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차 세계대전,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
939년부터 1945년까지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태평양 등지에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과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중국 등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세계 규모의 전쟁이다.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낳은 전쟁이다.
이 전쟁은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는 말이 있다.
이전쟁은 인류에게 있어 지구전체에 큰영향을 끼쳤다.
제2차 세계대전은 흔히 1939년 9월 1일에 일어난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이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대독 선전포고에서 발발하여,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종결된 것으로 여긴다.
이 기간 동안 1941년 독일의 소련 공격과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발발한 태평양 전쟁 등의 과정을 거쳐 세계적 규모로 확대되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미국의 하와이의 진주만을 일본군이 공격한 것이다.
일본 수뇌부의 오판이다.
영국이나 프랑스등에 전쟁물자를 판매하던 미국을 갑자기 일본 수뇌부의 명령으로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한것이다.
이때당시 미국은 전쟁물자 탱크나, 총 등을 판매해 자본이 많이 축적되어있었다.
수많은 전투를 치른 일본과 미국 결국 일본은 미국에게 패배를 인정하고 항복을 선언한다.
전쟁은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의 3국 조약을 근간으로 한 추축국] 진영과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중국 등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 진영의 대립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전쟁의 경과에 따라 각 진영에 가담한 국가들은 변동이 있으며, 중립을 표방한 나라들 가운데에서도 실제로는 어느 한 진영에 적극 가담한 나라도 있다.
이 전쟁으로 세계에서 수천만에 이르는 인명 피해가 나타났으며,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도 커다란 변동이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 영향을 준 전투들이 몇가지가 있다.
괌섬전투 진주만공습 태평양 전투 등 여러 전투들이 있다.
전승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을 중심으로 1945년 10월 24일 국제연합이 창설되었으며, 이 나라들은 한국전쟁에도 참전해 한국전쟁에도 싸운다.
전후 경제 질서의 회복을 위해 1944년 체결된 ‘브레튼우즈 협정’으로 달러가 세계의 기축 통화로 자리를 잡음으로써 미국 중심의 경제 체제가 성립하였다.
소련 군대가 주둔한 동유럽, 외몽고, 북한 등에 공산주의정권이 들어섰고, 중국에서도 중국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세계는 미국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동유럽,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으로 재편되었다.
또한 1960년대까지 패전국의 지배 아래 식민지 상태에 있던 나라들도 상당수가 주권국가로 독립을 이루면서 국제 관계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그 이후 냉전시대라는 시대가 시작된다.
이후 핵만능주의 등 여러 이론과 사상이 만들어진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두 이념의 사상이 대립한다.
그리고 일본이 항복하게 된 이유를 간략히 설명하자고 하면 이는 독일이 엄청난 위력의 폭탄을 개발한다는 소식이 미국에 들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국은 과학자들을 총동원해 폭탄을 개발하는데 이는 바로 우리가 아는 핵폭탄이다.
그리고 일본과 전투를 하는데 카미카제 신의 바람이라는 이름의 전술을 일본이 사용한다.
이는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적에게 돌진해서 박는 자폭 전술이다.
이런 전술이 계속되고 충격을 먹은 미국은 일본군이 단한명도 남지않을때 까지 이전술을 멈추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하고 핵폭탄을 투하한다.
미국은 총 두발의 핵을 사용했는데 그 폭탄의 이름은 리틀보이와 팻맨이다.
핵을 사용하기 전까지 핵폭탄의 위력을 몰랐다.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사용했다.
그 위력은 실로 엄청났다.
하지만 위력을 보지 못하고 듣기만해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일본 수뇌부는 항복을 하지않고 버티다가 다시한번 핵폭탄을 맞게된다.
이번에는 일본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맞고 정신을 차린 일본 수뇌부는 항복을 선언한다.
이렇게 큼직큼직한 사건들을 필두로 제2차 세계 대전은 문화와 모든 세상을 바꾸어 놓는 시작점이 되었다.
이런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의 꾸준한 정치, 외교에 큰 관심을 가지면 좋을것 같다.
황금기를 누리던 미국, 대공황의 수렁 속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쟁이 남긴 상처가 서서히 복구되고 있었다.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경제를 회복하고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쟁 물자보급으로 큰 경제적 이득을 봤던 미국은 각국에 전후 복구 자금까지 대출해 주면서 세계 최고의 채권국(국제 관계에서 다른 나라에 돈을 빌려 준 나라)이 되었다.
그 덕에 미국 경제는 황금기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은 국가 재정이 바닥나고 말았다.
마르크화(유로화 통일 전까지 사용하던 독일의 화폐 단위)의 가치가 떨어지고, 물가가 급등하면서 배상금조차 지불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미국은 1924년에 독일에 8억 마르크의 차관을 내주었고, 1929년에는 영(Young)안(제1차 세계 대전 배상금 지불에 관한 제2차 협상)을 통과시켜 배상금을 4분의 1정도 줄여 주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공황의 여파로,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독일은 다시 한번 큰 충격을 받았다.
독일 뿐만 아니라 미국에 돈을 빌려 쓴 유럽의 많은 나라들도 경제적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경제 공항은 1929년 10월 24일, 미국의 월 스트리트(미국의 주요 금융 기관들이 위치한 뉴욕 시 맨해튼의 거리. 미국의 금융 시장을 이르는 말)에서 ‘검은 목요일’ 이라 부르는 사건이 터지면서 시작되었다.
주가가 대폭락하여 미국 증권 시장이 붕괴된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뒤, 세계 최고 채권국으로서 호황을 누리던 미국은 남아도는 자금으로 산업 시설을 늘려 왔다.
그러나 대량 생산된 상품들은 미국 내에서 모두 소비되지 못했고,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물건을 구매할 능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소비가 줄어들어, 재고만 쌓이게 된 기업들은 자금난에 허덕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미국 경제에 불안을 느낀 투자자들이 주식을 한꺼번에 팔아 치웠고, 주가는 사상 최대로 떨어지고 말았다.
주가가 폭락하자 은행과 기업들이 문을 닫았고, 엄청나게 많은 실업자들이 생겼다.
또 농산물 가격까지 폭락하고 말았다.
이는 경제 상황이 더욱 나빠지는 악순환의 시작이었다.
수정 자본주의와 뉴딜 정책
세계 금융 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미국의 경제 공항은 곧 소련을 제외한 전 세계로 확산되어 세계 경제 대공황을 불러왔다.
오스트리아·독일·영국 등에서 은행이 파산하자, 영국은 금 본위제(금화를 법정 화폐로 통용하거나, 지폐를 일정한 비율로 자유롭게 금과 교환할 수 있는 제도)에서 이탈하였다.
다른 나라들도 여기에 뒤따르면서 무역 시장과 국제환 결제까지 혼란에 빠져 불경기에 허덕이게 되었다.
이렇게 세계 경제가 파탄에 이르자, 각국은 경제 공황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가지 해결책을 마련하였다.
1933년,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루스벨트는 경제 회복을 위해 뉴딜 정책을 추진하였다.
기존의 자유방임주의 경제 정책에서 벗어나, 정부가 경제 활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수정자본주의 이론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에 따라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 테네시 강 유역 개발 공사를 추진하고, 농산물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정부가 잉여 농산물을 모두 사들였다.
또 사회 보장법을 만들어 고용을 늘리고, 과잉 생산을 조절하였다.
더불어 라틴 아메리카 시장을 개척하여 ‘달러 블록’을 형성하였다.
그 결과 서서히 소비가 증가하면서 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도 자국과 식민지를 하나로 연결하는 ‘파운드 블록’과 ‘프랑 블록’을 형성하여 공황을 극복하였다.
공황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경제 정책
경제 정책/ 자유방임주의(18~9세기)/ 수정 자본주의(20세기)
시초 |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 존 케인스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 |
내용 | 개인이나 사회의 경제 활동에서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는 정책 | 공황과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국가의 적극적인 재정·금융 정책을 제시 |
전체주의의 등장
미국과 영국, 프랑스는 각각 블록 경제 를 이루어 보호 무역
자기 나라의 산업을 보호·육성하기 위하여 국가가 대외 무역을 간섭하고 수입에 여러 가지 제한을 두는 일)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자 자본주의 발달이 늦고 식민지가 적은 독일·이탈리아·일본은 공황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방법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전체주의(개인의 자유와 권리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우선시한다는 정치 체제였다.
세 나라에서는 계속되는 경제 불황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내세운 강력한 독재 정권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국 중심의 경제권을 확대하기 위해 대외 팽창을 추진하였다.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었으면서도 제대로 이익을 챙기지 못했다.
그 결과 식량 부족과 물가 폭등, 대규모 실업으로 이탈리아의 상황이 어려워지자, 무솔리니가 파시스트당(일당 독재를 확립한 이탈리아의 정당.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전체주의와 애국주의를 주장함)을 조직하여 독재 정권을 수립하였다.
무솔리니는 전체주의를 내세우면서 알바니아를 보호국으로 만들었고, 에티오피아를 침략하는 등 팽창 정책을 추진하였다.
경제적으로 미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독일은 이미 식민지를 모두 잃었기 때문에 블록을 형성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위기가 어느 나라보다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런 혼란을 틈타 등장한 히틀러는 나치당을 결성해 독일 민족의 우수성과 대독일 건설을 주장하였다.
국민들의 지지를 얻은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당 을 무너뜨리고 일당 독재 체제를 이루었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맺었던 베르사유 조약을 무시하고, 빼앗긴 식민지를 되찾기 위해 다시 군대를 키웠다.
그리고 독일 남서부의 라인란트 유역 비무장 지대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 국제 사회는 다시 긴장 상태에 들어서게 되었는데, 이것이 또 하나의 엄청난 세계 대전의 출발점이 되었다.
군사 대국을 꿈꾸던 일본 역시 대공황의 영향으로 불황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사이 군부와 재벌로 이루어진 군국주의자(국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군사력에 위한 대외적 발전에 두고, 전쟁과 그 준비를 위한 정책을 중요시하는 정치 체제)들이 자유주의 내각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국내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전쟁으로 해결하려고, ‘대동아 공영권’ 을 주장하면서 대륙 침략을 준비하였다.
히틀러의 꿈이 화가였다고?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히틀러는 13세가 되던 해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905년에 실업학교를 자퇴하고 미술 대학에 진학했지만,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다.
나중에 영국의 예술가 채프만 형제가 히틀러가 그렸던 그림을 구입하여, 덧칠한 뒤 되팔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히틀러는 군대에 가지 않기 위해 다른 도시로 도망갔다가, 1914년에 체포되기도 했다.
그러나 신체검사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아 병역이 면제되었는데,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자원 입대하여 1급 훈장까지 받았다.
에스파냐의 내전과 추축국 형성
국제 사회가 독일과 이탈리아·일본의 움직임으로 긴장하고 있던 1936년, 에스파냐에서는 프랑코 장군이 내란을 일으켰다.
당시 에스파냐에서는 국가주의(국가의 공동체적 이념을 강조하고 그 발전을 중요시하는 이념)자와 공화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내란이 일어나자 양측은 각각의 영토를 장악한 채,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치열한 싸움을 계속했다.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승리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양측은 모두 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1936년 10월 로마와 베를린을 연결하는 ‘추축’ 을 맺고, 소련에 대응한다는 명목으로 에스파냐의 내란에 개입했다.
이때 독일과 이탈리아는 국가주의자들을 도왔고, 영국·프랑스·미국 등에서 온 의용군(국가나 사회의 위급을 구하기 위하여 민간인으로 조직된 군대)과 소련은 공화파를 지원하고 나섰다.
11월에는 소련 공산당의 국제 조직인 코민테른에 맞서, 독일과 일본이 반(反)코민테른 협정을 맺었다.
이듬해 세 나라는 서로 합쳐 적을 막아 내자는 3국 방공 협정을 체결하고 추축국을 형성하였다.
에스파냐 내란,
세력/ 국가주의자/ 공화파
구성 | 로마 가톨릭교회, 군부, 토지 소유자, 기업가 등 | 도시 근로자, 농업 노동자, 교육 받은 중산층 등 |
지향하는 정치 체제 | 극단적인 민족주의 | 사회주의자 |
주도자 | 프랑코 장군 | 라르고 카바예로 총리→네그린 총리 |
에스파냐 내란 관련 예술 작품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에스파냐 내란 때, 독일 공군의 폭격을 받고 폐허가 된 마을을 비극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헤밍웨이의《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역시 에스파냐 내전에 참전했던 미국의 젊은 대학교수 로버트 조단이 게릴라 부대를 이끌고 임무를 수행하는 내용을 다룬 소설이다.
범게르만주의를 내세운 히틀러의 대외 침략
1938년 3월, 독일의 히틀러는 범게르만주의(독일을 중심으로 게르만 민족이 단결하여 세계를 지배하려는 사상)를 명분으로 내세워 오스트리아를 침략한 뒤 나치 정권을 세우고 병합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당시 약 300만 명의 게르만 혈통 주민이 살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되기 전의 연방국 이름)의 수데텐 지방을 점령하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을 회유하기 위해 뮌헨에서 회담을 갖고, 더 이상의 영토를 확장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독일의 수데텐 지방 점령을 승인하였다.
히틀러는 이듬해 뮌헨 협정을 어기고, 체코슬로바키아를 공격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방을 병합해 버렸다.
또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자유 도시가 된 폴란드의 단찌히(발트 해에 접해 있는 항구 도시. 현재 폴란드의 그단스크)를 요구하고 나섰다.
더 이상 독일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을 수 없게 된 영국은 군사력을 강화하고, 폴란드와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하였다.
또 프랑스와 함께 소련에 군사 동맹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영국과 프랑스의 제안에는 응답하지 않고 있다가, 1939년 8월에 독일과 독·소 불가침 조약 을 맺었다.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히틀러는 안심하고 전쟁 준비에 더 열을 내었고, 결국 1939년 아무런 선전 포고도 없이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영국은 독일에 군대를 거두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자, 프랑스와 함께 독일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전쟁이었던 제2차 세계 대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폴란드를 넘어 프랑스와 영국까지 공격하는 독일
1939년 9월, 독일은 미리 준비하고 있던 기갑 사단(전차와 장갑차를 주력으로 삼아 기동력과 화력을 높인 지상 작전 부대)을 앞세워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그 당시 폴란드의 병력은 100만이 넘었지만, 탱크나 장갑차 등 전투 장비는 독일에 비해 훨씬 뒤떨어져 있었다.
결국 독일의 우수한 장비와 강력한 화력(총이나 포 등의 무기가 가지고 있는 힘) 앞에 폴란드 군대는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한편 독일과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어 폴란드 분할에 합의한 바 있는 소련도 폴란드 동부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틈을 타 독일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까지 진군했고, 끝까지 저항하던 폴란드는 결국 독일과 소련의 손에 분할 점령되고 말았다.
그런데 영국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경우 폴란드를 지원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실제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
독일과 소련이 주변 국가를 점령하기 위해 계속 진군하자, 그제야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군도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1940년 4월 독일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략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을 공격 하였다.
연합군과의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한 독일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베네룩스 3국(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을 일주일 만에 점령한 뒤 프랑스로 진격해 들어갔다.
자신들이 유럽 최강의 부대라고 생각했던 프랑스군은 마지노선 을 믿고 독일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독일은 마지노선이 독일과 프랑스 국경 지역에만 한정되어 있다는 점을 이용해, 이미 점령한 벨기에를 가로질러 공격해 들어갔다.
마지노선을 우회한 독일군은 파리를 향해 신속하게 진군했다.
굳게 믿었던 마지노선을 무너뜨리고 독일군이 파죽지세(대를 쪼개는 기세라는 뜻으로, 적을 거침없이 물리치고 쳐들어가는 기세)로 공격해 들어오자, 프랑스와 영국군은 됭게르크(도버 해협에 위치한 북프랑스의 도시) 해안으로 몰리게 되었다.
독일군이 해안을 봉쇄하기 전에 병력을 철수시켜야 하는 상황에 처한 연합군은 영국 공군의 엄호(아군이 공격이나 철수를 쉽게 할 수 있도록 지원 부대가 적의 저항을 막는 일)를 받으며 겨우 프랑스를 탈출했다.
1940년 6월, 독일군은 마침내 파리를 점령했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베르 전투의 영웅이자 부총리였던 페탱을 내세워 비시(프랑스 중부 오베르뉴 지방에 있는 도시)에 괴뢰 정부(다른 나라가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한 나라의 행정부)를 세웠다.
그러자 샤를 드골 장군은 영국으로 건너가 자유 프랑스 위원회를 이끌면서, 프랑스에 남아 있는 레지스탕스(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에 점령당한 프랑스에서 독일과 맞서 싸우기 위해 일어난 지하 운동)를 지원하며 독일에 대한 항쟁을 계속하였다.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의 남은 목표는 영국이었다.
그러나 막강한 영국 해군을 무너뜨리고 영국 해협(도버 해협의 동쪽 끝에서 북해와 이어지는 좁고 긴 바다)을 건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독일은 공습(공군이 비행기를 이용하여 총격이나 폭격으로 적을 습격하는 일) 작전을 세우고, 1940년 8월, 영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은 미리 개발해 놓은 레이더(전자파를 이용해 대상물까지의 거리나 형상을 측정하는 장치)를 이용해 독일 전투기들의 공격을 막아 냈다.
4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의 현장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폴란드 남부 크라 쿠프에서 서쪽으로 50km 떨어진 지점 에 위치해 있다.
1940년 6월 최초로 폴 란드 정치범들이 이곳에 수용되었고, 1941년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대량 학살 시설로 확대되었다.
이곳에 끌려온 사람들은 가스, 총살, 고문, 질병, 굶주림 등으로 죽어 갔는데, 희생자 수는 무려 4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 가운데 3분의 2가 유대인이다.
수용소에서는 희생자의 장신구는 물론 금니까지 뽑아 금괴로 만들었으며, 머리카락을 모아 양탄자를 짰다.
또 각종 생체 실험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치의 잔학 행위에 희생된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유네 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독일과 소련의 전쟁
독일이 프랑스·영국과의 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 소련은 안심하고 핀란드 일부와 발트 3국(발트 해 동쪽에 있는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을 병합하면서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독일은 강력한 저항에 막혀 영국을 점령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히틀러는 유럽을 손에 넣은 뒤, 소련을 기습하려던 검은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 계획했던 공격 시점인 1943년보다 2년이나 앞당겨 소련을 향해 총구를 겨눈 것이다.
독일은 먼저 발칸 반도에 있는 헝가리·루마니아·슬로바키아를 공격하여 독일군에 합류시켰다.
또 불가리아를 추축국에 가담시켜 군사력을 강화한 뒤,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까지 점령해 버렸다.
마침내 1941년 6월, 히틀러는 150여 개 사단, 300만 명으로 구성된 병력을 동원해 소련 공격에 대대적으로 나섰다.
그 당시 소련은 독일보다 2~3배나 많은 탱크와 항공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대부분 독일의 앞선 기술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구식 장비였다.
결국 소련은 세계 최강의 군대를 앞세운 독일군에 힘도 써보지 못하고, 모스크바 인근까지 내어 주었다.
더 이상 물러설 수는 없다고 결정한 소련은 영국과 미국의 원조를 받으며 독일군이 점령하고 지나간 지역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또 독일의 공격이 예상되는 지역에 있는 다리와 철도를 파괴하고, 식량을 불태우는 등 독일군의 진격을 완강하게 저지했다.
그러는 동안 겨울이 다가왔고, 겨울 군복을 지급 받지 못한 독일군은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으로 고생하게 되었다.
결국 독일은 모스크바 공격을 포기하고,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방향을 바꿔 스탈린그라드 를 목표로 다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은 이곳에서도 소련의 반격을 받아 고립될 위기에 처했고, 결국 소련 점령을 포기한 채 철수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참전으로 거세진 연합군의 반격
추축국 가운데 하나인 일본은 중·일 전쟁을 일으켜 대륙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전쟁은 장기전으로 접어들었다.
또 일본은 프랑스가 차지하고 있던 인도차이나를 공격한 뒤 독일·이탈리아와 삼국 동맹을 맺었다.
그래서 미국은 ABCD 포위진(미국·영국·중국·네덜란드 4국의 첫 글자를 따서 이름 붙인 포위진)을 형성하고,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중단했다.
경제적 압박을 당하게 된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미국 태평양 함대 사령부가 있는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였다.
미국은 영·프 연합군이 됭게르크에서 철수한 이후, 엄청난 물량을 영국에 지원하면서 참전에 대한 준비를 해왔다.
이런 미국이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다.
그러자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과 이탈리아도 미국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제 전쟁은 유럽을 넘어 태평양까지 확산돼, 전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소련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을 물리친 것을 계기로 연합군의 반격이 거세졌다.
1942년 초 독일군이 소련을 공격하는 사이, 영국은 다시 군대를 재정비하여 독일의 주요 도시들을 공격했다.
미국은 둘리틀 중령이 이끄는 폭격기 편대(2~4대의 비행기로 이루어진 부대 구성단위)를 이용하여 일본의 주요 도시들을 공격하였다.
또 태평양의 미드웨이 섬과 여러 섬에서 벌어진 일본과의 해전에서 크게 승리하면서 태평양 전쟁(1941~1945년까지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의 주도권을 잡았다.
한편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는 영국이 독일의 롬멜 장군이 이끄는 기계화 사단에 밀려 키레나이카(지금의 리비아)를 잃고, 이집트까지 내줄 상황에 처했다.
그러나 미국과 연합한 몽고메리 장군이 이집트의 엘 알라메인에서 독일과 이탈리아 군을 격파해, 1943년 5월에 항복을 받아 냈다.
그즈음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체포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미국과 영국 연합군은 새 정부와 비밀 협상을 맺고 독일군이 주둔하고 있던 시칠리아 섬을 점령하였다.
결국 1943년 9월, 연합국에 항복한 이탈리아는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이에 독일은 무솔리니를 구하고 로마를 점령하였지만, 1944년에 다시 연합군에게 로마를 내어 주고 말았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연합국의 승리
1943년부터 히틀러는 서부 전선의 병력을 강화하였다.
프랑스 해안을 중심으로 방어기지를 구축(어떤 시설물을 쌓아 올려 만듦)하고 연합국의 반격에 대비한 것이다.
1944년 6월 6일, 미국의 아이젠하워 장군이 이끄는 15만의 연합군은 노르망디(프랑스 서북부 해안에 있는 지방) 상륙 작전을 감행하였다.
영국과 캐나다 군은 동부 해안으로, 미국군은 서부 해안으로 상륙하여 독일군을 공격하였다.
이 때 공군은 프랑스 동쪽 센강과 남쪽 르와르 강에 있는 다리들을 폭파하여 독일군의 병력 지원을 차단하였다.
연합군은 힘든 전투를 벌인 끝에 캉 항과 셰르부르 항을 점령하였고, 그 기세를 몰아 독일군을 더욱 강하게 공격하였다.
결국 연합군의 공격에 독일군은 무너지고 말았고, 29만이 넘는 병력이 포로로 잡혔다.
연합군이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는 동안, 독일군부의 고위 간부들이 히틀러 암살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수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다.
이로써 독일의 전력은 더욱 약해졌고, 1944년 8월 25일에는 연합군이 파리를 탈환하였다.
그 해 9월에 드골 장군은 프랑스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독일은 다시 총동원령(사람, 물자 따위의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라는 명령)을 내려 병력을 보충하고 서부 전선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연합군은 공격을 늦추지 않고 전면 공격을 해, 마침내 프랑스를 가로질러 독일 국경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동부 전선에서는 소련이 발칸 반도 위쪽으로 이동해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를 통해 독일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독일의 전력이 크게 약화된 틈을 타, 1945년 1월에 독일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이 바르샤바를 점령하자, 히틀러가 서부 전선에 있던 부대를 서둘러 동부 전선으로 보냈다.
그렇지만 독일군이 소련의 진격을 막지 못했고, 소련군은 부다페스트까지 점령해 들어갔다.
이때 영국과 미국 공군은 폭격을 강화하여 독일의 동부 전선의 교통 중심지들을 파괴하면서 소련군의 진격을 도왔다.
1945년 4월 22일, 마침내 소련군이 베를린에 입성하였다.
이에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하고, 그 뒤 독일은 5월 7일에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이로써 유럽에서의 공식적인 전쟁은 막을 내렸다.
독일이 항복한 후에도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을 남겨 두고 있었다.
미국은 사이판·필리핀·이오지마·오키나와 등을 차례로 점령한 뒤,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1945년 3월 9일, 미국은 일본 도쿄에 야간 공습을 감행했다.
이로써 미국은 육군을 상륙시키지 않아도 일본에 엄청난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 뒤 미국은 일본의 다른 대도시들에 대해서도 야간 공습을 감행하였다.
1945년 7월, 독일 포츠담에 모인 연합국 대표들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여전히 전쟁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고 이를 거절하였다.
결국 미국은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떨어뜨렸다.
게다가 소련이 8월 8일에 선전 포고를 하고 만주와 한반도로 진격해오자,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였다.
전 세계를 피로 물들게 했던 제2차 세계 대전이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전 세계 60여 개가 넘는 나라들이 1억이 넘는 병력을 동원하여 싸웠던 제2차 세계 대전은 약 2천 7백만 명의 군인이 전사하고, 2천 5백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희생되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남겼다.
민간인 희생자 중에는 히틀러의 민족 차별 정책으로 희생된 유대인이 약 5백만 명이나 되었다.
또 전쟁 비용이나 대대적인 공습으로 인한 재산 파괴 등 경제적인 피해도 그 어떤 전쟁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냉전 시대에 들어선 국제 사회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51개 나라의 대표들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모였다.
그들은 국제 연합 헌장을 선언하고, 세계 평화 유지를 위한 국제기구인 국제 연합(UN)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전쟁에 승리한 나라들은 미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전후 처리 문제에 대한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패전국인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어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관리를 받게 되었고, 일본은 무장 해제(항복한 군인이나 나라의 무기를 빼앗는 일)된 뒤 한동안 미국의 점령하에 놓였다.
오스트리아는 미·영·프·소의 관리를 받다가 1955년 중립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주권을 회복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아시아·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거나 신생 독립국이 되었다.
이들은 1950년대 이후 제3세력으로 성장하여, 미국과 소련 중심 세력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 냉전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국제 사회는 미국 중심의 자유 민주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세력이 대립하는 냉전 체제에 들어섰다.
국가와 민족도 나눠 버린 보이지 않는 전쟁, 냉전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자, 미국과 소련의 불안정한 동맹 관계는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소련은 동유럽에 대한 지배를 계속하면서 공산주의를 전파했고, 미국과 영국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독일은 1949년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냉전(Cold War)에 의해 분단된 것이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경계로 각각 남한과 북한을 점령하였다.
결국 북한은 소련에 의해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섰고, 남한은 미국에 의해 자본주의 체제가 수립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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