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27일 금요일

‘NBA 2K22’ 커버 모델 케빈 듀란트, “어빙-하든과 함께 게임 즐기고 있다” 마이클 조던 이후 역대 NBA 파이널 MVP 선수들,,,

‘NBA 2K22’ 커버 모델 케빈 듀란트, “어빙-하든과 함께 게임 즐기고 있다” 마이클 조던 이후 역대 NBA 파이널 MVP 선수들,,,

‘NBA 2K22’ 커버 모델 케빈 듀란트, “어빙-하든과 함께 게임 즐기고 있다”

케빈 듀란트,(32, 브루클린 네츠)

프로필,

카림 압둘 자바(74)

개요,

선수 경력,

수상 내역,

플레이 스타일,

출연작,

드라마,

기타,

덕 노비츠키(43)

개요,

커리어,

선수 경력,

은퇴 이후,

수상 내역,

플레이 스타일,

여담,

관련 문서,

마이클 조던 이후 역대 NBA 파이널 MVP 선수들,


‘NBA 2K22’ 커버 모델 케빈 듀란트, “어빙-하든과 함께 게임 즐기고 있다”

지난 15일(이하 한국시간) 2K는 ‘NBA 2K 시리즈’의 최신작 ‘NBA 2K22’의 커버 모델을 발표했다.

케빈 듀란트(32, 브루클린 네츠)는 NBA 75주년 에디션의 표지 모델로 선정된 선수 중 한 명이다.

케빈 듀란트는 올스타 11번, 리그 MVP, NBA 챔피언 2회를 수상한 명실상부 NBA 최고의 선수다.

케빈 듀란트는 NBA 전설 카림 압둘 자바(74), 덕 노비츠키(43)과 함께 ‘NBA 2K22’ NBA 75주년 에디션의 대표가 되는 영광을 안았다.

2K는 지난 1일 ‘NBA 2K22’의 표지 모델 확정 이후 온라인 미디어 간담회를 열고 케빈 듀란트를 초청해 화상 인터뷰를 진행했다.

케빈 듀란트의 표지 모델 선정은 이번이 3번째다.

케빈 듀란트는 ‘NBA 2K13’ ‘NBA 2K15’에서 표지 모델을 맡은 바 있다.

케빈 듀란트는 “이번 3번째 모델 선정은 의미가 크다.

나는 내가 경기장에 설 때 가족, 친구, 팀을 대표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다.

커버에 실릴 만큼 훌륭한 영광을 차지할 수 있어 기쁘다”고 소감을 전했다.

케빈 듀란트가 ‘NBA 2K 시리즈’에서 주로 플레이하는 팀은 자신이 소속된 브루클린 네츠다.

3명의 에이스(케빈 듀란트, 카이리 어빙, 제임스 하든)이 함께 뛰는 브루클린 네츠는 NBA 내에서 최고의 팀 중 하나다.

케빈 듀란트는 “카이리 어빙, 제임스 하든과 함께 온라인으로 ‘NBA 2K 시리즈’를 즐긴다.

온라인으로도 자주 플레이한다”라며 친목을 과시했다.

케빈 듀란트는 ‘NBA 2K 시리즈’의 그래픽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 1999년 첫 타이틀이 출시된 이래 ‘NBA 2K 시리즈’는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꾸준히 그래픽-인게임 플레이 부분에서 성장해왔다.

케빈 듀란트는 “2K는 모든 선수들에 대해 작업한다.

각 선수들의 움직임, 애니메이션이 실제 경기와 일치한다.

그렇게 때문이 게이머들이 익숙하게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케빈 듀란트는 데뷔 이래 지금까지 최고의 빅맨으로 활약하고 있다.

리그의 전설적인 빅맨들 중 케빈 듀란트의 플레이에 많은 영향을 끼친 선수는 덕 노비츠키, 하킴 올라주원, 케빈 가넷, 카림 압둘 자바다.

케빈 듀란트는 “덕 노비츠키처럼 슛을 쏘고 싶었고, 하킴 올라주원처럼 움직이며 케빈 가넷처럼 높은 릴리스에서 턴어라운드 점프를 하고 싶었다”며 “이러한 레전드 선수들에게서 받고 싶은 것들이 많다.

그들을 닮고 싶어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고 말했다.

케빈 듀란트는 전 세계의 다양한 플레이 스타일이 NBA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평가했다.

최근 NBA는 루카 돈치치, 니콜라 요키치 등 유럽의 ‘재능’들이 넘어와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케빈 듀란트는 “NBA는 속도를 늘리는 스타일인 반면에 그들은 느린 속도를 우리 게임에 접목시켜 또다른 역동성을 추가했다”며 “NBA는 매일 발전하고 진화하고 있다.

보기에도 아름답다”고 말했다.

케빈 듀란트는 인터뷰를 마치며 자신의 우상인 카림 압둘 자바, 덕 노비츠키와 함께 표지 모델을 장식하게 된 것에 대해 다시금 “영광이다”며 미소를 지었다.

케빈 듀란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나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평생을 농구에 헌신했다.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다”며 인터뷰를 끝맺었다.


케빈 듀란트, Kevin Durant,

농구선수, 스포츠기관단체인,

전체,

프로필,

최근활동,


프로필,

출생1988. 9. 29. 미국,
신체208cm, 109kg,
소속팀브루클린 네츠 (포워드, 7)
소속필라델피아 유니언(공동 구단주)
데뷔2007년 시애틀 슈퍼소닉스 입단,
관련정보NBA - 케빈 듀란트 경기 성적,
사이트트위터, 페이스북,
 


카림 압둘자바,

미국의 농구 선수,

뉴욕 시 출신 인물,

1947년 출생,

1969년 데뷔,

1989년 은퇴,

NBA 영구결번 선수,

센터(농구)

밀워키 벅스/은퇴, 이적,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은퇴, 이적,

NBA MVP,

미국의 무슬림,

개명한 인물,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카림 압둘자바의 수상 및 영예,


밀워키 벅스 No. 33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No. 33
카림 압둘자바
Kareem Abdul-Jabbar
생년월일
1947년 4월 16일 (75세)
국적
출신지
뉴욕주 뉴욕
종교
가톨릭 → 이슬람
신장
218cm (7' 2'')
체중
102kg (225 lbs)
포지션
센터
드래프트
1969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밀워키 벅스 지명
소속팀
밀워키 벅스 (1969~1975)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1975~1989)
등번호
33번
지도자 경력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2000, 어시스턴트 코치)
오클라호마 스톰(USBL) (2002, 감독)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2005~2011, 어시스턴트 코치)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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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선수 경력. 수상 내역. 플레이 스타일. 출연작. 영화. 드라마. 기타


개요,

미국의 농구인으로 현역 시절 포지션은 센터. 본명은 퍼디낸드 루이스 앨신더 주니어(Ferdinand Lewis Alcindor, Jr)였지만,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름을 바꿨다.
 
사진에서 보이는 고글과 블로킹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스카이훅 슛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레이커스 영구결번이자, 1980년대 매직 존슨과 더불어 쇼타임 레이커스를 이끈 선수였다.

1969년부터 1989년까지 뛰었으며 통산득점 38,387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NBA 통산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고 2022년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세이버메트릭스 기록은 다음과 같다.
WS 단일시즌 1위(25.37 / 1971-72 시즌)
WS 통산 1위(273.4)
  • OWS 단일시즌 1위(18.31 / 1971-72 시즌)
  • OWS 통산 1위(178.92)


선수 경력,

뉴욕 출신으로 1947년에 태어났으며 농구 이전에는 야구 외에 수영과 축구도 했었다.
 
14세 때인 1961년부터 파워 메모리얼 아카데미(1984년 폐교.) 시절 잭 도나휴(1931~2003) 감독에게 농구수업을 받았다.
 
고교 시절 71연승을 기록하는 등 고교 시절부터 뛰어난 기량을 보여왔고, 1966년에 농구명문 UCLA에 입학하여 존 우든(1910~2010) 감독의 가르침을 받아 3년 동안 전부 NCAA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면서 싹수부터 시퍼랬다.

이 시절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루머는 입학 직후 1학년과 상급생으로 나눠져서 연습경기를 했는데 압둘자바가 주축이 된 1학년팀이 상급생팀을 압도적으로 이겼다는 것.
 
문제는 그 상급생들이 그 직전해 NCAA 플레이오프에서 우승한 주전 멤버들이었다는 것이다. 
 
슬램덩크의 인기로 인해 꽤 유명한 사실이다.
 
압둘자바(당시 루 앨신더)는 1965년에 입학해 1학년 시즌이 1965-66 시즌이었는데 그가 입학하던 전 시즌인 1964-65 시즌에 UCLA는 토너먼트 우승을 거뒀다(65년 토너먼트 결과).
 
이를 두고 압둘자바는 "그들(상급생 팀)은 1965-66 시즌을 시작하며 전국에선 넘버 원이었지만 캠퍼스에선 넘버 투였죠"라고 언급했다.

다만 이 때 압둘자바에게 패배한 팀은 전 시즌 우승팀이었지만 게일 굿리치라는 에이스를 비롯하여 그해 졸업한 선배들의 전력 누출 때문인지 전혀 강하지 않았다.
 
1966년 NCAA 토너먼트 결과를 보면 UCLA는 우승은 커녕 토너먼트 진출도 못했다.
 
1966년 토너먼트 결과. 상세한 성적을 보면 이 당시 UCLA팀은 18승 8패라는 평범한 성적을 거뒀다. 
 
1965-66 시즌 UCLA 로스터. 물론 압둘자바가 대단한 건 변함이 없지만, 그가 이긴 팀이 전 시즌에 우승을 거둔 팀임에도 실제 전력은 그리 강하진 않았기 때문에 좀 애매한 케이스이다.

여담이지만 1966년에 우승한 팀은 Texas Western이란 학교로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당시에 역대 최초로 주전선수 전원이 흑인인 팀으로 NCAA 토너먼트 우승을 거둔 것으로 유명하고 이 팀을 이끈 감독 돈 해스킨스와 선수들의 일화가 영화로 나온게 Glory Road란 작품이다. 
 
영화 소개. 제리 브룩하이머가 제작했다.
 
현재 텍사스 웨스턴 대학교는 텍사스 대학교 엘패소 캠퍼스로 교명을 바꾸어 지금도 존재한다.

아무튼 1학년을 마치고 NCAA 토너먼트에 데뷔한 압둘자바의 대학생활은 딱 한마디로 설명 가능하다. 
 
역대 최고의 NCAA 선수. 이 시기 UCLA가 NCAA 토너먼트를 7연패하는 최전성기를 구가하는 와중에 1967년에서 1969년까지가 압둘자바의 시대였다.
 
얼마나 사기 유닛이었냐면, 압둘자바가 2학년 시즌을 마치자마자, NCAA에서 덩크 금지 룰을 만들 정도.
 
그리고 덩크가 금지당한 이 괴수께서는 손수 스카이 훅을 개발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압둘자바가 스카이 훅을 창조한 것은 아니다.
 
이미 NBA 초창기에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전신인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의 조지 마이칸이 리그를 지배할 때, 그가 즐겨 쓰던 슛이 현대에 부르는 훅 슛이다.
 
압둘자바도 이를 참고했고, 특유의 길죽길죽한 비주얼과 높은 타점으로 독특한 폼을 선보였던 것이다.
 
훅 슛은 기본적으로 빅맨이 팔을 위로 쭉 뻗은 상태에서 쏘는 것이라 일반 슛보다 타점이 훨씬 높고 쏘는 속도도 빠르며 블록하기가 훨씬 힘들지만 한손으로 쏘는 것이기 때문에 골대에서 멀어지면 정확도가 현격하게 떨어진다.
 
하지만 압둘자바의 스카이 훅은 기존의 훅 슛과 다르게 팔을 아예 골대 반대 방향으로 (물론 수평으로 뻗는게 아니라 ↗요 정도 각도로 위쪽으로) 뻗은 상태에서 압둘자바 특유의 높이와 점프력을 이용해 올라가서 쏘는 것이기 때문에 안 그래도 타점이 높은데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더 올라가서 앞에서 막는게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비교적 타점이 낮은 뒤쪽에서 막는다고 해도 기본 높이가 너무 높고 빨리 올라가기 때문에 블록하기 불가능한 건 마찬가지. 이토록 특이한 슛이라 기존의 훅 슛과 구분해서 '스카이 훅'이라고 부르는 것.
 
슛 장면을 보면 알겠지만 보통 훅 슛은 툭 던지는 느낌이라 포물선을 그리 높이 그리지 않지만, 스카이 훅은 길고도 높은 포물선을 그린다.
 
물론 이렇게 하면 난이도는 극악으로 올라간다.
 
훅 슛이 공을 올려놓는 느낌이라면 스카이 훅은 거의 반대쪽에서 투척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압둘자바는 극강의 손끝감각으로 이런 어려운 슛을 높은 확률로 넣을 수 있어 주무기로 써댈 수 있었던 것.
 
다른 빅맨들도 스카이 훅이 위력적인 건 알지만 알아도 어려워서 못 쓴다. 
 
보통 선수들 같으면 터프샷이라 피해야 하는 페이더웨이를 주무기로 썼던 마이클 조던과 같은 케이스다.
 
정리하자면 훅 슛은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처럼 훅 슛을 던지는 것은 NBA 역사상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NCAA는 단기간 리그파괴를 피할 수 있었지만 대신 NBA의 빅맨들에겐 20년의 재앙을 선물해줬다.
 
졸업과 동시에 1969 드래프트에 참가, 전체 1번 지명으로 창단된 지 2년 된 밀워키 벅스에 지명 됐다.
 
그러고는 당연히 신인왕 획득. 이 때 NBA의 라이벌 리그인 ABA에서도 압둘자바를 꼬시기 위해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는데, 바로 원하는 팀에서 데뷔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드래프트 당시부터 엄청난 대우를 받았던 것.

입단 2년차에 일찌감치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지금도 존재감이 없는 밀워키 벅스 역사의 첫 번째 우승이 이 시기였다.
 
이 때의 밀워키 벅스는 고작 창단 3년차로, 창단 후 가장 빨리 우승한 구단이 되었고, 이는 여지껏 깨지지 않고 있다.
 
커리어가 굉장히 길어지고,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시절의 모습이 많이 방송되어서 기억엔 많이 남아있지만 밀워키 벅스에서 6시즌을 보냈던 선수이다. 
 
빌 러셀에 치이고, 윌트 체임벌린에 치이는 등 우승에 한끝 모자랐던 은퇴를 앞둔 오스카 로버트슨이 도와 우승을 이뤄냈다.

하지만 미국에서 내로라하는 대도시인 뉴욕에서 태어나 로스앤젤레스에서 대학생 시절을 보낸 압둘자바에게 미국 중부지역의 소도시 밀워키는 그에게는 그야말로 따분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우승한 후 팀에게 끊임없이 우승도 시키고 해줄만큼 해줬으니 고향팀으로 트레이드를 시켜달라고 요구한다.
 
팀도 더 이상 잡지 못할 것을 아니까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그나마 원래는 고향 뉴욕이나 뉴저지로 가고 싶어했는데 트레이드 카드가 안맞아서 밀워키 벅스 프런트는 압둘자바에게 양해를 구하고 대안으로 로스앤젤레스로 트레이드 시킨다.
 
그 이후 밀워키 벅스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 그래도 압둘자바는 밀워키 벅스에서 6시즌동안 매시즌 매경기 40분 이상 뛰면서 20-10을 밥먹듯했고, 창단 첫 파이널 우승과 1973-74 시즌 파이널 준우승 등 신생팀 밀워키 벅스의 리그 정착에 크게 기여했다.
 
거기다 트레이드 되지 않았다면 자유계약으로 나갈 것이 확실했다.
 
다름아닌, 밀워키 벅스의 우승을 함께 이끈 오스카 로버트슨이 1970년 존 하블리첵 등과 함께 NBA를 연방법원에 제소하여 1976년 FA 제도의 초석이 되는 선수의 자유이적을 보장하는 판결을 이끌어냈기 때문에, 압둘자바가 1975년 이후 팀에 남았더라도 근 시일내에 이루어졌을 FA 제도의 수혜자가 될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이 때문에 밀워키 벅스도 미련 없이 압둘자바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 실제로 NBA에서 자유계약제도가 생긴 것은 1976-77 시즌 종료 후로, 최초의 자유이적은 당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가드 캐지 러셀이 되었다.
 
러셀은 시카고 불스로 1년 계약을 맺고 자유이적했다.

그러고는 1975년 이적 후에는 핵심선수로 뛰다가 1980년 매직 존슨과 제임스 워디가 온 후에는 그들에게 공격을 맡기고 자신은 골밑 수비에 전념하는 런앤건의 골키퍼가 되어 41세까지 선수로 활약하며 1980년대 쇼타임 레이커스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나이들어서 매직 존슨에게 팀 리더 역할을 물려주기 전까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1옵션이었다.
 
물론 매직 존슨이 팀의 리더가 된 후에도 속공상황이 아닌 하프코트 오펜스 상황에서의 압둘자바는 안정감 그 자체라 38세까지 평득 20점에 야투율 50% 후반대를 찍었다.
 
그만큼 늙어도 괴수였단 이야기.


수상 내역,

수상 내역
 NBA 챔피언 6회 (1971, 1980, 1982, 1985, 1987-1988)
 NBA 파이널 MVP 2회 (1971, 1985)
 NBA 정규시즌 MVP 6회 (1971-1972, 1974, 1976-1977, 1980)
 올-NBA 퍼스트 팀 10회 (1971-1974, 1976-1977, 1980-1981, 1984, 1986)
 NBA 올스타 19회 (1970-1977, 1979-1989)
 올-NBA 세컨드 팀 5회 (1970, 1978-1979, 1983, 1985)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5회 (1974-1975, 1979-1981)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6회 (1970-1971, 1976-1978, 1984)
 NBA 올해의 신인상 (1970)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70)
 NBA 올해의 블록왕 4회 (1975-1976, 1979-1980)
 NBA 올해의 득점왕 2회 (1971-1972)
 NBA 올해의 리바운드왕 (1976)
 네이스미스협회 선정 올해의 대학선수상 3회 (1967-1969)
 NCAA 챔피언 3회 (1967-1969)
 NCAA 파이널 포 MOP 3회 (1967-1969)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1995)


플레이 스타일,

218cm의 신장과 긴 팔, 말랐지만 그 신장대에서 나오기 어려운 뛰어난 기동성까지 고루 갖추었고 공/수 양면에서 엄청난 기량을 선보인 선수였다.


밀워키 벅스   시절의 스카이 훅 (Skyhook) 겹쳐,

그의 주특기인 '스카이 훅'은 타점이 높고 깊은데다 슈팅 레인지가 넓어서 막을 수 없는 신기였다.
 
훅 슛은 원래 골밑에서 포스트업을 하다가 한손으로 툭 던져놓거나 덩치들이 힘으로 욱여넣다시피하는 막슛에 가깝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상대 수비와 직각으로 서고, 일차적으로는 슛하지 않는 반대 손으로 수비를 견제하며 던질 수 있기에 빅맨에게는 배우면 좋은 필수 무기로 각광받았는 것.
 
그러나 압둘자바의 스카이 훅은 일반적인 훅 슛과는 달리 정말 부드러운 릴리즈를 가졌고, 레인지 역시 자유투 라인 이상의 거리에서 던져넣을 수 있을 정도로 길었다.
 
메커니즘과 레인지 자체가 블록을 하기 어렵게 설계되어 있는데, 218cm의 신장과 긴 팔을 가진 압둘자바의 높이까지 고려하면 릴리스 도중 뒤에서 긁어내는 것 외에는 거의 찍어낼 방법이 없었다.

물론 다 못 막은 것은 아니고, 윌트 체임벌린은 연속으로 블록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장면을 잘 보면 첫 번째 슛은 스카이 훅보단 일반적인 훅 슛에 가깝고, 두 번째는 골텐딩이다.
 
무지막지한 타점 외에도 바로 저 부분이 스카이 훅의 사기적인 부분인데, 일반적인 훅 슛은 타점이 위에 있기 때문에 수비가 찰싹 달라붙으면 블록이 가능하다.
 
그러나 스카이 훅은 타점이 골대 반대편에 있어서 포물선을 비교적 높게 그리기 때문에 수비수의 팔을 지나갈 때쯤 되면 볼이 하강 중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높이로 블록해봤자 골텐딩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
 
한마디로 골텐딩에 엄격한 현재 룰이었으면 더 막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소리이며, 위 두 번째 블록 역시 현재같으면 무난히 골텐딩이 불렸을 장면이다.

그 외에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시절의 데니스 로드맨, 고대 센터인 네이트 서몬드 등 수비 실력만큼은 레전드였던 선수들이 종종 블록을 해냈다고 전해지긴 한다.
 
물론 통상적으로 블록이 거의 불가능한 슛임은 명확하고, 때문에 당대 뿐만 아니라 최근까지 근 30년간 많은 선수들이 연습을 시도했지만 택도 없었다.
 
근래에 압둘자바가 교습다니면서 여러 센터들에게 전수하기도 했지만 실전에서 써먹은 선수는 거의 전무. 왜 '거의'냐면 딱 한 명 제대로 써먹은 선수가 있기 때문인데, 또다른 먼치킨이자 압둘자바의 레이커스 시절 파트너인 매직 존슨이 바로 그 선수이다.
 
물론 매직 또한 스카이 훅을 그대로 따라하진 못했고, 베이비 훅(혹은 주니어 스카이 훅)이라는 이름으로 손목을 쓰는 훅 슛이라기 보단 반대쪽으로 던지는 플로터처럼 띄우는 스타일로 나름대로 응용버전을 개발해서 말년까지 유용하게 써먹었다.
 
1987 파이널 4차전에서는 이걸로 결승골을 성공시키기도 했으며, 아래의 장면이 그것이다.


어찌보면 218cm의 매우 가볍고 슬림했던 압둘자바의 신체조건과 더할나위 없이 어울리는 기술이었던 셈.
 
그는 포스트업을 하더라도 상대를 거침없이 밀고 들어가 힘으로 욱여넣는 파워형 센터와는 거리가 있었다.
 
무지막지한 높이로 림에 직접 내리꽂는 덩크는 매우 위협적이었지만, 림과 어느정도 간격을 두고 던지는 샷 또한 선호했으며 그 과정에서 마무리로 즐겨 사용한 기술이 바로 스카이 훅이었던 것.
 
또한 근거리 페이더웨이 역시 포스트업의 마무리 기술로 잘 사용했다.
 
무시무시한 타점 덕분에 수비수를 밀어내거나 타이밍을 어렵게 뺏지 않더라도 스카이 훅&페이더웨이 등의 골밑~숏미드 피니시를 안정적으로 구사할 수 있었으며, 덕분에 압둘자바의 로우포스트 무브는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더라도 간결하고 깔끔한 인상을 준다.

롱 훅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중거리 슈팅도 가능했고, 자유투 성공률은 커리어 통산 0.721로 높다고는 못하더라도 준 거인급 센터로서는 결코 떨어지는 수치가 아니었다.
 
또한 통산 정규시즌 어시스트 개수가 3.6개로 수비 리바운드를 잡고 던지는 속공플레이도 뛰어났으며 포스트 플레이메이킹에도 능했던 당시 빅맨치곤 뛰어난 시야를 보유했었으며 당대 최고의 수비 리바운더이자 11회의 디펜시브팀 및 4회의 블록리더를 기록할 정도로 수비까지 정평이 나있었으니, 그야말로 농구 역사에서 세 손가락에 꼽힐만한 공수겸장이었던 셈.

특징이라면 상기했듯이 그는 신장에 비해 유독 마른 몸이었다는 것.
 
1970~1980년대 선수들의 평균 체중이 지금보다 확실히 가벼운 편이었지만 압둘자바는 그 중에서도 상당히 호리호리한 인상을 주는 선수였다.
 
몸무게가 225파운드 정도로 압둘자바보다 약 10cm 이상 작은 데이브 코웬스와 몸무게가 비슷했고, 마찬가지로 10cm 이상 작은 윌리스 리드(240파운드)보다는 오히려 더 가벼웠다. 
 
이는 압둘자바가 엄청나게 장수하는데 도움이 됐는데, 당시 농구화는 현재와 달리 보호 기능이 거의 없었기에 압둘자바처럼 기본기가 뛰어나고 몸이 가벼워 발목과 발에 부담이 적게 가는 선수들이 장수에 유리했다.
 
실제로 그와 비슷하게 장수한 로버트 패리시 역시 230파운드밖에 안 나갔다.

다만 이렇듯 가벼운 체격 때문에 육중하고 터프하며 파워가 막강한 일부 선수들에겐 비교적 약한 편이었는데, 키는 압둘자바보다 훨씬 작지만 당대 최강의 파워 센터였던 모제스 말론이 대표적이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첨언하자면 압둘자바가 말론의 밥이었던 수준은 아니지만, 상성상 말론을 상대하면 평소보다 훨씬 힘들어한 것은 사실이었다.
 
말론의 동료이자 또다른 레전드였던 줄리어스 어빙은 "말론이 압둘자바를 산채로 잡아먹곤 했다"라고 회상하기도 했으니, 이러나저러나 압둘자바의 최고 난적은 말론이었다.

 

출연작,

영화,

  • 1978년 사망유희,
  • 2022년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

 

드라마,

  • 2013년 ~ 2014년 크레이지 원스 - 본인 역


기타,

무하마드 알리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계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흑인 고유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정치적 진보 성향의 인물이다.
 
UCLA 2학년 시절 수니파로 개종했으며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차출을 거부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활약한 흑인 전차부대의 역사를 조명하는 책을 포함해 여러 책을 집필했고, 각종 매체에서 인종 문제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해 발언하였다.
 
2014년에는 사회주의 성향의 자코뱅이라는 잡지에 NCAA에서 대학생 운동선수들을 보다 공정하게 대우할 것을 촉구하는 글을 투고하기도 했다.
 
2015년에는 워싱턴 포스트 칼럼을 통해 도널드 트럼프를 비판하고 버니 샌더스 지지를 선언했다. 
 
물론 그렇다고 버니 샌더스를 뽑겠다는 소리는 아니었고 매직 존슨처럼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해왔다.
 
EA의 고전게임인 Lakers vs. Celtics and the NBA Playoffs에 등장했는데 스카이 훅은 쏘면 대부분 들어갔다.
 
농구 이외에도 부업으로 영화에 출연한 적도 있다.
 
대표적으로는 사망유희에 출연했으며 이소룡과 압둘자바의 대결은 액션 영화계에서 알아주는 명장면이다.
 
기골이 매우 장대하고 리치가 길며 싸움을 잘하는 흑인 캐릭터로서 깊이 각인된 장면.
사망유희 에 출연했으며   이소룡 과 압둘자바의 대결은 액션 영화계에서 알아주는 명장면,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작중 압둘자바가 맡은 배역의 이름은 하킴이었다
 
실제로 이소룡에게 무술 지도를 조금 받았으며, 이 때 배운 정권으로 시합중에 자신에게 하드파울을 시전한 켄트 벤슨을 가격했고, 턱이 부서지는 부상을 입혔다. 
 
이소룡은 이에 대해 실망의 표현을 했고, 압둘자바도 크게 뉘우치고, 그 이후 누군가를 경기중에 때린 적은 없다.
 
여담이지만 카우보이 비밥 2화에서는 이 하킴을 오마주한 압둘 하킴이라는 캐릭터가 나오며, 역시 이소룡의 절권도를 사용하는 스파이크 스피겔과 위 영상을 오마주한 대결을 벌인다.
 
압둘자바가 사망유희에 출연한 것은 눈에 띄는 피쳐링이었고, 이 후 스포츠맨들의 영화 출연 행각에 영향을 준 바가 있다.
 
(장 클로드 반담과 미키 루크의 영화 더블 팀은 콜로세움에서의 격투를 다루는 등 이소룡의 영화를 오마주한 흔적을 보이는데, 여기에 데니스 로드맨을 출연시켜 기골이 장대하여 리치가 매우 긴 파이트를 보여준다.)
 
이외에도 1980년작 코미디 영화 에어플레인에서는 로저 머독이라는 비행기 부조종사 역으로 나름 비중있게 나온다.
 
이름이 로저라서 조종사랑 항공관제사가 알겠다는 뜻으로 "ROGER!" 할때마다 자기 부르는 줄 알고 "뭐?" 라 말한다.
 
그리고 꼬마 승객이 "나 당신 알아요,
 
분명 카림 압둘자바야!" 라고 하는데 딱 잡아뗀다.
 
그리고 "울 아빠가 당신은 디펜스 능력이 부족하댔어요"라고 깐족거리니 꼬마의 멱살을 쥐고 "내가 그 얘기 NCAA 때부터 들었거덩?"하며 자폭한다.
 
중후반에 상한 생선을 먹고 실려나간 후에는 안 나온다.
 
하지만 은퇴한 뒤엔 수 차례의 사업 실패로 인해서 망하고, 이 때문에 미국 운동선수 사이에서는 늙어서 카림 압둘자바처럼은 되지 말자 식으로 수군거린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도 있었지만, 그의 돈은 대부분 빈민구호 명목의 기부로 이어졌다.
 
자선사업으로 빈민가의 아이들에게 캠프를 보내 수학과 과학, 공학 등을 가르치는 자선재단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현역시절 트레이드마크인 고글과 우승반지, 트로피도 모두 자선재단 기부로 인한 경매에 들어갔다.
 
그 외에도 2000년 2월에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의 코치를 맡은 걸 시작으로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고문, USBL 팀 오클라호마 스톰의 감독을 거쳐 2005년부터 6년간 친정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코치로 돌아와 필 잭슨 감독을 보좌했다.
 
1990년엔 친정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를 비롯해 1993년 4월 24일 밀워키 벅스에서 등번호 33번이 각각 영구결번 지정 되었고, 2009년 9월에는 前 NBA 및 NBA G 리그 선수들로 구성된 팀을 이끌고 감독 자격으로 방한하여 KBL 올스타팀과 대결을 펼친 적이 있다.
 
당시 무명시절의 샘 해밍턴이 행사에 참여해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샘이 이야기하기를 예상 밖으로 재밌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노우에 타케히코의 농구만화 슬램덩크에서 채치수의 방에 붙어있는 포스터의 주인공이다.
 
그 밖에도 서태웅의 1학년 팀과 채치수의 2, 3학년팀이 연습경기를 할 때, 채소연과 이한나 매니저가 위에 언급된 1학년 시절 압둘자바의 팀이 선배들을 연습시합에서 박살내버린 일화를 얘기하며 등장했다.
 
1994년작 MBC 미니시리즈 《마지막 승부》에서는 시력이 나쁜 이동민이 고글을 끼고 운동을 하자, 고참인 김만재가 건방져보인다,
 
렌즈 끼라며 갈구고, 이에 동민은 기합을 받으며 나는 압둘자바다! 나는 압둘자바다!라고 외치는 장면이 있다.
 
격투게임 더 킹 오브 파이터즈 시리즈의 아메리칸 스포츠 팀 일원인 럭키 글로버는 이 사람을 모델로 만든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농구선수 출신 공수도 유단자라는 점이 특히 더 그렇다.
 
모탈 컴뱃 시리즈의 흑인 소림승 카이의 모델이기도 하다.
 
선배 소림승 리우 캉의 모델은 이소룡.
 
2008년 말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2011년 2월에 완치 소식을 발표했다.
 
재즈 매니아로 유명한데, 3000장이 넘는 음반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존 콜트레인과 델로니어스 몽크 등의 음악을 들으며 자랐고, 재즈/소울 뮤지션이자 시인인 길 스콧헤론과는 학창 시절부터 친구였으며 스콧헤론의 결혼식에 압둘자바가 들러리를 서 주기도 했다.
 
2013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이적한 류현진에게 싸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정작 류현진은 압둘자바에 대해 모르는 표정이었다.
 
2015년 짱구는 못말려 X파일 3기 21화 '트레저 헌터 봉미선' 편에서 사망유희 촬영 당시의 코스프레를 한 채 나왔다.
 
2015년 9월 셜록 홈즈의 형인 마이크로프트 홈즈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마이크로프트 홈즈를 출간했다.
 
1870년대 20대 초반의 마이크로프트 홈즈가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이라고 한다.
 
커리어 통산 블록 개수가 3,189개로 하킴 올라주원과 디켐베 무톰보에 이은 역대 3위이다.
 
그러나 그는 프로 데뷔 후 네 시즌이 지나서야 블록이 집계되어 손해를 봤는데, 만약 첫 네 시즌 동안의 숫자가 집계되었다면 올라주원을 훌쩍 뛰어넘는 기록을 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압둘자바는 블록이 처음 집계된 1973-74 시즌에 평균 3.5개를 내고 그 다음 7시즌 동안 평균 3.5개를(최소 한 시즌 3개) 기록했다.
 
이 수치를 블록이 집계되지 않은 초반 네 시즌(321경기)에 대입하면 그의 통산 블록은 4,312개가 된다.
 
보수적으로 잡아서 평균 3개라고 쳐도 4,152개로 하킴(3,830)의 기록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가 나온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역대 선수들을 다 고려하면 압둘자바의 순위는 여전히 3위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윌트 체임벌린과 빌 러셀의 존재 때문인데, "평균 7~8개"라는 증언이 과장이라고 생각해 평균 5개라고 생각해도 체임벌린은 5,225개, 러셀은 4,815개라는 말도 안 되는 수치가 나온다.
 
사실 "평균 7~8개" 자체가 터무니없다고 보기도 힘든 게 한 양덕이 체임벌린과 러셀의 당시 블록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는 신문기사를 샅샅이 뒤져서 통계를 내본 결과 체임벌린은 112개에서 평균 8.8블록, 러셀은 135경기에서 평균 8.1블록이라는 무지막지한 수치가 나왔다고 한다.
 
참고로 두 선수 모두 마지막까지 포함된 수치 게다가 블록 능력에 있어선 저 둘에게 꿇리지 않았던 네이트 서몬드의 존재까지 고려하면 어쩌면 3위 밖으로 밀려났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본인의 우승 반지 4개를 비롯하여 234개의 기념품을 경매에 내놓았다고 한다.
 
경매 수입의 대부분은 본인이 새운 재단인 '스카이 훅 재단'을 통해 아동 지원 사업에 쓰일 예정이라고. 이에 압둘자바는 "내가 현역 시절 받은 반지, 트로피들을 방에 전시하는 것과 어린이들이 교육받을 기회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내가 가진 것들을 다 팔아도 좋다"고 말했다.
 
이 기념품들은 한화 약 33억에 팔렸다. 
 
전당포 사나이들의 에피소드에서도 이 물품들이 나오는데 경매장에 물건을 구입하러 온 릭의 앞에 직접 본인이 나타나서 진품 인증을 해 준다. 
 
압둘자바가 농구 경기 중에 고글을 착용하는 이유는 대학 시절에 왼쪽 눈을 다친 것 때문이다.
 
재밌는건 같은 팀의 제임스 워디 역시 1985년부터 눈 부상으로 고글을 항상 쓰고 다녔기 때문에 당시 어린 NBA팬들은 저 둘을 "고글 쓴 큰 선수/작은 선수"로 구분하기도 했다. 
 
키가 14세 때 이미 6-8, 즉 203cm에 달했다고 한다.
 
NBA는 카림 압둘자바의 이름을 따 '카림 압둘자바 사회정의상'을 선정하고 있다.
 
출시를 앞둔 NBA 2K22의 NBA 75주년 한정판에 디르크 노비츠키, 케빈 듀란트와 함께 커버 표지로 선정되었다. 
 
 
 

덕 노비츠키(43)

독일의 농구 선수,

바이에른 주 출신 인물,

1978년 출생,

1994년 데뷔,

2019년 은퇴,

NBA 영구결번 선수,

파워 포워드,

센터(농구),

댈러스 매버릭스/은퇴, 이적,

NBA MVP,

원클럽맨,

디르크 노비츠키의 주요 이력및 수상 경력,

댈러스 매버릭스 No. 41
디르크 베르너 노비츠키
Dirk Werner Nowitzki
생년월일
1978년 6월 19일 (44세)
신장
213cm (7' 0")
체중
111kg (245 lbs)
국적
출신지
바이에른 주 뷔르츠부르크
포지션
파워 포워드
드래프트
1998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9순위
밀워키 벅스 지명
 
소속팀
DJK 뷔르츠부르크 (1994-1998)
 댈러스 매버릭스 (1998-2019)
국가대표
독일 U-22 (1998)
독일 (1997-2015)
등번호
41번

개요. 커리어. 어린 시절. 선수 경력. 은퇴 이후. 수상 내역. 플레이 스타일. 여담. 관련 문서,

 

개요,

"ALL DREAMS ARE CRAZY. UNTIL THEY COME TRUE."
"모든 꿈은 미친 소리처럼 들리기 마련이다.

그 꿈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독일 출신의 전 NBA 선수이며 포지션은 파워포워드. 한 팀인 댈러스 매버릭스에서만 21시즌을 뛰었으며, 댈러스 매버릭스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는데 이견이 없다.
 
그의 등번호 41번은 맵스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커리어,

어린 시절,

디르크 노비츠키는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헬가는 독일 국가대표 농구선수였고, 그의 아버지는 독일 최고의 핸드볼선수였던 베르너 노비츠키, 그의 누나인 실케는 육상선수 출신으로 농구선수인 운동선수 집안. 노비츠키는 어렸을때 주로 테니스와 핸드볼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키가 부쩍 크기 시작하자 그는 농구로 종목을 바꾸게 된다.

스포츠 집안의 아들이라서 그런지 일찌감치 재능이 보였던 노비츠키는 지역농구팀이었던 DJK 뷔르츠부르크에 참여한 후 전직 독일 농구선수였던 홀거 게슈빈드너(Holger Geschwindner)의 눈에 들게되고, 그는 노비츠키의 개인코치가 된다.
 
게슈빈드너는 노비츠키를 엄격하게 가르쳤고 농구뿐만 아니라 노비츠키를 한 사람의 인격체로 만들기 위해서 악기를 연주하고, 문학책을 읽을 것을 권장하기도 했다. 
 
몇 년 후 일취월장해가는 모습을 보고 감탄한 게슈빈드너는 노비츠키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된다.
"너는 지금 세계무대에서 최고를 상대로 뛰는 것을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독일의 슈퍼스타로 남을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만일 네가 후자를 원한다면 우리는 곧 훈련을 멈출거다.

왜냐하면 아무도 너를 막지 못할테니까. 하지만 네가 전자를 원한다면 우리는 다시 매일 훈련해야 한다."
 
이틀간의 심사숙고끝에 노비츠키는 더 높은 곳을 향해 도전하기로 했고 DJK 성인팀에 16살의 나이로 입단을 결정했다,
 
 

선수 경력,

자세한 내용은 디르크 노비츠키/선수 경력 문서 참고하십시오.

 

은퇴 이후,

새로이 브루클린 네츠의 감독이 된 절친 스티브 내시에게 코치직을 제의받았으나 본인이 아직 현장에 복귀하기는 너무 이른것 같고 아직은 쉬고 싶다는 이유로 고사하였다.

추후 댈러스 지역언론에 밝힌 바에 따르면, 위의 이유들 뿐만아니라 과연 자신이 댈러스를 벗어나 무언가 할 수 있을까? 에 대한 의문이 생겨서였다고. 21년을 댈러스 매버릭스에 헌신한 만큼 다른 지역으로 떠날 생각이 들기가 쉽지 않은 모양. 그의 영원한 동반자이자 구단주 마크 큐반도 노비츠키의 댈러스 코칭스태프 자리는 늘 마련되어있으니 언제든지 합류할 수 있다고 누차 말해오긴했었다.

2020-21년 시즌이 종료된 후 댈러스는 새로운 GM과 헤드 코치 물색에 도움을 주고 프론트의 결정에 대한 컨설팅을 담당할 특별 고문으로 노비츠키를 선택하였다.

2022년 댈러스와 골든스테이트의 경기에서 영구결번식을 가졌다.
 
이 경기에서 댈러스는 레전드에게 바치는 승리를 거두었다.
 
감독이자 현역시절 같이 우승을 일궈냈던 동료 제이슨 키드는 이때 헌정사에서 노비츠키에게 "10일 단기계약하자고 하면 돌아올래?"는 농담반 진담반 질문을 던졌다.
 
관중들의 우레와 같은 환호완 달리 노비츠키는 웃으며 거절.


수상 내역,

수상 내역
NBA 챔피언 (2011)
NBA 파이널 MVP (2011)
 NBA 정규시즌 MVP (2007) 
 올-NBA 퍼스트 팀 4회 (2005-2007, 2009)
NBA 올스타 14회 (2002-2012, 2014-2015, 2019)
 올-NBA 세컨드 팀 5회 (2002-2003, 2008, 2010-2011)
 올-NBA 서드 팀 3회 (2001, 2004, 2012)
 NBA 올해의 팀메이트상 (2017)
 NBA 3점슛 콘테스트 챔피언 (2006)
 FIBA 올해의 유럽선수상 2회 (2005,2011)
유로바스켓 은메달 (2005)
유로바스켓 MVP (2005)
 2002 FIBA 세계 선수권 대회 미국 동메달
 FIBA 세계 선수권 대회 MVP (2002)

플레이 스타일,

7피트의 장신 선수임에도 4번 포지션에서 뛰지만 프로 농구의 대부분의 4번과는 판이하게 다른 스타일을 구사하던 선수로, 스트레치 빅맨 정점이지만 그렇다고 전형적인 스트레치 빅맨은 아니었다.
 
매우 다양한 공격기술과 180 클럽의 슛터치를 기반으로 내외곽을 가리지 않고 득점을 해내는 역대 최고수준의 공격형 파워 포워드였으며, 역대 180클럽 가입자 중 최장신이자 유일한 파워 포워드이다.

우선 신체적인 부분을 보자면 착화로는 216cm로 표기되던 장신에 윙스팬도 221cm로 합격점. 더불어 신장대비 훌륭한 기동성과 민첩성은 물론 게르만 계통의 선수답게 강한 힘도 가진 선수였다.
 
사실 기량 유지가 잘 된 선수치곤 운동능력이 은근 빨리 꺾인데다 말년에는 실제로 느림보였기에 많이들 오해하지만, 흔히 말하는 리얼 7푸터들 중 젊었을 적 노비츠키만큼 기민한 선수는 의외로 찾기 어려웠다.
 
수직 점프력이 다소 낮았던 걸 제하면 흠잡을 데 없는 하드웨어를 가진 선수가 슈팅은 농구 역사상 손꼽히는 수준에, 풋워크와 드리블 등의 기본기도 뛰어나 과장 보태지 않고 7풋 스윙맨이라고 해도 좋을 기술들을 구사했으니 00년대 기준으로는 가히 게임에서나 나올 선수였던 셈.
 
농구계에선 장신 센터급 프로필에 기민한 몸놀림, 뛰어난 기술과 슈팅 능력 등을 모두 겸비한 선수를 환상의 동물과도 같다고 하여 유니콘이라 부르곤 하는데, 노비츠키는 이런 유니콘 빅맨들의 시초격이라 볼 수 있는 선수였다.

일단 플레이 시작을 하이포스트에서 주로 한다.
 
일반적인 4번 사이즈를 가진 공격형 파워 포워드나 스트레치 포워드도 이렇게 시작은 안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욱 두드러진다.
 
외곽에서 공을 잡고 돌파를 시도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이포스트에서 스크린으로 시작하는 투맨 게임을 통해 패싱으로 빈 공간을 만들어내고, 슛을 던진다.
 
거기다 자신이 직접 미드레인지에서 슈팅을 던지면서 마무리하는 타입이라 인사이드 리바운드에 들어가지 않는다.
 
결국 노비츠키의 타점 높은 슛을 막으려면 상대 4번도 같이 나와서 컨테스트를 해주지 않으면 안된다.

사실 미들레인지, 그 중에서도 롱2에 해당되는 구간에서의 점퍼는 농구의 기본 명제를 고려할 때 매우 비효율적인 공격이다.
 
지금도 골대 가까이에서 슛을 던지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며 멀리서 던지는 것은 성공률도 문제고 실패 시 리바운드 가능성을 떨어뜨린다.
 
따라서 이 곳에서의 슈팅은 일반적인 상황에선 금기시되며, 멀리서 던질 것이면 차라리 3점 라인 바깥에서 던지는 것이 권장된다.
 
아니면 가까이 붙어서 성공률도 높이고 리바운드 다툼에도 도움이 되거나. 그래서 롱2라고 불리는 장거리 미들슛을 주무기로 삼는 선수들은 노비츠키나 라마커스 알드리지처럼 높은 성공률을 갖지 못하면 팀에 민폐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노비츠키의 주요 득점루트는 바로 이 3점 라인 살짝 안에서의 장거리 미들슛, 농구에서 가장 기대치가 떨어지며 가장 금기시되는 슈팅이다.
 
그리고 노비츠키의 위대함은 여기서 드러난다.
 
그런 비효율성을 무시해도 될 정도로 야투율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96-97시즌 부터 20-21 시즌까지의 거리, 구역 별 리딩 스코어러를 나열해보면 12~20피트 전체를 노비츠키가 독점하고 있고, 7개로 나눈 미드레인지 구역 중 6개를 차지할 정도로 미드~롱2에 굉장히 강하다는 것을 할 수 있다. 거리 별, 구역 별,

MVP를 수상한 2006-07 시즌의 골밑슛의 성공률은 .603으로 르브론 제임스처럼 7할 내외를 찍는 괴물은 물론이고 6할 중반에서 7할대를 찍었던 케빈 가넷, 팀 던컨에 비해 꽤나 처지는 수준이다.
 
특히 짧은 야투 성공률은 .409로 파워 포워드로서는 낙제점이었다.
 
그러나 중거리 성공률이 .500, 롱2 성공률이 .504, 3점슛 성공률이 .416으로 림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위협적인 슈팅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같은 시즌 골밑슛 시도 횟수가 260회, 3~10ft 내외의 짧은 야투 시도 횟수가 116회 였는데 비해 10~16ft 중거리슛 시도 횟수는 363회, 16ft~3점 라인 안쪽의 롱2 야투 횟수는 504회나 된다.
 
3점 시도 횟수도 192회로 짧은 야투 시도 횟수보다 많은 수준. 야투 시도 차트만 보면 파워 포워드가 아니라 슈팅 가드라고 봐도 될 정도다.
 
또한 우승을 거둔 시즌인 2010-11 시즌 노비츠키가 기록한 야투성공률은 51.7%로 커리어 하이 기록인데, 12월 부상으로 9경기를 쉬기 전까지는 무려 54.9%였다.
 
단순한 인사이더가 아닌 중장거리 슛을 주 무기로 삼고있는 선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놀라운 기록.

가뜩이나 막기 힘든 높은 타점인데 페이더웨이까지 구사한다.
 
보통 선수 상대라면 슛거리는 길지만 들어가봐야 2점이니 재수가 없었다고 치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게 던지는 족족 계속 들어간다. 
 
상대 팀 입장에서는 속이 뒤집힐 수 밖에 없다.
 
어중간하게 마크맨이 컨테스트해도 다 씹고 들어간다.
 
사기츠키라는 별명은 이런 사기적인 슈팅 능력 때문에 생긴 것이다.
 
오죽하면 수비엔 정말 둘째가라면 서러운데다가 당대 리그 최고의 수비수로 노비츠키의 라이벌이던 케빈 가넷조차 저걸 어떻게 막냐란 말을 했었을 정도.
 
그렇다고 더블팀을 들어가면 시야도 준수해서 오픈찬스인 동료에게 볼을 뿌려주면 그만이다.
 
게다가 저런 슛을 궁지에 몰린 중요한 순간, 역전이나 동점이 걸린 클러치 상황에서도 곧잘 넣었으니 사기란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ESPN Sport Science에서 분석한 내용을 보면 이게 왜 사기인지 이해가 갈 것이다. 
 
야오밍의 키를 가진 선수가 데릭 로즈만큼 점프를 해도 블럭이 불가능한 슛을 어쩌란 말인가? 페이드 어웨이를 쏠 때 무릎으로 방어하는건 덤이다.

이게 사기적인 게, 야오밍은 7피트 5인치, 즉 226cm인데, 로즈의 전성기 점프력이 40인치, 즉 1m를 조금 더 높이 뛸 수가 있었다.
 
즉, 야오밍의 키를 가진 선수가 로즈만큼 뛰면 3m가 넘는 높이까지 올라가는 건데, 그 높이로 뛰어도 블락슛이 안되고 공은 이미 손을 떠나 림으로 향해가고 있게 된다.
 
그렇다고 이걸 막으려고 대인 방어로 거머리처럼 붙었다가는 노비츠키가 방어하는 무릎에 접촉 될 경우 파울이 불릴 게 뻔하며, 던져서 들어갈 경우 앤드-원, 즉 자유투를 하나 더 던지게 된다.
 
그런데 노비츠키가 자유투를 상당히 잘 던지는 선수라 이렇게 되면 상대 슈팅 가드에서 3점슛을 먹히는 거나 똑같다.
 
이 요상한 폼으로 던지는 슛이 쏘는 족족 들어가니 수비하는 선수 입장에서는 그의 공이 림을 향해 포물선을 그릴때 그저 림이나 백보드 맞고 빗나가길 바랄 뿐이다.
 
거기다 돌파력도 좋은 선수이니 수비수 입장에서는 슛 하나만 견제하고 있을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환장할수 밖에 없다.

골밑을 파고드는 빈도가 높진 않다보니 S급 빅맨치고는 얻어내는 평균 자유투의 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성공률은 90퍼센트를 넘긴 시즌도 수차례 있고 통산 성공률도 87프로에 달하며 통산 자유투 득점은 역대 7위이다.
 
그렇다보니 파울로 끊을 수도 없다.

노비츠키의 시그니쳐 기술인 ONE LEGGED FADEAWAY에 관한 얘기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페이스업 혹은 포스트업을 치며 스텝을 밟다 다리 하나를 올리며 쏘는 페이더웨이슛이다.
 
국내에선 슛을 쏘는 폼이 어쩐지 학과 비슷하다하여 주로 학다리웨이라고 부르는편이다.
 
기술적으로 기존의 페이더웨이슛과 다른 점이 있다면 마이클 조던의 턴어라운드 페이더웨이는 "에어 조던"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해준 그 말도 안될 정도의 높은 체공력을 살린 것이고 노비츠키의 페이더웨이는 자신의 큰 신장과 팔길이를 십분 발휘한 것이다.
 
게다가 올린 다리로 공격시 방어까지 겸하니 막기가 여간 까다로울 수밖에 없으며사실상 알고도 못 막는 수준이다.
 
그래서 그런지 노비츠키 본인은 이 기술을 두고 백인 버전의 스카이훅이라 말하기도. 
 
기술의 위력이 상당한 것을 떠나 배우기엔 그렇게 어렵진 않은 것인지 다른 선수들도 많이 써먹는 편이다.
 
대표적으로 가장 유명한 선수들이 코비 브라이언트와 그리고 케빈 듀란트다.

그의 슈팅 능력은 클러치 상황에서 두각을 드러낸다.
 
실제로 유튜브에 노비츠키가 역전샷을 넣은 장면으로만 만들어진 하이라이트들이 많을 정도다.

노비츠키가 클러치 상황에서 강한 이유는 롱2가 비효율적인 슛임에도 꾸준히 사용되는 이유와 같다.
 
수비 집중도와 야투율을 종합적으로 따지면, 롱2 위치는 농구코트에서 슈팅을 시도하는 난도가 가장 낮은 곳이다.
 
3점 라인 밖은 수비 집중도가 가장 낮고 점수가 높지만 그만큼 성공률이 낮고, 골밑은 아투율이 높지만 그만큼 수비를 뚫기 어렵다.
 
물론 핸드 체킹룰이 개정되고 선수들의 3점 슈팅 능력이 발전 하면서 골 밑 득점과 3점슛에 대한 기대값이 상승하였고, 롱2는 더욱 더 비효율적인 슈팅이 되면서 입지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클러치 상황에서는 다르다. 
 
막판 원샷 플레이까지 안 가더라도, 상대팀이 수비를 악착같이 하면 팀전술로 3점 기회를 만들기도, 평상시보다 파울을 짜게 부는 플레이오프 상황에선 골밑까지 가기도 어렵다.
 
이 때문에 개인의 능력으로 득점을 짜내줄 수 있는 확실한 에이스가 없는 팀이 팀 전력에 비해 플레이오프에서 약한 것이다.

그런데 확실한 득점 하나하나가 아쉬운 상황에선 수비밀도가 낮은 롱2가 중요한 옵션이 된다.
 
막판 원샷 플레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상황에선 오픈샷이나 골밑 돌파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슛이 견제받는 터프슛이다.
 
때문에 클러치 3점은 시도 자체가 어렵고 성공률은 더더욱 낮아진다.
 
이렇게 팀 전술을 짤 여유 없이 에이스의 능력으로 점수를 급하게 짜내야 상황에선 롱2가 최고의 옵션이 된다.

하이스크린 완성도는 완벽에 가깝다.
 
이 뛰어난 스크린과 특유의 슈팅 능력으로 투맨게임에서 발휘하는 위력은 놀라운 수준이었으며, 제이슨 테리와 펼치는 픽앤팝은 댈러스의 리셀 웨폰이었다.
 
또한 데뷔 초기에는 수비를 계속 지적당했지만, 거듭된 노력 끝에 일대일 수비에서 구멍이 되는 일은 없어졌다.
 
수비를 잘 하진 못해도 네거티브 수비수까진 아니었다고 볼 수 있으며, 11시즌 댈러스에서 그러했듯 팀원들의 수비력이 우수하다면 충분히 커버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는 플레이오프 통산 140경기에서 25.4점 10.2리바운드를 올렸는데, 은퇴 선수들 중 플레이오프 통산 평균 25점-10리바운드 이상을 넘어선 선수는 밥 페팃, 엘진 베일러, 하킴 올라주원과 노비츠키뿐이라고. 또한 30득점 0턴오버 게임 횟수가 36회로 마이클 조던과 공동 1위다.


이 영상과 아래 영상에서 말년과는 사뭇 다른 리즈 시절 노비츠키의 운동능력을 실감할 수 있다.
 
특히 좀처럼 볼 수 없는 탄력적인 덩크와 코스트 투 코스트를 하는 모습들이 단연 압권.


노비츠키의 4년차 2002 플레이오프로 케빈 가넷의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를 상대로 39점 17리바운드를 기록한, 말그대로 날아다닌 수준의 경기였다.
 
당시 시리즈 평균기록은 33.3득점 15.7리바운드 1.3블록 3.0스틸 야투율 52.6% 3점 72.7(평균 2.6개) 자유투 88.9%. 참고로 이 시리즈에서 댈러스는 내리 3승을 따내며 다음 라운드로 진출했다.


여담,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데이비드 로빈슨, 팀 던컨과 마누 지노빌리, LA 레이커스의 매직 존슨과 코비 브라이언트, 유타 재즈의 존 스탁턴,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레지 밀러와 함께 한 구단의 황금기를 이끌며 은퇴하는 순간까지도 한 팀에서만 발자취를 남긴 원클럽맨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비미국 출신' 농구선수 중에서 윗세대의 하킴 올라주원, 후세대의 야니스 아데토쿤보와 함께 역대 최고로 평가받는다.
 
노비츠키 이상의 업적을 자랑하는 하킴의 경우 미국 국적을 취득한 뒤 드림팀에 발탁된 적이 있고, 따라서 '비미국인 농구선수'로서는 노비츠키가 십수년간 이견의 여지가 없는 No.1의 위치를 유지하였다.
 
2021년 현재 후발주자인 야니스 아데토쿤보가 2 time MVP 수상에 이어 노비츠키와 같은 프랜차이저 하드 캐리로 우승을 해내며 그의 위치를 강하게 위협하는 중이다.
 
여담으로 노비츠키와 야니스의 우승은 정확히 10시즌 차이로 이루어졌다.
 
독일 출신으로서 먼저 NBA에 진출했던 데틀레프 슈렘프와 함께 NBA에서 성공한 독일인 농구선수로 평가된다.
 
독일 농구 국가대표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편. 거의 대표팀 소집을 거른 적이 없다.
 
심지어는 유럽농구에서 존재감이 미비한 마케도니아와 독일의 평가전때도 소집에 응했을 정도. 노예가 따로없다.
 
하지만 2010-11 시즌이 시작되기 전 오프시즌에는 대표팀 차출을 처음으로 거부했다.
 
독일 농구협회에서도 그의 결정을 이해하는 분위기. 이것이 국가대표 은퇴가 아니라고 밝힌 것으로 보아 향후에도 대표팀 소집에 응할 용의는 있는듯?
 
그리고 선수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2016년 그는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댈러스 구단은 홈구장 아메리칸 에어라인스 센터 바닥에 노비츠키의 실루엣을 담았는데 노비츠키의 전매특허인 ‘학다리 페이드어웨이 슛’을 올리고 있는 노비츠키의 실루엣이다. 
 
양쪽 페인트존 부근에 하나씩 새겨질 예정이다. 
 
또한 지난 시즌과 달리 센터 서클에 있는 말 모양 로고가 좀 더 커지고 그 아래 댈러스 도시를 형상화한 스카이라인이 새롭게 들어갔다. 
 
2011년 독일 최고의 운동선수에 뽑혔다.
 
농구선수가 뽑힌 건 최초라고. 좀 늦은감이 있었다.
 
독일이 축구 최강국이기는 하나 한 때 2000년 초중반 독일 국대와 분데스리가의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졌던 시기도 있었다.
 
사실 독일 농구 국가대표팀은 노비츠키 때문에 그나마 이만큼 먹고 산다.
 
노비츠키가 없으면 그야말로 시망.
 
이는 독일 국가대표팀 다른 선수들 기량이 노비츠키와 너무 차이가 나는데다 노비츠키 역시 국가대표 에이스라는 막중한 자리 때문에 많은 부담감을 느끼고 혼자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FIBA 농구 월드컵에서 노비츠키 활약이 압도적이었고 2002년 미국에서 열린 FIBA 농구 월드컵에선 그가 맹활약하며 독일은 역사상 최대 성적인 3위까지 기록했다!
 
노비츠키는 이 대회에서 득점왕과 MVP를 동시에 차지했다.
 
또한 2005년에 세르비아-몬테네그로에서 개최되었던 유로바스켓 2005에서도 맹활약을 펼치며 독일은 역사상 최대 성적인 준우승까지 기록하였다!
 
그리고 노비츠키는 이 대회에서 득점왕과 MVP를 동시에 차지하였다.
 
그 외에 2001년 유로바스켓에서도 득점왕을 차지하며 독일을 4위까지 이끌고, 2006년 FIBA 농구 월드컵에서도 노비츠키가 득점왕까지 차지하면서 활약한 독일은 8강에 진출했다.
 
다만 2010년 대회는 부진하여 독일팀은 17위에 그쳤고 2014년 대회는 독일이 본선 탈락했다.
 
그 외에 유로바스켓 2007에서도 득점왕까지 차지하면서 독일의 8강 진출을 이끌었다.
 
플레이 스타일이 주로 슛을 위주로 한 플레이다 보니, 무시무시한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한 화려한 농구를 구사하는 케빈 가넷이나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블레이크 그리핀에 비하면 좀 재미가 없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포스트업과 페이스업, 돌파를 장착하긴 했지만, 역시 재미보다는 공격의 다변화라고 보는게 맞다.
 
NBA에서 통산 2만 득점을 돌파한 첫 번째 유럽인 선수다.
 
NBA에서 자신만의 족적을 잘 남기고 있는중. 그리고 3만 득점까지 달성하고 명예로운 은퇴을 맞이했다.
 
2016년 ESPN에서 선정한 역대 파워 포워드 랭킹에서 팀 던컨과 칼 말론에 이어 3위에 랭크되었다.
 
올해의 유럽 선수상을 7회 수상했고 이탈리아 스포츠 신문인 가제타 델라 스포츠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유럽 농구선수상을 5년 연속으로 수상했다.
 
2005년 이탈리아 스포츠 잡지인 슈퍼바스켓이 선정하는 올해의 남자 유럽 선수상과 FIBA 유로 올해의 농구선수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2011년 NBA 챔피언이 된 이후 주가가 급상승했다. 
 
팬들 사이에서는 플레이오프 및 결승전에서의 대활약으로 노비츠키를 재평가하는 분위기이며, 언론매체 여기저기서 찬양, ESPN에서 수여하는 "ESPY Best NBA Player" 부문에 이어 "ESPY Best Male Athlete" 부문까지 수상함으로써 2011년을 명실상부한 노비츠키의 해로 만들었다.
 
11시즌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노비츠키는 11시즌 연속 정규시즌에서 1500득점 이상을 올렸다.
 
유럽 선수 중에서는 전무한 성과. NBA에서는 칼 말론 이후 처음인데 말론는 1986-87 시즌부터 1997-98 시즌까지 이 기록을 달성한 바 있다.
 
2015년 기준 NBA 단일 구단에서 29000득점 이상을 올린 선수는 칼 말론, 마이클 조던, 코비 브라이언트 그리고 노비츠키인데 30000득점 이상으론 칼 말론, 코비 브라이언트, 노비츠키 셋 뿐이다.
 
2015년 12월 22일 기준 코비, 던컨에 이어 오로지 한팀에서 세번째로 가장 오랫동안 뛴 선수이다.
 
원클럽맨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추세인 NBA에서 몇 안되는 진정한 프랜차이즈 스타라 볼 수 있다.
 
코비처럼 한 팀에서의 근속 20년도 무리없이 채우게 될것으로 보인다.
 
노비츠키는 2016년을 기준으로해서 1996년 이래 커리어 +/- 탑3에 속한다.
 
3위는 +6,658의 르브론이고 2위는 +6,725의 노비츠키인데 1위는 무려 +10000의 팀 던컨이었다
 
역대 윈셰어 순위 8위에 올라있다.
 
非 미국인 선수 중 NBA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올렸고 가장 많은 경기를 뛴 선수가 되었다.
 
차갑고 무뚝뚝한 독일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인터넷을 잘 뒤져보면 예술급 표정의 그의 사진을 감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사진.
 
2016년 호세 바티스타 vs. 루그네드 오도어의 드잡이를 패러디한 사진을 오도어와 찍기도 했다.
 
이때 노비츠키는 호세 바티스타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농구에서는 사기꾼이지만 랩에는 젬병이다. 압권은 27초 부근이다.
 
샤킬 오닐의 유년기와 비슷하게도 어릴 적엔 큰 키로 놀림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스포츠 집안의 내력이어서 그런지 다른 종목에도 두각을 나타냈지만 굳이 농구를 선택한 것은 그냥 놀림을 덜 받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래리 버드는 노비츠키의 우승 시즌, 파이널이 끝나고 한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노비츠키에 관해 이렇게 언급한 바가 있다.
"우리는 공통점이 많다. 둘다 크고 외곽슛도 가능하다.

리바운드도 잘하며 경기에 헌신할 수 있다. 노비츠키를 고교 시절부터 봐왔는데 그때 난 사람들이 왜 나와 디르크를 비교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가 내 이름과 함께 연관된다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다.
 

이후 버드는 노비츠키의 은퇴식에도 참석했는데 남다른 유머감각을 뽐내며 노비츠키의 커리어를 축하해주었다.

이때 "네 덕에 NBA 리그는 성장했어."라고 말하는 버드 앞에서 노비츠키가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눈시울이 점점 붉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다룰 줄 아는 악기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첼로. 상기했듯, 노비츠키의 은사인 게슈빈드너가 오케스트라 수업까지 받길 권유했기 때문. 게다가 한 TV쇼에 나와선 기타 연주를 선보이기도했고, 취미로 색소폰을 분다고도 알려져 있다.
 
2014년에 본인의 농구인생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더 퍼펙트샷이 개봉되기도 했다.
 
그의 훈련방식이나 성장과정이 궁금하다면 꽤 흥미롭게 다가올 작품이다.
 
7풋 이상 빅맨의 3점슛 성공수 기록에서 압도적인 1위를 유지중이다.
 
2위하고의 차이는 꽤 큰편이다. 
 
2016년 4월 13일 기준 전체 통산 3점슛 누적 순위는 1700개로 전체 15위에 랭크되어있다.
 
가드와 전문 슈터가 아님에도 꽤나 상위권이다.
 
역대 단일경기 팀내 최다득점 랭킹에서 6위에 랭크되어 있다.
 
1위부터 칼 말론, 카림 압둘자바, 마이클 조던, 코비 브라이언트, 르브론 제임스, 디르크 노비츠키다.
 
몇 안 되는 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평균 25득점 10리바를 유지중인 빅맨. 정규시즌보다 플레이오프에서 기록이 상승한다는 점은 평론가들이 매우 긍정적이게 평가하는 점 중 하나이다,

매버릭스가 노비츠키의 이름을 딴 'Dirkburger'를 출시했다.
 
노비츠키는 칠면조 버거를 원했지만 프레즐 번에 루꼴라, 할라피뇨 비어 치즈를 곁들이고 베이컨 마멀레이드를 얹은 소고기 패티 버거로 완성되었는데 영상을 보면 노비츠키 본인이 직접 만들기도 한다. 
 
동료선수, 스탭들과 함께 직접 시식해보는 장면 가격은 12$. 3월 동안 아메리칸 에어라인 센터 구내 매점에서 판매했다고 한다.
 
올랜도 매직과의 경기에서 최고매상을 올렸다고 한다.
 
독일 사람 답게 축구도 좋아하며 독일이 월드컵에서 우승하자 크게 기뻐하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정작 볼은 잘 차지 못하는 듯 하다.
 
유쾌한 성격답게 가끔 볼을 찰 기회가 생기면 개그 퍼포먼스를 펼치고는 한다. 자선경기 영상 플라핑
 
은퇴 이후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간판 주전 미드필더인 토니 크로스 공식 인스타그램에 그의 은퇴를 기리는 피드가 게재되었다.
 
NBA 역대 여섯 번째로 통산 30000득점을 달성해냈는데, 이는 카림 압둘자바, 칼 말론, 코비 브라이언트, 마이클 조던, 윌트 체임벌린 다음 가는 기록. 아울러 3만 득점 - 1만 리바운드를 기록한 선수는 압둘자바, 칼 말론, 윌트 체임벌린, 르브론 제임스, 그리고 노비츠키로 5명이다.
 
카림 압둘자바를 넘어 역대 수비 리바운드 7위에 올라섰다.
 
디시인사이드 NBA 갤러리 공인 치트키이다.
 
2011년 코비와 르브론을 동시에 무너트린 신화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르브론 팬덤에게 아킬레스건이나 다름없는 선수이기도 한데 2007, 2014, 2015, 2017 파이널의 흑역사도 조곤조곤 반박하는 르브론 팬들조차 2011 파이널은 단 한마디의 반박도 꺼낼 수가 없을 정도다.
 
2015-16 시즌이 끝난 후 구단과 2년 50M에 재계약하는 과정에서 마크 큐반의 노비츠키에 대한 신뢰와 노비츠키의 구단에 대한 충성심을 알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마크 큐반이 Brown and Scoop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직접 밝힌 이야기로 노비츠키는 자신의 에이전트에게 "금액에 상관 없이 맵스에 남을 것" 이라는 말만 남긴채 휴가를 떠났고, 이에 에이전트는 구단과 협상을 시작하는데 에이전트가 "이 정도 금액이면 어때?" 라고 던지면 마크 큐반은 "야 우리 더 줄 수 있는데? 더 금액을 높여봐" 라고 해서 금액을 계속 올렸다.
 
그리고 결국 맵스의 2016-17 시즌 남은 샐러리캡의 전부를 노비츠키의 연봉으로 지급하는 것으로 협상은 마무리 되었다.(2년 5,000만불) 
 
2017-18 시즌을 앞두고 코비에 이어 한 팀에서 20년 이상을 뛴 선수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NBA 아프리카 게임 2017이라는 친선경기 행사에서 만난 크리스탑스 포르징기스와 함께 훈련하는 시간을 가졌다.
 
늘 그래왔지만 자신과 닮은 후배인 포르징기스를 매우 대견하게 여기는 듯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석에서 만난 적은 별로 없겠지만 굉장히 돈독한 관계인 것으로 보인다.
 
2017-18 시즌 들어서 올타임 플레잉타임 3위로 올라섰다(단 정규시즌 한정).
 
1, 2위는 역시나 카림 압둘자바와 칼 말론. 아울러 출전 경기 순위는 현재 기준으론 5위라고 한다.
 
2012년 스웨덴 여성인 예시카 올손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고 있다.
 
예시카 올손은 스웨덴 국가대표 축구선수인 마르틴 올손과 마르쿠스 올손 쌍둥이 형제와 남매지간이다.
 
많은 이들의 예상과는 달리 르브론 제임스와의 사이는 나쁘지 않은 편이다.
 
오히려 호의적이라면 호의적인 관계, 그간 르브론이 노비츠키에 관해 동료로서 존경심을 표한적도 자주 있던 편이다. 
 
기사 링크 아울러 노비츠키가 통산 30,000득점을 달성했을 당시 SNS를 통해 영상으로 축하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마이클 조던이 2010년대 중반에 선정한 본인의 시대에 뛰어도 통할 선수로 뽑힌 바 있다.
 
다른 선수들로는 코비 브라이언트, 팀 던컨, 르브론 제임스. 여담이지만 자주 오르락내리락거린 이야기는 아닌데 조던이 꽤 노비츠키의 플레이를 좋아한다고. 아무래도 자신과 같은 스코어러이고 불붙으면 막기 힘든 클러치의 강자여서 그렇다.
 
특이점 중 하나로 슈팅 릴리스가 매우 느린 편인데, 위에 언급됐다시피 어차피 블럭당할 일이 없으니 이렇게 느리게 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무릎의 추진력을 그대로 손목까지 전달하는 과정, 그리고 손목 릴리스가 매우 부드럽고 슛이 높고 아름다운 곡선을 그린다.
 
이런 느린 릴리스는 경기 중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 때문에 제한된 시간 내에 쏘아야하는 2006년 3점슛 콘테스트에서 웃지못할 해프닝이 일어난 적이 있다.
 
당시 예선에서 1위 레이 앨런, 공동 2위인 노비츠키와 길버트 아레나스가 각각 14점으로 결승에 올랐다.
 
그런데 문제는 노비츠키가 느리게 쏘는 스타일이다보니 막판에 허겁지겁 쐈음에도 시간이 촉박했던 것,
 
그리고 마지막 머니볼을 버저가 울린 뒤 쏴서 넣었다는 점이다.
 
리플레이로 봤을때 시간종료를 알리는 불이 켜졌을때 노비츠키의 손에 공이 있어 이것이 명백했지만 심판은 이를 무효화하지 않고 인정했다.
 
또한 리플레이 이후 판정 번복이 여기선 불가능한지라 오심이 정정되지 않았다.
 
실제로 무효가 너무 명백해서 리플레이를 보기도 전에 해설하던 찰스 바클리와 레지 밀러는 입을 모아 "시간 내에 못 던졌어!"라도 하고, 바클리는 오심으로 유명한 2006년 슈퍼볼을 언급하며 "슈퍼볼 심판들 데려왔나보네"하고 비아냥거렸다.
 
1500경기 이상을 뛰고도 평득 20점을 유지한 두 명 중 하나이다.
 
나머지 한명은 카림 압둘자바.
 
은퇴할 당시 몇가지 남긴 기록이 눈에 띄는데 NBA에서 가장 많이 뛴 선수 3위(1,522경기) 야투 성공 역대 8위(11,169개),
 
자유투 성공 6위(7,240개), 3점슛 성공 11위(1,982개), 수비 리바운드 5위(10,021개) 등에 이름을 남겼다.
 
댈러스에서 그의 은퇴를 기념하기 위해 4월을 노비츠키의 달로 정했다고 한다.
 
만장일치로 통과했던 안건이었고 지난해 댈러스의 시장인 마이크 라울링스는 노비츠키에게 도시의 열쇠를 수여하기도 하였다.
 
명실공히 댈러스라는 도시를 대표하는 스포츠 영웅인 셈이다.
 
그렉 포포비치 감독은 노비츠키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우리가 여태껏 봤던 최고의 슈터였고 굉장히 특별했던 선수라는 감상을 남기기도. 샌안토니오 스퍼스와 댈러스 매버릭스는 텍사스 주에서도 가까이 붙어있는 지역 라이벌이고, 플레이오프에서 6번이나 만났던 사이라서 피차 지긋지긋할 만큼 치열하게 붙어왔던 사이였다. 
 
그만큼 명승부를 많이 만들어내기도 하였는데 특히 마지막엔 1라운드에서 댈러스가 그해 우승하게 되는 샌안토니오를 4-3까지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지기도 모른다.
 
반면 샌안토니오는 파이널에선 4-1로 르브론의 마이애미를 싱겁게 이겨버렸다.
 
NBA에서 30득점을 기록한 선수중 최고령이라고 한다.
 
그것도 댈러스 홈에서 치룬 마지막경기에서 남긴 기록인 만큼 상당히 값지다.
 
여담으로 245번째로 넣은 30득점이었다고.
 
사실 은퇴에 대한 입장을 상당히 애매하게 비쳐 팬들 사이에선 설왕설래한 감이 없지않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댈러스를 제외한 다른팀들은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섭섭치 않은 대접을 해주었는데, LA 클리퍼스의 닥 리버스 감독은 아예 타임아웃을 부르곤 마이크를 잡아 팬들에게 노비츠키를 향한 기립박수를 유도했다.
 
이후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은퇴쪽으로 자꾸 기울어 팬들은 노비츠키가 은퇴를 한게 아니라 당한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를 가끔 하기도 한다.
 
마크 큐반 구단주와의 관계가 상당히 깊다.
 
큐반은 노비츠키의 은퇴식때 레전드들을 초대하고 갖가지 이벤트를 준비하는 등 예산을 아끼지 않았는데, 은퇴식에서 마크 큐반 본인 입으로 영구결번은 당연하고 은퇴선물로 구단 지분에다 경기장 앞에 무진장 큰 동상(the biggest, most bad-ass statue ever!!!!)까지 세워주겠다고 얘기했으며 큐반은 노비츠키가 아이에서 남편으로, 그리고 아버지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행복했다며 그에대한 애정을 은퇴식때 아끼지 않고 쏟아냈다.
 
매버릭스와 큐반 입장에서 노비츠키가 각별할 수밖에 없는 것이, 큐반이 팀을 인수한 2000년대 초반에 매버릭스는 그야말로 안습이었다.
 
80년대에 날리던 강팀이긴 했지만 90년대 내내 흑역사로 보내고 00년대에도 별 비전은 없는, 비슷하게 90년대를 안습으로 보낸 밴쿠버 그리즐리스 등과 비슷하게 doormat team의 대명사였다.
 
그런 팀에게 반전이 일어난게 노비츠키, 마이클 핀리, 스티브 내시가 이끄는 신바람 농구였고, 이후 우승까지 하는 서부 명문 중 하나가 된다.
 
이 과정에서 댈러스의 팀 가치는 수직상승했고, 이걸 떠나 농구광 마크 큐반은 자신의 팀이 훌륭한 구단으로 성장하는 것에 기뻐했다.
 
실제로 20년 가까이 인간관계를 쌓다보니 친분도 당연히 깊을 수밖에 없고, 노비츠키가 트레이드 요구를 한번도 한적도 없을 정도로 구단에 대한 애정도 깊으니 이뻐보일 수밖에. 심지어 07년 당시 플레이오프에 탈락한 뒤 MVP를 수여받는 참사가 일어났을때, 정작 노비츠키는 차분한 태도와 예의바른 웃음으로 기자회견에 임했음에도 큐반은 기자회견 도중 울먹이기까지 했다.
 
4년 뒤 우승을 차지했을때 어린애처럼 기뻐한 건 덤. 큐반 본인의 NBA 여정을 그대로 함께하고, 매버릭스를 좋은 구단으로 만들어준 일등공신인데다 오랜 기간 흔들리지 않는 우정을 공유한 친구이니 사이가 나쁠 수 없는 상황이다.
 
플레이오프에서 50득점을 넣은 적이 한 번 있는데 그 위로는 두 번 기록한 제리 웨스트, 세 번 해낸 앨런 아이버슨과 네 번을 넣은 윌트 체임벌린, 그리고 8회나 기록한 마이클 조던이 있다.
 
그 밑으로는 전부 노비츠키와 동일하게 한 번씩,
 
댈러스에서 한 거리를 그의 이름으로 붙이기로 했다고 한다.
 
현재는 노비츠키 웨이라고 부른다고. 현재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현재 노비츠키 웨이의 풍경. 구글에 검색하면 쉽게 위치와 이미지를 찾아볼수 있다.
 
노비츠키 본인도 애정이 깊어 은퇴한 이후에도 댈러스에 계속 살고 있다.
 
미국 시민권을 딸까 고민한 적도 있었지만 그냥 독일 국적으로 남기로 했다고. 독일인이 EU나 스위스가 아닌 국가의 이중국적을 따려면 정부의 승인을 따로 받아야하고, 이중국적이 독일 법에는 좀 복잡하게 적용된다.
 
2019-20 시즌부터 댈러스 매버릭스의 홈구장인 아메리칸 에어라인스 센터 코트에 노비츠키의 실루엣을 새기기로 했다고 한다.
 
이젠 매 경기마다 팬들은 잊지않고 페인트존에서 그의 시그니쳐 무브인 학다리웨이를 볼수 있게 되었다.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경기를 참관하던중 화면에 얼굴이 비치자 관중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2019년 12월 2일, 댈러스와 레이커스의 경기가 있었던 날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날 레이커스측은 노비츠키를 위한 헌정영상까지 틀어주었다.
 
기립박수를 받으며 인사하는 노비츠키의 앞에 댈러스팬과 레이커스팬 할것없이 모두가 경의를 표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 참고로 노비츠키와 레이커스는 의외로 인연이 깊다.
 
30,000득점을 비롯한 여러 기록들을 레이커스와의 시합에서 남겼으며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코비와 가솔이 이끄는 레이커스의 쓰리핏을 4-0으로 저지한 경력도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서부의 강호팀들답게 오랫동안 엉키면서 여러 추억들을 남긴 것.
 
아울러 코비 브라이언트와도 내시만큼은 아니나 절친한 사이로 유명하다.
 
예전에 이 항목에서는 르브론 제임스와는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다라는 서술이 있었으나 바레아의 인터뷰에 의하면 노비츠키는 르브론, 웨이드, 보시 마이애미 3인방을 정말 못 견딜 정도로 싫어했다고 한다.
 
웨이드와는 2006년 파이널에서의 역대급 슈퍼스타콜 때문에 좋은 관계일 수가 없었고 독감 조롱 사건의 영상을 보고 노비츠키가 개인적으로도 크게 상처를 받았다고. 2019년 올스타전에서는 르브론이 악수를 하러 왔으나 노비츠키가 거부해버린 사건도 있었다.

좀 더 부연설명을 하자면 노비츠키 성격상 "누구를 싫어한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직접 한 말은 아니나, 노비츠키와 오랜기간(10시즌) 함께 뛰고 2011년 우승멤버였던 JJ 바레아가 2021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 것이다.
 
바레아는 "그(노비츠키)는 마이애미를 싫어했어요.
 
르브론, 웨이드, 보시를 싫어했죠.
 
절대 입밖으로 낼 리는 없지만 견디기 어려워했어요" https://www.cbssports.com/nba/news/dirk-nowitzki-hated-lebron-james-miami-heats-big-3-according-to-former-teammate-j-j-barea/ 또한 노비츠키는 르브론의 실력을 높게 평가하긴 했지만 한번도 그를 좋게 얘기한 적은 없다.
 
바레아가 반복해서 "그는 절대 이렇게 얘기 안하겠지만요"라고 하는 것에 볼 수 있듯이 원래 노비츠키는 그 누구도 대놓고 까는 사람이 아니다.
 
즉, 노비츠키가 인품이 훌륭하기 때문에 대놓고 디스하지 않았고, 르브론에 대한 감정과 별개로 그가 농구를 잘하는 사람이란건 팩트이기 때문에 이걸 인정한 정도지, 서로 존중하는 관계라고 보는 건 무리다.
 
아티스트 빈지노가 발표할 예정인 두번째 정규앨범 타이틀로 인용되었다.

 

관련 문서,

NBA 관련 인물,
 
 
 

마이클 조던 이후 역대 NBA 파이널 MVP 선수들,

팀 던컨 (샌안토니오 스퍼스, 1999)

1999 / 팀 던컨 (23세 2개월)

 
 

vs 뉴욕 닉스 5경기 평균 45.5분 27.4득점 14리바운드 2.2블락,

샤킬 오닐 (LA 레이커스, 2000)

2000 / 샤킬 오닐 (28세 3개월)

vs 인디애나 페이서스 6경기 평균 45.7분 38득점 16.7리바운드 2.7블락,

샤킬 오닐 (LA 레이커스, 2001)

2001 / 샤킬 오닐 (29세 3개월)

vs 필라델피아 식서스 5경기 평균 45분 33득점 15.8리바운드 4.8어시스트 3.4블락

샤킬 오닐 (LA 레이커스, 2002)

2002 / 샤킬 오닐 (30세 3개월)

vs 뉴저지 네츠 4경기 평균 41.5분 36.3득점 12.3리바운드 3.8어시스트 2.8블락

팀 던컨 (샌안토니오 스퍼스, 2003)

2003 / 팀 던컨 (27세 1개월)

vs 뉴저지 네츠 6경기 평균 44분 24.2득점 17리바운드 5.3어시스트 5.3블락

천시 빌럽스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2004)

2004 / 천시 빌럽스 (27세 8개월)

vs LA 레이커스 5경기 평균 38.7분 21득점 5.2어시스트 3점 성공률 47%

팀 던컨 (샌안토니오 스퍼스, 2005)

2005 / 팀 던컨 (29세 1개월)

vs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7경기 평균 40.7분 20.6득점 14.1리바운드 2.1블락

드웨인 웨이드 (마이애미 히트, 2006)

2006 / 드웨인 웨이드 (24세 5개월)

vs 댈러스 매버릭스 6경기 평균 43.5분 34.7득점 7.8리바운드 3.8어시스트 2.7스틸

토니 파커 (샌안토니오 스퍼스, 2007)

2007 / 토니 파커 (25세 0개월)

vs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4경기 평균 37.8분 24.5득점 5리바운드 3.3어시스트 3점 성공률 57%

폴 피어스 (보스턴 셀틱스, 2008)

2008 / 폴 피어스 (30세 8개월)

vs LA 레이커스 6경기 평균 38.8분 21.8득점 4.5리바운드 6.3어시스트

코비 브라이언트 (LA 레이커스, 2009)

2009 / 코비 브라이언트 (30세 9개월)

vs 올랜도 매직 5경기 평균 43.8분 32.4득점 5.6리바운드 7.4어시스트 1.4블락

코비 브라이언트 (LA 레이커스, 2010)

2010 / 코비 브라이언트 (31세 9개월)

vs 보스턴 셀틱스 7경기 평균 41.2분 28.6득점 8리바운드 3.9어시스트 2.1스틸

덕 노비츠키 (댈러스 매버릭스, 2011)

2011 / 덕 노비츠키 (32세 11개월)

vs 마이애미 히트 6경기 평균 40.4분 26득점 9.7리바운드 2어시스트

르브론 제임스 (마이애미 히트, 2012)

2012 / 르브론 제임스 (27세 5개월)

vs 오클라호마시티 썬더 5경기 평균 44.1분 28.6득점 10.2리바운드 7.4어시스트

르브론 제임스 (마이애미 히트, 2013)

2013 / 르브론 제임스 (28세 5개월)

vs 샌안토니오 스퍼스 7경기 평균 43분 25.3득점 10.9리바운드 7어시스트 2.3스틸

카와이 레너드 (샌안토니오 스퍼스, 2014)

2014 / 카와이 레너드 (22세 11개월)

vs 마이애미 히트 5경기 평균 33.4분 17.8득점 6.4리바운드 1.6스틸 1.2블락 필드골 성공률 61%

안드레 이궈달라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2015)

2015 / 안드레 이궈달라 (31세 4개월)

vs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6경기 평균 37.1분 16.3득점 5.8리바운드 4어시스트 1.3스틸

르브론 제임스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2016)

2016 / 르브론 제임스 (31세 5개월)

vs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7경기 평균 41.7분 29.7득점 11.3리바운드 8.9어시스트 2.6스틸 2.3블락

케빈 듀란트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2017)

2017 / 케빈 듀란트 (28세 8개월)

vs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5경기 평균 39.7분 35.2득점 8.2리바운드 5.4어시스트 필드골 성공률 56%

케빈 듀란트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2018)

2018 / 케빈 듀란트 (29세 8개월)

vs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4경기 평균 41.3분 28.8득점 10.8리바운드 7.5어시스트 2.3블락

카와이 레너드 (토론토 랩터스, 2019)

2019 / 카와이 레너드 (27세 11개월)

vs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6경기 평균 40.5분 28.5득점 9.8리바운드 4.2어시스트 2스틸

르브론 제임스 (LA 레이커스, 2020)

2020 / 르브론 제임스 (35세 9개월)

vs 마이애미 히트 6경기 평균 39.4분 29.8득점 11.8리바운드 8.5어시스트 필드골 성공률 59%

야니스 아데토쿤보 (밀워키 벅스, 2021)

2021 / 야니스 아테토쿤보 (26세 7개월)

vs 피닉스 선즈 6경기 평균 39.8분 35.2득점 13.2리바운드 5어시스트 1.8블락 필드골 성공률 62%, 

 "NBA선수들 중 역대 50인 안에 드는 선수급은 예전에 뛰던 선수도 옛날 영상 등을 통해서 많이 접했지만, 70~80년대에 뛰던 선수 중 레전드 급은 아니지만 수준급의 선수들에 대해서는 정보가 부족하고 경기 영상이나 하이라이트를 거의 보지 못했다.  
 
이번에 장신 포인트 가드와 포인트 포워드, 센터들을 추리다가 발견한 이 백인 선수.

13년의 NBA커리어를 오직 단 한 팀, 피닉스 선즈에서 마무리한 유별난 선수.

알반 애덤스의 준수한 기록과 플레이 영상을 보니 매우 흥미로웠다.  
 
알반 애덤스(Alvan Adams).F/C. 206cm,95kg.(1954.7.19) 등번호 33번.  
 
oklahoma대학 출신. 3년간 평균, 23,4득점,13.3리바운드 기록. 

블레이크 그리핀이 2009년 2월 14일에 기록을 깨기 전까지 73-74시즌에만 21번의 더블더블을 기록해서 스쿨 레코드를 가지고 있었음. 
 
학교 역사상 오직 3명만 들어가는 한 경기에 40득점,20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한 선수. 나머지 두 명은 지금은 고인이 된 웨이먼 티스데일(61점,22리바운드)과 현역 NBA선수인 블레이크 그리핀(40점, 23리바운드). 
 
학교에서 영구 결번된 단 네 명의 선수 중 한명.(웨이먼 티스데일, 무키 블레이락, 스테이시 킹) 
 
75'draft 1-4. 피닉스 선즈에 드래프트 돼서 평생 한 팀에서 뛰다 은퇴. 
 
NBA 통산 평균 27.5분, 14.1득점,7리바운드,4.1어시스트,1.3스틸,0.8블록슛.

필드골 49.8%, 3점슛 13.3%, 자유투 78.8%. 턴오버 2.6개. 
 
루키 시즌에 평균 33.2분, 19득점,9.1리바운드,5.6어시스트,1.5스틸,1.5블록슛의 엄청난 기록을 선보이며 신인왕을 거머줬고 올스타에 선발됐던 능력자. 
(루키 시즌의 5.6어시스트는 리그 평균 어시스트 순위 8위에 랭크됨) 
 
백인 최고의 선수인 래리 버드가 루키 시즌(79-80)에 평균 36분, 21.3득점,10.3리바운드,4.5어시스트,1.7스틸,0.6블록슛의 탈인간급 기록을 낸 것에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기록이다. 

당연히 그 해의 신인왕은 래리 버드가 차지했다.   
 
게다가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슛, 덩크슛에 모두 능한 멀티 탤런트를 가진 선수였다.

특히 빅맨임에도 동료를 살려주는 패스를 찔러넣는 탁월한 시야를 가지고 있다.
[루키 시즌에만 다섯 번의 트리플 더블을 기록.(득점,리바운드,어시스트)]   
 
1977년 2월 22일, 버팔로 브레브스와의 경기에서 혼자 47득점,18리바운드,12어시스트의 트리플더블을 기록함. 이는 NBA역사상 오직 다섯명 만이 기록한 최소 46득점, 16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한 트리플더블이며 그 멤버는 엘진 베일러, 윌트 챔벌린, 러셀 웨스트브룩, 빈스 카터 뿐이다.

이런 레전드 선수들과 같은 반열에 오르다니..그런데 여지껏 이 선수를 모르고 살았다니.. 
 
애덤스의 또 다른 일화. 지금 생각하니 이 선수였구나 하는..

애덤스의 33번 등번호는 피닉스 선즈에서 영구결번이 됐는데, 또 한 명의 레전드인 그랜트 힐이 선즈와 계약할 때 33번을 달고 뛸 수 있도록 양보했다.  
 
오직 한 팀에서만 뛰다가 은퇴한 많은 레전드 선수들이 NBA에 있다. 
 
래리 버드, 매직 존슨, 팀 던컨, 덕 노비츠키, 존 스탁턴, 코비 브라이언트, 레지 밀러, 유도니스 해슬램, 존 하블리첵, 마누 지노빌리, 조 듀마스, 엘진 베일러, 데이비드 로빈슨, 제리 웨스트, 빌 러셀, 웨스 언셀드, 캘빈 머피, 케빈 맥해일, 아이재이아 토마스, 제임스 워디, 줄리어스 어빙, 윌리스 리드 등이다. 
 
알반 애덤스는 이런 레전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선수 중 하나다. 
 
루키 시즌인 1975년 12월 17일의 게임 로그를 보니 애덤스가 혼자 25점, 14리바운드, 12어시스트, 2스틸을 기록해서 상대팀인 밀워키를 116 대 111으로 물리쳤다.  
 
팀 동료 중 매우 유명한 선수가 눈에 띤다.

지금은 고인이 된 폴 웨스트팔. 포인트 가드로 뛰며 19점, 4어시스트를 기록. 

상대팀의 센터는 213cm의 장신인 앨모어 스미스고 198cm의 준수한 스몰 포워드인 밥 댄드리지가 주력 선수였다.  
 
1980년 2월 13일, 드디어 보스턴의 래리 버드와의 맞대결이 성사 됐다. 

결과는 놀랍게도 135 대 134, 단 한 점 차이로 피닉스가 승리. 4쿼터에 39 대 27로 12점을 더 득점한 것이 주효했다.  
 
보스턴의 래리 버드는 양팀 통틀어 최다 득점인 45점을 몰아넣고 13개의 리바운드를 잡았다.

반면 피닉스의 알반 애덤스는 72.7%의 확률높은 슛을 무기로 18점, 6리바운드, 5어시스트, 2스틸, 2블록슛의 공수에 걸쳐서 팀에 도움이 되는 플레이로 일관 했다.

일대일 대결에서는 43분으로 소화한 래리 버드가 31분을 소화한 애덤스에 이겼다고 볼 수 있으나 팀의 승리는 피닉스가 가져간 경기.  
 
피닉스 선즈에서는 폴 웨스트팔이 혼자 34점, 6어시스트, 3점슛 2개를 성공시키며 팀을 이끌었고 NBA역대 최고의 언더싸이즈드 빅맨 중 하나인 201cm의 트럭 로빈슨이 파워 포워드로 뛰며 24점, 11리바운드, 2블록슛을 기록했다. 

또, 70-80년대 피닉스 선즈를 빛냈던 비교적 유명한 선수인 스윙맨 월터 데이비스가 20점, 6어시스트로 힘을 보탰다.  
 
보스턴은 스몰 포워드 세드릭 맥스웰(203cm)이 25점, 8리바운드, 6어시스트, 3스틸로 공수에서 맹활약 했고, 211cm의 백인 센터 릭 로비가 23점, 13리바운드로 분전했으나 팀의 한 점차 패배를 막지는 못했다.  
 
보스턴의 홈경기로 보스턴에 피닉스가 졌지만 잘 싸운 경기. 

래리 버드가 20점,8리바운드,8어시스트,4스틸로 다재다능함을 보여줬다면, 이에 맞서는 알반 애덤스도 10점,14리바운드,8어시스트,2스틸,1블록슛으로 응수.

그러나 5개의 턴오버를 범했고 29.4%의 야투율이 보여주듯 슈팅 난조로 많은 득점을 올리지는 못한 경기. 

결국 보스턴의 삼인방인 로버트 패리쉬, 케빈 맥해일, 래리 버드의 폭격을 피닉스가 못 이겨낸 경기.  
 
아마도 피닉스 선즈의 골수팬들은 이 선수를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요즘 NBA의 스트레치 빅맨과 비교하면 3점슛도 없고 가치가 없을 것 같지만, 이 당시 플레이를 보면 굉장히 다이내믹해서 보는 재미가 있다. 

코트왕복 스피드가 매우 빠르고 중거리 점퍼가 정확하다.

골밑에서 비빌줄도 알고 덩크슛도 즐겨하는 선수.
 
이 선수의 플레이를 모은 유튜브 영상이 있어 링크한다. (화면 클릭하면 감상 가능)

신기하게도 영상의 스틸 사진이 전 세계 농구 역사에서 아직까지는 백인 농구 선수 중 역대 최고 선수라고 할 수 있는 래리 버드와의 매치업 사진이란 게 재밌다.

신장도 206cm로 같고 나이는 애덤스가 버드 보다 두 살 위다. 
 
이런 선수를 찾아서 영상을 보는 느낌은 마치 오래된 음악을 LP판으로 꺼내서 처음 듣게되는 느낌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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