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성(眞城)이며 초명(初名)은 서홍(瑞鴻)이다. 자(字)는 경호(景浩)이며, 호(號)는 퇴계(退溪)인데 ‘물러나 시내 위에 머무른다’는 뜻의 ‘퇴거계상(退居溪上)’에서 비롯되었다. ‘계(溪)’는 이황이 물러나 머물렀던 ‘토계(兎谿)’라는 지명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해석된다. 청량산(淸凉山) 기슭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여 도옹(陶翁)ㆍ도수(陶叟)ㆍ퇴도(退陶)ㆍ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는 별호(別號)도 사용했다.
시호(諡號)는 문순(文純)이다. 1501년 11월 25일(음력) 예안(禮安,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진사 이식(李埴, 뒤에 좌찬성으로 추증됨)의 7남 1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열두 살 때부터 숙부인 이우(李堣)에게 학문을 배웠다. 1528년에 소과(小科)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534년 식년시(式年試)에서 문과(文科)의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그 뒤 외교 문서의 관리를 담당하던 승문원(承文院)의 부정자(副正子)ㆍ박사(博士)ㆍ교리(校理)ㆍ교감(校勘) 등을 역임했으며,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侍講院)의 문학(文學) 등의 직위에도 있었다.
1542년에는 충청도에 어사로 파견되기도 하였고, 1543년에는 성균관의 교수직인 사성(司成)이 되었다. 1545년을사사화(乙巳士禍) 당시 삭탈관직(削奪官職)되었으나, 곧바로 서용(敍用)되어 사복시(司僕寺) 정(正)ㆍ교서관(校書館) 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1547년에는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 홍문관(弘文館) 부응교(副應敎), 의빈부(儀賓府) 경력(經歷) 등으로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토계(兎溪) 인근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548년에는 충청도 단양의 군수(郡守)가 되었는데, 형인 이해(李瀣)가 충청도 관찰사가 되자 상피제(相避制)에 따라 경상도 풍기의 군수로 옮겼다. 당시 사헌부(司憲府)에서는 병으로 물러났어도 왕을 가까이서 섬기던 이황에게 갑자기 외직(外職)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황은 풍기 군수로 있으면서 주세붕(周世鵬)이 1543년에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편액(扁額)과 서적(書籍), 학전(學田) 등을 내려줄 것을 건의하였다. 조정에서는 이황의 건의를 받아들여 1550년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과 함께 면세와 면역의 특권도 부여하였는데, 이로써 소수서원은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1549년에는 병을 이유로 다시 관직에서 물러나 토계 인근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거처로 삼았고, 1551년에는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황은 1550년 형인 이해가 참소(讒訴)를 당해 유배지로 가던 도중 억울하게 목숨을 잃자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 벼슬을 내려도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관직에 올랐다가도 곧바로 사퇴하기를 되풀이하였다. 1552년에는 홍문관 교리(校理)로 임명되어 경연(經筵)에 시독관(侍讀官)으로 참여해 왕에게 불교를 멀리하고 왕도(王道)를 행할 것을 간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헌부 집의(執義), 홍문관 부응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형조(刑曹)와 병조(兵曹) 참의(參議), 충무위(忠武衛) 상호군(上護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등으로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번번이 사양하고 물러났다.
명종(明宗)은 이황을 아껴 1555년에는 낙향해 있던 그에게 음식물 등을 전하며 되도록 빨리 돌아오라는 전교(傳敎)를 내리기도 하였고, 화공(畵工)을 보내 도산(陶山)의 풍경을 그려오게 하여 감상하기도 했다. 1558년과 1559년에는 공조참판(工曹參判)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임명되었으나, 이황은 사직을 청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1566년에는 공조판서(工曹判書),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 등으로 임명되었으나 마찬가지로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고, 명종은 이황에게 내의(內醫)를 보내 문병하기도 했다.
이황은 1570년 12월 8일(음력) 7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사후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었다. 1574년 그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의 뒤편에 도산서원이 세워져 그의 위패를 안치하였으며, 이듬해선조는 도산서원에 한석봉(韓石峯)이 쓴 편액을 하사하였다. 1600년에 조목(趙穆) 등이 그의 글을 모아 51권 31책으로 구성된 문집을 편찬했으며, 1610년에는 공자(孔子)와 명유(名儒)를 섬기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그는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비롯해 다수의 시를 남기고 있을 뿐 아니라,
조식(曺植)ㆍ기대승(奇大升) 등과 교류하며 나눈 편지 등도 전해진다. 그가 쓴 편지글은 <퇴계서절요(退溪書節要)>로 따로 편찬되어 간행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자성록(自省錄)>,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이학통록(理學通錄)>, <계몽전의(啓蒙傳疑)>, <전습록논변(傳習錄論辨)>, <경서석의(經書釋義)>, <심경후론(心經後論)> 등의 저술을 남겼다. 유묵(遺墨)으로 <퇴계필적(退溪筆迹)>과 <퇴도선생유첩(退陶先生遺帖)>도 전해진다. 그의 저술들은 1958년 대동문화연구원에 의해 <퇴계전서(退溪全書)>로 편찬되었다. 이황은 명종의 잇따른 부름을 사양하고 고향인 예안에 머무르며 학문 연구에 힘썼다. 그는 1556년에 예안향약(禮安鄕約)을 만들었고, 1561년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였다.
1567년 명종이 죽고선조(宣祖)가 즉위한 뒤에는 명종의 행장(行狀)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 겸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황은 병을 이유로 곧바로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선조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의 벼슬을 내리며 불렀으나 이황은 이를 사양하였다. 그러나선조가 특별히 교서(敎書)를 보내 다시 부르자 상경하여기대승(奇大升) 등과 함께 경연(經筵)에서 <대학(大學)>과 <예기(禮記)> 등을 강론하였다. 1568년에는 숭정대부(崇政大夫) 우찬성(右贊成)으로 임명되었으나 상소를 올리며 사직을 청하였고, 다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임명되었으나 마찬가지로 이를 사양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계속해서 조정에 들어올 것을 청하자,
그 해 7월에 상경하여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을 겸직하였다. 그리고 실록청(實錄廳)의 도청당상(都廳堂上)을 겸임하여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 때선조에게 <무진봉사(戊辰封事)>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제출하였다. <무진봉사>는 왕이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해 주의해야 할 것을 여섯 조항으로 정리하여 상소한 것으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라고도 불리며, 이이(李珥)의 <만언봉사(萬言封事)>와 더불어 조선 시대 성리학의 정치이념을 잘 드러내는 저술로 꼽힌다. 1569년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임명되었으나 다시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낙향하였다.그는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학설을 따랐으며, 불교와 도교는 물론 양명학(陽明學)과 나흠순(羅欽順)의 주기론(主氣論) 등을 비판하며 리(理)를 강조하는 주리론(主理論) 사상을 전개하였다.
그는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기초하여 우주를 리(理)와 기(氣)로 나누어 파악하였고, 우주 만물의 근원인 리(理)는 형이상(形而上)의 도(道), 현상인 기(氣)는 형이하(形而下)의 기(器)가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주자와 마찬가지로 리(理)와 기(氣)는 서로 구별되는 실체이며(理氣決是二物), 서로 섞일 수 없고(不相雜), 떨어져 있을 수도 없다고(不相離) 보았다. 하지만 리(理)와 기(氣)의 관계에서 서로 섞일 수 없다는 분별성을 상대적으로 더 강조했고, “작용이 있는 것은 모두 형이하(形而下)의 것”이라며 리(理)의 운동성을 부정했던 주자와는 달리 “태극(太極)에 동정(動靜)이 있는 것은 태극이 스스로 동정하는 것이요,
천명(天命)이 유행(流行)하는 것은 천명이 스스로 유행하는 것이니 어찌 또 그렇게 시키는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며 리(理)의 운동성을 인정하였다. 이황은 주자학(朱子學)에 대한 깊은 이해를 기초로 성리학 연구의 길을 본격적으로 닦았으며, 이이(李珥)와 함께 조선 성리학의 기본 틀과 특징을 형성한 인물이다. 1543년 주희(朱熹)의 문집과 어록인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가 간행되면서 조선의 유학자들은 주자의 학설을 본격적으로 접하며 성리학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켰다. 특히 이황은 평생 <주자대전>과 <주자어류>를 깊게 연구하여 ‘동방의 주자’라고 불릴 정도로 주자학 해석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혔으며, 나아가 기대승(奇大升)과의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을 통해 심성론(心性論) 연구를 독창적 으로 발전시켰다.
주자는 모든 사물은 리(理)의 원리와 기(氣)의 작용이 결합하여 나타나며, 리(理)는 절대적이고 순선(純善)하지만 기(氣)는 상대적이고 가선가악(可善可惡)하다고 보았다. 리(理)는 사물의 존재 원리이자 목적으로 도(道)나 천명으로도 표현된다.
주자는 리(理)를 사물이 존재하는 이유(所以然之故)이자 마땅히 그리되어야 할 원칙(所當然之則)이라고 나타냈으며, 기(氣)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형이하(形而下)의 존재들은 리(理)를 따라야 존재의 목적을 이룰 수 있고 리(理)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악(惡)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리(理)와 기(氣)의 관계는 리(理)가 기를 주재(主宰)하고 제어(制御)하며, 명령(命令)하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리(理)는 형이상(形而上)의 본체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변화하지 않는 부동(不動)의 절대성을 지니므로 오직 기(氣)만이 운동하고 변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관점을 인간의 심성(心性)에 대한 해석에 적용하여 이기호발설을 펼쳤다. 주자는 인간이 가지는 고유한 본성을 ‘성(性)’, 그것이 드러난 양태를 ‘정(情)’이라고 하였으며, 성(性)을 정(情)으로 드러내는 작용을 하는 것이 ‘심(心)’이라고 보았다. 또한 성(性)을 보편적 본성인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각 개체의 특수한 성질인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구분하였다.
성(性)이 정(情)으로 드러나는 마음의 작용도 둘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천명으로 받은 고유한 마음이 그대로 표현된 것이 ‘도심(道心)’, 그렇지 못한 것이 인심(人心)이다. 주자는 인심은 인간의 감각적 욕구의 영향으로 악해질 수 있으므로 인심에서 비롯된 인욕(人慾)을 억누르고, 도심에 담긴 천리(天理)를 따르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황은 이러한 주자의 논리를 바탕으로 측은지심(惻隱之心)ㆍ수오지심(羞惡之心)ㆍ사양지심(辭讓之心)ㆍ시비지심(是非之心)의 4단(四端)을 본연지성에서 드러난 정(情)으로,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7정(七情)은 기질지성에서 드러난 정(情)으로 보았다. 그리고 4단(四端)은 도심(道心), 7정(七情)은 인심(人心)이라 하였고, “4단은 리의 작용으로 나타나며(四端理之發), 7정은 기의 작용으로 나타난다(七情氣之發)”는 이기호발설을 주장했다.
이황은 리(理)가 운동하지 못한다면 죽은 것[死物]에 지나지 않아 기(氣)를 주재하고 제어하는 절대성을 지닐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리가 움직이면 기가 따라서 생긴다(理動則氣隨而生)”며 ‘이동설(理動說)’을 주장하며 리(理)의 능동성을 강조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리(理)를 체(體)와 용(用)의 두 측면으로 구분하였고, 체로서의 리(理)는 변화하지 않지만 용(用)으로서의 리(理)는 변화하고 운동한다고 보았다.그는 이러한 관점을 인간의 심성(心性)에 대한 해석에 적용하여 이기호발설을 펼쳤다.
주자는 인간이 가지는 고유한 본성을 ‘성(性)’, 그것이 드러난 양태를 ‘정(情)’이라고 하였으며, 성(性)을 정(情)으로 드러내는 작용을 하는 것이 ‘심(心)’이라고 보았다. 또한 성(性)을 보편적 본성인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각 개체의 특수한 성질인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구분하였다. 성(性)이 정(情)으로 드러나는 마음의 작용도 둘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천명으로 받은 고유한 마음이 그대로 표현된 것이 ‘도심(道心)’, 그렇지 못한 것이 인심(人心)이다.
주자는 인심은 인간의 감각적 욕구의 영향으로 악해질 수 있으므로 인심에서 비롯된 인욕(人慾)을 억누르고, 도심에 담긴 천리(天理)를 따르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황은 이러한 주자의 논리를 바탕으로 측은지심(惻隱之心)ㆍ수오지심(羞惡之心)ㆍ사양지심(辭讓之心)ㆍ시비지심(是非之心)의 4단(四端)을 본연지성에서 드러난 정(情)으로,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7정(七情)은 기질지성에서 드러난 정(情)으로 보았다. 그리고 4단(四端)은 도심(道心), 7정(七情)은 인심(人心)이라 하였고, “4단은 리의 작용으로 나타나며(四端理之發), 7정은 기의 작용으로 나타난다(七情氣之發)”는 이기호발설을 주장했다.그러나 이러한 이황의 주장은기대승의 비판을 받았다.기대승은 이황처럼 4단(四端)과 7정(七情)을 각각 리(理)와 기(氣)의 작용에 따른 것으로 나누면 4단에는 기(氣)가 없고 7정에는 리(理)가 없게 되는데, 이는 리(理)와 기(氣)가 떨어져 있을 수 없다고 한 주자의 견해와 대립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4단과 7정은 모두 정(情)이므로 도심(道心)과 인심(人心)과는 달리 리(理)와 기(氣)로 나눌 수 없으며, 7정 밖에 4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러한기대승의 비판에 대해 이황은 리(理)와 기(氣)는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분별이 없을 수는 없다며, 4단이 7정과 무관하게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순수하게 선한 4단과 선악이 결정되지 않은 7정을 분별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하였다. 또한 성(性)을 리(理)와 기(氣)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면 정(情)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기대승의 견해를 일부 수용하여 “4단은 리가 발하여 기가 그것을 따르는 것이요,
7정은 기가 발하여 리가 그것에 타는 것”이라는 해석을 제시하였다.기대승과 이황의 사단칠정논쟁은 8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성혼(成渾)과 이이(李珥) 등도 이 논쟁에 참여하면서 조선 성리학의 가장 중요한 연구 주제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후대의 학자들도 다양한 연구 성과를 남겨 이 주제는 조선 성리학의 중요한 특징을 구성하였다.
이황이 주자와는 달리 리(理)의 능동성을 강조한 것은 도덕의 원리가 사회에 실현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황의 사상은 명분론에 기초한 양반 관료 중심의 지배체제를 뒷받침하는 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리(理)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이황의 사상은 도덕적 원리를 강조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현실의 구체적인 변화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를 지닌다. 따라서 이황의 사상은 인간의 내면에서 도덕적 행위의 근거를 찾기 위한 심성론(心性論)에 치중되었다고 평가된다. 이황의 사상은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형성했으며, 일본 성리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조목(趙穆)ㆍ이덕홍(李德弘)ㆍ정구(鄭逑)ㆍ류성룡(柳成龍)ㆍ김성일(金誠一) 등이 이황의 사상을 계승했으며, 그의 사상을 계승한 영남학파는 이이의 사상을 계승한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더불어 동서(東西) 분당(分黨)의 배경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저술 들은 일본 에도 시대[江戶時代]에 11종 46권 45책 으로 간행되어 17세기 이후 야마사키 안사이 [山崎闇斎, 1619∼1682]의 기몬 학파 [崎門學派] 와 오쓰카 다이야 [大塚退野,1678∼1750]의 구마모토 학파[熊本學派] 등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또한 그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에도 ‘퇴계학'(退溪學)’이란 용어를 낳을 만큼 국내외에서 매우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황이 주자와는 달리 리(理)의 능동성을 강조한 것은 도덕의 원리가 사회에 실현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황의 사상은 명분론에 기초한 양반 관료 중심의 지배체제를 뒷받침하는 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리(理)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이황의 사상은 도덕적 원리를 강조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현실의 구체적인 변화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를 지닌다. 따라서 이황의 사상은 인간의 내면에서 도덕적 행위의 근거를 찾기 위한 심성론(心性論)에 치중되었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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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 https://youtu.be/fKNbbj5Mj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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