책으로 된 경전에만 그치는 것을 경계하면서 천지에 널려 있는 산 경전을 보라고 강조했다(《대종경》 수행품23). 장경 등의 경전은 정법시대에 새로이 마련된 간단한 교리와 편리한 방법으로 모든 사람을 실지로 훈련하여 구전심수를 통해 대도를 체험하고 뛰어난 역량을 얻은 다음에 한 번 참고할 때 십년의 독서보다 나을 것이라 했다.
제1차결집은 ‘왕사성결집’ 또는 ‘오백결집’으로 부르는데, 석가가 입멸한 해에, 설법이 자주 행해진 왕사성 교외에서 이루어졌다. 석존의 법통을 이은 대가섭이 좌장이 되어, 5백비구가 모인 가운데 우바리가 율(계율)을 암송하고, 아란이 법(교법)을 암송했다고 한다.
당시는 출가승단의 화합을 유지하기 위한 승가갈마(僧伽羯磨, samgha-kamma)라는 모임이 있었는데, 이에서 석존의 수기설법(隨機說法)을 구송(口誦)하기 위해 계율을 암송하는 지율자(持律者), 교법을 암송하는 지법자(持法者), 법에 대하여 해설하는 설법자(說法者), 경을 해설한 논을 암송하는 지론자(持論者), 갖추어진 경을 암송하는 지경자(持經者) 등의 전문가를 두어 결집을 행한 것이다. 이 최초의 결집에서 사제(四諦)ㆍ팔정도(八正道)ㆍ십이인연(十二因緣)을 중심한 교법과, 비구계 등의 교단운영상 필요한 계율을 확인했으며, 《아함경(阿含經)》은 이러한 초기교단의 내용을 비교적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제2결집은 ‘비사리결집’ 또는 ‘7백결집’으로 부르는데, 제1차결집 후 백년 쯤이 흘러 계율상에 이의가 생긴 것을 계기로 이루어졌다. S지족 출신의 7백비구들이 비사리성(毘舍離城)에 모여 ‘십사(十事)가 합법’임을 제창한 것으로, 십사란 소금저축ㆍ식사ㆍ출타ㆍ거주ㆍ동의(同意)ㆍ학습ㆍ보시 관행 등을 말한다. 보수적인 장로들은 이를 위법이라고 반대하여 교단적인 논란이 일어났으므로 이를 통해 교단의 근본분열(根本分裂)의 양상이 확인된다.
제3결집은 ‘천인결집’이라 부르며, 석존 멸후 2백년경에 마우리야왕조 아쇼카왕 치하의 화씨성(華氏城)에서 행해졌다. 아쇼카왕은 인도전역을 통일한 후 일체의 전쟁을 포기함으로써 호법(護法)군주ㆍ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일컬어지는데, 일체의 전쟁을 포기하고 ‘진정한 승리는 법에 의한 것’임을 선포하면서, 각처에 전법사를 파견함으로써 불교세력의 국제화를 가져왔고, 그 차원에서 경전결집을 행한 것으로 보인다.
제4결집은 기원후 약 2세기경에 카니시카왕의 치하에서 비구 5백인이 모여 행한 것으로 전한다. 외도(外道) 즉 다른 종교와의 관련 속에서 불교이념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한 결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3~4차의 결집은 남방으로 전해진 소승불교와 북방으로 전해진 대승불교가 서로 달리 전하고 있다. 경장ㆍ율장이 결집되는 교단의 발전과정에서 다른 종교와의 대론(對論)에 의한 논장이 이루어져 이른바 삼장이 마련됨으로써 이를 대장경이라 부르게 되었다. 특히 기원 후에 대승경전이 유행하면서 대장경은 엄청난 분량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불교가 각국에 전파되면서 여러 언어로 번역된 대장경을 이루게 되었는데, 인도의 싼스끄리뜨와 빠알리 경전, 스리랑카의 남전(南傳)대장경, 티베트의 서장(西藏)대장경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한역(漢譯)대장경은 여러 시대에 걸쳐 대ㆍ소승의 다양한 경전이 번역되자 방대한 이들을 일체경으로 묶어내는 작업이 이루어져 송대인 971년(태조4)에는 대장경의 판각을 명하여 983년에 5천여권으로 완성된 이른바 ‘칙판대장경’을 보게 되었다. 이후 각국에서 대장경의 판각이 이루어졌는데, 고려에서는 불력(佛力)을 빌려 외적의 침입을 막으려는 호국신앙과 함께 현종 때에 고려판대장경을 판각하는 등 전후 4차례에 걸쳐 간행작업이 이루어졌다.
현재 가야산해인사에 수장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려판 팔만대장경은 고종 때 판각된 것으로 경판(經板)의 수가 81,258판에 이른다. 이 고려판 팔만대장경은 역사성과 보존가치에서 뿐만 아니라 내용의 정교성 등에서 두드러진 예인데, 20세기 초에 이를 저본으로 하여 일본에서 활자판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을 발행하여 널리 유행하고 있다.
소태산대종사는 “경전이라 하는 것은 과거 세상의 성자 철인들이 세도인심(世道人心)을 깨우치기 위하여 그 도리를 밝혀 놓은 것이지마는, 그것이 오랜 시일을 지내 오는 동안에 부연(敷衍)과 주해(註解)가 더하여 오거시서(五車詩書)와 팔만장경(八萬藏經)을 이루게 되었나니, 그것을 다 보기로 하면 평생 정력을 다하여도 어려운 바라, 어느 겨를에 수양 연구 취사의 실력을 얻어 출중초범한 큰 인격자가 되리요”(《대종경》 수행품22)라 하여, 책으로 된 경전에만 그치는 것을 경계하면서 천지에 널려 있는 산 경전을 보라고 강조했다(《대종경》 수행품23). 장경 등의 경전은 정법시대에 새로이 마련된 간단한 교리와 편리한 방법으로 모든 사람을 실지로 훈련하여 구전심수를 통해 대도를 체험하고 뛰어난 역량을 얻은 다음에 한 번 참고할 때 십년의 독서보다 나을 것이라 했다.
고려대장경,[ 高麗大藏經 ]
고려시대에 불경(佛經)과 장소(章疏)를 집대성하여 인간(印刊)한 불경.
해인사 수다라장 장경판,
구분/ 시대/ 소장,
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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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1011~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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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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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대한 역사(役事)는 불교를 흥왕(興旺)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문화국으로서의 위력을 이웃나라에 선양하고, 불력(佛力)으로 국난을 타개함으로써 호국(護國)하겠다는 대발원(大發願)에서 이룩된 것이다.
이의 조조(雕造)는 오랜 시일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시행되었다. 제일 처음 조조된 것은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또는 《초판고본대장경(初板古本大藏經)》이라고 하는데, 1011년(현종 2) 거란(契丹)의 내침을 계기로 시작되어 1087년(선종 4)까지 77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이 초장경(약칭)은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도감(都監)을 두고 송(宋)의 개보판(開寶板)·거란본(契丹本)과 종래부터 전해 내려오던 국내본(國內本) 등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대반야경(大般若經)》(600권), 《화엄경(華嚴經)》, 《금광명경(金光明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 6,000여 권의 경판(經板)을 만들었다.
이 초장경(약칭)은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도감(都監)을 두고 송(宋)의 개보판(開寶板)·거란본(契丹本)과 종래부터 전해 내려오던 국내본(國內本) 등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대반야경(大般若經)》(600권), 《화엄경(華嚴經)》, 《금광명경(金光明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 6,000여 권의 경판(經板)을 만들었다.
그 후 문종(文宗)의 제4왕자인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송나라에서 각종 장서 3,000여 권을 모아 가지고 돌아와, 1073년(문종 27)부터 1090년(선종 7)까지 이 교장(敎藏)과 불서(佛書) 모은 것을 엮어 이를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이라 하고 이 목록에 의하여 차례대로 인간(印刊)한 것을 《속장경(續藏經)》이라고 한다. 그 후로도 흩어져 있는 불서를 모아 간행하였는데, 그 일은 그가 죽기 2년 전인 1099년(숙종 4)까지 계속되어, 모두 1,010부 4,740여 권이 인간되었다.
제1차로 완성된 이 정장(正藏)은 그 경판이 부인사에 이관, 소장되어 있었으나, 1232년(고종 19)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며, 《초조대장경》은 일본 교토[京都]의 난젠사[南禪寺]에 1,715권이 남아 있고 《속대장경》은 순천 송광사(松廣寺)와 고려대학교 도서관 및 일본 나라[奈良]의 도다이사[東大寺], 나고야[名古屋]의 신후쿠사[眞福寺] 등에 각각 흩어져서 겨우 47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몽골군의 침입으로 서울을 강화도로 옮긴 고려는, 호국(護國)을 위한 부인사의 《대장경》이 소실되자, 이 외침을 물리치기 위하여 다시 대장경을 조조하여 불력의 가호를 빌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새로이 설치하고, 1236년(고종 23)부터 1251년(고종 38)까지 재조(再雕)대장경을 완성시켰다. 이것은 처음 강화도성(江華都城) 서문(西門) 밖의 대장경 판당(板堂)에 수장되어 있었는데 후에 강화의 선원사(禪源寺)로 옮겨졌고, 그 후 조선 초기에 서울의 서대문 밖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다시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로 옮겨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이 《재조대장경》은 구목록(舊目錄)의 천(天)∼동함(洞函)에 이르기까지 639함(函)에 엮어져 부수는 1,547부(部), 6,547권(卷)이며, 추가목록의 동(洞)∼무(務) 및 중복된 녹(祿)∼무함(務函) 24함에 들어있는 15부, 231권(혹은 236권)을 합하면, 모두 663함 1,562부, 6,778권(혹은 6,783권)이며, 경판의 수는 8만 1258판이 되고, 이것이 안팎으로 새겨져서 16만여 쪽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세칭 《팔만대장경》이라고 한다.
이 재조대장경은 초조대장경을 그대로 다시 조조한 것은 아니다. 그것을 저본으로 한 것은 사실이나, 송·거란본과도 대교(對校)하여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고쳤고, 빠진 것은 그것을 보완하였다. 그리고 초장경 때에는 없었던 《송조신역경(宋朝新譯經)》과도 대교(對校)·고감(考勘)하였고 《개원록(開元錄)》, 《속정원록(續貞元錄)》 등의 불서목(佛書目)도 참고하여 본문을 다양하게 보완하였다.
이런 노력 끝에 이루어진 이 대장경은, 중국 북송(北宋)의 《개보칙판대장경(開寶勅版大藏經)》 이후 각종 《대장경》이 잇달아 조조되었지만, 그 어느 것보다도 본문이 충실하며 오탈(誤脫)이 적다는 것이, 국내외 학자들의 정평(定評)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도 이것을 저본으로 하여 《축쇄장경(縮刷藏經)》을 만들어내었고, 잇달아 중국에서도 청나라 말에 《빈가정사장판(頻伽精舍藏板)》을 내놓았다.
이런 노력 끝에 이루어진 이 대장경은, 중국 북송(北宋)의 《개보칙판대장경(開寶勅版大藏經)》 이후 각종 《대장경》이 잇달아 조조되었지만, 그 어느 것보다도 본문이 충실하며 오탈(誤脫)이 적다는 것이, 국내외 학자들의 정평(定評)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도 이것을 저본으로 하여 《축쇄장경(縮刷藏經)》을 만들어내었고, 잇달아 중국에서도 청나라 말에 《빈가정사장판(頻伽精舍藏板)》을 내놓았다.
《대장경》의 조조는 고려가 가장 어려웠던 국난의 시기에 초조판부터 헤아려 실로 240년이라는 장구한 시일을 통하여 이룩한 거국적 대사업으로, 대장경의 인쇄를 둘러싸고 경쟁하였던 송·거란에 대해 문화국으로서의 위신을 드높였을 뿐 아니라, 인쇄술과 출판술의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불교 성전을 총집한 것으로 <일체경>이라고도 하며, <삼장(三藏)>을 집성한 것이다. 원래 <대장경>의 호칭은 한역의 <삼장>에 약간의 중국인의 찬술서를 더한것을 가리켰는데, 현재에는 기타 국어에 의한 것도 널리 총칭한다. 즉, 한어 외에 팔리어, 티베트어, 몽고어, 만주어가 있으며, 서하어도 일부 현존한다. 또한 <대장경>에 편입되는 서적의 기준은 엄격하게 정해지며, 그 이외의 것은 <장외(藏外)>라고 하였다.
팔리어의 삼장,
<삼장>이라는 것은 팔리어의 티피타카(tipitaka)의 역어로 세 개의 용기라는 뜻인데 경ㆍ율ㆍ론의 3부로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경(수타 ; sutta)은 석가나 제자들의 언행록, 율(비나야 ; vinaya)은 교단의 계율규정, 논(論, 아비담마; abhid-hamma)은 철학적 이론을 전개한 것이다. 석가의 사망 후, 그 가르침을 올바르게 전하기 위해서 불멸 후 100~200년경의 교단은 많은 부파로 분열하고, 각 부파가 각자의 삼장을 전하게 되었다. 그들은 인도 각지의 언어에 의한다고 생각되는데, 완전한 형태로 현존 하는 것은 스리랑카에 전해진 상좌부계의 팔리어 삼장만으로, 현재 스리랑카, 태국, 버마 등 동남아시아의 불교국에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이들은 기원전 2~기원전 1세기경까지 서서히 형성된 것으로, 기원전 1세기경에 스리랑카에 전했다고 하며, 이후 많은 장외의 주석서, 강요서, 사서 등이 만들어졌다. 19세기 말, 런던에 팔리성전협회(Pāli Text Society)가 설립되어서 원전의 교정출판이 이루어졌다.
티베트 대장경,
불전의 티베트어역은 7세기 손첸 감포왕 시대에 톤미산보타에 의해서 시작되고, 13세기경에는 대장경이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티베트대장경은 칸귤(감수이(甘殊爾))과 텐귤(단수이(丹殊爾))로 이루어 졌으며, 전자는 경ㆍ율, 후자는 논을 수록하였다. 그 중에는 대승의 경론, 특히 원전도 한역도 현존하지 않는 인도 후기 불교의 문헌을 많이 포함하고 있으며, 티베트어역이 산스크리트의 술어역에 가깝고, 원형으로 환원하기 쉬운 점과 함께 인도 후기 불교의 연구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몇 번이나 개판되었는데, 18세기의 델게판, 나르탄판, 북경판 등이 중요한데 티베트인의 저작은 모두 장외이다.
한역 대장경,
중국에서 경률론 삼장의 한역사업은 2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으며, 11세기 말까지 거의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한역사업의 진행과 함께 역경의 수집이나 분류, 경전 진위의 판별이 필요해지고, 4세기 말에는 도안(道安)에 의 해서 『종리중경목록』이, 6세기 초에는 승우에 의해서 『출삼장기집』이 작성되었다. 이들 중경(衆經)이나 삼장을 북조의 북위에서 <일체경>이라고 하며, 남조의 양에서 <대장경>이라고 하였고, 수ㆍ당초에 이르러서 양자의 명칭이 확립되었으며, 사경의 서식도 정착되었다. 수ㆍ당시대에도 많은 불전목록이 편찬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730년에 완성된 지승의 찬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20권이다. 지승(智昇)은 남북조 이후의 경전분류법을 답습해서 대승의 삼장과 소승의 삼장 및 성현집전을 구별하고, 그 중 대승경전을 반야, 보적, 대집, 화엄, 열반의 오대부(五大部)로 하고, 대장경에 편입되어야 할 불전의 총수를 5048로 결정했는데 여기에 수재된 5048권의 경률론 등은 그 이후의 대장경(일체경)의 기준이 되었다. 대장경전의 황권적축(黃卷赤軸)의 장정을 하고, 약 10권씩을 대나무나 천으로 쌌으며, 480질로서 가장(架藏)되었고, 후에는 검출의 편의상 『천자문』에 의해서 함가(函架)의 번호를 붙여서 경장에 안치되었다.
목판인쇄에 의한 최초의 대장경은 송의 태조ㆍ태종의 양조, 971년부터 983년에 걸쳐서 촉나라에서 조조되었으며, 국도인 개봉에서 인쇄 출판되었는데 <촉판대장경>이라고 하며, 매행 14자의 권자본(卷子本)의 형식이었다. 이는 송조에 의한 정법유포의 공덕사업이었기 때문에 서하, 고려, 일본 등의 여러 나라에 국제우호의 의미를 포함해서 증여되었다. 983년 연말에 입송한 일본의 승은 이경(離京)시에 신찬된 대장경 481함 5048권과 신역경전 40권 등을 받았는데 이 대장경을 하사받은 고려는 11세기 전반에 복각판을 내고, 그 판목이 원군에 의한 병화로 소실되자, 13세기 중엽에는 재조본을 완성시켰다. 남송에서 명대에 걸쳐서도 각지에서 대장경은 계속 만들어졌으나, 명말에 새로운 형식의 방책본인 <만력판 대장경>이 출판되었다.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
고려시대의 승려로 천태종(天台宗)의 개조(開祖). 고려전기 국사, 승통, 국청사 제1대 주지 등을 역임한 승려.
성은 왕(王)씨. 이름은 후(煦), 호는 우세(祐世). 대각국사(大覺國師)는 시호.
속명은 왕후(王煦). 호는 우세(祐世). 법명은 의천. 경기도 개성 출신. 아버지는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이며,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李氏)이다. 불교 전적을 정비하고 『교장(敎藏)』을 간행하였으며, 천태종을 세워 교단의 통일과 국가 발전을 도모하였다.
송악출신으로 아버지는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이며,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이다. 문종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11세에 출가해 47세로 입적할 때까지 구법과 수행, 학문과 강학으로 일생을 살았던 대표적 고승이면서 탁월한 불교학자였다. 의천은 1085년 송나라로 들어가 고승 50여명을 만나 불법을 교류했고,귀국 후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속장경의 간행에 착수했다.
송악출신으로 아버지는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이며,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이다. 문종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11세에 출가해 47세로 입적할 때까지 구법과 수행, 학문과 강학으로 일생을 살았던 대표적 고승이면서 탁월한 불교학자였다. 의천은 1085년 송나라로 들어가 고승 50여명을 만나 불법을 교류했고,귀국 후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속장경의 간행에 착수했다.
문종의 넷째 아들로, 11세에 출가를 자원하였다. 1065년(문종 19)경덕국사(景德國師)를 은사로 삼아 출가하여, 영통사(靈通寺)에서 공부하다가 같은 해 10월불일사(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경·율·논 삼장(三藏)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 서적 및 제자백가의 사상을 두루 섭렵하였다. 스승인 경덕국사가 죽자 그의 강의를 대신 맡았다.
1067년(문종 21) 왕으로부터 우세라는 호와 함께 승통(僧統)의 직책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송나라에 유학을 계획하고, 송나라의 정원법사(淨源法師)와 편지를 통하여 교유하였다. 1085년(선종 2)송나라로 수도 변경(汴京)의 계성사(啓聖寺)에 머물면서 화엄의 대가인 유성법사(有誠法師)와 교유하였다.
그 후 상국사(相國寺)에서 운문종(雲門宗)의 종본(宗本)을 방문하였고, 흥국사(興國寺)에서 인도 승려 천길상(天吉祥)을 만나 인도의 사정과 학문을 배웠다. 또, 항주(杭州)대중상부사(大中祥符寺)의 정원법사에게 가서 『화엄경』, 『능엄경』, 『원각경』, 『대승기신론』 등의 사상과 천태와 현수의 교학에 대하여 토론하였으며, 그가 고려에서 가지고 간 지엄(智儼)·현수(賢首)·청량(淸凉)·규봉(圭峯) 등의 저술을 통해 자변대사(慈辨大師)와 원소율사(元炤律師)를 비롯한 여러 종파의 학승들과 담론하였다.
1086년 불교 전적 3,000여 권을 가지고 귀국한 뒤,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정리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송나라의 고승들과 서적·편지 등을 교환하면서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는 정원에게 『화엄경』과 장경각 건립비로 금 2,000냥을 보냈고, 요나라, 송나라, 일본 등에서 불교 서적 4,000여 권과 국내의 고서를 모았다.
그는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교장』의 간행 목록으로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3권을 편집하였는데, 이것은 삼장(三藏)의 정본 외에 그 주석서인 장소(章疏)만을 수집하여 목록을 작성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일이다.
1097년(숙종 2)국청사(國淸寺) 제1대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강의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천태종의 개립을 보게 되었으며, 1099년 천태종의 제1회 승선(僧選)을 행하고, 2년 후 국가에서 천태종 대선(大選)을 행하였다.
그는 불교계 선과 교의 수행을 함께 했으며, 선종인 조계종과 교종인 화엄종의 결함을 보완한 선교 통합을 위해 평생 노력했다. 천태종은 의천이 국청사의 주지로 취임,'천태교관(天台敎觀)'을 강의함으로써 개창됐다.
의천은 자신이 수집한 1010종 4857권의 불교 장서 목록을 정리한 '신편제종교장총록'을 비롯해 '원종문류', '석원사림', '대각국사문집' 등의 저서를 남겼다.
출생 - 사망/ 이명/ 직업분야/ 국적/ 시대
1055년 ~ 11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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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대각국사(大覺國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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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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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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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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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사항
- 흥왕사 주지
- 속장경 간행
- 국청사 주지
속장경(續藏經) 간행, 천태종 개립(開立) 등을 통해 고려 전기(前期) 불교의 교학진흥과 사상적 통일을 기하고 불교의 국가적 기여에 힘썼던 고려의 고승(高僧). 고려의 왕권강화를 위해 호족세력의 비호 아래 있던 오교구산의 여러 종파를 통일시키려 했다.
고려 문종의 제4왕자로 태어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11세에 출가하여 영통사(靈通寺)의 왕사(王師) 난원(爛圓)에게 득도(得度)하고 화엄교관(華嚴敎觀)을 배웠다. 30세 때인 선종(宣宗) 2년(1085)에 송나라에 들어가 고덕애학(高德礙學)을 방문하고 명산고적을 두루 찾았다.
국왕과 태후의 간절한 청에 의하여 오래 머물지 못하고 송나라로 떠난 지 14개월만에 귀국했는 데, 장소(章疏) 3천여 권을 갖고 왔다. 의천은 송에 머물던 짧은 동안에 고승 50여 명을 만나보고 법요(法要)를 논의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유성(有誠)ㆍ정원(淨源)ㆍ선총(善聰)과 화엄을, 종간(從諫)과 천태교학(天台敎學)을, 원소(元炤)ㆍ택기(擇其)와 율(律) 및 정토(淨土)를, 종본(宗本)ㆍ요원(了元)ㆍ회련(懷璉)과 선(禪)을, 천길상(天吉祥)과 범학(梵學)을 각각 논강소통(論講疏通)하여 송의 제학(諸學)을 모두 섭렵하였다.
귀국한 후에 의천은 흥왕사(興王寺) 주지로 있으면서 제자를 양성하는 한편, 요(遼)ㆍ송ㆍ일본 등에서 4천여 권의 장소(章疏)를 다시 수집, 구입하고 국내의 고서(古書)를 모아 그 목록으로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3권을 편집하였다. 이는 경(經)ㆍ율(律)ㆍ논(論), 삼장(三藏)의 정본 외에 그 주석서인 장소(章疏)만을 수집하여 목록을 작성한 것으로 이러한 부문에서는 최초가 된다.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이 목록에 의하여 경서를 간행하니, 이것을 곧 고려 속장경(續藏經)이라 한다.
그 후 선암사(仙岩寺)와 흥원사(興圓寺)를 거쳐 해인사(海印寺)에서 심신을 정양하고 있었는데, 숙종이 즉위하여 간청하자 다시 흥왕사(興王寺)에 돌아와 강학(講學)하였다. 숙종 2년(1097) 2월에 국청사(國淸寺)가 낙성되자, 그해 5월에 제1세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天台敎學)을 강(講)하니 모여드는 학자(學者)가 무려 1천 명을 넘었다. 여기서 비로소 천태종(天台宗)이 일종(一宗)으로 그 개립(開立)을 보게 되었다. 숙종 6년(1101)에 47세로 세상을 떠나니, 시호를 대각국사라 하였다.
국왕과 태후의 간절한 청에 의하여 오래 머물지 못하고 송나라로 떠난 지 14개월만에 귀국했는 데, 장소(章疏) 3천여 권을 갖고 왔다. 의천은 송에 머물던 짧은 동안에 고승 50여 명을 만나보고 법요(法要)를 논의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유성(有誠)ㆍ정원(淨源)ㆍ선총(善聰)과 화엄을, 종간(從諫)과 천태교학(天台敎學)을, 원소(元炤)ㆍ택기(擇其)와 율(律) 및 정토(淨土)를, 종본(宗本)ㆍ요원(了元)ㆍ회련(懷璉)과 선(禪)을, 천길상(天吉祥)과 범학(梵學)을 각각 논강소통(論講疏通)하여 송의 제학(諸學)을 모두 섭렵하였다.
귀국한 후에 의천은 흥왕사(興王寺) 주지로 있으면서 제자를 양성하는 한편, 요(遼)ㆍ송ㆍ일본 등에서 4천여 권의 장소(章疏)를 다시 수집, 구입하고 국내의 고서(古書)를 모아 그 목록으로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3권을 편집하였다. 이는 경(經)ㆍ율(律)ㆍ논(論), 삼장(三藏)의 정본 외에 그 주석서인 장소(章疏)만을 수집하여 목록을 작성한 것으로 이러한 부문에서는 최초가 된다.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이 목록에 의하여 경서를 간행하니, 이것을 곧 고려 속장경(續藏經)이라 한다.
그 후 선암사(仙岩寺)와 흥원사(興圓寺)를 거쳐 해인사(海印寺)에서 심신을 정양하고 있었는데, 숙종이 즉위하여 간청하자 다시 흥왕사(興王寺)에 돌아와 강학(講學)하였다. 숙종 2년(1097) 2월에 국청사(國淸寺)가 낙성되자, 그해 5월에 제1세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天台敎學)을 강(講)하니 모여드는 학자(學者)가 무려 1천 명을 넘었다. 여기서 비로소 천태종(天台宗)이 일종(一宗)으로 그 개립(開立)을 보게 되었다. 숙종 6년(1101)에 47세로 세상을 떠나니, 시호를 대각국사라 하였다.
저술로는 『신집원종문류』(新集圓宗文類),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석원사림』(釋苑詞林), 『성유식론단과』(成唯識論單科), 『팔사경직석』(八師經直釋), 『소재경직석』(消災經直釋) 등 10여 부 3백여 권이나 되었는데, 현존하는 것은 『교장총록』(敎藏總錄) 3권과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같은 책 『외집』(外集)의 낙장본(落張本)과 『원종문류』(圓宗文類) 및 『석원사림』(釋苑詞林)의 잔편(殘篇)이 있고 『간정성유식론단과』(刊定成唯識論單科)의 서문이 있다.
의천은 본래 화엄종의 승려였던 만큼 화엄 계통의 제자와 함께 천태종 개립 이후의 천태종계 제자들이 많아 그의 법을 이었다. 의천의 사상을 한두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천태종 개립을 통해 보면, 크게 ①교관병수(敎觀並修) ②선교(禪敎)의 융합 ③호국이념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입적하기 전부터 화엄교관(華嚴敎觀)과 천태교관(天台敎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두고 참구(參究)했다. 그리하여 송에 가서는 화엄학의 대가이면서 천태학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은 유성(有誠)과 더불어 화엄의 현수(賢首)와 천태의 지의(智)의 교판(敎判)사상 및 양종(兩宗)에 대해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다. 또한 중국 천태종의 고승(高僧)이었던 자변종간(慈辨從諫)으로부터는 천태교학에 대해서 깊은 지해(知解)를 얻었다.
고려에 돌아온 의천은 이 두 사상을 포용해서 당시 불교계의 시류(時流)를 제거하려고 의도했던 것으로, 그것이 곧 천태종 개립의 태동이었다. 천태교학에서는 교관병수(敎觀並修)를 강조하고 있는데, 곧 이론(敎相)과 실천(修行)의 겸행을 말한다. 그리하여 일심삼관(一心三觀)ㆍ삼관오교(三觀五敎)의 수행을 역설한다. 여기서 일심삼관의 수행이란 화엄법계의 관문으로서 실천수행과 이론적인 교리조직을 말한다. 삼관은 화엄경에 법계의 진리를 증독키 위하여 일심으로 닦는 3종의 관계(觀界), 즉 진공관(眞空觀)ㆍ이사무애관(理事無礙觀)ㆍ주편함용관(周遍含容觀)을 가리키며, 또 영락본업경(瓔珞本業經)에서 다루어지고 천태종에서 계승ㆍ발전시킨 공(空)ㆍ가(假)ㆍ중(中), 삼관을 말한다.
오교란 화엄의 오시교판(五時敎判)을 말하는데, 의천은 이를 그 내용에 있어서는 천태종의 사교와 대등하다고 보았다. 결국 삼관오교는 교상(敎相)과 이의 실천, 즉 교관병수(敎觀並修)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는 천태종을 개립한 의천의 근본사상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천태종 개립에서 볼 수 있는 의천의 또 다른 사상은 교(敎)와 선(禪)의 융희(融會)라고 말할 수 있다. 의천은 어느 일종(一宗), 일교(一敎)에 편중하지 않고 모든 사상을 융회ㆍ통합하려 했다.
이러한 각종 사상의 융회 노력은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특히 천태종 개립으로 당시 사상적으로 대립해 있던 선과 교를 융회하려 하였다. 또한 이같은 불교의 사상적 귀일(歸一)을 통해 고려불교를 개혁코자 했으며, 이를 그대로 호국불교적 이념으로 전개해가고 있다. 불교 교단의 발전과 함께 국가의 이익을 생각하는 의천의 이같은 호국이념은 그의 독특한 입전지법(立錢之法)의 주장에서도 엿볼 수 있다.
화엄종 계통의 승려였던 그가 천태종을 개립하게 된 까닭은 천태의 근본 사상인 회삼귀일(會三歸一)과 일심삼관(一心三觀)의 교의로써 국가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선(禪)과 교(敎)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저서에는『신편제종교장총록』3권, 『신집원종문류(新集圓宗文類)』 22권, 『석원사림(釋苑詞林)』 250권,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23권과 『대각국사외집(大覺國師外集)』 13권, 『간정성유식론단과(刊定成唯識論單科)』 3권, 『천태사교의주(天台四敎儀註)』 3권, 『계악권선면학(誡惡勸善勉學)』 1권, 『팔사경직석(八師經直釋)』, 『소재경직석(消災經直釋)』 등이 있다.
그밖에 『화엄경』 180권을 비롯하여 국어로 번역하여 강의한 것이 300여 권이다.
현재는 『신편제종교장총록』 3권과 『대각국사문집』, 『대각국사외집』의 낙장본, 『원종문류』, 『석원사림』의 일부, 『간정성유식론단과』의 서문만이 전하고 있다. 그의 문하에서 교웅(敎雄), 징엄(澄儼), 수개 등 160여 명의 고승이 배출되었다.
상훈 ^ 추모
시호는 대각국사(大覺國師)이며, 비는 영통사와 선봉사(僊鳳寺)에 건립되었다.
수양명대장경 [手陽明大腸經]
우리나라 신장신앙은 삼국시대의 신라에서는 진평왕(579 ~632년)에 제석천을 호국, 호법의 선신으로 신앙하여 제석궁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종류의 신장에 대한 신앙과 조상(造像)활동이 활발했고, 본격화 된 것은 문무왕(661~681)에 사천왕사가 건립된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백제에서는 무왕(600~641)때 제석사룰 건립했다는 기록, 의자왕 21년(660) 풍우로 천왕사(天王寺)와 도양사(道讓寺)의 탑이 진동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어, 제석․사천왕 등 신장에 대한 신앙이 백제에서도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도 신장신앙이 있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현재 기록으로는 확인할 만한 것이 없는 실정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감은사 사리기(682)의 사천왕상, 8부 중상을 비롯하여 석탑과 부도 등에 인왕, 사천왕, 8부중, 12지 등이 부조된 예가 많이 남아 있으며, 석굴암 내부에 여러 신장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불교가 국가와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신앙으로 수용됨에 따라, 법회와 도량 등이 크게 유행하였고 사찰안에도 많은 신장 탱화와 상이 모셔졌으나, 현재 남아있는 신장상의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조선시대에 신장은 단지 가람수호 또는 호법이라고 하는 신장본래의 기능에 의한 신앙의 대상으로서만 믿어졌다. 그래서 천왕문이나 명부전 등에 인왕상, 사천왕상 등의 탱화가 많이 조성되었다. 즉, 조선후기에는 신장이 갖고 있던 외호적 기능이 불전 안의 불보살 수호라고 하는 내호적 신앙으로 탈바꿈하면서 신중탱화가 크게 유행하였던 것이다. 결국 신장신앙은 시대적인 성격에 따라 호국호법(護國護法)이라는 외호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고, 때로는 개인의 신앙을 위한 기능을 하면서 꾸준히 발전되어 왔다.
대장경 종경록
화엄경
화엄경 : 십행품
1. 즐거운 행
2. 이롭게 하는 행
3. 어기지 않는 행
4. 굽히지 않는 행
5. 어리석음과 어지러움이 없는 행
6. 잘 나타나는 행
7. 집착이 없는 행
8. 얻기 어려운 행
9. 진실한 행
10. ...
화엄경
화엄경 : 십행품
1. 즐거운 행
2. 이롭게 하는 행
3. 어기지 않는 행
4. 굽히지 않는 행
5. 어리석음과 어지러움이 없는 행
6. 잘 나타나는 행
7. 집착이 없는 행
8. 얻기 어려운 행
9. 진실한 행
10. ...
유명선사, 명,
"제안선사/ 신찬선사/ 승찬대사/ 대법안 문익선사/ ○○화상/ 백운화상/ 달마대사
불교경전?
대장경이란 말은 불교성전 일체의 총칭이란 뜻으로 일체경이라고도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모은 경과 불제자들이 지켜야할 수향덕목을 모은 율(律)과 마명, 용수, 천친 같은 보살 논사들이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교리를 모은 논의 3장이란 뜻으로 3장경. 장경이라고도 한다. >>>불교경전 으로이어짐,,,
불교, 경전개설, (책)
참조항목
고려대장경초조본, 대장경, 장경도감,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 해인사 대장경판
역참조항목
감지은니불공견색신변진언경(권13), 강화 선원사지, 고려국신조장경교정별록, 고종, 고판본, 기신론별기, 대반야바라밀다경
카테고리
출처 ^ 참고문헌,
[대장경 [大藏經] (원불교대사전)
[고려대장경 [高麗大藏經] (두산백과)
[doopedia.co.kr
[대장경 [大藏經] (종교학대사전, 1998...)
[대각국사 의천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네이버 지식백과] 의천 [義天] (철학사전, 20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 권으로 끝내는 교과서 위인
[의천 [義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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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조선총독부, 1919)
[의천의 교학사상』(이종익, 한국철학연구 상, 동명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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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각국사와 천태사상』(조명기, 동국문화사, 1964)
[대각국사의 천태의 사상과 속장 업적」(조명기, 『백성욱박사송수기념불교학논문집』, 1958)
[팔만사천제대신장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오방대제),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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