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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5일 화요일
경주시慶州市, Gyeongju-s 2
경주시慶州市, Gyeongju-s"
경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 도시입니다. 약 천 년 동안 신라와 통일 신라의 도읍지로 크게 발전한 경주는 누구나 인정하는 거대한 보물 창고
부처님의 나라, 불국사.
751년에 불국사를 짓기 시작한 김대성은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부처님 곁으로 떠나고 말았어요. 신라 왕실은 공사를 이어받아 불국사 공사를 마무리했어요.
긴 공사 끝에 모습을 드러낸 불국사는 지금보다 웅장 했다고 전해 내려온다. 완공될 당시에는 건물이 80채가 넘었다고 해요. 지금의 불국사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불국사는 ‘부처님의 나라’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불국사는 이상적인 불교 세계를 잘 나타내고 있어요. 처음 지어졌을 때 불국사의 이름은 ‘화엄불국사’였어요.
화엄불국사(華嚴佛國寺)의 한자를 풀이하면 ‘화엄 사상에 입각한 불교 국가를 나타낸 사찰’이란 뜻. 다시 말하면 불국사는 불교 경전에 나오는 이상적인 부처님의 세상을 표현한 나라인 셈이다.
불국사에 세워진 건축물과 그 안에 있는 다양한 불상들은 다양한 불교 세계를 보여 주고 있어요. 건물 앞에 세워진 석탑과 그 속에서 발견된 유물과 각 공간을 이어 주는 작은 구조물 하나까지도 불교의 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석조 건축물"
불국사의 관문인 일주문을 지나 조금 이동하면 수많은 돌을 쌓아 만든 석대 위에 멋진 건축물이 자리하고 앞쪽으로 세련된 석조 구조물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이곳을 대석단이라고 해요. 돌을 정교하게 다듬은 아름다운 구조물이지요.
대석단은 청운교와 백운교가 있는 동쪽 구역과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는 서쪽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청운교와 백운교는 불국사를 알리는 포스터나 책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불국사를 대표하는 곳이에요. 실제로 청운교와 백운교를 보면 이름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아무리 살펴보아도 계단인데 다리를 뜻하는 이름을 갖고 있으니 말이에요. 지금은 볼 수 없지만 불국사를 지을 당시에는 청운교에서 백운교로 이어지는 아치 구조 아래쪽에 작은 물길이 있었어요. 그래서 청운교와 백운교에 다리를 의미하는 한자 ‘교(橋)’를 붙인 것
두 다리 중 아래쪽이 청운교이고 위쪽이 백운교입니다. 각각 17개와 16개, 총 33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두 다리가 끝나는 곳에는 부처님 세계로 통하는 ‘자하문’이란 문이 있어요.
한자로 자하문(紫霞門)은 ‘자주색(혹은 금색) 안개가 서린 문’이란 뜻으로, 몸에서 황금색을 발산하는 부처를 상징하지요.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에는 조금 작은 2개의 다리가 더 있어요. 연화교와 칠보교로 불리는 이 두 다리도 속세와 부처의 세계를 이어 주는 공간임. 이 두 다리에는 연꽃 문양이 조각되어 있는데 아래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위쪽 안양문 앞에서 내려다보아야 잘 보입니다.
연화교와 칠보교가 끝나는 곳에 있는 안양문은 극락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에요. 한자로 ‘안양(安養)’이란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몸을 쉬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곧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을 뜻하지요.
오늘날에는 청운교와 백운교, 연화교와 칠보교를 걸어서 불국사로 들어갈 수는 없어요. 문화재 보호를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옛날 통일 신라 사람들은 걸어서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을 거예요.
우리들은 선조들이 지은 통일 신라 최고의 석조 구조물과 부처님의 세계를 자유롭게 볼 수 있다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합니다.
수많은 걸작"
통일 신라 장인들이 빼어난 솜씨로 빚어낸 석조 건축물을 본 뒤에는 부처님의 세계를 표현한 불국사 안으로 이동해 보세요. 불국사 경내는 크게 대웅전, 극락전, 화엄경 구역으로 나눌 수 있어요.
불국사의 중심인 대웅전 구역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 삼층 석탑)을 중심으로 북쪽에 웅장한 대웅전이 서 있고 남쪽에는 자하문이 있어요. 앞에서 불국사를 부처님의 나라라고 했지요? 대웅전은 불국사의 주인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곳이에요. 그만큼 중요한 곳이랍니다.
처음 지어졌던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잿더미로 사라졌고, 지금의 건물은 조선 시대에 새로 건축한 것입니다. 그러나 건물을 받치고 있는 기단만큼은 옛 모습 그대로입니다.
대웅전 앞에는 2개의 멋진 탑,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습니다. 석가탑으로 더 잘 알려진 불국사 삼층 석탑은 통일 신라 석탑의 표본으로, 연꽃 모양의 돌조각이 새겨진 바닥 가운데에 세워져 있어요. 장식이 없어 간결한 아름다움과 각 부분의 균형이 잘 잡힌 안정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모습이랍니다.
실제로 탑을 본 친구들은 삼층 석탑이란 이름에 의문이 들었을 거예요. 3층보다 층이 많아 보였을 테니까요. 하지만 아래쪽에 있는 넓고 커다란 2층의 돌은 탑이 아니라 탑을 지탱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바닥 부분인 기단이에요.
석가탑에서 실제 석탑은 지붕 모양의 3층에서 5층 부분이지요. 그 위에 세워진 날렵한 모양의 작은 탑들은 보수 과정에서 새롭게 만든 거예요.
불국사 삼층 석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는 2층 석탑 안에서 소중한 유물이 발견되었어요. 황금으로 만든 사리함과 함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지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지금까지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오래전부터 기록을 중시했으며 뛰어난 인쇄 문화를 갖고 있었다는 걸 잘 보여 주는 유물이지요.
불국사 삼층 석탑 동쪽에는 십 원짜리 동전에 등장하는 다보탑이 있어요. 다보탑은 높이가 10.4m로 우아하고 화려한 모습의 탑입니다. 탑 아래쪽은 동서남북으로 계단이 있고, 계단 위쪽 중간 부분에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자 석상이 있어요.
이 사자상은 처음 다보탑이 세워질 당시에는 동서남북에 하나씩 총 4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때 3개가 사라지고, 하나 남은 것도 얼굴 부분이 크게 파손되었답니다. 다보탑의 윗부분은 나무를 깎아 조각한 듯 현란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보여 줍니다.
다보탑은 이전까지 신라에 세워졌던 석탑하고는 전혀 다른 형태와 구조로 세워진 탑이에요. 다보탑을 만든 장인이 신라인이 아닌 백제의 후손이라는 걸 짐작하게합니다.
극락전 화엄경구역"
불국사 서쪽은 극락전 구역입니다. 건물의 크기도 작고 웅장한 탑도 없지만 극락전에는 아미타불(금동아미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어요. 여러분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란 말을 많이 들어 보았을 거예요. 여기서 ‘나무’는 산에서 볼 수 있는 나무가 아니라 옛 인도 언어 중 하나인 산스크리트 어로 ‘무엇을 믿고 의지한다’는 뜻을 갖고 있어요.
다시 말하면 스님이나 불교 신자들이 ‘나무아미타불’이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미타불 부처님을 믿고 의지한다는 뜻이에요.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전체적인 조화와 선이 아름다운 불상으로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어요.
대웅전 뒤쪽에는 무설전이란 제법 큰 건물이 자리하고 있어요. 무설전은 스님들이 불경을 가르치고 공부를 했던 공간이에요.
무설전 뒤편이 화엄경 구역이에요. 화엄경 구역에는 관음전, 비로전, 나한전 등의 건물이 있는데, 중심은 관음전입니다. 불국사 관음전에는 자비로운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어요. 그리고 옆쪽의 비로전에는 진리와 빛의 부처님으로 알려진 비로자나불 부처님(금동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은 자비로움과 위엄이 동시에 느껴지는 독특한 불상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어요. 그 밖에도 불국사에는 불상이 모셔진 건물과 유적이 가득합니다.
빼어난 솜씨"
석굴암은 부처님을 모시기 위하여 건축한 석굴 사원으로 불국사와 동시에 짓기 시작했어요.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였습니다.
석굴암은 우리나라에서 많이 생산되는 화강암으로 만든 인공 석굴이에요.
외국의 유명한 석굴 유적지인 인도의 아잔타 석굴과 엘로라 석굴, 중국의 룽먼 석굴 등이 자연 상태의 바위를 뚫어서 만든 석굴이라면, 석굴암은 치밀하게 설계하고 계산해서 쌓은 인공 건축물입니다. 360여 개의 돌을 사용해 만든 둥근 천장과 석실의 모습은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석조 건축 기술을 잘 보여 준답니다.
석굴암에는 수많은 불상과 제자상, 보살, 팔부신중 등이 새겨져 있어요. 중국이나 인도의 석굴에 새겨진 조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정교해, 신라 장인들의 뛰어난 솜씨를 느낄 수 있지요. 그리고 전체적인 안정감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입니다.
공간마다 새겨진 의미 있는 조각상"
석굴암의 평면도를 보면 앞쪽은 사각형이고 뒤쪽은 원형의 구조로 되어 있어요. 석굴암은 크게 전실, 주실, 통로의 세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현재 유리창과 연결된 앞쪽의 사각형 부분이 전실,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앉아 있는 본존불이 모셔진 원형 부분이 주실, 전실과 주실을 이어 주는 곳이 통로랍니다.
가로 6.8m, 세로 4.8m의 전실은 현실 세계를 표현한 공간으로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이에요. 전실 벽에는 팔부신중(불법을 수호하는 8명의 신)이 좌우에 4개씩 모두 8개가 조각되어 있어요. 7개는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으나 오른쪽 벽의 하나는 일부가 파손되었어요.
전실과 주실을 잇는 통로는 폭 3.6m, 길이 2.9m입니다. 통로 입구에는 양쪽에 금강역사가 서 있어요. 부처님의 세계로 나쁜 것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금강역사는 조금은 험상궂게 생겼어요.
두 금강역사는 자세는 비슷하지만 얼굴 표정은 전혀 다르답니다. 전설에 따르면 금강역사는 힘이 코끼리의 수백 배에 이른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그리고 통로 벽면에는 무장한 4개의 사천왕이 새겨져 있습니다.
절묘한 공간미와 균형미"
석굴암의 중심은 안쪽 주실입니다. 타원에 가까운 둥근 주실은 부처의 세계를 표현한 공간이지요. 주실의 주인은 본존불입니다. 본존불은 1.8m 높이의 연꽃이 새겨진 좌대에 앉아 있고, 앉은키가 3.5m에 이르는 커다란 불상이에요.
눈을 감고 엷은 미소를 띤 입술이 돋보이는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자비심이 느껴지고, 커다란 귀와 어깨, 손, 다리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선은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입니다. 또한 어깨를 드러낸 옷과 옷 사이의 주름은 생동감이 엿보입니다. 뛰어난 예술성이 느껴지는 작품이지요.
부처의 세계답게 주실은 온통 불교와 관련된 조각과 공간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본존불을 중심으로 뒤편에는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 문양과 십일면관음보살상, 10대 제자상, 범천과 제석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등이 새겨져 있어요.
위쪽에는 10개의 감실(안으로 둥글게 판 공간)이 있고, 그 안에 8개의 조각상이 앉아 있어요. 2개는 지금 사라지고 없답니다.
주실은 완벽한 균형미를 보여 주는 공간이기도 해요. 불교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숫자인 108개의 돌로 짜맞춘 천장은 절묘한 공간미를 보여 준답니다.
신라 석불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본존불에 관해서는 최근까지도 학자들 사이에서 주장이 다르기도 했어요. 석가모니불, 아미타여래불, 비로자나불이란 설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석가여래불로 보고 있답니다.
한편 석굴암이 처음 완성될 당시에는 총 40개의 조각상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지금은 38개만 남아 있습니다. 사라진 2개의 감실 조각상에 관한 의문은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석굴암 다양한 이야기"
통일 신라가 만든 최고의 문화재입니다. 석굴암에는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도 담겨 있어요. 석굴암 주실의 본존불은 멀리 동남쪽 바다를 향해 앉아 있습니다. 지금은 석굴암 입구에 나무로 된 건축물이 세워져 볼 수 없지만, 과거에는 동짓날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이 본존불의 이마에 비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또 석굴암 본존불의 시선을 따라가면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이 잠들어 있는 대왕암이란 바다 능과 연결됩니다. 석굴암과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편안하게 지키겠다는 문무대왕의 마음이 연결되어 있는 것
석굴암 유적지는 안타까운 부분도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일제 강점기 때 복원 과정에서 시멘트를 사용한 것을 들 수 있어요. 잘못된 복원 공사로 습기가 차면서 한때 심각할 정도로 석굴 내부에 손상을 가져 왔어요.
그 이유로 오늘날 석굴암 내부를 관람할 수 없게 되었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복원 과정에서 나온 석재를 그냥 방치해 놓은 것입니다. 제대로 된 관리가 필요한 부분이지요.
석굴암과 불국사는 불교문화의 꽃입니다. 완벽한 공간 구성을 바탕으로 균형 잡힌 본존불과 조각, 환상적인 조화와 균형미를 가진 석굴암은 통일 신라의 종교, 예술, 건축, 수리, 기하학이 총망라된 유적지입니다.
청운교, 백운교, 불국사 삼층 석탑, 다보탑, 대웅전, 비로전 등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 현실과 부처의 세상이 공존하는 불국사는 우리의 자랑이자 온 인류가 보존하고 지켜 나가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한국의 탑"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탑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던 건축물입니다. 고대에는 종교적인 용도보다 군사적인 목적으로 탑을 만들었습니다. 부처님 몸에서 나온 사리를 보관하게 되면서 탑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스투파라고 하는 인도 탑에서 출발했지요. 당시에 스투파는 숭배의 대상이었고, 절도 스투파 주변에 지었답니다.
화엄사 사사자 삼층 석탑
우리나라에도 많은 탑이 있습니다. 처음 탑이 세워진 시기는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4세기부터 6세기까지는 주로 나무로 만든 목탑이 세워졌는데, 화재에 약하여 지금 남아 있는 탑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본격적으로 탑이 세워진 것은 7세기부터입니다.
이 시기의 탑은 돌로 만든 석탑이 대부분입니다. 이웃 중국은 벽돌로 만든 전탑이 많고 일본은 목탑이 많은데 비해 우리나라에 석탑이 많았던 이유는 어느 곳에서든 쉽게 돌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탑이 약 30여 기이고, 보물까지 합하면 약 200기나 됩니다. 지금 남아 있는 우리나라 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탑은 백제 무왕 때 건립한 미륵사지 석탑입니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 석탑, 경주 분황사 석탑, 감은사지 삼층 석탑, 다보탑 등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탑입니다.
포인트"
고대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것은 옛날 사람들이 남긴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물도 중요하지만 그에 따른 기록이 없다면 문화재의 진가를 정확히 알 수 없겠지요. 그래서 과거를 기록한 자료들은 소중한 문화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고대 역사와 문화에 관한 책 중 대표적인 것으로 고려 시대에 쓰여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가 있습니다. 《삼국유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문서로 고려의 일연 스님이 썼습니다. 《삼국유사》는 총 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3, 4, 5권을 한 권의 책으로 구성한 조선 시대 판본이 남아서 전해지고 있지요.
《삼국유사》에는 고대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재, 주요 인물까지 다양한 내용이 실려 있으며, 비교적 정확한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고려 때 학자인 김부식이 편찬한 역사책입니다. 《삼국사기》는 총 9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분류하면 50권에 달합니다. 《삼국유사》보다 약 140년가량 먼저 간행되었으며 고려 인종 때 처음 인쇄한 이후 여러 차례 인쇄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최초로 인쇄된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불교와 우리 문화
불교는 기독교, 이슬람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입니다.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에 인도에서 생겨났어요.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이웃 나라로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게 되었지요.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것과 관련해서는 서기 48년에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석탑을 싣고 바다 건너 가락국에 도착하자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 그녀를 왕비로 맞아 아이를 10명이나 낳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요.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시기는 4세기 후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삼국 가운데 불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는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고구려였습니다. 소수림왕 2년인 372년에 전해졌지요. 불교가 백제에 전래된 시기는 고구려보다 조금 늦은 384년 침류왕 때였습니다.
신라에는 휠씬 늦은 527년, 법흥왕 때 불교가 공인되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불교가 전래되었지만 정식 경로로는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보다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불교를 매우 중시했습니다. 삼국 시대에 불교는 종교인 동시에 통치 이념이었고, 문화 발전의 토대가 된 것은 물론, 사람들의 생활 깊숙이 영향을 끼쳤습니다. 삼국 시대 이후 통일 신라를 거쳐 고려 시대까지 약 천 년 동안 왕조와 백성들의 삶과 함께했지요.
따라서 고대 우리나라에 세워진 수많은 건축물과 주요 문화재, 소중한 기록들은 하나같이 불교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문화재는 불교와 연관이 없는 것도 있지만 많지 않습니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던 조선 시대에는 사찰이 파괴되고 승려들이 많은 피해를 받았지요. 그런 중에도 전국 사찰에서는 많은 문화재가 만들어졌습니다. 우리 고대 문화는 곧 불교문화라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불국사와 석굴암 답사"
문화재를 볼 때는 저마다 좋아하는 문화재도 다르고 접근 방법도 달라서 방법이나 코스를 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불국사와 석굴암을 자주 가본 경험으로 관람 방법을 추천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볼거리가 많아서 먼저 어느 곳을 볼지 결정한 뒤 관람을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유롭게 천천히 불국사를 둘러본 뒤 석굴암을 감상하는 것을 권합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불국사와 석굴암은 모두 현세와 부처님의 세계를 표현한 공간이지만 다양한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는 불국사를 둘러본 뒤 석굴암을 보아야 부처님의 세계를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둘째, 석굴암은 전실 앞을 유리문으로 막아 놓아서 안으로 들어가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1~2시간이면 충분히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다양한 문화재가 많은 불국사를 여유롭게 둘러본 다음 천천히 석굴암을 보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불국사는 볼거리가 무척 많아서 자세히 보아도 한두 곳은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고 싶은 곳을 미리 수첩에 적어 와 확인하면서 보아야 원하는 것을 다 보고 돌아갈 수 있습니다.
"불국사 일주문 ➞ 천왕문 ➞ 대석단(청운교, 백운교와 연화교, 칠보교) 구역 ➞ 극락전(안양문, 극락전) 구역 ➞ 대웅전(대웅전, 다보탑, 불국사 삼층 석탑, 좌경루와 범영루) 구역 ➞ 무설전 ➞ 관음전 ➞ 비로전 ➞ 석굴암"
경주 역사 지구에는 조각, 탑, 왕릉, 산성 등을 비롯해 신라 시대의 뛰어난 불교 유적과 생활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7세기부터 10세기 사이의 유적이 많으며 이들 유적을 통해 신라 고유의 탁월한 예술성을 확인할 수 있다. 경주는 1,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신라의 수도로 신라인의 생활 문화를 잘 보여 준다.
거대한 야외 박물관으로 알려진 남산을 중심으로 도시 여러 곳에 다양한 문화재가 흩어져 있습니다. 경주에 이토록 다채로운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이유는 신라가 긴 세월 동안 도읍지를 한 차례도 옮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에는 오랫동안 한 나라의 수도였던 도시가 많습니다. 그리스 아테네, 이탈리아 로마, 중국 시안, 일본 교토 등은 분명 경주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입니다. 하지만 산 전체가 야외 박물관을 연상시키는 유적지가 있는 곳은 경주가 유일합니다.
수많은 문화재와 유적이 경주 전체에 흩어져 있어 5개 지역으로 분류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경주의 토함산에는 독립된 세계 문화유산인 불국사와 석굴암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이자 고대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매력적인 도시, 경주로 떠나 볼까요?
천년 고도, 경주
경주는 기원전 57년부터 서기 935년까지 992년 동안 신라와 통일 신라의 도읍지였습니다. 삼한 시대 진한의 12국 중 사로국이 있던 곳이었고, 신라 시대에는 서라벌(계림)로 불렸습니다. 고려 시대부터 ‘경주’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지요.
경주는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 지역입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전성기 때는 경주에 주택이 약 18만 호나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경주의 주택이 10만 호가 조금 넘는 것에 비교하면 얼마나 커다란 도시였는지 짐작할 수 있겠죠? 놀랍게도 초가집이 단 한 채도 없었고, 황금으로 장식된 집이 자그마치 35채나 있었다고 합니다.
경주 역사 유적 지구는 크게 다섯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가장 넓은 면적에 많은 유적지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는 곳은 불교문화의 보고로 알려진 남산 지구입니다.
그리고 왕조의 궁궐 터가 자리한 월성 지구, 신라의 왕들이 잠들어 있는 고분군이 있는 대릉원 지구, 신라 불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황룡사 터와 분황사 터가 자리한 황룡사 지구, 천년 고도를 지키는데 크게 기여한 산성 지구가 있습니다.
신라의 흥망을 지켜본 남산
신라는 남산에서 시작해서 남산에서 끝을 맺었다고 할 수 있어요. 남산 서쪽 기슭 나지막한 언덕에는 과거에 우물이 있었던 나정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나정은 신라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박혁거세의 탄생지로 알려진 곳이랍니다. 신라가 생기기 전 경주 근처에는 6개의 마을로 이루어진 사로국이란 나라가 있었어요.
어느 날 6개 마을의 촌장들이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백마를 발견하였지요. 이상하게 여겨 그곳으로 가 보니 커다란 알이 하나 있었는데, 알을 깨뜨리자 그 안에서 사내아이가 나왔습니다.
이 사내아이가 훗날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로, 박처럼 생긴 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박(朴)으로 하고,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혁거세로 지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이곳에 우물은 없고, 박혁거세의 탄생 신화가 적힌 비석만 남아 있습니다.
나정 남쪽에는 신라의 멸망을 상징하는 포석정이 있어요. 신라의 왕들은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연회를 즐겼다고 해요. 포석정에는 폭이 30cm쯤 되고 길이가 22m쯤 되는 물길이 있어요. 구불구불하게 구부러진 물길을 따라 술잔이 돌게 만들었지요. 술잔이 멈추는 곳에 앉은 사람은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지요. 이 놀이를 ‘유상곡수연’이라고 해요.
그러나 이렇게 풍류를 즐기는 풍조는 신라를 쇠약하게 만들었고, 결국 신라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연회를 즐기다 후백제 왕 견훤의 침략을 받고 최후를 맞았다고 전해집니다. 천 년 동안 이어 온 신라를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만든 곳도 남산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야외 박물관, 남산
경주 남산은 동서 4km, 남북 10km에 달하는 타원형 모양의 산으로, 커다란 야외 박물관이라고 불리고 있어요. 신라에 불교가 전래되기 전부터 사람들은 남산을 성스럽게 여겼습니다. 불교가 전래되자 남산을 불교 성지인 수미산으로 여기며 많은 절과 불상, 불탑을 세우기 시작했고,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야외 박물관이 만들어졌지요.
남산에는 발굴된 유적지와 유물이 너무 많아 기관마다 발표하는 자료가 다르지만, 경주시의 자료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지금까지 남산에서 발견된 왕릉은 13기, 절터는 150여 곳입니다. 그리고 불상이 120여 점에 석탑은 96개, 석등도 22기나 됩니다. 그 밖에도 각종 유적지와 유물이 수없이 많습니다.
남산은 크게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독특한 문화재가 곳곳에 흩어져 있고, 매혹적인 유적지와 유물이 많아서 다 둘러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주요 유적지와 유물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한 곳
문화재가 보존"
남산 동쪽 지역은 서쪽에 비해 유적지도 적고 분포된 유물도 적습니다. 그러나 유물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펴 보면 서남산 지역에 있는 유물보다 세련되고 보존 상태가 뛰어난 문화재가 더 많습니다.
동남산에 남아 있는 주요 유물은 석탑과 불상으로, 작품성과 문화재의 가치가 높은 것으로는 보리사에 모셔진 미륵곡 석불좌상(석조여래좌상), 칠불암 마애석불,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을 꼽을 수 있습니다.
보리사라는 아담한 절의 왼쪽 언덕에서 세련된 자태로 토함산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미륵곡석불좌상은 보존 상태가 무척 좋은 불상입니다. 이전의 신라 불상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섬세한 선이 돋보이지요.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에 빠져 있는 듯한 표정을 하고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의 불상으로 신라 불상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작품입니다.
남산에는 많은 유적지와 유물이 있지만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유물은 칠불암 마애석불 하나뿐입니다. 칠불암 암자 옆 커다란 2개의 바위에 모두 7기의 불상이 새겨져 있지요.
병풍바위라는 곳에 새겨진 3기의 불상은 1~2.7m 크기로 삼존불이라고 하고, 바로 옆 사각형 바위에는 동서남북으로 4기의 사방불이 새겨져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모습의 칠불암 마애석불 중 화려한 연꽃 위에 앉아 미소를 머금고 있는 삼존불의 여래상과 보살상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칠불암 위쪽에는 남산에서 가장 신비로운 불상인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이 토함산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낭떠러지 위의 바위를 깎아 만든 이 불상은 머리에 삼면 보관을 쓰고 있습니다. 조각이 세련되고 섬세한 것은 물론, 이른 아침과 안개가 많은 날이면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신비한 불상
불교 문화재 서남산"
남산 서쪽 지역은 발길을 옮기는 곳마다 개성이 강한 유적지와 유물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에요. 주요 유적지는 계곡과 산 능선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서남산에서는 우선 삼릉 계곡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습니다. 삼릉 계곡의 입구 부분에는 세 명의 왕이 잠들어 있는 능과 초기 불교 미술을 잘 보여 주는 배리석불입상이 있어요.
이름도 특이한 배리석불입상은 가운데에 부처님이 있고 양쪽에 보살상이 서 있습니다. 세련미가 없고 둔탁한 모양새로 보아 신라 초기 불상으로 보고 있지요. 신라 초기 불교 미술의 수준을 가늠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물입니다.
삼릉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 산길을 따라 이동하면 목과 손이 잘린 불상을 비롯하여 마애관음보살입상, 석불좌상, 선각육존불 등과 만나게 됩니다. 이 불상들과 눈인사를 마치고 정상을 향해 걷다 보면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삼릉 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애석가여래좌상은 높이가 6m로 남산에 있는 불상 중 가장 큽니다. 자연 바위에 새겨진 거대한 불상으로 통일 신라 후기 때 완성한 작품입니다. 선으로 새겨진 몸은 약간 뒤로 젖힌 모습이고, 얼굴은 입체로 새겨 놓았습니다. 가느다란 눈으로 가파른 계단을 올라온 사람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지요. 지금도 불심 깊은 사람들이 찾아와 가슴속에 품고 있는 이야기를 마애석가여래좌상에게 전하고 있답니다.
마애석가여래좌상에서 능선을 따라 동남쪽으로 이동하면 균형이 잘 잡힌 모습의 삼층 석탑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용장사곡 삼층 석탑입니다. 용장사곡 삼층 석탑은 옛 신라 장인의 멋과 지혜가 동시에 느껴지는 탑입니다.
낭떠러지 끝에 세워진 탑인데도 불구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며 자연과의 조화를 소중하게 생각했던 우리 조상들의 정신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또한 건너편 산과 절벽을 배경으로 서 있는 자태는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아래쪽에는 마애여래좌상과 아주 특이한 모양의 용장사곡 석불좌상이 있습니다. 3층짜리 대좌 위에 세워진 1m 길이의 불상은 안타깝게도 머리 부분이 없습니다. 하지만 신라는 물론이고 백제와 고구려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을 간직하고 있다.
신라 정치 중심"
천년 고도의 정치 중심지로, 초기 유적지부터 화려한 유적지까지 신라의 발전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곳입니다. 월성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지는 신라 왕조를 이끌었던 김(金)씨의 시조 김알지가 태어난 숲인 계림이지요. 이 숲의 나뭇가지에 매달린 금 궤짝의 알에서 태어난 아기가 바로 김알지라는 건국 신화가 전해지고 있어요.
신라와 통일 신라 왕조는 초대왕인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마지막 왕인 경순왕까지 모두 56명의 왕이 나라를 다스렸는데 박씨, 석씨, 김씨가 돌아가면서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그중 가장 많은 왕을 배출한 것은 김씨입니다. 그리고 계림의 서쪽에는 내물왕의 능을 중심으로 3기의 왕릉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계림 남쪽에는 신라 최고의 문화 공간이었던 궁궐 유적지 월성이 있습니다. 이곳 터의 모양이 초승달처럼 생겼다고 해서 월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요.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월성은 남천이 흐르는 남쪽을 제외한 나머지 동쪽, 서쪽, 북쪽으로 인공 호수인 해자를 만들어 궁궐을 방어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 흙과 돌을 섞어 성벽을 쌓았습니다. 성벽 유적지는 지금도 남아 있다.
옛 신라의 궁궐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는 임해전지(임해전이 있던 터)가 있습니다. 임해전은 삼국을 통일한 30대 왕인 문무왕이 건설한 궁궐로, 왕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왕자가 머물렀던 동궁이었어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고 한편으로 당나라에 통일 신라의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건설한 궁궐이었지요.
임해전은 바다에 접해 있는 건물이란 뜻을 갖고 있어요. 육지 한가운데 바다라니 조금 생뚱맞지요?
신라 사람들이 임해전에 접해 있던 큰 연못을 바다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고 있어요. 바다를 좋아했던 문무왕은 자신이 죽으면 시신을 바다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하기도 했어요. 훗날 문무왕이 죽자 유언을 받들어 경주에서 가까운 동해 감포 앞바다에 수장했지요.
임해전은 동궁 외에도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희귀한 새와 짐승을 기르는 정원으로 사용되었고, 왕이 신하들과 연회를 즐기던 장소이기도 했어요. 임해전지는 조선에 이르러서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폐허가 된 임해전지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면서 조선 시대에는 임해전지의 연못을 ‘안압지’라고 불렀답니다.
임해전지는 발굴 과정에서 통일 신라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어요. 연못 속에서 발굴된 유물은 실제로 왕족과 백성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국립 경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천문대, 첨성대"
첨성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 여왕이 세운 건축물입니다. 첨성대에 관해서는 여러 곳에 기록이 남아 있지만 용도가 명확하게 밝혀진 자료는 없습니다.
첨성대는 월성과 계림 근처 사방이 확 트인 평탄한 곳에 우뚝 서 있습니다. 높이는 9.17m로 우물이나 호리병처럼 생긴 특이한 모습이에요.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지그재그로 쌓아 지었지요. 건물 가운데에는 정사각형의 창문이 있고, 꼭대기에는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긴 화강암이 2단으로 쌓여 있어요.
창문 아래쪽은 흙이 채워져 있어요. 지진이나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흙을 쌓은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첨성대는 별을 관측했던 장소로 알려져 있어요. 창문을 통해 별을 관측한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꼭대기에서 관측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요. 그래서 첨성대 안쪽에는 꼭대기까지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해요.
첨성대가 별을 관측했던 곳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건물의 과학적인 구조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어요. 첨성대를 짓는 데 사용된 벽돌의 개수가 362개인데(세는 방법에 따라 365개라는 주장도 있어요) 이 숫자는 1년을 음력으로 사용했던 당시 날짜와 같습니다.
첨성대의 몸통 부분을 27단으로 쌓았는데, 창문의 3단을 빼고 창문 아래쪽까지가 12단, 창문 위쪽이 12단으로, 24절기를 뜻한다고 합니다. 첨성대를 기념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학자는 제례 의식을 올렸던 곳이라고 주장하기도 해요.
하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사료와 기록에 의해, 별자리를 관측하여 계절과 절기를 알아보고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정보를 얻던 천문 관측대라는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왕가의 휴식처"
경주 시내를 다니다 보면 평지에 커다란 동산 모양의 무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어요. 경주의 왕릉은 마치 작은 산을 연상시킬 정도로 커서 예로부터 ‘조산’이라고 불렸지요.
경주에는 옛 신라와 통일 신라를 다스렸던 왕과 왕비, 귀족이 잠들어 있는 무덤이 250여 기나 있어요. 그중 거대한 봉분을 갖춘 왕릉은 23기이고, 나머지 무덤은 일반 묘처럼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지요.
신라 왕들의 무덤이 모여있는 곳을 대릉원 지구라고 해요. 황남리 고분군, 노동리 고분군, 노서리 고분군, 오릉 등이 대릉원 지구에 속하지요.
가장 흥미로운 왕릉으로는 천마총을 꼽을 수 있어요. 공식 명칭은 155호 고분이지만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진 천마도가 왕릉에서 발견된 이후 천마총이라 불리고 있어요. 천마총에는 많은 유물이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어요.
천마총에서는 금관과 천마도장니를 비롯하여 장신구와 무기, 유리병, 그릇 등 총 1만 1500점에 달하는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발굴 현장에 참여했던 학자들을 놀라게 만들 정도였지요.
천마총에서 발견된 유물은 고대 미술을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어요. 천마총에서 발견된 유리병과 생활용품을 통해 신라가 중국뿐만 아니라 서양과도 교역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유물을 감상하려면 천마총 전시장도 좋지만 국립 경주 박물관에서 진품을 보는 것이 좋답니다.
천마총 옆에는 부부가 함께 잠들어 있는 황남대총이 있습니다. 황남대총에서는 황금으로 만든 장신구를 비롯한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신라를 상징하는 황룡사"
경주는 도시 전체가 불교 유적지로 가득합니다. 대표적인 불교 유적지로 황룡사 지구를 빼놓을 수 없지요. 지금은 건물 터와 목탑이 세워졌던 흔적만 있지만 황룡사는 신라에서 매우 크고 중요한 절이었어요. 신라 24대 왕인 진흥왕은 553년에 황룡사 터에 궁궐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궁궐을 짓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땅에서 황룡이 나타났어요. 그 뒤 궁궐 공사를 멈추고 절을 짓기 시작했지요. 17년의 공사 끝에 모습을 드러낸 황룡사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웅장한 모습의 절이었다고 해요.
황룡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황룡사 구층 목탑이에요. 황룡사 구층 목탑은 선덕 여왕이 세웠다고 해요. 바닥 면적이 약 500m2, 한쪽 면의 길이가 22.2m에 높이가 75m나 되는 거대한 목탑이었지요. 이 거대한 목탑을 짓는 데는 백제의 장인 아비지가 크게 기여했어요.
당시 신라는 건축은 물론이고 생활 수준이 백제와 고구려에 못 미치는 상태였어요. 그래서 백제와 고구려에 부탁하여 뛰어난 장인들을 불러와야 했지요.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는 서로 적대 관계에 있었지만 모두 불교를 믿고 있어서 절이나 탑의 건축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답니다.
황룡사 구층 목탑은 1238년 몽골에 의해 잿더미로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찬란했던 옛 영화를 엿볼 수 있는 드넓은 터와 받침석만 남아있어요. 이곳에서 발굴된 4만여 점의 유물들은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황룡사 옆에는 또 다른 절 분황사 터가 있어요. 분황사 역시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졌지만, 모전 석탑이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답니다. 모전 석탑은 돌을 벽돌처럼 깎아 쌓아 만든 탑으로 선덕 여왕 때 세워졌어요. 바위를 쌓아 만든 바닥 위에 마치 건물처럼 생긴 독특한 3층 탑이 서 있지요. 처음 세워졌을 때는 지금과 모습이 달랐다고 해요.
몇 층짜리 탑이었는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남아 있는 탑으로 볼 때 7~9층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분황사 탑은 동서남북으로 굴방이란 문이 달려 있어요.
문 입구에는 각각 2기의 인왕상 조각이 있고, 앞쪽 네 모퉁이에는 돌사자가 세워져 있어요. 분황사 탑에서는 금과 은으로 만든 바늘과 가위 등이 발굴되었는데 이 유물들도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답니다.
천년 고도"
초기 신라는 가야, 백제, 고구려, 일본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작은 나라였습니다. 사방으로 국경을 마주했던 신라는 주변 나라들로부터 영토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여러 곳에 성을 쌓아야 했습니다.
경주에도 궁궐을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월성과 경주로 진입하는 적군을 막기 위해 만든 산성이 있습니다.
궁궐 주변에 흙과 돌로 쌓은 월성은 현재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산성 유적지로는 동쪽의 명활산성, 서쪽의 서형산성, 남쪽의 남산성, 북쪽의 북형산성, 북서쪽의 부산성 등이 있지요.
경주에 있는 산성도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쌓았어요. 짧게는 수백미터에서 길게는 10km가 넘는 산성들은 모두 방어를 목적으로 돌을 쌓아 만들었지요. 남아 있는 산성 가운데 보존 상태가 좋은 곳은 경주 동쪽에 쌓은 명활산성이에요.
명활산성은 산마루를 따라 쌓았는데 전체 둘레가 약 6km에 달합니다. 이중 구조로 되어 있으며 성벽의 높이가 지형에 따라 5~10m로 다르답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것은 수백 미터에 불과하지만 신라의 토목 수준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
골품 제도
신라에는 골품 제도라는 아주 특이한 신분 제도가 있었습니다. 골품 제도에 따라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었지요. 골품 제도에 의하면 신분이 혈통에 따라 8등급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왕족은 성골과 진골이었고 그 아래로 6두품부터 1두품까지의 신분이 있었는데, 숫자가 클수록 신분이 높았습니다. 3두품에서 1두품까지는 평민층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구분이 점차 사라졌지요.
최고 신분인 성골은 부모가 모두 왕족 출신인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두 번째로 높은 신분인 진골은 아버지와 어머니 가운데 한 사람이 왕족인 경우에 그 자녀들이 누릴 수 있는 신분이었답니다.
그리고 신라에 의해 멸망하거나 항복해 온 왕족에게도 진골 신분을 주었습니다. 6두품은 왕족이 아닌 사람이 가장 높이 오를 수 있는 신분이었습니다.
신라 초기와 중기까지는 성골 출신만 왕위를 이을 수 있었습니다. 진골 출신으로 최초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 29대 무열왕 김춘추였지요. 이후 진골 출신도 많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신라의 골품 제도는 왕위 계승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철저하게 적용되었습니다.
관직에 오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는 집의 규모와 재산의 정도까지 엄격하게 제한되었습니다. 골품 제도는 옷과 장신구, 가정에서 사용하는 그릇까지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었던 폐쇄적인 신분 제도였지요. 골품 제도는 국가 발전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기도 했습니다.
선덕 여왕"
신라 최초의 여왕은 진평왕과 마야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선덕 여왕입니다. 선덕 여왕은 신라 제27대 왕으로 15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선덕 여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는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있지만 탄생 시기와 가족사에 관해서는 많은 부분이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떤 문서에는 맏딸로 기록되어 있고, 둘째 딸로 기록된 문서도 있습니다.
선덕 여왕은 왕이 된 초기에 백성의 궁핍한 삶을 보살피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후에는 당나라의 선진 문물과 불교를 적극적으로 들여와 백성들의 믿음을 얻는 동시에 백성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지요.
선덕여왕은 동양 최대 규모인 황룡사 구층 목탑을 세우고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시설인 첨성대를 세우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선덕 여왕의 가장 훌륭한 업적은 백성들을 가난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해서 노력한 정책입니다. 약한 국력을 극복하기 위해 발휘한 뛰어난 외교력도 업적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외교와 군사력을 외국의 세력에 의존한 부분은 선덕 여왕의 잘못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선덕 여왕은 백성을 위하여 노력한 최초의 여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화백 회의
화백 회의는 골품 제도와 함께 신라의 독특한 제도로, 신라의 중앙 관료들이 모여 국가의 중요한 일을 토론하여 결정하는 제도였습니다. 경주 근처에 살던 여섯 촌장들이 모여 중요한 일을 의논하던 제도에서 시작되었지요. 물론 화백 회의에는 진골 이상의 지위를 가진 왕족들만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왕족 회의인 셈이었지요.
화백 회의를 대표하는 인물은 신라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이었습니다. 초기 상대등은 모두 왕족 출신인 성골이 맡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진골 출신도 상대등에 올랐습니다. 상대등은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왕의 지휘와 감시 아래 놓여 있었지만, 왕이 세상을 떠나면 왕위 계승 문제를 비롯하여 전쟁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일부터 중요한 건축물을 세우는 일까지 나라의 중요한 일을 실질적으로 결정했습니다.
신라의 상대등과 비슷한 일을 했던 관직은 고구려와 백제에도 있었습니다. 고구려에는 대대로라는 관직이 있어 왕과 함께 나랏일을 처리했지요. 백제에는 상좌평이란 관직이 있어 나랏일을 총괄했습니다. 상좌평은 왕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투표로 선출했습니다.
국립 경주 박물관
옛 신라의 궁궐이 있던 월성 근처에는 국립 경주 박물관이 있습니다. 국립 경주 박물관은 신라와 통일 신라는 물론이고 이전의 다양한 문화와 유물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곳입니다. 신라와 통일 신라의 문화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둘러보아야 할 곳이지요.
국립 경주 박물관은 실내와 야외 전시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실내 전시장은 고고관, 안압지관, 미술관, 특별 전시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국립 경주 박물관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고고관에는 선사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빗살무늬 토기, 경주 왕릉에서 발굴된 금관, 벽화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고고관 서쪽에는 임해전지에서 발굴된 유물만을 따로 모아 놓은 안압지관이 있습니다. 안압지관에는 나무로 만든 배와 여러 가지 생활용품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세련되고 화려한 장신구를 비롯하여 황금으로 만든 못까지 볼 수 있지요.
안압지관에 전시된 유물들을 보면 신라의 왕족들이 얼마나 화려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미술관에는 신라와 통일 신라 시대에 그려진 그림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별 전시관은 기획 전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야외 전시장에는 성덕 대왕 신종(에밀레종) 등 매혹적인 유물들이 박물관 야외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남산 지역에서 발굴된 여러 불상과 지금은 물속에 잠겨 버린 고선사 터에 남아 있던 고선사 터 삼층 석탑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경주 역사 유적"
경주 역사 유적 지구를 살펴보려면 무엇보다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역도 넓고 보아야 할 문화재도 많아서 일정을 여유롭게 잡아야 신라 문화의 진면목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일정이 짧다면 먼저 지도를 펼쳐 놓고 이동순서를 정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이동 경로를 정한 다음에는 각 지역에 관하여 미리 안내 책자를 살펴보고 둘러볼 것을 권합니다.
여러 차례 방문한 경험을 바탕으로 간단하게 추천하는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국립 경주 박물관에 가서 주요 유적지에 관한 정보를 얻고 유물을 관람한 뒤 걸어서 월성과 계림, 대릉원, 임해전지, 황룡사 터 등을 둘러보는 것이 좋습니다.
옛 시가지와 궁궐 유적지를 둘러본 뒤 시간이 허락되면 남산에 올라 불상들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남산을 답사할 때는 체력에 자신이 있다면 아침 일찍 동쪽 칠불암 방향으로 산에 올라 용장사 터를 거쳐 삼릉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서 보는 것이 좋습니다. 반나절 정도밖에 시간이 없다면 서남산의 삼릉 계곡 지역을 둘러볼 것을 추천합니다.
국립 경주 박물관 ➞ 월성, 석빙고 ➞ 계림 ➞ 첨성대 ➞ 황남리 고분군(천마총) ➞ 노서리, 노동리 고분군 ➞ 임해전지 ➞ 황룡사 터와 분황사 터 ➞ 나정, 포석정 ➞ 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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