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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8일 금요일
케임브리지. University of Cambridge"
케임브리지 Cambridge. Universit
런던에서 북동쪽으로 90km 떨어진, 소택(沼澤) 지방 바로 남쪽에 있다. 시의 대부분은 우즈강(江)의 지류인 캠강의 동안에 있다. 예로부터 런던과 북부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중세에는 스타브리지 시장도시로 알려진 상업중심지였다. 지금은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소재지로 ‘영국 유일의 참다운 대학도시’로 일컬어지며, 도시의 중앙을 흐르는 캠강 양안에 역사를 자랑하는 트리니티·킹스·퀸스 등을 비롯한 수십 개의 칼리지가 모여 있다.
중세의 역사적인 건물과 녹지대로 이루어졌다. 가장 유명한 건물은 킹스칼리지의 교회로 중세 건축의 대표작이다. 또 피츠윌리엄 박물관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시설이 있다. 산업은 라디오·전자공학·인쇄·기기제작 등 대학과 관계가 있는 것이 많고, 기타 제분·아스팔트·시멘트 제조공업도 이루어지며,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서점도 몇몇 있다.
옥스퍼드와 더불어 영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학이 있는 도시이다. 케임브리지의 역사는 로마인이 캠 강에 외적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케임브리지의 어원은 '캠 강(River Cam)에 다리(bridge)를 놓는다'에서 유래하였다.
1209년에 발생한 옥스퍼드 대학 내의 소요로 인해 많은 학자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대학을 세웠고, 14세기에는 위클리프 사건으로 옥스퍼드 대학이 이교 혐의를 받게 되자 학생들도 케임브리지 쪽으로 많이 옮겨 오면서 케임브리지의 위상은 점점 높아지게 되었다. 특히 하이테크놀로지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어 노벨상 수상자 81명을 배출할 정도의 명문 대학으로 성장했다.
케임브리지는 옥스퍼드와 마찬가지로 걸어서 구경할 수 있는 작은 도시이므로 굳이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아도 된다. 킹스 퍼레이드 거리(King's Parade Street)와 트리니티 거리(Trinity Street)를 따라 일직선상으로 퀸스 칼리지, 킹스 칼리지, 클레어 칼리지, 트리니티 칼리지, 세인트 존스 칼리지가 왼편에 연달아 위치하고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은 대부분 입장료를 받는다.
대학 구경을 마치고 나면 아늑한 녹지대가 있는 캠 강변으로 가자. 이곳에서 보는 케임브리지의 단과대학 풍경이 아주 아름다우며 케임브리지의 아늑한 중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여름에 이곳을 방문한다면 캠 강의 펀팅에도 참여해 볼 만하다. 6~10인용 나무배를 타고 긴 막대기로 노를 저으면서 캠 강을 가로지르면 그간의 피로가 말끔하게 풀린다.
퀸스 칼리지(Queen's College)
1448년 헨리 6세의 왕비인 마거릿이 설립한 후 1475년 에드워드 4세의 왕비인 엘리자베스가 완성시킨 대학이라 퀸스 칼리지라 불린다. 케임브리지에서 캠퍼스가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대학 뒤에 있는 캠 강을 가로지르는 목조 다리는 수학의 다리(Mathematical Bridge)이다. 190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축되었다.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
1441년 헨리 8세가 설립한 단과대학. 대학 내에 있는 킹스 칼리지 교회(King's College Chapel)는 1446년부터 거의 100년 동안 국왕 5명(헨리 2세~헨리 8세)의 손을 거쳐 완성한 화려한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다. 특히 성당 천장에 장식된 부채꼴 모양의 조각 장식은 튜더 왕조의 석공 대가 4명이 현란한 솜씨로 완성해낸 작품으로,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다. 재단에 있는 루벤스의 그림 '동방박사의 경배(Adoration of the Magic)'도 놓치지 말고 감상하자. 참고로 킹스 칼리지의 성가대는 매년 크리스마스 공연 때 BBC 방송을 통해 전국에 생방송될 정도로 유명하다.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
헨리 8세가 1546년에 설립한 트리니티 대학은 케임브리지에서 가장 규모가 큰 대학이다. 30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으며, 러셀이나 바이런 같은 유명인사도 이곳 출신이다. 특히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인 뉴턴이 1661년에 이 대학을 다녔고 그 후 33년 동안 교수로 재직하면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정립했다. 찰스 황태자도 이곳 출신이다. 중앙 정원에 있는 분수는 바이런이 나체로 목욕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세인트 존스 칼리지(Saint John's College)
1511년에 세운 단과대학. 이 대학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1831년에 베네치아의 탄식의 다리(Bridge of Sighs)를 모방하여 만든 탄식의 다리이다. 영국의 시인 워즈워드도 이 학교 출신이다.
영국의 동부 케임브리지셔에 있는 대학도시. 로마 시대로부터 취락이 있었고, 또 1068년에 윌리엄 1세(William I, the Conqueror, 재위 1066~87)가 성당을 쌓은 요지였다. 12세기 초기의 수도원 주위에 있었던 학교기숙사가 발전하여 1284년에 최초의 컬리지인 피터하우스가 생기고, 14~16세기에는 다수의 컬리지가 첨가되었다. 유명한 건조물로는, 선상(扇狀) 볼트와 24개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을 갖고 있는 화려한 킹즈 컬리지 예배당(1446~1515) 외에 트리니티 컬리지(16세기), 퀸즈 컬리지(16~17세기), 노르만 시대의 원당인 홀리세파르카 성당(1103년경), 고대동양에서 근세에 이르는 중요한 수집품을 소장한 피츠윌리엄 미술관 등이 있다.
1) 영국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셔 주의 주도. 시의 대부분은 우즈 강의 지류인 캠 강 동안에 있다. 예로부터 런던과 북부 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지금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소재지로 '영국 유일의 참다운 대학 도시'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은 1217년 처음으로 창설되어 1318년 요하네스 2세로부터 종합 대학의 인증을 받았다. 도시의 중앙을 흐르는 캠 강 양안에 역사를 자랑하는 트리니티, 킹스, 퀸스 등을 비롯한 수십 개의 칼리지가 모여 있다. 전자 공학·인쇄·제분·시멘트 제조 등의 공업이 성하다.
2) 미국 매사추세츠 주 동부에 있는 도시. 찰스 강을 사이에 두고 보스턴과 마주한다. 1630년 매사추세츠베이 사(社)가 뉴타운이라는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며, 1636년 하버드 대학이 창설된 후 1638년 영국의 대학 도시인 케임브리지의 이름을 따서 지명을 붙였다. 미국의 인쇄·제본업의 발상지이며, 하버드 대학, 매사추세츠 공과 대학 등이 있는 미국의 과학·산업 연구의 중심지이다. 화학·전기 기구·인쇄·출판·금속 등의 공업이 성하다.
University of Cambridge, ─大學校"
영국 및 영어권 지역에서 옥스포드 대학교 다음으로 가장 오래된 대학교이자 전 세계에서 7번째로 오래된 대학교이다. 91명에 달하는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이 대학은 영국의 대학평가기관 'QS(Quacquarelli Symonds)'가 발표한 세계대학순위(QS World University Rankings)에서 2010년에 이어 2011년 2년 연속 세계 1위로 선정되었다. 영국에서 연구를 선도하는 20개 명문대학으로 구성된 러셀 그룹(Russell Group) 회원 대학이다. 또한 1985년 설립된 유럽의 선도적 대학연합회 코임브라 그룹(Coimbra Group) 소속 대학이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1347년에 설립된 펨브로크 칼리지, 1584년에 설립된 이마누엘 칼리지, 1960년설립된 처칠 칼리지, 1964년에 설립된 다윈 칼리지, 그리고 1979년에 설립된 로빈슨 칼리지에 이르기까지 31개의 칼리지들은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연합대학 형태를 이룬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칼리지는 단과대학을 일컫는 미국의 칼리지 시스템과는 다르다. 각 칼리지는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며, 같은 건물에서 살고 같이 공부하는 방식의 학료(學寮: 학교 기숙사) 제도를 운영한다. 재학중인 학부생은 칼리지 단위에서 학료에 적을 두고 개인지도나 5인 정도의 소수교육을 받게 된다. 이러한 시스템은 학제간연구의 성과를 높이는 강점으로 작용한다.
1209년 옥스퍼드 시민들과 분쟁을 일으킨 여러 명의 학자들이 연구를 목적으로 케임브리지에 모여든 데서 출발했다. 1226년까지 학자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학교를 세우고 정규 과정을 개설하였다. 엘라이(Ely) 주교였던 휴 발샴(Hugh Balsham, ? ~1286)이 케임브리지 최초의 대학인 피터하우스(Peterhouse)를 세웠다. 그 후 1세기 동안 30개의 대학이 신설되었다. 1441년 잉글랜드 왕 헨리 6세(Henry VI, 1421~1471년)가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를, 1546년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가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를 설립하였다. 1534년 영국 왕실로부터 칙허장을 하사 받았다. 1584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출판사인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사가 첫 책을 출판했다. 1661년 영국 최고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인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이 이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1762년 식물원이 개장했다. 1921년 석사과정이 도입되었다
2011년 기준 100개 학과, 6개 스쿨로 구성되어 있다. 6개 스쿨로는 문리학, 생물과학, 임상의학, 인문학 및 사회과학, 물리과학, 기술 분야가 있다. 문리학 스쿨은 건축 및 예술사학부, 아시아 및 중동 연구학부, 고전학부, 신학부, 영어학부, 현대 및 중세 언어학부, 음악학부, 철학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외에 건축학과, 중동연구학과, 언어학과 등 14 학과가 개설되어 있으며, 영어 및 응용언어연구센터, 예술, 인문학, 사회과학 연구센터 등이 운영되고 있다. 생물과학 스쿨은 생물학부 및 수의학부에 병리학과, 동물학과, 실험 심리학과 등이 개설되어 있으며 케임브리지 시스템 생물학 센터, 세인스버리(Sainsbury) 실험소 등을 운영하고 있다.
대학 도서관은 의학도서관, 스콰이어 법률도서관, 센트럴 과학도서관, 베티&고든 무어(Betty and Gordon Moore) 도서관으로 나뉘며 총 800만 권의 도서를 소장하고 있다. 대학 부속기관으로 경영연구센터, 이슬람연구센터, 교육기술응용연구센터 등이 있다. 대학 부속시설로는 1816년 비스카운트 피츠윌리엄(Viscount Fitzwilliam)이 기증한 소장품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립된 피츠윌리엄 박물관, 20세기 작품들을 소장한 케틀스 야드(Kettle's Yard) 미술관, 위플(Whipple) 과학사 박물관, 식물원, 스콧극지연구소 등이 있다.
옥스퍼드대학교와 함께 영국에서 가장 오랜 전통과 유서를 자랑하는 대학교이다. 이 대학교의 기원은 1209년 옥스퍼드시(市)에서 학자와 시민 간에 일어난 분쟁을 계기로 여러 학자들이 케임브리지로 이주하여 학생들을 교육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된다. 1284년 최초의 칼리지인 피터하우스를 설립하였으며, 그 후 프랑스의 파리대학교와 옥스퍼드대학교를 모방하여 대학 조직을 개편하다가, 1318년에 교황 요한 22세로부터 일반연구소(studium generale)로 인가되었다.
14세기에 옥스퍼드대학이 J.위클리프 사건으로 이교(異敎) 혐의를 받게 되자, 많은 학생들이 케임브리지에 모이게 되어 그 이름이 높아졌고, 그에 따라 왕실의 지지도 케임브리지 쪽으로 쏠리게 되었다. 문예부흥기에는 D.에라스뮈스, T.리내카가 교편을 잡았으며, W.틴들, H.래티머가 중심이 되어 종교개혁운동을 지도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18세기에 들어서서 한때 쇠퇴하기도 하였으나, 19세기 이래로 수학과 자연과학 연구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옥스퍼드대학교처럼 학료(學寮: 학교 기숙사)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대학교로, 본부와 수십 개의 구성 칼리지로 되어 있는데, 본부와 칼리지는 각기 독자적인 기능을 가진 기관이면서도 오랜 역사적 발달과정을 통하여 긴밀한 통합을 이루고 있어 영국 대조직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으며, 시민적 교양을 달성하기 위한 독특한 교육형태를 형성하고 있다.
2010년 기준 구성 칼리지는 모두 31개로, 피터하우스(1284)·클레어(1326)·펨브로크(1347)·곤빌앤드케이스(1348)·트리니티홀(1350)·코퍼스크리스티(1352)·퀸스(1448)·크라이츠(1505)·세인트존(1511)·머레이 에드워즈(1954)·이마누엘(1584)·시드니서식스(1596)·다우닝(1800)·피츠윌리엄(1869)·거턴(1869)·뉴넘(1871)·셀윈(1882)·휴즈홀(1885)·세인트에드먼즈하우스(1896)·처칠(1960)·다윈(1964)·루시 캐번디시(1965)·클레어홀(1966)·호머턴(1976)·로빈슨(1977) 등이 있다. 그중 머레이 에드워즈, 뉴넘, 루시 캐번디시의 3개 칼리지는 여성만 입학할 수 있고 나머지는 남녀 모두 입학이 가능하다.
대학교는 교직원의 강좌조직과 연구조직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교직원들이 칼리지에 적(籍)을 두어 공통의 강의를 가짐으로써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칼리지로부터 희사되는 기부금이 대학교 재정의 기본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각 칼리지는 대학교 전체에 관련되는 규칙에 따라 재정과 방침을 결정할 때는 대학의 인가를 받지만, 대학에 대한 기부금 납부의무 외에는 관리·교수·학습·조직 등 모든 권한에서 자치권을 가진다.
학생은 개인지도교사(Tutor)의 선발에 의해 입학이 허가되며, 재학기간 중에는 학료에 적을 두며 개인지도를 중심으로 하는 전료제(全寮制 : 전원 기숙사 체제) 교육을 받게 된다. 강의 출석 여부는 의무적인 것이 아니고 학생의 자유에 맡겨져 있으나, 3학년을 수학한 후에 각종 우등시험(tripos 또는 examination for honors)에 합격해야만 학사학위나 다른 학위를 받을 수 있다. 18세기에 시작된 우등시험은 수학과 자연과학 분야에서 독특한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고 있다.
케임브리지셔 카운티의 케임브리지 카운티 타운 중앙을 흐르는 캠강(江) 양쪽 연안에 칼리지들이 모여 있다. 부속시설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소이자 출판사인 케임브리지대학교 출판사가 있으며 그밖에 도서관·피츠윌리엄박물관·고고학인류학박물관·고전고고학박물관·세드윅지구과학박물관·케틀스야드미술관·동물박물관·휘플과학사박물관·스콧극지연구소·식물원 등이 있다.
대학 졸업생 또는 교수를 지낸 사람 가운데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은 1958년과 1980년 화학상을 두 차례 수상한 프레데릭 생어, 1962년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프랜시스 크릭과 제임스 왓슨, 2009년 화학상을 수상한 벤카트라만 라마크리슈난 등이며 대영제국의 초대 총리인 로버트 월폴, 라지브 간디 인도 총리 등을 비롯해 세계적 정치가, 과학자 아이작 뉴턴, 찰스 다윈, 스티븐 호킹, 경제학자 존 케인스 등을 배출했다.
캠브리지 대학 (비공식적으로 캠브리지 대학 ) [주 1] A는 대학 공공 연구 대학 의 캠브리지 , 영국에 . 1209 년에 창립되어 1231 년 킹 헨리 3 세 (King Henry III) 에 의해 왕실 헌장 을 받았다. 케임브리지는 영어권 세계 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이며 세계에서 네 번째로 오래된 생존 대학 이다. 대학은 옥스포드 대학을 마을 사람들과 논박 한 후에 떠난 학자들의 모임에서 자랐다 . 2 개의 중세 대학은 많은 공통된 특징을 공유하며 종종 " 옥스 브릿지 " 라고도합니다 . 캠브리지 대학의 역사와 영향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 중 하나입니다.
캠브리지는 31 개의 구성 대학교 와 6 개의 학교로 구성된 100 개 이상의학과 를 포함한 다양한 기관으로 구성됩니다. 캠브리지 대학 출판사 (Cambridge University Press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출판사이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대학 출판사입니다. 이 대학교는 피츠 윌리엄 박물관 (Fitzwilliam Museum )과 식물원 등 8 곳의 문화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 캠브리지의 도서관 은 총 약 1,500 만 권의 책을 보유하고 있으며, 8 백만 권 은 법적 예금 도서관 인 캠브리지 대학 도서관 에 있습니다 .
2016 년 7 월 31 일에 끝난 해에는 대학의 총 소득이 16 억 6 천만 파운드였습니다. 이중 4 억 6 천 2 백만 파운드는 연구 보조금 및 계약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중심 대학 및 대학은 약 63 억 파운드의 복합 기금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미국 이외 의 어떤 대학교보다도 큰 규모 입니다. 대학은 " 실리콘 펜 (Silicon Fen) " 으로 알려진 하이테크 비즈니스 클러스터 의 개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협회 회원이며 영국의 유명 대학 의 " 골든 트라이앵글 "과 학술 보건 과학 센터의 케임브리지 대학 보건 파트너 (Cambridge University Health Partners) 의 일부 입니다.
2017년 9월로, 캠브리지에 의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최고의 대학 위를 기록하고 세계 대학 순위를 , 세계 3 개 다른 순위 테이블에 의한 네번째 최고의 대학, 세계에서 다른 기관은 많은 과목에 대 한 상위 10 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학은 저명한 수학자, 과학자, 정치가, 변호사, 철학자, 작가, 배우 및 외국의 수뇌를 포함하여 많은 유명한 동문 을 교육했습니다 . 94 명의 노벨 수상자 와 15 명의 영국 총리 , 10 명의 필드 메달 제작자 가 캠브리지에 학생, 교수 또는 동창으로 가입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1209년에 설립되었으며, 영어권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 중 하나이다. 총장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부군인 에딘버러 공 필립이며, 또한 단일 대학이 아닌 31개의 칼리지의 집합체이다. 칼리지는 "학료" 등으로 옮길 수 있는 말로 전문대학 내지 단기대학이나 단과대학과는 구분하여야 한다. 미국의 칼리지 시스템하고도 다르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런던에서 북쪽으로 80km 떨어진 캠 강가에 자리잡고 있다. 케임브리지는 대학이 있기 전부터 중요한 도시였다. 이 지역은 한때 로마 제국에 의해 점령되었다가 나중에 윌리엄이 요새화했다.
머턴 칼리지를 모델로 하여 일리의 주교였던 휴고 드 발셤이 첫 번째 칼리지인 피터하우스를 설립했다. 그 후 300년에 걸쳐 다른 칼리지들이 많이 설립되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1318년에 교황 요한네스 22세로부터 스투디움 게네랄레로 공식 인가를 받았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1502년에 대학 최초로 신학 교수직을 만든 후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511년 D. 에라스무스가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와서 르네상스 시대의 신학문을 정착시켰다.
1546년에 헨리 8세가 트리니티 칼리지를 설립했으며 이 칼리지는 아직까지 이 대학교 소속 칼리지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옥스퍼드대학교와 파리대학교에 의해 확립된 유형에 적응하여 1571년에 공식적으로 법인이 되었다.
교과는 주로 전통적인 3개 학(라틴어 문법, 수사학, 논리학), 4개 과(산술·기하·음악·천문학)에 의존했다. 이후 계속 공부하면 신학·법학·의학 분야의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학과로는 건축·예술사·고전·신학·영어·언어학·음악·동양학·경제학·경영학 ·정치학·교육학·역사학·법학·철학·공학·지리학·지질학·수학·물리학·화학·고고학·인류학·생물학·임상의학 등이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건물들은 깊은 역사와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크라이스츠 칼리지의 마당에 있는 뽕나무 아래에서 밀턴이 〈리시더스 Lycidas〉를 썼다고 전해지며, 모들린 칼리지에 원형 그대로 보존된 새뮤얼 페피스 도서관이 있다.
크리스토퍼 렌이 설계한 성당은 펨브로크 칼리지와 이마누엘 칼리지에 있다. 1800만 권의 책이 소장된 대학도서관은 전 세계에서 출판되는 모든 책이 소장되는 몇 안 되는 도서관 중의 하나이다.
중세사·교회사·근대사에 관한 액턴 장서, W. G. 애시턴의 일본 장서, 찰스 다윈의 논문, 웨이드의 중국어 소장품 등이 이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명한 자료들이다.
피츠윌리엄 박물관에는 이집트·그리스·로마의 고대 유물, 중세 및 근대의 필사 원고, 유럽 거장의 회화 등이 소장되어 있다.
케임브리지대학교는 교사와 학생이 침식을 같이 하며 같은 건물에서 살고 같이 공부하는 수도원 방식의 공부방법이 기본적인 공부방법이다.
19세기 중반까지 교원은 영국의 국교인 영국 성공회 신자이어야 하고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19세기 이후 대학 개혁에 따라 이러한 의무는 완화되어 현재는 대학교 안에서 살고 있는 교원은 그리 많지 않다. 케임브리지 대학 거튼 칼리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여성전료제 칼리지로서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여성교육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현재는 남녀공학이다.
각각의 칼리지에는 강한 분야의 특징이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각 분야의 공부를 하는 학생과 연구자가 몰려있다. 분야를 넘어선 인간관계를 형성하여 학제적 연구가 생성되는 강점을 가진 시스템이다. 학부생의 교육은 칼리지 단위에서 1대1에서 많아도 3인 정도의 소수교육이 이루어진다. 강의는 대학 학부 단위에서 행해지나 출석 검사는 하지 않고 학생의 자유의사에 맡겨져 있다.
다른 대학교와의 교류관계에 있어서는 옥스퍼드 대학교에 대한 대항의식이 세어 서로 “다른 쪽(the other place)”이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밴드라고 부르는 뱃놀이에서도 다른 방향으로 노를 젓는다.
전 세계적으로 케임브리지대학교는 겸손, 미덕, 명예를 교육 이념으로 삼아 800년동안 세계 최고 인재의 산실로 인정 받아 온 대학교이다.
케임브리지 신사(Cambridge Gentlemen)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케임브리지대학교 학생들은 공부에 열심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공부에만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장차 미래 사회를 이끌어 갈 전 세계의 인재들을 길러 내는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선 공부말고도 May Ball 파티와 같은 사교 활동도 한다.
이외에도, 케임브리지대학교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캠강에서 선상 펀팅(punting) 등으로 학생들은 자신의 학업 피로를 풀기도 한다.
학생들의 사회 적응력을 기르고 개인의 취미 활동을 인정해 주고 있다.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거나 A-level 전과목에서 만점자인 A+지원자들조차도 20% 정도만 합격, 나머지는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고 한다.[5] [6]
케임브리지대를 비롯한 영국 상위권 명문대의 입학 경쟁률은 앞으로도 계속 상승할 거라고 대학입학 상담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세계에서 각국을 대표하는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모인 집합장소로 알려져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는 114개의 도서관이 있다.[7] 국내 서울대학교의 30배에 달하는 3,000만 권의 장서와 각종 자료가 114개의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8개의 예술, 문화, 과학 박물관, 그리고 식물학 농원을 운영하고 있다:
케임브리지는 기본적인 강의(lecture)와 함께 개인교습(Supervision)이라는 전통적인 교육방식을 채택하여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교수와의 1:1 수업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개인교습 수업은 학생들의 전공에 대한 매우 깊고 풍부한 이해를 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각의 칼리지에 소속되어 있는 교수들은 각자의 과목들의 재학생들을 나누어 맡아 개인교습을 실시한다.
이러한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소규모 강의에 대한 열정적인 투자는 세계 각지의 대학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특히 미국 내 리버럴 아츠 칼리지의 학부 중심 교육 과정이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모델 삼아 만들어진 것이다.
대표적으로 캘리포니아 주의 저명한 상위권 명문 사립 클레어몬트 맥케나 대학교(Claremont McKenna College)가 옥스포드 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교육 시스템을 본받아 정치학과 경제학에 대한 강세를 보이며 단기간에 명문 대학교 반열에 올라섰다고 한다.
케임브리지 대학 졸업생 또는 교수를 지낸 사람 가운데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은 총 92명정도임.
1958년과 1980년 화학상을 두 차례 수상한 프레더릭 생어,
1962년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프랜시스 크릭과 제임스 왓슨,
2009년 화학상을 수상한 벤카트라만 라마크리슈난,
2012년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존 거든
이외에 대영 제국의 초대 총리인 로버트 월폴,
라지브 간디 인도 총리 등을 비롯한 해외 국가원수,
과학자 아이작 뉴턴, 찰스 다윈, 스티븐 호킹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 앨프리드 마셜, 조앤 로빈슨, 피에르 스라파, 아서 세실 피구, 아마르티아 센 등을 배출하였다.
대한민국의 동문으로는 '사다리 차버리기',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의 저자이자, 경제학과 교수인 장하준 등이 있다.
구글 딥마인드의 CEO이자 동시에 바둑기사 이세돌과의 대국으로 유명해진 알파고(AlphaGo)의 핵심개발자인 데미스 허사비스 (Demis Hassabis)가 케임브리지 대학교 컴퓨터 공학과 학부 졸업생이며, 이후 허사비스는 런던대학교 UCL에서 인지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예술인)
틸다 스윈턴 (Tilda Swinton, 1960년 11월 5일~): 영국 배우 - 영화 《설국열차》, 《나니아 연대기》- 아카데미상 수상
휴 로리 (Hugh Laurie, 1959년 6월 11일~ ): 영국 배우 & 코미디언
사샤 배런 코언 (Sacha Baron Cohen, 1971년 10월 13일~ ): 영국 배우 & 코미디언
릴리 콜 (Lily Cole, 1988년 5월 22일~): 영국 배우 & 모델
에디 레드메인(Eddie Redmayne, OBE, 1982년 1월 6일~): 영국의 배우이자 모델 - 영화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 《레 미제라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외 다수 - 아카데미 수상
레이철 바이스(Rachel Hannah Weisz,1970년 3월 7일~): 영국의 배우 - 영화 《미이라》, 《콘스탄틴》,《어바웃 어 보이》 외 다수 - 아카데미상 수상
엠마 톰슨 (Emma Thompson, 1959년 5월 15일~): 영국의 배우 - 영화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러브 액추얼리》, 《센스 앤 센서빌러티》 외 다수 - 아카데미상 수상
톰 히들스턴 (Tom Hiddleston, 1981년 2월 9일-) 영국의 배우 - 영화《토르: 천둥의 신》: 로키, 《워 호스 (영화)》: 제임스 니컬스 대위(Captain James Nicholls), 《어벤저스》: 로키,《토르: 다크 월드》: 로키
샘 멘데스 (Sam Mendes), 영국의 감독, 아카데미 수상
줄리언 펠로스 (Julian Fellowes): 영국의 배우 - 아카데미상 수상.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 출신 수학자, 공학자, 컴퓨터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튜링 상(A. M. Turing Award)의 원조,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엔 독일군을 격파하기 위해 암호해독을 맡기도 한, 앨런 튜링의 삶을 그린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영화 - 원제: The Theory of Everything, 2015년 - 제임스 마시 감독, 에디 레드메인 주연)
블랙홀과 우주의 기원에 괸해 연구하고 베스트셀러 '시간의 짧은 역사"를 쓴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박사의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창 시절의 학업과 사랑을 그린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영화, 2010년)
《유령작가》 (영화 - 원제: The Ghost Writer, 2010년 - 로만 폴란스키 감독)
《러브 인 클라우즈》 (영화 - 원제: Head In The Clouds 2008년 - 샬리즈 시어런, 페넬로페 크루스 주연)
《케임브리지 스파이》 (드라마 - 원제: Cambridge Spies, 2003년)
《모리스》 (영화 - 원제: E. M. Foster, 1987년 - 휴 그랜트 주연)
《불의 마차》 (영화 - 원제: Chariot of Fire, 1981년)
《호킹》 (영화 - 원제: Steven Hawking, 2008년) -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삶을 그린 영화
《아인슈타인과 에딩턴》 (영화 - 원제: Einstein and Eddington)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아서 스탠리 에딩턴의 관계를 그린 영화.
영국 및 영어권 지역에서 옥스포드 대학교 다음으로 가장 오래된 대학교이자 전 세계에서 7번째로 오래된 대학교이다. 91명에 달하는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이 대학은 영국의 대학평가기관 'QS(Quacquarelli Symonds)'가 발표한 세계대학순위(QS World University Rankings)에서 2010년에 이어 2011년 2년 연속 세계 1위로 선정되었다. 영국에서 연구를 선도하는 20개 명문대학으로 구성된 러셀 그룹(Russell Group) 회원 대학이다. 또한 1985년 설립된 유럽의 선도적 대학연합회 코임브라 그룹(Coimbra Group) 소속 대학이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1347년에 설립된 펨브로크 칼리지, 1584년에 설립된 이마누엘 칼리지, 1960년설립된 처칠 칼리지, 1964년에 설립된 다윈 칼리지, 그리고 1979년에 설립된 로빈슨 칼리지에 이르기까지 31개의 칼리지들은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연합대학 형태를 이룬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칼리지는 단과대학을 일컫는 미국의 칼리지 시스템과는 다르다. 각 칼리지는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며, 같은 건물에서 살고 같이 공부하는 방식의 학료(學寮: 학교 기숙사) 제도를 운영한다. 재학중인 학부생은 칼리지 단위에서 학료에 적을 두고 개인지도나 5인 정도의 소수교육을 받게 된다. 이러한 시스템은 학제간연구의 성과를 높이는 강점으로 작용한다.
1209년 옥스퍼드 시민들과 분쟁을 일으킨 여러 명의 학자들이 연구를 목적으로 케임브리지에 모여든 데서 출발했다. 1226년까지 학자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학교를 세우고 정규 과정을 개설하였다. 엘라이(Ely) 주교였던 휴 발샴(Hugh Balsham, ? ~1286)이 케임브리지 최초의 대학인 피터하우스(Peterhouse)를 세웠다. 그 후 1세기 동안 30개의 대학이 신설되었다. 1441년 잉글랜드 왕 헨리 6세(Henry VI, 1421~1471년)가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를, 1546년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가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를 설립하였다. 1534년 영국 왕실로부터 칙허장을 하사 받았다. 1584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출판사인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사가 첫 책을 출판했다. 1661년 영국 최고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인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이 이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1762년 식물원이 개장했다. 1921년 석사과정이 도입되었다
2011년 기준 100개 학과, 6개 스쿨로 구성되어 있다. 6개 스쿨로는 문리학, 생물과학, 임상의학, 인문학 및 사회과학, 물리과학, 기술 분야가 있다. 문리학 스쿨은 건축 및 예술사학부, 아시아 및 중동 연구학부, 고전학부, 신학부, 영어학부, 현대 및 중세 언어학부, 음악학부, 철학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외에 건축학과, 중동연구학과, 언어학과 등 14 학과가 개설되어 있으며, 영어 및 응용언어연구센터, 예술, 인문학, 사회과학 연구센터 등이 운영되고 있다. 생물과학 스쿨은 생물학부 및 수의학부에 병리학과, 동물학과, 실험 심리학과 등이 개설되어 있으며 케임브리지 시스템 생물학 센터, 세인스버리(Sainsbury) 실험소 등을 운영하고 있다.
대학 도서관은 의학도서관, 스콰이어 법률도서관, 센트럴 과학도서관, 베티&고든 무어(Betty and Gordon Moore) 도서관으로 나뉘며 총 800만 권의 도서를 소장하고 있다. 대학 부속기관으로 경영연구센터, 이슬람연구센터, 교육기술응용연구센터 등이 있다. 대학 부속시설로는 1816년 비스카운트 피츠윌리엄(Viscount Fitzwilliam)이 기증한 소장품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립된 피츠윌리엄 박물관, 20세기 작품들을 소장한 케틀스 야드(Kettle's Yard) 미술관, 위플(Whipple) 과학사 박물관, 식물원, 스콧극지연구소 등이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대영제국의 초대 총리인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 1676년~1745), 인도의 전 총리 라지브 간디(Rajiv Gandhi, 1944~1991),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과학자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3~1727), 우주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1942~), 경제학자 존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1946),
University of Cambridge coat of arms.svg
케임브리지 대학은 수많은 세계적인 인재를 배출하였고, 세계 대학들 가장 많은 94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하였다. 800년 동안 이어 온 깊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세계에서 유명한 장학금으로 인정받는 빌 게이츠 장학금(Gates Scholarship)을 수여하는 유일한 대학이기도 하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과학연구단지인 케임브리지 사이언스 파크(Cambridge Science Park)를 가진 대학으로서, 미국의 실리콘 벨리와 함께 세계 과학 단지로서 양대산맥으로 인정받고 있다.
세계경제포럼이 선정한 세계 최상위 26개 대학 중 하나이다
알래스카 주Alaska". 49번째 미국 땅이 된 빙토.
알래스카 주Alaska.
알래스카는 알류트(Aleut)어로 ‘거대한 땅’을 의미하는 인디언 말이다. 북위 60°~70°에 위치한 알래스카는 이름에 걸맞게 미국 면적의 약 1/5이나 된다. 1867년 미국의 국무 장관이었던 윌리엄 수어드(William Henry Seward, 1801~1872)가 러시아 정부로부터 720만 달러에 구입한 이 빙토는 1959년에 49번째 주로 편입되면서 정식으로 미국의 영토가 된 것이다. 알래스카는 미국내의 주(州) 중에서 최대의 면적을 가지고 있는 주로, 알래스카의 어원은 알류트語의 "Alyeshka" 즉 "위대한 땅"을 뜻한다. 원주민은 에스키모인(알류산의 알류트족)과 인디언들이었다.
미국 정부는 1982년부터 원주민은 물론 1년 이상 거주자에게 해마다 2천 달러씩의 배당금을 나누어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천연가스와 원유(미국 전체 생산량의 25%)가 생산될 뿐만 아니라 비록 돈을 주고 샀지만 거저 얻은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이 금액을 받는다. 나이도 관계없고 직업이 있건 없건 무조건 머릿수를 기준으로 평생 동안 받는 것이다. 원주민들이 국제결혼을 해서 혼혈아를 낳을 경우 그 아이에게는 이 돈의 50%에 해당하는 금액이 평생 지급된다. 주 정부는 매년 10월이면 이 돈을 원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4인 가족의 경우 연간 약 1천만 원에 상당하는 돈을 배당받는다.
알래스카는 1741년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에게 고용된 덴마크인 베링이 발견한 뒤, 러시아 모피상인이 서서히 이주해 왔으며, 18세기 말에는 러시아 - 아메리카회사가 모피무역을 독점하고 싯카를 건설하여 19세기 초에 번영을 누렸다.
19세기 중반 영국의 알래스카 강점을 두려워한 러시아는 미국과 매각교섭을 하여 1867년 미국의 스워드 국무장관이 720만 달러에 구입하였다. 이 지역을 1ha당 5센트로 환산해서 계산한 것이었다. 이를 두고 미국인들은 가장 어리석은 거래라고 이를 '수어드의 어리석은 행위'(Seward Folly)라고 불렀다.
미국 최대의 넓이, 최소 인구의 주. 주도 주노. 넓이 151만 8875km2. 인구 59만 9000명. 북아메리카 대륙 북서단부를 이룸. 동쪽으로 캐나다와 접경한 외에 3면이 북극해, 베링 해, 알래스카 만 등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며, 소련과는 베링 해협을 사이에 둠. 강과 산맥이 많고 금 · 백금 · 석유 · 목재 등 자원이 풍부하며 어업이 성함. 23개 행정 구역으로 나뉨. 러시아 영토이던 것을 1867년 720만달러에 사들였으며 1959년 주가 됐음.
알래스카의 원주민은 그린란드와 마찬가지로 17,000~30,000년 전쯤에 베링 해협을 넘어 온 황색계의 몽골 인종이며, 그들의 후손이 지금의 이누이트족과 알류트족이다. 시베리아와 중국 대륙에서 말을 타고 유랑 생활을 하던 이들이 얼음판을 넘어 사람이 없던 이곳에 처음으로 온 것이다. 이들의 뿌리가 우리와 같은 몽골계이기 때문에 생김새가 우리와 비슷한 면이 많으며, 남미로 내려간 인디언도 이들의 후손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알래스카라고 하면 에스키모, 이글루, 알래스칸 맬러뮤트, 빙하, 오로라, 백야, 연어, 툰드라), 원유, 수상 비행기, 호수, 매킨리 봉(6,194m) 등의 단어가 떠오른다. 그리고 1년 내내 눈으로 덮여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알래스카 최대 도시인 앵커리지는 숲이 많고 경치가 좋으며, 겨울에도 비교적 따뜻해서 일본의 홋카이도 지방과 비슷하다고 한다. 그리고 온화한 봄, 시원한 여름, 쌀쌀한 가을, 추운 겨울로 나뉘는 사계절이 있다. 다만 겨울과 여름이 길고 봄과 가을이 짧다. 여름은 매년 6월부터 9월까지이고, 겨울은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이다. 10월과 11월은 가을이고, 4월과 5월이 봄이다.
알래스카는 러시아 황제의 의뢰로 덴마크의 탐험가 베링이 베링해협의 발견(1728)에 이어서 1741년에 발견하였다. 1778∼1847년에는 J.쿡, G.밴쿠버, A.매켄지 등 영국의 탐험가들도 이곳을 답사하였다. 러시아는 알렉산드르 바라노프를 지사(知事)로 파견하여 이곳을 통치하게 하였는데, 1867년 재정(財政)이 궁핍하여 720만 달러로 매각, 이후 미국령(領)이 되었다.
북쪽은 북극해, 남쪽은 태평양에 면하고 서쪽은 베링해협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연방의 시베리아와 마주한다. 동쪽은 캐나다의 유콘주(州)와 접하고(서경 141°의 남북으로 통하는 직선 국경), 태평양 연안에서 남쪽으로 불규칙하게 뻗어 브리티시콜럼비아주와 접한다.
면적은 미국에서 최대이고 인구는 와이오밍주에 이어 두 번째로 적다. 원주민은 남부의 인디언, 북부의 에스키모, 알류샨의 알류트족(族)으로 총수 약 2만 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후 발견된 금광과 유전은 미국에 상당한 부를 안겨 주었다. 알래스카는 금, 석유, 천연 가스 등이 생산되고, 삼림 자원과 수산 자원도 풍부한 땅이었던 것이다.
알래스카는 1912년 준주(準州)가 되었고, 59년 49번째의 주로서 연방에 편입되어 미국의 대륙방위체재의 전초지역으로서 전략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연어잡이는 알래스카 수산업의 근간이자 관광 산업의 중요 상품이다. 연어는 알을 낳고 나면 반드시 죽게 되는데 알을 낳는 장소로 시원한 민물 냇가가 있는 이곳을 많이 찾아온다. 이곳에는 겨울에 쌓인 눈이 녹아서 찬물(얼음물)이 많이 흐르기 때문에 연어가 알을 낳기에 적당하기 때문이다. 또 알래스카는 늑대를 비롯하여 갈색곰, 바다수달, 물개, 바닷새 등 야생 동물들의 천국이다. 알래스카 연안의 수많은 바위섬은 세계 최대의 바닷새 및 물개 서식지로서 태고의 자연 속에 간직되어 있는 바다 동물원이나 마찬가지이다.
알래스카에는 깨끗한 공기, 맑은 물, 수려한 경관 그리고 일년 내내 흥미와 스릴과 모험을 만끽할 수 있는 오염되지 않은 곳이다. 뿐만 아니라 알래스카에는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들과 빼어난 국립공원들이 많다. 랭걸-세인트 일라이어스(Wrangell St, Elias) 국립공원은 5만 3천 ㎢나 되기 때문에 항공기를 이용해야 둘러볼 수 있다.
알래스카 반도로부터 시작한 알래스카 산맥에는 북미 최고의 매킨리 봉이 자리 잡고 있으며, 여기서부터 미국의 로키 산맥을 거쳐 남미의 안데스 산맥까지 남북미를 이어 주는 등뼈 역할을 하는 거대한 산세가 형성되어 있다. 회색 바위, 푸른 얼음, 중중첩첩의 봉우리와 계곡들은 세계 어느 곳과도 비길 수 없는 모험과 흥미를 제공한다. 겨울철이면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하는 구경거리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온다. 오로라를 보거나 빙하 위에서 스키를 타거나 또는 때 묻지 않은 자연 속 오두막집에 머무르며 알래스카를 체험해 보기 위해서다.
지세적(地勢的)으로는 북변(北邊)에 브룩스산맥이 동서로 뻗어 있고, 태평양쪽으로는 알래스카산맥이 부채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이 두 산맥 사이를 거의 병행하며 유콘강이 알래스카 중앙부를 가로질러 베링해협으로 흘러든다. 남쪽 연안에는 랭겔산맥 ·추가츠산맥이 있고, 알류샨산맥이 알래스카반도와 알류샨열도의 등뼈를 형성하며 서쪽으로 뻗어, 그 끝은 애투섬과 키스카섬에서 동경 172°30'에 달한다.
빙설로 덮인 화산이 많으며 카트마이산(山)을 비롯한 활화산(活火山)도 적지 않다. 브룩스산맥의 북극해쪽 저지(低地)는 툰드라 지대이며 중앙의 유콘강(江) 유역에는 침엽수림대(針葉樹林帶)와 습지가 펼쳐져 있다. 알래스카산맥은 매킨리(6,194m)·로건산(6,050m)을 포함하며 거대한 빙하가 발달해 있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알래스카간선도로가 통과한다.
태평양 해안지방은 전형적인 피오르드 지형을 나타내어 섬이 많고 풍경이 아름답다. 서쪽 해안은 해양성 기후로 비교적 살기 편하며 솔송나무·왜전나무 등의 침엽수림대가 펼쳐져 있다. 주요 산업은 어업·광업·임업·모피생산 등이며 어업이 중심이다. 1920년 페어뱅크스 부근의 금광 발견을 계기로 골드러시 시대가 형성되었는데 어업이 그에 대치되었다. 바다표범·담비·밍크 등 모피의 산출로도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한 전략상 방위기지화(防衛基地化)와 인구증가에 힘입어 건설업과 상공업이 주요산업으로 부상하였다. 1954∼1959년에는 케치칸과 싯카에 거대한 펄프공장이 세워지고 앵커리지 부근을 비롯하여 석유 발굴이 진척되고 있다.
북극해 연안의 석유자원이 주목받고 있던 중, 1968년 북극해에 면하는 노스슬로프(North Slope)에서 원유매장량이 96억 배럴로 알려진 대유전이 발견되었다. 미국은 에너지 자립정책의 일환으로 이 지역의 원유를 대량 수송하기 위해 노스슬로프에서 태평양 연안의 부동항 밸디즈에 이르는, 길이 1,280km, 지름 1.22m의 알래스카 횡단 송유관을 1975년 3월 착공, 1977년 6월에 준공 개통하였는데 이로써 하루 200만 배럴의 원유 수송이 가능하게 되었다.
앵커리지를 중심으로 하는 상업항공로의 기지화(基地化)와 알래스카간선도로의 완성으로 관광상으로도 중요시되었다. 행정중심지는 주도인 주노이지만, 경제·문화의 중심은 앵커리지이며, 태평양 연안의 싯카, 내륙부의 페어뱅크스, 베링해 연안지방의 놈, 알류샨 열도의 더치하버 등이 중심도시이다.
도시들이 골드러시에 따라 설립된 것과는 달리 1914년 알래스카 철도의 부설본부가 설치되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미국의 가장 중요한 공군기지였으며, 수송교통면에서는 알래스카 내륙·미국 본토·북아메리카 서부·북유럽·극동지방을 잇는 항공로의 중요한 연결점으로 세계 하늘의 십자로라고 일컫는다. 1961년 항구가 생겼으며, 어업 이외에 풍부한 석유·천연가스의 공급 중심지가 되었다.
알래스카만에 있는 코디액섬(Kodiak Island) 북동쪽 470km, 맥킨리산 남쪽으로 210km에 위치해 있다.
앵커리지의 내륙에 있는 마타누스카 계곡에서는 알래스카 유일의 상업적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1964년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있었다.
미국, 알래스카 주 중남부의 항만 도시이며 주 최대의 도시. 케나이 반도 가까이, 쿡 만에 있음. 인구 24만 6000명. 교통과 경제의 중심지. 어업, 임업, 석유 공업과 통조림 제조업이 성함. 미국군의 중요 방위 기지임.
행정구역명" ㅡ 면적(k㎡) 인구(명)
알래스카주[Alaska] 1,717,854 ㅡ ㅡ ㅡ ㅡ 735,132
앵커리지[Anchorage] 5,099 291,826
주노[City and Borough of Juneau] 8,430.4 32,167
랭겔[City and Borough of Wrangell] 8,967 2,369
야쿠타트 버러[City and Borough of Yakutat] 24,509 662
브리스톨 베이 버러[Bristol Bay Borough] 2,300 997
데날리 버러[Denali Borough] 33,092 1,826
헤인즈 버러[Haines Borough] 7,060 2,508
싯카 버러[Sitka Borough] 4,811 8,881
노스 슬로프 버러[North Slope Borough] 245,521 9,430
스캐그웨이 버러[North Slope Borough] 1,200 9,430
노스웨스트 아크틱 버러[Northwest Arctic Borough] 105,539 7,523
페어뱅크스 노스 스타 버러[Fairbanks North Star Borough] 19,280 97,581
키나이 페닌술라 버러[Kenai Peninsula Borough] 64,107 55,400
코디액 아일랜드 버러[Kodiak Island Borough] 31,137 13,592
레이크 앤 페닌술라 버러[Lake and Peninsula Borough] 85,268 1,631
알류샨스 이스트 버러[Aleutians East Borough 38,876 3,141
마타누스카 수시트나 버러[Matanuska-Susitna Borough] 65,418 88,995
키치칸 게이트웨이 버러[Ketchikan Gateway Borough] 17,234 13,477
피터즈버그 버러[Petersburg Borough] 9,917 3,273
놈 인구조사구역[Nome Census Area] 73,240 9,892
웨이드 햄프턴 인구조사구역[Wade Hampton Census Area] 50,950 7,977
베델 인구조사구역[Bethel Census Area] 117,850 17,758
유콘 코유쿡 인구조사구역[Yukon-Koyukuk Census Area] 382,810 5,695
딜링햄 인구조사구역[Dillingham Census Area] 54,170 5,010
알류샨스 웨스트 인구조사구역[Aleutians West Census Area] 36,560 5,511
사우스이스트 페어뱅크스 인구조사구역[Southeast Fairbanks Census Area] 64,900 6,985
발데즈 코르도바 인구조사구역[Valdez-Cordova Census Area] 104,500 9,763
후나 앵군 인구조사구역[Hoonah-Angoon Census Area] 28,270 2,145
프린스 오브 웨일즈 아우터케치칸 인구조사구역[Prince of Wales-Outer Ketchikan Census Area] 19,900 5,786
* 인구정보는 2013년 기준.
Anchorage (공식적 으로 Anchorage 의 Municipality 라고 불림 ) ( Dena'ina Athabascan : Dgheyaytnu )는 알래스카 주 에 통일 된 홈 규칙 시정촌 입니다 . 2016 년 추정 인구는 298,192 명으로 알래스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로 주 전체 인구의 40 % 이상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50 개 주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에 살고있는 뉴욕 주민의 비율이 뉴욕 에만 높습니다 . 함께 앵커리지 대도시권 은 Anchorage와 인접한 Matanuska-Susitna Borough,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2016 년에 인구는 401,635 명입니다.
앵커리지 (Anchorage)는 알래스카의 중남부 , 쿡 입구 의 종착지 , 북쪽 의 닉 암 (Knik Arm) 과 남쪽 의 턴가 인 암 (Turnagain Arm) 으로 형성된 반도 에 위치해 있습니다. 도시의 한계는 1,961.1 평방 마일 (5,079.2 km에 걸쳐 2 포함) 도시의 핵심 하는 합동 군사 기지, 여러 외곽 지역 사회 와의 거의 모든 치산 주립 공원 .
그것의 위치로, 뉴욕시, 거의 같은 거리에있는 프랑크푸르트 와 도쿄 , 앵커리지 내에있는 9 / 2 선진국의 약 90 % 공기에 의해 시간. 은 이러한 이유로, 앵커리지 국제 공항은 많은 국제 항공편에 대한 일반적인 급유 정지하고 중요한 곳입니다 페덱스 회사는 서비스의 글로벌 네트워크의 "중요한 부분"을 호출 허브. [12]
Anchorage는 All-America City Award에서 4 번 수상했습니다 . 1956 년, 1965 년, 1984-85 년, 2002 년, National Civic League 에서 그것은 또한 Kiplinger 에 의해 미국에있는 세금 친화적 인 도시로 지명되었다
앵커리지(Anchorage)는 미국 알래스카 주 남부의 거의 중앙에 있는 항구 도시로, 주의 상공업과 금융, 문화, 관광의 중심지이며, 알래스카의 가장 큰 도시이자 인구의 40퍼센트 이상을 구성한다. 앵커리지는 1956년, 1965년, 1984/85년, 2002년 국가시민연맹에 의해, 4번 전미국대표시 상으로 지명된 상태이다. 도시는 바둑판 눈금 모양으로 정비되어 있는데 그 아름다운 거리로 해서 전국 도시상을 두 번씩이나 수상한바 있다. 1914년에 알래스카 철도의 부설 본부지로서 건설이 시작되었고 1920년 시의 제도가 시행되었다. 미국기지의 건설, 북극권 항공로의 개설, 알래스카 유전개발 등으로 비약적인 발달을 해왔다. 북극권 가까운 곳에 있는 것에 비해서는 기후는 비교적 따뜻하여 7월 평균기온은 13.9도, 1월 평균기온은 영하 10.9도이다. 앵커리지라는 이름은 철도건설시 미국정부가 시프 크리프 강(en)가의 배 정박지에 물자보급선의 하역용지를 만들 때 도면에 anchorage의 a를 대문자로 잘못 쓴 것이 그대로 시 이름으로 채용된 것이 유래이다. 앵커리지는 11월만 되어도 태양이 9시경에 뜨기 시작하다가 12월에는 더 늦어져서 오전 10시 16분에야 해가 뜬다.
앵커리지는 1915년과 1923년 사이에 건설되었던 알래스카 철도를 위한 철도 건설 항구로서 1914년 설립되었다. 철도 본부가 있는 곳인 쉽크릭랜딩은 신속히 천막촌이 되었으며 1920년 11월 23일에 합병되었다. 1920년대 도시의 경제는 철도 주변에 집중되었다. 1930년대와 1950년대 사이, 도시는 항공운송으로 크게 성장했고 군대가 점점 더 중요하게 되었다. 1930년에 메릴 필드와 1951년에 앵커리지 국제 공항이 각각 개항을 한다. 엘멘도프 공군기지와 리처드슨 요새가 1940년대에 건설되었다. 1964년 3월 27일, 앵커리지는 115명의 알래스카인들을 사망케하고 180억달러의 손실이 났던, 진도 9.2의 굿 프라이데이 지진을 겪었다. 거의 5분간 땅의 흔들림이 지속되었다. 1960년대 중반 도시의 재건설이 이루어진다. 1968년 프루드호 만에서 석유가 발견되었고, 그 결과 일어난 오일붐 때문에 앵커리지는 앞선 성장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1975년에 앵커리지는 이글 리버, 저드우드, 글렌 알프스, 그리고 몇몇의 다른 지역사회와 합병을 한다.
2010년에는, 5세 이상의 앵커리지 거주자 중 83.7% (220,304명)가 집에서 영어만을 사용하며, 4.47%(11,769명)는 스페인어, 2.53% (6,654명)가 따갈로그어, 1.56% (4,108명)가 태평양의 다양한 언어들, 1.38% (3,636명)가 아메리카/알래스카의 원주민 언어, 1.14% (2,994명)가 한국어, 0.63% (1,646명)가 독일어, 0.57% (1,502)가 허몽어, 0.50% (1,307명)가 러시아어, 0.45% (1,185명)가 일본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합하면, 5세 이상의 앵커리지 거주자 중 16.33% (43,010명)가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한다.
앵커리지의 가장 큰 경제 부분은 운송, 군사, 주와 연방 정부, 관광, 기업 본사, 자원 추출이다. 지역 경제의 많은 부분이 앵커리지의 지리적 위치와 주변의 천연 자원에 의존한다. 앵커리지 경제는 아래의 48개 주에 비해 그 속도가 느리긴 하지만 계속적으로 성장해왔다. 1980년대 중반의 부동산 시장 침체를 제외하고는 불경기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다.
앵커리지 공항은 세계에서 화물량이 세 번째로 많다. 앵커리지가 아시아와 미국의 나머지 48개 주를 잇는 경로에 있어서 허브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앵커리지 항구는 알래스카로 오는 화물의 95%를 책임진다.
주노가 알래스카의 공식적인 수도이지만, 주노보다 앵커리지에 알래스카 주의 공무원이 더 많다. 약 6800여 명의 주 공무원들이 앵커리지에 있고, 3800명 정도가 주노에 있다. 주 정부는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건물을 사들여 주 공무원의 대부분을 수용하고 있다.
네 개의 소형 항공사, Alaska Central Express, Era Aviation, Hageland Aviation Services, 그리고 PenAir의 본사가 앵커리지에 위치하고 있다.
앵커리지는 판매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하지만 호텔에 머무를 시 12%, 차 렌트시 8%의 세금을 부과한다.
Downtown Saturday Market" 앵커리지 토요시장.
미국 알래스카주(州) 앵커리지에서 열리는 토요시장.
시내 중심부인 3번가와 이스트 스트리트(East Street)에 위치해 있는 주차장에서 열리며 1992년에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여름철인 5월 중순에서 9월까지만 개장하며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에서 오후 6시까지 열린다. 이 기간에는 날씨와 상관없이 항상 개장하며 이곳 시민은 물론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으로 앵커리지의 명물이다.
시장 안에는 300개 이상의 부스가 있으며 10,000여명의 상인들이 참여해 기념품은 물론 직접 재배한 과일, 채소, 고가구, 공예품, 미술품, 사진, 도자기, 홈메이드 양초, 비누 그리고 훈제연어, 사슴육포, 보석 등 다양한 물품을 판매한다. 관광객들은 물건을 사지 않고 구경만 하여도 아주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시장 안에서는 라이브 음악 공연이 이루어지고 음식도 다양하다.
Anchorage Museum" 앵커리지 박물관
미국정부가 알래스카를 사들인지 100년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68년에 문을 열었다. 개장 당시에는 대여한 알래스카 그림 60여 개와 2,500여 개 역사·민속 유물로 전시를 시작했다. 지금은 유물 2만 천여 점과 역사 기록 사진 45만여 점 등을 보유하고 있다. 알래스카의 예술·역사·과학을 대표하는 박물관이 되었고, 연간 18만여 명이 찾아오는 알래스카 10대 볼거리로 꼽히게 되었다. 전시관 외에도 도서관, 기록보관실, 교육시설 등을 갖추고 있으며, 1992년부터 스미소니언 박물관(Smithsonian Museum) 북극 연구소(Arctic Studies Center)의 알래스카 사무실도 겸하고 있다.
2017년 12월 6일 수요일
손준. 손침. 손정 孫靜.
1. 손준.
삼국 시대 오나라 오군(吳郡) 부춘(富春) 사람. 자는 자원(子遠)이고, 손견(孫堅)의 동생 손정(孫靜)의 증손이며, 손공(孫恭)의 아들이다. 처음에 무위도위(武衛都尉)와 시중(侍中)을 지냈다. 손권(孫權)의 총애를 받아 어림군(御臨軍)을 맡았다. 손권이 죽고 손량(孫亮)이 즉위하자 제갈각(諸葛恪)과 함께 정치를 보좌했는데, 무위장군(武威將軍)에 올라 도향후(都鄕侯)에 봉해졌다. 건흥(建興) 2년(253) 제갈각을 죽이고 승상대장군(丞相大將軍)이 되어 권력을 잡은 뒤 부춘후(富春侯)에 봉해졌는데, 권력을 전횡하여 조야(朝野)의 반발을 샀다. 사람됨이 교만하고 음해하기를 좋아해 사람을 많이 죽였다. 얼마 뒤 병사했는데, 종제(從弟) 손침(孫綝)이 권력을 이었다가 패한 뒤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다.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에서 승상을 지낸 인물.
오나라의 왕인 손권과는 7촌이며 손견의 동생 손정의 증손자이다. 219년에 출생하였으며 자는 자원(子遠)이다. 젊어서부터 용맹하고 무예가 뛰어나 손권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손권에 의해 오나라 시중이 되었으며 손권에게 제갈각을 추천하여 어린 손량을 보좌하였다. 이후 손량이 성장하자 함께 모의하여 제갈각을 처형하고 권력을 독점하였다. 승상이 되자 전횡이 극심하였고 궁녀들을 자신의 노리개로 삼았고 손권의 딸과 정분을 통하였다. 하지만 자신이 처형시켰던 제갈각을 꿈에서 만나고 병을 얻어 앓다가 256년에 사망하였다.
자는 자원(子遠). 오의 권신. 손권의 총애를 받았는데, 오만 방자하여 제갈각을 제거한다. 이후 권력을 잡아 갖은 횡포를 부린다.
2. 손침.
자는 자통(子通). 오의 권신. 손준의 종제로 등윤·여거·왕돈 등의 중신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황제 손양을 폐하고 손휴를 즉위시키는 등 횡포가 심하였다. 그러나 정봉에게 일족이 몰살당한다.
손준이 사망하자 권력을 장악하여 폭정을 휘둘렀다. 자신에 대한 적대적이었던 왕 손량을 폐위시키고 손휴를 옹립하였다. 하지만 손휴에 의해 처형되었다.
손침(孫綝, 231년 ~ 258년)은 중국 삼국 시대 오의 황족이자 권신이다.
처음에는 편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손준이 세상을 떠난 후, 손준에게 뒷일을 부탁받아 시중·무위장군이 되어 중앙과 지방의 모든 군사를 총괄했으며, 손준을 대신해 조정의 정사를 주관했다. 여거는 이를 듣고 분하고 두려워하여 등윤을 승상으로 천거했으며, 등윤과 함께 손침을 폐출하려 했다. 손침은 손준의 북정군을 되돌려 여거를 공격해 자살하게 했으며, 등윤과 그의 삼족을 멸했다.
이후 대장군에 임명되고 가절을 받았으며 영녕후에 봉해졌다. 손침은 자신의 존귀함에 의지하여 매우 오만했으며, 항상 무례히 행동했다. 손준의 당제로 제갈각(諸葛恪)을 죽이는 음모에 가담한 손려(孫慮)는 손침 집권 후 대우가 얕아지자 장군 왕돈과 함께 손침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위의 대장군 제갈탄(諸葛誕)이 사마씨 정권에 대항하여 거병하고 오나라에 투항을 청하자, 오는 문흠(文欽), 당자(唐咨), 전단(全端) , 전역(全懌) 등 병사 3만 명을 주어 구원하게 했으나 오히려 참패하여 손침은 큰 원망을 샀다.
손침은, 폐제 양이 정무를 본 이래로 많은 힐문을 받게 되어 두려워했다. 마침내 폐제는 손침을 죽일 모의를 세웠으나, 폐제의 비가 손침의 사촌 누나의 딸이었으므로 이 음모를 손침에게 알려 주었다. 손침은 결국 폐제를 폐출하고 반대하는 신하는 죽였으며, 낭야왕 손휴(孫休)를 맞아 황제로 세우니 이가 곧 오의 제3대 황제 경제였다.
득의양양해진 손침은 오자서의 사당을 불태우고 불교 사원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참수했다. 손침의 네 아우가 모두 후(侯)에 임명되었고 모두 근위군을 관장하여, 손침 집안의 권력은 천자를 기울게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손침과 경제는 서로 두려워하게 되어, 손침은 무창으로 나가기를 원했다. 경제는 이를 허락하였으나, 장군 위막이 손침이 밖에 있으면 변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으며, 무위사 시삭은 손침에게 모반의 징조가 있다고 했다. 마침내 영안 원년(258년) 12월 8일, 건업(建業)에서 연회가 있었는데, 손휴는 정봉(丁奉) · 장포(張布) 등과 함께 계획하여 손침을 묶고, 목을 베었다. 손침의 3족이 모두 살해당했으며, 손준 형제에게 죽은 제갈각, 등윤, 여거는 모두 사면되었다.
진수(陳壽)는 '《삼국지》오서 제갈등이손복양전' 말미에서, 손침을 손준과 함께 "흉악한 행실이 가득하여 본래 논할 가치도 없는 자”라고 평했다.
손견(종증조부).
손권(재종조부).
손휴(재종숙).
손량(재종숙).
손정(증조부).
손고(孫暠)(조부).
손작(孫綽)(아버지).
손침.
손공(孫恭)(작은아버지).
손준(종형).
손유(종조부).
손교(종조부).
손환(종조부).
3. 손정 孫靜
중국 후한 말의 인물로, 자는 유대(幼臺)이며, 양주(揚州) 오군(吳郡) 부춘현(富春縣) 사람이다.
삼국 시대 오나라 손책(孫策)의 숙부고, 손견(孫堅)의 동생이다. 자는 유대(幼臺)다. 손견이 처음 거병했을 때 병마(兵馬)를 규합했다. 손책을 따라 도강하여 회계(會稽)를 공격하면서 계책을 올려 회계태수 왕랑(王朗)을 격파하여 분무교위(奮武校尉)가 되었다. 관직에 나가기를 좋아하지 않아 지방에 남아 진수(鎭守)하기를 청했다. 손권(孫權)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 소의중랑장(昭義中郞將)이 되었다. 집에서 죽었다.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시조인 손견의 동생.
출생과 사망일을 정확하지 않으며 자는 유대(幼臺)이다. 손견을 도왔으며 후방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손견이 유표를 공격하기 위해 거병하자 이를 만류하였다. 형이 사망하고 조카인 손책이 주군으로 등극하자 회계군 공략의 선봉장으로 역할하였다.
손견(孫堅)의 아우로, 손견이 처음 거사하였을 때, 동향 사람들과 종실들을 오륙백 명 가량 모아 뒤를 견고히 지켰으며, 사람들의 의지가 되었다.
손책(孫策)이 유요(劉繇)를 깨부수고 여러 현을 평정하여 회계로 진격하였을 때, 사람을 보내어 손정을 청했고, 손정은 가속들을 데리고 전당에서 손책과 만났다. 당시 회계태수 왕랑(王朗)이 손책에게 고릉에서 저항하고 있었는데, 손책은 여러 번 물을 건너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 손정은 손책에게 남쪽으로 수십 리 떨어진 사독이 길의 요충이므로 이곳을 쳐 방비가 없는 곳으로 나아가기를 권했다. 손책은 이에 따라 왕랑 군을 속이고 밤중에 사독 길로 나아가 고천둔을 습격했다. 왕랑은 옛 단양태수 주흔(周昕) 등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웠으나, 손책은 주흔 등을 무찔러 베고 마침내 회계를 평정했다. 손책은 표를 올려 손정을 분무교위로 삼았고, 중임을 주려 했으나, 손정은 분묘와 종실을 사모하여 출사하기를 즐기지 않고 머물러 지키기를 구하여 손책이 이를 따랐다.
Sun Jing은 현재의 Fuyang District , Hangzhou , Zhejiang을 중심으로하는 Wu Commandery의 Fuchun County 출신 이다. 그는 처음에는 조용한 삶을 살았지만 열렬히 가족들에게 헌신했습니다. Sun Jing이 그의 동생과 합류했을 때 정확히 불확실합니다. 반란적인 쑤창 (Xu Chang, 172-174)에 대한 그의 선거 운동만큼이나 빨랐으며, 선 지앤 (Sun Jian)이 옐로우 터 반란 (Yellow Turban Rebellion). Xiang Qu와 Zong Shi 그리고 경비원으로 일했던 500 명에서 600 명 사이의 사람들과 함께 그는 Sun Jian에 처음 가입 한 사람 중 하나였으며 그들은 모두 아주 가깝습니다. 썬 징은 옐로우 터번 반란 기간 동안 잉촨 (Yingchuan), 양 사이 (Yangxi), 시화 (Xihua) 반란군과 싸우고 184 년 완 (Wan)과의 여러 차례의 싸움에 맞서 싸웠다. 그는 선 지앤 (Li Jian)과 함께 리앙 (Liang)성에 갔고 , 거기에서 메이 양 (Meiyang, 185)과 유중 186) 잘했다. 유종 (Yuzhong)에서 한강군이 패배 한 후, 선 징 (Sun Jing)은 동생을 따라 장샤 (Changsha)를 따라 갔다. 그는 장쩌민 ( Jing Province) 의 선전 ( Jing Province) 선거 운동에 참여 하여 187 년에 징 에 속했다. 일요일 Jian가 동 Zhuo 를 끌어 내리는 캠페인 에서 원조하기 위하여 북쪽으로 움직일 때191 년 Sun Jing은 Liang, Yangren, Dagu 및 Luoyang 에서의 전투에서 싸웠습니다 . Luoyang에서 그는 Dong Zhuo의 라인을 깬 최초의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이 성공적인 캠페인은 Yuan Shao가 그의 동맹 인 Sun Jian을 공격했을 때 Yangcheng에서 Yuan Shao 의 군대 와 갑작스럽게 전투를 벌 였으며, Sun 군대는 Luoyang에서 그의 공격을 막기 위해 빨리 후퇴해야했습니다. 선 징 (Sun Jing)은 처음으로 증원 군과 함께 도착했으며, 동생 밑의 주력 부대가 도착했을 때 천천히 유안 사오 군대를 밀어 냈습니다. 이 전투는 선 샤오 군대를 후원 한 후 선군에 대한 승리로 끝났습니다. Sun Jing은 또한 Sun Jian이 살해당한 Liu Biao 와의 마지막 캠페인에서 Sun Jian과 함께 갔다 .
원조하기 Sun Ce
Sun Jian이 Xiangyang 전투 에서 사망했을 때 , Sun Ben 은 군대의 지휘하에 군주 인 Yuan Shu 에게 돌아갔다. 선 징 (Sun Jing)은 위안 슈 (Yuan Shu)를 복무하지 않으려 고 군 복무에서 은퇴하고 아마 푸츈 (Fuchun)으로 귀가했다. 196 년 Sun Ce우를 정복하고 단양의 반은 선 징에게 그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선 징은 조카를 대신하여 싸우기 위해 퇴직했다. 그는 Sun Ce가 Qiantang에 입대하여 Sun Ce가 군벌 Wang Lang을 결렬 시키려고 일하고있었습니다. Wang Lang은 Guling시에서 주요 방어 장치를 수립했으며 Sun Ce의 공격에 직면하여 방어력을 발휘할 수있었습니다. 상황을 연구 한 후에 Sun Jing은 자신의 제안을했습니다. Zhadu Crossing은 Guling 남쪽에있는 12 개 정도의 리그 였고 육군이 포드로 가기에는 충분히 얕았습니다. 그는 Zhadu를 비밀리에 가로 질러 후방에서 Wang Lang을 공격 할 것을 제안했다. Sun Ce는이 제안을 받아 들였고 Sun Jing이 공격을 이끌도록했습니다. 그들은 일부 군인들이 밤에 출발하고 Sun Jing이 Wang Lang의 병력에게 경고하지 않고 Zhadu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위장하기 위해 여분의 모닥불을 켜 놓았다. 그는 강을 가로 지르지 않고 Gaoqian에서 Wang Lang의 진영을 공격했다. 그는 충격받은 수비수를 압도하고 위치를 확보했다. 이것은 Sun Ce 군대를 교두보로 만들었고, 강을 건너서 반대쪽으로 갈 수있었습니다.
이 승리가 Sun Jing에게 큰 부분을 차지한 것을보고, Sun Ce는 그의 삼촌을 그의 최고 장군 중의 한 명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선 징은 더 이상 군대 생활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Vehement Martial Might (대서사)의 대령으로 유일하게 받아 들여지는 임무를 거부하면서 주요 권위의 모든 입장을 뒤집었다. 대신, 그는 자신이 자란 마을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 가족의 고국에 배속 될 것을 요청했습니다. 일세 (Sun Ce)는 동의했기 때문에 선 징 (Sun Jing)은 우 Commandery로 옮겨졌고 그의 남은 생애를 그의 집을 지키는 데 보냈다.
죽음과 아들
Sun Quan 은 결국 Sun Jing에게 설득력있는 가계의 장군 (昭 義 中郎 将軍)이라는 직함을 받아들이겠다고 설득 하였지만, 그것은 실질적인 명령의 위치가 아니었고 Sun Jing은 항상 이전처럼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선징의 사망 연도는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의 직위는 상속인에게 넘어 갔다. Sun Jing은 Sun Hao, Sun Yu , Sun Jiao , Sun Huan 및 Sun Qian의 다섯 아들이 생존했습니다 .손권(孫權)이 소의중랑장으로 삼았으나, 관직에서 은퇴하고 죽었다.
삼국지와 삼국지연의의 주요 등장인물
군주
한
영제 소제 헌제
위
조조 조비 조예 조방 조모 조환
촉
유비 유선
오
손견 손책 손권 손량 손휴 손호
진
사마염
기타
공손연 공손찬 도겸 동탁 마등 여포 원소 원술 유언 유장 유표 장각 장로 한수
참모
문관
한
공융 교현 양표 왕윤 채옹
위
가후 곽가 곽회 동소 사마사 사마소 사마의 순욱 순유 양수 왕랑 왕숙 유엽 정욱 종요 종회 진군 화흠
촉
간옹 동윤 등지 마량 마속 미축 방통 법정 비의 손건 양의 유파 이적 장완 제갈량 진지
오
감택 고옹 노숙 반준 보즐 여범 우번 육손 장굉 장소 장제 제갈각 제갈근 주유
진
가충 순욱 장화 진수
기타
곽도 괴량 괴월 봉기 심배 이유 장송 저수 전풍 진궁 채모 허유
무장
한
노식 동승 주준 하진 황보숭
위
가규 등애 방덕 만총 서황 손례 악진 우금 이전 장합 장료 전예 전위 조인 조진 조창 조홍 조휴 하후돈 하후연 학소 허저
촉
강유 관우 관평 마대 마초 엄안 오의 왕평 요화 위연 이엄 장비 장익 조운 주창 진도 하후패 황권 황충
오
감녕 능통 미방 반장 서성 육항 여몽 장흠 전종 정보 정봉 제갈정 주치 주태 주환 진무 태사자 하제 한당 황개
진
두예 문앙 문호 석포 양호 왕준
기타
고순 곽사 기령 맹달 문추 안량 양봉 이각 장임 제갈탄 화웅
여인
한
당희 동태후 하태후 초선 헌목황후
위
견황후 곽귀인 양휘유 왕원희 장춘화 하후휘
촉
감부인 미부인 목황후 황월영
오
대교 소교 보연사 손노반 손부인 오부인
진
양염 양지
기타
채부인 채염 축융부인
비한족
가비능(선비) 구력거(오환) 답돈(오환) 동천왕(고구려) 맹획(남만) 어부라(흉노) 히미코(일본)
기타
관로 남화노선 사마휘 예형 우길 좌자 화타.
손량 孫亮.손휴 孫休.손량 孫亮.손호 孫皓.
1.손량 孫亮.
중국 삼국시대의 오(吳)나라 제2대 황제(재위 252∼258). 손권(孫權)의 아들. 손량의 옹립에 공이 컸던 손준(孫峻)이 정권을 잡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손림(孫綝)이 정권을 잡았다. 257년 손량이 친정(親政)을 선언하고, 외척 전(全)씨와 의논하여 손림을 죽이려다 반대로 폐위되어 회계왕(會稽王)으로 지위가 떨어졌다.
자(字)는 자명(子明). 손권(孫權)의 아들. 손권의 맏아들 손등(孫登)이 죽자 손화(孫和)와 그의 동생 손패(孫覇) 사이에 태자문제를 둘러싸고 다툼이 일어났고, 결국 어린 손량이 태자가 되어 252년 손권이 죽은 뒤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 결과 손량의 옹립에 공이 컸던 손준(孫峻)이 정권을 잡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손림(孫綝)이 정권을 잡았다. 257년 손량은 친정(親政)을 선언하고, 외척 전(全)씨와 의논하여 손림을 죽이려다 반대로 폐위되어 회계왕(會稽王)으로 지위가 떨어졌다. 뒤에 황제로 복귀한다는 소문이 있다 하여, 다시 후관후(候官侯)로 떨어져 임지로 부임하던 도중에 자살하였다.
손량은 손권의 막내 아들이지만 손권에게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황태자 싸움으로 인해 태자 손화(孫和)가 쫓겨나고 노왕 손패(孫覇)가 죽은 후, 두 형을 제치고 곧바로 태자에 봉해졌다. 손화의 어머니와 사이가 나쁜 누나 전공주가 자신의 일족인 전황후를 손량의 아내로 들이기를 손권에게 권했기 때문에, 태자로 봉해지면서 전황후를 태자비로 들였다.
태원 원년(251년) 겨울, 손권이 위독해지자 대장군 제갈각을 태자태부로 삼고, 중서령 손홍을 태자소부로 삼고, 회계태수 등윤을 태상으로 삼아 장군 여거, 시중 손준과 함께 손량을 보정하게 했다.
회계왕 손량(會稽王 孫亮, 243년 ~ 260년, 재위 252년 ~ 258년)은 오의 제2대 황제로, 손권(孫權)의 일곱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반황후이다. 자는 자명(子明)이다. 권신 손침을 몰아내려다 쫓겨났다.
(252년) 4월, 손권이 붕어하자 9세의 나이로 제위에 올랐다. 정비 전씨는 건흥 2년(253년) 정월에 황후가 되었다.
손량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돼 섭정단에 내분이 발생하여, 손홍이 제갈각을 제거하고자 불러들였으나 손준이 이를 제갈각에게 알려 제갈각은 손홍을 죽였다.[4]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손권이 태부로 삼은 제갈각(諸葛恪)이 전권을 위임받았다. 제갈각은 이해 12월에 쳐들어온 제갈탄, 호준을 동흥에서 격파했으나, 건흥 2년(253년)에 위나라를 쳐서 대패해 민심을 잃었다. 겨울 10월에 손량은 무위장군 손준(孫峻)과 모의하여 제갈각을 죽였고, 승상이 된 손준이 실권을 장악했다.[1][3][4]
오봉 2년(255년), 작년에 위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난 틈을 타 손준이 수춘을 노리고 출진했으나 이미 반란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후퇴했고, 문흠과 그 일당의 투항을 받아들였다. 위나라 장군 제갈탄이 보낸 추격군과 싸워 조진을 크게 이겼으나, 유찬이 제갈탄의 별장 장반의 추격을 받아 유찬, 손릉, 장수 세 장수를 잃었다.
태평 원년(256년), 손준이 죽었고, 유언으로 그의 사촌동생 손침(孫綝)이 뒤를 이어 나랏일을 전단했다. 여거와 등윤은 손침이 섭정을 맡은 것에 저항하여 싸웠으나 패배하여 삼족이 멸해졌다.
태평 2년(257년) 4월, 대사령을 내리고 친정을 시작했으며, 병사들과 장수들의 자제를 모아 근위 군대를 편성하고 훈련시켰다.
태평 3년(258년) 8월, 손침의 전횡으로 말미암아 누나 손노반, 장인 태상 전상과 그 아들 황문시랑 전기, 장군 유승과 함께 손침 살해를 도모하고 전기에게 밀조를 내려 전상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전상은 생각 없이 자기 아내에게 누설했고, 손침의 사촌 누나인 전상의 아내는 이를 손침에게 흘렸다. 그 때문에 손침의 선제공격을 받아 유승은 죽임을 당했고 전상은 사로잡혔다. 손침에게서 회계왕으로 쫓겨났다.
영안 3년(260년), 참언을 받아 후관후(候官侯)로 격하되었다. 후관후국으로 이송되던 중에 자살하였는 기록이 있고, 짐살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2.손휴 孫休.
자는 자열(子烈)이다. 손권의 아들 손량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라 오나라 3대 왕 경제가 된다. 당시 권력의 실세였던 승상 손침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260년 30세로 사망하였다.
오경제(吳景帝). 삼국 시대 오나라의 3대 황제. 손권(孫權)의 여섯 째 아들로, 자는 자열(子烈)이다. 처음에 낭야왕(琅邪王)에 봉해졌다. 손량(孫亮)이 오주(吳主)가 되자 단양(丹楊)으로 옮겼다가 다시 회계(會稽)로 옮겼다.
태평(太平) 3년(259) 손침(孫綝)이 손량을 폐하고 맞아 황제로 옹립했다. 얼마 뒤 손침을 살해하고 좌장군(左將軍) 장포(張布)와 승상(丞相) 복양흥(濮陽興)을 총애했다. 책 읽기를 좋아했고, 꿩 사냥을 즐겼다. 재위하는 동안 조정이 문란해지고, 부역(賦役)이 과중되는 등 폐해가 발생했다. 7년 동안 재위했고, 시호는 경(景)이다.
오 경황제 손휴(吳 景皇帝 중국어: 孫休, 병음: Sūn Xiū 쑨 시우, 235년 ~ 264년, 재위 258년 ~ 264년)는 오의 제3대 황제로, 자는 자열(子烈)이다. 손권(孫權)의 여섯 번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희황후 왕씨(敬憘皇后 王氏)이다.
13세에, 중서랑(中書郞) 사자(射慈)와 낭중(郞中) 성충(盛沖)에게 학문을 배웠다.
태원 2년(252년) 정월, 형 폐태자 손화(孫和)가 남양왕(南陽王)에 임명되고, 손분(孫奮)이 제왕(齊王)에 임명될 때, 낭야왕(琅邪王)의 작위를 받고 호림(虎林)에 거주했다. 이해 4월에 손권이 죽고 폐제 손량(孫亮)가 즉위한 후, 제갈각(諸葛恪)이 왕자들을 강가의 요충지에 두지 않고자 하여 손휴를 단양(丹陽)으로 옮겼다. 그러나 단양태수(丹陽太守) 이형(李衡)의 침해를 받았으므로 글을 올려 다른 군으로 옮기기를 구해, 조서로써 회계(會稽)로 옮겼다. 회계태수(會稽太守) 복양흥(濮陽興)과 친교를 맺었다.
태평 3년(서기 258년) 10월, 손침(孫綝)은 폐제를 쫓아내고, 낭야왕을 황제로 세우고자 종정 손해와 중서랑 동조에게 낭야왕을 맞이하게 했다. 낭야왕은 처음에는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손해와 동조의 설득을 받아들여 마침내 따라가 10월 18일에 즉위했다. 경제는 즉위 후 대사면을 실시하고, 연호를 영안으로 고쳤다. 이후, 손오의 황제로서는 유일하게 재위 기간에 연호를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또 손침을 승상·대장군에 임명하고, 손침의 네 동생을, 얼마 지나지 않아 손화의 세 아들을 모두 후로 삼았다. 이형은 경제가 즉위하자 두려워해 달아났는데, 복직시켰다. 손침과 그 네 아우의 권력이 심히 커 군주를 흔들 지경이었으므로, 경제는 두려워하여 자주 상을 주었다. 오래지 않아 손침이 역모한다는 보고가 들어왔으므로, 12월 8일에 경제는 심복인 좌장군 장포(張布)와 모의하여 손침을 주살하고 그 삼족을 멸했다.[1]
11월 21일, 한 집안에서 다섯 사람이나 세 사람이 부역에 징집되었을 경우 한 사람을 남겨 조세와 군역을 면제케 하는 내용의 조서를 내렸다. 또 자신이 즉위할 때 맞아들인 신하들의 등급을 하나씩 올렸다. 손침을 주살하고서는, 학교를 세우고 시험으로 인재를 선발하며, 관리와 관리의 자제들을 교육시켜 시험을 보게 하고 등급을 매겨 상을 주게 하는 내용의 조서를 내렸다.
영안 3년(260년), 가을에 도위 엄밀의 건의를 받아들여 포리당을 만들었다. 여러 신하들은 많은 공을 들여도 이룰 수 있는 보장이 없다고 했지만, 태상·위장군 복양흥(濮陽興)만이 만들 수 있다고 하여 병사와 백성들을 동원하여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 비용은 헤아릴 수 없었고, 병사들이 죽거나 도망하거나 혹은 스스로 적살(賊殺)하여 백성들은 매우 원망했다.[1][3]
영안 5년(262년), 8월 16일에 부인 주씨(주황후)를 황후로 세웠고, 19일에 아들 손완(孫𩅦)을 태자로 세웠다. 10월, 위장군 복양흥을 승상으로 임명하고, 장포에게는 궁궐의 부서를 맡기고 복양흥은 군사와 행정을 담당하게 하고, 자신은 정무에서 옮겨 학문에 힘쓰고자 했다. 그리하여 박사좨주 위요(韋昭), 박사 성충(盛沖)과 토론하고자 했으나, 위요와 성충이 자신의 과실을 드러낼 것을 꺼린 장포가 황당한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경제는 장포의 잘못을 지적하고 장포를 원망했으나, 장포가 사죄하고 장포의 의심을 사는 것을 꺼려 결국 이 일을 작파하고 위요와 성충을 궁으로 들이지 않았다.
영안 6년(263년) 5월, 위나라에서 오나라의 우방 촉나라를 공격했고, 한나라는 10월에서야 이를 알렸다. 이에 정봉에게는 수춘으로, 유평에게는 별도로 시적과 함께 남군으로 진격해 위나라의 관심을 돌리는 한편, 정봉과 손이는 면중으로 진격해 촉한을 구원하게 했다. 그러나, 11월 한황제 유선이 위나라 장군 등애에게 항복하여 촉한은 멸망했다.
영안 7년(264년), 장수들을 보내어 촉으로 쳐들어가, 파동 수비대장 나헌(羅憲)을 공격했다.
3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고, 손화의 아들이며 손휴의 조카인 오정후 손호(孫皓)가 즉위하였다. 이후 손완은 예장왕(豫章王)에 봉해졌으나, 손호가 손완을 포함한 손휴의 아들들을 모두 죽였다.
행정 구역 일부를 바꾸어, 회계군을 나누어 건안군을 신설했고, 무릉군을 나누어 천문군을 신설했고, 의도군을 나누어 건평군을 신설했다.
손휴는 사람들이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피휘하는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하여, 이름자를 새로 만들었다.[6]
장남: 완(중국어: 𩅦, 병음: Wan 완), 차남: 굉(중국어: 𩃙, 병음: Gong 궁), 삼남: 망(중국어: 壾, 병음: Mǎng 망), 사남: 보(중국어: 𠅨, 병음: Bao 바오)이다.
3.손량 孫亮.
중국 삼국시대의 오(吳)나라 제2대 황제(재위 252∼258). 손권(孫權)의 아들. 손량의 옹립에 공이 컸던 손준(孫峻)이 정권을 잡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손림(孫綝)이 정권을 잡았다. 257년 손량이 친정(親政)을 선언하고, 외척 전(全)씨와 의논하여 손림을 죽이려다 반대로 폐위되어 회계왕(會稽王)으로 지위가 떨어졌다.
자(字)는 자명(子明). 손권(孫權)의 아들. 손권의 맏아들 손등(孫登)이 죽자 손화(孫和)와 그의 동생 손패(孫覇) 사이에 태자문제를 둘러싸고 다툼이 일어났고, 결국 어린 손량이 태자가 되어 252년 손권이 죽은 뒤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 결과 손량의 옹립에 공이 컸던 손준(孫峻)이 정권을 잡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손림(孫綝)이 정권을 잡았다. 257년 손량은 친정(親政)을 선언하고, 외척 전(全)씨와 의논하여 손림을 죽이려다 반대로 폐위되어 회계왕(會稽王)으로 지위가 떨어졌다. 뒤에 황제로 복귀한다는 소문이 있다 하여, 다시 후관후(候官侯)로 떨어져 임지로 부임하던 도중에 자살하였다.
Sun Liang은 243 년 Sun Quan 과 그의 가장 좋아하는 배우자 인 Consort Pan 으로 태어났습니다 . Sun Quan의 막내 아들 인 그는 아버지 (Sun Liang이 태어 났을 때 61 세)에서 아들을 갖게되어 매우 기뻤습니다. - 그는 또한 관리가 패권을 위해 싸우는 그의 두 세 형제 중 하나와 함께 스스로를 정렬 된 궁전 분위기에서 태어났다 일 그는, 황태자 와 일 바, 루의 왕자 위치에 디자인을했다. 250 년 썬 바에 대한 썬 바의 끊임없는 공격에 시달리던 썬 콴 (Sun Quan)은 썬 바에게 자살하고 썬을 면직 시키라고 명령했다. 그의 장녀 썬 루반 (Sun Luban)그는 Sun과 그의 어머니 Wang 에 대한 거짓 비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Sun을 면직 시키려하고 Sun Liang을 새로운 왕세자로 만들었습니다. Sun Luban은 Sun Liang과 남편 인 Quan Cong 의 할머니와 결혼했습니다 . 251 년에 Sun Quan은 Sun Liang의 어머니 인 Consort Pan을 황후로 세웠습니다.
252 년, Sun Liang은 부모님을 빠른 시일 내에 잃었다. 그해 초, 황후 황제는 살해당했습니다 - 그러나 그녀가 어떻게 살해 당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동부의 우두 관리들은 그녀의 성격을 지키지 못한 그녀의 하인들이 그녀가 잠 들어있는 동안 그녀를 졸랐다 고 주장했다. 시마 Guang 의 Zizhi Tongjian에 주석을 달았던 Hu Sanxing을 포함한 많은 역사가들은 우의 동부 최고 관리가 그들은 썬 콴이 사망 한 후 황후 처럼 권력을 장악 할까봐 두려워했다 . 그 해 말 Sun Quan이 사망하여 Sun Liang이 새로운 황제가되었습니다.
Sun Quan은 사망하기 전에 Sun Liang 의 섭정 으로 Zhuge Ke 를 선임했습니다. Sun Quang은 신뢰할 수있는 보조자 인 Sun Jun 을지지 합니다. 제국 사람들은 또한 베이지 (Baiyue) 와의 군사적, 외교적 성공과 빠른 재치 로 이미 유명해 졌기 때문에 크게 제주 게를 존경 했다. 그러나 선콴이 유일하게 예약 한 것은 저지가 오만하고 자신의 능력에 대해 지나치게 높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예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252 년에 Sun Quan의 죽음에 비추어, Cao Wei 섭정 Sima Shi 는 Eastern Wu에 대해 세 가지의 주요 공격을했다. Zhuge Ke의 힘은, 그러나, 중대한 손실을 입히는 주요 Cao Wei 힘을 격파 할 수 있었다. Zhuge Ke의 명성은 더욱 확립되었습니다. 253 년에, 그는 잠시 동안 가지고 있던 계획을 수행했다. 다른 많은 관리들로부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카오 웨이 (Cao Wei)에 대한 대대적 인 공격을하기 위해 거의 모든 서비스 자격이있는 동부 우의 청년들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는 동부 우의 동맹국 인 슈 반 (Shu Han) 동지 장쩌민 (Jiang Wei ) 과의 공격을 더욱 조율했다 . 그러나 그의 전략은 결함이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는 초기에 Shouchun (壽春; 현재의 Lu'an , AnhuiHefei의 방어력이 강하고 주요한 동부 우 공격에 견딜 수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 그의 방식으로, 대신 그의 마음이 바뀌고 Hefei 를 공격했다. Zhuge Ke의 군대는 긴 포위 공격에 의해 닳아 없어지고 재앙을 당했다. 그는 카오 웨이 (Cao Wei) 증원 군이 도착한 후에 결국 철수했지만 , 그의 잘못된 전략에 대해 사과하기 위해 수도 인 지안 예 (현재의 난징 , 강소 )로 돌아가는 대신 그는 수도에서 몇 시간 동안 머물러 있었으며 막대한 손실 고생했다.
Zhuge Ke가 결국 Jianye에게 돌아 왔을 때, 그는 또한 그를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처벌하면서 모든 반대 의견을 쓸어 버리려고 더욱 노력했습니다. 그는 또한 사람들이 겪은 최근의 막대한 손실과 그들의 분노를 무시하고 카오 위 (Cao Wei)에 대한 또 다른 공격을 계획했다. Sun Jun은 Zhuge Ke를 죽여야한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는 주 리가 반역을 계획하고 있다고 Sun Liang에게 말했고, 그는 Zhuge Ke를위한 잔치에 함정을 세웠다. (젊은 천황이 Sun Jun의 계획을 알았고 그가 동의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며, 전통 사학자는 Sun Liang이 알고 동의했음을 암시하지만이 시점에서 10 살이었습니다.) 잔치 중간에는 암살자 인 Sun 6 월은주게를 죽이기 위해 준비했고, 6 월의 군대는 주 그 가족을 지웠다.
Sun Jun이 Zhuge Ke를 죽인 후, 그는 빠르게 자신의 힘을 통합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표면에서 동음 과 힘을 공유 했지만, 군대를 장악 한 그는 곧주게 (Zhuge Ke)보다 독재 적이되었다. 특히, 그는 전직 왕세자 인 썬을 제자와 음모로 잘못 고소했으며, 썬에게 자살을 강요했다. 그의 독재적인 행동은 선계 (孫 英)와 우 후작 (Hui Lü) (桓 θ) 사이의 음모로 이어졌지만 그는 254 년에 그 계획을 발견했으며, Sun Ying과 Huan Lü가 모두 처형 당했다.
255 년에, Cao Wei 가 Guanqiu Jian 과 Wen Qin에 의한 반란 을 다루어야 할 때 , Sun Jun이 이끄는 동부 우력 은 Cao Wei의 국경 지역을 공격하려고 시도했지만, Sima Shi가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 한 후에 철회했다. 일 6월에 대한 또 다른 음모가 발견되었다, 그해 말 (그들은 패배 한 후 원자바오 진 그의 군대. 그에게 항복 않았다), 및 임원의 많은 수의 손권의 둘째 딸과 함께 실행 된 일 Luyu , 거짓으로 그녀에 관련된 누이 자매 인 Sun Luban.
256 년에 원자바오 (溫家輝) 총리의 촉구를받은 선준은 갑자기 병이 나자 카오 웨이 (Kao Wei)에 대한 공격을 계획했다. 그는 사촌 인 선첸 ( Sun Chen) 에게 그를 섭정으로 승계시켜 곧 죽게했다.
사망은 큰 대립을 야기 할 것이다. 카오 위 (Cao Wei)에 대항하는 주요 세력을 이끌 수있는 장군 류 쥬 (Rü Ju )는 독재자 선준 (Sun Jun)이 자신을 구별하지 않은 선첸 (Sun Chen)을 임명했다는 사실에 화를 냈다. Lü Ju는 대신 Teng Yin 이 섭정이 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 했고 Teng Yin은 그와 함께 행동하기로 동의했습니다. 선첸은 군사적으로 격퇴했고, 그의 군대는 Teng Yin과 L Ju를 격파했다. Teng Yin과 그의 가족은 처형 당했고 Lu Ju는 자살했습니다. Teng Yin과 L Ju의 패배에 비추어 Sun Chen은 극도로 교만 해지기 시작했습니다.
Sun Liang은 14 세 때 257 세에 국가의 중요한 문제를 개인적으로 처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와 비슷한 나이의 청년과 장교로 구성된 개인 경비대를 창설했으며, 그들과 함께 자라려고했다. 그는 또한 때때로 선첸의 결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Sun Chen은 젊은 천황을 다소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말, 시 섭씨 Sima Zhao (Sima Shi의 형제)가 왕위를 빼앗 으려 한다고 생각한 Cao Wei 장군 제갈 단 은 반란을 선언 했다.동부 쪽 원조를 요구했다. 원 틴 (Wen Qin)이 이끄는 작은 동부 우 박치기가 그를 돕기 위해 재빨리 도착했지만 선첸 (Sun Chen)은 주력 부대를 이끌고조차 (Zhuge Dan)가 시마 조 (Sima Zhao)에 포위 된 쇼우 춘 (Shouchun)에서 장거리 진영을 선택하고 아무것도하지 않았다. Sun Chen이 대신 Zhu Yi 장군에게 Shouchun을 피곤하고 미숙 한 병력들로 구제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Zhu Yi는 Sun Chen이 그를 처형하여 Zhu Yi의 군대 기술과 성실함에 감탄했던 사람들로부터 분노를 표하기를 거부했다. 썬 첸 (Sun Chen)이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제갈 단의 반란은 258 년에 실패했고, 웬 진의 병사들은 카오 웨이 (Cao Wei)의 포로가되었다.
사람들과 젊은 천황이 모두 그를 화나게하고, 재의에게 돌아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자신의 신봉자들을 수도의 방위 책임자로 보냈다. Sun Liang은 화가 나서 그의 누이 인 Sun Luyu, 일반 Liu Cheng (劉 丞), 그의 시아버지 Quan Shang (全 尚), 그의 동생 인 Quan Ji (全 記)와 함께 음모를 꾸몄다. 선첸이 전복했다. 그러나 콴 상 (Quan Shang)은 선 첸의 사촌 인 아내의 음모를 비밀로 유지하지 않았으며 그녀는 선첸에게 말했다. Sun Chen은 Quan Shang을 신속하게 체포하여 Liu Cheng을 죽인 후 궁전을 둘러 쌌고 다른 관리들에게 Sun Liang이 정신병으로 고통당한 사람들에게 잘못 선언 한 사실에 동의하도록 강요했습니다 . Sun Liang은 "Kuaiji 왕자"라는 제목으로 왕자에게 강등되었습니다.
Sun Chen은 Sun Liang의 형인 Sun Xiu를 새로운 황제 인 Langye의 왕자로 만들었습니다. 몇 달 후, Sun Xiu는 Sun Chen에 대한 덫을 놓아 체포하여 살해당했습니다. 그러나 Sun Xiang이 왕좌에 Sun Liang을 돌려 줄 음모가 두려워서 망명 생활에서의 Sun Liang의 위치는 더 안전하지 못했습니다. 260 년에, Sun Liang이 다시 황제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고, Sun Liang의 하인들은 그가 요술로 그를 비난했다. Sun Xiu는 Sun Liang을 "Houguan의 후작"이라는 제목으로 후작에게 강등시키고 그를 Houguan (현재 복주 , 복건 )의 후작에게 보냈습니다 . Sun Liang은 여행에서 사망했습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가 자살했다고 믿는 반면, 다른 이론은 Sun Xiu가 그를 독살했다는 것입니다.
4.손호 孫皓.
중국 삼국시대의 오나라 최후의 황제. 즉위한 후 처음에는 선정을 베풀었으나, 점점 공신 일족들을 물리치고 근친자와 측근을 들여앉혀 새 제왕으로서의 권위를 확립시키려고 힘썼다. 조세를 가혹하게 징수하다. 각지에서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는 가운데, 남하하여 쳐들어온 진나라 대군에게 항복하였다
자 원종(元宗) ·호종(皓宗). 별명 팽조(彭祖). 손권(孫權)의 손자로서 제3대 황제인 손휴(孫休)의 뒤를 이어 264년에 즉위하였다. 이듬해에 진(晋)왕조가 창업하자, 9월부터 다음해 12월까지 수도를 건업(建業: 南京)에서 무창[武昌]으로 일시 이전하였다. 즉위한 후 처음에는 선정을 베풀었으나, 점점 공신 일족들을 물리치고 근친자와 측근을 들여앉혀 새 제왕으로서의 권위를 확립시키려고 힘썼다. 조세를 가혹하게 징수하였고 주색에 빠져 폭정을 하였다. 그 때문에 호족세력의 지지를 잃어, 각지에서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는 가운데, 남하하여 쳐들어온 진(晋)나라 대군에게 항복하였다(280년). 오나라는 4대 58년으로 멸망하였고, 손호는 항복한 후에 귀명후(歸命侯)의 작위를 받았으나 뒤에 서진(西晋)의 수도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에서 죽었다.
오군(吳郡) 부춘(富春) 사람으로, 손휴(孫休)가 제3대 황제로 제위에 오르자 오정후(烏程侯)에 책봉되었고, 손휴가 죽자 뒤를 이어 원흥(元興) 원년(264) 즉위했다. 이듬해에 진(晉)왕조가 창업하자, 9월부터 다음해 12월까지 수도를 건업(建業)에서 무창(武昌)으로 일시 옮겼다.
즉위한 뒤 처음에는 선정을 베풀었지만, 점점 공신(功臣) 일족들을 물리치고 측근을 들여앉혀 새 제왕으로서의 권위를 확립시키려고 힘썼다. 조세를 가혹하게 징수했고 주색(酒色)에 빠져 폭정을 저질렀다. 그 때문에 호족세력의 지지를 잃어 각지에서 반란이 잇달아 일어났다. 천기(天紀) 4년(280) 진무제(晉武帝)가 남하하여 오나라를 공격하자 대장군 왕준(王濬)이 먼저 건업에 도착했는데, 손호가 나와 항복했다. 오나라는 망했고, 귀명후(歸命侯)에 봉해졌다. 16년 동안 재위했다.
제3대 황제인 손휴(孫休)의 뒤를 이어 264년에 즉위하였다. 이듬해에 진(晋)왕조가 창업하자, 9월부터 다음해 12월까지 수도를 건업(建業: 南京)에서 무창[武昌]으로 일시 이전하였다. 즉위한 후 처음에는 선정을 베풀었으나, 점점 공신 일족들을 물리치고 근친자와 측근을 들여앉혀 새 제왕으로서의 권위를 확립시키려고 힘썼다. 조세를 가혹하게 징수하였고 주색에 빠져 폭정을 하였다. 그 때문에 호족세력의 지지를 잃어, 각지에서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는 가운데, 남하하여 쳐들어온 진(晋)나라 대군에게 항복하였다(280년). 오나라는 4대 58년으로 멸망하였고, 손호는 항복한 후에 귀명후(歸命侯)의 작위를 받았으나 뒤에 서진(西晋)의 수도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에서 죽었다.
중국 삼국 시대 오(吳)나라 4대 황제(재위 : 264~280). 손권(孫權)의 손자. 남양왕(南陽王) 화(和)의 아들. 경제(景帝)의 뒤를 이어 오나라 군주가 되었으나, 성질이 포학하고 토목의 큰 역사를 일으키면서 정사를 돌보지 않아 민심이 이반되어 드디어 진(晋)에게 항복, 진은 그를 귀명후(歸命侯)로 봉하였다.
Sun Hao (242–284), courtesy name Yuanzong , originally named Sun Pengzu with the courtesy name Haozong , was the fourth and last emperor of the state of Eastern Wu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He was the son of Sun...
Reign264 – 280 PredecessorSun Xiu BornSun Pengzu (孫彭祖), Haozong (皓宗) (courtesy name), 242 년에 태어났습니다. 일요일 그는 241 년에 그의 아버지, Sun Quan의 장남, 그리고 첫 번째 왕세자 인 Sun Deng 의 죽음 직전 또는 직후에 왕세자 로 임명 되었다 . Sun Hao의 어머니 인 Consort He 는 Sun의 첩이었다.
Sun Quan은 Sun Hao가 단지 8 살일 때, 형제들, Sun He와 Sun Ba (孫 霸) 사이의 끊임없는 논쟁에 지친 후에 Sun Ba가 자살하고 Guzhang에서 망명하도록 Sun을 면직하도록 명령했다 (故 鄣현재의 Huzhou , Zhejiang에서 ) 아마도 그의 가족과 함께 평범한 지위에 떨어졌다. Sun Hao는 궁극적으로 추정 된 상속인의 상태에서 황제의 손자이긴하지만 일반인의 아들 인 상태로 갔다.
252 세인 Sun은 그 해의 직전 Sun Quan이 Suny를 남양의 왕자로, 장사 에서 fiefdom으로 입성하여 평범한 지위에서 승진했다 . 실제로, 일 그는의 동생 후에도 소문이 있었다 일 리앙 의 섭정 손권의 죽음 이후 왕위를했다 제갈 각 , 일 그는 아내 공주 장의 삼촌, 일 그는를 복원하고 대신 일 그는 황제를 만들기에 관심 . Zhuge Ke가 Sun Jun에 의해 암살되고 교체 된 후Sun은 253 년 Sun Jun이 처음으로 자리를 옮겨서 Sun을 복귀시키는 데 도움이되고 Sun이 컴백 할 기회를 없애기 위해 위험에 처했습니다. Sun Jun은 Sun을 평의회의 자격으로 강등시키고 Xindu (新都; 현재 항저우 , Zhejiang )로 추방 한 후, Sun에게 자살을 강요하기 위해 사자를 보냈습니다. 공주님도 자살했습니다. (일 드孫德- 또한 자살을 할 수있는 기회를 제공 할 때, 배우자 그는 그녀가 사망 한 경우뿐만 아니라 아무도 일 그는의 아들 돌보는 남아있을 것이라고 진술 거부, 따라서 그녀는 손호와 그의 세 형제 다른 배우자들에게서 태어난 제기 ), Sun Qian (孫謙), Sun Jun (孫俊, 섭정과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Sun Hao는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 셨을 때 11 살이었습니다.
Sun Liang이 Sun Jun의 사촌이자 후계자 인 Sun Chen 에 의해 258 년 에 면직 된 후 , Sun Hao의 또 다른 삼촌 인 Sun Xiu 는 황제가되었고 그 해 Sun Xiu는 Sun Hao와 그의 형제 인 Sun De와 Sun Qian을 창립했습니다. 일요일 Hao의 제목은 Wucheng의 후작이고 그는 현재 Huzhou , Zhejiang에 있는 그의 fief에 보내졌다 . 어떤 시점에서, 그는 Wucheng County, Wan Yu 의 치안 판사와 친구가 되어 지성적이고 학문적 인 사람으로 그를 평가했습니다.
여름 264 일에 Sun Xiu는 병이 나면서 말을 할 수 없지만 글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궁전에 Puyang Xing (濮陽 興) 장관을 소환하는 칙령을 써서 그의 아들 인 Sun Wan 왕세자에게 Puyang을 위탁했다 . Sun Xiu는 그 후 곧 죽었다. 그러나 Puyang Xing은 Sun Xiu의 소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반과 협의 후 장 니어 , 그들은 사람들이 최근에 비추어 믿었다 가을 자신의 동맹 상태의 촉한263 년 성숙한 황제를 열망했다. (이 시점에서 Sunwan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Sun Xiu 자신이 29 세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Sunwan도 십대 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이 시점에서 완 장군의 추천에 따라 Puyang Xing과 Zhang Bu는 Sun Hao를 대신 차지했다.
손권孫權.Sūn Quán(형제"손책 [孫策].손견 [孫堅]
1. 손권孫權.
중국의 삼국시대 오나라의 초대 황제. 안후이, 후난을 비롯한 각 지방의 산월 민족과 그 밖의 이민족을 토벌 진무하고, 타이완, 하이난섬 방면에도 원정군을 보냈으며, 랴오둥의 공손씨와도 접촉을 시도하는 등 국내외의 경영에 노력하였다.
자는 중모(仲謀), 시호(諡號)는 대황제(大皇帝)이다. 손견(孫堅)의 둘째 아들로 200년에 형 손책(孫策)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주유(周瑜) 등의 보좌를 받아 강남(江南)의 경영에 힘썼다. 당시 형주(荊州: 湖北省襄陽縣)에는 유표(劉表)가 세력을 떨치고, 화북(華北)에는 조조(曹操)가 있어 남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조상의 본적은 오군(吳郡) 부춘(富春)이고, 하비(下邳)에서 태어났다. 자는 중모(仲謀)이다. 삼국(三國) 시대 동오(東吳)의 건립자로 부친 손견(孫堅)과 형 손책(孫策)과 더불어 군웅할거 시대에 강동(江東)에서 기반을 다졌다. 19세 때에 형 손책(孫策)이 자객에게 죽자 그를 계승하여 제후(諸侯)가 되었다.
208년 유비(劉備)와 연합하여 적벽(赤壁)에서 조조의 군대를 격퇴시켰다. 219년 여몽(呂蒙)을 파견하여 형주(荊州)를 탈취했다. 222년에 위문제(魏文帝) 조비(曹丕)가 오왕(吳王)으로 봉해졌다. 229년에 황제로 칭하고, 농관(農官)을 설치하고 둔전(屯田)을 실시하고 산월(山越)을 평정하여 군현(郡縣)을 설치했다. 사후에 시호는 대황제(大皇帝),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다.
유표가 죽고 그 아들 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의 압력은 더욱 강화되어 국내에서도 화전양론(和戰兩論)이 대립했으나 주유 등의 주전론이 승리하였다. 이에 손권은 유비(劉備)와 손잡고 남하한 조조의 대군을 적벽(赤壁)에서 격파함으로써 강남에서 위상을 확고히 하였다. 그뒤 형주의 귀속문제(歸屬問題)를 둘러싸고 유비와 대립하였으며, 이 때문에 219년 조조와 결탁하여 유비의 용장 관우(關羽)를 격파하고 형주를 공략하였다. 이때 손권은 관우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보냈다.
위(魏)·오(吳)·촉(蜀) 3국의 영토가 거의 확정되었으며, 오나라는 장쑤[江蘇]·안후이[安徽]의 남부, 저장[浙江]·장시[江西]·후베이[湖北]·후난[湖南]·푸젠[福建], 그리고 광둥[廣東] 방면까지를 지배하게 되었다.
220년 조조가 죽고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한(漢)나라의 제위(帝位)를 찬탈하여 황제로 즉위하자 유비도 촉한(蜀漢)의 황제가 되었다. 손권도 이에 맞서서 황위에 올라 연호를 황룡(黃龍)이라 하고 도읍을 건업(建業;南京)으로 정하였다. 위나라 문제(조비)가 손권의 아들을 신하로 등용한다는 명분으로 인질로 데려가려고 하자 손권이 이를 거부함으로서 위나라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위나라와 관계를 청산한 손권은 이후 대체로 촉한과 결합하여 위나라에 대항하는 한편, 국내의 발전에 힘썼다. 안후이·후난을 비롯한 각 지방의 산월(山越) 민족과 그밖의 이민족(異民族)을 토벌 진무(鎭撫)하고, 타이완[臺灣]·하이난섬[海南島] 방면에도 원정군(遠征軍)을 보냈으며, 랴오둥[遼東]의 공손씨(公孫氏)와도 접촉을 시도하는 등 국내외의 경영에 노력하였다.
만년에 태자로 책봉한 큰아들 손등(孫登)이 죽자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손권은 둘째 아들 손화(孫和)를 태자로 책봉하여 후계자로 삼는 한편, 넷째 아들 손패(孫覇)를 노왕(魯王)에 봉하여 태자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했다. 이로써 태자와 노왕 사이에 권력투쟁이 극심하게 일어나 국력이 소모되었다. 250년 손권은 결국 두 파벌을 모두 모조리 처형하고 겨우 10세인 막내 아들 손량(孫亮)을 태자로 책봉하였고, 252년 사망하였다.
1). 후한 말 영웅 손견의 아들
조상의 본적은 오군(吴郡) 부춘1)이고, 하비2)에서 태어났다. 자는 중모(仲謀)이다.
후한(後漢, 동한) 말의 영웅 손견의 아들이고 역시 후한 말의 무장 손책의 동생이다. 어려서부터 형 손책을 따라 강동(江東) 정벌에 나섰다.
헌제 건안(建安) 5년인 200년에 형 손책이 죽자 19세에 제후가 되어 뒤를 이었다. 강동 지구를 통치하며 장소, 주유, 정보 등의 도움을 받았으며, 인재를 널리 구하여 노숙, 제갈근 등을 문하의 식객으로 우대했다.
2). 적벽대전에서 승리하다
건안 13년인 208년에 조조가 형주(荊州,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시)를 장악하고 장강(長江)을 따라 진군해왔다. 손권은 항복하자는 여러 신하의 의견을 물리치고 주유와 정보를 좌우도독(左右都督)으로 삼아 각각 1만 명의 군대를 이끌도록 했다. 손권의 군대는 유비와 연합하여 적벽(赤壁)에서 조조의 군대를 대파하였고,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손권은 장강의 험한 지형을 의지하여 여러 차례 북방의 조조를 공격했다.
219년에는 여몽을 파견하여 형주를 장악했다.
3). 형주를 차지하고 관우를 죽이다
손권은 삼국 정립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숙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비의 촉한과 연합하여 위(魏)나라를 막는 기본 방침을 택했다. 그러나 여몽을 시켜 형주를 차지하고 관우를 죽이는 바람에 양국의 화의가 깨지고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위해 공격해왔다. 이것이 ‘이릉3)의 전투’다. 유비는 이 전투에서 크게 패했고 촉한의 국력은 급속도로 약해졌다. 그러나 위나라를 막아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오와 촉한의 동맹은 회복되었다. 손권은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채 촉한과의 동맹을 굳게 지켰다. 양국의 오랜 우호관계가 결과적으로 위나라의 공격을 견제했다.
4). 인재를 발탁하고 호족을 끌어들이다
손권은 장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온 지방 호족 세력을 신임하는 동시에, 재능을 가진 인물들은 출신 성분을 가리지 않고 발탁했다. 또한 남방의 특징을 파악하여 점진적으로 강동, 특히 오군(吳郡, 지금의 장쑤성 쑤저우 오현에 해당)의 호족 지주와 긴밀하게 연합하여 높은 관직을 위임하는 등 그들을 끌어들이는 데 힘을 다했다. 경제가 발달한 태호4) 유역을 거점으로 한 호족 지주들은 세력이 막강했을 뿐만 아니라 서로 간의 연대도 뿌리 깊었다. 이들은 손권이 자신들의 이익을 충분히 지켜줄 수 있다고 판단하여 그를 지지하고 충성을 표했다.
5). 오나라 황제가 되다
조조의 아들 조비(위 문제)가 동한(東漢, 후한)을 대신해 위나라를 세우자, 손권은 겉으로는 일개 지방 세력인 번(藩)이자 위나라 신하로 자처하고 시간을 벌며 정권의 기초를 다졌는데, 위 문제 황초(黃初) 2년인 221년에 위나라가 내린 봉호(封號)를 받아들여 무창(武昌, 지금의 후베이성 우창시)에서 오왕(吳王)으로 즉위하였다.
그로부터 8년 후인 229년에 손권은 마침내 황제를 자칭하고 연호를 황룡(黃龍)으로 하였으며 무창을 도읍으로 정했다가 뒤에 건업(建業, 지금의 장쑤성 난징(南京)시)으로 옮겨 강동을 통치했다. 황룡 원년인 229년에서 신봉(神鳳) 원년인 252년까지 재위했다.
손권은 만년에 통치 집단 내부의 모순에 시달렸는데, 큰아들 손등이 죽은 후 태자가 된 둘째아들 손화와 넷째아들이자 노나라 왕 손패(孫覇)가 서로를 공격하고 신하들도 두 파로 갈라져 통치에 심각한 위기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에 손권은 태자를 폐하고 노왕 손패를 죽이는가 하면, 연루된 신하들을 혹형으로 다스리고, 어린 아들 손량을 태자로 세워 위기를 타개해 나갔다.
삼국시대 통치자들 중 가장 장수한 끝에 252년 71세로 세상을 떠나 장릉(蔣陵, 지금의 난징 시 쉬안우(玄武)구 소재)에 묻혔다.
시호는 대황제(大皇帝), 묘호(廟號)는 태조(太祖)라 했다.
6). 손권의 국가 운영 정책
손권은 황제가 되어 전제 독재 권력을 확립한 후에는 엄격한 법을 적용했다. 정치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해 지방장관이 멋대로 관직을 버리고 도주하면 사형으로 처벌했다.
농관(農官)을 설치하고 둔전(屯田)을 실시하는 한편 산월(山越, 남부의 소수 이민족)을 평정하거나 항복시켜 군현(郡縣)을 설치했다. 각지에 흩어져 세력을 나누어 가지고 있던 할거 세력을 없애 통치 구역을 강동에서 지금의 푸젠성(福建省), 광둥성(廣東省), 광시성(廣西省), 후난성(湖南省)에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확대했다. 동한 말기 이후 분열되어 있었던 이 지역들은 다시 통일되어 사회, 경제가 발전했다.
손권은 개인의 봉건적 대토지 소유제를 보호함으로써 경제를 발전시켰고, 산월을 정벌하여 약탈해온 ‘생구(生口, 노예)’들을 세가 호족 대지주들과 공신들에게 나누어주어 부곡(部曲, 노예)이나 전객(佃客, 소작인)으로 삼게 했다. 또한 군권의 세습을 인정하여 그 전객들의 요역과 병역을 면제해주었다. 이것이 이른바 복객(復客) 제도다. 그는 노동력이 몰려 있던 태호 유역의 호족 지주들과 이런 방식으로 타협하여 경제발전을 촉진할 수 있었다.
강남 지역의 농업 생산력을 높이고 이 기초 위에서 여러 차례 해외로 사람을 보내 해외 개척에도 나섰다.
7). 관련 유적
관련 유적은 그의 무덤이 대표적이다. 『삼국지』에 따르면 손권은 죽은 뒤 장릉에 묻혔다. 이곳은 당시 남경(南京, 난징시)의 종산(鐘山)을 가리킨다.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 손종(孫鐘)의 이름자를 피해 종산을 장산(蔣山)으로 바꾸고 자신의 무덤을 장릉이라 했다.
훗날 명 태조(明太祖) 주원장이 종산에 자신의 무덤인 효릉(孝陵)을 만들 때 담당관이 손권의 무덤을 이장하자고 건의했지만 주원장은 손권은 영웅호한(英雄好漢)이니 그대로 두라고 했다.
손권의 무덤은 원래 손릉강(孫陵崗)이라 불렸는데, 이곳에 매화가 많기 때문에 1940년대에 매화산(梅花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곳에는 그의 부인인 보씨(步氏), 반씨(潘氏) 및 선명태자(宣明太子) 손등 등이 함께 묻혀 있다.
삼국시대의 오의 건국자이다. 오군(吳郡) 부춘(富春) 출신으로 자는 중모(仲謀), 부(父)는 손견(孫堅)이며 형인 손책의 대업을 이어받아 양자강 하류에 세력을 구축하고 건업(建業. 현 남경)에 도읍하였다. 유비(劉備)를 도와 조조(曹操)를 적벽(赤壁)에서 물리친 고사는 유명하다.
2. 孫堅"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武將)으로 황건의 난 토벌에 공을 세우고 동탁 토벌에도 가담하였다.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의 공격에 나섰다가 현산(峴山)에서 전사하였다. 아들인 손권(孫權)이 오(吳)를 건국한 뒤에 무열황제(武烈皇帝)로 추증되었다.
오군(吳郡) 부춘현(富春縣, 지금의 浙江省 杭州 富陽) 출신이다. 아들인 손권(孫權)이 오(吳)를 건국한 뒤에 시호(諡號)를 무열황제(武烈皇帝)라고 하였다. 춘추시대(春秋時代) 병법가(兵法家)로 이름을 날린 손무(孫武)의 후손이라고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오군(吳郡) 지역의 호족(豪族) 출신으로 17세 때 전당(錢唐)에서 해적을 물리쳐 이름을 떨쳤다. 그리고 회계(會稽)의 허창(許昌)이 반란을 일으키자 오군(吳郡)의 사마(司馬)로서 1천여명의 군사를 모아 이를 토벌하였으며, 이 때의 공으로 현승(縣丞)으로 임명되었다. 184년(中平 원년)에 장각(張角)이 이른바 황건(黃巾)의 난을 일으키자, 토벌군에 참여해 공을 세워 의랑(議郎)으로 임명되었으며, 장사태수(長沙太守)가 되어 구성(區星)이 이끈 반란군을 토벌하여 오정후(烏程侯)로 봉해졌다.
손권(孫權)의 아버지로, 자는 문대(文臺)고, 젊어서 현리(縣吏)가 되어 허생(許生, 또는 許昌)의 반란을 진압했다. 영제(靈帝) 중평(中平) 원년(184) 주준(朱imagefont)을 따라 황건군(黃巾軍)을 진압하고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올랐다. 얼마 뒤 장사태수(長史太守)로 옮겨 사공(司空) 장온(張溫)의 부하로 구성(區星) 등의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오정후(烏程侯)에 봉해졌다.
후한(後漢)의 영제(靈帝, 재위 168~189)가 죽은 뒤 동탁(董卓)이 권력을 잡고 횡포를 부리자 각지의 제후들이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손견도 군사를 일으켜 형주자사(荊州刺史) 왕예(王睿)와 남양태수(南陽太守) 장자(張咨)를 죽이고 노양(魯陽)에 이르러 원술(袁術)과 만났다. 원술(袁術)은 표(表)를 올려 손견이 파로장군(破虜將軍)과 예주자사(豫州刺史)를 겸하도록 하였고, 손견은 노양성(魯陽城)에 주둔하며 진군(進軍)을 준비하였다. 동탁(董卓)이 군대를 보내 노양성(魯陽城)을 공격하려 했으나 손견은 이를 물리쳤다. 하지만 양동(梁東)에서 동탁(董卓) 군대의 공격을 받아 간신히 포위를 뚫고 탈출한 뒤, 다시 병사를 모아 양인(陽人)에서 동탁의 군대를 대파하고 화웅(華雄) 등을 죽였다.
손견이 동탁의 군대를 격파하며 세력을 키우자 원술은 그를 경계하여 군량미를 보내지 않았다. 손견은 노양(魯陽)으로 달려가 원술을 설득하여 군량미를 조달받고 대곡(大谷)으로 진군하여, 뤄양[洛陽]을 위협하였다. 동탁은 뤄양[洛陽]에 불을 지르고 한구관[函谷關]으로 퇴각하였고, 손견은 뤄양[洛陽]에 진입하여 역대 왕들의 능묘를 보수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여 노양(魯陽)에 머물렀다.
192년(初平 3년), 손견은 원술의 종용을 받아 형주(荊州)의 유표(劉表)를 공격하였다. 손견은 유표가 파견한 황조(黃祖)를 격파하고 한수(漢水)를 건너 양양(襄陽)을 포위했다. 하지만 현산(峴山)에서 황조(黃祖) 군사가 쏜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동탁(董卓)을 토벌하는 군사가 일어나자 원술(袁術)과 병사를 합쳐 파로장군(破虜將軍)으로 예주자사(豫州刺史) 직을 수행했다. 동탁 군대를 격파하고 낙양(洛陽)으로 진격하여 동탁이 약탈한 후한 황제의 능들을 수복하고 우물 속에서 전국새(傳國璽)를 얻었다. 나중에 노양(魯陽)에 이르러 여러 부곡(部曲)을 지배했다. 헌제(獻帝) 초평(初平) 2년(191)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와 싸워 크게 이겼지만, 자기의 용맹만 믿고 단기로 현산(峴山)에 출전했다가 유표의 장수 황조(黃祖) 부하가 쏜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둘째 아들 손권이 칭제한 뒤 무열황제로 추봉되었다.
3. 孫策. 入主江東.
후한 말기 오현(吳縣) 부춘(富春) 사람. 자는 백부(伯符)고, 손견(孫堅)의 아들이며, 오(吳)나라를 세운 손권(孫權)의 형이다. 어렸을 때 수춘(壽春)에 살아 강남의 사족(士族)들과 폭넓게 교제했다. 아버지가 죽자 장인인 단양태수(丹陽太守) 오경(吳景)에게 갔다. 한헌제(漢獻帝) 흥평(興平) 초에 원술(袁術)에게 의지했고, 손견의 남은 세력 1천여 명과 군대를 이끌고 오경을 도왔다.
원술이 절충교위(折衝校尉)로 삼고 도강(渡江)하여 여러 곳을 다니면서 전투를 벌이다가 유요(劉繇)를 격파했다. 또 절강(浙江)으로 들어가 엄백호(嚴白虎) 등을 격파하고 스스로 회계태수(會稽太守)가 되었다. 나중에 여강군(廬江郡)을 빼앗아 강동(江東)에 손씨 정권을 세웠다. 조조(曹操)가 토역장군(討逆將軍)으로 임명하고 오후(吳侯)에 봉했다. 나중에 평소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오군태수의 측근에게 살해당했다. 동생 손권(孫權)이 칭제(稱帝)하자 장사환왕(長沙桓王)에 추시(追諡)되었다.
자는 백부(伯符). 손견의 장자이자 손권의 형. 손견이 죽자 원술에게 잠시 의탁해 있다가 손견을 섬기던 이들의 도움을 얻어 동오로 들어가 기반을 닦는다. 그러나 웅지를 펴보지 못하고 26세로 요절한다.
175년 저장성[浙江者]에서 출생했다. 자(字)는 백부(伯符)이고, 손권(孫權)의 형이다. 이름난 맹장이었던 아버지 손견(孫堅)이 죽은 후 서주 근처인 강도로 이주했다. 단양태수에게 몸을 의지했다가 194년 원술(袁術)의 휘하에 들어가 아버지의 군대를 이어받았다. 이때 받은 군사는 1천 명이었다. 원술의 휘하에서 수많은 공적을 세웠지만 그의 기개를 두려워한 원술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이에 원술로부터 독립하기로 결심하고 강남(江南)을 평정, 일족과 측근을 태수로 임명하여 진무(鎭撫)와 개발에 힘썼다. 마침 원술이 제위에 오르려 하자 손책은 이를 격렬하게 비난하면서 원술과의 관계를 청산했다. 조조(曹操)는 이를 알고 손책과 손을 잡는 편이 이롭다고 판단해 그를 토역장군 오후(吳侯)에 봉하고 혼인관계를 맺었다. 200년 조조와 원소(袁紹)가 관도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손책은 허도(許都)에 있는 한나라 헌제(獻帝)를 맞아들이려 했으나 실행에 옮기기 전 자객의 칼을 맞고 죽었다.
중국 후한(後漢) 말의 무장. 손견 사후 군대를 이어받아 강남을 평정, 진무와 개발에 힘썼다.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한나라 헌제를 맞으려 했으나 실행에 옮기기 전에 죽었다.
조조가 북방을 통일하고 있을 때, 남방에서는 다른 할거세력이 점차 강대해지고 있었다. 그 세력의 수령은 강동의 주인인 손책(孫策)과 손권(孫權) 형제였다. 강동이란 지금의 장강 하류의 강남 일대를 말한다. 손책의 자는 백부(伯符)이며, 오군(吳郡) 부춘(富春, 절강성 부양) 사람으로 명문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손견(孫堅)은 농민 봉기를 진압한 공로로 장사 태수를 책봉받았다. 손견은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하여 북상하다가 노양(魯陽)에서 원술을 만났다. 원술은 손견을 파로장군으로 임명했다. 손견은 원술과 유표(劉表)가 형주를 쟁탈하는 싸움에서 원술의 선봉장이 되어 유표의 대장 황조(黃祖)를 격파했다. 그리고 승세를 타고 추격하다가 숨어 있던 복병들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손견이 죽은 다음 맏아들인 손책이 그 직무를 이어받아 군대를 통솔했다. 손책은 언제나 전쟁터에서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웠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손랑(孫郞)'이라고 불렀다.
동생 손권을 가까이 불러 관인(官印)과 인수(印綬, 관인을 몸에 차기 위한 끈)를 넘겨주며 당부했다. “강동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전장에서 승부를 겨루고 천하를 다투는 일에서는 아우가 나보다 못하지만, 인재를 등용하고 그들이 각자 힘을 다하게 하여 지금의 강동을 보존하는 데는 내가 아우보다 못하네.” 강동을 종횡하던 '손랑'은 숨을 거두었다. 손책이 죽은 후 동생 손권이 형의 직무를 대신해 강동의 대권을 장악했다. 당시 손권의 나이 겨우 열아홉이었으나, 장소와 주유의 보좌로 형의 업적을 계승해 강동을 발전시켰다.
손책은 평소 사냥을 즐겼는데 어느 날인가는 사슴을 쫓다가 강변에 이르게 되었다. 그의 말이 하도 빨라 수하들은 미처 따라오지 못하고 뒤에 처져 있었다. 그런데 이때, 오군의 태수였던 허공(許貢)의 문객 셋이 강변에 숨어 있었다. 손책이 오군을 함락했을 때 태수 허공을 죽이자, 주인의 원수를 갚을 시기를 줄곧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허공의 문객들은 손책을 향해 일제히 활을 쏘았다. 손책은 이마에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손책의 몸은 신속히 악화되었다.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안 손책은 모사 장소 등을 불러서 당부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오, 월 땅은 인력과 자원이 풍부한 데다가 방어하기 좋은 장강까지 있어서 큰 위업을 이룩할 수 있소. 부디 내 동생 손권을 잘 보필해 주길 바라오.”
손책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큰 위업을 이루려 했으나 원술 밑에서는 그런 포부를 실현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기회를 노려 원술의 수하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마침 양주 자사 유요(劉䌊)가 원술의 외숙인 강동 태수 오경을 단양(丹陽)에서 쫓아냈다. 손책은 강동에 가서 외숙의 원수를 갚겠다고 원술에게 청했다. 원술은 손책에게 어서 가서 외숙의 원수를 갚으라며 군사 1천 명을 내주었다. 손책은 군사들을 데리고 강동으로 오는 도중에 군사들을 더 모집했다. 수춘(壽春)에서 역양(歷陽)까지 오는 동안에 그는 군사를 5∼6천 명이나 모집했다. 이때, 오랜 친구인 주유가 단양의 친척집에 와 있다가 손책이 군사를 이끌고 온다는 말을 듣고 그도 군사를 거느리고 찾아갔다. 그리고 손책에게 군량을 비롯한 기타 물자를 도와주었다. 이렇게 손책은 자기의 역량을 확충함과 동시에 유력한 조수를 얻게 되었다. 장강을 건넌 손책은 유요의 군대를 여러 차례 격파했으며 마침내 유요를 단양에서 쫓아내고 오군과 회계군을 점령했다. 아울러 강동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손책은 군사들이 백성의 재물을 노략질하는 것을 엄금하였으며 백성의 이익을 해치는 일을 하면 엄하게 다스렸다. 그래서 손책의 군대는 강동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손책을 죽음으로 몬 우길은?.
『삼국지연의』 제29회의 회목은 ‘소패왕이 노하여 우길(于吉)을 참수하다.’이다. 손책은 원한을 맺은 자객들로부터 불의의 습격을 받고 상처를 입는다. 그 상처가 낫기도 전인 어느 날 성루(城樓)에서 일을 논의하는데 갑자기 여러 장수들이 성루를 내려간다. 그들은 도인(道人) 우길에게 다가가 큰 절을 하고 신선(神仙)이라고 부르며 우러러 공경한다. 신선을 믿지 않던 손책이 우길을 체포하라고 명한다. 잡혀온 우길에게 재주를 물으니 바람과 비를 불러 올 수 있다고 했다. 이에 우길에게 단에 올라 비를 빌도록 명하니, 때맞추어서 큰 비가 내린다. 이 광경을 본 여러 관원들은 더욱 우길에게 감복하여 큰 절을 올린다.
우길의 능력이 대중을 현혹시킬 것이라고 생각한 손책은 속히 참수토록 명한다.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우길을 죽였지만 이때부터 손책은 꿈속에서 여러 차례 우길을 만나게 되고, 우길의 혼에 이끌려, 앉으나 서나 마음이 불안하고 정신이 황홀해진다. 어느 날 거울을 들고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던 손책은 거울 속에 서있는 우길의 모습을 보게 된다. 곧장 거울을 깨뜨린 손책은 크게 고함을 지른다. 이로 인하여 아물던 상처가 다시 터지고 오래지 않아 죽게 된다.
이렇듯 우길에 대한 나관중의 묘사는 현실적으로 도저히 발생될 수 없는 황당하고 허망하기 짝이 없는 일들이다. 그렇다면 이 내용은 터무니없는 날조란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역사상 근거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지ㆍ손책전』 배송지 주에서 인용한 『강표전(江表傳)』, 『지림(志林)』, 『수신기(搜神記)』 등에는 이에 관한 내용이 산견된다. 그래서 배송지는 ‘『강표전』, 『수신기』 등에 적힌 우길에 관한 기록은 동일하지 않아서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라고 했던 것이다.
북제(北齊) 사람인 안지추(顔之推)는 『환혼기(還魂記)』에서 이렇게 서로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모순까지 있는 부분을 연결시키고 있다. 즉 손책이 우길을 처치한 사건과 사냥 도중 자객에게 상처를 입은 사건을 뒤바꾸어 배치했다. 손책의 상처가 나으려는 참에 거울을 들고 자신을 비추다가 거울 속에 나타난 우길을 만나게 되는데 정작 뒤를 돌아보면 사라지기를 세 번이나 반복하다가 그만 거울을 부수고 크게 고함을 지르고 그 바람에 아물던 상처가 터지고 조금 뒤에는 죽고 말았다라고 한 것이다.
이 부분은 당연히 각도를 달리해서 평가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모종강이 이 회의 평주에서 이르기를, ‘손책은 신선을 믿지 않는데, 이 점이 바로 손책이 영웅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한 무제(漢武帝)와 같이 영명(英明)한 경우도 오히려 신선에 유혹되고 방사를 좋아했으나 손책은 그렇지 않으니, 이에서 우리는 그의 식견이 보통 사람을 크게 뛰어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지의 평주에도 역시 이런 의미가 있다. 이런 것이 바로 그들의 고명한 점이다.
나관중이 표현하고자 한 본의는 아마도 손책이 우길의 손에 죽었다고 여긴다거나 손책의 죽음이 우길과 지극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나관중이 묘사한 것처럼 진실로 우길이 비바람을 불러 오고 병을 고칠 수 있었다면, 손책은 감히 우길을 죽이지 못하고 응당 공경하고 받들었을 것이다. 아쉬운 점은 우길과 같은 이러한 신선은 지금까지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나관중은 이러한 자료들을 적당히 정리해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형태의 소설로 완성했다. 나관중은 역사소설과 역사과학을 적당히 혼합함으로써 『수신기』와 같은 종류의 기괴한 사건을 그의 역사소설 속으로 적절히 끌어들였던 것이다. 만약 그가 이런 기괴한 사건을 역사사실로 간주했다면 당연히 착오를 범한 것이다. 하지만 『삼국지연의』를 쓸 때 설서예인들의 영향을 크게 받아 신기하고 괴이한 사건을 특별히 중시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런 사건은 수많은 독자들을 흡인하기에 충분하여 누구나 듣기 좋아하고 읽기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나관중은 사건의 진실성이나 합리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곧바로 자신의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나관중이 『삼국지연의』를 쓰면서 참고한 서적이 광범위하다는 것은 장점이겠지만, 때로는 너무 복잡해서 괴탄하고 황당한 것들마저 끌어들인 것은 단점이라 할 수 있다.
2017년 12월 5일 화요일
전통 한지. Korean paper, 韓紙.
전통 한지 Korean paper, 韓紙.
종이를 발견하기 전, 인간은 죽간이나 목간을 주로 사용하였다. 종이의 기원에 대한 연대와 장소는 분명하지 않으나 기원전 2,500년경 고대 이집트인들이 파피루스(Papyrus)라는 식물 내피를 가공하여 종이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식물성 섬유를 종이의 단계로 만드는 초보적인 단계로 종이의 기원으로는 엄밀히 보기 어렵다. 이집트에서 파피루스를 사용하는 동안 동양에서는 문자를 표기하기 위하여 다양한 형태의 소재들, 예를 들어 소나 돼지의 뼈, 거북의 등껍질, 청동 그릇, 나무판자, 얇은 대나무판, 판석 등을 사용했다. 중국에서는 상고시대 때 거북이의 껍질이나 죽간, 목간, 비단 위에 글씨를 쓰고 기록하였으나 서한시대(B.C.206~224)에 이르러 마포(식물인 마)의 원료로 식물성 섬유종이를 만들어 사용했다. 『후한서』의 「채륜전」에 "··· 和帝 원년(A.D.105)에 채륜이 인피 섬유와 마 등의 식물섬유를 원료로 하여 종이를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었으나 최근 전한시대 고분이 발굴되면서 이보다 150~200년 앞서 종이가 발견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중국에서는 채륜이 황제에게 종이의 제조 과정을 보고한 이후 종이를 문서 표기의 대중적인 소재로 사용하도록 결정했다는데 큰 의미를 둔다. 이후 당, 송 시대에 와서 종이 제조기술이 향상되어 품종과 품질이 다양해지고 명대에 이르러 선덕 연간에 '선지'가 제조되기에 이른다. 그 후 청대에는 종이의 종류가 더욱 다양해지고 좋은 질의 종이가 만들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채륜이 종이를 만들었던 서기 105년경은 한반도에 낙랑군을 비롯한 4군이 설치된 시기로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성립되면서 제지술이 전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6세기 경에는 고구려 승려 담징이 먹, 붓과 함께 일본에 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이 기록에 사용된 재료인 종이는 2세기부터 현재까지 사용되는 가장 오래된 기록재료이다.
한지는 닥나무 껍질로 만든 순수한 한국 종이를 일본의 화지(和紙), 중국의 당지(唐紙), 서양의 양지(洋紙)와 구분하여 칭하는 말이며, 저피(楮皮, 닥나무 껍질)→조비→조회→종이로 어원이 변천하였다.
한지의 역사"
제지술이 우리나라에 언제 도입되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대개 중국과 일본 문헌을 통해 삼국시대라고 알려지고 있다. 다만 『고려사』에 종이와 관계되는 짤막한 문장이 군데군데 있고, 백제 고이왕 52년(서기 285)에 왕인 박사가 천자문과 논어를 일본에 전해 준 사실과 고구려 영양왕 21년(310)에 담징이 일본에 제지술을 전해주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당시 초지법과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으리라 생각된다.
우리나라 종이는 예로부터 중국에서도 높이 평가할 만큼 명성이 자자했다. 송나라 손목(孫穆)이 지은 『계림지(鷄林志)』에는 "고려의 닥종이는 윤택이 나고 흰 빛이 아름다워서 백추지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고반여사(考槃余事)』에는 "고려 종이는 누에고치 솜으로 만들어져 종이 색깔은 비단같이 희고 질기기는 마치 비단과 같은데 글자를 쓰면 먹물을 잘 빨아들여 종이에 대한 애착심이 솟구친다. 이런 종이는 중국에는 없는 우수한 것이다"라고 적혀있다.
조선시대에는 태종·세종 때 조지서(造紙署)를 두고 종이를 생산할 정도로 수요가 많았고, '상화지(霜華紙)', '백면지(白棉紙)' 등이 유명했다. 조선 영조 때 서명웅(1716~1787)이 지은 『보만재총서』에는 "송나라 사람들이 여러 나라 종이의 품질을 논하면 반드시 고려지를 최고로 쳤다. 우리나라의 종이가 가장 질겨서 방망이로 두드리는 작업을 거치면 더욱 고르고 매끄러웠던 것인데 다른 나라 종이는 그렇지 못하다"라고 적고 있어 한국 종이의 우수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종이가 대량 수입됐고 해방 후에는 양지가 점차 대중지의 위치를 차지해 버렸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이는 신라시대에 제조된 『무구정광다라니경』(국보 제126호, 704~751년 제조)으로 중국에서 말하는 '백추지'이다. 삼국시대에는 백추지가 주류를 이뤘고, 고려시대에는 '고려지'로 불리는 '견지(繭紙)', '아청지(鵝靑紙)' 등이 중국에서도 최고급지로 평가 받았다.
중국 역대 제왕의 진적을 기록하는 데에 고려의 종이만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 종이의 명성은 조선으로 이어져 한지가 중국과의 외교 필수품이 되기도 했다. 한지의 질이 명주와 같이 정밀해서 중국인들은 이것을 비단 섬유로 만든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러한 이유로 한지가 중국과의 외교에서 조공품으로 많이 강요되었다.
한지의 제지법"
한지의 주원료는 닥과 닥풀이다. 종이를 만드는 방법은 원료나 혼합하는 방법에 따라 조금씩 다르나 한지 제지의 전체적인 흐름은 1) 닥나무 채취 2) 닥나무 껍질 벗기기 3) 닥나무 껍질 삶기 4) 닥나무 껍질 씻기 5) 닥나무 껍질 두드리기 6) 닥나무 껍질에 닥풀 풀기 7) 한지 뜨기 8) 한지 말리기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깨끗이 다듬은 닥나무의 껍질을 벗겨 건조시키면 흑피가 된다. 다음으로 10시간 정도 흐르는 물에 담가 두었다가 껍질을 벗겨내면 백피가 된다. 메밀대나 콩짚대를 태워 만든 재로 잿물을 내어서 4~5시간 삶는다.
예로부터 종이를 만드는 사람은 삶는 과정을 제일로 여겨, 좋은 날을 택하였는데, 그것은 닥이 너무 삶아지거나 덜 삶아져도 좋은 종이를 얻어낼 수 없으며, 한 번 잘못 삶아진 닥은 다시 삶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삶은 닥은 맑은 물에 여러 번 씻어서 잿물기를 제거한 다음, 남아 있는 티를 일일이 골라낸다.
넓적한 돌판 위에 올려놓고 40분에서 1시간 정도 떡메로 고해(=두드리기)한다. 그리고 고해된 것을 지통에 넣고 뜨는데, 이때 '황촉규(속칭 닥풀)'라는 식물 뿌리의 즙을 진윤제로 섞는다. 이 닥풀은 날씨가 더워지면 삭아버리는 성질이 있어서 종이는 여름철보다는 서늘하고 건조한 가을이나 겨울철에 뜨는 것이 좋다.
닥섬유와 닥풀을 섞을 때는 종이의 용도에 맞추어서 경험이 많은 사람이 적당히 혼합한다. 혼합할 때 골고루 풀어지라고 대막대기로 휘젓는데, 이 과정을 '풀대친다'고 한다. 풀대질을 한 다음에는 대나무 세초발을 발틀에 얹어서 섬유를 고르게 떠낸다. 이것을 '물질한다(초지(抄紙))'고 하는데, 종이를 만드는 사람(지장)의 숙련된 솜씨가 가장 잘 드러나는 중요한 과정이다. 닥풀의 혼합 정도와 물질하는 솜씨에 따라서 종이의 두께가 결정되는 것은 물론, 종이바닥의 곱고 거친 정도가 결정되어 종이의 종류와 품질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한지를 뜨는 방법은 대개 흘림뜨기와 가둠뜨기가 있는데, 전통적인 한지의 초지법은 흘림뜨기인 외발뜨기와 장판지뜨기이고, 현재 많이 사용되고 있는 초지방법인 쌍발뜨기는 가둠뜨기와 흘림뜨기의 중간 형태를 띠고 있다.
한장 한장 떠낸 종이를 습지라고 한다. 습지는 하룻밤 동안 무거운 돌로 눌러놓아 서서히 물기를 뺀 다음 건조시킨다. 건조방법은 옛날에는 진흙 담이나 온돌 방바닥에 습지를 붙여 건조했는데, 이러한 건조 방법은 습기가 천천히 말리면서 고르게 말라 종이가 질기게 된다. 요즈음은 대부분 불에 달군 철판 위에서 건조하고 있다. 건조가 끝나면 일단 종이가 완성되는 것이지만, 여기에 다시 도침(다듬이 방망이질)을 하여 곱고 윤기나게 다듬음으로써 재래식 방법에 의한 종이는 비로소 완성된다.
한지의 특징"
우리나라의 한지는 일본의 화지(和紙), 중국의 선지(宣紙)와 구별된다. 세 나라 간의 종이는 사용 원료도 구별된다. 한지는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 질기고 자연스러운 반면, 화지는 일본산 닥나무 껍질로 만드는데 조직이 치밀하고 매끄러우며, 선지는 중국 닥나무 껍질, 섬유와 볏짚 등으로 만들어 거칠고 약하다. 한지가 우수한 것은 우리나라 닥나무를 비롯한 재료가 다른 나라에 비해 질적으로 나은 데다 종이 제조방식이 껍질을 벗겨 닥섬유질을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이다.
2006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한지페스티벌에서도 한지의 우수성이 드러났다. 한지로 만들어진 갖가지 등이 파리 볼로뉴 숲을 밝히던 중 갑자기 비가 내렸지만 우리의 전통 한지로 만든 등은 불이 꺼지지 않았다.
한지는 질기고, 보온성과 통풍성이 아주 우수하다. 바람을 잘 통하게 해주고 습기를 빨아들이고 내뿜는 성질이 있어 건조되었을 때 찢어지지 않고 보관성이 좋아서 수명이 오래 간다.
구텐베르크의 성경은 발간된 지 550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지질의 보관에 문제가 있어 열람조차 불가능한 암실에 보관되어 있는 반면에 한지는 천 년 세월을 견뎌낸 것은 물론 삭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다. 한지의 우수한 보존성은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이인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700년대 초에서 751년 사이 후기신라시대에 제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경덕왕 13년(754)에 필서로 쓰였던 묵서사경인 백지 『묵서대방광불화엄경』은 최고(最古)의 필서본으로 이 역시 한지의 우수성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고려 인종 23년(1145)경에 제지창 지소에서 한지로 발간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의 일부가 850년 동안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 역시 한지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지의 주원료인 닥나무의 인피섬유는 길이가 보통 20~30mm 이상이며, 긴 것은 60~70mm까지 있다. 그런데 서양 종이인 양지의 원료인 목재펄프의 섬유의 길이는 침엽수가 2.5~4.6mm, 활엽수가 0.7~1.6mm 정도로 매우 짧다. 따라서 인피섬유는 목재펄프에 비해 섬유의 결합이 강하고 질기며, 조직의 강도가 뛰어나 훌륭한 종이가 될 수 있다.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 껍질의 섬유는 길이가 균등한 데다 서로 간의 폭도 매우 좁다. 게다가 섬유의 방향도 직각으로 교차하여 그물 같은 구조를 띠고 있어 견고하다.
한지는 다양한 원료와 방식으로 제조될 수 있으나 주로 닥나무의 인피섬유, 맑은 물, 경우에 따라 목회를 사용하여 80여 가지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한지 제지의 원리는 식물의 섬유소를 물에 푼 후 그것을 떠내어 말리는 것이다. 이때 섬유소들은 접착제 없이 셀룰로오스 분자 사이의 수소결합을 하여 서로 엉키면서 섬유세포를 구성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한지는 산성도가 7.89로 중성을 띤다.
우리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신문지나 교과서가 세월이 흐르면 누렇게 변색되는 이유는 사용된 펄프지가 산성지이기 때문이다. 양지는 pH 4.0 이하의 산성지로서 수명이 고작 50~100년 정도면 누렇게 황화현상을 일으키며 삭아버리는 데 비해, 한지는 중성지로 화학반응을 쉽게 하지 않고, 세월이 지날수록 결이 고와지고 수명이 오래가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근래에 와서 미국, 캐나다,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19세기 후반 및 20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종이의 산도를 측정해 본 결과 산도가 4이하가 대부분이었으며, 그대로 방치한다면 이 기간에 제조된 종이는 금후 200~300년 사이에 분해되어 없어져 버릴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들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이들 도서를 약품처리하고 중성지를 제조하려는 노력이 행하여졌다. 우리의 한지의 수명이 길고 보존성이 우수하여 선진 각국에서 분석해 본 결과 산성계 첨가제나 이즈제를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음을 알았으며, 그야말로 '중성'에서 초지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후부터 세계가 중성지 제조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지의 질을 향상시킨 또 다른 요인이 있는데, 섬유질을 균등하게 분산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식물성 풀인 닥풀이다. 닥풀은 섬유가 빨리 가라앉지 않고 물속에 고루 퍼지게 하여 종이를 뜰 때 섬유의 접착이 잘 되도록 하며, 얇은 종이를 만드는 데 유리하고 겹쳐진 젖은 종이를 쉽게 떨어지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또, 한지 제조의 마무리 공정으로 종이 표면이 치밀해지고 광택이 나도록 하기 위해 풀칠한 종이를 여러 장씩 겹쳐 놓고 내리치는데, 이 기술을 '도침'이라고 한다.
한지의 종류"
한지는 종류에 따라 그 명칭도 다양 서화용으로 쓰이는 종이는 크게 선지계(宣紙系)와 당지계(唐紙系)로 나누어진다. 선지는 지질이 무른 편이며 습기를 흡수하는 성질이 있다. 옥판전(玉版箋), 라문전(羅文箋), 백지(白紙) 등이 선지에 속한다. 중국제 종이의 종류에는 일번당지(一番唐紙), 이번당지(二番唐紙), 백당지(白唐紙) 등이 있으며 이 외의 가공지로서 납전(蠟箋), 채전(彩箋), 문양전(文樣箋), 주금전(酒金箋), 문당전(文唐箋) 등이 있다.
청조(淸朝)시대의 종이로서 지금까지 감상의 대상으로 애장되는 고지(古紙)가 있는데 징심당지(澄心唐紙), 방금율산장경지(倣金栗山藏經紙) 같은 것이 있다. 화선지는 먹물을 잘 흡수하며 먹의 번짐이 좋은 서예용 종이를 말하며, 현재 시판 중인 대표적인 화선지로는 오당지, 옥당지, 연선지 등이 있다. 순지는 우리나라의 전통 한지로서 닥나무 껍질로 제조하는 종이다. 보존성이 뛰어나며 질겨서 그림용(민화)이나 서예용으로 이용된다. 색지는 순지를 염색한 것으로 색상이 다양하고 아름다워 용도가 다양하다. 문양지는 특수용지로 화선지 및 색지를 이용한 다양한 문양이 있다. 순지를 2장 또는 3장을 합한 두꺼운 종이로, 합한 매수에 따라 2합지, 3합지로 칭하며 주로 동·서양화용으로 사용된다.
한지의 구조적 특성"
평량, 두께, 밀도, 지합, 방향성 등이 있다. 평량(g/m2)은 물리적 광학적 성질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종이는 균일한 두께를 유지하는 것이 좋고, 두께에 따라 종이의 품질이 결정된다. 밀도는 섬유 간 결합력을 크게 좌우하며, 지합은 제지할 때 섬유나 기타 첨가제 등이 종이를 형성할 때 얼마나 균일하게 분포되었는지를 판단하는 지표로, 외관에 영향을 미친다.
종이는 내부응력을 가지고 있어 함수율이나 주변 상대습도에 따라 종이의 치수변화가 일어난다.
한지의 강도적 특성"
종이의 강도는 일반적으로 인장강도, 파열강도, 인열강도, 내절도, 빳빳한 정도(Stiffness) 등이 있다. 이 특징들은 섬유의 종류, 유연성, 결합강도뿐 아니라 구조적 특징 중 평량, 밀도, 함수율 등에 의해서도 크게 좌우된다. 내절강도와 인장강도, 인열강도는 종이의 보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내절강도는 종이 노화와 직접적 관련이 있고, 인장강도는 내구성, 인열강도는 섬유길이, 섬유결합력, 지합, 평량 등과 관련이 있다.
한지의 화학적 특성"
종이를 구성하는 식물성 섬유는 대부분이 셀룰로오스(Cellulose), 헤미셀룰로오스(Hemicellulose), 리그닌(Lignin) 및 추출물(Extractives)의 화학 성분을 지니고 있다. 특히 식물섬유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며, 섬유의 특성과 제지 원료로서의 적합 여부를 좌우하는 것은 셀룰로오스이다. 셀룰로오스는 탄소, 수소, 산소로 구성된 탄수화물(Carbonhydrate) 분자가 길게 결합되고, 많은 양의 당 단위로 이루어진 다당류의 일종이다. 셀룰로오스는 아래 그림과 같이 셀로바이오스(Cellobiose)가 측면결합을 하여 직선상의 사슬을 이루며, 셀로바이오스는 물과의 친수성이 높은 자유 수산기(-OH)를 포함하고 있어서 쉽게 수소결합(Hydrogen Bond)을 이룬다. 수소결합은 화학적 결합보다는 약하지만 길고 많은 수소결합을 하게 되어 강한 결합력을 갖는다. 따라서 보존성과 관계된 종이의 강도는 섬유의 강도라기보다는 섬유 사이의 수소결합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종이 원료와 달리 펄프를 서로 결합시키기 위하여 별도의 접착제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종이의 성질은 주로 종이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섬유의 구조에 의하여 결정된다.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특성은 섬유 길이와 세포벽 두께이다. 섬유 간의 결합을 위한 최소의 섬유 길이가 필요하며, 실제로 섬유 길이는 인열 강도와 비례한다. 종이를 만드는 제지공정 중에서 고해는 섬유의 표면적을 넓혀 더 많은 결합점을 갖도록 교착시키고 물의 표면장력으로 밀착하게 해서 수소결합이 일어나게 해 탄성을 갖는 종이를 만든다.
한지의 광학적 특성"
광학적 성질은 빛과 종이와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우리 눈이 다른 시각적인 느낌을 갖도록 하는 것으로 색, 명도, 불투명도, 광택 등이 있다. 종이는 셀룰로오스 분자가 빛을 흡수하면 열화가 일어나며, 재료, 표백제, 충전 및 도공, 염료, 초지방법, 표면 마무리 등에 따라 다르다. 빛 중에서도 자외선이 큰 피해를 주는데 셀룰로오스가 직접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제지시 첨가되는 첨가물에 의해 열화가 일어나며, 광화학 반응으로 착색의 원인이 된다.
우리나라의 한지는 일본의 화지(和紙), 중국의 선지(宣紙)와 구별된다. 세 나라 간의 종이는 사용 원료도 구별된다. 한지는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 질기고 자연스러운 반면, 화지는 일본산 닥나무 껍질로 만드는데 조직이 치밀하고 매끄러우며, 선지는 중국 닥나무 껍질, 섬유와 볏짚 등으로 만들어 거칠고 약하다. 한지가 우수한 것은 우리나라 닥나무를 비롯한 재료가 다른 나라에 비해 질적으로 나은 데다 종이 제조방식이 껍질을 벗겨 닥섬유질을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이다.
2006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한지페스티벌에서도 한지의 우수성이 드러났다. 한지로 만들어진 갖가지 등이 파리 볼로뉴 숲을 밝히던 중 갑자기 비가 내렸지만 우리의 전통 한지로 만든 등은 불이 꺼지지 않았다.
"호정지
함경북도에서 재배하는 귀리짚으로 만든 황색의 한지로서 우리나라 고래로부터 생산된 명물인데 일병 북지, 북황지라고도 한다. 백색의 한지를 백지라 하는데 한지를 필사하는 데 편리하도록 방망이로 다듬이질을 한 백지를 말한다. 또 가는 털과 이끼를 섞어서 뜬 종이를 태지라 한다.
곡지
곡지(미지·가지지라고도 함)는 사경용의 종이로 저피를 원료로 하여 만든 것이고, 갈대를 원료로 하여 수록법에 의해 만든 고대 우리나라 한지로 로화지가 있다.
상지
상지는 도토리나무로 물들인 닥지인데, 주로 니금, 사경의 서사에 이용되었다.
장지
장지는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생산되었으며 지질이 두껍고 질기며 지면에 윤이 나서 문서 기록용으로 쓰인다.
태상지
태상지는 전라도 산 해태를 섞어서 종이를 뜬 것으로서 문양이 아름다운데 옛날에는 〈어음〉에 쓴 종이로 지질이 강하다.
생지
생록의 한지(뜬 대로의 종이)
단치
우리나라 고대 한지의 일종으로서 봉서에 사용
도침백지
홍두깨에 말아서 다듬이질을 하여 광택을 낸 백지로 옛날에는 글씨를 빨리 쓰기 위해서 이러한 방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예지
책의 겉표지에 사용되는 백지
외장지
지질이 두껍고 질기며 지면에 윤기가 나서 휘장용 종이로 쓰인다."
경주시慶州市, Gyeongju-s 2
경주시慶州市, Gyeongju-s"
경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 도시입니다. 약 천 년 동안 신라와 통일 신라의 도읍지로 크게 발전한 경주는 누구나 인정하는 거대한 보물 창고
부처님의 나라, 불국사.
751년에 불국사를 짓기 시작한 김대성은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부처님 곁으로 떠나고 말았어요. 신라 왕실은 공사를 이어받아 불국사 공사를 마무리했어요.
긴 공사 끝에 모습을 드러낸 불국사는 지금보다 웅장 했다고 전해 내려온다. 완공될 당시에는 건물이 80채가 넘었다고 해요. 지금의 불국사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불국사는 ‘부처님의 나라’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불국사는 이상적인 불교 세계를 잘 나타내고 있어요. 처음 지어졌을 때 불국사의 이름은 ‘화엄불국사’였어요.
화엄불국사(華嚴佛國寺)의 한자를 풀이하면 ‘화엄 사상에 입각한 불교 국가를 나타낸 사찰’이란 뜻. 다시 말하면 불국사는 불교 경전에 나오는 이상적인 부처님의 세상을 표현한 나라인 셈이다.
불국사에 세워진 건축물과 그 안에 있는 다양한 불상들은 다양한 불교 세계를 보여 주고 있어요. 건물 앞에 세워진 석탑과 그 속에서 발견된 유물과 각 공간을 이어 주는 작은 구조물 하나까지도 불교의 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석조 건축물"
불국사의 관문인 일주문을 지나 조금 이동하면 수많은 돌을 쌓아 만든 석대 위에 멋진 건축물이 자리하고 앞쪽으로 세련된 석조 구조물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이곳을 대석단이라고 해요. 돌을 정교하게 다듬은 아름다운 구조물이지요.
대석단은 청운교와 백운교가 있는 동쪽 구역과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는 서쪽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청운교와 백운교는 불국사를 알리는 포스터나 책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불국사를 대표하는 곳이에요. 실제로 청운교와 백운교를 보면 이름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아무리 살펴보아도 계단인데 다리를 뜻하는 이름을 갖고 있으니 말이에요. 지금은 볼 수 없지만 불국사를 지을 당시에는 청운교에서 백운교로 이어지는 아치 구조 아래쪽에 작은 물길이 있었어요. 그래서 청운교와 백운교에 다리를 의미하는 한자 ‘교(橋)’를 붙인 것
두 다리 중 아래쪽이 청운교이고 위쪽이 백운교입니다. 각각 17개와 16개, 총 33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두 다리가 끝나는 곳에는 부처님 세계로 통하는 ‘자하문’이란 문이 있어요.
한자로 자하문(紫霞門)은 ‘자주색(혹은 금색) 안개가 서린 문’이란 뜻으로, 몸에서 황금색을 발산하는 부처를 상징하지요.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에는 조금 작은 2개의 다리가 더 있어요. 연화교와 칠보교로 불리는 이 두 다리도 속세와 부처의 세계를 이어 주는 공간임. 이 두 다리에는 연꽃 문양이 조각되어 있는데 아래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위쪽 안양문 앞에서 내려다보아야 잘 보입니다.
연화교와 칠보교가 끝나는 곳에 있는 안양문은 극락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에요. 한자로 ‘안양(安養)’이란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몸을 쉬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곧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을 뜻하지요.
오늘날에는 청운교와 백운교, 연화교와 칠보교를 걸어서 불국사로 들어갈 수는 없어요. 문화재 보호를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옛날 통일 신라 사람들은 걸어서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을 거예요.
우리들은 선조들이 지은 통일 신라 최고의 석조 구조물과 부처님의 세계를 자유롭게 볼 수 있다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합니다.
수많은 걸작"
통일 신라 장인들이 빼어난 솜씨로 빚어낸 석조 건축물을 본 뒤에는 부처님의 세계를 표현한 불국사 안으로 이동해 보세요. 불국사 경내는 크게 대웅전, 극락전, 화엄경 구역으로 나눌 수 있어요.
불국사의 중심인 대웅전 구역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 삼층 석탑)을 중심으로 북쪽에 웅장한 대웅전이 서 있고 남쪽에는 자하문이 있어요. 앞에서 불국사를 부처님의 나라라고 했지요? 대웅전은 불국사의 주인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곳이에요. 그만큼 중요한 곳이랍니다.
처음 지어졌던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잿더미로 사라졌고, 지금의 건물은 조선 시대에 새로 건축한 것입니다. 그러나 건물을 받치고 있는 기단만큼은 옛 모습 그대로입니다.
대웅전 앞에는 2개의 멋진 탑,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습니다. 석가탑으로 더 잘 알려진 불국사 삼층 석탑은 통일 신라 석탑의 표본으로, 연꽃 모양의 돌조각이 새겨진 바닥 가운데에 세워져 있어요. 장식이 없어 간결한 아름다움과 각 부분의 균형이 잘 잡힌 안정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모습이랍니다.
실제로 탑을 본 친구들은 삼층 석탑이란 이름에 의문이 들었을 거예요. 3층보다 층이 많아 보였을 테니까요. 하지만 아래쪽에 있는 넓고 커다란 2층의 돌은 탑이 아니라 탑을 지탱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바닥 부분인 기단이에요.
석가탑에서 실제 석탑은 지붕 모양의 3층에서 5층 부분이지요. 그 위에 세워진 날렵한 모양의 작은 탑들은 보수 과정에서 새롭게 만든 거예요.
불국사 삼층 석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는 2층 석탑 안에서 소중한 유물이 발견되었어요. 황금으로 만든 사리함과 함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지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지금까지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오래전부터 기록을 중시했으며 뛰어난 인쇄 문화를 갖고 있었다는 걸 잘 보여 주는 유물이지요.
불국사 삼층 석탑 동쪽에는 십 원짜리 동전에 등장하는 다보탑이 있어요. 다보탑은 높이가 10.4m로 우아하고 화려한 모습의 탑입니다. 탑 아래쪽은 동서남북으로 계단이 있고, 계단 위쪽 중간 부분에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자 석상이 있어요.
이 사자상은 처음 다보탑이 세워질 당시에는 동서남북에 하나씩 총 4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때 3개가 사라지고, 하나 남은 것도 얼굴 부분이 크게 파손되었답니다. 다보탑의 윗부분은 나무를 깎아 조각한 듯 현란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보여 줍니다.
다보탑은 이전까지 신라에 세워졌던 석탑하고는 전혀 다른 형태와 구조로 세워진 탑이에요. 다보탑을 만든 장인이 신라인이 아닌 백제의 후손이라는 걸 짐작하게합니다.
극락전 화엄경구역"
불국사 서쪽은 극락전 구역입니다. 건물의 크기도 작고 웅장한 탑도 없지만 극락전에는 아미타불(금동아미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어요. 여러분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란 말을 많이 들어 보았을 거예요. 여기서 ‘나무’는 산에서 볼 수 있는 나무가 아니라 옛 인도 언어 중 하나인 산스크리트 어로 ‘무엇을 믿고 의지한다’는 뜻을 갖고 있어요.
다시 말하면 스님이나 불교 신자들이 ‘나무아미타불’이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미타불 부처님을 믿고 의지한다는 뜻이에요.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전체적인 조화와 선이 아름다운 불상으로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어요.
대웅전 뒤쪽에는 무설전이란 제법 큰 건물이 자리하고 있어요. 무설전은 스님들이 불경을 가르치고 공부를 했던 공간이에요.
무설전 뒤편이 화엄경 구역이에요. 화엄경 구역에는 관음전, 비로전, 나한전 등의 건물이 있는데, 중심은 관음전입니다. 불국사 관음전에는 자비로운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어요. 그리고 옆쪽의 비로전에는 진리와 빛의 부처님으로 알려진 비로자나불 부처님(금동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은 자비로움과 위엄이 동시에 느껴지는 독특한 불상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어요. 그 밖에도 불국사에는 불상이 모셔진 건물과 유적이 가득합니다.
빼어난 솜씨"
석굴암은 부처님을 모시기 위하여 건축한 석굴 사원으로 불국사와 동시에 짓기 시작했어요.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였습니다.
석굴암은 우리나라에서 많이 생산되는 화강암으로 만든 인공 석굴이에요.
외국의 유명한 석굴 유적지인 인도의 아잔타 석굴과 엘로라 석굴, 중국의 룽먼 석굴 등이 자연 상태의 바위를 뚫어서 만든 석굴이라면, 석굴암은 치밀하게 설계하고 계산해서 쌓은 인공 건축물입니다. 360여 개의 돌을 사용해 만든 둥근 천장과 석실의 모습은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석조 건축 기술을 잘 보여 준답니다.
석굴암에는 수많은 불상과 제자상, 보살, 팔부신중 등이 새겨져 있어요. 중국이나 인도의 석굴에 새겨진 조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정교해, 신라 장인들의 뛰어난 솜씨를 느낄 수 있지요. 그리고 전체적인 안정감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입니다.
공간마다 새겨진 의미 있는 조각상"
석굴암의 평면도를 보면 앞쪽은 사각형이고 뒤쪽은 원형의 구조로 되어 있어요. 석굴암은 크게 전실, 주실, 통로의 세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현재 유리창과 연결된 앞쪽의 사각형 부분이 전실,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앉아 있는 본존불이 모셔진 원형 부분이 주실, 전실과 주실을 이어 주는 곳이 통로랍니다.
가로 6.8m, 세로 4.8m의 전실은 현실 세계를 표현한 공간으로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이에요. 전실 벽에는 팔부신중(불법을 수호하는 8명의 신)이 좌우에 4개씩 모두 8개가 조각되어 있어요. 7개는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으나 오른쪽 벽의 하나는 일부가 파손되었어요.
전실과 주실을 잇는 통로는 폭 3.6m, 길이 2.9m입니다. 통로 입구에는 양쪽에 금강역사가 서 있어요. 부처님의 세계로 나쁜 것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금강역사는 조금은 험상궂게 생겼어요.
두 금강역사는 자세는 비슷하지만 얼굴 표정은 전혀 다르답니다. 전설에 따르면 금강역사는 힘이 코끼리의 수백 배에 이른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그리고 통로 벽면에는 무장한 4개의 사천왕이 새겨져 있습니다.
절묘한 공간미와 균형미"
석굴암의 중심은 안쪽 주실입니다. 타원에 가까운 둥근 주실은 부처의 세계를 표현한 공간이지요. 주실의 주인은 본존불입니다. 본존불은 1.8m 높이의 연꽃이 새겨진 좌대에 앉아 있고, 앉은키가 3.5m에 이르는 커다란 불상이에요.
눈을 감고 엷은 미소를 띤 입술이 돋보이는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자비심이 느껴지고, 커다란 귀와 어깨, 손, 다리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선은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입니다. 또한 어깨를 드러낸 옷과 옷 사이의 주름은 생동감이 엿보입니다. 뛰어난 예술성이 느껴지는 작품이지요.
부처의 세계답게 주실은 온통 불교와 관련된 조각과 공간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본존불을 중심으로 뒤편에는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 문양과 십일면관음보살상, 10대 제자상, 범천과 제석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등이 새겨져 있어요.
위쪽에는 10개의 감실(안으로 둥글게 판 공간)이 있고, 그 안에 8개의 조각상이 앉아 있어요. 2개는 지금 사라지고 없답니다.
주실은 완벽한 균형미를 보여 주는 공간이기도 해요. 불교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숫자인 108개의 돌로 짜맞춘 천장은 절묘한 공간미를 보여 준답니다.
신라 석불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본존불에 관해서는 최근까지도 학자들 사이에서 주장이 다르기도 했어요. 석가모니불, 아미타여래불, 비로자나불이란 설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석가여래불로 보고 있답니다.
한편 석굴암이 처음 완성될 당시에는 총 40개의 조각상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지금은 38개만 남아 있습니다. 사라진 2개의 감실 조각상에 관한 의문은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석굴암 다양한 이야기"
통일 신라가 만든 최고의 문화재입니다. 석굴암에는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도 담겨 있어요. 석굴암 주실의 본존불은 멀리 동남쪽 바다를 향해 앉아 있습니다. 지금은 석굴암 입구에 나무로 된 건축물이 세워져 볼 수 없지만, 과거에는 동짓날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이 본존불의 이마에 비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또 석굴암 본존불의 시선을 따라가면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이 잠들어 있는 대왕암이란 바다 능과 연결됩니다. 석굴암과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편안하게 지키겠다는 문무대왕의 마음이 연결되어 있는 것
석굴암 유적지는 안타까운 부분도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일제 강점기 때 복원 과정에서 시멘트를 사용한 것을 들 수 있어요. 잘못된 복원 공사로 습기가 차면서 한때 심각할 정도로 석굴 내부에 손상을 가져 왔어요.
그 이유로 오늘날 석굴암 내부를 관람할 수 없게 되었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복원 과정에서 나온 석재를 그냥 방치해 놓은 것입니다. 제대로 된 관리가 필요한 부분이지요.
석굴암과 불국사는 불교문화의 꽃입니다. 완벽한 공간 구성을 바탕으로 균형 잡힌 본존불과 조각, 환상적인 조화와 균형미를 가진 석굴암은 통일 신라의 종교, 예술, 건축, 수리, 기하학이 총망라된 유적지입니다.
청운교, 백운교, 불국사 삼층 석탑, 다보탑, 대웅전, 비로전 등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 현실과 부처의 세상이 공존하는 불국사는 우리의 자랑이자 온 인류가 보존하고 지켜 나가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한국의 탑"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탑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던 건축물입니다. 고대에는 종교적인 용도보다 군사적인 목적으로 탑을 만들었습니다. 부처님 몸에서 나온 사리를 보관하게 되면서 탑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스투파라고 하는 인도 탑에서 출발했지요. 당시에 스투파는 숭배의 대상이었고, 절도 스투파 주변에 지었답니다.
화엄사 사사자 삼층 석탑
우리나라에도 많은 탑이 있습니다. 처음 탑이 세워진 시기는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4세기부터 6세기까지는 주로 나무로 만든 목탑이 세워졌는데, 화재에 약하여 지금 남아 있는 탑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본격적으로 탑이 세워진 것은 7세기부터입니다.
이 시기의 탑은 돌로 만든 석탑이 대부분입니다. 이웃 중국은 벽돌로 만든 전탑이 많고 일본은 목탑이 많은데 비해 우리나라에 석탑이 많았던 이유는 어느 곳에서든 쉽게 돌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탑이 약 30여 기이고, 보물까지 합하면 약 200기나 됩니다. 지금 남아 있는 우리나라 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탑은 백제 무왕 때 건립한 미륵사지 석탑입니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 석탑, 경주 분황사 석탑, 감은사지 삼층 석탑, 다보탑 등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탑입니다.
포인트"
고대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것은 옛날 사람들이 남긴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물도 중요하지만 그에 따른 기록이 없다면 문화재의 진가를 정확히 알 수 없겠지요. 그래서 과거를 기록한 자료들은 소중한 문화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고대 역사와 문화에 관한 책 중 대표적인 것으로 고려 시대에 쓰여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가 있습니다. 《삼국유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문서로 고려의 일연 스님이 썼습니다. 《삼국유사》는 총 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3, 4, 5권을 한 권의 책으로 구성한 조선 시대 판본이 남아서 전해지고 있지요.
《삼국유사》에는 고대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재, 주요 인물까지 다양한 내용이 실려 있으며, 비교적 정확한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고려 때 학자인 김부식이 편찬한 역사책입니다. 《삼국사기》는 총 9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분류하면 50권에 달합니다. 《삼국유사》보다 약 140년가량 먼저 간행되었으며 고려 인종 때 처음 인쇄한 이후 여러 차례 인쇄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최초로 인쇄된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불교와 우리 문화
불교는 기독교, 이슬람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입니다.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에 인도에서 생겨났어요.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이웃 나라로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게 되었지요.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것과 관련해서는 서기 48년에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석탑을 싣고 바다 건너 가락국에 도착하자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 그녀를 왕비로 맞아 아이를 10명이나 낳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요.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시기는 4세기 후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삼국 가운데 불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는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고구려였습니다. 소수림왕 2년인 372년에 전해졌지요. 불교가 백제에 전래된 시기는 고구려보다 조금 늦은 384년 침류왕 때였습니다.
신라에는 휠씬 늦은 527년, 법흥왕 때 불교가 공인되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불교가 전래되었지만 정식 경로로는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보다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불교를 매우 중시했습니다. 삼국 시대에 불교는 종교인 동시에 통치 이념이었고, 문화 발전의 토대가 된 것은 물론, 사람들의 생활 깊숙이 영향을 끼쳤습니다. 삼국 시대 이후 통일 신라를 거쳐 고려 시대까지 약 천 년 동안 왕조와 백성들의 삶과 함께했지요.
따라서 고대 우리나라에 세워진 수많은 건축물과 주요 문화재, 소중한 기록들은 하나같이 불교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문화재는 불교와 연관이 없는 것도 있지만 많지 않습니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던 조선 시대에는 사찰이 파괴되고 승려들이 많은 피해를 받았지요. 그런 중에도 전국 사찰에서는 많은 문화재가 만들어졌습니다. 우리 고대 문화는 곧 불교문화라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불국사와 석굴암 답사"
문화재를 볼 때는 저마다 좋아하는 문화재도 다르고 접근 방법도 달라서 방법이나 코스를 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불국사와 석굴암을 자주 가본 경험으로 관람 방법을 추천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볼거리가 많아서 먼저 어느 곳을 볼지 결정한 뒤 관람을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유롭게 천천히 불국사를 둘러본 뒤 석굴암을 감상하는 것을 권합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불국사와 석굴암은 모두 현세와 부처님의 세계를 표현한 공간이지만 다양한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는 불국사를 둘러본 뒤 석굴암을 보아야 부처님의 세계를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둘째, 석굴암은 전실 앞을 유리문으로 막아 놓아서 안으로 들어가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1~2시간이면 충분히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다양한 문화재가 많은 불국사를 여유롭게 둘러본 다음 천천히 석굴암을 보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불국사는 볼거리가 무척 많아서 자세히 보아도 한두 곳은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고 싶은 곳을 미리 수첩에 적어 와 확인하면서 보아야 원하는 것을 다 보고 돌아갈 수 있습니다.
"불국사 일주문 ➞ 천왕문 ➞ 대석단(청운교, 백운교와 연화교, 칠보교) 구역 ➞ 극락전(안양문, 극락전) 구역 ➞ 대웅전(대웅전, 다보탑, 불국사 삼층 석탑, 좌경루와 범영루) 구역 ➞ 무설전 ➞ 관음전 ➞ 비로전 ➞ 석굴암"
경주 역사 지구에는 조각, 탑, 왕릉, 산성 등을 비롯해 신라 시대의 뛰어난 불교 유적과 생활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7세기부터 10세기 사이의 유적이 많으며 이들 유적을 통해 신라 고유의 탁월한 예술성을 확인할 수 있다. 경주는 1,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신라의 수도로 신라인의 생활 문화를 잘 보여 준다.
거대한 야외 박물관으로 알려진 남산을 중심으로 도시 여러 곳에 다양한 문화재가 흩어져 있습니다. 경주에 이토록 다채로운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이유는 신라가 긴 세월 동안 도읍지를 한 차례도 옮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에는 오랫동안 한 나라의 수도였던 도시가 많습니다. 그리스 아테네, 이탈리아 로마, 중국 시안, 일본 교토 등은 분명 경주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입니다. 하지만 산 전체가 야외 박물관을 연상시키는 유적지가 있는 곳은 경주가 유일합니다.
수많은 문화재와 유적이 경주 전체에 흩어져 있어 5개 지역으로 분류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경주의 토함산에는 독립된 세계 문화유산인 불국사와 석굴암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이자 고대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매력적인 도시, 경주로 떠나 볼까요?
천년 고도, 경주
경주는 기원전 57년부터 서기 935년까지 992년 동안 신라와 통일 신라의 도읍지였습니다. 삼한 시대 진한의 12국 중 사로국이 있던 곳이었고, 신라 시대에는 서라벌(계림)로 불렸습니다. 고려 시대부터 ‘경주’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지요.
경주는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 지역입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전성기 때는 경주에 주택이 약 18만 호나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경주의 주택이 10만 호가 조금 넘는 것에 비교하면 얼마나 커다란 도시였는지 짐작할 수 있겠죠? 놀랍게도 초가집이 단 한 채도 없었고, 황금으로 장식된 집이 자그마치 35채나 있었다고 합니다.
경주 역사 유적 지구는 크게 다섯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가장 넓은 면적에 많은 유적지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는 곳은 불교문화의 보고로 알려진 남산 지구입니다.
그리고 왕조의 궁궐 터가 자리한 월성 지구, 신라의 왕들이 잠들어 있는 고분군이 있는 대릉원 지구, 신라 불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황룡사 터와 분황사 터가 자리한 황룡사 지구, 천년 고도를 지키는데 크게 기여한 산성 지구가 있습니다.
신라의 흥망을 지켜본 남산
신라는 남산에서 시작해서 남산에서 끝을 맺었다고 할 수 있어요. 남산 서쪽 기슭 나지막한 언덕에는 과거에 우물이 있었던 나정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나정은 신라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박혁거세의 탄생지로 알려진 곳이랍니다. 신라가 생기기 전 경주 근처에는 6개의 마을로 이루어진 사로국이란 나라가 있었어요.
어느 날 6개 마을의 촌장들이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백마를 발견하였지요. 이상하게 여겨 그곳으로 가 보니 커다란 알이 하나 있었는데, 알을 깨뜨리자 그 안에서 사내아이가 나왔습니다.
이 사내아이가 훗날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로, 박처럼 생긴 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박(朴)으로 하고,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혁거세로 지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이곳에 우물은 없고, 박혁거세의 탄생 신화가 적힌 비석만 남아 있습니다.
나정 남쪽에는 신라의 멸망을 상징하는 포석정이 있어요. 신라의 왕들은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연회를 즐겼다고 해요. 포석정에는 폭이 30cm쯤 되고 길이가 22m쯤 되는 물길이 있어요. 구불구불하게 구부러진 물길을 따라 술잔이 돌게 만들었지요. 술잔이 멈추는 곳에 앉은 사람은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지요. 이 놀이를 ‘유상곡수연’이라고 해요.
그러나 이렇게 풍류를 즐기는 풍조는 신라를 쇠약하게 만들었고, 결국 신라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연회를 즐기다 후백제 왕 견훤의 침략을 받고 최후를 맞았다고 전해집니다. 천 년 동안 이어 온 신라를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만든 곳도 남산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야외 박물관, 남산
경주 남산은 동서 4km, 남북 10km에 달하는 타원형 모양의 산으로, 커다란 야외 박물관이라고 불리고 있어요. 신라에 불교가 전래되기 전부터 사람들은 남산을 성스럽게 여겼습니다. 불교가 전래되자 남산을 불교 성지인 수미산으로 여기며 많은 절과 불상, 불탑을 세우기 시작했고,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야외 박물관이 만들어졌지요.
남산에는 발굴된 유적지와 유물이 너무 많아 기관마다 발표하는 자료가 다르지만, 경주시의 자료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지금까지 남산에서 발견된 왕릉은 13기, 절터는 150여 곳입니다. 그리고 불상이 120여 점에 석탑은 96개, 석등도 22기나 됩니다. 그 밖에도 각종 유적지와 유물이 수없이 많습니다.
남산은 크게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독특한 문화재가 곳곳에 흩어져 있고, 매혹적인 유적지와 유물이 많아서 다 둘러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주요 유적지와 유물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한 곳
문화재가 보존"
남산 동쪽 지역은 서쪽에 비해 유적지도 적고 분포된 유물도 적습니다. 그러나 유물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펴 보면 서남산 지역에 있는 유물보다 세련되고 보존 상태가 뛰어난 문화재가 더 많습니다.
동남산에 남아 있는 주요 유물은 석탑과 불상으로, 작품성과 문화재의 가치가 높은 것으로는 보리사에 모셔진 미륵곡 석불좌상(석조여래좌상), 칠불암 마애석불,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을 꼽을 수 있습니다.
보리사라는 아담한 절의 왼쪽 언덕에서 세련된 자태로 토함산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미륵곡석불좌상은 보존 상태가 무척 좋은 불상입니다. 이전의 신라 불상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섬세한 선이 돋보이지요.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에 빠져 있는 듯한 표정을 하고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의 불상으로 신라 불상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작품입니다.
남산에는 많은 유적지와 유물이 있지만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유물은 칠불암 마애석불 하나뿐입니다. 칠불암 암자 옆 커다란 2개의 바위에 모두 7기의 불상이 새겨져 있지요.
병풍바위라는 곳에 새겨진 3기의 불상은 1~2.7m 크기로 삼존불이라고 하고, 바로 옆 사각형 바위에는 동서남북으로 4기의 사방불이 새겨져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모습의 칠불암 마애석불 중 화려한 연꽃 위에 앉아 미소를 머금고 있는 삼존불의 여래상과 보살상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칠불암 위쪽에는 남산에서 가장 신비로운 불상인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이 토함산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낭떠러지 위의 바위를 깎아 만든 이 불상은 머리에 삼면 보관을 쓰고 있습니다. 조각이 세련되고 섬세한 것은 물론, 이른 아침과 안개가 많은 날이면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신비한 불상
불교 문화재 서남산"
남산 서쪽 지역은 발길을 옮기는 곳마다 개성이 강한 유적지와 유물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에요. 주요 유적지는 계곡과 산 능선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서남산에서는 우선 삼릉 계곡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습니다. 삼릉 계곡의 입구 부분에는 세 명의 왕이 잠들어 있는 능과 초기 불교 미술을 잘 보여 주는 배리석불입상이 있어요.
이름도 특이한 배리석불입상은 가운데에 부처님이 있고 양쪽에 보살상이 서 있습니다. 세련미가 없고 둔탁한 모양새로 보아 신라 초기 불상으로 보고 있지요. 신라 초기 불교 미술의 수준을 가늠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물입니다.
삼릉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 산길을 따라 이동하면 목과 손이 잘린 불상을 비롯하여 마애관음보살입상, 석불좌상, 선각육존불 등과 만나게 됩니다. 이 불상들과 눈인사를 마치고 정상을 향해 걷다 보면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삼릉 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애석가여래좌상은 높이가 6m로 남산에 있는 불상 중 가장 큽니다. 자연 바위에 새겨진 거대한 불상으로 통일 신라 후기 때 완성한 작품입니다. 선으로 새겨진 몸은 약간 뒤로 젖힌 모습이고, 얼굴은 입체로 새겨 놓았습니다. 가느다란 눈으로 가파른 계단을 올라온 사람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지요. 지금도 불심 깊은 사람들이 찾아와 가슴속에 품고 있는 이야기를 마애석가여래좌상에게 전하고 있답니다.
마애석가여래좌상에서 능선을 따라 동남쪽으로 이동하면 균형이 잘 잡힌 모습의 삼층 석탑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용장사곡 삼층 석탑입니다. 용장사곡 삼층 석탑은 옛 신라 장인의 멋과 지혜가 동시에 느껴지는 탑입니다.
낭떠러지 끝에 세워진 탑인데도 불구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며 자연과의 조화를 소중하게 생각했던 우리 조상들의 정신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또한 건너편 산과 절벽을 배경으로 서 있는 자태는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아래쪽에는 마애여래좌상과 아주 특이한 모양의 용장사곡 석불좌상이 있습니다. 3층짜리 대좌 위에 세워진 1m 길이의 불상은 안타깝게도 머리 부분이 없습니다. 하지만 신라는 물론이고 백제와 고구려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을 간직하고 있다.
신라 정치 중심"
천년 고도의 정치 중심지로, 초기 유적지부터 화려한 유적지까지 신라의 발전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곳입니다. 월성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지는 신라 왕조를 이끌었던 김(金)씨의 시조 김알지가 태어난 숲인 계림이지요. 이 숲의 나뭇가지에 매달린 금 궤짝의 알에서 태어난 아기가 바로 김알지라는 건국 신화가 전해지고 있어요.
신라와 통일 신라 왕조는 초대왕인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마지막 왕인 경순왕까지 모두 56명의 왕이 나라를 다스렸는데 박씨, 석씨, 김씨가 돌아가면서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그중 가장 많은 왕을 배출한 것은 김씨입니다. 그리고 계림의 서쪽에는 내물왕의 능을 중심으로 3기의 왕릉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계림 남쪽에는 신라 최고의 문화 공간이었던 궁궐 유적지 월성이 있습니다. 이곳 터의 모양이 초승달처럼 생겼다고 해서 월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요.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월성은 남천이 흐르는 남쪽을 제외한 나머지 동쪽, 서쪽, 북쪽으로 인공 호수인 해자를 만들어 궁궐을 방어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 흙과 돌을 섞어 성벽을 쌓았습니다. 성벽 유적지는 지금도 남아 있다.
옛 신라의 궁궐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는 임해전지(임해전이 있던 터)가 있습니다. 임해전은 삼국을 통일한 30대 왕인 문무왕이 건설한 궁궐로, 왕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왕자가 머물렀던 동궁이었어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고 한편으로 당나라에 통일 신라의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건설한 궁궐이었지요.
임해전은 바다에 접해 있는 건물이란 뜻을 갖고 있어요. 육지 한가운데 바다라니 조금 생뚱맞지요?
신라 사람들이 임해전에 접해 있던 큰 연못을 바다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고 있어요. 바다를 좋아했던 문무왕은 자신이 죽으면 시신을 바다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하기도 했어요. 훗날 문무왕이 죽자 유언을 받들어 경주에서 가까운 동해 감포 앞바다에 수장했지요.
임해전은 동궁 외에도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희귀한 새와 짐승을 기르는 정원으로 사용되었고, 왕이 신하들과 연회를 즐기던 장소이기도 했어요. 임해전지는 조선에 이르러서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폐허가 된 임해전지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면서 조선 시대에는 임해전지의 연못을 ‘안압지’라고 불렀답니다.
임해전지는 발굴 과정에서 통일 신라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어요. 연못 속에서 발굴된 유물은 실제로 왕족과 백성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국립 경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천문대, 첨성대"
첨성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 여왕이 세운 건축물입니다. 첨성대에 관해서는 여러 곳에 기록이 남아 있지만 용도가 명확하게 밝혀진 자료는 없습니다.
첨성대는 월성과 계림 근처 사방이 확 트인 평탄한 곳에 우뚝 서 있습니다. 높이는 9.17m로 우물이나 호리병처럼 생긴 특이한 모습이에요.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지그재그로 쌓아 지었지요. 건물 가운데에는 정사각형의 창문이 있고, 꼭대기에는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긴 화강암이 2단으로 쌓여 있어요.
창문 아래쪽은 흙이 채워져 있어요. 지진이나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흙을 쌓은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첨성대는 별을 관측했던 장소로 알려져 있어요. 창문을 통해 별을 관측한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꼭대기에서 관측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요. 그래서 첨성대 안쪽에는 꼭대기까지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해요.
첨성대가 별을 관측했던 곳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건물의 과학적인 구조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어요. 첨성대를 짓는 데 사용된 벽돌의 개수가 362개인데(세는 방법에 따라 365개라는 주장도 있어요) 이 숫자는 1년을 음력으로 사용했던 당시 날짜와 같습니다.
첨성대의 몸통 부분을 27단으로 쌓았는데, 창문의 3단을 빼고 창문 아래쪽까지가 12단, 창문 위쪽이 12단으로, 24절기를 뜻한다고 합니다. 첨성대를 기념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학자는 제례 의식을 올렸던 곳이라고 주장하기도 해요.
하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사료와 기록에 의해, 별자리를 관측하여 계절과 절기를 알아보고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정보를 얻던 천문 관측대라는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왕가의 휴식처"
경주 시내를 다니다 보면 평지에 커다란 동산 모양의 무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어요. 경주의 왕릉은 마치 작은 산을 연상시킬 정도로 커서 예로부터 ‘조산’이라고 불렸지요.
경주에는 옛 신라와 통일 신라를 다스렸던 왕과 왕비, 귀족이 잠들어 있는 무덤이 250여 기나 있어요. 그중 거대한 봉분을 갖춘 왕릉은 23기이고, 나머지 무덤은 일반 묘처럼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지요.
신라 왕들의 무덤이 모여있는 곳을 대릉원 지구라고 해요. 황남리 고분군, 노동리 고분군, 노서리 고분군, 오릉 등이 대릉원 지구에 속하지요.
가장 흥미로운 왕릉으로는 천마총을 꼽을 수 있어요. 공식 명칭은 155호 고분이지만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진 천마도가 왕릉에서 발견된 이후 천마총이라 불리고 있어요. 천마총에는 많은 유물이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어요.
천마총에서는 금관과 천마도장니를 비롯하여 장신구와 무기, 유리병, 그릇 등 총 1만 1500점에 달하는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발굴 현장에 참여했던 학자들을 놀라게 만들 정도였지요.
천마총에서 발견된 유물은 고대 미술을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어요. 천마총에서 발견된 유리병과 생활용품을 통해 신라가 중국뿐만 아니라 서양과도 교역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유물을 감상하려면 천마총 전시장도 좋지만 국립 경주 박물관에서 진품을 보는 것이 좋답니다.
천마총 옆에는 부부가 함께 잠들어 있는 황남대총이 있습니다. 황남대총에서는 황금으로 만든 장신구를 비롯한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신라를 상징하는 황룡사"
경주는 도시 전체가 불교 유적지로 가득합니다. 대표적인 불교 유적지로 황룡사 지구를 빼놓을 수 없지요. 지금은 건물 터와 목탑이 세워졌던 흔적만 있지만 황룡사는 신라에서 매우 크고 중요한 절이었어요. 신라 24대 왕인 진흥왕은 553년에 황룡사 터에 궁궐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궁궐을 짓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땅에서 황룡이 나타났어요. 그 뒤 궁궐 공사를 멈추고 절을 짓기 시작했지요. 17년의 공사 끝에 모습을 드러낸 황룡사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웅장한 모습의 절이었다고 해요.
황룡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황룡사 구층 목탑이에요. 황룡사 구층 목탑은 선덕 여왕이 세웠다고 해요. 바닥 면적이 약 500m2, 한쪽 면의 길이가 22.2m에 높이가 75m나 되는 거대한 목탑이었지요. 이 거대한 목탑을 짓는 데는 백제의 장인 아비지가 크게 기여했어요.
당시 신라는 건축은 물론이고 생활 수준이 백제와 고구려에 못 미치는 상태였어요. 그래서 백제와 고구려에 부탁하여 뛰어난 장인들을 불러와야 했지요.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는 서로 적대 관계에 있었지만 모두 불교를 믿고 있어서 절이나 탑의 건축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답니다.
황룡사 구층 목탑은 1238년 몽골에 의해 잿더미로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찬란했던 옛 영화를 엿볼 수 있는 드넓은 터와 받침석만 남아있어요. 이곳에서 발굴된 4만여 점의 유물들은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황룡사 옆에는 또 다른 절 분황사 터가 있어요. 분황사 역시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졌지만, 모전 석탑이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답니다. 모전 석탑은 돌을 벽돌처럼 깎아 쌓아 만든 탑으로 선덕 여왕 때 세워졌어요. 바위를 쌓아 만든 바닥 위에 마치 건물처럼 생긴 독특한 3층 탑이 서 있지요. 처음 세워졌을 때는 지금과 모습이 달랐다고 해요.
몇 층짜리 탑이었는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남아 있는 탑으로 볼 때 7~9층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분황사 탑은 동서남북으로 굴방이란 문이 달려 있어요.
문 입구에는 각각 2기의 인왕상 조각이 있고, 앞쪽 네 모퉁이에는 돌사자가 세워져 있어요. 분황사 탑에서는 금과 은으로 만든 바늘과 가위 등이 발굴되었는데 이 유물들도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답니다.
천년 고도"
초기 신라는 가야, 백제, 고구려, 일본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작은 나라였습니다. 사방으로 국경을 마주했던 신라는 주변 나라들로부터 영토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여러 곳에 성을 쌓아야 했습니다.
경주에도 궁궐을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월성과 경주로 진입하는 적군을 막기 위해 만든 산성이 있습니다.
궁궐 주변에 흙과 돌로 쌓은 월성은 현재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산성 유적지로는 동쪽의 명활산성, 서쪽의 서형산성, 남쪽의 남산성, 북쪽의 북형산성, 북서쪽의 부산성 등이 있지요.
경주에 있는 산성도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쌓았어요. 짧게는 수백미터에서 길게는 10km가 넘는 산성들은 모두 방어를 목적으로 돌을 쌓아 만들었지요. 남아 있는 산성 가운데 보존 상태가 좋은 곳은 경주 동쪽에 쌓은 명활산성이에요.
명활산성은 산마루를 따라 쌓았는데 전체 둘레가 약 6km에 달합니다. 이중 구조로 되어 있으며 성벽의 높이가 지형에 따라 5~10m로 다르답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것은 수백 미터에 불과하지만 신라의 토목 수준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
골품 제도
신라에는 골품 제도라는 아주 특이한 신분 제도가 있었습니다. 골품 제도에 따라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었지요. 골품 제도에 의하면 신분이 혈통에 따라 8등급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왕족은 성골과 진골이었고 그 아래로 6두품부터 1두품까지의 신분이 있었는데, 숫자가 클수록 신분이 높았습니다. 3두품에서 1두품까지는 평민층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구분이 점차 사라졌지요.
최고 신분인 성골은 부모가 모두 왕족 출신인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두 번째로 높은 신분인 진골은 아버지와 어머니 가운데 한 사람이 왕족인 경우에 그 자녀들이 누릴 수 있는 신분이었답니다.
그리고 신라에 의해 멸망하거나 항복해 온 왕족에게도 진골 신분을 주었습니다. 6두품은 왕족이 아닌 사람이 가장 높이 오를 수 있는 신분이었습니다.
신라 초기와 중기까지는 성골 출신만 왕위를 이을 수 있었습니다. 진골 출신으로 최초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 29대 무열왕 김춘추였지요. 이후 진골 출신도 많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신라의 골품 제도는 왕위 계승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철저하게 적용되었습니다.
관직에 오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는 집의 규모와 재산의 정도까지 엄격하게 제한되었습니다. 골품 제도는 옷과 장신구, 가정에서 사용하는 그릇까지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었던 폐쇄적인 신분 제도였지요. 골품 제도는 국가 발전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기도 했습니다.
선덕 여왕"
신라 최초의 여왕은 진평왕과 마야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선덕 여왕입니다. 선덕 여왕은 신라 제27대 왕으로 15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선덕 여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는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있지만 탄생 시기와 가족사에 관해서는 많은 부분이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떤 문서에는 맏딸로 기록되어 있고, 둘째 딸로 기록된 문서도 있습니다.
선덕 여왕은 왕이 된 초기에 백성의 궁핍한 삶을 보살피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후에는 당나라의 선진 문물과 불교를 적극적으로 들여와 백성들의 믿음을 얻는 동시에 백성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지요.
선덕여왕은 동양 최대 규모인 황룡사 구층 목탑을 세우고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시설인 첨성대를 세우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선덕 여왕의 가장 훌륭한 업적은 백성들을 가난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해서 노력한 정책입니다. 약한 국력을 극복하기 위해 발휘한 뛰어난 외교력도 업적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외교와 군사력을 외국의 세력에 의존한 부분은 선덕 여왕의 잘못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선덕 여왕은 백성을 위하여 노력한 최초의 여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화백 회의
화백 회의는 골품 제도와 함께 신라의 독특한 제도로, 신라의 중앙 관료들이 모여 국가의 중요한 일을 토론하여 결정하는 제도였습니다. 경주 근처에 살던 여섯 촌장들이 모여 중요한 일을 의논하던 제도에서 시작되었지요. 물론 화백 회의에는 진골 이상의 지위를 가진 왕족들만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왕족 회의인 셈이었지요.
화백 회의를 대표하는 인물은 신라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이었습니다. 초기 상대등은 모두 왕족 출신인 성골이 맡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진골 출신도 상대등에 올랐습니다. 상대등은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왕의 지휘와 감시 아래 놓여 있었지만, 왕이 세상을 떠나면 왕위 계승 문제를 비롯하여 전쟁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일부터 중요한 건축물을 세우는 일까지 나라의 중요한 일을 실질적으로 결정했습니다.
신라의 상대등과 비슷한 일을 했던 관직은 고구려와 백제에도 있었습니다. 고구려에는 대대로라는 관직이 있어 왕과 함께 나랏일을 처리했지요. 백제에는 상좌평이란 관직이 있어 나랏일을 총괄했습니다. 상좌평은 왕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투표로 선출했습니다.
국립 경주 박물관
옛 신라의 궁궐이 있던 월성 근처에는 국립 경주 박물관이 있습니다. 국립 경주 박물관은 신라와 통일 신라는 물론이고 이전의 다양한 문화와 유물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곳입니다. 신라와 통일 신라의 문화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둘러보아야 할 곳이지요.
국립 경주 박물관은 실내와 야외 전시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실내 전시장은 고고관, 안압지관, 미술관, 특별 전시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국립 경주 박물관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고고관에는 선사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빗살무늬 토기, 경주 왕릉에서 발굴된 금관, 벽화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고고관 서쪽에는 임해전지에서 발굴된 유물만을 따로 모아 놓은 안압지관이 있습니다. 안압지관에는 나무로 만든 배와 여러 가지 생활용품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세련되고 화려한 장신구를 비롯하여 황금으로 만든 못까지 볼 수 있지요.
안압지관에 전시된 유물들을 보면 신라의 왕족들이 얼마나 화려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미술관에는 신라와 통일 신라 시대에 그려진 그림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별 전시관은 기획 전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야외 전시장에는 성덕 대왕 신종(에밀레종) 등 매혹적인 유물들이 박물관 야외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남산 지역에서 발굴된 여러 불상과 지금은 물속에 잠겨 버린 고선사 터에 남아 있던 고선사 터 삼층 석탑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경주 역사 유적"
경주 역사 유적 지구를 살펴보려면 무엇보다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역도 넓고 보아야 할 문화재도 많아서 일정을 여유롭게 잡아야 신라 문화의 진면목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일정이 짧다면 먼저 지도를 펼쳐 놓고 이동순서를 정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이동 경로를 정한 다음에는 각 지역에 관하여 미리 안내 책자를 살펴보고 둘러볼 것을 권합니다.
여러 차례 방문한 경험을 바탕으로 간단하게 추천하는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국립 경주 박물관에 가서 주요 유적지에 관한 정보를 얻고 유물을 관람한 뒤 걸어서 월성과 계림, 대릉원, 임해전지, 황룡사 터 등을 둘러보는 것이 좋습니다.
옛 시가지와 궁궐 유적지를 둘러본 뒤 시간이 허락되면 남산에 올라 불상들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남산을 답사할 때는 체력에 자신이 있다면 아침 일찍 동쪽 칠불암 방향으로 산에 올라 용장사 터를 거쳐 삼릉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서 보는 것이 좋습니다. 반나절 정도밖에 시간이 없다면 서남산의 삼릉 계곡 지역을 둘러볼 것을 추천합니다.
국립 경주 박물관 ➞ 월성, 석빙고 ➞ 계림 ➞ 첨성대 ➞ 황남리 고분군(천마총) ➞ 노서리, 노동리 고분군 ➞ 임해전지 ➞ 황룡사 터와 분황사 터 ➞ 나정, 포석정 ➞ 남산.
경주 여행.
경주 여행"
신라는 천년 동안 지속된 왕국이야. 경주는 아직도 천년 전에 살았던 신라인의 숨결이 도시 곳곳에서 느껴지는 역사의 도시이고, 문화유산들도 많이 남아있어. 경주라는 큰 도시 전체가 하나의 문화재라 길을 걷다 땅을 파면 수천 년 전의 토기가 발견될 것 같은 예감까지 들게 해. 경주는 도시 그 자체에서 신라의 고고한 흔적을 느낄 수 있어. 우리 함께 신라의 고고한 흔적을 느끼러...
石窟庵"
통일신라시대에 경주 토함산(吐含山)에 세워진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사찰이다. 신라인들의 신앙과 염원, 뛰어난 건축미, 성숙한 조각기법 등을 보여주는 역사 유적으로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문화재청에 등록된 정식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삼국유사》에 나오는 원래 이름은 석불사이다. 임진왜란 이후 불국사에 예속되었고, 1910년경부터 일본인들이 석불사 대신 현재의 석굴암(石窟庵)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刱)할 때, 왕명에 따라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설화를 기반으로 한 요소가 엿보이는 전설적인 유래이지만, 대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환생(還生)하였다는 김대성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타나듯이 경덕왕대에 중시(中侍)로 있었던 김문량이 실존인물임에 비추어, 그의 아들인 김대정(金大正)이 신라의 기명(記名) 방식에 의해 대성과 동일인물인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김대성은 왕명을 받들어 토함산의 정상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전개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김씨 왕족(金氏王族)을 위한 2대 사찰의 건립에 마지막 생애를 다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석굴암은 김대성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하여 그 조영사업은 국가가 마침내 완성시켰다고 한다. 이 점은 분명히 석굴암의 창건이 김대성이라는 개인의 원력(願力)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왕실을 비롯한 당시 신라인 모두가 염원한 거족적인 일대 불사(佛事)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것은 석굴암의 방위(方位)가 김씨 왕족의 공동묘역(共同墓域)인 신라의 동해구(東海口)와 일치하고 있음을 보아도 더욱 뚜렷해진다. 동해구란, 삼국통일의 영주(英主)인 문무왕(文武王)의 해중릉(海中陵), 즉 대왕암(大王巖)이 자리잡고 있는 곳을 말한다.
문무왕은 욕진왜병(欲鎭倭兵)하고자 동해의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저승에서까지 국가수호의 집념을 잃지 않겠다는 군왕이었다. 이 같은 호국사상은 동해구의 유적인 해중릉을 비롯하여 감은사(感恩寺)나 이견대(利見臺), 그리고 석굴암과 동해구와의 관계 등에서 같은 맥락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 점은 석굴암의 창건주인 경덕왕의 선왕(先王), 즉 효성왕(孝成王) 역시 화장 후 산골(散骨)된 곳이 이 동해구여서, 석굴암 대불의 시각(視角)이 동남동 방향으로 동해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성이 있다.
신라인의 믿음과 호국정신의 요람으로서 국찰(國刹)도 같았던 석굴암의 존재를 뚜렷이 부각시켜 주는 예라고 하겠다. 이로써 석굴암이 지니고 있는 신앙적인 측면은 물론, 조형적인 면까지 신라미술의 최고 절정을 이룬 민족 최대의 석조미술품으로 꼽아 결코 손색이 없는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1995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구조와 특징"
석굴암의 구조적 특색은 무엇보다 화강암의 자연석을 다듬어 인공적으로 축조한 석굴사찰이라는 점이다. 즉, 인도·중국 등의 경우와 같이 천연의 암벽을 뚫고 조성한 천연석굴이 아니다.
토목기술을 바탕으로 이룩된 석굴의 기본적인 평면구조는 전방후원(前方後圓)의 형태를 취하면서 네모진 공간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로 나뉘어져 있다. 주실에는 단독의 원각(圓刻) 본존상(本尊像)을 비롯하여 보살과 제자상 등이 있으며, 전실에는 인왕상(仁王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 등을 부조(浮彫)하여 배치하였다. 이 전실의 기능은 곧 예배와 공양을 위한 장소이다.
천장은 궁륭형(穹窿 形)의 둥근 양식이며, 그 위에 연화문(蓮花紋)의 원판을 두어 천개(天蓋)로 삼고 있다. 조각상의 배치는 전실부터 시작하여 팔부신중(八部神衆) 8구, 인왕(仁王) 2구, 사천왕 4구, 천부(天部) 2구, 보살(菩薩) 3구, 나한(羅漢) 10구, 감불(龕佛) 8구와 본존여래좌상 1구가 있다. 이들 불상의 배치에 있어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보다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고대 조형미술의 기본원칙과 같은 것이기도 하여서 석굴의 안정감을 한층 강조하는 구실도 하고 있다.
조각상 가운데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본존여래좌상이다. 이 석굴 자체가 본존상을 봉안하기 위하여 조영되었던 만큼 그 의미가 매우 큰 불상이다. 예배의 주대상이 곧 이 본존상임은 물론, 중앙에 자리잡아 석굴의 내부공간을 구획한 신라 조각미술의 결정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뛰어난 작품이다. 본존상은 연화문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다. 광배(光背)는 석굴 후벽의 천장 밑에 둥근 연화판석(蓮花瓣石) 1매로 조성하였다. 이는 전실의 법당에서 본존상에 예배할 때, 동일시각 위에 놓여지는 치밀한 계산에 따라 처음부터 마련된 것이다.
본존상의 양식적 특징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 7세기 후반부터 유행하여 고려 전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여래좌상의 기본양식이다. 법의(法衣)는 오른쪽 어깨를 벗고 왼쪽 어깨에 가사(袈裟)를 걸친 우견편단(右肩遍袒) 양식을 보이고 있다. 또한 수인(手印)은 악마의 유혹을 물리친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結)하고 있다. 머리 위에는 육계(肉髻 )를 표시했으며 머리는 나발(螺髮)이다. 상호(相好)는 원만한 모습에 자비(慈悲)를 지니고 있다.
신부(身部)는 매우 당당할 정도의 거구로서 장부의 상을 보이고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고 두 번째 손가락을 다음 손가락 위에 겹쳐 운동감을 주고 있다. 왼손은 두 발 위에 놓아 편안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어떻든 본존상의 신앙적인 의미와 조형적인 가치가 훌륭히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부드러운 자태와 인자한 표정에서 고도의 조각술을 살필 수 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불교의 구원상(久遠像)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불상의 명호"
석굴암 본존상에서 중요한 부분은 명호이다. 지금까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그것은 석가여래로 통칭되어 왔으나 이는 뚜렷한 오류임이 구명되었다. 즉, 19세기 말엽 중수 당시의 현판(懸板)에 미타굴(彌陀窟)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편액(扁額)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표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을 뜻하는 수광(壽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료는 본존상의 명호가 석가여래 아닌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또한 신라시대에 보편적이던 우견편단과 항마촉지인은 곧 아미타불이었다는 점도, 본존상의 명호를 밝히는 데 중요한 뒷받침이 된다. 이는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에 안치된 본존상이나 군위(軍威) 팔공산(八公山)의 석존 본존상 등 같은 양식의 불상에서도 분명히 입증되고 있다.
신라 불상의 양식계보로 비추어 볼 때 석굴암 본존불상의 명호는 7∼8세기 신라에서 유행했던 아미타불임이 분명한 것이다. 또한 김대성이 현세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세웠다는 창건 유래 역시 미타정토(彌陀淨土)를 표현한 것으로, 동해구의 유적과도 연관되고 있다.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석굴암 본존상의 명호는 마땅히 신라인의 정토신앙을 기반으로 한 아미타불이며, 왕족의 발원에 의해 이루어진 거국적인 불사(佛事)이었음을 확인케 한다.
Seokguram Grotto and Bulguksa Temple"(석굴암 과 불국사)
석굴암(石窟庵)과 불국사(佛國寺)는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고대 불교 유적이다. 석굴암은 불상을 모신 석굴이며, 불국사는 사찰 건축물이다. 두 유산은 모두 경주시 동남쪽의 토함산(吐含山)에 있으며,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다. 두 유산은 8세기 후반에 같은 인물이 계획해 조영하였으며 비슷한 시기에 완공되었다. 석굴암은 화강암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쌓아 만든 석굴로 원형의 주실 중앙에 본존불(本尊佛)을 안치하고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나한상, 신장상 등을 조화롭게 배치하였다. 불국사는 인공적으로 쌓은 석조 기단 위에 지은 목조건축물로 고대 불교 건축의 정수를 보여 준다. 특히 석굴암 조각과 불국사의 석조 기단 및 두 개의 석탑은 동북아시아 고대 불교예술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불국사는 인공적으로 쌓은 석조 기단 위에 지은 목조건축물로 고대 불교 건축의 정수를 보여 준다. 석굴암 조각과 불국사의 석조 기단 및 두 개의 석탑은 동북아시아 고대 불교예술의 최고 걸작 중 하나이다.
석굴암은 부처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불국사는 불법의 세계를 현실 세계에 구현한 걸작으로, 이들 두 유산은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불국사와 석굴암 전 영역과 두 유산이 위치한 토함산이 유산 구역에 포함되어 있다.
석굴암 본존불과 그 주위 대부분의 석조 조각과 건축의 형태는 8세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진정성이 높다. 불국사 경내의 석조 유산은 부분적 보수 과정을 거쳤을 뿐 신라 시대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목조 건축물들은 16세기부터 보수와 복원의 과정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든 복원 사업은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전통 재료와 기술이 사용되었다.
토함산 남동쪽 비탈에 있는 석굴암은 동해를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인 751년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짓기 시작해 혜공왕 10년인 774년에 완공됐다. 기록에 따르면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였다고 한다. 석굴암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벽에는 39개의 불상들이 조각되어 있으며 한가운데에 본존불상이 놓여 있다.
석굴암은 전실(前室), 비도(扉道), 돔형 주실(主室)로 구성된다. 전실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양쪽 벽에는 팔부신장(八部神將)이 각각 네 사람씩 새겨져 있다. 비도는 전실에서 주실로 들어가는 부분인데, 비도의 입구 옆에는 두 사람의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이 서 있다. 비도의 좁아지는 부분 양쪽으로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각각 한 쌍씩 조각되어 있다. 주실의 입구 양쪽에 팔각형 돌기둥 두 개가 각각 세워져 있고, 본존불상은 주실의 중앙에서 조금 벗어난 지점에 놓여 있다. 주실의 입구 양쪽 벽에는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 두 보살, 십나한이 새겨져 있다. 본존불상 뒤의 벽 한가운데에는 자비의 보살로 알려진 십일면관음보살상(十一面觀音菩薩像)이 새겨져 있다.
전실과 주실의 벽에 새겨진 불상들 아래 놓여 있는 돌에도 마찬가지로 부조가 새겨져 있다. 석굴암이 만들어진 당시에 십일면관음보살상 앞에 있었던 대리석 사리탑은 일제강점기 때 제거됐다. 본존불상 뒤의 벽에 새겨진 십일면관음보살상 위에는 거대한 원형 연판(蓮瓣)이 조각되어 있다. 이 원형 연판은 정면에서 보면 마치 본존불상의 후광인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연판 위쪽 벽에는 열 개의 감실들이 가로로 늘어서 있다. 감실 각각에는 보살이나 불자의 조각상이 놓여 있었으나, 현재 그 중 두 개가 없어진 상태다. 돔형 천장을 구성하는 돌들은 주실 천장의 또 다른 연판을 향해 모아지는 모습을 하고 있다.
본존불상인 석가여래좌상은 3.45m 높이로 연화좌(蓮花座) 위에 앉아 있다. 불상의 머리카락은 달라붙은 곱슬머리이며, 정수리에는 궁극의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肉髻)가 돌기처럼 튀어나와 있다. 이마는 넓고, 초승달 같은 눈썹 아래로 반쯤 감은 눈은 동해를 응시하고 있다. 오른쪽 어깨에 걸쳐져 왼팔과 가슴을 덮은 모양의 법복은 섬세하고도 현실적이다. 불상은 부좌 상태에서 항마촉지인이라는 손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지신(地神)을 소환해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할 때 취했던 동작이다. 금강역사상, 팔부신장상, 천부상, 보살상, 십나한상, 사천왕상 등의 다른 조각들도 모두 세부적인 자연스러움에 주의를 기울여 정교하게 조각되었다.
석굴암의 본존불상이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는 걸작이라면, 불국사는 신라의 이상향인 불국토를 현세에 드러내고자 의욕적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불국사는 석굴암과 동시에 만들어졌는데, 불국사의 축조를 시작하고 지휘한 사람 역시 석굴암을 만든 재상 김대성이었다. 효심이 깊었던 김대성은 현생의 부모를 기리며 불국사를 세웠고, 전생의 부모들을 기리며 석굴암을 지었다.
이승에 부처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은 신라의 오랜 꿈이었고, 신라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바로 부처의 나라라고 믿었다. 때문에 불국사라는 이름 자체도 신라인들에게는 큰 의미를 지닌다. 불국사는 말 그대로 부처님 나라의 사찰을 뜻한다. 이것은 곧 불국사가 부처님의 나라가 현세에 실현된 낙원이라는 의미다.
불국사 경내는 이승에 실현된 불교적 이상향이라 여겨졌다. 석단(石壇) 위에 지어진 목조 건축물들은 세 구역으로 구분된다. 비로자나불의 전당인 비로전, 득도의 전당인 대웅전, 지복의 전당인 극락전이 그것이다. 세 구역은 하나의 현세 공간과 두 개의 천상 공간을 상징하고 있다. 순수한 부처의 나라로, 비로자나불이 존재하는 현세, 아미타불의 낙원,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비로전, 극락전, 대웅전을 포함해 석단 위의 공간은 곧 부처의 나라이며, 석단 아래의 공간은 이승이다. 이 두 세계는 청운교, 백운교, 연화교, 칠보교 두 쌍의 다리로 연결된다. 석단, 석교(石橋), 그리고 대웅전 앞에 세워진 석가탑과 다보탑은 신라 시대의 우수한 석공 기술을 보여 준다. 석굴암과 마찬가지로 불국사는 손으로 다루기 힘든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옛날에 불국사에는 토함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로 만들어진 구품연지라는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구품연지는 존재하지 않지만, 토함산의 물이 흘렀던 수구의 흔적이 아직까지 석단에 남아 있다.
석가탑과 다보탑에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내용이 반영되어 있다. 석가모니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설파할 때 보배로운 탑이 땅에서 솟아났고, 이미 깨달음을 얻은 다보여래가 그 탑 위에 나타나 석가모니의 설법을 증명했다. 그리고 다보여래와 석가모니는 탑 안에 나란히 앉았다는 것이다. 다보탑은 이 이야기에 나오는 다보여래를, 석가탑은 석가모니를 상징하고 있다.
폭 6.7㎝, 길이 6.2m의 두루마리에 적힌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또한 주목할 만하다. ‘흠 없이 순수한 빛의 위대한 다라니경’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유물은 1966년에 석가탑의 2층에서 발견됐다. 8세기경에 만들어진 이 경전은 목판으로 인쇄된 경전으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불국사는 막대한 피해를 입어 목조건물이 모두 불에 타버렸지만, 다행히 석단, 석교, 석탑, 등(燈), 금으로 도금된 청동 불상들은 무사히 남았다. 오늘날 볼 수 있는 불국사의 건축물은 1969년부터 1973년 사이에 시행된 복구 작업을 통해 부분적으로 재건된 것이다. 복구는 불국사 유적의 발굴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나, 신라 시대 당시의 대규모 복합 건축물을 재현해 내지는 못했다. 불국사의 중심에 위치한 대웅전 앞뜰에는 다보탑과 석가탑이 동서로 놓여 있다. 통일신라 시대 이래 사찰의 주 건물 앞에는 동일한 외관을 가진 한 쌍의 탑을 세우는 것이 관례였으나, 다보탑과 석가탑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기준 (ⅰ) : 석굴암과 불국사는 신라인들의 창조적 예술 감각과 뛰어난 기술로 조영한 불교 건축과 조각으로 경주 토함산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어우러져, 한국 고대 불교예술의 정수를 보여 주는 걸작이다.
기준 (ⅳ) : 석굴암과 불국사는 8세기 전후의 통일신라 시대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건축과 조각으로, 석굴암은 인공적으로 축조된 석굴과 불상 조각에 나타난 뛰어난 기술과 예술성, 불국사는 석조 기단과 목조건축이 잘 조화된 고대 한국 사찰 건축의 특출한 예로서 그 가치가 두드러진다.
경주 동쪽 토함산 기슭에는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습니다. 이상적인 부처님의 나라를 표현한 절, 불국사는 통일 신라의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건축물입니다.
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 삼층 석탑), 청운교와 백운교 등 세련되고 아름다운 불교 유산들이 가득하지요. 불국사는 우리나라에서 국보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절로도 유명합니다.
불국사 위쪽 토함산 정상 가까운 곳에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석굴 사찰 석굴암이 있습니다. 석굴암은 단순히 부처님을 모신 석굴이 아닙니다. 크지는 않지만 신라 전성기 최고의 걸작으로, 통일 신라의 종교와 예술, 과학을 한곳에서 보여 주는 무척 중요한 유적지입니다.
오늘날 불국사의 목조 건축물과 석굴암은 원래 모습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러나 여전히 불교 국가 통일 신라의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도시 전체가 불교 유적지인 경주"
경주는 사로국에서 시작되어 서라벌(계림으로 불리기도 했어요)로, 경주로 이름이 바뀌면서 삼한 시대부터 고려가 세워지기 전까지 오랜 세월 도읍지였습니다. 992년 동안 도읍지였던 곳답게 어느 곳을 가더라도 역사와 전통이 담긴 문화재를 만날 수 있는 곳이 경주이지요.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경주에는 수많은 불교 유적지들이 세워졌어요. 고구려와 백제의 도읍지에도 많은 절이 세워졌지만 현재 경주만큼 많은 유적지가 남아 있는 곳은 없답니다. 경주에 많은 불교 유적지가 세워지게 된 것은 신라 사람들이 불교를 깊이 믿었기 때문이에요.
신라의 왕들도 종교를 통해 백성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정책으로 불교를 장려했지요. 신라는 국가 차원에서 많은 승려를 중국에 보냈고, 경주를 중심으로 전국에 수많은 절을 세웠습니다. 한마디로 경주는 전체가 불교 유적지였다
경주에 화려한 불교문화가 꽃핀 시기는 통일 신라 시대였습니다. 삼국 통일을 계기로 백제와 고구려의 세련된 불교문화가 들어오면서 신라는 한층 수준 높은 문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신라는 8세기가 되자 경주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토함산에 역사적인 건축물을 짓기 시작했어요. 바로 불국사와 석굴암이에요.
불국사 창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경덕왕 10년인 751년에 김대성이 지었다고 해요. 석굴암 역시 김대성이 처음 건축을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김대성은 통일 신라에서 가장 높은 벼슬인 시중을 지냈어요. 관직에서 물러난 뒤 부모님을 위해 불국사와 석굴암을 건축하기로 결심했지요.
전설에 따르면 김대성은 두 번 태어났다고 해요. 그래서 처음 자신을 길러 준 부모님을 위해 석굴암을 짓고, 두 번째 부모님을 위해서는 불국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김대성의 부모님에 대한 깊은 효성 덕분에 지어졌다고 할 수 있지요.
김대성은 누구보다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어요.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대성은 불국사 삼층 석탑과 다보탑을 세울 때 직접 감독하고 참여했다고 해요. 그리고 석굴암 내부와 본존불은 직접 조각을 했다는 기록도 있어요. 김대성은 나이가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석굴암 제작에 몰두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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