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6일 수요일

손권孫權.Sūn Quán(형제"손책 [孫策].손견 [孫堅]

1. 손권孫權. 중국의 삼국시대 오나라의 초대 황제. 안후이, 후난을 비롯한 각 지방의 산월 민족과 그 밖의 이민족을 토벌 진무하고, 타이완, 하이난섬 방면에도 원정군을 보냈으며, 랴오둥의 공손씨와도 접촉을 시도하는 등 국내외의 경영에 노력하였다. 자는 중모(仲謀), 시호(諡號)는 대황제(大皇帝)이다. 손견(孫堅)의 둘째 아들로 200년에 형 손책(孫策)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주유(周瑜) 등의 보좌를 받아 강남(江南)의 경영에 힘썼다. 당시 형주(荊州: 湖北省襄陽縣)에는 유표(劉表)가 세력을 떨치고, 화북(華北)에는 조조(曹操)가 있어 남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조상의 본적은 오군(吳郡) 부춘(富春)이고, 하비(下邳)에서 태어났다. 자는 중모(仲謀)이다. 삼국(三國) 시대 동오(東吳)의 건립자로 부친 손견(孫堅)과 형 손책(孫策)과 더불어 군웅할거 시대에 강동(江東)에서 기반을 다졌다. 19세 때에 형 손책(孫策)이 자객에게 죽자 그를 계승하여 제후(諸侯)가 되었다. 208년 유비(劉備)와 연합하여 적벽(赤壁)에서 조조의 군대를 격퇴시켰다. 219년 여몽(呂蒙)을 파견하여 형주(荊州)를 탈취했다. 222년에 위문제(魏文帝) 조비(曹丕)가 오왕(吳王)으로 봉해졌다. 229년에 황제로 칭하고, 농관(農官)을 설치하고 둔전(屯田)을 실시하고 산월(山越)을 평정하여 군현(郡縣)을 설치했다. 사후에 시호는 대황제(大皇帝),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다. 유표가 죽고 그 아들 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의 압력은 더욱 강화되어 국내에서도 화전양론(和戰兩論)이 대립했으나 주유 등의 주전론이 승리하였다. 이에 손권은 유비(劉備)와 손잡고 남하한 조조의 대군을 적벽(赤壁)에서 격파함으로써 강남에서 위상을 확고히 하였다. 그뒤 형주의 귀속문제(歸屬問題)를 둘러싸고 유비와 대립하였으며, 이 때문에 219년 조조와 결탁하여 유비의 용장 관우(關羽)를 격파하고 형주를 공략하였다. 이때 손권은 관우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보냈다. 위(魏)·오(吳)·촉(蜀) 3국의 영토가 거의 확정되었으며, 오나라는 장쑤[江蘇]·안후이[安徽]의 남부, 저장[浙江]·장시[江西]·후베이[湖北]·후난[湖南]·푸젠[福建], 그리고 광둥[廣東] 방면까지를 지배하게 되었다. 220년 조조가 죽고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한(漢)나라의 제위(帝位)를 찬탈하여 황제로 즉위하자 유비도 촉한(蜀漢)의 황제가 되었다. 손권도 이에 맞서서 황위에 올라 연호를 황룡(黃龍)이라 하고 도읍을 건업(建業;南京)으로 정하였다. 위나라 문제(조비)가 손권의 아들을 신하로 등용한다는 명분으로 인질로 데려가려고 하자 손권이 이를 거부함으로서 위나라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위나라와 관계를 청산한 손권은 이후 대체로 촉한과 결합하여 위나라에 대항하는 한편, 국내의 발전에 힘썼다. 안후이·후난을 비롯한 각 지방의 산월(山越) 민족과 그밖의 이민족(異民族)을 토벌 진무(鎭撫)하고, 타이완[臺灣]·하이난섬[海南島] 방면에도 원정군(遠征軍)을 보냈으며, 랴오둥[遼東]의 공손씨(公孫氏)와도 접촉을 시도하는 등 국내외의 경영에 노력하였다. 만년에 태자로 책봉한 큰아들 손등(孫登)이 죽자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손권은 둘째 아들 손화(孫和)를 태자로 책봉하여 후계자로 삼는 한편, 넷째 아들 손패(孫覇)를 노왕(魯王)에 봉하여 태자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했다. 이로써 태자와 노왕 사이에 권력투쟁이 극심하게 일어나 국력이 소모되었다. 250년 손권은 결국 두 파벌을 모두 모조리 처형하고 겨우 10세인 막내 아들 손량(孫亮)을 태자로 책봉하였고, 252년 사망하였다. 1). 후한 말 영웅 손견의 아들 조상의 본적은 오군(吴郡) 부춘1)이고, 하비2)에서 태어났다. 자는 중모(仲謀)이다. 후한(後漢, 동한) 말의 영웅 손견의 아들이고 역시 후한 말의 무장 손책의 동생이다. 어려서부터 형 손책을 따라 강동(江東) 정벌에 나섰다. 헌제 건안(建安) 5년인 200년에 형 손책이 죽자 19세에 제후가 되어 뒤를 이었다. 강동 지구를 통치하며 장소, 주유, 정보 등의 도움을 받았으며, 인재를 널리 구하여 노숙, 제갈근 등을 문하의 식객으로 우대했다. 2). 적벽대전에서 승리하다 건안 13년인 208년에 조조가 형주(荊州,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시)를 장악하고 장강(長江)을 따라 진군해왔다. 손권은 항복하자는 여러 신하의 의견을 물리치고 주유와 정보를 좌우도독(左右都督)으로 삼아 각각 1만 명의 군대를 이끌도록 했다. 손권의 군대는 유비와 연합하여 적벽(赤壁)에서 조조의 군대를 대파하였고,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손권은 장강의 험한 지형을 의지하여 여러 차례 북방의 조조를 공격했다. 219년에는 여몽을 파견하여 형주를 장악했다. 3). 형주를 차지하고 관우를 죽이다 손권은 삼국 정립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숙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비의 촉한과 연합하여 위(魏)나라를 막는 기본 방침을 택했다. 그러나 여몽을 시켜 형주를 차지하고 관우를 죽이는 바람에 양국의 화의가 깨지고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위해 공격해왔다. 이것이 ‘이릉3)의 전투’다. 유비는 이 전투에서 크게 패했고 촉한의 국력은 급속도로 약해졌다. 그러나 위나라를 막아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오와 촉한의 동맹은 회복되었다. 손권은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채 촉한과의 동맹을 굳게 지켰다. 양국의 오랜 우호관계가 결과적으로 위나라의 공격을 견제했다. 4). 인재를 발탁하고 호족을 끌어들이다 손권은 장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온 지방 호족 세력을 신임하는 동시에, 재능을 가진 인물들은 출신 성분을 가리지 않고 발탁했다. 또한 남방의 특징을 파악하여 점진적으로 강동, 특히 오군(吳郡, 지금의 장쑤성 쑤저우 오현에 해당)의 호족 지주와 긴밀하게 연합하여 높은 관직을 위임하는 등 그들을 끌어들이는 데 힘을 다했다. 경제가 발달한 태호4) 유역을 거점으로 한 호족 지주들은 세력이 막강했을 뿐만 아니라 서로 간의 연대도 뿌리 깊었다. 이들은 손권이 자신들의 이익을 충분히 지켜줄 수 있다고 판단하여 그를 지지하고 충성을 표했다. 5). 오나라 황제가 되다 조조의 아들 조비(위 문제)가 동한(東漢, 후한)을 대신해 위나라를 세우자, 손권은 겉으로는 일개 지방 세력인 번(藩)이자 위나라 신하로 자처하고 시간을 벌며 정권의 기초를 다졌는데, 위 문제 황초(黃初) 2년인 221년에 위나라가 내린 봉호(封號)를 받아들여 무창(武昌, 지금의 후베이성 우창시)에서 오왕(吳王)으로 즉위하였다. 그로부터 8년 후인 229년에 손권은 마침내 황제를 자칭하고 연호를 황룡(黃龍)으로 하였으며 무창을 도읍으로 정했다가 뒤에 건업(建業, 지금의 장쑤성 난징(南京)시)으로 옮겨 강동을 통치했다. 황룡 원년인 229년에서 신봉(神鳳) 원년인 252년까지 재위했다. 손권은 만년에 통치 집단 내부의 모순에 시달렸는데, 큰아들 손등이 죽은 후 태자가 된 둘째아들 손화와 넷째아들이자 노나라 왕 손패(孫覇)가 서로를 공격하고 신하들도 두 파로 갈라져 통치에 심각한 위기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에 손권은 태자를 폐하고 노왕 손패를 죽이는가 하면, 연루된 신하들을 혹형으로 다스리고, 어린 아들 손량을 태자로 세워 위기를 타개해 나갔다. 삼국시대 통치자들 중 가장 장수한 끝에 252년 71세로 세상을 떠나 장릉(蔣陵, 지금의 난징 시 쉬안우(玄武)구 소재)에 묻혔다. 시호는 대황제(大皇帝), 묘호(廟號)는 태조(太祖)라 했다. 6). 손권의 국가 운영 정책 손권은 황제가 되어 전제 독재 권력을 확립한 후에는 엄격한 법을 적용했다. 정치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해 지방장관이 멋대로 관직을 버리고 도주하면 사형으로 처벌했다. 농관(農官)을 설치하고 둔전(屯田)을 실시하는 한편 산월(山越, 남부의 소수 이민족)을 평정하거나 항복시켜 군현(郡縣)을 설치했다. 각지에 흩어져 세력을 나누어 가지고 있던 할거 세력을 없애 통치 구역을 강동에서 지금의 푸젠성(福建省), 광둥성(廣東省), 광시성(廣西省), 후난성(湖南省)에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확대했다. 동한 말기 이후 분열되어 있었던 이 지역들은 다시 통일되어 사회, 경제가 발전했다. 손권은 개인의 봉건적 대토지 소유제를 보호함으로써 경제를 발전시켰고, 산월을 정벌하여 약탈해온 ‘생구(生口, 노예)’들을 세가 호족 대지주들과 공신들에게 나누어주어 부곡(部曲, 노예)이나 전객(佃客, 소작인)으로 삼게 했다. 또한 군권의 세습을 인정하여 그 전객들의 요역과 병역을 면제해주었다. 이것이 이른바 복객(復客) 제도다. 그는 노동력이 몰려 있던 태호 유역의 호족 지주들과 이런 방식으로 타협하여 경제발전을 촉진할 수 있었다. 강남 지역의 농업 생산력을 높이고 이 기초 위에서 여러 차례 해외로 사람을 보내 해외 개척에도 나섰다. 7). 관련 유적 관련 유적은 그의 무덤이 대표적이다. 『삼국지』에 따르면 손권은 죽은 뒤 장릉에 묻혔다. 이곳은 당시 남경(南京, 난징시)의 종산(鐘山)을 가리킨다.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 손종(孫鐘)의 이름자를 피해 종산을 장산(蔣山)으로 바꾸고 자신의 무덤을 장릉이라 했다. 훗날 명 태조(明太祖) 주원장이 종산에 자신의 무덤인 효릉(孝陵)을 만들 때 담당관이 손권의 무덤을 이장하자고 건의했지만 주원장은 손권은 영웅호한(英雄好漢)이니 그대로 두라고 했다. 손권의 무덤은 원래 손릉강(孫陵崗)이라 불렸는데, 이곳에 매화가 많기 때문에 1940년대에 매화산(梅花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곳에는 그의 부인인 보씨(步氏), 반씨(潘氏) 및 선명태자(宣明太子) 손등 등이 함께 묻혀 있다. 삼국시대의 오의 건국자이다. 오군(吳郡) 부춘(富春) 출신으로 자는 중모(仲謀), 부(父)는 손견(孫堅)이며 형인 손책의 대업을 이어받아 양자강 하류에 세력을 구축하고 건업(建業. 현 남경)에 도읍하였다. 유비(劉備)를 도와 조조(曹操)를 적벽(赤壁)에서 물리친 고사는 유명하다. 2. 孫堅"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武將)으로 황건의 난 토벌에 공을 세우고 동탁 토벌에도 가담하였다.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의 공격에 나섰다가 현산(峴山)에서 전사하였다. 아들인 손권(孫權)이 오(吳)를 건국한 뒤에 무열황제(武烈皇帝)로 추증되었다. 오군(吳郡) 부춘현(富春縣, 지금의 浙江省 杭州 富陽) 출신이다. 아들인 손권(孫權)이 오(吳)를 건국한 뒤에 시호(諡號)를 무열황제(武烈皇帝)라고 하였다. 춘추시대(春秋時代) 병법가(兵法家)로 이름을 날린 손무(孫武)의 후손이라고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오군(吳郡) 지역의 호족(豪族) 출신으로 17세 때 전당(錢唐)에서 해적을 물리쳐 이름을 떨쳤다. 그리고 회계(會稽)의 허창(許昌)이 반란을 일으키자 오군(吳郡)의 사마(司馬)로서 1천여명의 군사를 모아 이를 토벌하였으며, 이 때의 공으로 현승(縣丞)으로 임명되었다. 184년(中平 원년)에 장각(張角)이 이른바 황건(黃巾)의 난을 일으키자, 토벌군에 참여해 공을 세워 의랑(議郎)으로 임명되었으며, 장사태수(長沙太守)가 되어 구성(區星)이 이끈 반란군을 토벌하여 오정후(烏程侯)로 봉해졌다. 손권(孫權)의 아버지로, 자는 문대(文臺)고, 젊어서 현리(縣吏)가 되어 허생(許生, 또는 許昌)의 반란을 진압했다. 영제(靈帝) 중평(中平) 원년(184) 주준(朱imagefont)을 따라 황건군(黃巾軍)을 진압하고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올랐다. 얼마 뒤 장사태수(長史太守)로 옮겨 사공(司空) 장온(張溫)의 부하로 구성(區星) 등의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오정후(烏程侯)에 봉해졌다. 후한(後漢)의 영제(靈帝, 재위 168~189)가 죽은 뒤 동탁(董卓)이 권력을 잡고 횡포를 부리자 각지의 제후들이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손견도 군사를 일으켜 형주자사(荊州刺史) 왕예(王睿)와 남양태수(南陽太守) 장자(張咨)를 죽이고 노양(魯陽)에 이르러 원술(袁術)과 만났다. 원술(袁術)은 표(表)를 올려 손견이 파로장군(破虜將軍)과 예주자사(豫州刺史)를 겸하도록 하였고, 손견은 노양성(魯陽城)에 주둔하며 진군(進軍)을 준비하였다. 동탁(董卓)이 군대를 보내 노양성(魯陽城)을 공격하려 했으나 손견은 이를 물리쳤다. 하지만 양동(梁東)에서 동탁(董卓) 군대의 공격을 받아 간신히 포위를 뚫고 탈출한 뒤, 다시 병사를 모아 양인(陽人)에서 동탁의 군대를 대파하고 화웅(華雄) 등을 죽였다. 손견이 동탁의 군대를 격파하며 세력을 키우자 원술은 그를 경계하여 군량미를 보내지 않았다. 손견은 노양(魯陽)으로 달려가 원술을 설득하여 군량미를 조달받고 대곡(大谷)으로 진군하여, 뤄양[洛陽]을 위협하였다. 동탁은 뤄양[洛陽]에 불을 지르고 한구관[函谷關]으로 퇴각하였고, 손견은 뤄양[洛陽]에 진입하여 역대 왕들의 능묘를 보수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여 노양(魯陽)에 머물렀다. 192년(初平 3년), 손견은 원술의 종용을 받아 형주(荊州)의 유표(劉表)를 공격하였다. 손견은 유표가 파견한 황조(黃祖)를 격파하고 한수(漢水)를 건너 양양(襄陽)을 포위했다. 하지만 현산(峴山)에서 황조(黃祖) 군사가 쏜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동탁(董卓)을 토벌하는 군사가 일어나자 원술(袁術)과 병사를 합쳐 파로장군(破虜將軍)으로 예주자사(豫州刺史) 직을 수행했다. 동탁 군대를 격파하고 낙양(洛陽)으로 진격하여 동탁이 약탈한 후한 황제의 능들을 수복하고 우물 속에서 전국새(傳國璽)를 얻었다. 나중에 노양(魯陽)에 이르러 여러 부곡(部曲)을 지배했다. 헌제(獻帝) 초평(初平) 2년(191)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와 싸워 크게 이겼지만, 자기의 용맹만 믿고 단기로 현산(峴山)에 출전했다가 유표의 장수 황조(黃祖) 부하가 쏜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둘째 아들 손권이 칭제한 뒤 무열황제로 추봉되었다. 3. 孫策. 入主江東. 후한 말기 오현(吳縣) 부춘(富春) 사람. 자는 백부(伯符)고, 손견(孫堅)의 아들이며, 오(吳)나라를 세운 손권(孫權)의 형이다. 어렸을 때 수춘(壽春)에 살아 강남의 사족(士族)들과 폭넓게 교제했다. 아버지가 죽자 장인인 단양태수(丹陽太守) 오경(吳景)에게 갔다. 한헌제(漢獻帝) 흥평(興平) 초에 원술(袁術)에게 의지했고, 손견의 남은 세력 1천여 명과 군대를 이끌고 오경을 도왔다. 원술이 절충교위(折衝校尉)로 삼고 도강(渡江)하여 여러 곳을 다니면서 전투를 벌이다가 유요(劉繇)를 격파했다. 또 절강(浙江)으로 들어가 엄백호(嚴白虎) 등을 격파하고 스스로 회계태수(會稽太守)가 되었다. 나중에 여강군(廬江郡)을 빼앗아 강동(江東)에 손씨 정권을 세웠다. 조조(曹操)가 토역장군(討逆將軍)으로 임명하고 오후(吳侯)에 봉했다. 나중에 평소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오군태수의 측근에게 살해당했다. 동생 손권(孫權)이 칭제(稱帝)하자 장사환왕(長沙桓王)에 추시(追諡)되었다. 자는 백부(伯符). 손견의 장자이자 손권의 형. 손견이 죽자 원술에게 잠시 의탁해 있다가 손견을 섬기던 이들의 도움을 얻어 동오로 들어가 기반을 닦는다. 그러나 웅지를 펴보지 못하고 26세로 요절한다. 175년 저장성[浙江者]에서 출생했다. 자(字)는 백부(伯符)이고, 손권(孫權)의 형이다. 이름난 맹장이었던 아버지 손견(孫堅)이 죽은 후 서주 근처인 강도로 이주했다. 단양태수에게 몸을 의지했다가 194년 원술(袁術)의 휘하에 들어가 아버지의 군대를 이어받았다. 이때 받은 군사는 1천 명이었다. 원술의 휘하에서 수많은 공적을 세웠지만 그의 기개를 두려워한 원술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이에 원술로부터 독립하기로 결심하고 강남(江南)을 평정, 일족과 측근을 태수로 임명하여 진무(鎭撫)와 개발에 힘썼다. 마침 원술이 제위에 오르려 하자 손책은 이를 격렬하게 비난하면서 원술과의 관계를 청산했다. 조조(曹操)는 이를 알고 손책과 손을 잡는 편이 이롭다고 판단해 그를 토역장군 오후(吳侯)에 봉하고 혼인관계를 맺었다. 200년 조조와 원소(袁紹)가 관도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손책은 허도(許都)에 있는 한나라 헌제(獻帝)를 맞아들이려 했으나 실행에 옮기기 전 자객의 칼을 맞고 죽었다. 중국 후한(後漢) 말의 무장. 손견 사후 군대를 이어받아 강남을 평정, 진무와 개발에 힘썼다.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한나라 헌제를 맞으려 했으나 실행에 옮기기 전에 죽었다. 조조가 북방을 통일하고 있을 때, 남방에서는 다른 할거세력이 점차 강대해지고 있었다. 그 세력의 수령은 강동의 주인인 손책(孫策)과 손권(孫權) 형제였다. 강동이란 지금의 장강 하류의 강남 일대를 말한다. 손책의 자는 백부(伯符)이며, 오군(吳郡) 부춘(富春, 절강성 부양) 사람으로 명문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손견(孫堅)은 농민 봉기를 진압한 공로로 장사 태수를 책봉받았다. 손견은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하여 북상하다가 노양(魯陽)에서 원술을 만났다. 원술은 손견을 파로장군으로 임명했다. 손견은 원술과 유표(劉表)가 형주를 쟁탈하는 싸움에서 원술의 선봉장이 되어 유표의 대장 황조(黃祖)를 격파했다. 그리고 승세를 타고 추격하다가 숨어 있던 복병들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손견이 죽은 다음 맏아들인 손책이 그 직무를 이어받아 군대를 통솔했다. 손책은 언제나 전쟁터에서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웠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손랑(孫郞)'이라고 불렀다. 동생 손권을 가까이 불러 관인(官印)과 인수(印綬, 관인을 몸에 차기 위한 끈)를 넘겨주며 당부했다. “강동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전장에서 승부를 겨루고 천하를 다투는 일에서는 아우가 나보다 못하지만, 인재를 등용하고 그들이 각자 힘을 다하게 하여 지금의 강동을 보존하는 데는 내가 아우보다 못하네.” 강동을 종횡하던 '손랑'은 숨을 거두었다. 손책이 죽은 후 동생 손권이 형의 직무를 대신해 강동의 대권을 장악했다. 당시 손권의 나이 겨우 열아홉이었으나, 장소와 주유의 보좌로 형의 업적을 계승해 강동을 발전시켰다. 손책은 평소 사냥을 즐겼는데 어느 날인가는 사슴을 쫓다가 강변에 이르게 되었다. 그의 말이 하도 빨라 수하들은 미처 따라오지 못하고 뒤에 처져 있었다. 그런데 이때, 오군의 태수였던 허공(許貢)의 문객 셋이 강변에 숨어 있었다. 손책이 오군을 함락했을 때 태수 허공을 죽이자, 주인의 원수를 갚을 시기를 줄곧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허공의 문객들은 손책을 향해 일제히 활을 쏘았다. 손책은 이마에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손책의 몸은 신속히 악화되었다.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안 손책은 모사 장소 등을 불러서 당부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오, 월 땅은 인력과 자원이 풍부한 데다가 방어하기 좋은 장강까지 있어서 큰 위업을 이룩할 수 있소. 부디 내 동생 손권을 잘 보필해 주길 바라오.” 손책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큰 위업을 이루려 했으나 원술 밑에서는 그런 포부를 실현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기회를 노려 원술의 수하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마침 양주 자사 유요(劉䌊)가 원술의 외숙인 강동 태수 오경을 단양(丹陽)에서 쫓아냈다. 손책은 강동에 가서 외숙의 원수를 갚겠다고 원술에게 청했다. 원술은 손책에게 어서 가서 외숙의 원수를 갚으라며 군사 1천 명을 내주었다. 손책은 군사들을 데리고 강동으로 오는 도중에 군사들을 더 모집했다. 수춘(壽春)에서 역양(歷陽)까지 오는 동안에 그는 군사를 5∼6천 명이나 모집했다. 이때, 오랜 친구인 주유가 단양의 친척집에 와 있다가 손책이 군사를 이끌고 온다는 말을 듣고 그도 군사를 거느리고 찾아갔다. 그리고 손책에게 군량을 비롯한 기타 물자를 도와주었다. 이렇게 손책은 자기의 역량을 확충함과 동시에 유력한 조수를 얻게 되었다. 장강을 건넌 손책은 유요의 군대를 여러 차례 격파했으며 마침내 유요를 단양에서 쫓아내고 오군과 회계군을 점령했다. 아울러 강동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손책은 군사들이 백성의 재물을 노략질하는 것을 엄금하였으며 백성의 이익을 해치는 일을 하면 엄하게 다스렸다. 그래서 손책의 군대는 강동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손책을 죽음으로 몬 우길은?. 『삼국지연의』 제29회의 회목은 ‘소패왕이 노하여 우길(于吉)을 참수하다.’이다. 손책은 원한을 맺은 자객들로부터 불의의 습격을 받고 상처를 입는다. 그 상처가 낫기도 전인 어느 날 성루(城樓)에서 일을 논의하는데 갑자기 여러 장수들이 성루를 내려간다. 그들은 도인(道人) 우길에게 다가가 큰 절을 하고 신선(神仙)이라고 부르며 우러러 공경한다. 신선을 믿지 않던 손책이 우길을 체포하라고 명한다. 잡혀온 우길에게 재주를 물으니 바람과 비를 불러 올 수 있다고 했다. 이에 우길에게 단에 올라 비를 빌도록 명하니, 때맞추어서 큰 비가 내린다. 이 광경을 본 여러 관원들은 더욱 우길에게 감복하여 큰 절을 올린다. 우길의 능력이 대중을 현혹시킬 것이라고 생각한 손책은 속히 참수토록 명한다.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우길을 죽였지만 이때부터 손책은 꿈속에서 여러 차례 우길을 만나게 되고, 우길의 혼에 이끌려, 앉으나 서나 마음이 불안하고 정신이 황홀해진다. 어느 날 거울을 들고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던 손책은 거울 속에 서있는 우길의 모습을 보게 된다. 곧장 거울을 깨뜨린 손책은 크게 고함을 지른다. 이로 인하여 아물던 상처가 다시 터지고 오래지 않아 죽게 된다. 이렇듯 우길에 대한 나관중의 묘사는 현실적으로 도저히 발생될 수 없는 황당하고 허망하기 짝이 없는 일들이다. 그렇다면 이 내용은 터무니없는 날조란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역사상 근거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지ㆍ손책전』 배송지 주에서 인용한 『강표전(江表傳)』, 『지림(志林)』, 『수신기(搜神記)』 등에는 이에 관한 내용이 산견된다. 그래서 배송지는 ‘『강표전』, 『수신기』 등에 적힌 우길에 관한 기록은 동일하지 않아서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라고 했던 것이다. 북제(北齊) 사람인 안지추(顔之推)는 『환혼기(還魂記)』에서 이렇게 서로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모순까지 있는 부분을 연결시키고 있다. 즉 손책이 우길을 처치한 사건과 사냥 도중 자객에게 상처를 입은 사건을 뒤바꾸어 배치했다. 손책의 상처가 나으려는 참에 거울을 들고 자신을 비추다가 거울 속에 나타난 우길을 만나게 되는데 정작 뒤를 돌아보면 사라지기를 세 번이나 반복하다가 그만 거울을 부수고 크게 고함을 지르고 그 바람에 아물던 상처가 터지고 조금 뒤에는 죽고 말았다라고 한 것이다. 이 부분은 당연히 각도를 달리해서 평가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모종강이 이 회의 평주에서 이르기를, ‘손책은 신선을 믿지 않는데, 이 점이 바로 손책이 영웅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한 무제(漢武帝)와 같이 영명(英明)한 경우도 오히려 신선에 유혹되고 방사를 좋아했으나 손책은 그렇지 않으니, 이에서 우리는 그의 식견이 보통 사람을 크게 뛰어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지의 평주에도 역시 이런 의미가 있다. 이런 것이 바로 그들의 고명한 점이다. 나관중이 표현하고자 한 본의는 아마도 손책이 우길의 손에 죽었다고 여긴다거나 손책의 죽음이 우길과 지극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나관중이 묘사한 것처럼 진실로 우길이 비바람을 불러 오고 병을 고칠 수 있었다면, 손책은 감히 우길을 죽이지 못하고 응당 공경하고 받들었을 것이다. 아쉬운 점은 우길과 같은 이러한 신선은 지금까지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나관중은 이러한 자료들을 적당히 정리해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형태의 소설로 완성했다. 나관중은 역사소설과 역사과학을 적당히 혼합함으로써 『수신기』와 같은 종류의 기괴한 사건을 그의 역사소설 속으로 적절히 끌어들였던 것이다. 만약 그가 이런 기괴한 사건을 역사사실로 간주했다면 당연히 착오를 범한 것이다. 하지만 『삼국지연의』를 쓸 때 설서예인들의 영향을 크게 받아 신기하고 괴이한 사건을 특별히 중시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런 사건은 수많은 독자들을 흡인하기에 충분하여 누구나 듣기 좋아하고 읽기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나관중은 사건의 진실성이나 합리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곧바로 자신의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나관중이 『삼국지연의』를 쓰면서 참고한 서적이 광범위하다는 것은 장점이겠지만, 때로는 너무 복잡해서 괴탄하고 황당한 것들마저 끌어들인 것은 단점이라 할 수 있다.

2017년 12월 5일 화요일

전통 한지. Korean paper, 韓紙.

전통 한지 Korean paper, 韓紙. 종이를 발견하기 전, 인간은 죽간이나 목간을 주로 사용하였다. 종이의 기원에 대한 연대와 장소는 분명하지 않으나 기원전 2,500년경 고대 이집트인들이 파피루스(Papyrus)라는 식물 내피를 가공하여 종이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식물성 섬유를 종이의 단계로 만드는 초보적인 단계로 종이의 기원으로는 엄밀히 보기 어렵다. 이집트에서 파피루스를 사용하는 동안 동양에서는 문자를 표기하기 위하여 다양한 형태의 소재들, 예를 들어 소나 돼지의 뼈, 거북의 등껍질, 청동 그릇, 나무판자, 얇은 대나무판, 판석 등을 사용했다. 중국에서는 상고시대 때 거북이의 껍질이나 죽간, 목간, 비단 위에 글씨를 쓰고 기록하였으나 서한시대(B.C.206~224)에 이르러 마포(식물인 마)의 원료로 식물성 섬유종이를 만들어 사용했다. 『후한서』의 「채륜전」에 "··· 和帝 원년(A.D.105)에 채륜이 인피 섬유와 마 등의 식물섬유를 원료로 하여 종이를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었으나 최근 전한시대 고분이 발굴되면서 이보다 150~200년 앞서 종이가 발견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중국에서는 채륜이 황제에게 종이의 제조 과정을 보고한 이후 종이를 문서 표기의 대중적인 소재로 사용하도록 결정했다는데 큰 의미를 둔다. 이후 당, 송 시대에 와서 종이 제조기술이 향상되어 품종과 품질이 다양해지고 명대에 이르러 선덕 연간에 '선지'가 제조되기에 이른다. 그 후 청대에는 종이의 종류가 더욱 다양해지고 좋은 질의 종이가 만들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채륜이 종이를 만들었던 서기 105년경은 한반도에 낙랑군을 비롯한 4군이 설치된 시기로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성립되면서 제지술이 전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6세기 경에는 고구려 승려 담징이 먹, 붓과 함께 일본에 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이 기록에 사용된 재료인 종이는 2세기부터 현재까지 사용되는 가장 오래된 기록재료이다. 한지는 닥나무 껍질로 만든 순수한 한국 종이를 일본의 화지(和紙), 중국의 당지(唐紙), 서양의 양지(洋紙)와 구분하여 칭하는 말이며, 저피(楮皮, 닥나무 껍질)→조비→조회→종이로 어원이 변천하였다. 한지의 역사" 제지술이 우리나라에 언제 도입되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대개 중국과 일본 문헌을 통해 삼국시대라고 알려지고 있다. 다만 『고려사』에 종이와 관계되는 짤막한 문장이 군데군데 있고, 백제 고이왕 52년(서기 285)에 왕인 박사가 천자문과 논어를 일본에 전해 준 사실과 고구려 영양왕 21년(310)에 담징이 일본에 제지술을 전해주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당시 초지법과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으리라 생각된다. 우리나라 종이는 예로부터 중국에서도 높이 평가할 만큼 명성이 자자했다. 송나라 손목(孫穆)이 지은 『계림지(鷄林志)』에는 "고려의 닥종이는 윤택이 나고 흰 빛이 아름다워서 백추지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고반여사(考槃余事)』에는 "고려 종이는 누에고치 솜으로 만들어져 종이 색깔은 비단같이 희고 질기기는 마치 비단과 같은데 글자를 쓰면 먹물을 잘 빨아들여 종이에 대한 애착심이 솟구친다. 이런 종이는 중국에는 없는 우수한 것이다"라고 적혀있다. 조선시대에는 태종·세종 때 조지서(造紙署)를 두고 종이를 생산할 정도로 수요가 많았고, '상화지(霜華紙)', '백면지(白棉紙)' 등이 유명했다. 조선 영조 때 서명웅(1716~1787)이 지은 『보만재총서』에는 "송나라 사람들이 여러 나라 종이의 품질을 논하면 반드시 고려지를 최고로 쳤다. 우리나라의 종이가 가장 질겨서 방망이로 두드리는 작업을 거치면 더욱 고르고 매끄러웠던 것인데 다른 나라 종이는 그렇지 못하다"라고 적고 있어 한국 종이의 우수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종이가 대량 수입됐고 해방 후에는 양지가 점차 대중지의 위치를 차지해 버렸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이는 신라시대에 제조된 『무구정광다라니경』(국보 제126호, 704~751년 제조)으로 중국에서 말하는 '백추지'이다. 삼국시대에는 백추지가 주류를 이뤘고, 고려시대에는 '고려지'로 불리는 '견지(繭紙)', '아청지(鵝靑紙)' 등이 중국에서도 최고급지로 평가 받았다. 중국 역대 제왕의 진적을 기록하는 데에 고려의 종이만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 종이의 명성은 조선으로 이어져 한지가 중국과의 외교 필수품이 되기도 했다. 한지의 질이 명주와 같이 정밀해서 중국인들은 이것을 비단 섬유로 만든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러한 이유로 한지가 중국과의 외교에서 조공품으로 많이 강요되었다. 한지의 제지법" 한지의 주원료는 닥과 닥풀이다. 종이를 만드는 방법은 원료나 혼합하는 방법에 따라 조금씩 다르나 한지 제지의 전체적인 흐름은 1) 닥나무 채취 2) 닥나무 껍질 벗기기 3) 닥나무 껍질 삶기 4) 닥나무 껍질 씻기 5) 닥나무 껍질 두드리기 6) 닥나무 껍질에 닥풀 풀기 7) 한지 뜨기 8) 한지 말리기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깨끗이 다듬은 닥나무의 껍질을 벗겨 건조시키면 흑피가 된다. 다음으로 10시간 정도 흐르는 물에 담가 두었다가 껍질을 벗겨내면 백피가 된다. 메밀대나 콩짚대를 태워 만든 재로 잿물을 내어서 4~5시간 삶는다. 예로부터 종이를 만드는 사람은 삶는 과정을 제일로 여겨, 좋은 날을 택하였는데, 그것은 닥이 너무 삶아지거나 덜 삶아져도 좋은 종이를 얻어낼 수 없으며, 한 번 잘못 삶아진 닥은 다시 삶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삶은 닥은 맑은 물에 여러 번 씻어서 잿물기를 제거한 다음, 남아 있는 티를 일일이 골라낸다. 넓적한 돌판 위에 올려놓고 40분에서 1시간 정도 떡메로 고해(=두드리기)한다. 그리고 고해된 것을 지통에 넣고 뜨는데, 이때 '황촉규(속칭 닥풀)'라는 식물 뿌리의 즙을 진윤제로 섞는다. 이 닥풀은 날씨가 더워지면 삭아버리는 성질이 있어서 종이는 여름철보다는 서늘하고 건조한 가을이나 겨울철에 뜨는 것이 좋다. 닥섬유와 닥풀을 섞을 때는 종이의 용도에 맞추어서 경험이 많은 사람이 적당히 혼합한다. 혼합할 때 골고루 풀어지라고 대막대기로 휘젓는데, 이 과정을 '풀대친다'고 한다. 풀대질을 한 다음에는 대나무 세초발을 발틀에 얹어서 섬유를 고르게 떠낸다. 이것을 '물질한다(초지(抄紙))'고 하는데, 종이를 만드는 사람(지장)의 숙련된 솜씨가 가장 잘 드러나는 중요한 과정이다. 닥풀의 혼합 정도와 물질하는 솜씨에 따라서 종이의 두께가 결정되는 것은 물론, 종이바닥의 곱고 거친 정도가 결정되어 종이의 종류와 품질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한지를 뜨는 방법은 대개 흘림뜨기와 가둠뜨기가 있는데, 전통적인 한지의 초지법은 흘림뜨기인 외발뜨기와 장판지뜨기이고, 현재 많이 사용되고 있는 초지방법인 쌍발뜨기는 가둠뜨기와 흘림뜨기의 중간 형태를 띠고 있다. 한장 한장 떠낸 종이를 습지라고 한다. 습지는 하룻밤 동안 무거운 돌로 눌러놓아 서서히 물기를 뺀 다음 건조시킨다. 건조방법은 옛날에는 진흙 담이나 온돌 방바닥에 습지를 붙여 건조했는데, 이러한 건조 방법은 습기가 천천히 말리면서 고르게 말라 종이가 질기게 된다. 요즈음은 대부분 불에 달군 철판 위에서 건조하고 있다. 건조가 끝나면 일단 종이가 완성되는 것이지만, 여기에 다시 도침(다듬이 방망이질)을 하여 곱고 윤기나게 다듬음으로써 재래식 방법에 의한 종이는 비로소 완성된다. 한지의 특징" 우리나라의 한지는 일본의 화지(和紙), 중국의 선지(宣紙)와 구별된다. 세 나라 간의 종이는 사용 원료도 구별된다. 한지는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 질기고 자연스러운 반면, 화지는 일본산 닥나무 껍질로 만드는데 조직이 치밀하고 매끄러우며, 선지는 중국 닥나무 껍질, 섬유와 볏짚 등으로 만들어 거칠고 약하다. 한지가 우수한 것은 우리나라 닥나무를 비롯한 재료가 다른 나라에 비해 질적으로 나은 데다 종이 제조방식이 껍질을 벗겨 닥섬유질을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이다. 2006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한지페스티벌에서도 한지의 우수성이 드러났다. 한지로 만들어진 갖가지 등이 파리 볼로뉴 숲을 밝히던 중 갑자기 비가 내렸지만 우리의 전통 한지로 만든 등은 불이 꺼지지 않았다. 한지는 질기고, 보온성과 통풍성이 아주 우수하다. 바람을 잘 통하게 해주고 습기를 빨아들이고 내뿜는 성질이 있어 건조되었을 때 찢어지지 않고 보관성이 좋아서 수명이 오래 간다. 구텐베르크의 성경은 발간된 지 550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지질의 보관에 문제가 있어 열람조차 불가능한 암실에 보관되어 있는 반면에 한지는 천 년 세월을 견뎌낸 것은 물론 삭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다. 한지의 우수한 보존성은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이인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700년대 초에서 751년 사이 후기신라시대에 제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경덕왕 13년(754)에 필서로 쓰였던 묵서사경인 백지 『묵서대방광불화엄경』은 최고(最古)의 필서본으로 이 역시 한지의 우수성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고려 인종 23년(1145)경에 제지창 지소에서 한지로 발간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의 일부가 850년 동안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 역시 한지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지의 주원료인 닥나무의 인피섬유는 길이가 보통 20~30mm 이상이며, 긴 것은 60~70mm까지 있다. 그런데 서양 종이인 양지의 원료인 목재펄프의 섬유의 길이는 침엽수가 2.5~4.6mm, 활엽수가 0.7~1.6mm 정도로 매우 짧다. 따라서 인피섬유는 목재펄프에 비해 섬유의 결합이 강하고 질기며, 조직의 강도가 뛰어나 훌륭한 종이가 될 수 있다.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 껍질의 섬유는 길이가 균등한 데다 서로 간의 폭도 매우 좁다. 게다가 섬유의 방향도 직각으로 교차하여 그물 같은 구조를 띠고 있어 견고하다. 한지는 다양한 원료와 방식으로 제조될 수 있으나 주로 닥나무의 인피섬유, 맑은 물, 경우에 따라 목회를 사용하여 80여 가지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한지 제지의 원리는 식물의 섬유소를 물에 푼 후 그것을 떠내어 말리는 것이다. 이때 섬유소들은 접착제 없이 셀룰로오스 분자 사이의 수소결합을 하여 서로 엉키면서 섬유세포를 구성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한지는 산성도가 7.89로 중성을 띤다. 우리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신문지나 교과서가 세월이 흐르면 누렇게 변색되는 이유는 사용된 펄프지가 산성지이기 때문이다. 양지는 pH 4.0 이하의 산성지로서 수명이 고작 50~100년 정도면 누렇게 황화현상을 일으키며 삭아버리는 데 비해, 한지는 중성지로 화학반응을 쉽게 하지 않고, 세월이 지날수록 결이 고와지고 수명이 오래가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근래에 와서 미국, 캐나다,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19세기 후반 및 20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종이의 산도를 측정해 본 결과 산도가 4이하가 대부분이었으며, 그대로 방치한다면 이 기간에 제조된 종이는 금후 200~300년 사이에 분해되어 없어져 버릴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들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이들 도서를 약품처리하고 중성지를 제조하려는 노력이 행하여졌다. 우리의 한지의 수명이 길고 보존성이 우수하여 선진 각국에서 분석해 본 결과 산성계 첨가제나 이즈제를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음을 알았으며, 그야말로 '중성'에서 초지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후부터 세계가 중성지 제조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지의 질을 향상시킨 또 다른 요인이 있는데, 섬유질을 균등하게 분산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식물성 풀인 닥풀이다. 닥풀은 섬유가 빨리 가라앉지 않고 물속에 고루 퍼지게 하여 종이를 뜰 때 섬유의 접착이 잘 되도록 하며, 얇은 종이를 만드는 데 유리하고 겹쳐진 젖은 종이를 쉽게 떨어지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또, 한지 제조의 마무리 공정으로 종이 표면이 치밀해지고 광택이 나도록 하기 위해 풀칠한 종이를 여러 장씩 겹쳐 놓고 내리치는데, 이 기술을 '도침'이라고 한다. 한지의 종류" 한지는 종류에 따라 그 명칭도 다양 서화용으로 쓰이는 종이는 크게 선지계(宣紙系)와 당지계(唐紙系)로 나누어진다. 선지는 지질이 무른 편이며 습기를 흡수하는 성질이 있다. 옥판전(玉版箋), 라문전(羅文箋), 백지(白紙) 등이 선지에 속한다. 중국제 종이의 종류에는 일번당지(一番唐紙), 이번당지(二番唐紙), 백당지(白唐紙) 등이 있으며 이 외의 가공지로서 납전(蠟箋), 채전(彩箋), 문양전(文樣箋), 주금전(酒金箋), 문당전(文唐箋) 등이 있다. 청조(淸朝)시대의 종이로서 지금까지 감상의 대상으로 애장되는 고지(古紙)가 있는데 징심당지(澄心唐紙), 방금율산장경지(倣金栗山藏經紙) 같은 것이 있다. 화선지는 먹물을 잘 흡수하며 먹의 번짐이 좋은 서예용 종이를 말하며, 현재 시판 중인 대표적인 화선지로는 오당지, 옥당지, 연선지 등이 있다. 순지는 우리나라의 전통 한지로서 닥나무 껍질로 제조하는 종이다. 보존성이 뛰어나며 질겨서 그림용(민화)이나 서예용으로 이용된다. 색지는 순지를 염색한 것으로 색상이 다양하고 아름다워 용도가 다양하다. 문양지는 특수용지로 화선지 및 색지를 이용한 다양한 문양이 있다. 순지를 2장 또는 3장을 합한 두꺼운 종이로, 합한 매수에 따라 2합지, 3합지로 칭하며 주로 동·서양화용으로 사용된다. 한지의 구조적 특성" 평량, 두께, 밀도, 지합, 방향성 등이 있다. 평량(g/m2)은 물리적 광학적 성질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종이는 균일한 두께를 유지하는 것이 좋고, 두께에 따라 종이의 품질이 결정된다. 밀도는 섬유 간 결합력을 크게 좌우하며, 지합은 제지할 때 섬유나 기타 첨가제 등이 종이를 형성할 때 얼마나 균일하게 분포되었는지를 판단하는 지표로, 외관에 영향을 미친다. 종이는 내부응력을 가지고 있어 함수율이나 주변 상대습도에 따라 종이의 치수변화가 일어난다. 한지의 강도적 특성" 종이의 강도는 일반적으로 인장강도, 파열강도, 인열강도, 내절도, 빳빳한 정도(Stiffness) 등이 있다. 이 특징들은 섬유의 종류, 유연성, 결합강도뿐 아니라 구조적 특징 중 평량, 밀도, 함수율 등에 의해서도 크게 좌우된다. 내절강도와 인장강도, 인열강도는 종이의 보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내절강도는 종이 노화와 직접적 관련이 있고, 인장강도는 내구성, 인열강도는 섬유길이, 섬유결합력, 지합, 평량 등과 관련이 있다. 한지의 화학적 특성" 종이를 구성하는 식물성 섬유는 대부분이 셀룰로오스(Cellulose), 헤미셀룰로오스(Hemicellulose), 리그닌(Lignin) 및 추출물(Extractives)의 화학 성분을 지니고 있다. 특히 식물섬유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며, 섬유의 특성과 제지 원료로서의 적합 여부를 좌우하는 것은 셀룰로오스이다. 셀룰로오스는 탄소, 수소, 산소로 구성된 탄수화물(Carbonhydrate) 분자가 길게 결합되고, 많은 양의 당 단위로 이루어진 다당류의 일종이다. 셀룰로오스는 아래 그림과 같이 셀로바이오스(Cellobiose)가 측면결합을 하여 직선상의 사슬을 이루며, 셀로바이오스는 물과의 친수성이 높은 자유 수산기(-OH)를 포함하고 있어서 쉽게 수소결합(Hydrogen Bond)을 이룬다. 수소결합은 화학적 결합보다는 약하지만 길고 많은 수소결합을 하게 되어 강한 결합력을 갖는다. 따라서 보존성과 관계된 종이의 강도는 섬유의 강도라기보다는 섬유 사이의 수소결합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종이 원료와 달리 펄프를 서로 결합시키기 위하여 별도의 접착제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종이의 성질은 주로 종이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섬유의 구조에 의하여 결정된다.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특성은 섬유 길이와 세포벽 두께이다. 섬유 간의 결합을 위한 최소의 섬유 길이가 필요하며, 실제로 섬유 길이는 인열 강도와 비례한다. 종이를 만드는 제지공정 중에서 고해는 섬유의 표면적을 넓혀 더 많은 결합점을 갖도록 교착시키고 물의 표면장력으로 밀착하게 해서 수소결합이 일어나게 해 탄성을 갖는 종이를 만든다. 한지의 광학적 특성" 광학적 성질은 빛과 종이와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우리 눈이 다른 시각적인 느낌을 갖도록 하는 것으로 색, 명도, 불투명도, 광택 등이 있다. 종이는 셀룰로오스 분자가 빛을 흡수하면 열화가 일어나며, 재료, 표백제, 충전 및 도공, 염료, 초지방법, 표면 마무리 등에 따라 다르다. 빛 중에서도 자외선이 큰 피해를 주는데 셀룰로오스가 직접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제지시 첨가되는 첨가물에 의해 열화가 일어나며, 광화학 반응으로 착색의 원인이 된다. 우리나라의 한지는 일본의 화지(和紙), 중국의 선지(宣紙)와 구별된다. 세 나라 간의 종이는 사용 원료도 구별된다. 한지는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 질기고 자연스러운 반면, 화지는 일본산 닥나무 껍질로 만드는데 조직이 치밀하고 매끄러우며, 선지는 중국 닥나무 껍질, 섬유와 볏짚 등으로 만들어 거칠고 약하다. 한지가 우수한 것은 우리나라 닥나무를 비롯한 재료가 다른 나라에 비해 질적으로 나은 데다 종이 제조방식이 껍질을 벗겨 닥섬유질을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이다. 2006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한지페스티벌에서도 한지의 우수성이 드러났다. 한지로 만들어진 갖가지 등이 파리 볼로뉴 숲을 밝히던 중 갑자기 비가 내렸지만 우리의 전통 한지로 만든 등은 불이 꺼지지 않았다. "호정지 함경북도에서 재배하는 귀리짚으로 만든 황색의 한지로서 우리나라 고래로부터 생산된 명물인데 일병 북지, 북황지라고도 한다. 백색의 한지를 백지라 하는데 한지를 필사하는 데 편리하도록 방망이로 다듬이질을 한 백지를 말한다. 또 가는 털과 이끼를 섞어서 뜬 종이를 태지라 한다. 곡지 곡지(미지·가지지라고도 함)는 사경용의 종이로 저피를 원료로 하여 만든 것이고, 갈대를 원료로 하여 수록법에 의해 만든 고대 우리나라 한지로 로화지가 있다. 상지 상지는 도토리나무로 물들인 닥지인데, 주로 니금, 사경의 서사에 이용되었다. 장지 장지는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생산되었으며 지질이 두껍고 질기며 지면에 윤이 나서 문서 기록용으로 쓰인다. 태상지 태상지는 전라도 산 해태를 섞어서 종이를 뜬 것으로서 문양이 아름다운데 옛날에는 〈어음〉에 쓴 종이로 지질이 강하다. 생지 생록의 한지(뜬 대로의 종이) 단치 우리나라 고대 한지의 일종으로서 봉서에 사용 도침백지 홍두깨에 말아서 다듬이질을 하여 광택을 낸 백지로 옛날에는 글씨를 빨리 쓰기 위해서 이러한 방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예지 책의 겉표지에 사용되는 백지 외장지 지질이 두껍고 질기며 지면에 윤기가 나서 휘장용 종이로 쓰인다."

경주시慶州市, Gyeongju-s 2

경주시慶州市, Gyeongju-s" 경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 도시입니다. 약 천 년 동안 신라와 통일 신라의 도읍지로 크게 발전한 경주는 누구나 인정하는 거대한 보물 창고 부처님의 나라, 불국사. 751년에 불국사를 짓기 시작한 김대성은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부처님 곁으로 떠나고 말았어요. 신라 왕실은 공사를 이어받아 불국사 공사를 마무리했어요. 긴 공사 끝에 모습을 드러낸 불국사는 지금보다 웅장 했다고 전해 내려온다. 완공될 당시에는 건물이 80채가 넘었다고 해요. 지금의 불국사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불국사는 ‘부처님의 나라’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불국사는 이상적인 불교 세계를 잘 나타내고 있어요. 처음 지어졌을 때 불국사의 이름은 ‘화엄불국사’였어요. 화엄불국사(華嚴佛國寺)의 한자를 풀이하면 ‘화엄 사상에 입각한 불교 국가를 나타낸 사찰’이란 뜻. 다시 말하면 불국사는 불교 경전에 나오는 이상적인 부처님의 세상을 표현한 나라인 셈이다. 불국사에 세워진 건축물과 그 안에 있는 다양한 불상들은 다양한 불교 세계를 보여 주고 있어요. 건물 앞에 세워진 석탑과 그 속에서 발견된 유물과 각 공간을 이어 주는 작은 구조물 하나까지도 불교의 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석조 건축물" 불국사의 관문인 일주문을 지나 조금 이동하면 수많은 돌을 쌓아 만든 석대 위에 멋진 건축물이 자리하고 앞쪽으로 세련된 석조 구조물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이곳을 대석단이라고 해요. 돌을 정교하게 다듬은 아름다운 구조물이지요. 대석단은 청운교와 백운교가 있는 동쪽 구역과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는 서쪽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청운교와 백운교는 불국사를 알리는 포스터나 책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불국사를 대표하는 곳이에요. 실제로 청운교와 백운교를 보면 이름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아무리 살펴보아도 계단인데 다리를 뜻하는 이름을 갖고 있으니 말이에요. 지금은 볼 수 없지만 불국사를 지을 당시에는 청운교에서 백운교로 이어지는 아치 구조 아래쪽에 작은 물길이 있었어요. 그래서 청운교와 백운교에 다리를 의미하는 한자 ‘교(橋)’를 붙인 것 두 다리 중 아래쪽이 청운교이고 위쪽이 백운교입니다. 각각 17개와 16개, 총 33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두 다리가 끝나는 곳에는 부처님 세계로 통하는 ‘자하문’이란 문이 있어요. 한자로 자하문(紫霞門)은 ‘자주색(혹은 금색) 안개가 서린 문’이란 뜻으로, 몸에서 황금색을 발산하는 부처를 상징하지요.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에는 조금 작은 2개의 다리가 더 있어요. 연화교와 칠보교로 불리는 이 두 다리도 속세와 부처의 세계를 이어 주는 공간임. 이 두 다리에는 연꽃 문양이 조각되어 있는데 아래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위쪽 안양문 앞에서 내려다보아야 잘 보입니다. 연화교와 칠보교가 끝나는 곳에 있는 안양문은 극락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에요. 한자로 ‘안양(安養)’이란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몸을 쉬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곧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을 뜻하지요. 오늘날에는 청운교와 백운교, 연화교와 칠보교를 걸어서 불국사로 들어갈 수는 없어요. 문화재 보호를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옛날 통일 신라 사람들은 걸어서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을 거예요. 우리들은 선조들이 지은 통일 신라 최고의 석조 구조물과 부처님의 세계를 자유롭게 볼 수 있다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합니다. 수많은 걸작" 통일 신라 장인들이 빼어난 솜씨로 빚어낸 석조 건축물을 본 뒤에는 부처님의 세계를 표현한 불국사 안으로 이동해 보세요. 불국사 경내는 크게 대웅전, 극락전, 화엄경 구역으로 나눌 수 있어요. 불국사의 중심인 대웅전 구역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 삼층 석탑)을 중심으로 북쪽에 웅장한 대웅전이 서 있고 남쪽에는 자하문이 있어요. 앞에서 불국사를 부처님의 나라라고 했지요? 대웅전은 불국사의 주인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곳이에요. 그만큼 중요한 곳이랍니다. 처음 지어졌던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잿더미로 사라졌고, 지금의 건물은 조선 시대에 새로 건축한 것입니다. 그러나 건물을 받치고 있는 기단만큼은 옛 모습 그대로입니다. 대웅전 앞에는 2개의 멋진 탑,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습니다. 석가탑으로 더 잘 알려진 불국사 삼층 석탑은 통일 신라 석탑의 표본으로, 연꽃 모양의 돌조각이 새겨진 바닥 가운데에 세워져 있어요. 장식이 없어 간결한 아름다움과 각 부분의 균형이 잘 잡힌 안정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모습이랍니다. 실제로 탑을 본 친구들은 삼층 석탑이란 이름에 의문이 들었을 거예요. 3층보다 층이 많아 보였을 테니까요. 하지만 아래쪽에 있는 넓고 커다란 2층의 돌은 탑이 아니라 탑을 지탱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바닥 부분인 기단이에요. 석가탑에서 실제 석탑은 지붕 모양의 3층에서 5층 부분이지요. 그 위에 세워진 날렵한 모양의 작은 탑들은 보수 과정에서 새롭게 만든 거예요. 불국사 삼층 석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는 2층 석탑 안에서 소중한 유물이 발견되었어요. 황금으로 만든 사리함과 함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지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지금까지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오래전부터 기록을 중시했으며 뛰어난 인쇄 문화를 갖고 있었다는 걸 잘 보여 주는 유물이지요. 불국사 삼층 석탑 동쪽에는 십 원짜리 동전에 등장하는 다보탑이 있어요. 다보탑은 높이가 10.4m로 우아하고 화려한 모습의 탑입니다. 탑 아래쪽은 동서남북으로 계단이 있고, 계단 위쪽 중간 부분에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자 석상이 있어요. 이 사자상은 처음 다보탑이 세워질 당시에는 동서남북에 하나씩 총 4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때 3개가 사라지고, 하나 남은 것도 얼굴 부분이 크게 파손되었답니다. 다보탑의 윗부분은 나무를 깎아 조각한 듯 현란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보여 줍니다. 다보탑은 이전까지 신라에 세워졌던 석탑하고는 전혀 다른 형태와 구조로 세워진 탑이에요. 다보탑을 만든 장인이 신라인이 아닌 백제의 후손이라는 걸 짐작하게합니다. 극락전 화엄경구역" 불국사 서쪽은 극락전 구역입니다. 건물의 크기도 작고 웅장한 탑도 없지만 극락전에는 아미타불(금동아미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어요. 여러분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란 말을 많이 들어 보았을 거예요. 여기서 ‘나무’는 산에서 볼 수 있는 나무가 아니라 옛 인도 언어 중 하나인 산스크리트 어로 ‘무엇을 믿고 의지한다’는 뜻을 갖고 있어요. 다시 말하면 스님이나 불교 신자들이 ‘나무아미타불’이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미타불 부처님을 믿고 의지한다는 뜻이에요.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전체적인 조화와 선이 아름다운 불상으로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어요. 대웅전 뒤쪽에는 무설전이란 제법 큰 건물이 자리하고 있어요. 무설전은 스님들이 불경을 가르치고 공부를 했던 공간이에요. 무설전 뒤편이 화엄경 구역이에요. 화엄경 구역에는 관음전, 비로전, 나한전 등의 건물이 있는데, 중심은 관음전입니다. 불국사 관음전에는 자비로운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어요. 그리고 옆쪽의 비로전에는 진리와 빛의 부처님으로 알려진 비로자나불 부처님(금동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은 자비로움과 위엄이 동시에 느껴지는 독특한 불상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어요. 그 밖에도 불국사에는 불상이 모셔진 건물과 유적이 가득합니다. 빼어난 솜씨" 석굴암은 부처님을 모시기 위하여 건축한 석굴 사원으로 불국사와 동시에 짓기 시작했어요.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였습니다. 석굴암은 우리나라에서 많이 생산되는 화강암으로 만든 인공 석굴이에요. 외국의 유명한 석굴 유적지인 인도의 아잔타 석굴과 엘로라 석굴, 중국의 룽먼 석굴 등이 자연 상태의 바위를 뚫어서 만든 석굴이라면, 석굴암은 치밀하게 설계하고 계산해서 쌓은 인공 건축물입니다. 360여 개의 돌을 사용해 만든 둥근 천장과 석실의 모습은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석조 건축 기술을 잘 보여 준답니다. 석굴암에는 수많은 불상과 제자상, 보살, 팔부신중 등이 새겨져 있어요. 중국이나 인도의 석굴에 새겨진 조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정교해, 신라 장인들의 뛰어난 솜씨를 느낄 수 있지요. 그리고 전체적인 안정감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입니다. 공간마다 새겨진 의미 있는 조각상" 석굴암의 평면도를 보면 앞쪽은 사각형이고 뒤쪽은 원형의 구조로 되어 있어요. 석굴암은 크게 전실, 주실, 통로의 세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현재 유리창과 연결된 앞쪽의 사각형 부분이 전실,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앉아 있는 본존불이 모셔진 원형 부분이 주실, 전실과 주실을 이어 주는 곳이 통로랍니다. 가로 6.8m, 세로 4.8m의 전실은 현실 세계를 표현한 공간으로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이에요. 전실 벽에는 팔부신중(불법을 수호하는 8명의 신)이 좌우에 4개씩 모두 8개가 조각되어 있어요. 7개는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으나 오른쪽 벽의 하나는 일부가 파손되었어요. 전실과 주실을 잇는 통로는 폭 3.6m, 길이 2.9m입니다. 통로 입구에는 양쪽에 금강역사가 서 있어요. 부처님의 세계로 나쁜 것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금강역사는 조금은 험상궂게 생겼어요. 두 금강역사는 자세는 비슷하지만 얼굴 표정은 전혀 다르답니다. 전설에 따르면 금강역사는 힘이 코끼리의 수백 배에 이른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그리고 통로 벽면에는 무장한 4개의 사천왕이 새겨져 있습니다. 절묘한 공간미와 균형미" 석굴암의 중심은 안쪽 주실입니다. 타원에 가까운 둥근 주실은 부처의 세계를 표현한 공간이지요. 주실의 주인은 본존불입니다. 본존불은 1.8m 높이의 연꽃이 새겨진 좌대에 앉아 있고, 앉은키가 3.5m에 이르는 커다란 불상이에요. 눈을 감고 엷은 미소를 띤 입술이 돋보이는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자비심이 느껴지고, 커다란 귀와 어깨, 손, 다리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선은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입니다. 또한 어깨를 드러낸 옷과 옷 사이의 주름은 생동감이 엿보입니다. 뛰어난 예술성이 느껴지는 작품이지요. 부처의 세계답게 주실은 온통 불교와 관련된 조각과 공간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본존불을 중심으로 뒤편에는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 문양과 십일면관음보살상, 10대 제자상, 범천과 제석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등이 새겨져 있어요. 위쪽에는 10개의 감실(안으로 둥글게 판 공간)이 있고, 그 안에 8개의 조각상이 앉아 있어요. 2개는 지금 사라지고 없답니다. 주실은 완벽한 균형미를 보여 주는 공간이기도 해요. 불교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숫자인 108개의 돌로 짜맞춘 천장은 절묘한 공간미를 보여 준답니다. 신라 석불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본존불에 관해서는 최근까지도 학자들 사이에서 주장이 다르기도 했어요. 석가모니불, 아미타여래불, 비로자나불이란 설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석가여래불로 보고 있답니다. 한편 석굴암이 처음 완성될 당시에는 총 40개의 조각상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지금은 38개만 남아 있습니다. 사라진 2개의 감실 조각상에 관한 의문은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석굴암 다양한 이야기" 통일 신라가 만든 최고의 문화재입니다. 석굴암에는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도 담겨 있어요. 석굴암 주실의 본존불은 멀리 동남쪽 바다를 향해 앉아 있습니다. 지금은 석굴암 입구에 나무로 된 건축물이 세워져 볼 수 없지만, 과거에는 동짓날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이 본존불의 이마에 비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또 석굴암 본존불의 시선을 따라가면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이 잠들어 있는 대왕암이란 바다 능과 연결됩니다. 석굴암과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편안하게 지키겠다는 문무대왕의 마음이 연결되어 있는 것 석굴암 유적지는 안타까운 부분도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일제 강점기 때 복원 과정에서 시멘트를 사용한 것을 들 수 있어요. 잘못된 복원 공사로 습기가 차면서 한때 심각할 정도로 석굴 내부에 손상을 가져 왔어요. 그 이유로 오늘날 석굴암 내부를 관람할 수 없게 되었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복원 과정에서 나온 석재를 그냥 방치해 놓은 것입니다. 제대로 된 관리가 필요한 부분이지요. 석굴암과 불국사는 불교문화의 꽃입니다. 완벽한 공간 구성을 바탕으로 균형 잡힌 본존불과 조각, 환상적인 조화와 균형미를 가진 석굴암은 통일 신라의 종교, 예술, 건축, 수리, 기하학이 총망라된 유적지입니다. 청운교, 백운교, 불국사 삼층 석탑, 다보탑, 대웅전, 비로전 등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 현실과 부처의 세상이 공존하는 불국사는 우리의 자랑이자 온 인류가 보존하고 지켜 나가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한국의 탑"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탑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던 건축물입니다. 고대에는 종교적인 용도보다 군사적인 목적으로 탑을 만들었습니다. 부처님 몸에서 나온 사리를 보관하게 되면서 탑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스투파라고 하는 인도 탑에서 출발했지요. 당시에 스투파는 숭배의 대상이었고, 절도 스투파 주변에 지었답니다. 화엄사 사사자 삼층 석탑 우리나라에도 많은 탑이 있습니다. 처음 탑이 세워진 시기는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4세기부터 6세기까지는 주로 나무로 만든 목탑이 세워졌는데, 화재에 약하여 지금 남아 있는 탑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본격적으로 탑이 세워진 것은 7세기부터입니다. 이 시기의 탑은 돌로 만든 석탑이 대부분입니다. 이웃 중국은 벽돌로 만든 전탑이 많고 일본은 목탑이 많은데 비해 우리나라에 석탑이 많았던 이유는 어느 곳에서든 쉽게 돌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탑이 약 30여 기이고, 보물까지 합하면 약 200기나 됩니다. 지금 남아 있는 우리나라 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탑은 백제 무왕 때 건립한 미륵사지 석탑입니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 석탑, 경주 분황사 석탑, 감은사지 삼층 석탑, 다보탑 등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탑입니다. 포인트" 고대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것은 옛날 사람들이 남긴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물도 중요하지만 그에 따른 기록이 없다면 문화재의 진가를 정확히 알 수 없겠지요. 그래서 과거를 기록한 자료들은 소중한 문화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고대 역사와 문화에 관한 책 중 대표적인 것으로 고려 시대에 쓰여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가 있습니다. 《삼국유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문서로 고려의 일연 스님이 썼습니다. 《삼국유사》는 총 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3, 4, 5권을 한 권의 책으로 구성한 조선 시대 판본이 남아서 전해지고 있지요. 《삼국유사》에는 고대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재, 주요 인물까지 다양한 내용이 실려 있으며, 비교적 정확한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고려 때 학자인 김부식이 편찬한 역사책입니다. 《삼국사기》는 총 9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분류하면 50권에 달합니다. 《삼국유사》보다 약 140년가량 먼저 간행되었으며 고려 인종 때 처음 인쇄한 이후 여러 차례 인쇄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최초로 인쇄된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불교와 우리 문화 불교는 기독교, 이슬람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입니다.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에 인도에서 생겨났어요.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이웃 나라로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게 되었지요.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것과 관련해서는 서기 48년에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석탑을 싣고 바다 건너 가락국에 도착하자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 그녀를 왕비로 맞아 아이를 10명이나 낳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요.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시기는 4세기 후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삼국 가운데 불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는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고구려였습니다. 소수림왕 2년인 372년에 전해졌지요. 불교가 백제에 전래된 시기는 고구려보다 조금 늦은 384년 침류왕 때였습니다. 신라에는 휠씬 늦은 527년, 법흥왕 때 불교가 공인되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불교가 전래되었지만 정식 경로로는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보다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불교를 매우 중시했습니다. 삼국 시대에 불교는 종교인 동시에 통치 이념이었고, 문화 발전의 토대가 된 것은 물론, 사람들의 생활 깊숙이 영향을 끼쳤습니다. 삼국 시대 이후 통일 신라를 거쳐 고려 시대까지 약 천 년 동안 왕조와 백성들의 삶과 함께했지요. 따라서 고대 우리나라에 세워진 수많은 건축물과 주요 문화재, 소중한 기록들은 하나같이 불교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문화재는 불교와 연관이 없는 것도 있지만 많지 않습니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던 조선 시대에는 사찰이 파괴되고 승려들이 많은 피해를 받았지요. 그런 중에도 전국 사찰에서는 많은 문화재가 만들어졌습니다. 우리 고대 문화는 곧 불교문화라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불국사와 석굴암 답사" 문화재를 볼 때는 저마다 좋아하는 문화재도 다르고 접근 방법도 달라서 방법이나 코스를 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불국사와 석굴암을 자주 가본 경험으로 관람 방법을 추천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볼거리가 많아서 먼저 어느 곳을 볼지 결정한 뒤 관람을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유롭게 천천히 불국사를 둘러본 뒤 석굴암을 감상하는 것을 권합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불국사와 석굴암은 모두 현세와 부처님의 세계를 표현한 공간이지만 다양한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는 불국사를 둘러본 뒤 석굴암을 보아야 부처님의 세계를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둘째, 석굴암은 전실 앞을 유리문으로 막아 놓아서 안으로 들어가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1~2시간이면 충분히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다양한 문화재가 많은 불국사를 여유롭게 둘러본 다음 천천히 석굴암을 보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불국사는 볼거리가 무척 많아서 자세히 보아도 한두 곳은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고 싶은 곳을 미리 수첩에 적어 와 확인하면서 보아야 원하는 것을 다 보고 돌아갈 수 있습니다. "불국사 일주문 ➞ 천왕문 ➞ 대석단(청운교, 백운교와 연화교, 칠보교) 구역 ➞ 극락전(안양문, 극락전) 구역 ➞ 대웅전(대웅전, 다보탑, 불국사 삼층 석탑, 좌경루와 범영루) 구역 ➞ 무설전 ➞ 관음전 ➞ 비로전 ➞ 석굴암" 경주 역사 지구에는 조각, 탑, 왕릉, 산성 등을 비롯해 신라 시대의 뛰어난 불교 유적과 생활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7세기부터 10세기 사이의 유적이 많으며 이들 유적을 통해 신라 고유의 탁월한 예술성을 확인할 수 있다. 경주는 1,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신라의 수도로 신라인의 생활 문화를 잘 보여 준다. 거대한 야외 박물관으로 알려진 남산을 중심으로 도시 여러 곳에 다양한 문화재가 흩어져 있습니다. 경주에 이토록 다채로운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이유는 신라가 긴 세월 동안 도읍지를 한 차례도 옮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에는 오랫동안 한 나라의 수도였던 도시가 많습니다. 그리스 아테네, 이탈리아 로마, 중국 시안, 일본 교토 등은 분명 경주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입니다. 하지만 산 전체가 야외 박물관을 연상시키는 유적지가 있는 곳은 경주가 유일합니다. 수많은 문화재와 유적이 경주 전체에 흩어져 있어 5개 지역으로 분류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경주의 토함산에는 독립된 세계 문화유산인 불국사와 석굴암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이자 고대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매력적인 도시, 경주로 떠나 볼까요? 천년 고도, 경주 경주는 기원전 57년부터 서기 935년까지 992년 동안 신라와 통일 신라의 도읍지였습니다. 삼한 시대 진한의 12국 중 사로국이 있던 곳이었고, 신라 시대에는 서라벌(계림)로 불렸습니다. 고려 시대부터 ‘경주’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지요. 경주는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 지역입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전성기 때는 경주에 주택이 약 18만 호나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경주의 주택이 10만 호가 조금 넘는 것에 비교하면 얼마나 커다란 도시였는지 짐작할 수 있겠죠? 놀랍게도 초가집이 단 한 채도 없었고, 황금으로 장식된 집이 자그마치 35채나 있었다고 합니다. 경주 역사 유적 지구는 크게 다섯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가장 넓은 면적에 많은 유적지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는 곳은 불교문화의 보고로 알려진 남산 지구입니다. 그리고 왕조의 궁궐 터가 자리한 월성 지구, 신라의 왕들이 잠들어 있는 고분군이 있는 대릉원 지구, 신라 불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황룡사 터와 분황사 터가 자리한 황룡사 지구, 천년 고도를 지키는데 크게 기여한 산성 지구가 있습니다. 신라의 흥망을 지켜본 남산 신라는 남산에서 시작해서 남산에서 끝을 맺었다고 할 수 있어요. 남산 서쪽 기슭 나지막한 언덕에는 과거에 우물이 있었던 나정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나정은 신라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박혁거세의 탄생지로 알려진 곳이랍니다. 신라가 생기기 전 경주 근처에는 6개의 마을로 이루어진 사로국이란 나라가 있었어요. 어느 날 6개 마을의 촌장들이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백마를 발견하였지요. 이상하게 여겨 그곳으로 가 보니 커다란 알이 하나 있었는데, 알을 깨뜨리자 그 안에서 사내아이가 나왔습니다. 이 사내아이가 훗날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로, 박처럼 생긴 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박(朴)으로 하고,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혁거세로 지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이곳에 우물은 없고, 박혁거세의 탄생 신화가 적힌 비석만 남아 있습니다. 나정 남쪽에는 신라의 멸망을 상징하는 포석정이 있어요. 신라의 왕들은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연회를 즐겼다고 해요. 포석정에는 폭이 30cm쯤 되고 길이가 22m쯤 되는 물길이 있어요. 구불구불하게 구부러진 물길을 따라 술잔이 돌게 만들었지요. 술잔이 멈추는 곳에 앉은 사람은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지요. 이 놀이를 ‘유상곡수연’이라고 해요. 그러나 이렇게 풍류를 즐기는 풍조는 신라를 쇠약하게 만들었고, 결국 신라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연회를 즐기다 후백제 왕 견훤의 침략을 받고 최후를 맞았다고 전해집니다. 천 년 동안 이어 온 신라를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만든 곳도 남산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야외 박물관, 남산 경주 남산은 동서 4km, 남북 10km에 달하는 타원형 모양의 산으로, 커다란 야외 박물관이라고 불리고 있어요. 신라에 불교가 전래되기 전부터 사람들은 남산을 성스럽게 여겼습니다. 불교가 전래되자 남산을 불교 성지인 수미산으로 여기며 많은 절과 불상, 불탑을 세우기 시작했고,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야외 박물관이 만들어졌지요. 남산에는 발굴된 유적지와 유물이 너무 많아 기관마다 발표하는 자료가 다르지만, 경주시의 자료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지금까지 남산에서 발견된 왕릉은 13기, 절터는 150여 곳입니다. 그리고 불상이 120여 점에 석탑은 96개, 석등도 22기나 됩니다. 그 밖에도 각종 유적지와 유물이 수없이 많습니다. 남산은 크게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독특한 문화재가 곳곳에 흩어져 있고, 매혹적인 유적지와 유물이 많아서 다 둘러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주요 유적지와 유물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한 곳 문화재가 보존" 남산 동쪽 지역은 서쪽에 비해 유적지도 적고 분포된 유물도 적습니다. 그러나 유물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펴 보면 서남산 지역에 있는 유물보다 세련되고 보존 상태가 뛰어난 문화재가 더 많습니다. 동남산에 남아 있는 주요 유물은 석탑과 불상으로, 작품성과 문화재의 가치가 높은 것으로는 보리사에 모셔진 미륵곡 석불좌상(석조여래좌상), 칠불암 마애석불,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을 꼽을 수 있습니다. 보리사라는 아담한 절의 왼쪽 언덕에서 세련된 자태로 토함산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미륵곡석불좌상은 보존 상태가 무척 좋은 불상입니다. 이전의 신라 불상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섬세한 선이 돋보이지요.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에 빠져 있는 듯한 표정을 하고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의 불상으로 신라 불상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작품입니다. 남산에는 많은 유적지와 유물이 있지만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유물은 칠불암 마애석불 하나뿐입니다. 칠불암 암자 옆 커다란 2개의 바위에 모두 7기의 불상이 새겨져 있지요. 병풍바위라는 곳에 새겨진 3기의 불상은 1~2.7m 크기로 삼존불이라고 하고, 바로 옆 사각형 바위에는 동서남북으로 4기의 사방불이 새겨져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모습의 칠불암 마애석불 중 화려한 연꽃 위에 앉아 미소를 머금고 있는 삼존불의 여래상과 보살상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칠불암 위쪽에는 남산에서 가장 신비로운 불상인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이 토함산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낭떠러지 위의 바위를 깎아 만든 이 불상은 머리에 삼면 보관을 쓰고 있습니다. 조각이 세련되고 섬세한 것은 물론, 이른 아침과 안개가 많은 날이면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신비한 불상 불교 문화재 서남산" 남산 서쪽 지역은 발길을 옮기는 곳마다 개성이 강한 유적지와 유물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에요. 주요 유적지는 계곡과 산 능선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서남산에서는 우선 삼릉 계곡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습니다. 삼릉 계곡의 입구 부분에는 세 명의 왕이 잠들어 있는 능과 초기 불교 미술을 잘 보여 주는 배리석불입상이 있어요. 이름도 특이한 배리석불입상은 가운데에 부처님이 있고 양쪽에 보살상이 서 있습니다. 세련미가 없고 둔탁한 모양새로 보아 신라 초기 불상으로 보고 있지요. 신라 초기 불교 미술의 수준을 가늠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물입니다. 삼릉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 산길을 따라 이동하면 목과 손이 잘린 불상을 비롯하여 마애관음보살입상, 석불좌상, 선각육존불 등과 만나게 됩니다. 이 불상들과 눈인사를 마치고 정상을 향해 걷다 보면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삼릉 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애석가여래좌상은 높이가 6m로 남산에 있는 불상 중 가장 큽니다. 자연 바위에 새겨진 거대한 불상으로 통일 신라 후기 때 완성한 작품입니다. 선으로 새겨진 몸은 약간 뒤로 젖힌 모습이고, 얼굴은 입체로 새겨 놓았습니다. 가느다란 눈으로 가파른 계단을 올라온 사람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지요. 지금도 불심 깊은 사람들이 찾아와 가슴속에 품고 있는 이야기를 마애석가여래좌상에게 전하고 있답니다. 마애석가여래좌상에서 능선을 따라 동남쪽으로 이동하면 균형이 잘 잡힌 모습의 삼층 석탑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용장사곡 삼층 석탑입니다. 용장사곡 삼층 석탑은 옛 신라 장인의 멋과 지혜가 동시에 느껴지는 탑입니다. 낭떠러지 끝에 세워진 탑인데도 불구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며 자연과의 조화를 소중하게 생각했던 우리 조상들의 정신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또한 건너편 산과 절벽을 배경으로 서 있는 자태는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아래쪽에는 마애여래좌상과 아주 특이한 모양의 용장사곡 석불좌상이 있습니다. 3층짜리 대좌 위에 세워진 1m 길이의 불상은 안타깝게도 머리 부분이 없습니다. 하지만 신라는 물론이고 백제와 고구려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을 간직하고 있다. 신라 정치 중심" 천년 고도의 정치 중심지로, 초기 유적지부터 화려한 유적지까지 신라의 발전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곳입니다. 월성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지는 신라 왕조를 이끌었던 김(金)씨의 시조 김알지가 태어난 숲인 계림이지요. 이 숲의 나뭇가지에 매달린 금 궤짝의 알에서 태어난 아기가 바로 김알지라는 건국 신화가 전해지고 있어요. 신라와 통일 신라 왕조는 초대왕인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마지막 왕인 경순왕까지 모두 56명의 왕이 나라를 다스렸는데 박씨, 석씨, 김씨가 돌아가면서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그중 가장 많은 왕을 배출한 것은 김씨입니다. 그리고 계림의 서쪽에는 내물왕의 능을 중심으로 3기의 왕릉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계림 남쪽에는 신라 최고의 문화 공간이었던 궁궐 유적지 월성이 있습니다. 이곳 터의 모양이 초승달처럼 생겼다고 해서 월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요.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월성은 남천이 흐르는 남쪽을 제외한 나머지 동쪽, 서쪽, 북쪽으로 인공 호수인 해자를 만들어 궁궐을 방어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 흙과 돌을 섞어 성벽을 쌓았습니다. 성벽 유적지는 지금도 남아 있다. 옛 신라의 궁궐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는 임해전지(임해전이 있던 터)가 있습니다. 임해전은 삼국을 통일한 30대 왕인 문무왕이 건설한 궁궐로, 왕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왕자가 머물렀던 동궁이었어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고 한편으로 당나라에 통일 신라의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건설한 궁궐이었지요. 임해전은 바다에 접해 있는 건물이란 뜻을 갖고 있어요. 육지 한가운데 바다라니 조금 생뚱맞지요? 신라 사람들이 임해전에 접해 있던 큰 연못을 바다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고 있어요. 바다를 좋아했던 문무왕은 자신이 죽으면 시신을 바다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하기도 했어요. 훗날 문무왕이 죽자 유언을 받들어 경주에서 가까운 동해 감포 앞바다에 수장했지요. 임해전은 동궁 외에도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희귀한 새와 짐승을 기르는 정원으로 사용되었고, 왕이 신하들과 연회를 즐기던 장소이기도 했어요. 임해전지는 조선에 이르러서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폐허가 된 임해전지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면서 조선 시대에는 임해전지의 연못을 ‘안압지’라고 불렀답니다. 임해전지는 발굴 과정에서 통일 신라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어요. 연못 속에서 발굴된 유물은 실제로 왕족과 백성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국립 경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천문대, 첨성대" 첨성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 여왕이 세운 건축물입니다. 첨성대에 관해서는 여러 곳에 기록이 남아 있지만 용도가 명확하게 밝혀진 자료는 없습니다. 첨성대는 월성과 계림 근처 사방이 확 트인 평탄한 곳에 우뚝 서 있습니다. 높이는 9.17m로 우물이나 호리병처럼 생긴 특이한 모습이에요.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지그재그로 쌓아 지었지요. 건물 가운데에는 정사각형의 창문이 있고, 꼭대기에는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긴 화강암이 2단으로 쌓여 있어요. 창문 아래쪽은 흙이 채워져 있어요. 지진이나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흙을 쌓은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첨성대는 별을 관측했던 장소로 알려져 있어요. 창문을 통해 별을 관측한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꼭대기에서 관측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요. 그래서 첨성대 안쪽에는 꼭대기까지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해요. 첨성대가 별을 관측했던 곳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건물의 과학적인 구조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어요. 첨성대를 짓는 데 사용된 벽돌의 개수가 362개인데(세는 방법에 따라 365개라는 주장도 있어요) 이 숫자는 1년을 음력으로 사용했던 당시 날짜와 같습니다. 첨성대의 몸통 부분을 27단으로 쌓았는데, 창문의 3단을 빼고 창문 아래쪽까지가 12단, 창문 위쪽이 12단으로, 24절기를 뜻한다고 합니다. 첨성대를 기념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학자는 제례 의식을 올렸던 곳이라고 주장하기도 해요. 하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사료와 기록에 의해, 별자리를 관측하여 계절과 절기를 알아보고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정보를 얻던 천문 관측대라는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왕가의 휴식처" 경주 시내를 다니다 보면 평지에 커다란 동산 모양의 무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어요. 경주의 왕릉은 마치 작은 산을 연상시킬 정도로 커서 예로부터 ‘조산’이라고 불렸지요. 경주에는 옛 신라와 통일 신라를 다스렸던 왕과 왕비, 귀족이 잠들어 있는 무덤이 250여 기나 있어요. 그중 거대한 봉분을 갖춘 왕릉은 23기이고, 나머지 무덤은 일반 묘처럼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지요. 신라 왕들의 무덤이 모여있는 곳을 대릉원 지구라고 해요. 황남리 고분군, 노동리 고분군, 노서리 고분군, 오릉 등이 대릉원 지구에 속하지요. 가장 흥미로운 왕릉으로는 천마총을 꼽을 수 있어요. 공식 명칭은 155호 고분이지만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진 천마도가 왕릉에서 발견된 이후 천마총이라 불리고 있어요. 천마총에는 많은 유물이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어요. 천마총에서는 금관과 천마도장니를 비롯하여 장신구와 무기, 유리병, 그릇 등 총 1만 1500점에 달하는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발굴 현장에 참여했던 학자들을 놀라게 만들 정도였지요. 천마총에서 발견된 유물은 고대 미술을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어요. 천마총에서 발견된 유리병과 생활용품을 통해 신라가 중국뿐만 아니라 서양과도 교역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유물을 감상하려면 천마총 전시장도 좋지만 국립 경주 박물관에서 진품을 보는 것이 좋답니다. 천마총 옆에는 부부가 함께 잠들어 있는 황남대총이 있습니다. 황남대총에서는 황금으로 만든 장신구를 비롯한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신라를 상징하는 황룡사" 경주는 도시 전체가 불교 유적지로 가득합니다. 대표적인 불교 유적지로 황룡사 지구를 빼놓을 수 없지요. 지금은 건물 터와 목탑이 세워졌던 흔적만 있지만 황룡사는 신라에서 매우 크고 중요한 절이었어요. 신라 24대 왕인 진흥왕은 553년에 황룡사 터에 궁궐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궁궐을 짓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땅에서 황룡이 나타났어요. 그 뒤 궁궐 공사를 멈추고 절을 짓기 시작했지요. 17년의 공사 끝에 모습을 드러낸 황룡사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웅장한 모습의 절이었다고 해요. 황룡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황룡사 구층 목탑이에요. 황룡사 구층 목탑은 선덕 여왕이 세웠다고 해요. 바닥 면적이 약 500m2, 한쪽 면의 길이가 22.2m에 높이가 75m나 되는 거대한 목탑이었지요. 이 거대한 목탑을 짓는 데는 백제의 장인 아비지가 크게 기여했어요. 당시 신라는 건축은 물론이고 생활 수준이 백제와 고구려에 못 미치는 상태였어요. 그래서 백제와 고구려에 부탁하여 뛰어난 장인들을 불러와야 했지요.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는 서로 적대 관계에 있었지만 모두 불교를 믿고 있어서 절이나 탑의 건축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답니다. 황룡사 구층 목탑은 1238년 몽골에 의해 잿더미로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찬란했던 옛 영화를 엿볼 수 있는 드넓은 터와 받침석만 남아있어요. 이곳에서 발굴된 4만여 점의 유물들은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황룡사 옆에는 또 다른 절 분황사 터가 있어요. 분황사 역시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졌지만, 모전 석탑이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답니다. 모전 석탑은 돌을 벽돌처럼 깎아 쌓아 만든 탑으로 선덕 여왕 때 세워졌어요. 바위를 쌓아 만든 바닥 위에 마치 건물처럼 생긴 독특한 3층 탑이 서 있지요. 처음 세워졌을 때는 지금과 모습이 달랐다고 해요. 몇 층짜리 탑이었는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남아 있는 탑으로 볼 때 7~9층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분황사 탑은 동서남북으로 굴방이란 문이 달려 있어요. 문 입구에는 각각 2기의 인왕상 조각이 있고, 앞쪽 네 모퉁이에는 돌사자가 세워져 있어요. 분황사 탑에서는 금과 은으로 만든 바늘과 가위 등이 발굴되었는데 이 유물들도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답니다. 천년 고도" 초기 신라는 가야, 백제, 고구려, 일본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작은 나라였습니다. 사방으로 국경을 마주했던 신라는 주변 나라들로부터 영토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여러 곳에 성을 쌓아야 했습니다. 경주에도 궁궐을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월성과 경주로 진입하는 적군을 막기 위해 만든 산성이 있습니다. 궁궐 주변에 흙과 돌로 쌓은 월성은 현재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산성 유적지로는 동쪽의 명활산성, 서쪽의 서형산성, 남쪽의 남산성, 북쪽의 북형산성, 북서쪽의 부산성 등이 있지요. 경주에 있는 산성도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쌓았어요. 짧게는 수백미터에서 길게는 10km가 넘는 산성들은 모두 방어를 목적으로 돌을 쌓아 만들었지요. 남아 있는 산성 가운데 보존 상태가 좋은 곳은 경주 동쪽에 쌓은 명활산성이에요. 명활산성은 산마루를 따라 쌓았는데 전체 둘레가 약 6km에 달합니다. 이중 구조로 되어 있으며 성벽의 높이가 지형에 따라 5~10m로 다르답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것은 수백 미터에 불과하지만 신라의 토목 수준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 골품 제도 신라에는 골품 제도라는 아주 특이한 신분 제도가 있었습니다. 골품 제도에 따라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었지요. 골품 제도에 의하면 신분이 혈통에 따라 8등급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왕족은 성골과 진골이었고 그 아래로 6두품부터 1두품까지의 신분이 있었는데, 숫자가 클수록 신분이 높았습니다. 3두품에서 1두품까지는 평민층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구분이 점차 사라졌지요. 최고 신분인 성골은 부모가 모두 왕족 출신인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두 번째로 높은 신분인 진골은 아버지와 어머니 가운데 한 사람이 왕족인 경우에 그 자녀들이 누릴 수 있는 신분이었답니다. 그리고 신라에 의해 멸망하거나 항복해 온 왕족에게도 진골 신분을 주었습니다. 6두품은 왕족이 아닌 사람이 가장 높이 오를 수 있는 신분이었습니다. 신라 초기와 중기까지는 성골 출신만 왕위를 이을 수 있었습니다. 진골 출신으로 최초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 29대 무열왕 김춘추였지요. 이후 진골 출신도 많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신라의 골품 제도는 왕위 계승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철저하게 적용되었습니다. 관직에 오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는 집의 규모와 재산의 정도까지 엄격하게 제한되었습니다. 골품 제도는 옷과 장신구, 가정에서 사용하는 그릇까지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었던 폐쇄적인 신분 제도였지요. 골품 제도는 국가 발전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기도 했습니다. 선덕 여왕" 신라 최초의 여왕은 진평왕과 마야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선덕 여왕입니다. 선덕 여왕은 신라 제27대 왕으로 15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선덕 여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는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있지만 탄생 시기와 가족사에 관해서는 많은 부분이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떤 문서에는 맏딸로 기록되어 있고, 둘째 딸로 기록된 문서도 있습니다. 선덕 여왕은 왕이 된 초기에 백성의 궁핍한 삶을 보살피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후에는 당나라의 선진 문물과 불교를 적극적으로 들여와 백성들의 믿음을 얻는 동시에 백성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지요. 선덕여왕은 동양 최대 규모인 황룡사 구층 목탑을 세우고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시설인 첨성대를 세우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선덕 여왕의 가장 훌륭한 업적은 백성들을 가난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해서 노력한 정책입니다. 약한 국력을 극복하기 위해 발휘한 뛰어난 외교력도 업적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외교와 군사력을 외국의 세력에 의존한 부분은 선덕 여왕의 잘못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선덕 여왕은 백성을 위하여 노력한 최초의 여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화백 회의 화백 회의는 골품 제도와 함께 신라의 독특한 제도로, 신라의 중앙 관료들이 모여 국가의 중요한 일을 토론하여 결정하는 제도였습니다. 경주 근처에 살던 여섯 촌장들이 모여 중요한 일을 의논하던 제도에서 시작되었지요. 물론 화백 회의에는 진골 이상의 지위를 가진 왕족들만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왕족 회의인 셈이었지요. 화백 회의를 대표하는 인물은 신라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이었습니다. 초기 상대등은 모두 왕족 출신인 성골이 맡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진골 출신도 상대등에 올랐습니다. 상대등은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왕의 지휘와 감시 아래 놓여 있었지만, 왕이 세상을 떠나면 왕위 계승 문제를 비롯하여 전쟁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일부터 중요한 건축물을 세우는 일까지 나라의 중요한 일을 실질적으로 결정했습니다. 신라의 상대등과 비슷한 일을 했던 관직은 고구려와 백제에도 있었습니다. 고구려에는 대대로라는 관직이 있어 왕과 함께 나랏일을 처리했지요. 백제에는 상좌평이란 관직이 있어 나랏일을 총괄했습니다. 상좌평은 왕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투표로 선출했습니다. 국립 경주 박물관 옛 신라의 궁궐이 있던 월성 근처에는 국립 경주 박물관이 있습니다. 국립 경주 박물관은 신라와 통일 신라는 물론이고 이전의 다양한 문화와 유물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곳입니다. 신라와 통일 신라의 문화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둘러보아야 할 곳이지요. 국립 경주 박물관은 실내와 야외 전시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실내 전시장은 고고관, 안압지관, 미술관, 특별 전시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국립 경주 박물관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고고관에는 선사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빗살무늬 토기, 경주 왕릉에서 발굴된 금관, 벽화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고고관 서쪽에는 임해전지에서 발굴된 유물만을 따로 모아 놓은 안압지관이 있습니다. 안압지관에는 나무로 만든 배와 여러 가지 생활용품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세련되고 화려한 장신구를 비롯하여 황금으로 만든 못까지 볼 수 있지요. 안압지관에 전시된 유물들을 보면 신라의 왕족들이 얼마나 화려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미술관에는 신라와 통일 신라 시대에 그려진 그림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별 전시관은 기획 전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야외 전시장에는 성덕 대왕 신종(에밀레종) 등 매혹적인 유물들이 박물관 야외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남산 지역에서 발굴된 여러 불상과 지금은 물속에 잠겨 버린 고선사 터에 남아 있던 고선사 터 삼층 석탑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경주 역사 유적" 경주 역사 유적 지구를 살펴보려면 무엇보다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역도 넓고 보아야 할 문화재도 많아서 일정을 여유롭게 잡아야 신라 문화의 진면목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일정이 짧다면 먼저 지도를 펼쳐 놓고 이동순서를 정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이동 경로를 정한 다음에는 각 지역에 관하여 미리 안내 책자를 살펴보고 둘러볼 것을 권합니다. 여러 차례 방문한 경험을 바탕으로 간단하게 추천하는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국립 경주 박물관에 가서 주요 유적지에 관한 정보를 얻고 유물을 관람한 뒤 걸어서 월성과 계림, 대릉원, 임해전지, 황룡사 터 등을 둘러보는 것이 좋습니다. 옛 시가지와 궁궐 유적지를 둘러본 뒤 시간이 허락되면 남산에 올라 불상들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남산을 답사할 때는 체력에 자신이 있다면 아침 일찍 동쪽 칠불암 방향으로 산에 올라 용장사 터를 거쳐 삼릉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서 보는 것이 좋습니다. 반나절 정도밖에 시간이 없다면 서남산의 삼릉 계곡 지역을 둘러볼 것을 추천합니다. 국립 경주 박물관 ➞ 월성, 석빙고 ➞ 계림 ➞ 첨성대 ➞ 황남리 고분군(천마총) ➞ 노서리, 노동리 고분군 ➞ 임해전지 ➞ 황룡사 터와 분황사 터 ➞ 나정, 포석정 ➞ 남산.

경주 여행.

경주 여행" 신라는 천년 동안 지속된 왕국이야. 경주는 아직도 천년 전에 살았던 신라인의 숨결이 도시 곳곳에서 느껴지는 역사의 도시이고, 문화유산들도 많이 남아있어. 경주라는 큰 도시 전체가 하나의 문화재라 길을 걷다 땅을 파면 수천 년 전의 토기가 발견될 것 같은 예감까지 들게 해. 경주는 도시 그 자체에서 신라의 고고한 흔적을 느낄 수 있어. 우리 함께 신라의 고고한 흔적을 느끼러... 石窟庵" 통일신라시대에 경주 토함산(吐含山)에 세워진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사찰이다. 신라인들의 신앙과 염원, 뛰어난 건축미, 성숙한 조각기법 등을 보여주는 역사 유적으로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문화재청에 등록된 정식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삼국유사》에 나오는 원래 이름은 석불사이다. 임진왜란 이후 불국사에 예속되었고, 1910년경부터 일본인들이 석불사 대신 현재의 석굴암(石窟庵)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刱)할 때, 왕명에 따라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설화를 기반으로 한 요소가 엿보이는 전설적인 유래이지만, 대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환생(還生)하였다는 김대성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타나듯이 경덕왕대에 중시(中侍)로 있었던 김문량이 실존인물임에 비추어, 그의 아들인 김대정(金大正)이 신라의 기명(記名) 방식에 의해 대성과 동일인물인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김대성은 왕명을 받들어 토함산의 정상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전개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김씨 왕족(金氏王族)을 위한 2대 사찰의 건립에 마지막 생애를 다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석굴암은 김대성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하여 그 조영사업은 국가가 마침내 완성시켰다고 한다. 이 점은 분명히 석굴암의 창건이 김대성이라는 개인의 원력(願力)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왕실을 비롯한 당시 신라인 모두가 염원한 거족적인 일대 불사(佛事)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것은 석굴암의 방위(方位)가 김씨 왕족의 공동묘역(共同墓域)인 신라의 동해구(東海口)와 일치하고 있음을 보아도 더욱 뚜렷해진다. 동해구란, 삼국통일의 영주(英主)인 문무왕(文武王)의 해중릉(海中陵), 즉 대왕암(大王巖)이 자리잡고 있는 곳을 말한다. 문무왕은 욕진왜병(欲鎭倭兵)하고자 동해의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저승에서까지 국가수호의 집념을 잃지 않겠다는 군왕이었다. 이 같은 호국사상은 동해구의 유적인 해중릉을 비롯하여 감은사(感恩寺)나 이견대(利見臺), 그리고 석굴암과 동해구와의 관계 등에서 같은 맥락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 점은 석굴암의 창건주인 경덕왕의 선왕(先王), 즉 효성왕(孝成王) 역시 화장 후 산골(散骨)된 곳이 이 동해구여서, 석굴암 대불의 시각(視角)이 동남동 방향으로 동해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성이 있다. 신라인의 믿음과 호국정신의 요람으로서 국찰(國刹)도 같았던 석굴암의 존재를 뚜렷이 부각시켜 주는 예라고 하겠다. 이로써 석굴암이 지니고 있는 신앙적인 측면은 물론, 조형적인 면까지 신라미술의 최고 절정을 이룬 민족 최대의 석조미술품으로 꼽아 결코 손색이 없는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1995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구조와 특징" 석굴암의 구조적 특색은 무엇보다 화강암의 자연석을 다듬어 인공적으로 축조한 석굴사찰이라는 점이다. 즉, 인도·중국 등의 경우와 같이 천연의 암벽을 뚫고 조성한 천연석굴이 아니다. 토목기술을 바탕으로 이룩된 석굴의 기본적인 평면구조는 전방후원(前方後圓)의 형태를 취하면서 네모진 공간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로 나뉘어져 있다. 주실에는 단독의 원각(圓刻) 본존상(本尊像)을 비롯하여 보살과 제자상 등이 있으며, 전실에는 인왕상(仁王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 등을 부조(浮彫)하여 배치하였다. 이 전실의 기능은 곧 예배와 공양을 위한 장소이다. 천장은 궁륭형(穹窿 形)의 둥근 양식이며, 그 위에 연화문(蓮花紋)의 원판을 두어 천개(天蓋)로 삼고 있다. 조각상의 배치는 전실부터 시작하여 팔부신중(八部神衆) 8구, 인왕(仁王) 2구, 사천왕 4구, 천부(天部) 2구, 보살(菩薩) 3구, 나한(羅漢) 10구, 감불(龕佛) 8구와 본존여래좌상 1구가 있다. 이들 불상의 배치에 있어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보다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고대 조형미술의 기본원칙과 같은 것이기도 하여서 석굴의 안정감을 한층 강조하는 구실도 하고 있다. 조각상 가운데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본존여래좌상이다. 이 석굴 자체가 본존상을 봉안하기 위하여 조영되었던 만큼 그 의미가 매우 큰 불상이다. 예배의 주대상이 곧 이 본존상임은 물론, 중앙에 자리잡아 석굴의 내부공간을 구획한 신라 조각미술의 결정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뛰어난 작품이다. 본존상은 연화문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다. 광배(光背)는 석굴 후벽의 천장 밑에 둥근 연화판석(蓮花瓣石) 1매로 조성하였다. 이는 전실의 법당에서 본존상에 예배할 때, 동일시각 위에 놓여지는 치밀한 계산에 따라 처음부터 마련된 것이다. 본존상의 양식적 특징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 7세기 후반부터 유행하여 고려 전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여래좌상의 기본양식이다. 법의(法衣)는 오른쪽 어깨를 벗고 왼쪽 어깨에 가사(袈裟)를 걸친 우견편단(右肩遍袒) 양식을 보이고 있다. 또한 수인(手印)은 악마의 유혹을 물리친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結)하고 있다. 머리 위에는 육계(肉髻 )를 표시했으며 머리는 나발(螺髮)이다. 상호(相好)는 원만한 모습에 자비(慈悲)를 지니고 있다. 신부(身部)는 매우 당당할 정도의 거구로서 장부의 상을 보이고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고 두 번째 손가락을 다음 손가락 위에 겹쳐 운동감을 주고 있다. 왼손은 두 발 위에 놓아 편안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어떻든 본존상의 신앙적인 의미와 조형적인 가치가 훌륭히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부드러운 자태와 인자한 표정에서 고도의 조각술을 살필 수 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불교의 구원상(久遠像)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불상의 명호" 석굴암 본존상에서 중요한 부분은 명호이다. 지금까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그것은 석가여래로 통칭되어 왔으나 이는 뚜렷한 오류임이 구명되었다. 즉, 19세기 말엽 중수 당시의 현판(懸板)에 미타굴(彌陀窟)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편액(扁額)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표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을 뜻하는 수광(壽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료는 본존상의 명호가 석가여래 아닌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또한 신라시대에 보편적이던 우견편단과 항마촉지인은 곧 아미타불이었다는 점도, 본존상의 명호를 밝히는 데 중요한 뒷받침이 된다. 이는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에 안치된 본존상이나 군위(軍威) 팔공산(八公山)의 석존 본존상 등 같은 양식의 불상에서도 분명히 입증되고 있다. 신라 불상의 양식계보로 비추어 볼 때 석굴암 본존불상의 명호는 7∼8세기 신라에서 유행했던 아미타불임이 분명한 것이다. 또한 김대성이 현세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세웠다는 창건 유래 역시 미타정토(彌陀淨土)를 표현한 것으로, 동해구의 유적과도 연관되고 있다.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석굴암 본존상의 명호는 마땅히 신라인의 정토신앙을 기반으로 한 아미타불이며, 왕족의 발원에 의해 이루어진 거국적인 불사(佛事)이었음을 확인케 한다. Seokguram Grotto and Bulguksa Temple"(석굴암 과 불국사) 석굴암(石窟庵)과 불국사(佛國寺)는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고대 불교 유적이다. 석굴암은 불상을 모신 석굴이며, 불국사는 사찰 건축물이다. 두 유산은 모두 경주시 동남쪽의 토함산(吐含山)에 있으며,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다. 두 유산은 8세기 후반에 같은 인물이 계획해 조영하였으며 비슷한 시기에 완공되었다. 석굴암은 화강암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쌓아 만든 석굴로 원형의 주실 중앙에 본존불(本尊佛)을 안치하고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나한상, 신장상 등을 조화롭게 배치하였다. 불국사는 인공적으로 쌓은 석조 기단 위에 지은 목조건축물로 고대 불교 건축의 정수를 보여 준다. 특히 석굴암 조각과 불국사의 석조 기단 및 두 개의 석탑은 동북아시아 고대 불교예술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불국사는 인공적으로 쌓은 석조 기단 위에 지은 목조건축물로 고대 불교 건축의 정수를 보여 준다. 석굴암 조각과 불국사의 석조 기단 및 두 개의 석탑은 동북아시아 고대 불교예술의 최고 걸작 중 하나이다. 석굴암은 부처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불국사는 불법의 세계를 현실 세계에 구현한 걸작으로, 이들 두 유산은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불국사와 석굴암 전 영역과 두 유산이 위치한 토함산이 유산 구역에 포함되어 있다. 석굴암 본존불과 그 주위 대부분의 석조 조각과 건축의 형태는 8세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진정성이 높다. 불국사 경내의 석조 유산은 부분적 보수 과정을 거쳤을 뿐 신라 시대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목조 건축물들은 16세기부터 보수와 복원의 과정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든 복원 사업은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전통 재료와 기술이 사용되었다. 토함산 남동쪽 비탈에 있는 석굴암은 동해를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인 751년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짓기 시작해 혜공왕 10년인 774년에 완공됐다. 기록에 따르면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였다고 한다. 석굴암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벽에는 39개의 불상들이 조각되어 있으며 한가운데에 본존불상이 놓여 있다. 석굴암은 전실(前室), 비도(扉道), 돔형 주실(主室)로 구성된다. 전실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양쪽 벽에는 팔부신장(八部神將)이 각각 네 사람씩 새겨져 있다. 비도는 전실에서 주실로 들어가는 부분인데, 비도의 입구 옆에는 두 사람의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이 서 있다. 비도의 좁아지는 부분 양쪽으로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각각 한 쌍씩 조각되어 있다. 주실의 입구 양쪽에 팔각형 돌기둥 두 개가 각각 세워져 있고, 본존불상은 주실의 중앙에서 조금 벗어난 지점에 놓여 있다. 주실의 입구 양쪽 벽에는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 두 보살, 십나한이 새겨져 있다. 본존불상 뒤의 벽 한가운데에는 자비의 보살로 알려진 십일면관음보살상(十一面觀音菩薩像)이 새겨져 있다. 전실과 주실의 벽에 새겨진 불상들 아래 놓여 있는 돌에도 마찬가지로 부조가 새겨져 있다. 석굴암이 만들어진 당시에 십일면관음보살상 앞에 있었던 대리석 사리탑은 일제강점기 때 제거됐다. 본존불상 뒤의 벽에 새겨진 십일면관음보살상 위에는 거대한 원형 연판(蓮瓣)이 조각되어 있다. 이 원형 연판은 정면에서 보면 마치 본존불상의 후광인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연판 위쪽 벽에는 열 개의 감실들이 가로로 늘어서 있다. 감실 각각에는 보살이나 불자의 조각상이 놓여 있었으나, 현재 그 중 두 개가 없어진 상태다. 돔형 천장을 구성하는 돌들은 주실 천장의 또 다른 연판을 향해 모아지는 모습을 하고 있다. 본존불상인 석가여래좌상은 3.45m 높이로 연화좌(蓮花座) 위에 앉아 있다. 불상의 머리카락은 달라붙은 곱슬머리이며, 정수리에는 궁극의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肉髻)가 돌기처럼 튀어나와 있다. 이마는 넓고, 초승달 같은 눈썹 아래로 반쯤 감은 눈은 동해를 응시하고 있다. 오른쪽 어깨에 걸쳐져 왼팔과 가슴을 덮은 모양의 법복은 섬세하고도 현실적이다. 불상은 부좌 상태에서 항마촉지인이라는 손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지신(地神)을 소환해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할 때 취했던 동작이다. 금강역사상, 팔부신장상, 천부상, 보살상, 십나한상, 사천왕상 등의 다른 조각들도 모두 세부적인 자연스러움에 주의를 기울여 정교하게 조각되었다. 석굴암의 본존불상이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는 걸작이라면, 불국사는 신라의 이상향인 불국토를 현세에 드러내고자 의욕적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불국사는 석굴암과 동시에 만들어졌는데, 불국사의 축조를 시작하고 지휘한 사람 역시 석굴암을 만든 재상 김대성이었다. 효심이 깊었던 김대성은 현생의 부모를 기리며 불국사를 세웠고, 전생의 부모들을 기리며 석굴암을 지었다. 이승에 부처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은 신라의 오랜 꿈이었고, 신라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바로 부처의 나라라고 믿었다. 때문에 불국사라는 이름 자체도 신라인들에게는 큰 의미를 지닌다. 불국사는 말 그대로 부처님 나라의 사찰을 뜻한다. 이것은 곧 불국사가 부처님의 나라가 현세에 실현된 낙원이라는 의미다. 불국사 경내는 이승에 실현된 불교적 이상향이라 여겨졌다. 석단(石壇) 위에 지어진 목조 건축물들은 세 구역으로 구분된다. 비로자나불의 전당인 비로전, 득도의 전당인 대웅전, 지복의 전당인 극락전이 그것이다. 세 구역은 하나의 현세 공간과 두 개의 천상 공간을 상징하고 있다. 순수한 부처의 나라로, 비로자나불이 존재하는 현세, 아미타불의 낙원,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비로전, 극락전, 대웅전을 포함해 석단 위의 공간은 곧 부처의 나라이며, 석단 아래의 공간은 이승이다. 이 두 세계는 청운교, 백운교, 연화교, 칠보교 두 쌍의 다리로 연결된다. 석단, 석교(石橋), 그리고 대웅전 앞에 세워진 석가탑과 다보탑은 신라 시대의 우수한 석공 기술을 보여 준다. 석굴암과 마찬가지로 불국사는 손으로 다루기 힘든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옛날에 불국사에는 토함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로 만들어진 구품연지라는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구품연지는 존재하지 않지만, 토함산의 물이 흘렀던 수구의 흔적이 아직까지 석단에 남아 있다. 석가탑과 다보탑에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내용이 반영되어 있다. 석가모니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설파할 때 보배로운 탑이 땅에서 솟아났고, 이미 깨달음을 얻은 다보여래가 그 탑 위에 나타나 석가모니의 설법을 증명했다. 그리고 다보여래와 석가모니는 탑 안에 나란히 앉았다는 것이다. 다보탑은 이 이야기에 나오는 다보여래를, 석가탑은 석가모니를 상징하고 있다. 폭 6.7㎝, 길이 6.2m의 두루마리에 적힌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또한 주목할 만하다. ‘흠 없이 순수한 빛의 위대한 다라니경’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유물은 1966년에 석가탑의 2층에서 발견됐다. 8세기경에 만들어진 이 경전은 목판으로 인쇄된 경전으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불국사는 막대한 피해를 입어 목조건물이 모두 불에 타버렸지만, 다행히 석단, 석교, 석탑, 등(燈), 금으로 도금된 청동 불상들은 무사히 남았다. 오늘날 볼 수 있는 불국사의 건축물은 1969년부터 1973년 사이에 시행된 복구 작업을 통해 부분적으로 재건된 것이다. 복구는 불국사 유적의 발굴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나, 신라 시대 당시의 대규모 복합 건축물을 재현해 내지는 못했다. 불국사의 중심에 위치한 대웅전 앞뜰에는 다보탑과 석가탑이 동서로 놓여 있다. 통일신라 시대 이래 사찰의 주 건물 앞에는 동일한 외관을 가진 한 쌍의 탑을 세우는 것이 관례였으나, 다보탑과 석가탑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기준 (ⅰ) : 석굴암과 불국사는 신라인들의 창조적 예술 감각과 뛰어난 기술로 조영한 불교 건축과 조각으로 경주 토함산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어우러져, 한국 고대 불교예술의 정수를 보여 주는 걸작이다. 기준 (ⅳ) : 석굴암과 불국사는 8세기 전후의 통일신라 시대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건축과 조각으로, 석굴암은 인공적으로 축조된 석굴과 불상 조각에 나타난 뛰어난 기술과 예술성, 불국사는 석조 기단과 목조건축이 잘 조화된 고대 한국 사찰 건축의 특출한 예로서 그 가치가 두드러진다. 경주 동쪽 토함산 기슭에는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습니다. 이상적인 부처님의 나라를 표현한 절, 불국사는 통일 신라의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건축물입니다. 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 삼층 석탑), 청운교와 백운교 등 세련되고 아름다운 불교 유산들이 가득하지요. 불국사는 우리나라에서 국보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절로도 유명합니다. 불국사 위쪽 토함산 정상 가까운 곳에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석굴 사찰 석굴암이 있습니다. 석굴암은 단순히 부처님을 모신 석굴이 아닙니다. 크지는 않지만 신라 전성기 최고의 걸작으로, 통일 신라의 종교와 예술, 과학을 한곳에서 보여 주는 무척 중요한 유적지입니다. 오늘날 불국사의 목조 건축물과 석굴암은 원래 모습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러나 여전히 불교 국가 통일 신라의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도시 전체가 불교 유적지인 경주" 경주는 사로국에서 시작되어 서라벌(계림으로 불리기도 했어요)로, 경주로 이름이 바뀌면서 삼한 시대부터 고려가 세워지기 전까지 오랜 세월 도읍지였습니다. 992년 동안 도읍지였던 곳답게 어느 곳을 가더라도 역사와 전통이 담긴 문화재를 만날 수 있는 곳이 경주이지요.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경주에는 수많은 불교 유적지들이 세워졌어요. 고구려와 백제의 도읍지에도 많은 절이 세워졌지만 현재 경주만큼 많은 유적지가 남아 있는 곳은 없답니다. 경주에 많은 불교 유적지가 세워지게 된 것은 신라 사람들이 불교를 깊이 믿었기 때문이에요. 신라의 왕들도 종교를 통해 백성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정책으로 불교를 장려했지요. 신라는 국가 차원에서 많은 승려를 중국에 보냈고, 경주를 중심으로 전국에 수많은 절을 세웠습니다. 한마디로 경주는 전체가 불교 유적지였다 경주에 화려한 불교문화가 꽃핀 시기는 통일 신라 시대였습니다. 삼국 통일을 계기로 백제와 고구려의 세련된 불교문화가 들어오면서 신라는 한층 수준 높은 문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신라는 8세기가 되자 경주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토함산에 역사적인 건축물을 짓기 시작했어요. 바로 불국사와 석굴암이에요. 불국사 창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경덕왕 10년인 751년에 김대성이 지었다고 해요. 석굴암 역시 김대성이 처음 건축을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김대성은 통일 신라에서 가장 높은 벼슬인 시중을 지냈어요. 관직에서 물러난 뒤 부모님을 위해 불국사와 석굴암을 건축하기로 결심했지요. 전설에 따르면 김대성은 두 번 태어났다고 해요. 그래서 처음 자신을 길러 준 부모님을 위해 석굴암을 짓고, 두 번째 부모님을 위해서는 불국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김대성의 부모님에 대한 깊은 효성 덕분에 지어졌다고 할 수 있지요. 김대성은 누구보다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어요.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대성은 불국사 삼층 석탑과 다보탑을 세울 때 직접 감독하고 참여했다고 해요. 그리고 석굴암 내부와 본존불은 직접 조각을 했다는 기록도 있어요. 김대성은 나이가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석굴암 제작에 몰두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해요.

경주시慶州市, Gyeongju-si 1

경주시慶州市, Gyeongju-s 유물의 수적인 면에서는 뒤지지만 규모나 예술적인 면에서는 단연 독보적인 동편기슭에는 남산에서 가장 큰 절로 비구니들의 수도처인 보리사와 8세기 말 신라불상의 걸작으로 보물로 지정된 석가여래좌상, 비스듬히 기울어진 바위 위에 조금은 거칠게 조각된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지역축제로는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정부지정 문화관광 축제인 한국의 술과 떡잔치, 매년 4월 초 보문관광단지일원에서 펼쳐지는 경주벚꽃마라톤대회, 경주버섯축제, 문무대왕해맞이대축제와 새해맞이토함산기원대축제 등이 있다. 농촌전통테마마을인 안강옥산세심마을은 69호에 155명의 마을주민이 살고 있는 전통적인 한국의 농촌마을로 농촌진흥청에서 2002년도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선정, 자립적으로 농촌체험관광을 운영하고 있는 마을이다. 읍·면 1). 감포읍(甘浦邑) 시의 동단에 위치한 읍. 면적 44.83㎢, 인구 6,013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감포리이다. 본래 경주부 동해면이었으나 1895년(고종 32)장기군(長鬐郡)에 편입되어 내남면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경주군에 편입되어 양북면이 되었으며, 1937년양북면의 오류·감포 등 9개 이가 분리되어 감포읍으로 승격되었다. 동대산계의 동부지역으로 바다 가까이까지 200m 내외의 산지가 해안에 급박하여 평야가 거의 없으며,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동해로 흘러드는 오류천(五柳川)·전촌천(典村川)·팔조천(八助川) 등은 기울기가 급하고 길이도 짧아 유역면적도 협소하다. 총경지면적은 8.39㎢로 18.7%, 임야면적은 32.34㎢로 72.1%, 기타는 9.2%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이 4.00㎢로 47.7%를, 논이 4.39㎢로 52.3%를 차지하며 논농사와 밭농사가 비슷한 비율로 행해진다. 농산물은 주로 파·양파·당근·감·천궁 등의 작물이 재배되며 돼지가 많이 사육되고 있다. 매년 인구가 감소하고 있으며, 산업은 경지율이 낮아 주민의 약 3할 정도가 어업에 종사하며 가구수로는 4할을 차지한다. 수산업은 주로 시내 유일의 어항인 감포항에서 주로 행해지며, 2008년 현재 어선도 총 444척 중 동력 427척, 무동력 17척으로 10톤 미만의 소형어선이 대부분이다. 주어종은 꽁치·멸치·가오리 등이며, 약간의 전복과 미역의 양식이 행해진다. 특산물로는 멸치젓갈, 미역, 전복, 오징어, 꿀곶감 등이 있다. 교통은 울산∼신고산간의 국도가 전촌리에서 군산∼감포간의 국도와 만나 경주 도심지와 연결되며, 지방도가 북쪽의 구룡포(九龍浦)와 포항, 남쪽의 울산을 해안을 따라 연결하고 있다. 문화유적은 대본리에 이견대, 전동리에 삼락당·삼우정·삼인재, 오류리에 감포영성(甘浦營城)이 있고, 남쪽 끝의 대보리일대는 경주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감포(甘浦)·오류(五柳)·전동(典洞)·전촌(典村)·호동(虎洞)·노동(魯洞)·팔조(八助)·나정(羅井)·대본(坮本) 등 9개 리가 있다. 2). 건천읍(乾川邑) 시의 중서부에 위치한 읍. 면적 92.40㎢, 인구 1만 663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건천리이다. 본래 경주군 서면 지역으로 1973년서면에서 건천·천포 등 11개 리가 분리되어 건천읍으로 되었다. 동대산계의 동부지방과 단석산계의 서부지방 사이에 놓여 있으며, 경주에서 영일만쪽으로 빠지는 길이 54㎞의 형산강을 배경으로 넓은 건천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총경지면적은 19.06㎢로 20.6%, 임야면적은 61.72㎢로 66.8%, 기타는 12.5%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이 4.67㎢로 24.5%를, 논이 14.39㎢로 75.5%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농산물은 보리와 벼농사를 주로 하며, 지역특산물인 양송이버섯은 도내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고 있고, 당도 높은 포도재배집산지로 유명한 곳이며, 이 밖에 보리·무·배추·수박·고추·마늘·파·상추와 사과가 생산되고, 가축으로는 한우가 사육되고 있다. 교통은 경부고속도로와 중앙선, 국도가 평행으로 읍의 중앙을 관통하여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송선리에 부산성지, 방내리에 단석사지·척판대, 금척리에 고분군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교(분교 1개교),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건천(乾川)·천포(泉浦)·송선(松仙)·신평(薪坪)·용명(龍明)·대곡(大谷)·화천(花川)·모량(毛良)·방내(芳內)·금척(金尺)·조전(棗田) 등 11개 리가 있다. 3). 안강읍(安康邑) 시의 북서단에 위치한 읍. 면적 138.87㎢, 인구 2만 8866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안강리이다. 본래 안강현의 소재지로서 형산강 서쪽이 되므로 강서면이라 하여 갑산·산전·강교 등 19개 이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강동면의 양동 등 일부 지역이 병합되었고, 1949년안강읍으로 승격되었다. 1973년천북면 청령리가 안강읍에 편입되었다. 북부에 어래산·자옥산이 있고, 동부의 동대산계와 서부의 단석산계 사이를 흐르는 형산강이 읍내를 가로질러 흐르기 때문에 주변에는 넓은 농경지가 분포하는데, 특히 안강평야는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어 경상북도내의 유수한 곡창지대를 이룬다. 이 평야를 중심으로 벼농사지대가 이루어진다. 총경지면적은 28.97㎢로 20.9%, 임야면적은 92.52㎢로 66.7%, 기타는 12.4%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이 8.71㎢로 30.1%를, 차지하고 논이 20.26㎢로 69.9%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안강읍은 경주시 제일의 쌀 주산지이며, 토마토, 단감, 포도 등의 특산물과 젖소, 한우, 돼지 등의 가축사육을 겸하고 있는 복합영농이 발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풍산 안강공장과 70여개의 중소기업이 산재해 있다. 또한 이 읍과 이웃한 산간지방 일대의 생활권이 안강쪽에 속하여 고추·마늘과 같은 밭작물이 모여들기 때문에 안강읍은 농간물 집산지로서의 상업기능도 대단히 높다. 교통은 동해남부선 철도가 경주와 포항을 연결하고 대구와 포항을 잇는 국도가 통과하고 있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강교리에 관수정, 하곡리에 수재정·성산서당, 양월리에 구강서원·익재영정, 대동리에 이의정·매호정, 산대리에 덕산서원·삼우정·서림정, 옥산리에는 독락당과 독락당 뒷편 정혜사지에 13층석탑이 있다. 또한 옥산서원과 서원내의 중국주엽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6개교,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2개교가 있다. 안강(安康)·양월(楊月)·육통(六通)·노당(老堂)·산대(山垈)·옥산(玉山)·하곡(霞谷)·강교(江橋)·두류(斗流)·근계(根溪)·갑산(甲山)·대동(大洞)·검단(檢丹)·사방(士方)·청령(靑令) 등 15개 이가 있다. 4). 외동읍(外東邑) 시의 남단에 위치한 읍. 면적 109.67㎢, 인구 1만 6647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입실리이다. 본래 경주군 지역으로 경주읍내의 동쪽 바깥쪽이 되므로 외동면이라 하여 상신·하신·영지 등 37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내동면의 일부가 병합되어 신계·활성·말방 등 17개 리를 관할하였다. 1975년이동면 신계리의 일부가 경주시에 편입되었으며, 1980년외동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동부에 삼태봉, 서부에 마석산이 있다. 총경지면적은 28.89㎢로 26.3%, 임야면적은 63.82㎢로 58.1%, 기타는 15.5%를 차지하고 있으며 경지 중 밭은 6.79㎢로 23.5%를, 논은 22.10㎢로 76.5%를 차지한다.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토양은 제3기의 화강암인 사질양토로 토지가 비옥하다. 주요 농산물은 배·배추·마늘·고추 등이 생산되어 남쪽의 울산공업단지에 농산물을 공급해주는 구실을 한다. 가축은 주로 한우·돼지가 사육되고 있다. 특히 대규모의 채소단지와 문산리 비육우단지는 이곳의 중요한 소득원이 되고 있으며, 공업도시 울산과 인접하여 대규모 공단이 입지하고 있다. 도로는 동해남부선과 부산∼온성간의 국도가 읍의 중앙을 남북으로 지나 경주와 울산을 연결하고 있다. 문화유적으로 모화리의 관문성은 지금도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선이 되고 있다. 이 밖에 모화리에 원원사터, 괘릉리에 괘릉, 방어리에 감화정·영지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6개교,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입실(入室)·구어(九於)·모화(毛火)·문산(汶山)·석계(石溪)·녹동(鹿洞)·냉천(冷川)·제내(堤內)·북토(北吐)·방어(方於)·개곡(開谷)·신계(薪溪)·괘릉(掛陵)·활성(活城)·말방(末方)·죽동(竹洞)·연안(淵安)등 17개 리가 있다. 5). 강동면(江東面) 시의 북동단에 위치한 면. 면적 81.48㎢, 인구 5,03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인동리이다. 본래 경주군 지역으로 형산강의 동쪽이 되므로 강동면이라 하여 모서·호명·인좌 등 26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모서·호명 등 11개 리로 개편되었다. 동쪽으로는 동대산맥이 남북으로 주행하여 면의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형산강이 구조곡을 따라 북류하고 북쪽에서 남류하는 기계천(杞溪川)과 인동리에서 합류하여 유로를 동쪽으로 바꾸어 동해로 흘러든다. 서쪽은 안강평야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총경지면적은 19.56㎢로 24.0%, 임야면적은 46.58㎢로 57.2%, 기타는 18.8%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은 6.17㎢로 31.5%를, 논은 13.39㎢로 68.5%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벼농사를 주로 하며 사과·배추·오이·고추·시금치·참외·복숭아·포도·감·천궁 등이 생산된다. 대표적인 농산물인 딸기, 부추 등의은 해외 수출도 하고 있다. 도로는 형산강구조곡을 따라 동해남부선이 포항과 경주를 연결하며, 인동리에서는 부산∼온성간의 국도와 영주∼포항간의 국도가 교차된다. 또 울산∼신고산간의 국도가 북부를 횡단하며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양동리에 관가정·두곡영당·설천정·수운정·심수정, 다산리에 귀래정·단계사·삼괴정, 왕신리에 수연정, 유금리에 동강서원 등이 있으며, 국당리에 옥련사(玉連寺)도 있다. 양동리는 여주이씨(驪州李氏)·월성손씨(月城孫氏)의 동족마을인 양동민속마을이 유명하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분교 2개교)가 있다. 인동(仁洞)·모서(毛西)·호명(虎鳴)·오금(吾琴)·왕신(旺信)·국당(菊堂)·유금(有琴)·양동(良洞)·안계(安溪)·다산(多山)·단구(丹邱) 등 11개 리가 있다. 6). 내남면(內南面) 시의 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122.03㎢, 인구 5,13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이조리이다. 본래 경주군 지역으로 경주 남쪽이 되므로 내남면이라 하여 상명·하명·백운 등 31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노곡·월산 등 16개 리를 관할하였고, 1975년율동(栗洞)과 배리(拜里)가 다시 경주시로 편입되었다. 금오산맥과 주사산맥이 남북으로 주행하여 각각 동쪽과 서쪽의 경계를 이루고, 이들 산맥 사이를 형산강의 상류인 기린내가 북쪽으로 흐른다. 기린내와 그 지류를 따라 충적평야가 전개될 뿐 대부분의 지역이 산지이다. 또한 형산강 상류지역의 청정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총경지면적은 19.63㎢로 16.1%, 임야면적은 90.73㎢로 74.4%, 기타는 9.5%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은 5.96㎢로 30.4%를, 논은 13.67㎢로 69.6%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하여 보리·녹두 등과 이외에도 오이·호박·수박·토마토·천궁·사과·배·고추·무·잎담배 등이 재배되며, 가축은 한우·닭 등도 사육된다. 박달리의 도진마을에서는 한지, 고사리 마을에서는 인삼·약초가 재배되며, 비지리에서는 닥나무가 생산된다. 토마토, 딸기 등 시설 채소단지 및 농공단지 조성되어 있다. 특산물로는 남산송이, 양봉, 사과, 배, 토마토, 딸기 등이 있다. 교통은 도로가 면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경부고속도로와 부산∼강릉간의 국도가 통과하여 경주시와 연결된다. 또한, 동서로 서면∼양남간의 군도가 지나고 있어 인근의 동부지역과 연결된다. 문화유적은 용장리에 용장사지 삼층석탑·석불좌상·천룡사지, 이조리에 봉암정·용산서원, 화곡리에 어연정·화계서당 등이 등이 있다. 이조리는 월성최씨(月城崔氏)의 동족마을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용장(茸長)·노곡(蘆谷)·명계(椧溪)·월산(月山)·이조(伊助)·부지(鳧池)·덕천(德泉)·안심(安心)·상신(上辛)·박달(朴達)·비지(飛只)·화곡(花谷)·망성(望星) 등 13개 리가 있다. 7). 산내면(山內面) 시의 남서단에 위치한 면. 면적 142.55㎢, 인구 3,32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의곡리이다. 본래 경주군 지역으로 운문산의 안쪽이 되므로 산내면이라 하여 어두·원동·장사 등 18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내남면(內南面)·박달리(朴達里)의 일부와 울산군 두서면(斗西面) 소호동의 일부가 병합되어 9개 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단석산(斷石山, 827m)·사룡산(社龍山, 685m)·옹강산(翁江山, 832m)·문복산(文福山, 1,014m)·고헌산(高獻山, 1,033m) 등의 높은 산이 면을 둘러싸고 있으며, 동창천(東倉川)과 그 지류를 따라 좁은 곡저평야가 형성되어 있을 뿐 대부분의 지역이 산지로 되어 있다. 총경지면적은 14.85㎢로 10.4%, 임야면적은 117.82㎢로 82.7%, 기타는 6.9%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은 6.93㎢로 46.7%를, 논은 7.92㎢로 53.3%를 차지하며 밭농사와 논농사의 비율이 비교적 비슷하다. 또한 경지율이 매우 낮은 전형적인 산지지역으로 약초의 재배·채취가 활발하다. 참깨·천궁·마늘·고추·배추가 많이 나며, 양봉·한우사육 등도 행해진다. 감산리의 장사마을에서는 고랭지채소가 재배되며, 내일리의 상목마을은 양잠으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북동부의 일부지역은 경주국립공원 단석산지구에 포함된다. 지형상 교통은 극히 불편하나 시천∼경주간의 국도가 당고개를 넘어 건천읍과 통하고, 서쪽으로 청도읍과 연결되며 면의 남부에는 언양∼영천간의 지방도가 남북으로 나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분교 1개교),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의곡(義谷)·내일(乃日)·대현(大賢)·일부(日富)·신원(新院)·외칠(外七)·내칠(內七)·우라(牛羅)·감산(甘山) 등 9개 리가 있다. 8). 서면(西面) 시의 서단에 위치한 면. 면적 52.13㎢, 인구 3,661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아화리이다. 본래 경주군 지역으로 경주읍내의 서쪽이 되므로 서면이라 하여 고천·고백·모량 등 32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모량·방내 등 17개 리로 개편되었다. 면의 중앙을 영천∼경주간구조곡이 동남으로 관통하고 남쪽과 북쪽은 산지를 이룬다. 남쪽에는 주사산이, 북쪽에는 인내산·관산(冠山, 394m) 등이 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낙동강 상류인 동창천이 면 중심을 관통하고 있으며, 산천어, 꺽지, 피라미, 빙어 등 민물고기가 많다. 총경지면적은 10.06㎢로 19.3%, 임야면적은 36.13㎢로 69.3%, 기타는 11.4%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은 2.80㎢로 27.8%를, 논은 7.26㎢로 72.2%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하여 호박·마늘·파·양파·상추 등의 채소류와 사과·포도·복숭아 등의 과실류가 재배되고, 가축은 돼지의 사육도 활발하다. 도리에서는 고랭지작물·특수밭작물의 재배와 양계·양돈 등으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특산물로는 곤달비, 더덕 등이 있다. 도로는 면 중앙의 구조곡을 따라 경부고속도로와 중앙선, 군산∼감포간의 국도가 나란히 달려 대구·경주 등과 연결된다. 문화유적은 도계리에 계은정, 도리에 벽송정, 천촌리에 주사암이 있다. 천촌리의 샘촌마을에는 겨울에 얼지 않고 여름에 물이 아주 차가운 웅굴담, 여름철 땀띠를 없애준다는 월청샘, 들판 한가운데서 항상 일정한 양의 물이 솟아 농사에 이용되는 갈모샘 등 30여 개의 우물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 중학교 1개교가 있다. 아화(阿火)·도계(道溪)·천촌(泉村)·서오(棲梧)·심곡(深谷)·도(道)·사라(舍羅)·운대(雲坮) 등 8개 리가 있다. 9). 양남면(陽南面) 시의 남동단 동해안에 위치한 면. 면적 84.95㎢, 인구 6,582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하서리이다. 본래 경주부 지역으로 동해가에 있으므로 동해면이라 하였는데, 1895년장기군에 편입되면서 양남면이라 하여 석촌·효동·나산 등 16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다시 경주부에 귀속되었다. 동대산맥의 동쪽사면을 이루는 산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삼태봉(三台峰, 629m)이 서쪽 경계의 최고봉이고, 북쪽 경계를 따라 조항산(鳥項山, 596m)·우산(牛山, 334m)이 있다. 나아천(羅兒川)·하서천(下西川)·관성천(觀星川)의 세 줄기 작은 하천이 남동류하여 동해로 흘러들며, 그 하류에 소규모의 충적평야가 전개된다. 총경지면적은 11.93㎢로 14.0%, 임야면적은 64.55㎢로 75.9%, 기타는 10.1%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이 3.13㎢로 26.2%를, 논이 8.80㎢로 73.8%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하여 고구·감자·파·당근·감 등이 주로 생산된다. 신서리 범실마을에서는 포도, 다골마을에서는 감, 억수밑마을에서는 백도 등도 재배된다. 신대리의 건댓골에서는 한우사육으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해안에서는 영세어업이 행해지며 미역채취, 바다뱀장어·복어·가자미 등이 많이 잡힌다. 특히, 수렴리의 구무바위 주민들은 미역·전복·멍게 등의 양식업으로 소득을 높이고 있다. 나아리에 원자력발전소와 수렴리에 코오롱그룹 사원휴양소가 설치되어 있다. 교통은 도로가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울산∼신고산간의 국도가 감포와 울산을 연결하며, 서면∼양남간의 군도와 석굴∼관성간의 군도가 면의 중앙부를 지나면서 이 면과 경주를 연결하고 있으나 불편하다. 수렴리 관성마을에서는 3년마다 풍어제를 지내며, 하서리 올골마을에는 마을어귀의 큰 당수나무 아래에서 정월 대보름날 달을 보고 소원을 비는 풍속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분교 1개교), 중학교 1개교가 있다. 하서(下西)·환서(環西)·수렴(水念)·신서(新西)·서동(瑞洞)·상계(上溪)·신대(新垈)·기구(基邱)·석촌(石村)·석읍(石邑)·효동(孝洞)·상라(上羅)·나산(羅山)·나아(羅兒)·읍천(邑川) 등 15개 리가 있다. 10). 양북면(陽北面) 시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120.06㎢, 인구 4,47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어일리이다. 본래 경주부 지역으로 동해가에 있으므로 동해면(東海面)이었는데, 1895년장기군에 편입되어 내남면이라 하여 연동·오류·창사 등 33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외동면의 일부가 병합되어 양북면으로 개칭되면서 경주군에 편입되었다. 1937년 9개 리가 감포읍으로 분리되었다. 추령(楸嶺)·토함산을 잇는 동대산맥의 동쪽사면에 자리잡아 대부분의 지역이 산지이며, 중앙을 남동류하는 대종천(大鐘川)의 유역에만 소규모의 평야가 분포한다. 총경지면적은 14.88㎢로 12.4%, 임야면적은 95.15㎢로 79.3%, 기타는 8.3%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이 4.93㎢로 33.1%를, 논이 9.95㎢로 66.9%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미곡위주의 논농사를 주로 하고 있으나 최근 양북토마토로 잘 알려진 토마토와 부추 등 채소재배와 한우사육을 중심으로 한 축산업이 발달하였고, 넓은 산지를 이용한 산나물채취 및 엄나무 등 소득작목으로 소득을 높여가고 있으며 해안지역은 회식당과 미역 등 해산물 판매와 양식어업을 주로 하고 있다. 봉길리 일원에는 한국수력원자력(주) 월성원자력 본부가 위치해 있으며, 봉길리 신월성 1,2호기 인접부지에는 64만평 규모의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처분시설(방폐장)이 건설될 예정이다. 교통은 도로가 면의 북부를 동서로 군산∼감포간의 국도가 통과하며, 남북으로 나 있는 양북∼오천간의 지방도는 해안에까지 이르러 울산∼신고산간의 국도와 만난다. 문화유적은 용당리에 감은사지·감은사지삼층석탑, 장항리에 장항사지오층석탑, 봉길리에 문무왕해중릉, 범곡리에 석굴암 등이 있으며, 장항리에는 장항사터와 토함산 기슭의 울창한 삼림속에 들어선 토함산 자연휴양림이 있다. 그리고 호암리에는 지림사도 있다. 봉길해수욕장 일대는 경주국립공원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분교 1개교),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어일(魚日)·와읍(臥邑)·용동(龍洞)·권이(權伊)·호암(虎巖)·안동(安洞)·장항(獐項)·범곡(凡谷)·입천(卄川)·송전(松田)·죽전(竹田)·두산(斗山)·용당(龍堂)·구길(九吉)·봉길(奉吉) 등 15개 리가 있다. 11). 천북면(川北面) 시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58.21㎢, 인구 5,24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동산리이다. 본래 경주군 지역으로 동천의 북쪽이 되므로 천북면이라 하여 지북·고성·용강 등 22개 이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부내면의 북정리와 내동면의 사리 일부, 강서면의 검단리 일부가 병합되어, 황성·용강 등 15개 리로 개편되었다. 1955년경주가 시로 승격되면서 3개 리가 경주시로 편입되었고 1975년 다시 2개 리가 경주시로 편입되었다. 동쪽으로는 태백산맥의 지맥이 동대산맥, 서쪽으로는 형산강이 경계를 이루며, 그 양안에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중앙부에는 소항천(小項川)의 지류 및 왕신천(旺信川)의 상류가 넓은 산간분지를 이루고 있다. 총경지면적은 13.99㎢로 24.1%, 임야면적은 33.66㎢로 57.9%, 기타는 18.0%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이 4.41㎢로 31.5%를, 논이 9.58㎢로 68.5%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경상북도 동남부에 자리한 경주는 인구 약 27만 명 정도(2011년 기준)인 소도시이지만, 기원전 57년부터 서기 935년까지 56명의 왕이 다스리며 천 년 동안 왕조를 이루어온 ‘신라’의 수도이자, 한국 문화의 원형이 되는 신라시대 역사와 문화의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아주 특별한 도시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쪽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사로국(斯盧國, 서라벌)’이라는 작은 부족국가로 출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고 있던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하여 통일 왕국을 이루어냈으며, 안정된 국가 기반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매우 화려하고 찬란한 과학·문화·예술을 꽃피웠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일본은 물론 서아시아의 이슬람권과도 활발히 교류하였으며 세계를 향해 문호를 활짝 열어 이미 천 년 전에 국제도시의 명성을 만방에 떨쳤다. 전성기 때 신라의 수도 경주에는 무려 ‘17만 8936호’(약 90만 명)가 살았는데, 8세기 무렵인 당시 경주의 도시 규모와 번영의 정도는 비잔틴(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 터키의 이스탄불), 이슬람제국의 수도 바그다드(현 이라크), 당나라의 수도 장안(현 중국의 시안)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번영했다. 경주는 도시 전체가 문화재와 박물관일 만큼 숱한 명소들이 도시 전체에 퍼져 있다. 개국 이래 천 년 동안 도읍을 옮긴 적이 한 번도 없다 보니 천 년 왕국 신라의 역사가 고스란히 한 곳에 집중된 것이다. 도시화되어 도로가 넓어지고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긴 했지만, 21세기 경주는 여전히 천 년 전 신라의 유적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경주 곳곳에서 수없이 많은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다. 부처의 그 자체 남산지구" 고위봉(494m)과 금오봉(468m) 두 봉우리가 중심이 된 남산은 남북(10km)으로 길게 누운 모습으로 경주의 남쪽에 솟아 있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골짜기가 깊고 능선이 변화무쌍하여 보는 방향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드러낸다. 산 전체가 ‘야외 박물관’이라고 불릴 만큼 불상과 탑, 석등, 연화대좌 등 수많은 불교 유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유적들은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두드러지기보다는 남산의 자연경관을 크게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가며 집단적으로 어우러진다. 산 전체를 기단부로 삼은 용장사지 삼층석탑이 대표적인 예이고, 바윗면을 그대로 이용한 마애불이 특히 눈에 많이 띈다. 이 밖에도 남산 기슭에는 신라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나정(蘿井)’을 비롯하여 신라의 천 년 역사를 마감하는 망국의 한이 서린 ‘포석정(鮑石亭)’까지 신라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역사적 장소들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불교가 신라에 전해진 이후 7세기 전반 경부터 10세기에 이르기까지 집중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몇 군데의 석축만 남아 있는 용장사지는 매월당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쓰며 머물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용장사지 삼층석탑은 절을 감싸고 뻗은 동쪽 바위 산맥의 높은 봉우리에 서 있는데, 자연암석을 하층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상층기단과 탑신을 올렸다. 곧, 자연암석이 하층기단일 수도 있고, 그 아래 바위산 전체가 또한 하층기단일 수도 있는 셈이다. 산 전체를 기단으로 삼은 스케일과 상상력으로 보면 세계 그 어느 석탑이 이에 견줄 수 있을까. 용장사지 삼층석탑의 스케일에 준하는 불상이 있다. 칠불암 위에 곧바로 선 남쪽 바위에 새겨져 있는 신선암 마애보살상(높이 1.4m)이다. 불상은 마치 구름 위 의자에 앉아 한쪽 다리를 아래로 내려뜨린 채 유희하는 듯 편안한 자세(유희좌)이다. 풍만한 얼굴이지만 표정은 무심한 듯,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하다. 가장 편안한 자세로 인간을 구제할 방법을 고심하고 있다고 할까. 옷자락 역시 구름에 날려 흩어지는 듯 서서히 사라진다. 경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입지도 교묘하지만, 조각수법 하늘을 나는 듯 표현되어 있다. 천 년 왕조의 월성" 동서고금을 통해 천 년 동안 왕조를 이어온 나라는 매우 드물다. 더구나 경주가 한 왕조의 수도로서 천 년을 이어왔다면, 그 입지와 규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으리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왕경(王京, 왕이 거처하는 왕궁을 중심으로 그 나라 수도의 근간을 이루는 공간을 이름)을 지방과 구분하였으며, 도시 구조도 정비하고, 정비된 왕경을 둘러싼 산성도 축조하였다. 신라 왕경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지만, 현재까지 연구에 의하면 도시 전체가 네모 반듯한 바둑판 모양으로 정리되어 있었으며, 왕복 4차선에 해당하는 폭 15미터의 넓은 도로와 배수로가 나란히 건설되고 배수로 안쪽에 주택가가 들어섰을 만큼 철저한 계획도시였다. 도로는 인도와 마차가 다니는 차도로 나뉘었고, 주택가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덮고 숯을 피워 난방을 했을 정도로 쾌적했다. 숯을 피우면 매캐한 냄새가 나지 않고, 그을음이 없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절이 하늘의 뭇별처럼 많고, 탑들이 기러기처럼 늘어섰을 정도였고, ‘금입택(金入宅)’의 고급 주택도 35채가 있었다고 한다. 귀족이나 일반인의 생활환경과 수준이 이러할진대, 왕이 살았던 궁궐은 어떠했을까? 신라 초기의 왕궁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정확치 않다. 다만, [삼국유사]의 기록 등에 근거하여 나정이나 오릉이 있는 서남산(西南山) 일대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파사왕 22년(101)에 “성을 쌓아 월성(月城)이라 이름하고 7월에 왕이 옮겨 살았다”고 하였다. 아마도 이후 이 월성이 왕궁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던 것 같다. 월성은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하여 반월성이라고도 한다. 월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었으며, 문무왕 때에는 임해전(임해전은 신라 왕궁의 별궁으로,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에 딸린 인공 연못이 안압지이다)·첨성대일대가 편입되어 성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성의 동·서·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으며, 남쪽은 절벽인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벽 밑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마련한 방어시설인 해자(垓字)가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임해전으로 통했던 문터가 남아 있다. 근래에는 계림(鷄林)과 첨성대 사이의 건물터와 성동동 전랑지(殿廊址)의 대규모 건물터 등이 발굴되어 그 동안 석연치 않았던 천 년 왕조 신라의 궁궐 규모와 위치가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천 년을 한 터전에서 살아왔으니, 그 흔적의 두께가 만만치 않다. 왕경에 대한 본래의 모습을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신비감, 대능원" 경주 시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신라시대의 고분들만 보더라도 역사 문화 도시 경주의 정체성은 범상치가 않다. 처음부터 계획된 수도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넓어졌기 때문에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이 뒤섞이게 된 것이다. 현재 경주 도심에는 높이가 23미터(황남대총)에 이르는 것부터 지상에서는 식별이 어려운 것까지 신라 고분 150여 기가 남아 있다. 특히 시내의 평지에 자리한 황남리고분군(대능원), 노동리고분군, 노서리고 분군은 신라가 강력한 왕권을 확립해나가는 5~6세기 무렵에 축조된 대표적인 고분군으로, 규모와 출토 유물의 화려함에서 신라 고분을 대표한다. 이들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관을 비롯한 각종 금제 장신구, 유리잔, 토기, 천마도 등은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들로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보관되고 있다. 대능원이라 불리는 황남리고분군은 신라시대의 왕·왕비·귀족들의 능이 모여 있는 곳으로, “미추왕을 대릉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따온 이름이다. 천마총, 황남대총, 전 미추왕릉을 비롯한 능 20여 기가 있지만, 무덤의 주인이 밝혀진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천마총은 발굴 당시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천마의 그림이 나와 붙은 이름이다. 발굴 조사된 고분 가운데 ‘대능원’ 안에 있는 ‘천마총’이 유일하게 그 내부가 공개되어 있다. 무덤 속으로 들어가지만 지하로 내려가지는 않는다. 땅을 파고 시신을 묻은 것이 아니라 그냥 평지 위에 시신을 놓고 그 위에 봉분을 얹은 형태이기 때문이다. 유물 가운데 금관도 출토되었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황남대총은 신라 고분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동서 길이 80m, 남북 길이 120m, 봉분 높이 23m). 두 개의 봉분이 잇닿아 있어 마치 표주박을 엎어 놓은 듯 한 모양이다. 발굴 결과 남쪽이 남자, 북쪽의 무덤이 여자의 것으로 밝혀졌다. 남자의 묘에서 순장의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순장을 금한 지증왕 이전에 조성된 능임을 알 수 있다. 신라의 명성" 신라의 유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황룡사이다.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1238년)으로 불에 타, 지금은 건물과 불상의 주춧돌들만이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폐사지이지만, 지금의 경주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면적은 대단하다. 현재까지 조사된 황룡사지는 380,087제곱미터,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진흥왕 14년(553)부터 짓기 시작하여 선덕여왕을 거쳐 경덕왕 13년(754)에 대종을 주조한 데 이르기까지 창건과 관련된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황룡사의 창건이 삼국 통일의 국가로써 신라의 저력과 위상이 집약된 국가 사업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전하는 기록들에 의하면 경내에 성덕대왕신종보다 4배나 큰 대종이 있었으며, 현대식 건물로 따져 20층은 족히 넘는 높이의 80여 미터짜리 구층목탑, 인도에서는 만들지 못하고 비로소 신라 황룡사에서만 만들 수 있었다는 약 5미터 높이의 장륙존상(인도의 아육왕이 철 5만 5천 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서 불상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계속 실패하기에 그것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냈는데, 이것이 신라 앞바다에 당도하여 비로소 황룡사 장륙존상을 조성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등이 있었다고 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황룡사의 위용은 폐사지인 지금도 그 장엄함과 웅혼함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웃한 아홉 나라에게 신라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성격으로 세운 구층목탑은 경주 도성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신라 최고의 상징물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황룡사와 담장을 나란히 하고 있는 분황사역시 신라의 대표적인 승려인 원효와 자장이 머물렀던 신라의 대표적인 명찰이다. 수도 외곽을 방어" 경주는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산성이 많은데, 산성 가운데 경주역사유적지구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경주의 동쪽에 자리 잡은 명활산(266m)에 쌓은 명활산성이다. 경주 서쪽의 선도산성, 남쪽의 남산성과 더불어 당시 수도 경주를 방어하는 데 큰 구실을 하였으며, 475년 자비왕이 거주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규모도 상당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해 성벽을 쌓았는데, 이는 신라 초기의 축조방식이다. 경주는 한 나라의 수도로서 천 년을 유지해온 흔치 않은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대와 중세를 거쳐온 역사 도시로서 오늘날의 현대 도시로 이어진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아주 드물다. 2천 년을 이어온 경주의 이와 같은 역사성, 문화성은 도저히 복제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지니며, 한국 문화의 원형이 탄생된 공간이라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경주에 감탄하며 열광하는 이유 또한 경주를 고대와 현대가 행복한 조화를 이루며 발전하는 명품 도시로 가꾸어 나가야 하는 근거가 된다. 유네스코는 신라 천 년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경주에 ‘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을 붙여 인류가 함께 보존해야 할 세계유산으로 등재시켰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유적의 성격에 따라 크게 불교 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 년 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고분군 분포 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 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 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나뉘다. 도시 전체에 걸쳐 많은 수의 유적이 산재하니 하나하나 등록하지 않고 지역으로 묶은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지역별로 등재하다 보니, 지구로 묶이지 못해 빠지거나 현장을 떠나 있는 이유로 세계유산 목록에 오르지 못한 유물도 상당수다.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국립경주박물관의 여러 유물들이 그러한 예이다. 경주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등재된 문화재의 수는 52개이다.

경주시慶州市, Gyeongju-si

경주시慶州市, Gyeongju-si 경주는 아직도 천년 전에 살았던 신라인의 숨결이 도시 곳곳에서 느껴지는 역사의 도시이고, 문화유산들도 많이 남아있어. 경주라는 큰 도시 전체가 하나의 문화재라 길을 걷다 땅을 파면 수천 년 전의 토기가 발견될 것 같은 예감까지 들게 해. 경주는 도시 그 자체에서 신라의 고고한 흔적을 느낄 수 있다. 1) 첨성대 첨성대는 우리나라에서, 아니 동아시아에서 현존하는 천문대 중 가장 오래 됐어. 첨성대의 아름다운 곡선미를 봐. 화려하지는 않지만 곡선의 미를 뽐내고 있는 첨성대는 한국적인 미를 보여주고 있어. 특히 첨성대의 야경은 정말 아름다워. 2) 국립 경주 박물관 국립 경주 박물관은 7만 8,680점의 소장 유물과 2,383점의 전시 유물, 국보 13점, 보물 29점의 지정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어. 하나하나 소중한 우리 선조들의 아름다운 유물들을 간직하고 있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관람할 수 있어. 이 박물관에 있는 성덕 대왕 신종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종 가운데 가장 크며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으로,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러. 종의 소리를 맑게 하기 위해 어떤 사람이 종을 만들 때 아기를 넣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어. 그래서 이 종의 성분을 정밀 분석해봤지만, 사람 뼈에 들어있는 인(P) 성분은 나오지 않았어. 따라서 아기를 넣었다는 전설은 그냥 전설일 뿐이야. 3) 안압지 왕이 잔치를 열거나 손님을 모셨던 장소야. 그래서 호수와 궁이 매우 조화롭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 이 당시에는 안압지 안에 진귀한 동물을 모아놓고 풍류를 즐겼다고 하는데, 정말 상상만 해도 얼마나 근사했을지 짐작이 가지? 4) 괘릉 괘릉은 신라 원성왕의 능으로 신라 시대의 능 중에서 가장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주는 능이야. 이 능에는 고개 돌린 석수가 있어. 보통 능을 지키는 석수는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기 위하여 각 방향으로 서있기 마련인데, 이 곳의 석수는 단 두 곳의 방향에 서있으면서 사방을 지키고 있어. 바로 고개를 돌려서 동서남북 사방을 전부 바라보고 있는 거야. 5) 기림사 기림사는 경주의 대표적인 사찰이야. 불국사에 비교하면 크지 않은 규모지만 기림사에는 특별한 것이 있어. 바로 다섯 가지 약수야. 장군수, 오탁수, 초안수, 화정수, 감로수 이 5가지 약수는 각각 그 특징이 있어. 오탁수는 물의 맛이 으뜸이고, 초안수는 눈이 맑아지며, 화정수는 마음이 편안해지고, 감로수는 하늘에서 내리는 단 이슬과도 같다고 해. 약수는 지금도 마실 수 있으니, 이 곳에 가면 꼭 약수를 마셔봐~ 6) 문무대왕릉 문무왕은 무열왕(김춘추)의 아들이자 신라의 30대 왕으로 삼국 통일을 완성했어. 문무대왕릉은 바다의 가운데 있는데 바로 대왕암이야. 이는 문무왕이 죽어서까지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화장하여 동해에 뿌려달라고 했기 때문이야. 이 곳에서 일출을 보며 죽어서도 신라를 지키고자 했던 문무왕을 생각해봐! 7) 감은사지 3층 석탑 감은사지 3층 석탑은 감은사 앞뜰에 서있는 거대한 탑이야. 감은사는 지금 남아있지 않고, 쌍둥이 탑 두 개만 남아있어. 경주에 있는 3층 석탑 중 가장 거대한 감은사지 3층 석탑은 왜구로부터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세웠다는 감은사에 맞게 위엄이 가득해 보여. 8) 석굴암 현재까지도 완벽한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유리막으로 막아놓고 있어. 유리 저편으로 보이는 석굴암의 아름다운 조각은 정말 감탄을 자아내게 해. 그 섬세한 조각을 그 당시에 어떻게 새겨 넣을 수 있었는지 천년 전 신라인의 도공을 생각하면 신비롭기까지 해. 9) 불국사 우리나라 사람 중에 불국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야. 사적 및 명승 제1호,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유명하고 또 그만큼 가치가 있는 곳이야. 38만 8,879m2 공간에 다보탑, 석가탑, 금동 비로자나불좌상, 금동 아미타여래 좌상, 사리탑, 연화교, 칠보교, 청운교, 백운교 등의 수많은 국보와 보물이 숨쉬고 있어. 돌 하나, 나무 하나에 신라인의 정성과 혼이 담겨있으니, 여유를 가지고 신라인의 숨결을 느낄수가있다. 북동쪽으로 포항시, 서쪽으로 영천시·청도군, 남쪽으로 울산광역시 울주군, 동쪽으로 동해에 면한다. 대부분 경상분지지체(慶尙盆地地體)에 속하고, 양북면 어일리·범곡리와 천북면 등의 일부 지역은 포항분지지체에 속한다. 경상분지 지역은 경상계의 퇴적암층을 뚫고 관입한 불국사관입암층(佛國寺貫入岩層)으로, 화강암과 반암이 주로 분포한다. 포항분지는 신생대 제3기에 형성된 지층으로 화성암·수성암·역암·사암·응회암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지역과 내륙지역으로 나누며, 내륙지역은 연평균기온이 14℃, 1월 평균기온이 -0.3℃, 8월 평균기온이 26.6℃이고, 연평균강수량은 998.2mm이다. 춥고 더운 차이가 심하고 강수량이 적은 남부내륙형 기후를 나타낸다. 해안지역은 동해의 영향을 받아 연평균기온 13.3℃, 1월 평균기온 0.6℃, 8월 평균기온 25℃, 강수량 1,028.6mm로, 따뜻하고 습한 남부해안성 기후를 나타낸다. 여름에는 태풍이 자주 지나간다. 지형은 크게 셋으로 구분된다. 동부 해안 지대는 대체로 경사가 급하고 산지가 이어진 동대산계(東大山系)를 이루고, 서부는 단석산(斷石山:829m)을 중심으로 단석산계를 형성해 낙동강 유역과 형산강 유역의 분수계를 이룬다. 양 산계의 중간을 형산강과 그 지류가 흐르면서 안강·건천·내남 등 3대 평야를 형성하여 비옥한 농업지대를 이룬다. 행정구역 감포읍, 건천읍, 구정동, 구황동, 내남면, 노동동, 노서동, 도지동, 동방동, 마동, 배동, 배반동, 북군동, 서악동, 석장동, 성건동, 성동동, 손곡동, 시래동, 안강읍, 암곡동, 양남면, 양북면, 외동읍, 인왕동, 진현동, 천군동, 천북면, 현곡면, 황남동, 황오동, 황용동, 효현동 자연 경주분지, 구미산, 금오산, 남산, 단석산, 명활산, 오봉산, 옹강산, 인내산, 치술령, 토함산, 형산강평야 관광 감포관광단지, 경주 민속공예촌, 경주국립공원, 경주월드, 보문관광단지, 봉길해수욕장, 오류해수욕장, 토함산자연휴양림, 황성공원 문화유적 감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감산사지 삼층석탑, 감은사지 삼층석탑, 경주 간묘, 경주 감은사지, 경주 경덕사, 경주 경덕왕릉, 경주 경애왕릉, 경주 계림, 경주 계림로 보검, 경주 교동 고분군, 경주 교동 석등, 경주 교동법주, 경주 구 서경사, 경주 구정동 고분군, 경주 구정동 방형분,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 경주 귀래정, 경주 근계리 입불상, 경주 금척리 고분군, 경주 기림사 건칠보살반가상, 경주 기림사 대적광전, 경주 기림사 소장유물,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경주 김유신묘,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경주 나정, 경주 남고루, 경주 남사리 북삼층석탑, 경주 남산 미륵곡석불좌상, 경주 남산 불곡석불좌상,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경주 남산 용장사곡 석불좌상, 경주 남산 일원, 경주 남산 입곡석불두,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 경주 남산 탑곡마애조상군, 경주 남산동 석조감실, 경주 남산리 삼층석탑, 경주 남산신성, 경주 낭산 일원, 경주 내물왕릉, 경주 노동리 고분군, 경주 노서동 석불입상, 경주 노서리 고분군, 경주 능지탑지, 경주 단고사 강당, 경주 독락당, 경주 동궁과 월지, 경주 동방동 와요지, 경주 동부 사적지대, 경주 동부동 은행나무, 경주 동천동 마애삼존불좌상, 경주 동천동 사방불탑신석, 경주 두대리 마애석불입상, 경주 마동사지 삼층석탑, 경주 망덕사지, 경주 명활성, 경주 무열왕릉, 경주 문무대왕릉, 경주 미추왕릉, 경주 배동 삼릉, 경주 배리 석불입상, 경주 배리 윤을곡마애불좌상,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경주 법흥왕릉, 경주 벽도산 석불입상, 경주 보문동 사지, 경주 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 경주 보문리 당간지주, 경주 보문리 석조, 경주 부산성, 경주 불국사 경내,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경주 사마소, 경주 사천왕사지, 경주 삼랑사지 당간지주, 경주 삼릉계석불좌상, 경주 서부동 석불좌상, 경주 서악동 고분군, 경주 서악리 귀부, 경주 서악리 마애석불상, 경주 서악리 삼층석탑, 경주 서출지, 경주 석빙고, 경주 석장동 암각화, 경주 선덕여왕릉, 경주 성덕왕릉, 경주 성동동 전랑지, 경주 손곡동과 물천리 유적, 경주 손순유허, 경주 신무왕릉, 경주 신문왕릉, 경주 안계리 석조석가여래좌상, 경주 약수계곡 마애입불상, 경주 양동 관가정, 경주 양동 무첨당, 경주 양동 향단, 경주 양동마을, 경주 양동마을 강학당, 경주 양동마을 근암 고택, 경주 양동마을 낙선당 고택, 경주 양동마을 두곡 고택, 경주 양동마을 사호당 고택, 경주 양동마을 상춘헌 고택, 경주 양동마을 송첨 종택, 경주 양동마을 수운정, 경주 양동마을 수졸당 고택, 경주 양동마을 심수정, 경주 양동마을 안락정, 경주 양동마을 이향정 고택, 경주 양산재, 경주 열암곡 석불좌상, 경주 영지, 경주 오릉, 경주 오야리 삼층석탑, 경주 옥산서원, 경주 용강동 고분, 경주 용강동 원지 유적, 경주 우안 양수장, 경주 원성왕릉, 경주 원원사지, 경주 월성, 경주 월암 종택, 경주 유연정, 경주 이견대, 경주 인왕리 고분군, 경주 일성왕릉, 경주 장항리 사지, 경주 재매정, 경주 전 민애왕릉, 경주 정강왕릉, 경주 죽동리 출토 청동기일괄, 경주 지마왕릉, 경주 진덕여왕릉, 경주 진평왕릉, 경주 진흥왕릉, 경주 천관사지, 경주 천군동 사지, 경주 천군리 삼층석탑, 경주 첨성대, 경주 최부자댁, 경주 춘양교지와 월정교지, 경주 침식곡 석불좌상, 경주 탈해왕릉, 경주 포석정지, 경주 표암, 경주 헌강왕릉, 경주 헌덕왕릉, 경주 헌안왕릉, 경주 화산리 회유토기 요지, 경주 활성리 석불입상, 경주 황남동 금제 드리개, 경주 황남리 고분군, 경주 황남리 효자손시양 정려비, 경주 황오동 삼층석탑, 경주 황오리 고분군, 경주 효공왕릉, 경주 효소왕릉, 경주 효현리 삼층석탑, 경주 흥덕왕릉, 경주 흥륜사지, 경주 희강왕릉, 경주검총, 경주안심리암각화, 경주읍성, 경주읍지, 경주향교, 고선사지 삼층석탑, 관문성, 광개토대왕공적기념호우, 구강서원, 굴불사지 석불상, 금곡사지 원광법사 승탑, 금관총 금관, 금동 당간 용두, 기림사, 기림사 비로자나불 복장전적, 기림사 삼층석탑, 기림사 약사전, 기림사 응진전, 기림사 진남루, 기마인물형토기, 김양묘, 김인문묘, 남간사지 당간지주, 남간사지 석정, 남산신성비, 낭산 마애삼존불, 내물왕릉 계림 월성지대,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동강서원, 동경관, 망덕사지 당간지주, 명활산성작성비, 목조문무인상, 무장사 아미타불조상사적비 이수 및 귀부, 무장사지 삼층석탑, 백률사, 백운대 마애불입상, 백율사 대웅전, 백지묵서묘법연화경, 보리사 마애석불, 분황사 석정, 분황사 석탑, 분황사 약사여래입상,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불국사, 불국사 다보탑, 불국사 사리탑, 불국사 삼층석탑, 불국사 삼층석탑 내발견유물, 불국사 석조, 불국사 연화교칠보교, 불국사 청운교백운교, 삼괴정, 삼국사기(권50),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삼안총, 상서장, 서봉총, 서수형토기(미추왕릉), 서악서원, 석굴암, 석굴암 삼층석탑, 석탈해왕탄강유허, 성덕대왕 신종, 성덕왕릉귀부, 성산서당, 손소선생분재기, 손종로정충비각, 수봉정, 수재정, 숭덕전, 숭복사지 삼층석탑, 숭신전, 숭혜전, 식리총, 신라왕릉, 신라진지문성왕릉, 안압지, 안압지 출토 금동판불상일괄, 양동 대성헌, 양동의 향나무, 영지석불좌상,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운암공부조묘, 웅수사지 석불입상, 월성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월성 금장리 고분군, 월성 남사리사지 삼층석탑, 월성 용명리사지 삼층석탑, 월성 입실리 유적, 월성 장항리사지 서오층석탑, 월성 주사댁, 유리제 병 및 배, 육의당, 의성 관덕동 석사자, 이씨삼강묘비, 이언적수필고본일괄, 익재영정, 익재집책판, 인용사지, 임신서기석, 적개공신논상록권, 전홍유후설총묘, 정공청유품, 정덕계유사마방목,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종덕재 정당, 종오정 일원, 천룡사지 삼층석탑, 천마도 장니, 천마총, 천마총 금과대·금요패, 천마총 금관, 천마총 금모, 천마총 금제 관식, 천마총 금제 관식, 천마총 목걸이, 천마총 유리잔, 천마총 자루솥, 천마총 환두대도, 청동 옻칠 발걸이, 최진립전적및유품, 충의당, 취지금니묘법연화경, 태종무열왕릉비, 토우장식장경호, 통감속편, 해동명적, 호우총, 황남대총,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 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 황남대총 남분 금제 허리띠, 황남대총 남분 은관, 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 황남대총 북분 금과대 ·금요패, 황남대총 북분 금관수하식, 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 황남대총 북분 금팔찌 및 금반지,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 황남대총 북분 은잔, 황남대총 북분 은제 관식, 황룡사 구층목탑 문화시설 국립경주박물관,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박물관, 신라역사과학관, 안압지전시관, 우양미술관 관공서 경주시청, 대구지방검찰청 경주지청 학교 감포종합고등학교, 감포중학교, 감포초등학교, 강동초등학교, 건천초등학교, 경주고등학교, 경주공업고등학교, 경주대학교, 경주디자인고등학교, 경주마케팅고등학교, 경주여자고등학교, 경주여자정보고등학교, 경주여자중학교, 경주정보고등학교, 경주중학교, 경주초등학교, 계림고등학교, 계림중학교, 계림초등학교, 괘릉초등학교, 근화여자고등학교, 근화여자중학교, 나산초등학교, 나원초등학교, 내남초등학교, 대본초등학교, 동국대학교, 동방초등학교, 동천초등학교, 모량초등학교, 모아초등학교, 모화초등학교, 무산중학교, 문화고등학교, 문화중학교, 불국사초등학교, 불국중학교, 사방초등학교, 산내중학교, 산대초등학교, 삼성생활예술고등학교, 서라벌대학교, 서라벌여자중학교, 서라벌초등학교, 석계초등학교, 선덕여자고등학교, 선덕여자중학교, 신라고등학교, 신라공업고등학교, 신라중학교, 신라초등학교, 아화중학교, 아화초등학교, 안강북부초등학교, 안강여자고등학교, 안강여자중학교, 안강전자고등학교, 안강제일초등학교, 안강중학교, 안강초등학교, 양남중학교, 양남초등학교, 양동초등학교, 양북중학교, 양북초등학교, 연안초등학교, 영지초등학교, 오릉초등학교, 옥산초등학교, 외동중학교, 용강초등학교, 용황초등학교, 월성중학교, 월성초등학교, 위덕대학교, 유림초등학교, 의곡초등학교, 입실초등학교, 전촌초등학교, 천북초등학교, 천포초등학교, 태화고등학교, 현곡초등학교, 화랑고등학교, 화랑초등학교, 황남초등학교, 황성초등학교, 흥무초등학교 교통 4번국도, 중앙선 행사및축제 신라문화제, 신라문화제, 한국 전통주와 떡 축제, 한국 전통주와 떡 축제 종교 감로암, 경주 구 서경사, 경주 기림사 대적광전, 경주 불국사 경내, 고선사, 골굴사, 금강사, 금강암, 기림사, 기림사 약사전, 백율사 대웅전, 보리사, 분황사, 불국사, 삼불사, 석가사지, 석굴암, 신선사, 정혜사, 황복사 연혁" BC 57년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이곳을 중심으로 서라벌(徐羅伐)을 세웠다. 이 나라가 307년(기림왕 10)부터 신라로 개칭·발전하였는데, 이후 992년간 신라의 왕경(王京)이 자리하였으며 지방의 소경(小京)과 대비하여 대경(大京)이라고 불렀다. 6세기에 도시로서 도로망과 주거형태를 체계적으로 갖추기 시작하였고 계획적인 도로망이 격자로 만들어졌으며 8세기에 대도시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도시의 규모는 남북과 동서로 각 약 6km내외의 규모로 짐작된다. 고려가 신라를 합병한 935년(태조 18) 처음으로 경주라 불렀으며, 940년(태조 23) 영남지방의 행정 관청인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가 설치되었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바꾸고, 유수사(留守使)를 두었으며 1012년(현종 3)에 다시 경주가 되었다. 한동안 경주부에 설치된 경상좌도(慶尙左道)의 감영(監營)이 1601년(선조 34)에 대구로 이동된 후 경주의 지위는 약화되었다. 1895년(고종 32) 23부제(府制) 실시로 경주군으로 개편되고, 1931년 4월 경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37년 7월 양북면(陽北面)에서 감포리(甘浦里) 외 8개리가 감포읍으로 분리 승격되었다. 1949년 5월에는 강서면(江西面)이 안강읍으로 승격되었다. 1955년 9월 경주읍이 경주시로 승격되어 군과 분리되었고, 군의 명칭이 월성(月城)으로 바뀌었다. 1973년 7월 서면(西面)의 건천리(乾川里) 외 10개리가 건천읍으로 승격 분리되었고, 1980년 12월 외동면(外東面)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 1월 월성군의 명칭이 경주군으로 환원되었다. 1995년 1월 경주시와 경주군이 합쳐 통합시가 되었다. 2016년 현재 경주시는 감포읍·안강읍·건천읍·외동읍 및 양북면·양남면·내남면·산내면·서면·현곡면·강동면·천북면과 중부동, 황오동, 성건동, 황성동, 용강동, 동천동, 황남동, 보덕동, 월성동, 불국동, 선도동 등 4읍 8면 11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회와문화" 경주시의 교육기관으로는 대학교 3개교, 전문대학 1개교, 고등학교 20개교, 중학교 20개교, 초등학교 43개교(분교 4개) 등이 있다. 문화시설로는 박물관(국립경주박물관,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박물관)·공공도서관·문화원·종합문예회관·미술관 등이 있다. 매년 10월에 열리는 신라문화제를 비롯해 4월과 5월에 청마백일장과 목월백일장이 열린다. 민속놀이로는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동제를 비롯해 가배놀이와 사자놀이가 전해온다. 이러한 민속놀이는 10월에 열리는 신라문화제에서 재현된다. 경주시는 국내에는 익산시, 해외에는 이탈리아 폼페이시, 프랑스 베르사유시, 미국 잉글우드시, 일본 나라시·오바마시, 중국 시안시 등과 자매결연을 맺어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 정의 경상북도 남동단에 위치한 시. 개관 동쪽은 동해, 서쪽은 청도군과 영천시, 남쪽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북쪽은 포항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8°58′∼ 129°31′, 북위 35°39′∼ 36°04′에 위치한다. 면적은 1,324.41㎢이고, 인구는 25만 9773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4개 읍, 8개 면, 11개 행정동(44개 법정동), 305개 행정리(142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에 있다. 자연환경 태백산맥의 남단으로 경상계(慶尙系)의 화강암이 관입한 지질을 이룬다. 지형은 주사산맥(朱砂山脈)·금오산맥(金鰲山脈)·동대산맥(東大山脈) 등 세 줄기 태백산맥의 지맥이 서부·중부·동부를 각각 남북으로 주행하여 산지지형을 이루고 있다. 주요 산으로는 도덕산(道德山, 703m)·구미산(龜尾山, 594m)·금오산(金鰲山, 466m)·황룡산(黃龍山, 664m)·토함산(吐含山, 745m)과 주사산(朱砂山, 622m)·소두방산(315m)·천룡산(天龍山, 495m) 등이 있다. 고개로는 추령(楸嶺, 309m)과 치술령(765m) 등이 있다. 형산강구조곡(兄山江構造谷), 영천∼경주간 구조곡이 교차하는 지점에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침식분지가 형성되어 그 곳에 경주 시가지가 발달하였다. 명활산(明活山, 245m)·금오산(金鰲山)·옥녀봉(玉女峰, 215m)·선도산(仙挑山, 381m)·소금강산(小金剛山, 143m) 등 구릉성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는 자연요새를 이루고 있다. 또한, 경주∼양산간 구조곡도 경주 도심지에서 교차하여 거의 시 전역이 형산강의 상류·중류부에 해당된다. 산내면에서 발원하는 동창천이 청도군 청도읍 내호리에서 청도천과 합류, 밀양강으로 흘러들며, 외동읍 괘릉리에서 발원하는 동천이 울산에서 태화강으로 흘러든다. 울산광역시 울주군에서 발원하는 미역내가 북류하면서 크고 작은 하천과 합해져 기린내[麟川]가 되고, 반월성을 싸고 도는 남천(南川)은, 시가지 중심부를 관통하는 북천(北川)과 현곡천(見谷川)·대천(大川) 등과 합류해 형산강을 이루어 북류하다 안강평야에서 칠평천(七坪川)·기계천(杞溪川)과 합류하여 동해로 흐른다. 기후는 기온교차가 비교적 심한 내륙성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연평균기온 14.0℃, 1월 평균기온 -0.9℃, 8월 평균기온 24.6℃이며, 연강수량은 1,037.0㎜이다. 역사 이 지역에서 사람이 살게 된 것은 청동기시대라고 생각되는데, 이는 이 시기 이전에 해당하는 유물·유적이 발견된 바 없고, 고인돌·청동검·간돌칼 등을 부장한 무덤 등 청동기 유물·유적이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곧 구정동, 평동 입실리 유적 등은 우리나라 후기 청동기문화를 밝혀주는 귀중한 유적이며, 조양동 유적은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들 유적은 이 지역이 일찍부터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며, 이와 같이 발달된 문화를 토대로 하여 신라가 성립될 수 있었다. 신라는 원래 사로 6촌에서 비롯되었는데, 사로 6촌의 위치를 경주평야 일대에만 한정하여 보는 견해도 있으나, 경주지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사로 6촌은 기원 전후 무렵 사로국(斯盧國)으로 발전하였으며, 점차 진한 12국의 맹주국(盟州國)이 되었고, 6촌도 6부로 개편되었다. 그 뒤 사로국이 주변지역에 대한 정복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그 영역이 확대되자 6부가 두어져 있던 이들 지역은 왕경으로 되었다. 곧 궁실과 각종 관청이 들어서고 지배층이 거주하는 도시로 발전하였으며, 6부의 아래에 방리제(坊里制)가 시행되었다. 통일 이후의 전성시대에는 17만 8,936호의 인구가 거주하는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각종 유적에서 그 대략을 짐작할 수 있으나, 신라의 쇠퇴로 왕도로서의 영화는 사라지게 되었다. 935년(태조 18)신라가 고려에 항복하자 이 지역은 경순왕의 식읍이 되었고, 940년 군현 개편에 따라 6부의 명칭도 바뀌게 되었다. 이 때 이곳에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가 두어져 6부지역을 위시한 인근의 여러 지역이 합속되었다. 995년(성종 14)동경유수관(東京留守官)으로 개편되었으나, 1012년(현종 3)동경유수관이 폐지되고 경주방어사로 강등되었다가 1014년 다시 안동대도호부로, 1018년경주대도호부로 개편되었으며, 1030년 다시 동경유수관이 되었다. 이러한 개편 과정에서도 여러 군현을 영속한 큰 읍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했으며, 12세기 후반 무인정권하에서는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202년(신종 5)동경야별초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태로 1204년에는 지경주사(知慶州事)로 읍격이 강등되었으나, 1219년(고종 6) 유수관으로 복귀되었다. 1238년에는 몽고군이 이 지역을 휩쓸어 황룡사구층목탑이 불타는 등 수많은 문화재의 손실을 입었고, 1308년(충렬왕 34)계림부로 고쳐졌다. 조선 개국 후 8도체제가 확정되면서 이곳에 경상도의 감영이 두어졌으나 1408년(태종 8) 무렵 감영이 상주목으로 옮겨졌고, 1415년에 경주부로 개칭되었다. 이 후에도 안강(安康)·기계(杞溪) 등 4현을 속현으로 거느린 영남의 큰 읍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였다. 1519년(중종 14) 일시 경상도가 좌·우도로 나뉘어지자 좌도의 치소가 되어 좌도감사가 경주부윤을 겸하게 되었다. 이 지역은 건국이래 학문이 번성한 지역으로서, 1561년(명종 16)서악서원(西嶽書院), 1572년(선조 5)옥산서원(玉山書院) 등 많은 원사(院祠)가 건립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의 진격로에 해당하는 이 지역은 치열한 격전지가 되었고, 박진(朴晉)·박의장(朴毅長)·권응수(權應銖) 등이 이끈 관민(官民) 연합군의 경주성전투와 그 탈환 작전은 왜란을 승리로 이끈 계기가 되었다. 이 지역은 조선 후기에 동성 마을이 많이 형성되었는데, 양동의 이씨(李氏)와 손씨(孫氏)는 오늘날까지 그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 말기에는 이곳 출신 최제우(崔濟愚)가 인내천(人乃天)의 동학사상을 창시하여 민중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기도 하였다. 1895년 지방제도 개혁 시에 경주군으로 개편되었고, 1931년 읍면제의 실시에 따라 경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이어서 1937년에는 양북면의 일부가 감포읍으로 분리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이 지역 역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는데, 3·1운동시에 3월 13일과 15일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1928년신간회 경주지부가 결성되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9년안강읍의 승격에 이어 1955년경주시의 승격으로 시군이 분리되어 월성군이 따로 존재하게 되었다. 1973년건천읍, 1980년외동읍의 승격이 있었고, 1989년월성군이 경주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도농통합에 따라 경주시와 경주군이 통합되어 새로운 경주시가 되었다. 1998년 행정동 통폐합이 이루어져 4읍 8면 13동이 되었다가 다시 2009년 1월 행정동이 통폐합되어 4읍 8면 11동으로 되었다. 유물·유적 이 시는 선사시대부터 많은 유적을 남기고 있다. 특히, 신라 천 년의 도읍지로서 수많은 유물·유적을 간직하고 있어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유물·유적이 밀집되어 있다. 국가지정 문화재만도 국보 31점(불국사삼층석탑 일괄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73점, 사적 및 명승 77개소, 천연기념물 3종, 중요민속자료 16종, 중요무형문화재 2종이 있다. 경주시 일원의 유물·유적은 크게 고분 및 그 유물, 불교관계 문화재, 성 및 궁궐지, 고건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경주시내 이외에도 천북면 모아리·오야리, 외동읍 죽동리에서 무문토기가 출토된 바 있고, 고인돌 또한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특히, 강동면과 천북면 모아리 등지에 무리를 이루고 있다. 삼한시대의 유적으로는 외동읍 죽동리, 강동면 안계리, 외동읍 입실리에서 출토된 청동기 일괄유물과 조양동 토광묘군이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 이후의 신라분묘유적으로는 경주시내에 자리하고 있는 노서동·노동동·황남동·황오동·인왕동 고분군을 비롯하여, 서악의 무열왕릉을 비롯한 고분들과 인접한 충효동 고분군·김유신묘 등이 시내 서쪽에 있다. 낭산 산록에 선덕왕릉·신문왕릉·효공왕릉·신무왕릉이, 남산 기슭에는 헌강왕릉·정강왕릉·경명왕릉·경애왕릉 등이 분포한다. 이 밖에도 금강산 서쪽의 고분군 및 남산주변 고분군 등 곳곳에 많은 고분이 있다. 이러한 고분가운데, 금관총·서봉총·천마총과 98호 남·북분 등에서 발굴된 각종 유물은 신라문화의 찬연함을 보여주는 유물이 된다. 불교문화재로는 불국사·석굴암을 비롯하여 남산일대의 유적을 들 수 있다. 남산은 그 자체가 거대한 노천박물관이라 일컬을 만큼, 미륵곡·불곡·탑곡 등의 골짜기마다 사찰지·불상·탑 등이 산재한다. 또 황룡사지·사천왕사지·망덕사지·고선사지·흥륜사지·굴불사지·천군리사지 등을 통해서는 신라 불교사찰의 모습을 확인하게 하였다. 또한 현곡면에 월성나원리오층석탑(月城羅原里五層石塔, 국보 제39호), 안강읍 옥산리에 정혜사지십삼층석탑(淨惠寺址十三層石塔, 국보 제40호), 양북면 용당리에 감은사지삼층석탑(感恩寺址三層石塔, 국보 제112호), 건천읍 송선리에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斷石山神仙寺磨崖佛像群, 국보 제199호) 등이 있다. 그리고 내남면 용장리에 경주남산용장사곡삼층석탑(慶州南山茸長寺谷三層石塔, 보물 제186호)·경주남산용장사곡석불좌상(慶州南山茸長寺谷石佛坐像, 보물 제187호), 양북면 호암리에 기림사건칠보살좌상(祇林寺乾漆菩薩坐像, 보물 제415호), 안동리에 월성골굴암마애여래좌상(月城骨窟庵磨崖如來坐像, 보물 제581호), 율동에 월성두대리마애석불입상(月城斗垈里 磨崖石佛立像, 보물 제122호)이 있다. 배동에 경주배리석불입상(慶州拜里石佛立像, 보물 제63호), 양북면 용당리에 경주감은사지(慶州感恩寺址, 사적 제31호), 감포읍 대본리에 이견대(利見臺, 사적 제159호), 양북면에 경주장항리사지(慶州獐項里寺址, 사적 제45호), 외동읍 모화리에 경주원원사지(慶州遠願寺址, 사적 제46호), 진현동에 석굴암석굴(石窟庵石窟, 국보 제24호) 등이 있다. 성지 및 궁궐지로는 반월성·임해전지·명활산성·남산성, 건천읍 송선리의 경주부산성(慶州富山城, 사적 제25호)과 외동읍 모화리의 관문성(關門城, 사적 제48호)이 대표적이다. 고건축물로는 안강읍 옥산리에 옥산서원(사적 제154호), 강동면 양동리에 무첨당(無忝堂, 보물 제411호)과 향단(보물 제412호)·관가정(觀稼亭, 보물 제442호), 옥산리에 독락당(獨樂堂, 보물 제413호), 강동면 옥산리에 월성손동만씨가옥(月城孫東滿氏家屋, 중요민속자료 제23호)이 있다. 그리고 양동낙선당(良洞樂善堂, 중요민속자료 제73호)·양동이원봉가옥(良洞李源鳳家屋, 중요민속자료 제74호)·양동이원용가옥(良洞李源鏞家屋, 중요민속자료 제75호)·양동이동기가옥(良洞李東琦家屋, 중요민속자료 제76호)이 있다. 또한 양동이희태가옥(良洞李熙太家屋, 중요민속자료 제77호)·양동수졸당(良洞守拙堂, 중요민속자료 제78호)·양동이향정(良洞二香亭, 중요민속자료 제79호)·양동수운정(良洞水雲亭, 중요민속자료 제80호)·양동심수정(良洞心水亭, 중요민속자료 제81호)·양동안락정(良洞安樂亭, 중요민속자료 제82호)·양동강학당(良洞講學堂, 중요민속자료 제83호) 등이 있다. 중요 전적(典籍)으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인 『삼국사기』(卷五十, 보물 제525호)의 목판본과 『해동명적(海東名蹟)』(上卷 20枚, 下卷 23枚, 보물 제526호)·정덕계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 보물 제524호)·이언적수필고본일괄(李彦迪手筆稿本一括, 보물 제586호)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현곡면 오류리에 등나무(천연기념물 제89호), 안강읍 옥산리에 동락당의 중국주엽나무(천연기념물 제115호), 육통리에 월성안강읍의 회화나무(천연기념물 제318호) 등이 있다. 중요무형문화재로는 경주교동법주(향토술담기, 중요무형문화재 제86호), 누비옷(중요무형문화제 제107호)이 있다. 이 밖에도 신라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으로 계림·첨성대·포석정·나정·재매정·동방와요지군·반월성내의 석빙고·경주읍성 등이 있다. 교육·문화 신라의 고도인 경주의 전 근대적 교육기구는 신라의 화랑도와 682년(신문왕 2)에 설치된 국학이 있었다. 국학은 고려시대 경주향교의 바탕이 되었으며, 이것은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교동에 있는 경주향교는 1492년(성종 23)에 중수되었으나, 임진왜란 중에 소실되었다. 그 뒤 이시발이 중건하여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주에는 향교 외에도 조선시대에 소학당이 있어 동몽을 훈회하였다. 서원으로는 1561년(명종 16)서악동에 설립되고 1623년에 사액된 서악서원(西岳書院), 1573년(선조 6)안강읍 옥산리에 설립되고 1574년(선조 7)에 사액된 옥산서원(玉山書院), 1700년(숙종 26)에 설립하고 1711년 사액된 숭열사가 있다. 이 외에도 구강서원은 1692(숙종 18)에 안강읍 양월리에, 동강서원은 1707에 강동면 유금리에, 인산서원은 1714, 매월당영당은 1670(현종 11), 운곡서원은 1785년(정조 9)강동면 왕신리에 각각 건립되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모두 훼철되었지만 서악서원과 옥산서원은 훼철되지 않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근대 교육기관인 초등학교로는 1907년에 유림들이 세운 월성학교(월성초등학교의 전신)·계림공립보통학교(계림초등학교의 전신)·옥산공립보통학교(옥산초등학교의 전신)가, 1909년에 광흥학교가 설립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1920년에 세워진 건천공립보통학교 외에 25개의 학교가, 중학교는 1938년에 사립학교인 경주중·고등학교가 세워졌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43개교, 중학교 20개교, 고등학교 21개교, 특수학교 1개교가 있으며,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경주대학교·위덕대학교·서라벌대학교가 있다. 문화면으로는 도서관 6개소, 박물관 4개소(국립경주박물관, 동국대·경주대·위덕대 박물관 ), 문화재 300점, 예술단 5개(교향악단 1, 국악단 1, 합창단 1, 소년·소녀 합창단 1, 연극단 1), 문화공간으로는 공연시설 7개소, 전시시설 1개소, 지역문화복지시설 4개소, 그리고 문화원이 하나 있다. 문화행사로는 문화박람회인 경주세계문화엑스포가 3년마다(8∼11월) 보문단지내 엑스포공원에서 개최되고 있다. 1962년부터 시작된 신라문화제는 매년 10월에 개최로 경주세계문화엑스포가 열리는 해는 연계 개최하기로 하였으며, 전국국악대전, 신라미술대전, 한글백일장, 화랑씨름대회 등의 행사가 펼쳐진다. 이밖에도 청마백일장, 목월백일장, 원효예술제, 만파식적제, 동학예술제 등이 열리고 있다. 특히,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에서는 ‘신라문화학술회의’ 개최와 전문학술지인 ‘신라문화’를 간행하여 신라의 역사·문화를 재조명하고 있다. 이 지역은 동학의 발생지이며 교조 최제우가 활동한 곳이며 유네스코가 세계 10대 문화유적도시로 지정한 곳이다. 민속 이 고장에 전해져 내려오는 민속놀이로는 양동마을의 줄다리기와 호미씻이, 세시에 따라 행해지는 널뛰기·윷놀이·연날리기·사자놀이·풀놀이·활쏘기·탑놀이·그네뛰기·가배놀이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양동마을의 줄다리기와 호미씻이는 이 고장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 알려져 있다. 줄다리기는 정월 보름과 8월 보름경에 주로 행해졌는데, 요즈음은 격년제 또는 3년마다 한 번씩 행해지고 있다. 시합은 윗마을과 아랫마을 간에 이루어지는데, 시합 전에 각각 고사를 지내고 해가 넘어갈 무렵에 시작해서 이튿날 새벽까지 한다. 시합 중에 힘이 달리면 이웃마을에 가서 청병을 하기도 하며, 구경하던 사람들까지도 가세해서 협동심을 발휘한다. 줄다리기는 윗마을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아랫마을이 이기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한다. 이와같은 믿음은 주민들에게 기대감을 부여해주고 있으며 물질과 정신의 대비를 나타내주고 있다. 호미씻이는 삼복이 지나고 세 벌 논을 다 맨 뒤 마을의 머슴들에게 놀 기회를 주는 행사이다. 여름 동안 가장 열심히 일한 머슴이 소를 타고 주인집에 들어가면 주인은 술과 음식을 대접한다. 이 날은 머슴들이 농악대를 이끌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지신을 밟아주며 한해의 수고를 서로 위로하고 격려함으로써 주인과 머슴이 일체감을 가진다. 양동마을과 같이 유교색이 짙은 마을에서는 동제를 지내지 않으나 군내의 많은 동네에서 아직까지 동제를 지내고 있다. 대개 골맥이라는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데, 마을 입구의 고목이나 서낭당이 신체가 된다. 제는 마을에 따라 특별한 날을 정하고 매년 같은 날에 지내기도 하며, 매년 주민이 모여 날짜를 결정하기도 한다. 제일이 결정되면 부정이 없고 출산·초상 등을 당하지 않은 남자를 제관으로 선정한다. 제관은 금줄로써 신성구역을 표시하고 정성을 다해 동제를 지내게 되는데, 다음 동제까지 마을에 재앙이 생기면 제관이 제를 잘못 지냈기 때문이라 믿어 지탄을 받게 된다. 제의 비용은 대개 동민들이 분담하며, 제물은 정성을 다해 준비하고 제를 지낸 뒤 음복을 한다. 해안지방에는 용왕을 모시는 별신제를 행하는 곳이 많다. 동제가 근엄하고 정적인 데 비해 별신제는 무당을 초청하여 굿을 함으로써 축제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동네행사로서 별신굿이 열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해난사고로 인한 수중고혼을 위로하기 위해 개인이 별신제를 지내는 경우도 있다. 내륙지방에서 동제를 지내는 것과 해안지방에서 별신제를 지내는 것은 주민의 생업과 연관되어서 의례활동이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민요·설화 이 고장은 민요가 다양하고도 풍부하게 전승되어온 곳이다. 남성들이 부르는 노래는 「망깨소리」·「지신밟기」·「보리타작노래」·「모노래」 등 주로 노동요이며, 여성들이 부르는 노래는 「치마노래」·「부채노래」·「바늘노래」·「시리굿노래」·「방아타령」·「댕기노래」·「베틀노래」·「시집살이노래」·「달노래」 등 여자들이 의생활과 관련성을 지닌 노래들이 대부분이다. 「지신밟기」·「모노래」·「각설이타령」 등은 남녀 구분없이 부른다. 외동읍의 「모내기노래」는 벌모를 심을 때 남성들이 부르는 교환창이지만 줄모를 심는 오늘날에도 흥이 나면 노인층에서 흥얼거리기도 한다. “물기야 허정청 흐러놓고 쥔내야 양반은 어데로 갔노, 문어야 대전복 손에 들고 첩이야 방으로 놀러갔네, 첩이야 방은 꽃방이요, 님의 방은 연못이라, 꽃과 나비는 봄한철이고 물과 고기는 사시 장천……” 이러한 사설은 여러 면에서 유사하며 가락도 비슷하나 안강읍 부근에서는 사설이 전혀 다르다. “모다야 들어내재이 이모판으로 들어내자 새별겉으나 저밥골이 반달겉이도 떠나온다 니가무시나 반달이냥 초승월색이 반달이지…….” 「보리타작노래」는 이 군 일대에서 거의 비슷하다. 현곡면에서는 목도리깨꾼이 앞소리를 메기며 때릴 곳을 지시하면 종도리깨꾼이 뒷소리 여음을 재창하며 보리를 두드린다. “호호 호해야 여기봐라 호해야 호호 호해야 이보리를 뚜두려서 호호 호해야 곡간에다 채울라네 호호 호해야 개구리보리 때레라 호호 호해야…….” 특히 이 군에는 「달노래」라 하여 종래에 부인들 사이에 흔히 불리던 이른바 「월령가」가 있다. “정월가만 십오일에 망월하시는 소년들아 망월돋아 좋건마느 부모봉양은 뉘가할꼬 그달그믐은 다지내고 이월가면 한식이예 괴지촌에 넋이로다……그달그믐은 다지내고 사월가면 초파일에 앞집이도야 관등달고 뒷집이도야 관등다는데 우리임은 어델가고 관등놀이를 모르시노…….” 「달노래」는 특정한 기능을 가진 노래가 아니며 밭을 매거나 혼자서 오랜 시간 일을 할 때 무료함을 달래며 부른다. 이 밖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 메뚜기를 추스리며 아이를 낳았다고 좋아하는 「항굴래비노래」와 「진보청송조리장사」 등 희극적 요소가 있는 서사민요가 전승되는 것은 이 지방이 민요의 고장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고장은 인물전설이 많은 지역이다. 특히, 신라시대의 인물전설이 많고, 근대의 인물로는 박문수·정만서·최제우 등의 전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인물전설 외에는 「풍수설화」·「아기장수설화」와 자연물유래담들이 많이 전한다. 현곡면은 최제우가 태어난 곳이고 지금도 동학이 성한 고장이어서 최제우 및 그 아버지 근암(近菴) 최옥(崔鋈)의 이야기가 함께 전한다. 최옥은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하고 산림처사로 자처하며 살았는데 과부인 한씨부인을 만나 최제우를 낳았다. 최제우를 낳게 된 내력은 이렇다. 낙방만 거듭하던 최옥이 용담(龍潭)에서 공부를 하다가 깜박 졸았는데, 꿈에 달이 품속으로 사르르 들어왔다. 이 때 남편이 일찍 죽어 과부가 된 청주 한씨가 친정인 서면에 와 지내는데 초저녁 꿈에 우물가에 가니 달이 품속으로 들어왔다. 전에는 얌전하기만 했던 사람이 천리라도 걸어야겠다는 듯이 온몸이 가시에 찔려 유혈이 낭자한 채 구미산을 넘어와 보니 불빛이 뻔한 곳이 있는데, 바로 최옥이 공부하는 용담정이었다. 최옥은 인기척에 문을 열고 한씨부인을 맞아 동침을 하여 최제우를 낳았는데, 이 때 최옥에게는 본부인이 있었다. 서면에서 조선 말기에 살았다는 정만서는 가난하고 지체가 낮은 미천한 백성으로 갖은 술책으로 지체 높고 돈 많은 사람을 괴롭히는 이 고장을 대표하는 시정잡배였다. 어린아이를 잃고 울고 있는 부인을 놓고 정만서가 다른 사람과 부인을 웃기는 내기를 하였다. 우는 부인 곁에 다가가 떠나지 않는 정만서를 보고 부인이 우는 사연을 말하였다. 정만서 또한 슬프다고 하며 다름 아니라 뱃속에서 회충을 낳는데 죽어버려서 슬프다고 하니 부인이 기가 막혀 웃었다. 물론 정만서는 내기에서 이겨 술 한턱을 잘 얻어먹었다. 강동면 호명리의 장군바위는 「아기장수전설」이 전하는 곳이다. 슬하에 자식이 없는 여인이 절에 다니며 불공을 드렸는데 꿈에 백발노인이 “내 아들을 보내줄 터이니 잘 기르라.”고 한 뒤에 보니, 바위 위에 큰 칼을 차고 서 있는 아이를 발견하였다. 아이는 여인에게 “어머니”라고 부르며 밥을 달라 청하며 마을의 왜놈들을 물리치겠다 하였다. 놀란 여인이 마을에 가서 이 사실을 알리니 사람들은 소년장군이 났으니 난리가 날 것이라며 불을 질러 죽여버리고 말았다. 이 때 소년장군이 섰던 바위에 발자국과 칼자국이 남아 있어 장군바위라 하게 되었다. 얼마 뒤에 과연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 밖에 오봉산의 「주사암전설(朱砂庵傳說)」·「감은사연기설화」·「용궁바위전설」 등이 전한다. 산업·교통 2008년 현재 경주시의 총면적 중 임야가 67.9%, 농경지가 16.8%, 기타가 15.3%로 경지율은 낮은 반면 산림지역의 비중이 크다. 총경지면적은 223.12㎢로 그 중 논은 161.26㎢로 72.3%를 차지하고 밭은 61.86㎢로 27.7%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안강평야는 안강읍의 중앙을 관류하여 동으로 흐르는 토평천(土坪川)이 형산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형성된 평야로 안강읍의 동부와 동북부일대 및 강동면의 중앙과 서부일대에 펼쳐져 있으며,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어 경상북도내에서 손꼽히는 곡창지대를 이룬다. 평야일대에서는 사과도 많이 재배된다. 주곡 위주의 농업이 행해지고 있으며, 다만 건천지역의 양송이 재배와 내남면과 산내면의 누에치기가 비교적 활발하다. 경주버섯은 건천읍을 중심으로 재배되고 있는데 전국생산량의 24.6%, 도내생산량의 98%를 차지하고 있다. 이 밖에 사과·배·복숭아·포도가 재배되는데, 사과는 안강·강동·천북면 등의 북부지역, 배는 남부지역에서 많이 생산된다. 그리고 돼지·한우·젖소 등이 주로 사육되고 있다. 경주는 한우, 버섯 전국 1위, 보리, 단감, 시설 토마토, 젖소 도 1위, 벼, 돼지 도 2위로 농·축산물 생산의 보고이다. 특산품은 교동에는 전통주인 교동법주, 황남동에서 처음 만들어진 조그마한 팥빵인 황남빵, 감포 앞바다에서 잡아올린 멸치를 짜낸 순수멸치젓이다. 그 외 경주배, 안강단감, 찰토마토, 남산에서 생산되는 자색의 경주옥돌, 동상의 소인이 있는 심장이 약한 환자에게 내복약으로 사용되는 4·5년생 약초인 오수유(吳茱萸), 강강제·완화제로 쓰이는 다년생 초본인 하수오(何首烏)가 있다. 임산물은 1,017,421㎏이 생산되었으며, 주로 버섯·산나물·밤·호두·대추·도토리·산딸기 등이 생산된다. 수산업은 시내의 유일한 어항인 감포(甘浦)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2007년 현재 2만 3,743M/T의 어획고를 보이고 있다. 산업구조는 농축수산업이 약 34%, 광공업이 15%, 서비스업 등이 51%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경주의 문화·관광도시의 특성상 서비스산업의 비중이 높다. 산업 및 농공단지는 14개로 용강준공업지역, 8개의 지방산업단지, 5개의 농공단지(안강, 외동, 건천, 내남, 서면)에 모두 186개의 업체가 입주하여 있다. 자동차산업의 영향으로 총 1221개 기업체 중 자동차부품 생산업체가 33%를 차지하고 있으며, 포항종합제철의 영향으로 연관공업인 안강의 풍산금속공장 등 여러 공장이 입지하고 있으며, 경주의 특색 있는 것으로는 토석유리공업을 들 수 있다. 1976년 착공하여 1982년 준공된 월성원자력발전소는 국내 유일의 가압중수형 원자력발전소로 유명하다. 4기의 중수로 원전이 운영 중으로, 67만 8천㎾인 1호기는 83년에, 70만㎾급인 월성 2,3,4호기는 각각 97,98,99년에 준공되어 정상 운전 중에 있으며, 신월성 1,2호기가 건설 중에 있다. 발전소를 중심으로 양남면·양북면·감포읍 일대는 1976년 산업기지 개발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상업은 신라의 수도였던 까닭에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490년(소지왕 12) 3월에 경도시(京都市), 509년(지증왕 10)에 동시(東市)가 개설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1830년대에는 사평·구어·읍내·부내·대창장 등의 5일장이 있었고, 1920년대 후반까지도 5일장에서 거래가 활발하였다. 특히 부내장은 대구 부내장과 더불어 영남의 2대시장으로 손꼽힐 만큼 규모가 컸다. 민족항일기 말 중앙선·대구선의 개통과 포항∼일본 서북부를 잇는 항로의 개설로 교통이 발달하고 인구가 증가하여 경주시의 상업은 급속히 발달하였다. 그러나 정기시장은 쇠퇴하였고,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유명무실화되었다. 시가의 번창과 더불어 공설·상설시장은 증가하여 1962년에는 불국사가축시장, 1963년 청과물도매시장, 1967년 경주가축시장이 개설되었다. 1970년대 이후 성도·성간·불국사 상가 등이 상설화되었고, 남흥·황오시장은 현대식 민영시장으로 변모하였다. 1982년에는 경주민영시장이 현대식 사설소매시장으로 개설되었으며, 농·수산도매시장도 1980년 이후 세 군데 개장되었다. 1985년경에는 불국사장(4·9일장)·감포·하서·안강·입실·의곡·용산·건천·아화·어일 등 10개의 5일장이 공설로 열리고 있었다. 정기시장에서는 농수산물·공산품·생활필수품·산나물·약초·소 등이 주로 거래된다. 특히, 불국사장에서는 농산물과 소, 감포장과 하서장에서는 수산물, 입실·의곡·건천장에서는 농산물, 의곡장에서는 산채, 안강장에서는 소와 약초, 아화장에서는 소가 각각 많이 거래되고 있다. 2008년 현재 공설시장 11개소(감포, 안강, 건천, 외동, 양북, 양남, 산내, 서면, 성동, 구정, 불국사상가)와 사설시장 3개소가 있다. 교통은 경부고속도로가 지나며, 국도 7호의 포항∼울산간의 도로가 지나는 등 3호·4호·20호가 지나며, 이 외에도 지방도가 곳곳에 있어 편리하다. 철도의 중앙선과 동해남부선, 경부고속선도 지난다. 관광 신라 천 년의 고도로서 찬란한 신라문화의 보고인 경주는 자연박물관이자 세계적인 고적관광도시이다. 1968년 12월에 경주고적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본격적인 관광도시로 발달하였다. ‘보는 관광지’에서 ‘즐기는 관광지’로 유도하기 위해 1974년부터 계속하여 경주관광종합개발사업이 추진되어오고 있다. 유네스코에 의해 불국사, 석굴암(1995.12.9)과 남산, 월성, 대릉원, 황룡사, 산성 등 5개의 경주역사유적지구(2000.12.2), 양동마을(2010.7.31) 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3개 사적지구(토함산·오릉·무열왕릉·월성·남산·김유신장군묘·미추왕릉·황룡사지·문무대왕릉·금강산·명활산·괘릉 등)에 대한 문화재 복원·보수·정화작업이 추진되었으며, 보문지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국제적인 위락시설을 갖춘 보문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2009년 현재 문화재는 국보 32점, 보물 82점, 사적 및 명승 2점, 사적 76점, 중요민속자료 16점, 중요무형문화재 2점, 천연기념물 3종, 기타 97점으로 총 313점이며, 전국의 약 4%, 경상북도의 약 22%를 차지한다. 문화재는 불국사와 토함산·금강·남산·서악·송화 등 5개의 국립공원지구에 집중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기암고봉(奇巖高奉)의 남산(468m)은 30여 개의 깊은 하곡(河谷)에 백여 개의 절터와 기암괴석에 새겨진 불상·석탑 등 불교유적이 밀집되어 있다. 남산 서편기슭에는 석불입상·석불좌상·경애왕릉·삼릉 등과 포석계곡·선방계곡·삼릉계곡이 곁들여져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나정과 신라의 종말을 알리는 경애왕의 비극이 서려 있는 포석정이 있다. 포석정은 진한 6촌의 시조를 모신 양산재 입구에서 1㎞남짓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신라의 종말을 알리는 경애왕의 비극이 서려 있는 포석정, 삼국시대에 조성되어 햇살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미소가 일품인 배리삼존석불, 10곳의 절터와 14체의 석불상이 있는 삼릉골, 병풍바위에 살아 있는 듯 조각되어 있는 마애삼존육존불상 등이 볼 만하다. 불무사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높이 9m, 둘레 30m의 여래상·보살상·비천상·나한상 및 탑과 사자 등 30여 종에 달하는 다양한 형상이 조각되어 있는 부처바위, ‘남산 아줌마부처’라는 별명을 가진 남산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부처인 감실석불좌상이 있다. 시내중심부 황남동의 4만여 평에 천마총을 비롯하여 20기의 능이 자리하고 있는 고분공원이 있다. 인왕동의 반월성 일대에는 첨성대·석빙고·안압지와 신라 천 년의 문화·예술·역사·유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경주국립박물관이 있다. 구황동에는 황룡사지와분황사가 있으며 서악동에는 무열왕릉과 진흥왕릉·문성왕릉 등의 고분군이 있다. 또한 토함산에는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어 한국적 불교사상과 인공미의 극치를 보여주며, 남동쪽 장항리탑정계곡에는 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 있다. 주요 명승고적으로는 나원리 오층석탑,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가장 완벽한 묘제(墓制)를 보여주는 괘릉을 비롯하여 부산성(富山城)·경덕왕릉·흥덕왕릉·원원사지·관문성·기림사 등이 있다.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의 문무왕 해중릉(海中陵)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와 마주한 해변에는 봉길해수욕장이 있다. 안강에서 서쪽으로 7㎞되는 자옥산(紫玉山) 아래 절승지에는 1572년(선조 5) 건립된 이언적을 모신 옥산서원이 있고, 외동읍 방어리와 괘릉리에 걸쳐 영지가 있으며, 현곡면 가정리에는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가 출생하고 묻힌 곳인 용담정(龍潭亭)이 있다. 빼놓을 수 없는 관광명소로는 양동이씨와 경주손씨의 동족마을인 양동민속마을이 있다. 크고 작은 150여 채의 조선시대 건축양식의 가옥과 2채의 사당·정자 15개소·학당 등이 계곡을 따라 여기 저기에 자리하여 절로 감탄을 자아낸다. 이 가운데서는 보물 3점, 민속자료 12점, 지방유형문화재 4점이 포함되어 있다.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로는 회재이언적 선생의 선친인 이번이 살던 고택인 무첨당, 회재선생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 중종이 그의 모친의 병환을 돌볼 수 있도록 배려해서 지은 집인 향단과 조선 중종 때의 청백리 우재손중돈이 분가하여 살았던 관가정이 있다. 많은 민속가옥이 남아 있는 이 마을은 안동하회마을과 더불어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17년 12월 3일 일요일

정몽주 [鄭夢周

정몽주 [鄭夢周 고려 말기 문신 겸 학자.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주자가례》를 따라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했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단심가〉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본관 영일(迎日).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초명 몽란(夢蘭)·몽룡(夢龍). 시호 문충(文忠).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다.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藝文檢閱)·수찬·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典農寺丞)·예조정랑 겸 성균박사(禮曹正郞兼成均博士)·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냈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太常少卿寶文閣應敎兼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九州]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 전공판서(典工判書)·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예의판서(禮儀判書)·예문관제학·전법판서·판도판서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對明國交)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책록되었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 2)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太宗)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도모했다. 그리고 성리학에도 밝아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사회 윤리의 기반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1392년(공양왕 4)에는 고려의 기존 법률 체계와 원나라의 법률, 1367년에 새로 제정된 《대명률(大明律)》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신율(新律)》을 편찬해 고려의 법률 체계를 재정비하려 했다. 나아가 외교와 군사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했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정의" 1337년(충숙왕 복위 6)∼1392년(공양왕 4).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개설" 본관은 영일(迎日). 출생지는 영천(永川). 초명은 정몽란(鄭夢蘭) 또는 정몽룡(鄭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운관(鄭云瓘)이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난초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정몽란이라 했다. 뒤에 정몽룡으로 개명하였고 성인이 되자 다시 정몽주라 고쳤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57년(공민왕 6) 감시(監試: 일명 국자감시로 진사를 뽑던 시험)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급제해 1362년예문관(藝文館)의 검열(檢閱)·수찬(修撰)이 되었다. 이때 김득배(金得培)가 홍건적을 격파해 서울을 수복하고서도 김용(金鏞)의 음모로 상주에서 효수되자, 김득배의 문생으로서 왕에게 시체를 거둘 수 있도록 청해 장사지냈다. 1363년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候)·위위시승(衛尉寺丞)을 역임하였고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종군하여 서북면에서 달려온 병마사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여진토벌에 참가하였다. 돌아와서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전농시승(典農寺丞)을 역임하였다.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해져서 사대부들이 모두 백일 단상(短喪)을 입었는데, 홀로 부모의 상에 여묘(廬墓)를 살고 슬픔과 예절을 극진히 했기 때문에 1366년 나라에서 정려(旌閭: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를 내렸다. 이듬해예조정랑(禮曹正郎)으로 성균박사를 겸임하였다. 태상소경(太常少卿)과 성균관사예(司藝)·직강(直講)·사성(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1372년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풍랑으로 배가 난파되어 일행 12인이 익사하였다. 다행히 정몽주는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명나라 구조선에 구출되어 이듬해 귀국하였다.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등을 거쳐, 1376년(우왕 2)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彦陽)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당시 왜구의 침구가 심해 나흥유(羅興儒)를 일본에 보내어 화친을 도모했으나 그 주장(主將)에게 붙잡혔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정몽주에게 앙심을 품었던 권신들의 추천으로 구주(九州: 현재 일본의 큐수지역)지방의 패가대(覇家臺)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건너가 교린(交隣)의 이해(利害)를 설명해 맡은 임무를 수행했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이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전공사(典工司)·예의사(禮儀司)·전법사(典法司)·판도사(判圖司)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380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雲峯)에서 왜구를 토벌하였다. 이듬해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에 올라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副使商議會議都監事寶文閣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이 되었다. 1382년 진공사(進貢使)·청시사(請諡使: 전왕의 시호를 요청하기 위해 보내는 사신)로 두 차례 명나라에 갔으나 모두 입국을 거부당해 요동(遼東)에서 되돌아왔다. 동북면조전원수로서 다시 이성계를 따라 함경도에 다녀온 뒤, 1384년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명나라는 고려에 출병하려고 세공(歲貢)을 증액하고 있었고, 5년간의 세공이 약속과 다르다 하여 고려 사신을 유배시키는 등 고려와의 국교관계를 악화시키고 있었다. 이에 모두 명나라에 봉사하기를 꺼려했으나 사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긴장상태의 외교관계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85년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우홍명(禹洪命) 등 33인을 뽑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가서 증액된 세공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의 면제를 요청해 결국 관철시켰다. 귀국 후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영원군(永原君)에 봉군되었다. 그러나 한 번 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다시 국교가 악화되는 바람에 요동에서 되돌아왔다. 삼사좌사(三司左使)·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恭讓王)을 세워 이듬해문하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영서운관사(門下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戶曹尙瑞寺事進賢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領書雲館事)로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군되고, 순충논도동덕좌명공신(純忠論道同德佐命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초(彛初)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당시 조정에서 물러난 구파정객들에 대한 대간(臺諫)의 논죄가 끊임없이 계속됨을 보고 이를 부당하다고 말했으나 오히려 탄핵을 받았다. 이에 사직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경연사 익양군충의백(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 館事經筵事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당시 풍속이 모든 상제(喪祭)에 불교의식을 숭상했는데, 사서(士庶)로 하여금 『가례(家禮)』에 의해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요청해 예속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힘썼다. 또 지방수령을 청렴하고 물망이 있는 사람으로 뽑아 임명하고 감사를 보내 출척(黜陟)을 엄격하게 했으며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에 경력과 도사를 두어 금전과 곡식의 출납을 기록하게 하였다. 서울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교육의 진흥을 꾀하였다. 그리고 기강을 정비해 국체를 확립하였으며 쓸데없이 채용된 관원을 없애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 의창(義倉)을 다시 세워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해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는 등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1391년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더했으며, 이듬해 『대명률(大明律)』·『지정조격(至正條格)』 및 본국의 법령을 참작·수정해 신율(新律)을 만들어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조준(趙浚)·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 등이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책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런 와중에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왕석(王奭)을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벽란도(碧瀾渡)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의 우익(羽翼)인 조준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이방원(李芳遠)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위급함을 고해 그날 밤으로 개성으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역으로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정몽주도 이를 알고 정세를 엿보려 이성계를 문병하였으나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살해되었다. 학문세계와 저술활동"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당시 고려의 『주자집주(朱子集註)』에 대한 정몽주의 강설이 사람의 의표를 찌를 정도로 뛰어나 모두들 놀라워했다. 그러다가 송나라 유학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이 전해지면서 그 내용이 정몽주의 강설내용과 서로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 탄복하였다고 한다. 정몽주의 시문은 호방하고 준결하며 시조 「단심가(丹心歌)」는 정몽주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후세에까지 많이 회자되고 있다. 문집으로 『포은집(圃隱集)』이 전하고 있다. 평가" 대사성(大司成)이색(李穡)은 정몽주를 높이 여겨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하였다. 정치적으로도 정몽주는 고려 말의 어려운 시기에 정승의 자리에 올라 아무리 큰일이 나더라도 조용히 사리에 맞게 처결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상훈과 추모" 1401년(태종 1)권근(權近)의 요청에 의해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修文殿大提學監藝文春秋館事益陽府院君)이 추증되었다. 1517년(중종 12) 태학생(太學生) 등의 상서(上書)로 문묘에 배향될 때 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고려의 벼슬만을 쓰고 시호를 적지 않음으로써 두 왕조를 섬기지 않았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3개의 서원에 제향되었고, 묘 아래에 있는 영모재(永慕齋),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등 몇 곳의 서원에는 정몽주의 초상을 봉안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죽이기 전에 술자리에서 그의 생각을 떠보았다고 한다. 이방원은 자신들과 함께 하자는 뜻을 담아 <하여가>라는 시를 읊었고, 정몽주는 고려에 충성하겠다는 뜻으로 <단심가>를 지어 응수했다. 제안을 거절당하자 이방원은 즉시 부하들에게 정몽주를 죽이라고 지시했다. 1337년에 경상도 영천의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난 정몽주는 학문이 높아 일찍부터 이름을 떨쳤다. 고려 말기의 대학자인 이색이 성리학의 창시자라고 인정했을 정도였다. 정몽주의 높은 학문 수준을 보여 주는 일화가 전해진다. 정몽주는 성균관 박사 시절에 유교의 경전을 강의한 적이 있는데, 고려에 있는 하나뿐인 《주자집주》를 해석해 뜻을 풀이해 주었다. 이후 중국에서 유교의 경전 여러 권이 들어와 내용을 살펴보니 정몽주의 풀이가 정확하게 맞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정몽주는 외교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공민왕이 죽은 뒤 명의 사신이 친원파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명으로 건너가 자칫 오해하기 쉬운 사건을 정확하게 해명해 외교적인 마찰을 없앴다. 이후에도 친원파들은 정몽주를 제거할 목적으로 관계가 껄끄러웠던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그는 오히려 수백 명의 포로를 데려오는 성과를 거두었다. 정승의 자리에 오른 정몽주는 어지러운 고려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다. 유학을 가르치고 관리를 양성하는 공립 학교를 세웠고, 흉년 때 가난한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는 의창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의 기운은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져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래도 정몽주는 끝까지 고려를 유지하고자 했지만, 이성계를 지지하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세력에게 죽임을 당했다. 심화" 정몽주는 처음에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권력을 잡은 이성계를 지지했다.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울 때에도 뜻을 같이 했다. 하지만 개혁에 대한 두 사람의 의견은 오래지 않아 크게 갈렸다. 정몽주는 고려 왕조 안에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이성계는 새 나라를 세워 모든 문제를 일시에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몽주는 정도전과 조준, 남은 등을 탄핵해 귀양을 보내면서 이성계 세력과 맞섰고, 위협을 느낀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1392년 3월에 선죽교 위에서 그를 살해했다. 정몽주는 말에서 떨어져 다친 이성계를 병문안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방원이 보낸 부하들에게 죽었다. 이후 오랫동안 그가 죽은 장소인 선죽교에는 정몽주의 핏자국이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 이방원, 「하여가」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정몽주, 「단심가」 -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는 정몽주의 굳센 의지가 담긴 시였지요. 이 시를 계기로 이방원은 정몽주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합니다. 그래서 부하를 보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입니다. 정몽주의 충심을 상징하는 선죽교 선죽교의 원래 이름은 선지교였습니다. 하지만 정몽주가 죽은 자리에서 붉은 대나무가 자랐다고 하여 선죽교로 불리게 되었어요. 그 대나무는 고려를 향한 정몽주의 충심을 상징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