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세' 북한 김일성 주석 동생 "김영주 사망..
김영주 金英柱,
목차,
정의,
생애,
남북 관계의 북측 대표,
실각,
말년,
북한 김일성 주석의 동생 김영주 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이 14일 사망했다고 북한 [노동신문]이 15일 보도했다.
고인은 1920년생으로 향년 101세.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났으며, 일제강점기 때 항일빨치산 활동을 했으며 모스크바종합대학을 나왔다.
신문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김일성훈장, 김정일훈장 수훈자이며 공화국영웅인 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김영주 동지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시하여 화환을 보내시었다”고 알렸다.
특히, 신문은 “김영주 동지는 당과 국가의 중요 직책에서 오랫동안 사업하면서 당의 노선과 방침을 관철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였으며 사회주의건설을 힘있게 다그치고 우리 식의 국가사회제도를 공고 발전시키는데 공헌하였다‘고 기렸다.
아울러, 신문은 “김정은 동지께서 보내신 화환이 14일 고인의 영전에 진정되었다”고 덧붙였다.
고인은 1972년 당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직책으로 7.4남북공동성명 합의에 관여했으며, 남측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공동성명을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한 바 있다.
또한 이 공동성명의 이행을 위해 설치된 남북조절위원회 북측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김영주 金英柱,
출생/ 사망/ 국적/
1920. 9. 21, 만주 임강현 |
2021. 12. 14, 평양 |
북한 |
북한의 정치가. 김일성의 부모인 김형직과 강반석 사이의 셋째 아들로 김일성의 동생이다.
김일성 치하의 북한의 핵심 지도층이었다.
1961년 9월 제4차 당대회에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이 되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 1966년 6월 요직인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장으로 승진했다.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7.4 남북공동성명에 서명하는등 주요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후 남북관계의 북측 대표로 한동안 활동했다.
1974년 2월 정무원 부총리를 거쳐 4월 김일성 특사로 루마니아·헝가리·일본·중국·이집트 등을 방문했으나 김정일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1993년 국가 부주석과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었을 뿐 실질적인 활동 없이 원로로 지냈다.
정의,
북한의 정치가. 김일성 주석의 동생으로, 북한의 고위 지도자를 지냈으며, 1970년대에는 남북관계에서 북한의 대표를 지냈다.
생애,
김형직(金亨稷)과 강반석(姜盤石)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1930년대 후반 빨치산 소년대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 후 모스크바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고급당학교에서 수학했다.
1953년 3월 6·25전쟁 당시 남조선노동당 간부들 숙청 군사재판 과정에서 이승엽(李承燁) 세력에 대한 재판의 서기를 맡았으며, 1954년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과 1957년 조직지도부 지도과장이 되면서부터 중앙의 정치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핵심 지도층 부상,
1961년 9월 제4차 당대회에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이 되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 1966년 6월 요직인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장으로 승진했다.
그 해 10월 당대표자 대회에서 조선노동당 비서 겸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승격되고, 1966년 12월 조선노동당 정치위원 겸 비서국 비서가 되었다.
1970년 11월 제5차 당대회에서 권력서열 6위로 당내의 핵심지도층으로 부상했다.
남북 관계의 북측 대표,
1972년 7월 당시 조직지도부장으로서 7·4 남북공동성명에 서명했으며, 평양측 공동위원장으로 남북조절위원회에 참가한 바 있다.
1973년 8월 28일 평양측 조절위원장으로 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해서 이후락(당시 중앙정보부장 겸 남북조절위원회 서울측 위원장)의 경질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밖에도 한국의 '6·23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을 '기만'이라고 반박하는 발표를 하는 등 남북관계의 북측 대표로 한동안 활동했다.
실각,
1974년 2월 정무원 부총리를 거쳐 4월 김일성 특사로 루마니아·헝가리·일본·중국·이집트 등을 방문했다.
1975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5기 5차회의 이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과 관련해 김일성 주석의 후계체제 확립 문제를 둘러싼 권력투쟁 과정에서 실각, 숙청되어 가족과 함께 자강도에 유배되었다고 알려졌다.
말년,
김정일 위원장 체제가 공고해진 후인 1993년 7월 26일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자격으로 김일성, 김정일을 비롯한 당·정 고위 간부들과 함께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탑' 준공식에 참석함으로써 그 지위가 다시 확인되었다.
그해 12월 8일 노동당 제6기 21차회의에서 정치위원 및 당 중앙위원으로, 12월 11일 제9기 최고인민회의에서 국가부주석으로 각각 선출되었다.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4년여 만에 다시 열린 1998년 9월 제10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이종옥·박성철·전문섭 등과 함께, 신설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위원장직에 추대되었다.
이후 2015년 7월 지방의회 대의원 선거 때 외에 특별한 공개적인 활동이 없이 지냈으며,
북한의 선대 지도자인 김일성 주석의 동생 김영주 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이 사망한 것으로 15일 확인됐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이날 김영주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김정은 총비서가 그의 영전에 화환을 보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그가 김일성훈장, 김정일훈장을 받았으며 공화국 영웅이라고 호명했다.
이어 "그는 당과 국가의 중요 직책에서 오랫동안 사업하면서 당의 노선과 방침을 관철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했으며 사회주의 건설을 힘있게 다그치고 우리 식의 국가사회제도를 공고발전시키는 데 공헌했다"라고 평가했다.
김영주는 1920년생으로, 모스크바 유학을 거쳐 1950년대 초반부터 주요 직책을 맡아 활동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당 조직지도부장과 당 비서, 정무원 부총리를 역임하는 등 권력 핵심에서 활동하다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자 활동을 시작한 1970년대 중반부터 평양을 떠나 자강도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 수개월 전인 1993년 12월 정치국 위원으로 다시 등장하면서 국가 부주석 자리에도 임명됐다.
이후 권력 핵심은 아니지만 꾸준히 공식 직함을 유지했다.
그에 대해서는 김정일 위원장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렸다가 명예직으로 복귀한 것이라는 설과, 1970년대 중반부터 건강상의 문제를 안고 있던 그가 스스로 신변을 정리하고 자강도에서 생활하다가 정권 교체기에 '후견인'으로 등장한 것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동시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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