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0일 금요일

대장경,[ 大藏經 ] 1

대장경,[ 大藏經 ] 1
불교의 경장․율장․논장을 종류별로 분류하여 집대성한 것
대장경은 인도에서 완성된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과 중국 및 여러 나라 불교학자들이 저술한 논서들을 종류별로 분류하여 총합한 것을 말한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조에서는 오대산 화장사(華藏寺)에서 대장경을 읽었다고 하였고,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조에서는 신라말기에 보요(普耀)선사가 두 차례 오월국(吳越國)에 가서 대장경을 가지고 왔다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조에 오대산 화장사(華藏寺)에서 대장경을 읽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그 주요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문왕의 아들 보천과 효명이 오대산에 들어가 각각 암자를 짓고 수행하였다. 보천은 입적할 때에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마다 국가를 위해 기도할 방법을 기록하였는데, 동대에는 원통사(圓通社), 남대에는 금강사(金剛社), 서대에는 수정사(水精社), 북대에는 백련사(白蓮社), 중대에는 화엄사(華嚴社)를 결성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살던 보천암을 화장사로 이름을 고치고 오대사(五臺社)의 본사(本寺)로 삼아 그곳에 비로자나 삼존과 대장경을 모셔두고 5명의 승려로 하여금 낮에는 대장경을 읽고 밤에는 화엄신중(華嚴神衆)을 염송하도록 하였다.

대장경과 같은 불교경전은 대부분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것으로 『삼국유사』 권3 탑상4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조에 그와 관련한 여러 기록을 전하고 있다. 이를 시대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 진흥왕 26년(565)에 진(陳)나라(557-589) 사신 유사(劉思)가 승려 명관(明觀)과 함께 불교 경전과 논서 1천 7백여 권을 가지고 왔고,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법사가 삼장(三藏) 4백여 함을 싣고 왔다. 신라말기에 보요(普耀)선사가 두 차례 오월국(908-978)에 가서 대장경을 가지고 왔으며, 경순왕 2년(928)에 묵(默)화상이 당나라에 가서 대장경을 가지고 왔다. 고려 선종 3년(1086)에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송나라로부터 천태종의 많은 책을 가지고 왔고, 고려 예종(1105-1122) 때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요본(遼本) 대장경 3부를 가지고 왔다.

이러한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조의 기록 가운데 대장경 혹은 삼장이라고 명시한 기사는 신라시대에 자장법사, 보요선사, 묵화상이 중국 대장경을 수입한 것과 고려시대에 혜조국사가 거란의 요나라에서 간행한 대장경을 들여온 것이다. 자장법사가 대장경을 가지고 왔다는 기록은 『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률(慈藏定律)조에도 보인다. 자장정률조에서는 자장법사가 신라에 아직 불경과 불상이 충분히 구비되지 못하였으므로 당나라 황제에게 대장경 1부와 불구(佛具) 등을 요청하여 가지고 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묵화상이 대장경을 가지고 왔다는 기록은 『고려사』 권1 태조 11년(928)조에 보이는데, 『고려사』에서는 승려 홍경(洪慶)이 대장경 1부를 싣고 예성강에 이르자 왕이 친히 맞이했다고 되어 있다. 묵화상과 홍경이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고려 고종 때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대장경. 경판은 국보 제32호이다. 대장경은 부처님의 설법과 규칙, 논술을 모두 모은 것을 말하며, 경판은 현재 81,258매가 남아 있다.

대장경이라는 말은 중국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이다. 인도에서는 삼장(三藏) 체계의 불교 경전이 성립되었을 뿐 대장경이라는 말은 없었다. 삼장이란 부처님의 설법을 기록한 경장(經藏)과 교단의 계율을 해설한 율장(律藏)과 후대의 학자들이 경전을 해석한 논장(論藏)을 말하는데, 이 삼장이 중국에 전래된 것은 기원전후에 인도로부터 온 전법사(傳法師)가 불교를 중국에 소개하면서부터이다. 그 후 중국의 구도승(求道僧)들이 인도에 유학하여 직접 경전을 수입하였다. 이에 삼장의 여러 경전들이 전법사와 구도승에 의해 개별적으로 수백 년에 걸쳐 중국에 전래되었다.(大藏會, 1989)

중국에 유입된 불교 경전이 점차 늘어나면서 경전의 성격을 정리할 필요성이 생겨났다. 인도로부터 무차별적으로 경전을 수입했기 때문에 중국에 수입되어 번역된 경전들이 대승의 경전인지, 아니면 소승의 경전인지를 구별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진(東晉)의 도안(道安, 312-385)이 처음으로 『종리중경목록(綜理衆經目錄)』을 만들어 당시에 유통되던 경전의 목록을 만들고 그 경전들을 간략히 소개하였다.(미즈노 고겐, 1996) 그 후 불교교단이 발전하면서 경전을 전체적으로 수집하여 정리할 필요성이 생겨났고, 양나라 무제(武帝, 재위 502-549)의 명령으로 경전을 수집하여 『화림원불교중경목록(華林園佛敎衆經目錄)』을 만들었다. 이때 수집된 경전들을 “대장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大藏會, 1989) 그리고 대장경이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은 수나라에 이르러서부터라고 한다.(李富華 외, 2003)

대장경이 처음 나무에 새겨진 것은 송나라 태종 8년(983)에 완성된 『개보칙판인성대장경(開寶勅版印成大藏經)』이다. 이 대장경은 송나라 태조(太祖, 재위 960-976) 개보(開寶) 연간(968-976)에 황제의 칙명(勅命)으로 만들기 시작하여 태종 8년(983)에 완성된 것이다. 이 당시 목판 대장경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인쇄술의 발달 덕분이었다. 8세기 이전에는 목판술이 발달하지 못하여 대부분 필사한 사경(寫經)이었다. 수천 권이나 되는 대장경을 모두 필사하여 보관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목판술의 발달로 경전들을 나무에 새겨 인쇄하게 되었고, 송나라 태조 때에 비로소 수천 권의 대장경 전체를 목판으로 제작하게 되었다. 이때 만든 대장경은 730년에 지승(智昇)이 경전 목록을 정리한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에 의거한 것으로 총 5,048권이었다.(李富華 외, 2003)

중국에서 처음 완성된 대장경은 이웃 나라에도 영향을 주어 고려와 거란에서도 대장경을 나무에 판각하였다. 먼저 판각을 시작한 것은 고려였다. 고려는 현종 1년(1010)에 거란의 침입을 받고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외적을 물리치고자 대장경 판각을 서원하였고, 거란이 물러가자 곧바로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 대장경은 현종 2년(1011)에 판각을 시작하여 현종 20년(1029)에 1차 작업이 완수되었다. 그 후 판각이 중단되었는데 그 사이 거란에서 대장경을 만들어 보내옴에 따라 그에 자극받아 문종 17년(1063)에 추가 판각을 시작하여 선종 4년(1087)에 완성하였다. 그것을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라 부른다. 『초조대장경』의 목판은 팔공산 부인사(符仁寺)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고종 19년(1232) 몽고 침입 때 모두 불타버렸다.(천혜봉, 2003) 고려 조정은 강화도로 피신하여 다시 대장경을 판각하기 시작하였다.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몽고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고종 23년(1236)에 착수하여 고종 38년(1251)에 완성하였다. 이것을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 혹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고 부른다. 이 대장경의 목판이 현재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박상국, 2003)

대장경 판각 사업은 중국 역대왕조에서 꾸준히 진행되어 북송대(960-1126)에 『개보칙판인성대장경』을 비롯하여 『숭녕만수대장(崇寧萬壽大藏)』 『비로장(毘盧藏)』이 간행되고, 남송대(1127∼1279)에 『원각장(圓覺藏)』, 『자복장(資福藏)』이 간행되었다. 그리고 원나라 시대(1271-1368)에 『적사장(磧砂藏)』, 『보녕장(普寧藏)』, 명나라 시대(1368-1644)에 『남장(南藏)』, 『북장(北藏)』, 『가흥장(嘉興藏)』, 청나라 시대(1636∼1912)에 『용장(龍藏)』이 간행되었다. 근대에는 『빈가장(頻伽藏)』이 간행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에도시대(1603-1867)에 『천해장(天海藏)』, 『황벽장(黃檗藏)』, 근대에 『축쇄대장경(縮刷大藏經)』, 『만자장경(卍字藏經)』, 『만속장경(卍續藏經)』,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이 간행되었다.(李富華 외, 2003)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983년 이전에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대장경은 모두 필사본 대장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산오만진신조에 언급된 대장경과 전후소장사리조에서 신라시대에 자장법사, 보요선사, 묵화상이 중국에서 수입했다고 한 대장경은 모두 필사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고려시대에 혜조국사가 요본(遼本) 대장경을 들여왔다고 한 것은 목판본 『거란대장경』을 중국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보인다.
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전후소장사리)
前後所將舍利
國史云 眞興王太淸三年己巳 梁使沈湖送舍利若干粒 善德王代貞觀十七年癸卯 慈藏法師所將佛頭骨佛牙佛舍利百粒 佛所著緋羅金點袈裟一領 其舍利分爲三 一分在皇龍塔 一分在太和塔 一分竝袈裟在通度寺戒壇 其餘未詳所在 壇有二級 上級之中 安石蓋如覆鑊 諺云 昔在本朝 相次有二廉使禮壇 擧石鑊而敬之 前感脩蟒在函中 後見巨蟾蹲石腹 自此不敢擧之 近有上將軍金公利生庾侍郞碩 以高廟朝受旨 指揮江東 仗節到寺 擬欲擧石瞻禮 寺僧以往事難之 二公令軍士固擧之 內有小石函 函襲之中 貯以瑠璃筒 筒中舍利只四粒 傳示瞻敬 筒有小傷裂處 於是庾公適蓄一水精函子 遂奉施兼藏焉 識之以記 移御江都四年乙未歲也 古記稱百枚分藏三處 今唯四爾 旣隱現隨人多小 不足怪也 又諺云 其皇龍寺塔災之日 石鑊之東面始有大斑 至今猶然 卽大遼應曆三年癸丑歲也 本朝光廟五載也 塔之第三災也 曹溪無衣子留詩云 聞噵皇龍災塔日 連燒一面示無間 是也 自至元甲子已來 大朝使佐本國皇華 爭來瞻禮 四方雲水 輻湊來參 或擧不擧 眞身四枚外 變身舍利 碎如砂礫 現於鑊外 而異香郁烈 彌日不歇者 比比有之 此末季一方之奇事也 唐大中五年辛未 入朝使元弘所將佛牙[今未詳所在 新羅文聖王代] 後唐同光元年癸未 本朝太祖卽位六年 入朝使尹質所將五百羅漢像 今在北崇山神光寺 大宋宣和元年己<亥>[睿廟十五年] 入貢使鄭克永李之美等所將佛牙 今內殿置奉者是也 相傳云 昔義湘法師入唐 到終南山至相寺智儼尊者處 隣有宣律師 常受天供 每齋時天廚送食 一日律師請湘公齋 湘至坐定旣久 天供過時不至 湘乃空鉢而歸 天使乃至 律師問 今日何故遲 天使曰 滿洞有神兵遮擁 不能得入 於是 律師知湘公有神衛 乃服其道勝 仍留其供具 翌日又邀儼湘二師齋 具陳其由 湘公從容謂宣曰 師旣被天帝所敬 嘗聞帝釋宮有佛四十齒之一牙 爲我等輩 請下人間 爲福如何 律師後與天使傳其意於上帝 帝限七日送與湘公 致敬訖 邀安大內 後至大宋徽宗朝 崇奉左道 時國人傳圖讖曰 金人敗國 黃巾之徒 諷日官奏曰 金人者 佛敎之謂也 將不利於國家 議將破滅釋氏 坑諸沙門 焚燒經典 而別造小舡 載佛牙泛於大海 任隨緣流泊 于時 適有本朝使者 至宋聞其事 以天花茸五十領紵布三百疋 行賂於押舡內史 密授佛牙 但流空舡 使臣等旣得佛牙來奏 於是睿宗大喜 奉安于十員殿左掖小殿 常鑰匙殿門 施香燈于外 每親幸日 開殿瞻敬 至壬辰歲移御次 內官悤遽中忘不收檢 至丙申四月 御願堂神孝寺釋蘊光 請致敬佛牙 聞于上 勑令內臣遍檢宮中 無得也 時 栢臺侍御史崔冲命薛伸 急徵于諸謁者房 皆未知所措 內臣金承老奏曰 壬辰年移御時紫門日記推看 從之 記云 入內侍大府卿李白全受佛牙函云 召李詰之 對曰請歸家更尋私記 到家檢看 得左番謁者金瑞龍佛牙函准受記 來呈 召問瑞龍 無辭以對 又以金承老所奏云 壬辰至今丙申五年間 御佛堂及景靈殿上守等 囚禁問當 依違未決 隔三日 夜中瑞龍家園墻裏 有投擲物聲 以火檢看 乃佛牙函也 函本內一重沈香合 次重純金合 次外重白銀函 次外重瑠璃函 次外重螺鈿函 各幅子如之 今但瑠璃函爾 喜得之 入達于內 有司議 金瑞龍及兩殿上守皆誅 晉陽府奏云 因佛事 不合多傷人 皆免之 更勑十員殿 中庭特造佛牙殿安之 令將士守之 擇吉日 請神孝寺上房蘊光 領徒三十人 入內設齋敬之 其日入直承宣崔弘上將軍崔公衍 李令長 內侍茶房等 侍立于殿庭 依次頂戴敬之 佛牙區穴間 舍利不知數 晉陽府以白銀合貯而安之 時 主上謂臣下曰 朕自亡佛牙已來 自生四疑 一疑 天宮七日限滿而上天矣 二疑 國亂如此 牙旣神物 且移有緣無事之邦矣 三疑 貪財小人 盜取函幅 棄之溝壑矣 四疑 盜取珍利 而無計自露 匿藏家中矣 今第四疑當之矣 乃放聲大哭 滿庭皆洒涕獻壽 至有煉頂燒臂者 不可勝計 得此實錄於當時內殿焚修前祗林寺大禪師覺猷 言親所眼見 使予錄之 又至庚午出都之亂 顚沛之甚 過於壬辰 十員殿監主禪師心鑑 亡身佩持 獲免於賊難 達於大內 大賞其功 移授名刹 今住氷山寺 是亦親聞於彼 眞興王代天嘉六年乙酉 陳使劉思與釋明觀 載送佛經論一千七百餘卷 貞觀十七年 慈藏法師載三藏四百餘函來 安于通度寺 興德王代太和元年丁未 入學僧高麗釋丘德 齎佛經若干函來 王與諸寺僧徒出迎于興輪寺前路 大中五年 入朝使元弘 齎佛經若干軸來 羅末普耀禪師再至吳越 載大藏經來 卽海龍王寺開山祖也 大宋元祐甲戌 有人眞讚云 偉哉初祖 巍乎眞容 再至吳越 大藏成功 賜御普耀 鳳詔四封 若問其德 白月淸風 又大定中 漢南管記彭祖逖留詩云 水雲蘭若住空王 况是神龍穩一場 畢竟名藍誰得似 初傳像敎自南方 有跋云 昔普耀禪師始求大藏於南越 洎旋返次 海風忽起 扁舟出沒於波間 師卽言曰 意者 神龍欲留經耶 遂呪願乃誠 兼奉龍歸焉 於是風靜波息 旣得還國 遍賞山川 求可以安邀處 至此山 忽見瑞雲起於山上 乃與高<弟>弘慶經營蓮社 然則 像敎之東漸 實始乎此 漢南管記彭祖逖題 寺有龍王堂 頗多靈異 乃當時隨經而來止者也 至今猶存 又天成三年戊子 默和尙入唐 亦載大藏經來 本朝睿廟時 慧照國師奉詔西學 市遼本大藏三部而來 一本今在定惠寺[海印寺有一本 許參政宅有一本] 大安二年 本朝宣宗代 祐世僧統義天入宋 多將天台敎觀而來 此外方冊所不載 高僧信士往來所齎 不可詳記 大敎東漸 洋洋乎慶矣哉 讚曰 華月夷風尙隔烟 鹿園鶴樹二千年 流傳海外 眞堪賀 東震西乾共一天 按此錄義湘傳云 永徽初 入唐謁智儼 然據浮石本碑 湘武德八年生 丱歲出家 永徽元年庚戌 與元曉同伴欲西入 至高麗有難而廻 至龍朔元年辛酉入唐 就學於智儼 總章元年 儼遷化 咸<亨>二年 湘來還新羅 長安二年壬寅示滅 年七十八 則疑與儼公齋於宣律師處 請天宮佛牙 在辛酉至戊辰七八年間也 本朝高廟入江都壬辰年 疑天宮七日限滿者 誤矣 忉利天一日夜當人間一百歲 且從湘公初入唐辛酉 計至高廟壬辰 六百九十三歲也 至庚子年 始滿七百年而七日限已滿矣 至出都至元七年庚午 則七百三十年 若如天言而七日後還天宮 則禪師心鑑出都時 佩持出獻者 恐非眞佛牙也 於是年春出都前 於大內集諸宗名德 乞佛牙舍利 精勤雖切 而不得一枚 則七日限滿上天者 幾矣 二十一年甲申 修補國淸寺金塔 國主與莊穆王后 幸妙覺寺 集衆慶讚訖 右佛牙與洛山水精念珠如意珠 君臣與大衆 皆瞻奉頂戴 後幷納金塔內 予亦預斯會 而親見所謂佛牙者 長三寸許 而無舍利焉 無極記

전후소장사리
『국사(國史)』에 이르길,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때인 태청(太淸, 547-549) 3년 기사(己巳, 549)에 양(梁)나라가 심호(沈湖)를 시켜 불사리(佛舍利) 몇 낱을 보내왔고, 선덕왕(善德王, 재위 632-647) 때인 정관(貞觀, 627-649) 17년 계묘(癸卯, 643)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가지고 온 부처님의 두골(頭骨), 어금니, 사리 백 낱과 부처님이 입던 붉은 깁에 금점이 있는 가사(袈裟) 한 벌이 있었는데, 그 사리는 셋으로 나누어 일부분은 황룡사탑(皇龍寺塔)에 있고, 일부분은 태화사탑(太和寺塔)에, 일부분은 가사와 함께 통도사(通度寺) 계단(戒壇)에 있으며, 그 나머지는 어디 있는지 자세하지 않다.
(통도사) 계단에는 단이 두층으로 되었는데, 위층 가운데에는 솥을 엎어놓은 것과 같은 돌뚜껑을 안치하였다. 속설(俗說)에는 옛날 본조(本朝, 고려)에서 연달아 두 안렴사[廉使]가 계단에 예(禮)를 하고 돌뚜껑을 들어 경배하였다. 앞의 안렴사는 긴 구렁이가 석함 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뒤의 안렴사는 큰 두꺼비가 돌 속에 쪼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후로는 감히 그 돌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근래에 상장군(上將軍) 김이생(金利生)과 시랑(侍郞) 유석(庾碩)이 고종(高宗, 재위 1213-1259)때 왕의 명을 받아 낙동강 동쪽을 지휘하였을 때 부절을 가지고 절에 이르러 돌뚜껑을 들어 예하고자 하니 절의 승려가 그 전의 일로 난처하게 여겼다.
두 사람이 군사를 시켜 굳이 들게 하였더니 그 안에 작은 석함이 있고 석함 속에 유리통이 들어 있는데, 통 속에 사리가 다만 네 낱이 들어 있었다. 서로 돌려보며 예경하였는데 통이 조금 상하여 금이 간 곳이 있었다. 마침 유공(庾公)이 수정함 하나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시주하여 그곳에 안치해 두게 하였다. 그 사실을 기록하였으니 (그 해는) 강도(江都, 강화도)로 서울을 옮긴지 4년째인 을미년(乙未年, 1235)이었다. 고기(古記)에는 사리 백 낱을 세 곳에 나누어 안치하였다고 하였는데, 이제 겨우 네 낱뿐이라고 하였다. 이미 (사리가) 사라지고 나타남이 사람에 따라 많기도 하고 저기도 하니, 괴이하게 여길 것은 없다. 또 민간에서는 황룡사의 탑이 불에 타던 날에 돌뚜껑 동쪽 면에 처음 큰 반점이 생겼는데 지금까지 그대로 있다고 한다. (그때는) 곧 대요(大遼)의 응력(應曆, 951-969) 3년 계축(癸丑, 953)이요, 본조(고려) 광종(光宗, 재위 949-975) 5년이니, 탑이 세 번째 화재를 당하던 때였다. 조계(曹溪, 조계산) 무의자(無衣子)가 남긴 시에 이르길, “듣건대 황룡사의 탑이 불타던 날에, 연이어 (통도사 돌뚜껑의) 일면도 탔으니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보인 것이다.”라 하였는데 이것이다. 지원(至元, 1264-1294) 갑자(甲子, 1264) 이래로 대조(大朝, 원)의 사신과 본국의 사신이 다투어 와서 예배하고 사방의 운수(雲水, 행각승)들도 몰려와서 참배하였는데, 혹은 (그 석함을) 들기도 하고 들지 않기도 하였다.
진신(眞身) 사리 네 낱 이외에 변신(變身) 사리는 모래와 같이 부서져 돌뚜껑 밖에 나타났는데, 이상한 향기가 그윽하게 풍기어 여러 날 동안 없어지지 않는 일이 종종 있었으니 이는 말세에 한 가지 기이한 일이었다. 당(唐) 대중(大中, 847-859) 5년 신미(辛未, 851)에 입조사(入朝使) 원홍(元弘)이 가지고 온 부처님의 어금니[지금은 있는 곳을 알 수 없으나 신라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 때 일이다.]와 후당(後唐) 동광(同光, 923-926) 원년 계미(癸未, 923) (곧) 본조(고려) 태조(太祖, 재위 918-943) 즉위 6년에 입조사(入朝使) 윤질(尹質)이 가지고 온 5백 나한상(羅漢像)은 지금 북숭산(北崇山) 신광사(神光寺)에 있고, 대송(大宋) 선화(宣和, 1119-1125) 원년 기해(己亥, 1119)[예종(睿宗, 재위 1105-1122) 15년]에 입공사(入貢使) 정극영(鄭克永), 이지미(李之美) 등이 가지고 온 부처님 어금니는 지금 내전에 모셔둔 것이 그것이다. 전하는 말에 이르길, 옛날 의상법사(義湘法師)가 당나라에 들어가서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 지엄존자(智儼尊者)에게 이르니, 이웃에 선율사(宣律師, 도선율사)가 있어 항상 하늘로부터 공양을 받고, 재(齋)를 올릴 때마다 하늘의 주방에서 음식을 보내왔다. 하루는 선율사가 의상법사를 재에 청하여, 의상이 와서 자리 잡고 앉은 지 오래되었으나 하늘의 공양은 시간이 지나도 이르지 않았다.
의상이 빈 바릿대로 돌아가자 천사(天使)가 그제야 왔다. 율사가 묻기를, “오늘은 어째서 늦었는가?”하니, 천사가 말하기를, “온 골짜기에 신병(神兵)이 가로막고 있어 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율사는 의상에게 신의 호위가 있는 것을 알고 그 도(道)가 자기보다 뛰어남에 탄복하여 그 공양물을 그대로 두었다가 이튿날 또 지엄(智儼)과 의상 두 법사를 재에 청하여 그 사유를 자세히 말하였다. 의상이 조용히 선율사에게 말하기를, “스님은 이미 천제(天帝)의 존경을 받고 계시니 일찍이 듣건대 제석궁에는 부처님의 40개 치아 가운데 한 어금니가 있다고 하니, 우리들을 위해 청하여 인간에 내려 보내어 복을 삼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하였다.
율사가 후에 천사와 함께 그 뜻을 상제(上帝)에게 전달하니, 상제가 7일을 기한으로 의상에게 보내주었다. (의상이) 예경을 마친 후 맞이하여 대궐에 모셨다. 그 후 대송(大宋) 휘종(徽宗, 재위 1100-1125) 때에 이르러 좌도(左道, 도교)를 받드니 그때 나라 사람들이 도참(圖讖)을 전파하여 말하기를, “금인(金人)이 나라를 멸망시킨다.”고 하였다. 황건(黃巾, 도교)의 무리가 일관(日官)을 움직여 아뢰기를, “금인(金人)은 불교를 이름이니 장차 국가에 이롭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의논하여 장차 불교를 없애기 위해, 모든 승려를 묻어 죽이고, 경전을 불사르고, 따로 조그마한 배를 만들어 부처님의 어금니를 실어 바다에 띄워 어디든지 인연을 따라 흘러가게 하려고 하였다. 그때 마침 본조(고려)의 사신이 송(宋)에 가 있다가 그 사실을 듣고 천화용(天花茸) 50벌과 저포(苧布) 300필로써 배를 호송하는 관원에게 뇌물을 주고 몰래 부처님 어금니를 받고 빈 배만 띄우게 하였다. 사신들이 부처님 어금니를 얻어 가지고 돌아와 (임금께) 아뢰었다. 이에 예종(睿宗)이 크게 기뻐하여 십원전(十員殿) 왼쪽 소전(小殿)에 모시고, 항상 전각문을 자물쇠로 채워두고 밖에는 향을 피우고 등불을 밝혔다. 매번 친히 행차하는 날에는 전각문을 열고 예배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232)에 서울을 옮길 때에 내관이 바쁘고 당황하여 (부처님 어금니를) 잊고 챙기지 못하였다.
병신년(丙申年, 1236) 4월에 이르러 왕의 원당(願堂)인 신효사(神孝寺)의 승려 온광(蘊光)이 부처님 어금니에 예배하기를 청하여 왕에게 아뢰니, 왕은 내신을 시켜 궁중을 두루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이때 백대(栢臺, 어사대) 시어사(侍御史) 최충(崔冲)이 설신(薛伸)에게 명하여 급히 여러 알자방(謁者房)을 불러 찾아보았으나 모두 어디 두었는지 몰랐다. 내신 김승로(金承老)가 아뢰기를, “임진년(1232) 서울을 옮길 때의 자문일기(紫門日記, 궁중일기)를 찾아보십시오.”라고 하여 그 말대로 하였더니, 일기에는 입내시(入內侍) 대부경(大府卿) 이백전(李白全)이 부처님 어금니가 든 함을 받았다고 쓰여 있다. 이백전을 불러 문책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집으로 돌아가 다시 저의 일기를 찾아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집에 와서 살펴보고 좌번(左番) 알자(謁者) 김서룡(金瑞龍)이 부처님의 어금니가 든 함을 받았다는 기록을 가져다 바쳤다. 김서룡을 불러 물으니 대답하지 못하였다.
김승로(金承老)가 아뢰는대로 임진년(1232)으로부터 지금 병신년(1236)까지 5년 동안의 어불당(御佛堂)과 경령전(景靈殿)의 상수(上守, 지키는 자)들을 잡아 가두고 심문하였으나 이렇다 할 결말이 나지 않았다. 3일이 지난 밤중에 김서룡의 집 담 안으로 무슨 물건을 던지는 소리가 나서 불을 켜서 살펴보니 곧 부처님 어금니가 든 함이었다. 함은 본래 안쪽 한 겹은 침향합(沈香合)이고, 다음 바깥 겹은 순금합(純金合)이고, 다음 바깥 겹은 백은함(白銀函), 그 다음 바깥 겹은 유리함(瑠璃函), 또 그 다음 바깥 겹은 나전함(螺鈿函)으로써 각 폭은 서로 맞게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다만 유리함뿐이었다. 함을 얻은 것을 기뻐하여 대궐로 들어가 아뢰었다.
유사(有司)가 의논하여 김서룡과 양전(兩殿)의 상수들을 모두 죽이고자 하니 진양부(晉陽府)가 아뢰기를, “불사(佛事)로 인하여 사람을 많이 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하므로 모두 놓아 주었다. 다시 명하여 십원전(十員殿) 안뜰에 특별히 불아전(佛牙殿)을 만들어 봉안하고 장사(將士)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또 길일을 택하여 신효사(神孝寺) 상방(上房)의 온광(蘊光)을 청하여 무리 30명을 거느리고 궐 내로 들어와 재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게 하였다. 그날 입직(入直)한 승선(承宣) 최홍(崔弘)과 상장군(上將軍) 최공연(崔公衍), 이영장(李令長)과 내시(內侍), 다방(茶房) 등이 불아전 뜰에서 왕을 모시고 서서 차례로 사리를 머리에 이고 예를 올렸는데, 부처의 어금니가 든 함의 틈 사이에 있는 사리는 그 수를 알 수 없었으나, 진양부가 백은합에 담아 모셨다. 그때 임금이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가 부처님의 어금니를 잃은 후로 스스로 네 가지 의심이 생겼다.
첫 번째는 천궁(天宮)의 7일 기한이 차서 하늘로 올라간 것이 아닐까 의심하였고, 두 번째는 나라가 이처럼 어지러우니 어금니는 신령스런 물건이므로 잠깐 인연이 있는 평온한 나라로 옮겨간 것이 아닐까 의심하였고, 세 번째는 재물를 탐내는 소인이 그 함만 훔치고 어금니는 구렁에 버렸을까 의심하였고, 네 번째는 도적이 사리를 훔쳐갔으나 밖에 드러내놓을 수 없어서 집 안에 감추어 둔 것이 아닐까 하였더니 이제 네 번째의 의심이 맞았다.”고 하며 소리를 내어 크게 우니, 온 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만수를 빌며 연정소비(煉頂燒臂, 촛불로 이마와 팔을 태우는 불교 기도 의식)하는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 실록(實錄)은 당시 내전 분수승이었던 전 기림사(祇林寺)의 대선사(大禪師) 각유(覺猷)에게서 얻은 것인데, (그때) 친히 본 바라 하여 나에게 기록하게 하였다. 또 경오년(庚午年, 1270)의 환도할 때의 난리는 낭패가 심함이 임진년(1232)보다도 더하였는데, 십원전의 감주(監主)였던 선사 심감(心鑑)은 위험을 무릅쓰고 (부처님 어금니가 든 함을) 가지고 와 도적의 환란에서 화를 면하게 되었다. 대궐에 알려져 그 공을 크게 포상하여 이름난 절로 옮겨 주었으니 지금 빙산사(氷山寺)에 주석하고 있다. 이 역시 그에게 친히 들은 바이다. 진흥왕(眞興王) 때인 천가(天嘉, 560-566) 6년 을유(乙酉, 565)에 진(陳)나라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이 불교 경론(經論) 1천 7백여 권을 실어왔다.
정관(貞觀) 17년(643)에는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삼장(三藏) 400여 함을 실어 와서 통도사(通度寺)에 안치하였다.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 때인 태화(太和, 827-835) 원년 정미(丁未, 827)에는 입학승(入學僧)인 고구려의 승려 구덕(丘德)이 불경 몇 상자를 가지고 왔으므로 왕이 여러 절의 승려들과 함께 흥륜사(興輪寺)의 앞길에서 맞이하였다.
대중(大中) 5년(851)에는 입조사(入朝使) 원홍이 불경 몇 축을 가지고 왔으며, 신라 말기에는 보요선사(普耀禪師)가 두 번이나 오월(吳越)에 가서 대장경(大藏經)을 싣고 오니 곧 해룡왕사(海龍王寺)의 개산조(開山祖)였다. 대송(大宋) 원우(元祐, 1086-1094) 갑술(甲戌, 1094)에 어떤 사람이 (선사의) 진영을 찬(讚)하길, 위대하셔라 시조스님. 빼어나셨구나 그 모습. 두 번이나 오월에서 대장경을 가져오셨네. 보요란 작호 주시고, 조서를 내려 네 번이나 책봉했구나. 만일 그의 덕을 말하라면 명월과 청풍이라 하겠네. 또 대정(大定) 연간(1161-1189)에 한남(漢南)의 관기(管記) 팽조적(彭祖逖)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수운(水雲)의 고요한 절간은 부처님 계신 곳, 더욱이 신룡(神龍)이 한 지경을 보호하네, 마침내 이 명찰을 뉘라서 이어받을까, 처음 불교는 남방에서 왔도다.
발문(跋文)은 다음과 같다.“옛날에 보요선사(普耀禪師)가 처음 남월(南越)에서 대장경을 구해 돌아올 때 해풍이 갑자기 일어 작은 배가 물결 사이에 출몰하였다. 보요선사가 말하기를, ‘아마 신룡이 대장경을 머물게 하려는 것인가.’하고 드디어 주문으로 정성껏 축원하여 용까지 함께 받들고 돌아오니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가라앉았다. 본국에 돌아오자 산천을 두루 살펴보며 안치할 만한 곳을 구하다가 이 산에 이르러 홀연히 상서로운 구름이 산 위에서 일어남을 보고 이에 수제자 홍경(弘慶)과 함께 절을 세우니, 불교의 동방전래는 실로 이때 시작되었다. 한남의 관기 팽조적이 제(題)한다.”이 절(해룡왕사)에는 용왕당(龍王堂)이 있는데, 꽤 신령하고 이상한 일이 많았으니 그때 대장경을 따라와 머물렀던 것으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천성(天成, 926-930) 3년 무자(戊子, 928)에 묵화상(默和尙)이 당(唐)에 건너가 역시 대장경을 싣고 왔으며, 본조(고려) 예종 때(1105-1122)에는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조서를 받들고 서역으로 유학가서 요나라 판본인 대장경 3부를 사가지고 왔는데, 그 한 본은 지금 정혜사(定惠寺)에 있다.[해인사(海印寺)에 한 본이 있고 허참정(許參政)댁에 한 본이 있다.] 대안(大安, 1085-1094) 2년(1086) 본조(고려) 선종(宣宗, 재위 1083-1094) 때에 우세승통(祐世僧統) 의천(義天)이 송(宋)에 들어가 천태 교관(敎觀)을 많이 가지고 왔으며, 이밖에 서책에 실리지 않은 고승 신사(信士)들이 왕래하여 가지고 온 것은 자세히 적을 수 없다.
불교의 동방전래는 한 없이 넓었으니 경사롭다. 찬한다.“중국과 동방이 아득히 떨어져 있고, 녹원(鹿園)과 학수(鶴樹)로부터 2천 년이나 되었네. 해외로 전파되니 참으로 기쁘구나. 동국[東辰]과 서방[西乾]이 한 세상이 되었구나.”이 기록의 의상전을 살펴보면, 영휘(永徽, 650-655) 초년에 당(唐)에 들어가 지엄법사를 찾아보았다고 하나, 부석사의 「본비(本碑)」에 의하면, 의상은 무덕(武德, 618-626) 8년(625)에 출생하여 어린 시절에 출가하고 영휘(永徽) 원년 경술(庚戌, 650)에 원효(元曉)와 함께 당(唐)에 들어가려고 고구려에 이르렀다가 어려움이 있으므로 돌아왔다. 용삭(龍朔, 661-663) 원년 신유(辛酉, 661)에 당(唐)에 들어가 지엄법사에게 나가아 배웠다.
총장(總章, 668-670) 원년(668)에 지엄법사가 세상을 떠나자 함형(咸亨, 670-674) 2년(671)에 의상이 신라로 돌아와서 장안(長安, 701-705) 2년 임인(壬寅, 702)에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 78세라고 하였다. 그러면 지엄과 함께 선율사(도선율사)가 있는 곳에서 재를 올리고 천궁의 부처님 어금니를 청하던 것은 신유(661)에서 무진(戊辰, 668)에 이르는 7,8년 사이가 될 것이다. 본조(고려)의 고종이 강화로 들어가던 임진년(1232)에 천궁의 7일 기한이 찼다고 의심한 것은 잘못이다. 도리천(忉利天)의 하루 밤낮은 인간의 100년에 해당하는데, 의상이 처음 당(唐)에 들어가던 신유(661)로부터 고종 임진(1232)까지 계산하면 693년이고, 경자(1240)에 이르러야 비로소 700년이 되며 7일 기한이 찬다.
강화도로부터 나오던 지원(至元) 7년 경오(1270)까지는 730년이니, 만약 천제의 말과 같이 7일 후에 천궁으로 돌아갔다고 하면 선사 심감(心鑑)이 강화도로부터 나올 때 가지고 와서 바친 것은 아마 부처님 어금니가 아닐 것이다. 이 해 봄 강화도로부터 나오기 전에 (왕은) 대궐에서 모든 종파의 고승을 모아 부처님 어금니와 사리를 정성껏 빌었지만 한 낱도 얻지 못하였으니, 7일 기한이 차서 하늘로 올라간 것도 그럴 듯하다. 지원 21년 갑신(甲申, 1284)에 국청사(國淸寺) 금탑(金塔)을 보수하였다. 왕(충렬왕, 재위 1275-1309)은 장목왕후(莊穆王后)와 같이 묘각사(妙覺寺)에 행차하여 대중을 모아 경찬법회를 하였다. 그런 뒤 앞서 이야기한 부처님 어금니와 낙산사의 수정염주, 여의주를 군신과 대중이 모두 떠받들어 경배한 후 함께 금탑 안에 넣어 두었다. 나 또한 이 모임에 참례하여 이른바 부처님 어금니라는 것을 직접 보았는데, 그 길이가 3촌(寸)쯤 되고 사리는 없었다. 무극(無極)이 기록한다.

초조본 대반야바라밀다경 권162, 170, 463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인 ≪대반야바라밀다경≫. 국보 제284호.


[삼국유사, 권3 탑상4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
<按>山中古傳 此山之署名 眞聖住處者 始自慈藏法師 初法師欲見中國五臺山文殊眞身 以善德王代 貞觀十年丙申[唐僧傳云十二年 今從三國本史]入唐 初至中國太和池邊 石文殊處 虔祈七日 忽夢大聖授四句偈 覺而記憶 然皆梵語 罔然不解 明旦忽有一僧 將緋羅金點袈<裟>一領 佛鉢一具 佛頭骨一片 到于師邊 問何以無聊 師答 以夢所受四句偈 梵音不解爲辭 僧譯之云 呵囉婆佐曩 是曰了知一切法 達


哆佉嘢 云自性無所有 曩伽呬伽曩 云如是解法性 達


盧舍那 云卽見盧舍那 仍以所將袈裟等 付而囑云 此是本師釋迦尊之道具也 汝善護持 又曰 汝本國艮方溟州界有五臺山 一萬文殊常住在彼 汝往見之 言已不現 遍尋靈迹 將欲東還 太和池龍現身請齋 供養七日 乃告云 昔之傳偈老僧 是眞文殊也 亦有叮囑創寺立塔之事 具載別傳 師以貞觀十七年 來到此山 欲覩眞身 三日晦陰 不果而還 復住元寧寺乃見 文殊云 至葛蟠處 今淨嵓寺是[亦載別傳] 後有頭陁信義 乃梵日之門人也 來尋藏師憩息之地 創庵而居 信義旣卒 庵亦久廢 有水多寺長老有緣 重創而居 今月精寺是也 藏師之返 新羅 淨神大王太子 寶川孝明二昆弟[按國史 新羅無淨神寶川孝明三父子明文 然此記下文云 神龍元年開土立寺 則神龍乃聖德王卽位四年乙巳也 王名興光 本名隆基 神文之第二子也 聖德之兄孝照名理恭 一作洪 亦神文之子 神文政明字日照 則淨神恐政明神文之訛也 孝明乃孝照一作昭之訛也 記云 孝明卽位 而神龍年開土立寺云者 亦不細詳言之爾 神龍年立寺者乃聖德王也] 到河西府[亦今溟州及有河西郡是也 一作河曲縣 今蔚州非是也] 世獻角干之家留一宿 翌日過大嶺 各領千徒 到省烏坪 遊覽累日 忽一夕昆弟二人 密約方外之志 不令人知 逃隱入五臺山[古記云 太和元年戊申八月初 王隱山中 恐此文大誤 <按>孝照一作昭 以天授三年壬辰卽位 時年十六 長安二年壬寅崩 壽二十六 聖德以是年卽位 年二十二 若曰太和元年戊申 則先於孝照卽位<壬>辰 已過四十五歲 乃太宗文武王之世也 以此知此文爲誤 故不取之] 侍衛不知所歸 於是還國 二太子到山中 靑蓮忽開地上 兄太子結庵而止住 是<曰>寶川庵 向東北行六百餘步 北臺南麓亦有靑蓮開處 弟太子孝明又結庵而止 各懃修業 一日同上五峰瞻禮次 東臺滿月山 有一萬觀音眞身現在 南臺麒麟山 八大菩薩爲首一萬地藏 西臺長嶺山 無量壽如來爲首一萬大勢至 北臺象王山 釋迦如來爲首五百大阿羅漢 中臺風盧山亦名地盧山 毗盧遮那爲首一萬文殊 如是五萬眞身一一瞻禮 每日寅朝 文殊大聖到眞如院 今上院 變現三十六種形 或時現佛面形 或作寶珠形 或作佛眼形 或作佛手形 或作寶塔形 或萬佛頭形 或作萬燈形 或作金<橋>形 或作金鼓形 或作金鐘形 或作神通形 或作金樓形 或作金輪形 或作金剛<杵>形 或作金甕形 或作金鈿形 或五色光明形 或五色圓光形 或吉祥草形 或靑蓮花形 或作金田形 或作銀田形 或作佛足形 或作雷電形 或(如)來湧出形 或地神湧出形 或作金鳳形 或作金烏形 或馬産師子形 或雞産鳳形 或作靑龍形 或作白象形 或作鵲鳥形 或牛産師子形 或作遊猪形 或作靑蛇形 二公每汲洞中水 煎茶獻供 至夜各庵修道 淨神王之弟與王爭位 國人廢之 遣將軍四人到山迎之 先到孝明庵前呼萬歲 時有五色雲 七日垂覆 國人尋雲而畢至 排列鹵簿 將邀兩太子而歸 寶川哭泣以辭 乃奉孝明歸卽位 理國有年[記云 在位二十餘年 盖崩年壽二十六之訛也 在位但十年爾 又神文之弟爭位事國史無文 未詳] 以神龍元年[乃唐中宗復位之年 聖德王卽位四年也]乙巳三月初四日始改創眞如院 大王親率百寮到山 營搆殿堂 幷塑泥像文殊大聖安于堂中 以知識靈卞等五員 長轉華嚴經 仍結爲華嚴社 長年供費 每歲春秋 各給近山州縣倉租一百石 淨油一石 以爲恒規 自院西行六千步 至牟尼岾古伊峴外 柴地十五結 栗枝六結 坐位二結 創置莊舍焉 寶川常汲服其靈洞之水 故晩年肉身飛空 到流沙江外 蔚珍國掌天窟停止 誦隨求陁羅尼 日夕爲課 窟神現身白云 我爲窟神已二千年 今日始聞隨求眞詮 請受菩薩戒 旣受已 翌日窟亦無形 寶川驚異 留二十日乃還五臺山神聖窟 又修眞五十年 忉利天神三時聽法 淨居天衆烹茶供獻 四十聖騰空十尺 常時護衛 所持錫杖 一日三時作聲 遶房三匝 用此爲鐘磬 隨時修業 文殊或灌水寶川頂 爲授成道記莂 川將圓寂之日 留記後來山中所行輔益邦家之事云 此山乃白頭山之大脈 各臺眞身常住之地 靑在東臺北角下 北臺南麓之末 宜置觀音房 安圓像觀音 及靑地畫一萬觀音像 福田五員 晝讀八卷金經仁王般若千手呪 夜念觀音禮懺 稱名圓通社 赤任南臺南面 置地藏房 安圓像地藏 及赤地畫八大菩薩爲首一萬地藏像 福田五員 晝讀地藏經金剛般若 夜(占)察禮懺 稱金剛社 <白>方西臺南面 置彌陁房 安圓像無量壽 <及>白地畫無量壽如來爲首一萬大勢至 福田五員 晝讀八卷法華 夜念彌陁禮懺 稱水精社 黑地北臺南面 置羅漢堂 安圓像釋迦 及黑地畫釋迦如來爲首五百羅漢 福田五員 晝讀佛報恩經涅槃經 夜念涅槃禮懺 稱白蓮社 黃處中臺<眞>(如)院中 安泥像文殊不動 後壁安黃地畫毗盧遮那爲首三十六化形 福田五員 晝讀華嚴經六百般若 夜念文殊禮懺 稱華嚴社 寶川庵改創華藏寺 安圓像毗盧遮那三尊及大藏經 福田五員 長<閱>藏經 夜念華嚴神衆 每年設華嚴會一百日 稱名法輪社 以此華藏寺爲五臺社之本寺 堅固護持 命淨行福田 鎭長香火 則國王千秋 人民安泰 文<武>和平 百穀豊穰矣 又加排下院文殊岬寺爲社之都會 福田七員 晝夜常行華嚴神衆禮懺 上件三十七員齋料衣費 以河西府道內八州之稅 充爲四事之資 代代君王 不忘遵行幸矣

오대산의 5만 진신(眞身)
산 중의 고전(古傳)을 살펴보면, 이 산을 참다운 성인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자장법사(慈藏法師)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 법사가 중국 오대산(五臺山)의 문수보살 진신(眞身)을 뵙고자 하여 선덕왕(善德王, 재위 632-647) 때인 정관 10년 병신(636)에[『당승전(唐僧傳)』에는 12년(638)이라고 했으나 여기서는 삼국본사(三國本史)를 따른다.] 당(唐)에 들어갔다. 먼저 중국 태화지(太和池)가의 문수보살 석상이 있는 곳에 이르러 7일 동안 정성스럽게 기도하였더니, 꿈에서 홀연히 대성(大聖)이 네 구절의 게(偈)를 주었다. 꿈을 깨니 기억은 하겠으나 모두 범어(梵語)라 망연하여 이해하지 못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갑자기 한 승려가 붉은 비단에 금점(金點)이 찍힌 가사(袈裟) 한 벌과 부처의 바리때 한 개, 부처의 머리뼈 한 조각을 가지고 법사의 곁에 와서는 어찌하여 근심하는지를 물었다. 법사가 답하기를, “꿈에 받은 네 구절의 게(偈)가 범어라 이해할 수 없어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승려가 그것을 풀이하여 말하기를, “‘가라파좌낭(呵囉婆佐曩)’은 일체의 법을 깨달았다는 말이요, ‘달예치구야(達


哆佉嘢)’는 자성(自性)은 정해진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낭가사가낭(曩伽呬伽曩)’은 이와 같이 법성(法性)을 이해한다는 말이고, ‘달예노사나(達


盧舍那)’는 곧 노사나불을 뵌다는 말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가지고 온 가사 등을 맡기면서 부탁하기를, “이것들은 본사(本師)이신 석가세존의 도구인데, 그대가 잘 간직하시오.”라고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그대의 본국(本國) 동북방 명주(溟州) 내에 오대산이 있는데, 1만의 문수보살께서 항상 거기에 머무르고 계시니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시오.”라고 하고는 곧 사라졌다. (법사는) 영험한 유적들을 두루 찾아본 뒤 신라로 돌아오려 하였는데, 태화지의 용이 나타나 재(齋) 지내주기를 청하므로 7일 동안 공양하였다. 이에 (용이) 고하여 말하기를, “예전에 게(偈)를 풀이해 준 노승이 바로 진짜 문수보살이셨습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절을 짓고 탑을 세우는 것을 간곡히 부탁한 일은 별전(別傳, 『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률조를 가리킴)에 자세히 실려 있다. 법사는 정관 17년(643) 이 산(오대산)에 이르러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뵈려고 하였으나 3일 동안 날씨가 어두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가, 다시 원령사(元寧寺)에 살면서 그때서야 비로소 (문수보살을) 뵈었다.
문수보살이 이르기를, “칡덩굴이 있는 곳으로 가라.”고 하였으니, 지금의 정암사가 이곳이다.[역시 별전(『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률)에 실려 있다.] 후에 두타(頭陁) 신의(信義)는 범일(梵日)의 문인이었는데, 와서 자장법사가 쉬었던 자리를 찾아 암자를 짓고 거처하였다. 신의가 죽은 뒤 암자 역시 오래도록 폐하였다가 수다사(水多寺)의 장로인 유연(有緣)이 다시 짓고 거처하였는데, 지금의 월정사(月精寺)가 이것이다. 자장법사가 신라에 돌아왔을 때 정신대왕(淨神大王)의 태자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형제가[『국사(國史)』를 살펴보면 신라에는 정신․보천․효명 세 부자에 대한 글이 없다. 그러나 이 기록의 다음 글에서는 신룡(神龍) 원년(705)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하였는데, 신룡은 곧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즉위한지 4년(705)인 을사(乙巳)이다.
왕의 이름은 흥광(興光)이고 본명은 융기(隆基)이며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의 둘째 아들이다. 성덕왕의 형인 효조왕(孝照王, 재위 692-702)의 이름은 이공(理恭), 또는 이홍(理洪)이라고도 하는데, 역시 신문왕의 아들이다. 신문왕 정명(政明)의 자(字)는 일조(日照)이니 곧 “정신”은 아마도 신문왕 “정명”의 와전인 듯하다. “효명”은 곧 “효조” 또는 “효소(孝昭)”의 와전이다. 기록에서 효명이 즉위하였다고는 하였으나, 신룡 연간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한 것은 또한 자세한 말이 아니니, 신룡 연간에 절을 세운 사람은 성덕왕이었다.] 하서부(河西府)[또한 지금의 명주(溟州)에 하서군(河西郡)이 있으니 이것이다.
혹은 하곡현(河曲縣)이라고도 쓰는데, 지금의 울주(蔚州)는 이곳이 아니다.]에 이르러 세헌(世獻) 각간(角干)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이튿날 대령(大嶺)를 지나 각각 천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이르러 여러 날을 유람하였다.
어느 날 저녁 갑자기 두 형제는 속세를 떠나 불문에 들어갈 것을 몰래 약속하고는 아무도 모르게 도망하여 오대산에 들어가 숨었고,[고기(古記, 『삼국유사』 권3 탑상4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에는 “태화(太和) 원년(647) 무신 8월 초에 왕이 산속으로 숨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이 글이 크게 잘못된 듯하다. 살피건데, 효조왕 또는 효소왕은 천수(天授) 3년 임진(692)에 즉위하였는데, 그 해 나이가 16세였고, 장안(長安) 2년 임인(702)에 죽었으니 나이가 26세였다.
성덕왕은 이 해에 즉위하였으니 22세였다. 만약 태화 원년 무신이라고 말한다면 효조왕이 즉위한 임진년보다 빠른 것이니 이미 45년이나 지난 것으로, 곧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치세였다. 이로써 이 글이 잘못된 것을 알았으니 취하지 않는다.] 시위(侍衛)하던 자들은 따를 곳을 알지 못하여 이에 서울로 돌아갔다. 두 태자가 산속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푸른 연꽃이 땅 위에 피어나니, 형 태자가 (그곳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이를 보천암(寶川菴)이라고 하였다.
동북쪽으로 600여 보 가니 북대(北臺) 남쪽 기슭에도 역시 푸른 연꽃이 피어난 곳이 있어 아우 태자 효명도 (그곳에) 암자를 짓고 머무르며 각각 부지런히 불법을 닦았다. 하루는 함께 다섯 봉우리에 올라가 예불을 올리려고 하였는데,
동대(東臺)인 만월산(滿月山)에는 1만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진신(眞身)이 나타나 있었고,
남대(南臺)인 기린산(麒麟山)에는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地藏菩薩),
서대(西臺)인 장령산(長嶺山)에는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북대(北臺)인 상왕산(象王山)에는 석가여래(釋迦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5백 대아라한(大阿羅漢), 중대(中臺)인 풍로산(風盧山), 다른 이름으로 지로산(地盧山)에는 비로자나(毗盧遮那)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문수보살(文殊菩薩) 진신(眞身) 등이 나타나 있었다.
이와 같은 5만의 진신(眞身)에게 일일이 예불을 올리니 매일 아침 인시(寅時, 3시 30분-4시30분)에 문수보살이 진여원(眞如院), 지금의 상원(上院, 상원사)에 이르러서는 36가지의 형태로 변신하여 나타났는데, 어떤 때는 부처의 얼굴 형태로 나타나고, 혹은 보주(寶珠)의 형태, 혹은 부처의 눈 형태, 혹은 부처의 손 형태, 혹은 보탑(寶塔)의 형태, 혹은 만불(萬佛)의 머리 형태, 혹은 만등(萬燈)의 형태, 혹은 금교(金橋)의 형태, 혹은 금고(金鼓)의 형태, 혹은 금종(金鐘)의 형태, 혹은 신통(神通) 형태, 혹은 금루(金樓)의 형태, 혹은 금륜(金輪)의 형태, 혹은 금강저(金剛杵)의 형태, 혹은 금옹(金甕)의 형태, 혹은 금비녀의 형태, 혹은 오색광명(五色光明)의 형태, 혹은 오색원광(五色圓光)의 형태, 혹은 길상초(吉祥草)의 형태, 혹은 푸른 연꽃의 형태, 혹은 금전(金田)의 형태, 혹은 은전(銀田)의 형태, 혹은 부처의 발 형태, 혹은 뇌전(雷電)의 형태, 혹은 여래(如來)가 솟아나는 형태, 혹은 지신(地神)이 솟아나는 형태, 혹은 금봉황의 형태, 혹은 금까마귀 형태, 혹은 말이 사자를 낳는 형태, 혹은 닭이 봉황을 낳는 형태, 혹은 푸른 용의 형태, 혹은 흰 코끼리의 형태, 혹은 까치의 형태, 혹은 소가 사자를 낳는 형태, 혹은 노는 멧돼지의 형태, 혹은 푸른 뱀의 형태 등이었다. 두 태자는 매번 골짜기의 물을 길어와 차를 다려 공양하고, 밤이 되면 각각의 암자에서 도를 닦았다.
정신왕의 아우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투자 국인(國人)들이 그를 폐하고, 장군 넷을 산으로 보내 두 태자를 맞이하게 하였다. 먼저 효명암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니 이때 오색의 구름이 7일 동안 드리워져 덮었다. 국인들은 구름을 좇아 모두 이르러서는 의장을 벌여 열을 짓고 장차 두 태자를 맞이하여 돌아가고자 하였다. 보천은 소리내 울면서 사양하므로 이내 효명을 받들어 돌아와 즉위하게 하였다.   
나라를 다스린 지 몇 해가 지나[기록에서 재위 20여 년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죽었을 때 나이인 스물여섯이 와전되어서일 것이다. 재위는 단 10년 뿐이었다. 또한 신문왕의 동생이 왕위를 다툰 일은 『국사(國史)』에 기록이 없으므로 알 수 없다.] 신룡 원년[곧 당(唐) 중종(中宗)이 복위한 해로, 성덕왕이 즉위한지 4년(705) 되는 해이다.] 을사 3월 초4일에 처음으로 진여원(眞如院)을 개창하였다. 대왕께서 친히 백료들을 거느리고 산에 이르러 전당(殿堂)을 만들어 열고, 아울러 문수보살상을 흙으로 빚어 건물 안에 안치하였다.
지식(知識) 영변(靈卞) 등 다섯 명으로 하여금 『화엄경(華嚴經)』을 매일 읽도록 하고, 이로 인하여 화엄사(華嚴社)를 결성하도록 하였다. 오래토록 공양할 비용은 매 해 봄․가을에 산에서 가까운 주․현의 창(倉)에서 조(租) 100석과 정유(淨油) 1석씩을 공급하도록 하여 항상 규칙으로 삼았고, 진여원에서 서쪽으로 6천보 떨어진 곳으로부터 모니점(牟尼岾)과 고이현(古伊縣) 바깥에 이르기까지의 시지(柴地) 15결과 밤나무 숲 6결, 좌위(座位, 전답) 2결로써 장사(莊舍)를 세우도록 하였다. 보천은 항상 그 신령스러운 골짜기의 물을 길어 마셨으므로 만년에 육신이 허공을 날아 유사강(流沙江) 밖 울진국(蔚珍國) 장천굴(掌天窟)에서 멈췄다.
수구다라니(隨求陁羅尼) 외기를 밤낮의 과업으로 삼았더니 굴의 신(神)이 몸을 드러내 말하기를, “나는 굴의 신이 된지 2천년이 되었지만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수구다라니의 참 도리를 들었으니 보살계(菩薩戒) 받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보살계를) 받고 난 다음날 굴 또한 형체가 없어지니, 보천이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20일을 머물고 난 뒤, 이내 오대산 신성굴(神聖窟)로 돌아왔다.
도를 닦던 50년 동안 도리천(忉利天)의 신이 (하루에) 세 번 법을 들었고, 정거천(淨居天)의 무리들이 차를 다려 공양하였으며, 40명의 성중이 공중을 10척이나 날아 항상 호위하였다. 지니고 있던 석장(錫杖)은 하루에 세 번 소리를 내며 방을 세 바퀴 도니 이것으로 종(鐘)과 경(磬)을 삼아 때를 좇아 수행하였고, 때로는 문수보살이 보천의 이마에 물을 붓고 성도(成道)의 기별(記莂, 약속)을 주기도 하였다. 보천이 장차 입적하려고 하던 날, 뒷날 산중에서 행하는 것으로 나라에 도움을 주는 일들을 기록하여 남겼다. (기록에) 이르기를, “이 산은 곧 백두산의 큰 줄기로 각 대(臺)에는 (불보살들의) 진신(眞身)이 항상 거주하는 땅이다.
청색의 방위인 동대(東臺)의 북쪽 귀퉁이 아래, 북대(北臺) 남쪽 기슭 끝에는 마땅히 관음방(觀音房)을 두고, 원상(圓像)의 관음보살과 푸른 바탕에 1만의 관음보살상을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으로는 5명을 두어, 낮에는 8권의 『금광명경(金光明經)』․『인왕경(仁王經)』․『반야경(般若經)』․『천수다라니(千手陀羅尼)』를 읽게 하고, 밤으로는 관음예참(觀音禮懺)을 염송케 하며, 이름은 원통사(圓通社)라고 칭하도록 하여라.
적색의 방위인 남대(南臺)의 남쪽 면에는 지장방(地藏房)을 두고, 원상의 지장보살과 붉은 바탕에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상을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낮에는 『지장경(地藏經)』․『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읽게 하고, 밤에는 점찰예참(占察禮懺)을 염송하게 하며, 금강사(金剛社)라 칭하게 하여라.
백색의 방위인 서대(西臺)의 남쪽 면에는 미타방(彌陀房)을 두고, 원상의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와 흰색 바탕에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낮으로는 8권의 『법화경(法華經)』을 읽게 하고, 밤으로는 미타예참(彌陀禮懺)을 염송하게 하며, 수정사(水精社)라 칭하게 하여라.
흑색의 방위에 해당하는 땅인 북대(北臺)의 남쪽 면에는 나한당(羅漢堂)을 두고, 원상의 석가여래와 검은 바탕에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나한(五百羅漢)을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낮에는 『불보은경(佛報恩經)』․『열반경(涅槃經)』을 읽게 하고, 밤에는 열반예참(涅槃禮懺)을 염송하게 하며, 백련사(白蓮社)라 칭하게 하여라.
황색의 방위에 위치한 중대(中臺)의 진여원 안에는 흙으로 빚은 문수부동(文殊不動)을 안치하고, 뒷벽에는
황색 바탕에 비로자나불을 우두머리로 한 36가지의 형태를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낮으로는 『화엄경(華嚴經)』․『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을 읽게 하고, 밤으로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염송하게 하며, 화엄사(華嚴社)라 칭하여라.
보천암은 화장사(華藏寺)로 개창하고 원상의 비로자나 삼존불과 『대장경(大藏經)』을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항상 『대장경』을 열람하게 하고, 밤으로는 화엄신중(華嚴神衆)을 염송하게 하여라. 매년 화엄회(華嚴會)를 100일 동안 베풀고, 이름을 법륜사(法輪社)라 칭하여라. 이 화장사를 오대사(五臺社)의 본사(本社)로 삼아 굳게 보호하고 지키며 행실이 정결한 복전승들에게 명하여 오래토록 향화를 받들게 하면, 국왕이 천추를 누리고 백성이 평안하며 문무가 화평하고 백곡이 풍요로울 것이다.
하원(下院)의 문수갑사(文殊岬寺)를 열어 결사의 도회(都會)로 삼고 복전승 7명에게 밤낮으로 항상 화엄신중예참(華嚴神衆禮懺)을 행하게 하여라. 이상 37명의 재(齋)에 필요한 재료들과 의복의 비용은 하서부(河西府)의 도(道)에 속한 여덟 주(州)의 세금으로써 네 가지 일에 드는 비용으로 충당하여라. 대대로 군왕들이 잊지 않고 받들어 행한다면 다행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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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콘텐츠닷컴 원문보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대장경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삼국유사 사전/박물지 시범개발), 2007.,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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